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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너무 많다


타르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열하루째 오후였다. 먼저 보인 것은 도시가 아니라 길이었다. 그때까지 걸어온 길은 수레바퀴 자국이 난 흙길이었는데, 어느 지점부터 그 길에 돌이 깔려 있었다.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촘촘히 박아 놓은 것이었고 폭이 수레 세 대가 나란히 갈 만했다. 켈리가 발로 한 번 굴러 보았다. 소리가 났다. 흙에서는 나지 않던 소리였고, 발바닥으로 올라오는 느낌도 달랐다. 열하루 동안 켈리의 발은 무른 땅에 익숙해져 있었다. 무른 땅은 밟으면 조금 가라앉았다가 발을 놓아주는데, 이 돌은 가라앉지 않고 그대로 받아쳤다. 무릎이 먼저 그것을 알아차렸다.

"여기서부터 저쪽 거야."
바르트가 말했다. 켈리는 저쪽이 어디인지 물으려다 말았다. 요즘 켈리는 물어볼 것을 하나씩 뒤로 미루는 버릇이 생겼는데, 미루는 이유는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열하루 동안 켈리가 본 적 없는 것이 하루에 두세 개씩 나왔다. 물레방아를 봤고 우물에 달린 두레박을 봤고 소가 끄는 쟁기를 봤다. 그것을 전부 물으면 걷는 시간보다 묻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았고, 그래서 켈리는 나중에 물을 것을 머릿속에 쌓아 두기 시작했다. 쌓아 두는 것은 처음 해 보는 일이었다. 여태 켈리의 머릿속에는 쌓아 둘 자리가 없었다.

돌길을 따라 두 시간을 더 가자 성벽이 나왔다. 성벽은 높지 않았다. 켈리가 아는 성벽은 회랑의 방어 토루였고 그것은 사람 키의 세 배쯤 되었는데, 여기 것은 두 배가 될까 말까 했다. 대신 길었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성벽 위에 사람이 서 있지 않았다. 켈리가 그것을 한참 보았다. 벽이 있으면 위에 사람이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켈리가 아는 규칙이었다. 벽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고 지키려면 서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고, 대신 벽 아래 문 앞에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줄을 보자 켈리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발이 그쪽으로 갔다. 등이 펴졌고 두 손이 앞으로 모였고 시선이 정면보다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줄의 맨 뒤에 가서 섰다. 앞사람과의 간격은 한 걸음 반이었다. 그것이 정확한 간격이었다. 육성소에서는 한 걸음 반이었고 전선에서도 한 걸음 반이었으며 그보다 가까우면 지적을 받았다. 지적은 대개 이름을 부르는 대신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고, 두 번 치면 그날 저녁에 벌이 있었다.

"자네 뭐 해."
바르트가 뒤에서 물었다.
"줄 섰어."
"무슨 줄인지 알아?"
켈리가 앞을 보았다. 앞사람의 등이 있었고 그 앞에도 등이 있었고 그 끝에 문이 있었다. 문 앞에 탁자가 있고 탁자 뒤에 사람이 둘 앉아 있었다.
"…몰라."
"그럼 왜 섰어."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줄이 있으면 선다. 그다음에 무엇을 주든 받는다. 그것은 이유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유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줄을 섰고 그중 어느 줄에서도 이게 무슨 줄이냐고 물은 적이 없었으며, 물은 아이를 본 적도 없었다.

바르트가 옆에 와서 같이 섰다.
"뭐, 이 줄은 맞긴 해."
"맞아?"
"성문 통과 줄이야. 어차피 서야 돼."
켈리가 조금 안심했다. 안심했다는 것을 본인은 몰랐고, 다만 어깨가 한 치쯤 내려갔다. 줄은 생각보다 길었고 천천히 줄었다. 앞에는 짐수레가 둘 있었고 그 사이에 걸어서 온 사람들이 끼어 있었다. 수레는 안을 들여다보는 데 시간이 걸렸고 사람은 금방 지나갔다. 켈리는 그 차이를 세어 보았다. 수레 하나에 여덟 숨, 사람 하나에 두 숨쯤이었다. 세는 동안 기다리는 것이 덜 길게 느껴졌다. 기다릴 때 뭔가를 세는 버릇은 저울 줄에서 생긴 것이었다. 앞에 몇이 남았는지를 세면 자기 차례까지 몇 숨인지가 나왔고, 그 숫자가 있으면 견딜 만했다.

탁자 앞에 왔을 때 앉아 있던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입시세 둘."
바르트가 동전 두 개를 놓았다. 남자가 그것을 쓸어 담고 옆으로 고갯짓을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름도 묻지 않았고 어디서 왔는지도 묻지 않았고 짐도 열어 보지 않았다. 켈리가 문을 지나면서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저 사람 아무것도 안 물어봤어."
"물어볼 이유가 없으니까."
"왜 없어."
"돈 냈잖아."
켈리는 그 논리를 따라가 보려고 했다. 돈을 내면 묻지 않는다. 그러면 돈을 안 낸 사람에게는 묻는 것인가. 아니면 돈이 곧 대답인가. 두 번째 쪽이 맞는 것 같았는데, 맞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했다. 대답은 말로 하는 것인데 동전은 말이 아니었다.

실은 두 번째가 맞았다. 타르실의 성문은 사람을 가려 들이는 곳이 아니라 수를 세어 값을 받는 곳이었고, 값을 낸 자에게 더 묻지 않는 것이 이 도시가 육십 년 동안 지켜 온 거의 유일한 원칙이었다. 상인의 도시에서 출신을 캐기 시작하면 배가 들어오지 않는다. 켈리가 그날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원칙 덕분이었으며, 사흘 뒤에 명부에 이름이 오르게 되는 것도 같은 원칙 때문이었다. 묻지 않는 도시는 그 대신 적는 도시였다. 켈리는 그 생각을 머릿속의 쌓아 두는 자리에 넣었다. 그 자리가 요즘 빠르게 차고 있었다.

문 안쪽 벽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여러 장이었다. 어떤 것은 새것이고 어떤 것은 비에 젖었다 말라 우글쭈글했다. 글자가 있는 것도 있고 그림이 있는 것도 있었다. 켈리가 지나가면서 그것을 읽었다. 읽을 수 있는 것만 읽었다. 배를 구한다는 것, 짐꾼을 구한다는 것, 소를 잃어버렸다는 것. 소를 잃어버렸다는 종이에는 소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다. 그리고 오른쪽 끝에 다른 종이보다 빳빳한 것이 하나 있었다.

켈리가 걸음을 늦췄다. 그 종이에는 그림이 없었고 글자만 있었다. 윗줄이 굵었고 아랫줄이 가늘었다. 굵은 쪽에 네 글자가 있었다. 분실 자산. 그 아래 줄에 회수 협조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로는 글씨가 작아져서 읽기 어려웠다. 맨 아래에 도장이 찍혀 있었다. 둥근 도장이었고 안쪽에 뭔가가 새겨져 있었는데 켈리는 그 문양을 알았다. 원 안에서 실이 뻗어 나오는 모양이었다. 켈리의 외투 안쪽 가슴에도 같은 것이 은실로 수놓여 있었고, 그것은 지난 이십일 일 동안 한 번도 바깥 공기에 닿지 않았다.

"가자."
바르트가 켈리의 팔꿈치를 잡았다. 그는 이미 그 종이를 봤고 봤다는 티를 내지 않았으며 켈리가 그 앞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도 세고 있었다. 셋을 세고 나서 팔꿈치를 잡았다. 그보다 오래 서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이쪽을 볼 것이었다. 남의 눈에 걸리는 것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오래 보느냐라는 것을 그는 북쪽에서 빠져나오던 해에 배웠다. 그 요령이 그를 두 번 살렸고, 두 번 다 그는 자기가 살아난 줄도 모르는 채로 지나갔다. 켈리가 따라 걸었다. 걸으면서 외투 앞섶을 한 번 만졌다. 단추가 목까지 채워져 있었다.

타르실 안쪽은 소리부터 달랐다. 켈리가 아는 소리는 종류가 많지 않았다. 망치 소리, 점호 소리, 발소리, 배식 줄이 움직이는 소리. 전부 한 번에 하나씩 나는 소리였다. 소리가 두 가지 이상 겹치는 일은 드물었고, 겹치면 대개 무슨 일이 난 것이었다. 여기서는 그 전부가 동시에 났다. 수레바퀴가 돌길을 지나가고 어딘가에서 쇠를 두드리고 누가 소리쳐 부르고 다른 누가 웃고 개가 짖고 문이 닫히고 그릇이 부딪혔다. 소리가 겹치면 하나하나를 골라낼 수 없다는 것을 켈리는 처음 알았다. 골라내려고 애쓰다가 머리가 아파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 많았다. 켈리는 그 표현을 정확히 쓸 수 있었다. 많다는 것은 셀 수 있는 것이 셀 수 없을 만큼 있다는 뜻인데, 켈리는 여태 사람을 세면서 살았다. 제4마도대에 마법사가 스물몇이었고 그 숫자가 계속 바뀌었으므로 매번 세었다. 막사 스무 채에 사람이 몇인지도 대략 알았다. 육성소에서는 한 방에 열둘이었고 그것은 삼 년 내내 열둘이었다. 그런데 이 길에는 그보다 많은 사람이 한 번에 있었고, 세려고 하면 센 사람이 움직여서 다시 세어야 했다. 켈리는 두 번 세다가 그만두었고, 그만두고 나서 속이 조금 불편해졌다. 셀 수 없는 것이 눈앞에 있는 상태를 켈리의 몸은 견디기 어려워했다.

문제는 세는 것이 아니라 걷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무 대형도 이루지 않고 걸었다. 이쪽으로 가는 사람과 저쪽으로 가는 사람이 섞여 있었고 누가 앞인지 뒤인지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간격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둘은 어깨가 닿을 만큼 붙어서 걸었고 어떤 사람은 혼자 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걸었다. 켈리는 그 사이에 들어가서 세 걸음을 걷고 멈췄다. 앞에서 사람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두 걸음을 걷고 또 멈췄다. 이번에는 옆에서 왔다. 켈리가 아는 규칙으로는 앞에서 오는 사람이 있으면 서서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행군 대열이 마주치면 계급이 낮은 쪽이 비켜선다. 켈리는 늘 낮은 쪽이었다.

뒤에서 누가 켈리의 등에 부딪혔다. 부딪힌 쪽이 뭐라고 하고 지나갔다. 켈리가 그쪽을 보았다. 잘못한 것이 자기인지 상대인지 알 수 없었다. 줄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줄에서는 앞사람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서면 섰다. 그게 전부였고 그래서 틀릴 일이 없었다. 틀릴 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 것이었는지를 켈리는 그 길 한가운데에서 처음 알았고, 알고 나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편했다고 생각한 것이 이상했다.

제도가 사람에게서 맨 먼저 가져가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판단이다. 판단을 오래 빼앗긴 자는 그것을 돌려받는 순간을 안도가 아니라 불편으로 느끼며, 불편하다는 이유로 스스로 돌려주려 든다. 켈리의 몸은 열두 해 동안 틀릴 일이 없는 세계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 세계는 켈리를 열일곱 번 내보냈고 매번 며칠씩을 가져갔으나, 적어도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를 두고 켈리를 곤란하게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 번째로 부딪혔을 때 바르트가 돌아와서 켈리의 손목을 잡았다.
"이러다 저녁까지 못 가겠네."
"사람이 계속 와."
"오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어."
바르트가 잠깐 켈리를 보았다.
"자네 지금 저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고 있었어?"
"어."
"전부?"
"어."
바르트가 손목을 잡은 채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보지 마. 앞만 봐. 부딪히면 부딪히는 거고."
"부딪히면 어떻게 돼."
"어떻게 되는 건 없어."
켈리는 그 대답이 제일 어려웠다. 아무것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말이었다. 켈리가 아는 세계에서 무언가가 어긋나면 반드시 뒤에 무엇이 왔다. 지적이 오거나 벌이 오거나 그날 배식이 줄었다. 아무것도 안 오는 어긋남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며칠 전 파인 땅에서 한 번 들었고 오늘 또 들었다. 두 번 들었으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바르트가 쇳조각을 판 곳은 항구 안쪽의 좁은 골목이었다. 문 위에 간판이 없고 대신 벽에 쇠붙이 몇 개가 못으로 박혀 있었다. 그것이 간판인 모양이었다. 안에 들어가자 사람이 하나 앉아 있었고 바르트가 자루를 내려놓았다. 그다음부터는 긴 이야기가 오갔다. 켈리는 절반쯤 알아들었다. 이건 어디서 난 것이냐, 폐허다, 어느 폐허냐, 말할 수 없다, 그러면 값을 깎겠다, 깎으면 다른 데로 가겠다, 다른 데 가면 이것도 못 받는다, 그럼 둘 다 손해다. 그런 식이었다. 중간에 주인이 자루에서 쇳조각 하나를 꺼내 손톱으로 긁고 혀로 대 보고 불빛에 비춰 보았다. 그 동작이 어딘가 바르트와 닮아 있었다.

켈리는 그 이야기가 싸움인 줄 알았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목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했는데 둘 다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상대를 깎는 일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날 배웠다. 값이라는 것이 물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는데, 그 생각을 붙잡아 두기에는 가게 안이 너무 답답했다.

밖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켈리가 골목으로 나왔다. 나와서 벽에 기대어 섰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고 땅을 보았다. 땅을 보고 있으면 사람이 몇 명 지나가는지 세지 않아도 되었다. 돌바닥 틈새에 뭔가가 자라 있었다. 풀이었다. 돌을 이렇게 촘촘히 박아 놓았는데도 틈이 있었고 그 틈으로 풀이 나왔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때 골목 끝에 줄이 있었다.

열 명쯤이 벽을 따라 서 있었다. 간격이 일정했다. 켈리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무엇을 주는 줄인지 보려고 앞쪽을 살폈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켈리는 맨 뒤에 가서 섰다. 등을 펴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시선을 정면보다 조금 아래에 두었다. 간격은 한 걸음 반이었다.

줄은 천천히 줄었다. 여덟 명이 남고 여섯이 남고 넷이 남았다. 켈리는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은 켈리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앞사람이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켈리를 보고 다시 앞을 봤다가 또 한 번 돌아보았다. 두 번째에는 조금 오래 보았다. 켈리는 그 시선이 무엇을 재는 것인지 몰랐고, 모르는 채로 자세를 유지했다.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시선에 대한 정답이라고 몸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켈리 뒤에 누가 와서 섰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왔다. 켈리가 서 있었으므로 거기가 줄의 끝인 줄 알았던 것이다. 켈리는 뒤에 사람이 붙은 것을 알았고 알고 나서 등을 조금 더 폈다. 줄이 길어지면 자기 차례가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가 든든해지는 것이었다. 앞에 넷이고 뒤에 둘이면 그 줄 안에서 켈리의 자리는 확실했다.

바르트가 찾으러 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골목을 두 번 오가고 나서야 그 줄에서 켈리를 발견했고, 발견하고 나서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본 것은 마른 여자애 하나가 자세를 완벽하게 잡고 서 있는 것과, 그 뒤로 두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서 있는 것이었다.
"켈리."
켈리가 돌아보았다.
"거기서 뭐 해."
"줄 있어서."
"무슨 줄인지 봤어?"
켈리가 앞을 보았다. 앞의 세 사람 너머로 이제는 보였다. 나무 문이 하나 있고 그 옆에 통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통에 동전을 넣고 문으로 들어갔다.
"…몰라."
"저건 뒷간이야."
"…"
"돈 내고 들어가는 뒷간."
켈리가 줄에서 나왔다. 나오면서 앞사람이 한 걸음 앞으로 갔고 간격이 메워졌다. 켈리는 그 메워지는 것을 보았다. 자기가 빠져도 줄은 그대로였다. 뒤에 섰던 둘 중 하나가 켈리를 따라 나왔고 하나는 그냥 남았다. 남은 쪽은 아마 원래 볼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르트가 앞서 걷다가 한 번 돌아보았다.
"자네 줄 보면 다 서?"
"어."
"왜."
켈리가 그 질문에 대답하려고 했다. 대답이 없지는 않았다. 줄을 서면 그다음이 있다. 무언가를 받거나 어딘가로 가거나 무엇을 하라는 말을 듣는다. 줄을 서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열두 해 동안 켈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줄을 선 뒤에 일어났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전부 그랬다. 줄 밖에서 켈리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말로 만들려니 문장이 되지 않았다.
"…그냥."
바르트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그날 저녁 노트에 한 줄을 적었고 그 줄은 이랬다. 줄을 보면 선다. 무슨 줄인지 묻지 않는다.

항구는 골목을 빠져나오자 바로 나왔다. 나무로 짠 긴 부두가 있었고 배가 여섯 척 묶여 있었다. 배는 켈리가 생각한 것보다 컸다. 짐수레 스무 대를 실어도 남을 것 같았고 돛대가 성벽보다 높았다. 사람들이 널빤지를 오르내리며 자루를 옮기고 있었다. 자루 하나를 두 사람이 드는 것도 있고 혼자 지는 것도 있었는데, 혼자 지는 쪽은 허리를 굽히지 않고 무릎으로 들어 올렸다. 켈리가 그 동작을 알아보았다. 모래주머니를 들 때 그렇게 들었다. 잘 들면 허리가 안 나간다.

그 너머에 물이 있었다. 켈리가 걸음을 멈췄다. 이번에는 사람 때문이 아니었다.

물은 끝이 없었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끝이 있었는데 앞쪽으로는 없었다. 회색이었고 움직이고 있었으며 움직이는 방식이 개울과 달랐다. 개울은 한쪽으로 흘렀다. 이것은 한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동시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소리가 났다. 계속 났고 멈추지 않았다. 켈리가 아는 소리 중에 멈추지 않는 것은 없었다. 망치도 멈추고 점호도 끝나고 발소리도 그친다. 이 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그치지 않는 소리가 있다는 것이 켈리에게는 소리 자체보다 이상했다.

냄새도 났다. 켈리가 코로 두 번 들이마셨다. 소금이었다. 며칠 전에 3돈을 주고 산 것과 같은 냄새였다. 켈리는 그 자루를 등에 지고 열흘을 걸었고 그것이 한 줌씩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냄새가 공기에 그냥 퍼져 있었다. 값이 붙은 것이 공짜로 퍼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켈리는 잠깐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한 번 더 들이마셨다.

"저거 다 물이야?"
"다 물이야."
"어디까지."
바르트가 옆에 와서 섰다.
"저쪽 끝에 또 땅이 있어. 거기도 사람 살고."
"얼마나 가야 돼."
"배로 스무 날쯤."
켈리가 그 숫자를 들었다. 스무 날. 걸어서 열하루를 온 것이 이 도시까지였고, 배로 스무 날을 가면 또 땅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땅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켈리는 며칠 전에 흙바닥에서 동그라미 다섯 개를 보았고 그것이 세상 전부인 줄 알았다. 그 동그라미들은 이 물의 이쪽에 있었다. 이쪽이 있으면 저쪽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때 처음 계산해 보았고, 계산해 보니 세상이 흙바닥에 그려진 것보다 훨씬 컸다.

"저 배는 어디로 가."
"저건 곡물선이니까 로엔 쪽에서 왔을 거고. 나가는 건 남쪽으로 가."
"남쪽에 뭐 있어."
"나도 안 가 봤어."
켈리가 바르트를 보았다. 안 가 봤다는 말을 이 사람에게서 듣는 것이 처음이었다. 바르트는 여태 켈리가 묻는 것에 대개 답을 갖고 있었고, 답이 없을 때는 모른다고 했는데 그것도 아는 사람이 모른다고 하는 투였다. 안 가 봤다는 것은 달랐다. 그것은 이 사람에게도 바깥이 있다는 뜻이었다.

켈리가 한참 서 있었다. 바르트가 재촉하지 않았다. 해가 물 위로 낮게 떨어지고 있었고 물이 그 빛을 받아 군데군데 번졌다. 켈리는 번지는 자리를 보았다가 번지지 않는 자리를 보았다가 했다. 번지는 자리는 계속 옮겨 다녔다. 같은 자리에 두 번 오지 않았다. 켈리는 그것을 세어 보려고 하다가 세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었다. 오늘 세는 것을 그만둔 것이 세 번째였고, 그만두고 나서 속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날 밤은 항구 뒤편의 삯방에서 잤다. 하룻밤에 셋이었고 그 값에 짚 매트리스와 담요 한 장과 문 하나가 딸렸다. 문이 딸렸다는 것이 켈리에게는 새로웠다. 헛간에는 문이 있었지만 그 문은 안에서 잠기지 않았다. 여기 것은 안쪽에 나무 빗장이 있었다. 바르트가 그것을 걸었고 켈리가 그 동작을 보았다.
"왜 잠가."
"여긴 사람이 많으니까."
"사람 많으면 잠가?"
"많으면 그중에 나쁜 놈도 있지."
"몇이나."
바르트가 잠깐 웃었다.
"그건 나도 몰라. 그래서 잠그는 거야."
켈리가 그 말을 곱씹었다. 몇인지 모르기 때문에 잠근다는 것이었다. 켈리가 아는 대비는 전부 숫자에서 나왔다. 적이 몇이면 이쪽은 몇을 세우고, 며칠 치가 남았으면 하루에 얼마씩 먹는다. 숫자를 모르는 채로 대비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들었다.

바르트가 쇳조각을 판 값은 일곱 냥 너 돈이었다. 켈리가 그 숫자를 듣고 잠깐 셈을 했다. 하루에 예닐곱 돈을 쓰면 열흘이 넘었다. 처음으로 셈이 넉넉하게 나왔고, 넉넉하게 나왔는데도 켈리는 그 숫자를 두 번 더 확인했다.
"여기서 며칠 있을 거야."
"왜."
"살 게 있어. 그리고 읽을 것도 좀 있고."
바르트가 노트를 펴면서 말했다.
"여기 서고가 하나 있거든. 돈 내면 들어가서 볼 수 있어."
"책 보는 데 돈을 내?"
"내지."
"얼마."
"하루에 닷 돈."
켈리가 눈썹을 조금 움직였다. 닷 돈이면 빵 두 개 반이었다. 켈리는 책이라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마법청 서기가 들고 다니는 것이 있었고 그것은 얇았다. 그 얇은 것을 하루 보는 데 빵 두 개 반을 낸다는 계산이 잘 서지 않았다.
"뭐 읽는데."
"잉여 얘기."
켈리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바르트를 보았다.
"자네가 터뜨리면 나가는 게 있잖아. 그게 어디로 가는지."
"그거 아직도 봐?"
"보지."
바르트가 노트를 덮었다.
"자네는 그게 그냥 없어진다고 했고 나는 없어지는 건 없다고 했는데, 둘 중 하나는 틀렸을 거 아냐. 그럼 확인을 해야지."

등불이 꺼지고 나서 켈리는 오래 깨어 있었다. 삯방은 벽이 얇아서 옆방 소리가 들렸고 아래층에서는 아직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다. 그 소리가 켈리에게는 낯설었는데, 낯설다고 해서 싫은 것은 아니었다. 소등 뒤에 소리가 나는 것은 규칙 위반이었고 위반이면 누가 와야 하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 밤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스무 날째 겪는 중이었고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누워서 켈리는 성문 안쪽에 붙어 있던 종이를 다시 떠올렸다.

「회수」는 아는 말이었다. 열다섯 살에 처음 듣고 삼 년을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때 누가 설명해 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말이 나온 뒤에 어떤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고, 그다음에 또 그 말이 나왔고 또 누가 돌아오지 않았다. 세 번째쯤부터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켈리는 그 말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말 뒤에 오는 것을 아는 쪽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더 알려고 하면 물어야 하는데 그것은 물어도 되는 항목이 아니었다.

모르는 것은 앞에 붙은 네 글자였다. 분실 자산. 글자는 읽혔고 뜻도 짐작이 갔다. 잃어버린 재산이라는 말이었다. 창고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그렇게 적는다. 켈리는 보급 문서에서 그 표기를 본 적이 있었다. 담요 두 장이 없어졌을 때 그렇게 적혔고, 그 아래에 담당자가 변상한다는 줄이 붙었다.

그 네 글자가 왜 「회수」 앞에 붙어 있는지를 켈리는 몰랐다. 둘을 이어 붙이면 문장이 하나 나온다는 것도, 그 문장의 주어가 자기라는 것도 몰랐다. 벨류엔의 문서를 읽는 데에는 요령이 하나 있었다. 사람에게 쓰는 말과 물건에 쓰는 말이 같은 난에 들어앉아 있을 때, 그 난이 사람 쪽인지 물건 쪽인지는 맨 아래 처리란을 보아야 알 수 있다. 처리란은 언제나 글씨가 가장 작은 자리에 있었고, 켈리는 거기까지 읽지 않았다.

몰랐으므로 그날 밤 켈리는 잘 잤다.

 

확률이 낮았을 뿐


바르트가 서고에 간 것은 타르실 둘째 날 아침이었다. 그는 나가기 전에 켈리에게 세 가지를 말했다. 첫째, 점심때쯤 돌아온다. 둘째, 이 동전 다섯 개로 뭐든 사 먹어라. 셋째, 멀리 가지 마라. 켈리가 세 가지를 다 듣고 알겠다고 했다. 바르트가 문을 열다 말고 한 번 돌아보았는데, 돌아본 이유는 알겠다는 대답이 너무 정확하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깐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나갔다. 나가면서 그가 생각한 것은 자기가 방금 세 가지를 명령처럼 말했다는 것이었고, 그 생각은 서고에 도착할 때까지 그를 따라왔다.

켈리는 동전 다섯 개를 오른손에 쥐었다. 쥐고 나서 주머니에 넣을까 하다가 그대로 쥐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으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려고 계속 만져야 하는데, 손에 쥐고 있으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동전은 얇고 차가웠다가 곧 손바닥 온도가 되었다. 켈리는 짚 매트리스에 앉아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은 잘하는 일이었으므로 특별히 힘들지 않았다. 창밖으로 항구 쪽이 보였고 종탑이 하나 서 있었다. 종은 정시마다 울렸다. 여덟 시에 여덟 번 울렸고 아홉 시에 아홉 번 울렸다. 켈리는 그 규칙을 알아내고 나서 조금 편해졌다. 시각을 알려 주는 것이 있는 도시는 그렇지 않은 들판보다 나았다. 전선에도 시보가 있었다. 여기 종은 그것보다 소리가 길게 끌렸다.

열 번이 울리고 열한 번이 울렸다. 그 두 시간 동안 켈리가 한 일은 네 가지였다. 지팡이를 무릎에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살펴보았다. 흠은 없었다. 담요를 접었다가 폈다가 다시 접었다. 세 번 접으면 네모가 되고 네 번 접으면 더 작은 네모가 되는데 네 번 접은 쪽이 보기 좋았다. 손바닥을 펴서 동전이 다섯 개인지 확인했다. 다섯 개였다. 그리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세었다. 스물아홉까지 세다가 같은 사람이 두 번 지나가는 바람에 다시 세었고, 두 번째에는 마흔넷에서 놓쳤다.

열한 번이 울린 뒤에 배가 고파졌다. 고픈 것에는 익숙했으나 요즘은 하루에 세 번쯤 먹는 것이 보통이 되어 있었고, 몸이 그 보통에 벌써 적응한 모양이었다. 켈리는 그것이 조금 억울했다. 며칠 먹었다고 몸이 더 자주 보채는 것이 계산에 맞지 않았다. 열두 해 동안 두 번씩 먹었을 때는 두 번에 맞춰 고팠는데, 세 번으로 바뀌는 데는 스무 날도 걸리지 않았다. 몸이 그렇게 빨리 편한 쪽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켈리에게는 새로웠고, 새로우면서 조금 불안했다. 다시 두 번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오면 그때는 더 힘들 것 같았다.

켈리가 일어섰다. 밖에 나가는 것은 세 번째 항목에 어긋나지 않았다. 멀리 가지 말라고 했지 나가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켈리는 그 구별을 해 보고 나서 자기가 방금 구별이라는 것을 했다는 사실에 잠깐 멈췄다. 전에는 이런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말한 것만 했고 말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았으며 그 사이에 뭐가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말과 말 사이에 빈자리가 있고 그 빈자리는 자기가 채워도 된다는 것이, 켈리가 이 도시에서 배운 것 중 가장 위험한 것이 되었다.

골목으로 나가자 냄새가 났다. 빵집이었다. 켈리가 그 앞에 가서 섰다. 철판 위에 빵이 있었고 값이 적힌 나무판이 걸려 있었다. 한 개 두 돈. 켈리는 그것을 읽었고 손에 다섯 돈이 있었고 계산은 간단했다. 두 개를 사고 한 돈이 남는다. 그런데 켈리는 거기서 움직이지 못했다.

사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는지를 몰랐다. 저쪽이 먼저 뭘 물어야 하는 것인지, 이쪽이 먼저 동전을 내미는 것인지, 내밀면 어느 손으로 내미는 것인지, 빵을 가리키면서 내미는 것인지 그냥 내밀고 기다리는 것인지. 베렐에서는 바르트가 했고 성문에서도 바르트가 했고 삯방에서도 바르트가 했다. 켈리가 본 것은 그 사람이 동전을 놓는 장면뿐이었고, 그 앞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보지 않았다. 볼 이유가 없었다. 배급 줄에서는 손을 내밀면 얹어 주었다. 그게 전부였고 그 전부가 여기서는 통하지 않았다.

켈리가 손을 반쯤 내밀었다가 도로 내렸다. 내밀면 얹어 줄 것 같았는데 얹어 주지 않으면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사고파는 일에는 말이 필요했다. 무엇을 얼마나 달라고 말하고 값을 묻고 동전을 내미는 순서가 있는데, 그 순서는 어느 나라에서도 문서로 적히지 않는다. 적히지 않는 것은 곁에서 보고 익히는 수밖에 없고, 곁에서 보고 익히려면 어릴 적에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장에 따라가 본 일이 있어야 한다. 켈리에게 여섯 살 이전은 없었다.

빵집 주인이 켈리를 두 번 보았다. 세 번째에 뭐라고 물었는데 켈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항목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켈리가 뒷걸음으로 한 걸음 물러났고, 주인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것이 켈리를 쫓아낸 것인지 그냥 다른 일이 생긴 것인지 켈리는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었으므로 그 자리를 떴다.

골목을 나와 걷다가 켈리가 줄을 보았다. 열두어 명이 벽을 따라 서 있었다. 켈리가 걸음을 늦췄다. 어제 뒷간 일이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먼저 앞쪽을 살폈다. 살펴봤으나 사람 등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다만 줄 끝에서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어딘가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기대하는 얼굴로 줄을 서서 들어가는 곳이 켈리가 아는 것 중에는 하나뿐이었다. 켈리는 그 하나를 떠올렸고, 떠올리고 나니 배가 더 고파졌다.

켈리가 맨 뒤에 섰다. 간격은 한 걸음 반이었다.

줄은 빨리 줄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앞에 탁자가 있고 사람이 하나 앉아 있었는데, 앞사람이 그 앞에서 짧게 뭐라고 하고 들어갔다. 켈리 차례가 왔을 때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이름."
켈리가 대답했다.
"켈리."
"성은."
"없어."
남자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마른 여자애가 서 있었다. 남색인지 뭔지 모를 옷 위에 큰 갈색 외투를 걸쳤고 손에 긴 나무 막대기를 들었으며 표정이 없었다.
"성이 없어?"
"없어."
"…그럼 켈리라고만 적는다."
"어."
남자가 명부에 적었다. 적으면서 한 번 더 켈리를 보았다. 그러고는 턱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켈리가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자기 이름이 종이에 적히는 것을 보았다.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바르트의 노트였고 이번은 이 명부였다. 켈리는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적히는 것이 나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직 켈리에게 없었다. 벨류엔에서 켈리에 관해 적힌 것은 전부 번호였고, 번호는 적혀도 켈리를 찾아오지 않았다. 찾아오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그래서 켈리는 적기와 찾기를 서로 다른 일로 알고 있었으며, 그 둘이 한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앞으로 사흘이 더 걸렸다.

안은 넓지 않았고 어두웠고 사람이 많았다. 가운데에 두꺼운 나무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양쪽에 의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 팔꿈치 자국이 깊게 패어 있었다. 오래 쓴 물건이었다. 사람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고 한쪽 벽에 나무판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 이름과 숫자가 분필로 적혀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보고 배식대를 떠올렸다. 사람이 둘러싸고 있고 이름이 적혀 있고 숫자가 붙어 있었다. 숫자가 붙은 이름은 켈리가 아는 것이었다. 무게를 재면 숫자가 나오고 그 숫자대로 받는다. 여기 숫자도 그런 것이라고 켈리는 짐작했고, 짐작이 절반은 맞았다. 숫자대로 받는 것은 맞았으나 그 숫자가 무게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음. 켈리."

켈리가 앞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갈라졌고 갈라지면서 웅성거렸다. 누가 웃었다. 하나가 웃자 둘이 웃었고 곧 여럿이 웃었다. 켈리가 그쪽을 보았다.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웃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보다가, 보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앞으로 갔다. 웃음은 켈리가 잘 모르는 것 중 하나였다. 육성소에서 아이들이 웃는 일은 있었으나 많지 않았고, 웃을 때는 대개 무엇이 웃긴지 서로 아는 상태였다. 여기서는 웃는 쪽만 알고 웃음을 받는 쪽은 몰랐다. 그것이 사람을 여럿 모아 놓고 웃는 일의 오래된 쓰임이었다. 웃음은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바깥에 있는지를 말 한마디 없이 정해 놓으며, 바깥으로 정해진 쪽은 자기가 언제 정해졌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켈리는 그날 그 방에서 바깥이었고, 바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의자에 앉았다.

배당을 매기는 남자가 켈리를 위아래로 훑고 나무판에 분필로 적었다. 켈리 열둘. 옆의 숫자는 하나였다.
"열두 배."
그 말에 또 웃음이 났다. 몇 사람이 동전을 내밀었다. 재미로 거는 것이었다. 한 돈짜리가 대부분이었고 아무도 진지하지 않았다. 열두 배를 건다는 것은 지지 않을 것 같은 쪽에 거는 사람들이 심심해서 반대쪽에 한 돈을 던지는 일이었고, 그것도 놀이의 일부였다.

탁자 반대편에 앉은 사람은 부두 짐꾼이었다. 목이 굵고 팔뚝이 켈리 허벅지만 했다. 그가 켈리를 보더니 뒤쪽을 향해 뭐라고 했고 또 웃음이 났다. 켈리가 의자에 앉았다. 앉아서 탁자를 보았다.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몰랐으므로 물었다.
"이거 뭐 해."
"팔씨름."
옆에 선 남자가 대답했다. 그는 심판인 모양이었다.
"팔 올려. 손 잡고. 상대 손등 탁자에 붙이면 이기는 거야."
"그게 다야?"
"그게 다야."
켈리가 오른팔을 탁자에 올렸다. 짐꾼이 손을 내밀었고 켈리가 그 손을 잡았다. 손이 컸다. 켈리의 손이 그 안에 반쯤 들어갔다. 잡고 나서 켈리가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이거 이기면 뭐 줘."
"뭐?"
"이기면 뭐 줘. 밥 줘?"
짐꾼이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웃는 웃음이었다. 앞니가 하나 없었다.
"애야. 여기 밥 안 줘."
켈리가 실망했다. 실망했다는 표시는 나지 않았고 다만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밥을 주는 줄인 줄 알았다. 기대하는 얼굴로 들어가는 곳이 밥 주는 데 말고 또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 순간에 배웠다. 그리고 배운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여기까지 온 이상 이걸 하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줄을 섰으면 차례를 마쳐야 한다. 차례를 안 마치고 나가는 법을 켈리는 배운 적이 없었다.

"시작."

켈리는 시작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은 켈리가 아는 말이었다. 열두 해 동안 그 말 뒤에 오는 것은 언제나 하나였다. 걸고 달리고 하라는 대로 한다. 무엇을 걸어야 하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랐으나 걸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걸지 않고 시작하는 훈련은 벨류엔에 없었다.

그래서 켈리는 걸었다.
오른팔 안쪽에서 무언가가 밀려 올라왔다. 어깨에서 팔꿈치로 내려가 손목에서 뭉쳤다. 교범은 그것을 강화의 예비 단계라 불렀고 마법청의 서기들은 단계마다 번호를 매겨 두었으나 켈리는 그 이름을 배운 적이 없었다. 켈리가 아는 것은 다 올라오고 나면 팔이 가벼워진다는 사실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을 쓰면 안 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그 방에서 아무도 켈리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말해 줄 이유가 없었다. 이 방의 누구도 그런 것을 걸 줄 아는 사람이 앉아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짐꾼은 처음에 힘을 주지 않았다. 봐주려고 한 것이었다. 어린 여자애를 상대로 단번에 눕히면 보기 좋지 않으므로 몇 숨쯤 버티다가 천천히 넘길 생각이었고, 그 생각을 할 시간은 있었다. 시작 소리가 나고 나서 한 숨 반 정도였다. 그 한 숨 반이 지나고 그의 손등이 탁자에 닿았다.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짐꾼이 자기 손을 보았다가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여전히 팔을 그 자세로 두고 앉아 있었고 표정이 그대로였다.
"…뭐야 지금."
"끝난 거야?"
켈리가 물었다. 심판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켈리의 팔을 한 번 보았다.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 팔뚝이 가늘었다. 가는데 선이 있었다. 살이 없어서 근육이 그대로 드러난 팔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다른 선이 하나 더 있었다.

피부 밑으로 붉은 실 같은 것이 손목에서 팔꿈치 쪽으로 옅게 번져 있었다. 방이 어두웠고 등불이 탁자 위쪽에만 달려 있었으므로 잘 보이지 않았다. 심판은 부두에서 10년을 일했고 팔뚝을 보는 눈이 있었는데, 그 눈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타르실에는 마법사가 없었다. 회랑에서 천 리 떨어진 항구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남의 팔에서 그 선을 알아볼 방법은 없었다.
그는 그것을 핏줄이라고 생각했다. 힘을 쓰면 핏줄이 선다. 그 설명으로 넘어갔고, 넘어간 뒤로는 다시 보지 않았다.

나무판 앞이 잠깐 소란해졌다. 한 돈을 던졌던 사람들이 열두 돈씩 받아 갔다. 받아 가면서 웃었고 이번 웃음은 아까 것과 종류가 달랐다. 배당을 매기던 남자가 분필로 적힌 것을 지우고 다시 적었다. 켈리 둘. 옆의 숫자는 하나였다.
두 번째 상대는 봐주지 않았다. 그쪽은 첫 판을 봤으므로 처음부터 힘을 썼고, 켈리의 손등이 탁자 쪽으로 반쯤 기울었다. 사람들이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웃음이 아니라 구경하는 소리였다. 켈리는 그 상태에서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이를 악물고 있었고 목에 핏줄이 섰고 어깨가 들려 있었다. 켈리는 그 자세를 보고 한 가지를 알았다. 저 사람은 지금 전부를 쓰고 있었다.

켈리는 절반쯤 걸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을 마저 걸었다.
팔이 한 번 더 뜨거워졌다. 상대의 손등이 탁자에 닿는 데는 두 숨이 걸렸다. 닿고 나서 그가 팔을 빼고 어깨를 주물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무판 앞에서 배당을 매기던 남자가 분필을 든 채로 서 있었다. 그가 한참 서 있다가 켈리의 숫자를 지웠다. 지우고 새로 적지 않았다. 켈리 쪽에 걸 사람이 이제 없을 것이고, 켈리 반대쪽에 걸 사람은 더 없을 것이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에는 값을 붙이지 않는 것이 이 판의 규칙이었다.

세 번째는 하우스가 직접 골랐다. 뒤쪽 방에서 불려 나온 사람이었고 여기서 일하는 자였다. 팔이 짐꾼보다 굵지는 않았는데 손목이 두꺼웠다. 그가 앉으면서 켈리를 한 번 보았고 그 눈에는 웃음이 없었다. 이 사람이 나온 것은 판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두 판이 나갔으면 세 판째는 되찾아야 했고, 되찾지 못하면 오늘 저녁 장부가 맞지 않았다.

켈리도 이번에는 처음부터 다 걸었다. 여태 절반씩 건 이유는 아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를 몰라서였는데, 이제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상대가 얼마나 쓰는지를 보고 그보다 조금 더 걸면 되는 것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그 자리에서 알아냈고, 알아낸 것을 바로 써 보았다.

문제는 그 조금 더가 켈리에게는 조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벨류엔의 교범에는 강화의 단계가 여섯으로 나뉘어 있었다. 아래 셋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 안에 있었고 위 셋은 그 바깥에 있었다. 돌파형에게 가르치는 것은 위 셋이었다. 터지는 자리까지 가는 데 필요한 것이 그것이었기 때문이고, 아래 셋을 쓸 일이 없었으므로 아래 셋은 가르치지 않았다. 켈리가 조절할 줄 아는 눈금은 넷째부터 시작했다.

탁자가 부서졌다.
정확히는 켈리 쪽 모서리가 먼저 갈라졌고 그다음에 상판 가운데가 쪼개졌다. 두꺼운 나무였는데도 그렇게 되었다. 상대의 손등은 탁자에 닿지 못했다. 닿을 탁자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팔이 부러진 상판 사이로 내려갔고 켈리가 손을 놓았다. 나무 부스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상대는 팔을 그대로 든 채 자기 손과 켈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이 일을 육 년 했고 탁자가 부서지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 방에서 소리를 낸 것은 마지막으로 떨어진 나무 조각 하나였다.
켈리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오른쪽 무릎이 한 번 꺾였다가 돌아왔다. 값이 왔다. 세 번을 연달아 걸었고 마지막 것이 컸으므로 그만큼이 어디선가 빠져나갔다. 켈리는 그것을 배고픔으로 셌다. 오늘 받은 것이 다섯 돈이었고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방금 쓴 것이 빵 몇 개어치인지가 저절로 계산되어 나왔다. 계산이 나쁘게 나왔다.

켈리가 부서진 탁자를 보았다. 그리고 심판을 보았다.
"이거 내가 물어야 돼?"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누군가 뒷문 쪽으로 뛰었다. 뒤이어 한 사람이 나무판 앞으로 가서 분필로 적힌 것을 손바닥으로 지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배당을 건 사람들이었다. 열두 배가 한 번 나왔고 두 배가 한 번 나왔으니 받을 것이 있었고, 받을 것이 있는 사람이 여럿이면 소리가 커진다. 나무판을 지우는 쪽과 지우지 말라는 쪽이 붙었고 그 사이에 의자 하나가 넘어졌다.

켈리는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다만 사람들이 자기를 밀치고 지나가고 있었고, 밀치는 것에 대해 이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냥 서 있었다. 서 있으면서 켈리가 생각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아직 밥을 못 먹었다. 둘째, 저 탁자를 물어야 하는지 아닌지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둘 중에 첫 번째가 더 급했다.

그러다 종소리를 들었다. 열두 번이었다. 정오였다. 점심때쯤 돌아온다고 했으니 돌아가야 할 시각이었다.

켈리가 문 쪽으로 갔다. 들어온 문은 사람들이 막고 있었고 반대편에 다른 문이 있었으므로 그쪽으로 갔다. 손잡이를 당겼다. 열리지 않았다. 바깥에서 뭔가로 막아 놓은 모양이었다. 켈리가 한 번 더 당겼고 역시 열리지 않았다.
"나 가야 돼."
아무도 듣지 않았다. 켈리가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과 지워진 나무판과 부서진 탁자가 있었다. 그중 누구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시간 됐어."
켈리가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는 대신 이번에는 앞으로 밀었다. 미는 동안 팔에 또 한 번 걸었다. 문을 부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켈리는 문이 열리기를 바랐고, 밀면 열린다고 생각했으며, 세게 밀면 더 잘 열린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는 틀린 데가 없었다. 다만 켈리가 걸 줄 아는 가장 약한 눈금이 문이 견딜 수 있는 것보다 위에 있었을 뿐이다.

문이 경첩째 뜯어져 나갔다.
문짝이 바깥 골목으로 넘어가 돌바닥에 떨어졌다. 먼지가 났다. 그리고 그 문 뒤쪽 벽에 붙어 있던 것이 같이 딸려 나왔다.

사람이었다. 작았다. 켈리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고 열대여섯으로 보였다. 사내아이였다. 문과 벽 사이 좁은 틈에 들어가 있다가 문이 통째로 없어지는 바람에 몸을 가릴 것이 사라진 참이었다. 주머니가 여럿 달린 옷을 입고 있었고 그중 하나에서 주사위가 두 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쪽이 켈리를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없었다. 켈리도 표정이 없었다. 둘이 잠깐 그러고 있었다. 그 잠깐 동안 주사위 하나가 계속 굴러가다가 돌틈에 걸려 멈췄다.
"저 3할로 잡힐 참이었는데요."
작은 쪽이 말했다. 목소리에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주사위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켈리 옆을 지나 골목 쪽으로 걸어갔다. 세 걸음쯤 가다가 멈추고 돌아보았다.
"같이 가시죠."
"왜."
"혼자 가면 저 7할로 잡혀요. 두 사람이면 4할이고요."
켈리가 그 숫자를 들었다. 7할과 4할. 어느 쪽이 작은지는 바로 알았다. 숫자는 켈리가 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쪽은 혼자 가면 9할입니다."
"왜 나는 9할이야."
"그렇게 생겼으니까요."
작은 쪽이 켈리의 외투와 지팡이와 키를 차례로 가리켰다.
"저 안에서 탁자 부순 사람이 어떻게 생겼냐고 물으면 다들 똑같이 대답할 겁니다. 마른 여자애가 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고요. 이 도시에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몇인데."
"하나요."

켈리가 골목 양쪽을 보았다. 뒤쪽 방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소리가 났다.
"가자."
켈리가 말했다.

작은 쪽이 따라오지 않았다. 골목 입구에 쭈그려 앉아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뭐 해."
"잠깐만요."

주사위 하나를 꺼냈다. 아까 주운 것 중 하나였다. 그것을 돌바닥에 세워 놓고 엄지로 한 번 눌렀다. 누르는 동안 입술이 움직였는데 소리는 나지 않았다. 숫자를 세는 입 모양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보았고, 보면서 저 사람이 지금 뭔가를 세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았다. 무엇을 세는지는 몰랐다.

작은 쪽이 일어섰다.
"됐습니다."

뒷문에서 사람 셋이 뛰어나왔다. 앞선 자가 골목 입구를 돌았다.

넘어졌다.

뒤따르던 자가 그 위로 넘어졌고, 세 번째가 두 사람을 피하려다 벽에 어깨를 박았다. 셋이 한자리에 엉켰다. 하나가 일어서려다 다른 하나의 팔을 밟았고 그쪽이 소리를 질렀다.

켈리가 그 자리를 보았다. 평평한 돌바닥이었다.
"저거 왜 넘어져."
"돌이 있었겠죠."
"없는데."
"그럼 미끄러웠겠죠."

켈리가 바닥을 한 번 더 보았다. 마른 돌이었다. 사흘째 비가 안 왔다. 켈리는 그 두 가지를 알았고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까지 알았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나아가려면 사람이 이유 없이 넘어질 수도 있다는 것 말고 다른 가능성을 알아야 했고, 그런 것을 켈리는 배운 적이 없었다.

작은 쪽이 주사위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몸을 돌렸다. 두 걸음 만에 발을 헛디뎠다. 넘어지지는 않았는데 오른손을 벽에 짚었고, 짚고 나서 그 손목을 잠깐 쥐고 있었다. 숨을 한 번 짧게 들이마셨다.
"…3할로 돌아왔네요."
"뭐가."
"아무것도요."

소매를 내려 손목을 덮었다. 덮는 동안 소매 안쪽이 잠깐 보였다. 천이 감겨 있었다. 새것이 아니었고 여러 번 감았다 푼 것이었으며, 감은 자리가 손목 하나치고는 두꺼웠다.

둘이 골목을 나와 큰길로 접어들었다. 큰길에 들어서자 니카가 걸음을 조금 늦췄다. 뛰면 눈에 띈다고 했다. 켈리가 그 말을 듣고 속도를 맞췄다. 맞추는 것은 요즘 연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근데 왜 숨어 있었어."
"땄거든요."
"많이?"
"아니요. 조금씩 오래요."
니카가 걸으면서 대답했다.
"한 번에 많이 따면 걸립니다. 조금씩 오래 따면 안 걸리는데, 그것도 아주 오래 하면 걸려요. 저는 넉 달 했습니다."
"넉 달이면 오래야?"
"오래죠. 보통 두 달쯤에서 그만둡니다."
"근데 왜 넉 달 했어."
니카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계산이 맞았으니까요."
켈리는 그 대답을 이해했다. 계산이 맞으면 계속하는 것이었다. 계산이 맞는데도 그만두는 이유를 켈리도 잘 몰랐다. 그리고 걸으면서 니카가 한마디를 더 했는데, 묻지도 않은 것을 덧붙이는 투였다.
"저 판에서는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무슨 짓."
"…아니요. 그냥 안 했다고요."
니카가 말을 접었다. 접은 이유는 설명하려면 길어지기 때문이었고, 길어지면 이 사람이 자기를 두고 갈 확률이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니카가 넉 달 동안 지킨 규칙이었다. 판에서는 걸지 않는다. 도망칠 때만 건다. 그 구분을 지키지 않으면 오래 못 간다는 것을 그는 열세 살에 배웠고 그 뒤로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켈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들을 이유가 없었다. 켈리에게는 지켜야 할 그런 구분이 없었고, 없는 이유는 아무도 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벨류엔에서 시작이라는 말이 나오면 거는 것이 순서였고, 거는 자리와 걸지 않는 자리를 나누는 규정은 교범 어디에도 없었다. 나눌 필요가 없었다. 마법사가 마법을 쓰면 안 되는 자리에 가게 되는 경우를 마법청은 상정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한 사람은 판에서 걸지 않아 뒷문 뒤에 숨어 있었고, 한 사람은 판에서 걸어 탁자를 부수었다. 둘이 같은 골목에서 만난 것이 그래서 우연이었는데, 우연이라는 것을 둘 다 나중에야 알았다.

켈리가 물었다.
"아까 주사위는 왜 세웠어."
니카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버릇입니다."
"무슨 버릇."
"세워 놓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버릇이요."
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종류의 것은 켈리도 알았다. 담요는 세 번 접어도 되는데 네 번 접는 쪽이 나았고, 왜 나은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켈리는 더 묻지 않았다.

니카가 켈리를 한 번 보았다. 더 물을 줄 알고 대답을 두 개 더 준비해 두었는데 쓸 데가 없어졌다. 걸으면서 그 두 개를 도로 집어넣었다.

켈리가 물었다.
"이름 뭐야."
"니카 셰르입니다."
"켈리."
"성은요."
"없어."
"그거 좋네요."
니카가 말했다.
"찾기 어렵거든요."
켈리가 그 말을 생각해 보았다. 여태 켈리에게 성이 없다는 것은 없는 쪽이었다. 없는 것에 좋다는 말이 붙은 것은 처음이었다.

바르트는 삯방 앞에 서 있었다. 열두 시 반이었고 켈리는 없었고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가 골목 입구 쪽을 보다가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는 켈리였고 하나는 처음 보는 작은 사내아이였다. 두 사람 다 걸음이 빨랐고 뒤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어디 갔었어."
"줄 섰어."
바르트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또?"
"이번엔 앞에 봤어."
"봤는데?"
"밥 주는 덴 줄 알았어."
옆에서 니카가 말했다.
"밥은 안 주는 데였습니다."
바르트가 그쪽을 보았다.
"댁은 누구요."
"니카 셰르입니다. 이분이 문을 부수는 바람에 같이 나왔습니다."
"…문을."
"문하고 탁자요."
니카가 정정했다.
"탁자가 먼저였고 문이 나중이었습니다."

바르트가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아직 오른손에 동전 다섯 개를 쥐고 있었다. 나가서 아무것도 사 먹지 않았으므로 하나도 줄지 않았다. 손바닥에 동전 모양 자국이 다섯 개 나 있었다. 바르트가 그 손을 한참 보았다. 그가 오늘 아침에 준 것은 다섯 돈이었고 그것으로 빵 두 개를 사고 한 돈이 남았어야 했다. 다섯 개가 그대로 있다는 것은 켈리가 네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그 네 시간 동안 대신 무엇을 했는지는 방금 들었다.

"자네 밥은."
"못 샀어."
"왜."
"사는 법 몰라서."

바르트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배낭을 열고 아침에 남긴 빵을 꺼내 켈리에게 주었다. 켈리가 받아서 먹었다.

받는 손을 그가 보고 있었다. 오른쪽 팔뚝에 아직 선이 남아 있었다. 아까보다 옅어졌고 곧 사라질 것이었는데, 사라지기 전까지는 보였다. 그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지난 석 달 동안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세 번인지 네 번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은 색의 짙기로 가늠해 보면 서너 번쯤이었다.

바르트는 그것을 묻지 않았다. 묻는 대신 켈리가 빵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중에 노트를 펴고 그날 자리에 한 줄을 적었다. 「셋, 혹은 넷. 아침부터 굶음.」 그 아래에 화살표를 그리고 「보충 없음」이라고 적었다.

쓴 만큼을 어디선가 가져와야 하는데 그날 켈리가 가져올 데는 자기 몸밖에 없었다. 그것을 계산으로 확인한 것이 그날이 처음이었고, 확인하고 나서 그는 저울 이야기를 며칠 더 하게 된다.

먹는 동안 니카가 그 옆에 서서 기다렸다가 다 먹은 것을 보고 말했다.
"오늘 안에 이 도시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요."
"저쪽이 받을 게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탁자값하고 문값하고, 아마 배당금까지 엮어서요."
"배당금은 우리가 받을 거 아니오."
"받으려면 남아 있어야 하고, 남아 있으면 물어줄 것도 같이 계산됩니다."
니카가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하나 꺼내 손안에서 굴렸다.
"제 계산으로는 남는 쪽이 6할 손해입니다. 저쪽은 장부를 쓰는 사람들이고 장부를 쓰는 쪽은 언제나 받을 것을 먼저 적습니다."
바르트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부를 쓰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오후 셋은 타르실 서쪽 문으로 나갔다. 나가는 데 입시세는 들지 않았다. 나가는 것은 공짜라고 켈리가 처음 알았다. 들어올 때는 돈을 받고 나갈 때는 안 받는 것이 이상해서 물었더니, 니카가 나가는 사람한테 받으면 아무도 안 나가고 그러면 더 곤란해진다고 대답했다. 켈리는 그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 앞뒤가 맞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흘 뒤에 그들은 다시 타르실로 불려 들어오게 되는데, 그때 셈을 해 준 사람은 니카가 아니었다.

 

대리인


찾아온 사람은 사흘째 저녁에 왔다. 일행은 타르실에서 서쪽으로 반나절쯤 떨어진 냇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르트가 여기서 며칠 더 묵자고 했기 때문이었는데, 이유는 사려던 물건을 아직 못 샀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려는 것은 저울이었다. 지금 쓰는 것은 한 푼 단위까지밖에 못 재는데, 그보다 잘게 재는 것이 타르실에 있다고 했다. 값은 스무 냥이었다. 바르트는 그 값을 듣고 사흘째 계산 중이었고, 계산하는 동안 그 저울 이야기를 세 번 했다.

찾아온 사람은 젊었고 가죽 통을 하나 들고 있었다. 그는 불가로 와서 이름 셋을 확인했다. 바르트 뮐렌, 니카 셰르, 그리고 켈리. 성이 없는 켈리. 확인하고 나서 통에서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받는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다고 했고, 다만 받았다는 표시를 해 달라고 했다. 바르트가 받고 이름을 적었다. 그 사람은 표시를 확인하고 통을 닫고 돌아갔다. 오는 데 반나절, 가는 데 반나절일 텐데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 일의 방식이었다. 통지를 나르는 자는 내용에 관여하지 않으며,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반나절을 걸어와 종이 한 장을 내밀고 다시 반나절을 걸어 돌아갈 수 있다. 관여하기 시작하면 그 일은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내가 그날 저녁 불가에서 본 것은 마른 여자애 하나와 작은 사내아이 하나와 덩치 큰 중년 남자 하나였고, 셋 중 누구도 그의 기억에 남지 않았다.

켈리가 그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위쪽에 굵은 글자가 있고 아래로 작은 글자가 빽빽했다. 굵은 쪽은 읽혔다. 중재 출석 통지. 그리고 그 아래 어딘가에 자기 이름이 있었다. 켈리 두 글자였다. 그것을 찾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는데, 글자가 작고 줄이 촘촘했기 때문이다. 찾고 나서 켈리가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짚었다.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는 것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바르트의 노트였다. 두 번째는 사흘 전 그 집의 명부였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 것은 켈리에게 좋았고 두 번째 것은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세 번째 것은 이 종이가 반나절을 걸어서 자기를 찾아왔다는 점이 달랐다. 적힌 것이 사람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때 알았다.

"내 이름이 왜 여기 있어."
"자네가 적어 줬으니까."
바르트가 종이를 받아서 작은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얼굴이 조금씩 굳었다.
"적으면 안 되는 거였어?"
"안 되는 건 아니고."
"근데."
"적으면 찾을 수 있게 되는 거지."
켈리가 그 말을 곱씹었다. 바르트의 노트에 적힌 이름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런데 그 노트는 켈리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같은 적기인데 하나는 찾아오고 하나는 안 찾아오는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켈리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 차이는 누가 적었느냐가 아니라 그 적힌 것을 누가 들고 있느냐에 있었다.

니카가 종이를 넘겨받아 아래쪽 글자를 읽었다.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 가면 궐석으로 처리된다고 합니다."
"궐석이 뭐요."
"안 온 사람 몫은 온 사람 말대로 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얼마가 되나."
"저쪽이 부르는 대로요."
바르트가 불을 한 번 쑤셨다. 불티가 올라갔다.
"사흘 전엔 도망가는 게 6할 이득이라고 했잖소."
"그때는 그랬습니다."
"지금은."
"지금은 반대입니다."
니카가 주사위를 손안에서 굴렸다. 굴리는 것은 계산을 하는 동작이 아니라 계산이 끝났을 때 하는 동작이었다. 켈리는 며칠 사이에 그 구별을 알게 되었다.
"사흘 전엔 저쪽이 우리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지금은 압니다. 이름 셋에 나이에 생김새까지요. 쇠 파는 데서 나갔겠죠. 그 집은 장부를 쓰니까요."
"그래서."
"그래서 지금 도망가면 이 도시에 다시는 못 들어옵니다. 저야 상관없는데요."
니카가 바르트 쪽을 보았다.
"그쪽은 여기서 계속 사야 하는 게 있으시잖습니까."

바르트가 불을 한 번 더 쑤셨다. 저울은 타르실에서만 팔았다. 정확히는 타르실에서 사는 것이 가장 쌌고, 다른 데서 사려면 두 배를 줘야 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십 년쯤 더 재면서 살 생각이었다.

"가야겠군."

중재소는 항구 안쪽 큰 건물의 이 층에 있었다. 아래층은 곡물 저울대였고 사람이 많았으며 냄새가 났다. 곡물 냄새와 사람 냄새와 젖은 마대 냄새가 섞인 것이었는데, 켈리는 그 냄새를 맡으면서 로엔에서 온 밀이 여기를 지나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밀이 어디서 오는지 아는 것이 두 달 전에는 못 하던 일이었다.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좁고 어두웠고 계단참마다 문이 있었고 문마다 번호가 붙어 있었다. 켈리가 그 번호를 하나씩 읽으면서 올라갔다. 번호를 읽는 것은 잘하는 일이었다.

배정된 방은 넷째 문이었다. 안은 좁았고 긴 탁자가 하나 있었으며 그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의자가 놓여 있었다. 상석에 앉은 사람은 중재인이었다. 쉰쯤 되어 보였고 앞에 종이와 모래시계를 놓아두었다. 모래시계는 켈리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유리 안에 모래가 들어 있고 가운데가 잘록했다. 켈리는 앉자마자 그것을 보기 시작했고 그 뒤로도 자주 보았다.

맞은편에는 둘이 앉아 있었다. 하나는 그날 그 집의 주인이었다. 켈리가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날은 뒤쪽 방에 있었는데 지금은 앞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하나가 더 앉아 있었는데, 그쪽은 그날 없던 사람이었다. 서른 후반쯤의 남자였다. 금속테 안경을 썼고 옅은 갈색 머리를 뒤로 넘겼는데 한 가닥이 삐져나와 있었다. 회색 장코트가 구겨져 있었고 원래는 좋은 옷이었을 것 같았다. 여행하는 차림이 아닌데 옷은 여행한 사람처럼 상해 있었다. 앞에 서류 뭉치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낡은 가죽 가방이 있었다. 그가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손가락으로 줄을 짚고 있었는데, 짚는 속도가 읽는 속도보다 빨랐다. 이미 아는 것을 확인하는 손이었다.

중재인이 시작을 알리고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그리고 양쪽을 한 번씩 보았다.
"청구 측부터."
안경 쓴 남자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코트 앞섶을 한 번 폈는데 그래 봐야 구김이 펴지지는 않았다.
"대리인 오벨 리스트입니다. 청구 항목은 셋입니다. 첫째, 탁자 한 대. 참나무 상판에 쇠 받침을 댄 것으로 여덟 해 전 제작. 감가를 적용해 열두 냥. 둘째, 문 한 짝과 경첩 두 벌. 문짝은 새것에 가깝고 경첩은 벽째 뜯겨 나갔으므로 벽 보수까지 포함해 여덟 냥. 셋째, 영업 중단 손실. 당일 오후와 다음 날 하루, 합 하루 반. 일 평균 수입의 절반을 잡아 다섯 냥. 합계 스물다섯 냥입니다."
"…스물다섯."
바르트가 그 숫자를 받아 적었다. 손에 있는 것이 여섯 냥 조금 넘었다. 스물다섯 냥이면 정밀 저울보다 다섯 냥이 더 비쌌고, 그는 그 계산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니카가 손을 들었다. 손을 들고 나서 중재인이 고갯짓을 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그런 절차를 아는 사람이었다. 타르실 빈민가에서 자란 아이가 중재소 절차를 아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동네에서는 돈 문제가 생기면 여기로 왔고, 니카는 열두 살부터 남의 일로 이 계단을 올라 다녔다.
"셋째 항목이요. 영업 중단이 하루 반이라는 건 누가 셌습니까."
"청구인이 신고했습니다."
"신고한 걸 그대로 적으면 그건 셈이 아니라 받아쓰기죠."
"신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허위로 밝혀지면 배액을 물립니다."
"밝혀지면요. 안 밝혀지면 그냥 다섯 냥이고요."
오벨이 가방 쪽으로 손을 뻗었다. 뻗으면서 낮게 뭐라고 말했는데 들리지 않았다. 숫자 같기도 했다.

가방이 저절로 열렸다.

그 안에서 손이 나왔다. 두 개였다. 팔꿈치까지 있었고 그 위로는 없었다. 잘린 자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거기까지만 있는 모양이었다. 색이 없었고 잉크 냄새가 났다. 두 손이 탁자 위로 올라와 서류 뭉치 옆에 자리를 잡더니 종이를 넘기기 시작했다. 넘기는 속도가 빨랐고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켈리가 지팡이를 잡았다. 바르트가 그 팔을 눌렀다.

나머지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중재인은 모래시계를 보고 있었고 그 집 주인은 하품을 했고 니카는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다. 이 방에서 그것을 처음 보는 사람은 켈리뿐이었다.

"앉으셔도 됩니다."
오벨이 말했다.
"물지 않습니다."
"…저거 뭐야."
"서기입니다."
"사람이야?"
"아니요."
"그럼 뭐야."
"계약입니다."

손이 한 장을 뽑아 오벨 앞으로 밀었다. 오벨이 그것을 받아 읽었는데, 받기 전에 이미 읽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타르실 상거래 중재 규정 제구조 제이항. 손실액 산정은 청구인의 장부에 근거하되, 장부가 없는 업종은 신고액에 상한을 둔다. 이 업종은 장부를 두지 않는 업종이며 상한은 일 평균 수입의 절반, 최대 사흘분입니다. 저희는 하루 반을 청구했습니다. 상한의 절반입니다."
"그걸 외우고 계십니까."
"제구조는 자주 씁니다."
니카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다른 쪽을 짚었다.
"둘째 항목. 벽 보수가 왜 문값에 들어갑니까."
"경첩이 벽째 뜯겼습니다."
"그건 문이 튼튼했으면 안 그랬겠죠. 문이 벽보다 강하면 벽이 나가는 겁니다. 그건 문을 그렇게 단 쪽 잘못 아닙니까."
"제십사조. 건축물의 시공 상태는 손괴 책임을 감면하지 않습니다."
"제십사조에 단서가 있을 텐데요."
손이 종이를 한 장 뽑아 올렸다. 제십사조였다. 단서는 붙어 있지 않았다.
"단서는 제십사조에 없습니다. 제십오조에 있고, 지진과 홍수입니다."
"그럼 제십오조도 가져오시죠."
"부르지 않았습니다."
"부르면 가져옵니까."
"예."
"그럼 부르시죠."
"제가 왜요."
손 두 개가 가만히 있었다. 부른 것만 가져오는 손이었다.
"사람도 지진처럼 밀면요."
"규정에 사람은 없습니다."
니카가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꺼내 탁자에 굴렸다. 굴리고 나서 눈을 보지도 않았다.
"그럼 제가 이길 확률이 2할쯤 되겠네요."
"제 계산으로는 일흔 번에 한 번입니다."
"일흔 번에 한 번이면 2할이 아니라 거의 없는 건데요."
"예."
"그럼 일흔 번 하면 한 번은 이기는군요."
"이 건은 한 번뿐입니다."
니카가 주사위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중재인이 그 오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종이에 뭔가를 적었는데, 적은 것은 진술이 아니라 시각이었다.

바르트가 그 사이에 손을 들었다. 중재인이 또 고갯짓을 했다. 바르트가 일어서지 않고 앉은 채로 허리춤을 더듬더니 손바닥만 한 놋쇠 물건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접시가 둘 달린 작은 저울이었다.

중재인이 그것을 보았다.
"…그건 뭡니까."
"저울이오."
"여기서 뭘 재시려고."
"이거요."
바르트가 주머니에서 나무 조각을 하나 꺼냈다. 손바닥 절반쯤 되는 것이었고 한쪽 면이 매끈하고 반대쪽이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부서진 탁자 상판의 조각이었다. 사흘 전에 그 방을 나오면서 주워 온 것이었다.

오벨이 그 조각을 보았다. 그는 십오 년 동안 이 계단을 오르내렸고 증거물이 들어오는 것은 여러 번 봤다. 부서진 물건의 파편이 들어오는 것도 봤다. 저울이 같이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탁자 말인데."
"예."
"참나무 상판이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두께가 얼마요."
오벨이 서류를 넘겼다. 넘기다가 멈췄다.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쟀소."
바르트가 조각을 저울 한쪽 접시에 올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추를 몇 개 꺼내 반대쪽에 얹기 시작했다. 얹는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추가 세 개째에서 접시가 수평이 되었다.
"11 그램하고 조금. 이만한 부피에 이 무게면 참나무가 맞소. 다만 상판 두께가 손가락 두 마디 반이오. 쪼개진 면을 보면 알 수 있소. 참나무 두 마디 반이면 여덟 해 쓴 걸 감안해도 새로 짜는 데 일곱 냥이면 되오. 쇠 받침은 안 부서졌으니 그대로 쓰면 되고. 열두 냥은 쇠 받침까지 새로 짜는 값이오."
방이 조용해졌다. 중재인이 처음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나무는 무게로 값을 치오. 나는 무게 재는 사람이고."
오벨이 안경을 한 번 올려 썼다. 그러고는 서류 맨 뒤에서 한 장을 뽑아 앞으로 옮겼다. 그가 처음으로 말을 조금 느리게 했다.
"…확인하겠습니다. 다만 쇠 받침이 재사용 가능한지는 목수가 봐야 합니다."
"봐야지."
"그럼 그 항목은 보류하고 나머지를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모래가 절반쯤 내려간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둘째 항목에 있었다. 중재인이 두 번 시간을 확인했고 한 번은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니카가 확률을 말하면 오벨이 조항 번호로 받았고, 오벨이 조항을 읽으면 바르트가 무게와 값으로 받았다. 세 사람이 서로 다른 말로 싸우고 있었으므로 이야기는 좀처럼 한자리에 모이지 않았다. 중재인은 처음 얼마간 받아 적다가 나중에는 적기를 그만두었고, 그만둔 뒤로는 턱을 괴었다. 그가 이 방에서 십일 년을 일했는데 오늘 같은 건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한쪽이 화를 내고 한쪽이 우는데, 오늘은 아무도 화를 내지 않고 세 사람이 각자 자기 학문을 하고 있었다.

켈리는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슨 이야기인지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아들은 것은 이랬다. 자기가 부순 것들에 값이 붙었고, 그 값이 스물다섯 냥이고, 스물다섯 냥은 가진 것보다 훨씬 많다. 나머지는 전부 아는 단어로 되어 있는데 붙여 놓으면 뜻이 흩어졌다. 켈리는 알아듣기를 포기하고 모래시계를 보았다. 모래는 일정하게 떨어졌다. 켈리가 그것을 세어 보았는데 알갱이 단위로는 셀 수 없었고, 대신 잘록한 부분을 지나가는 줄기가 한 번도 끊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방에서 켈리가 그날 알아낸 것은 그것 하나였다.

그러다 오벨이 한 장을 더 넘기면서 말했다.
"참고로 상금 청구 건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참가 등록 시 규정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되며, 해당 규정에 따라 기물 파손 시 상금은 소멸합니다."
니카가 고개를 들었다.
"그 규정 읽어 준 적 없는데요."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어디에요."
"입구 벽입니다. 명부 탁자 옆."
"글자가 얼마나 작던가요."
"규정에 크기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켈리가 그때 입을 열었다.
"나 그거 못 읽었어."
모두가 켈리 쪽을 보았다. 켈리는 탁자를 보고 있었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입구에 있었어?"
"예. 있었습니다."
"나 거기 섰었는데."
"그러면 읽을 수 있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글자는 읽어."
켈리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근데 뜻을 몰라."

오벨이 종이를 넘기려던 손을 멈췄다. 그는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읽었다거나 못 읽었다거나 안 읽었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다. 읽었는데 뜻을 모른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가 십오 년간 남의 말을 들어서 얻은 감각으로 바로 알아졌다.

"…어느 부분이 말씀입니까."
"전부."
"전부요."
"글자는 다 알아. 붙여 놓으면 모르겠어."
오벨이 잠깐 오벨답지 않게 가만히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규정문이 적힌 쪽을 켈리 쪽으로 돌려놓고,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어 읽어 주었다.
"이 줄입니다. 참가자는 등록으로써 본 규정에 동의한 것으로 본다."
"동의가 뭐야."
"좋다고 했다는 뜻입니다."
"난 안 했는데."
"등록하셨으니까요."
"이름 물어봐서 대답한 건데."
"그것이 등록입니다."

켈리가 그 줄을 오래 보았다. 오벨이 짚어 준 자리에는 글자가 열몇 개 있었고 켈리는 그것을 전부 읽을 수 있었다. 읽을 수 있는데 그 열몇 개가 자기를 여기 앉혀 놓았다.

"그럼 저 문 값은."
"열두 냥입니다. 아니, 문은 여덟이고 탁자가 열둘입니다."
"그거 누가 정했어."
"탁자는 목재 시세와 감가로 산정했습니다. 문은 시공비 견적서가 있습니다."
"그거 말고."
켈리가 서류 쪽을 가리켰다.
"저기 적은 사람. 그 사람이 정한 거야?"
"산정 기준에 따라 계산한 것입니다."
"기준은 누가 정해."
"평의회가 정합니다."
"평의회는 누가 정해."
"…상인들이 뽑습니다."
"그럼 상인이 정하네."
오벨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멈췄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틀린 말인데 어디가 틀렸는지 설명하려면 세 단계가 더 필요했고, 세 단계를 거쳐도 결국 비슷한 데로 돌아왔다.

켈리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제 값은 누가 정해요?"

방이 조용해졌다.

켈리는 자기가 방금 무엇을 물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질문은 앞의 질문과 같은 줄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문에 값이 있고 그 값을 누가 정했으면, 자기에게도 값이 있고 그것도 누가 정했을 것이다. 켈리는 자기에게 값이 붙어 있다는 것을 사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루 5돈이라는 값이었고 그것은 바르트가 노트에 적어 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값은 먹는 것에 붙은 값이었고, 켈리가 지금 물은 것은 그것과 조금 다른 것이었다. 무엇이 다른지는 켈리도 몰랐다.

오벨이 대답하지 않았다. 조항을 찾은 것도 아니고 서류를 넘긴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앉아 있었다. 그가 아는 규정집에는 그 질문에 해당하는 조항이 없었다. 사람에게 값을 매기는 조항은 있었다. 노동 계약이 그랬고 보상 산정이 그랬고 상해 배상표가 그랬다. 그러나 그 조항들은 전부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값을 매겼지 사람 자체에 매기지 않았다. 매기지 않는 이유는 매길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매기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고, 그러면 누가 언제 그렇게 정했느냐는 질문이 바로 뒤에 붙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지금 자기 값을 물었다. 물어도 되는 것인 줄 알고 물은 얼굴이었다.

중재인이 헛기침을 했다.
"질문의 취지가 본건과 관련이 없습니다."
"예."
오벨이 대답했다. 대답하고 나서 종이를 정리했다. 정리하면서 옆자리를 보았다.
"청구인 되시는…"

거기서 멈췄다.

멈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반 숨쯤이었다. 오벨이 서류 맨 위를 내려다보았고 거기 적힌 것을 읽었다.
"…하우케 씨. 나머지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그 집 주인이 오벨을 한 번 보았다. 따지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오벨이 가방을 열었고 손 두 개가 마지막 종이를 묶어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이 닫혔다.

켈리가 그것을 보았다. 아까보다 덜 놀랐다. 놀라는 데도 순서가 있어서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덜 놀라게 되어 있었다.

그날의 결론은 이렇게 났다. 탁자는 목수 확인 뒤에 다시 정하기로 하고 일단 여덟 냥으로 잡았다. 문과 벽은 여섯 냥으로 깎였다. 영업 손실은 반나절분인 두 냥으로 줄었다. 합해서 열여섯 냥이었다. 바르트가 가진 것은 여섯 냥이 조금 넘었으므로 다섯 냥을 먼저 내고 남은 열한 냥을 넉 달에 나누어 갚기로 했다.

분할 상환 각서에 세 사람의 이름이 들어갔다. 바르트가 적고 니카가 적었다. 켈리 차례가 되자 중재인이 도장을 내라고 했다. 도장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손가락을 쓰라고 했다. 먹그릇이 켈리 앞으로 밀려왔다.

켈리가 오른손 엄지에 먹을 묻혔다. 그리고 자기 이름 옆을 눌렀다.

종이가 찢어졌다.

"…어."

먹이 밀려 나와 이름 쪽까지 번졌고, 눌린 자리에 구멍이 났으며, 그 아래 탁자 상판에 엄지만 한 자국이 팼다. 중재인이 그 자국을 보았다. 그리고 켈리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벨이 가방에서 새 종이를 꺼냈다.
"…여분이 있습니다."
"규정에 있는 거요?"
"아니요. 제가 들고 다닙니다."

두 번째 장을 다시 쓰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다 쓰고 나서 중재인이 이번에는 먹그릇을 직접 잡고 있었다. 켈리가 엄지를 대고, 아까보다 약하게 눌렀다. 종이는 무사했다. 대신 자국이 검은 동그라미 하나로 뭉개져 있었다.

중재인이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결이 보여야 합니다."
"결이 뭐야."
"손가락 무늬요. 이러면 누가 눌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거 내 손가락인데."
"압니다. 그런데 종이는 모릅니다."

세 번째 장이 나왔다. 오벨의 여분은 두 장까지였다.

바르트가 저울을 도로 꺼냈다. 아까 넣었던 것을 다시 꺼내 탁자 가운데에 놓고, 한쪽 접시에 추를 하나 얹었다. 제일 작은 것이었다.
"손가락 대 보시오."
켈리가 반대쪽 접시에 엄지를 얹었다. 접시가 쑥 내려갔다.
"세."
"이게 세?"
"이건 세다 못해 산을 미는 거요. 접시가 안 내려갈 만큼."
켈리가 힘을 뺐다. 접시가 올라왔다.
"이제 모자라오."
"그럼 어떡해."
"사이."

켈리가 사이를 찾기 시작했다. 접시는 내려가거나 올라갔고 그 사이에서 멈추는 법이 좀처럼 없었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아무것도 조절해 본 적이 없었다. 조절이란 말 자체를 그날 처음 들었다. 배급은 정해진 만큼 나왔고 마법은 나가거나 안 나갔고 명령은 따르거나 안 따르는 것이었다. 중간이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 놋쇠 접시 위에서 처음 배우고 있었다.

일곱 번째에 접시가 멈췄다.

"됐소. 그만큼."

켈리가 그 힘을 손끝에 남겨 둔 채로 먹을 묻히고 종이에 댔다. 그리고 뗐다.

자국이 남았다.

중재인이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도장을 찍었다. 니카가 뒤에서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세 번째 장이 나올 확률이 어떻다는 얘기였고 아무도 듣지 않았다.

켈리가 자기 이름 옆을 보았다.

작은 검은 자국이었다. 가까이 보면 선이 여러 겹 돌아가고 있었다. 가운데가 소용돌이처럼 감겼고 바깥으로 갈수록 선이 벌어졌다. 켈리는 자기 손가락에 그런 것이 있는 줄 몰랐다. 엄지를 들어 불빛 쪽으로 기울여 보니 거기에도 같은 무늬가 있었다. 늘 있었을 텐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번호는 받은 것이었다. 이름도 받은 것이었다. 로브도 받았고 지팡이도 받았고 빵도 받은 것이었으며, 받은 것에는 전부 값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이 무늬는 아무도 준 적이 없었다. 육성소에서도 주지 않았고 제4마도대에서도 주지 않았다. 켈리가 여섯 살에 줄을 서기 전부터 그 손가락에 있었다.

값이 얼마인지 켈리는 몰랐다. 물어볼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도 그날은 몰랐다.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해가 기울어 있었다. 셋이 부두 쪽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얼마 못 가서 뒤에서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오벨이 가방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장코트 자락이 뛰는 바람에 더 구겨져 있었다.

"잠깐만."
바르트가 멈췄다. 니카도 멈췄다. 켈리는 조금 늦게 멈췄다.
"뭐 빠뜨린 거 있소?"
"아니요."
오벨이 숨을 고르고 안경을 올려 썼다.
"아까 그 질문 말입니다."
"어느 거요."
"그럼 제 값은 누가 정하느냐는 것이요."
그가 켈리 쪽을 보았다. 켈리는 그를 보고 있었고 특별한 표정이 없었다.
"제가 답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요."
"조항으로 답이 안 나와서요."

바르트가 그를 한참 보았다.
"그래서 어쩌시려고."
"동행하겠습니다."
"우리 돈 없소."
"압니다. 제가 방금 그 액수를 산정했습니다."
"그럼 왜."
"답이 안 나와서요."
"그건 댁 사정이고."
"예. 제 사정입니다."

바르트가 배낭끈을 고쳐 멨다. 거절할 참이었고 거절하는 말은 짧을수록 좋았다.
"그럼 여기서 푸시오. 우리는 줄 게 없소. 방금 열여섯 냥 물기로 한 사람들이오."
"드리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같이 갈 이유가 없다는 거요."
"같이 안 가셔도 됩니다."
오벨이 말했다.
"제가 같은 길로 가는 겁니다."

바르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왕령 통행 조례 제칠조. 공로의 통행은 제한하지 아니한다. 서쪽 문에서 로엔 가도까지는 공로입니다."
"그러니까 따라오겠다는 거 아니오."
"아닙니다. 저는 로엔 쪽에 볼일이 있고 그쪽도 로엔 쪽으로 가십니다. 방향이 같을 뿐입니다."
"볼일이 뭔데."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니카가 그때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꺼냈다. 굴리지는 않았다.
"안 떨어집니다, 저 사람."
"계산했나."
"아니요. 이건 계산 안 해도 압니다."

바르트가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는 무엇을 하든 기한을 먼저 정하는 사람이었다.
"언제까지 같은 방향이오."
"답이 나올 때까지입니다."
"안 나오면."
"안 나올 리가 없습니다."
오벨이 가방 끈을 고쳐 쥐었다.
"십오 년 동안 남이 묻는 걸 조항으로 답해 왔습니다. 조항이 없으면 비슷한 것을 찾았고 그것도 없으면 해석을 붙였습니다. 그 일을 오래 하면 알게 되는 게 하나 있는데, 답이 없는 질문은 대개 질문이 틀린 겁니다. 오늘 건 안 틀렸습니다."
"그거 하나 때문에."
"하나면 충분합니다."
"찾으면 어쩔 거요."
"돌아갑니다."

그 말에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여태 듣기만 하고 있었다.
"돌아가면 나는."
오벨이 켈리 쪽을 보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답 만들면 돌아간다며.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데."

오벨이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두 번째였다.

그는 방금 자기가 한 말을 속으로 다시 들어 보았다. 들어 보니 그 안에 이 아이가 들어 있지 않았다. 질문만 들어 있었다. 질문은 그가 가져갈 것이고 답도 그가 만들 것이며 그러고 나면 그는 타르실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 순서 어디에도 그 질문을 한 사람의 자리는 없었다. 십오 년 동안 그는 일을 그렇게 다뤄 왔다. 사람으로 보지 않고 건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었다.

"…그건 그때 가서 정하겠습니다."
"그것도 조항으로 정해?"
"아마도요."

바르트가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말할 근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근거를 못 찾은 것은 그날 세 번째였다.

넷이 서쪽 문으로 나갈 때 켈리가 오벨에게 물었다.
"아저씨 글씨 잘 써?"
"…예. 그럭저럭."
"나 못 써."
"읽으신다면서요."
"읽어. 쓰는 건 안 배웠어."
오벨이 걸음을 한 박자 늦췄다. 그는 그 말의 뜻을 아까보다 빨리 알아들었다. 읽기만 가르치고 쓰기를 안 가르치는 데가 어디인지, 그리고 왜 그렇게 하는지를 그는 알고 있었다. 벨류엔에서 태어났으므로 알았다.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얼마 줘야 돼."
오벨이 대답하려다 멈췄다. 방금 자기가 한 말에 걸렸기 때문이다. 값을 받지 않고 무언가를 주면 그것은 선의가 되고, 선의로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좀 전에 세 번 말했다.
"…열람료를 받겠습니다."
"그게 뭐야."
"제가 묻는 것에 대답해 주시는 겁니다. 한 번 가르칠 때 한 번씩이요."
"뭘 물어보는데."
"아직 모릅니다. 정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켈리가 그 조건을 따져 보았다. 대답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았다. 켈리가 가진 것 중에 값이 붙은 것은 하루 5돈짜리 먹는 양뿐이었고 그것과는 상관없는 조건이었다.
"어."
"그럼 정해진 겁니다."

오벨이 잠깐 뒤에 한마디를 덧붙였는데, 방금 없던 값을 하나 만들어 붙여 놓고 하는 말이었으므로 켈리에게 한 말이라기보다 자기에게 한 말에 가까웠다.
"값이 안 붙는 것도 있어야죠. 그게 없으면 다들 미칩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수첩을 꺼냈다. 걸으면서 두 줄을 적었다. 켈리. 성 없음. 읽을 줄 알되 쓰지 못함. 그 아래에 한 줄이 더 붙었다. 열람료 — 문답 일 회 대 일 회.

십오 년 동안 그렇게 해 왔다. 오늘 만난 사람을 적어 두지 않으면 어느 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기 때문이었고, 그것이 그가 지불해 온 값이었다. 값을 치르는 데 불만은 없었다. 다만 그 줄을 적는 손이 평소보다 한 박자 느렸는데, 이유는 방금 자기가 답하지 못한 질문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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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에 얼마


능선을 넘고 사흘이 지났다.

첫날은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폐허 분지에서 남서로 빠지는 비탈에는 짐승이 다닌 자국뿐이었고 그마저도 녹다 만 눈에 덮여 자주 끊겼다. 바르트는 자국이 끊긴 자리마다 잠깐 서서 땅을 들여다보고는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내렸다. 켈리가 보기에 그 결정에는 아무 근거가 없었다. 물어보지는 않았다. 앞선 사람이 가는 쪽으로 가는 일이라면 열두 해 동안 해 왔으므로 새로 배울 것이 없었다.

둘째 날 오후에야 수레바퀴 자국이 난 길이 나왔다. 바퀴 폭이 넓고 자국이 깊은 것을 보면 짐수레가 여러 번 지나간 길이었다. 바르트는 그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주저앉더니 한참 숨을 골랐다. 그는 켈리보다 훨씬 크고 훨씬 느렸다.

"여기서부터는 사람 다니는 데야."
"그래서."
"그래서 짐을 다시 싸야지."
바르트가 배낭을 풀어 안에 든 것을 길바닥에 늘어놓았다. 병이 여섯, 천으로 싸맨 주머니가 아홉, 집게와 작은 망치와 쇠붙이 몇, 담요 두 장, 부싯돌, 소금 자루, 마른 빵, 말린 고기 한 줌, 그리고 노트. 노트는 맨 위에 따로 놓았다. 비가 오면 그것부터 품에 넣는다는 것을 켈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바르트가 그중에서 담요 두 장과 빈 냄비와 주머니 세 개를 골라 켈리 쪽으로 밀었다.
"자네가 이거 들어."
켈리가 그것들을 한데 모아 들어 보았다. 한 손으로 들렸다. 들린다는 것을 넘어서 가볍다는 느낌까지 왔고, 가볍다는 느낌이 오는 순간 속이 불편해졌다. 켈리는 그것을 다시 내려놓고 바르트가 남겨 둔 쪽을 건너다보았다. 병 여섯 개와 연장 전부가 거기 있었다.
"적어."
"적지."
"더 줘."
"안 돼."
"왜."
바르트가 자기 몫을 배낭에 도로 넣기 시작했다. 병을 넣을 때는 사이사이에 천을 끼워 서로 부딪히지 않게 했다. 그 동작이 어찌나 느리고 정확한지, 켈리는 보고 있는 동안 두 번쯤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자네 지금 47이야."
"그게 뭐."
"자네 무게. 어제 쟀잖아."

쟀다. 어제 저녁에 바르트가 나뭇가지와 노끈으로 이상한 물건을 만들어 켈리를 거기 매달았다. 켈리는 그것이 저울인 줄 알았고 실제로 저울이었다. 벨류엔의 저울과 생김새는 전혀 달랐으나 하는 일은 같았다. 다른 점이 딱 하나 있었는데, 벨류엔에서는 숫자가 올라가면 안 되는 것이었고 어제는 바르트가 숫자를 보더니 만족한 얼굴을 했다는 것이었다. 켈리는 그 차이를 사흘이 지나도록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47이면 절반이 23이고, 오래 걸을 거면 그 절반쯤이 맞아. 그 이상 지면 무릎이 먼저 나가."
"나 30 지고 달렸어."
"얼마나."
"매일."
바르트가 병을 넣던 손을 멈추고 켈리를 보았다. 한참 보았다. 켈리는 그 시선이 무엇을 재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재고 있다는 것만 알았으므로 등을 조금 폈다. 무엇을 재는지 모를 때는 자세를 바로 하는 편이 낫다는 것도 열두 해가 가르쳐 준 것 중 하나였다.
"그래서 지금 47이지."
켈리는 그 말의 앞뒤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몰랐다. 다만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이 사람이 자주 한다는 데에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켈리가 다시 자기 몫을 내려다보았다. 담요 두 장과 냄비와 주머니 세 개. 아무리 봐도 적었다.
"덜 지면 덜 받잖아."
"뭘 덜 받아."
"밥."

바르트가 배낭 끈을 조이다 말고 켈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노트를 꺼내 숯 조각으로 한 줄을 적었다. 켈리는 그가 무엇을 적는지 보려고 목을 뺐으나 각도가 나오지 않았다. 한 줄을 적고 나서 바르트는 노트를 덮더니, 자기 짐에서 빈 자루 두 개를 꺼내 켈리 쪽 더미 위에 얹었다. 자루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부피만 컸다.
"이것도 자네가 들어."
켈리가 그것을 들어 보았다. 무게는 거의 그대로인데 덩치가 커졌다. 등에 묶고 일어서서 몇 걸음 걸어 보니 등판이 꽉 찬 느낌이 났다. 그제야 속이 편해졌다.
"됐어?"
"어."
바르트가 무릎을 짚고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켈리는 빈 자루 두 개를 등에 지고 그 옆을 따라 걸었다.

마을이 보인 것은 사흘째 한낮이었다. 먼저 보인 것은 표지판이었다. 길이 갈라지는 자리에 나무 기둥이 서 있고 가로판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기둥은 기울어지지 않았고 가로판도 떨어지지 않았다. 글자는 파낸 자리에 검은 칠을 덧입혀 놓아 멀리서도 읽혔다. 켈리가 걸음을 늦추고 그것을 읽었다. 베렐. 한 시간. 지나가면서 고개를 돌려 기둥 뒤쪽을 보았다. 기둥 뒤에는 완만한 내리막이 있었고 내리막 끝에 지붕들이 있었다. 회색 지붕과 짚 지붕이 섞여 있었으며 그중 몇 군데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중이었다. 담이 있고 담 안에 집이 있고 집에 지붕이 있었다.

표지판 아래에 마을이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처음 보았다. 회랑에서 삼 년을 보내는 동안 표지판은 수십 번 지나갔고 그 뒤에는 한 번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이 남고 마을이 없는 것, 그것이 켈리가 아는 표지판의 정의였다. 그래서 켈리는 그 앞에서 잠깐 멈춰 서 있었고, 열 걸음쯤 앞서 가던 바르트가 돌아보았다.
"왜."
"아니."
켈리가 따라붙었다. 내리막을 내려가는 동안 지붕이 점점 커졌고 어느 순간 소리가 났다. 사람 소리였다. 자기가 사람 소리를 오래 듣지 못했다는 것을 켈리는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알았다. 마을 어귀에서 바르트가 멈춰 서더니 켈리 쪽으로 손을 뻗어 외투 앞섶을 여며 주었다. 단추 세 개를 위에서부터 차례로 채우고, 한 발 물러나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다.
"됐다."
"뭐가."
"안 보여."
켈리가 자기 가슴 쪽을 내려다보았다. 기름 얼룩이 진 두꺼운 갈색 천뿐이었다.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는 켈리만 알았다.

마을에 들어서자 흙길이 넓어지고 양옆으로 좌판이 늘어섰다. 장이 서는 날인 모양이었다. 늦겨울의 장이라 물건이 많지는 않았다. 무와 마른 콩과 절인 것들, 겨울을 난 사과 몇 바구니, 나무 그릇, 가죽끈, 대장간에서 나온 낫과 쇠못. 사람들은 두껍게 입고 손을 비비면서 좌판 사이를 오갔고 값을 두고 서로 뭐라고 주고받았는데,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지는 품이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 사이를 걸으면서 켈리는 한 가지를 알아차렸다. 아무도 자기를 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이 켈리에게 닿았다가 그냥 지나갔다. 멈추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일도 없었고 아이를 안으로 들이는 사람도 없었다.

베렐은 벨류엔 국경에서 남서로 엿새 거리에 있었고, 그 엿새가 이 마을의 성격을 전부 결정했다. 회랑은 여기까지 닿지 않았다. 남색 로브가 마지막으로 지나간 것이 이십 년 전이라 젊은 사람들은 그 색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예 몰랐고, 나이 든 사람들은 알면서도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켈리가 지금 걸치고 있는 것은 기름 얼룩이 진 갈색 외투였다. 그러므로 켈리는 그날 마른 여자애 하나로 그 장을 지나갔고, 그것은 켈리가 열두 해 만에 처음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본 경험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그런 말로 정리하지 못했다. 다만 사람들이 자기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만 알아차렸고,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은 채로 걷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켈리가 아는 바깥은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사라지는 곳이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지 않았고 그래서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러다 냄새를 맡았다. 길 안쪽에 천막을 반쯤 친 좌판이 있었고 그 뒤에 화덕이 있었다. 화덕 위 철판에 둥근 빵이 줄줄이 얹혀 있었다. 갈색으로 구워진 것과 아직 흰 것이 섞여 있었으며 표면에 기름이 발려서 빛났다. 화덕에서 나온 김이 찬 공기에 닿아 흰 기둥을 만들었다가 흩어졌다. 켈리는 그 앞에서 멈췄다. 배가 고팠다. 고픈 것에는 익숙했으므로 그것 자체는 특별하지 않았다. 다만 눈앞에 빵이 있고 그것이 줄지어 있고 아무도 그 앞에 줄을 서 있지 않다는 것이 켈리를 붙잡아 세웠다. 배급 줄이 없는 배급은 켈리가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켈리가 손을 뻗어 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줄의 맨 앞에 서면 손을 내밀고, 얹어 주면 받고, 받으면 옆으로 비킨다. 열두 해 동안 하루에 세 번씩 한 동작이었다. 빵이 따뜻했다. 켈리가 그것을 손바닥에 올린 채 옆으로 한 걸음 비켰고, 좌판 주인이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리의 크기와 방향만 알 수 있었고, 그 방향이 자기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켈리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등이 펴지고 턱이 당겨지고 시선이 정면보다 약간 아래로 내려갔다. 두 발이 모였다. 열두 해 동안 혼나는 소리가 날 때마다 취하던 자세였다. 지금 그 소리를 낸 사람은 집검관이 아니라 앞치마를 두른 중년 남자였고 켈리도 그 차이를 알았는데, 알면서도 자세를 풀 수가 없었다. 켈리가 빵을 철판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그런데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몰랐다.

좌판 주인이 좌판을 돌아 나와 켈리의 팔을 잡았다. 외투 소매 위로 잡은 것이었고 세게 잡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잡혔다. 잡히는 순간 오른팔 안쪽에서 무언가가 밀려 올라왔다. 벨류엔의 교범은 그것을 강화의 예비 단계라 불렀고 마법청의 서기들은 단계마다 번호까지 매겨 두었으나, 켈리는 그 이름을 배운 적이 없었다. 켈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어깨까지 다 올라오고 나면 팔이 가벼워진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가벼워진 팔로 잡은 것을 떼어 내면 되는데, 떼어 낸 다음에 그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는 여태 확인해 본 적이 없었다. 확인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만 써 왔기 때문이다. 켈리가 숨을 멈췄다.

"놔 주쇼."
바르트의 목소리였다. 그가 좌판 옆에 와 서 있었다. 덩치가 커서 서 있는 것만으로 좌판 앞이 좁아졌다.
"이거 댁 일행이오?"
"그렇소."
"집어 갔소."
"봤소."
바르트가 켈리의 팔을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좌판 주인이 손을 놓았다. 켈리의 팔에서 감각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빠져나가면서 손끝이 저렸다.

그 저림이 가실 때까지 켈리는 아무 데도 보지 않았다. 팔 안쪽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가 쓰이지 못하고 도로 가라앉을 때 손끝이 저리다는 것을, 켈리는 열두 해 동안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올라온 것은 언제나 쓰였기 때문이다. 표적 앞에서 올라왔고 표적을 향해 나갔으며 나가고 나면 며칠이 사라졌다. 올라온 것을 도로 내려보내는 일에는 이름조차 없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켈리가 방금 한 번 했다.

바르트가 허리춤에서 천 주머니를 꺼내 끈을 풀었다. 주머니를 한쪽 손바닥 위에 기울이자 그 안에서 작고 납작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동전이었다. 구리색이었고 손톱만 했고 한쪽 면에 뭔가가 새겨져 있었다. 바르트가 그중 두 개를 골라 좌판 위에 놓았다. 소리가 났다. 딱, 딱. 좌판 주인이 그 두 개를 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아까 켈리가 내려놓은 빵을 집어서 종이에 싸더니 바르트에게 내밀었다. 얼굴이 조금 전과는 딴사람처럼 달라져 있었다.
"두 개 사면 하나 더 얹어 주오."
"그럼 두 개 주쇼."
바르트가 동전 네 개를 더 놓았다. 주인이 빵 세 개를 쌌다.

마을 끝 돌담에 걸터앉아 켈리가 빵을 먹었다. 겉이 단단하고 속이 부드러웠으며 안쪽에서 소금 맛이 났다. 켈리는 그것을 세 입에 먹었다. 먹고 나서 손바닥에 남은 부스러기를 혀로 핥았다. 바르트는 남은 빵 세 개를 무릎에 올려놓고 동전을 한 줄로 늘어놓았다가 쓸어 담았다가 다시 늘어놓으며 세고 있었다.
"아저씨."
"응."
"이게 빵이야?"
바르트가 세던 손을 멈췄다.
"뭐가."
켈리가 좌판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가 바르트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저거. 그거 주니까 빵 줬잖아. 그럼 그게 빵이야?"
바르트가 동전 하나를 집어서 켈리에게 내밀었다. 켈리가 받았다. 얇고 차가웠다. 뒤집어 보니 한쪽 면에 배 모양이 새겨져 있고 반대쪽에 숫자가 있었다. 가장자리가 닳아서 무늬가 뭉개져 있었다.

"이게 빵 값이야."

"값."
"빵 하나에 이게 둘. 그러니까 이건 빵 반쪽이지."
켈리가 그 동전을 손바닥 위에 놓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반쪽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냄새도 안 나고 따뜻하지도 않았다.
"먹을 수 있어?"
"없지."
"그럼 왜 줘."
"저 사람이 저걸로 밀을 사거든. 밀 사서 빵을 또 굽고, 구운 걸 또 팔고, 팔아서 또 밀을 사고. 그렇게 돌아가는 거야."
켈리가 동전을 바르트에게 돌려주고 두 손을 무릎에 놓았다. 돌려주면서 손바닥에 남은 자국을 한 번 들여다보았다. 오래 쥐고 있었던 탓에 동그란 자리가 눌려 있었다. 그 자국은 금방 사라졌는데, 저울에 오래 매달려 있다가 내려왔을 때 겨드랑이에 남던 자국도 그런 식으로 사라지곤 했다.
"누가 정해."
"뭘."
"둘. 빵 하나에 둘. 누가 정했어."
바르트가 빵 한 개를 반으로 갈라 한쪽을 켈리에게 건넸다. 켈리가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정하지. 밀값이 오르면 올리고, 옆 좌판이 싸게 팔면 내리고. 그러다 너무 올리면 아무도 안 사니까 다시 내려."
"안 내면?"
"뭘."
"값. 안 내면 어떻게 돼."
"뺏기지. 아니면 쫓겨나고. 아까 자네 팔 잡은 거, 그거야."

켈리가 씹던 것을 삼켰다. 그러고 나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바르트는 재촉하지 않고 남은 빵을 종이에 다시 쌌다.

그동안 켈리가 한 것은 셈이었다. 하루에 세 번, 한 해가 삼백예순 날 남짓, 그것이 열두 해. 숫자가 커지자 손가락이 모자랐고 켈리는 도중에 몇 번 자리를 놓쳤다가 처음부터 다시 셌다. 만이 넘어갔다. 만이라는 수를 켈리는 배급 문서에서 본 적이 없었다. 벨류엔의 문서에 나오는 숫자는 대개 수십이었고 많아야 수백이었으며 그보다 큰 수는 쓸 일이 없었으므로, 켈리에게 만이란 이름만 있고 크기가 없는 수였다. 그 수만큼 받아먹은 것에 값이 붙어 있다면 그 값은 켈리가 아는 어떤 물건보다도 컸다.

"나는 안 냈는데."
"안 냈지."
"근데 여섯 살 때부터 매일 받았어. 하루에 세 번."
바르트가 빵을 싸던 손을 멈췄다. 멈추고 나서도 켈리 쪽을 보지 않았다. 종이의 접힌 자리를 손가락으로 두 번 눌렀다.
"그랬겠지."
"그럼 그건 값이 없는 거야?"
"아니."
"그럼."
"값이 없는 게 아니고, 자네가 안 낸 거야."
켈리가 바르트를 보았다. 바르트는 여전히 종이만 보고 있었다.
"그럼 누가 냈는데."
바르트가 빵 꾸러미를 배낭에 넣고 끈을 묶었다. 묶고 나서 일어섰다.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
"가자. 해 지겠다."

그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몰라서가 아니었다. 벨류엔이 마법사를 어떻게 길러 내는지 그는 대강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는데, 그가 아는 쪽은 쇠를 다루는 일이지 사람을 다루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십수 년을 여러 나라의 길 위에서 보내다 보면 어떤 종류의 값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으로 치러진다는 것쯤은 저절로 알게 된다. 그가 입을 다문 것은 자기가 아는 만큼만 말했다가 그 아이가 그것을 전부라고 믿어 버릴까 싶어서였다. 반쯤 아는 사람이 해 주는 설명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세계의 모양을 정해 버린다. 그는 북쪽 작업장에서 그런 일을 여러 번 저질렀고, 저지르고 나면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것도 거기서 배웠다.

그날 밤은 마을 바깥의 헛간에서 잤다. 여관이 하나 있었는데 바르트가 값을 묻더니 그냥 나왔다. 하룻밤에 5돈이라고 했다. 그 대신 마을 끝 농가에 가서 헛간 한쪽을 빌렸고 그 값은 1돈이었다. 짚이 두껍게 깔려 있었고 벽 한쪽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으나 바닥이 젖지 않았다. 켈리는 삼 년 동안 잔 곳 중에 그보다 나쁜 데가 여럿 있었다고 생각했다.

바르트가 초 한 자루를 켜고 노트를 폈다. 켈리는 담요를 무릎에 덮고 그 옆에 앉아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목을 빼지 않아도 보였다. 바르트가 옆자리를 비워 두었기 때문이다. 글자는 읽을 수 있었다. 어려운 글자가 아니었다. 마법청은 켈리에게 번호와 보급 수량과 소속 표기를 읽을 만큼은 가르쳤고, 바르트가 노트에 적는 것도 대개 그 정도 수준이었다.
빵 넷. 6돈.
소금 한 자루. 3돈.
헛간. 1돈.
합 10돈.
남음 36돈.

켈리가 그 숫자를 보고 나서 앞 장을 넘겼다. 바르트가 말리지 않았다. 앞 장에도 비슷한 줄들이 있었고 맨 아래에 남음이라는 글자와 숫자가 있었다. 46이었다. 그 앞 장도 46이었고 그 앞 장도 46이었다. 폐허에 있는 동안에는 쓸 일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켈리가 손가락으로 46에서 36으로 이어지는 자리를 짚었다.
"줄었어."
"줄었지."
"왜."
"썼으니까."
"이거 다 쓰면."
"더 못 사지."

켈리가 노트에서 손을 뗐다. 짚 위에 손바닥을 짚고 몸을 조금 뒤로 기울였다. 헛간 서까래에 거미줄이 있었고 초의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거미줄 그림자도 따라 흔들렸다.
"아저씨는 뭐 팔아."
"쇠붙이. 폐허에서 캔 거."
"저기서 팔면 되잖아."
"저기선 값이 안 나와. 그냥 쇠로밖에 안 쳐 주거든. 그걸 아는 사람한테 팔아야 값이 붙지."
"그게 어딘데."
"항구."
바르트가 초를 손으로 가려 심지를 조금 세웠다. 불이 밝아졌다.
"타르실이라고. 배 들어오는 데야. 거기까지 가야 돼."
"멀어?"
"걸어서 보름."
켈리가 셈을 했다. 숫자를 더하고 빼는 것은 배급 수량을 확인할 줄 알아야 했으므로 마법청이 가르친 것 중 하나였고, 켈리가 가장 잘하는 것이기도 했다.
"모자라."
"오늘은 소금 샀으니까 많이 쓴 거고. 앞으로는 하루 6돈에서 7돈쯤일 거야."
"그럼 닷새."
"그쯤."
바르트가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은 아니었지만 켈리는 그가 왜 웃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셈은 빠르네."

켈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하루에 6돈에서 7돈. 그건 둘이 쓰는 것이었다. 그러면 하나가 쓰는 것은 그 절반쯤일 텐데, 자기가 바르트보다 더 먹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바르트는 아침에 빵 반 개를 먹고 그만두었다.
"나 얼마야."
바르트가 초 심지에서 손을 뗐다.
"뭐가."
"하루에. 내가 먹는 거."
바르트가 노트를 앞으로 몇 장 넘겼다. 폐허에 있던 동안 적어 둔 쪽이었다. 거기에는 날짜마다 켈리가 먹은 것이 적혀 있었다. 무엇을 몇 번. 바르트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입속으로 뭔가를 세었다.
"자네 혼자 5돈쯤. 나보다 많이 먹어."

켈리가 그 숫자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것이 자기에게 붙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울의 47처럼 붙어 있었는데, 저울의 숫자와 달리 이쪽은 날마다 새로 생겨났다.
"내가 안 먹으면."
"그럼 돈은 남지."
"그럼 안 먹을게."
바르트가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켈리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짚이 눌리는 소리가 났다.
"안 먹으면 돈은 남고, 대신 자네가 줄어. 그것도 어디로든 가는 거야. 없어지는 게 아니고."
"어디로 가는데."
"그건 나도 몰라."
바르트가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손깍지를 꼈다.
"근데 하나는 알아. 이 세상에 공짜로 없어지는 건 없어. 자네가 안 내면 누가 내는 거고, 아무도 안 내는 것 같으면 그건 안 내는 게 아니라 내가 누가 내는지 모르는 거야."

켈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며칠 전 분지에서 들은 말과 같은 말이라는 것만은 알아들었다. 그때는 잉여가 어디로 가느냐는 이야기였고 지금은 빵값 이야기인데, 바르트는 그 둘을 같은 얼굴로 말했다. 바르트가 초를 껐다. 헛간이 어두워지고 벽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짚 끝을 흔들었다. 켈리는 담요를 턱까지 끌어 올리고 누워서 눈을 뜬 채로 서까래 쪽을 보았다. 거미줄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데도 거기 있다는 것은 알았다. 조금 전까지 불빛 아래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켈리는 그 생각을 하다가 낮에 들은 말 하나가 같은 모양이라는 데에 닿았다. 누가 내는지 모르면 아무도 안 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어두워지면 거미줄이 없어 보이는 것과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갔으나 그다음으로는 가지 못했다. 그다음으로 가려면 누가 내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했고, 그것은 오늘 물었다가 대답을 못 받은 것이었다. 켈리는 대답을 못 받은 질문을 두 번 묻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켈리가 그날 배운 말은 값 하나였다. 그 말이 빵에도 붙고 소금에도 붙고 헛간 바닥 짚 한 줌에도 붙는다는 것을 그날 알았고, 자기에게도 하루 5돈씩 붙어 있다는 것까지 알았다. 다만 그 값을 여태 누가 대신 내 왔으며 그 대가로 무엇을 가져가기로 되어 있었는지를 알게 되는 데는, 그로부터 한참이 더 걸렸다.

 

다섯 개의 이름


베렐을 떠난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농가 주인이 헛간 문을 열어 주면서 남서쪽 길 사정을 일러 주었다. 사흘쯤 내리막이 이어지고 그 끝에 갈림길이 있는데 가운데로 가면 여울을 두 번 건너야 하니 왼쪽으로 붙으라고 했다. 바르트가 고맙다고 하면서 어제 산 소금을 한 줌 덜어 주었다. 주인이 사양했고 바르트가 다시 밀었고 주인이 받았다. 그 주고받는 동작이 세 번쯤 오갔다. 사양하고 다시 밀고 마지못한 척 받는 그 절차에는 이름이 있었고, 대륙 어디를 가나 형태만 조금씩 다를 뿐 같은 것이 있었으며, 아이들은 대개 예닐곱 살 무렵에 어른들을 보고 그것을 익힌다. 켈리는 익힌 적이 없었다. 켈리가 본 것은 세 가지가 한자리에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소금에는 3돈이라는 값이 붙어 있었고, 값이 붙은 것을 아무 대가 없이 덜어 주는 일이 있었으며, 주는 쪽과 받는 쪽이 한 번씩 미루는 순서가 있었다. 그 셋이 어떻게 한자리에 같이 있을 수 있는지를 켈리는 알 수 없었다. 물어보려다가 바르트가 이미 걷기 시작했으므로 따라갔다.

길은 이틀 내내 완만한 내리막이었다. 겨울이 끝나 가는 중이라 눈은 그늘진 자리에만 남아 있었고, 녹은 물이 길 가장자리로 흘러 가느다란 도랑을 만들었다. 물소리가 계속 오른쪽에서 났다. 켈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걷는 것 자체는 힘들지 않았다. 힘든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켈리는 걸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이상한 말 같지만 사실이었다. 육성소에서는 대형을 맞춰 이동했고 전선에서는 행군하거나 달렸다. 대형은 앞사람의 뒤통수를 보고 보폭을 맞추는 일이었고, 행군은 정해진 시각까지 정해진 지점에 닿는 일이었으며, 달리기는 뒤를 보지 않는 일이었다. 셋 다 걷는 것과는 달랐다. 그냥 어딘가로 가면서 옆 사람과 속도를 맞추고 도중에 서고 싶으면 서는 것, 그런 식의 이동을 켈리는 열여덟 해 만에 처음 해 보는 중이었고,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바르트는 느렸다. 켈리가 평소 속도로 걸으면 백 보쯤 만에 뒤가 비었고, 그러면 켈리는 멈춰 서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서 있었다. 열두 해 동안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줄을 서서 하는 것이었고 줄에는 반드시 앞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앞사람이 뒤에 있었다. 켈리는 그 구조를 처음 겪어 보았고, 겪는 동안 자기 발끝을 자주 내려다보았다.

바르트가 느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무릎이었다. 왼쪽 무릎이 오르막에서는 그럭저럭인데 내리막에서 말을 듣지 않았고, 그래서 내리막일수록 더 느려졌다. 사흘째 저녁에 켈리가 그것을 물었다. 바르트가 바지를 걷어 무릎을 보여 주었는데 한쪽이 다른 쪽보다 눈에 띄게 굵었다. 만져 보라고 해서 만져 보니 안에 딱딱한 것이 들어 있었다. 뼈는 아니었다. 뼈는 그렇게 둥글지 않았다.
"이것도 대가야?"
"이건 계량 잘못한 거고."
"뭐가 달라."
"안 달라. 그냥 내가 못한 거지."
"못하면 더 와?"
"더 오지. 정확히 맞추면 안 오고."
켈리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잘못하지 않으면 대가가 안 온다는 뜻이었는데, 켈리가 아는 대가는 잘하고 못하고와 상관없이 왔다. 열일곱 번을 다 제대로 해냈어도 손은 매번 두 시간씩 굳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치르는 값과 자기가 치르는 값은 다른 종류인 모양이었다. 어떻게 다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둘의 차이는 실은 간단했다. 바르트가 치르는 것은 실수의 값이었고 켈리가 치르는 것은 존재의 값이었다. 실수는 줄일 수 있고 존재는 줄일 수 없다. 켈리가 그 구분에 이름을 붙이게 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며, 붙이고 나서도 그것을 남에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사흘째부터 켈리는 조금씩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다. 다만 멈춰 서서 기다리는 것보다 처음부터 천천히 걷는 편이 덜 이상했고, 그 편이 덜 이상하다는 것을 켈리가 스스로 알아냈다. 바르트는 그것을 알아차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노트에 한 줄이 늘었을 뿐이었다.

갈림길은 사흘째 오후에 나왔다. 길이 세 갈래로 갈렸고 어느 쪽에도 표지판이 없었다. 바르트가 잠깐 서서 해를 보더니 왼쪽 길로 들어섰다. 왼쪽은 남서쪽이었다. 처음부터 계속 그랬다.
"왜 맨날 저쪽이야."
"북쪽에는 내가 못 가."
"왜."
바르트가 대답하지 않고 걸었다. 켈리는 더 묻지 않았다. 묻지 말아야 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대답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시 묻는 방법을 몰라서였다. 열두 해 동안 대답하지 않는 쪽은 언제나 가르치는 쪽이었고, 가르치는 쪽에 두 번 묻는 일은 없었다.

그날 밤 켈리는 그 말을 한 번 더 생각했다. 못 간다는 것은 가는 방법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가면 안 된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켈리가 아는 못 간다는 것은 전부 두 번째였다. 가면 안 되는 데가 있었고 가면 안 되는 시각이 있었고 가면 안 되는 이유는 알려 주지 않았다. 바르트가 말한 못 간다가 어느 쪽인지 켈리는 알 수 없었다. 물어보면 알 수 있을 텐데 물어보는 방법을 몰랐고,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 요즘 들어 자꾸 걸렸다. 전에는 걸린 적이 없던 일이었다.

나흘째 낮에 둘은 볕이 드는 바위에 앉아 쉬었다. 남쪽으로 트인 비탈이라 바람이 없었고 흙이 마르기 시작한 오후였다. 바위가 미지근했다. 바르트가 마른 빵을 반으로 갈라 한쪽을 켈리에게 주었고 켈리는 그것을 받아 먹기 시작했다. 저쪽 비탈에서 새가 두 번 울었다. 같은 간격으로 두 번이었고, 조금 있다가 또 두 번이었다.

켈리가 빵을 다 먹고 손바닥을 털었다. 그러고 나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려다가 말았고 다시 열려다가 말았다. 물어보는 일에는 순서가 있었다. 육성소에서는 손을 들고 호명을 기다린 다음 물었고, 물을 수 있는 항목은 정해져 있었으며, 정해지지 않은 것을 물으면 대답 대신 다른 것이 돌아왔다. 전선에서는 아예 손을 들지 않았다. 지금 옆에 앉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한 적이 없었고 항목을 정해 준 적도 없었는데, 정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켈리에게는 오히려 어려웠다. 어디까지가 물어도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긴 어느 나라야."

바르트가 씹던 것을 멈췄다.

켈리가 무언가를 물은 적은 여러 번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물은 것은 전부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이게 빵이냐, 값이 뭐냐, 다 쓰면 어떻게 되느냐. 손으로 짚을 수 있는 것들이었고 대답도 손으로 짚어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눈앞에 없는 것을 물은 것은 처음이었다. 바르트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알아차렸다는 표시를 내지는 않았다. 표시를 내면 다음부터 묻지 않을 것 같아서였는데, 그런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로서는 낯선 일이었다. 그는 평생 사람보다 물건을 많이 다뤘고, 물건은 이쪽이 어떤 얼굴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바르트가 남은 빵을 종이에 싸서 품에 넣었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발치의 젖은 흙을 손바닥으로 몇 번 쓸어 고르고, 옆에 떨어진 마른 막대기를 하나 주웠다. 무릎이 좋지 않은 사람이 쪼그려 앉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앉고 나서 한 번 더 자세를 고쳤다.
"자네 지금 글자 읽지."
"읽어."
"어디까지."
"번호. 수량. 소속."
"그럼 됐네."
바르트가 막대기 끝으로 고른 흙 가운데에 긴 줄을 하나 그었다. 줄은 비뚤었고 길었다. 한 번 긋고 나서 끝을 조금 더 늘였다.
"여기가 회랑이야."

켈리가 그 줄을 보았다. 자기가 삼 년을 산 곳이 흙 위의 손가락 두 마디였다. 그 두 마디 안에 베르단이 있고 카인 북단이 있고 하렌 방면이 있었다. 이름만 남은 땅들이 전부 거기 들어 있었다. 켈리는 그 땅을 걸어서 가로지르는 데 이틀이 걸린다는 것을 알았고, 폭으로는 열다섯 킬로미터쯤 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손가락 두 마디가 열다섯 킬로미터라면 이 흙바닥은 어느 정도인지 계산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나눌 숫자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척도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실제 거리와 그려진 거리 사이에 정해진 비율이 있고 그 비율을 알면 종이 위의 한 뼘에서 걸어야 할 날수를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켈리는 몰랐다. 모르는 편이 마땅했다. 지도는 벨류엔에서 마법사에게 지급되는 물품이 아니었고, 지급되지 않는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자기가 선 자리를 전체 안에서 짚을 수 있게 되면 그다음에 하게 되는 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마법청은 알았고, 그래서 켈리의 손에는 열두 해 동안 어떤 지도도 쥐여지지 않았다.

바르트가 줄 위쪽에 넓은 모양을 그렸다. 크게 그렸다. 막대기가 두 번 왔다 갔다 하고서야 테두리가 닫혔다.
"여기가 자플랜."
그리고 줄 아래 오른쪽에 또 하나를 그렸다. 위쪽 것보다 뚜렷하게 작았다.
"여기가 벨류엔."
켈리가 두 개를 번갈아 보았다.
"자플랜이 더 크네."
"훨씬 크지."
"얼마나."
"땅으로는 네 배쯤. 사람으로는 그보다 더 되고."
"근데 왜 못 이겨."
바르트가 막대기로 아래쪽 모양을 두 번 두드렸다.
"저쪽은 사람이 많고, 이쪽은 사람 하나가 사람 백을 하니까."

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 하나가 사람 백을 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켈리는 알았다. 그것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았다. 백을 하려면 백만큼의 값을 내야 하고 값은 몸에서 나가고 몸은 한정되어 있었다. 열네 달이라는 숫자를 켈리가 들어 본 적은 없었지만, 들어 본 적이 없어도 막사에서 사람이 줄어드는 속도는 세어 볼 수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세어 본 적이 있었다. 세고 나서 다시는 세지 않았다. 켈리는 무릎 위에 놓은 손을 한 번 쥐었다가 폈다.

바르트가 막대기를 자플랜 안쪽으로 옮겼다. 오른쪽 위였다. 막대기 끝을 거기에 댔다. 대고만 있었다. 흙에 점이 하나 찍혔을 뿐 선은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가 막대기를 뗐고,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거긴 뭐야."
"없어."
"없어?"
"지금은 없어."
"전에는 있었어?"
바르트가 막대기로 다른 데를 가리켰다. 왼쪽 아래였다.
"이쪽 얘기부터 하자."
켈리가 그 점을 한 번 더 보았다. 점은 곧 마른 흙에 섞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바르트가 막대기를 왼쪽 아래로 가져갔다. 그리고 동그라미를 그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서로 붙지 않게 조금씩 떨어뜨려서 그렸다. 그리는 데 꽤 시간이 걸렸고 다 그리고 나서는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건 뭐야."
"나라."
"다섯 개?"
"다섯 개."

켈리가 아는 나라는 둘이었다. 하나는 자기가 속한 곳이고 하나는 쏘는 쪽이었다. 그 둘 말고 더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들어 본 적이 없으면 없는 것이라고 켈리는 여태 여겨 왔다. 세계의 크기를 자기가 들은 말의 크기로 재는 셈인데, 그 버릇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켈리 자신도 몰랐다. 마법청이 가르친 것은 번호와 수량과 소속과 명령이었다. 그 넷으로 열두 해가 돌아갔다. 나라의 수는 거기 없었다. 없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으니, 셋 이상을 알면 고를 수 있게 되고 고를 수 있게 되면 떠날 수도 있게 되기 때문이다. 둘만 아는 사람에게 세상은 여기 아니면 저기이고, 저기가 쏘는 쪽이라면 남는 것은 여기 하나뿐이었다.

바르트가 동그라미 안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흙에는 잘 써지지 않아서 획마다 두 번씩 덧그었다. 다 쓰고 나서 막대기로 하나씩 짚었다.
켈리가 그것을 읽었다. 소리를 내어 읽었다.
"아르베인. 로엔. 타르실. 드란. 실베인."
읽고 나서 한 번 더 읽었다. 입에 붙지 않았다. 처음 내 보는 소리들이었다. 회랑의 표지판에 적혀 있던 이름들은 전부 없어진 것의 이름이었는데, 흙바닥의 이 다섯은 아직 있는 것의 이름이었다. 있는 것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 보는 일이 그렇게까지 다르다는 것을 켈리는 그때 처음 알았다.

"어디로 가."
바르트가 세 번째 동그라미를 짚었다.
"여기. 타르실. 항구 있는 데."
"나머지는."
"로엔은 밀. 어제 먹은 거 그쪽에서 온 거야."
켈리가 로엔이라고 쓰인 동그라미를 보았다. 빵이 어디선가 오기는 했을 텐데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본 적이 없다기보다, 빵에 출처가 있다는 것 자체가 새로웠다. 육성소와 군대의 배식대에는 솥이 있었고 솥 안에 든 것이 어디서 실려 왔는지를 묻는 아이는 없었다. 묻는 항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 사람들은 뭐 해."
"밀 키우지. 그거 말고는 별로 안 해."
"그럼 그거 누가 다 먹어."
"여기저기 다 먹어. 위에도 가고 아래에도 가고."
바르트가 막대기 끝으로 로엔에서 자플랜 쪽으로 선을 하나 긋고, 다시 로엔에서 벨류엔 쪽으로 선을 하나 그었다. 두 선이 로엔에서 갈라져 나갔다.
"그러니까 저기를 굶기면 위아래가 같이 굶어. 그래서 아무도 저기는 안 건드려."
"안 건드리면 좋은 거 아니야?"
"좋지. 지금까지는."

바르트가 막대기를 옮겼다.
"드란은 산이고. 사람 파는 데야."
"사람을 팔아?"
"싸우는 사람. 돈 주면 가서 싸워 줘."
"누구 편으로."
"돈 준 쪽."
켈리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편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태어나면 정해지고 번호를 받으면 확정되며 그 뒤로는 바뀌지 않는다. 켈리는 자기 편을 고른 적이 없었고 고를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돈으로 정하는 사람들이 산속에 살고 있다고 했다. 편을 돈으로 정할 수 있다면 편이란 값이 붙는 물건이라는 뜻이고, 값이 붙는 물건이라면 켈리의 편에도 값이 붙어 있었을 것이었다. 그 값을 누가 치렀는지는 사흘 전 돌담에서 물었다가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 형제끼리 다른 편 될 수도 있어?"
바르트가 막대기를 들었다가 그대로 두었다. 대답이 조금 늦게 나왔다.
"되지."
"그럼 어떻게 해."
"모르겠어. 나는 산에 안 살아 봐서."

"실베인은 늪이야. 이상한 거 하는 사람 많고."
"이상한 거."
"자네 같은 거. 근데 방식이 달라."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마법사?"
"아니. 그건 아니야."
바르트가 뭐라고 더 설명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설명할 말을 고르는 얼굴이었는데 마땅한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막대기로 실베인 동그라미의 테두리를 한 번 덧그었다.
"자네 쪽은 힘을 밀어내는 거잖아. 저쪽은 뭐랄까, 빌리거나 걸거나 부르거나 그래. 규칙이 계통마다 다르고 하는 사람마다도 좀 달라. 나도 다 몰라."
"너도 그거야?"
"나는 또 다른 거고."
"그럼 몇 개야."
"여섯인가 일곱인가. 세는 사람마다 달라."
켈리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는 사람마다 다른 숫자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숫자는 하나였다. 스물셋은 어디서 세도 스물셋이었다.
"나중에 보면 알아."

켈리가 마지막 동그라미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는."
"아르베인. 기사 있는 데. 다섯 중에 제일 가난해."
"기사가 뭐야."
"칼 쓰는 사람. 말 타고. 규칙 많고."
"무슨 규칙."
"안 싸우기로 한 사람은 안 치고, 항복하면 안 죽이고, 뭐 그런 거. 지키는지는 모르겠다만."
켈리가 그 말을 들으면서 눈을 한 번 깜빡였다. 항복하면 안 죽인다는 규칙이 있다는 말이었다. 켈리가 아는 규칙 중에 누구를 안 죽이는 쪽으로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규칙은 전부 누가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하고 몇 시에 자는지를 정하는 것이었다.
"마법사는."
"없어."
켈리가 손을 뗐다.
"그럼 뭘로 싸워."

"안 싸워."

켈리가 바르트를 보았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바르트는 막대기 끝으로 흙을 긁고 있었고 딴 데를 보고 있지도 않았으므로,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다.
"안 싸워?"
"지금은 안 싸워."
"왜."
바르트가 막대기를 흙에 꽂았다.
"안 해도 되니까."

켈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싸우지 않아도 되는 상태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었는데, 켈리가 아는 세계에서 싸움은 날씨 같은 것이었다. 좋고 나쁨이 있을 뿐 있고 없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겨울에 눈이 안 올 수는 있어도 겨울이 안 올 수는 없었다. 켈리가 다섯 개의 동그라미를 다시 보았다. 다섯 군데 전부 눈이 안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건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태 그랬다는 뜻이기도 했다. 켈리가 저울에 올라가고 벌판을 돌고 열일곱 번 손을 드는 동안, 저 동그라미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밀을 키우고 배를 띄우고 말을 타고 다녔으며, 그중 누구도 켈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고 알아야 할 까닭도 없었다. 세상의 대부분은 켈리가 사는 방식으로 살지 않았다. 그것이 그날 오후 흙바닥 위에서 켈리에게 건네진 것이었고, 건넨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건네고 있는지 절반쯤만 알고 있었다.

"그럼 저기 애들은 뭐 해."
바르트가 막대기를 잡은 손을 멈췄다.
"뭐?"
"애들. 저기 애들은 뭐 해."
바르트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대답을 찾는 중이었는데, 켈리가 보기에는 둘이 같아 보였다.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새가 또 두 번 울었다. 바르트가 아는 대답은 여러 개 있었다. 밭에 나가고, 물을 긷고, 가축을 보고, 더러는 학교 비슷한 데에 가고, 대개는 그냥 놀았다. 그중 어느 것도 이 아이에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놀았다는 말을 하려면 논다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말해야 했다.

"그냥 살지."

"그냥?"
"응. 그냥."
켈리가 다섯 개의 동그라미를 보았다. 하나씩 보았다. 아르베인, 로엔, 타르실, 드란, 실베인. 그 안에 사람이 있고 그중에 켈리만 한 아이들이 있고 그 아이들은 아침에 저울에 올라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켈리는 저울에 올라가지 않는 아침이라는 것을 상상해 보려다가 실패했다. 재지 않으면 무엇으로 그날의 양을 정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지 않고 그냥 주는 것일까. 그럼 얼마나 주는 것일까. 얼마나 먹을지를 자기가 정하는 것일까. 마지막 생각까지 가고 나서 켈리는 그것을 그만두었다. 그 생각은 어제 바르트가 그릇을 밀어 주었을 때 켈리를 한참 앉아 있게 만든 것과 같은 종류였고, 같은 자리에서 또 막혔다.

바르트가 일어섰다. 무릎을 짚고 일어나면서 짧게 소리를 냈고, 짐을 메고, 막대기를 흙에 꽂아 둔 채 길 쪽으로 두어 걸음 옮겼다. 켈리는 아직 앉아 있었다.

켈리가 손을 뻗어 오른쪽 아래의 모양을 짚었다. 벨류엔이었다. 손가락 끝이 흙에 조금 묻었다.
"우리 어디 있어."
바르트가 돌아와서 막대기를 뽑아 들고, 회랑 아래쪽에서 왼쪽으로 조금 치우친 자리에 점을 하나 찍었다.
"여기."
켈리가 그 점을 보았다. 그리고 그 점과 벨류엔 사이를 보았다. 손가락 한 마디였다. 켈리는 열흘 가까이 걸었다. 하루에 몇 만 걸음씩 걸었고 발바닥이 두 번 까졌고 밤마다 다리가 아팠는데, 그게 손가락 한 마디였다.

가깝다고 켈리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다.

켈리가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는지 아닌지는 얼굴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같은 거리를 반대쪽에서 재는 사람들이 있었다. 벨류엔의 회수 담당자들은 지도를 펴 놓고 일한다. 사라진 자산이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를 지난 날수만큼 곱하고, 그 결과를 반지름 삼아 원을 그리고, 원 안에 든 마을들로 사람을 보낸다. 켈리가 열흘 동안 벌어 놓은 손가락 한 마디는 그 원 안에 넉넉히 들어가고도 남았다.

그러고 나서 켈리가 점과 타르실 사이를 보았다. 그쪽도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다섯 개의 동그라미는 전부 왼쪽 아래에 모여 있었고, 위쪽의 자플랜과는 회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며, 오른쪽 아래의 벨류엔과도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았다. 손을 펴면 셋이 다 덮였다.

켈리가 다섯 개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 세고 나서 한 번 더 세었다. 개수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달라진 것은 없었는데도 켈리는 그것을 세 번째로 세었고, 세면서 무엇을 확인하려는 것인지는 본인도 몰랐다.

"가자."
켈리가 일어섰다. 지도는 지우지 않았다. 지워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몰랐고, 바르트도 지우지 않았으므로 그냥 두었다. 걷다가 한 번 뒤를 돌아보았는데 비탈이 꺾여서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은 길에서 조금 벗어난 바위 밑에서 잤다. 바람을 막아 주는 자리를 바르트가 골랐고,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작게 피웠다. 크게 피우면 멀리서 보인다고 했다. 누가 보면 안 되느냐고 켈리가 물었더니, 안 되는 사람이 딱히 정해진 건 아니지만 보여서 좋을 일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켈리는 그 말이 맞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으나 불이 작은 것 자체는 좋았다. 작은 불은 오래 봐도 눈이 아프지 않았다. 바르트가 노트에 그날 몫을 적고 먼저 누웠다. 그는 눕자마자 잠들었다. 매번 그랬다. 켈리는 매번 그러지 못했다.

불이 잦아들 때까지 켈리는 앉아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얹고 불을 보았다. 그러다 오른손을 폈다. 그리고 엄지부터 하나씩 접었다. 엄지에서 아르베인, 검지에서 로엔, 중지에서 타르실, 약지에서 드란, 새끼손가락에서 실베인. 다섯이 되면 주먹이 되었다. 주먹을 폈다가 다시 처음부터 했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입술만 움직였다. 자는 사람 옆에서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육성소에서 배운 것 중 하나였고, 소등 뒤에 말을 하면 다음 날 배식이 줄었다. 줄어 봐야 얼마 안 줄었는데도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켈리는 그 규칙이 지금 이 자리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는 것과 몸이 하는 것은 별개였고, 그 둘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도 겨우 몇 주 전부터였다.

외우는 이유는 분명했다. 적어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켈리는 글자를 읽었지만 쓸 줄은 몰랐다. 읽는 것은 가르쳐 주었고 쓰는 것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번호를 읽어야 자기 자리를 찾고 수량을 읽어야 배급을 확인하는데, 마법사가 무언가를 써야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쓸 일이 없는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 기준은 그것 하나였고, 그 기준을 세운 사람은 아마 악의가 없었을 것이다. 읽기만 가르친 자는 지시를 받을 수 있고 쓰기까지 배운 자는 지시를 남길 수 있다. 남긴 것은 다른 사람이 읽게 되고 읽은 사람은 그것을 다시 남긴다. 그런 연쇄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마법청은 오래전에 계산해 두었으며, 계산의 결론이 켈리의 손에 숯 한 자루가 쥐여지지 않은 이유였다. 그 기준으로 자기에게서 빠진 것이 무엇무엇인지를 켈리 자신은 아직 몰랐다.

그래서 켈리가 뭔가를 남겨 두는 방법은 외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잊어버리면 다시 물어야 하는데, 다시 묻는 방법을 켈리는 몰랐다. 한 번 물어서 대답을 들은 것을 또 묻는 일이 육성소에는 없었다. 그러니 잊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켈리는 그날 밤 그 다섯을 몇 번이나 셌는지 세지 않았다. 세는 것까지 세지는 않았다. 다만 불이 완전히 꺼졌을 때도 순서가 헷갈리지 않았으므로 충분히 셌다고 판단하고 누웠다.

누워서도 한 번 더 했다. 아르베인, 로엔, 타르실, 드란, 실베인. 그리고 손가락이 모자라서 세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지도의 오른쪽 아래에 있던 작은 모양이었다. 그것에도 이름이 있었고 켈리는 그 이름을 외울 필요가 없었다. 열두 해 동안 매일 들었으므로.

그 지도는 그 자리에 한동안 남아 있었다. 사흘 뒤에 비가 왔고 비가 오자 지워졌다. 켈리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그보다 오래갔는데, 남은 것은 나라 다섯의 이름이 아니라 동그라미 다섯 개의 크기였다. 다섯을 전부 합쳐도 위쪽 것 하나보다 작았다. 켈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날은 몰랐고,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 다섯 개를 전부 걸어 본 뒤였다.

 

때리는 편이 싸다


베렐에서 남서로 이틀을 더 갔을 때 길이 좁아지는 자리가 나왔다. 양옆으로 낮은 언덕이 붙어 있고 그 사이로 수레 한 대가 겨우 지날 폭의 길이 이어졌다. 길 끝에 마을이 있었다. 집이 열 채쯤 되는 작은 마을이었고 입구에 방앗간이 하나 서 있었는데 물레가 얼어붙어 돌지 않았다. 바르트가 그것을 보더니 저기서 물을 얻어 가자고 했다. 물에도 값이 붙느냐고 켈리가 물었고, 물은 대개 공짜라는 대답을 들었다. 대개라는 말이 왜 붙는지는 묻지 않았다. 요 며칠 사이 켈리는 대개라든가 보통이라든가 아마도라든가 하는 말들이 바깥이라는 데에 유난히 많이 붙어 다닌다는 것을 알아 가는 중이었다. 벨류엔의 문서에는 그런 말이 없었다. 문서는 얼마를 언제까지라고만 적었고, 적힌 대로 되지 않는 날에도 적힌 것 쪽이 고쳐지는 법은 없었다. 바깥은 반대였다. 말이 먼저 헐겁고 그 헐거운 자리 안에서 일이 실제로 어떻게 될지가 정해졌다.

셋이 나온 것은 언덕 그늘에서였다. 앞에 선 남자가 낡은 칼을 차고 있었는데 칼집이 가죽이 아니라 천으로 감겨 있었고 감은 것이 풀려 늘어져 있었다. 그 뒤에 몽둥이를 든 키 큰 남자가 있었고, 맨 뒤에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쪽은 아직 아이였다. 열대여섯쯤으로 보였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른 둘보다 두 걸음쯤 떨어져 서 있었다. 셋 다 말랐다. 바르트보다도 켈리보다도 말랐다. 켈리는 그것을 먼저 보았다. 마른 것은 알아보기 쉬웠고, 얼마나 말랐는지로 며칠쯤 굶었는지를 어림하는 일은 켈리가 아주 오래 해 온 것이었다.

켈리가 그다음으로 알아차린 것은 저들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열일곱 번의 출격에서 켈리가 본 사람들은 전부 등을 보이거나 땅에 엎드려 있었고, 그래서 켈리에게 사람의 정면이란 같은 편의 얼굴을 뜻하는 말이었다. 지금 언덕 그늘에서 나온 셋은 같은 편이 아닌데 정면으로 오고 있었다. 그런 종류의 사람은 켈리의 열여덟 해에 한 번도 없었다. 켈리는 그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고, 알고 나서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몰랐다.

"짐 내려놓으쇼."
바르트가 배낭을 벗어 발치에 내려놓았다. 순순히 내려놓는 것을 보고 켈리가 그를 보았는데 얼굴에 별다른 것이 없었다. 화가 난 것도 겁을 먹은 것도 아니고 그냥 배낭을 내려놓는 얼굴이었다. 그는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것이 아니었다. 북쪽에서 빠져나오던 해에 세 번 당했고, 그중 두 번은 그냥 내주었고 한 번은 안 내주려다 갈비뼈가 나갔다. 나간 갈비뼈는 넉 달이 지나서야 제대로 붙었고 그동안 일을 못 했다. 그래서 그는 그 뒤로 셈을 해 두고 다녔다. 쇳조각 서 돈어치와 갈비뼈 하나를 놓고 보면 어느 쪽이 싼지는 계산할 것도 없었다.
"안에 쇠붙이밖에 없소."
"열어 보쇼."
바르트가 끈을 풀었다. 병 여섯 개와 천에 싸맨 주머니들과 연장과 노트가 보였다. 칼을 찬 남자가 그중에서 쇳조각이 든 자루를 끌어냈다. 무게가 있어서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거 팔아 봐야 값 안 나오오."
"그걸 댁이 왜 정하쇼."
"정하는 게 아니라 아는 거요. 그 안에 든 게 죄 부러진 축이랑 녹슨 판때기라 그냥 쇠로 치면 서 돈어치야. 셋이 나누면 한 사람에 한 돈이고, 그걸 지고 마을까지 내려가는 값이 더 들 거요."
남자가 잠깐 멈췄다. 셈을 해 보는 얼굴이었고 셈이 오래 걸리는 얼굴이기도 했다. 그러다 옆에 선 키 큰 남자가 뭐라고 짧게 한마디 했고, 그러자 칼을 찬 남자가 자루를 어깨에 얹었다.
"그래도 한 돈이 어디요."

바르트가 자루 끈을 잡았다. 놓지 않으려고 잡은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말해 보려고 잡은 것 같았는데, 키 큰 남자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몽둥이가 아니라 손으로 밀었다. 세게 민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바르트는 무릎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고 짐을 벗어 균형이 어긋나 있었고 발밑이 얼어 있었다. 뒤로 두 걸음 밀리다가 발이 걸렸고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넘어지면서 팔꿈치가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품에서 노트가 빠져나와 젖은 흙 위로 떨어졌다.

켈리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손가락이 벌어지고 팔꿈치가 펴졌다. 마법청의 교범은 그 동작을 제3 기립이라 적어 두었고, 그 아래에 자세가 잡히기까지 허용되는 시간의 상한을 표로 붙여 두었다. 켈리의 몸은 그 표의 절반쯤 되는 시간에 자세를 잡았다. 열두 해가 그 시간을 줄여 놓았으며, 줄여 놓은 만큼이 켈리가 돌파형으로 분류된 이유였다. 팔 안쪽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깨에서 손목 쪽으로 무언가가 번져 내려왔고, 다 번지면 그다음은 정해져 있었다. 그 뒤의 일을 켈리는 매번 보지 못했다. 보고 있을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을 들면 무언가가 없어졌고 없어진 자리에서 켈리는 달렸다. 그것이 절차였다.

"안 돼."
바르트였다. 흙바닥에 옆으로 누운 채로 낸 소리였고 크지 않았다. 켈리가 멈췄다. 손이 올라간 채로 멈췄다. 팔 안쪽의 열은 멈추지 않고 계속 번졌으므로, 멈춘 것은 켈리의 팔이 아니라 켈리였다. 켈리는 그 목소리가 명령인지 아닌지 잠깐 헷갈렸다. 명령이면 따르면 되고 따르면 끝나는데, 바르트는 명령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방금 한 말은 명령처럼 들렸고, 켈리의 몸은 명령처럼 들리는 것에는 먼저 반응하게 되어 있었다.

"저기 집 있어."
바르트가 팔꿈치를 짚고 몸을 일으키면서 턱으로 마을 쪽을 가리켰다.
"자네가 여기서 터뜨리면 저 집들 값을 우리가 물어."
켈리가 그 말을 들었다. 단어는 전부 아는 것이었다. 집이 있고 값이 있고 문다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떻게 한 문장으로 붙는지가 잡히지 않았다. 켈리가 아는 세계에서 터뜨리는 것에는 값이 붙지 않았다. 그것은 명령이었고, 명령에 값을 물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값은 빵에 붙는 것이었다.
"…내가?"
"자네가. 나도."
"왜."
"부쉈으니까."

켈리는 며칠 전 돌담에 앉아서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그때도 값 이야기였고 그때도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럼 누가 냈는데. 바르트는 일어나서 가자고 했고 해가 진다고 했다. 켈리가 삼 년 동안 터뜨린 것들에도 값이 붙어 있었다면 그것 역시 누군가 냈을 것이었다. 부서진 집이 있었고 부서진 사람이 있었고 그 전부에 값이 붙었다면, 그 값은 열일곱 번어치였다. 누가 냈는지는 그때도 지금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방금 알았다. 지금 여기서 터뜨리면 그 값을 낼 사람이 이 자리에 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방금 넘어져서 아직 다 일어나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칼을 찬 남자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인지 켈리는 듣지 않았다. 켈리는 자기 오른손을 보고 있었다. 손끝이 조금 떨렸고 그것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올라온 것이 아직 안 내려가서였다. 그 상태로 두면 어디로든 나가게 되어 있었다. 여태 그것을 안 나가게 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켈리는 지금 자기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것을 안 나가게 하고 있었다. 올라온 것을 쓰지 않고 내려보내는 데에도 값이 붙는지는 아무도 말해 준 적이 없었는데, 팔이 어깨까지 무거워지는 것을 보면 아마 붙는 모양이었다.

켈리가 손을 내렸다. 내리고 나서 왼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오른손으로 옮겨 잡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잡았다. 아래쪽을 잡았다. 그렇게 잡는 법은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고 그날 켈리가 혼자 정한 것이었는데, 정했다기보다 두 손으로 잡으면 덜 흔들리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했다. 훗날 다섯 나라의 교본에 실리게 되는 자세가 그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정해졌다. 교본을 쓴 사람들은 그것이 오랜 연구의 산물이라고 적었으나 실제로는 열여덟 살짜리가 언덕 밑에서 반 호흡 만에 정한 것이었고, 정한 근거는 덜 흔들리겠다는 짐작 하나였다.

켈리는 사람을 때려 본 적이 없었다.

터뜨려 본 적은 열일곱 번 있었다. 그것은 스무 보쯤 떨어진 데서 손을 들면 되는 일이었고 그다음에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는 켈리가 보지 않았다. 보라고 한 적이 없었고 볼 여유도 없었다. 터뜨리고 나면 뛰어야 했으므로 뒤를 돌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리가 세 걸음이었고 상대의 얼굴이 보였고 그 얼굴이 자기 쪽을 보고 있었다. 보고 있는 얼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배운 것이 없었다.

켈리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위로 들었다. 장작을 패는 자세였다. 그런 자세를 배운 적은 없었는데 무거운 것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동작은 몸이 알고 있었다. 모래주머니를 들었다 내려놓는 일을 삼 년 동안 매일 했고, 그때는 아무도 그것을 무기 쓰는 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냥 다리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들어 올리면서 팔에 힘을 넣었다. 넣는다기보다 아까부터 열려 있던 것을 그쪽으로 흘려보냈다. 뜨거운 것이 어깨에서 손목까지 한 번에 내려갔고 손아귀가 저렸다. 저리고 나서 조여들었다. 아이언우드가 갑자기 가벼워졌다. 무게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켈리 쪽이 세진 것이었는데, 몸은 그 둘을 구별하지 못하고 똑같이 가볍다고 느꼈다.

내려쳤다. 빗나갔다.

키 큰 남자는 세 걸음 앞에 있었는데 지팡이는 그보다 한 걸음 오른쪽 땅에 떨어졌다. 켈리는 조준을 못 했다. 스무 보에서 못 하던 것을 세 걸음에서 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고 실제로 못 했다. 다만 스무 보에서 빗나가는 것과 세 걸음에서 빗나가는 것은 결과가 달랐다. 스무 보에서는 엉뚱한 데가 없어졌고, 세 걸음에서는 땅이 파였다. 얼어 있던 흙이 깨지면서 소리가 났다. 쿵이 아니라 쩍, 하는 소리였다. 파인 자리가 켈리의 발만 했고 깊이가 손 한 뼘이었다. 흙덩이가 튀어서 키 큰 남자의 무릎에 맞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키 큰 남자가 파인 자리를 보았다. 그리고 지팡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쥐고 있는 마른 여자애를 보았다. 세 가지를 차례로 보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고, 그 시간 동안 켈리는 박힌 지팡이를 뽑아내고 있었다. 잘 안 빠져서 두 번 흔들었다. 두 번째에 뽑혔고, 뽑히면서 흙이 한 줌 딸려 나왔다. 그리고 남자가 몽둥이를 들었다. 아마 들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켈리가 두 번째를 쳤다. 이번에는 옆으로 쳤다. 위에서 아래로 치면 빗나간다는 것을 방금 배웠으므로 옆으로 쓸었고, 옆으로 쓸면 빗나가더라도 어딘가에는 닿는다는 것까지는 계산이 아니라 우연이었다. 지팡이가 몽둥이에 먼저 닿았다. 몽둥이가 부러졌다. 부러진 것이 튀어 나가고 나서도 지팡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 가서 남자의 팔뚝에 닿았다. 닿는 소리가 났는데 나무에 닿을 때와 다른 소리였다. 켈리는 그 소리를 처음 들었고, 들으면서 손으로도 느꼈다. 들고 있는 나무를 통해 저쪽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손바닥으로 전해져 왔다. 무언가가 한 번 걸렸다가 미끄러졌다.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몽둥이 자루를 놓고 팔을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칼을 찬 남자가 자루를 떨어뜨렸다. 떨어뜨리고 나서 잠깐 서 있다가, 주저앉은 쪽의 옷깃을 잡아 끌어 일으켜 세우고 언덕 쪽으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면서 계속 켈리를 보았다. 켈리도 보았다. 칼은 끝까지 뽑지 않았고 아마 뽑을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터뜨릴 때에는 없던 일이었다. 멀리서 하는 일에는 손에 남는 것이 없고, 손에 남는 것이 없으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의 경계도 함께 흐려진다. 벨류엔이 마법사에게 거리를 주는 까닭이 사거리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무 보 밖에서 손을 드는 아이는 자기가 무엇을 부수었는지를 손바닥으로 알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도 자기 몫을 따져 물을 수가 없다. 그날 세 걸음 거리에서 켈리의 손바닥으로 올라온 감각은 열두 해 동안 벨류엔이 켈리에게 주지 않기로 되어 있던 것이었다.

맨 뒤에 있던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아이가 켈리를 보고 있었고 켈리도 그 아이를 보았다.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고 두 발이 모여 있었고 시선이 정면보다 약간 아래였다. 켈리가 지팡이를 든 채로 멈췄다. 왜 멈췄는지는 몰랐다. 다만 저 자세를 어디서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디서 봤는지가 떠오르려다 말았으며, 떠오르기 전에 칼을 찬 남자가 그 아이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셋이 언덕을 넘어갔다. 자루는 그 자리에 있었다. 켈리는 계속 서 있었다. 지팡이를 두 손으로 쥔 채였다. 끝났다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터뜨린 다음에는 뛰라는 지시가 있었고 돌아오면 보고하라는 절차가 있었는데, 때린 다음에 무엇을 하라는 항목은 어디에도 없었다. 켈리는 그 항목이 없는 자리에 서서 언덕 쪽을 계속 보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어깨가 조금씩 내려갔다.

"이제 놔도 돼."
바르트가 흙을 털면서 일어나 있었다. 팔꿈치 쪽이 찢어져 피가 비쳤고 바지에 진흙이 묻어 있었다. 그가 먼저 한 일은 노트를 주워 겉장의 흙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는 것이었다. 두 번 닦고 나서 품에 넣고, 그러고 나서야 자기 팔꿈치를 들여다보았다. 켈리가 손가락을 폈다. 펴지기는 하는데 도로 오므라지지 않았다. 지팡이가 손에서 떨어져 땅에 부딪혔다. 켈리가 그것을 다시 주우려고 몸을 굽혔는데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는 자리가 없었다. 손목부터 팔꿈치까지가 남의 것 같았고, 팔을 들어 올리는 것까지는 되는데 쥐는 것이 안 되었다. 켈리는 그 상태를 알고 있었다. 매번 이랬다. 벨류엔의 문서는 이것을 소모라고 적었다. 소모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는 것이었으므로 손실 항목에 들어가지 않았고, 손실 항목에 들어가지 않는 것에는 아무도 값을 붙이지 않았다. 켈리가 열일곱 번에 걸쳐 치른 두 시간들은 그런 식으로 어느 장부에도 오르지 않았다.

"왔나."
바르트가 옆에 와서 쪼그려 앉았다. 켈리의 손을 보고 있었다.
"뭐가."
"대가. 지금 온 거지?"
"어."
"어디로."
"손."
"얼마나 가나."
"두 시간쯤."
"매번 그만큼인가."
"세게 쓰면 더 가."
"더 가면 얼마나."
"하루."
"하루 동안 손을 못 쓰나."
"어."
바르트가 그 대답을 듣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노트를 폈다. 젖은 손으로 숯을 잡아서 글씨가 번졌다. 그래도 적었다. 적으면서 한 번 더 물었다.
"아까가 세게 쓴 건가."
켈리가 파인 구덩이 쪽을 보았다.
"아니."

둘은 길가 돌에 앉아서 기다렸다. 바르트가 물통을 꺼내 켈리 손에 물을 부었다. 씻으라고 부은 것이 아니라 감각이 돌아오는지 보려고 부은 것이었는데, 차갑다는 것은 느껴졌다. 느껴지는데 오므라지지 않았다. 켈리가 그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열여덟 해를 쓴 손이었고 굳은살이 세 군데 박혀 있었다. 지팡이가 닿는 자리와 밧줄이 닿는 자리와 모래주머니 끈이 닿는 자리였다. 세 군데 다 벨류엔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벨류엔이 만들지 않은 자리를 찾으려면 아무것도 닿지 않은 손바닥 한가운데를 보아야 했는데, 하필 그 자리에 오늘 처음으로 무언가가 생겼다. 나무를 통해 남의 뼈가 한 번 걸렸다 미끄러지던 감각이 거기 남아 있었다. 그것은 굳은살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바르트는 그동안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자기 팔꿈치에 뭔가를 발랐다. 바르는 동안 얼굴을 한 번 찡그렸다.

"그거 내가 물어야 돼?"
"뭘."
"팔. 피 나잖아."
바르트가 병뚜껑을 닫으면서 자기 팔꿈치를 들여다보았다.
"이건 저쪽이 물어야지. 민 사람이 있으니까."
"근데 갔잖아."
"갔지."
"그럼 어떻게 돼."
"그냥 내가 떠안는 거야."
바르트가 병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세상에 못 받는 값이 꽤 많아. 받을 데가 도망가기도 하고, 받을 데가 죽기도 하고, 받을 데가 어딘지 몰라서 못 받기도 하고. 그런 건 그냥 누가 떠안는 거지."
"누가."
"거기 있던 사람."
켈리가 그 말을 생각해 보았다. 값은 붙어 있고 누군가는 내야 하는데 낼 사람이 없으면 옆에 있던 사람이 낸다는 뜻이었다. 그건 켈리가 아는 어떤 것과 모양이 비슷했다. 무엇과 비슷한지까지는 그날 생각이 닿지 않았다.

"저거는 물어야 돼?"
"뭘."
"저거. 땅 파인 거."
바르트가 그쪽을 보더니 웃었다. 소리는 내지 않고 어깨만 한 번 움직였다.
"저건 안 물어도 돼. 땅은 주인이 없으면 안 물고, 주인이 있어도 저 정도는 안 따져."
"어떻게 알아."
"따지려면 재야 되거든. 재는 값이 더 비싸."
켈리가 구덩이를 다시 보았다. 재는 값이 더 비싸다는 말을 켈리는 처음 들었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다. 알아들었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했다. 요즘 이 사람이 하는 말 중에 알아듣는 것이 조금씩 늘고 있었고, 그게 어떻게 늘어나는지는 켈리도 몰랐다. 배우고 있다는 감각은 없었다. 배운다는 것은 벌판을 돌고 표적 앞에 서는 일이었지 돌에 앉아서 구덩이를 보는 일이 아니었다.

바르트가 다 적고 나서 노트를 돌려 켈리 쪽으로 보여 주었다. 켈리가 읽었다. 글씨가 번져 있었지만 읽을 수는 있었다.

강화 더하기 타격. 대가 적음. 배상 없음.

"뭔 뜻이야."
"자네가 아까 한 게 제일 싸다는 뜻이야."
"싸."
"터뜨리면 자네 몸에서 며칠이 나가고 저기 집들 값까지 물어야 돼. 아까처럼 하면 손 두 시간이면 끝나고 아무한테도 안 물어도 되고. 그럼 싼 거지."
켈리가 그 줄을 다시 보았다. 셈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며칠과 두 시간이었고 무는 것과 안 무는 것이었다. 켈리는 셈을 잘했으므로 어느 쪽이 싼지는 바로 알았다. 다만 그 셈을 자기가 해도 되는 것인지는 몰랐다. 여태 무엇을 쓸지 정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고, 그 사람은 값을 계산해서 정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계산한 것은 다른 것이었고 켈리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자네 아까 왜 손 내렸어."
"네가 안 된다고 했잖아."
"그래."
바르트가 숯을 내려놓았다.
"그럼 내가 하라면 해?"

"응."

켈리는 구덩이를 보고 있었고 방금 한 대답이 어떤 대답인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켈리에게 그 질문은 물을 필요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고, 물을 필요가 없는 것에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바르트는 그 대답을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북쪽의 어느 작업장에서 몇 해를 같이 일한 사람들이 꼭 그렇게 대답했다. 하라면 했고 물으면 응이라고 했고 며칠씩 앓다가 그중 몇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그가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하라면 한다고 대답하는 사람 옆에 오래 서 있으면 언젠가 하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쁜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니었다. 편한 쪽으로 한 번씩 기울어지는 과정이었고, 기울기가 워낙 완만해서 기울어지는 동안에는 아무도 자기가 기울고 있는 줄을 몰랐다. 그가 아는 한 그 경사를 되돌아 올라온 사람은 없었다. 되돌아오려면 자기가 어디까지 내려왔는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은 대개 사람이 하나 없어진 뒤에 남는 빈자리였다.

바르트가 오래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일어나 자루를 끌어와 배낭에 도로 넣고, 켈리의 지팡이를 주워 켈리 옆에 기대어 놓고, 두 시간쯤 여기서 쉬어 가자고 했다. 물은 내일 얻어도 된다고 했다. 켈리가 알겠다고 했고, 그 말을 하면서 자기가 또 대답만 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둘은 해가 기울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마을은 걸어서 스무 보쯤이었는데 들어가지 않았다. 바르트가 오늘은 안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했고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켈리는 그 이유를 나중에야 짐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언덕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소리가 난 쪽에서 낯선 둘이 걸어 내려오면 그 둘을 반기지 않을 것이었다. 부순 것에 값이 붙는다면 소리에도 무언가가 붙는 모양이었다.

앉아 있는 동안 켈리는 오른손보다 다른 것을 더 많이 생각했다. 두 번째로 쳤을 때 손바닥으로 올라온 감각이었다. 나무를 통해 사람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전해져 왔고, 무언가가 한 번 걸렸다가 미끄러졌다. 켈리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았다. 팔뼈였다. 걸렸다가 미끄러졌다는 것은 부러지지는 않았다는 뜻이었고, 부러졌다면 걸린 자리에서 그대로 갔을 것이었다. 켈리는 그 차이를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알았다. 알고 나서 손바닥을 바지에 두 번 문질렀다. 문질러도 그 감각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터뜨릴 때는 이런 것이 없었다. 손을 들면 멀리서 무언가가 사라졌고 켈리는 뛰었고 그게 전부였다. 무엇이 어떻게 부서지는지가 손으로 올라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켈리는 그날 처음으로 자기가 한 일이 손에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좋은지 나쁜지는 판단하지 못했다. 판단할 항목이 없었다.

그날 밤은 마을 바깥 헛간에서 잤다. 방앗간 옆에 있는 것이었고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문이 열려 있었다. 바르트가 그걸 확인하고 나서, 아침에 사람이 오면 값을 치르면 된다고 했다. 켈리가 그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먼저 들어가 놓고 나중에 무는 것도 되는 모양이었다.

손은 두 시간이 조금 넘어서 돌아왔다. 손가락이 오므라지기 시작할 때 저릿한 것이 손끝에서 손목 쪽으로 올라왔고, 그 뒤로는 쥘 수 있었다. 켈리는 몇 번 쥐었다 폈다 해 보고 나서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등불 가까이 가져가 살펴보았다. 얼어붙은 흙을 그만큼 쳤으면 어딘가 상했어야 했다. 아무 자국도 없었다. 흙만 조금 끼어 있었고 그것은 손톱으로 긁으니 떨어졌다. 나무 표면이 매끈했고 금 간 데도 없었고 끝이 뭉개지지도 않았다. 켈리는 그것을 두 번 돌려 가며 확인했다.

아이언우드였다. 보급대에서 지급할 때 뭐라고 설명해 주지도 않았고 켈리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삼 년을 쓰는 동안 이 물건에 흠이 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것도 좀 이상했다. 이 나라는 마법사에게 싸구려만 지급했다. 옷은 얇았고 신은 밑창이 금방 닳았고 담요는 한 장이었다. 그런데 이 지팡이만은 삼 년째 멀쩡했다. 켈리가 그것을 무릎에 놓고 손잡이 쪽을 만져 보았다. 거기만 닳아 있었다. 누군가 오래 쥐었던 자리였고 켈리가 받았을 때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 누군가가 몇 호였는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적을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손잡이 아래쪽에 평평한 면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새길 수 있었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바르트가 그때 노트를 폈다. 낮에 적은 줄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그 줄은 그날의 지출도 아니고 켈리가 먹은 양도 아니었으므로 이 노트의 어느 항목에도 속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적었다. 여섯 글자였다.

명령하지 말 것.

수신자가 없는 문장이었다. 그가 평생 적어 온 줄들은 전부 나중에 누군가 읽고 셈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한 줄만은 읽을 사람이 자기뿐이었고, 읽어도 셈이 맞춰지지 않았다. 금지 조항이란 대개 이미 저지른 자가 만든다. 그는 자기가 아직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었고, 믿으면서도 적었다. 적어 두지 않으면 잊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잊지 않으면서도 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켈리는 그 줄을 보지 못했다. 반대쪽을 보고 앉아 지팡이를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있다가 등불이 꺼졌고 둘 다 누웠다. 누워서 켈리는 낮에 본 것을 한 번 더 떠올렸다. 맨 뒤에 서 있던 아이였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고 두 발이 모여 있었고 시선이 정면보다 조금 아래였다. 그 자세를 어디서 봤는지가 그때 생각났다. 여러 군데서 봤다. 줄 서 있는 데서 봤고 점호할 때 봤고 저울 앞에서 봤다. 다들 그렇게 서 있었다. 켈리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지시를 기다리는 자세였고, 켈리가 아는 한 그 자세는 육성소와 전선에만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벨류엔 사람이 아니었고 마법사도 아니었고 남색 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번호도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서 있었다. 켈리는 한참 동안 그 앞뒤를 맞춰 보려고 했다. 맞춰지지 않았다. 저 자세가 육성소 바깥에도 있다면 그건 육성소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뜻인데, 그럼 누가 만든 것인지를 켈리는 알 수 없었고, 그 질문을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켈리는 결국 그것을 접어 두었다. 접어 둔 것들이 요즘 자꾸 늘어나고 있었다. 그 전에는 접어 둘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접어 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들기 전에 손가락이 오므라지는지 두 번 더 확인했고, 두 번 다 오므라졌으므로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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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 없이


먹으라는 말이 나온 것은 한참 뒤였다.

남자는 그동안 나무판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다 적고 나서 판을 옆에 놓고 켈리를 보았다. 그릇은 여전히 바닥에 놓여 있었고 김이 많이 줄어 있었다.

"먹어."

그 말이 나오자 켈리의 손이 움직였다. 지시였기 때문이다. 지시가 나오면 수행하는 것이 절차였고, 절차가 있으면 켈리는 할 수 있었다. 그릇을 두 손으로 들었다. 따뜻했다. 손바닥이 데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래 굶은 손에는 그 온도가 이상하게 아팠다.

입에 댔다.

처음 한 모금이 들어가자 목구멍이 저항했다. 오래 비어 있던 곳에 뜨거운 것이 들어오자 근육이 잘못 움직였고 켈리는 기침을 했다. 기침을 하면서 국물이 조금 흘렀다. 두 번째 모금은 천천히 넘겼다. 세 번째부터는 괜찮았다.

맛은 알 수 없었다. 짜고 기름지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 이상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혀가 오래 일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이 목을 지나 내려가서 위에 도착하는 감각이 있었고, 도착한 자리에서 따뜻한 것이 퍼졌다. 절반쯤 먹었을 때 남자가 말했다.
"천천히."
켈리가 멈췄다. 멈춘 것은 그 말이 지시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천천히 하라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남자를 보았다. 남자가 손짓으로 그릇을 가리켰다.
"급하게 먹으면 토해. 나흘 굶은 사람은 나흘 걸려서 먹어야 돼."
켈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흘 걸려서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천천히 먹으라는 뜻이라는 것은 알았으므로 천천히 먹었다.

다 먹고 나서 그릇을 내려놓았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긁었다. 긁는 데 쓸 것이 없어서 손가락을 썼고 손가락에 묻은 것을 핥았다. 그러고 나서 그릇을 두 손으로 들고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이유는 다음 절차를 몰라서였다. 부대에서는 다 먹은 그릇을 정해진 자리에 갖다 놓았다. 여기에는 그런 자리가 없었다. 그릇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누구에게 돌려주어야 하는지, 돌려주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남자가 일어나서 그릇을 받아 갔다. 그리고 냄비에서 다시 떠서 가지고 왔다.

켈리는 그것을 보았다. 들고 오는 것이 같은 그릇이었고 안에 든 것도 같은 것이었다. 남자가 그것을 아까와 같은 자리에 놓았다. 켈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배식은 한 번이었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저울의 숫자에 따라 양이 정해지고 그 양을 받으면 그날의 절차가 끝났다. 끝난 절차가 다시 시작되는 경우는 없었다. 같은 날 두 번 배식을 받은 사람을 켈리는 본 적이 없었다.
"왜."
남자가 물었다. 켈리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말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법을 몰랐다. 지금 켈리 안에 있는 것은 하나였다. 이것을 먹어도 되는지를 확인하고 싶다. 그런데 그 확인을 요청하는 문장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켈리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다시 그릇을 보았다. 그리고 또 남자를 보았다. 남자가 그것을 두 번쯤 보고 나서 말했다.
"먹어도 돼."
켈리가 그릇을 들었다.

두 번째 그릇을 먹는 동안 켈리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두 번째였다. 두 번째가 나왔다는 것은 기준이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면 기준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기준을 알아야 그 기준 안에서 움직일 수 있고, 기준 밖으로 나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켈리는 알고 있었다. 45라는 숫자가 나온 날 배식이 반으로 줄었다.

켈리가 찾고 있는 기준은 없었다. 그 방에서 음식의 양을 정하는 것은 저울도 규정도 아니고 앞에 앉은 사람의 판단이었으며, 그 판단이 보고 있는 것은 켈리가 얼마나 먹을 수 있느냐 하나였다. 켈리는 그런 종류의 기준을 만나 본 일이 없었다. 여태 켈리에게 적용된 기준은 전부 켈리 바깥에서 정해져 내려온 것들이었고, 켈리의 상태를 보고 그 자리에서 정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저울조차 켈리를 보지 않았다. 저울이 본 것은 숫자였다.

두 번째 그릇을 다 먹고 나서 켈리는 아까처럼 앉아 있었다.

남자가 또 일어났다.

세 번째 그릇이 왔다.

켈리는 이번에는 남자를 보지 않았다. 그릇만 보았다. 손이 움직이려다가 멈췄고 다시 움직이려다가 멈췄다. 두 번째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먹어."

켈리가 먹었다.

세 번째를 먹는 동안 배가 아팠다. 아픈데도 먹었다. 배가 아픈 것과 먹는 것을 멈추는 것 사이에 연결이 없었다. 연결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부대에서는 배가 아플 만큼 먹을 기회 자체가 없었으므로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몸이 배운 적이 없었다.

절반쯤 먹었을 때 남자가 그릇을 가져갔다.

켈리의 손이 그릇을 따라갔다. 아주 짧았다. 손가락이 그릇 가장자리를 붙잡으려다가 놓쳤다. 그 동작은 켈리가 결정한 것이 아니었고, 켈리는 자기 손이 그렇게 움직였다는 것을 움직이고 나서 알았다.

남자는 그 손을 보았다. 북쪽 작업장에서 여러 번 본 손이었다. 오래 굶은 사람은 배가 부른 뒤에도 그렇게 하며, 그 손이 멎기까지는 대개 몇 달이 걸린다. 어떤 사람은 끝내 멎지 않았다. 그가 아는 한 그것을 멎게 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다음에도 있으리라는 확신이었고, 확신은 한 번 배불리 먹인다고 생기는 물건이 아니었다. 여러 날에 걸쳐 어긋나지 않아야 겨우 생겼다.

남자가 그릇을 선반에 올려놓았다.

"여기 둘게. 반 시간 있다가 먹어."

그리고 덧붙였다.

"안 뺏어."

켈리는 선반 위의 그릇을 보았다.

남자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 나무판을 다시 무릎에 놓고 숯 조각을 집었다. 적으면서 한 번씩 고개를 들어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선반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선반 위의 그릇을 보고 있었는데, 그 자세가 한참 이어졌다. 십 분쯤이었다. 그동안 켈리의 시선은 그릇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가 적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일어나서 그릇을 다시 가져다 켈리 앞에 놓았다.
"그냥 먹어."
이번에는 켈리가 바로 손을 뻗었다.

그날 저녁에 마른 빵이 나왔다.

국이 아니라 딱딱한 것이었다.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였고 가장자리가 검었다. 남자가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하나를 켈리 앞에 놓았다. 자기 몫은 그 자리에서 뜯어 먹었다.

켈리는 절반을 먹었다.

먹는 동안 남자는 자기 것을 다 먹고 물을 마시고 화로에 나무를 넣었다. 그러는 동안 한 번도 켈리 쪽을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보지 않는 것처럼 하고 있었다.

켈리가 남은 절반을 다시 반으로 나누었다. 한쪽을 입에 넣었다. 다른 한쪽을 왼손에 쥐었다. 쥔 채로 잠깐 있었다. 그리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짧게 둘러보았다. 오래 보면 눈에 띈다는 것을 켈리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을 로브 앞섶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남자는 화로를 보고 있었다. 나무를 넣고 부지깽이로 자리를 잡아 주고 있었다. 그 자세 그대로였고 고개는 돌아가지 않았다. 다만 손이 잠깐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다. 부지깽이 끝이 숯 위에 닿은 채로 한 박자 머물렀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여럿이었다. 여기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든가, 내일도 있다든가,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든가 하는 말들이었다. 그 말들이 전부 맞는 말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고, 동시에 그중 어느 것도 지금 저 아이에게 가닿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말 몇 마디로 고쳐지는 버릇이었다면 애초에 그렇게 깊이 박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지깽이를 마저 움직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저녁에 나오는 빵을 언제나 조금 크게 잘랐다. 켈리가 숨길 몫을 미리 셈에 넣어 둔 것이었는데, 그 사실은 끝내 말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도 그릇이 나왔고 그다음 날에도 나왔다. 사흘째부터 켈리는 혼자 앉을 수 있었고 나흘째에는 혼자 걸을 수 있었다. 얼굴에 굳어 있던 피는 둘째 날에 남자가 물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닦아 주는 동안 켈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이 자기 얼굴을 만지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처음이라는 것을 그 순간에는 생각하지 못했고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생각했다.

닷새째에 남자가 일하러 나갈 때 켈리가 따라 일어섰다.

남자가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따라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켈리를 위아래로 한 번 보고 나서 걸었다.

분지의 일은 단순했다.

쓰러진 기계에서 쓸 만한 쇠를 떼어 내고, 떼어 낸 것을 화덕에서 녹여 덩어리로 만들고, 그 덩어리를 수레에 쌓는 것이었다. 며칠에 한 번씩 남쪽에서 상인이 와서 그것을 사 갔다. 사 가는 값은 무게로 쳤다.

남자가 하는 일은 그중에서도 녹이는 쪽이었다. 떼어 내는 일은 힘이 좋은 젊은 사람들이 했고, 녹이는 일은 불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했다. 불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이 분지에서 그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를 경계하면서도 쫓아내지는 않았다.

그날 남자는 큰 판 하나를 화덕 쪽으로 옮기려 하고 있었다.

두께가 손가락 두 개쯤 되고 넓이가 사람 상체만 한 철판이었다. 한쪽 끝을 들어 올려서 끌고 가는 방식이었는데 지면이 울퉁불퉁해서 몇 걸음마다 걸렸다. 남자가 허리를 펴고 숨을 골랐다. 걸릴 때마다 목덜미의 혹 부근이 붉어졌다.

켈리가 옆으로 갔다. 그리고 그 판을 들었다. 한 손으로 들었다. 판 가운데를 잡고 위로 들어 올렸는데 팔이 완전히 펴질 때까지 올라갔다. 그 상태로 세 걸음 걸어서 화덕 옆에 내려놓았다. 내려놓을 때 쿵 소리가 났다.

남자가 그것을 보고 있었다.

입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손에는 아직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고 허리는 펴다 만 자세였다.

그리고 켈리의 무릎이 꺾였다.

앞으로 고꾸라지지는 않았다. 한쪽 무릎이 먼저 땅에 닿았고 손으로 땅을 짚었다. 숨이 가빠졌고 팔이 떨렸다. 오른팔 아래쪽이 뜨거웠다가 빠르게 식었다. 입안에서 쇠 맛이 났다. 남자가 달려왔다. 달려와서 켈리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런데 손을 대지는 않았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들여다보았다. 눈을 보고, 목을 보고, 떨리는 팔을 보았다.

"방금 그거."

켈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숨이 돌아오지 않았다.

"방금 그거 뭐야."

켈리가 겨우 숨을 골랐다.

"…강화."

"강화."

남자가 그 말을 따라 했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몸을 뒤로 젖혀 켈리를 다시 보았다. 위에서 아래까지 천천히 보았다.
"자네 그럼 그거군."
무엇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말할 단어가 그에게 없었는지, 아니면 있는데 쓰지 않은 것인지 켈리는 알 수 없었다.

둘 다였다. 그가 아는 말은 북쪽에서 쓰던 것이었고 이 나라에서 그것을 어떻게 부르는지는 몰랐다. 그리고 말을 알았다 해도 그 자리에서 쓸 생각은 없었다. 무엇이라고 불러 버리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그것으로만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그는 살아오면서 몇 번 겪었다. 사람을 부르는 말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열두 해 동안 번호로 불려 온 아이에게 이름표를 하나 더 붙이는 일을, 그는 그날 저녁에 하지 않기로 했다.

그날 저녁 남자는 일을 일찍 접었다.

오두막으로 돌아와서 화로에 불을 붙이고 냄비를 걸었다. 그리고 선반에서 노트를 꺼냈다. 나무판이 아니라 진짜 종이로 된 것이었다. 두껍고 귀퉁이가 닳아 있고 끈으로 묶여 있었다.

그것을 무릎에 놓고 폈다. 그리고 켈리를 보았다.
"몇 가지 물어보자."
켈리는 앉아 있었다.
"그거 한 번 쓰면 얼마나 들어."
켈리가 그를 보았다.
"뭐가."
"값 말이야. 쓰면 뭔가 나가잖아. 얼마나 나가."
켈리는 그 질문을 이해했다. 이해했는데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값이 나간다는 것은 알았다. 얼마나 나가는지도 몸으로는 알았다. 그런데 그것을 숫자로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모르겠는데."
"모른다고?"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쓸 때마다 나가는 건 알 거 아냐."
"응."
"그럼 얼마나 나가는지는 왜 몰라."
켈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려고 해 보았다. 대답하려면 왜 모르는지를 알아야 했는데 그것도 몰랐다. 열두 해 동안 아무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교관은 하라고 했고 집검관은 어디에 하라고 했다. 얼마나 드느냐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안 가르쳐 줬어."
남자가 숯 조각을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그럼 이건 아나. 쓰고 나면 어디가 아파."
이건 대답할 수 있었다.
"처음에 추워. 손끝이랑 발끝부터. 그다음에 목이 마르고. 마지막에 힘이 없어져."
남자가 그것을 적었다. 적는 속도가 빨랐다.
"순서가 있다는 거지. 매번 같은 순서인가."
"응."
"크게 쓰면 순서가 바뀌나."
켈리가 잠깐 생각했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크게 쓰면 한꺼번에 와."
남자가 그것도 적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을 했다.
"자네 그거, 잉여 에너지 어디로 가나."
켈리는 그 문장에서 두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뭐?"
남자가 숯을 든 채로 잠깐 멈췄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쓰고 남은 게 있을 거 아냐. 힘을 만들어서 썼으면, 쓴 것보다 만든 게 많았을 거고, 그러면 남은 게 있을 거고, 그게 어디론가 갔을 거 아냐. 그게 어디로 가냐고."
켈리는 그 말을 천천히 따라갔다. 따라가다가 걸렸다.
"남는 게 없는데."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뭐?"
"남는 게 없어. 다 나가."
"다 나간다니."
"만든 만큼 다 나가. 그리고 만든 것보다 더 나가."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그러고 있었다. 무릎 위의 노트를 보고 있었는데 거기에 적힌 것을 읽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숯을 쥔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그게 다 어디로 가는데."
"내가 내는데."
켈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것이 이상한 말인지 아닌지를 몰라서 남자를 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이상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눈썹이 가운데로 모여 있었고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켈리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켈리 뒤쪽 어딘가를 보고 있었고 거기에는 벽밖에 없었다.
"그거 누가 가르쳤어."
"마법청."
"마법청."
남자가 그 말을 한 번 따라 했다. 그리고 노트를 덮었다. 덮었다가 다시 폈다. 다시 폈는데 적지는 않았다.
"자네."
"응."
"그 사람들이 자네한테 뭘 안 가르쳤는지는 아나."

켈리는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단어는 전부 아는 것이었고 문장의 모양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을 묻는 것인지가 잡히지 않았다. 배우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배우지 않은 것이 있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했고, 켈리는 자기가 배운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열두 해를 살았다.

그래서 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한참 기다렸다. 기다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인 것이 대답을 들었다는 뜻인지 못 들었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노트에 한 줄을 적었다. 이번에 적은 것은 관찰이 아니었다. 물음표가 붙어 있었다.

 

적어 두게


남자는 매일 저녁에 뭔가를 적었다.

일이 끝나고 오두막에 돌아오면 화로에 불을 붙이고, 물을 올리고, 그다음에 노트를 폈다. 순서가 정해져 있었고 그 순서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적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열 줄이 넘는 날이 드물었고 어떤 날은 두 줄로 끝났다. 다 적으면 노트를 덮어서 끈으로 묶고 선반 맨 위에 올려놓았다.

켈리는 그것을 며칠 동안 보았다. 보면서 저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했는데, 궁금해한다는 감각 자체가 낯설었다. 부대에서도 적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기가 적었고 교관이 적었고 집검관이 적었다. 그때 켈리가 그것에 대해 느낀 것은 궁금함이 아니었다. 적히면 무언가가 결정된다는 것만 알았고, 결정되는 쪽이 켈리에게 유리했던 적은 없었다.

여기서 적히는 것은 달라 보였다. 남자는 적고 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보내지 않았고 누구에게 보여 주지도 않았다. 적고 덮고 올려놓는 것이 전부였다.

엿새째 저녁에 켈리가 그 옆에 가서 앉았다. 남자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말했다.
"볼래?"
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법을 몰랐으므로 그냥 앉아 있었다. 남자가 노트를 조금 기울여 주었다.

글자가 있었다. 줄이 촘촘했고 글씨가 작았다. 켈리는 그것을 읽으려고 했다. 읽히는 것이 있고 안 읽히는 것이 있었다. 숫자는 전부 읽혔다. 숫자 옆에 붙은 단위도 읽혔다. 킬로그램, 리터, 시간. 그런 것들은 보급 문서에서 매일 보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사이에 들어간 말들은 읽히지 않았다. 글자는 보이는데 그 글자들이 모여서 무슨 뜻이 되는지가 잡히지 않았다.

켈리가 배운 글은 명사와 숫자였다. 번호와 수량과 소속은 전부 명사였고, 명사만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목록을 읽을 수 있으나 문장을 읽지는 못한다. 목록은 무엇이 얼마나 있는지를 말해 주고 문장은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해 준다. 열두 해 동안 켈리가 읽은 것은 전부 앞쪽이었다.

한 줄만 완전히 읽혔다.

동행 1. 아침 두 그릇, 저녁 한 그릇 반.

켈리가 그 줄을 두 번 읽었다. 그리고 세 번 읽었다.
"그게 뭐야."
남자가 켈리가 짚은 곳을 보았다.
"자네 먹은 거."
"…왜 적어."
"내가 쓴 거 적는 거야. 오늘 쇠 얼마 녹였고, 숯 얼마 썼고, 물 얼마 썼고. 자네도 먹었으니까 적지."
켈리는 그 설명을 이해했다. 이해했는데 이상했다. 먹은 것을 적는 것은 부대에서도 했다. 배식병이 그날 나간 양을 적었고 그것은 나중에 보급 장부와 맞춰졌다. 그러니까 같은 일이었다. 같은 일인데 무언가가 달랐고, 무엇이 다른지를 켈리는 짚어 내지 못했다.

다른 것은 이것이었다. 부대의 장부에 적힌 것은 나간 양이었다. 여기 적힌 것은 켈리가 먹은 양이었다. 같은 숫자인데 주어가 달랐다. 켈리는 그 차이를 그날 알아내지 못했고 몇 달 뒤에 알아냈다.

"동행 1."
켈리가 그 부분을 다시 짚었다.
"이건."
"자네지."
"…왜 이렇게 적어."
남자가 숯을 내려놓고 켈리를 보았다.
"자네 이름을 모르니까."

켈리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재촉하지 않았다. 화로에서 나무가 한 번 튀는 소리가 났다.

"켈리."

말하고 나서 켈리는 자기가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소리가 작았고 목이 걸렸다. 그 이름을 마지막으로 소리 낸 것이 언제인지는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 검사를 받으러 가기 전에 누가 그것으로 불렀던 것 같은데 그 사람의 얼굴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가 노트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그 줄을 문질렀다. 숯으로 쓴 것이라 문지르자 번지면서 지워졌다.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고 회색 자국이 남았다. 그 위에 다시 적었다.

켈리. 아침 두 그릇, 저녁 한 그릇 반.

켈리는 그것을 보았다. 자기 이름이 글자로 되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열두 해 동안 켈리에 관해 적힌 모든 문서에 적혀 있던 것은 번호였다. 돌파 7호. 그 표기는 읽을 줄 알았고 자주 보았고 그것이 자기를 가리킨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종이에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켈리는 그 두 글자를 오래 보았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다른 줄을 적고 있었다.

번호와 이름은 둘 다 켈리를 가리키는 표기였고 글자 수도 엇비슷했다. 다른 점은 번호가 사람이 아니라 자리를 가리킨다는 것이었다. 돌파 7호라는 표기는 켈리가 없어지면 다음 아이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었고 실제로 넘어갔다. 켈리라는 두 글자는 넘어갈 데가 없었다. 그 차이를 켈리는 그날 알지 못했다. 알게 되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으며, 알고 난 뒤에 켈리가 한 일이 결국 그 차이를 제도로 만드는 일이었다.

"근데."
켈리가 말했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왜 지웠어."
"틀렸으니까."
"틀린 거 아닌데. 동행 1, 맞는데."
남자가 숯을 든 채로 켈리를 보았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말했다.
"동행 1은 이름이 아니야. 그건 자리야. 자네가 아니라 자네가 서 있는 자리를 가리키는 거지. 다른 사람이 오면 그 사람도 동행 1이 돼. 근데 켈리는 다른 사람이 와도 켈리가 아니잖아."

켈리는 그 말을 천천히 따라갔다. 따라가다가 어딘가에서 걸렸다. 다른 사람이 오면 그 사람도 7호가 된다. 켈리가 나온 지 며칠쯤 지났을 것이고, 그 침상에는 이미 누가 들어와 있을 것이고, 아침 저울 앞에서 서기가 부르는 돌파 칠호에 대답하는 아이가 있을 것이었다. 그 아이도 7호였다.

그러면 켈리는 무엇이었나.

그 질문이 켈리 안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만들어졌는데 대답이 없었으므로 켈리는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 그대로 둔 것들이 켈리 안에 이미 여러 개 있었다.

남자가 노트를 덮었다.
"나는 바르트다. 바르트 뮐렌."
켈리가 그를 보았다.
"뮐렌은."
"성이야. 집안 이름."
켈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성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장교들 이름에는 두 부분이 있었고 뒷부분이 그것인 모양이었다. 마법사에게는 없었다.
"나는 없는데."
"없나."
"응."
바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화로에 나무를 하나 더 넣었다.

이틀 뒤 저녁에 켈리가 그 혹에 대해 물었다.

물어보기까지 이틀이 걸린 것은 물어보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이 아직 길어서였다. 다만 그날은 바르트가 웃옷을 벗고 있었다. 화덕 일을 하고 와서 땀에 젖었으므로 벗어서 말리는 중이었고, 그래서 등이 다 보였다.

일곱 개였다. 목덜미에 둘. 그 아래로 척추를 따라 셋. 왼쪽 어깨뼈 근처에 하나. 오른쪽 옆구리에 하나.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가장 작은 것은 콩알만 했고 가장 큰 것은 달걀 정도였다. 색은 살색이었는데 그 자리만 조금 붉었다.

"그거."
켈리가 말했다. 바르트가 자기 목덜미를 만졌다.
"이거."
"응."
"대가야."
켈리는 그 단어를 알았다. 아는 단어가 나오자 다음 질문이 쉽게 나왔다.
"무슨 대가."
바르트가 앉아서 등을 화로 쪽으로 돌렸다. 말리는 자세이기도 했고 켈리에게 보여 주는 자세이기도 했다.
"내가 하는 게 연금술이라는 건데. 물질을 바꾸는 거야. 쇠를 더 단단하게 만들거나, 안 섞이는 걸 섞거나, 타지 않는 걸 태우거나. 그런 걸 하려면 값이 들어. 자네가 아는 거랑 같아."
"응."
"근데 내는 방법이 달라."
바르트가 켈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네는 몸에서 바로 빼내지. 체온 빼고, 물 빼고, 힘 빼고. 그래서 쓰면 바로 무너져. 나는 그걸 안 해. 나는 값을 다른 걸로 바꿔서 내."
"뭘로."
"그게 이거야."
바르트가 목덜미의 혹 하나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는 두 사람 다 몰랐다. 대륙의 어느 학자도 시원하게 답한 적이 없는 문제였고, 답이 나오지 않는 까닭은 답을 찾을 만큼 오래 사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만 실무상의 차이는 분명했다. 즉시 내는 쪽은 며칠 앓고 일어나며, 미뤄 두는 쪽은 앓지 않는 대신 어느 날 한꺼번에 받는다. 앞쪽은 매번 아프고 뒤쪽은 마지막에 한 번 아프다. 어느 쪽이 나은지는 물어보는 시점에 따라 달라졌다.

"뭔지는 나도 몰라. 살덩어리인데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갈라 본 적이 없어서. 확실한 건 하나야. 내가 큰 걸 쓸 때마다 이게 하나씩 생겨. 그리고 안 없어져."
켈리가 그 혹들을 다시 보았다. 일곱 개.
"그럼 안 아파?"
"안 아프지. 지금은."
"지금은."
"나중엔 아프겠지. 이게 커지거나, 안 좋은 자리에 생기거나 하면. 이미 하나는 자리가 별로야."
바르트가 목덜미 쪽을 가리켰다.
"여기 이거. 여기는 굵은 게 지나가는 자리라서, 더 커지면 곤란해져."

그 말을 하면서 그는 웃지도 않았고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았다. 겁을 주려는 것도 아니고 딱하게 보이려는 것도 아니었다. 장부에 적힌 줄을 소리 내어 읽는 투였다. 평생 해 온 일이 값을 재고 적고 치르는 일이었으므로 자기 몸에 붙은 값을 말할 때에도 같은 투가 나왔다. 켈리는 그 투를 그날 처음 들었고, 나중에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쓰게 된다.

"그럼 왜 그렇게 해."
바르트가 웃었다. 웃는 것을 켈리는 처음 보았다. 입이 한쪽만 올라가는 웃음이었고 눈은 웃지 않았다.
"나중은 지금이 아니니까."

켈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문장을 기억해 두었다. 기억해 둔 이유는 그 문장이 무언가와 닮아 있었기 때문인데, 무엇과 닮았는지는 그때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몇 해 뒤였고, 그때는 그 문장이 한 나라의 방침이 되어 있었다.

"자네 방식이랑 내 방식이랑, 어느 쪽이 나은 건 아니야."
바르트가 말했다.
"자네 건 값을 바로 치러. 그래서 정직하지. 대신 치를 게 없으면 죽어. 내 건 미뤄. 그래서 오래 살아. 대신 미룬 게 어디로 가는지는 내가 못 골라."
그러고 나서 그가 덧붙였다.
"둘 다 안 내는 방법은 없어. 그건 나도 못 찾았고 아무도 못 찾았어."

그 저녁에 바르트가 켈리에게 노트를 내밀었다. 노트와 숯 조각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받았는데 받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뭐."
"적어 두게."
"뭘."
"아까 말한 거. 순서 말이야. 추위, 목마름, 힘. 그리고 오늘 뭘 했고 그다음에 어떻게 됐는지. 자네 몸에서 일어나는 건 자네가 제일 잘 아니까 자네가 적는 게 맞아."

켈리는 노트를 보았다. 펼쳐진 면에 빈 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숯 조각은 손가락 두 마디쯤 되었고 끝이 뭉툭했다. 켈리가 그것을 쥐었다. 쥐고 나서 한참 있었다.

바르트가 처음에는 기다렸다. 생각을 정리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켈리의 손이 종이 위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숯 끝이 종이에 닿지도 않았다. 쥔 자세도 이상했다. 숯을 주먹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자네."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글 못 쓰나."
"…못 써."
"읽는 건 되잖아. 아까 읽었는데."
"읽는 것만 배웠어."
바르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조금 길었다.
"읽는 것만."

"응. 번호랑 수량이랑 소속 표기. 그거 읽을 수 있으면 됐다고 했어."

"누가."

"마법청."
바르트가 손을 뻗어 켈리에게서 숯을 받아 갔다. 받아 가면서 켈리의 손 모양을 잠깐 보았다. 그러고 나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한참 있다가 그가 말했다.
"그럼 내가 적지."
그리고 덧붙였다.
"자네는 말해. 내가 적을 테니까."
켈리는 그 말을 이해했다.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쉬웠다.

며칠 뒤에 바르트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유는 사흘 전부터 있었다. 분지의 다른 채집자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을 바르트가 보았다. 그들은 남색 로브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이야기의 방향은 하나뿐이었다. 국경 쪽 초소에 알리면 얼마쯤 받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 그중에 있었다.

바르트는 그 이야기를 켈리에게 하지 않았다. 대신 짐을 쌌다. 쌀 것이 많지 않았다. 병 몇 개와 주머니 몇 개와 연장 몇 개와 노트. 그것을 낡은 배낭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 벽에 걸려 있던 외투를 내려서 켈리에게 주었다.
"입어."
두껍고 기름 얼룩이 있고 소매가 길었다. 바르트에게 맞는 크기였으므로 켈리에게는 컸다. 입으니까 손이 절반쯤 덮였고 밑단이 무릎 아래까지 왔다.

그리고 앞섶이 가려졌다.

켈리가 자기 가슴 쪽을 내려다보았다. 은실이 보이지 않았다. 외투가 두꺼워서 비치지도 않았다.
"그걸로 다 되는 건 아니야."
바르트가 배낭 끈을 조이면서 말했다.
"밑에 입은 거 언젠가는 벗어야 돼. 그건 자네가 결정할 일이고, 지금은 아니어도 되고. 일단 오늘은 그거 입고 가자."

"어디로."

"남서쪽."

"거기 뭐 있어."
바르트가 배낭을 메고 문 쪽으로 갔다. 문을 열고 바깥을 한 번 내다보았다. 해가 낮았다.
"사람 많은 데. 시장 있고, 재료 있고, 책 있는 데."
"책."
"자네가 아까 한 말 말이야. 남는 게 없다고 한 거. 그거 말이 안 되거든. 뭘 만들었으면 어디로든 갔어야지, 그냥 없어졌을 리가 없어. 없어졌다면 그건 없어진 게 아니라 내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거고."
바르트가 돌아보았다.
"그걸 알아야겠어."
켈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이 사람이 자주 한다는 것에는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는."
"같이 가."
켈리가 그를 보았다.
"그게 명령이야?"
바르트가 잠깐 멈췄다. 그리고 문지방에 한쪽 발을 올린 채로 켈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니. 물어보는 거야."

켈리는 그 차이를 몰랐다. 명령이면 따르면 되고 따르면 절차가 끝난다. 물어보는 것이면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 대답은 켈리가 만들어야 했다.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한참 있다가 켈리가 말했다.

"갈게."

말하고 나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는데, 무언가를 하기는 했다는 감각이 남았다.

둘은 해가 지기 전에 분지를 나왔다. 바르트가 앞에 서고 켈리가 뒤에서 따라갔다. 거리는 여섯 보쯤이었다. 그 거리는 켈리가 정한 것이 아니라 몸이 정한 것이었고, 스무 걸음쯤 가고 나서 바르트가 돌아보더니 말했다.
"옆에 와서 걸어. 뒤에 있으면 말이 안 들려."
켈리가 옆으로 갔다. 옆으로 가서 걸으니까 보폭이 맞지 않았다. 바르트가 크고 다리가 길었으므로 켈리가 조금 빨리 걸어야 했다. 몇 백 걸음쯤 가자 바르트가 속도를 줄였다.

능선을 넘을 때 켈리가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분지의 쇠들이 저녁 빛을 받아 붉었다. 화덕 하나에서 아직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누가 다시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그날 밤 야영지에서 바르트가 노트를 폈다. 불빛이 약해서 가까이 대고 적어야 했다. 두 줄을 적었다. 첫 줄은 그날 옮긴 짐의 무게와 걸은 거리였다.

둘째 줄은 이랬다. 켈리. 열여덟. 저녁에 마른 빵 한 덩이, 물. 오늘 강화 안 씀.

같은 시기에 다른 종이에도 그 이름에 해당하는 것이 적히고 있었다. 그쪽에는 이름이 없었고 번호가 있었으며, 소모라는 항목과 회수 미확인이라는 비고가 붙어 있었다. 두 기록은 같은 사람에 관한 것이었고 서로를 모른 채로 각각 쌓여 갔다.

켈리가 노트를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그거 다 적으면 어떻게 돼?"
바르트가 숯을 내려놓고 손가락에 묻은 것을 바지에 문질렀다.
"안 어떻게 돼. 그냥 남지."

켈리는 그 대답을 한참 생각했다. 남는다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부대에서 적힌 것들은 전부 무언가를 위한 것이었다. 집계를 위해서였고 보급을 위해서였고 결정을 위해서였다. 적힌 것에는 반드시 다음이 있었고 그 다음이 켈리에게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것도 위하지 않고 그냥 남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날 처음 알았다.

 

분실 자산

 

 

**벨류엔 마법왕국 · 왕도 마법청**

검토는 아흐레 걸렸다.

로르칸이 찍은 점 하나에서 시작된 절차였다. 점이 찍히면 담당 서기가 해당 건의 원본을 청구하고, 원본이 오면 부속 자료를 모으고, 자료가 모이면 검토관 셋이 각각 의견서를 쓴다. 셋의 의견이 갈리면 다시 회의를 여는데 이번에는 갈리지 않았다.

모인 자료는 이랬다. 제4마도대 출격 결과 보고 사본. 정찰 보고. 해당 자산의 배치 이력. 훈련 기록. 체중 기록 삼 년 치. 소속 집검관의 근무 평정. 그리고 사건 당일 인근에서 발생한 마도중대 건의 별건 보고.

검토관들이 주목한 것은 체중 기록이었다.

삼 년 동안 42에서 46 사이를 오갔다. 그 정도면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그 숫자가 한 번도 40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다른 자산들은 배치 후 여섯 달쯤부터 체중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그 뒤로는 올라오지 않았다. 힘을 쓰면 몸이 줄고, 몸이 줄면 배식이 늘지만, 늘어난 배식이 줄어든 몸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정상적인 곡선이었고 그 곡선의 끝에 소모가 있었다.

돌파 7호의 곡선은 평평했다.

검토관 중 하나가 그 이유를 찾아냈다. 훈련 기록에 근력 훈련이 매일 기재되어 있었다. 모래주머니 45킬로그램, 삼천 보. 삼 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다른 자산에게는 그런 기록이 없었다. 조준 훈련이 있을 뿐이었다.

담당 집검관이 개인 판단으로 시킨 것이었다. 규정에 근거가 없었고 상급 승인도 없었다. 근무 평정에는 그에 관한 언급이 한 줄도 없었다.

자료에는 한 가지가 더 들어 있었으나 아무도 그 칸을 보지 않았다. 배치 연령이었다. 표준은 열둘이고 돌파 7호는 열다섯이었다. 세 해가 늦었다. 유급으로 묶여 있던 그 세 해 동안 그 아이는 벌판을 돌지 않았고 표적 앞에 서지도 않았으며 아무것도 터뜨리지 않았다. 열둘에 시작한 아이와 열다섯에 시작한 아이의 차이는 삼 년이 아니라 삼 년치 소모였다. 검토관들이 그 칸을 지나친 까닭은 그것이 인사 서류의 항목이지 운용 서류의 항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서가 달랐다.

검토관은 그것을 의견서에 적었다. 적으면서 그 집검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었으나 물을 수 없었다. 그는 같은 사건에서 전사로 처리되어 있었다.

셋의 결론은 같았다. 이 건은 단순 소모가 아니다.

그래서 분류가 바뀌었다.

「마법청 자산 관리 규정」 제4장 제19조는 자산의 상태를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있었다. 운용, 정비, 대기, 소모, 분실.

제20조. 소모란 자산이 기능을 상실하고 회수가 완료된 상태를 말한다.

제21조. 분실이란 자산의 소재가 확인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돌파 7호는 제20조에서 제21조로 옮겨졌다. 서류상으로는 한 칸 이동이었고 실제로는 다른 일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소모된 것은 채우면 됐다. 분실된 것은 찾아야 했다.

찾아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로 정리되어 있었다.

첫째, 자산이 외부에 있으면 운용 방식이 알려진다. 마법사를 어떻게 뽑고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쓰는지는 마법청 바깥에서 알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둘째, 해당 자산은 돌파형으로 삼 년을 넘긴 사례였다. 왜 넘겼는지가 밝혀지면 나머지 자산의 운용에 적용할 수 있었다. 평균 존속 기간이 열네 달에서 열여덟 달로만 늘어도 연간 보충 요구량이 상당히 줄었다.

셋째가 실제로 중요한 것이었다.

의견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자산의 이탈이 미회수 상태로 종결될 경우, 잔여 자산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함. 풀어 쓰면 이런 뜻이었다.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가려고 하는 것이 생긴다.

스물두 명이 있는 막사에서 하나가 나갔고 그 하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까지는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됐는지는 아직 모른다. 모르는 동안에는 괜찮다. 나간 뒤에 어떻게 되는지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아무도 나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결론이 나야 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잡혀 오거나, 잡히지 않은 채로 어딘가에서 끝나거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확인되어 문서가 닫히는 것이었다.

그 대목을 쓴 검토관은 마흔둘이었고 자식이 둘 있었다. 그가 그 문장을 적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남아 있는 것은 그가 표현을 세 번 고쳤다는 사실뿐인데, 세 번 고친 끝에 고른 것이 가장 짧고 가장 사무적인 쪽이었다. 길게 쓰면 읽는 사람이 무슨 말인지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게 되면 결재가 늦어진다. 그는 그 일을 십칠 년 했다.

의견서는 그다음 조항을 인용하며 끝났다.

제5장 제23조. 분실 자산은 지체 없이 회수한다.

제24조. 회수는 자산의 원상 복귀를 원칙으로 한다.

제25조. 원상 복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현장에서 기능을 정지시킨다.

제26조. 제25조에 따른 조치는 회수로 간주한다.

비앙카 세렌이 호출된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

스물여덟이었다. 마법청 직할 특무 집검관이었고 그 직책에 있는 사람은 벨류엔 전체에 넷이었다.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다. 검은 머리를 목덜미에서 짧게 묶었고 얼굴에 표정이 적었다. 남색 코트를 입었는데 마도대의 것과는 재단이 달랐다. 소매에 은색 선이 두 줄 들어가 있었다.

로르칸의 집무실에 들어가서 두 걸음 앞에서 멈추고 섰다.
"앉게."
"서 있겠습니다."
로르칸은 그것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서류 묶음을 책상 위로 밀어 놓았다. 비앙카가 그것을 받아서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읽는 속도가 빨랐다. 체중 기록 표에서 잠깐 멈췄고 훈련 기록에서 한 번 더 멈췄다. 정찰 보고는 두 번 읽었다. 다 읽고 나서 묶음을 덮었다.
"분류는."
"어제 변경했네. 분실."
"회수 지침은."
"규정대로."
비앙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기한은."
로르칸이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잠깐 있었다. 대답할 말을 고르는 시간이 아니라 그 질문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표시였다.
"없네."
"없습니까."
"이 건은 닫아야 하는 거지 빨리 닫아야 하는 게 아니야. 자네가 몇 해를 쓰든 상관없어. 다만 닫아야 해."
비앙카가 서류 묶음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필요한 게 있나."
"통행 문서와 각 부대 협조 요청서. 그리고 남서 방면 지도."
"남서."
"발자국이 남서로 나 있었습니다. 열흘도 더 됐으니 의미는 없습니다만, 그 방향으로 간 데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북동은 부대가 있고 북서는 회랑입니다. 동쪽은 강이고요."
"남쪽은."
"남쪽으로 갔으면 지금쯤 잡혔습니다. 마을이 많습니다."
로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서류로 손을 뻗었다. 그것이 나가라는 뜻이었으므로 비앙카가 돌아섰다. 문 앞에서 로르칸이 한 번 더 말했다.
"세렌."
비앙카가 멈췄다.
"그 자산이 왜 삼 년을 버텼는지, 그것도 알아 오게. 살아 있으면 물어보고, 살아 있지 않으면 몸을 보고."
"확인했습니다."

비앙카는 그날 저녁에 자기 방에서 준비를 했다. 마법청 관사의 방이었다. 좁았고 물건이 적었다. 침상 하나, 궤 하나, 벽에 걸린 코트 한 벌. 궤 안에 든 것은 갈아입을 옷 두 벌과 세면 도구와 문서 몇 장이었다.

벽에 검이 걸려 있었다.

비앙카가 그것을 내려서 침상에 앉았다. 무릎 위에 눕히고 칼집에서 뽑았다. 기름 먹인 천으로 칼날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한 방향으로만 훑었다. 다 하고 나면 천을 접어 다른 면을 쓰고 다시 처음부터 훑었다. 세 번 반복했다. 언제나 세 번이었다.

그 동작은 배운 것이었다. 특무 집검관이 되면서 받은 교육 과정에 그것이 들어 있었다. 검 손질법, 인솔 대형, 지시 용어, 보고 양식. 전국의 집검관이 같은 방식으로 배웠으므로 전국의 집검관이 같은 방식으로 검을 닦았다. 북부전선 제4마도대의 가브릴 도른도 같은 방식으로 닦았고, 그 동작을 삼 년 동안 열여덟 번 지켜본 아이가 지금 남서쪽 어딘가에 있었다.

칼날을 다 닦고 나서 비앙카가 칼집을 무릎에 놓았다. 검은 가죽을 씌운 나무였다. 입구에서 손가락 두 마디쯤 내려온 곳에 가는 홈이 파여 있었다. 칼끝으로 그은 자국이었고 깊이와 간격이 일정했다.

첫 줄부터 세면 열아홉이었다.

칼집 한쪽 면이 다 차서 열다섯 번째부터는 반대편으로 넘어가 있었다. 비앙카는 그것을 세지 않았다. 셀 필요가 없었다. 어느 것이 몇 번째인지, 그때 그 아이가 몇 살이었고 어떤 분류였는지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는 것이 직무 능력의 일부였다. 보고서에 적어야 할 항목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는 저울 옆에 서는 서기들과 정확히 반대편에 놓여 있었다. 서기는 얼굴을 외우지 않도록 배치되었고 비앙카는 외우도록 훈련받았다. 둘의 차이는 사람됨이 아니라 직무였다. 잊는 편이 유리한 자리가 있고 기억하는 편이 유리한 자리가 있으며, 어느 자리에 어떤 사람을 두어야 하는지를 마법청은 오래전에 정리해 두었다. 열아홉 번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면서 스무 번째를 하러 나갈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벨류엔 전체에 넷이었다.

비앙카 세렌도 여섯 살에 검사를 받았다. 그때는 기준이 이백분의 일이었으므로 지금보다 까다로웠다. 통과해서 마법청으로 갔고 원적이 말소되었고 열둘에 배치되었다. 분류는 결계형이었다. 번호는 3호였다.

결계형의 평균 존속 기간은 돌파형보다 길었다. 결계형은 앞에 서지 않고 뒤에 서기 때문이었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소모되었다. 결계는 충격을 막는 것이 아니라 받아서 옮기는 것이고, 옮기는 자리가 시전자의 몸이었으므로, 결계형은 크게 다치지 않은 채로 안쪽부터 무너졌다.

비앙카는 열여섯까지 갔다. 그해에 갈비뼈 안쪽에서 뭔가가 잘못되어 석 달을 누워 있었고, 일어났을 때 출력이 절반으로 떨어져 있었다. 출력이 떨어진 자산은 운용할 수 없었다. 그런 경우에 마법청이 쓰는 처리 방식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후방 잡역이었고 하나는 집검관 전환이었다. 후자는 흔하지 않았다. 마법사 출신 집검관은 마법사의 상태를 읽을 줄 알아서 현장에서 유용했지만, 그 자리에 두었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앙카에게 그 자리가 제안되었을 때 하루를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 하루 뒤에 수락했다. 수락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비앙카는 설명이 없다는 것이 설명이라고 생각했고, 그 판단이 맞았는지는 지금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

첫 번째 홈을 그은 것은 스물한 살 때였다. 그 아이는 열셋이었고 포격형이었고 다리를 못 쓰게 된 상태로 적진 안쪽에 남아 있었다. 데리고 나올 수 없는 위치였고 두고 나오면 잡혔다. 잡히면 운용 방식이 알려진다.

비앙카는 규정을 알고 있었다. 제25조와 제26조였다.

그날 밤 돌아와서 칼집에 첫 줄을 그었다. 왜 그었는지는 지금도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다만 그때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그 일이 없었던 일이 될 것 같았고,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마법청 문서에는 그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번호와 분류와 처리 결과만 있었다. 그래서 비앙카는 칼집에 그었다. 그 뒤로 열여덟 번을 더 그었고, 그러는 동안 그 행위의 의미는 조금씩 바뀌었다. 처음에는 기록이었다. 중간쯤부터는 습관이었다. 지금은 둘 다 아니었고 무엇인지는 비앙카도 몰랐다.

칼집을 닦고 나서 비앙카가 그것을 다시 쥐었다.

스무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비앙카 세렌이 벨류엔 왕도를 떠났다. 말을 타고 갔고 혼자였다. 특무 집검관은 인원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사람이 많으면 눈에 띄고 눈에 띄면 상대가 먼저 안다. 짐은 안장주머니 두 개에 들어갔다.

떠나기 전에 마법청 정문에서 통행 문서를 확인받았다. 문서에는 목적이 적혀 있었다. 「분실 자산 회수」. 그 아래 대상란에 이렇게 있었다. 제4마도대 소속, 돌파 7호, 여, 18세.

이름란은 없었다. 양식에 그 칸이 만들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에 남서쪽으로 사백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하나는 덩치가 큰 중년 남자였고 하나는 마른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큰 외투를 입고 있었고 소매가 손을 절반쯤 덮었다.

그 남자의 배낭 안에 노트가 있었고, 노트에는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벨류엔 마법청의 어느 문서에도 없는 것이었다.

비앙카 세렌은 그 추적에 여섯 해를 쓰게 된다. 그동안 쫓는 쪽과 쫓기는 쪽이 여러 번 자리를 바꾸고, 마지막에는 둘 중 누구도 처음에 받은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날 아침 왕도를 나서면서 비앙카가 생각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남서쪽 지형과 검문소의 위치와 열흘이 지난 발자국의 가치에 관한 것이었고, 그 계산은 대체로 정확했다.

다만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분실된 자산이 걷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옆에서 누가 그것의 무게와 먹은 양을 매일 적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적히기 시작한 것은 회수되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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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색


열흘째 되는 날 오후에 길이 나왔다.

개울을 따라 내려가다가 만난 것이었다. 수레바퀴 자국이 두 줄로 나 있었고 그 사이에 말굽 자국이 찍혀 있었다. 흙이 다져져서 단단했고 가장자리에 풀이 눌려 있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었다. 켈리는 그 앞에 서서 한참을 보았다. 열흘 만에 처음 보는 사람의 자국이었다. 회랑에서 본 것들은 사람이 있었던 자국이었지 사람이 다니는 자국은 아니었다. 길을 따라가자 한 시간쯤 뒤에 집이 나왔다. 무너지지 않은 집이었다. 벽이 네 면 다 서 있었고 지붕이 덮여 있었고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그 뒤로 비슷한 집이 열댓 채 더 있었다. 울타리가 있었고 울타리 안에 닭이 있었고 빨랫줄에 옷이 널려 있었다. 마당에서 아이 둘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무언가를 끓이는 냄새가 났다.

켈리는 그 냄새 쪽으로 걸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열흘 동안 잎과 풀뿌리만 먹었고 이틀 전부터는 그것도 제대로 못 찾았으므로, 냄새가 나는 쪽으로 걷는 것 말고 다른 항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물가에 여자가 하나 있었다. 두레박을 올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켈리를 보았다. 이십 보쯤 떨어진 거리였다.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켈리는 보았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여자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사라졌다. 표정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냥 없어졌다. 손에 든 두레박이 도로 우물로 떨어졌고 줄이 풀리면서 두레박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다음에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단어였는데 켈리는 알아듣지 못했다. 이름을 부른 것 같았다. 마당에 있던 아이 둘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 아이가 켈리를 보았다. 그 아이도 여자와 똑같이 되었다. 얼굴에서 뭔가가 사라졌다. 다른 아이는 켈리를 보지 않고 먼저 뛰었다. 뛰는 것을 보고 첫 번째 아이도 뛰었다.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먼 집부터 닫힌 것이 아니라 가까운 집부터 닫혔다. 그러니까 순서가 있었다. 누군가 소리를 지르면 그 옆집이 듣고 닫고, 그 옆집이 듣고 또 닫는 식이었다. 열댓 채가 전부 닫히는 데 스무 숨이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창문의 덧문까지 닫혔다. 빨랫줄에 널린 옷은 그대로 남아서 바람에 흔들렸다. 닭이 몇 마리 마당에 남아 있었다. 닭은 아무것도 몰랐다.

켈리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왜 그런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켈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지팡이를 들고 있었지만 그것은 늘 들고 있는 것이었고, 걸어왔지만 걷는 것은 금지된 일이 아니었다. 손에 무기를 든 것도 아니고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스무 명쯤 되는 사람이 전부 문을 닫았다. 지시를 기다리는 자세가 나왔다. 어깨가 내려가고 시선이 정면보다 조금 아래로 가고 두 손이 앞으로 모였다. 켈리는 그렇게 서서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여전히 몰랐다.

한참 뒤에 문 하나가 열렸다. 남자가 나왔다. 사십 대쯤이었고 손에 쇠스랑을 들고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까지 나와서 멈췄다. 켈리에게서 열 보쯤 되는 자리였다. 더 가까이 오지 않았다. 남자는 쇠스랑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내리지도 않았다. 그냥 두 손으로 자루를 쥔 채로 서 있었고,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보았다.
"가."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가라고."
켈리는 대답할 말을 찾았다. 찾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켈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한 문장이었는데 그 문장은 지금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령을 받았을 때 하는 대답이었고, 명령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었으며, 이 남자는 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돌아서서 열 걸음쯤 걸었을 때 뒤에서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쇠스랑을 떨어뜨린 소리였다. 켈리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 일대 사람들이 남색 로브를 어떻게 아는지는 켈리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는 사람은 여럿이었다. 우물가의 여자는 열한 살 때 그것을 보았고, 쇠스랑을 든 남자는 스무 살 때 보았다. 둘은 다른 마을에서 보았고 다른 해에 보았다. 공통점은 그것을 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옷의 소속을 몰랐고 계급을 몰랐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몇 살인지도 몰랐다. 아는 것은 색과 모양뿐이었다. 남색이고, 가슴에 은실로 둥근 것이 수놓아져 있다. 그것을 본 사람 중에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사람은 없었다. 자세히 알 만큼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그 뒤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틀 뒤에 켈리는 문양을 진흙으로 덮었다. 생각해 내는 데 이틀이 걸렸다. 켈리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명령을 받아서 수행하는 훈련만 받았고, 수행 중에 걸림돌이 생기면 그것은 집검관이 판단할 일이었다.

판단을 대신해 주는 사람이 늘 곁에 있으면 판단하는 능력은 쓰이지 않고, 쓰이지 않는 것은 자라지 않는다. 그것이 무능이라 불리는 상태와 다른 점은 하나뿐이었다. 무능은 없는 것이고 이쪽은 쓰지 못하게 해 둔 것이다. 열두 해 동안 잠겨 있던 것을 켈리는 그 숲에서 하나씩 꺼내 쓰기 시작했으며, 꺼낼 때마다 며칠씩 걸렸다. 이틀은 그중에서도 빠른 축이었다.

그러니까 이틀은 켈리가 혼자서 문제를 찾아낸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도망친 것은 켈리 때문이 아니라 옷 때문이었다. 켈리가 그 결론에 도달한 것은 두 번째 마을에서였다. 두 번째 마을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고, 그 마을에는 켈리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으므로, 같은 결과가 나왔다면 원인은 켈리가 아니라 켈리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였다.

그중에 남과 다른 것은 옷이었다. 옷 중에서도 가슴과 등에 은실로 수놓은 것이었다. 켈리는 그 문양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원이 있고 그 안에서 아홉 가닥이 뻗어 나온다. 멀리서도 보이라고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전장에서 뒤엉키고 연기가 나고 어두워도 집검관이 자기 마법사를 찾을 수 있도록. 찾아서 지시를 내릴 수 있도록. 그 설명에 무엇을 덧붙여야 하는지 켈리는 여전히 몰랐다. 다만 이제 그 은실이 켈리를 죽일 수 있다는 것만은 알았다.

물가로 가서 진흙을 퍼 왔다. 손바닥으로 문질러 발랐다. 은실 위에 두껍게 바르고, 티 나지 않게 가슴 전체에 폈다. 등판은 팔이 잘 닿지 않아서 나무에 등을 대고 비볐다. 다 하고 나서 볕이 드는 자리에 서서 말렸다. 반나절이 걸렸다. 마르면서 색이 옅어졌지만 은실은 보이지 않았다. 켈리는 그것을 성공으로 판단했다.

세 번째 마을은 강 건너에 있었다. 다리가 있었고 다리 끝에 방앗간이 있었다. 켈리가 다리를 반쯤 건넜을 때 비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는 비였다. 그다음에 굵어졌다. 회랑을 벗어난 뒤로 몇 번 비를 맞았고 그때마다 그냥 맞았다. 비를 피하는 방법을 몰랐고 피할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냥 맞으면서 걸었다. 방앗간 앞에 사람이 셋 있었다. 자루를 나르던 중이었다. 그중 하나가 켈리를 보았다. 이번에는 반응이 느렸다. 잠깐 쳐다보다가 다시 자루를 들었다. 켈리는 그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걸어갔다. 열 걸음쯤 더 갔을 때 그 사람이 다시 켈리를 보았다. 이번에는 손에서 자루를 놓았다.

켈리가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진흙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빗물이 가슴께를 타고 내려가면서 갈색 줄을 만들었고, 그 줄 사이로 은실이 드러나 있었다. 원의 윗부분과 가닥 세 개가 보였다. 비에 젖어서 오히려 더 반짝였다.

켈리는 손바닥으로 그것을 문질렀다. 문지를수록 더 씻겨 나갔다. 방앗간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이번에는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조용히 닫혔다.

켈리는 다리 위에 서서 비를 맞았다.

그날 밤 켈리는 로브를 벗었다. 바위 아래 비가 덜 드는 자리를 찾아 들어가서 벗었다. 벗고 나니 속옷 한 겹만 남았다. 안감이 바깥으로 오게 뒤집었다. 안감은 물들이지 않은 삼베였다. 누런빛이 도는 흰색이었다. 입어 보았다. 그리고 바로 알았다.

숲에는 흰 것이 없었다. 나무도 흙도 돌도 풀도 전부 갈색이거나 초록이거나 회색이었다. 흰 것은 멀리서도 보였다. 남색은 어두워지면 덜 보이기라도 했는데 흰 것은 어두울수록 더 보였다.

게다가 문양이 여전히 있었다. 은실은 앞에서 박아 뒤에서 매듭짓는 방식이었으므로 안쪽에도 실이 지나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색만 흐릴 뿐 모양은 똑같았다.

켈리는 그것을 뜯어내기로 했다. 손톱으로 실 한 가닥을 걸어서 당겼다. 실은 촘촘했고 여러 겹으로 박혀 있었다. 당기자 천이 같이 딸려 왔다. 더 세게 당겼다. 손톱이 뒤로 젖혀졌고 그다음에 부러졌다. 엄지손톱 절반이 나갔다. 피가 났다.

다른 손가락으로 해 보았다.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로 물어뜯어 보았다. 실이 끊어지기는 했다. 한 가닥의 일부가 끊어졌다. 아홉 가닥이 각각 수십 번씩 박혀 있었으므로, 그 속도로 하면 며칠이 걸릴 것이었다. 칼이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칼은 없었다. 지팡이 끝은 뭉툭했고 아이언우드는 무엇을 자르는 데 쓰는 나무가 아니었다.

켈리는 한 가지를 더 생각했다. 태우면 된다. 켈리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무언가를 없애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손을 대고 터뜨리면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없어진다. 문양도 없어질 것이었다.

문양이 있는 자리는 가슴이었다. 그 뒤에 있는 것은 켈리였다.

켈리는 그 생각을 접었다. 다시 뒤집어서 제대로 입었다. 젖은 남색 천이 어깨에 무겁게 얹혔다. 속옷 바람으로 밤을 보낼 수는 없었다. 늦겨울이었고 비가 왔고 켈리는 열흘 넘게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랬다. 이 옷을 입으면 사람에게 갈 수 없고, 이 옷을 벗으면 얼어 죽는다. 켈리는 그 두 항목을 여러 번 검토했다. 검토해도 항목은 두 개뿐이었다.

세 번째 항목이 있기는 했다. 다른 옷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켈리의 목록에 들어오지 않은 까닭은 옷을 구한다는 일이 어떤 일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열두 해 동안 켈리가 걸친 것은 전부 지급받은 것이었다. 지급은 정해진 날에 정해진 수량으로 나왔고, 헌 것을 반납해야 새것이 나왔다. 옷이 어디서 만들어지는지, 어떻게 남의 것이 내 것으로 넘어오는지, 값을 치르면 되는 것인지 청구서를 올려야 하는 것인지를 켈리는 알지 못했다. 그 전부를 배우는 데는 그로부터 한 달이 더 걸렸고, 가르쳐 준 사람은 저울을 들고 다니는 중년 남자였다.

열이레째부터는 걷는 것이 어려워졌다. 다섯 갈래 잎은 어디에나 있지는 않았다. 그늘진 비탈에서만 자랐고 그런 비탈이 매일 나오지는 않았다. 이틀에 한 번쯤 찾았고 찾으면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었다. 그것으로는 모자랐다. 모자란다는 것은 숫자로도 알 수 있었다. 부대에서 켈리는 45킬로그램이었다. 기준보다 1킬로그램이 많아서 배식이 반으로 줄었다. 그 1킬로그램은 모래주머니를 지고 매일 삼천 보를 달려서 붙은 것이었다. 그것이 먼저 빠졌다. 팔뚝이 얇아졌다. 손으로 쥐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다음에 허벅지가 빠졌다. 그다음부터는 뺄 것이 없는데도 계속 빠졌다.

켈리는 자기 무게가 알고 싶었다. 저울이 없었다. 저울이 없으면 무게를 아는 방법이 없었고, 무게를 모르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른다. 열두 해 동안 매일 아침 알던 것을 이제 모르게 되었다.

대신 갈비뼈를 세어 보았다. 로브 안에 손을 넣어 옆구리부터 위로 훑으면 뼈가 하나씩 걸렸다. 예전에는 걸리지 않았다. 지금은 여덟 개까지 셀 수 있었다.

여덟은 저울이 아니었지만 숫자이기는 했다. 켈리는 매일 아침 그것을 셌다. 셀 것이 있으면 아침이 아침 같았다.

열이레째 오후에 켈리는 넘어졌다. 돌에 걸린 것도 아니고 미끄러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다리가 안 움직였다. 앞으로 나가야 하는 다리가 나가지 않았고 몸은 이미 앞으로 기울어 있었다. 손을 짚었는데 손도 힘이 없어서 얼굴이 흙에 닿았다. 일어났다. 스무 걸음쯤 가서 또 넘어졌다. 이번에는 일어나는 데 오래 걸렸다.

세 번째로 넘어졌을 때 켈리는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하늘이 보였다.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 사이로 뭔가가 보였다.

연기였다.

마을의 연기와는 달랐다. 굴뚝에서 곧게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가늘게 올라와 흩어지고 있었고, 색이 더 짙었다. 무엇을 태우는 연기인지 켈리는 몰랐다. 다만 연기가 있다는 것은 불이 있다는 뜻이고 불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사람이 있으면 문이 닫힌다. 켈리는 그것을 열흘 동안 세 번 배웠다.

그래도 켈리는 일어났다. 일어나서 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른 항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켈리가 그 남색 로브를 벗는 데는 두 달이 더 걸렸다. 그리고 그것을 벗으라고 말해 준 사람은, 그 옷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 대륙에서 가장 늦게 알게 된 사람이었다.

 

소모 1, 회수 미확인

 

**벨류엔 마법왕국 · 북부전선 제4마도대**

베르단의 일이 종이에 적힌 것은 사건이 있고 사흘 뒤였다.

제4마도대의 서기는 스물넷이었고 이 자리에 온 지 여덟 달째였다. 하는 일은 매일 아침 저울 옆에 서서 숫자를 받아 적는 것과, 출격이 있을 때마다 결과를 정리해 사단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양식은 마법청이 내려보낸 것을 썼다. 종이 한 장에 칸이 일곱 개 있었다. 일시. 부대. 조 번호. 목표. 결과. 인원. 비고.

앞의 네 칸은 쉬웠다. 일시는 초봄 열이튿날 이십이 시경. 부대는 제4마도대. 조 번호는 제3조. 목표는 베르단 공사장 서측 건물. 결과 칸도 어렵지 않았다. 정찰이 돌아와서 확인했고 건물은 없어져 있었다. 달성이라고 적었다.

문제는 여섯 번째 칸이었다.

인원 칸에는 그 조에 속한 사람의 최종 상태를 적게 되어 있었다. 적을 수 있는 말은 넷이었다. 귀환. 전사. 회수. 소모. 이 네 가지 말고 다른 것을 적으면 사단에서 반려되어 내려왔다. 양식에 없는 말은 집계할 수 없고, 집계할 수 없는 것은 문서로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검관 가브릴 도른은 간단했다. 시신을 수습해 왔으므로 전사였다. 마흔여섯이었고 팔 년 근속이었으며 미혼이었다. 서기는 그 줄을 적고 넘어갔다.

돌파 7호가 남았다.

정찰이 가지고 온 것은 이랬다. 도랑 근처에서 집검관의 시신을 찾았다. 그 주변 이백 보를 훑었으나 마법사는 없었다. 로브 조각도 지팡이도 없었다. 흙에 누군가 누웠던 자국이 있었고 그 자국에서 남서쪽으로 발자국이 이어지다가 얼어붙은 지면에서 끊겼다.

서기는 네 개의 말을 하나씩 대 보았다.

귀환은 아니었다.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전사도 아니었다. 전사로 적으려면 시신이 있거나 최소한 죽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야 했다. 회수도 아니었다. 회수는 집검관이 수행하고 집검관이 보고하는 항목이었는데 그 집검관은 같은 서류의 윗줄에서 전사 처리되어 있었다.

남은 것은 소모였다.

소모는 원래 물자에 쓰는 말이었다. 화살 몇 다발 소모, 기름 몇 되 소모, 촉매장 몇 자루 소모. 마법사에게도 그 말을 쓰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서기도 몰랐다. 서기가 왔을 때 이미 양식에 그렇게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마법청 문서과에 가면 알 수 있었다. 사십일 년 전 양식 개정 때 인원 칸의 선택지가 셋에서 넷으로 늘었고, 늘어난 하나가 소모였다. 개정 사유란에는 집계 편의라고 적혀 있었다. 그전에는 시신이 없는 경우를 적을 자리가 없어서 서기들이 저마다 다른 말을 지어 썼고, 지어 쓴 말은 집계에 걸리지 않아 사단마다 숫자가 맞지 않았다. 숫자를 맞추려고 만든 칸이었다. 그 칸을 만든 사람이 마법사를 물자로 여겼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물자 쪽 양식에 들어 있던 말을 가져다 쓰는 편이 새 말을 하나 만들어 결재를 받는 것보다 빨랐을 뿐이다. 사십일 년이 지나는 동안 그 사정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졌고, 말만 남았다.

서기는 붓을 들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옆자리로 갔다. 선임 서기는 마흔쯤이었고 이 부대에 육 년 있었다. 서류를 받아서 한 번 훑고 정찰 보고를 한 번 더 훑었다.
"소모로 적어."
"시신이 없습니다."
"소모에 시신이 있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어. 귀환하지 않았고 전사가 확인되지 않았으면 소모야."
서기가 잠깐 있다가 물었다.
"그러면 살아 있는 경우는 어디에 적습니까."
선임이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 특별한 표정은 없었다. 이런 질문을 처음 받는 것도 아니었다.
"비고에 적어. 회수 미확인."
"그게 무슨 뜻입니까."
"회수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뜻이지."
선임이 다시 자기 서류로 돌아갔다. 서기는 자리로 와서 붓을 적셨다. 그날 서기가 적은 줄은 이랬다.

돌파 7호. 소모 1. 비고, 회수 미확인.

서기는 그 줄을 적으면서 그 아이를 떠올리려고 했다. 매일 아침 저울 옆에 서 있었으므로 얼굴을 여러 번 보았을 것이었다. 떠오르지 않았다. 스물세 명이 전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순서로 올라오는 것을 여덟 달 동안 보았고, 서기가 기억하는 것은 숫자였다. 42, 43, 45, 41. 그중에 45가 하나 있었고 그 숫자는 다른 것들보다 눈에 띄었으므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45가 7호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한 것을 두고 그 서기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는 여덟 달 동안 얼굴이 아니라 눈금을 보도록 그 자리에 배치되어 있었다. 저울 옆에 선 사람이 아이들의 얼굴을 외우기 시작하면 그 일을 오래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마법청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 자리는 이 년마다 사람을 바꾸었다. 여덟 달이면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은 셈이었다.

서류는 그날 밤에 사단으로 갔고 사단에서 이틀 걸려 북부전선 사령부에 도착했다.

마도원수 칼멘 드 바슈는 예순하나였다. 마도라는 말이 붙어 있었지만 마법을 쓸 줄은 몰랐다. 마법사를 운용하는 부대를 지휘한다는 뜻이었고, 그런 직책이 생긴 것은 예순 몇 해 전 전쟁이 길어지면서였다.

칼멘의 하루는 서명으로 시작해서 서명으로 끝났다. 아침에 부관이 서류를 쌓아 놓고 나가면 그것을 위에서부터 한 장씩 읽고 이름을 적었다. 많은 날은 예순 장이 넘었고 적은 날도 서른 장은 되었다. 그날은 마흔두 장이었다.

제3조 건은 열한 번째였다.

칼멘은 그 서류를 읽었다. 읽고 나서 다시 읽었다. 그의 서명 속도로 보면 두 장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부관이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두 번째로 시계를 보았다.
"집검관 도른의 유족 통지는."
"작성했습니다. 아래에 있습니다."
"가족이 있나."
"없습니다. 부모가 다 돌아갔고 형제도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통지는 어디로 가나."
부관이 잠깐 말이 없었다.
"소속 부대에 게시하고 폐기합니다."
칼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통지서에 서명했다. 갈 곳이 없는 종이였지만 서명하지 않으면 절차가 끝나지 않았고, 절차가 끝나지 않으면 그 자리에 다른 집검관을 배정할 수 없었다.
"7호 쪽은."
"마법사 유족 통지는 양식이 없습니다."
칼멘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물어본 것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물어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는 여섯 살에서 여덟 살 사이에 적성 검사로 선발되었고, 선발되면 마법청 소속이 되었으며, 마법청 소속이 되면 원적이 말소되었다. 말소된 원적은 복원되지 않았다. 복원할 수 있게 해 두면 요청이 들어올 것이고, 요청이 들어오면 처리해야 하고, 처리하려면 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법사에게는 돌아갈 곳도 통지할 곳도 없었다. 그것이 마법사를 쓰기 좋게 만드는 조건 중 하나였다.
"알겠다."
칼멘이 제3조 서류에 서명했다. 그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책상 왼쪽 두 번째 서랍에 종이가 한 장 있었다. 여러 번 접었다 폈다 해서 접힌 자리가 해져 있고 아래쪽은 이미 다른 종이를 이어 붙였다. 거기에 번호가 적혀 있었다. 돌파 4호, 결계 2호, 포격 11호, 돌파 6호. 그런 식으로 세 줄에 걸쳐 빼곡했다.

칼멘이 사 년 전부터 적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기가 서명한 번호를 적어 두는 것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법사의 배치는 마법청이 정했고 소모율은 전황이 정했으며 양식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원수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없었다.

사 년 전에 그가 그 종이를 꺼낸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그해 여름에 그는 자기가 방금 서명한 번호가 지난달에 서명한 번호와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같은 번호가 두 번 죽을 수는 없으므로, 그것은 앞의 아이가 없어진 자리에 뒤의 아이가 들어와 앉았다는 뜻이었다. 번호는 자리의 이름이지 사람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그는 삼십 년 넘게 알고 있었고, 알고 있는 것과 알아차리는 것이 서로 다른 일이라는 것은 그해 여름에 처음 알았다. 종이에 번호를 적어 두면 적어도 몇 번째 사람인지는 셀 수 있었다. 그가 사 년 동안 한 일이 그것이었다. 세는 일.

그날 저녁에 칼멘은 그 종이를 꺼내 한 줄을 더 적었다. 돌파 7호. 적고 나서 종이를 접어 넣고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남은 서류를 마저 처리했다. 마흔두 장 중 마지막 장은 다음 분기 충원 요청서였다. 필요 인원이 숫자로 적혀 있었다. 칼멘은 그 숫자를 보고, 지난 분기 요청서에 적혀 있던 숫자를 떠올리고, 두 숫자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서명했다.

같은 날 저녁 제4마도대 막사에서는 저녁 식사가 끝나 있었다.

마법사들은 대개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금지한 규정은 없었지만 다들 하지 않았고, 하지 않는 것이 오래되면 하는 것이 이상해진다. 그래도 소문은 돌았다. 소문은 말보다 빨랐고 말 없이도 돌았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전했는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스물두 명이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

칠호가 안 돌아왔다.

구호는 그 소문을 벽 쪽 자리에서 들었다. 정확히는 두 아이가 낮은 소리로 주고받는 것을 들었다.
"칠호 아직 안 왔대."
"나흘 됐지."
"도망쳤대."
구호는 그 말을 곱씹었다. 도망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여기서 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나간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몰랐고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간 사람이 돌아와서 말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배식 때 구호는 빵을 다 먹었다. 평소에는 삼분의 일쯤 남겼다. 남겨서 소매에 넣었다가 다음 날 낮에 꺼냈다. 그 습관이 언제 생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남겨 두면 줄 데가 있었고, 줄 데가 있으면 남기는 것이 아깝지 않았다. 이제 줄 데가 없었으므로 남길 이유도 없어졌다.

구호는 그것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애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아까워할 만한 것이 애초에 많지 않았고, 많지 않은 편이 견디기 쉬웠다.

이레 뒤에 새로 온 아이가 있었다. 열두 살이었다. 로브가 몸에 비해 컸고 소매를 두 번 접어 올렸는데도 손등을 덮었다. 배치받은 침상은 벽에서 일곱 번째였다. 다음 날 아침 저울 앞에서 서기가 번호를 불렀다.
"돌파 칠호."
아이가 나와서 저울에 올랐다. 접시가 기울었다가 올라왔다.
"39."
기준보다 5킬로그램이 적었다. 배식이 그대로 나갔다. 죽 한 그릇과 빵 한 덩이. 아이는 두 손으로 받아서 물러섰다.

낮 휴식 시간에 구호가 그 아이 옆에 가서 앉았다.
"칠호."
"응."
"너 몇 살이야."
아이가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는데. 열둘이나 열셋."
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매에서 빵을 꺼냈다. 그날 아침에 삼분의 일을 남긴 것이었다. 다시 남기기 시작한 것은 어제부터였다.
"난 오늘 안 뛰니까."
아이가 그것을 받았다. 받아서 한입 베어 물고 나머지를 소매에 넣었다. 구호는 그 동작을 곁눈으로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그런 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 서류의 사본이 벨류엔 마법청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아흐레 뒤였다.

마도상 로르칸 비스는 마법청의 수장이었다. 마법사가 아니었고 군인도 아니었다. 그가 다루는 것은 숫자였다. 마법청은 사람을 뽑아서 가르쳐서 배치하고 소모를 기록하는 기관이었고, 그 네 가지는 전부 숫자로 표현되었으며, 숫자로 표현되는 것은 예측할 수 있었다. 로르칸의 집무실 벽에는 장부가 열두 해 치 꽂혀 있었다. 그날 그가 보고 있던 것은 월간 집계였다. 표가 세 줄이었다. 위는 보충, 가운데는 소모, 아래는 차액. 이번 달 보충은 열아홉이었다. 소모는 스물여섯이었다. 차액은 마이너스 일곱이었다.

로르칸은 그 아래에 지난 열두 달의 차액을 늘어놓았다. 마이너스 사, 마이너스 육, 마이너스 삼, 마이너스 구, 마이너스 오. 열두 달 중 플러스가 난 달은 두 번이었고 두 번 다 대규모 교전이 없던 달이었다.

이 숫자가 뒤집히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마법사 하나를 쓸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데 최소 여섯 해가 걸렸다. 여섯 살에 뽑아서 열두 살에 배치했다. 배치된 뒤의 평균 존속 기간은 열네 달이었다.

들어오는 데 여섯 해가 걸리고 나가는 데 열네 달이 걸리는 구조에서 숫자가 플러스가 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더 많이 뽑는 것이다. 로르칸은 이미 두 번 그렇게 했다. 사 년 전에 적성 기준을 낮췄다. 종전에는 전체의 이백분의 일이 선발되었는데 지금은 백사십분의 일이 선발된다. 이 년 전에는 검사 연령을 여섯 살에서 다섯 살로 내렸다. 어릴수록 적성이 덜 드러나므로 오판이 늘었지만, 오판이 늘어도 총량은 늘었다.

두 조치 다 효과가 있었고 두 조치 다 일회성이었다. 한 번 낮춘 기준은 다시 낮출 때마다 얻는 것이 줄어들었다.

그러니까 세 번째 방법이 필요했다. 로르칸은 그것을 이 년째 검토하고 있었고, 검토 결과는 아직 문서로 만들지 않았다. 만들지 않은 이유는 그 문서가 만들어지는 순간 그것이 결정이 되기 때문이었다.

로르칸은 집계표를 덮고 다른 묶음을 폈다.

「회수 미확인」이라는 항목으로 분류된 건들이었다. 지난 열두 달 동안 열한 건이 있었다. 대부분은 몇 주 안에 정리되었다. 시신이 뒤늦게 확인되거나, 다른 부대에서 발견되거나, 그대로 두어도 무방한 경우였다.

열한 건 중 넷은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로르칸은 그 넷을 한 장씩 넘겼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들어온 것에서 멈췄다.

제4마도대. 돌파 7호. 열여덟 살. 배치 삼 년.

로르칸이 그 줄을 두 번 읽었다.

삼 년이었다. 평균 존속 기간이 열네 달인 곳에서 삼 년이었다. 게다가 돌파형이었다. 돌파형의 평균은 열네 달보다도 짧았다. 로르칸은 지난 육 년치 배치 기록을 머릿속에서 훑었다. 돌파형으로 분류되어 삼 년을 넘긴 사례는 이것 말고 하나뿐이었고 그 하나는 사고로 팔을 잃어 후방으로 빠진 경우였다.

숫자가 맞지 않으면 둘 중 하나였다. 기록이 틀렸거나, 아니면 그 개체가 다른 개체와 다르거나. 로르칸은 붓을 들어 그 줄 옆에 작은 점을 하나 찍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마법청 안에서 세 사람이 알았다. 점이 찍힌 건은 분류 변경 검토 대상으로 올라갔다. 검토가 끝나면 사람이 파견되었다.

그날 로르칸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다음 달 예상 소모를 적는 것이었다. 전황 보고와 계절과 지난 석 달의 추세를 넣어 계산했다. 나온 숫자를 칸에 적었다.

이번 달보다 큰 숫자였다.

그 서류들 어디에도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적을 칸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법사에게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칸도 없었고, 그것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도 여태 없었다.

 

폐허의 사람


연기까지 가는 데 하루가 걸렸다.

거리로는 반나절이면 될 것이었으나 켈리의 다리가 그 속도를 내지 못했다. 백 걸음 걷고 앉았다. 앉으면 일어나는 데 시간이 걸렸으므로 나중에는 서서 쉬었다. 나무에 등을 대고 서서 숨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걸었다. 그렇게 해서 다음 날 오후에 능선을 넘었다.

능선 너머에 있는 것은 마을이 아니었다. 넓은 분지였다. 한때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거기 있는 것은 쇠였다. 켈리가 지금까지 본 어떤 쇠보다도 많은 양의 쇠가 땅 위에 널려 있었고, 대부분이 붉게 녹슬어 있어서 분지 전체가 붉은빛이 도는 갈색이었다. 풀은 자라지 않았다. 자라려고 한 흔적은 있었으나 쇳물이 스며든 땅에서 오래 버티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널려 있는 것들 중에는 큰 것이 있었다. 가장 큰 것은 길이가 스무 보쯤 되었고 높이가 집 두 채를 포갠 만큼 되었다.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몸통이 여러 겹의 판으로 되어 있었고 그 판마다 굵은 못이 줄지어 박혀 있었다. 아래쪽에 바퀴가 있었는데 바퀴가 아니라 바퀴 여러 개를 띠로 감은 것이었고, 그 띠가 끊어져서 늘어져 있었다. 위쪽으로는 관 같은 것이 뻗어 나왔다가 중간에서 부러져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오래 보았다. 무기라는 것은 알았다. 사람이 타는 것이라는 것도 짐작이 갔다. 옆구리에 문이 있었고 문 크기가 사람이 드나들 만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말이 끄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말 스무 마리로도 저것을 끌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런 것이 분지 안에 마흔 대쯤 있었다.

삼십 년 전에 이 분지에서 전투가 있었다. 그때는 여기가 전선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전선은 그 뒤로 북쪽으로 밀렸다가 남쪽으로 밀렸다가 다시 북쪽으로 밀렸고, 그러는 동안 이 분지는 어느 쪽도 지나가지 않는 자리가 되었다. 양쪽 지도에 다 표시되어 있었으나 양쪽 다 그곳에 병력을 두지 않았다. 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쇠는 삼십 년 동안 거기 있었다.

그날 이 분지에서 멈춘 기계는 마흔한 대였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은 백아홉이었다. 양쪽이 다 숫자를 적어 두었는데, 기계 쪽 숫자는 두 기록이 일치했고 사람 쪽 숫자는 어느 쪽에서는 백아홉이고 다른 쪽에서는 백열둘이었다. 그 차이를 맞춰 볼 사람은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기계는 남아서 셀 수 있었고 사람은 남지 않아서 셀 수 없었다. 여기서 쇠를 캐는 사람들이 삼십 년 동안 땅에서 꺼낸 것 중에는 쇠가 아닌 것도 섞여 있었다. 그런 것이 나오면 한쪽에 모아 두었다가 겨울 끝에 한 번씩 묻었다. 묻는 자리는 분지 동쪽 끝이었고 표시는 하지 않았다. 표시를 해 두면 누구 것이냐고 묻는 사람이 생기는데 대답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기는 분지 가운데쯤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가까이 가자 소리가 들렸다. 쇠를 두드리는 소리와 무언가 끌리는 소리와 사람 목소리였다. 켈리는 능선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 소리를 향해 걸었다. 사람이 여럿 있었다. 열 명쯤이었다. 흩어져서 일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쓰러진 기계에 올라가 판을 뜯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뜯어낸 것을 수레에 싣고 있었다. 가운데에 돌로 쌓은 화덕이 몇 개 있었고 거기서 연기가 올라왔다. 화덕 옆에 작은 쇳덩이들이 쌓여 있었다.

켈리가 오십 보쯤 앞까지 갔을 때 한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이 켈리를 보았다. 그리고 옆 사람의 팔을 쳤다. 옆 사람이 고개를 들었고 또 옆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과 비슷했지만 같지는 않았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없었다. 뛰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하던 것을 내려놓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어서 흩어졌다. 수레를 끌던 사람은 수레를 두고 갔고 판을 뜯던 사람은 연장을 챙겨서 내려왔다. 급해 보이지 않았는데 이십 숨쯤 지나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기계 사이로 들어간 것 같았다. 기계가 마흔 대쯤 널려 있는 곳에서 사람 열 명이 숨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켈리는 그 자리에 서서 그것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여기 사람들은 겁을 먹은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익숙한 일을 했다. 이곳에 오는 사람은 여러 종류가 있었고 그중에 군복을 입은 것들이 있었으며, 군복이 나타나면 사라지는 것이 여기 규칙인 모양이었다.

화덕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났다. 수레가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켈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다.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화덕 중 하나 앞이었다. 켈리가 처음에 그를 못 본 것은 그가 앉아 있었고 등이 화덕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흩어지는 동안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켈리가 그쪽으로 걸었다. 가까이 가면서 보니 덩치가 컸다. 앉아 있는데도 컸다. 어깨가 넓었고 팔뚝이 굵었으며 목이 짧았다. 나이는 사십 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머리카락은 회색이 섞인 갈색이고 짧게 깎았는데 고르게 깎이지 않아서 한쪽이 들쑥날쑥했다. 가죽 앞치마를 입고 있었고 앞치마에는 크고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불똥이 튀어서 탄 자국이었다.

그는 집게로 화덕 안의 무언가를 뒤집고 있었다. 쇳덩이였다. 뒤집고 나서 옆에 놓인 나무판에 무언가를 적었다.

켈리가 이십 보까지 갔을 때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켈리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여자의 얼굴에서 사라졌던 것도, 아이의 얼굴에서 사라졌던 것도 그대로 있었다. 그는 눈을 조금 가늘게 떴을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집게를 다시 화덕에 넣었다. 켈리는 멈춰 섰다.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열흘 동안 세 번 같은 일이 일어났고 세 번 다 결과가 같았다. 결과가 같으면 원인이 같은 것이고 원인이 같으면 네 번째도 같아야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켈리가 아는 원인은 옷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옷을 보지 못했거나, 보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두 번째였다. 그는 북쪽에서 왔다. 정확히는 북쪽에서 더 북쪽으로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가 배운 군복은 전부 회색이거나 검은색이었다. 남색에 은실로 원을 수놓은 것은 그의 목록에 없었다. 그가 보기에 그것은 어딘가 부잣집에서 입을 법한 좋은 천이었고, 그 좋은 천이 다 해져서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으며, 그 안에 든 아이가 굶주려 죽기 직전이라는 것이 훨씬 눈에 띄었다.

그 남자는 굶주린 사람을 알아보는 데 익숙했다. 자기가 그랬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뭐 찾나."
켈리는 그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발음이 달랐다. 말 끝이 짧게 끊겼고 어떤 소리는 목 안쪽에서 나왔다. 두 번쯤 속으로 되짚고 나서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이었다.

켈리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찾는 것이 있기는 했다. 먹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말로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열두 해 동안 먹을 것은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배급되는 것이었고, 요청이라는 행위 자체가 켈리의 목록에 없었다.

그래서 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어깨가 내려가고 시선이 정면보다 조금 아래로 가고 두 손이 앞으로 모였다. 남자가 그 자세를 보았다. 잠깐 보다가 다시 화덕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 있으려면 저기 서. 거기 연기 온다."
켈리는 그 말도 한 박자 뒤에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 말이 지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시가 나오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남자가 턱으로 가리킨 쪽으로 다섯 걸음 옮겨 섰다. 남자가 그것을 곁눈으로 보았다. 이번에는 조금 오래 보았다.

시간이 지났다. 얼마나 지났는지 켈리는 몰랐다. 해가 옮겨 간 것으로 보아 한 시간쯤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남자는 쇳덩이를 두 번 뒤집었고 다 된 것을 집게로 꺼내 물에 담갔다. 김이 크게 올라왔다. 꺼낸 것을 옆에 쌓고 나무판에 또 무언가를 적었다. 적을 때마다 몸을 숙였는데 그때 목덜미가 드러났다.

거기에 뭔가가 있었다.

살 밑에 뭔가가 들어 있는 것처럼 불룩했다. 둥글고 매끈했고 크기가 엄지손가락 끝만 했다. 하나가 아니었다. 목덜미에 두 개가 나란히 있었고 그 아래 등 쪽으로 옷깃에 가려 하나가 더 보였다.

켈리는 그것을 보았지만 무엇인지 몰랐다.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물어보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이 켈리 안에서는 여전히 길었다. 남자가 일을 마치고 일어섰다. 화덕의 불을 줄이고 연장을 챙겨 수레 쪽으로 걸어갔다. 켈리가 따라갔다. 따라가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남자가 움직였고 켈리의 몸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다른 항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분지에 서 있을 이유도 없었고 나갈 이유도 없었으며, 움직이는 것이 하나 있으면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열두 해 동안 켈리가 해 온 일이었다.

열 걸음쯤 갔을 때 남자가 돌아보았다.
"따라오지 마."
켈리가 섰다. 남자가 다시 걸었다. 켈리는 서 있었다. 남자가 스무 보쯤 가다가 다시 돌아보았다. 켈리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까 지시한 자리에서 정확히 열 걸음 떨어진 곳이었다. 남자가 잠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그때 켈리가 쓰러졌다.

쓰러지기 전에 몇 가지가 먼저 일어났다. 귀에서 높은 소리가 났다. 이것은 베르단 이후로 익숙한 소리였으므로 켈리는 그것을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다음에 시야 가장자리가 어두워졌다. 어두워지는 것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좁혀 들어왔고, 좁혀지는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다리에 힘이 없다는 것은 이미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정보가 아니었다. 무릎이 접혔다. 옆으로 넘어갔다. 땅에 닿을 때 어깨가 먼저 닿았고 그다음에 머리 옆이 닿았다. 땅에서 쇠 냄새가 났다.

시야가 거의 다 닫혔을 때 켈리는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큰 것이었다. 그것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빠르게 오고 있었다. 그리고 팔이 보였다. 이쪽으로 뻗어 나오는 팔이었다. 굵고 그을렸고 손이 컸다.

켈리의 입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오려고 한 것은 한 문장이었다. 열두 해 동안 그 상황에서 나오게 되어 있는 문장이었고, 그 문장이 마지막으로 나왔던 밤에는 그 뒤에 빛이 왔다.

이번에는 빛이 오지 않았다.

켈리는 그 손이 자기 어깨 아래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몸이 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다음은 없었다.

훗날 켈리는 그 순간을 도랑 가장자리의 그것과 나란히 놓고 여러 번 견주어 보게 된다. 두 손은 비슷하게 생겼고 비슷한 속도로 왔다. 달랐던 것은 그 뒤에 무엇이 왔느냐뿐이었다. 손이 무엇을 하려던 손인지는 손을 보아서는 알 수 없고 그 뒤에 오는 것을 보아야 안다. 그것이 켈리가 그해 봄에 배운 것들 가운데 가장 오래 남았다.

깨어난 것은 냄새 때문이었다.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냄새가 있었다. 뜨겁고 기름지고 짠 냄새였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만은 몸이 알았다. 뱃속이 그 냄새에 반응해서 아프게 조여들었다. 켈리가 눈을 떴다. 천장이 낮았다. 판자를 이어 붙인 천장이었고 틈새로 빛이 가늘게 들어왔다. 낮인 모양이었다. 누워 있는 자리는 흙바닥 위에 깔린 짚이었고 그 위에 천이 덮여 있었다. 담요였다. 켈리는 담요를 덮어 본 적이 몇 번 없었다. 막사에서는 담요가 한 사람당 하나씩 나왔지만 얇아서 덮는 것보다 깔고 자는 쪽이 나았다. 지급 규정에는 담요 일 매라고 적혀 있었고 실제로 일 매가 나왔으므로 규정은 지켜지고 있었다. 두께에 관한 규정은 없었다.

로브는 그대로 입고 있었다. 지팡이는 짚 옆에 놓여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팔이 떨려서 두 번 실패하고 세 번째에 앉았다. 방 안은 좁았다. 세 걸음이면 가로지를 만했다. 한쪽 벽에 선반이 있고 거기에 물건이 잔뜩 쌓여 있었다. 병과 통과 주머니와 쇳조각과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반대쪽에 화로가 있었고 그 위에 냄비가 걸려 있었다.

남자가 냄비 앞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앉은키가 켈리가 선 것과 비슷했다. 나무 주걱으로 냄비 안을 젓고 있었고 저을 때마다 그 냄새가 더 났다.

켈리가 앉은 소리를 들었는지 남자가 돌아보았다.

"깼나."

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필요한 말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었다.

남자가 다시 냄비로 돌아갔다. 한참 더 젓고 나서 국자로 떠서 그릇에 부었다. 나무 그릇이었다. 그것을 들고 와서 켈리 앞 바닥에 놓았다.

켈리는 그것을 보았다.

노란 것이 걸쭉하게 담겨 있었고 위에 기름이 떠 있었다. 건더기가 보였다. 뭔가 잘게 썬 것이 들어 있었다.

켈리는 손을 뻗지 않았다.

뻗지 않은 이유는 절차 때문이었다. 배식은 번호를 부르고, 저울의 숫자가 나오고, 그 숫자에 따라 양이 정해지고, 그러고 나서 받는 것이었다. 지금 그중에 일어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번호가 불리지 않았고 무게를 재지 않았고 양이 정해지지 않았다.

정해지지 않은 것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켈리는 몰랐다. 남자가 그것을 보고 있었다. 켈리가 그릇을 보고 손을 뻗지 않는 것을. 그 얼굴에 뭔가가 지나갔는데 켈리는 그것을 읽지 못했다.
"안 먹나."
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한참 있다가 말했다.
"독 안 탔어."
그 말은 켈리가 알아들었다. 다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여전히 손을 뻗지 못했다.

남자는 더 묻지 않았다. 일어나서 선반 쪽으로 가더니 나무판과 숯 조각을 가지고 돌아와 켈리 맞은편에 앉았다. 나무판을 무릎에 놓고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적으면서 고개를 들지 않고 물었다.
"이름이 뭔가."
켈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름은 있었다. 켈리라는 이름이 있었고 켈리는 그것을 잊은 적이 없었다. 다만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해 본 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부대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묻지 않았고 아무도 그것으로 부르지 않았다. 번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번호가 있으면 이름은 필요하지 않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열두 해 동안 쓰이지 않았으며, 쓰이지 않은 것은 녹슨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켈리를 한 번 보았다. 그리고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릇을 조금 더 가까이 밀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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