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세상에는 두 종류의 오싹함이 있다.
하나는 누구나 겪는, 여름밤 바람 같은 오싹함. 그리고 다른 하나는—나만 아는, 등 뒤에 가만히 서 있는 오싹함.
그 큰일을 겪고 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 두 번째 오싹함을 느낀다. 골목 그늘에서, 낡은 건물 틈에서,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그 느낌. 요괴가 유독 잘 꼬이는 내 체질은, 세상을 한 번 구했다고 해서 사라져 주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남들은 못 보는 걸 보는 겁쟁이다.
하지만—딱 하나, 달라진 게 있다.
이제 나는, 그 오싹함 앞에서 눈을 감지 않는다.

어둑시니와의 그 밤이 지나고, 며칠이 흘렀다.
가장 급한 일은, 지마를 회복시키는 거였다. 금이 간 몽당방망이는 여전히 잠잠했다. 이따금 희미한 온기만 느껴질 뿐, 그 시끄러운 목소리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애가 탔다.
"할아버지, 지마 어떻게 하면 빨리 나아요?"
"글쎄다. 도깨비 본체가 상한 건, 시간이 약이지." 고만복 할아버지가 수염을 쓸며 말했다. "한데, 회복을 좀 도우려면… 그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걸 먹이는 게 최고지."
지마가 제일 좋아하는 것. 그건,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용돈을 탈탈 털어 메밀묵을 사 날랐다. 방망이 옆에 메밀묵 한 접시를 놓아두면, 다음 날 아침엔 신기하게도 접시가 텅 비어 있었다. 잠든 와중에도, 지마는 메밀묵만은 꼬박꼬박 챙겨 먹은 거다. 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게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아서 안심이 됐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다.
"…어이, 꼬맹이."
잠결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지마?! 지마야!"
"흐암. 잘 잤다." 방망이 위로, 지마가 기지개를 켜며 스윽 나타났다. 금 갔던 자리는 아직 희미하게 흉터처럼 남아 있었지만, 그 왕방울 눈만은 예전 그대로 반짝였다. "한데 꼬맹이, 메밀묵이 좀 부족하더구나. 이 몸 정도 되는 대도깨비가 회복하려면, 최소 백 그릇은 있어야 하는 법인데. 겨우 며칠에 한 접시가 뭐냐."
"…너 지금 살아난 지 십 초 됐거든?"
살아나자마자 메밀묵 타령이라니. 나는 기가 막히면서도, 눈물이 핑 돌 만큼 반가웠다.

그런데 지마는, 기력을 되찾자마자 더 가관이었다.
"크흠. 아무튼 말이다, 꼬맹이." 지마가 팔짱을 끼고 거들먹거렸다. "지난번 그 어둑시니 말이다. 결국, 누구 덕에 이긴 것 같으냐?"
"…어, 다 같이?"
"어허, 무슨 소리! 마지막에, 이 몸이 딱! 깨어나서, 결정적인 힘을 보탰지 않았느냐!" 지마가 제 가슴을—가슴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탕탕 쳤다. "생각해 봐라. 이 천 년 대도깨비가 마지막에 짠! 하고 나타나지 않았으면, 네가 그 어둠을 어찌 이겼겠느냐? 결국 이 모든 게, 다 이 몸의 활약 덕분인 게지! 으하하!"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정작 그 '마지막 한 번'을 위해, 잠들기 전까지 나를 감싸다 방망이에 금이 간 건 쏙 빼놓고. 게다가 마지막엔 힘이 다 빠져서 "미안하다, 이제 정말 못 하겠다" 하고 다시 잠들어 놓고선.
"지마야. 너 그때, 마지막에 힘 다 빠져서 도로 잠들었잖아."
"뭐, 뭣이? 그, 그건 이 몸이 잠깐 전략적으로 휴식을 취한 거고—"
"그리고 결정타는 남구천 아저씨랑, 내가 낸 건데."
"어허, 세세한 건 됐다! 아무튼 큰 그림은 이 몸이 그렸다는 게 중요한 게지!"
"게다가 마지막에 '둘이서 함께 가자'고 멋있게 말한 것도 너였잖아. 나 그거 감동했는데."
"그, 그건… 크흠. 뭐,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다오." 지마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렸다. 왕방울 눈이, 어쩐지 살짝 붉어진 것도 같았다.
나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그래. 이 시끄럽고 뻔뻔한, 그러면서도 은근히 정 많은 허풍쟁이가 돌아왔다. 이제야, 정말로 다 끝난 것 같았다.

세상을 구한 다음 날, 나는—평범하게 학교에 갔다.
정확히는, 지각을 했다. 며칠간 지마를 간호하느라 늦잠을 잔 탓이었다. 교문을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는데, 하필 담임인 마정숙 선생님—우리끼리는 '마녀쌤'이라 부르는—과 딱 마주쳤다.
"이민수! 너 또 지각이야?" 마녀쌤이 팔짱을 끼고 눈을 치켜떴다. "요즘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니. 준비물도 자꾸 빼먹고, 수업 시간엔 꾸벅꾸벅 졸고. 내가 너만 할 때는 말이야, 새벽같이 일어나서 십 리 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녀쌤의 '나 때는 말이야' 이야기가 시작되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게 한번 시작되면 최소 십 분이었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 지각했다고 잔소리를 듣고 있다니. 어젯밤까지 거대한 어둠과 목숨 걸고 싸운 나인데, 오늘은 준비물 안 챙겼다고 혼나고 있었다. 나는 그 어이없는 낙차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그 잔소리가, 조금도 밉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웠다. 이 지루하고 평범한 잔소리가 있다는 건, 우리 동네가 무사하다는 뜻이었으니까. 마녀쌤이 이렇게 시시콜콜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이 평화가, 나는 새삼 소중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내일부터 안 늦을게요." 내가 순순히 고개를 숙이자, 마녀쌤이 오히려 김이 샜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 같으면 우물쭈물 변명이나 하던 녀석이, 웬일로 순순히 사과를 하니 의외였던 모양이다.
"…어, 그래. 알면 됐어. 어서 들어가." 마녀쌤이 헛기침을 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 무뚝뚝한 얼굴 뒤로, 아주 잠깐 어리둥절한 기색이 스쳤다. 나는 그게 어쩐지 우스워서, 교실로 뛰어가며 피식 웃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수현이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뒷자리의 서리는 여전히 두꺼운 요괴 책에 코를 박고 있었다. 다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범한 얼굴이었다. 온 동네를 구한 우리 넷이, 오늘은 그냥 평범한 초등학생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한 건—어른들 중 누구도,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는 거였다.

쉬는 시간, 아이들이 창밖을 보며 떠들었다.
"야, 요즘 우리 동네 왜 이렇게 분위기 좋아졌지?"
"그러게.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재개발 얘기도 쑥 들어갔대. 사람들이 갑자기 '그냥 여기서 계속 살자'고 마음을 바꿨다나."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요즘 하늘도 엄청 맑잖아."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슬며시 웃었다. 날씨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동네를 짓누르던 그 어둠이 걷혔기 때문이다. 사람들 마음에 고여 있던 불안과 슬픔이 사라지자, 다들 다시 이 동네를 사랑하게 된 거였다. 재개발로 흉흉하던 분위기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진짜 이유를 아는 건, 오직 우리뿐이었다. 우리가 그날 밤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어둠과 싸웠는지. 아무도 몰랐고, 앞으로도 모를 거였다.
조금은, 서운할 법도 했다. 온 동네를 구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게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뿌듯했다. 아무도 모르게, 우리가 이 평범한 일상을 지켜 냈다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뭐 혼자 실실 웃냐." 수현이가 옆구리를 툭 쳤다.
"아니, 그냥. 좋아서." 나는 씩 웃었다.
"뭐래. 이상한 녀석." 수현이도 따라 웃었다.

그날 방과 후, 우리는 늘 그렇듯 고물상으로 향했다.
그런데 고물상 마당에,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낡은 중절모에 검은 정장. 발이 땅에서 한 뼘쯤 떠 있는—저승사자, 명두수 차사였다.
"아, 마침 오셨군요." 명두수 차사가 우리를 보더니, 어디선가 두꺼운 서류 뭉치를 척 꺼냈다. 그 두께가, 웬만한 사전만 했다. "지난번 어둑시니 건, 처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뒤처리 서류가 좀… 남아서요."
"서, 서류요?" 내가 되물었다.
"예. 여기, '초대형 요괴 소멸 신고서'. 여기 '흑막 요괴 처리 결과 보고서'. 그리고 이건 '재개발 구역 정화 확인서'에, '주민 기억 조정 면제 신청서'…" 명두수 차사가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읊었다. 넘겨도, 넘겨도 끝이 없었다. "아, 그리고 여기 '어둑시니 소멸에 따른 저승 인구 변동 정정서'도 있고요. 여기 세 군데, 여기 다섯 군데, 각각 서명 부탁드립니다. 도장도 있으면 좋고요."
"세, 세상을 구했는데… 상은 안 주고, 서류를 쓰라고요?!" 수현이가 기가 막힌 듯 외쳤다.
"상이라뇨. 저희 공단엔 그런 예산이 없습니다." 명두수 차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딱딱하게 말했다. "오히려 요괴를 소멸시키면 소멸시킬수록, 저희는 서류가 늘어나서 야근만 늘어납니다. 이번 달만 벌써 야근이 열두 번째예요." 그러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부디, 서류나 빨리 좀…."
결국 우리는 고물상 마당에 쭈그려 앉아, 산더미 같은 서류에 낑낑대며 서명을 했다. 세상을 구한 영웅들의 보상이, 서류 작업이라니. 나는 손목이 아프도록 이름을 쓰면서,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요괴 세계의 관공서도, 사람 사는 곳이랑 똑같이 팍팍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아니, 다음엔 안 뵙는 게 좋겠네요. 요괴 사건은 없는 게 제일이니." 명두수 차사가 서류를 챙겨 둥실 떠오르며, 처음으로 아주 살짝 웃었다. "…아무튼, 고마웠습니다. 여러분 덕에, 저승도 한시름 놓았어요."
그러고는, 그는 스르르 사라졌다.

명두수 차사가 떠난 뒤, 고만복 할아버지가 조용히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낡은 밥상 위에, 정갈하게 차린 밥 한 상이었다. 따뜻한 쌀밥에, 나물 몇 가지, 그리고—된장국 한 그릇. 할아버지는 그 밥상을, 고물상 마당 한켠 별이 잘 보이는 자리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누구 주는 거예요?"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할아버지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구천이하고, 그 아이 주는 거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어쩐지 촉촉했다. "그 녀석, 옛날에 늘 아침을 지었거든. 형편없는 된장국을 끓여서 말이야. 이제는 그 국이, 이상하게 그립구나." 할아버지가 옅게 웃었다. "저 위에서, 오랜만에 만난 스승하고 제자가—따뜻한 밥이라도, 같이 먹고 있으려나 싶어서."
나는 그 밥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려움을 없애려다 사랑까지 잃어버렸던 사람. 그러다 마지막 순간, 눈물과 함께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사람. 남구천 아저씨는, 그렇게 자기 손으로 어둠을 끝내고 별이 되었다. 나는 그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마지막에 지은 그 따뜻한 웃음이—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잘 드세요, 아저씨." 나는 밤하늘을 향해, 나직이 인사했다.
그때, 밤바람이 살랑 불어와 된장국의 김을 하늘로 실어 날랐다. 마치, 저 위의 누군가가 그 밥상을 받아 든 것처럼. 나는 왠지, 남구천 아저씨가 지금쯤 그 아이와 나란히 앉아—오랜만에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었을까요?" 나는 문득,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한참을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저, 너무 아팠던 사람이지. 아픔을 견디는 법을 몰라서, 잘못된 길로 갔을 뿐이다."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그러지 마라. 아프면 아픈 대로, 무서우면 무서운 대로. 그걸 끌어안고 가는 법을, 너는 이미 알잖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구천 아저씨가 마지막에 되찾은 그 눈물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날 저녁, 고물상은 오랜만에 왁자지껄했다.
떡쇠와 도깨비들이 놀러 와 씨름판을 벌였고, 갓파도 개천에서 오이를 한 아름 안고 찾아왔다. 서리는 이번 사건의 전말을 수첩에 빼곡히 정리하며 "어둑시니 완전체 목격 및 소멸 실증 사례… 이건 진짜 역사에 남을 자료야" 하고 혼자 감격했다. 수현이는 떡쇠와 팔씨름을 하다 어이없이 지고는 "다시! 나 이런 거 다 해봐서 아는데!" 하며 재도전을 외쳤다. 물론, 또 졌다.
그리고 지마는—어느새 회복해서, 메밀묵 접시를 끌어안고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있었다. "역시 평화로운 날엔, 메밀묵이 최고지! 캬!"
"저 도깨비, 회복하더니 먹는 양이 두 배가 됐어." 서리가 수첩에 뭔가를 적으며 중얼거렸다. "'대도깨비, 회복 후 식욕 이백 퍼센트 증가.' 메모 완료."
"어허, 그건 다 회복에 필요한 정당한 영양 섭취니라!" 지마가 발끈했다가, 곧바로 다시 메밀묵에 코를 박았다. 다들 그 모습에 배를 잡고 웃었다.
떡쇠가 그 큰 손으로 내 등을 툭 쳤다. 그 '툭'에 나는 또 앞으로 휘청했지만, 이젠 그것도 익숙했다. "꼬맹이, 언제든 놀러 오너라! 우리 골목은 늘 열려 있으니까!" 방개도 옆에서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갓파는 오이를 아작거리면서, 그 큰 눈으로 나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
나는 그 시끌벅적한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몇 달 전만 해도, 나는 혼자였다. 요괴가 무서워서 늘 숨어 다니던, 교실 창턱의 화분 같던 아이. 그때 내 소원은 딱 하나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하루. 조용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디서나 흔한 평범한 중학생이 되는 것.
그런데 지금 내 곁엔, 시끄러운 도깨비와, 겁 없는 친구와, 요괴 덕후 친구와, 능청스러운 스승과, 유쾌한 도깨비들과, 오이를 아작거리는 갓파가 있었다. 하나도 평범하지 않은, 정신없이 시끄러운 나날.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이제, 그 평범한 소원이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밤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꼬맹이." 방망이 위에서, 지마가 문득 물었다. "너, 처음엔 그렇게 평범해지고 싶어 하더니. 이젠 안 그러냐?"
"응."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평범한 것도 좋은데, 지금이 더 좋아. 무섭고 시끄럽지만… 그래도, 지금이 좋아."
"허. 제법 컸구먼." 지마가 흡족하게 웃었다.
나는 여전히 겁쟁이다. 앞으로도 무서운 건 무서울 거고, 오싹한 건 오싹할 거다. 요괴가 꼬이는 이 체질도, 아마 평생 안 고쳐질 거다. 나는 대단한 영웅도, 겁 없는 용사도 아니다. 그냥, 남들보다 겁이 조금—아니, 많이 많은 평범한 아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겁이 많다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걸. 그건 내가 그만큼 많은 걸 사랑한다는 뜻이라는 걸. 그리고 진짜 용기란, 겁이 없는 게 아니라—겁이 나도, 도망치지 않는 거라는 걸.
그러니 누가 나한테 어떤 애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거다.
나는 겁쟁이입니다.
그래도—무서운 걸, 똑바로 볼 줄 아는 겁쟁이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오싹함이 있다.
하나는 누구나 겪는 오싹함.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만 아는 오싹함.
나는 오늘도 그 두 번째 오싹함을 느낀다. 저기, 골목 그늘 어딘가에서.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팔뚝에 소름이 돋는다.
예전 같으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도망쳤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몽당방망이를 꼭 쥐고, 그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지마야. 저기, 또 하나 있다."
"오, 그러냐? 좋다, 꼬맹이. 이번엔 또 무슨 녀석인지, 어디 똑바로 한번 봐 주자꾸나."
나는 씩 웃으며, 그 오싹함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무서웠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728x90

'bluelimn's > 도깨비를 주웠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장 · 똑바로 봐  (0) 2026.08.05
16장 · 각자의 용기  (0) 2026.08.05
15장 · 두려움의 이름  (0) 2026.08.05
14장 · 무너진 뚝딱  (0) 2026.08.04
13장 · 옛 도사  (0) 2026.08.04
12장 · 무서워하면 커진다  (0) 2026.08.04
11장 · 시장 골목 도깨비들  (0) 2026.08.03
10장 · 고물상의 비밀  (0) 2026.08.03
9장 · 이민 온 요괴  (0) 2026.08.03
8장 · 다 아는 얼굴  (0) 2026.08.02
728x90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저 까마득한 어둠의 꼭대기, 시뻘건 두 눈을 향해. 무서웠다. 고개를 드는 순간, 그 거대함이 온몸을 짓눌러 왔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숨이 턱 막혔다. 올려다보면 볼수록, 어둑시니는 더 크고 더 무섭게 부풀어 올랐다.
『그렇지. 올려다봐라.』 어둑시니가 흡족하게 웃었다. 『무섭지? 그 조그만 몸으로, 나를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어서 눈을 내리깔아라. 도망쳐. 그게 편하단다.』
정말로, 그러고 싶었다. 눈을 감고, 등을 돌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게 훨씬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눈을 감지 않았다.
"…무서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도, 엄청 무서워. 다리도 떨려. 도망치고 싶어."
『그럼 도망치렴.』
"근데—안 도망쳐."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겁쟁이야. 근데 겁쟁이라서, 알아. 무서운 걸 똑바로 보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그걸 해내면, 얼마나 대단한 건지도."
나는 후들거리는 두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그리고 올려다보는 대신—어둑시니의 그 시뻘건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겁먹어서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그저 눈높이를 맞추듯. 무서움을 끌어안은 채로, 그저 담담하게.
지마가 가르쳐 준 그대로였다. 겁을 없애려 하지 마라. 겁은 없애는 게 아니라, 안고 가는 거다. 고만복 할아버지의 말도 떠올랐다. 흔들려도 괜찮다고 마음을 놓으면, 중심은 저절로 잡힌다고. 나는 그 모든 가르침을, 온몸으로 붙들었다. 무서웠다. 여전히 무서웠다. 하지만 나는, 그 무서움 한가운데서—중심을 잃지 않았다.
그러자—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거대하던 어둑시니가, 아주 조금—줄어들었다.

『……?』
어둑시니의 시뻘건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뭐냐, 이건. 왜… 왜 안 무서워하지.』
"무서워해. 엄청 무서워." 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근데 무서워하는 거랑, 도망치는 건 다른 거야. 나는 무서운 채로, 그냥—너를 똑바로 볼 뿐이야."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어둑시니를 똑바로 본 채로. 그러자 그것이 또 한 뼘, 줄어들었다. 이 층 높이만큼 거대하던 것이,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볼수록 커지던 놈이, 이번엔 볼수록 작아졌다.
『그만둬. 그만 보란 말이다!』 어둑시니가 발버둥 쳤다. 어둠의 팔을 마구 휘두르며, 나를 겁주려 했다. 무시무시한 환영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지마가 사라지는 모습, 친구들이 어둠에 삼켜지는 모습, 내가 혼자 남겨지는 모습. 온갖 무서운 것들이, 나를 뒤흔들었다.
나는 흠칫했다. 다시, 겁이 밀려들었다. 어둑시니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부풀어 올랐다.
『그래, 그거다! 무서워해! 무서워하라고!』
아, 안 돼. 겁먹으면 커진다. 나는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 환영들이 너무 생생해서, 심장이 얼어붙었다. 어둑시니가 다시 삼 층 높이로 치솟았다.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을 뻔했다.
바로 그때였다.
품에 안고 있던, 금 간 몽당방망이가—따뜻해졌다.

"…어이, 꼬맹이."
익숙한 목소리가, 방망이 속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숨을 멈췄다. 그 목소리는—지마였다.
"지, 지마?!"
"…혼자서, 아주 폼 잡고 있구먼." 지마가 힘겹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방망이의 금 간 틈에서, 아주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네가… 그렇게 용감하게 맞서는데. 이 몸이, 계속 자고 있을 수야 없지 않겠느냐."
"지마야! 너 깨어난 거야? 이제 괜찮은 거야?"
"…솔직히, 하나도 안 괜찮다." 지마가 힘없이 웃었다. "본체가 이 모양이니, 옛날 같은 힘은 못 쓴다. 딱 한 번… 마지막으로 한 번, 너를 도울 힘밖에 안 남았어. 그러니 꼬맹이. 이 한 번을, 헛되이 쓰지 마라."
방망이가, 다시 한번 따뜻하게 빛났다. 잠들어 있던 지마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깨어난 거였다. 나를 위해서. 나는 코끝이 찡했지만, 울 때가 아니었다.
"지마야. 나… 무서워."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안다. 나도 무섭다." 지마가 나직이 말했다. 늘 큰소리치던 녀석이, 무섭다고 순순히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천 년을 살았어도, 저런 놈 앞에선 나도 오금이 저린다. 근데 꼬맹이.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나느냐. 고물상 앞에서, 네가 나를 주웠던 그날." 지마의 목소리에, 어쩐지 웃음기가 어렸다. "너는 그때도 겁쟁이였고, 나는 힘 빠진 몽당방망이 신세였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던 우리 둘이서… 여기까지 왔어. 달걀귀신도, 그슨대도, 다 같이 넘었지. 그러니 마지막도—둘이서, 함께 가자꾸나. 늘 그랬듯이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웃었다.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지마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내 품 안에 있었다.
"…응. 같이 가자, 지마야."
나는 방망이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그리고 다시—어둑시니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헐, 헉."
나는 숨을 골랐다. 처음 지마에게 배웠던, 그 우스꽝스러운 호흡법. 겁먹으면 기가 흩어지니까. 무서워도, 중심만 잃지 않으면 되니까.
어둑시니가 보여 주는 무서운 환영들을, 나는 이제 똑바로 마주봤다. 지마가 사라지는 환영? 아니. 지마는 여기, 내 품 안에 있다. 친구들이 삼켜지는 환영? 아니. 친구들은 지금도, 나를 위해 싸우고 있다. 혼자 남겨지는 환영? 아니. 나는,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다.
"…다 가짜야." 나는 나직이 말했다. "네가 보여 주는 건, 전부 가짜야. 진짜는—내 뒤에 있어.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이."
그 순간, 어둑시니가 보여 주던 환영들이—스르르, 힘을 잃었다.
나는 방망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지마의 마지막 힘과, 내 기가—하나로 모였다. 방망이 끝에, 따뜻하고 눈부신 빛이 맺혔다. 어둠 속에서, 그 빛은 작은 등불처럼 은은했다.
"뚝딱."
이번엔, 실패하지 않았다.
방망이 끝에서, 한여름 정오의 햇살 같은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이, 어둑시니를 정면으로 비췄다. 나는 그 빛 너머로, 어둑시니의 눈을 끝까지—단 한 순간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았다.
『아, 아아아—!』
어둑시니가 비명을 질렀다. 삼 층 높이로 치솟았던 몸이, 급격히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이 층 높이로. 사람 키만큼으로. 그리고 어린아이만큼으로. 볼수록 작아지고, 작아지고, 또 작아졌다. 온 동네를 뒤덮었던 그 거대한 어둠이—이제, 겨우 내 무릎 높이만 한 조그만 그림자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때—건물 위의 남구천이, 휘청 무릎을 꿇었다.
"…구천아?" 고만복 할아버지가, 놀라 그를 보았다.
남구천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어둑시니가 작아지자—그것과 얽혀 있던 남구천 안에서, 무언가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지워 버렸던, 두려움이. 그리고 두려움과 함께 잠들어 있던, 따뜻함이.
"…이게, 뭐지." 남구천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텅 비어 있던 그 눈에—처음으로, 물기가 어렸다. "가슴이… 아프다. 왜… 왜 이렇게, 아픈 거지."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수십 년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었다.
"…생각난다." 남구천이 흐느꼈다. "그 아이가… 나를 보고 웃던 게. '스승님' 하고 부르던, 그 목소리가. 내가… 내가 지키지 못한, 그 아이가."
남구천은,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두려움을 버리며 함께 버렸던 온기가, 사랑이, 슬픔이—한꺼번에 되돌아온 거였다. 그건 고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다시—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구천아…" 할아버지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고만복. 나는… 대체 무슨 짓을." 남구천이 젖은 눈으로 옛 동료를 보았다. "두려움만 없애면, 다시는 안 아플 줄 알았어. 이 세상 모두가 두려움을 잃으면… 다시는 누구도, 나처럼 소중한 걸 잃고 울지 않아도 될 줄 알았어. 그게… 구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남구천이,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그리운데. 이 아픔마저 없애 버리면… 그 아이를 사랑했던 것도, 없던 일이 되는 거였어. 나는… 그 아이를, 두 번 잃을 뻔했구나."
남구천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오래도록 울었다. 그 우는 모습은, 무서운 흑막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소중한 걸 잃고 오래 슬퍼하지도 못했던, 한 사람의 것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도 그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가여웠다. 두려움을 없애면 편할 줄 알았던 사람. 그러다 사랑하는 마음까지 잃어버린 사람. 그건, 내가 갈 수도 있었던 길이었다. 만약 내가 겁이 무서워서, 그걸 통째로 없애는 쪽을 택했다면.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됐을지 몰랐다.

바로 그때였다.
내 무릎 높이로 쪼그라들었던 어둑시니가—갑자기, 부르르 떨더니 다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이다……!』 어둑시니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울부짖었다. 『아직 안 끝났어! 이 동네의 두려움이, 아직 남아 있는 한—나는, 몇 번이고 다시 커진다!』
그것이, 사방의 어둠을 다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작아졌던 몸이, 무섭게 다시 부풀어 올랐다. 마지막 발악이었다. 나는 다시 방망이를 들었지만—지마의 힘도, 내 기도, 이미 바닥나 있었다. 방금 그 한 번이, 정말로 마지막이었던 거다.
"지, 지마! 한 번만 더—"
"…미안하다, 꼬맹이. 이 몸은, 이제 정말…" 지마의 목소리가, 다시 희미해졌다. 방망이의 빛이, 꺼져 갔다.
어둑시니가 다시 거대해졌다. 이대로면, 모든 게 헛수고가 된다. 나는 절망했다.
그 순간—누군가, 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남구천이었다.
"…구천아?!"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남구천은, 다시 부풀어 오르는 어둑시니를 향해—천천히, 두 팔을 벌리고 걸어갔다. 그 등이, 어쩐지 후련해 보였다.
"이건, 내가 시작한 일이다." 남구천이 나직이 말했다. "그러니, 내가 끝내마."
"안 돼, 구천아! 그건—" 할아버지가 그를 붙들려 했지만, 남구천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만복. 나는 이미, 너무 오래 저것과 얽혀 버렸다. 저것을 끝내려면… 나도 함께 사라지는 수밖에 없어. 나도, 안다." 남구천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 얼굴은,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괜찮다. 오히려… 홀가분해. 이제야, 그 아이한테… 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구천아, 다른 방법이 있을 게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찾아보면—"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떨렸다.
"고만복." 남구천이, 옛 동료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너는 늘 그랬지. 끝까지 포기를 안 했어. 그 고집이, 그 시절엔 어찌나 든든했는지. 하지만 이번만은, 나를 보내 다오. 이건 내가 저지른 일이야. 내 손으로, 끝내게 해 줘." 남구천이 나를 흘끔 보았다. "저 아이가, 나한테 가르쳐 줬다. 도망치지 않는 게 뭔지. 나도… 이제, 도망치지 않으련다."

남구천이, 어둑시니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그 거대한 어둠을, 두 팔로 힘껏 끌어안았다. 오랜 세월 그와 얽혀 있던 어둠이, 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둑시니가 발버둥 쳤지만, 남구천은 놓지 않았다.
"민수야!" 남구천이, 나를 돌아보며 외쳤다.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이 어둠을—똑바로 봐 다오! 네 그 용기로, 이것을 끝내 다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힘은 바닥났지만, 마음까지 바닥난 건 아니었다. 나는 텅 빈 방망이를 들어 올리는 대신—그냥, 내 두 눈으로. 남구천이 끌어안은 그 어둠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무섭지만,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잘 가." 나는 나직이 말했다. "이제, 아무도 무섭게 하지 마."
그리고 등 뒤에서—친구들이, 도깨비들이, 할아버지가, 모두 함께 그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무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수십 개의 시선이, 그 어둠을 향해 모였다. 두려워하지 않는 시선들이.
어둑시니가, 마지막 비명을 질렀다.
『이럴 수는… 없어…!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어……!』
그리고—그 거대한 어둠은, 남구천의 품 안에서. 눈부신 빛과 함께, 스르르 흩어졌다. 온 동네를 뒤덮었던 어둠이, 거짓말처럼 걷혔다. 오랫동안 짓눌려 있던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 빛 속에서, 남구천이—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웃었다.
그건, 텅 빈 웃음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정 많고 눈물 많던 그 시절의—따뜻한 웃음이었다.
"고맙다, 꼬마야. 네 덕분에… 나는, 사람으로 돌아가는구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구천의 모습도—어둠과 함께, 별빛 속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아주 편안한 얼굴로. 마치, 오래 기다려 온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재개발 구역에,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토록 짙던 어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텅 빈 건물들 위로, 맑은 밤하늘이 펼쳐졌다. 오랜만에 보는, 별이 총총한 하늘이었다. 온 동네를 짓누르던 그 무거운 공기도, 어느새 말끔히 걷혀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해냈다. 우리가, 정말로 해냈다.
"…민수야! 이민수!"
수현이와 서리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떡쇠와 도깨비들도, 고만복 할아버지도. 모두가 상처투성이였지만, 하나같이 살아 있었다. 그 얼굴들을 보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끝났구나. 정말로, 끝났구나.
"지마야! 지마, 괜찮아?" 나는 다급히 방망이를 살폈다.
"…걱정 말거라." 방망이 속에서, 지마의 목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려왔다. "조금… 오래 자야 할 것 같다만. 이 몸은, 안 죽는다. 천 년 대도깨비가, 이 정도로 어찌 되겠느냐."
그 허풍이, 오늘따라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방망이를 꼭 끌어안고,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고만복 할아버지는, 남구천이 사라진 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 슬픔과—어떤 후련함이, 함께 어려 있었다.
"…잘 가거라, 구천아." 할아버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편해졌구나. 그 아이한테… 잘 좀, 전해 주고."
밤하늘의 별들이, 유난히 밝게 빛났다. 마치, 오래 헤어져 있던 스승과 제자가—다시 만나, 나란히 웃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섭기만 하던 어둠이 걷힌 자리에, 이렇게 많은 별이 숨어 있었다는 걸—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무서운 걸 똑바로 마주보고 나면, 그 뒤엔 늘 이렇게—별이 있었던 거다. 그저 내가, 무서워서 눈을 감고 있느라 못 봤을 뿐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지마를 품에 꼭 안은 채로. 옆에는 수현이와 서리가, 뒤에는 할아버지와 도깨비들이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다 같이 그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이토록 오래, 우리 동네가 아름다웠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맑고, 고요한 밤이었다.

728x90

'bluelimn's > 도깨비를 주웠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장 · 나는 겁쟁이입니다, 그래도  (1) 2026.08.05
16장 · 각자의 용기  (0) 2026.08.05
15장 · 두려움의 이름  (0) 2026.08.05
14장 · 무너진 뚝딱  (0) 2026.08.04
13장 · 옛 도사  (0) 2026.08.04
12장 · 무서워하면 커진다  (0) 2026.08.04
11장 · 시장 골목 도깨비들  (0) 2026.08.03
10장 · 고물상의 비밀  (0) 2026.08.03
9장 · 이민 온 요괴  (0) 2026.08.03
8장 · 다 아는 얼굴  (0) 2026.08.02
728x90

재개발 구역 한복판은, 이미 어둠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그곳은 밤보다 더 캄캄했다. 텅 빈 건물들 사이로, 시커먼 어둠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고여 있었다. 공기는 축축하고 무거웠고, 발을 디딜 때마다 서러운 생각들이 발목을 잡아끄는 것 같았다. 이 동네 사람들이 몇 달간 흘려 온 불안과 슬픔이, 전부 이곳으로 흘러들어 웅덩이를 이룬 거였다.
가로등은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았다. 아니, 켜져 있어도 그 빛이 어둠에 잡아먹혀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저 멀리서, 정체 모를 흐느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어둠이 저 혼자 일렁이며 낮게 웅웅거렸다.
그 웅덩이 한가운데—철거를 앞둔 낡은 상가 건물 위에, 남구천이 서 있었다.
그 건물은, 우리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건물이었다.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떡볶이를 사 먹던 곳. 이제는 셔터가 다 내려지고, 벽엔 '철거'라는 붉은 글씨만 크게 적힌 곳. 그 위에 선 남구천은, 마치 이 죽어 가는 동네의 주인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발밑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늦지 않았구나." 남구천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마침, 깨어나는 참이다. 똑똑히 봐 두어라. 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끝내 줄 존재를."
그의 발밑 어둠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사방의 빈집에서, 골목에서, 그늘에서—온갖 어둠 조각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그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며칠 전 우리가 상대했던 그 조각들이, 수백 수천 개가 되어 뭉치고 또 뭉쳤다. 어둠이 산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두 개의 시뻘건 눈이—그 어둠의 꼭대기에서, 스르르 떠올랐다.
어둑시니였다. 진짜배기, 본체.
그것은 건물보다도, 아니 우리가 아는 그 어떤 것보다도 거대했다. 고개를 한껏 젖혀야 겨우 그 눈이 보일 만큼. 밤하늘을 통째로 오려 붙인 것 같은 시커먼 형체가, 온 재개발 구역을 뒤덮으며 꿈틀거렸다. 그것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주변 빈집들의 창문이 와장창 깨지고, 낡은 담벼락이 우수수 무너졌다. 그 몸에서는, 이 동네 사람들이 흘린 온갖 서러운 말들이 새어 나왔다. '집이 헐린대.' '이제 여길 떠나야 해.' '무서워.' '다 끝났어.' 수백 수천의 목소리가 뒤엉킨, 거대한 슬픔 덩어리였다.
그 앞에 서자, 나는 내가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지—뼈저리게 느꼈다. 다리가, 절로 후들거렸다. 저런 걸, 나 같은 게 어떻게 마주본단 말인가.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크, 크다." 수현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겁 없던 수현이조차, 목소리가 떨렸다.
"저게… 문헌에서만 보던, 완전체 어둑시니." 서리도 새하얗게 질렸다. "말도 안 돼. 저렇게까지 클 줄은…"

『무섭지.』
그 목소리가, 온 사방에서 울렸다. 머릿속으로 직접 파고드는, 그 끈적한 목소리.
『무서워해도 돼. 너희만이 아니야. 이 동네 사람들 모두가, 나를 무서워하고 있으니까. 그 두려움이, 나를 이렇게 키웠지.』
어둑시니가 시뻘건 눈을 굴리며, 우리를 하나하나 훑었다. 그 눈길이 닿을 때마다,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눈이—맨 마지막으로, 나에게 멈췄다.
『너로구나. 나를 똑바로 봤다는, 그 겁쟁이가.』 어둑시니가 나직이 웃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다. 저번엔 작은 조각이었지. 나는—진짜다. 자, 어디 봐라. 이 앞에서도, 네가 도망치지 않을 수 있을지.』
그 순간, 어둑시니가 거대한 어둠의 팔을 뻗어—우리를 향해 쏟아부었다. 온 세상이, 시커먼 파도에 뒤덮였다.
"흩어져!" 고만복 할아버지가 외쳤다.
우리는 사방으로 몸을 굴렸다. 어둠의 파도가 방금까지 우리가 섰던 자리를 집어삼켰다. 땅이 움푹 꺼지고, 그 자리에서 서러운 신음 같은 게 울려 퍼졌다.
"안 되겠다."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고쳐 쥐며,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 눈에, 오랜 도사의 각오가 서려 있었다. "저놈은 너무 커. 이대로는 민수가 마주볼 틈도 없이 짓밟힌다. 그러니—우리가, 길을 낸다."
"길을요?" 내가 되물었다.
"민수, 너는 오직 저놈의 본체, 저 시뻘건 눈만 보고 달려라." 할아버지가 말했다. "나머지 잡것들과 남구천은, 우리가 맡는다. 네가 저 눈앞에 설 때까지,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길을 터 주마."
나는 그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모두가, 나 하나를 저 앞으로 보내기 위해—목숨을 걸려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나선 건, 도깨비들이었다.
"자, 이놈들아! 우리 차례다!" 떡쇠가 우렁차게 포효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방개를 비롯한 시장 골목 도깨비들이, 그 뒤를 따랐다. "어이, 시커먼 놈! 옛날에 못다 한 승부, 오늘 끝장을 보자!"
어둑시니가 흩뿌린 수백 개의 어둠 조각들이, 도깨비들을 향해 몰려들었다. 떡쇠는 그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커다란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조각들이 퍽퍽 터져 나갔다. 방개는 절굿공이를 휘두르고, 다른 도깨비들은 몽둥이며 빗자루를 들고 어둠과 맞섰다.
"떡쇠 아저씨, 왼쪽 다리!" 내가 소리쳤다. 조각 하나가, 떡쇠의 약한 왼쪽 다리를 노리고 달려들고 있었다.
"하하! 걱정 마라, 꼬맹이!" 떡쇠가 씩 웃으며, 오히려 그 왼쪽 다리로 조각을 힘껏 걷어찼다. "이 다리는, 그 옛날 이 어둠한테 다친 다리다! 오늘, 제대로 빚을 갚아 주마!" 그 옛날 겁먹고 당했던 그 자리에서, 떡쇠는 이제 겁내지 않고 맞서 싸우고 있었다. 절뚝이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떡쇠와 도깨비들은, 겁도 없이 그 어둠 속을 헤집고 다녔다. 아니, 겁이 없는 게 아니었다. 방개는 "어이쿠, 무서워라!" 하고 엄살을 떨면서도, 절굿공이를 한 번도 놓지 않았다. 무서우면서도, 싸우고 있었다. 조각 하나가 방개의 등을 덮치자, 옆에 있던 다른 도깨비가 몸을 날려 막아 줬다. 도깨비들은 서로의 등을 지켜 주며, 한 덩어리가 되어 어둠과 맞섰다.
"우리 골목 식구는, 하나가 당하면 다 같이 갚는다!" 떡쇠가 우렁차게 외쳤다. 그 말에, 도깨비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 함성이, 이상하게도 어둠을 조금 밀어내는 것 같았다.
도깨비들이 어둠 조각들을 상대하며, 조금씩—조금씩 길을 냈다. 시커먼 어둠 속에, 우리가 나아갈 좁은 틈이 열렸다.
"됐다! 지금이야!" 방개가 외쳤다. "꼬맹이, 어서 가라! 여긴 우리가 막는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 틈으로 달렸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새로운 어둠의 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어둑시니가, 나만은 기어코 막으려는 거였다.


"이쪽은 내가 맡으마."
고만복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온갖 고물들이—부러진 우산이며 녹슨 자전거며 이 빠진 항아리며—전부 그의 곁으로 날아들었다. 그것들이 저마다 창이 되고 방패가 되어, 어둠의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건물 위의 남구천이 스르르 내려왔다.
"…여전하구나, 고만복." 남구천이 텅 빈 눈으로 옛 동료를 보았다. "그 낡은 재주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막아야지. 너를 막는 게—내 마지막 남은, 옛정이니까."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그 목소리에, 오랜 슬픔이 배어 있었다. "구천아. 나는 아직도, 그 시절 네가 그립다. 정 많고 눈물 많던 그 남구천이. 오늘, 그 녀석을 되찾아 오마."
"…그런 건, 이제 없다." 남구천의 손끝에서, 어둠이 검처럼 뻗어 나왔다.
두 옛 도사가, 맞부딪쳤다. 고물 무기와 어둠이 사방에서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기억하느냐, 구천아."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외쳤다. "우리 셋이서 밤새 요괴를 잡고 나면, 네가 늘 아침을 지었지. 그 형편없는 된장국을, 김서방하고 나는 맛있는 척 먹어 주고."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시절의 너는, 그렇게 따뜻한 녀석이었어. 그런 네가—어쩌다 이렇게 됐느냐."
남구천의 어둠 검이, 잠깐 멈칫했다. 텅 빈 그 눈에, 아주 잠깐—무언가가 스친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런 건, 다 잊었다." 남구천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따뜻함 같은 걸 기억하니까, 아픈 거다. 나는 이제, 아프지 않아. 그러니 너도, 그만 옛날 얘기로 나를 흔들려 들지 마라."
할아버지는 남구천을 붙들어, 내게서 떼어 놓았다. 옛 동료끼리의 그 싸움은—보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아렸다. 나는 이 악물고, 다시 앞으로 달렸다.
"민수! 어둑시니의 약점!" 그때, 뒤에서 서리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어둠 조각들을 피해 몸을 숨긴 채, 낡은 문헌을 펼치고 있었다. "찾았어! 그 옛날 셋이서 봉인한 방법! 어둑시니는—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두려워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면, 그 앞에서 힘을 잃는대! 그게 봉인의 핵심이야! 결국—너 하나한테 달렸어, 민수!"
나 하나한테. 그 말이,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힘이 났다. 모두가 이렇게 싸우는 건, 결국 나를 저 앞에 세우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반드시 거기 서야 했다.
서리의 말이, 내 안에서 무언가를 또렷하게 만들었다. 힘으로 이기는 게 아니었다. 저 거대한 걸 부수거나 태울 필요도 없었다. 그저—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면 된다. 그건, 지마가 나한테 가르쳐 준 바로 그거였다. 화장실의 달걀귀신 앞에서, 운동장의 어둠 앞에서, 며칠 전 그 조각 앞에서. 나는 늘 그렇게 해 왔다. 무서워도, 똑바로. 그러니 이번에도—할 수 있을 거다. 아니, 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둑시니는, 나를 순순히 보내 주지 않았다.
내 앞으로, 유난히 커다란 어둠 덩어리 하나가 쏟아져 내렸다. 도깨비들도, 할아버지도 손이 닿지 않는 위치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머니의 은빛 못을 던졌지만, 어둠은 꿈쩍도 않았다. 그 시커먼 것이, 나를 그대로 집어삼키려 덮쳐 왔다.
"이민수!"
그 순간, 누군가 나를 확 밀쳤다.
수현이었다. 수현이가 나를 밀쳐 내고, 그 자리에서—어둠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섰다.
"수현아, 안 돼!"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슨대에게 삼켜졌던 그날이 떠올랐다. 겁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어둠에 잡아먹혔던 수현이. 이번에도, 그때처럼—
그런데, 아니었다.
수현이는 무작정 뛰어든 게 아니었다. 그 애의 손에는,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고물 방패가 들려 있었다. 냄비 뚜껑으로 만든, 그 방패가. 수현이는 그걸 정확히 머리 위로 치켜들어, 쏟아지는 어둠을 막아 냈다. 어둠이 방패에 부딪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수, 수현아, 너…"
"헤헤. 놀랐지?" 수현이가 방패를 든 채, 씩 웃었다.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했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무서운 거였다. 분명, 무서운 거였다. 그런데도 도망치지 않고, 나를 지키고 있었다. "나, 이번엔 그냥 막 뛰어든 거 아니야. 아까 할아버지가 이 방패 주면서 그랬거든. 어둠이 쏟아지면 이걸로 머리 위를 막으라고. 그래서—무섭지만, 머리 쓰면서 막은 거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 예전엔, 겁 없이 아무 데나 막 뛰어들었잖아. 근데 그건 용기가 아니라 그냥 바보짓이었어. 다 해봐서 알아." 수현이가 방패를 고쳐 쥐며 말했다. 늘 자랑처럼 하던 그 말이, 오늘은 어쩐지 다르게 들렸다. "이번엔, 무서운 걸 알면서도—어떻게 하면 널 지킬 수 있을지 생각하고, 그다음에 뛰어든 거야. 이게, 진짜 용기 맞지?"
겁 없이 뛰어들던 만용의 수현이가, 어느새—무서움을 알고, 그 위에서 머리를 쓰는 진짜 용기를 배워 있었다. 나는 코끝이 찡해졌다.
그슨대에게 삼켜졌던 그날, 수현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진짜 공포를 알았다. 그리고 그 뒤로 몇 달 동안, 무서움을 알면서도 나서는 법을 조금씩 배워 왔다. 오늘, 그 배움이—이렇게 빛나고 있었다.
"…응. 맞아. 진짜 용기야." 나는 겨우 대답했다. "너, 진짜 멋있어졌다. 수현아."
"뭐래. 원래 멋있었거든?" 수현이가 씩 웃으며, 방패로 또 어둠 한 덩이를 쳐 냈다. 그러면서도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여깴 내가 막을게. 너는 저 눈만 보고 달려! 너밖에 못 하잖아, 그거! 나도 오래는 못 버티니까, 어서 가!"

나는 달렸다.
도깨비들이 어둠 조각을 걷어 내며 낸 길을. 할아버지가 남구천을 붙들어 비운 길을. 서리가 알려 준 방향으로. 그리고—수현이가 온몸으로 막아 준, 그 길을.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몫의 용기를 내고 있었다. 겁 없는 수현이는 겁을 알고 나서 진짜 용기를 냈고, 요괴가 무섭던 서리는 그 무서움을 지식으로 바꿔 냈고, 은퇴한 할아버지는 옛 동료를 붙들고, 다리를 다쳤던 떡쇠는 그 상처와 맞섰다. 누구도, 무섭지 않아서 싸우는 게 아니었다. 다들 무서웠다. 그런데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용기가—나 하나를, 저 앞으로 밀어 주고 있었다.
나는 시커먼 어둠을 헤치고, 헤치고, 또 헤쳤다. 온몸이 무거웠다. 어둠이 스칠 때마다, 서러운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넌 못 해. 넌 겁쟁이야. 도망쳐. 하지만 나는, 이제 그 목소리에 넘어가지 않았다. 내 등 뒤에서, 모두가 싸우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들의 용기를 등에 업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나는, 그 앞에 섰다.
거대한 어둠의 산. 그 꼭대기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두 개의 시뻘건 눈. 고개를 한껏 젖혀야 겨우 보이는, 그 압도적인 어둑시니의 본체 앞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서웠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이제껏 마주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달걀귀신도, 그슨대도, 며칠 전 그 조각도—이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도망쳐. 머릿속의 겁쟁이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비명을 질렀다. 저건 못 이겨. 저건 사람이 마주볼 수 있는 게 아니야. 어서 도망쳐—
나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모두가 싸우고 있었다. 떡쇠가, 방개가, 할아버지가, 서리가, 그리고 수현이가. 하나같이 무서워하면서도, 나를 위해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어붙은 내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안 돼. 나는 이 악물었다. 여기서 도망치면, 저 모두의 용기가 헛것이 된다. 나는, 도망치지 않아.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어둑시니가, 나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웃었다. 『하지만 겁쟁이야. 올려다봐라. 나를 올려다보면 볼수록, 나는 한없이 커진단다. 자, 어디—네가 정말로, 이 앞에서 도망치지 않을 수 있을지. 보여 다오.』
나는 잠든 몽당방망이를, 가슴에 꼭 안았다.
그리고 천천히—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728x90

'bluelimn's > 도깨비를 주웠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장 · 나는 겁쟁이입니다, 그래도  (1) 2026.08.05
17장 · 똑바로 봐  (0) 2026.08.05
15장 · 두려움의 이름  (0) 2026.08.05
14장 · 무너진 뚝딱  (0) 2026.08.04
13장 · 옛 도사  (0) 2026.08.04
12장 · 무서워하면 커진다  (0) 2026.08.04
11장 · 시장 골목 도깨비들  (0) 2026.08.03
10장 · 고물상의 비밀  (0) 2026.08.03
9장 · 이민 온 요괴  (0) 2026.08.03
8장 · 다 아는 얼굴  (0) 2026.08.02
728x90

결전의 날 아침이, 밝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침이 온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밤새 한숨도 못 자고, 금 간 몽당방망이를 끌어안은 채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커튼도 걷지 않은 방 안은, 대낮인데도 어둑했다. 꼭, 내 마음 같았다.
밤새, 어제의 그 장면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시커먼 창이 날아오던 순간. 얼어붙어 꼼짝 못 하던 내 다리. 나를 감싸며 쩍, 하고 금이 가던 방망이. 그리고 스르르 흐릿해지던 지마의 마지막 얼굴. 눈을 감으면 그 장면이, 눈을 뜨면 텅 빈 천장이 나를 짓눌렀다.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베개는 언제 젖었는지도 모르게, 축축했다.
"지마야." 나는 방망이에 대고, 몇 번이고 속삭였다. "일어나 봐. 응? 한 번만."
방망이는, 대답이 없었다. 손끝에 아주 희미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지만, 그뿐이었다. 늘 시끄럽게 잔소리하던 그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학교에는 가지 않았다. 엄마가 아침에 열이 있냐며 이마를 짚어 보고는, 하루 쉬라며 출근했다. 나는 그 말이 고마웠다. 지금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누구도 만날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오늘 밤이면, 어둑시니가 깨어난다. 온 동네를, 아니 온 세상을 집어삼킬 그 어둠이. 그런데 그걸 막아야 할 나는—이 꼴이었다. 지마는 나 때문에 잠들었고, 나는 여전히 겁쟁이인 채로, 방구석에서 떨고만 있었다.
차라리, 이 모든 게 그냥 꿈이었으면 싶었다. 몇 달 전, 고물상 앞에서 그 방망이만 줍지 않았다면. 요괴 같은 게 안 보이는, 평범한 아이였다면. 나는 늘 그걸 바랐다. 평범하게, 조용히 사는 것. 그런데 막상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이번엔 지마한테 미안해졌다. 그 시끄럽고 따뜻한 도깨비를 안 만났으면 좋았을 거라니.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나는 지마를 만난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너는 이미, 졌으니까.'
남구천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이미 진 거였다. 결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민수! 문 열어!"
쾅쾅,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흠칫했다. 수현이 목소리였다.
"…없는 척할 생각 하지 마! 너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안 열면 부수고 들어간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수현이와 서리가 서 있었다. 둘 다, 학교도 안 가고 온 모양이었다.
"…왜 왔어." 나는 힘없이 말했다. "가. 나 혼자 있고 싶어."
"혼자 있긴 뭘 혼자 있어." 수현이가 성큼 들어왔다. "너 지금 그 꼴로, 오늘 밤 어쩌려고."
"…못 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 못 해, 수현아. 어제 봤잖아. 나 때문에 지마가…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늘 이렇게 얼어붙어. 나 같은 겁쟁이가, 무슨 수로 그 어둠을 막아. 나는… 안 돼."
"이민수—"
"됐어." 서리가 수현이를 막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커튼도 안 걷은 어두운 방, 방망이를 끌어안고 웅크린 나를. "…민수야. 잠깐, 우리랑 같이 갈 데가 있어."
"어디를."
"고물상. 할아버지가, 널 데려오래."
나는 고개를 저으려 했다. 하지만 서리는,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민수야. 네가 정 못 하겠으면, 안 해도 돼. 아무도 널 억지로 못 시켜." 서리가 조용히 말했다. "근데 그 전에, 딱 한 번만 할아버지 얘기를 들어 봐. 그러고도 못 하겠으면, 그땐 나도 더 안 붙잡을게. 약속해."
"…나는 진짜, 자신 없어." 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 근데 너, 자신 있었던 적 한 번이라도 있었어?" 수현이가 툭 끼어들었다. "달걀귀신 때도, 그슨대 때도, 넌 맨날 벌벌 떨었잖아. 근데 다 해냈어. 그러니까 자신 없는 건, 하나도 안 이상해. 넌 원래, 그러면서 해내는 애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에, 어쩐지 코끝이 시큰해졌다.
결국 나는, 친구들에게 반쯤 끌리다시피 집을 나섰다. 금 간 방망이만은, 꼭 끌어안은 채로.

고물상에는, 뜻밖의 손님들이 와 있었다.
떡쇠와 방개를 비롯한, 시장 골목 도깨비들이었다. 좁은 고물상 마당에, 울퉁불퉁한 도깨비들이 잔뜩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고만복 할아버지는 그 한가운데서, 팔짱을 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구나." 할아버지가 나를 보았다.
"꼬맹이!" 떡쇠가 성큼 다가왔다. 그 커다란 얼굴이, 걱정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김서방이 다쳤다며. 괜찮으냐? 아니, 안 괜찮겠지. 그 시끄러운 녀석이 잠들었으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도깨비들의 그 걱정 어린 얼굴들을 보자, 오히려 더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이들이 이렇게 나를 위해 모였는데,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겁쟁이였으니까.
"에이, 그렇게 풀 죽을 것 없다!" 방개가 나섰다. "김서방 그 녀석, 원래 엄살이 심해. 방망이에 금 좀 갔다고 어찌 되는 놈이 아니야. 옛날에도 씨름하다 두 동강 날 뻔한 걸, 사흘 앓고 벌떡 일어났다니까."
"맞다, 맞아." 다른 도깨비가 거들었다. "그 허풍쟁이가, 그렇게 쉽게 갈 리가 없지."
도깨비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나를 위로하려 애썼다. 그 투박한 위로가, 어쩐지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다들 이렇게 와 주셨는데. 저는… 저는 못 해요. 어제, 결정적인 순간에 얼어붙어서 지마를 못 지켰어요. 저 같은 겁쟁이는, 결국 아무것도 못 해요. 남구천 말이 맞아요. 저는 이미… 졌어요."
마당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고만복 할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민수야. 너, 어제 왜 얼어붙었는지 아느냐."
"…제가, 겁쟁이라서요."
"아니."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지마를 사랑해서다."
나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잘 들어라."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낮고 따뜻했다. "어제 네가 얼어붙은 건, 지마를 잃을까 봐 무서워서였다. 그렇지? 그 녀석이 다칠까 봐, 그 녀석이 없어질까 봐. 그 두려움 때문에, 몸이 굳은 게야."
"…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생각해 보렴. 그 두려움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할아버지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지마가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무서웠을까? 아니지. 지마가 소중하니까, 잃는 게 무서운 거다. 사랑하니까, 두려운 거야. 두려움이란 건—사랑하는 게 있다는, 바로 그 증거다."
나는 숨을 멈췄다.
"남구천을 봐라." 할아버지의 눈이, 슬퍼졌다. "그 녀석은 두려움을 없앴다. 그래서 이제 아무것도 안 무섭지. 하지만 그 대신,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하게 됐어. 두려움을 버린다는 건, 사랑을 버린다는 거였으니까. 무서운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은—실은, 소중한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인 거다."
할아버지가 잠깐, 먼 곳을 보았다.
"그 녀석이 그렇게 아끼던 제자를 잃고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게 됐을 때. 나는 그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슬퍼할 줄도 모르게 된 거니까. 사랑하는 아이를 잃고도 아프지 않다는 건, 편해진 게 아니라—마음이 죽어 버린 거야."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니 민수야. 무섭다고 울 줄 아는 너는, 남구천보다 약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야."
그제야, 나는 알 것 같았다. 남구천의 그 텅 빈 눈이, 왜 그렇게 서늘했는지. 그건 용감한 자의 눈이 아니라—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텅 빈 자의 눈이었다.
"그러니 민수야. 네가 겁이 많은 건." 할아버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못난 게 아니야. 네가, 그만큼 많은 걸 사랑한다는 뜻이다. 지마를, 친구들을, 이 동네를. 소중한 게 많으니까, 무서운 것도 많은 거지. 네 두려움에는,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사랑이야."
두려움의 이름은, 사랑.
그 말이, 내 안에서 무언가를 툭, 하고 건드렸다. 나는 늘 내 겁 많음이 부끄러웠다.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그게, 내가 많은 걸 사랑한다는 증거였다니.

"…근데요, 할아버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저는 결정적인 순간에 얼어붙었잖아요. 사랑해서 무서운 거라도… 결국 못 지켰잖아요."
"그래. 어제는 그랬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남구천하고 너는, 딱 하나가 다르다."
"…그게 뭔데요?"
"남구천은, 그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도망쳤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두려움을 없애는 쪽으로. 사랑을 버리는 쪽으로. 그게 그 녀석의 선택이었어. 하지만 너는?" 할아버지가 나를 보았다. "너는 어제,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이 자리에 왔다. 지마를 끌어안고, 죄스러워하면서. 그건, 도망친 게 아니야. 넘어진 거지. 넘어진 거랑, 도망친 건 달라. 넘어진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
넘어진 것과, 도망친 것은 다르다.
그 말에, 나는 문득—책 다섯 권을 머리에 이고 나무판 위에서 몇 번이고 넘어지던, 그날이 떠올랐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올라섰다. 그리고 결국, 끝까지 걸어갔다. 넘어지는 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일어서기만 하면 됐다.
"…민수야." 옆에서, 서리가 조용히 말했다. "나, 어제 어둠에 갇혔을 때. 진짜 무서웠어. 근데 그 안에서, 딱 한 가지 생각만 들더라. '민수가 올 거야'라고. 왜냐면 너는, 늘 그랬으니까. 달걀귀신 때도, 그슨대 때도, 갓파 때도. 무서워하면서도, 늘 와 줬잖아."
"맞아." 수현이가 거들었다. "야, 나 그슨대한테 삼켜졌을 때 기억나? 그때도 네가 왔잖아. 나보다 백배는 겁 많은 네가. 벌벌 떨면서도, 나 구하러 왔었잖아. 나는 그거, 아직도 안 잊었어."
떡쇠도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 떡쇠를 넘긴 것도, 겁먹고 도망친 놈이 아니라—무서워하면서도 똑바로 본 너였지. 안 그러냐, 꼬맹이?"
"맞아요." 서리가 수첩을 넘기며 담담하게 덧붙였다. "나 그동안 너 관찰한 거, 여기 다 적혀 있어. 화장실 달걀귀신 때, 다리 후들거리면서도 안 도망침. 급식실 먹깨비 때, 무서워하면서도 씨름판에 기 대 줌. 그슨대 때, 벌벌 떨면서도 수현이 구하러 감. 갓파 때, 저승사자 앞에서도 나섬." 서리가 나를 보았다. "보여? 너, 한 번도 안 무서웠던 적이 없어. 근데 한 번도, 도망친 적도 없어. 이게, 너야."
나는 친구들을, 그리고 도깨비들을 둘러보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 나는 늘 겁쟁이였다. 하지만 겁쟁이인 채로도, 매번 도망치지 않고 와 주었다. 그게—몇 달 동안, 내가 쌓아 온 거였다. 지마가, 이 친구들이, 하나하나 가르쳐 준 거였다.

나는 품에 안은, 금 간 몽당방망이를 내려다보았다.
"…지마야." 나는 나직이 속삭였다. "너는 늘 나한테, 무서워도 도망치지 말라고 했지. 나는 그게, 무서움을 없애라는 말인 줄 알았어. 근데 이제 알겠어. 무서움을 없애는 게 아니라—무서운 채로, 그냥 도망만 안 치면 되는 거였어."
방망이가,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침묵이 무섭지 않았다. 그 안에 지마가 있다는 걸, 아직 그 온기가 남아 있다는 걸, 나는 믿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아버지. 저, 할게요." 내 목소리가, 아직 떨렸다. "여전히 무서워요. 오늘 밤 생각하면, 다리가 후들거려요. 근데—그래도, 도망 안 칠래요. 지마가 가르쳐 준 대로. 무서운 채로도, 똑바로 볼래요."
"…그래."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게, 진짜 용기다. 무섭지 않은 게 아니라, 무서운데도 하는 것."
"이제야 우리 꼬맹이답구먼!" 떡쇠가 우렁차게 외쳤다. 도깨비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수현이가 내 어깨를 툭 쳤고, 서리도 드물게 활짝 웃었다.
나는 금 간 방망이를 꼭 쥐었다. 두려웠다. 여전히, 미치도록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두려움의 이름을 안다. 그건, 내가 이 모든 걸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지마를, 친구들을, 이 동네를. 그리고 그 사랑이 있는 한—나는,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다.

"자, 그럼." 고만복 할아버지가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 눈에, 오랜 도사의 불꽃이 되살아났다. "오늘 밤이다. 어둠이 가장 짙어지는 시각, 재개발 구역 한복판에서 어둑시니가 완전히 깨어난다. 우리는 그 전에, 그곳으로 간다."
"작전은요?" 서리가 수첩을 펼치며 물었다.
"어둑시니는 힘으로는 못 이긴다. 유일한 방법은, 민수가 그놈을 똑바로 마주봐서 작게 만드는 것뿐이야." 할아버지가 말했다. "하지만 그놈은, 수천수만의 어둠 조각으로 민수를 방해할 게다. 그러니—"
"그건, 우리가 맡지." 떡쇠가 가슴을 쿵 쳤다. "우리 도깨비들이, 그 잔챙이 조각들을 다 상대하마! 꼬맹이가 본체한테 갈 길을, 우리가 뚫어 주겠다!"
"나는 어둑시니의 약점을 계속 찾을게." 서리가 말했다. "봉인 방법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거야. 결정적인 순간에, 민수한테 알려 줄게."
"나는 민수 옆에 딱 붙어 있을 거야." 수현이가 씩 웃었다. "요괴는 안 보여도, 몸빵은 자신 있거든. 민수가 흔들리면, 내가 붙잡아 줄게."
"…근데 수현아, 너 안 무섭냐?"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어제 그 어둠에 삼켜졌으면서.
수현이가 잠깐 말이 없더니, 씩 웃었다. "무섭지. 나도 이제, 무서운 게 뭔지 알거든."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너한테 배웠잖아. 무서워도 하는 거. 나 예전엔 그냥 겁 없이 아무 데나 뛰어들었는데, 그건 용기가 아니라 그냥 생각이 없는 거였더라고. 이번엔 무서운 거 알면서, 그래도 갈 거야. 그게 진짜 용기라며."
나는 조금 놀랐다. 만날 겁 없이 사고만 치던 수현이가, 어느새 이런 말을 하다니. 우리는, 다 함께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 든든한 얼굴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혼자였다면, 나는 진작 무너졌을 거다.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겁 없던 친구, 똑똑한 친구, 능청스러운 스승, 그리고 유쾌한 도깨비들. 이 모두가, 내 곁에 있었다.
"…고마워요. 다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우리는 해가 지기 전까지, 마지막 준비에 매달렸다. 할아버지는 고물 무기들을 하나하나 점검했고, 도깨비들은 저마다 절굿공이며 몽둥이를 챙겼다. 서리는 어둑시니 봉인법이 적혔을 법한 문헌을 마지막까지 뒤졌고, 수현이는 내 곁에서 이것저것 챙겨 주었다. 나는 각성 수련으로 낡은 숟가락 몇 개를 못으로 깨워, 주머니에 챙겼다. 지마 없이 내가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기였다.
그렇게 분주히 움직이는 사이, 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창밖의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가—점점, 어둠에 잠겨 갔다. 오늘 밤. 모든 것이 결판나는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금 간 방망이를 가슴에 꼭 안았다. 잠든 지마에게, 나는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지마야. 이번엔… 내가 널 지킬게. 그러니까 조금만, 더 자고 있어."
방망이 속에서, 아주 희미한 온기가—대답하듯, 한 번 반짝인 것 같았다.

728x90

'bluelimn's > 도깨비를 주웠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장 · 나는 겁쟁이입니다, 그래도  (1) 2026.08.05
17장 · 똑바로 봐  (0) 2026.08.05
16장 · 각자의 용기  (0) 2026.08.05
14장 · 무너진 뚝딱  (0) 2026.08.04
13장 · 옛 도사  (0) 2026.08.04
12장 · 무서워하면 커진다  (0) 2026.08.04
11장 · 시장 골목 도깨비들  (0) 2026.08.03
10장 · 고물상의 비밀  (0) 2026.08.03
9장 · 이민 온 요괴  (0) 2026.08.03
8장 · 다 아는 얼굴  (0) 2026.08.0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