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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출국하는 날이 되었다.

공항으로 가는건 S1을 타면되고 지정된 좌석이 없다고 한다. S1을 타는 티켓은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하는 가장 저렴한 것이 한시간짜리가 있어 그것을 예매하려고 했다. 회사카드로 하려니 앱으로 승인이 필요했는데 데이터만 가능한 도시락 심으로는 결제가 불가능했다. 여기서 1차로 헤매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결국 심 교체로 해결했다. 도시락은 데이터만 가능해서 해외로 나왔을 때 받는 안전 안내문자들이 하나도 오지 않았는데 원래 사용하던 유심을 끼우니 안내 문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그런데 헤매는 도중에 낭비된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서비스의 시작 시간을 그대로 둔 채 결재 해버렸다. 어차피 가는데 10여분밖에 걸리지않아 시간을 좀 허비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원래 역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입구 앞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그러고는 시간에 맞춰 지나가는 지상철을 탔다. 타고나서 내 앞에 있는 아가씨에게 공항가는거 맞냐고 물어봤다.
아니라고 했다.
한 정거장만에 내려 다시 걸어서 역으로 갔다. 플랫폼을 찾다가 또 하나를 놓쳤다. 이제 다 확인하고 제대로 기다렸고 S1이 들어왔다. 기차에 타서 멋져보이는 아저씨에게 공항가는 것이 맞냐고 물어보니 또 아니란다.
기차에서 급히 내렸는데 아저씨가 앱으로 막 찾아보면서 따라나와서 S1도 공항 가는게 있고 지나치는게 있단다. 그러면서 여기서 다음차를 타면 된단다. 기다렸다. 그 기차가 떠나자마자 공항가는 S1표시가 사라졌다. 그 기차를 탔어야 했다. 도대체 그 친절한 빌런은 무슨짓을 한거지?
어쩔수없이 다음기차를 기다리다 문득 다른 플랫폼일수도 있겠다싶어 다시 나갔다. 역시나 다른 곳에서 기다려야 했다. 이번에 놓치면 표를 새로 예매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료인터넷이 되는곳을 찾아 유심을 바꿔야 할 위기였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유심은 로밍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이번에는 제대로 탔고 도착시간은 티켓의 종료시간과 일치했다. 기차를 타고가는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인데 티켓시간을 지나칠뻔 했다. 그 짧은 시간에도 티켓 검표원이 왔다. 이건 독일과 확일히 달랐다.
 
그라츠 공항은 상당히 작았다. 외진 시골길 같은 좁은 길을 지나면 덩그러니 혼자 있는 건물이 공항인데 카페하나 면세점 하나 있는 공항이다. 그래도 인터넷으로 여기 면세점에 어떤 물건들을 살 수 있는지 미리 검색해볼 수 있는 서비스가 있다.

 

독일로 가는 비행편은 30분 지연되었다. 제대로 안내도 해주지 않았다. 그냥 고속버스나 기차가 조금 지연되는 것처럼 생각하나보다. 다른 사람들은 다 태연하게 있길래 나만 환승을 하는 줄 알았는데 막상 비행기를 타고나서 몇몇 승객이 환승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봤다.(물론 한국으로 가능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프랑스의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긴급하게 탑승했다. 정작 다른 연결편도 지연도착 했는지 출발까지 지연시키면서 탑승하러 오는 마지막 버스를 기다려줬다.

 

출발시간까지 옆자리가 비어있어 짐을 다 놔뒀더니 마지막 버스를 타고 온 사람이 옆자리의 주인이었다.
루프트한자는 한국행이어서 그런지 한국어 버전의 메뉴 안내도 제공해줬다. 좌석에 디스플레이도 한국어를 지원해준다.
그리고 기내에서 내자리만 USC 충전기가 고장나 있었다. 승무원을 호출했는데 본척도 하지않고 한시간 후에 음료 서비스 하러와서는 끈다. 상황을 말하고 다른 충전할 방법이 없냐고 하니까 없단다. 유럽에서 제일큰 에어라인에 돈 다내고 탔는데 왜 고장난거 써야 하냐고 따졌는데 그냥 방법이 없단다.
보통 비행기에서 노트북도 쓰는데 전원포트도 없고 USB도 안되냐고 짜증이 엄청 났는데 옆자리 사람이 화장실 간 동안 확인해보니 좌석사이 뒤쪽에 충전기를 연결할 콘센트가 있었다.
승무원이 그것만 알려줬어도 좋았을텐데 유렵직원에 대해 다시 편견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사장이라면 유럽인 직원은 뽑기 전에 고민을 많이 해볼 것 같다.

 

한국에 도착은 예정대로 잘 도착했다. 에어프랑스에 너무 호되게 당했는지 갈 때와 올 때 제시간에 도착한 것이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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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엔 여울


**타르실 · 상인 평의회 회계실**


회계실은 평의회 건물 3층에 있었고 창이 바다 쪽으로 났다. 아침이면 돛대들의 그림자가 창살 사이로 들어와 마룻바닥에 가로줄을 긋다가, 해가 오를수록 짧아지며 벽 쪽으로 물러났다. 방은 길었다. 동쪽 끝에 책상이 하나 있었고 서쪽 끝에 책상이 하나 있었다. 두 책상은 서로 등을 지게 놓여 있어서 거기 앉은 서기 둘은 하루 종일 상대의 등만 보았다.
동쪽 책상의 장부는 「사람」이라고 불렸다. 용병을 사고파는 일이 거기 적혔다. 서쪽 책상의 장부는 「말」이라고 불렸다. 소문과 동향과 지도와 숫자가 거기서 팔렸다. 두 서기는 서로의 장부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책상을 등지게 놓은 것은 서른 해 전 어느 의장이었는데, 그가 남긴 말은 한 줄이었다. 타르실은 무엇이든 판다. 다만 누가 샀는지는 팔지 않는다. 바다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그 한 줄을 믿고 이 항구에 짐을 부렸다. 묻지 않는 도시였고, 그래서 적는 도시였다. 적은 것은 산 사람과 판 사람 말고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
두 장부가 같은 자리에 펼쳐지는 것은 하루에 몇 번뿐이었다. 창가 가운데에 의장의 탁자가 있었다. 동쪽 서기도 서쪽 서기도 서명을 받을 때는 장부를 그 탁자로 가져왔다. 의장은 읽고, 웃고, 왼손 가운뎃손가락의 반지를 돌려 인장 면을 아래로 향하게 한 다음 푸른 테를 두른 종이 위에 눌렀다. 저울이 찍혔다. 서기가 장부를 들고 제 책상으로 돌아가면 두 장부는 다시 방의 양 끝으로 갈라졌다.
6월 20일 아침에 동쪽 책상으로 온 손님은 상인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은 맞았는데 서는 자세가 맞지 않았다. 등이 너무 곧았고 두 발이 너무 가지런했다. 동쪽 서기가 그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고, 다 적은 것을 의장의 탁자로 가져왔다.
자하르 무넨은 쉰을 몇 해 넘긴 사내였다. 살집이 있었고 옷은 세 나라의 것을 한 벌에 섞어 입었다. 소매는 남쪽 바다의 줄무늬였고 깃은 로엔의 밀빛이었으며 단추는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손가락마다 반지가 있었다. 웃는 얼굴이었다. 그것이 그의 기본값이었다. 화가 나도 웃었고 손해를 보아도 웃었으며, 타르실 상인들은 그 웃음의 깊이를 읽어 그날 시세를 가늠했다.
그가 종이를 읽었다.
「드란 용병 200. 키엔 여울 남안. 6월 27일 밤 진입. 28일 정오까지 확보. 정오에 고용주의 주력이 깃발을 올리고 북안에서 건넌다. 그 전에 깃발 없이 북에서 오는 것은 적으로 본다. 고용주 표식은 정오에 올린다.」
"정오 전에 북에서 누가 옵니까."
자하르가 물었다. 손님이 대답했다.
"벨류엔 척후가 여울 북쪽 숲을 돈다는 말이 있소."
"그 말은 서쪽 책상에서 사셨습니까."
"아니오."
자하르가 웃었다. 사지 않은 말을 믿고 계약서를 쓰는 사람은 흔했다. 그는 반지를 돌렸고 저울이 푸른 테 안쪽에 찍혔다.
닷새 뒤 저녁에는 서쪽 책상에 손님이 왔다. 아침의 손님과는 다른 사내였다. 손가락 끝이 잉크로 검었고, 서는 자세는 아침의 손님과 같았다. 그는 키엔 여울 일대의 동향을 샀다. 서쪽 서기가 남쪽 가도 세관에서 올라온 통행 기록 사본을 펼쳐 놓고 거기서 한 줄을 옮겨 적었다. 24일. 드란 무리 약 200. 북쪽으로. 키엔 방향. 세관은 행선지를 묻지 않았고 고용주도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은 것은 적히지 않았다.
「드란 용병 약 200, 키엔 남안으로 이동 중. 27일 밤 도착 예상. 고용주 불명.」
"고용주가 누구요."
손님이 물었다.
"타르실은 고객의 이름을 팔지 않습니다."
서쪽 서기가 대답했다. 손님은 더 묻지 않았다. 종이를 받아 들고 서서, 서기의 펜을 빌려 「불명」 옆에 작게 몇 자를 덧붙였다. 서기는 그것을 보았으나 말리지 않았다. 산 종이에 산 사람이 무엇을 적든 그것은 산 사람의 일이었다.
「벨류엔 추정.」
의장의 탁자에서 자하르는 서명하기 전에 그 종이를 한 번 더 읽었다. 드란. 200. 키엔. 닷새 전 아침이 떠올랐다. 그는 손님의 외투 소매를 보았다. 상인 옷이었는데 안감이 강철 회색이었다. 자하르가 웃었다. 아침의 웃음보다 조금 깊었다.
자플랜이 산 드란을 자플랜이 또 사는 것이었다. 제 물건의 행방을 제 돈으로 사는 셈이었다. 타르실 상인들은 그를 「두 번 파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욕이 아니었다. 감탄이었다. 그는 웃으며 생각했다. 큰 나라는 제 안에서는 말이 통한다. 같은 왕관 아래의 방 두 개가 서로에게 말하지 않을 리 없었다.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나라의 일이었다.
반지가 돌았고 저울이 찍혔다. 서쪽 서기가 장부를 들고 제 책상으로 돌아갔다. 두 장부는 다시 방의 양 끝으로 갈라졌다. 두 장부가 만나는 자리는 그 방에 하나뿐이었다. 의장의 왼손 가운뎃손가락이었다.

**자플랜 왕국 · 서부 진격 대대**


6월 27일 밤, 키엔 여울 북안의 풀밭에는 불이 없었다. 유리크 판 카르소는 운반차 짐판에 등불 하나를 엎어 두고 그 아래에 종이 두 장을 나란히 폈다. 빛이 짐판 바닥으로만 새어 나왔다. 기름때 밴 장갑 손가락이 첫 장을 눌렀다. 왼팔의 회색 띠가 등불 가장자리에 걸렸다. 카르소 출신은 자플랜 군복을 입을 때 왼팔에 회색 띠를 둘러야 했다. 규정이었다.
첫 장은 북부군 본영의 명령서였다. 「정오까지 키엔을 건너 남안에 교두보를 세운다. 남안은 확보된다.」 아래에 란돌프 그라이엔의 서명이 있었다. 남안을 누가 확보하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확보된다. 주어가 없는 문장이었다. 본영의 문서에는 그런 문장이 흔했고, 주어가 빠진 자리에는 대개 보급이나 계약이 들어 있었다. 보급과 계약은 카르소계가 결재하지 않는 문서였다. 결재하지 않는 문서는 배포 명단에도 오르지 않았다. 유리크는 그것을 19년 동안 알았고 19년 동안 주어 없는 문장을 읽어 왔다.
둘째 장은 같은 본영 정보과에서 저녁에 내려온 것이었다. 푸른 테를 두른 타르실 종이의 사본이었다. 「드란 용병 약 200, 키엔 남안으로 이동 중. 27일 밤 도착 예상. 고용주 불명.」 그 옆에 다른 손으로 덧붙인 「벨류엔 추정.」
유리크는 두 장을 겹쳐 보았다. 남안은 확보된다. 남안에 오늘 밤 적의 용병이 든다. 두 문장이 같은 땅을 두고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확보하기로 한 무언가가 늦었거나 틀어졌고, 적이 그보다 먼저 들어오는 것이었다. 정오를 기다리면 드란은 밤새 남안의 버드나무 사이에 자리를 팔 것이고, 드란이 판 자리는 하루 만에 요새가 되었다. 드란이 어떤 병사인지는 자플랜 장교라면 다 알았다. 자플랜 군대 안에도 그들이 있었다.
그는 셈했다. 보병 300. 외골격 20. 드란 200. 강폭 120미터. 여울 길은 말뚝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했다. 새벽 4시 반이면 강에서 안개가 오를 것이었다. 이맘때 이 강은 해 뜨기 전에 늘 안개를 냈다.
"4시 반에 건넌다."
부관이 그를 보았다.
"명령서는 정오입니다."
"정오까지다."
유리크가 첫 장의 그 낱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부관은 더 말하지 않았다.
"깃발은 접는다. 안개 속에서 깃발은 표적이다. 소리 내지 않는다. 측심 줄을 맨 앞에. 외골격은 불을 넣지 않고 북안에 둔다."
"기계 없이 드란을 칩니까."
"깊이를 모르는 물에 기계를 넣지 않는다."
연료 한 통으로 물을 건너는 시간은 1시간 20분이었다. 외골격 한 벌은 120킬로그램이었고 가슴판은 안에서 빗장을 걸었다. 말뚝 사이가 생각보다 깊으면 그 120킬로그램은 그대로 가라앉을 것이었다. 유리크는 그 셈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부관을 언덕 위 세관으로 보냈다. 타르실 땅에서 무장한 채 여울을 건너려면 허가가 있어야 했고, 허가에는 값이 있었다. 정오의 허가를 새벽으로 당기는 값은 따로 붙었다. 유리크는 그 웃돈의 액수를 장부에 적게 했다.

**드란 · 키엔 여울 남안**


같은 밤 남안의 물은 검었다. 별빛이 물살에 부서져 군데군데 희끗거렸을 뿐 강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들리는 것은 자갈 위를 넘는 물소리였다. 레크는 허리까지 물에 들어가 말뚝 하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참나무 말뚝이었다. 머리에 타르실 세관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저울 모양이었다.
"뽑아."
호른 가르가 말했다. 호른은 물가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마흔 남짓이었고 코가 한 번 부러졌다가 비뚤게 붙어 있었다. 회갈색 모피 어깨걸이에 산양 뿔 단추가 둘 달려 있었다.
레크가 말뚝을 흔들었다. 바닥의 자갈이 말뚝을 놓지 않으려 했다. 세 번을 흔들고서야 뽑혔다. 물이 소용돌이치며 뽑힌 자리로 몰려들었다.
"그거 세관 거잖아요."
"세관 건 정오에 도로 꽂아 주면 돼."
"왜 옮겨요."
호른이 손가락으로 물을 가리켰다. 레크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호른에게는 보이는 모양이었다.
"얕은 길은 저 자갈톱을 따라 비스듬히 건너가. 말뚝이 그 길을 따라 열 걸음마다 하나씩 서 있지. 넷째부터 동쪽으로 반 걸음씩 옮겨. 일곱째쯤 가면 표시는 소 위에 서 있게 돼."
"소요?"
"깊은 데. 사람 키 둘."
레크는 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레크가 태어난 마을에도 강이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늘 차고 빨랐고, 마을 아이들은 걷기 전에 여울을 읽는 법을 먼저 배웠다. 물빛이 바뀌는 자리, 물살이 주름지는 자리, 돌이 둥글어지는 자리. 산사람은 여울을 안다. 그래서 산 아래 사람들은 드란을 샀다.
"정오에 우리 편이 오면요."
"깃발을 들고 오지. 그럼 소리쳐서 알려 주면 돼. 말뚝 옮겼다고."
"깃발 없이 오면요."
"계약서에 적혀 있잖아."
호른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개켜진 천이었다. 등불이 없어서 색은 보이지 않았다. 레크는 저녁에 그것을 한 번 보았다. 강철 회색 바탕에 진홍색으로 무언가가 수놓여 있었다. 정오가 되면 그것을 창끝에 매달아 올리기로 되어 있었다. 고용주의 주력이 그것을 보고 건너올 것이었다.
"정오 전에 깃발 없이 북에서 오는 것은 적이다."
호른이 천을 도로 품에 넣으며 외었다. 드란 용병대는 싸우기 전날 밤 계약서를 소리 내어 한 번 읽었다. 글을 읽는 사람이 읽고 나머지는 들었다. 들은 것은 잊지 않았다. 드란에서는 계약서가 먼저였다. 고용주의 얼굴보다, 고용주의 나라보다, 고용주가 내일 무슨 말을 하든 그보다 먼저였다. 그래야 다음 고용주가 드란을 샀다.
레크가 다섯째 말뚝을 뽑아 반 걸음 동쪽으로 옮겨 꽂았다. 물살이 발목을 감았다가 풀었다. 레크는 열일곱이었고 이번이 첫 계약이었다. 마을을 떠날 때 어머니는 계약서가 먼저라는 말을 세 번 했고, 레크는 세 번 다 들었다.
새벽 3시가 지나자 물에서 김이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 위에 얇게 깔렸다가 금세 무릎 높이가 되었고, 다시 허리 높이가 되었다. 버드나무 줄기가 아래에서부터 지워졌다. 호른이 일어서서 모두를 버드나무 사이로 물렸다. 방패들이 줄을 맞췄고 투석끈이 허리에서 풀렸다. 레크는 짧은 창을 쥐고 방패 뒤에 무릎을 꿇었다. 손이 차가웠다. 물에 오래 있었기 때문이라고 레크는 생각했다.

**타르실 · 키엔 세관**


세관은 북안 언덕 위에 있었다. 돌로 쌓은 이층집이었고 지붕에 저울을 새긴 풍향판이 달려 있었다. 자하르는 전날 저녁에 도착했다. 정오에 자플랜 대대가 여울을 건넌다고 했다. 보병 300에 외골격 20이었다. 통행료는 머릿수와 기계 수로 받았다. 그해 키엔에서 받을 가장 큰 값이었고, 타르실 의장은 큰 값이 들어오는 날에는 직접 입회했다. 게다가 그는 그 기계라는 것을 아직 한 번도 제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새벽 3시쯤 세관장이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키가 작은 노파였고 손에 등잔과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대대가 도하를 새벽으로 당겼습니다. 4시 반입니다. 웃돈을 냈습니다."
"왜."
"부관 말로는 정찰 정보에 남안에 적의 용병이 든다고."
자하르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멈췄다. 웃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웃음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 세관장은 그 얼굴을 서른 해 동안 보아 왔지만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남안의 드란은 자플랜 작전과가 산 것이었다. 그 계약서에 그는 6월 20일 아침에 서명했다. 남안에 적의 용병이 든다는 말은 자플랜 정보과가 산 것이었다. 그 종이에 그는 6월 25일 저녁에 서명했다. 두 장을 다 본 사람은 이 땅에 그 하나였다. 큰 나라의 방 두 개는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나라의 일이라고, 닷새 전 저녁에 그는 생각했다. 그 나라의 일이 지금 언덕 아래 물가에 있었다.
그가 탁자에 앉아 종이를 당겼다. 펜에 먹을 묻혔다. 「남안의 드란은 귀측 작전과가 고용한 것임.」 한 줄이었다. 그 한 줄을 언덕 아래 대대에 내려보내면 되었다. 세관장이 등잔을 든 채 그것을 기다렸다.
자하르는 그 종이를 보았다.
그 한 줄은 한 고객의 계약을 다른 고객에게 파는 것이었다. 작전과와 정보과는 같은 왕관 아래 있었으나 타르실 장부에는 다른 고객으로 적혀 있었다. 동쪽 책상과 서쪽 책상은 서른 해 동안 등을 지고 앉았다. 그 등과 등 사이에 이 도시가 있었다. 오늘 이 한 줄이 언덕을 내려가면, 내일부터 바다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타르실에 무엇을 사러 오든 그 값에 한 가지를 더 셈해야 했다. 내 이름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팔릴 수 있다는 것. 그 셈이 한 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았다. 신용은 그런 물건이었다.
"의장님."
"기다리게."
그는 종이를 접었다. 접은 것을 펴서 다시 읽었다. 한 줄은 그대로였다. 창밖은 검었다. 4시에 강에서 안개가 오르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안개는 물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차오르는 것 같았다. 여울이 지워졌고 버드나무가 지워졌고 북안의 풀밭이 지워졌다. 운반차의 검은 윤곽들이 흰 것 속에 마지막까지 떠 있다가 가라앉았다.
4시 반에 아래에서 소리가 올라왔다. 물을 헤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었는데 곧 다른 소리가 섞였다. 사람이 소리를 지르는 소리였다. 자하르는 종이를 쥔 채 창가에 섰다. 지금 이 종이를 들고 누군가 언덕을 뛰어 내려간다 해도 저 흰 것 속에서 누구에게 건넬 수 있을지 그는 알지 못했다.

**타르실 · 키엔 여울**


물은 허리까지 올라왔고 생각보다 찼다. 슈텐 판 카르소는 맨 앞에 있었다. 열아홉이었다. 왼팔에 회색 띠를 맸고 오른손에 3미터짜리 장대를 쥐었다. 허리에는 밧줄이 감겨 있었고 그 밧줄은 뒤의 열 명을 거쳐 북안의 말뚝에 매여 있었다. 슈텐은 수심을 측정하는 측심병이었다. 앞에 아무도 없는 자리가 측심병의 자리였다. 카르소 관구에서 징집된 아이들은 대개 그런 자리에 섰다.
안개 속에서는 세 걸음 앞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말뚝이 보였다. 말뚝 하나를 지나면 안개 속에서 다음 말뚝의 머리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저울 낙인이 찍힌 참나무 머리였다. 슈텐은 그 머리를 보고 걸었고, 장대로 앞의 바닥을 짚으며 걸었다. 장대 끝에 자갈이 닿았다. 닿으면 한 걸음 나갔다. 닿으면 또 한 걸음. 뒤의 사람들은 슈텐의 등을 보고 걸었다. 소리를 내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물소리만 났다. 삼백 명이 물을 헤치는 소리는 물소리에 묻혔다.
셋째 말뚝을 지났다. 넷째를 지났다. 다섯째 말뚝 앞에서 장대가 조금 깊이 들어갔다. 슈텐은 멈추지 않았다. 다섯째를 지나자 물이 가슴께로 올라왔다. 여섯째 말뚝 머리가 안개 속에 떴다. 슈텐이 장대를 앞으로 내밀었다.
장대가 바닥에 닿지 않았다.
3미터짜리 장대가 손잡이까지 물에 잠겼는데 아무것도 짚이지 않았다. 슈텐이 멈췄다. 뒤에서 누가 슈텐의 등을 밀었다. 슈텐의 발이 앞으로 미끄러졌다. 발밑의 자갈이 끝나 있었다. 끝난 자리에서 바닥이 비스듬히 아래로 꺼졌고 물살이 그쪽으로 빨려 들었다. 슈텐의 몸이 기울었다. 허리의 밧줄이 팽팽해졌다. 뒤의 사람이 밧줄을 붙잡았고, 그 뒤의 사람이 그 사람을 붙잡았다. 줄이 슈텐을 붙들었다.
슈텐의 옆으로 두 사람이 지나갔다. 줄에 매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말뚝을 보고 걷던 사람들이었다. 둘은 슈텐처럼 기울었다가 슈텐처럼 붙잡히지 못했다. 흰 안개 속에서 물이 두 번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갑옷을 입은 사람은 물에 뜨지 않았다.
"말뚝이 옮겨졌다!"
슈텐이 소리쳤다. 소리 내지 말라는 명령을 그가 처음으로 어겼다. 소리가 안개 속으로 번졌다. 뒤에서 누군가 그 말을 되받았다. 그 뒤에서도 받았다. 말이 줄을 타고 북안으로 넘어갔다.
"여울을 아는 놈들이다."
누군가 말했다. 그 말도 줄을 타고 넘어갔다.
그때 남안 쪽 안개 속에서 소리가 왔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굵고 짧았고 낯선 억양이었다. 슈텐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그 억양은 알았다. 관구의 공방에도 그런 억양으로 말하는 노인이 하나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었다.
"드란이다."
슈텐이 중얼거렸다. 정보대로였다. 남안에 드란이 있다고 했고, 드란은 여울을 알았고, 여울을 아는 놈들이 말뚝을 옮겼다. 하나도 틀린 데가 없었다. 맞는 것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그 소리는 더 적의 소리가 되었다.
남안에서 레크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호른 가르의 목소리였다. 호른은 안개를 향해 드란 말로 물었다. 어느 쪽이냐. 대답이 없었다. 물 헤치는 소리만 났다. 깃발도 없었다. 안개 속에서 깃발이 보일 리 없었으나 계약서에는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가 적혀 있지 않았다. 깃발 없이 북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오 전이었다.
"던져."
투석끈이 돌기 시작했다. 바람을 찢는 소리가 버드나무 사이에서 났다. 돌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어딘가에서 쇠에 맞는 소리가 났고 어딘가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레크는 방패 뒤에서 창을 쥐었다. 손이 떨렸다. 떨리는 것이 차가워서가 아니라는 것을 레크는 그제야 알았다.
자플랜 보병이 말뚝 길을 버리고 장대를 쥔 아이의 줄을 따라 자갈톱을 더듬어 올라왔다. 줄이 옳은 길을 찾았다. 그러나 옳은 길은 폭이 좁아서 셋이 나란히 서지 못했고, 그 좁은 끝에 드란의 방패가 기다리고 있었다. 물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한 번에 하나씩이었다. 허리까지 젖은 다리는 무거웠다. 방패 사이로 짧은 창이 나갔다가 들어왔다.
레크 앞으로 한 사람이 올라왔다. 밧줄을 매지 않은 사람이었다. 안개 속에서 먼저 보인 것은 강철 회색이었다. 젖어서 거의 검었다. 그다음에 얼굴이 보였다. 레크와 나이가 비슷했다. 그 사람이 칼을 들었다. 레크가 창을 내밀었다. 배운 대로였다. 창끝이 무언가에 걸렸다가 들어갔다. 그 사람이 물가에 무릎을 꿇었다. 왼팔에 회색 천이 감겨 있었다. 레크는 그 천이 무엇인지 몰랐다. 벨류엔 놈들도 팔에 띠를 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 사람에 관해 레크가 한 생각의 전부였다. 그 사람이 앞으로 쓰러졌고 물이 그 사람을 끌어갔다.
강은 서쪽으로 흘렀다. 서쪽 끝에 바다가 있었고 바다 어귀에 타르실의 항구가 있었다. 여울에서 번진 붉은 것이 물살을 타고 그쪽으로 길게 풀려 갔다. 안개 아래로 흘러서 아무도 보지 못했다.
북안 풀밭에서 유리크 판 카르소는 숫자를 받았다. 전령이 물에 젖은 채로 와서 불렀다. 측심 줄은 길을 찾았다. 말뚝 길은 소로 이어졌다. 소에서 꺼내지 못한 사람이 몇. 자갈톱 끝에 방패가 있다. 방패 너머에서 돌이 온다. 드란이다. 유리크가 그 숫자들을 받아 머릿속 셈에 더했다. 셈은 어떻게 해도 같은 자리로 갔다. 좁은 길 끝에 선 드란을 보병으로 밀어내려면 보병이 남지 않았다.
운반차 위에서 외골격들이 불을 넣지 않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부관이 그쪽을 보았다. 유리크는 보지 않았다. 말뚝이 소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그는 방금 들었다. 120킬로그램은 가라앉았고 가슴판의 빗장은 안에서 걸렸다. 그는 기계를 넣지 않았다. 기계는 남았다. 사람이 줄었다.
7시 반에 그가 물러나라고 명했다. 그리고 다시 모이라고 명했다. 안개 속에서 흩어진 보병을 모으려면 그들이 보고 찾아올 것이 있어야 했다.
"깃발을 편다. 외골격 불 넣어라. 물가에 벽을 세운다."

안개는 8시가 지나서 걷혔다. 아래에서 위로 걷혔다. 물이 먼저 드러났고 그다음에 말뚝들이 드러났다. 넷째부터 일곱째까지 말뚝이 동쪽으로 휘어 있었고, 그 휜 줄 아래의 물빛만 유난히 짙었다. 버드나무가 드러났고 북안의 풀밭이 드러났다. 그 풀밭 물가에 쇠틀들이 한 줄로 서서 김을 뿜고 있었다. 쉭. 쉭. 그 뒤로 깃발들이 펴져 있었다. 강철 회색 바탕에 진홍색 왕관이었다.
호른 가르가 그것을 보았다.
그의 손이 품으로 갔다. 개켜진 천을 꺼냈다. 펴지 않아도 알았다. 강철 회색이었고, 접힌 자리 사이로 진홍색 실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그는 강 건너의 깃발을 보았고 손에 든 천을 보았다. 두 번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레크의 창을 빼앗아 그 끝에 천을 매었다. 매는 손이 매듭을 두 번 놓쳤다. 품에서 계약서도 꺼냈다. 푸른 테를 두른 종이였다. 그것도 창끝에 꿰었다. 창이 올라갔다.
북안에서 유리크가 망원경을 들었다. 놋쇠 통 안에서 남안의 창끝이 둥글게 떠올랐다. 강철 회색 천에 진홍 왕관. 그 아래 푸른 테를 두른 종이 한 장. 유리크는 그 종이의 테를 알았다. 지금 그의 부관 품에도 같은 테를 두른 종이가 있었다.
"멈춰."
유리크가 말했다. 처음에는 낮게 말했고 두 번째는 크게 말했다. 물가의 보병들이 멈췄다. 부관이 품에서 정찰 정보 사본을 꺼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그것을 들고 서 있었다. 유리크가 그 손목을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강 양쪽에서 푸른 테를 두른 종이가 한 장씩 올라가 있었다.
언덕 위 세관의 창가에서 자하르 무넨은 그것을 보았다. 세관에는 여울을 건너는 수레를 세는 데 쓰는 망원경이 있었다. 그 망원경으로 그는 남안의 종이를 보았고 북안의 종이를 보았다. 글씨는 보이지 않았다. 테는 보였다. 테 안쪽 아래 귀퉁이에 무엇이 찍혀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저울이었다. 같은 반지가 찍은 저울이었다. 그 반지가 지금 그의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있었다. 그는 망원경을 내려놓고 그 손을 오므렸다. 반지의 인장 면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손을 펴지 않았다.
벨류엔은 그날 키엔에 한 사람도 보내지 않았다.
여울 가운데 자갈톱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 둘 다 허리까지 물에 잠겨 있었다. 호른 가르가 계약서를 내밀었고 유리크 판 카르소가 정보 사본을 내밀었다. 둘은 서로의 종이를 읽었다. 글씨는 달랐다. 한 장은 동쪽 책상의 서기가 썼고 한 장은 서쪽 책상의 서기가 썼다. 인장은 같았다.
"우리 계약에는 너희를 치는 조항이 없었다."
호른이 말했다.
"내 명령서에는 너희가 없었다."
유리크가 말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 명령서에 왜 드란이 없었는지 그는 알았다. 주어가 없는 문장이었다. 그 주어를 지운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왼팔에 감긴 것이 물에 젖어 무거웠다. 그것을 이 산사람에게 설명할 말은 없었다.
그날 키엔에서 자플랜 정규 대대는 38명을 잃었고 61명이 다쳤다. 드란 용병대는 19명을 잃었고 34명이 다쳤다. 동쪽으로 휜 말뚝 넷 아래의 소에서 건져 낸 사람이 가장 많았다. 유리크는 그 숫자를 외웠다. 외운 숫자를 종이로 옮길 때 하나도 흘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외골격 20벌 가운데 잃은 것은 없었다.
드란은 정오가 되기 전에 남안을 떠났다. 계약은 정오까지였고 정오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들은 죽은 이들을 버드나무 가지로 엮은 들것에 실었다. 산까지는 아흐레 길이었다. 레크는 들것 하나의 앞쪽 손잡이를 잡았다. 잡기 전에 물가에서 손을 오래 씻었다.
"누가 우리를 쳤어요?"
레크가 물었다. 호른 가르는 대답하기 전에 오래 걸었다.
"고용주가."
사실이었다. 그 짧은 말은 드란 사람들보다 먼저 산을 올랐다.
언덕 위 세관에서 서기가 장부를 펴 놓고 자하르를 기다렸다. 펜 끝이 오늘 날짜 줄 위에 멈춰 있었다.
"통행료는 어떻게 적습니까."
"건넌 수만 적게."
서기가 적었다. 「6월 28일. 키엔 여울. 통행 0.」
"수입은요."
자하르가 잠깐 있다가 말했다.
"둘."
서기가 적었다. 용병 중개료 하나, 정보 매매료 하나. 새벽 도하 웃돈은 허가에 붙은 값이라 따로 적었다. 타르실은 건넜는지를 묻지 않았다.
자하르가 서기의 손에서 펜을 받았다. 그 줄을 오래 보다가 줄 바깥 여백에 무언가를 적었다. 타르실 장부에는 사람의 수를 적는 칸이 없었다. 적을 칸이 없어서 그는 여백에 적었다.
「건너지 못한 사람 57.」
그는 펜을 돌려주었다. 왼손은 그때까지도 오므린 채였다. 서기가 장부를 덮으며 의장의 얼굴을 보았다. 웃는 얼굴이 기본값인 사람이었다. 그날 아침 그 기본값은 돌아오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접힌 쪽지 한 장이 보내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다.

 

묻힌 종이

 

**자플랜 왕국 · 카르소 공업 관구 오르트 정제장**


6월 12일 아침, 오르트 정제장의 정문 앞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관은 없었다.
정제장은 죽은 사람을 돌려주지 않았다. 정문 안쪽 어딘가에 묻는다고 했고, 어디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기록에는 열병이라고 적혔다. 오르트에서는 해마다 열병이 돌았다. 열병으로 죽은 사람은 몸을 오래 두면 안 된다는 것이 정제장의 설명이었고, 그 설명은 20년 째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들은 몸 대신 다른 것을 들고 왔다. 그날 앞장선 여자는 널빤지 하나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널빤지 위에 작업 장갑 한 켤레가 얹혀 있었다. 가죽이 닳아 손가락 끝이 반들거렸고 엄지 자리에 기운 자국이 있었다. 그 장갑의 주인은 마흔셋이었고 정제장에서 14년을 일했다.
행렬은 마을에서 정문까지 이어졌다. 길었다. 아무도 노래하지 않았고 아무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걸음만 있었다. 정문 앞에 이르자 맨 앞의 여자가 멈췄고 그 뒤로 사람들이 차례로 멈췄다. 그러고는 섰다. 정문 위 망루에서 감독관 하나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플랜 사람이었다. 강철 회색 제복에 진홍 줄이 하나 있었다. 그는 행렬을 해산시킬 수 없었다. 관구에서는 집회가 금지되어 있었으나 장례는 집회가 아니었다. 장례를 금하는 조항은 없었다. 금하려면 장례가 무엇인지를 문서에 적어야 했는데 그것을 적어 본 사람은 없었다.
하임은 행렬의 중간쯤에 있었다. 서른여덟이었다. 오르트에 온 지 열한 해가 되었고 그사이 손끝이 먼저 늙었다. 처음에는 손가락 끝이 조금 둔했고 그다음 해에는 손톱 밑이 둔했다. 지금은 첫째 마디까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뜨거운 것을 쥐어도 몰랐고 차가운 것을 쥐어도 몰랐다. 손이 무엇을 쥐었는지 알려면 눈으로 보아야 했다. 정제장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되었다. 손끝부터였다. 그다음이 기침이었고, 그다음은 장갑이 널빤지에 얹혔다.
하임의 앞에 마테스가 있었다. 스물둘이었고 정제장에 온 지 세 해째였다. 행렬이 정문 앞에서 멈추자 마테스가 왼팔에 손을 댔다. 회색 띠가 거기 감겨 있었다. 카르소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왼팔에 감았다. 정제장 작업복에도, 징집되어 입는 군복에도, 왕도에 가는 이동 허가증의 사진 자리에도 그 띠가 있었다. 마테스가 매듭을 풀었다. 천천히 풀었다. 띠가 팔에서 떨어져 손에 들렸다.
행렬의 몇이 그것을 보았다. 망루의 감독관도 보았다. 띠를 떼면 처벌이었다. 감독관이 망루의 난간을 짚고 몸을 내밀었다.
마테스는 띠를 떼지 않았다. 오른팔로 옮겼다. 오른팔 위쪽에 띠를 감고 매듭을 지었다. 왼팔에 감던 것과 같은 높이였고 같은 매듭이었다. 그러고는 손을 내리고 다시 정문을 보았다.
감독관이 망루에서 내려왔다. 하임은 그가 초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초소 창으로 그가 책장을 넘기는 것이 보였다. 두꺼운 책이었다. 관구 규정집이었다. 그는 한참 넘겼다. 회색 띠에 관한 조항은 하나였다. 카르소계 신민은 공적 장소에서 회색 띠를 착용한다. 왼팔에. 떼는 자는 처벌한다. 오른팔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규정에는 왼팔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왼팔에 착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뗀 것도 아니라 규정만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려워 감독관이 책을 덮었다.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적을 것이 없었다. 오른팔에 띠를 감은 사람을 무엇이라고 적어야 하는지 그 책은 알려 주지 않았다.
행렬은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정문 앞에 서 있다가 흩어졌다. 흩어지기 전에 널빤지를 든 여자가 정문 철책 아래에 장갑을 내려놓았다. 장갑은 저녁까지 거기 있었다.
그날 오후 감독관이 인부 막사 앞에 명부를 붙였다. 조사대 보충 인부였다. 어디로 가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오르트에서 둘. 하임의 이름이 있었고 그 아래에 마테스의 이름이 있었다. 마테스는 명부를 읽고 나서 오른팔의 띠를 한 번 만졌다. 하임은 자기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짚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옛 돌산 기슭의 구덩이는 깊었다. 바구니로 흙을 날라 올리는 데에도 요령이 있었다. 하임은 그 요령을 이틀 만에 익혔다. 정제장에서 열한 해 동안 무거운 것을 날랐으므로 몸이 먼저 알았다. 다만 손은 매번 눈으로 보아야 했다. 바구니 끈을 쥐었는지, 쥔 끈이 미끄러지지 않는지.
6월 25일 아침 구덩이 벽이 무너졌을 때 하임은 흙더미 위에 있었다. 바구니를 메고 막 올라선 참이었다. 흙먼지가 오르고 고함이 났다. 구덩이 아래에 사람이 둘 깔렸다. 벤노와 아르민이었다. 벤노는 하임과 같은 막사에서 잤고 아르민은 밤마다 피리를 불다가 감독에게 혼났다.
그때 덤불에서 누가 뛰어내렸다. 여자애였다. 마른 아이였고 갈색 외투 자락이 펄럭였다. 막대기를 하나 들고 있었는데 뛰어내리기 전에 그것을 덤불 위에 놓았다. 놓는 것을 하임은 보았다. 그다음은 잘 보이지 않았다. 너무 빨랐다. 여자애가 구덩이 안에 있었고 들보를 들고 있었다. 흙이 얹힌 들보였다. 사람 셋이 들어야 하는 것을 혼자 들고 있었다. 손등에 붉은 줄이 섰다.
마테스가 뛰어내렸다. 쇠뇌병 하나가 그의 팔을 잡았는데 마테스가 뿌리쳤다. 오른팔이었다. 마테스는 들보 밑으로 기어 들어가 손으로 흙을 팠다. 손톱이 들렸다.
하임은 흙더미 위에 서 있었다. 바구니를 멘 채였다. 내려가지 않았다. 내려가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바구니를 내려놓아야 내려갈 수 있었는데 바구니 끈을 쥐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손끝이 말해 주지 않았다. 손은 끈을 쥐고 있었고 하임은 그 손을 보지 않고 구덩이만 보고 있었다. 그러니 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임이 그것을 안 것은 모든 일이 끝나고 벤노가 들것에 실려 올라왔을 때였다. 그때 고개를 숙였고, 자기 손이 아직 끈을 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사이에 본 것은 있었다. 들보 아래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끌려 나오는 동안 여자애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엇을 세는 것 같았다. 그러다 들보 속에서 낮게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여자애가 한 걸음 물러나며 들보를 놓았다. 들보가 둘로 꺾였다. 흙이 마저 내려와 아무도 없는 자리를 덮었다. 덩치 큰 사람 하나가 구덩이 턱에 무릎을 꿇고 팔을 뻗어 여자애를 끌어올렸다. 끌어올리고 나서 그 사람은 여자애의 두 손을 뒤집어 보았다. 손바닥을 보고 손등을 보고 손가락 사이를 보았다. 그러고는 허리춤의 물통을 열어 그 손에 부었다. 다 부었다. 하임은 그것을 알았다. 정제장에서 교대가 끝나면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손끝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눈으로 손을 보고, 무엇이 묻었을지 모르니 물로 씻었다. 그때 물을 아끼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 막사는 조용했다. 낮에 벌어진 일을 두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록에 없는 사람들이 기록에 없는 일을 하다가 기록에 없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 날에는 입을 다무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하임은 등을 대고 누워 천막 천장을 보았다. 옆자리에서 마테스가 몸을 뒤척였다. 손톱이 들린 손가락에 천을 감고 있었다.
"그 큰 사람 봤어?"
마테스가 낮게 말했다.
"어느."
"여자애 끌어 올린 사람. 덩치 큰."
"봤어."
"목에 혹 봤어?"
하임은 기억을 더듬었다. 큰 사람이 여자애를 끌어 올리고 물을 붓던 것은 보았다. 목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임이 본 것은 그 사람의 손이었다. 남의 손을 뒤집어 보던 손이었다.
"정제장에 오래 있던 사람 혹이야."
마테스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 목에도 있었어. 오르트에 스무 해 있던 사람들은 다 그렇게 나. 목 옆에. 콩알만 한 게 하나 나고, 또 하나 나고."
하임이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자기 목에 댔다. 목 옆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손끝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매끈한지 울퉁불퉁한지, 따뜻한지 차가운지도 몰랐다. 손가락이 목에 닿아 있다는 것은 목이 알았다. 목이 아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하임은 손을 내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자리였다.
"그 사람이 거기서 나왔으면."
마테스가 말을 하다 말았다. 하임은 그 뒤를 묻지 않았다. 정제장에서 나온 사람은 없었다. 나왔다는 사람의 이야기는 가끔 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대개 끝이 좋지 않았다.
나흘 뒤 밤에 추적대가 돌아왔다. 낮에 개 셋을 앞세우고 나갔던 쇠뇌병 넷과 회색 외투 하나였다. 돌아온 개는 둘이었다. 둘 다 꼬리를 말고 있었다. 쇠뇌병 하나가 모닥불 앞에 주저앉아 침을 뱉었다.
"계곡에서 냄새가 끊겼어. 거기까진 좋았어."
"그다음은."
"늑대야. 회색 늑대. 숲에서 울더니 개들이 미쳐서 그쪽으로 달려갔어. 셋이 다. 둘은 해 지고 나서 저 혼자 돌아왔고."
"하나는."
"숲으로 들어갔어. 안 나와. 들어간 데로 나오는 숲이라더니 개는 안 나와."
다른 쇠뇌병이 웃었다. 웃음이 짧았다. 하임은 모닥불 너머에서 그 말을 들었다. 늑대가 개를 데려갔다. 그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것이 그냥 늑대라고 믿었다.
이튿날 아침 하임은 물을 길러 개울 위쪽으로 갔다. 홈통 위쪽, 아직 맑은 물이 흐르는 데였다. 물통 둘을 지고 돌아오는 길에 지휘자의 천막 앞을 지났다. 천막 앞에 접이 탁자가 하나 나와 있었고 계급장 없는 사람이 거기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의 짧은 상의 왼쪽 가슴에 글씨가 남아 있었다. 그 아침 구덩이 앞에서 손 둘이 나타나 적고 간 글씨였다. 그는 그것을 모래로 여러 번 문질렀다. 하임은 그가 개울가에서 문지르는 것을 두 번 보았다. 글씨는 흐려졌으나 지워지지 않았다. 잉크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 것 같았다.
하임은 글자를 몰랐다. 숫자는 알았다. 정제장의 할당량은 숫자로 왔다. 하루에 바구니 몇, 한 달에 통 몇. 그래서 하임은 그 가슴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몰라도 그 끝에 무슨 숫자가 있는지는 알았다. 6이었다.
계급장 없는 사람이 펜을 멈췄다. 고개를 숙였다.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거꾸로 읽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하임의 자리에서도 보였다. 6.
그가 옆에 선 쇠뇌병에게 물었다.
"개는."
"셋 중 둘입니다."
"까닭은."
"…늑대가."
계급장 없는 사람이 펜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길게 적었다. 하임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다만 그가 적는 동안 쇠뇌병의 얼굴이 조금 어색해지는 것을 보았다. 자기가 한 말이 그 종이에서는 다른 말이 되어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조금 위쪽에 숫자가 하나 더 있었다. 2. 하임은 그 숫자가 무엇인지 알았다. 벤노와 아르민이었다. 벤노는 다리가 꺾였고 아르민은 갈비뼈에 금이 갔다. 아르민은 그 뒤로 피리를 불지 않았다. 숨을 깊이 쉬면 아프다고 했다. 종이에는 2라고 적혀 있었다. 하임은 물통을 고쳐 지고 지나갔다. 물통 끈을 쥔 손은 이번에도 보아야 알았다.

닷새 뒤 왕도의 대공학원에 짐말 한 필이 들어왔다. 말 등에 봉투 하나와 나무 상자 하나가 실려 있었다. 봉투에는 봉랍이 없었다. 상자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비토르 케른은 동관 맨 끝 방에서 봉투를 먼저 열었다. 칼을 찾지 않고 손톱으로 열었다. 보고서는 한 장이었다. 글씨가 작고 곧았다. 쓴 사람은 그런 글씨를 쓰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6월 25일. 구덩이 일부 붕괴. 인부 2 부상(1 다리 골절). 미확인 인원 6 목격. 그중 1, 벨류엔 강화형 추정. 집검관 없음. 같은 날 밤 외골격 1, 무릎 관절 부식으로 정지. 6월 29일 추적. 계곡에서 냄새 끊김. 야생 동물에 의한 추적 중단. 사냥개 1 미귀환.」
케른의 눈은 「인부 2」를 지나갔다. 머물지 않았다. 인부는 조사대에 늘 딸려 있는 것이었고 둘이 다쳤다는 것은 둘을 다시 보내면 된다는 뜻이었다. 그의 눈은 셋째 줄에서 멈췄다. 벨류엔 강화형 추정. 집검관 없음. 그는 그 두 마디를 두 번 읽었다. 그다음 넷째 줄에서 다시 멈췄다. 무릎 관절 부식.
그가 상자를 열었다. 짚 사이에 쇠붙이 하나가 누워 있었다. 외골격의 무릎 외판이었다. 반원으로 휜 쇠판이었고 안쪽에 맞물림 톱니가 나 있었다. 그가 아홉 해 동안 각도를 맞춘 바로 그 관절이었다. 그 외판이 붉었다. 녹이었다. 녹이 겉에만 앉은 것이 아니었다. 톱니 사이사이에 피어 있었고 맞물리는 면이 부슬부슬 일어나 있었다. 케른이 엄지손톱으로 그 면을 긁었다. 녹이 비늘처럼 떨어져 짚 위에 쌓였다. 그 아래도 녹이었다.
그는 아래층 공방으로 내려갔다. 화로 셋이 달아 있었다. 공방장을 불러 외판을 작업대 위에 놓았다. 공방장은 앞치마에 손을 닦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손가락으로 톱니를 하나씩 짚었다. 한참이었다.
"…쇠가 하루 만에 늙었소."
공방장이 말했다. 남쪽 억양이었다.
"하루가 아니오."
케른이 말했다.
"보고서엔 몇 숨이라고 했소. 사람 하나가 손을 댄 뒤에 섰다고."
공방장이 외판에서 눈을 들었다. 케른을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입이 조금 열렸다가 닫혔다. 그는 외판을 작업대에 내려놓고 다시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이미 닦은 손이었다. 그러고는 화로 쪽으로 돌아갔다. 케른은 그의 등을 잠깐 보았다. 묻지 않았다. 공방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은 대개 말이 적었고, 말이 적은 사람에게 캐묻는 것은 케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외판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 작업대 위에 그가 아홉 해 동안 맞춘 관절이 해체된 채 놓여 있었다. 그 옆에 녹슨 외판을 나란히 놓았다. 같은 모양이었다. 하나는 아홉 해가 걸렸고 하나는 몇 숨이 걸렸다. 걸린 방향이 반대였다.
봉투에 종이가 한 장 더 있었다. 북부군 사령부에서 돌아온 사본이었다. 키엔 여울. 손실 칸에 숫자가 둘 있었다. 「외골격 손실 없음. 사망 57.」 케른은 그 두 줄을 오래 보았다. 기계는 하나도 잃지 않았고 사람은 쉰일곱을 잃었다. 그가 아는 셈으로는 답이 하나였다. 기계를 물에 넣지 않았다. 넣었으면 기계가 막았을 것이다. 그는 수첩을 꺼냈다. 넷째 줄 아래가 비어 있었다.
그가 다섯째 줄을 적었다.
키엔. 기계를 넣지 않았다. 57.
다섯 줄을 위에서 아래로 읽었다. 하나의 생각이 되었다. 그 생각에 그 줄이 꼭 맞았다. 깊이를 모르는 물에 120킬로그램을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그 사본에 적혀 있지 않았다. 적혀 있지 않은 것은 그의 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새 종이를 당겼다. 조사대로 보낼 쪽지였다. 대공학원장에게는 병력을 움직일 권한이 없었다. 예산을 결재할 권한도 없었다. 그래서 그 조사대는 기록에 없었다. 기록에 없는 조사대에 보내는 종이도 기록에 남지 않아야 했다. 그가 짧게 적었다.
「표본. 산 채로. 기록하지 말 것.」
접어서 봉했다. 이번에는 봉랍을 쓰지 않았다. 급사를 불렀다. 급사가 나간 뒤 그는 창가에 섰다. 북쪽 하늘이 맑았다. 작업대 위에서 녹슨 외판이 창빛을 받고 있었다. 녹은 빛을 되비추지 않았다. 그 옆의 관절만 번쩍였다.

7월 7일 오후, 북부군 사령부 란돌프 그라이엔의 집무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전령이 아니었다.
란돌프는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펜을 내려놓았다. 유리크 판 카르소였다. 군복이 먼지로 허옇게 덮여 있었고 장화 뒤축에 마른 진흙이 붙어 있었다. 키엔에서 여기까지는 말로 나흘이었다. 그는 나흘을 달려왔다. 반박문은 대개 전령이 들고 왔다. 하렐 때도, 툰델 때도 유리크는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리크가 종이 한 장을 책상에 놓았다. 경례는 규정대로 했다. 란돌프는 종이를 집지 않고 먼저 그를 보았다. 그가 이 방에 혼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앉으시오."
"서 있겠습니다."
란돌프가 종이를 집었다.
그는 이레 전에 키엔 보고서를 쓸 때를 떠올렸다. 「명령된 정오를 기다리지 않고 미확인 정보에 의거 새벽 독단 도하. 남안의 아군 고용 용병과 교전. 정찰 실패.」 거짓은 한 글자도 없었다. 다 쓰고 나서 그는 한 줄을 덧붙일까 생각했다. 「계약 문서는 배포 규정에 따라 선봉대에 통보되지 않음.」 그것도 사실이었다. 그 한 줄을 적으면 배포 규정이 보고서에 오른다. 보고서에 오른 규정은 어전에서 문제가 된다. 규정을 문제 삼은 기록은 자플랜군 역사에 없었다. 그는 그 줄을 쓰지 않았다. 하렐에서도 그랬다. 쓰지 않은 줄은 늘 그렇게 빠졌다.
반박문은 짧았다. 글씨가 작고 곧았으며 숫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아라비아 숫자로 적혀 있었다. 란돌프는 그 글씨를 알았다. 툰델의 상보도 같은 손이 썼다. 반박문은 그가 보고서에 쓰지 않은 그 한 줄로 끝나 있었다.
「본 대대는 드란 용병 고용 계약을 통보받지 못했다. 계약 문서는 카르소계 지휘관 배포 명단에서 제외된다.」
란돌프의 눈이 마지막 구절에서 멈췄다. 카르소계. 그 세 글자를 그는 수백 번 문서에서 보았다. 인사 서류에서, 배치표에서, 배포 명단의 각주에서. 언제나 다른 사람의 손으로 적힌 것이었다. 그 세 글자를 판 카르소가 제 손으로 쓴 것을 그는 처음 보았다. 획이 다른 글자보다 조금 깊었다. 펜을 세게 눌렀거나 오래 댔거나.
"틀린 데가 없소."
란돌프가 말했다.
"그럼."
"그럼."
란돌프가 펜을 들었다. 반박문 아래 여백에 처리 의견을 적었다. 적으면서 소리 내어 읽었다. 숨길 까닭이 없었다. 숨길 것이 하나도 없는 문장이었다.
"결재 권한 밖 문서 인용. 서고 보관."
유리크는 움직이지 않았다.
"제가 인용한 계약서는 장군께서 서명하신 명령서와 같은 날 나간 것입니다."
"그렇소."
"저는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소. 그리고 귀관은 그 문서를 볼 권한이 없소. 볼 권한이 없는 문서를 근거로 쓴 반박은 받을 수 없소. 규정이오."
"보지 못해서 57이 죽었습니다."
"그 숫자는 내 보고서에 있소."
란돌프가 말했다.
"내가 올렸소. 하나도 줄이지 않았소."
그것도 사실이었다. 유리크가 그를 보았다. 툰델의 상보를 쓴 사람의 눈이었다. 묻는 자리에서 종이를 뒤적이지 않으려고 숫자를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 눈이 지금 무엇을 외우고 있는지 란돌프는 알 수 없었다.
"규정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란돌프가 펜을 내려놓았다.
"규정을 문제 삼으시오. 규정을 문제 삼는 문서를 따로 올리면 되오."
유리크가 입을 열었다. 란돌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문서도 권한 밖이오만."
방 안이 조용했다. 창밖 안뜰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가 멀어졌다. 의자 등에는 강철 흉갑이 걸려 있었고 그 위에 진홍 망토가 개켜져 있었다. 유리크의 눈이 그 흉갑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그 종이를 제가 다시 가져갈 수는 없습니까."
"접수된 문서는 돌려주지 않소."
란돌프가 말했다.
"규정이오."
유리크가 경례했다. 규정대로였다. 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었다. 문고리를 잡기 전에 그가 왼팔에 손을 댔다. 회색 띠를 한 번 고쳐 맸다. 생각 없이 나온 동작이었다. 란돌프는 그 동작을 보았다. 어전에서도, 사령부 복도에서도 그는 그것을 여러 번 보았을 것이었다.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처음 본 것 같았다.
문이 닫혔다.
란돌프는 한동안 반박문을 들고 있었다. 처리 의견은 이미 적혀 있었다. 서기를 불러 넘기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는 서기를 부르지 않았다. 대신 반박문의 마지막 구절을 한 번 더 읽었다. 카르소계. 깊게 눌린 세 글자였다.
그는 그날 저녁에 만족하지 않았다.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먼저 알아차렸다. 팔백 미터를 얻은 날에도 그랬다. 그때 그는 그것을 피로라고 정리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정리했다. 그 정리가 편했다. 편한 정리는 오래갔다. 그는 서기를 불러 반박문을 넘기고, 의자 등의 흉갑을 무릎에 올려 마른 천으로 닦았다. 아침에 이미 닦은 것이었다.
그 종이는 엿새 뒤 왕실 서고에 꽂혔다. 서고지기는 처리 의견을 보고 선반을 골랐다. 「권한 밖」이라고 적힌 선반이었다. 그는 종이를 읽지 않았다. 처리 의견이 적힌 종이는 읽지 않는 것이 서고의 일이었다. 그 선반에는 먼저 꽂힌 종이들이 있었다. 서명이 「판 카르소」로 끝나는 종이가 여럿이었다.

**벨류엔 마법왕국 · 왕도 마법청 회수과**


회수과 뒤채의 책상 넷 가운데 셋이 비어 있었다. 툰델에서 결계선이 무너진 뒤로 전선을 벗어난 자산이 한꺼번에 쏟아졌고, 특무 집검관 셋은 한 달째 그 건들을 따라 북부를 돌고 있었다. 닷새 전 2분기 보충률 회의에서 분실 칸에 처음으로 두 자리 숫자가 적혔다. 남서 방면의 미결 한 건은 그 숫자 아래로 밀려 「장기 건」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비앙카 세렌은 그 꼬리표를 떼지 않았다. 떼지 않고 그 아래에 편성안을 붙여 올렸다. 특무 집검관 하나에 인원 셋, 말 다섯, 경비 석 달. 회수과가 생긴 뒤로 특무 집검관이 조를 꾸린 일은 없었다. 사람이 많으면 눈에 띄고 눈에 띄면 상대가 먼저 안다. 그 규칙은 상대가 혼자일 때 맞는 규칙이었다. 나루터에서 비앙카는 상대가 다섯이라는 것을 알았다.
편성안은 7월 7일 오후에 돌아왔다. 마지막 장에 로르칸 베르트의 서명이 있었다. 인원과 말과 경비가 적힌 장이었다. 그 뒤에 넉 장이 실로 묶여 붙어 있었다. 협조문 첫 줄을 고치는 사유서였다. 타르실 중재 기록을 조용히 청구한 일, 서류 없이 빌린 정찰조를 로엔에 들인 일, 첫 줄이 틀린 것을 알고도 서른 장을 그대로 둔 일이 날짜순으로 적혀 있었다. 비앙카가 직접 쓰고 직접 묶은 것이었다. 실을 세 번 감아 한쪽으로 맺었다. 돌아온 매듭이 그 모양 그대로였다.
정식 문서는 읽힌다. 비앙카는 그렇게 알고 넉 장을 썼다. 다만 읽힌다는 것이 끝까지 읽힌다는 뜻은 아니었다. 운용국장의 눈은 숫자가 있는 장에서 멈추었고, 숫자가 없는 넉 장은 숫자가 있는 장 뒤에 묶여 있었을 뿐이었다. 비앙카는 매듭을 풀지 않고 사유서를 서랍에 넣었다. 새 협조문 마흔 장은 이미 찍혀 있었다. 첫 줄이 「막대기」였다.

방에는 셋이 더 있었다.
위그는 문 옆에 앉아 있었다. 누가 들어올 때마다 입술이 움직였다. 나루터에서 다섯째를 보지 않았다고 보고한 뒤로 생긴 버릇이었다. 그는 이제 발밑보다 사람을 먼저 셌다. 그 보고로 초소장의 빚은 갚아졌고, 이번에는 비앙카가 그를 정식으로 데려왔다.
파스칼은 나무 상자를 무릎에 얹고 있었다. 회수과 서기 가운데 가장 젊었고 잡보를 가장 느리게 읽었다. 느리게 읽는 대신 한 줄도 버리지 않았다. 상자 안에는 손바닥만 한 카드가 마흔 장 남짓 서 있었다. 한 장에 소문 하나였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파스칼이 한 장을 들었다. 실베인 접경 장터에서 온 것이었다. 막대기 든 애. 키가 3미터.
"적게."
"틀린 줄 압니다."
"틀린 것도 적게. 어디서 틀렸는지가 나와."
파스칼이 카드를 도로 꽂았다. 지도의 헛것 표시를 지우지 않는 사람 밑에서 일하는 서기였다.
노엘은 창가에 서 있었다. 비앙카와 같은 해에 검사를 받았고 같은 해에 결계형으로 배치되었다. 번호는 11호였다. 열일곱에 갈비뼈 안쪽이 무너져 출력이 절반으로 떨어졌고, 그에게는 집검관 전환이 제안되지 않았다. 후방 잡역으로 가서 열한 해 동안 결계 말뚝을 깎았다. 숨을 깊이 쉬지 않는 사람이었다. 결계형은 대개 그랬다.
"3호."
노엘이 창밖을 본 채 불렀다. 회수과에서 비앙카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노엘 하나였다.
"강화가 넘치면 쥔 데로 가. 쥔 게 나무면 결 따라 터지고, 쥔 게 없으면 자기 손등으로 와. 그 애가 아직 막대기를 쥐고 다니면, 지나간 자리에 부러진 게 남아."
"부러진 걸 보면."
"몇째 눈금이었는지는 알아."
"11호."
비앙카가 말했다. 노엘이 돌아보았다. 둘이 서로를 부르는 데 쓰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다른 호칭은 둘 다 배운 적이 없었다.

비앙카가 상자에서 카드 한 장을 뽑았다. 파스칼이 오늘 아침에 꽂은 것이었다. 옛 돌산 아래에 자플랜 조사대. 칼 없는 벨류엔 마법사를 봤다고 함. 타르실 마부에게서.
비앙카는 그 카드를 지도 옆에 세웠다. 회수 규정 제25조가 왜 있는지 그는 알았다. 잡히면 운용 방식이 알려진다. 자산이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자산을 잃는 것보다 나빴다. 그는 옛 돌산 자리에 표시를 하고, 거기서 손가락을 남쪽으로 내렸다. 실베인의 테두리를 바깥으로 돌아 산맥 쪽이었다. 벨류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땅이라면 나오는 길목에 서 있으면 되었다.
카드를 도로 꽂으려는데 옆의 한 장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로엔 나루터. 짐꾼 앞에서 막대기가 부러짐. 그 애가 아직 안 쳤다고 함. 나루터에서 비앙카가 직접 들은 말이었다. 그는 그 카드를 다른 카드보다 조금 오래 보았다. 왜 오래 보았는지는 카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제자리에 꽂았다.
"새벽에 나가네."
위그가 일어섰다. 입술이 한 번 움직였다.
넷이었다.

**자플랜 왕국 · 옛 돌산 기슭 조사대 야영지**


7월 8일, 옛 돌산 기슭의 야영지에 급사가 들어왔다. 말이 거품을 물고 있었다.
하임은 흙더미에서 바구니를 비우고 내려오던 참이었다. 급사가 회색 외투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는 것을 보았다. 봉랍이 없는 종이였다. 회색 외투가 그것을 읽었다. 읽고 나서 계급장 없는 사람에게 건넸다. 계급장 없는 사람도 읽었다. 가슴의 흐린 글씨 위로 그의 턱이 잠깐 내려갔다.
그는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탁자 위에 일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일지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펜을 들지도 않았다. 하임은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무엇이든 적는 사람이었다. 바구니 수를 적었고 물통 수를 적었고 6을 적었다. 이번에는 적지 않았다.
"개를 데려와."
그가 말했다.
쇠뇌병들이 개를 끌고 나왔다. 늑대를 따라갔다가 꼬리를 말고 돌아온 둘이었고, 그 뒤로 사흘 전 아랫마을에서 사 온 개 둘이 더 있었다. 회색 외투가 천막에서 나무토막 하나를 들고 나왔다. 구덩이에서 둘로 꺾인 들보의 한쪽이었다. 회색 외투들은 구덩이에서 나온 것을 무엇이든 버리지 않았다. 흙은 유리병에 담았고 들보는 천막 안에 세워 두었다. 여자애가 쥐고 있던 자리에 손바닥 모양으로 나무껍질이 벗겨져 있었다. 개들이 그 자리에 코를 박았다.
"산마루 쪽으로."
쇠뇌병 넷이 쇠뇌를 멨다. 회색 외투가 따라나섰다. 이번에는 외골격 하나가 운반차에서 내려 그 뒤에 섰다. 무릎에 새 외판을 단 것이었다. 쉭. 김이 빠졌다.
마테스가 하임 옆에 와 섰다. 오른팔의 띠가 땀에 젖어 짙었다.
"산 채로래."
마테스가 말했다. 급사가 회색 외투에게 종이를 건네며 한 말을 그가 들었다.
하임은 대답하지 않았다. 막대기를 놓고 뛰어내린 여자애를 생각했다. 들보를 들고 있던 손등의 붉은 줄을 생각했다. 그 애가 들보를 내려놓았을 때 벤노가 살았다. 하임은 그때 흙더미 위에서 바구니를 메고 서 있었다.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냄새를 잡은 것이었다. 개울을 거슬러 산 쪽으로 끌려갔다. 쇠뇌병들이 뒤따랐고 외골격이 쉭쉭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하임은 흙더미 아래에 서서 그것을 보았다. 바구니 끈을 쥐고 있었다. 쥐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이번에도 몰랐다.
개 짖는 소리가 산마루를 넘어갔다. 그 너머가 드란이었다.

 

먹을 것이 없다


7월 2일 아침, 일행은 비탈 중간의 바위 그늘에서 깼다. 어제 산마루에서 볼 때 망루는 반나절 거리였다. 산에서 가까워 보이는 것은 대개 가깝지 않았다. 해가 질 때까지 내려왔는데도 망루는 여전히 비탈이 꺾이는 자리에 서 있었고, 꺾이는 자리는 내려갈수록 하나씩 더 생겼다. 그래서 바위 그늘에서 잤다. 저녁은 먹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었다.
아침에도 없었다. 없다는 것은 모두 알았다. 다만 오벨은 아는 것과 적힌 것이 다르다고 했다. 그래서 각자 가진 것을 바위 위에 꺼내 놓기로 했다. 오벨이 수첩을 펴고 맨 위에 적었다. 「일행 보유 물품 목록. 7월 2일 아침.」 그 아래에 줄을 긋고 첫 항목을 적었다. 「식량」. 그러고는 펜을 든 채 기다렸다.
바르트가 자루를 거꾸로 들고 털었다. 빈 병 다섯이 굴러 나왔다. 마개는 다 닫혀 있었고 속은 다 비어 있었다. 그다음에 천으로 싼 것이 하나 나왔는데, 바르트는 그것을 바위에 놓지 않고 도로 자루에 넣었다. 저울이었다. 윗늪 이후로 바르트는 그것을 풀지 않았다. 켈리는 천의 매듭이 지난번에 보았을 때와 같은 모양인 것을 보았다. 바르트가 대신 빈 손바닥을 펴서 위아래로 한 번 흔들었다. 어림하는 손이었다.
"0이야."
"아직 아무것도 안 올렸잖아요."
니카가 말했다.
"0은 달 필요가 없어."
니카가 자기 것을 꺼냈다. 주사위 둘, 목에 두르던 짙은 붉은 천, 손목에 감는 천의 여분이었다. 니카가 주사위를 바위 위에 굴렸다. 다섯과 둘이 나왔다. 니카가 그것을 오래 보았다.
"오늘 안에 먹을 것을 찾을 확률이요."
"얼마야?"
켈리가 물었다.
"주사위로는 안 나와요. 그냥 굴려 본 거예요."
린이 자루를 열었다. 손목에 장신구 열둘, 자루 안에 털가죽 둘이었다. 털가죽은 회색이었다. 린은 그것을 꺼내지 않고 자루 입구로 손만 넣어 한 번 쓸었다가 뺐다. 그러고는 일어나 비탈 위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소아레에서 물에게 하던 인사였다. 숙인 채로 한참 있었다. 대답이 없었다.
"여긴 남의 산이야."
린이 다시 앉으며 말했다.
"인사를 어떻게 받는지 몰라. 물어볼 데도 없고."
오벨 자신의 것은 수첩과 펜과 안경과 가방이었다. 가방 안은 종이였다. 종이는 먹을 수 없었으므로 오벨은 그것을 목록에 올리지 않았다. 이 목록의 주제는 식량이었다.
켈리가 자루를 열었다. 개켜진 천이 두 겹 들어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손을 넣어 바닥까지 짚어 보고 뺐다. 옷이었다. 옷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켈리가 자루를 도로 묶었다. 그리고 허리춤에 매단 것을 풀어 바위 위에 놓았다. 국자였다. 모라의 젊은이가 준 늪오리나무 국자였고, 그저께 처음으로 죽을 저었다. 다들 국자를 보았다.
"그건 식량이 아닙니다."
"국자."
"압니다."
오벨이 그래도 적었다. 목록에 올라간 첫 물건이었다. 「국자 1.」
"부러질 확률은 지금 0이에요."
니카가 말했다.
"저을 게 없으니까요."
오벨이 「식량」 옆에 적었다. 「없음.」 그 아래 줄에 적었다. 「돈 — 없음.」 그러고는 두 줄 밑에 밑줄을 두 번 그었다. 밑줄을 두 번 긋는 것은 오벨이 문서에서 가장 중요한 줄에만 하는 일이었다.
켈리가 품에 손을 넣었다.
꺼낸 것을 바위 위에 놓았다. 빵 끝이었다. 엄지손가락 두 마디만 했고 겉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6월 27일에 일행이 마지막 빵을 나누었을 때 켈리 몫의 한쪽 끝이었다. 켈리는 빵을 끝까지 먹은 적이 없었다. 끝을 하나 남겨 품에 넣었다. 막사에서 누가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막사에서 혼자 익힌 것이었다. 배급은 정해진 날에 왔고, 정해진 날이 와도 배급이 오지 않는 날이 있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바르트가 빵 끝을 집어 손바닥에 올렸다. 저울은 꺼내지 않았다. 손이 한 번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30그램쯤."
바르트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오벨이 「없음」에 줄을 하나 긋고 그 옆에 적었다. 「빵 조각 1.」
켈리가 국자를 들었다. 빵 끝을 바위에 놓고 국자 자루로 한 번 내리쳤다. 걸지 않았다. 빵이 갈라졌다. 반듯하게 갈라지지는 않았다. 큰 조각 둘과 작은 조각 넷이 바위 위로 튀었고, 부스러기가 그 사이에 흩어졌다.
"국자 부러질 확률이 다시 생겼어요."
니카가 말했다. 켈리는 국자를 조금 느슨하게 쥐었다.
조각은 여섯이었다. 켈리가 하나씩 나누었다. 바르트, 니카, 오벨, 린, 자기. 큰 조각 둘은 바르트와 린에게 갔다. 마지막 하나를 들고 켈리가 일어섰다. 바위 그늘을 나와 어제 내려온 쪽으로 몇 걸음 올라가서 평평한 돌 위에 놓았다. 거기서는 위쪽 비탈이 잘 보였다. 어제 늑대가 앉아 있던 바위가 그 위 어딘가에 있었다.
"영감님 거야."
켈리가 돌아와 앉았다. 다섯이 각자의 조각을 입에 넣었다. 굳어서 씹히지 않았다. 다들 입 안에서 오래 녹였다. 녹이는 동안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해가 오르자 골짜기에서 안개가 올라왔다.
처음에는 아래쪽 계단밭 몇 층이 하얘졌고, 바르트가 자루를 다 묶었을 때에는 바위 그늘 바로 앞의 돌담이 반쯤 지워져 있었다. 망루는 보이지 않았다. 연기도 보이지 않았다. 켈리는 어제 저녁까지 그 연기를 보고 걸었다. 연기가 없으니 볼 것이 없었다.
"기다리죠."
니카가 말했다.
"안개는 한낮이면 걷혀요. 대개는요."
"대개면 몇 할이요."
"7할. 72.5퍼센트 정도에요"
켈리가 제 배를 보았다. 빵 끝 하나가 들어간 배였다. 켈리가 일어섰다.
"걸어. 아래로만 가면 돼."
고슈가 있을 때 길을 정하는 사람은 고슈였다. 고슈는 맨 앞에서 땅을 보았고, 땅을 보다가 이쪽이 낫겠다고 말하면 그쪽이 나았다. 지금은 켈리가 맨 앞이었다. 땅을 볼 줄 몰랐으므로 켈리는 기울기를 보았다. 발이 아래로 기우는 쪽으로 걸으면 되었다. 그런데 계단밭에서는 발이 기울지 않았다. 층마다 평평했다. 평평하게 만들려고 쌓은 담이었다. 한 층을 끝까지 걸어야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틈이 나왔고, 그 틈은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벽을 따라가십시오."
오벨이 말했다.
"길을 잃었을 때는 벽을 따라가면 출구가 나옵니다. 로엔 곡물청 창고 안전 수칙 제4조입니다."
켈리가 돌담에 왼손을 대고 걸었다. 다들 그 뒤를 따랐다. 돌담은 무릎 높이였고 끊이지 않았다. 아주 오래 끊이지 않았다. 니카가 걸으면서 무언가를 셈했는데, 셈이 끝날 때마다 고개를 갸웃했다. 린은 한 번 더 위를 보고 인사했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바르트는 맨 뒤에서 옆구리에 손을 대고 걸었다.
돌담이 끝났다. 끝난 자리에 바위가 있었고, 바위 아래 그늘에 빵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다.
일행이 그 그늘을 내려다보았다. 아침에 깬 자리였다.
"…창고에는 문이 있었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돌담은 비탈을 가로질러 쌓은 것이었다. 비탈을 가로지르는 것을 끝까지 따라가면 산을 한 바퀴 돌았다.
"같은 자리로 돌아올 확률은요."
니카가 말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원래 1할도 안 돼요. 대단한 거예요."
켈리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몇 걸음 위의 평평한 돌로 갔다. 돌 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빵 조각이 있던 자리에 축축한 자국이 하나 남아 있었다. 혀로 핥은 자리처럼 둥글었다.
린이 켈리 옆에 와서 그 자국을 보았다. 린의 얼굴이 풀렸다.
"영감님이 먹었어."
켈리는 안개 속 위쪽을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데에 있었다.

그때 안개 속에서 고함이 났다.
"사기꾼아!"
"거기 서!"
발소리가 비탈 위에서 내려왔다. 하나는 가볍고 빨랐고, 그 뒤로 여럿이 무겁게 따라왔다. 개 짖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켈리가 지팡이를 가로로 들었다. 드는 순간 안개가 갈라지며 흰 것이 튀어나왔다. 흰 것은 켈리의 지팡이에 정확히 걸렸다.
사람이었다. 흰 옷을 입은 사내가 지팡이에 가슴을 받고 뒤로 넘어갔다. 등에 지고 있던 종이 두루마리 다발이 터져 사방으로 굴렀고, 소매에서 주홍색 종이가 한 움큼 쏟아져 안개 속으로 팔랑거렸다. 사내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잠깐 하늘을 보다가, 일어나지 않고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종이부터 주웠다. 주우면서 한 장 한 장 앞뒤를 확인했다. 확인한 것만 품에 넣었다.
"괜찮아?"
켈리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종이가 젖지 않았습니다."
사내가 주홍 종이 마지막 한 장을 품에 넣고 그제야 일행을 보았다. 스물 중반쯤 되어 보였다. 검은 머리를 정수리 위로 높이 묶었고, 발목까지 오는 흰 웃옷에 먹빛 띠를 둘렀다. 소매 끝과 손가락마다 먹이 묻어 있었다. 이 대륙의 얼굴이 아니었다. 사내가 일행을 하나씩 보고 나서 정중하게 물었다.
"실례지만, 길을 아십니까."
"몰라."
"저도 모릅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무언가가 정리된 얼굴이었다. 그때 안개 속에서 셋이 나타났다. 양치기들이었다. 거친 털옷을 입고 끝이 굽은 막대기를 들었으며, 발치에 털이 긴 개 한 마리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앞장선 사람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왔다. 수염 난 양치기가 흰 옷의 사내를 보고, 그 둘레에 선 다섯을 보았다.
"한패구나."
"아닙니다."
오벨이 앞으로 나섰다.
"저희는 이분과 어떠한 계약 관계에도 있지 않으며, 방금 이분이 저희 일행의 지팡이에—"
양치기가 막대기를 들었다. 오벨은 말을 멈추지 않고 돌아서서 뛰었다. 뛰면서 말을 마저 했다.
"—부딪혔을 뿐입니다!"
다들 뛰었다. 다들 뛰니까 켈리도 뛰었다. 흰 옷의 사내가 맨 앞이었다. 그는 뛰면서도 한 손으로 품의 종이를 누르고 있었다. 바르트가 옆구리를 붙잡고 뛰었고, 린이 바르트의 팔을 끼고 뛰었다. 니카는 뛰면서 무언가를 셈했다. 잡힐 확률 같았는데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안개 속에서는 어디로 뛰는지 아무도 몰랐다. 쫓는 쪽도 몰랐다. 얼마 뒤 앞도 하얗고 뒤도 하얘지자, 모두가 거의 같은 때에 멈췄다.
숨소리만 났다. 가까운 데서도 나고 조금 먼 데서도 났다.
"…거기 누구야."
안개 저쪽에서 수염 난 양치기의 목소리가 났다.
"저희요."
린이 대답했다.
"저희가 누구야."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 물음에 대답하려면 길었다.
"그놈도 거기 있어?"
"있습니다."
흰 옷의 사내가 대답했다. 스스로 한 대답이었다. 양치기가 안개 저쪽에서 한숨을 쉬었다. 쫓기를 그만둔 사람의 한숨이었다. 그도 길을 잃은 것이었다.
"그놈이 판 부적이 안개 속에서 길을 찾아 준다고 했어."
양치기가 안개에 대고 말했다.
"염소 우리에 붙여 놨는데, 안개 낀 아침에 염소가 셋이나 없어졌다고."
"붙여 두시면 안 됩니다."
사내가 말했다.
"읽으셔야 합니다."
"읽었어. 매일 봤어."
"소리 내서 읽으셔야 합니다."
안개 저쪽이 조용해졌다.
"…그런 말은 안 했잖아."
"했습니다. 파는 자리에서 세 번 말씀드렸습니다."
"했어."
다른 양치기의 목소리였다.
"나도 들었어. 세 번."
"넌 누구 편이야."
켈리는 그사이에 흰 옷의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젖지 않은 바위 위에 마른 종이를 한 장 펴고, 허리춤의 통에서 붓을 꺼내고, 다른 통의 뚜껑을 열었다. 먹이었다. 사내가 붓 끝을 먹에 담갔다가 통 가장자리에 두 번 훑었다. 두 번이었다. 세 번도 한 번도 아니었다. 바르트의 눈이 그 붓 끝을 따라갔다.
"어디로 가십니까."
사내가 붓을 종이 위에 든 채 물었다. 켈리에게였다. 일행 맨 앞에 선 사람이 켈리였다.
"연기."
켈리가 말했다.
"어제 망루에서 연기가 올라왔어. 그 밑으로 가."
사내가 종이 귀퉁이에 작은 글자 하나를 먼저 적었다. 그다음에 가운데에 큰 글자들을 쓰기 시작했다. 느렸다. 안개 저쪽에서 양치기들이 다시 웅성거렸고, 니카가 발끝으로 바위를 두드렸다. 사내는 서두르지 않았다. 획 하나를 긋고 붓을 들어 다음 획이 시작될 자리를 본 뒤에야 붓을 댔다. 획이 꺾이는 자리에서는 숨을 멈췄다. 바르트도 같은 자리에서 숨을 멈췄다. 켈리는 그것을 보았다. 바르트가 저울 앞에서 숨을 멈추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마지막 획은 긋지 않았다. 사내가 붓을 통에 넣고 종이를 두 손으로 들고 일어섰다. 종이를 가슴 높이로 들고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외쳤다.
"「바람의 길잡이」!"
산이 울릴 만큼 큰 소리였다. 비장했다. 안개 저쪽에서 양치기들이 움찔하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 가장자리부터 오그라들었다. 불꽃은 없었다. 주홍 종이가 가장자리에서부터 검게 말리며 재가 되었고, 재가 사내의 손끝을 떠나 공중에 떴다. 그 재가 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바람이 일었다. 사내의 발치에서 시작된 바람이 비탈 아래로 곧게 내달렸다. 넓지 않았다. 사람 둘이 나란히 걸을 만한 폭이었다. 그 폭만큼 안개가 갈라졌다. 갈라진 자리가 아래로 아래로 뻗어 나갔다. 돌담이 보였고 그 아래 돌담이 보였고 그 아래 틈이 보였다. 층과 층 사이로 내려가는 좁은 틈이었다. 바람은 그 틈만 골라 지나갔다. 맨 끝, 비탈이 꺾이는 자리에 돌탑이 서 있었다. 꼭대기에서 연기 한 줄이 곧게 오르고 있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갈라진 안개 가장자리에 양치기 셋이 서 있었다. 생각보다 가까웠다. 열 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개가 바람에 털을 날리며 낑낑거렸다. 수염 난 양치기가 천천히 품에 손을 넣었다. 꺼낸 것은 구겨진 주홍 종이였다. 같은 글자들이 쓰여 있었고, 귀퉁이에 다른 작은 글자가 하나 있었다.
"…소리 내서 읽어야 하는 거였어?"
"예."
수염 난 양치기가 종이를 보았다. 한참 보았다.
"그럼 내가 이걸 염소 우리에 붙여 놓은 건."
"그것도 괜찮습니다."
사내가 말했다.
"염소가 읽지 않을 뿐입니다."
그 산에서 흰 옷을 입을 사내는 많은 부적을 팔았는데 사내가 판 부적이 몇 장이었고 그중 몇 장이 지금 염소 우리에 붙어 있는지는, 그의 생계를 위해 여기서는 밝히지 않기로 한다.
수염 난 양치기가 종이를 품에 도로 넣었다. 넣는 손이 아까보다 조심스러웠다. 그가 허리춤의 주머니를 풀어 무언가를 세었다. 동전이 여섯 개였다.
"반만 냈었지. 나머지야."
사내가 두 손으로 받았다. 받고 나서 고개를 숙였다. 양치기도 따라 숙였다. 그때 아래쪽에서 염소 울음이 났다. 갈라진 안개 끝, 망루 아래 돌담 밑에 하얀 것 셋이 나란히 붙어 서 있었다. 수염 난 양치기가 그것을 보았다.
"…저기 있었네."
양치기 셋과 개가 바람이 낸 길을 따라 먼저 뛰어 내려갔다.

바람이 낸 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행이 그 길로 내려서자 뒤에서 안개가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닫히는 것이 걷는 것보다 조금 느렸으므로, 일행은 쫓기지 않을 만큼만 서둘렀다.
흰 옷의 사내도 같이 내려왔다. 아무도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는데 같이 내려왔다.
"유안입니다."
사내가 걸으면서 말했다.
"산맥 너머에서 왔습니다. 도술을 씁니다. 방금 것이 도술입니다."
오벨이 그 말을 받아 일행을 소개했다. 걸으면서 하는 소개였는데도 격식이 갖춰져 있었다. 바르트 뮐렌, 연금술. 니카 셰르, 주술. 소아레 린, 정령술. 오벨 리스트, 소환술. 유안은 이름을 하나 들을 때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끄덕이는 깊이가 매번 같았다.
"그리고 고슈. 드루이드입니다. 현재 부재중입니다."
길 옆 바위 위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회색이 앉아 있었다. 바람이 낸 길의 가장자리, 안개가 막 닫히려는 자리의 바위였다. 어제보다 가까웠다. 늑대는 일행을 보지 않았다. 유안을 보고 있었다. 입술이 들려 있었다.
유안이 걸음을 멈췄다.
"…저 늑대도 일행입니까."
"응. 영감님이야."
린이 말했다.
"…일행이 저를 싫어하는군요."
"처음 보는 사람은 다 싫어해. 사람일 때도 그랬어."
유안이 늑대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벨에게 끄덕이던 것과 같은 깊이였다. 늑대가 한 번 더 으르렁거리고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켈리는 오늘 밤 장부의 고슈 칸에 적을 것을 생각했다. 빵 먹음. 그리고 그 옆에, 가까이.
오벨이 마지막으로 켈리를 가리켰다.
"켈리입니다. 지팡이를 씁니다."
유안이 켈리 쪽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켈리가 먼저 말했다.
"부적."
"…유안입니다."
"부적."
유안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놀리는 얼굴이 아니었다. 켈리는 처음 보는 사람을 그 사람에게서 가장 먼저 보인 것으로 불렀다. 바르트는 오랫동안 아저씨였고 고슈는 아직 영감님이었다. 유안에게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안개 속에 팔랑거리던 주홍 종이였다.
"…예. 부적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유안이 말했다. 오자 하나를 그냥 넘기기로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얼마 뒤 니카가 유안 옆으로 갔다. 니카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운을 다루는 사람에게는 걸었다.
"방금 거, 값이 뭐예요."
"운입니다. 크게 쓰면 그만큼 사소한 것들이 어긋납니다."
"사소한 게 어긋나는 건 제 일인데요."
"…그렇습니까."
두 사람이 서로를 보았다. 같은 물건을 파는 가게 둘이 한 골목에 있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얼굴들이었다. 유안이 먼저 눈을 돌려 켈리의 지팡이를 보았다. 갈라진 쇠 테가 감긴 자리를 오래 보았다.
"켈리 씨는 무슨 술을 씁니까. 지팡이는 술이 아닙니다."
"마법이요."
니카가 대신 말했다.
"터뜨리는 거요. 그런데 어디로 갈지 몰라요. 그래서 지팡이로 때려요."
유안이 걸음을 멈췄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겁니까, 어디로 갈지 정하지 못하는 겁니까."
켈리가 유안을 보았다.
"…그거 다른 거야?"
"다릅니다. 모르는 것은 고칠 수 없습니다. 정하지 못하는 것은 대신 정해 줄 수 있습니다."
유안이 쭈그려 앉아 붓통 끝으로 땅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사람 하나가 누울 만한 크기였다. 다 그리고 나서 그 둘레를 한 번 더 그었다. 선이 처음 것과 어긋나지 않았다.
"범위를 정하면 빗나가도 됩니다. 이 안에서만 빗나가면 됩니다."
켈리가 동그라미를 내려다보았다. 삼 년 동안 교관은 켈리에게 어디를 맞히라고만 했다. 어디를 맞히지 않아도 되는지를 말한 사람은 없었다.
"그거, 부적으로 돼?"
"아직 해 본 적은 없습니다."
켈리는 유안을 보았다. 쓸 수 있는 것을 보는 눈이었다. 유안도 켈리를 보았다. 풀 수 있는 것을 보는 눈이었다. 둘 다 상대의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바르트는 알아챘다. 바르트는 아무 말 없이 동그라미를 밟지 않게 돌아서 걸었다.
"한 가지 확인하겠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유안 씨가 저희와 동행한다는 합의는 없었습니다."
"반대도 없었습니다."
오벨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조항을 찾는 얼굴이었다. 찾지 못했다.
대신 수첩을 폈다. 아침에 쓴 목록이었다. 오벨이 「식량」 줄 위에 한 줄을 끼워 넣었다. 「인원 — 6.」
"0을 여섯으로 나눠도 0이에요."
니카가 말했다. 셈이라고 할 것도 없는 셈이었는데 니카는 그것을 굳이 소리 내어 했다.
"저는 삯이 있습니다."
유안이 허리춤을 두드렸다. 동전끼리 부딪는 소리가 났다. 다들 그 소리 쪽을 보았다. 아침부터 일행이 들은 소리 가운데 가장 좋은 소리였다.
"여섯 돈이면 빵 세 덩이야."
바르트가 말했다. 오벨이 「돈 — 없음」에 줄을 긋고 옆에 적었다. 「여섯 돈(유안).」
켈리는 그 허리춤을 보았다. 빵 세 덩이를 여섯이 나누면 반이었다. 반이면 괜찮았다. 막사에서는 반도 없는 날이 있었다.

길 끝이 보인다고 길이 짧은 것은 아니었다. 바르트는 층마다 쉬었고 쉴 때마다 옆구리를 눌렀다. 안개는 뒤에서 닫히고 앞에서는 저절로 걷혔다. 니카의 7할이 맞았다. 다만 한낮이 아니라 해가 기운 뒤였다. 그사이에 유안은 두 가지를 잃었다.
첫째는 붓이었다. 좁은 틈을 내려가다 붓통 뚜껑이 저절로 열렸고, 붓 하나가 굴러 나와 돌담 틈으로 들어갔다. 유안이 무릎을 꿇고 틈을 들여다보았다. 팔을 넣어 보았다. 팔꿈치까지 들어갔다. 붓은 나오지 않았다. 돌담은 비탈 하나를 통째로 쌓은 것이었고 틈은 그 안 어디로든 이어졌다.
둘째는 신발 끈이었다. 붓을 찾느라 쭈그렸다가 일어서는데 끊어졌다.
유안이 품에서 빈 종이 한 장을 꺼내 길게 찢었다. 그것을 꼬아 끈 대신 묶었다. 매듭이 반듯했다.
"크게 쓴 날은 이렇습니다."
유안이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였다. 니카가 그 종이 끈을 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았다.
마지막 층에서 바르트가 담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망루가 이제는 돌 하나하나가 보일 만큼 가까웠다.
"드란은 값을 받아."
바르트가 말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사람을 받는 데에도 받고 군대를 받는 데에도 받아. 값을 치르려면 계약서가 있어야 하고. 계약서 없이 오는 군대는 저 망루에서 돌려보내. 자플랜이든 벨류엔이든."
"…그래서 산이었어요?"
켈리가 물었다. 산으로 가자고 한 것은 켈리였다. 그때 켈리가 셈한 것은 마을이 낼 값 하나뿐이었다.
"자네가 산이라고 했을 때 나도 셈을 하나 더 했지."
바르트가 옆구리를 누르며 일어섰다.
"기록에 없는 사람들은 계약서를 못 써."
켈리는 계급장 없는 가슴을 떠올렸다. 오벨의 서기가 적은 글씨를 거꾸로 내려다보던 얼굴이었다. 그 사람은 하루라고 했다. 하루는 매일 왔다. 다만 계약서는 들고 오지 못했다.
"우리도 없잖아요."
린이 말했다.
"우리는 사람이야. 사람은 값만 내면 돼."
"값도 없잖아요."
바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망루에 닿을 때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망루 아래에 닿았을 때 해는 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돌탑은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낮았다. 문은 아래쪽에 하나뿐이었고, 문 옆 돌 위에 둘이 앉아 있었다. 한쪽 다리를 앞으로 뻗은 노인과 열둘쯤 된 사내아이였다. 아이가 횃불을 들고 있었다. 그 둘 사이의 나이는 거기 없었다. 산 아래 어딘가의 계약서 안에 있었다.
노인이 일어나지 않고 말했다.
"여긴 할름이오. 들어오려면 값을 내시오."
"사람을 받는 값 말씀이십니까."
오벨이 물었다.
"사람을 받는 값이오."
"얼마입니까."
"사람마다 다르오. 가진 걸 보고 정하오."
유안이 앞으로 나섰다. 처음으로 그가 일행 앞에 섰다.
"제가 내겠습니다. 오늘 받은 삯이 있습니다."
그가 허리춤에 손을 댔다. 손이 멈췄다. 허리춤을 한 바퀴 더듬었다. 품을 더듬었다. 소매를 털었다. 주홍 종이가 한 장 떨어졌을 뿐이었다. 동전 여섯을 넣은 주머니는 거기 없었다. 언제 없어졌는지 아무도 몰랐다. 유안 자신도 몰랐다.
"…대가입니다."
유안이 말했다.
"확률이에요."
니카가 말했다.
유안이 니카를 보았다.
"크게 쓴 날은 반드시 무엇을 잃습니다. 오늘은 셋입니다. 붓, 끈, 삯."
"크게 안 쓴 날에도 사람은 물건을 잃어요. 주머니 끈은 원래 그쯤 되면 풀려요. 그건 그냥 확률이에요."
"제 불운은 제 것입니다."
"불운은 원래 제 쪽이에요."
두 사람 다 진지했다. 켈리는 불운이 누구 것인지를 두고 다투는 사람들을 처음 보았다. 막사에서는 그런 것을 다툴 일이 없었다. 다 마법청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오벨이 말했다.
"여섯 돈은 없습니다."
오벨이 수첩을 펴서 「여섯 돈(유안)」에 줄을 그었다. 그날 그 목록에서 지운 것이 그것으로 셋이었다.
노인은 그 다툼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럼 짐이오."
아이가 횃불을 들고 다가왔다. 노인이 앉은 채 손을 뻗어 자루를 하나씩 받았다. 오벨의 가방에서 종이가 나오자 노인이 한 장을 불빛에 비춰 보았다. 무언가 적혀 있었다.
"계약서요?"
"목록입니다."
노인이 그것을 도로 넣었다. 계약서가 아닌 종이에는 관심이 없는 손이었다. 니카의 주사위를 보고는 니카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바르트의 자루에서 천으로 싼 것을 만지려다, 바르트의 눈을 보고 손을 거두었다. 유안의 두루마리를 풀자 아이가 소리를 냈다.
"할아버지, 이거 염소 부적이다."
"알아."
노인이 두루마리를 도로 말았다. 유안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 산에서는 소문이 사람보다 먼저 내려왔다.
노인의 손이 켈리의 자루에 닿았다. 켈리는 그 손을 보았다. 매듭이 풀렸다. 아침에 켈리가 짚어 보기만 하고 꺼내지 않은 바닥까지 노인의 손이 내려갔다. 손이 개켜진 천을 쥐었다. 두 겹 가운데 두툼하고 무거운 쪽이었다. 노인이 그것을 꺼냈다.
아이가 횃불을 가까이 댔다. 노인이 천을 펼쳤다. 개킨 자리가 풀리면서 자락이 땅까지 늘어졌다. 짙은 남색이었다. 소매 끝과 자락 끝에 흰 띠가 두 줄씩 둘려 있었다. 그리고 가슴께에서, 은실로 크게 수놓은 문양이 횃불을 받아 번쩍였다.
노인의 눈이 그 문양에서 일행 쪽으로 올라왔다. 하나씩 지나갔다. 켈리에게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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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는 자전거를 많이 탄다. 독일도 많이 타지만 여기가 훨씬 많은 느낌이다. 자전거 도로도 잘 되어 있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많이 타다보니 자전거 라이더들이 수신호를 항상 사용한다. 그런 것은 우리나라도 얼른 도입하면 좋겠다.

 

목요일은 교육일정의 마지막 날이라 열심히 설명을 들었다. 점심을 먹기위해 회사근처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는데 실내 디자인이 눈에 익었다. Reselstube란 곳으로 화요일 저녁을 먹었던 곳이다.

점심은 메뉴판을 주지 않고 비건과 넌비건으로만 구분했다. 오늘은 육식 메뉴는 슈니첼이었다. Graz가 화이트와인이 유명하다고 하도 그래서 와인도 한잔 주문했다.

 

한입 먹자마자 오스트리아에서 먹은 최고의 슈니첼이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돼지고기 안에 햄과 치즈까지 넣은 버전이었는데, 치즈 돈까스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오리지널 슈니첼을 해줬으면 더 감격했을 것 같다. 삶은 감자, 그랜베리 소스와 함께 주는데 처음으로 맛있는 슈니첼을 먹어 로컬 맛집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저녁은 매니저 없이 중국인 둘과 따로 저녁을 먹었다. Rondo라는 곳에서 먹었는데 카페이자 술집이자 레스토랑인 곳이다. 분위기가 좋고 음식은 플레이팅에 힘을 줘서 사진을 찍기 좋은 곳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시킨 저녁은 또 슈니첼이었다. 사실 이곳은 스테이크가 메인이다. 스테이크가 꽤 커서 다 먹으면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보였다. 미디움으로 시켰는데도 레어에 가깝게 나왔다.

 

중국인은 해물메뉴랑 스테이크를 시키는데 나는 슈니첼을 시키니까 이거 그냥 고기 튀김인데 괜찮아? 하고 직원이 물어봤다. 여기의 슈니첼은 오스트리아에 오기 전 예상하던 딱 그 슈니첼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짠 맛이 너무 강했다. 이곳도 감자랑 크랜베리소스가 같이 나왔는데 감자는 그라츠에서 먹은 것중에 가장 알맞게 익혀져 나왔다. 다른 곳들은 다들 오버쿡이었다. 가격이 조금 있어 보이긴 하지만 가봤던 식당들 중에 요리 수준이 가장 안정적이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중국인이 우리를 교육해준 사람의 영어가 알아듣기 어렵다고 했다. 이탈리아식 억양인지 프랑스 억양인지 좀 들어가 있는데 독일식 강한 T 발음보다 더 알아듣기 힘든 건 맞다. 나로서는 중국식 영어보다는 알아듣기 쉬웠다. 자기들끼리 중국어를 쓰다가 나를 보면서 중국어를 하는데 사실 나를 보고 말한 건 중국어가 아니었다. 그러면 이미 지난간 소리를 머리에서 꺼내 열심히 조합해야 한다. 순식간에 조합을 해보고나서 대답한다.

S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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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 테



린이 다 외었을 때는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간 뒤였다. 오벨은 마지막 줄 옆에 작게 출처를 적고 수첩을 덮었다. 덮고 나서 표지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 눌러 둔다고 안에 든 것이 달아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오벨은 그렇게 했다.
뿌리 밑에서 보이는 것은 두 가지였다. 앞에는 개울이 있었다. 열 걸음 너비의 물이 어둠 속에서도 희끄무레하게 흘렀고, 그 바닥의 돌들이 잿빛이라는 것을 일행은 알고 있었다. 낮에 쇠뇌병들이 그 앞에서 발을 멈췄다. 뒤에는 숲이 있었다. 들어가면 들어간 자리로 다시 나오는 숲이었다. 니카가 낮에 그것을 몸으로 확인했다. 그 둘 사이에 남은 것은 숲 가장자리를 따라 난 좁은 땅뿐이었다. 사람 둘이 나란히 서면 하나는 물가로 밀려나는 너비였다. 그 땅이 하류로 이어졌고 상류로도 이어졌다. 상류에는 천막이 있었다.
개울 건너 산기슭에서 천막의 불빛이 하나씩 늘어났다. 등불이 아니라 횃불이었다. 횃불 몇이 구덩이 둘레에 박혔고 그 사이로 사람 그림자들이 오갔다. 망치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버팀목을 박는 소리였다. 낮에 무너진 구덩이를 밤새 다시 세우려는 것이었다. 하루. 그 사람에게는 하루가 먼저였다.
개울가에서는 개구리가 울지 않았다. 윗늪에서 세던 소리가 여기서는 처음부터 없었다. 밤이 되면 들려야 할 것이 들리지 않는 자리에서는 들리는 것이 더 크게 들렸다. 물소리와 망치 소리와, 바르트의 숨소리였다. 바르트의 숨은 아직 고르지 않았다.
"…지금 가면요."
니카가 하류 쪽 어둠을 보며 말했다. 셈하는 입술이었는데 이번에는 숫자를 말했다.
"좁은 데서 따라잡혀요. 아저씨가 켈리 씨를 메고 뛰면 사람 걸음이에요. 외골격은 사람 걸음보다 빨라요. 8할."
"여기 있으면."
"…안 찾을 수도 있죠. 그건 셈이 안 나와요."
셈이 안 나온다는 말을 니카가 하는 것을 켈리는 처음 들었다. 바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릎 사이에 끼운 손을 아직 빼지 않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사람 하나를 메고 다시 뛸 다리가 바르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켈리는 셈을 했다. 구덩이 위에서 들보를 받친 것이 아침이었다. 다리에 한 번, 팔에 한 번 따로 걸었다. 후반동은 몇 시간에서 하루였다. 지금은 밤이었다. 켈리가 손가락을 오므려 보았다. 가운데 마디까지 접히다가 거기서 멈췄다. 낮보다는 나았다. 나은 만큼이 손톱 하나 길이였고, 그것으로는 지팡이를 쥘 수 없었다.
연필도 쥘 수 없었다. 켈리의 장부에는 오늘 줄이 아직 없었다. 적을 것은 있었다. 다리 남의 것. 팔. 손등. 아침에 구덩이 위에서 낸 값이었고 켈리 칸에 들어갈 값이었다. 바르트의 노트 맨 뒷장에 켈리가 직접 그어 놓은 칸이었다. 그런데 그 칸에 적으려면 손이 있어야 했다. 값을 낸 손으로는 값을 적을 수 없었다. 켈리는 그 셈을 오래 붙들고 있지 않았다. 지금 셀 것은 따로 있었다.
터뜨리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기 전에 셈이 먼저 끝났다. 뿌리 밑은 사람 여섯이 웅크리면 꽉 차는 구멍이었다. 켈리의 왼쪽 어깨에 바르트의 팔이 닿아 있었고 오른쪽 무릎에 린의 발이 닿아 있었다. 터뜨리는 자리에서는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먼저 없어졌다. 켈리는 그런 자리를 열일곱 번 지나왔다.
고슈는 구멍에 들어오지 않았다. 뿌리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 등이 둥글어졌다. 주먹은 여전히 쥔 채였다. 이따금 고개가 바람 쪽으로 돌았고, 돌아가는 빠르기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영감님."
린이 고슈의 등에 대고 불렀다.
"…응."
"아직이죠."
"…아직."
대답이 낮보다 늦게 왔다. 린은 그것을 듣고 더 묻지 않았다. 손목의 장신구를 한 손으로 감싸 소리가 나지 않게 했다.
바르트가 무릎 사이에서 손을 뺐다. 자루를 끌어당겨 안을 더듬었다. 유리병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가 났다. 저울이 든 쪽은 열지 않았다. 손이 병 하나를 찾아 꺼냈고, 엄지로 마개를 한 번 눌러 보고는 그 병을 품에 넣었다. 노트는 꺼내지 않았다. 켈리는 그것을 보았다. 바르트는 무엇을 넣든 먼저 달았다. 달지 않은 것을 품에 넣는 바르트를 켈리는 처음 보았다.
그때 소리가 왔다.
쉭.
개울 건너, 천막 쪽이었다. 낮에 두 번 들은 소리였다. 한참 뒤에 또 쉭. 그다음은 그보다 빨랐다. 쉭. 쉭. 소리와 소리 사이가 고르게 맞춰지고 있었다.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켈리는 숨을 세기 시작했다. 낮에 쇠뇌를 그렇게 셌다. 쏘고 나면 스무 숨이었고, 그 스무 숨 안에 뛰고 열여섯에서 엎드렸다. 세는 동안은 켈리의 입이 일행의 다리였다. 이번에도 셌다. 쉭과 쉭 사이에 숨이 둘이었다. 그다음 쉭과 쉭 사이에도 둘이었고 그다음도 둘이었다. 켈리는 그 사이에서 빈 데를 찾았다. 시위를 다시 거는 동안 고개가 아래로 가는 스무 숨 같은 것을. 사람이 쓰는 무기에는 그런 자리가 있었다. 사람이 다시 힘을 모아야 하는 자리였다.
쉭. 둘. 쉭. 둘. 쉭.
없었다. 그 쇠에는 다시 걸 시위가 없었다. 김은 걸음마다 빠졌고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켈리가 아는 셈 가운데 그것을 셀 수 있는 셈은 없었다. 켈리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일행이 켈리를 보고 있었다. 낮에 그랬듯이 켈리의 입에서 숫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숫자는 나오지 않았다.
상류 쪽에서 등불 셋이 이쪽 둑을 따라 내려왔다. 땅 가까이에서 흔들리는 불빛 아래로 쇠뇌병 넷의 다리가 보였고, 그 뒤에 하나가 더 걸어왔다. 그 하나는 등불 사이를 걸으면서도 얼굴만은 빛 바깥에 두고 있었다. 걸음걸이로 켈리는 그를 알았다. 무너진 구덩이를 사람보다 먼저 보던 사람이었다.
쉭 소리는 등불과 다른 데서 왔다. 맞은편 둑이었다. 거기 그것이 섰을 때 켈리는 처음으로 그것을 똑바로 보았다. 사람보다 한 뼘 큰 쇠틀이었다. 등에 진 둥근 통에서 김이 빠질 때마다 건너편 등불이 그 김에 번졌다. 무릎과 팔꿈치마다 쇠가 맞물려 있었고, 가슴은 판 하나로 막혀 있었다. 판 위쪽에 가로로 좁은 틈이 나 있었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건너편 등불이 그 틈을 한 번 비췄을 때 켈리는 안의 눈을 보았다. 젊은 눈이었다. 켈리는 그 눈이 자기를 셈하는지 보려 했다. 회색 외투가 켈리의 손등을 뒤집을 때의 눈이 그랬고 측정관의 눈이 그랬다. 그 눈은 셈하지 않았다. 틈 밖의 어둠을 이리저리 훑다가 개울의 물빛에서 한 번 멈췄다. 겁이 든 눈이었다. 쇠는 그 겁을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바깥에서 보이는 것은 김 빠지는 소리와 맞물린 쇠뿐이었다.
쇠틀이 개울로 들어왔다.
낮에 쇠뇌병이 발을 멈춘 누런 풀의 줄을 쇠틀은 그냥 밟았다. 잿빛 물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물살이 쇠에 부딪혀 갈라졌고 김 빠지는 소리가 바뀌었다. 쉭이 아니라 쉬익이었다. 물을 건너는 데는 걷는 것보다 많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안에 있는 사람은 물에 닿지 않았다. 학원 사람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한 물을 학원이 만든 쇠는 건넜다.
켈리는 그제야 알았다. 앞의 벽은 쇠뇌병에게만 벽이었다.
"…내가."
고슈가 말했다. 일어서지 않았다. 쪼그린 채로 어깨의 털가죽을 벗었고 둘째 것도 벗었다. 린이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았다. 받는 손이 떨렸다.
"영감님. 깊이 가지 마요."
고슈가 린을 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얼굴이었는데, 입이 열리기 전에 얼굴이 먼저 바뀌기 시작했다. 턱이 앞으로 나왔다. 회색 수염이 볼까지 번졌고, 쥐고 있던 주먹이 펴지면서 손톱이 흙을 긁었다. 등이 둥글어지다가 낮아졌다. 사람이 쪼그린 높이에서 짐승이 엎드린 높이로 내려갔다. 켈리는 그것을 소아레 늪에서 한 번 보았다. 그때는 오래 걸렸다. 이번에는 짧았다. 고슈가 서두르고 있었다.
늑대였다. 털빛이 수염과 같은 회색이었다. 늑대가 뿌리 밑을 한 번 돌아보았는데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아직은 그랬다.
그러고는 뛰었다. 숨은 쪽이 아니라 등불 쪽으로 뛰었다. 등불 아래를 스치듯 지나며 쇠뇌병 하나의 다리를 물었다가 놓았다. 등불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 비명이 났고 쇠뇌가 줄 소리를 냈다. 쇠살이 늑대 뒤의 흙에 꽂혔다. 늑대는 숲 가장자리를 따라 열 걸음쯤 달리다가 숲으로 들어갔다.
"쫓아!"
쇠뇌병 셋이 뒤따랐다. 지휘자가 무언가를 말했는데 그 말보다 셋의 발이 빨랐다. 셋이 덤불로 들어갔고 덤불이 흔들렸다. 그리고 세 숨 뒤에 셋이 같은 덤불에서 나왔다. 들어갈 때와 같은 쪽을 보고 있었다. 하나는 쇠뇌를 거꾸로 들고 있었다. 셋이 서로를 보았다. 낮에 니카가 그랬던 것처럼.
늑대는 나오지 않았다.
숲은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짐승은 들였다. 린이 털가죽 둘을 끌어안은 채 숲을 보았다. 덤불은 다시 흔들리지 않았다.
"영감님."
작게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린이 한 번 더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 부르면 등불이 이쪽을 볼 것이었다.
켈리가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뼈와 깃털 끈이 거기 매달려 있었다. 다음에도 맡으라고 했던 것이었다. 맡은 것은 여기 있었고 맡긴 사람은 숲에 있었다.

쇠틀이 개울을 다 건넜다. 이쪽 둑에 올라서자 물이 쇠를 타고 흘러내렸고, 물방울이 등불 빛을 받아 잿빛으로 반짝였다. 쇠틀은 숲으로 들어간 늑대에게 관심이 없었다. 뿌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낮에 쇠뇌병 하나가 덤불을 헤쳐 보았던 자리였다.
쉭.
니카가 뿌리 밑에서 기어 나갔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니카가 너무 빨랐다. 뿌리 하나를 등지고 무릎을 꿇었고,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꺼내 뿌리 위에 세웠다. 엄지로 눌렀다. 입술이 움직였다. 켈리는 그 입 모양을 알았다. 타르실 골목에서 처음 본 것이었다. 그날 마른 돌바닥에서 쫓아오던 셋이 차례로 넘어졌고, 니카는 걸어 놓고 걸어 나갔다.
쇠틀이 한 걸음을 더 디뎠다. 넘어지지 않았다.
니카의 엄지 밑에서 주사위가 튀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니카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무릎을 꿇은 채로, 디딘 데가 없는 사람처럼 넘어졌다. 등이 뿌리에 부딪혔고 뒤통수가 흙에 닿았다.
켈리는 니카에게 들은 것을 떠올렸다. 거는 데에는 걸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사람에게는 발목이 있고 무릎이 있고 겁이 있어서 넘어질 데가 많았다. 쇠틀에는 겁이 없었다. 쇠틀 안에는 있었겠으나 쇠가 그것을 감싸고 있었다. 걸 자리가 없으면 건 것은 갈 데가 없었고, 갈 데가 없는 것은 건 사람에게 돌아왔다.
니카가 일어나려 했다. 손목을 쥔 채였다. 손목에 감은 천 아래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일어나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튀었어요."
오벨의 손이 가방 걸쇠로 갔다. 켈리는 그 손을 보았다. 걸쇠를 반쯤 열었다가 멈춘 손이었다. 서기는 부른 일만 했다. 적으라고 부르면 적었고 가져오라고 부르면 가져왔다. 쇠틀을 멈추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부른다 해도 그 값으로 무엇을 내놓아야 할지 오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담보를 고르지 않으면 가장 최근 것부터 가져갔다. 가장 최근 것은 오늘이었고, 오늘은 린이 외어 준 어귀의 사흘이 들어 있는 날이었다. 가방에는 다른 계약서도 있었다. 그쪽은 부르면 가까운 것부터 쳤고, 쇠틀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니카였다. 오벨이 걸쇠를 도로 채웠다. 채우는 소리가 아주 작았다. 오벨은 가방을 가슴에 안고 니카 쪽으로 몸을 낮췄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인 사람의 자세였다.
쇠틀이 니카 쪽으로 돌았다.
린이 털가죽을 내려놓았다. 땅에 등불 하나가 굴러 있었다. 늑대가 떨어뜨리게 한 것이었다. 기름이 조금 새어 나와 마른 잎 위에서 불이 작게 번지고 있었다. 린이 그 앞으로 기어갔다. 무릎을 꿇었다. 오나 앞에서 차례를 청할 때 하던 자세였다. 손목에서 장신구 하나를 풀려는데 매듭이 손톱에 걸렸고, 린은 그것을 이로 끊었다.
"불 맡으신 분. 저는 소아레 린입니다. 인사가 짧아서 죄송합니다. 저 아이 앞에, 저 쇠 앞에 길게 서 주십시오. 오늘 밤만요."
린이 장신구를 불에 넣었다. 작은 뼈 구슬이었다.
불이 일어섰다. 마른 잎에서 마른 잎으로, 린의 손이 그어 보인 쪽으로 번져서 니카와 쇠틀 사이에 사람 무릎 높이의 띠를 만들었다. 쇠틀이 멈췄다. 김 빠지는 소리가 한 번 끊겼다가 다시 났다. 틈 너머에서 안의 사람이 고개를 숙여 불을 내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의 등에는 둥근 통이 있었다. 김을 내는 통이었다. 쇠틀이 한 걸음 물러났다.
쇠틀이 불을 따라 옆으로 걸었다. 불의 끝을 찾고 있었다. 띠는 길지 않아서 열 걸음쯤 가면 끝났다. 린이 그것을 보았다.
"한 번 더요."
린이 둘째 장신구를 풀었다. 이번에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할 틈이 없었다. 장신구를 쥔 손을 불 속에 그대로 넣었고, 넣은 채로 끝을 향해 그었다. 불이 손을 따라 달렸다. 띠가 늘어났다. 쇠틀이 다시 멈췄다.
켈리는 냄새를 맡았다. 마른 잎 타는 냄새 사이에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린의 손바닥이 아직 불 속에 있었다. 꺼낼 까닭을 모르는 손이었다. 린은 불을 빌렸고, 빌린 동안 불은 뜨겁지 않았다.
"린. 손."
"응?"
린이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불 속에서 꺼냈다. 손바닥이 등불 빛에 번들거렸다. 린은 그 손을 뒤집어 보고 다시 뒤집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 그 손에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었다.
손목에서 장신구 둘이 빠져 있었다. 남은 것들이 부딪는 소리가 아까보다 가벼웠다. 열둘이었다. 린은 세지 않았다. 켈리가 셌다.

불 띠의 끝은 개울가였다. 물 앞에서 불은 멈췄다. 쇠틀은 그 자리를 찾아냈다. 물에 한 발을 디뎠다. 쉬익. 잿빛 물을 밟고 불 끝을 돌아 나왔다. 돌아 나온 자리가 뿌리 밑이었다.
바르트가 거기 서 있었다.
언제 일어섰는지 켈리는 보지 못했다. 바르트는 뿌리 구멍과 쇠틀 사이에, 켈리의 앞에 서 있었다. 등불 빛이 바르트의 목덜미에 닿았다. 혹들이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스무 해 동안 하나씩 붙은 것들이었고 하나도 달지 않고 붙은 것은 없었다. 바르트의 얼굴은 켈리 쪽을 향하지 않았다. 쇠틀의 무릎을 보고 있었다. 품에 넣었던 병이 손에 들려 있었다. 손이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는 마개가 뽑히지 않아서 바르트는 마개를 이로 물어 뽑았다.
켈리는 바르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알았으므로 소리를 내려 했는데 소리보다 바르트가 빨랐다.
쇠틀의 팔이 바르트를 향해 뻗었다. 바르트는 피하지 않았다. 몸을 낮춰 그 팔 아래로 들어갔다. 쇠틀의 무릎이 바르트의 가슴 앞에 있었다. 쇠와 쇠가 맞물린 자리였다. 바르트가 병을 거꾸로 들어 그 자리에 쏟았다. 회색 가루였다. 얼마나 쏟는지 보지 않았다. 병이 빌 때까지 쏟았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그 무릎을 감쌌다.
바르트의 입술이 움직였다. 니카처럼 숫자를 세는 입술이 아니었다. 켈리가 아는 말 가운데 그 입 모양에 맞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바꾼다.
쇠가 소리를 냈다. 굽는 소리도 부러지는 소리도 아니었다. 젖은 모래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맞물린 쇠의 겉이 바르트의 손 아래에서 붉게 일어났다가 부슬부슬 떨어졌다. 녹이었다. 몇 해에 걸쳐 앉을 녹이 몇 숨 만에 앉았다. 쇠틀이 다음 걸음을 디디려 했는데 무릎이 그 무게를 받지 못했다. 쇠틀이 앞으로 꺾이며 무릎을 꿇었다. 김이 한꺼번에 빠졌다. 쉬이이. 그리고 멈췄다.
가슴판의 틈 너머에서 안의 사람이 무언가를 소리쳤다. 쇠틀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르트가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났다. 물러난 걸음이 휘청였다. 바르트의 윗옷 왼쪽 옆구리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등불 빛에 검게 보였다. 젖은 자리가 아래로 번졌다. 바르트가 그 자리에 손을 댔다가 떼었다. 손바닥이 검었다.
켈리는 바르트의 장부 맨 앞에 있던 두 줄을 떠올렸다. 모자람. 살 파임. 손톱. 붙는 것은 무게만 늘렸으나 빠지는 것은 어디서 빠질지 몰랐다. 그래서 바르트는 저울이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야 한다면 남는 쪽으로 기울게 달았다. 오늘 바르트는 달지 않았다. 빠진 것은 손톱만 하지 않았다.
"바르트!"
켈리가 소리쳤다.
소리친 것이 자기라는 것을 켈리는 조금 뒤에야 알았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소리를 질러 본 적이 없었다. 지르라고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그 이름으로 부른 것도 처음이었다. 폐허에서 그릇을 내밀던 날부터 그는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자리의 이름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서면 그 사람도 아저씨가 되었다. 지금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은 자리가 아니었다.
바르트가 돌아보았다. 웃으려고 했던 것 같았다. 웃음이 되기 전에 무릎이 꺾였다. 바르트가 쇠틀 옆에 주저앉았다.

등불이 다가왔다. 숲에서 나온 셋과 다리를 물린 하나가 쇠뇌를 들고 섰고, 그 가운데에 지휘자가 있었다. 가슴의 글씨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쇠뇌 끝이 바르트에게 갔다. 바르트는 쇠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옆구리를 누르고 있었다.
켈리가 일어섰다.
지금 켈리의 다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남의 다리도 세워 둘 수는 있었다. 무릎을 펴서 잠그면 되었다. 켈리는 뿌리를 등으로 밀며 몸을 올렸고, 린이 내려놓은 지팡이를 두 손바닥 사이에 끼워 땅에 짚었다. 쥐지는 못하고 기댔다. 짚는 물건으로 만든 것이었으니 짚는 데에는 쓸 수 있었다. 그렇게 세 걸음을 걸어 바르트 앞에 섰다. 쇠뇌와 바르트 사이였다.
쇠뇌 끝이 흔들렸다. 켈리는 그 까닭을 알고 있었다. 여자애는 살려서. 학원 사람들이 그 애 손을 보고 눈이 뒤집혔다고 했다. 상하지 않게 해 달라고 했다. 켈리를 물건으로 취급하는 눈들이었고, 그 셈에서 켈리는 값이 나갔다. 값이 나가는 것 앞에서는 쏘지 않는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그런 셈 안에서 살았다. 그 셈을 등 뒤의 사람 쪽으로 돌려세워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지휘자가 손을 들었다. 쇠뇌 끝이 내려갔다.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높지 않은 목소리였다. 높일 필요가 없는 목소리였다.
"예. 알겠습니다."
켈리의 입이 말했다. 지팡이가 손바닥 사이에서 빠져나가 땅에 떨어졌다.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켈리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알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먼저 입이 했고 손이 했다. 열두 해 동안 그 말 뒤에는 늘 손이 따라갔다. 무엇을 알겠다는 것인지 켈리는 몰랐다. 가브릴이 손을 뻗던 그 밤에도 몰랐다. 그 말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나오는 말이었고, 나오면 몸이 따랐다. 몸은 오늘 밤에도 배운 대로 했다.
지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됐소. 여자애만 데려가시오."
쇠뇌병 하나가 다가왔다. 지휘자의 눈이 켈리를 지나 바르트에게로, 니카에게로, 린에게로, 오벨에게로 갔다. 하나씩 세는 눈이었다.
"나머지는—"
낮에 들은 말이었다. 해 지면 묻으시오. 해는 진 지 오래였다.
켈리는 발 앞의 지팡이를 내려다보았다. 손은 쥐지 못했다. 쥐려면 걸어야 했다. 아침에 다리에 한 번, 팔에 한 번 걸었고 그 값이 아직 다 청구되지 않은 팔이었다. 그 위에 한 번 더 거는 것을 교범은 금하지 않았다. 돌파형에게는 마지막 자리라는 것이 늘 있었고, 마지막 자리에서는 다음 날을 셈하지 않았다.
켈리가 몸을 숙였다.
열이 올라왔다. 팔 안쪽에서 시작해 어깨로 올라가는, 아침과 같은 길이었다. 다만 길이 헐어 있었다. 열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무언가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넷째 눈금이었다. 켈리가 아는 가장 낮은 눈금이었고, 그것이 지금 켈리가 가진 전부였다. 손가락이 닫혔다. 지팡이를 쥐었다. 넘친 것이 지팡이로 갔다.
틱.
작은 소리였다. 아이언우드가 울기 전에 쇠가 먼저 울었다. 손바닥 바로 위, 바르트가 마을 어귀에서 급히 녹여 먹인 쇠 테가 갈라지는 소리였다. 우물가에서 마지막으로 쳤을 때도 그 테가 삐걱했다는 것을 켈리는 듣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들었다. 지팡이가 켈리 대신 값을 내는 소리였다.
쇠뇌가 다시 올라왔다. 지휘자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켈리는 사람을 보지 않았다. 사람을 치면 사람이 죽었다. 켈리가 아는 가장 낮은 눈금은 사람에게 쓰는 눈금이 아니었다. 켈리는 몸을 돌려 개울을 보았다. 쇠뇌병들이 선 자리 바로 옆이 둑이었다. 아까 쇠틀이 올라온 자리였고, 흙이 젖어 있었다.
켈리가 둑을 쳤다.
둑이 무너졌다. 쳐서 무너졌다기보다 쳐서 터진 것 같았다. 젖은 흙과 그 아래의 잿빛 물이 한꺼번에 들려 일어났다가 등불 쪽으로 쏟아졌다. 진흙이 쇠뇌병들의 다리와 소매와 얼굴에 튀었다. 등불 둘이 꺼졌다.
"물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학원 사람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한 물이었다. 쇠뇌병들이 쇠뇌를 내던지고 얼굴을 문질렀다. 하나는 개울에서 멀어지려고 숲 쪽으로 뛰었다가 덤불 앞에서 멈췄다. 지휘자만이 서 있었다. 그도 소매로 얼굴을 닦았는데, 닦는 동안 눈이 감겨 있었다.
낮에 일행을 막아 준 물이 밤에 길을 열었다. 저들이 만든 물이었다.
"가."
켈리가 말했다. 말하고 나서 무릎이 꺾였다.

오벨이 켈리를 업었다. 켈리는 오벨이 무언가를 업는 것을 처음 보았고, 오벨도 처음인 것 같았다.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메고 켈리를 등에 올리는 데 두 번 실패했고 세 번째에 올렸다. 린이 데지 않은 손으로 니카를 일으켰다. 니카는 열이 올라 걸음이 비뚤었다. 바르트는 혼자 일어났다. 옆구리를 누른 손가락 사이로 검은 것이 새어 나왔다. 린이 털가죽 둘과 지팡이를 한 팔에 끌어안았다.
하류로 뛰었다. 숲 가장자리의 좁은 땅을 따라, 들어가지 않고.
뒤에서 고함이 났다. 쫓아오는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켈리는 오벨의 등에서 뒤를 보았다. 뒤를 보는 것이 켈리의 일이었다. 무릎을 꿇은 쇠틀이 남은 등불 하나 아래에 그대로 있었다. 그 너머 개울 건너 산기슭의 천막에는 불이 다 켜져 있었다. 구덩이 쪽에서는 망치 소리가 아직 나고 있었다. 뿌리 밑에 웅크리고 있을 때부터 나던 소리였다. 쉭 소리처럼 고르게 났다. 쇠틀 하나를 멈추게 했는데 그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홈통은 거기 있었고 그 아래로 물은 흘렀다.
켈리는 셌다. 손가락을 접을 수 없었으므로 눈으로 셌다. 앞에서 비틀거리는 니카. 니카를 부축한 린. 혼자 걷는 바르트. 업은 오벨. 업힌 자신.
다섯이었다.
켈리는 한 번 더 셌다. 다섯이었다. 허리춤에서 뼈와 깃털 끈이 오벨의 등에 부딪혀 소리를 냈다. 켈리는 쥐지 못하는 손으로 그것을 잡으려 했다. 잡히지 않았다.
지팡이는 린의 팔에 안겨 있었다. 손잡이 위 한 뼘, 쇠 테가 갈라진 자리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켈리는 거기 갈라진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들었기 때문이다.

 

청구서


밤새 걸은 길이 몇 킬로미터였는지는 아무도 세지 않았다. 켈리도 세지 않았다. 오벨의 등에서 켈리가 센 것은 사람이었고, 사람은 밤새 다섯이었다.
동이 틀 무렵 숲 가장자리가 개울에서 멀어졌다. 개울은 오른쪽으로 휘어 갈대 속으로 들어갔고 숲은 왼쪽으로 물러났다. 그 사이에 바위가 하나 있었다. 사람 키의 두 배쯤 되는 바위였는데 아래쪽이 파여 있어 바람이 들지 않았다. 고슈가 있었다면 그 밑에 무엇이 사는지부터 말했을 것이었다. 고슈가 없었으므로 아무도 아무 말 없이 그 밑으로 들어갔다.
개울이 멀어지자 소리가 돌아왔다. 갈대 너머에서 새가 울었다. 처음에는 하나가 울었고 조금 뒤에는 여럿이 울었다. 며칠 동안 개울가에서 듣지 못한 소리였다. 개구리가 울지 않던 물가를 따라 밤새 걸어 내려온 끝에, 무언가가 우는 자리에 닿은 것이었다. 켈리는 오벨의 어깨 너머로 그 소리를 들었다. 셀 수 있는 소리였는데 세지 않았다. 셀 것이 따로 있었다.
오벨이 무릎을 꿇자 켈리가 등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오벨은 한참 그 자세로 있다가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앉았다. 서른여덟 해 동안 서류 가방보다 무거운 것을 져 본 적이 없는 허리였다. 가방은 아직 가슴 앞에 매달려 있었다. 밤새 켈리와 가방 사이에 끼어 있던 사람이 오벨이었다.
해가 떴다. 청구서도 같이 왔다.
켈리가 먼저 받았다. 일어나 앉으려고 바위를 짚었는데 팔이 어깨 높이에서 멈췄다. 그 위로는 올라가지 않았다. 막힌 것이 아니라 거기서 끝난 것 같았다. 손가락은 가운데 마디까지 접혔다가 거기서 멈췄다. 어제 아침에 한 번 낸 값 위에 밤에 한 번 더 얹은 값이었다. 두 번 낸 값이 두 번 청구되었는데 하나씩이 아니라 한꺼번에 왔다. 켈리는 팔을 내려놓고 어깨 아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셈해 보았다. 많지 않았다.
린이 바위 그늘 끝에 앉아 오른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침 빛이 손바닥에 닿아 있었다. 손바닥 가운데에 물집이 셋 솟아 있었고 하나는 밤새 터져 허옇게 늘어져 있었다. 린이 엄지로 그 자리를 꾹 눌렀다. 켈리는 린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에 아무것도 없었다.
"…괜찮은데?"
린이 말했다. 진짜로 궁금한 목소리였다. 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린의 손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린만 모르고 있었다. 모른다는 것이 그 손에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라는 데까지는 켈리도 알았다. 그다음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니카는 바위의 가장 깊은 데에 누워 있었다. 얼굴이 붉었다. 왼 손목의 천을 오른손으로 꽉 쥔 채였고 입술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따금 소리가 섞여 나왔는데 숫자였다. 니카가 눈을 떴다. 바위 아래로 들어오는 빛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지금 아침일 확률이요. 6할."
"해가 떠 있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니카가 빛을 다시 보았다.
"…그럼 7할로 올릴게요."
니카의 셈은 빨랐다. 늘 맞는 것은 아니었으나 빠르기만은 언제나 빨랐다. 그의 셈이 틀린 일은 꽤 많았는데, 그의 자존심을 위해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열 나는 확률은 10할이요. 이건 맞아요."
니카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 것은 맞았다.
오벨은 수첩을 펴 놓고 있었다. 어젯밤 뿌리 밑에서 받아 적은 장이었다. 줄마다 끝에 작게 「소아레 린이 외었음」이 붙어 있었다. 오벨은 그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로 다 읽고 나서 린을 보았다.
"숲지기는 지팡이를 짚었습니까."
"어제 외어 줬잖아요."
"적혀 있습니다."
오벨이 수첩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런데 제가 본 것이 아닙니다."
린이 오벨을 보았다. 오벨의 손가락은 그 줄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법정에서 기록과 증언은 같은 무게를 가졌다. 적힌 것은 본 것과 같았고, 그래서 오벨은 스무 해 동안 적힌 것을 읽는 일로 먹고살 수 있었다.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오벨은 자기 수첩에서 처음 배우고 있었다. 읽으면 알았다. 다만 떠오르지는 않았다.
린이 데지 않은 손으로 무릎을 짚고 오벨 앞에 고쳐 앉았다.
"짚었어요. 켈리 거랑 길이가 비슷했어요. 두 개가 나란히 놓였어요."
오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첩에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미 적혀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끄덕였다.
바르트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밤새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아침에도 하지 않았다. 윗옷 왼쪽 옆구리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어젯밤 등불 아래에서 검게 보이던 것이 아침 빛에서는 붉었다. 굳은 붉음 위에 새 붉음이 번들거렸다. 켈리는 그것을 보았고 오벨도 보았다. 오벨이 먼저 말했다.
"멎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말을 받지 않았다. 받을 말이 없었다. 여섯 가운데 상처를 닫는 술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빌리는 사람과 거는 사람과 부르는 사람과 바꾸는 사람과 되는 사람과 터뜨리는 사람이 있었다. 닫는 사람은 없었다.
"그쪽 술로는 막을 수 있습니까."
오벨이 바르트에게 물었다. 바르트가 눈을 떴다.
"…막을 수는 있어."
"그럼."
"달아야 해."
바르트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손이 떨렸다. 어제 아침부터 떨리던 손이었는데 오늘은 떨림이 더 컸다. 바르트는 그 손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는 눈금을 못 읽어. 못 읽고 바꾸면 또 모자라. 모자라면 또 빠져."
"어디서."
켈리가 물었다. 바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켈리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노트 앞쪽, 먹이 가장 바랜 자리의 두 줄이었다. 빠지는 것은 어디서 빠질지 몰랐다. 손목에서 빠지면 손목이 파였고 더 안쪽에서 빠지면 더 안쪽이 파였다. 어젯밤은 옆구리였다. 다음은 옆구리보다 안쪽일 수도 있었다.
니카가 누운 채로 말했다.
"…그러면 지지면 되잖아요."
모두가 니카를 보았다. 니카가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열 나서 하는 말 아니에요. 도박장 뒷마당에서 봤어요. 칼 맞은 사람을 달군 쇠로 지지는 거요. 9할은 살아요."
그 9할이 맞는지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다만 그것밖에 남은 방법이 없다는 것은 다들 알았다.
"불이 있어야 합니다."
오벨이 말했다.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연기."
켈리가 말했다. 오벨이 켈리를 보았다.
"연기는 멀리서 보여."
켈리는 그것을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었다. 연기가 오르는 데에는 사람이 있었고, 사람이 있는 데로 돌파형이 갔다. 켈리는 삼 년 동안 연기를 보고 걸었다. 걸어간 끝에 무엇을 했는지도 켈리는 알았다. 그러니 지금 이 바위에서 연기가 오르면 그것을 보고 걸어올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결국 불은 바위가 가장 깊이 파인 자리에 작게 피웠다. 마른 잔가지만 골라 손바닥 하나만 한 불을 만들었다. 연기는 바위 아랫면을 타고 퍼지다가 바위 끝에서 흩어졌다. 위로 곧게 오르지 않았다. 부싯돌은 오벨이 쳤다. 바르트의 자루에서 꺼낸 것이었는데 오벨은 다섯 번을 치고서야 불똥을 마른 이끼에 받았다. 앞의 네 번은 아무도 세지 않았다. 니카만 셌다.
바르트의 칼이 불 위에 놓였다. 손바닥 길이의 작은 칼이었고 자루까지 쇠 하나로 된 것이었다. 칼날이 먼저 붉어졌고 자루도 곧 뜨거워졌다. 그것을 쥐고 상처에 대고 있어야 했다. 떼지 않고 대고 있어야 했다.
켈리의 손은 쥐지 못했다. 바르트의 손은 떨렸다. 니카는 열에 떨었다. 오벨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다만 오벨이 그 자루를 쥐면 쥐는 순간 놓을 것이었다. 사람의 손은 뜨거운 것을 쥐면 놓게 되어 있었다. 놓지 않으려면 손이 뜨거운 것을 몰라야 했다.
"내가 할게."
린이 말했다. 모두가 린의 손을 보았다. 물집 셋이 아침 빛 아래에서 번들거렸다.
"린 씨 손은 이미—"
"그러니까요."
린이 오벨의 말을 잘랐다.
"지금은 안 뜨거워. 나중에 뜨거워도 그건 나중이야."
바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린을 오래 보았다.
"…그건 내가 하던 말이야."
"알아요."
린이 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목의 장신구는 풀지 않았다. 빌릴 것이 없었다. 어젯밤 빌린 것이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두 번 빌린 것은 두 번 돌려받아야 했고, 아직 하나도 돌려받지 않은 손이었다.
바르트가 자루에서 저울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묶은 가죽 끈을 풀어 입에 물었다. 오벨이 바르트의 뒤로 돌아가 두 어깨를 잡았다. 켈리는 잡을 손이 없었다. 켈리가 바르트의 다리 위에 엎드렸다. 두 다리를 가로질러 몸을 얹었다. 켈리가 낼 수 있는 것은 무게뿐이었다. 열두 해 동안 아침마다 저울 위에서 재던 그 무게였다. 그 무게를 남의 다리를 붙들어 두는 데 쓰는 것은 처음이었다.
린이 칼자루를 쥐었다. 쥐는 소리가 났다. 작게, 젖은 것이 뜨거운 데 닿는 소리였다. 린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벨이 바르트의 윗옷 자락을 걷었다. 굳은 피가 천과 같이 떨어지며 살이 드러났다. 파인 자리였다. 켈리는 그것을 바르트의 다리 너머로 보았다. 손톱만 하지 않았다.
"셋 세면 대요."
린이 말했다. 켈리가 숨을 셌다. 셀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하나. 둘.
린은 셋을 기다리지 않았다.
바르트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켈리의 몸이 다리째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오벨이 어깨를 누르며 무언가 말했는데 켈리는 듣지 못했다. 가죽 끈 너머에서 바르트의 소리가 났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바위 밑에서 짓눌리는 무언가의 소리였다. 냄새가 났다. 바르트의 살 냄새였고, 그 아래에 그보다 가는 냄새가 하나 더 섞여 있었다. 칼자루를 쥔 손에서 나는 냄새였다. 린의 손은 떼지 않았다. 켈리는 셌다. 넷. 다섯. 여섯.
린이 칼을 들었다.
파인 자리가 검게 오그라들어 있었다. 피가 나오지 않았다. 바르트가 가죽 끈을 뱉었다. 끈에 이가 깊이 박힌 자리가 남아 있었다. 바르트는 숨만 쉬었다. 오래 쉬었다.
린이 칼을 풀밭에 내려놓고 오른손을 펴 보았다. 칼자루 모양이 손바닥에 그대로 찍혀 있었다. 물집은 남아 있지 않았다. 물집이 있던 자리까지 다 그 모양 안에 들어갔다.
"…괜찮은데?"
아까와 같은 말이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까도 웃은 사람은 없었다.
"린."
켈리가 바르트의 다리 위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거 나중에 와."
켈리는 그것을 알았다. 후반동은 몇 시간에서 하루 뒤에 왔다. 걸 때는 아무렇지 않았고 다음 날 아침에 청구서가 왔다. 린의 손은 어제 걸었고 아직 아침이 오지 않은 손이었다.
"알아."
린이 대답했다. 다 안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게 대답했다.
바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린을 보았고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아직 바르트의 다리 위에 엎드려 있었다.
"…고맙네."
린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고는 켈리에게 말했다.
"무거웠어."
"45."
켈리가 말했다. 바르트가 웃으려고 했다. 웃으려다 옆구리를 붙잡았다. 붙잡고 나서 마저 웃었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정오가 지나자 켈리가 노트를 달라고 했다.
바르트의 자루에서 오벨이 노트를 꺼냈다. 맨 뒷장을 펴서 켈리 앞에 놓았다. 칸 다섯이 그어진 장이었다. 「켈리」「지팡이」「아저씨」「방망이」「외는 이」. 맨 아래 줄은 「소아레. 탁자」였다. 그 아래가 비어 있었다.
"적어야 해."
켈리가 말했다. 연필을 집으려 했다. 손가락이 가운데 마디에서 멈췄고 연필은 손바닥 위를 굴러 풀밭에 떨어졌다. 켈리가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바르트는 손이 떨렸다. 니카는 열에 떴고 린의 오른손은 칼자루 모양이었다. 바위 밑에서 연필을 쥘 수 있는 손은 하나였다.
"제가 적겠습니다."
오벨이 연필을 주웠다. 무릎 위에 노트를 고쳐 놓고 안경을 고쳐 썼다. 그 동작을 켈리는 중재소에서 보았다. 오벨이 남의 서류를 받아 적기 전에 하는 일이었다.
"자리는."
"구덩이."
오벨이 왼쪽 여백에 「구덩이」라고 적었다. 반듯한 글씨였다. 켈리의 글씨들 사이에서 그 두 글자만 인쇄한 것 같았다.
"켈리 칸. 다리 남의 것. 팔. 손등."
연필이 움직였다. 오벨이 다 적고 나서 소리 내어 읽었다.
"하지 기능 일시 상실. 상지 근력 저하. 수배부 모세혈관 파열."
켈리가 오벨을 보았다.
"…그게 뭐야."
"같은 말입니다."
"내 말로."
오벨이 자기가 적은 것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보다가 줄을 하나 긋고 그 아래에 다시 적었다. 「다리 남의 것. 팔. 손등.」 오벨의 반듯한 글씨로 적힌 「다리 남의 것」은 이상하게 법조문처럼 보였다. 켈리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지팡이 칸은 비워. 그날은 놓았어."
"예."
"칸 더 그어 줘. 다섯."
오벨의 연필이 멈췄다.
"다섯이나."
"니카, 린, 오벨, 고슈."
"넷입니다."
"하나 더."
오벨이 세로줄을 넷 그었다. 칸이 좁아졌다. 맨 뒷장 한 장에 칸 아홉이 들어가자 칸 하나의 너비가 손가락 하나만 해졌다. 오벨은 칸 머리에 이름을 하나씩 적었다. 「니카」「린」「오벨」「고슈」. 자기 이름을 적을 때 연필이 아주 조금 머뭇거렸다. 남의 장부에 자기 이름을 지불인으로 적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리고요."
"인부."
"인부는 저희 일행이 아닙니다."
"값을 냈어."
오벨이 켈리를 보았다.
"구덩이에서. 다리 부러진 사람. 매일 입에 천 감고 내려가는 사람들."
"지불인이 특정되지 않으면 장부에 칸을 줄 수가 없습니다. 이름이 없으면—"
"이름 몰라."
켈리가 말했다.
"그래도 냈어."
오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필이 오른쪽 끝으로 갔다. 종이 가장자리에 남은 자리는 손톱 두 개만 했다. 오벨이 거기에 세로줄을 하나 더 긋고 칸 머리에 작게 「인부」라고 적었다. 칸이 열이 되었다. 켈리가 열을 셌다. 어제는 다섯이었다.
"인부 칸에. 다리 하나."
「다리 하나.」
"오벨 칸에."
오벨의 연필이 자기 칸 위에서 멈췄다. 켈리가 말했다.
"어귀의 사흘."
오벨이 그것을 적었다. 자기가 낸 값을 자기 손으로 남의 장부에 적었다. 적고 나서 연필을 들지 않았다. 켈리가 하나를 더 말했다.
"옆에. 린이 외어 줬다고."
"옆은 여백입니다. 여백은 원래 비워 두는 자리입니다."
"내 장부는 여백에도 적어."
오벨이 여백을 보았다. 「소아레. 탁자」 줄 옆에 켈리의 삐뚤어진 글씨로 「자국 1」이 적혀 있었다. 오벨은 그 옆 줄의 여백에 작게 적었다. 「린이 외어 줌.」
다음 줄은 「개울」이었다. 켈리 칸에 「한 번 더. 팔 어깨까지.」 지팡이 칸에 「쇠 테 갈라짐.」 켈리는 그 다섯 글자를 오벨이 적는 동안 지팡이를 내려다보았다. 손잡이 위 한 뼘, 갈라진 자리는 낮에 보아도 가늘었다. 그래도 거기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들었으므로 알았다.
"니카 칸."
"튄 게 아니에요."
바위 안쪽에서 니카가 말했다. 눈은 감은 채였다.
"확률이 나쁜 쪽으로 나온 거예요. 쇠틀에는 걸 자리가 없었고 그래서 건 게 갈 데가 없어서—"
"칸이 좁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손가락 하나만 한 칸이었다. 니카가 잠깐 조용했다.
"…그럼 '나쁜 쪽'만요."
「나쁜 쪽. 열.」
"열은 빼 주시면 안 돼요?"
"사실입니다."
니카가 다시 조용해졌다. 셈하는 입술이 움직였는데 무엇을 세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린 칸에는 「둘. 손.」이 들어갔다. 장신구 둘과 손 하나였다. 린이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오늘 아침 거도 써."
"그건 오늘 줄이야."
켈리가 말했다. 오벨이 「개울」 아래에 새 줄을 그었다. 왼쪽 여백에 「바위 밑」. 린 칸에 「손. 또.」 그리고 바르트 칸에 무언가를 적으려다 켈리를 보았다. 켈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중이었다.
"고슈 칸은요."
오벨이 물었다. 켈리가 고슈 칸을 보았다. 「개울」 줄의 고슈 칸이 비어 있었다. 무엇을 냈는지는 알았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적어야 하는지는 몰랐다. 사람이 짐승이 되어 숲에 들어가 나오지 않은 것을 적는 말은 켈리에게 없었다.
"물음표."
"문서에 물음표는—"
"내 장부야."
오벨이 연필을 고슈 칸에 댔다. 한참 대고 있다가 물음표를 하나 그렸다. 스무 해 동안 오벨이 법정에 낸 서류 가운데 물음표가 들어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물음표를 쓰는 사람은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벨은 그것을 처음 그렸고, 다 그리고 나서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생각보다 모양이 반듯하게 나오지 않았다.
"하나 남았어."
켈리가 말했다. 셋째 칸 머리였다. 「아저씨.」
"그건 내가 쓸게."
켈리가 한 번 더 말했다.
오벨이 연필을 내밀었다. 켈리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받지 못하고 두 손바닥 사이에 끼웠다. 기도하는 사람의 손 모양이었다. 켈리는 그 손으로 「아저씨」 위에 줄을 하나 그었다. 줄은 곧게 그어지지 않았다. 세 글자를 다 지나가는 데 두 번 끊겼다. 그 위 빈자리에 켈리가 썼다.
바르트.
세 글자가 다른 글자의 세 배만 했다. 손바닥 사이에서 연필이 이리저리 기울었고, 기울 때마다 획이 넓어졌다. 마지막 글자의 받침이 옆 칸으로 넘어갔다. 「방망이」 칸이었다.
"방망이 칸을 침범했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방망이는 한 줄뿐이야."
켈리가 말했다. 바위 안쪽에서 니카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방망이가 이의 없대요. 10할이요."
린이 웃었다. 오늘 처음 웃은 사람이 린이었다. 바르트는 바위에 기댄 채 그 장을 건너다보았다. 자기 이름이 그 장에서 가장 컸다.
"…크게도 썼네."
"손이 이래서."
켈리가 말했다. 그러고는 바르트 칸의 「개울」 줄을 내려다보았다. 비어 있었다. 그 칸에 들어갈 것은 켈리가 정할 것이 아니었다. 바르트의 장부에서 옮겨 와야 했다. 그런데 바르트의 장부에는 아직 그 줄이 없었다.

해가 기울 무렵 일행은 바위를 떠나 산 쪽으로 반나절을 걸었다. 바르트는 걸었다. 지진 자리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 걸었고, 쉴 때마다 그 손을 떼어 보았다. 피는 묻어 나오지 않았다.
저녁 자리는 비탈의 마른 풀숲이었다. 불은 피우지 않았다. 바르트가 자루에서 노트를 꺼냈다. 이번에는 오벨이 꺼낸 것이 아니었다. 윗늪 저녁부터 바르트는 그 노트를 펴지 않았다. 켈리가 청할 때만 자루에서 나왔고, 나와서도 바르트의 손에서는 펴지지 않았다. 지금 바르트가 그것을 폈다. 맨 뒷장이 아니라 앞쪽이었다. 먹이 바랜 장을 지나 열일곱 줄이 있는 장에서 멈췄다.
맨 아래 줄은 「5월 3일. 목 오른쪽. 쌀알. 한 푼 남음.」이었다. 그 아래가 비어 있었다.
바르트가 연필을 쥐었다. 손이 떨렸다. 연필 끝이 종이에 닿자마자 미끄러져 엉뚱한 데로 줄을 그었다. 바르트는 그 줄을 내려다보았다. 스무 해 동안 그 장의 모든 글자가 그 손에서 나왔다. 저울을 달고, 눈금을 읽고, 적었다. 그 순서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켈리."
"네."
바르트가 노트를 내밀었다.
"적어 주게."
켈리는 노트를 받았다. 무릎 위에 놓고 연필을 두 손바닥 사이에 끼웠다. 바르트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부탁했다는 것을 켈리는 알았다. 무엇을 받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주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빵을 조금 크게 자르고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6월 25일."
켈리가 적었다. 숫자는 쉬웠다. 숫자는 육성소에서 배웠다.
"왼 옆구리."
적었다.
"살 파임."
적었다. 그다음에 바르트가 멈췄다. 크기를 말할 차례였다. 콩, 팥, 쌀알, 손톱. 바르트는 그것을 늘 제 눈으로 재서 적었다. 이번에는 보지 못했다. 파인 자리는 옆구리 뒤쪽에 있었고 바르트는 그 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그것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크기는."
"제 손바닥만 해요."
린이 말했다. 린은 그 자리를 칼로 덮은 사람이었다. 린이 오른손을 펴 보였다. 칼자루 모양이 찍힌 손바닥이었다. 아무도 그 손바닥을 오래 보지 않았다. 켈리가 적었다. 손바닥.
바르트가 다음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마지막은 늘 푼이었다. 한 푼 남음, 두 푼 모자람. 저울의 눈금이었다. 바르트의 입이 열린 채로 있었다. 거기 들어갈 숫자가 없었다.
"…달지 않음."
켈리가 적었다. 「달지 않음.」
그 줄은 그 장의 다른 줄들보다 두 배쯤 컸다. 한 줄이 두 줄의 자리를 먹었다. 열일곱 줄은 전부 같은 크기의 작은 글씨였는데 열여덟째 줄만 커다랗고 삐뚤었다. 그리고 그 줄만 푼으로 끝나지 않았다. 스무 해 동안 바르트의 몸은 저울 위에서 적혔다. 이 줄의 몸은 저울에 오른 적이 없었다.
바르트가 노트를 돌려받아 그 줄을 오래 보았다.
"…크네."
"손이 이래서."
"아니."
바르트가 노트를 덮지 않고 무릎에 얹었다.
"됐어."
켈리는 맨 뒷장으로 넘겨 바르트 칸의 「개울」 줄에 그것을 옮겨 적었다. 「옆구리. 손바닥. 달지 않음.」 역시 컸다. 「인부」 칸 바로 옆까지 넘어갔다. 이번에는 오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비탈 아래, 낮에 떠나온 숲 가장자리가 멀리 한 줄로 어둡게 누워 있었다. 그 끝에 무언가 앉아 있었다.
회색이었다. 바위인 줄 알았다. 바위였다면 귀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늑대였다. 앉아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숲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숲과 비탈의 경계, 아무도 서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린이 일어섰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부르면 올까. 부르면 갈까. 린은 그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될지 몰랐고, 모르는 채로 부를 수 없었다.
"…영감님 털 색이야."
린이 작게 말했다.
켈리가 허리춤의 끈을 풀었다. 손가락이 닫히지 않아 매듭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뼈 일곱 개와 깃털 다섯 개가 꿰인 끈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손목에 걸었다. 그러고는 팔을 들었다. 팔은 어깨 높이에서 멈췄다. 그 위로는 올라가지 않았다. 켈리는 거기까지만 들어 보였다.
맡은 것이 여기 있다는 뜻이었다. 그 뜻이 늑대에게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늑대는 일어서지 않았다. 귀만 한 번 이쪽으로 섰다.
켈리의 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깨 높이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하는 팔이었다. 린이 데지 않은 왼손으로 켈리의 팔꿈치를 받쳤다. 둘이 그렇게 서 있었다. 해가 넘어갔다. 늑대는 그 자리에 엎드렸다. 다가오지 않았다. 가지도 않았다.
그날 밤 켈리는 노트 맨 뒷장을 오래 보았다. 칸이 열이었다. 고슈 칸에 물음표가 하나 있었다. 켈리는 그 물음표를 지우지 않기로 했다. 내일 그 옆에 적을 것이 하나 생겼을 뿐이었다. 멀리. 앉아 있음.

 

치유사가 없다


린이 깬 것은 동이 트기 조금 전이었다. 깼다기보다 무언가에 끌려 올라온 것에 가까웠다. 마른 풀숲에 모로 누워 있던 몸이 한 번 크게 튀었고, 오른손이 가슴 앞으로 말려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소리가 났다.
켈리는 그 소리에 눈을 떴다. 막사에서 밤에 나는 소리는 대개 셋 가운데 하나였다. 기침과 잠꼬대와, 이를 악문 채 새어 나오는 숨. 이것은 그 셋 어디에도 들지 않았다. 이를 악물지 않은 소리였다. 막을 생각을 아직 하지 못한 사람의 소리였다.
린이 울고 있었다.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쥐고 무릎 사이에 끼운 채, 몸을 동그랗게 말고 울었다. 소리를 낮추려 하지 않았다. 소아레 마을 어귀에서 늪 바람이 눈에 들어갔다고 둘러대던 린이었다. 그때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먼저 둘러댔다. 지금은 둘러댈 틈이 없었다.
어제 아침 칼자루를 쥐었던 손이었다. 그 손은 그때 아무것도 몰랐다. 불을 빌린 동안 불은 뜨겁지 않았고, 빌린 것을 돌려받기 전까지 그 손바닥은 린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돌려받고 있었다. 이틀 치 뜨거움이 이자를 붙여 한꺼번에 손바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바르트가 몸을 일으키려다 옆구리를 붙잡고 도로 누웠다. 오벨이 일어나 앉아 풀숲을 더듬어 안경을 찾았다. 니카는 열에 젖은 눈을 떴다가 린 쪽을 보고는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다. 셀 것이 아니었다.
켈리가 린 옆으로 기어갔다. 손가락은 아직 가운데 마디에서 멈췄다. 린의 손을 잡아 줄 수 없었다. 잡을 수 있었다 해도 지금 그 손은 아무도 잡으면 안 되는 손이었다. 켈리가 가진 것 가운데 지금 쓸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하나."
린의 어깨가 흔들렸다.
"둘."
켈리는 린의 숨에 맞춰 세지 않았다. 린의 숨이 따라올 만한 빠르기로 셌다. 행군할 때 교관이 세던 빠르기였다. 사람의 발이 생각보다 먼저 맞춰 들어가는 빠르기였다. 개울가에서는 켈리가 숫자를 말하면 다섯이 움직였다. 지금 켈리가 세는 것은 한 사람의 숨이었다.
"셋. 넷."
처음에 린의 숨은 숫자를 앞질렀다. 일곱쯤에서 숫자와 나란해졌고 열둘쯤에서는 숫자 뒤를 따라왔다. 켈리는 서른까지 세고 처음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 서른을 다 세기 전에 린이 다시 몸을 말았다. 아까와 같았고, 아까보다 조금 더했다. 켈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린은 불을 두 번 빌렸다. 두 번 빌린 것은 두 번 돌아왔다. 켈리는 셈을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셌다.
"하나."
오벨이 물통 뚜껑에 물을 따라 들고 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뚜껑을 든 채 서 있었다. 켈리가 턱으로 린의 손을 가리켰다. 오벨이 무릎을 꿇고 뚜껑을 기울였다. 물이 칼자루 모양으로 부어오른 자리 위로 흘러내렸다. 린이 숨을 크게 들이켰고, 켈리는 그 숨도 셌다. 오벨은 뚜껑이 빌 때마다 다시 따랐다. 물통이 가벼워지는 소리가 났다. 아무도 물을 아끼자고 하지 않았다.
해가 산등성이에 걸릴 무렵 린의 숨이 숫자 없이도 고르게 되었다. 켈리가 세기를 멈췄다. 린이 눈을 떴다. 눈가가 부어 있었다.
"…이게 원래 이런 거야?"
"응."
"너는 맨날 이랬어?"
"…다음 날 아침에."
"뭐가."
"걸고 나면. 다음 날 아침에 와."
린이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칼자루 모양이 아침 빛 아래에서 벌겋게 부어 있었다. 손바닥 가장자리의 물집 자리가 젖은 종이처럼 쭈글쭈글했다.
"그래서 나중에 온다고 한 거구나."
"응."
린이 한참 있다가 말했다.
"…이렇게 오는 줄 알았으면."
그 뒤를 린은 말하지 않았다. 켈리도 묻지 않았다. 그 뒤에 무엇이 붙을지 둘 다 알았고, 알았더라도 했을 것이라는 것도 둘 다 알았다. 바르트의 옆구리는 멎었다.
바르트가 누운 채로 린을 보았다.
"…미안하네."
"하지 마요."
린이 손을 무릎 위에 조심스럽게 펴 놓으며 말했다.
"그 말 들으면 더 아파요."
바르트는 그 뒤로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자루에서 마지막 남은 빵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나눴고, 가장 큰 조각을 린의 무릎 옆에 놓았다. 그것도 미안하다는 말이었지만 린은 그 말은 받았다.

빵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한 덩이를 다섯으로 나누자 손바닥보다 작은 조각들이 되었다. 켈리는 자기 몫을 품에 넣으려다 그만두고 그 자리에서 먹었다. 다음 끼니가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먹어 두어야 했다. 그것은 육성소가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탈영한 뒤의 숲이 가르친 것이었다.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숲 가장자리를 따라 실베인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이틀이면 모라였고 사흘이면 윗늪이었다. 비탈을 오르면 산이었다. 산등성이는 회색 돌을 군데군데 드러낸 채 서쪽으로 길게 이어졌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바르트만 알았다. 바르트는 드란이라고만 했다.
오벨이 수첩을 폈다.
"윗늪에서 청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오벨이 말을 이었다.
"청은 어디가 아픈지였습니다. 찾았습니다. 찾았으면 가서 말해야 합니다. 외는 이도 돌아오면 본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윗늪까지 가면요."
니카가 누운 채로 말했다. 이마에 얹은 젖은 천이 미끄러져 눈썹에 걸렸다.
"조사대 천막하고 반나절 거리예요. 걔들이 윗늪 쪽으로 올 확률이—"
니카가 입을 다물었다. 숫자를 말하지 않았다. 니카가 숫자를 말하지 않는 것은 숫자가 나쁠 때였다.
켈리는 비탈 아래를 보았다. 숲 가장자리가 한 줄로 누워 있었고 그 끝은 아침 안개에 묻혀 있었다. 그 너머 어딘가에 모라가 있었다. 둑 끝에서 징발대의 저울이 가라앉던 마을이었다. 그날 모라는 싸웠다. 마을 사람들이 앞장섰고 늪이 거들었다. 그날 온 것은 저울을 든 사람들이었다. 이번에 올 것은 누런 줄 앞에서 멈추지 않는 쇠틀이었다.
쫓는 쪽이 둘이었다. 거두러 오는 쪽과 데려가러 오는 쪽. 둘 다 켈리가 있는 데로 왔다. 켈리가 모라에 있으면 모라로 왔고 윗늪에 있으면 윗늪으로 왔다.
"마을로 가면 마을이 값을 내."
켈리가 말했다. 다들 켈리를 보았다.
"산으로 가."
말하고 나서야 켈리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알았다. 길을 정했다. 열두 해 동안 길은 정해져서 왔다. 지도 위에 그어진 선으로 왔고 교관의 손가락으로 왔고, 삼 년 동안은 가브릴의 등으로 왔다. 그 등을 따라가면 되었다. 탈영한 뒤에는 바르트가 정했고, 바르트가 정하지 않는 날에는 고슈가 앞에서 걸었다. 지금 고슈는 숲에 있었고 바르트는 옆구리를 누르고 앉아 있었다. 정할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켈리의 입이 먼저 정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바르트가 켈리를 오래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산."
"그럼 윗늪은."
린이 물었다. 켈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켈리의 셈에는 윗늪에 갈 자리가 없었다. 약속은 오벨의 셈이었고 켈리는 그런 셈을 할 줄 몰랐다.
린이 잠깐 있다가 말했다.
"그럼 내가 외어 둘게."
"…외어 둬?"
"나중에 말하려고. 윗늪은 적은 건 안 받잖아. 아저씨 수첩에 있어도 소용없어."
오벨이 수첩을 반쯤 덮었다.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린이 무릎을 꿇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서 무릎 위에 펴 둔 채였다. 외는 이들이 외기 전에 하던 자세였는데 그 손바닥만은 외는 이들과 달랐다. 린은 쉬는 자리에서 쉬며 외었다.
"윗늪 위. 옛 돌산 기슭. 천막 일곱. 깃발 없음. 구덩이 하나. 물 빼는 홈통 하나. 누런 줄은 홈통이 닿는 자리에서 시작함. 홈통 위쪽 풀은 양쪽 다 초록. 개구리는 위에서 욺."
린이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인부들은 입에 천을 감고 내려감. 한 사람은 띠를 오른팔에 맴."
그러고는 오벨을 보았다.
"…맞아?"
"맞습니다."
오벨이 수첩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볼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오벨이 잃지 않은 날에 오벨이 직접 본 것이었다.
켈리는 린을 보았다. 소아레에서 린은 「나는 외는 이 아니야」라고 했다. 할머니 앞에서, 차례를 받지 못한 자리에서. 외는 이는 차례가 아닌 말은 외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린에게 차례를 준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린이 지금 한 것은 외는 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린이 하는 일이었다.

산은 비탈보다 가팔랐다. 흙보다 돌이 많았고, 돌 틈마다 뿌리를 뼈처럼 드러낸 소나무가 바람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일행은 그날 해가 질 때까지 걸어 산의 어깨쯤에 닿았다. 바르트의 걸음에 맞추느라 빠르지 않았다. 켈리가 앞에서 걸었다. 앞에서 걷는 것도 처음이었다. 앞에서 걸어 보니 앞에는 길이 없었다.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뒤에 생겼다.
이튿날 아침 켈리는 지팡이를 쥐었다.
쥐어졌다. 손가락이 가운데 마디를 지나 끝까지 닫혔다. 켈리는 그것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사흘 만이었다. 손바닥 바로 위에서 쇠 테의 갈라진 자리가 만져졌다. 엄지로 쓸면 머리카락만 한 틈이 손끝에 걸렸다. 쥘 수 있게 된 손이 처음 만진 것이 그 틈이었다.
"돌아왔네."
린이 말했다. 오른손을 천으로 싼 채였다.
"이제 걸 수 있겠네."
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다음 날, 해가 한낮을 조금 넘었을 때였다.
멀었다. 산 아래, 며칠 전 떠나온 숲 가장자리 쪽이었다. 켈리가 바위 위로 올라가 엎드렸다. 숲 가장자리를 따라 작은 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셋은 낮았고 빨랐다. 개였다. 그 뒤로 넷이 따랐는데 등에 멘 것의 모양으로 쇠뇌인 줄 알았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었다. 회색 외투였다. 외투는 걸음이 느렸고, 걷다가 멈춰 개들이 코를 박은 자리를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았다.
켈리는 그 외투를 알았다. 구덩이 앞에서 켈리의 손등을 뒤집던 손이 그런 소매에서 나왔다. 상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 사람이 개를 따라오는 것은 켈리를 상하지 않게 데려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켈리가 바위에서 내려왔다.
"개 셋. 쇠뇌 넷. 회색 외투 하나. 숲 끝."
"냄새로 찾을 확률이요."
니카가 말했다. 열이 반쯤 내린 얼굴이었다.
"9할이요. 이건 맞아요."
바르트가 일어섰다. 일어서는 데 시간이 걸렸다. 옆구리를 누른 손이 떨렸다. 바르트는 뛸 수 없었다. 걸을 수는 있었지만 개보다 빨리 걸을 수는 없었다.
린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 걸면 업을 수 있잖아."
켈리는 셈했다. 업을 수 있었다. 다리에 속도를, 팔과 등에 힘을 따로 걸면 바르트를 업고 개보다 빨리 산을 오를 수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는. 그다음은 셈할 필요가 없었다. 켈리는 그다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구덩이 앞에서 들보를 받친 것이 아침이었고, 밤에 쇠틀이 왔을 때 켈리의 손은 지팡이를 쥐지 못했다. 개 뒤에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은 오늘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계급장 없는 그 사람에게는 하루가 먼저였고, 하루는 매일 왔다.
"지금은 안 써."
켈리가 말했다. 린이 켈리를 보았다. 그 눈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켈리는 몰랐다. 켈리는 말을 보탰다. 말을 보태는 것도 켈리에게는 처음 해 보는 일이었다.
"써 버리면 내일 없어. 저 사람들은 내일도 와."
바르트가 켈리를 보았다. 아까 길을 정할 때처럼 오래 보았다.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짧게 숨을 내쉬었는데, 켈리는 그것이 웃음의 앞부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 어쩔 건가."
켈리는 그것까지는 셈하지 못했다. 그때 린이 말했다.
"물."
린이 산 아래쪽 골짜기를 가리켰다. 물소리가 났다.
"늪에서 사냥할 때 짐승이 물로 들어가면 놓쳐. 냄새가 물에 안 남아."

계곡물은 차가웠다. 발목을 담그자 뼈까지 찬 기운이 올라왔고 무릎까지 들어서자 숨이 저절로 짧아졌다. 물살은 빨랐다. 바닥의 돌들은 이끼로 덮여 미끈거렸다. 일행은 물을 거슬러 올랐다.
문제는 바르트의 옆구리였다. 지진 자리는 젖으면 안 되었다. 물은 무릎까지였고 옆구리는 그보다 한참 위에 있었으니 넘어지지만 않으면 되었다. 바르트는 윗옷 자락을 걷어 올려 입에 물었다. 바위 밑에서 가죽 끈을 물던 입이었다. 그 꼴로 한 손은 옆구리를 누르고 한 손으로는 허공을 짚어 균형을 잡았다.
오벨은 가방을 머리 위로 들었다.
"계약서 젖으면 서기 안 나온다면서요."
니카가 말했다. 오벨이 머리 위의 가방을 올려다보았다.
"…그렇습니다."
니카는 찬물이 무릎에 닿자마자 눈을 감았다.
"아."
"왜."
"열 내려가는 확률이요. 9할."
린은 왼손 하나로 지팡이와 털가죽 둘을 머리 위로 받치고 걸었다. 천으로 싼 오른손은 가슴에 붙였다. 맨발이 이끼 낀 돌을 쥐듯 디뎠다. 이 물에서 넘어지지 않을 사람은 린 하나였다.
켈리는 바르트의 오른쪽에 섰다. 왼쪽은 지진 자리였다. 바르트의 오른팔을 자기 어깨에 걸쳤다. 무거웠다. 켈리는 걸지 않았다.
세 번째 굽이에서 바르트의 발이 미끄러졌다.
이끼 낀 돌이었다. 바르트의 몸이 왼쪽으로, 지진 자리 쪽으로 기울었다. 물이 옆구리를 향해 올라왔다. 켈리의 두 다리가 물 밑 돌 틈에 박혔다. 어깨에 걸친 팔을 끌어당겼다. 바르트의 무게가 켈리의 어깨와 허리와 무릎을 차례로 지나 물 밑의 돌까지 내려갔고, 거기서 멈췄다. 바르트가 기운 채로 섰다. 옆구리와 물 사이에 손바닥 하나만 한 틈이 남았다.
바르트가 옷자락을 문 채로 켈리를 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다 옷자락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 바르트가 옷자락을 손으로 옮겨 쥐었다.
"…자네 지금 걸었나."
"안 걸었어."
"그럼 이게 그냥 자네야?"
"모래주머니."
켈리가 말했다. 삼 년 동안 아침마다 모래주머니를 지고 벌판을 돌았다. 터지는 자리까지 제 발로 가라고 만든 다리였다. 그 다리가 지금 물 밑 돌 틈에 박혀 바르트를 받치고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걸지 않은 몸은 값을 청구하지 않았다.
바르트가 웃었다. 웃다가 손에 쥐었던 옷자락을 놓쳤다. 옷자락이 물에 떨어졌다.
"옷이 젖었습니다."
오벨이 머리 위로 가방을 든 채 말했다.
"옆구리는."
"안 젖었습니다."
"그럼 됐어."
켈리가 말했다. 바르트는 젖은 옷자락을 다시 걷어 물었다. 웃음이 아직 남아 있어서 옷자락이 자꾸 입에서 빠졌다.
한 시간 남짓 물을 거슬러 올랐을 때 개 짖는 소리가 계곡 입구에 닿았다. 소리가 물가에서 흩어졌다. 셋이 서로 다른 쪽에서 짖었다. 쫓던 것이 물가에서 끊긴 개들의 소리였다. 일행은 굽이 뒤 바위 그늘에 몸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물이 무릎을 스치며 지나갔다. 니카의 입술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무엇을 세는지 켈리도 알았다. 켈리도 세고 있었다.
그때 다른 소리가 났다.
짖는 소리가 아니었다. 길고 낮게 시작해서 끝이 높아지는 소리였다. 숲 쪽에서 왔다. 개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다음 순간 셋이 한꺼번에 짖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흩어진 소리가 아니었다. 한 방향이었다. 소리가 계곡 입구에서 멀어졌다. 숲 쪽으로, 산 아래로, 점점 작아졌다. 사람의 고함이 그 뒤를 따라갔다. 회색 외투의 목소리가 무언가 소리쳤지만 개들은 듣지 않았다.
린이 바위 그늘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붙어 있었다.
"…영감님이야."
아무도 그 말을 받지 않았다. 다들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날 밤 산의 어깨 너머에서 늑대가 울었다. 한 번이었고 멀었다. 린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그 소리가 끝날 때까지 들었다. 부르지 않았다. 켈리도 부르지 않았다. 켈리는 허리춤의 끈을 손으로 쥐었다. 이번에는 쥐어졌다.

이튿날은 쉬었다. 켈리가 정했다. 개들이 돌아오기 전에 하루쯤은 걷지 않아도 된다는 셈이었고, 그 셈이 맞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바르트의 걸음이 하루를 더 버티지 못한다는 것은 다들 알았다.
새벽에 린이 먼저 그것을 보았다. 바위 그늘에서 조금 떨어진 풀밭에 토끼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목덜미가 깨끗하게 물려 있었고 나머지는 상한 데가 없었다. 둘레의 이슬 맺힌 풀에 짐승의 발자국이 한 줄로 찍혀 왔다가 한 줄로 돌아갔다.
"…영감님이 잡는 방식이야."
린이 말했다. 토끼를 바로 들어 올리지 않았다. 한참 들여다보기만 했다.
"목만 물어. 다른 데는 안 상하게. 먹을 사람 생각해서."
토끼는 린이 왼손 하나로 손질했다. 늪 아이들은 한 손으로도 그 일을 할 줄 알았다. 칼은 바르트의 작은 칼이었다. 바위 밑에서 린이 쥐었던 그 칼이었다. 린은 칼자루를 쥐기 전에 잠깐 망설였고, 이번에는 왼손으로 쥐었다.
그날 아침의 다른 일은 대부분 오벨에게 갔다.
켈리가 바르트의 붕대를 갈려고 했다. 어제 계곡에서 옷자락이 젖었고 붕대 끝도 조금 젖었다. 켈리가 천을 감고 끝을 묶었다. 바르트의 숨이 멈췄다.
"…숨."
켈리가 매듭을 풀고 다시 묶었다. 이번에는 붕대가 바르트의 허리에서 스르르 흘러내렸다. 세 번째에는 바르트가 손을 들어 켈리를 말렸다. 손은 쥘 수 있게 돌아왔는데 그 손은 중간을 몰랐다. 모래주머니를 지고 삼 년을 돈 팔에는 꽉과 헐렁 사이의 눈금이 없었다. 바르트의 손은 떨렸고 니카의 손은 열에 들떠 있었으며 린의 오른손은 천에 싸여 있었다.
오벨이 붕대를 받아 들었다.
오벨은 붕대를 서류처럼 감았다. 천의 끝을 맞추고, 한 번 감을 때마다 접힌 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펴고, 마지막 끝을 세 겹으로 접어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매듭은 짓지 않았다. 접어 넣은 끝이 풀리지 않았다. 바르트가 자기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왜 안 풀려."
"서류 묶음은 끈 없이 접어서 보관합니다. 삼단 접기가 가장 덜 풀립니다."
린의 손도 오벨이 감았다. 찬물에 적신 천을 칼자루 모양 위에 얹고 같은 방식으로 접었다. 린이 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이거 편지 접은 거잖아요."
"편지도 삼단입니다."
니카의 이마에 얹을 천은 오벨이 반듯하게 네 번 접어 얹었다. 니카는 눈을 감은 채 그것을 받고는 서류함에 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오벨은 그 말을 칭찬으로 들었다.
불은 안개가 있을 때만 피웠다. 켈리가 그렇게 정했다. 새벽 안개가 골짜기를 채우고 있는 동안에는 연기가 안개에 섞여 어디가 연기인지 알 수 없었다. 오벨이 그 불에 죽을 끓였다. 바르트의 자루 맨 밑에서 나온 곡식 한 줌과 토끼 고기, 그리고 켈리가 바위 둘레에서 뜯어 온 풀이 들어갔다. 잎이 다섯 갈래였고 줄기가 붉었고 그늘에서 자란 것이었다. 실베인에서 몫으로 말했던 것을 켈리는 처음으로 일행의 솥에 넣었다.
오벨이 그날 아침 죽을 몇 번 태웠는지는 켈리의 장부에 두 번으로 적혀 있다. 실제로는 그보다 많았으나, 그의 명예를 위해 여기서는 장부를 따르기로 한다.
결국 켈리가 국자를 들었다. 모라의 젊은이가 준 늪오리나무 국자였다. 허리춤에 매달고 다닌 지 보름이 되었는데 국자로 쓰는 것은 처음이었다. 켈리는 저었다. 쉬지 않고 저었다. 같은 동작을 쉬지 않고 되풀이하는 것은 켈리가 열두 해 동안 가장 많이 해 온 일이었다. 죽은 더 타지 않았다.
"그 국자요."
니카가 이마의 천 아래에서 말했다.
"부러질 확률 68.7퍼센트는 아직 유효해요."
켈리는 국자를 조금 느슨하게 쥐었다.
오후에 오벨이 바르트의 붕대를 다시 풀었다. 지진 자리에 딱지가 앉아 있었다. 검붉고 단단했으며 가장자리가 조금 말려 올라가 있었다. 아무도 앉히지 않았는데 앉아 있었다.
"…앉았네."
바르트가 말했다. 놀란 목소리가 아니었다. 앉을 줄 알았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켈리는 그 딱지를 보다가 막사의 등잔을 떠올렸다.
출격한 다음 날 밤이면 치유사가 등잔을 들고 막사에 왔다. 흰 소매를 걷어 올린 사람들이었다. 치유사는 포격형의 침상부터 들렀고 결계형의 침상에서 오래 머물렀다. 돌파형의 침상은 지나갔다. 켈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돌파형은 다음 출격이 오기 전에 저 혼자 일어났다. 일어나지 못하면 다음 출격이 오지 않았다.
켈리의 멍은 아무도 손대지 않았으므로 저 혼자 검어졌다가 노래졌다가 사라졌다. 느렸다. 구호의 코피는 치유사가 손을 얹으면 그 자리에서 멎었다. 빨랐다. 그런데 켈리는 한 가지를 보았다. 구호의 코피는 갈수록 늦게 멎었다. 처음에는 손을 얹자마자 멎던 것이 나중에는 치유사가 한참을 앉아 있어야 멎었다. 손이 얹힐 때마다 다음 코피가 조금씩 더 오래 갔다.
켈리는 그때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지금도 정확히는 몰랐다. 다만 바르트의 딱지를 보며 셈은 할 수 있었다. 낫게 해 주는 것에도 값이 있었다. 그 값은 다음 상처에서 냈다. 켈리의 멍은 그 값을 내지 않았다. 아무도 켈리에게 그것을 빌려주지 않았으므로 켈리는 갚을 것도 없었다. 치유사가 없었다. 그 말이 그날 처음으로 나쁘게만 들리지 않았다. 느린 것은 제 것이었다.

밤에 켈리가 노트를 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켈리가 직접 적었다. 손이 돌아왔으므로. 글씨는 여전히 삐뚤었고 획마다 연필이 한 번씩 멈췄으나, 바위 밑에서 손바닥 사이에 끼우고 쓰던 것보다는 작았다.
「개울」 줄의 고슈 칸에는 물음표가 있었고 그 옆에 오벨이 받아 적어 준 「멀리. 앉아 있음.」이 붙어 있었다. 켈리가 그 아래에 새 줄을 그었다. 왼쪽 여백에 「계곡」.
켈리 칸에 「0. 안 씀.」이라고 적었다.
0은 세 번째였다. 모라와 소아레의 탁자에서 적은 것이 둘이었다. 그 둘은 걸 까닭이 없는 자리에서 걸지 않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까닭이 있었다. 개가 있었고 쇠뇌가 있었고 회색 외투가 있었다. 걸 까닭이 있는 자리에서 걸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켈리는 그 0을 앞의 둘보다 오래 보았다. 같은 모양인데 무게가 달랐다.
바르트 칸에 「옷 젖음. 옆구리 안 젖음.」 바르트가 그것을 보고 웃다가 옆구리를 눌렀다.
니카 칸에 「찬물.」 니카가 고개를 들었다.
"그건 값이 아니라 좋았던 건데요."
"찼잖아."
니카가 다시 누웠다. 반박하지 않았다. 찼다.
고슈 칸에 「개 데려감.」 켈리는 그 네 글자를 적는 동안 연필을 조금 천천히 움직였다.
그 아래에 줄을 하나 더 그었다. 「쉰 날.」
오벨 칸에 「죽 두 번 태움.」
"그건 대가가 아닙니다."
오벨이 말했다.
"곡식 냈잖아."
오벨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곡식은 바르트의 자루 맨 밑에 있던 마지막 한 줌이었다. 탄 것도 그 한 줌에서 나왔다. 오벨은 그 셈에 맞설 조항을 찾지 못했다.
고슈 칸에서 켈리의 연필이 멈췄다. 칸 안에 적을 것이 아니었다. 고슈가 낸 것이 아니라 고슈가 준 것이었다. 켈리는 연필을 칸 바깥 여백으로 옮겨 작게 적었다. 「토끼 1.」
"받은 것을 적는 칸은 없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여백에."
켈리가 말했다. 오벨이 「자국 1」과 「린이 외어 줌」이 적힌 여백을 보았다. 그 여백은 이제 비워 두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벨은 더 말하지 않았다.
켈리의 연필이 켈리 칸으로 돌아갔다. 「쉰 날」 줄의 켈리 칸이었다. 켈리는 거기에 무언가를 적으려 했다. 바르트의 옆구리였다. 바르트가 쇠틀 앞에 선 것은 켈리 앞이었고, 켈리가 쥐지 못하는 손으로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 값의 어느 만큼은 켈리 칸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연필 끝이 종이에 닿았다.
"그건 내 칸이야."
바르트가 말했다. 켈리의 어깨 너머였다. 소아레에서 들은 말이었다. 그때 켈리는 바르트의 장부에서 줄 하나를 옮겨 적고 있었다.
켈리가 연필을 떼었다.
바르트 칸에는 이미 그 값이 적혀 있었다. 「옆구리. 손바닥. 달지 않음.」 바르트의 말이었고 바르트가 고른 값이었다. 바르트는 그날 밤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그 병을 품에 넣었다. 그것을 켈리 칸에 다시 적으면 같은 값이 두 번 적혔다. 그리고 두 번째 줄이 첫 번째 줄을 지웠다. 바르트가 낸 것이 켈리가 낸 것이 되었다.
동료가 다친 것은 켈리가 낸 값이 아니었다. 켈리는 그 말을 소리 내어 하지 않았다. 다만 「쉰 날」 줄의 켈리 칸에 다른 것을 적었다. 「손 돌아옴.」
그것은 켈리의 것이었다.

7월 1일 아침 일행은 산마루에 올랐다.
마지막 오르막은 층이 진 바위였다. 바르트는 바위마다 쉬었고 쉴 때마다 옆구리에서 손을 떼어 보았다.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니카는 열이 다 내려 걸음이 곧았다. 곧은 걸음으로 니카가 일행 가운데 가장 먼저 마루에 닿았고, 닿자마자 그 자리에 섰다.
켈리가 그 옆에 섰다.
반대편 비탈이 보였다. 비탈 전체가 계단이었다. 사람의 무릎 높이로 쌓은 돌담이 비탈을 가로질러 층층이 내려갔고 층마다 좁은 밭이 있었다. 밭에는 키 작은 보리가 자라고 있었다. 담 하나를 쌓으려면 비탈에서 돌을 하나하나 골라내야 했을 것이었다. 비탈 어디에도 굴러다니는 돌이 보이지 않았다. 전부 담이 되어 있었다.
멀리 비탈이 꺾이는 자리에 돌탑 하나가 서 있었다. 망루였다. 꼭대기에서 연기 한 줄이 곧게 올라가고 있었다. 바람이 없는 아침이라 연기는 흩어지지 않았다.
"드란이야."
바르트가 말했다. 숨이 찼다.
"수출하는 게 사람뿐인 나라야. 돌은 많은데 먹을 건 저 층층이 밭에서 나는 것뿐이라서."
"받아 줄까요."
린이 물었다.
"드란은 사람을 받는 데에도 값을 받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얼마야."
켈리가 물었다.
"모릅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켈리는 연기를 보았다. 연기 아래에는 사람이 있었다.
린이 켈리의 소매를 당겼다. 린의 고개는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 지나온 쪽, 산마루 아래의 바위들이었다.
회색이 있었다.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숲 가장자리에서 처음 본 날보다 훨씬 가까웠다. 사람의 목소리가 겨우 닿지 않을 만한 거리였다. 늑대는 일행을 보고 있었다. 귀가 이쪽으로 서 있었다.
켈리가 허리춤에서 끈을 풀었다. 이번에는 매듭이 쉽게 풀렸다. 끈을 손목에 걸고 팔을 들었다.
팔이 어깨를 지나 올라갔다. 머리 위까지 올라갔다. 숲 가장자리에서는 어깨에서 멈추던 팔이었다. 켈리는 뼈 일곱 개와 깃털 다섯 개가 바람 한 점 없는 공중에서 흔들리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흔드는 것은 켈리의 팔이었다. 팔이 떨리고 있었다. 떨리면서도 내려오지 않았다.
늑대가 일어섰다. 일행 쪽으로 한 걸음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내려오지 않았다. 일어선 채로 이쪽을 보다가 도로 앉았다. 린의 숨이 한 번 걸렸다가 풀렸다.
켈리가 팔을 내렸다. 노트를 꺼내 맨 뒷장을 폈다. 「쉰 날」 줄 아래에 새 줄을 긋고 여백에 「산마루」라고 적었다. 그리고 고슈 칸에 적었다. 조금 가까이.
칸은 좁았다. 그래도 들어갔다.
일행이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망루 쪽이었다. 켈리가 앞에서 걸었다. 연기를 보고 걸었다.
연기를 보고 걷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삼 년 동안 열일곱 번 그렇게 걸었다. 걸어간 끝에서 터뜨리지 않으려고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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