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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아침에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셔서 요양원으로 가지 못하고 병원에 계속 있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병원에 미리 면회를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임종이 가까워지면 잠시 면회를 허용하기 때문에 누나 집에서 며칠 지내면서 상황을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어머니 집에 잠시 있었는데 한동안 오지 못할테니 집을 정리하고 대강 청소를 했다. 정신이 없어 어떻게 청소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정리와 청소가 되어 있어서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정도만 하면 되었다. 누나 집에 가는 것은 차로 4~50분 거리였는데 길지 않은 그 시간 가운데 다시 전화가 왔다. 병원으로 바로 오라는 연락이었다. 마음은 급한데 신호는 많고 차는 밀렸다. 명절이고 아직 연휴가 많은데 왜이리 차가 많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연휴가 길어서 이제야 처가에 가는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병원에 도착하니 누나가 미리 와 있었다. 누나의 집은 병원에서 차로 5분 거리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숨을 쉬기가 상당히 어려운 상태였다. 불과 며칠 전에 걸어다시던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숨도 쉬기 어렵다니, 그리고 이 자리가 임종을 위해 잠시 허용 된 면회 시간이라니 마음의 준비가 길었어도 현실감이 없었겠지만 예상치도 못한 속도감에 현실 감각이 사라졌다. 의사가 와서 사망선언을 하였다.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이후부터는 선을 그은 듯 바로 장례 절차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환자가 살아있는 동안과 죽은 이후는 물과 기름처럼 선명하게 구분이 되어 한 공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장례식장 직원이 요즘은 Covid19로 인해 모두가 화장을 해야 하므로 화장터를 예약하는 것이 가장 급하다고 했다. 장례식장을 정하기도 전에 화장이 가능한 시간부터 확인했다. 대구에는 남는 곳이 없었다. 다른 지역에 가서 화장을 하거나 발인을 늦추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가지 희망은 누군가 예약을 변경하면서 취소분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취소가 되자마자 바로 예약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한시간 후에 예약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일단 예약이 가능한 시간에 타이머를 맞춰놓고 장례에 대한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장례식장에서 호실을 구하고나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상복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식장에서 대여하는 옷을 입었다. 그러고나서 사진을 전달 해 영정사진을 만들었다. 도중에 타이머가 울려 화장터를 다시 예약했다. 대구에 있는 곳에 마지막 순서에 겨우 예약을 했다. 그곳이 전국적으로 잘 하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음식이 오고 도우미가 오고, 장례지도사가 왔다. 장례지도사가 진행하는 장례는 유교식을 따른다고 했다. 아버지는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지만 개신교 교회에 가끔 다니셨다. 어머니는 나중에 불교대학을 다니고는 불교를 믿기 시작했다. 나는 종교라는 것은 심리를 안정화하는 정신적 서비스업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무교다. 천주교나 이슬람은 없었지만 온갖 종교가 뒤엉켜 있는 장례식장이었다. 어머니는 불교식으로 진행하기를 원해 자주 가는 절의 스님을 불렀다. 어머니의 상심이 가장 클 터였기 때문에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행동들이 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준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이라 멀리서 나를 보러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었다. 그리고 이러이러한 사람은 꼭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빠진 사람이 더러 있었다. 내가 사회적으로 기반을 잡고 널리 인맥을 펼치는 것이 아니어서 빈소가 밤새 북적이지는 않았다. 가장 큰 곳은 아니지만 비교적 큰 곳을 잡았는데 그나마 사람들이 조금씩이나마 계속 있어 다행이었다. 장례를 치르는 3일장 중에도 순서와 절차가 있다. 장례지도사의 유교식과 스님의 불교식이 조금씩 달랐는데 장례지도사가 중간중간 의미를 설명해주어 훨씬 마음에 와닿았다. 그런데 그 분이 진행할 때마다 눈물이 너무 많이 나서 마음이 많이 고생스러웠다. 첫날과 둘째날 아침까지는 친한 사람이 올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렸는데 둘째 저녁부터는 그런 게 좀 나아졌다. 그래도 장례지도사가 올 때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둘째 날 점심무렵 입관을 진행했다. 부패의 위험때문에 시신을 냉동하였다가 입관할 때 내어주는데 옷을 입혀 뉘이고 염을 하는 것을 보여준다. 염을 하기 전에 이마에 손을 올리고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했다. 염이 끝나고는 입관을 할 때 상주가 안아들고 관에 넣었다.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이후로도 며칠 간 팔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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