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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자리


감사 결의안은 이틀 동안 「아직」이 하나씩 늘었다.
결의안이 올라올 때마다 외는 이들은 지난 회의를 먼저 외웠고, 지난 회의를 외는 동안 일행이 모라에서 한 일이 다시 나왔다. 수레 하나를 650으로 셌소. 9할이라 했소. 아무것도 부러뜨리지 않았소. 그것을 다 듣고 나서 외는 이들이 차례로 「아직」이라고 했다.
"…감사가 줄어요."
니카가 말했다. 마루 아래 배에 걸터앉아 다리를 물에 담그고 있었다.
"줄지 않습니다. 미뤄질 뿐입니다."
오벨이 말했다.
"미뤄지면 줄어요. 이자가 거꾸로 붙어요."
오벨이 무언가 반박하려다 수첩을 펴서 셈을 해 보았다. 셈을 끝내고 수첩을 덮었다. 반박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소아레 아이들이 다리 위에서 「아직」을 셌다. 감사 결의안에 「아직」이 몇 나올지를 두고 조개껍데기를 걸었다. 니카가 그 판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끼지 않았다. 끼면 아이들 조개껍데기를 다 딸 것이었고, 다 따면 그것도 어느 외는 이가 외울 것이었다. 타르실 니카. 아이들 조개를 땄소. 니카는 그 한 줄이 큰 마루에서 외워지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침마다 같은 일이 있었다.
린이 오나보다 먼저 일어나 마루를 쓸었다. 다 쓸고 나면 오나가 나왔다. 오나가 그물 앞에 앉으면 린이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할머니. 차례 주세요."
"무엇을 말하려고."
그날 아침에는 물음이 하나 새로 붙었다. 열흘 넘게 오나는 「아직」만 했다. 무엇을 말하려느냐고 묻는 것은 처음이었다.
린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큰 마루에서 소리쳤던 말들이 아직 입안에 있었다. 주문, 맨발, 사례, 회의. 그런데 그 말을 차례를 받아 다시 하면 무엇이 되는지 린은 몰랐다. 그날 밤의 말은 화가 나서 나온 말이었다. 화가 가라앉은 뒤에 같은 말을 차례로 하면 그것은 다른 말이었다.
"…모르겠어요."
"그럼 아직이다."
오나가 그물코를 기웠다. 린이 일어나 빗자루를 도로 집었다. 다 쓴 마루를 한 번 더 쓸었다.
켈리는 문 옆에서 그것을 보았다. 날마다 보았다. 그날은 오나의 「아직」 앞에 물음이 하나 생겨 있었다. 켈리가 아는 셈으로는, 물음이 하나 생기면 그만큼 가까워진 것이었다.

점심때 모라의 젊은이가 왔다.
늪에서 켈리가 끌어낸 젊은이였다. 배에 생선 한 바구니와, 무언가를 갈대로 싼 묶음을 싣고 왔다. 감사 결의안이 큰 마루에서 「아직」을 모으는 동안 모라 사람들은 결의안을 기다리지 않았다. 결의안은 수풀회가 하는 것이였고 생선은 사람이 하는 감사였다. 젊은이가 오나네 마루 끝에 생선 바구니를 놓았다. 그러고는 갈대 묶음을 풀어 켈리에게 내밀었다. 국자였다. 늪오리나무를 깎은 것이었다. 손잡이가 길었고 오목한 데가 깊었다. 손잡이 끝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는데 목이 짧았다.
마루 끝이 조용해졌다. 옆집 마루에서 그물을 깁던 사람이 손을 멈췄다. 볼이 둥근 여자가 다리 위를 지나가다 멈췄다. 소아레 사람들이 열흘 넘게 켈리 손이 닿지 않는 데로 치워 온 것이었다.
켈리가 국자를 받았다.
손잡이를 쥐었다. 쥐는 손에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올라오면 내려보내면 되었는데 올라오지 않았다. 쥐는 데에는 마법을 걸 필요가 없었다. 국자는 부러지지 않았다.
마루 아래 배에서 니카가 말했다.
"…68.7퍼센트는 아직 유효해요."
린이 니카의 발을 밟았다.
젊은이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켈리가 국자를 든 채로 고개를 숙였다. 린에게 배운 각도였고 드는 것이 늦었다. 젊은이가 똑같이 숙였다. 둘이 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 옆집 사람이 그물 깁는 손을 다시 움직였다.
켈리는 그날 국자를 허리춤에 매달았다. 뼈와 깃털 끈 옆이었다. 바르트가 그것을 보고 노트를 폈다가,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몰라서 도로 덮었다.

그날도 일행 안건 회의는 지난 회의를 외는 데 오후가 다 갔고, 해가 진 뒤에 「아직」으로 끝났다.
외는 이들은 회의가 끝나면 소아레 집집에 흩어져 묵었다. 먼 마을에서 배로 온 사람들이었다. 오나네에는 쇠물의 외는 이가 묵었다. 늪 남쪽 끝 마을이라고 린이 일러 주었다. 늪 바닥에서 붉은 녹 같은 것이 올라와 물이 늘 쇳빛인 데라고 했다. 머리가 다 빠진 늙은이였는데 손등과 손가락 마디에 쇳물이 튄 것 같은 검은 점이 박혀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마루에 등잔 하나가 놓였다. 오나와 쇠물의 외는 이가 그물 앞에 나란히 앉았고 일행이 그 둘레에 앉았다. 켈리는 허리춤의 국자가 마루에 닿지 않게 비스듬히 앉았다. 고슈는 마루에 올라오지 않았다. 장대 밑 물가에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마루 바닥 널빤지 틈으로 그 등이 조금 보였다.
바르트가 배낭을 정리하다가 저울을 꺼내 옆에 놓았다. 접시 둘에 쇠추가 딸린 작은 저울이었다. 쇠물의 외는 이가 그것을 오래 보았다.
"그 저울은 어디서 났소."
"제가 만들었어요. 카르소에서 배운 대로요. 열네 살에 대장간에 들어가서 거기 영감한테."
"그 영감은 어디서 배웠소."
바르트가 대답하지 못했다. 영감이 어디서 배웠는지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 대장간에서는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 쇠가 녹는지 안 녹는지를 물었다.
"…몰라요."
"나도 모르오."
쇠물의 외는 이가 말했다.
"그런데 닮은 것을 본 적은 있소. 쇠물 늪에서."
오나가 그물을 깁던 손을 멈추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쇠물의 외는 이도 그렇게 했다. 큰 마루에서 길게 욀 때의 자세였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외는 박자가 아니었다. 회의가 아니니 외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말했다. 그래서 빨랐고, 쉬는 자리가 군데군데 틀렸다. 틀려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늪가에 쇠를 바꾸는 대장장이가 있었소. 그 법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본 사람이 없소. 우리가 아는 건 본 것뿐이오. 대장장이가 늪 바닥의 붉은 쇠를 바꾸었소. 바꾸는 건 했는데 다는 걸 못 했소. 저울이 없었소. 손으로 달았소. 손이 틀렸소. 남은 게 손등에 붙었소. 혹이었소."
바르트가 자기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 사람이 저울을 만들었소. 남은 게 몸에 붙지 않게. 모자라서 몸에서 빠지지 않게. 그 사람 법에는 저울이 없었소. 저울은 그 사람이 메운 빈 자리였소."
쇠물의 외는 이가 바르트의 저울을 턱으로 가리켰다.
"같은 거라고는 안 하겠소. 닮았소."
"그 뒤로는요."
"그 뒤로 쇠물 늪에서 쇠를 바꾸는 사람을 본 외는 이가 없소. 본 건 거기까지요."
마루가 조용했다.
바르트가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큰 손이었다. 손등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르트의 혹은 소매 속 팔뚝과 목덜미에 있었다. 바르트는 그 깨끗한 손등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저울을 무릎 위로 옮겼다. 아무것도 달지 않았다. 놓기만 했다.
켈리가 그것을 보았다. 바르트가 저울을 꺼내 놓고 아무것도 달지 않는 것을 켈리는 처음 보았다.

니카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발을 배에 올려놓고 있었다. 오른손이 왼 손목에 가 있었다. 오나가 그 손목을 보았다.
"그 천은 왼손에만 감소?"
"…예. 원래 그런 거래요."
"울음늪에도 왼손에 감던 사람이 있었소. 울음늪의 외는 이가 큰 마루에서 왼 것이오. 큰 마루에서 한 번 나온 말은 열넷이 다 외오."
오나가 말했다. 오나도 외는 박자가 아니었다.
"여자였소. 거는 술을 썼소. 어디서 얻었는지는 본 사람이 없소. 거는 건 했는데 돌아오는 걸 막지 못했소. 이웃집 개에게 걸었소. 개는 사흘을 앓았고 여자는 이레를 앓았소. 낫고 나서 천을 손목에 감았소. 왼손이었소. 돌아올 자리를 천에 정했소. 돌아오는 게 천으로 가라고. 그게 그 여자가 메운 빈 자리였소."
니카의 오른손이 천을 쥐었다. 천의 끝이 해어져 있었다.
"그 뒤로 울음늪에서 천을 감는 사람을 본 외는 이는 없소."
니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셈하는 입이었는데 오래 움직이다 멈췄다. 몇 할이 나왔는지 니카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오벨은 수첩을 펴 들고 있었다. 무언가 묻고 싶은 얼굴이었는데 묻지 않고 오나를 보았다. 차례를 기다리는 눈이었다. 큰 마루에서 보름 넘게 앉아 있다 보니 몸에 붙은 것이었다.
"여긴 회의가 아니오."
오나가 말했다.
"…그럼 실례지만. 소환도 있습니까."
쇠물의 외는 이가 대답했다.
"갈림바위가 있소. 바위 하나가 가운데로 갈라져 있소. 갈라진 면에 뭐가 새겨져 있었소. 그 앞에서 부르던 사람이, 부를 때 맺는 약조라고 했소. 반쪽은 이쪽에 있었고 반쪽은 없었소. 그 사람은 이쪽 반쪽만 읽고 불렀소. 무얼 불렀는지는 알았소. 부르고 나서 무얼 불렀는지를 잊었소. 무얼 잊었는지는 몰랐소."
오벨이 등을 폈다.
"그래서 그 뒤로 적었소. 부르기 전에 적고 부른 뒤에 읽었소. 그게 그 사람이 메운 빈 자리였소. 실베인에서 처음 적은 사람이오. 이백 해 전이오. 그 사람은 마을에서 쫓겨났소. 적는 사람이라서."
"약조가 반쪽이었다면, 나머지 반쪽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쌍방 계약입니다."
"숲 너머에 있다고 그 사람이 말했소."
"열람 신청은 어디로 합니까."
쇠물의 외는 이가 오벨을 보았다. 오나도 보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쇠물의 외는 이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오벨은 자기가 무엇을 물었는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물었다. 법률가는 그 물음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었다.

"정령은 내가 하겠소."
오나가 말했다. 이번에는 빠르지 않았다. 한 마디를 놓고 다음 마디를 놓기까지 숨 하나가 더 들어갔다.
"소아레 동쪽 샘이오. 자매였소. 언니가 샘물을 빌렸소. 빌리는 건 했고 빌린 뒤에 무엇이 비는지는 몰랐소. 빌리고 나서 목이 마르지 않았소. 사흘을 마시지 않았소. 넷째 날에 쓰러졌소."
"동생이 옆에 있었소. 동생이 언니 입에 물을 부었소. 그 뒤로 동생은 언니가 빌릴 때마다 옆에 섰소. 빌리면 목마른 걸 모르니 옆에서 봐 줘야 하오. 그게 동생이 메운 빈 자리였소."
켈리가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다섯째 손가락이었다.
린이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을 린은 다 알고 있었다. 이 마루에서 이 할머니에게 열 번도 넘게 들었다. 그런데 손님들 사이에 앉아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드루이드는요."
바르트가 물었다. 장대 밑을 한 번 내려다보고 나서였다.
"드루이드는 외는 이가 없소."
오나가 말했다.
"고슈 말고는 본 사람이 없소. 고슈는 마을에 살지 않소. 마을에 살지 않는 사람의 일은 외는 이가 없소."
널빤지 틈으로 보이던 등이 조금 움직였다가 멈췄다.

오나가 그물을 다시 집었다. 집어 놓고 깁지는 않았다.
"원본은 본 적이 없소. 우리가 본 술은 다 반쪽이었소. 처음부터 반쪽이었는지, 본 사람이 반쪽만 보았는지는 모르오."
"빈 자리는 쓰는 사람이 메웠소. 메운 사람마다 메운 게 달랐소. 그래서 닮았는데 같지 않소. 갈래마다 규칙이 다르고, 같은 갈래도 집집이 다르오."
오나가 한 번 쉬었다.
"바깥은 잡술이라 하오. 섞였다는 말이오. 맞는 말이오. 섞였소. 빈 자리마다 다른 사람의 손이 들어갔으니."
린이 고개를 들었다.
오나는 린을 보지 않았다. 앞을 보고 말했다.
"그게 잡술이오."
그러고는 그물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쇠물의 외는 이도 따라 일어섰다. 둘이 안으로 들어갔다. 마루에 다섯이 남았다. 등잔 하나가 마루 가운데 있었다.

바르트가 저울 접시 하나에 쇠추를 올렸다가 내렸다. 또 올렸다가 내렸다. 달 것이 없었는데 그렇게 했다.
"카르소 대장간에선."
바르트가 말했다. 저울을 보면서였다.
"연금이 카르소 거라고 했어. 카르소 사람이 처음 했다고. 영감이 그렇게 가르쳤고 나도 그렇게 알았어. 서른 해를."
"…여기서도 누가 했대요."
니카가 말했다.
"했대. 누가 먼저인지는 몰라. 근데 둘 다 같은 데서 틀렸어. 손으로 달다가."
바르트가 쇠추를 접시에 올려놓고 이번에는 내리지 않았다.
"그 영감도 혹이 있었어. 여기, 손등에. 내가 열네 살 때 물었지. 그게 뭐냐고. 영감이 그랬어. 저울 없이 단 값이라고. 그 말이 영감 말인 줄 알았어."
"그 영감 이름은요."
켈리가 물었다.
"몰라. 다들 영감이라고만 했어. 나도 그렇게 불렀고."
바르트가 그렇게 말하고 노트를 폈다. 맨 앞장을 펴더니 한참 보았다. 무엇을 적으려는 것 같았는데 적지 않았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적을 칸이 없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바르트도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바르트가 저울 접시를 손가락으로 한 번 튕겼다. 작은 쇳소리가 났다.

니카는 왼 손목의 천을 풀고 있었다. 풀어서 무릎 위에 펴 놓았다. 붉은 천이었는데 여러 번 빨아서 분홍에 가까웠다. 가장자리에 해진 자리가 일곱 군데였다.
"엄마도 왼손에 감았어요."
니카가 말했다. 천을 보면서였다.
"왜 왼손이냐고 물었더니 원래 그런 거래요. 원래 그런 게 어디서 왔는지는 엄마도 몰랐어요."
니카가 천의 해진 자리를 손톱으로 하나씩 짚었다.
"감을 때 엄마가 흥얼거렸어요. 가사는 없었어요. 저는 그게 감는 데 필요한 건 줄 알고 따라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그냥 엄마 버릇이었어요."
"지금도 해?"
린이 물었다.
"…해요. 필요 없는 줄 알면서요."
"…셈해 봤어? 그 여자랑 같은 건지."
린이 물었다. 니카가 고개를 저었다.
"했는데 안 말할 거예요."
"왜."
"높게 나와서요. 높게 나와도 같은 건 아니고요."
니카가 천을 도로 감았다. 감는 데 오래 걸렸다. 매듭을 두 번 지었다가 풀고 한 번만 지었다.

오벨은 수첩이 아니라 다른 것을 꺼냈다. 가방 맨 아래에서 나온 얇은 책이었다. 표지가 떨어져 나가 실로 묶은 등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제가 소환을 배운 책입니다. 타르실 헌책방에서 샀습니다."
오벨이 책을 폈다. 첫 장에 글자가 문장 한가운데서 시작하고 있었다.
"앞장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서른 장쯤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저는 그 서른 장에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를 이십 년 동안 짐작하면서 불렀습니다."
"짐작한 걸로 불렀어요?"
켈리가 물었다.
"짐작한 걸 적어서 불렀습니다. 적어 두지 않으면 무엇을 짐작했는지도 잊으니까요."
오벨이 책을 덮었다. 덮고 나서 표지 없는 등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갈림바위의 반쪽을 읽은 사람이 실베인에서 처음 적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랬지."
"그리고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오벨이 웃었다. 소리 없이 웃었다. 켈리는 오벨이 그렇게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백 년 만에 쫓겨난 자리에 와 있는 셈입니다. 이번에는 회의에 올라가 있고요."

린은 아무것도 꺼내지 않았다. 무릎을 안고 앉아 등잔을 보았다.
"할머니가 잡술이 맞대."
린이 말했다. 켈리에게 한 말이었다.
"…응."
"근데 기분이 안 나빠."
린이 그렇게 말하고 한참 등잔만 보았다. 등잔 불빛이 손목의 장신구에 닿았다. 열넷이었다.
"섞였다는 거잖아. 빈 자리마다 누가 손을 넣었다는 거잖아. 그걸 잡술이라고 하면… 그럼 잡술 맞지. 할머니도 손 넣었고 나도 넣었어. 할머니 할머니도 넣었고."
"…응."
"그 말을 벨류엔은 욕으로 했어."
"응."
"할머니는 아니었어."
린이 그 말을 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더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는데 하지 않았다.

켈리는 그 말들을 다 들었다. 듣는 동안 교범을 생각했다.
교범에는 빈 자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적혀 있었다. 눈금이 여섯이었고 위 셋은 돌파형이 배웠고 아래 셋은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다. 아무도 가르치지 않은 것도 교범에는 적혀 있었다. 적혀 있는 것은 고칠 수 없었다. 고칠 필요도 없었다. 그 교범을 읽은 아이 누구라도 같은 자리에 서면 같은 일을 했다.
그래서 켈리가 떠난 자리에도 누군가 왔을 것이었다. 같은 번호를 받았을 것이었다. 켈리는 그 아이를 본 적이 없었지만 그 아이가 무엇을 배웠는지는 알았다. 교범에 빈 자리가 없었으므로, 그 자리에 누가 와도 되었다.
바르트의 저울은 쇠물 늪 대장장이의 저울과 닮았는데 같은 저울은 아니었다. 니카의 천은 울음늪 여자의 천과 닮았는데 니카의 엄마는 그 여자를 몰랐다. 오벨의 책에는 떨어져 나간 서른 장이 있었고 오벨은 그 자리를 짐작으로 메웠다. 린의 다섯째 손가락은 오나가 외어 준 자매에게서 왔다. 닮은 것은 많았는데 같은 것은 없었다. 빈 자리마다 다른 손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켈리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을 위로 폈다. 폭발이 나가는 손이었다. 교범대로 배운 손이었다.
그런데 그 손에도 교범에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올라온 것을 쓰지 않고 도로 내려보내는 것. 열두 해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고 탈영한 뒤에 처음 했다. 벨류엔에는 그 동작의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켈리는 그 뒤로 몇 번 더 했다. 모라의 늪에서도 했다.
켈리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손끝이 조금 저렸다.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는데 저렸다.

이튿날 새벽에 린이 켈리를 깨웠다. 마루를 쓸기 전이었다.
둘이 배를 타고 소아레 동쪽으로 갔다. 멀지 않았다. 버드나무 사이를 두 번 꺾어 들어가자 물이 맑아졌다. 늪의 검은 물이 아니라 바닥이 보이는 물이었다. 바닥에서 모래가 조금씩 들썩였다. 물이 아래에서 올라오는 자리였다.
샘 가에 평평한 돌이 하나 있었다. 위가 반들반들했고 왼쪽 끝 두 군데가 조금 패어 있었다. 앉은 자리가 아니라 발 놓인 자리 같았다.
린이 배에서 내려 돌 위에 올라 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마가 물 가까이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손을 물에 대지는 않았다. 빌리러 온 것이 아니었다.
켈리는 린의 왼쪽에 섰다. 어디에 서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린이 무릎을 꿇으니 그 옆에 섰다. 모라의 둑 끝에서는 옆에 앉아 있었는데 여기서는 앉을 데가 없었다.
린이 고개를 돌려 켈리를 보았다. 켈리의 발을 보았다. 그러고는 돌을 보았다.
"…너 지금 어디 서 있는지 알아?"
"옆."
"…그 자리야."
켈리가 발밑을 보았다. 두 발이 패인 자리에 하나씩 들어가 있었다.
"언니가 빌릴 때 동생이 서 있던 자리. 할머니가 어릴 때 데려와서 알려 줬어. 여기가 자매가 있던 데고, 여기가 옆에서 봐 주는 사람 자리라고."
켈리가 그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돌은 젖어 있었고 패인 데에만 이끼가 앉지 않았다. 아주 오래 누군가 서 있었던 자리라고 했다. 발을 넣어 보니 그냥 발 놓기 편한 자리였다.
"…비켜?"
"아니."
린이 다시 샘을 보았다.
"거기 있어."
물이 아래에서 올라왔다. 모래가 들썩였다. 둘은 해가 버드나무 끝에 걸릴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린이 일어나 무릎을 털었고, 켈리가 먼저 배에 올라 노를 잡았다. 노는 나무였다. 걸지 않고 저었다.

오나네 장대에 배를 매는데 옆 장대에 낯선 배가 하나 매여 있었다. 쇠물의 외는 이가 타고 온 배였다. 배 바닥에 붉은 덩이가 셋 놓여 있었다. 주먹 둘만 한 것들이었고 겉이 녹으로 거칠었다. 바람 부는 날 배가 뜨지 않게 싣고 다니는 것이라고 린이 말했다. 쇠물 사람들은 돌 대신 늪 바닥에서 건진 쇳덩이를 싣는다고 했다.
마루 끝에 바르트가 앉아 있었다. 저울이 무릎 옆에 있었다. 밤새 그 자리에 두었던 모양이었다. 바르트는 배 바닥의 덩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쇠물의 외는 이가 안에서 나와 그 옆에 섰다.
"저거, 달아 봐도 돼요?"
쇠물의 외는 이가 바르트를 보았다가 배를 보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트가 배로 내려가 덩이 하나를 들어 올렸다. 두 손으로 들고 나서 잠깐 그대로 있었다. 손이 무게를 가늠하고 있었다. 대장간에서 서른 해 동안 든 버릇이었다. 바르트가 그 버릇을 알아챘다. 덩이를 도로 내려놓고 저울을 가져왔다.
켈리는 배에서 내리다 말고 그 저울을 보았다. 발이 모이지 않았다. 바르트의 저울이었다.
바르트가 접시 한쪽에 덩이를 올렸다. 다른 쪽에 쇠추를 하나씩 올렸다. 접시가 기울었다가 셋째 추에서 거의 수평이 되었고 넷째에서 반대로 기울었다. 바르트가 넷째를 내리고 작은 추로 바꿨다. 수평이 되었다.
"4.3킬로그램."
손으로 들었을 때는 넷이라고 생각했다. 0.3이 틀렸다. 바꿀 때 0.3이 틀리면 그 0.3은 어딘가에 붙었다. 바르트는 그것을 목덜미로 알았다.
"바꾸진 않을 거예요. 달기만 했어요."
쇠물의 외는 이가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쇠물 늪 바닥에서 건진 쇠가 카르소 저울 위에 있었다.
"…본 것이 하나 늘었소."
"외실 거예요?"
"쇠물 늪 일을 욀 때 붙이겠소. 카르소 대장장이가 쇠물 쇠를 달았소. 손으로 들었다가 내려놓고 저울로 달았소."
바르트가 그 말을 듣고 한참 있었다.
"…내려놓은 것까지 외요?"
"본 것은 다 외오."
바르트가 덩이를 배 바닥에 도로 놓았다. 처음 놓여 있던 자리였다.

그날 오후 일행 안건 열여덟째 회의는 열일곱 회의를 외는 데서 시작했다. 지난밤 오나네 마루에서 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회의가 아니었으니 외는 이들이 외지 않았다. 쇠물 늪의 대장장이도 울음늪의 여자도 오벨의 열람 신청도, 일행 안건에서는 아직 없었던 일이었다.
켈리는 그것이 이상했다. 켈리가 아는 장부는 무엇이든 적었다. 적힌 것은 있었던 일이었고 적히지 않은 것은 없었던 일이었다. 외는 이들도 같았다. 다만 무엇을 욀지는 차례가 정했다.
열일곱 회의를 다 외는 데 해가 졌다. 등잔이 올라왔다. 검은 탁자가 불빛을 먹었고 둘레의 늙은 얼굴들만 아래에서 비쳐 올라왔다. 회의 끝머리에 쇠물의 외는 이의 차례가 왔다.
"어젯밤 오나네 마루에서 넷 가운데 셋의 닮은 것을 말했소. 회의가 아니라 외지 않았소. 다음 회의에서 차례로 다시 말하겠소."
쇠물의 외는 이가 켈리를 보았다.
"오늘은 넷째를 묻겠소. 벨류엔 마법사. 벨류엔 술은 이 늪에서 닮은 것을 본 적이 없소. 욀 것이 없소."
켈리가 고개를 숙였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대신 묻겠소. 당신 술에도 빈 자리가 있소."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쇠물의 외는 이가 켈리를 보고 있었다. 검은 점이 박힌 손이 무릎 위에 있었다.
켈리가 대답을 찾았다. 이번에는 찾을 데가 있었다. 지난밤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찾아 둔 것이었다.
"…올라온 걸 도로 내려보내는 거요."
외는 이들이 들었다.
"교범에 없어요. 아무도 안 가르쳤어요. 탈영하고 나서 처음 했어요. 하면 손끝이 저려요. 이름이 없어요."
"그럼 당신이 메운 것이오."
쇠물의 외는 이가 말했다.
"이름을 붙이시오. 외겠소."
마루가 조용해졌다. 열넷이 켈리를 보았다. 마루 아래에서 린이 숨을 멈췄다. 바르트가 노트를 펴려다 말았다. 적을 것인지 욀 것인지를 정하지 못한 손이었다.
켈리가 생각했다. 생각하는 동안 외는 이들이 기다렸다. 실베인 사람들은 기다리는 데 익숙했다. 켈리도 기다리는 데 익숙했다. 그래서 꽤 오래 걸렸다.
"…아직이요."
쇠물의 외는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이면 다음 회의에서 묻겠소."
켈리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물을 것이 하나 생겼는데 차례가 아니었다. 켈리가 오나를 보았다. 오나가 켈리를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차례를 주는 끄덕임이었다.
마루 아래에서 린이 그것을 보았다. 린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그거, 여기서 본 적 있어요? 올라온 걸 도로 내려보내는 거."
쇠물의 외는 이가 둘레를 보았다. 열셋이 하나씩 고개를 저었다. 오나도 저었다.
"없소. 처음 듣는 것이오."
"그럼…"
"그러니 외겠소. 이름이 붙으면."
니카가 마루 아래에서 소리 없이 무언가를 셌다. 켈리의 「아직」이 둘이 되었다. 땅 이름과 동작 이름이었다.
오벨이 수첩을 폈다. 켈리의 장을 찾아 맨 아래에 줄을 하나 긋고 두 줄을 적었다. 「땅 이름 — 아직」, 「동작 이름 — 아직」. 적고 나서 그 두 줄을 한참 보았다. 오벨의 수첩에는 동료마다 장이 하나씩 있었다. 이름과 얼굴과 버릇이 적힌 장이었다. 「아직」이 두 줄인 장은 그것 하나였다.
린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오나를 보고 있었다. 오나는 한 번도 마루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큰 마루를 내려오는 길에 고슈가 장대 밑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회의 동안 내내 거기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짓단이 말라 있었다.
켈리가 그 앞을 지나갔다. 고슈가 켈리의 허리춤을 보았다. 뼈와 깃털 끈이 매달려 있었다.
"…드루이드는 외는 이가 없어."
고슈가 말했다.
"…예. 들었어요."
"…나는 마을에서 안 배웠어. 숲 어귀에서 처음 됐어. 경계의 숲. 마을이 아니라서 아무도 안 봤어."
"그럼 누가 알아요?"
고슈가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소리가 났다.
"…숲지기가 알아."
"숲지기요?"
린이 뒤에서 걸음을 멈췄다.
"…영감님. 숲지기는 옛날얘기잖아요."
실베인 아이들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경계의 숲 어귀에 늙은 정령이 하나 산다고 했다. 숲을 가꾼다고 했고, 이백 해째 가꾸고 있다고 했다. 비 오는 날 숲 어귀 나무들이 한쪽으로만 눕는 것은 그가 쓰다듬고 지나가서라고 했다.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 자랐고 자라서는 웃으며 그 말을 했다.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봤나."
바르트가 물었다.
"…봤어."
"언제."
고슈가 대답하기 전에 오래 있었다.
"…열한 해 전. 깊이 들어갔다가 못 돌아올 뻔한 적이 있어. 그때."
고슈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무엇이 되어서 깊이 들어갔는지, 무엇이 그를 돌아오게 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린이 고슈를 보았다. 린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고슈가 린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켈리를 다시 보았다.
"…보러 갈래?"

 

어귀


소아레를 떠나는 날 아침, 린은 차례를 청하지 않았다.
린은 여느 날처럼 마루를 쓸었다. 오나가 나와 그물 앞에 앉자 린이 그 앞에 무릎을 꿇은 것도 여느 날과 같았다. 다만 입에서 나온 말이 달랐다.
"할머니. 숲 어귀 다녀올게요. 영감님이 데려간대요."
오나의 손이 그물코에서 멈췄다. 열흘 넘게 아침마다 같은 청을 듣던 귀에 다른 말이 들어간 것이었다. 오나는 린을 한참 보았다. 린의 무릎 앞에 빗자루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고, 빗자루 끝에 마른 갈대 부스러기가 붙어 있었다.
"…숲지기 보러."
"예."
"나는 못 봤다. 그래서 외는 것도 없다."
오나가 그물을 다시 집었다. 그물코 하나를 다 기운 다음에야 말이 이어졌다.
"보거든 인사는 네가 해라."
"…예."
린이 일어섰다. 일어서고 나서 잠깐 그 자리에 있었다. 오늘은 「아직」을 듣지 않았다. 듣지 않은 아침이 듣는 아침보다 이상했다. 켈리는 문 옆에서 린의 발을 보았다. 맨발의 발가락이 마루를 한 번 움켜쥐었다가 펴졌다.

오벨은 떠나기 전에 큰 마루에 들러 일행이 며칠 자리를 비운다고 알렸다. 안건을 낸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회의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쇠물의 외는 이가 대답했다.
"하오. 비운 것도 외오."
"저희가 없는 동안 저희 안건이 나아갈 수도 있습니까."
"나아가지는 않소. 비운 것이 늘어날 뿐이오."
오벨이 수첩에 적었다. 「궐석. 진행 없음. 누적만.」 적고 나서 그 줄을 한참 보았다. 법정에도 궐석은 있었다. 법정의 궐석은 자리를 비운 쪽이 지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아무 쪽도 지지 않고 다만 외워졌다. 오벨은 그것이 누구에게 유리한지 끝내 판단하지 못하고 수첩을 덮었다.

배는 두 척이었다. 바르트가 여섯의 무게를 어림해 나눴다. 앞 배에 고슈와 린과 니카가 탔고 뒤 배에 바르트와 오벨과 켈리가 탔다. 나누고 나서 바르트가 뒤 배의 뱃전을 내려다보았는데, 뒤 배가 손가락 두 마디만큼 더 잠겨 있었다. 바르트는 그것을 노트에 적지 않았다. 모라에서 저울이 가라앉는 것을 본 뒤로 바르트는 배에 오를 때마다 물 높이부터 보았다.
물길은 모라로 가던 길과 같았다. 그때는 밤이었고 지금은 낮이었다. 갈대가 키를 넘었다가 낮아지기를 되풀이했고, 낮아진 자리마다 물 위에 흰 꽃이 떠 있었다. 켈리는 노를 저었다. 이번에도 걸지 않고 저었다. 손바닥에 노의 결이 닿았고 결 사이에 낀 물이 미지근했다.
앞 배에서 니카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 움직이다 멈췄다.
"…2할이요."
"뭐가."
바르트가 뒤 배에서 물었다.
"숲지기가 있을 확률이요."
"고슈가 봤다잖나."
"그래서 2할이에요. 영감님 혼자 봤으니까요. 열한 해 전에, 못 돌아올 뻔했을 때요."
물 위가 조용해졌다. 앞 배의 고슈가 노를 젓다 말고 돌아보았다. 털가죽 어깨 너머로 니카를 보았고, 오래 보았다. 니카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셈한 것을 셈한 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맞는 말이야."
고슈가 다시 노를 저었다. 노가 물에 들어가는 소리가 아까와 같았다. 니카는 입을 다물었고 그 뒤로 다시 셈하지 않았다. 린이 니카의 발을 밟으려다 말았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해 질 녘에 모라에 닿았다. 둑 끝에 탄 장대와 새 장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사이에 새 장대가 셋 늘었는데, 새것에는 아직 껍질이 붙어 있었다. 껍질 벗기는 데까지 손이 가지 않은 것이었다. 배를 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둑 위로 나왔다. 국자를 깎은 젊은이가 맨 앞이었다. 젊은이는 켈리의 허리춤을 보았다. 뼈와 깃털 끈 옆에 늪오리나무 국자가 매달려 있었다. 젊은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고 켈리도 숙였다. 이번에는 드는 것이 둘이 같았다.
모라의 외는 이는 소아레에 남아 있었으므로 그날 밤 모라에는 외는 이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일행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묻는 것은 외는 이의 일이었다. 그들은 생선을 구웠다. 기침하는 노인이 켈리 옆에 앉아 생선 하나를 집어 들고 뼈를 발라 주었다. 켈리는 생선 뼈를 바르는 법을 몰랐다. 막사에서는 뼈가 없는 것만 나왔고 뼈가 있는 것은 뼈째 먹었다. 노인의 손가락이 가시를 하나씩 들어내어 나뭇잎 가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켈리는 그것을 끝까지 보았다. 다 바르고 나니 가시가 열아홉 개였다. 켈리는 그 수를 셌고, 세고 나서 왜 셌는지 몰랐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젊은이가 둑 너머 늪을 가리켰다. 사초 무더기 사이에 물이끼가 유난히 고르게 덮인 자리가 있었다. 나흘 전 서기가 저울을 놓친 자리였다. 물이끼는 그 위를 벌써 메워 놓았고,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건지면 아직 쓸 만할 텐데."
바르트가 말했다. 대장장이의 말이었다. 쇠는 늪에서 나흘 만에 상하지 않았다.
"…거기 둬요."
켈리가 말했다. 켈리는 그와 같은 모양의 저울에 아침마다 올랐다. 막사의 것은 사람이 올라설 만큼 컸고, 접시가 균형을 찾으면 서기가 눈금을 읽었으며, 그 숫자대로 밥이 나왔다.
바르트가 켈리를 보았다가 늪을 보았다.
"그러지."
그 뒤로 바르트는 그 자리를 다시 가리키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고슈가 둑 끝으로 갔다. 켈리가 자다 깼을 때 그는 아직 거기 서 있었다. 서쪽을 보고 있었다. 늪이 끝나는 자리에서 땅이 조금 올라갔고, 그 위로 검은 띠 하나가 하늘을 가로막았다. 띠의 윗선에서 별이 끝났다. 별이 끝나는 선을 따라가면 그것이 숲이었다.
켈리가 둑 끝으로 가서 고슈 옆에 섰다. 고슈는 돌아보지 않았다. 둑 아래 물에서 개구리 하나가 울다 그쳤다.
"…저기서 처음 됐어."
고슈가 말했다.
"뭐가 됐어요?"
"…몰라. 그때는 알았는데."
켈리는 그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백로가 되었다 돌아온 날, 고슈는 그 늪 백로의 목이 왜 짧은지를 그렇게 말했다. 새일 때는 알았는데 돌아오면서 두고 왔다고 했다. 고슈는 무엇이 되었다가 돌아올 때마다 무언가를 그쪽에 두고 오는 사람이었다.
"열한 해 전에는요?"
고슈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띠 위로 별 하나가 넘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땐 이름을 두고 왔어."
"그럼 어떻게 돌아왔어요?"
"…내일."
고슈가 그렇게 말하고 둑을 내려갔다. 켈리는 그 뒤로도 한참 서쪽을 보았다. 검은 띠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빛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모라에서부터는 걸었다.
늪은 모라 서쪽에서 끝났다. 끝나는 방식이 갑작스럽지 않았다. 물이 얕아지다가 진흙이 되었고, 진흙이 굳다가 이끼가 되었다. 어느 순간 켈리는 발을 뽑지 않고 걷고 있었다. 한 달 가까이 발목까지 젖은 채로 지냈으므로 땅이 발을 붙잡지 않는 것이 처음에는 오히려 이상했다. 켈리는 몇 걸음마다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빠지지 않았다.
젖은 신발이 마르기 시작했다. 마르는 신발은 걸을 때마다 소리가 조금씩 달라졌다. 아침에는 질척였고 한낮이 가까워지자 끈적였으며, 해가 머리 위에 올 무렵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켈리는 그 소리가 없어진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아챘다. 소리가 없어진 것을 알아채는 데는 소리를 알아채는 것보다 오래 걸렸다.
나무가 바뀌었다. 늪오리나무와 버드나무가 줄더니 줄기가 굵은 나무들이 늘었다. 사람 둘이 팔을 벌려도 둘레를 다 안지 못할 나무들이었다. 껍질에 이끼가 두껍게 앉아 있었는데 이끼는 줄기의 한쪽에만 있었다. 바르트가 그것을 먼저 보았다.
"다 같은 쪽으로 누웠어."
나무들이 조금씩 기울어 있었다. 한 그루만 보면 모를 만큼이었으나 여러 그루를 나란히 보면 알 수 있었다. 하나같이 서쪽으로, 숲이 짙어지는 쪽으로 기울었다.
"바람 쪽이 아냐. 이 늪 바람은 남쪽에서 오는데."
바르트가 배낭에서 저울을 꺼내 쇠추 하나를 끈에 매달아 들었다. 쇠추가 곧게 늘어졌다. 바르트는 그 끈과 나무 줄기 사이의 틈을 손가락으로 재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비 오는 날 숲지기가 쓰다듬고 지나가서래요."
린이 말했다.
"그건 재는 게 아니잖나."
"재는 거 아니에요. 옛날얘기예요."
바르트가 쇠추를 거두었다. 노트에 「기울기 — 모두 서쪽」이라고 적고, 까닭 칸은 비워 두었다.

해가 머리 위에 왔을 때 고슈가 멈췄다. 멈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금도 말뚝도 없었다. 켈리는 저도 모르게 말뚝을 찾았다. 벨류엔의 선은 말뚝으로 되어 있었다. 500미터마다 참나무 말뚝이 서고 말뚝마다 손이 얹혀야 선이 섰다. 손이 없으면 선도 없었다. 여기에는 말뚝이 없는데 선이 있었다. 고슈가 거기서 더 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있었다.
"여기서부터입니까."
오벨이 물었다.
"…응."
"영역 분리 협정에 따르면 경계의 숲은 사람이 들어가지 않는 땅입니다. 경계선이 정확히 어디입니까."
"…여기쯤."
"쯤은 법률 용어가 아닙니다."
"…나무는 법 몰라."
오벨이 무언가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고슈가 숲 안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들어가도 돼. 들어가면 여기로 다시 나와."
"다시 나온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숲이 그렇게 자라. 걸어 들어간 길이 걸어 나오는 길이 돼. 숲지기가 그렇게 길렀어."
오벨이 숲 안쪽을 한참 보았다. 나무 사이로 길처럼 보이는 틈이 여럿 나 있었고, 틈마다 조금씩 휘어 있었다. 휘어 가다 보면 어디로 나오게 되는지 오벨은 수첩에 그려 보려다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바르트가 따라 물러섰고 니카와 린과 켈리도 물러섰다. 고슈가 돌아보았다. 다섯이 한 걸음씩 뒤에 서 있었다.
"…여기가 어귀야. 어귀는 들어가는 데가 아니야. 서 있는 데야."
고슈가 그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해가 기울었다.
고슈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한 번 움직였는데, 바르트가 기운 줄기에 붙은 딱정벌레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때였다. 등딱지가 이끼와 같은 색이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벌레였다. 고슈가 그것을 보더니 말을 시작했다. 그 벌레는 기운 나무에만 산다고 했다. 곧은 나무에서는 빗물이 줄기를 타고 곧장 흘러내리는데, 기운 나무에서는 빗물이 줄기 아랫면에 고였다가 천천히 떨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아랫면에만 이끼가 두껍게 앉고, 그 이끼 속에만 이 벌레가 알을 낳는다고 했다. 알은 서른 날 만에 깨는데 비가 적은 해에는 마흔 날이 걸린다고 했다. 깨어난 애벌레는 이끼를 먹지 않고 이끼 밑의 껍질을 먹는데 껍질을 먹는 자리가 정해져 있다고 했다. 고슈의 말은 그 뒤로도 오래 이어졌다. 늪에서 사십 분을 설명하던 그 목소리였다. 사람 이야기를 할 때는 말끝마다 쉬던 사람이 벌레 이야기를 할 때는 쉬지 않았다. 바르트가 노트에 받아 적다가 두 장째에서 연필을 내려놓았다. 켈리는 끝까지 들었다. 알아들은 것은 절반이었다. 다만 그 벌레가 기운 나무에만 산다는 것, 나무가 곧게 서 있으면 그 벌레는 살 데가 없다는 것은 알아들었다.
고슈의 말이 끝나자 바르트가 노트를 다시 폈다. 날짜와 자리를 적고 그 아래에 「숲지기」라고 적었다. 옆에 무게 칸을 그었다. 칸은 비워 두었다. 니카는 나무 밑동에 등을 대고 앉아 눈을 감았는데 자는 것은 아니었다. 입술이 이따금 움직였다. 오벨은 수첩에 경계선을 그려 보려다가 그릴 기준점이 없어서 연필 끝만 종이에 대고 있었다. 린은 손목의 장신구를 하나씩 만졌다. 만지기만 하고 세지는 않았다. 열넷이었다.
켈리는 지팡이를 무릎에 가로로 얹고 앉아 있었다. 쇠 테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테 아래로 금이 지나갔다. 손톱 끝으로 느껴질 만큼만 벌어진 금이었다.
해가 숲 너머로 넘어갔다. 나무 밑이 먼저 어두워졌고 그다음에 나무 사이가 어두워졌다. 하늘이 가장 늦게 어두워졌다. 어두워지는 데에도 순서가 있었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 아주 흐린 빛 하나가 보였다.
푸른 빛이었다. 맑은 물을 오래 들여다보면 바닥에 어리는 하늘빛 같은 것이었는데, 그보다도 흐렸다. 사람 키만 한 길쭉한 빛이었고, 어귀에서 열 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너무 가까웠다. 그 거리라면 오후 내내 보였어야 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어."
고슈가 말했다.
"해가 있으면 안 보여. 빛이 흐려서."
니카가 눈을 떴다.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가 멈췄다.
"…다시 셀게요."

빛이 나무 사이에서 나왔다. 나오는 것이 걷는 것 같지 않았다. 흐린 빛이 조금씩 사람 모양을 갖추어 가며 어귀 쪽으로 옮겨 왔다. 옮겨 오는 동안 곁의 나무들이 아주 조금씩 그쪽으로 기울었다. 바람이 없었는데 나뭇잎이 한쪽으로 쓸렸다.
어귀에 이르러서야 모양이 보였다. 사람보다 조금 컸고 몹시 말랐다. 어깨가 좁고 목이 길어서 그림자만 보면 여자 같았는데, 가까이 오니 여자라고도 남자라고도 할 수 없었다. 몸 전체가 흐린 물빛이었다. 빛이 몸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물빛이 다 빠져나간 자리에 조금 남은 것이 비치는 것 같았다. 얼굴의 주름이 나이테처럼 겹겹이 돌아갔다. 한쪽 팔뚝에 나뭇가지가 돋아 있었는데, 마디 몇 개가 마른 채로 굳어 안쪽으로 굽어 있었다. 펴지지 않는 가지였다. 다른 손은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아무 장식 없는 마른 나무였고 길이가 켈리의 것과 비슷했다.
켈리는 정령을 본 적이 없었다. 린이 불을 빌리고 물을 빌릴 때도 빌려주는 쪽은 보이지 않았다. 켈리는 보이지 않는 것이 정령인 줄 알았다. 옆을 보니 린의 입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린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늙은 정령은 어귀의 선을 넘지 않았다. 선 바로 안쪽에서 멈추고, 굳은 가지가 돋은 팔을 곁의 나무 줄기에 얹었다. 줄기가 그 팔 쪽으로 조금 휘었다.
"…고슈네요."
목소리가 낮았다. 나뭇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와 크기가 같았다.
"이름, 아직 갖고 있네요. 엊그제 같은데."
"…응."
켈리는 그 말을 셈했다. 고슈가 숲지기를 본 것은 열한 해 전이었다. 열한 해가 이 늙은 정령에게는 엊그제였다.
늙은 정령이 고슈 뒤의 다섯을 보았다.
"손님을 데려왔네요. 다섯이나."

린이 앞으로 나왔다. 어귀의 선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등을 폈다. 숲지기를 만나면 뭐라고 할 거냐는 말은 소아레 아이들 사이에서 오래된 장난이었다. 린도 열 살 무렵 그 장난 속에서 이 인사를 수십 번 했다. 그 장난이 지금 무릎 앞에 서 있었다.
"…이름을 모르고 부르는 무례를 먼저 사과드립니다. 실베인 소아레에서 온 린입니다."
린이 이마를 숙였다가 들었다.
"이름을 여쭤도 될까요."
늙은 정령이 린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이 어떤 색인지 켈리는 알 수 없었다. 몸의 빛이 너무 흐려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불러 주는 이가 없어서요.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불렀는지 잊었어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아이들이 부르는 걸로 해요."
린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장난 속에서는 쉽게 나오던 말이었다.
"…숲지기님."
"님은 처음이네요."
몸의 물빛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가 돌아갔다. 웃은 것이었다.
린의 손이 손목으로 갔다. 장신구 하나를 풀려고 매듭을 잡았다.
"빌리러 온 건 아니잖아요."
늙은 정령이 말했다.
"…예."
"그럼 넣어 둬요."
린이 매듭에서 손을 뗐다. 열넷 그대로였다.
켈리가 린 옆으로 와서 고개를 숙였다. 숙이는 것은 린에게 배운 각도였고 드는 것은 늦었다. 늙은 정령은 켈리가 고개를 드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 다 든 다음에 켈리의 팔을 보았다. 걷은 소매 아래 붉은 실금이 옅게 남아 있었다. 그다음에 지팡이를 보았고 쇠 테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허리춤을 보았다. 뼈와 깃털 끈과 국자가 있었다.
"…많이 냈네요."
"…예."
켈리가 대답했다. 무엇을 냈는지 말하지 않았다. 늙은 정령도 묻지 않았다.

늙은 정령의 무릎이 조금 꺾였다. 지팡이를 짚은 손이 떨렸고 몸이 곁의 줄기를 따라 내려앉았다. 내려앉는 자리에 굵은 뿌리가 하나 있었다. 뿌리가 흙 위로 손바닥 하나만큼 올라와 그 몸을 받았다. 켈리는 뿌리가 움직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오래 못 서."
고슈가 말했다. 켈리를 보지 않고 늙은 정령을 보면서였다.
켈리가 물었다.
"아파요?"
"아프진 않아요. 덜 차요."
켈리는 그 대답의 모양을 알았다. 백로였던 고슈가 돌아온 날 켈리가 똑같이 물었고, 고슈는 안 아프다고, 덜 돌아온다고 했다. 아프지 않은 대가가 있었다. 아프지 않아서 무엇이 빠져나가는지 모르는 대가였다.
"언제부터요?"
"오래전에요. 일을 하나 했어요. 그 값이에요."
오벨의 연필이 수첩 위에서 멈췄다. 무슨 일이었는지를 물을 자리였다. 오벨은 묻지 않았다. 오벨이 청구 원인을 묻지 않고 넘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켈리가 물었다.
"…그 대가는 언제 끝나요?"
늙은 정령이 켈리를 보았다.
"끝나지 않아요."
켈리의 손가락이 쇠 테 위에서 멈췄다. 켈리가 아는 대가는 끝나는 것이었다. 마법청 장부의 칸은 날짜마다 따로 있었고 날짜가 지나면 닫혔다. 번호 옆에 줄이 하나 그어지면 그 번호의 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대가가 끝나는 방법은 그것 하나였다. 그러니 끝나지 않는다는 말은 줄이 그어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이들 이야기가 맞다면 이 늙은 정령의 칸은 이백 해째 열려 있었다.
"다만 나눠 지면 견딜 수 있어요."
늙은 정령이 등을 뒤로 기댔다. 등 뒤의 줄기가 그 무게를 받아 휘었다. 마른 가지가 꺾이기 직전의 소리가 났는데 꺾이지 않았다. 그 줄기 너머의 나무가 조금 휘었고 그 너머의 나무도 휘었다. 어귀의 나무들이 차례로 같은 쪽으로 기울었다. 아침부터 일행이 보아 온 그 기울기였다.
린이 그것을 보았다. 쓰다듬고 지나가서가 아니었다. 기대서였다.
"나무들이 나눠 져요. 이백 해째."

"고슈도 한 번 나눠 졌죠."
늙은 정령이 말했다. 고슈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 내 이름을 들고 있었어."
"떨어뜨리고 가길래요. 사흘 들고 있었더니 돌아오던데요."
"…무거웠어?"
"이름이 무거우면 아무도 못 갖고 다니죠."
고슈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털가죽 깃 아래로 입꼬리 한쪽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늙은 정령의 눈이 다시 켈리의 허리춤으로 갔다.
"그것도 고슈 거죠."
켈리가 내려다보았다. 뼈와 깃털 끈이었다. 고슈가 백로가 되던 날 벗어 던진 털가죽을 켈리가 개켜 들었고, 돌아온 고슈가 그 끈을 내밀며 다음에도 갖고 있으라고 했다.
"…맡은 거예요."
"그래요. 맡은 거."
늙은 정령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켈리는 끈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끈 옆에 국자가 있었다. 국자는 받은 것이었고 끈은 맡은 것이었다. 둘이 같은 허리춤에서 같이 흔들렸다.

니카가 입을 열었다. 한참 망설이다 연 입이었다.
"…나눠 지면 얼마나 줄어요?"
"셈해 본 적은 없어요. 줄진 않아요. 견딜 만해지죠."
"그건 셈이 안 되는데요."
"그래서 안 했죠."
니카가 입을 다물었다.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셈할 수 없는 것을 받아 들고 어디에 둘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니카는 되돌아오는 것을 늘 혼자 앓았다. 혼자 앓는 것은 셈이 되었다.
오벨이 두 가지만 여쭙겠다고 했다. 늙은 정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은 지금 전쟁 중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알아요."
"그런데도 숲에만 계십니까."
"사람 일에는 끼지 않기로 했어요. 우리 모두 그렇게 정했어요. 숲을 길러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데까지가 우리 일이에요."
오벨이 수첩에 적었다. 「불개입. 합의.」 적고 나서 연필 끝으로 그 두 낱말을 한 번 짚었다. 합의라는 낱말은 법률가에게 가볍지 않았다.
"갈림바위의 약조 나머지 반쪽이 숲 너머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숲 너머는 제가 가는 데가 아니에요. 저는 어귀까지예요."
오벨이 그 아래에 적었다. 「어귀까지.」 그것이 대답의 전부였는데 오벨은 그 줄 아래에 밑줄을 그었다. 관할을 밝힌 대답은 법률가에게 대답이었다.
바르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노트를 펴 놓고 비워 둔 무게 칸을 보고 있었다. 늙은 정령이 그 칸을 건너다보았다.
"…그건 안 재질 텐데요."
"알아요."
바르트가 말했다. 어른에게 하는 말투였다.
"그래도 칸은 있어야 해서요."
늙은 정령의 물빛이 다시 조금 밝아졌다가 돌아갔다.

빛이 흐려졌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흐렸다. 늙은 정령이 지팡이를 짚고 뿌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혼자 일으키지 않았다. 등 뒤의 줄기가 휘었다가 펴지면서 그를 밀어 올렸다.
"오래 서 있었네요."
늙은 정령이 돌아섰다. 그때 린이 무릎을 꿇은 채로 불렀다.
"숲지기님. 하나만 청해도 되겠습니까."
늙은 정령이 멈췄다. 린이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오늘 밤 이 어귀에서 자고 가게 해 주십시오. 불은 피우지 않겠습니다. 선은 넘지 않겠습니다. 날이 밝으면 가겠습니다."
린의 손이 다시 손목으로 갔다가, 아까 들은 말이 생각났는지 무릎으로 돌아왔다. 늙은 정령이 린을 오래 보았다.
"정령들은 예의 바르게 청하면, 조금은 들어줘요."
그러고는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동안 곁의 나무들이 차례로 그쪽으로 기울었다. 빛이 흐려서 줄기 하나만 지나가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줄기 사이에서 다시 보였다가 그다음 줄기에서 다시 가려졌다. 세 번째에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빛이 사라진 자리를 다섯이 한참 보았다. 늙은 정령이 앉았던 뿌리는 흙 속으로 도로 내려가 있었다. 린이 어귀의 선 앞으로 가서 그 뿌리에 손을 대 보려다 말았다. 선 너머였다.
니카의 입술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2할이 나왔어요."
"그게 맞힌 건가."
바르트가 물었다.
"2할도 나오면 나온 거예요."
니카가 그렇게 말하고 고슈를 보았다. 고슈는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열한 해 전에 혼자 본 사람을 2할로 셈한 것은 니카였다. 셈은 틀리지 않았다. 니카가 고슈 옆으로 가서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셈이 틀리지 않았는데도 무언가를 갚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날 밤 일행은 어귀에서 잤다. 린이 불을 피우지 않겠다고 했으므로 아무도 피우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이슬이 내렸다. 선 바깥의 풀은 금세 젖었는데 일행이 누운 자리만은 마른 채였다. 머리 위의 가지들이 어두워진 뒤로 조금 더 이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슬은 그 가지 끝에 맺혔다가 일행이 누운 자리 바깥으로 떨어졌다. 조금이었다. 딱 다섯 사람과 고슈 하나가 누울 만큼이었다.
린이 깨어 있었다. 누운 채로 기운 나무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애들한테 말해 줘야 하나."
린이 말했다. 켈리에게 한 말이었다.
"뭘?"
"쓰다듬는 게 아니라 기대는 거라고."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린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나뭇잎이 바람 없이 한 번 쓸렸다가 멎었다.
"쓰다듬는 게 더 예쁜데."
린이 한참 있다가 다시 말했다.
"근데 나는 봤잖아. 할머니는 못 봤고. 외는 이는 본 것만 외니까, 내가 말 안 하면 아무도 못 외워."
린이 몸을 돌려 켈리를 보았다.
"그건 차례 받고 해야 하는 말이야."
그러고는 다시 돌아누웠다. 손목에서 장신구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가 작게 났다. 오늘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
켈리는 잠들지 않았다. 지팡이를 무릎에 얹고 앉아 쇠 테 아래의 금에 엄지를 대었다. 넘친 것은 쥐고 있던 나무로 갔다. 소아레 빨래터에서 방망이가 결대로 갈라졌을 때 켈리는 그것을 알았다. 지팡이를 멀리 치워 두었더니 넘친 것이 방망이로 갔다. 그 전에는 넘칠 때마다 지팡이로 갔고, 그래서 금이 갔다. 켈리는 그 금을 부서진 것으로 알았다. 부서진 것이라면 켈리는 많이 보았다. 탁자도 문짝도 홑이불도 부서졌다.
그런데 이 금은 부서진 자리가 아니었다. 켈리 손으로 올 것이 나무로 간 자리였다. 금이 더 벌어지지 않게 쇠 테를 감은 것은 바르트였고, 테를 감은 날 새벽 바르트의 목덜미에 혹이 하나 늘었다. 켈리는 그 혹을 보았으나 그때는 그것을 셈하지 않았다.
어귀의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같은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보았고 무릎 위의 지팡이를 보았다. 켈리가 아는 장부에는 지불인 칸이 하나뿐이었다. 칸 하나에 번호 하나였다. 그 칸에 다른 것을 적는 법은 교범에 없었다.
켈리가 일어섰다. 바르트는 나무에 기대 자고 있었는데 켈리가 다가가자 눈을 떴다. 대장장이는 쇠 식는 소리에도 깨는 사람이었다.
"…아저씨."
"응."
"노트. 한 장만요."
바르트가 켈리를 보았다. 켈리가 바르트의 노트를 달라고 한 것은 처음이었다.
"뭘 적게."
"…제 거요."
바르트가 노트를 내밀었다. 찢어 주지는 않았다.
"한 장은 안 되네. 찢으면 맞붙은 장까지 빠져. 맨 뒤에 쓰게."
켈리가 노트를 받았다. 맨 뒷장은 비어 있었다. 연필을 쥐었다. 쥐는 데에는 마법을 걸 필요가 없었다. 켈리는 맨 위에 줄을 하나 그었다. 그다음에 칸을 몇 개로 나눌지 몰라서, 오래 연필을 들고 있었다.

 

칸


어귀의 아침은 풀이 먼저 알렸다.
선 바깥의 풀이 하나같이 젖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슬이 무거워서였다. 선 안쪽, 일행이 누웠던 자리의 풀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여섯 사람이 누운 모양대로 마른 자리가 여섯이었고, 그 가장자리에서 젖은 풀과 마른 풀이 칼로 그은 듯이 갈렸다. 머리 위의 가지들은 밤새 그쪽으로 기울어 있었는데 해가 오르자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갔다.
린이 일어나 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도 없는 숲을 향해 이마를 숙였다가 들었다.
"고맙습니다. 약속대로 선은 넘지 않았습니다."
숲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일어나 무릎의 흙을 털었다.
켈리는 바르트의 노트를 가슴에 얹은 채 깨어났다. 연필은 손에 쥐고 있었다. 노트를 펴 보니 맨 뒷장에는 어젯밤 그은 줄 하나뿐이었다. 칸을 몇 개로 나눌지 정하지 못한 채 잠든 것이었다. 켈리는 노트를 덮어 품에 넣었다. 바르트가 그것을 보았고 돌려 달라고 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 켈리는 몇 번 뒤를 돌아보았다. 어귀의 나무들은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기운 쪽 어딘가에 그 늙은 정령이 앉아 있을 것이었다. 켈리는 그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생각했다. 장식 없는 마른 나무였고 길이가 켈리의 것과 비슷했다. 그 지팡이에도 금이 있는지 켈리는 보지 못했다. 어두웠고, 보려고 하지 않았다. 다음에 보면 볼 것이었다. 켈리는 다음이라는 말을 생각한 것이 이상해서 한동안 그 말을 입 안에서 굴렸다.
고슈는 앞장서 걸었다. 올 때보다 걸음이 빨랐다. 늪이 다시 시작되는 자리에서 고슈는 한 번 멈추어 서쪽을 돌아보았고, 그다음부터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르던 신발이 다시 젖었다. 질척이는 소리가 돌아왔고, 켈리는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모라에는 한낮을 조금 넘겨 닿았다. 배를 띄우기에는 늦은 시각이어서 그날 밤도 모라에서 묵었다.
켈리는 저녁을 먹고 둑 끝에 앉아 노트를 폈다. 맨 뒷장을 찾느라 뒤에서부터 넘겼는데, 맨 뒷장 바로 앞의 몇 장에 바르트의 글씨가 있었다. 앞쪽의 글씨와 달랐다. 앞쪽은 무엇을 먹었고 무엇을 샀고 어디서 잤는지가 길게 적혀 있었는데, 이 장들은 줄마다 짧았다. 날짜가 있었고, 몸의 자리가 있었고, 크기가 있었다.
앞의 줄일수록 먹이 바래 있었고 글씨가 작았다. 뒤로 올수록 글씨가 컸다. 눈이 나빠진 것인지 쓰는 손이 굵어진 것인지 켈리는 알 수 없었다. 남은 줄에는 크기가 곡식으로 적혀 있었다. 콩, 팥, 쌀알. 몸에 붙은 혹의 크기였다. 모자란 줄에는 곡식이 없었다. 대신 「살 파임」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자라면 몸에서 가져갔고, 가져간 자리는 살이 파였다. 줄 끝마다 푼이 붙어 있었다. 한 푼 남음, 두 푼 모자람. 푼은 저울의 눈금이었다. 바르트는 제 몸에 붙은 것도 제 몸에서 빠져나간 것도 저울의 눈금으로 적고 있었다.
「왼 손목 안쪽. 살 파임. 손톱. 두 푼 모자람.」
「왼 팔뚝 안쪽. 팥. 한 푼 남음.」
모자란 줄은 열일곱 가운데 둘뿐이었다. 둘 다 맨 앞쪽, 먹이 가장 바랜 자리에 있었다. 그 뒤로는 전부 남은 줄이었다. 붙는 것은 무게만 늘렸으나 빠지는 것은 어디서 빠질지 몰랐다. 손목에서 빠지면 손목이 파였고, 더 안쪽에서 빠지면 더 안쪽이 파일 것이었다. 바르트는 그것을 두 번 배웠고, 그다음부터는 저울이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야 한다면 남는 쪽으로 기울게 달았다. 바르트의 혹은 그렇게 해서 늘어난 것이었다.
맨 아래 줄을 켈리는 읽기 전에 알았다.
「5월 3일. 목 오른쪽. 쌀알. 한 푼 남음.」
쇠 테를 감은 날이었다. 그날 아침 켈리는 지팡이에 없던 것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 바르트는 금 갔길래 그랬다고만 했다. 켈리는 그날 바르트의 목덜미를 보지 않았다. 볼 줄을 몰랐다.
켈리는 그 장을 오래 보았다. 바르트에게도 장부가 있었다. 지불인 칸에 바르트 하나만 적히는 장부였다. 스무 해 동안 열일곱 줄이었다. 열일곱째 줄의 값은 켈리의 지팡이가 낼 값이었다.

켈리가 맨 뒷장으로 돌아갔다. 어젯밤 그은 줄 아래에 세로줄을 둘 그었다. 칸이 셋이 되었다. 첫째 칸 머리에 「켈리」라고 적었다. 둘째 칸에 「지팡이」라고 적었다. 셋째 칸에서 연필이 멈췄다가 「아저씨」라고 적었다. 바르트의 이름을 쓸 줄은 알았다.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어서 이름으로 적지 못했다.
그다음이 어려웠다. 줄마다 무엇을 적어야 하는지 켈리는 몰랐다. 날짜는 몰랐다. 켈리가 아는 것은 자리였다. 켈리는 칸 왼쪽 여백에 자리를 적었다. 언 땅. 도박장. 로엔. 품팔이 마을. 호위. 빨래터. 모라. 앞쪽 줄들은 칸이 다 차지 않았다. 켈리는 거기서 무엇을 냈는지 기억했으나 그것을 무엇이라고 적는지 몰랐다. 다리가 남의 것이 된 날을 무엇이라고 적어야 하는지, 컵을 못 든 저녁을 몇이라고 적어야 하는지 교범에는 없었다. 교범에는 출력이 있었고 소모가 있었다. 소모는 마법청이 적었다. 켈리가 적은 적은 없었다.
막사의 저울 옆에는 서기가 앉아 있었다. 켈리가 저울에 오르면 서기가 눈금을 읽고 장부에 적었다. 출격에서 돌아오면 켈리는 다시 저울에 올랐고 서기는 다시 적었다. 그 두 숫자의 차이가 켈리가 낸 값이었을 것이다. 켈리는 그 장부를 거꾸로만 보았다. 저울 위에서 서기의 붓이 움직이는 것을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그 장부에 칸이 몇 개였는지 켈리는 몰랐다. 하나였을 것이었다. 번호 하나에 칸 하나였다.
켈리는 결국 교범의 말을 찾는 것을 그만두고 자기 말로 적었다. 「다리 남의 것.」 「컵 못 듦.」 「빵 반.」 「안 걸음. 멍.」 교범에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날그날 켈리의 몸이 켈리에게 한 말이었다. 적고 나니 앞쪽 줄들의 켈리 칸이 조금씩 찼다. 글씨는 삐뚤었고 획마다 연필이 한 번씩 멈췄다. 켈리가 글자를 배운 지 넉 달이 되지 않았다.
뒤쪽 줄은 쉬웠다. 바르트가 적어 둔 것이 있었다. 켈리는 노트 앞쪽을 넘겨 소아레의 줄을 찾았다. 「빨래 1. 빵 2.」 「방망이 1. 빵 2. 생선 1.」 그것을 빨래터 줄의 켈리 칸에 옮겨 적었다. 지팡이 칸은 비었다. 그날 지팡이는 널빤지 저쪽 끝에 있었다. 대신 방망이가 갈라졌다. 켈리는 방망이를 어느 칸에 적을지 한참 생각하다가 칸을 하나 더 그었다. 넷째 칸 머리에 「방망이」라고 적었다. 그 칸에 들어갈 것은 한 줄뿐이었다. 켈리는 그래도 지우지 않았다.
「로엔」 줄의 지팡이 칸에 「실금」이라고 적었다. 「품팔이 마을」 줄의 지팡이 칸에는 「금」이라고 적고, 아저씨 칸에 바르트의 줄을 그대로 옮겼다. 목 오른쪽. 쌀알.
「모라」 줄에서 켈리의 연필이 다시 멈췄다. 모라에서 켈리는 마법을 걸지 않았다. 늪에서 젊은이를 끌어낼 때 올라온 것을 도로 내려보냈다. 켈리는 켈리 칸에 「0」이라고 적었다. 0을 적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적고 나서 오래 보았다. 자기 칸에 0이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그건 내 칸이야."
바르트가 뒤에 와 서 있었다. 켈리의 어깨 너머로 아저씨 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저씨 거 맞잖아요."
"내가 낸 거지. 자네가 낸 게 아냐."
"제 일로 난 거예요."
"그래도 내 몸이야."
"그래서 칸을 따로 그었어요."
바르트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서 있다가 켈리 옆에 앉았다. 앉으면서 목덜미에 손이 갔다가 내려왔다. 둘은 한동안 둑 아래 물을 보았다. 물이끼가 저울이 가라앉은 자리를 고르게 덮고 있었다.
"…그러지."
바르트가 말했다. 그것뿐이었다.
니카가 지나가다 멈춰 서서 노트를 넘겨다보았다. 니카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가 멈췄다.
"그건 셈이 아니네요."
"그럼 뭐예요."
"장부요. 셈은 답이 하나 나와요. 장부는 칸이 늘어요."
니카가 그렇게 말하고 지나갔다. 켈리는 칸을 세었다. 넷이었다. 어제는 하나였다.

이튿날 소아레에 닿은 것은 해 질 녘이었다.
다리 위에서 아이들이 먼저 보았다. 「왔다!」 하는 소리가 다리를 따라 마을 안쪽으로 건너갔다. 아이 하나가 니카에게 달려와 빈손을 내밀어 보였다. 감사 결의안의 「아직」이 그사이에 또 늘었다고 했다. 아이는 이번에는 줄 거라는 쪽에 조개껍데기를 다 걸었다가 다 잃었다고 했다. 니카가 그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다음엔 느는 쪽에 걸어."
니카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어느 외는 이에게 외워질지 몰랐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리 저쪽으로 뛰어갔다.
큰 마루에 등잔이 올라 있었다. 회의 중이었다. 배가 장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동안 마루 위에서 외는 소리가 내려왔다. 박자가 느리고 고르게 떨어졌다. 일행 안건 스물한째 회의를 외는 중이었다.
"일행이 없소. 아직."
외는 이가 그 두 마디를 외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열아홉째도 스물째도 스물한째도 그 두 마디였다. 넷이 다 그랬으므로 외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행이 자리를 비운 회의는 일행이 있던 회의보다 짧았다.
그리고 스물둘째 회의가 열렸다. 외는 이들이 차례로 돌았다.
"일행이 없소."
배는 바로 그 마루 밑에 매여 있었다. 오벨이 입을 열었다.
"있—"
린이 오벨의 소매를 잡았다.
"차례 아니에요."
"…저희가 지금 여기 있지 않습니까."
"회의에선 없어요. 들어온 게 아직 안 외워졌으니까요."
오벨이 입을 다물었다. 마루 위에서 외는 이들이 하나씩 「아직」이라고 했다. 스물둘째 회의는 일행이 마루 밑에 앉아 있는 채로 일행이 없는 회의로 끝났다. 니카가 소리 없이 무언가를 셌는데, 다 세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켈리는 노트에 칸을 하나 더 그었다. 다섯째 칸 머리에 「외는 이」라고 적었다. 그 아래에 「14」라고 적고, 옆에 「22」라고 적었다. 오벨에게 물으니 스물두 회의를 외는 데는 내일 하루 낮이 꼬박 갈 거라고 했다. 켈리는 그 옆에 「하루」라고 적었다. 열넷이 하루씩이었다. 켈리 일로였다.

이튿날 아침 린은 마루를 쓸었다. 다 쓸고 나서 오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할머니. 차례 주세요."
"무엇을 말하려고."
린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닫지 않았다.
"어귀에서 본 거요. 할머니가 못 본 거요."
오나의 손이 그물코에서 멈췄다. 오래 멈춰 있었다. 그물코 하나를 다 기울 만한 시간이 지났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저녁에 주마."
린이 고개를 숙였다. 숙인 채로 오래 있었다. 일어나 빗자루를 집었다. 다 쓴 마루를 다시 쓸지는 않았다. 빗자루를 벽에 세워 두고 마루 끝에 앉아 다리를 물 위로 늘어뜨렸다. 켈리가 문 옆에서 그것을 보았다. 린의 발끝이 물을 한 번 찼다. 물방울이 반딧불이 대신 아침 햇빛을 받았다.
외는 이들이 큰 마루로 모이기 전에 린이 켈리를 불렀다. 둘이 마루 끝에 나란히 앉았다. 린이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리고 등을 폈다. 큰 마루에서 하는 자세였다.
"들어 봐. 이상하면 말해 줘."
"…난 몰라."
"그래도."
린이 하려는 말을 했다. 처음에는 길었다. 어귀에 가기까지의 일부터 나왔고 숲지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가 순서 없이 나왔다. 린이 말을 멈추고 한참 물을 보다가 다시 했다. 두 번째에는 어귀에 가기까지가 빠졌다. 세 번째에는 「그러니까」가 빠졌다. 네 번째에 린은 열여드레 전 큰 마루에서 소리쳤던 말을 붙여 보았다. 주문, 맨발, 사례, 회의. 「그게 왜」에서 목소리가 올라갔다. 린이 입을 다물었다.
"…이상해?"
"올라갔어."
"알아."
린이 다섯 번째로 했다. 「그게 왜」를 뺐다. 목소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같은 말이었는데 다른 말이었다. 린이 손목의 장신구를 내려다보았다. 세지 않았다.
"이거면 돼."
켈리는 무엇이 되는지 몰랐다. 다만 다섯 번째 말이 첫 번째 말보다 짧았고, 짧아진 만큼 무거웠다.

일행 안건 스물셋째 회의는 아침에 시작했다.
스물두 회의를 외는 데 하루 낮이 갔다. 첫째 회의의 「…아직이요」가 나왔고, 바르트의 「제 입으로는 카르소 사람이에요」가 나왔고, 니카의 「…저요」가 나왔다. 일곱째 회의의 교관의 줄이 교관의 박자로 나왔다. 켈리는 그 줄을 다시 들으면서 이번에는 무릎 위의 손을 보지 않았다. 앞을 보았다. 열여덟째 회의의 「당신 술에도 빈 자리가 있소」가 나왔고 오나가 켈리에게 차례를 준 끄덕임이 나왔다. 끄덕임은 말이 아니었으므로 외는 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외웠다. 그다음에 넷이 다 「일행이 없소. 아직」인 회의가 나왔다. 스물둘째의 「일행이 없소」가 나올 때 오벨의 어깨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 하루 낮 동안 마을 사람들이 두 번 마루 끝에 생선과 빵을 올려놓고 갔다. 외는 이들은 외는 것을 멈추지 않고 번갈아 먹었다. 하나가 외는 동안 나머지 가운데 몇이 빵을 뜯었고, 틀린 데가 나오면 빵을 쥔 채로 손을 들었다. 일행은 둘레 바깥에 앉아 있었다. 바르트는 두 번 졸았고 두 번 다 「제 입으로는 카르소 사람이에요」가 나올 때 깼다. 오벨은 수첩에 회의 번호를 하나씩 적어 두고 외는 이가 그 회의를 다 외면 줄을 그어 지워 나갔다. 니카는 처음부터 끝까지 입술을 움직였다. 켈리는 빵을 둘 먹었다. 걸지 않았는데 둘을 먹었다. 앉아서 듣기만 하는 것도 배가 고팠다.
해가 졌다. 등잔이 올라왔다. 검은 탁자가 불빛을 먹었다.
오나가 입을 열었다.
"소아레 린. 차례요."

린이 일어섰다. 열여드레 전 일곱째 회의에서 일어섰던 그 자리였다. 그때는 언제 일어섰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다들 보았다. 린은 맨발로 마루를 디디고 섰고 두 손을 앞에 모았다. 손목의 장신구가 떨리지 않았다.
"경계의 숲 어귀에서 숲지기를 봤어요."
외는 이들이 들었다. 열넷이 같은 자세로 들었다.
"있었어요. 해가 지고 나서야 보였어요. 빛이 흐려서 해가 있으면 안 보여요. 어귀의 나무가 한쪽으로 누운 건 쓰다듬고 지나가서가 아니에요. 숲지기가 기대서예요. 오래 못 서요. 나무들이 나눠 진대요. 이백 해째요."
린이 숨을 한 번 쉬었다.
"사람 일에는 끼지 않기로 했대요. 숲을 길러서 사람이 못 들어오게 하는 데까지가 자기들 일이래요. 그래도 예의 바르게 청하면 조금은 된대요. 그래서 우리가 이슬을 안 맞았어요."
"그리고 대가는 끝나지 않는대요. 나눠 지면 견딜 수 있대요."
마루가 조용했다. 탁자 끝에서 하벨의 붓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 더 있어요."
린이 오나를 보았다. 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을 안 하는 건 남의 걸 빌리면서 소리 지르는 게 무례라서예요. 맨발인 건 가죽을 사이에 두면 아무것도 못 빌려서예요. 사례는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걸 줘요. 회의가 긴 건 아무도 남 대신 안 정해서예요."
열여드레 전과 같은 말이었다. 박자가 달랐다. 그때는 끝까지 가지 못하고 「그게 왜, 그게 왜」에서 끊겼다. 이번에는 끝까지 갔다.
"바깥은 이걸 잡술이라고 해요. 섞였다는 말이래요. 맞는 말이에요."
린이 앉았다. 앉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목의 장신구가 한 번 부딪쳤다가 멎었다.
"소아레 린. 외겠소."
오나가 말했다. 린을 보지 않고 앞을 보고 말했다. 켈리는 그 말을 들으면서 린의 손을 보았다. 린의 한 손이 다른 손목의 장신구를 덮고 있지 않았다.

회의가 이어졌다. 차례가 다시 오나의 왼쪽부터 돌았다.
"아직."
"아직."
쇠물의 외는 이 차례에서 물음이 나왔다.
"땅 없는 켈리. 이름을 붙였소."
"…아직이요."
쇠물의 외는 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넘겼다.
"아직."
"아직."
켈리는 무릎 위에 노트를 펴 놓고 있었다. 다섯째 칸에 「14」와 「22」와 「하루」가 있었다. 그 아래에 23을 적을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직」이 하나 나올 때마다 켈리의 엄지가 그 빈자리를 한 번씩 문질렀다. 넷째 아직에서 켈리는 그 아래에 24를 적을 자리도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아래도 비어 있었다. 맨 뒷장이었는데 칸은 아래로 얼마든지 내려갈 수 있었다.
켈리가 일어섰다.
차례가 아니었다.
일어서는 동안 켈리는 린을 보았다. 차례 아닌 데서 일어서는 것이 무엇인지 켈리에게 가르친 사람이 린이었다. 린이 켈리를 올려다보았다. 막지 않았다.
켈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 차례 아닌 말은 외지 않는다. 그 대신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지팡이를 들었다. 탁자 모서리를 살짝 두드리려고 했다. 차례를 청하는 데 말이 아닌 것이 쓰여도 되는지는 아무도 정해 두지 않았다.
켈리에게 살짝은 없었다.

쾅.
등잔이 한 번 뛰었다. 하벨의 붓이 탁자 끝까지 굴러갔다. 마루 밑에서 장대가 한 번 울었다. 외는 이 열넷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가 지팡이를 내려다보았다. 걸지 않았다. 걸지 않아도 그랬다. 켈리의 팔은 삼 년 동안 모래주머니를 지고 달린 팔이었다.
"…그건 어떻게 외오."
쇠물의 외는 이가 말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린이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어깨가 떨렸다. 오나가 그쪽을 보지 않았는데, 오나의 입꼬리 한쪽도 아주 조금 움직였다가 돌아갔다. 켈리가 쇠 테 아래를 엄지로 쓸어 보았다. 금은 벌어지지 않았다. 검은 탁자 모서리에 지팡이 끝만 한 자국이 하나 나 있었다. 늪에서 건져 올린 뒤로 몇 대째 그 위에서 회의를 해 온 탁자였다. 자국은 그 탁자에 처음 난 것이었다.

오나가 켈리를 보았다.
"땅 없는 켈리. 차례를 청한 거요."
"…예."
"말하시오."
켈리가 지팡이를 내렸다. 내리는 데에는 살짝이 필요 없었다.
"이 안건, 저희 거잖아요."
외는 이들이 들었다.
"남 대신 안 정한다고 했잖아요. 그럼 저희 건 저희가 정해도 돼요?"
누구도 막지 않았다. 켈리가 노트를 들어 보였다. 칸이 다섯 그어진 장이었다. 외는 이들은 글자를 읽지 못했다. 그래도 칸은 보였다.
"손님은 안 할게요."
마루가 조용해졌다. 마루 밑에서 니카가 고개를 들었다.
"손님은 열넷이 다 정해야 하잖아요. 그건 안 끝나요. 니카가 1할이래요."
마루 밑에서 니카가 고개를 도로 숙였다.
"대신 오라는 데 갈게요. 오라는 건 마을마다 정하면 되잖아요. 남 대신 정하는 거 아니잖아요."
켈리가 말을 멈췄다.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켈리는 고개를 숙였다. 숙이는 것은 린에게 배운 각도였다. 드는 것은 이번에도 늦었는데, 늦은 만큼 외는 이들이 켈리의 정수리를 오래 보았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차례가 다음 외는 이에게 있었는데 그 외는 이가 입을 열지 않았다. 「아직」이라고 할 자리였다. 그런데 무엇에 대해 아직인지가 없어졌다. 손님으로 둘지 말지를 묻던 안건에서 손님이 손님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모라의 외는 이가 입을 열었다. 차례가 그였다. 얼굴 한쪽의 그을린 얼룩이 등잔 쪽을 향해 있었다.
"…모라는 청하오."
그것뿐이었다. 모라의 외는 이는 차례를 넘겼다.
"쇠물도 청하오."
쇠물의 외는 이가 말했다.
"저울을 한 번 더 보고 싶소. 그리고 그 소리를 어떻게 외는지 아직 모르겠소."
그다음 외는 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하지 않았다. 청하지 않는 것도 그 마을이 정하는 일이었다. 다음 외는 이가 청했고, 그다음은 하지 않았고, 그다음은 청했다. 울음늪의 외는 이가 청하면서 니카 쪽을 보았다. 니카가 왼 손목을 소매 속으로 넣었다.
차례가 늪 북쪽 끝 마을의 외는 이에게 갔다. 윗늪이라고 린이 귓속말을 했다. 경계의 숲과 산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는 데라고 했다. 등잔 빛이 겨우 닿는 자리에 앉은 늙은이였는데, 회의 내내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윗늪도 청하오."
외는 이가 잠깐 쉬었다.
"짐승이 앓소.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소. 본 것이니 외오."
마루 밑에서 무엇이 움직였다. 널빤지 틈으로 보이던 고슈의 등이 펴졌다.
차례가 오나에게 돌아왔다. 오나가 무릎 위의 손을 들어 그물을 집었다. 집어 놓고 깁지는 않았다.
"일행 안건. 손님은 정하지 않소. 청은 마을마다 하오."
오나가 한 번 쉬었다.
"끝났소."

소리가 바로 나지 않았다. 외는 이 열넷이 그 말을 외느라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끝났소」는 스물세 회의 동안 처음 나온 말이었다.
마루 밑에서 니카의 입술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짧았다.
"…올해 안이네요."
"1할이 나왔군."
바르트가 말했다.
"1할도 나오면 나온 거예요."
오벨이 수첩을 폈다. 「일행 안건 — 종결. 당사자 결정. 청은 마을별.」 적고 나서 오벨은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으려다 말았다. 법률가는 그런 종결을 본 적이 없었다. 안건이 기각된 것도 가결된 것도 아니었다. 안건이 스스로 일어나서 다른 데로 간 것이었다.
하벨이 탁자 끝까지 굴러간 붓을 집어 왔다. 붓끝을 다시 적시고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받는 곳이 어디인지 켈리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소리를 어떻게 외는지는 끝내 정해지지 않았다. 그 소리를 욀 다음 회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외는 이들이 하나둘 마루를 내려갔다. 모라의 외는 이는 켈리 앞을 지나가다 걸음을 늦추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쇠물의 외는 이는 탁자 모서리의 자국을 손끝으로 한 번 쓸고 갔다. 윗늪의 외는 이만 오래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올린 손을 끝까지 풀지 않았다. 등잔이 그 늙은 얼굴을 아래에서 비추었는데, 그 얼굴은 다른 외는 이들처럼 쉬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날 밤 켈리는 오나네 마루 끝에서 노트를 폈다.
다섯째 칸의 「22」 아래에 「23」이라고 적었다. 그 옆에 무엇을 적을지 생각하다가 「끝」이라고 적었다. 그러고는 맨 아래에 줄을 하나 새로 넣었다. 왼쪽 여백에 「소아레. 탁자」라고 적었다. 켈리 칸에 「0」이라고 적었다. 걸지 않았으므로. 지팡이 칸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금이 벌어지지 않았으므로. 다른 칸을 하나씩 내려다보다가, 칸 바깥 여백에 작게 「자국 1」이라고 적었다. 탁자의 칸은 긋지 않았다. 탁자는 실베인의 것이었다.
켈리 칸에 0이 둘이 되었다. 켈리는 그 둘을 한참 보았다.
바르트가 와서 노트를 달라고 했다. 켈리가 내밀자 바르트는 맨 뒷장을 펴지 않고 그 앞의 장을 폈다. 바르트의 장이었다. 바르트가 열일곱째 줄 끝에 연필로 무언가를 작게 적었다. 켈리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바르트가 노트를 덮어 다시 켈리에게 내밀었다.
"맨 뒷장은 자네 거야. 쓸 때마다 달라고 하게."
"…매번요?"
"매번. 찢어 주면 맞붙은 장까지 빠진다니까."
켈리가 노트를 받았다. 앞쪽에는 바르트가 스무 해 동안 먹고 사고 잔 것이 있었고, 그 뒤에 열일곱 줄이 있었고, 맨 뒤에 켈리의 다섯 칸이 있었다. 한 권이었다. 켈리는 바르트가 열일곱째 줄 끝에 무엇을 적었는지 넘겨 보지 않았다. 남의 칸이었다.
린이 옆에 와서 앉았다. 다리를 물 위로 늘어뜨렸다. 손목의 장신구를 세지 않았다. 열넷이었다.
"할머니가 외겠대."
"…응."
"내 말을. 다음에 아무 회의에서나 숲지기 얘기가 나오면 할머니가 내 말로 외는 거야. 소아레 린이 봤소, 하고."
린이 그렇게 말하고 물을 내려다보았다. 반딧불이가 떠다녔다. 하나가 떠오르면 물에 비친 것이 같이 떠올라서 둘로 보였다.
"이제 내 말도 남아."
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트를 덮지 않고 무릎 위에 펴 둔 채로 있었다. 칸은 다섯이었다. 아래로 얼마든지 내려갈 수 있었다.
마루 아래 장대 밑에서는 고슈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등잔이 다 꺼질 때까지 고슈는 북쪽을 보고 있었다. 윗늪의 외는 이가 짐승이 앓는다고 말한 뒤로 고슈는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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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능

 

**자플랜 왕국 · 북부군 사령부**


툰델에서 올라온 상보는 넉 장이었고 넉 장 모두 여백이 거의 없었다. 글씨가 작고 곧았으며 줄 끝이 한 번도 처지지 않았다. 숫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아라비아로 적혀 있었다. 이 상보를 쓴 사람은 묻는 자리에서 종이를 뒤적이지 않으려고 숫자를 외우고 다녔고, 외운 것을 종이로 옮길 때는 하나도 흘리지 않았다.
첫 장은 관측이었다. 관측 초소의 일지에는 정오에 적 마법사를 세는 칸만 있었고 그 칸은 넉 달 동안 12였다. 상보를 쓴 사람이 그 옆에 「교대」라는 칸을 새로 그었다. 이레 동안 그 칸에 적힌 교대는 세 번이었는데 셋 다 누가 쓰러진 뒤였다. 둘째 장은 계획과 경과였다. 노포 여섯 문이 일곱째 말뚝 앞을 2분에 한 발씩, 22시부터 4시 반까지 195발 쳤다. 일곱째는 예정보다 오래 버텼고 대신 여섯째가 비었다. 셋째 장은 돌파 뒤의 일이었다. 외골격 마흔 벌 가운데 손실은 한 벌이었고 무릎 관절이 포격에 맞아 터졌다. 진출은 12킬로미터에서 멈췄는데 멈춘 까닭도 적혀 있었다. 보병 본대가 예정보다 열네 시간 늦게 도착했고 그사이 외골격의 연료가 절반 아래로 내려갔다. 넷째 장은 줄마다 짧았다. 아군 손실과 회수한 쇠살의 수가 있었고 그 아래 운반차 정비 기록이 있었다. 정비 기록 가운데 한 줄은 이랬다.

「아홉째 운반차 우측 앞바퀴 매몰. 4분 지체.」

상보보다 하루 먼저 온 것은 소문이었다. 툰델 돌파를 알리는 한 줄짜리 급보가 사령부 안뜰로 들어온 것은 전날 해 질 녘이었고, 그 한 줄이 회랑 끝까지 퍼지는 데는 저녁 식사가 끝날 시간이면 충분했다. 장교 식당에서 누군가 잔을 들었다. 63년이라는 말이 몇 번 오갔고 그다음에 이름 하나가 오갔다. 판 카르소. 그 이름을 부른 사람들은 대개 젊었고 기계화 부대와 같은 막사를 써 본 적이 없었다. 란돌프는 식당 문 앞을 지나다가 그 이름을 들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 밤 그의 집무실 창 아래 안뜰에서는 등이 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집무실 창으로 든 볕이 책상 모서리에서 꺾였다. 의자 등에는 강철 흉갑이 걸려 있었고 그 위에 진홍 망토가 개켜져 있었다. 란돌프 그라이엔은 상보를 두 번 읽었다. 첫 번째는 빨랐고 두 번째는 셋째 장에서 오래 멈췄다. 보병 본대는 그의 것이었다. 보병은 외골격보다 느리다. 그리고 출동 명령서는 규정대로 작성되었고 규정대로 부관의 부서를 받았으며, 그 절차가 몇 시간을 먹는지는 하렐 이후로 그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가 상보를 내려놓고 서랍에서 다른 양식을 꺼냈다. 어전으로 올리는 전공 보고였다.
양식은 한 장이었고 칸이 여섯이었다. 일시, 장소, 지휘관, 투입 장비, 전과, 특기 사항. 어전에서 이 양식을 받는 사람은 앞의 다섯 칸을 훑고 여섯째 칸에서 멈춘다. 특기 사항은 한 줄이었다. 한 줄로 정한 사람은 없었으나 서른 해 동안 그 칸에 두 줄을 적어 올린 보고는 없었다.
일시와 장소는 금방이었다. 지휘관 칸에 그는 「툰델 방면 기계화 선봉대장 유리크 판 카르소」라고 적었다. 줄이지 않았다. 성을 빼지 않았고 직함을 낮추지도 않았다. 투입 장비 칸에는 「대공학원 제작 동력 외골격 40, 운반차 20, 노포 6」. 전과 칸에는 「툰델 결계선 돌파. 12킬로미터 진출 후 재정비」. 63년 만이라는 말은 적지 않았다. 그런 것을 적는 칸은 없었다.

특기 사항 앞에서 펜이 멈췄다.
문장이 둘 있었다. 둘 다 머릿속에서 이미 끝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하나는 「현장 지휘관이 적 결계형의 교대 공백을 관측하여 돌파 지점을 정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력 외골격이 결계를 통과함. 장비 성능 우수」였다.
둘 다 사실이었다. 그가 첫 문장에서 걸린 것은 낱말 하나였다. 관측. 유리크가 본 것은 남색 옷이 말뚝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 옷 안의 사람이 지쳐 있다는 것은 본 것이 아니라 셈한 것이었다. 셈은 맞았다. 다만 셈이 맞았다는 것과 그것을 보았다는 것은 다른 일이었고, 보고서에는 본 것을 적는다. 그는 서른 해 동안 그렇게 적어 왔다. 둘째 문장에는 셈이 없었다. 쇠살이 결계를 넘어갔고 외골격이 그 뒤를 따라 넘어갔다. 그것은 마흔 명이 보았다.
하렐의 밤에 그는 그것을 생각으로 떠올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떠올렸다. 장비가 특기 사항에 오르면 그 장비를 만든 기관에 사본이 간다는 규정이 있었고 그는 그 규정을 알았다. 안다는 것과 그것 때문에 쓴다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그는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한동안 붙들고 있었고, 붙들고 있는 동안 펜 끝의 먹이 말랐다. 그가 펜을 다시 먹에 찍었다.

「동력 외골격이 결계를 통과함. 장비 성능 우수.」

기계의 성능이 좋았다는 말이었다. 그 문장에 거짓은 한 글자도 없었다. 빠진 것이 있었을 뿐이다. 열네 시간도 그 문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열네 시간을 적을 칸은 있었다. 특기 사항이었다. 그 칸에는 이미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상보 넷째 장의 4분은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았다. 4분은 전공 보고에 오를 크기가 아니었다. 그 4분 동안 누가 바퀴 앞에 있었는지는 상보를 쓴 사람도 적지 않았다.
란돌프가 서명했다. 서명하고 나서 그는 의자 등에 걸쳐 둔 흉갑을 집어 무릎에 놓고 마른 천으로 닦았다. 아침에 이미 닦은 것이었다. 강철이 등불을 받아 날을 세웠고 그 위에 각진 턱과 짧게 깎은 흰머리가 비쳤다. 그는 그 얼굴을 보지 않고 닦기만 했다.

사본이 왕도의 대공학원에 닿은 것은 엿새 뒤였다. 북부군의 붉은 봉랍이 찍힌 봉투였고, 서기가 그것을 조달청 납품 명세서와 부품 견적서 사이에 끼워 가져왔다. 대공학원으로 오는 우편은 대개 그런 것들이었다. 무엇을 몇 개 만들었고 얼마가 들었으며 언제까지 더 만들어야 하는지를 묻는 종이들이었다. 봉랍을 뜯는 칼이 책상에 따로 있었는데 케른은 그것을 찾지 않고 손톱으로 뜯었다.
비토르 케른의 방은 동관 맨 끝에 있었다. 창이 북쪽으로 나서 하루 내내 빛이 고르게 들었고, 그 빛 아래 작업대 위에 쇠 관절 하나가 해체된 채 놓여 있었다. 선반에는 손바닥만 한 모형들이 늘어서 있었다. 무릎, 팔꿈치, 발목. 사람의 몸에서 접히는 자리를 쇠로 다시 만든 것들이었다. 방 안에 기름 냄새와 먹 냄새가 같이 배어 있었다.
케른은 창가에 서서 사본을 읽었다. 창백하고 마른 사내였다. 짙은 감색 장의의 소매가 손등까지 내려왔고 손가락 마디마다 먹과 쇳가루가 배어 있었다. 목에는 얇은 천을 감았는데 여름에도 풀지 않았다. 안경 너머의 눈이 여섯째 칸에서 멈췄다.
그는 그 줄을 두 번 읽고 의자로 가서 앉았다. 앉아서 한 번 더 읽었다. 서른한 해 동안 그는 전공 보고의 사본을 여러 번 받았다. 받은 것은 대개 손실 보고였다. 무엇이 부서졌고 몇 대가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 값이 얼마인지를 알리는 종이들이었다. 특기 사항 칸에 대공학원이라는 이름이 오른 종이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사본을 들고 아래층 공방으로 내려갔다. 공방은 반지하였고 화로 셋이 늘 달아 있어서 여름에는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흘렀다. 달군 쇠 냄새와 기름 탄 냄새가 천장에 고여 내려오지 않았다. 벽에는 실패한 관절 시편들이 줄에 꿰여 매달려 있었는데, 접히는 각도가 하나씩 조금씩 달랐다. 아홉 해 동안 맞추지 못한 각도들이었다. 일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카르소 관구에서 올라온 장인들이었고 그들의 말에는 아직 남쪽 억양이 남아 있었다. 케른이 공방장을 불러 여섯째 칸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공방장은 글을 천천히 읽는 사람이었다. 다 읽고 나서 그가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이미 닦은 손이었다.
"…우리 거요?"
"우리 거요."
공방장이 종이를 옆 화로의 장인에게 넘겼고, 종이는 그렇게 공방을 한 바퀴 돌았다. 종이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망치 소리가 하나씩 멎었다가 다시 났다. 다시 날 때는 전보다 조금 빨랐다. 케른은 그 소리를 등 뒤에 두고 위층으로 올라왔다.

그가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두 달 전 어전에서 쓰던 그 수첩이었다. 넘기다가 세 줄이 적힌 장에서 손을 멈췄다.

습지. 중장비 불가.
사람으로 800미터.
400.

그 아래에 그가 한 줄을 더 적었다.

툰델. 기계가 넘었다.

네 줄을 위에서 아래로 읽으면 하나의 생각이 되었다. 사람으로 밀면 800미터에 400이 들고, 기계로 밀면 63년 묵은 선이 하룻밤에 넘어간다. 그러므로 더 나은 기계가 필요하다. 그가 모으는 문장에 그 줄이 꼭 들어맞았다. 들어맞는 줄은 오래 기다려야 오는 법이었다.
지휘관 칸도 그는 읽었다. 아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 앞에도 그와 같은 세 글자가 붙는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는 그 칸을 읽고 지나갔다. 그가 모으는 문장에 그 칸은 들어가지 않았다. 기계가 인정받으면 기계를 만든 손들이 인정받고, 그 손들은 대부분 카르소 관구에 있었다. 그는 서른한 해를 그렇게 믿었고, 오늘 받은 종이는 그 믿음을 처음으로 문서로 확인해 준 것이었다. 같은 종이의 다른 사본을 사흘 먼저 받아 읽은 카르소 사람이 툰델에 하나 있었다. 그 사람에게 그 종이가 무엇이었을지를 케른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까닭이 종이 위에 없었다.
그가 손실 칸으로 눈을 옮겼다. 한 벌. 무릎 관절. 그가 메모지를 당겨 공방에 보낼 쪽지를 썼다. 「무릎 관절 외판 보강. 포격 맞은 각도 확인 요망.」 쓰고 나서 작업대 위의 해체된 관절을 보았다. 사람의 무릎이 접히는 각도로 접히게 만든 것이었다. 그 각도를 맞추는 데 그는 아홉 해를 썼다.
그 관절 안에도 무릎이 하나 있었다. 포격이 외판을 뚫고 들어갔을 때 그 안의 무릎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손실 칸에 적혀 있지 않았다. 손실 칸은 벌로 세었다. 케른은 쪽지를 접어 서기에게 넘기고 다시 수첩을 폈다. 넷째 줄 아래가 비어 있었다. 그가 그 빈자리를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손끝의 쇳가루가 종이에 흐린 회색 줄을 남겼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목에 감은 천을 고쳐 매고 창가로 갔다. 북쪽 하늘은 여름인데도 맑고 차가웠다.

**벨류엔 마법왕국 · 북부전선 총사령부**


툰델의 줄이 12킬로미터 물러난 이튿날 아침, 칼멘 드 바슈의 책상에 쌓인 서류는 쉰여덟 장이었다. 맨 위가 툰델 구간장의 보고였다. 새 자리의 말뚝 열둘. 결계형 여덟. 그 아래에 집검관들의 진술서가 묶여 있었다. 진술은 서로 조금씩 달랐으나 한 가지는 같았다. 노포가 밤새 일곱째 말뚝 하나만 쳤다는 것이었다. 저쪽은 어느 말뚝 뒤에 교대가 오지 않는지 알고 있었다.
칼멘이 진술서를 내려놓았다. 셈을 하는 사람이 저쪽에도 있었다.
마법청 서기들은 그를 「셈하는 원수」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비꼬는 말이었는데 그가 개의치 않았으므로 그대로 굳었다. 예순둘이었다. 그가 빈 종이를 한 장 당겨 숫자를 적었다. 말뚝 열둘에 교대 셋이면 서른여섯이었고 교대 둘이면 스물넷이었다. 지금 있는 것은 여덟이었다. 서부 전선에서 넷을 빼 올 수 있었다. 서부의 필요치를 깎으면 그렇게 된다. 그러면 열둘이었다. 말뚝 열둘에 결계형 열둘. 그가 그 옆에 0을 적고 동그라미를 쳤다. 예비가 없다는 뜻이었다. 툰델이 뚫리기 전과 같은 숫자였고, 저쪽은 그 숫자를 세는 법을 이미 알았다.

나머지를 메울 곳은 둘이었다. 하나는 육성소였다. 열두 살에 하는 분류를 열한 살로 당기면 한 해치가 한꺼번에 나온다. 칼멘은 그 줄을 적지 않았다. 배치 나이를 열넷으로 올리자는 종이를 열네 해 동안 여섯 번 쓴 손이었다. 그 손으로 열하나를 적을 수는 없었다.
다른 하나는 그날 아침 서류 더미 중간에 끼어 있었다. 북부 후방 요양소의 주간 보고였다. 그는 그것을 매주 받았고 매주 거기 딸린 급식 청구서에 서명했다. 청구서의 숫자는 몇 달째 같았다. 스물넷. 하루 두 끼. 그 숫자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거기 누운 아이들이 일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뜻이었고, 그는 그것을 좋은 숫자로 읽어 왔다. 그날 보고에는 이런 줄이 있었다.

「보행 불가 결계형 11. 상체 이상 없음. 출력 측정 정상 범위.」

칼멘이 그 줄을 오래 보았다. 그러다가 한 문장이 그에게 왔다. 결계형이 서서 하는 일은 없었다. 결계형이 하는 일은 말뚝 앞에 앉아 테에 손을 얹는 것이었다.
그는 그 셈을 세 번 했다. 왕도로 가는 길에 늘 하던 대로였고, 세 번 다 같은 숫자가 나왔다. 열둘에 열하나를 더하면 스물셋. 교대 둘에 하나가 모자랐다. 모자란 하나는 아직 걷는 아이 하나가 하루에 두 번 앉으면 되었다.

그가 책상 왼쪽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종이가 두 장 있었다. 하나는 여러 번 접었다 펴서 접힌 자리가 해진 종이였고 아래쪽에 다른 종이가 이어 붙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반으로 접힌 깨끗한 종이였다. 배치 나이를 올리자는 여섯 번째 종이였다. 다음 분기 회의까지 스무 날 남짓 남아 있었고, 그때 숫자만 고쳐 일곱 번째로 다시 쓸 생각이었다.
그가 해진 쪽을 꺼냈다. 사 년 동안 그가 서명한 번호들이 빼곡했다. 요양소 보고의 명부를 그 옆에 펴 놓고 위에서부터 대조했다. 열하나가 전부 거기 있었다. 결계 4호는 이어 붙인 종이의 끝에 있었다. 석 달 전 하렐 방면 제3 보루에서 업혀 나온 아이였다. 그 아이의 소모 통지서에 서명할 때 그는 그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알면서 서명했다. 걷지 못하는 결계형은 소모였다. 그것이 규정이었고 그 규정은 아이를 아끼는 규정이었다. 걷지 못하는 아이를 다시 내보내지 않게 하려는 규정이었다.
그가 새 종이를 꺼냈다. 서기를 부르지 않았다.

「결계형 전원 투입. 1. 서부 전선 결계형 4를 툰델로 전속한다. 2. 북부 후방 요양소 결계형 11을 툰델 예비로 재배치하며 이송은 들것으로 한다. 3. 집검관은 마법사 2에 1을 둔다.」

칼멘 드 바슈가 처음 쓴 소모 명령이었다. 그는 열네 해 동안 마법사가 덜 죽는 자리를 골라 배치해 왔고, 그것이 그가 아끼는 방식의 전부였다. 그 방식으로는 툰델의 숫자가 맞지 않았다. 맞지 않는 숫자를 맞추는 방법을 그는 방금 찾았고, 그 방법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았다. 그가 서명했다.
부관이 들어와 종이를 받았다. 받아서 읽는 동안 부관의 눈이 둘째 줄에서 한 번 멈췄다.
"…들것이라고 적으셨습니다."
"그렇게 적었네."
부관이 더 묻지 않고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 칼멘은 왼쪽 무릎을 한 번 짚고 일어났다가 도로 앉았다. 일어나서 하려던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서명하고 나서 그는 해진 종이를 다시 펼쳤다. 같은 번호에 두 번 서명한 것은 처음이었다. 두 번째를 적을 자리를 따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는 열한 개의 번호 옆에 짧은 줄을 하나씩 그었다. 다 긋고 보니 그 줄들이 집검관이 칼집에 새기는 홈과 닮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오래 보지 않고 종이를 접었다. 여섯 번째 종이는 꺼내지 않았다. 서랍을 닫았다.
그 열하나는 다음 달 마법청 집계에서 소모 칸을 떠나 배치 칸으로 옮겨 갔다. 칼멘 드 바슈가 처음으로 소모를 명령한 달은, 장부로는 소모가 열하나 줄어든 달이었다.

북부 후방 요양소는 강가의 옛 곡물 창고였다. 지붕이 높고 창이 작아서 아침 해가 들어오면 빛이 바닥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중간쯤에서 먼지에 걸려 멈췄다. 침상이 두 줄로 스물넷 놓여 있었다. 거기 누운 아이들은 대부분 결계형이었다. 다리부터 무너지는 것은 결계형뿐이었기 때문이다.
창고에는 냄새가 고여 있었다. 곡식 냄새가 아직 들보에 배어 있었고 그 위에 약초 달인 냄새와 오래 빨지 못한 이불 냄새가 겹쳤다. 하루에 두 번 죽이 왔고 이레에 한 번 의무관이 와서 무릎을 두드려 보고 갔다. 두드려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대개 말이 없었다. 말을 할 일이 없었고, 누가 무엇을 하든 하루가 같은 길이로 지나갔다.
결계 사호는 왼쪽 줄 다섯째 침상에서 붕대를 감고 있었다. 손은 멀쩡했으므로 손이 하는 일이 주어졌다. 전선으로 나가는 붕대를 감았고, 다 감은 것은 열 개씩 묶어 바구니에 넣었다. 열여섯이었다. 셋째 달 열아흐렛날 하렐 방면 제3 보루에서 세 번째 결계가 무너질 때 같이 주저앉았고, 그 뒤로 무릎 아래가 제 무게대로만 움직였다. 석 달 가까이 그가 본 것은 이 창고의 천장이었다. 들보가 몇 개인지는 첫 주에 다 세었다. 결계 사호라는 번호는 제3 보루에서 이미 다른 아이에게 넘어가 있었다. 이 창고의 장부에서만 그 번호가 아직 그의 것이었다.
"결계 사호."
문가에서 서기가 장부를 들고 번호를 불렀다. 점호 시각이 아니었다.
"예. 알겠습니다."
대답이 먼저 나갔다. 무엇을 알겠다는 것인지는 그 뒤에 들었다. 서기가 번호를 열하나 불렀고 열하나가 같은 대답을 했다. 다 부르고 나서 서기가 장부를 덮은 채 한 줄을 더 읽었다. 툰델 예비로 재배치. 이송은 들것. 정오 출발.
결계 사호는 감던 붕대를 끝까지 감았다. 감고 나서 묶었다. 열 개를 채우지 못한 묶음이 바구니 옆에 남았다. 그가 그 묶음을 보다가 왜 자기가 불렸는지를 알았다. 알아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계형이 서서 하는 일은 없었다. 열두 살 때 교관이 처음 가르쳐 준 것 가운데 하나였다.

정오에 병사 둘이 들것을 들고 들어왔다. 하나가 어깨 밑을 받치고 하나가 무릎 밑을 받쳐 침상에서 들것으로 옮겼다. 옮기는 손이 서툴렀다. 사람을 이렇게 옮겨 본 적이 없는 손이었다. 수레 바닥에 짚이 깔려 있었고 들것 열하나가 그 위에 나란히 눕혀졌다. 수레가 움직이자 하늘이 흔들렸다. 석 달 가까이 만에 보는 하늘이었다. 초여름이었다. 길가의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고 있었고, 바람이 지나가면 이삭 끝이 한쪽으로 쓰러졌다가 일어났다. 옆 들것의 아이가 그것을 보고 무어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결계 사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레는 이틀을 굴렀다.
첫날 밤 수레는 어느 마을 어귀에 섰다. 우물가에 있던 사람 몇이 이쪽을 보았다. 짚 위에 들것 열하나가 나란히 누워 있었고, 남색 옷 열하나의 가슴마다 은빛 문장이 달빛을 받았다. 우물가의 여자가 물동이를 내려놓고 한참 보다가 옆에 선 아이의 손을 끌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문장이 무엇인지 이 일대 사람들은 알았다. 그 문장 아래 누운 것이 아이라는 것은 그날 처음 보았을 것이다. 결계 사호는 들것 위에서 그 여자의 등을 보았다. 문이 닫힐 때까지 보았다.
툰델의 새 자리에 닿은 것은 사흘째 해 질 녘이었다. 흙둑은 절반쯤 올라가 있었고 공병들이 아직 흙을 지고 있었다. 새로 판 흙은 검고 축축했으며 낮 동안 볕을 받은 겉만 하얗게 말라 있었다. 삽이 흙에 박히는 소리가 어둠이 내릴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말뚝 열둘이 500미터마다 박혀 있었고 말뚝마다 남색이 하나씩 앉아 있었다. 들것 열하나는 흙둑 뒤 교통호 바닥에 한 줄로 내려졌다. 그날 밤 그들은 거기서 잤다. 교대는 6시였다.
교통호 바닥은 등에 차가웠다. 위로 좁게 잘린 하늘에 별이 많았다. 결계 사호는 잠들지 않고 그 별을 보다가 흙둑 너머에서 이따금 건너오는 소리를 들었다. 쇠가 쇠에 닿는 소리였고 멀었다. 석 달 전 제3 보루에서 들은 것과 같은 종류의 소리였는데 그때보다 무거웠다.
6시가 되기 조금 전에 병사 둘이 와서 들것을 들었다. 들것이 흙둑을 따라 동쪽으로 움직였다. 하늘이 동쪽부터 잿빛으로 묽어지고 있었다. 병사들이 셋째 말뚝 뒤의 구덩이 앞에서 섰다. 구덩이는 어른 하나와 아이 하나가 들어가면 꼭 차는 크기였는데 그 안에 이미 둘이 있었다. 말뚝에 손을 얹고 앉은 남색 하나와 그 뒤에 선 집검관 하나였다. 집검관은 마흔 남짓한 사내였고 사흘쯤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그가 구덩이 턱에 무릎을 꿇고 들것에서 결계 사호를 받아 내렸다. 내려서 말뚝 옆에 앉히고 두 다리를 손으로 접어 앉은 자세를 맞추었다. 다리는 접히는 대로 접혔다.
"아르노 키스다. 넷째 말뚝의 십일호도 내가 맡는다."
"예. 알겠습니다."
집검관 하나에 마법사 하나라고 규정에 적혀 있었다. 그 규정 아래에 이번 달부터 단서가 하나 붙었다. 둘에 하나. 아르노 키스는 그 단서가 붙은 첫 집검관들 가운데 하나였다. 칼은 그의 허리에 있었다.

말뚝은 허리 높이의 참나무였고 머리에 잿빛 테가 둘려 있었다. 후방 창고에서 실어 온 묵은 말뚝이었다. 테 위에 먼저 앉은 아이의 손이 얹혀 있었다. 서부에서 온 아이였다. 결계 사호보다 한두 살 어려 보였고 손등이 터서 갈라져 있었다. 결계 사호가 그 손 옆에 자기 두 손을 얹었다. 손 넷이 잠깐 테 위에 같이 있었다. 그다음에 둘이 떨어졌다. 서부에서 온 아이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결계 사호의 다리를 한 번 보았고, 눈을 돌렸고, 구덩이를 나가 흙둑 뒤로 걸어갔다. 걸어갈 수 있는 다리였다.
테에는 손바닥 둘이 놓이는 자리만 반들반들했다. 결계 사호의 손바닥이 그 자리에 맞았다. 그 자리를 닳게 한 손들도 대개 이만했을 것이다. 팔 안쪽이 뜨거워졌다. 열이 손목으로 내려가 테로 빠져나갔고, 빠져나간 것이 말뚝 양옆으로 길게 번졌다. 석 달 가까이 만이었는데 몸이 순서를 기억하고 있었다. 갈비뼈 안쪽이 익숙한 무게로 한 번 눌렸다. 넷째 말뚝 쪽에서 십일호가 이쪽을 보았다. 기침을 한 번 하고 고개를 돌렸다. 동쪽이 밝아 오면서 가슴의 은빛 문장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결계가 받은 것은 세운 사람의 몸으로 간다. 결계형은 대개 다리부터 무너졌다. 다리가 이미 무너진 결계형에게 그다음 것이 어디로 가는지는 교범에 적혀 있지 않았다.

**자플랜 왕국 · 툰델 방면 기계화 선봉대**


선봉대 지휘소는 벨류엔이 버리고 간 흙둑 뒤에 있었다. 교통호를 넓혀 지붕을 얹은 것이라 천장이 낮았고, 흙벽에서 마른 흙이 이따금 부스러져 탁자 위에 떨어졌다. 지휘소 입구 옆에 말뚝 하나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 여섯째 말뚝이었다. 벨류엔은 물러나면서 말뚝을 뽑아 가지 않았다. 뽑을 시간이 없었는지 뽑을 까닭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병사들은 그 말뚝에 외투를 걸었다. 잿빛 테의 반들반들한 자리에 외투 깃이 걸려 있었다.
란돌프의 보고서 사본은 사흘 뒤에 툰델 지휘소에 닿았다. 유리크 판 카르소는 그것을 선 채로 읽었다. 여섯 칸을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휘관 칸에 그의 이름이 줄지 않은 채 적혀 있었다. 투입 장비 칸에 대공학원이 있었다. 특기 사항 칸에 한 줄이 있었다.
그는 그 줄을 다시 읽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고칠 데를 찾는 눈이었다. 찾지 못했다. 외골격은 결계를 통과했고 성능은 우수했다. 그 종이에는 거짓이 한 군데도 없었고, 그가 그 종이에서 찾아낸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하렐 때의 종이 두 장이 접힌 채 들어 있었다. 전령의 발송 기록과 「전령 도착 지연」이 적힌 보고서 사본이었다. 그가 새 종이를 그 위에 얹고 서랍을 닫았다. 닫으면서 왼팔의 회색 띠를 한 번 고쳐 맸다. 생각 없이 나온 동작이었다.
그다음에 그는 자기 상보의 사본을 꺼내 넷째 장을 폈다. 아홉째 운반차 우측 앞바퀴 매몰. 4분 지체. 4분은 그가 외운 숫자였다. 운반차가 빠져나오는 데 걸린 시간을 그는 말 위에서 쟀고 그 숫자를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그 4분 동안 바퀴 앞에 누가 있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도 보지 않았다.
부관이 들어와 사령부에서 돌아온 전령의 말을 전했다. 돌파 소식이 닿던 날 저녁 사령부 장교 식당에서 잔을 든 사람들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판 카르소라는 이름이 여러 번 나왔다는 것이었다. 부관은 그것을 좋은 소식으로 전했다. 유리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랍을 한 번 더 열어 맨 위의 종이를 보았다. 잔을 든 사람들의 말은 그 종이 어디에도 없었다. 종이에 없는 것은 다음 어전에 올라가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하렐에서 배웠고 툰델에서 한 번 더 배웠다.
그날 저녁 지휘소를 나서다가 그가 여섯째 말뚝 앞에서 섰다. 누군가의 외투가 걸려 있었고 그 깃 아래로 잿빛 테의 반들반들한 자리가 보였다. 손바닥 둘이 놓이는 자리였다. 자리가 작았다. 그는 자기 손을 거기 대 보지 않았다. 대 보지 않아도 맞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기름때가 밴 장갑 손가락이 한 번 오므라졌다가 펴졌다. 그가 말뚝을 지나 둔덕 쪽으로 걸어갔다.

이튿날 새벽 그는 망원경을 들고 둔덕에 엎드렸다. 놋쇠 통이 밤이슬에 젖어 차가웠다. 남쪽으로 1킬로미터쯤에 벨류엔의 새 흙둑이 보였다. 아직 낮았다. 갓 판 흙이라 옛 흙둑보다 색이 검었고, 그 앞에는 맨땅이 없었다. 풀이 흙둑 밑동까지 무릎 높이로 서 있었다. 말뚝 열둘이 서 있었고 말뚝마다 남색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열둘에 열둘이었다.
6시에 흙둑 뒤의 교통호에서 남색이 움직였다. 그가 망원경을 그쪽으로 옮겼다. 교대였다. 다만 걸어서 오지 않았다. 병사 둘이 무언가를 들고 왔고 그 위에 남색이 누워 있었다. 누운 남색의 가슴에서도 은빛 문장이 막 떠오른 볕을 받아 번쩍였다. 문장은 서 있는 남색의 것과 똑같이 컸다. 들것이 말뚝 뒤의 구덩이로 내려갔고, 잠시 뒤 다른 남색이 구덩이에서 걸어 나와 남쪽으로 갔다. 망원경이 닿는 말뚝 넷에서 그는 그런 것을 넷 보았다.
그가 일지를 펴고 교대 칸에 적었다. 6시. 교대 4. 적고 나서 그 옆에 한 낱말을 더 적었다.

들것.

그 칸에 숫자가 아닌 것을 적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적지 않았다. 적을 수 있는 것이 그 낱말뿐이었다. 그날 오후 그는 노포 한 문을 돌려 셋째 말뚝 앞으로 한 발을 쏘게 했다. 쇠살이 풀밭 위를 날아가다가 흙둑 앞 허공에서 멈췄고, 그 자리에 떨어졌다. 날은 상하지 않았다. 떨어진 자리 둘레의 풀은 아직 서 있었다. 툰델의 맨땅도 처음에는 그렇게 한 발이었다.

 

차례


소아레의 집들은 밤새 조금씩 움직였다.
장대 위에 지은 집이라 마루 밑으로 물이 드나들었고, 물이 드나들 때마다 장대가 아주 조금 기울었다가 돌아왔다. 누워 있으면 그것이 등으로 왔다. 바르트는 눕자마자 잠들었고 니카는 뒤척이다 잠들었으며 오벨은 안경을 놓을 자리를 세 번 바꾼 뒤에 잠들었다. 켈리는 문 옆에서 지팡이를 안고 누워 있었다. 바닥이 기울 때마다 눈을 떴다. 막사 바닥은 기울지 않았다. 참호 바닥도 기울지 않았다. 켈리가 아는 바닥은 전부 가만히 있었다.
날이 밝아 올 무렵에야 바닥이 숨을 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잠들었는데 금방 깼다.

마루 끝에 오나가 앉아 있었다.
린의 할머니였고 린보다 작았다. 흰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등 뒤로 늘였는데 땋은 끝에 아무것도 꿰지 않았다. 손목에 장신구가 하나 있었다. 하나뿐이었다. 검은 나무를 깎은 구슬이었고 오래 만져서 결이 반들거렸다. 어젯밤 다섯이 널빤지 다리를 건너왔을 때 오나는 이 자리에서 그물코를 깁고 있었다. 다섯을 한 번 훑어보고 「들어오시오」 한마디를 했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켈리가 오나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린에게 배운 인사였다. 이마가 바닥 가까이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올라오는 것이 늦었다.
오나가 그물에서 눈을 들었다.
"숙이는 건 린이오."
"…예."
"드는 건 누구한테 배웠소."
켈리가 생각했다. 고개를 드는 법은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다. 다만 열두 해 동안 켈리는 고개를 숙이면 들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숙이고 있었다. 말이 나오지 않으면 오래 숙이고 있었다.
"…아무한테도요."
"그럼 그건 당신 것이오."
오나가 다시 그물코를 기웠다. 켈리는 무릎을 꿇은 채로 그 말을 받아 놓았다. 자기 것이라는 말을 켈리는 많이 들어 보지 못했다. 손에 든 지팡이도 남이 쓰던 것이었다.

린이 안쪽에서 나왔다. 머리를 반쯤 땋은 채였다. 나머지 반을 땋으며 나오다가 켈리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고 멈췄다.
"할머니. 얘 아침부터 왜 이러고 있어요."
"인사하더라."
"그거 어제 했잖아요."
"어제는 내가 못 봤다."
린이 땋던 손을 내렸다. 오나가 린의 손목을 보았다. 어제 마을 어귀의 노인이 본 자리였다. 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래 보았다. 셈하는 눈이었다. 켈리는 그 눈을 알았다. 저울 옆의 서기가 그런 눈으로 눈금을 읽었다. 서기는 읽고 나서 장부에 적었고, 오나는 읽고 나서 아무 데도 적지 않았다.
"셋이 셋 다 땅이 다르구나."
오나가 말했다.
"하나는 땅이 없고."
"…예."
"손님으로 둘 수 있는지 정해야겠다."
"할머니."
"안건이다."
린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거 정하는 데 한 달 걸려요."
"그러니 일찍 불러야지."

오나가 마루 아래로 몸을 내밀고 짧게 소리를 냈다. 어제 그물을 걷다가 린의 이름을 외친 아이가 옆집 마루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오나가 손짓을 두 번 했다. 아이가 장대를 타고 내려가 배에 올랐다. 좁고 긴 배였다. 아이가 노를 저어 버드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어디 가요?"
켈리가 물었다.
"수풀회 부르러."
린이 얼굴을 덮은 채로 말했다.
"수풀회는 어디 있는데요?"
"없어."
"없어요?"
"자리가 없어. 안건이 생긴 마을로 와. 우리가 안건이니까 여기로 와."
린이 손을 내렸다.
"마을마다 외우는 이가 하나씩 있어. 할머니 같이 안건을 모두 외우고 다니는 사람을 외는 이들이라고 불러. 그 사람들이 다 와야 시작해."
"몇 명인데요?"
"열넷."
"언제 다 와요?"
린이 늪 쪽을 보았다. 버드나무 가지 끝이 물에 닿아 있었다.
"…먼 데는 사흘."

외는 이들은 배로 왔다.
첫날 해 질 녘에 둘이 왔다. 이튿날 다섯이 왔고 사흘째 해 질 녘까지 여섯이 더 왔다. 오는 사람마다 늙었고 저마다 혼자 노를 저었다. 배가 닿으면 장대를 짚고 큰 마루로 올라가 앉았다.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먼저 온 사람과 말을 나누지도 않았다. 다 모이기 전에 하는 말은 회의가 아니었고, 회의가 아닌 말을 외는 이들은 하지 않았다.
큰 마루는 마을 한가운데 있었다. 장대가 다른 집보다 굵었고 지붕이 넓었으며 벽이 없었다. 바닥 한가운데에 낮고 긴 탁자가 놓여 있었다. 늪 바닥에서 건진 통나무를 켜서 만든 것이라 검었다. 칠을 한 것이 아니라 나무가 그런 색이었다. 수백 년을 물 밑에 있으면 나무가 그렇게 된다고 린이 말했다. 켈리가 지나가다 손가락 끝으로 모서리를 눌러 보았다. 쇠처럼 단단했다.
외는 이들은 그 탁자 둘레에 앉았고 처음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끼니때가 되면 마을 사람이 그릇을 올려다 주었다. 밤에도 거기서 잤다. 켈리는 큰 마루 앞을 지날 때마다 위를 보았다. 앉은 사람이 하나씩 늘어 갔다.
마을 어귀 둔덕에는 고슈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날마다 같은 자리였고 날마다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켈리는 뼈와 깃털 끈을 허리춤에 매달고 다녔다. 둔덕 앞을 지날 때 고슈가 그 끈을 한 번 보았고, 보고 나서 늪으로 눈을 돌렸다.

사흘째 해 질 녘에 열셋째가 왔다. 오나까지 열넷이었다. 그날 밤에 하나가 더 왔다.
배가 닿기도 전에 아이들이 먼저 알았다. 널빤지 다리 위로 아이들이 몰려나가 소리를 질렀다.
"스물세 번째 왔다!"
"스물세 번째!"
배에서 내린 사람은 예순이 넘어 보이는 남자였다. 이끼색 겹옷을 입었고 기름 먹인 천으로 싼 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렇게 불러도 화를 내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뭉치를 고쳐 끼고 다리를 건넜다.
"하벨 아저씨야. 수풀회 대변인."
린이 말했다.
"왜 스물세 번째예요?"
"뭐 하나 정하려면 회의를 스물세 번 해야 하니까."
"…진짜요?"
"평균이 그렇대."
린이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내가 로엔에 간 거야."
큰 마루 위에서 하벨이 뭉치를 풀었다. 종이였다. 묶은 종이가 여러 다발이었고 그 옆에 붓과 먹이 있었다. 하벨이 탁자 끝에 앉아 종이 한 장을 펴더니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켈리 뒤에서 오벨이 숨을 들이켰다. 소아레에 와서 사흘 동안 오벨은 종이를 든 사람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외는 이들을 기다리는 사흘 동안 넷은 손님이었고, 소아레의 손님은 거들었다.
바르트는 첫날 아침에 배를 보았다. 소아레의 배는 나무못을 썼는데 몇 척은 쇠못을 박았고 그 쇠못이 전부 녹슬어 있었다. 바르트가 그것을 하나씩 뽑아 새로 갈았다. 뽑을 때마다 배 주인이 옆에 쪼그려 앉아 구경했다.
오벨은 물을 긷기로 했다. 접경에서 약속했던 몫이었다. 그런데 소아레에는 물을 긷는 일이 없었다. 마루 끝에서 두레박을 내리면 물이었다. 오벨이 두레박을 한 번 내렸다가 올리고 나서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오나가 그물을 내주었다. 오벨은 그날 그물을 기웠고 기우는 동안 매듭을 세었다. 저녁에 그물을 돌려주면서 매듭이 이천사백열둘이라고 말했다. 오나가 그 숫자를 받았다.
니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도박사는 아직 수풀회에서 다룬 적이 없었고, 다룬 적이 없는 사람이 무언가를 하면 그것이 누구의 몫인지 정할 수 없었다. 니카는 마루 끝에 앉아 다리를 물 위로 늘어뜨리고 남들이 하는 일을 보았다.
켈리는 빨래터로 갔다.

빨래터는 마을 끝 물가에 있었다. 물 위로 널빤지를 길게 깔고 그 끝에 납작한 돌을 여럿 박아 놓았다. 여자들이 돌 앞에 무릎을 꿇고 빨래를 했다. 젖은 천을 돌에 얹고 나무 방망이로 두드리면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가 늪으로 돌아갔다. 여럿이 두드리는데 박자가 맞았다.
켈리가 지팡이를 널빤지에 내려놓았다. 손에 닿는 거리였다.
옆의 여자가 빨래 짜는 법을 보여 주었다. 볼이 둥근 여자였다. 젖은 홑이불 양 끝을 쥐고 반대로 비틀자 비틀린 천에서 물이 줄기로 쏟아졌다.
"이렇게."
켈리가 따라 했다. 천을 쥐고 천천히 비틀었다. 물이 떨어졌다. 줄기가 아니라 방울이었다.
"그렇게 짜면 내일까지 물 떨어지겠소."
"…예."
"살짝 힘 줘 봐요."
켈리가 손을 멈췄다.
"…살짝이 몇째예요?"
"몇째?"
여자가 켈리를 보았다. 켈리가 진지하게 여자를 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엇을 물었는지 몰랐다.
교범의 눈금은 여섯이었다. 켈리가 배운 것은 위의 셋이었고 그중 가장 아래가 넷째였다. 넷째보다 아래는 켈리에게 없었다. 살짝이 몇째인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으므로 켈리는 가진 것 가운데 가장 아래를 골랐다.
켈리가 지팡이를 보았다. 손에 닿는 거리였다. 켈리가 그것을 집어 널빤지 저쪽 끝에 옮겨 놓고 돌아왔다. 여자의 눈이 그 동작을 따라갔다.
켈리가 홑이불을 다시 쥐었다. 팔 안쪽에서 열이 올라왔다. 넷째 단계였다. 열이 양팔로 번졌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붉은 실 같은 것이 손목에서 팔꿈치 쪽으로 옅게 번졌다. 여자의 눈이 지팡이에서 그 팔로 옮겨 갔다.
비틀었다.
천이 찢어지는 소리는 짧았다. 홑이불이 꼬인 자리를 따라 둘로 갈라졌고, 그 안에 남아 있던 물이 한꺼번에 옆으로 나갔다. 볼이 둥근 여자의 얼굴로 나갔다.
방망이 소리가 멈췄다. 빨래터 전체에서 멈췄다.
켈리가 반쪽이 된 홑이불을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있었다. 여자가 얼굴의 물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넷째가 제일 아래예요."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켈리는 짜지 않고 두드렸다. 여자가 그렇게 정했다. 방망이를 건네면서 여자가 말했다.
"두드리기만 하오. 살살."
살살이라는 말에는 힘이라는 말이 붙어 있지 않았다. 켈리는 걸지 않고 두드렸다. 박자가 다른 사람들과 맞지 않았지만 빨래는 멀쩡했다. 한나절이 그렇게 갔다. 여자가 이따금 켈리 쪽을 보았고 보고 나서 자기 빨래로 돌아갔다.
오후에 여자가 켈리의 빨래를 들어 보았다. 소매 끝에 늪 진흙이 그대로 있었다.
"때가 안 빠졌소. 힘을 좀 줘야지."
켈리가 방망이를 내려다보았다. 방망이는 나무였다.
"…힘 주면 이거—"
"줘 봐요."
켈리가 지팡이를 보았다. 널빤지 저쪽 끝이었다. 어제 옮겨 놓은 자리에서 아무도 옮기지 않았다.
켈리가 넷째로 걸었다. 양팔이었다. 방망이를 내리쳤다.
소리가 하나 났다. 방망이가 돌에 닿는 소리와 방망이가 갈라지는 소리가 같은 소리였다. 쥔 자리에서부터 결을 따라 금이 달려 나가더니 끝에서 둘로 벌어졌다. 돌 위의 빨래에는 소매 끝에서 어깨까지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진흙은 빠졌다.
켈리가 방망이 반쪽을 들고 있었다. 나머지 반쪽은 물에 떠서 천천히 늪 쪽으로 갔다.
"…때는 빠졌어요."
여자가 구멍을 보았다.
마루 끝에서 니카가 다리를 늘어뜨린 채 말했다.
"켈리 씨가 다음에 부러뜨릴 건 국자예요. 7할이요. 68.7퍼센트."
그 뒤로 켈리가 지나가면 마루 끝에 걸어 둔 국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주걱도 들어갔다. 사흘째에는 켈리가 다리를 건너오는 것을 보고 노를 배 안으로 걷어 들이는 사람이 있었다.

저녁이면 켈리가 많이 먹었다. 소아레의 빵은 물벼 가루를 반죽해 달군 돌판에 구운 것이라 납작하고 손바닥만 했다. 켈리는 첫날 저녁에 둘을 먹었다. 늘 먹던 것보다 하나가 많았다. 두 손으로 들고 먹었다. 한 손으로 들면 팔이 빵 무게를 못 이기고 자꾸 내려갔다. 걸고 나면 배가 고팠다. 몸 안에서 무언가가 탄 만큼 비었다.
바르트가 노트를 폈다. 바르트는 폐허에서부터 켈리가 먹는 것을 적었다.
「빨래 1. 빵 2.」
이튿날 저녁에 한 줄이 늘었다.
「방망이 1. 빵 2. 생선 1.」
켈리가 노트를 넘겨다보았다. 바르트가 노트를 덮지 않았다.
"…빨래가 하나예요?"
"하나지."
"반쪽이 두 개예요."
바르트가 한참 있다가 「빨래 1」 옆에 작게 「반 2」라고 적었다.

사흘째 빨래터에서는 그물을 걷던 그 아이가 켈리 옆에 쪼그려 앉았다. 켈리는 손으로 빨래를 비비고 있었다. 방망이는 이제 켈리에게 오지 않았다.
"누나는 왜 살살이 안 돼?"
켈리가 비비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안 배웠어요."
"왜 안 배웠어?"
켈리가 빨래를 물에 헹궜다. 헹구는 동안 대답을 찾았는데 찾을 것은 없었다. 대답은 처음부터 있었다. 교범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아래 셋을 왜 가르치지 않는지 켈리에게 설명해 준 사람은 없었지만,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터지는 자리까지 가는 데는 필요 없었으니까요."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터지는 자리가 어딘데?"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빨래를 건져서 짰다. 걸지 않고 천천히 짰다. 물이 방울로 떨어졌다.
옆에서 볼이 둥근 여자가 방망이를 내려놓았다. 그날 빨래터에서는 방망이 소리가 한동안 하나 모자랐다.

첫 회의는 하벨이 온 이튿날 저녁에 열렸다.
아침에도 회의가 있었다. 아침 것은 피난민 안건이었고 열아홉 번째였다. 외는 이들은 회의를 열면 먼저 지난 회의를 외웠다. 첫째 회의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고 둘째 회의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그 말 그대로 외웠다. 하나가 외우면 나머지 열셋이 듣다가 틀린 데가 있으면 손을 들었다. 손이 올라가면 그 자리부터 다시 외웠다. 지난 열여덟 회의를 다 외우는 데 아침나절이 갔다. 그중 반 시간은 열한째 회의에서 누군가 「아직」이라고 했는지 「아직은」이라고 했는지를 두고 갔다. 열아홉 번째 회의는 점심때 열렸고 반 시간 만에 끝났다. 외는 이 둘이 「아직」이라고 했다.
"아직이 뭐예요?"
니카가 물었다.
"아직 못 정했다는 거야. 한 사람이라도 아직이면 다음 회의로 넘어가."
린이 말했다.
"한 사람이라도요?"
"한 사람이라도."
니카가 큰 마루를 올려다보았다. 열넷이 앉아 있었다. 니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고슈와 같은 입이었다. 고슈는 외우는 중이었고 니카는 세는 중이었다.

저녁 회의에 넷이 불려 올라갔다. 탁자 둘레 바깥에 자리가 있어서 거기 나란히 앉았다. 린이 넷 옆에 앉았다. 데려온 사람이 앉는 자리였다.
첫 회의라 외울 지난 회의가 없었다. 대신 오나가 외웠다. 안건이 생긴 마을의 외는 이는 그 마을이 안건에 대해 아는 것을 외운다.
"카르소 바르트. 없어진 땅. 소아레 배의 쇠못 열한 개를 갈았소."
외는 이들이 들었다.
"벨류엔 오벨. 불 놓은 땅. 물을 길으러 왔는데 소아레는 물을 긷지 않소. 그물을 기웠소. 매듭이 이천사백열둘이오."
오벨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 숫자가 정확히 외워진 것이 기쁜 얼굴이었다.
"타르실 니카. 팔린 지도의 땅. 아무것도 안 했소."
"…그것도 외워요?"
니카가 작게 물었다. 린이 니카의 발을 밟았다.
"땅 없는 켈리. 접경에서 풀을 골랐소. 소아레에서 홑이불 하나를 반쪽 둘로 만들었소. 방망이 하나를 부러뜨렸소. 빨래에 구멍을 하나 냈소."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고칠 데가 없었다. 켈리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외는 이들이 차례로 말했다. 오나의 왼쪽부터 돌았다. 차례가 오면 하나를 묻거나, 묻지 않고 「아직」이라고 했다. 한 바퀴를 도는 동안 물음이 넷 나왔고 아직이 열 나왔다.
물음 하나가 켈리에게 왔다. 탁자 맞은편에 앉은 남자였다. 얼굴 한쪽이 오래전에 그을린 것처럼 얼룩져 있었다. 모라의 외는 이라고 린이 귓속말을 했다. 늪 서쪽 끝 마을이었고, 여덟 해 전에 탔다.
"땅 없는 켈리. 어디 땅이오."
접경에서 들은 물음이었다. 켈리는 그때 모른다고 했고 지금도 몰랐다. 다만 그 사이에 린이 해 준 말이 하나 있었다. 땅 이름은 네가 정하는 거라는 말이었다. 켈리는 그 말을 받아 놓기만 하고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직이요."
마루가 조용해졌다. 외는 이 열넷이 켈리를 보았다. 모라의 외는 이가 켈리를 한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이면 다음 회의에서 묻겠소."
그것으로 그 물음이 끝났다. 켈리 옆에서 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회의는 저녁마다 열렸다. 둘째 회의는 첫째 회의를 외는 데서 시작했고, 셋째 회의는 첫째와 둘째를 외는 데서 시작했다. 회의가 하나 늘 때마다 외는 시간이 한 회의만큼 늘었다.
둘째와 셋째 회의는 바르트 일로 다 갔다. 카르소가 없어진 땅이면 카르소 바르트는 자플랜 사람이냐 카르소 사람이냐를 두고서였다. 바르트는 자기 차례가 오자 목덜미를 한 번 만지고 말했다. 「자플랜 장부에는 자플랜 사람이고, 제 입으로는 카르소 사람이에요.」 넷째 회의 첫머리에 그 말이 다시 나왔다. 바르트의 목소리가 아니었는데 바르트가 쉰 자리에서 똑같이 쉬었다. 바르트가 그것을 듣고 한참 탁자를 보았다.
넷째와 다섯째 회의는 니카 일로 갔다. 외는 이들이 도박사를 몰랐기 때문이다. 니카는 넷째 회의에서 돈을 건다고 했고, 다섯째 회의에서 모라의 외는 이가 돈이 없으면 무엇을 거느냐고 물었다. 니카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손목에 감은 천을 내려다보았다.
"…저요."
외는 이들이 그 말을 외웠다.
오벨은 여섯째 하나로 끝났다. 벨류엔이라는 말이 나오자 모라의 외는 이가 벨류엔은 다음 회의에서 하나 더 다루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켈리 차례였다.

회의가 끝나면 오벨이 하벨 옆으로 갔다. 하벨이 탁자 끝에서 종이를 추리는 동안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셋째 회의가 끝난 저녁에 오벨이 물었다.
"실례지만 무엇을 적으십니까."
"바깥에 보낼 것이오."
"회의록이 아니고요."
"회의는 외는 이들이 외우오. 나는 바깥에 보낼 말만 적소."
하벨이 종이 한 장을 들어 보였다. 받는 곳에 로엔이라고 적혀 있었다.
"바깥은 외운 것을 안 믿소. 적은 것만 믿소. 그래서 수풀회에 적는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하오."
"…그게 대변인입니까."
"그게 대변인이오."
오벨이 그 대답을 수첩에 적었다. 적고 나서 하벨을 보았다. 하벨이 오벨의 수첩을 보았다. 둘이 한동안 말이 없었는데, 소아레에 와서 오벨이 그렇게 편한 얼굴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날 밤 오벨이 수첩에 셈을 했다. 피난민 안건은 열여덟 회의를 외는 데 아침나절이 걸렸다.
"타르실 상인 안건은 마흔 번이었다고 했습니다."
"했어요."
니카가 말했다.
"마흔째 회의는 외는 데만 하루 낮이 다 갔을 겁니다."
니카가 그 셈을 들었다. 자기 나라 상인들을 돌려보낸다는 결론이 하루 낮 동안 외워진 끝에 났다는 뜻이었다.
"…저희 건은 언제 끝나요."
"그건 니카 씨 일입니다."
니카가 큰 마루 쪽을 보았다. 등잔 하나가 켜져 있었다.
"…1할이요."
"무엇의 1할입니까."
"올해 안에 끝날 확률이요."

일곱째 회의는 여섯 회의를 외는 데서 시작했다. 바르트의 「제 입으로는 카르소 사람이에요」가 다시 나왔고 니카의 「…저요」가 다시 나왔다. 외는 이는 말만 외우지 않았다. 말과 말 사이도 외웠다. 니카가 「저요」 앞에서 쉰 만큼 외는 이도 쉬었다. 니카가 그 쉼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여섯 회의를 외는 사이에 해가 졌다. 마을 사람이 등잔을 올려다 탁자 위에 놓았다. 불빛이 검은 탁자에 닿으면 탁자가 빛을 먹었고, 둘레에 앉은 얼굴들만 아래에서 비쳐 올라왔다. 늙은 얼굴 열넷이었다. 하나같이 입이 작게 움직이다 멈추곤 했다. 넷은 그 바깥에 앉아 있었다. 바르트가 무릎을 한 번 폈다가 도로 접었다. 오벨은 첫 회의 때부터 등을 펴고 앉았는데 일곱째에도 등이 펴져 있었다.
켈리 차례가 왔다. 모라의 외는 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차례가 그였다.
"벨류엔은 여덟 해 전에 모라에 불을 놓았소. 타르실이 판 지도를 들고 왔소. 그 나라 마법사를 손님으로 두자는 것이오."
켈리가 무릎 위의 손을 보았다.
"묻겠소. 땅 없는 켈리. 벨류엔은 실베인을 뭐라 부르오."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 물음에는 대답이 있었다. 켈리가 아는 대답이었다.
교관이 한 번 읽어 준 줄이었다. 교범 맨 뒷장 타국 술법 항목에 있었다. 교관은 그 줄을 읽고 나서 외울 필요 없다고 했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 줄이었다. 켈리는 외웠다. 교관이 읽은 것은 다 외웠다. 외울 것과 외우지 않을 것을 자기가 고를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 켈리는 하지 못했다.
"…타국 술법. 잡술. 체계 없음. 대량 운용 불가."
교관의 박자 그대로였다.
"외울 필요 없음."
마루가 조용했다. 켈리 옆에서 린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 읊고 나서야 켈리는 그 줄이 무엇을 두고 한 말인지를 보았다. 탁자 둘레에 앉은 사람들이었다. 등잔 아래에서 비쳐 올라온 늙은 얼굴 열넷이었다. 그 줄을 외울 때 켈리는 줄 너머에 사람이 앉아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줄은 줄이었고 시험에 나오지 않는 줄이었다.

모라의 외는 이가 오벨을 보았다.
"벨류엔 법은."
오벨이 안경을 고쳐 썼다. 고쳐 쓰는 데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법전에는 「무등록 술법」입니다. 법정에서는 그렇게 씁니다."
"법정 밖에서는."
오벨이 잠깐 있었다. 법률가는 묻는 말에 정확히 대답한다. 정확한 대답이 무엇인지 오벨은 알았다.
"…잡술이라고 합니다."
"타르실은."
니카가 빨리 말했다. 거짓말이 아닌데 빨랐다.
"회의만 하는 나라요. 술사는 잡술쟁이요."
"카르소는."
바르트가 목덜미를 만졌다.
"「늪 사람」이었어요. 사는 데 붙인 이름이에요. 욕은 아니었고요."
"지금은."
"지금은 카르소가 없어요. 그 말도 같이 없어졌어요."

모라의 외는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오나를 보았다. 오나가 입을 열었다. 박자가 느리고 고르게 떨어졌다. 지난 회의를 욀 때와 같은 박자였다.
"잡술쟁이. 로엔 곡물상이 했소. 타르실 뱃사람이 했소. 아르베인 기사가 했소. 드란 용병이 했소."
외는 이들이 들었다. 놀라는 얼굴이 없었다.
"늪 무당. 드란이 했소. 맨발들. 로엔이 했소. 이끼 먹는 것들. 타르실이 했소. 회의만 하는 나라. 넷이 다 했소. 미개한 잡술. 벨류엔 마법청이 했소. 문서로 왔소. 하벨이 읽어 줬소."
오나가 숨을 한 번 쉬었다.
"방금 더 들었소. 체계 없음. 대량 운용 불가. 외울 필요 없음. 무등록 술법. 늪 사람. 그건 욕이 아니라 했소."
"그걸 왜 외워요."
린이었다.

린이 서 있었다. 언제 일어섰는지 켈리는 보지 못했다. 맨발이 마루를 딛고 있었고 손목의 장신구가 떨렸다.
"그걸 왜 다 외우고 있어요. 왜 아무도 화를 안 내요."
"잊으면."
오나가 말했다. 린을 보지 않았다.
"다음에 들을 때 처음 듣는 것이 되오. 처음 듣는 건 아프오."
"그러니까 안 아프려고 외워요? 그게 뭐예요!"
린의 목소리가 마루 끝까지 갔다. 마루 밑의 물까지 갔다. 옆집 마루에서 그물을 깁던 사람이 손을 멈췄다.
"주문을 안 하는 건 못 해서가 아니에요. 남의 걸 빌리면서 소리 지르는 게 무례라서예요. 맨발인 건 가죽을 사이에 두면 아무것도 못 빌려서고요. 사례는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걸 줘요. 제일 좋은 거요. 그게 왜 잡술이에요. 소리 질러서 부리는 건 술법이고요? 회의가 긴 건 아무도 남 대신 안 정해서예요. 한 사람이라도 아직이면 안 정하는 거예요. 그게 왜, 그게 왜—"
"소아레 린."
오나가 말했다.
"차례가 아니야."

린이 입을 다물었다.
차례가 아닌 말은 외지 않는다. 수풀회의 예법이었다. 다음 회의 첫머리에 바르트의 말은 다시 나올 것이고 니카가 쉰 자리도 다시 나올 것이었다. 켈리가 읊은 교관의 줄도, 오벨의 「잡술」도 다시 나올 것이었다. 린의 말만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린이 그 예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가르친 사람이 오나였다.
린이 앉았다. 앉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목의 장신구가 한 번 더 떨리고 멎었다.
탁자 끝에서 하벨이 붓을 내려놓았다. 켈리가 그것을 보았다. 회의 내내 하벨의 붓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린이 일어섰을 때였고, 멈춘 것은 오나가 린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회의는 이어졌다. 모라의 외는 이가 차례를 넘겼고 다음 외는 이가 물었다. 벨류엔 회수조가 로엔 남부까지 내려왔다는 말이 있는데 실베인까지 오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오벨이 대답했다. 협조문이 돌고 있고 협조문은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외는 이들이 그 말을 외웠다. 린은 그동안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의 장신구를 덮고 있었다. 켈리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그 손을 보았다.
일곱째 회의는 그 뒤로 반 시간을 더 했다. 켈리의 안건에서 아직이 일곱 나왔다.

그날 밤 린은 오나네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물 위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물 위로 반딧불이가 떠다녔다. 버드나무 가지 끝에서 하나가 떠오르면 물에 비친 것이 아래에서 같이 떠올라서 하나가 둘로 보였다. 개구리가 울었다. 이쪽에서 한 마리가 울면 건너편에서 받아 울었다.
마을의 등잔이 집집마다 하나씩 꺼졌다. 장대 위의 집이 어두워지면 집과 물의 경계가 지워져서 집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에서 비린내와 풀 냄새가 같이 올라왔다. 마을 어귀 둔덕에 검은 덩어리 하나가 있었다. 고슈였다. 낮과 같은 자세였다.
린은 장신구를 세고 있었다. 손목에 감긴 것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었다. 조가비를 짚었고 유리를 짚었고 나무 깎은 것을 짚었다. 반딧불이가 가까이 오면 유리가 잠깐 빛났다. 나무 깎은 것은 빛나지 않았다. 빛나지 않는 것이 더 많았다.
"…열다섯."
켈리가 그 옆에 앉았다. 지팡이를 무릎 위에 가로로 놓았다. 다리는 늘어뜨리지 않았다. 마루가 조금 기울었다가 돌아왔다. 켈리는 이제 그것에 눈을 뜨지 않았다. 사흘째 밤부터 그랬다.
둘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 열 살 때."
린이 말했다. 물을 보고 있었다.
"로엔 장에 갔는데 거기 애들이 맨발이라고 놀렸어. 신 살 돈이 없냐고. 설명하려고 했는데, 설명하면 길어지잖아. 길어지면 안 믿어. 그래서 안 했어. 그 뒤로 한 번도 안 했어."
켈리가 들었다.
"집에 와서 할머니한테 물었어. 왜 그렇게 부르냐고. 할머니가 외워 두래. 외워 두면 다음엔 덜 아프대."
린이 발끝으로 물을 건드렸다. 물결이 하나 번졌다.
"나는 안 외웠어. 외우면 그 말이 맞는 말이 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들을 때마다 처음 들어."
켈리가 그 말을 들었다. 처음 듣는 건 아프다는 말을 켈리는 오늘 저녁에 한 번 들었다.
"오늘 처음 했는데. 차례가 아니래."
린이 웃었다. 웃는 소리가 짧았다.
"그 사람은 적었어."
켈리가 말했다.
"…누구."
"끝에 앉은 사람. 종이 든 사람. 린이 말할 때만 붓이 움직였어."
린이 고개를 들어 큰 마루 쪽을 보았다. 등잔 하나가 아직 켜져 있었다. 탁자 끝자리였다.
"…하벨 아저씨는 바깥에 보낼 것만 적는데."
린이 그렇게 말하고 한동안 그 등잔을 보았다.

켈리가 일어섰다. 린 앞으로 돌아가 무릎을 꿇었다. 마루가 기울었다. 켈리가 이마를 마루 가까이 숙였다. 린에게 배운 각도였다. 그러고는 숙인 채로 있었다. 드는 것이 늦었다. 오늘은 더 늦었다.
"…뭐 해."
"그 줄 말한 거."
"……"
"교관이 읽은 거. 그거 말한 거."
켈리가 이마를 숙인 채로 말했다.
"그건 인사잖아."
"다른 건 안 배웠어."
린이 켈리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보다가 손을 뻗어 켈리의 어깨를 밀었다.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일어나. 그거 사과할 때 하는 거 아니야."
"사과할 땐 뭐 해?"
린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내일 가르쳐 줄게."
린이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훔쳤다. 늪 바람 탓이라고 이번에는 말하지 않았다.

켈리가 다시 린 옆에 앉았다.
"외울 필요 없다고 했는데 외웠어. 그 줄."
"알아. 들었어."
"이제 다른 거 외우고 있어."
린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가 손가락을 하나 폈다.
"무릎 꿇고 숙이는 거."
손가락이 하나씩 더 펴졌다.
"물 빌리면 목마른 걸 모르니까 옆에서 봐 줘야 하는 거. 쓴대는 먹는 게 아니라 달여서 배 아픈 사람 주는 거. 땅 이름을 앞에 붙이는 거. 영감님 옷 벗을 땐 뒤돌아야 하는 거."
다섯이었다.
"주문 안 하는 건 남의 거 빌리면서 소리 지르면 무례라서인 거. 맨발은 가죽을 사이에 두면 못 빌려서인 거. 사례는 제일 좋은 거 주는 거."
여덟이었다. 린이 켈리의 손가락을 보았다.
"…그거 오늘 내가 한 말이잖아."
"응."
"차례 아니었는데."
"나는 외는 이 아니야."
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켈리가 펴진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몰라서 그런 거면 가르쳐 주는 거. 그게 예법인 거."
아홉이었다.

린이 물을 보았다.
"…그 사람들은 배울 생각이 없어."
"나도 없었어."
린이 켈리를 보았다.
"나도 배울 생각 없었어. 린이 그냥 가르쳤잖아."
첫 수업은 로엔에서였다. 아침이었고 린이 「자. 마주 봐.」라고 했다. 켈리는 왜 마주 봐야 하는지 몰랐다. 모르면서 마주 보았다. 하라는 것을 하는 일은 켈리가 잘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 손가락 아홉이 되어 있었다.
반딧불이 하나가 둘 사이로 지나갔다. 물에 비친 것이 아래에서 같이 지나갔다.
린이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켈리의 손을 보았다. 펴진 손가락 아홉을 보았다.
"하나 빠졌어."
"뭐."
"…차례. 차례 아닌 말은 안 외는 거."
켈리가 마지막 손가락을 폈다.
"열."
린이 켈리의 손가락을 하나씩 짚어 보았다. 장신구를 셀 때와 같은 손이었다. 첫째 손가락에서 멈췄다.
"이건 숙이는 것만 있네. 드는 건?"
"드는 건 내 거래."
"…누가 그래."
"할머니가."
린이 켈리를 보았다. 한참 보다가 웃었다. 아까보다 길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건너편 개구리가 잠깐 울음을 멈췄다가 다시 울었다.
린이 무릎 위에 손목을 올려놓았다. 열다섯이 감겨 있었다.
"내일은 할머니한테 차례 달라고 할 거야."
"달라고 하면 줘?"
"몰라. 달라고 해 본 적 없어."
켈리가 펴진 손가락을 보았다. 열이 다 펴져 있었다. 사과하는 법은 내일이었고, 그것을 어디에 세야 할지 켈리는 아직 몰랐다.

 

적힌 길


사과하는 법은 이튿날 아침에 배웠다.
서서 하는 것이었다. 상대의 눈을 보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한 문장으로 말하고, 그다음에 고개를 숙인다. 숙이는 것이 맨 나중이었다. 켈리는 순서를 거꾸로 했다. 고개부터 숙였고 숙인 채로 말했으며 눈은 끝까지 들지 못했다. 린이 세 번 고쳐 주었다. 네 번째에 켈리가 린의 눈을 보았는데, 보고 나니 무엇을 잘못했는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뭐였지."
"네가 잘못한 거잖아."
"…교관 줄."
"그래. 그거."
"교관 줄 말한 거."
"…됐어. 그만해."
그날 밤 켈리가 손가락을 셌다. 열한째가 생겼는데 셀 손가락이 없었다. 켈리가 왼손 엄지를 한 번 더 접었다.

그 뒤로 여드레가 갔다.
일행 안건은 저녁마다 열렸고 열다섯째까지 갔다. 켈리의 땅 이름은 회의마다 물음으로 왔다가 「아직」으로 갔다. 소아레 사람들은 켈리가 다리를 건너오면 여전히 국자를 안으로 들였다. 린은 아침마다 오나에게 차례를 청했고 오나는 아침마다 「아직」이라고 했다. 아직이면 다음에 물으면 되었다. 린은 다음 날 또 물었다.

아흐레째 아침에 모라에서 아이가 왔다.
배가 큰 마루 장대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췄다. 아이가 배에서 내렸는데 노를 놓지 못했다. 밤새 저어 온 손이었다. 손가락이 노 자루 모양대로 굽어서 펴지지 않았다. 아이가 노를 든 채로 장대를 기어올랐다.
큰 마루에서는 피난민 안건 스물셋째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지난 스물두 회의를 외는 중이었다. 외는 이 하나가 외고 열셋이 들었다. 아이가 마루 가장자리에 섰다. 아이는 외는 이가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차례가 없었다.
아이가 노를 든 채로 서 있었다. 입술이 떨렸는데 열리지 않았다. 실베인 아이들은 큰 마루에서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을 말보다 먼저 배운다.
모라의 외는 이가 아이를 보았다.
외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열넷째 회의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가 지나갔다. 모라의 외는 이가 일어섰다. 차례가 아니었다.
오나가 그를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는 소리가 멈췄다.
모라의 외는 이가 마루 가장자리로 가서 허리를 굽혔다. 아이가 그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말했다. 짧았다. 모라의 외는 이가 허리를 폈다. 얼굴의 얼룩진 쪽이 아침 볕을 받았다. 그가 장대를 짚고 내려가 아이가 타고 온 배에 올랐다.
큰 마루에는 열셋이 남았다. 열셋은 회의가 아니었다. 회의가 아닌 말을 외는 이들은 하지 않았다. 탁자 끝에서 하벨이 붓을 내려놓았다.

켈리는 그때 오나네 마루 끝에서 그물을 개고 있었다. 린이 먼저 일어섰다. 모라의 외는 이가 차례 없이 일어서는 것을 린도 보았다.
"…할머니가 아무 말도 안 했어."
린이 그렇게 말하고 다리를 건너 뛰어갔다. 켈리가 그 뒤를 따랐다. 아이가 큰 마루 장대 밑에 주저앉아 있었다. 린이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모라 애지. 무슨 일이야."
"…벨류엔."
아이가 말했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벨류엔이 왔어. 둑에. 내일 낮까지 곡식이랑 사람 내놓으래."
켈리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등이 펴지고 턱이 당겨지고 시선이 조금 내려갔다. 두 발이 모였다. 그 이름을 큰 소리로 들으면 몸이 그렇게 했다. 켈리는 그것을 알았고, 알면서도 풀지 못했다.
풀린 것은 발이었다. 발이 먼저 풀렸고 풀리자마자 물가로 갔다.
모라의 외는 이가 배에 앉아 노를 잡고 있었다. 켈리가 그 배에 올랐다. 배가 기울었다가 바로 섰다.
모라의 외는 이가 켈리를 보았다.
"벨류엔 마법사."
"…예."
"당신이 이 배를 왜 타시오?"
켈리가 대답을 찾았다. 찾을 데가 없었다. 로엔 남부의 진창길에서 행렬 쪽으로 걸어 나갔을 때도 그랬다.
"…모르겠는데요."
모라의 외는 이가 한참 켈리를 보았다. 그러고는 노를 하나 더 꺼내 켈리 앞에 놓았다.
"저으시오."
켈리가 노를 받았다. 노는 나무였다. 켈리가 그것을 잠깐 내려다보고, 마법을 걸지 않고 저었다.

뒤에서 배 한 척이 더 물에 내려졌다. 바르트가 탔고 오벨이 탔고 니카가 탔다. 린이 고물에 앉아 노를 잡았다. 마을 어귀 쪽 물가에도 배가 한 척 떠 있었는데 고물에 고슈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언제 탔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둔덕은 비어 있었다.
세 척이 버드나무 사이로 나갔다. 큰 마루에서는 열셋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서쪽으로 갈수록 버드나무가 줄고 갈대가 늘었다. 갈대가 사람 키를 넘어서 배 양옆이 초록 벽이 되었고, 벽 사이로 난 물길은 배 한 척 너비였다. 모라의 외는 이는 갈림길에서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다. 켈리는 앞에서 젓는 등을 보며 박자를 맞췄다. 박자가 맞으면 배가 덜 흔들렸다.
반나절 동안 그는 한 번 말했다.
"여덟 해 전에 몇 살이었소."
켈리가 셈을 했다.
"…열 살이요."
"그때 어디 있었소."
"막사요. 벨류엔 북쪽."
모라의 외는 이가 노를 한 번 저었다. 두 번 저었다.
"그럼 됐소."
그 뒤로 그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켈리도 묻지 않았다. 무엇이 됐는지 켈리는 몰랐다. 다만 그 말을 듣고 나서 노 젓는 팔이 조금 덜 무거웠다.

모라에 닿은 것은 해가 기운 뒤였다.
늪 서쪽 끝이었다. 물이 얕아지고 갈대가 성겨지면서 집들이 보였다. 소아레처럼 장대 위에 선 집들이었는데 장대 몇 개가 검었다. 칠한 검정이 아니라 탄 검정이었다. 탄 장대를 뽑지 않고 그 옆에 새 장대를 박아 집을 다시 올렸다. 그래서 집 밑에 장대가 둘씩 서 있는 데가 있었다. 하나는 희었고 하나는 검었다. 8년이였다. 새 장대도 이제는 희다고 하기 어려웠다.
마을 북쪽 끝에 둑이 있었다. 늪 두 개 사이에 흙을 쌓아 올린 길이었는데, 수레 한 대가 겨우 지날 폭으로 북쪽을 향해 길게 뻗어 있었다. 모라에서 바깥으로 수레가 나갈 수 있는 길은 그것 하나였다.
둑 어귀에 남색이 있었다.
코트형 군복이었다. 스물 남짓이 둑 어귀 마른땅에 천막 셋을 쳤고 수레 셋과 말 여섯을 매어 두었다. 둑 머리의 말뚝에 종이 한 장이 못으로 박혀 있었다. 천막 앞에 탁자가 놓였고 탁자 위에 저울이 있었다. 접시 둘에 쇠추가 딸린 저울이었다. 서기 하나가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모라 사람이 지고 온 곡식 자루를 접시에 올리고 추를 옮기고 장부에 적었다. 자루를 내려놓고 다음 자루를 올렸다.
켈리가 배에서 그것을 보았다. 남색을 보았고 저울을 보았다. 몸이 다시 그렇게 했다. 배 바닥에서 두 발이 모였다.
바르트가 다른 배에서 그것을 보았다. 배가 닿자 바르트가 먼저 내려 켈리가 내리는 자리 앞에 섰다. 남색 쪽에서 켈리가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바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뚝의 종이는 모라에서 아무도 읽지 못했다. 오벨이 읽었다.
「징발령. 북부 전선 보강 소요. 징발 구역 — 남서 늪지 무주지. 곡물 1,600킬로그램. 인부 20. 기한 여섯째 달 12일 정오. 경로 — 작전도 제14호 지정 경로.」
오벨이 그 종이를 두 번 읽었다. 두 번째에는 손가락으로 한 줄씩 짚었다. 짚던 손가락이 「무주지」에서 멈췄다.
"주인 없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모라의 외는 이가 오벨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벨이 천막으로 갔다. 아무도 가라고 하지 않았다. 바르트가 붙잡으려다 말았다. 오벨이 천막 앞에서 안경을 고쳐 쓰고 소대장을 청했다. 나온 사람은 마흔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남색 코트의 단추가 목까지 채워져 있었다.
"벨류엔 징발령 시행 규칙 제3조. 징발은 왕국 영토와 점령지에서만 합니다. 실베인은 둘 다 아닙니다."
소대장이 오벨을 보았다. 오벨의 옷을 보았고 말씨를 들었다. 벨류엔 말씨였다.
"어디 사람이오."
"벨류엔입니다. 법률가입니다."
"그럼 알겠군. 무주지는 영토에 준하오. 제3조 단서."
"무주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 땅입니다. 여기는 사람이 삽니다."
소대장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가죽 통을 들고 나왔다. 통에서 종이를 꺼내 탁자 위에 폈다. 지도였다. 늪이 푸른 잉크로 칠해져 있었고 길이 붉은 잉크로 그어져 있었다. 소대장이 손가락으로 한 자리를 짚었다.
"작전도 제14호. 여기가 지금 서 있는 자리요."
오벨이 그 자리를 보았다. 작은 동그라미가 하나 있었다. 동그라미 위에 가위표가 쳐져 있었고 옆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모라 — 소각(195).」
오벨이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읽고 나서야 소리를 냈다는 것을 알았다.
모라의 외는 이가 둑 머리에 서 있었다. 글을 읽을 줄 몰랐다. 들을 줄은 알았다.
"마을 없음."
소대장이 말했다. 손가락으로 가위표를 두 번 두드렸다.
오벨은 그 뒤로 한 시간을 더 말했다. 단서의 단서를 말했고 시행 규칙의 개정 연도를 말했고 무주지를 판정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말했다. 소대장은 다 들었다. 듣고 나서 말했다.
"명령서대로 하시오. 기한은 내일 정오."
오벨이 돌아왔다. 걸음이 느렸다. 해가 그만큼 더 기울어 있었다.

모라의 외는 이 집 마루에 일곱이 둘러앉았다. 모라 사람 몇이 마루 아래 배에서 올려다보았다.
"…둑 말고 길이 있어요?"
켈리가 물었다.
"서쪽에 옛길이 있었소. 수레 둘이 비켜 갈 만했소. 두 해 전 가을에 가라앉았소."
"…재작년 길은 반만 있어."
고슈가 말했다. 마루 끝에 쪼그려 앉아 늪을 보고 있었다.
"…반은 늪이야. 위에 풀이 덮여서 길처럼 보여."
오벨이 수첩을 폈다. 지도에서 본 것을 적어 두었다.
"작전도에 길이 둘이었습니다. 둑은 붉은 실선이었고 서쪽 옛길은 붉은 점선이었습니다."
켈리가 그 말을 들었다.
"…점선은 예비 경로예요."
다들 켈리를 보았다.
"실선이 막히면 점선으로 가요. 점선도 막히면 멈추고 보고해요. 지도에 없는 길로는 안 가요. 그리고 기한이 있으면 안 멈춰요. 기한 넘기면 소대장이 벌을 받으니까요."
"자네 그걸 어떻게 아나."
바르트가 물었다.
"저도 적힌 길로만 다녔어요."
마루가 조용해졌다. 켈리는 그 말이 왜 마루를 조용하게 하는지 몰랐다. 아는 것을 말했을 뿐이었다.
바르트가 노트를 폈다. 한참 있다가 적기 시작했다. 입으로도 셌다.
"수레에 곡식 다 실으면 수레까지 650킬로그램. 바퀴 넷에 쇠 테를 둘렀고. 바퀴 하나에 160. 남색 하나가 갑옷 입고 짐 지면 100 남짓. 발이 둘이니 한 발에 50."
"…모라 사람은."
"맨발에 자루 하나 지면 70쯤. 발바닥이 넓지."
바르트가 고슈를 보았다.
"옛길 풀 덮인 데. 얼마까지 받쳐."
"…뿌리 붉은 사초 있는 데는 사람을 받쳐. 말은 몰라. 수레는 안 받쳐."
"그럼 둑만 막으면 되는군."

"둑을 어떻게 막아요."
니카가 물었다.
린이 둑 쪽을 보았다. 둑 양옆으로 늪이 둘이었다. 동쪽 늪의 물이 서쪽 늪보다 높았다. 둑이 그 사이를 막고 있었다.
"동쪽 물을 조금 빌리면… 둑 위로 한 뼘. 한 뼘이면 둑이 안 보여. 어디가 둑이고 어디가 늪인지 모르게 돼. 수레는 못 지나가."
"그럼 하면 되잖아요."
"…이름을 몰라."
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고슈를 만나던 날 늪에서도 그랬다. 그 늪을 맡은 정령의 이름을 몰라서 린은 아무것도 빌리지 못했다.
모라의 외는 이가 린을 보았다.
"모라 동쪽 물은 이름이 있소."
"…아세요?"
"내 할머니의 할머니가 그 이름을 받았소. 외는 이는 들은 것을 버리지 않소."
그가 이름을 말했다. 소리가 길었고 중간에 물이 돌 사이를 지나가는 소리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켈리는 따라 할 수 없었다. 린이 입술을 소리 없이 움직여 두 번 따라 했다.
니카가 둑 쪽을 한 번 보고 소대장의 천막을 한 번 보았다.
"…둑이 물에 잠겼을 때 저 사람이 점선으로 갈 확률이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니카가 말했다.
"91.7퍼센트 확률입니다."
니카의 계산 기준은 아무도 몰랐지만 계산은 빨랐다.

린은 자정이 지나 둑으로 나갔다.
남색 천막 쪽에 불이 하나 남아 있었다. 보초 하나가 그 불 옆에 앉아 졸았다. 둑 남쪽 끝까지는 불빛이 닿지 않았다. 린이 거기 무릎을 꿇었다. 켈리가 서너 걸음 뒤에 섰다. 따라 나온 것은 켈리 하나였다.
린이 손목에서 장신구 하나를 풀었다. 조가비였는데 안쪽이 무지갯빛으로 반들거리는 것이었다. 린이 가진 것 가운데 그것이 제일 좋았다. 반딧불이가 지나가면 그 안쪽만 빛을 받았다. 린이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 물 위로 한 번 들어 보이고 물가 진흙 위에 놓았다.
그리고 손을 물에 댔다.
소리를 내지 않았다. 주문은 벨류엔이 하는 것이었다. 린은 손을 대고 가만히 있었다.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까 두 번 따라 한 이름이 소리 없이 어디로 가는지 켈리는 볼 수 없었다. 다만 린의 어깨가 아주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숨을 내쉬는 것 같았는데 내쉬는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넘겨주는 어깨였다.
한참 뒤에 물가의 갈대가 한 번 흔들렸다. 바람은 없었다.
물이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처음에 손등까지 오던 물이 지금은 린의 손목까지 와 있었다.
"…됐어."
린이 손을 뗐다. 진흙 위의 조가비가 없었다. 물이 가져갔는지 처음부터 그렇게 되는 것인지 켈리는 알지 못했다.
린이 손목을 짚어 세었다.
"…열넷."

밤에는 물 위로 소리가 멀리 왔다. 둑 북쪽 끝의 불가에서 남색 옷을 입은 둘이 말을 하고 있었는데, 낮이었으면 들리지 않았을 말이 수면을 미끄러져 둑 남쪽 끝까지 왔다.
"…인부 스물로 되겠냐?"
"북쪽에서 말뚝을 새로 박는대. 열둘을 다."
"말뚝을 왜 새로 박아."
"선이 물러났으니까."
"선이 어떻게 물러나."
"나도 몰라. 소문이 그렇대."
불가에서 장작 하나가 무너졌다. 둘 중 하나가 하품을 했고 그 뒤로는 말이 없었다.
켈리가 그 말을 들었다. 말뚝을 새로 박는다는 말을 켈리는 알아듣지 못했다. 말뚝은 새로 박는 것이 아니었다. 켈리가 아는 말뚝은 63년 동안 같은 자리에 서 있었고 그 테에는 손바닥 자리가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었다. 선은 물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선은 선이었다.
켈리가 그 말을 받아 놓았다. 받아 놓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할 수 없는 것을 정하지 않고 두는 일은 이제 켈리도 할 줄 알았다. 다만 그 말은 다른 것들처럼 가볍지 않았다.

새벽까지 물이 올랐다. 소리 없이 올랐다. 둑의 흙이 젖는 빛깔이 아래에서 위로 번졌고, 위까지 번지고 나서는 물이 흙 위를 덮었다. 한 뼘이었다. 동쪽 늪과 서쪽 늪이 둑 위에서 만나 하나가 되었다. 동이 틀 무렵에는 둑이 있던 자리가 그냥 물이었다. 갈대 끝만 두 줄로 물 위에 나와 있었는데, 그것이 둑 양쪽 가장자리라는 것은 아는 사람만 알았다.
린은 그동안 둑 끝에 앉아 있었다. 켈리가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반 시간마다 켈리가 물병을 내밀었다.
"마셔."
"안 마르다니까."
"그러니까 마셔."
린이 켈리를 보았다. 다섯째 손가락이었다. 물을 빌리면 목마른 걸 모르니까 옆에서 봐 줘야 하는 거. 린이 물병을 받아 마셨다. 목이 마르지 않은 채로 마셨다. 몸이 그것을 반기지 않았다. 그래도 마셨다. 켈리는 린이 다 마실 때까지 보았다.
마루에서는 바르트가 등잔 밑에서 노트를 다시 펴고 숫자를 고쳤다가 도로 고쳤다. 오벨은 수첩에 징발령을 한 자도 빼지 않고 옮겨 적었다. 하벨에게 보여 줄 생각이었다. 니카는 잤다. 9할에서 더 셀 것이 없었다.
고슈는 밤새 보이지 않았다. 새벽에 서쪽 옛길 쪽 갈대 사이에서 나왔는데 바짓단이 무릎까지 젖어 있었다. 무엇을 했는지 묻는 사람에게 고슈는 사초가 올해 어디까지 자랐는지를 말했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동이 트자 남색 천막에서 고함이 났다.
보초가 둑 머리에 서서 물을 보고 있었다. 소대장이 코트 단추를 채우며 나왔다. 물을 보았다. 물 위로 나온 갈대 끝 두 줄을 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소대장이 창을 하나 받아 물을 찔렀다. 창 자루가 한 뼘 들어가다 멈췄다. 소대장이 한 걸음 옆을 찔렀다. 창 자루가 끝까지 들어갔다. 소대장이 창을 빼냈다. 창날에 검은 진흙이 엉겨 있었다.
그가 가죽 통에서 작전도를 꺼냈다. 한참 보았다. 서기를 불렀다. 서기가 장부에 무언가를 적었다.
"실선 침수. 수심 미확인."
소대장이 말했다. 서기가 그대로 받아 적었다.
"예비 경로로 간다."
갈대 사이 둔덕에서 니카가 숨을 내쉬었다. 9할이 맞았다. 맞은 것이 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모라의 외는 이가 둑 머리로 갔다. 소대장 앞에 섰다.
"서쪽 길은 없소."
"작전도에 있소."
"두 해 전 가을에 가라앉았소."
"작전도에 있소."
"그 그림은 여덟 해 전 것이오."
"벨류엔 작전도요."
소대장은 그 말을 대답으로 했다. 모라의 외는 이도 그 말을 대답으로 들었다. 둘 다 더 하지 않았다.
"인부 앞으로."
소대장이 말했다.
"자루 지고 앞에 선다. 길은 이 땅 놈들이 안다."

갈대 사이에서 린이 일어서려 했다. 바르트가 린의 어깨를 눌렀다.
"안 돼. 사람을 앞에 세우면…"
계획에 없었다. 계획은 남색이 수레를 끌고 옛길로 들어가 빠지는 것이었다. 모라 사람은 그 길에 없어야 했다.
모라 사람 스물이 자루를 졌다. 스물째는 기침을 하는 노인이었다. 모라의 외는 이가 그 노인 앞으로 가서 노인의 자루를 받아 졌다. 몫은 무리마다 진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일하지 못하는 사람의 몫을 진다. 소대장은 수를 세었고 스물이 맞았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게 순서대로 빠져요."
켈리가 말했다. 갈대 사이에서 다들 켈리를 보았다.
"영감님 만난 날 늪에서요. 무거운 사람부터 빠졌어요. 린만 안 빠졌어요."
바르트가 노트를 보았다. 어젯밤 고친 숫자였다. 맨발에 자루 하나 지면 70. 사초는 사람을 받친다.
"…모라 사람은 안 빠진다."
"안 빠질 확률 9할이요."
니카가 말했다. 그러고는 조금 있다가 덧붙였다.
"정확히는 91.4퍼센트요."
린이 니카를 보았다. 나머지가 누구냐고는 묻지 않았다.

행렬이 옛길로 들어갔다.
모라의 외는 이가 맨 앞이었다. 그가 디디는 자리마다 밑동이 붉은 사초가 있었다. 고르는 것 같지 않았는데 고른 자리만 디뎠다. 모라 사람 열아홉이 그 발자국을 그대로 디뎠다. 맨발이 젖은 풀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짧고 고르게 났다. 자루를 진 어깨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뒤에 남색의 군인이 섰다. 군인은 앞사람의 발자국을 디뎠다. 발자국은 맨발 하나만 했다. 그 위에 장화가 올라섰다. 첫 걸음은 받쳐 주었다. 둘째 걸음도 받쳐 주었다. 셋째 걸음에서 풀 아래로 물이 배어 올라왔다.
수레가 들어갔다.
첫 수레의 앞바퀴가 사초 무더기를 비껴 풀 덮인 자리를 밟았다. 쇠 테가 풀을 눌렀고 풀이 꺼졌다. 바퀴가 바퀴통까지 들어갔다. 말이 끌었다. 끌수록 뒷바퀴도 따라 들어갔다. 말의 앞발이 물이끼를 밟았다. 말이 목을 뒤로 젖히며 울었다.
둘째 수레가 첫 수레를 비켜 돌았다. 비켜 돈 자리가 더 나빴다.
남색들이 무릎까지 빠졌다. 빼려고 힘을 주었다. 힘을 주면 아래가 빨았다. 무릎까지가 허벅지까지가 되었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 창을 짚었는데 창이 끝까지 들어갔다.
앞에서 모라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초 둔덕에 닿자 자루를 내려놓았다. 한 줄로 나란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돌아섰다. 뒤에서 빠지고 있는 남색을 보았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여덟 해 전에 이 늪을 돌아 들어온 사람들도 남색 옷을 입고 있었다.

말이 한 번 더 뒷발로 섰다.
행렬 가운데쯤에 모라 젊은이 하나가 섰다가 처지고 있었다. 자루를 늦게 받은 사람이었다. 말이 일어서는 바람에 젊은이가 한 발을 옆으로 디뎠다. 디딘 자리에서 거품 하나가 올라와 퍽 하고 터졌다.
젊은이가 가슴까지 들어갔다.
켈리가 갈대에서 나와 있었다. 언제 나왔는지 켈리도 몰랐다. 바르트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났다.
켈리는 린보다 무거웠다. 고슈를 만난 날 늪에서 넷째로 빠진 몸이었다. 켈리가 늪 가장자리에서 등으로 누웠다. 누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들은 말은 몸이 먼저 따랐다. 지팡이를 가슴 밑에 가로로 깔았다. 지팡이 양 끝이 물이끼를 넓게 눌렀다.
그 자세로 밀었다. 발꿈치로 밀고 어깨로 밀었다. 물이끼가 출렁였다. 출렁이다 멎으면 또 밀었다.
젊은이 앞에 닿았다. 팔을 뻗었다. 손이 젊은이의 손목을 잡았다.
팔 안쪽이 뜨거워지려 했다. 마법을 걸면 쉽게 끝낼 수도 있었다. 4단계로 양팔에 걸면 젊은이는 단번에 나올 것이었다. 그리고 가슴 밑의 지팡이가 그 값을 받을 것이었다. 지팡이를 놓고 걸면 값은 켈리의 손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켈리가 그 열을 도로 내려보냈다. 손끝이 저렸다.
"…힘 빼요."
켈리가 말했다. 고슈에게 들은 말이었다.
"힘 주면 아래로 빨려 들어가요. 힘을 빼요."
젊은이가 힘을 빼려 했다. 빼는 법을 몰라서 더 주었다. 더 들어갔다. 켈리가 기다렸다. 기다리는 일은 켈리가 잘하는 일이었다. 젊은이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켈리가 당겼다. 마법을 걸지 않은 팔로 당겼다. 힘은 부족했지만 젊은이가 늪에서 조금 나왔다. 기다렸다. 또 당겼다. 오래 걸렸다.
젊은이가 허리까지 나왔고 무릎까지 나왔다. 둘이 같이 굴렀다. 붉은 사초 쪽이었다.
켈리가 사초 둔덕에 누운 채로 하늘을 보았다. 숨이 찼다. 가슴 밑의 지팡이를 더듬어 보았다. 쇠 테가 손에 닿았다. 테 아래의 금이 더 벌어지지 않았다.

고슈는 서쪽 둔덕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늪 가운데에 남색 스물 남짓이 허리까지, 가슴까지 빠져 있었고 말 여섯이 울고 있었다. 고슈가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입술이 움직이다가 소리가 났다.
"…말 풀어."
아무도 듣지 않았다.
"…말 풀어. 말은 혼자 나와. 묶여 있으면 수레에 딸려 들어가."
소대장이 고슈를 보았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둔덕 위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소대장이 그 말을 들어야 할지 판단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첫 수레가 한 뼘 더 가라앉았다. 소대장이 손짓했다. 병사들이 멍에를 풀었다. 말들이 몸을 뒤틀며 물이끼를 헤쳐 나갔다. 고슈가 말들이 나가는 쪽을 보며 말했다. 말의 무릎 관절이 어떻게 생겼는지, 늪에 사는 말과 마른땅에 사는 말의 발굽이 어떻게 다른지를 말했다. 그 말은 사람에게 한 말보다 길었다.
"…갑옷 벗어."
그다음은 사람 차례였다.
"…등으로 누워. 무게를 넓게 펴. 창은 가로로 놔."
군인들이 갑옷 끈을 풀었다. 갑옷이 물이끼 위에 놓였다가 천천히 기울었다. 짐을 벗었다. 창을 가로로 놓았다. 그렇게 하자 덜 가라앉았다. 덜 가라앉는 것을 본 다음 남색이 따라 했다.
서기가 저울을 등에 진 채로 허리까지 빠져 있었다.
"…그거 벗어."
"저울은 못 버립니다. 관물입니다."
"…그럼 같이 가라앉아."
갈대 사이에서 바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서기가 둔덕 위를 한참 보았다. 그러고는 어깨끈을 풀었다. 저울이 등에서 떨어져 물이끼 위에 놓였다가 기울기 시작했다. 접시 하나가 먼저 잠겼다. 다른 접시가 하늘을 보며 한동안 떠 있었다. 그 위에 아무것도 올라 있지 않았다. 쇠추가 접시에서 굴러떨어져 먼저 들어갔고, 접시가 그 뒤를 따랐다.
켈리가 사초 둔덕에서 그것을 보았다. 끝까지 보았다. 가라앉는 데 오래 걸렸다.

남색의 군인들이 사초를 짚어 가며 나왔다. 갑옷도 창도 짐도 없었다. 수레 셋은 바퀴통까지, 그다음에는 짐칸까지 들어가 있었다. 곡식 자루는 모라 사람들이 내려놓은 둔덕 위에 한 줄로 남아 있었다.
소대장은 가죽 통 하나만 들고 나왔다. 둔덕에 앉아 통에서 작전도를 꺼내 무릎 위에 폈다. 품에서 연필을 꺼냈다. 오벨이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그 손을 보았다.
소대장이 붉은 점선 위에 두 줄을 긋고 옆에 적었다. 그러고는 손을 멈추고 한참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모라 쪽을 보았다. 장대 위의 집들을 보았고, 둔덕 위에 서 있는 모라 사람 스물을 보았다. 가위표를 친 동그라미 옆에 몇 글자를 더 적었다.
"…지도가 틀리면 고쳐서 내야 해요."
켈리가 오벨 옆에 와 있었다. 온몸이 검은 진흙이었다.
"안 고치면 다음에 오는 사람이 빠지니까요. 그것도 적혀 있어요."
오벨이 소대장의 무릎 위를 읽었다. 점선 옆에는 「통행 불가」였다. 동그라미 옆에는 「마을 있음 — 정정」이었다.
모라의 외는 이가 오벨 옆에 섰다.
"뭐라고 적었소."
"서쪽 길은 지나갈 수 없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사람이 산다고 적었습니다."
"적었소?"
"적었습니다."
모라의 외는 이가 소대장을 보았다. 소대장이 지도를 말아 통에 넣었다. 갑옷 없는 남색 스물 남짓이 사초를 짚으며 북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긴 게 아니오."
모라의 외는 이가 말했다. 그들이 갈대 너머로 보이지 않게 된 뒤였다.
"다시 못 오게 한 거요. 저쪽은 적은 것만 믿으니까."

일행이 소아레로 돌아온 것은 이틀 뒤 아침이었다.
배가 닿자 하벨이 장대 밑에 내려와 있었다. 하벨이 오벨을 보았고 오벨이 수첩을 꺼냈다. 징발령을 한 자도 빼지 않고 옮겨 적은 장이었다. 하벨이 그 장을 오래 읽었다. 「무주지」에서 한 번 멈췄고 「경로」에서 한 번 더 멈췄다.
"빌려 가도 되겠소."
"예. 돌려주시면 됩니다."
"돌려주겠소. 옮겨 적고 나서."
하벨이 수첩을 들고 큰 마루로 올라갔다. 탁자 끝 자기 자리에 앉아 종이를 한 장 폈다. 받는 곳을 먼저 적었는데 켈리가 있는 데서는 보이지 않았다.
큰 마루에 열넷이 다시 앉았다. 피난민 안건 스물넷째 회의였다. 회의는 지난 회의를 외는 데서 시작했다. 스물셋째 회의를 외는 차례가 오자 오나가 외웠다.
"모라의 외는 이. 차례가 아닌데 일어나 나갔소."
외는 이들이 들었다. 모라의 외는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루 아래에서 린이 그것을 보았다. 린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다음에 모라의 외는 이가 외웠다. 안건이 생긴 마을의 외는 이는 그 마을이 아는 것을 왼다.
"카르소 바르트. 수레 하나를 650으로 셌소. 맞았소. 벨류엔 오벨. 벨류엔 법을 한 시간 읽었소. 소대장이 다 들었소. 타르실 니카. 9할이라 했소. 맞았소. 소아레 린. 모라 동쪽 물을 빌렸소. 열넷이 남았소. 고슈. 말에게 오래 말했소."
모라의 외는 이가 한 번 쉬었다.
"땅 없는 켈리. 모라에서 아무것도 부러뜨리지 않았소."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고칠 데가 없었다. 손톱 밑에 아직 모라의 진흙이 있었다. 켈리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모라의 외는 이가 차례를 돌려 말했다. 감사 결의안을 올리겠다는 말이었다. 외는 이들이 차례로 대답했다.
「아직」이 셋 나왔다.
마루 끝에서 니카가 입술을 소리 없이 움직였다. 감사 결의안이 올해안에 끝날 확률을 계산하고 있었으나 아무도 몇 할이냐고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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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분


켈리는 해가 뜨기 전에 늪가에 있었다.
늪은 아직 잿빛이었다. 물과 하늘의 경계가 없었고 그 사이를 안개가 메웠다. 갈대 끝마다 이슬이 맺혀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이슬 하나가 떨어지면 그 갈대가 튀어 올랐다가 천천히 다시 숙였다. 어디선가 개구리가 한 번 울었고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둔덕 쪽에서는 솥 밑 불씨를 살리는 연기가 가늘게 한 줄 올랐다.
어제 그 아이 둘이 먼저 와 있었다. 둘이 무릎을 꿇고 풀을 들추고 있다가 켈리가 오는 것을 보고 동시에 일어났다. 무릎이 이미 젖어 바짓단이 짙었다. 하나가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잎이 다섯 갈래였다.
"줄기요."
아이가 줄기를 보았다. 붉었다. 아이의 얼굴이 펴졌다.
"그늘이요."
아이가 둘레를 보았다. 해가 아직 뜨지 않았으므로 어디나 그늘이었다. 아이가 그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켈리를 보았다. 켈리도 그런 경우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해 뜨고 다시 봐요."
셋이 해가 뜰 때까지 쪼그려 앉아 기다렸다.
해가 늪 건너 숲 위로 올라오자 안개가 아래부터 걷혔다. 그늘이 생겼다. 갈대 그림자가 물이끼 위에 길게 누웠고 풀 한 포기 한 포기가 해 쪽과 그늘 쪽으로 갈렸다. 아이가 손에 든 풀이 뽑혀 나온 자리를 다시 찾아 보았다. 갈대 그림자 안쪽이었다. 아이가 소리 없이 주먹을 쥐었다.

솥에 두 번째 풀이 들어간 것은 아침나절이었다. 노파가 그것을 보고 갈대를 내려놓았다.
"됐소. 몫은 했소."
"…예."
"어디로 가오."
"소아레요."
린이 대답했다. 노파가 늪 쪽을 보았다. 안개가 걷히는 중이었는데 걷힌 자리가 다 물이었다.
"우기 지나면 길이 바뀌오. 작년 길로 가지 마시오."
"알아요."
"아는 거하고 디디는 건 다르오."
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린은 이 늪 동쪽에서 나고 자랐다. 자란 사람은 길이 바뀌었다는 말을 들어도 발이 먼저 옛길로 간다. 소아레는 접경에서 하루 길이었다. 그 하루 길을 린은 이 년 만에 가는 것이었다.
떠나기 전에 켈리가 둔덕을 한 번 돌아보았다. 거적 아래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기어 나와 솥 쪽으로 줄을 서고 있었다. 거적 기둥마다 날을 세운 낫이 한 자루씩 기대어 있었다. 어제 바르트 옆에 쌓였던 것들이었다. 도랑에는 물이 제 방향으로 흘렀고 그 옆에 물동이 둘이 엎어져 말라 가고 있었다.

늪은 처음에는 땅처럼 보였다. 풀이 덮여 있었고 밟으면 조금 출렁였으나 꺼지지 않았다. 덮은 것은 풀이 아니라 이끼였다. 노란빛이 도는 초록이었고 군데군데 붉은 기가 번져 있었다. 디디면 물 먹은 천을 누를 때 같은 소리가 났고 발을 떼면 발자국 모양대로 물이 고였다가 천천히 빠졌다. 그 위로 잠자리가 낮게 날았다. 날개가 물이끼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풀 썩는 냄새가 났고, 이따금 발밑에서 거품이 올라와 터지면 그 냄새가 갑자기 짙어졌다.
린이 앞에 섰다. 맨발이 이끼 위를 디딜 때마다 발가락이 먼저 닿고 뒤꿈치가 따라 닿았으며 디딘 자리를 오래 누르지 않았다. 켈리가 그 뒤를 따라 린이 디딘 자리를 디뎠다. 그다음이 니카였고 오벨이었고 맨 뒤가 바르트였다. 다섯이 같은 자리를 디뎠다.
문제는 다섯의 무게가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린이 디딘 자리는 린의 무게를 받쳐 준 자리였다. 켈리는 린보다 무거웠으나 아직 괜찮았다. 니카도 괜찮았다. 오벨이 디딜 때 풀 아래에서 물이 배어 올라왔다. 바르트가 디뎠을 때 풀이 꺼졌다.

바르트의 오른발이 허벅지까지 들어갔다. 들어간 다리를 빼려고 왼발에 힘을 주자 왼발이 무릎까지 들어갔다.
"…어."
"아저씨?"
"움직이지 마. 아니 움직여. 아니."
바르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하는 동안 허리까지 들어갔다. 등의 배낭이 그를 아래로 눌렀다.
진흙이 차가웠다. 차가운 것이 바짓단으로 들어와 무릎 뒤를 타고 올라왔다. 빠진 자리 둘레에서 거품이 줄지어 올라와 터졌고 터질 때마다 썩은 달걀 냄새가 났다. 바르트가 팔을 휘저었다. 휘저은 팔이 이끼를 찢었고 찢어진 자리 밑으로 검은 물이 보였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물이었다.

오벨이 돌아서서 손을 내밀었다. 바르트가 그 손을 잡았다. 잡은 순간 오벨의 양발이 같이 들어갔다. 오벨이 내려다보았다. 발목이 없었고 정강이가 없어지는 중이었다.
"…이건 계약서에 없는 일입니다."
"뭐?"
"앞사람이 빠졌을 때 뒷사람이 당긴다는 조항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긴 사람까지 빠진 경우는…"
"지금 그 얘길 왜 해!"
"제11조요!"
니카가 외쳤다.
"급할 땐 문서 안 본다면서요!"
"…보고 있지 않습니다. 외우고 있습니다."
"닥쳐!"

니카가 멈춰 서서 둘을 보았다. 보는 눈이 셈을 하는 눈이었다.
"제가 당기면 7할로 저도 빠져요. 정확히는 73.28퍼센트 정도입니다."
"그럼 당기지 마!"
"3할은 안 빠지는데요. 정확히는 26.72퍼센트 정도입니다."
"…"
"해 볼게요."
니카가 오벨의 팔을 잡았다. 빠졌다. 니카가 자기 허벅지를 내려다보았다.
"…7할이었네요."
"알아!"

켈리가 돌아섰다. 셋이 허리와 허벅지와 정강이까지 늪에 들어가 있었다. 켈리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팔 안쪽이 뜨거워지려 했다. 강화를 걸면 바르트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그때 지팡이 가운데의 쇠 테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금이 간 지팡이에 마법을 통과시키면 대부분의 경우 버티지 못하고 부러진다.
「한 번은 돼. 한 번 쓰면 끝이야.」
켈리가 그 열기를 도로 내려보냈다. 손끝이 저렸다.
켈리가 지팡이를 내밀었다. 바르트가 끝을 잡았다. 켈리가 당겼다. 당기는 힘이 그대로 발로 내려갔고 켈리의 두 발이 발목까지 들어갔다. 켈리가 더 당겼다. 정강이까지 들어갔다.
"놔! 너까지 빠져!"
"…안 놔요."
"놓으라고!"
켈리가 놓지 않았다. 놓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지팡이를 쥔 손은 놓지 않게 되어 있었다.

린이 혼자 서 있었다. 맨발이 아직 풀 위에 있었다. 린이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늪에 댔다.
"…물길님. 아니. 물 맡으신 분. 아니."
린이 손을 뗐다가 다시 댔다. 실베인의 정령은 맡은 것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물길을 맡은 것과 늪을 맡은 것은 다르다. 린은 물길을 맡은 것의 이름을 열 가지 알았고 늪을 맡은 것의 이름은 하나도 몰랐다. 로엔 농지에는 늪이 없었다.
"…이름을 몰라."
"뭐?"
"얘 이름을 모른다고!"
늪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정령의 대답이라는 것을 린은 알았다.

그때 갈대 사이에서 목소리가 났다.
"…움직이지 마."
느린 목소리였다. 말과 말 사이가 길었다. 다섯이 그쪽을 보았다. 갈대가 둥그렇게 솟은 둔덕 위에 사람이 하나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헝클어진 회색 머리와 수염이 얼굴을 덮어 눈만 보였다. 짙은 갈색 눈이었고 깜박이는 일이 드물었다. 어깨에 가죽과 털을 겹쳐 둘렀고 끈에 꿴 뼈와 깃털이 목에서 흔들렸다. 쪼그린 무릎이 귀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다. 맨발이었는데 발톱이 손톱만큼 길었고, 발가락이 갈대 밑동을 움켜쥐고 있었다. 사람이 앉는 자세라기보다 무언가가 앉는 자세였다. 무릎에 손을 얹고 늪을 보고 있었다.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뭐 해?"
허리까지 잠긴 바르트가 물었다.
"…보는 중."
"뭘."
"…너희."

린이 그 사람을 보았다.
"…영감님?"
둔덕 위의 사람이 늪에서 눈을 떼어 린을 한참 보았다.
"…소아레 린. 컸네."
"영감님!"
"…또 빠졌네. 너 일곱 살 때도 여기서 빠졌어."
"저 지금 안 빠졌거든요!"
"…저 사람들은 너 따라온 거고."
린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둔덕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 쪼그린 채 말을 시작했다.
"…이건 물이끼야."
"알았으니까 꺼내 줘!"
"…물이끼는 물 위에 떠. 뿌리가 없어. 위쪽이 자라는 동안 아래쪽이 죽어. 죽은 게 쌓여서 두꺼워지는데, 두꺼워도 떠 있는 거야. 땅이 아니야."
"그러니까 꺼내 달라고!"
"…발을 빼려고 힘을 주면 아래가 빨아. 물 빠진 자리를 진흙이 메우려고 해서. 힘을 줄수록 들어가."
바르트가 힘을 빼려 했다. 빼는 법을 몰라서 더 줬다. 더 들어갔다.
"…힘 빼."
"빼고 있어!"
"…그게 주는 거야."

"…누워."
"뭐?"
"…등으로 누워. 무게를 넓게 펴. 물이끼가 받칠 만큼."
오벨이 먼저 누웠다. 다리가 박혀 있어서 상체만 뒤로 넘겼다. 넘기자 등이 물이끼에 닿았고 닿은 자리가 한참 출렁이다 멎었다. 다리가 조금씩 따라 올라왔다. 오벨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됩니다."
"…그거 봐."
그가 그다음에 한 말은 다리를 빼는 법이 아니었다.
"…물이끼 사이에 사는 딱정벌레가 있어. 등이 녹색이야. 이 철에 알을 낳는데 물이끼 줄기에 붙여. 줄기마다 하나씩만 붙여. 왜 하나씩만 붙이는지는 몰라. 내가 열한 해째 보고 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해. 알 붙은 줄기는 꺾지 마. 꺾으면 그 자리가 꺼져."
바르트가 자기 손 옆을 보았다. 쥐고 있던 줄기에 녹색 알이 하나 붙어 있었다. 바르트가 그 손을 아주 천천히 폈다.

켈리도 누웠다. 누우라는 말에 몸이 먼저 따랐다. 명령은 따를 줄 알았다. 다만 지팡이를 쥔 손은 그대로였고 그 끝을 바르트가 아직 잡고 있었다.
"…그 막대기."
"…지팡이요."
"…가로로 놔. 가슴 밑에. 무게를 나눠."
켈리가 지팡이를 가슴 밑에 가로로 깔았다. 깔자 몸이 덜 가라앉았다. 지팡이 양 끝이 물이끼를 넓게 눌렀다. 그 덕에 바르트 쪽 끝도 덜 꺼졌다.

니카가 누웠다. 누우면서 셈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셈을 하려면 몇 할인지 알아야 하는데 이 늪에서 몇 할이 나오는지 니카는 몰랐다. 모르는 판에서는 판을 아는 사람 말을 듣는 것이 맞다는 것을 니카는 도박장에서 배웠다.
남은 것은 바르트였다. 허리까지 잠긴 채 배낭이 등을 누르고 있었다.
"…배낭은 벗어."
"저울 들었어."
"…저울이 무겁지."
"저울은 못 버려."
"…그럼 같이 가라앉아."
바르트가 둔덕 위를 한참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어깨끈을 풀었다. 배낭이 등에서 떨어져 물이끼 위에 놓였다가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다. 바르트의 얼굴이 기우는 배낭을 따라 기울었다.
켈리가 누운 채로 지팡이 끝을 뻗었다. 끝이 배낭의 어깨끈에 걸렸다. 켈리가 지팡이를 비틀어 끈을 감았다. 배낭이 멈췄다.
바르트가 켈리를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에도 둔덕 위의 사람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뿌리 붉은 사초. 저거 자라는 데는 밑이 땅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자리에 가느다란 풀이 무더기로 서 있었다. 잎은 여느 풀과 같았는데 물에 잠긴 밑동이 핏줄처럼 붉었다.
"…거품 나는 데는 밟지 마. 늪이 숨 쉬는 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바르트 바로 옆에서 거품 하나가 올라와 퍽 하고 터졌다. 바르트가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백로 서 있는 데는 물이 무릎 아래."
멀리 갈대 끝에 회색 새 한 마리가 한 발로 서 있었다. 목을 어깨에 묻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말이 백로가 왜 한 발로 서는지로 넘어갔고, 거기서 이 늪의 백로가 다른 늪의 백로보다 목이 짧은 까닭으로 넘어갔다. 그 까닭은 아직 확인 중이었다.
그 말들 가운데 절반은 꺼내 주는 말이었고 절반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 어느 쪽인지는 듣는 사람이 골라야 했다.
"…이제 굴러. 저쪽. 사초 있는 데. 뿌리 붉은 거."
오벨이 먼저 굴렀다. 구르는 방향이 맞았다. 사초 둔덕에 닿자 그 밑이 단단했다. 니카가 굴렀다. 켈리가 지팡이로 배낭을 끌며 굴렀다. 바르트가 마지막이었다. 허리가 빠지는 데 한참 걸렸고 빠지면서 진흙이 커다란 소리를 냈다. 오벨이 그 소리를 듣고 한 번 웃었다가 바르트의 얼굴을 보고 그쳤다.

다섯이 사초 둔덕에 모였다. 넷은 허리 아래가 전부 검었고 린만 발목 아래가 검었다. 볕에 진흙이 마르면서 하얗게 갈라졌다. 오벨이 바짓단을 털자 마른 진흙이 비늘처럼 떨어졌고 그 밑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진흙이 다시 나왔다. 니카는 목에 두른 붉은 천부터 살폈다. 끝자락 한 뼘이 검게 젖어 있었다. 니카가 그것을 짜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르트가 배낭을 끌어안고 앉아 저울을 꺼내 보았다. 접시가 제자리에 있었다. 바르트가 소매로 접시를 닦았다. 소매에도 진흙이 묻어 있어서 닦을수록 접시가 더러워졌다. 바르트가 그것을 알면서도 몇 번 더 닦고 나서야 도로 넣었다.
니카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2,400이요."
"뭐가."
"빠져 있는 동안 셌어요. 할 게 없어서."
2,400을 세는 동안 둔덕 위의 사람은 말을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사십 분이었다.

그가 그제야 둔덕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걸음이 물이끼 위를 디디는데 출렁이지 않았다. 디딜 자리를 고르는 것 같지 않았는데 고른 자리만 디뎠다. 가까이서 보니 손톱이 길고 두꺼웠다. 웃지 않았는데도 송곳니 끝이 입술 사이로 조금 보였다.
"…고슈 영감님이야."
린이 말했다.
"고슈 뭐."
바르트가 물었다.
"그냥 고슈."
"땅 이름은."
"없어. 영감님은 어느 마을에도 안 살아. 늪을 돌아다녀."
실베인 사람은 사는 땅의 이름을 이름 앞에 붙인다. 붙일 땅이 없는 사람은 드물었다. 고슈가 그 드문 사람이었다.

켈리가 고슈를 보았다.
"…저도 땅이 없어요."
고슈가 켈리를 보았다. 오래 보았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라 무언가를 관찰하는 눈이었고, 켈리는 그 눈이 싫지 않았다. 바르트가 처음 켈리를 볼 때도 그런 눈이었다.
"…그래."
고슈의 입술이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가 나지 않다가 차츰 났다.
"…뭐 하는 거예요?"
"…외워 두는 거."
"뭘요."
"…너희."
고슈가 외운 것을 소리 내어 읊었다. 읊는 목소리가 말하는 목소리보다 더 느렸다.
"…다섯. 무게 순서대로 빠짐. 하나는 안 빠짐. 셋째로 무거운 것이 셈하고 빠짐. 가장 무거운 것이 저울 못 버림."
"…"
"…하나는 끝까지 막대기를 안 놓음."
"지팡이요."
"…막대기."
고슈가 고치지 않았다.
"영감님은 안 적어."
린이 말했다.
"본 건 다 외워. 늪 하나를 통째로 외우고 다녀."

켈리가 그 줄을 생각했다. 켈리에 관한 줄은 여럿이었다. 협조문은 종이에 적혔고 나루터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돌았다. 이 줄은 한 사람이 외웠다. 막대기라는 말만 틀렸고 나머지는 맞았다.
"…그건 맞아요."
고슈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고는 늪 쪽을 보았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길은 내일. 해 지면 늪이 숨을 쉬어. 그때 걸으면 안 돼."
고슈가 사초 둔덕 끝으로 가서 혼자 쪼그려 앉았다. 다섯과 열 걸음쯤 떨어진 자리였다. 거기서 그는 무릎을 세우고 늪을 보았다. 입술이 다시 조금씩 움직였다. 그날 밤 그는 그 자리에서 잤다.

해가 지자 늪이 숨을 쉬었다.
낮에는 드문드문 올라오던 거품이 쉬지 않고 올라왔다. 여기서 퍽 하고 터지면 저기서 퍽 하고 받았다. 소리가 늪 전체에 고르게 퍼져서 무언가 아주 큰 것이 물 밑에서 천천히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물 위로 희미한 푸른빛이 떠올랐다가 꺼졌다. 한 군데가 아니었다. 이쪽에서 떠오르면 저쪽에서 꺼졌고 꺼진 자리 옆에서 다시 떠올랐다.
"…저거 뭐예요."
켈리가 물었다. 대답한 것은 고슈가 아니라 린이었다. 고슈는 이미 늪을 보며 입술만 움직이고 있었다.
"늪이 내쉬는 숨에 불이 붙은 거래. 만지면 안 뜨거워. 근데 따라가면 안 돼. 따라가면 거품 나는 데로 가."
켈리가 그 불을 오래 보았다. 벨류엔의 불은 터지는 것이었고 터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 불은 터지지 않았다. 떠올랐다가 꺼지고 다시 떠올랐다.
사초 둔덕 끝에 고슈의 등이 검게 보였다. 푸른빛이 떠오를 때마다 그 등의 윤곽이 잠깐 드러났다가 다시 어둠에 잠겼다. 켈리는 지팡이를 가슴에 안고 누운 채 그 등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반나절


고슈는 해가 뜨기 전부터 늪을 보고 있었다.
다섯이 깼을 때 그는 어제 그 자리에 어제 그 자세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회색 수염 끝마다 이슬이 맺혀 있었고 어깨의 털가죽에도 이슬이 하얗게 앉아 있었다. 움직이지 않은 지 오래된 것에만 이슬이 그렇게 고르게 앉는다. 밤새 그러고 있었는지 아침에 다시 그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입술이 소리 없이 조금씩 움직였다.
"…길이 바뀌었어."
"얼마나."
바르트가 물었다.
"…작년 길은 없어. 재작년 길은 반만 있어."
"그럼 어떻게 가."
"…내가 볼게."
고슈가 일어섰다. 일어서서 갈대숲 쪽으로 걸어갔다. 갈대가 사람 키보다 높았고 그가 그 안으로 들어가자 등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갈대 위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털가죽이었다. 둘째로 날아온 것도 털가죽이었다. 셋째는 끈에 꿴 뼈와 깃털이었는데 날아오다 갈대 끝에 걸려 한참 흔들렸다.
"…뭐 하는 거야."
바르트가 말했다.
"뒤돌아요!"
린이 말했다.
"왜."
"뒤돌라고요! 다들!"
넷이 뒤돌았다. 니카가 고개를 반쯤 돌리다가 린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아니, 궁금하잖아요."
"궁금해도 안 돼."
"왜 안 되는데요."
"영감님 옷 벗었으니까!"
니카가 고개를 바로 했다.

갈대 쪽에서 소리가 났다. 사람 소리가 아니었고 짐승이 우는 소리도 아니었다. 무언가가 접히는 소리였다. 길게 한 번 났고 짧게 몇 번 났다. 등 뒤에서 나는 소리라 넷은 볼 수 없었지만 린은 갈대 끝을 보고 있었다. 갈대 끝이 한 줄로 흔들리다가 흔들리는 높이가 내려왔다. 사람 키 높이에서 흔들리던 것이 가슴께로, 무릎께로 내려왔다. 회색 깃털 하나가 갈대 위로 떠올랐다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조용해졌다.
"…돌아봐도 돼."
린이 말했다. 목소리가 작았다.
넷이 돌아보았다. 갈대 밑동에서 새 한 마리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회색이었다. 다리가 길었고 부리가 길었다. 백로였는데 백로치고는 목이 짧았다. 깃털 끝이 이슬에 젖어 짙은 회색이었고 등 쪽만 은빛이 돌았다. 다리는 마른 갈대 줄기 같았고 잔 비늘이 덮여 있었다. 발가락 넷이 물이끼 위에 부채처럼 펴졌다. 걸음이 느렸고 한 발을 들었다가 내리기 전에 한참 들고 있었다. 새가 다섯 쪽을 한 번 보았다. 눈 둘레에 노란 테가 있었다. 사람의 눈이 저렇게 노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보는 방식이 어제 둔덕 위의 그것과 같았다. 오래 보았고 깜박이지 않았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목이 짧은데요."
니카가 말했다.
"이 늪 백로는 원래 짧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그러고 나서 덧붙였다.
"그 까닭은 확인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새가 오벨을 한참 보았다. 오벨이 시선을 피했다.

켈리가 갈대 쪽으로 갔다. 갈대 끝에 걸린 뼈와 깃털 끈을 내렸고, 바닥에 떨어진 털가죽 둘을 주웠다. 가죽에서 냄새가 났다. 늪 냄새와 짐승 냄새와 오래된 사람 냄새가 섞여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개켰다. 소매를 안으로 접고 아랫단을 둘로 접고 어깨선을 맞추는 방식이었다. 털가죽에는 소매도 어깨선도 없었으나 켈리는 그 순서대로 개켰다.
"…그거 냄새 안 나?"
바르트가 물었다.
"나요."
"근데 왜 들어."
"아무도 안 들잖아요."
변신하면 아무것도 들 수 없다. 그래서 짐은 늘 남이 맡아야 한다. 켈리는 그것을 몰랐다. 다만 땅에 떨어진 옷을 보았고, 옷이 땅에 떨어져 있으면 주워서 개켜야 한다는 것만 알았다.

새가 걷기 시작했다.
물이끼 위를 걸었는데 아무 데나 딛지 않았다. 한 발을 들고 있다가 내릴 자리를 고른 다음에야 내렸다.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어떤 자리는 내리다 말고 다시 들었다.
"…따라가요. 저 발자국 그대로."
린이 말했다. 린이 앞에 섰고 새가 디딘 자리를 디뎠다. 새 발자국은 작았다. 발가락 넷이 찍힌 자리에 물이 배어 올라와 네 갈래 물길이 생겼다가 금방 흐려졌다. 흐려지기 전에 디뎌야 했다. 린의 맨발이 그 위를 디디면 발자국이 발바닥 가운데에 숨었다. 켈리가 그 뒤였고 니카가 그 뒤였으며 오벨이 그 뒤였다. 오벨의 안경이 땀에 미끄러져 코끝까지 내려왔는데, 올리려고 손을 들면 몸이 기울었으므로 그대로 두었다. 니카는 숨을 참고 걸었다. 숨을 쉬면 무거워진다고 믿는 것 같았다.
바르트가 맨 뒤였다. 바르트의 장화가 새 발자국을 디디면 발자국이 장화 밑에서 보이지 않았다. 바르트가 딛기 전에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거 맞아?"
"맞아요. 그 자리요."
"발자국이 내 엄지발가락만 해."
"그 자리 맞다니까요."
바르트가 디뎠다. 꺼지지 않았다. 바르트가 다음 발자국을 내려다보았다. 또 한참 보았다. 어제 허리까지 빠진 사람은 다음 날 발자국 하나를 그렇게 오래 본다.

늪 가운데쯤에서 새가 멈췄다.
멈춰서 한 발을 들었다. 들고 내리지 않았다. 다섯이 뒤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새는 물을 보았다. 이끼가 찢어진 자리에 검은 물이 손바닥만 하게 드러나 있었고 새가 그 물을 내려다보았다.
목이 나갔다.
빨랐다. 짧은 목이 그렇게 빨리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다섯 중 누구도 몰랐다. 물이 한 번 튀었고 목이 들어왔을 때 부리 끝에 은빛이 걸려 있었다. 손가락만 한 물고기였다. 꼬리가 한 번 떨렸다. 새가 고개를 젖히자 물고기가 없어졌다. 목이 한 번 꿀렁였다.
"…드셨어요?"
니카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새는 다시 가만히 있었다. 한 발로 서서 물을 보았다. 아까보다 더 백로 같았다. 백로가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저거 길 찾는 거예요, 쉬는 거예요?"
니카가 물었다.
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린의 얼굴이 하얬다.
"…영감님."
새가 움직이지 않았다.
"영감님!"
새가 고개를 돌렸다. 노란 눈이 린을 보았다. 한참 보았다. 그러고는 든 발을 내렸다. 내린 자리가 다음 길이었다.
린이 그 뒤를 디뎠다. 디디는 발이 조금 떨렸다. 켈리가 그것을 보았다. 린의 발이 떨리는 것을 켈리는 처음 보았다.

늪이 끝나는 자리에 단단한 둔덕이 있었다. 새가 그 위에 올라섰다. 다섯이 차례로 올라섰다. 바르트가 마지막으로 올라서서 발밑을 두 번 밟아 보았다. 단단했다. 바르트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새가 둔덕 끝 갈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돌아요."
린이 말했다. 이번에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켈리가 뒤돈 채로 개킨 털가죽을 어깨 너머 갈대 쪽으로 던졌다. 뼈와 깃털 끈은 던지지 않았다. 던지면 엉킬 것 같았다.
갈대 쪽에서 아까 그 소리가 다시 났다. 접히는 소리가 펴지는 소리로 바뀌어 났다. 아까보다 오래 났다.

고슈가 갈대에서 나왔다.
털가죽을 둘렀는데 하나는 뒤집혀 있었다. 털이 안으로 갔다. 고슈는 그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걸어 나와서 다섯 앞에 섰는데, 선 자세가 이상했다. 한 발로 서 있었다.
"…영감님. 발."
고슈가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보았다. 그러고는 든 발을 내렸다.
"…물."
"예?"
"…얕아. 저기. 길."
고슈가 손가락으로 둔덕 너머를 가리켰다. 말에 이어지는 것이 없었다. 말과 말 사이를 잇는 것들이 빠져 있었다. 어제 사십 분을 쉬지 않고 말하던 사람이 단어를 하나씩 떨어뜨렸다. 고슈가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문지르고 나서 그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비려."
니카가 고개를 돌렸다. 어깨가 떨렸다. 린이 니카의 발을 밟았다.
"…괜찮으세요?"
오벨이 물었다.
고슈가 오벨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안경."
"예. 오벨입니다."
"…안경."
고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벨은 더 고치지 않았다.

고슈가 린을 보았다. 보는 눈이 조금 풀렸다. 아는 얼굴을 볼 때의 눈이었다.
"…오나."
린이 웃었다.
"그건 할머니 이름이에요."
고슈가 린을 다시 보았다. 무언가를 찾는 눈이었다. 찾다가 못 찾았다.
"…오나 아니야?"
"오나 할머니 손녀요. 린이요. 소아레 린."
"…린."
고슈가 그 이름을 입 안에서 한 번 굴렸다. 굴리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는데, 끄덕인 것이 알아들어서인지 그냥 끄덕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린이 그 뒤로 웃지 않았다. 린이 고슈 옆으로 가서 뒤집힌 털가죽의 소매 자리를 잡았다. 고쳐 입히지는 않았다. 잡고만 있었다.

둔덕에서 소아레까지는 반나절 길이었다. 길이 있었다. 땅이 단단했고 걸으면 소리가 났다. 길 양쪽으로 버드나무가 늘어서 있었는데 가지가 물에 닿을 만큼 처져 있었다. 처진 가지 끝이 물을 스칠 때마다 동그란 물결이 하나씩 생겨 번졌다. 물가 진흙에 짐승 발자국이 어지러웠다. 고슈가 그 발자국들 앞에서 걸음을 늦췄고 입술이 빠르게 움직였다.
고슈가 맨 앞에서 걸었다. 걷다가 이따금 멈췄다. 멈추면 한 발을 들었다. 들고 있다가 생각난 듯 내렸다. 그러는 동안 다섯도 같이 멈췄다.
길가 웅덩이에서 개구리가 한 마리 뛰었다. 고슈의 목이 그쪽으로 빠르게 나갔다. 목만 나갔다. 몸은 따라가지 않았다. 고슈가 나간 목을 천천히 도로 들였다.
"…방금 그거."
니카가 말했다.
"아무 말 하지 마."
린이 말했다.
"아니, 방금 개구리를…"
"하지 마."
니카가 하지 않았다.

켈리가 고슈 옆에서 걸었다. 뼈와 깃털 끈을 아직 들고 있었다. 돌려줄 때를 놓쳤고, 고슈가 달라고 하지 않았다.
둘은 말을 하지 않았다. 고슈가 멈추면 켈리도 멈췄다. 고슈가 한 발을 들고 있는 동안 켈리는 두 발로 서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일은 켈리가 잘하는 일이었다.
"…아파요?"
켈리가 물었다. 한참 걸은 뒤였다.
"…안 아파."
"그럼요."
고슈가 대답하기 전에 오래 있었다. 단어를 찾는 것 같았다.
"…덜 돌아와."
켈리가 그 말을 들었다. 덜 돌아온다는 말을 켈리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덜」이라는 말은 알았다. 덜 지면 덜 받는다. 덜 먹으면 덜 무겁다. 그 말이 붙으면 언제나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다 돌아와요?"
"…오늘은."
고슈가 그렇게 말하고 다시 걸었다. 그 뒤로 켈리는 묻지 않았다.

해가 기울 무렵에 연기가 보였다. 낮은 지붕들이 물가를 따라 줄지어 있었고 지붕마다 갈대를 이었다. 집들은 땅에 바로 서 있지 않았다. 굵은 장대 여럿이 집을 받쳐 들고 있어서 마루 밑으로 물이 드나들었다. 집과 집 사이에 널빤지 다리가 놓여 있었고 다리 난간마다 그물이 걸려 말라 가고 있었다. 물 위에 좁은 배 서너 척이 매여 있었다. 물고기 굽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왔다. 고슈의 목이 또 그쪽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린이 걸음을 멈췄다. 멈추고 한참 그쪽을 보았다.
"…소아레예요."
고슈가 린 옆에 섰다. 두 발로 서 있었다. 고슈가 린을 보았다.
"…소아레 린."
린이 고슈를 보았다.
"…예."
"…컸네."
어제 늪가에서 했던 말이었다. 린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소매로 눈가를 한 번 훔쳤다. 늪 바람이 눈에 들어간 것이라고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린이 말했다.

돌아오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아침에 갈대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해 질 녘에야 린의 이름을 바로 불렀다.
"…목 짧은 까닭."
고슈가 불쑥 말했다.
"예?"
"…백로. 목 짧은 까닭. 아까 알았어."
"뭐였는데요."
고슈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나오는 것이 없었다. 입을 다물었다.
"…두고 왔어."
"예?"
"…새일 때는 알았는데. 돌아오면서 두고 왔어."
고슈가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이 오래된 일이라는 뜻이었다.

마을 어귀 널빤지 다리 위에서 아이 하나가 그물을 걷다가 이쪽을 보았다. 아이가 그물을 놓고 소리를 질렀다.
"소아레 린 왔다!"
그 소리에 장대 위 집들에서 머리가 하나둘 나왔다. 마루 끝에 앉아 그물코를 깁던 노인이 바늘을 멈추고 린을 보았다. 린의 얼굴을 보았고, 그다음에 린의 손목을 보았다. 린의 손목에는 조가비와 유리와 나무를 깎은 것들이 감겨 있었다. 노인이 그것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많이 줄었구나."
린이 손목을 등 뒤로 감췄다. 켈리가 그 손목을 떠올려 보았다. 로엔의 물길 앞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팔목마다 다발로 감겨 있었다. 지금은 다발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 켈리는 짚어 낼 수 없었다. 날마다 옆에서 걸었는데도 그랬다.

고슈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마을 어귀 둔덕에 쪼그려 앉았다. 린이 들어오라고 했다.
"…사람 많은 데선 잠이 안 와."
"그럼 내일은요."
"…내일도 안 와."
"아니, 내일은 어디 가냐고요."
고슈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켈리를 보았다. 켈리의 손에 아직 뼈와 깃털 끈이 들려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내밀었다. 고슈가 받지 않았다.
"…네가 갖고 있어."
"…예?"
"…다음에도."
고슈가 그렇게 말하고 늪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입술이 다시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켈리가 끈을 내려다보았다. 뼈 일곱 개와 깃털 다섯 개가 꿰여 있었다. 뼈는 작은 짐승의 것이었고 깃털은 전부 회색이었다.
켈리가 그것을 자루에 넣지 않았다. 손에 들고 마을로 들어갔다.

 

교대

 

**자플랜 왕국 · 툰델 방면 기계화 선봉대**

툰델 평야의 풀은 어느 자리에서 뚝 끊겼다. 평야는 북에서 남으로 완만하게 내려앉았고 초여름이라 풀이 무릎까지 차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면 풀이 한쪽으로 쓰러졌다가 일어났는데, 그 물결이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다가 매번 같은 자리에서 멈췄다. 거기서부터는 맨땅이었다. 서른 보 남짓한 너비의 누런 흙이 동서로 6킬로미터를 달렸고, 그 위에 붉게 녹슨 쇳조각이 씨앗처럼 박혀 있었다. 63년 동안 자플랜이 남쪽으로 쏜 것들이 거기서 멈추고 거기 떨어졌다. 떨어진 것이 쌓인 땅에는 풀이 나지 않았으므로 맨땅의 남쪽 가장자리는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곧았다.
그 가장자리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이 거기 서 있었다. 거기서 조금 물러난 자리에 낮은 흙둑이 평야를 가로질렀고, 흙둑 위에는 500미터마다 말뚝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열둘이었다. 말뚝마다 남색 옷이 하나씩 붙어 앉아 있었다.

유리크 판 카르소가 툰델에 온 것은 아흐레 전이었다. 하렐의 일이 있고 열흘 뒤에 북부군 사령부가 그를 동쪽으로 보냈다. 명령서에는 툰델 방면 기계화 선봉대 지휘라고 적혀 있었다. 툰델은 63년 동안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는 자리였고, 그런 자리에 기계화 부대를 맡기는 것은 날 선 칼을 칼집째 벽에 걸어 두는 일과 같았다. 명령서 아래에 란돌프 그라이엔의 서명이 있었다. 좌천이라는 말은 그 종이 어디에도 없었다.
유리크가 첫날 한 일은 흙둑 맞은편 둔덕에 엎드려 망원경을 댄 것이었다. 기름때가 배어 검어진 장갑 손가락이 놋쇠 통을 감쌌고, 왼팔에 두른 회색 띠가 풀잎에 쓸렸다. 남색은 잘 보였다. 1킬로미터 밖에서도 가슴께의 은빛 문장이 볕을 받아 이따금 번쩍였다. 벨류엔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집검관이 멀리서도 제 마법사를 찾을 수 있도록 문장을 크게 박았는데, 크게 박은 것은 자플랜의 망원경 안에서도 똑같이 컸다.
망원경이 서쪽에서 일곱째 말뚝에 멈췄다. 거기 붙은 남색이 열둘 가운데 가장 작았다. 옷이 몸에 비해 커서 앉아 있는데도 자락이 흙에 끌렸고, 말뚝 머리에 얹은 두 손은 접어 올린 소매에 반쯤 묻혀 있었다. 아침 6시에 그 아이가 거기 있었다. 오후 2시에도 있었다. 해가 지고 흙둑을 따라 등불이 켜졌을 때 유리크가 다시 망원경을 들었고, 등불 아래 같은 자리에 같은 크기의 남색이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도 있었다.

유리크가 관측 초소로 내려갔다.
"일곱째 말뚝은 교대가 언제 오나."
초소장은 그 자리에서 네 해를 보낸 사람이었다. 그는 질문을 잘못 들은 줄 알고 한 번 되물었고,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알자 선반에서 일지를 꺼냈다.
"예전에는 하루 세 번이었습니다. 6시와 2시와 10시."
"지금은."
초소장이 일지를 넘겼다. 몇 장을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
"…적혀 있지 않습니다."
"왜."
"칸이 없습니다. 적 마법사 인원은 정오에 한 번 세어서 적습니다. 교대는 적는 칸이 없습니다."
유리크가 일지를 받아 정오의 칸을 훑었다. 지난 넉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12였다. 12였으므로 아무도 그 줄을 다시 들여다보지 않았다. 숫자가 같으면 사람들은 그 아래에 있는 것도 같다고 믿는다.
그날 저녁 유리크가 정오 칸 옆에 세로줄을 하나 그었다. 칸 머리에 「교대」라고 적었다. 초소 세 곳에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말뚝 열둘을 나눠 지켜보게 했고, 누가 흙둑으로 올라오고 누가 내려가는지를 그 칸에 적게 했다. 이레 뒤에 칸이 찼다. 말뚝 열둘에서 이레 동안 교대는 세 번이었다. 셋 다 누가 쓰러진 뒤였다. 한 말뚝의 남색이 업혀 내려가고 나서 새 남색이 남쪽 길로 올라오기까지 첫 번에는 다섯 시간이 걸렸고 두 번째는 일곱 시간이 걸렸다. 세 번째는 이튿날 아침이었다. 그사이 빈 말뚝은 양옆의 말뚝이 덮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두껍게 덮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시간 동안 빈 말뚝 앞으로 쇠살을 쏘아 본 자플랜 노포는 없었다.

열둘에 열둘이었다.

자플랜 북부군 교범에는 결계를 치지 말라는 조항이 있었다. 63년의 경험이 그 한 줄로 줄어 있었다. 결계에 쇠살을 쏘면 결계는 버텼고, 버티다 지치면 벨류엔은 새 마법사를 올려 보냈으며, 새 마법사가 세운 결계는 처음과 똑같이 단단했다. 쏜 만큼 버리는 셈이었다. 그래서 자플랜의 노포는 결계를 비켜 쏘거나 아예 쏘지 않았다. 그 조항을 쓴 사람도 그것을 배운 사람도 조항이 무엇을 전제로 하는지는 따로 적어 두지 않았다. 새 마법사가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전제는 석 달 전에 사라졌고 조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교범은 조건이 바뀐 뒤에도 오래 남는다.
결계가 무엇으로 버티는지 유리크는 알지 못했다. 벨류엔이 그것을 적어서 내보낸 적은 없었다. 다만 이레치 칸에 세 번 적힌 말이 있었다. 쓰러져 업혀 내려감. 무엇으로 버티든 버티는 쪽에 바닥이 있다는 뜻이었다. 바닥이 있는 것은 기계도 같았다. 연료통이 작은 기계가 먼저 선다. 유리크는 일곱째 말뚝을 골랐다. 부관이 고른 까닭을 물었을 때 그는 망원경을 건네주었다. 부관이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고 나서 아무것도 더 묻지 않았다.
계산은 단순했다. 노포 여섯 문으로 일곱째 말뚝 앞을 2분에 한 발씩 친다. 결계에 맞은 쇠살은 날 하나 상하지 않고 맨땅에 떨어졌다. 무엇에 부딪쳤든 쇠살 쪽에는 흔적이 남지 않았다. 흔적은 다른 데 남았다. 맨땅에 떨어진 쇠살은 날이 밝은 뒤에 주워 오면 그만이었다. 자플랜이 한 발에 치르는 값은 줍는 수고가 전부였고, 저쪽이 한 발에 치르는 값은 한 번이었다. 무엇으로 치르는지는 몰라도 한 번은 한 번이었다. 외골격 마흔 벌은 운반차 스무 대에 실어 일곱째 말뚝 맞은편 800미터 뒤에 대 둔다. 비면 내려서 걷는다.
유리크는 새벽 2시면 빌 것이라고 보았다. 이번에는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노포도 외골격도 쇠살도 위임 범위 안에 있었다. 하렐에서 배운 것이었다.

**벨류엔 마법왕국 · 툰델 결계선 제6구간**


밤 10시에 첫 발이 왔다. 쇠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 부딪치는 소리는 둔했다. 솜으로 싼 종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동쪽에서 한 번 났고, 조금 있다가 또 났다. 그 간격이 밤새 같았다.
아르노 키스는 여섯째 말뚝 뒤의 구덩이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구덩이는 어른 하나와 아이 하나가 들어가면 꼭 차는 크기였다. 말뚝은 허리 높이의 참나무였고 머리에 촉매를 녹여 부은 테가 둘려 있었다. 흐린 잿빛이었다. 결계 십일호가 그 테에 두 손을 얹고 앉아 있었다. 열세 살이었다. 테에는 손바닥 둘이 놓이는 자리만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었는데, 그 자리를 닳게 한 손이 십일호의 것만은 아니었다. 말뚝은 아이보다 오래 산다. 십일호는 석 달 동안 그 자세로 잠드는 법을 익혔다. 고개는 떨구어도 손은 테에서 떨어지지 않게 잠드는 법이었다.
소리가 날 때마다 십일호의 손등이 한 번씩 떨렸다. 500미터 밖에서 맞는 것인데도 그랬다. 결계는 말뚝마다 따로 서지 않고 이웃과 조금씩 겹쳐 서 있어서, 일곱째가 맞으면 여섯째의 테도 그 끝을 조금 받았다. 아르노는 집검관으로 열한 해를 지냈다. 그동안 맡은 아이가 넷이었고 십일호가 다섯째였다. 그는 십일호의 손등을 보다가 동쪽을 보았다. 흙둑을 따라 걸린 등불 아래 일곱째 말뚝의 남색이 보였다. 소리가 날 때마다 그 남색이 한 번씩 움찔했다. 움찔하는 폭이 자정 무렵부터 커졌다.

새벽 2시가 조금 넘어 일곱째의 남색이 무릎을 꿇었다. 손은 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아이의 집검관이 구덩이에서 일어나 구간 지휘소 쪽으로 사람을 보내는 것이 등불 아래로 보였다.
구간 지휘소에서 그 요청이 종이가 되는 데 사십 분이 걸렸다. 방면 지휘소에서 내려온 답은 한 줄이었다. 「제7 말뚝 보강. 인접 구간 가용 인원으로.」 그 줄을 쓴 사람은 가용 인원이라는 말을 정확한 뜻으로 썼다. 말뚝에 붙어 있지 않은 결계형, 쉬고 있는 결계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구간 서기가 명부를 펴서 가용 칸을 찾았고 칸은 비어 있었다. 석 달째 비어 있었다. 서기는 그 빈칸을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래 본다고 무엇이 채워지지는 않는다. 그는 전령에게 명령을 불러 주었는데, 불러 주는 사이에 한 낱말이 빠졌다.
"칠번 보강. 인접 구간에서."

전령이 여섯째 구덩이에 닿은 것은 새벽 4시였다.
"인접 구간의 누구를 말하는가."
"인접 구간이라고만 들었습니다."
아르노가 동쪽을 보았다. 여덟째 말뚝은 일곱째 너머에 있었고 그쪽 남색도 밤새 끝을 받아 왔다. 여덟째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여섯째는 조용했다. 노포는 일곱째만 쳤고 서쪽으로는 한 발도 오지 않았다.
교범에는 이런 경우를 위한 문장이 있었다. 이웃 말뚝의 겹침이 빈 말뚝을 「잠시」 덮는다는 문장이었다. 잠시가 몇 분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아르노는 그 문장을 열한 해 동안 몇 번 읽었고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다. 쓸 일이 없었다. 말뚝 뒤에는 늘 다음 아이가 있었다.
"한 시간이다."
아르노가 말했다. 전령에게 한 말인지 자기에게 한 말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한 시간 뒤에 돌아온다. 그렇게 적어 두게."
"예."
"십일호."
"예. 알겠습니다."
십일호가 테에서 손을 뗐다. 떼는 순간 테가 낮게 한 번 울었다. 바로 옆에 있던 아르노도 들었는지 확실하지 않을 만큼 낮은 소리였다. 둘은 흙둑 뒤의 교통호를 따라 동쪽으로 걸었다. 하늘이 동쪽부터 잿빛으로 묽어지고 있었다. 십일호의 옷자락이 교통호 벽에 스쳤고, 가슴께의 은빛 문장이 그 잿빛 아래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 멀리서도 보이라고 박은 문장이었다.
일곱째 구덩이에서 결계 십팔호는 무릎을 꿇은 채 말뚝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두 손은 여전히 테 위에 있었다. 입가에 검은 줄이 하나 말라붙어 있었다. 열두 살이었고, 저울에 오르면 31킬로그램이었다. 십일호가 그 옆에 무릎을 꿇고 테의 남은 반쪽에 손을 얹었다. 손이 넷이 되었다. 다음 발이 왔을 때 둘이 같이 움찔했다. 움찔하는 폭이 반으로 줄었다. 아르노가 서쪽을 돌아보았다. 500미터 밖 여섯째 말뚝의 테 위에 등불 빛만 얹혀 있었다.

**자플랜 왕국 · 툰델 방면 운반차 대기선**

 

같은 밤 요른 하이덴은 운반차 바퀴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 소리를 셌다. 노포가 쏘는 소리는 날카로웠고 쇠살이 저쪽에 닿는 소리는 둔했다. 날카로운 것이 하나 나면 조금 있다가 둔한 것이 하나 왔다. 그 둘을 한 번으로 셌다. 밤 10시부터 세기 시작해 자정에 예순을 넘겼고 새벽 2시에 백스물이 되었다. 요른은 무엇이든 세는 사람이었다. 세는 동안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툰델에 온 지 나흘째였다. 하렐에서 돌아와 사흘을 누워 있을 때 차출 명령이 다시 내려왔다. 명령을 낸 부서는 제3 보루의 인원표를 보고 있었고, 그 표에서 요른은 여전히 손이 좋은 공병이었다. 부상자 명단은 다른 부서에 있었다. 정비반장은 차출 서류를 읽고 나서 요른의 왼팔을 매단 삼각건을 보았고, 다시 서류를 보았다. 서류에는 삼각건을 적는 칸이 없었다.
"한 손이면 반 몫은 하겠지. 바퀴 봐."

운반차는 무릎 높이밖에 안 되는 넓은 짐판에 쇠바퀴 넷을 단 것이었고 말 여섯이 끌었다. 짐판마다 외골격이 두 벌씩 실려 있었다. 사람 모양으로 짠 쇠틀이었다. 등에 둥근 연료통을 졌고 무릎과 팔꿈치마다 쇠 관절이 맞물렸으며, 가슴판을 열면 그 안에 사람 하나가 들어갔다. 한 벌이 120킬로그램이었다. 그 무게로 걸으면 연료를 먹었으므로 전선 가까이까지는 실어서 갔다. 짐판 위에서 외골격은 무릎을 꿇은 모양으로 묶여 있었고, 그것을 입을 병사들은 그 옆 땅바닥에서 외투를 덮고 잤다. 어둠 속에서 보면 쇠로 된 사람 마흔이 기도를 하는 것 같았다.
새벽 2시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부들이 일어나 말에게 물을 먹였다가 다시 누웠다. 정비반장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2시라더니, 하고 중얼거렸다. 요른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셌다. 백서른. 백마흔. 셈이 쌓이는 동안 그는 봄을 생각했다. 봄이 되면 교대라고 했었다. 봄에 교대 명단이 한 번 내려왔고 그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이름이 왜 없는지 물을 곳은 없었다. 저 둔한 소리가 닿는 말뚝 뒤의 아이에게도 석 달째 교대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요른은 알지 못했다.

195번째에서 명령이 왔다. 4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유리크 판 카르소가 말을 타고 운반차 줄을 따라 달려왔다. 그는 방금 망원경 안에서 일곱째 말뚝에 남색 둘이 나란히 붙은 것을 보았고, 여섯째 말뚝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았다.
"서쪽으로 500. 여섯째 말뚝. 지금."
마부들이 뛰어 일어났다. 말 백스무 마리가 한꺼번에 발을 굴렀다. 쇠바퀴 스무 대가 다져진 평야 위를 구르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땅을 타고 남쪽으로 건너갔다. 요른은 아홉째 운반차의 짐판 끝에 매달렸다.
300미터쯤 갔을 때 아홉째 운반차의 오른쪽 앞바퀴가 땅속으로 꺼졌다. 회랑의 땅은 어디를 파도 옛 참호가 나왔다. 63년 동안 판 것을 63년 동안 메웠고, 메운 흙은 위에서 보면 다른 흙과 같았으나 밟으면 달랐다. 짐판이 기울었고 묶인 외골격 둘이 밧줄째 한쪽으로 쏠렸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말들이 버둥거렸다. 뒤에 오던 운반차들이 그것을 비켜 돌아갔다.

요른이 짐판에서 뛰어내렸다. 짐판 옆구리에 참호를 덮을 판자가 묶여 있었다. 오른손으로 한 장을 뽑아 바퀴 앞의 무른 흙에 비스듬히 꽂았다. 왼팔은 쓸 수 없었으므로 판자 끝을 무릎으로 눌렀다. 무릎으로 누르면 각이 안 맞는다는 것을 그는 하렐에서 배웠다. 각이 안 맞으면 쐐기가 튄다. 그는 판자 밑에 흙을 한 줌 쳐 넣고 쐐기를 대고 망치로 쳤다. 두 번 만에 판자가 섰다.
"당겨!"
마부가 채찍을 내렸다. 말 여섯이 앞으로 몸을 던졌고 바퀴가 판자를 타고 올라왔다. 바퀴 밑에서 판자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는데, 그때는 이미 바퀴가 무른 흙을 넘은 뒤였다.
유리크가 말을 탄 채 그 옆을 지나갔다. 그가 본 것은 운반차가 빠져나오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그는 외웠다. 운반차 밑에서 기어 나오는 자의 왼팔에 감긴 천은 보지 않았다.

5시가 되기 전에 운반차 스무 대가 여섯째 말뚝 맞은편에 섰다. 유리크가 노포 하나를 돌려 세우게 했다.
"여섯째에 한 발."
쇠살이 날아갔다. 맨땅 위를 지나 그 곧은 가장자리에 닿았고, 닿아서 멈추지 않았다. 계속 날아가 흙둑을 넘었고 흙둑 너머 풀밭에 비스듬히 박혔다. 박힌 자리에서 풀이 흔들렸다. 그 자리에 있던 자플랜 사람 가운데 그 가장자리를 무언가가 넘어가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아버지들도 본 적이 없었다.
외골격병들이 가슴판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판이 닫히고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마흔 번 났다. 등의 연료통에서 쉭 하고 김이 빠졌다. 쇠로 된 사람 마흔이 무릎을 펴고 짐판에서 내려섰고, 내려설 때마다 땅이 발바닥으로 느껴질 만큼 울렸다. 그들이 맨땅을 건넜다. 녹슨 쇳조각이 쇠 발밑에서 부서졌다. 맨 앞의 것이 그 가장자리에 닿았고,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디뎠다. 아무것도 그것을 막지 않았다.

요른은 판자 두 장을 오른쪽 어깨에 걸고 그 뒤를 따랐다. 흙둑 뒤에는 벨류엔의 교통호가 있을 것이었고, 120킬로그램짜리가 거기 빠지지 않게 다리를 놓는 것이 공병의 일이었다. 흙둑에 올라섰을 때 바로 옆에 여섯째 말뚝이 있었다. 허리 높이의 참나무였고 머리에 잿빛 테가 둘려 있었다. 쇠도 아니고 돌도 아닌 것이었다. 테에는 손바닥 둘이 놓이는 자리만 반들반들했다. 요른은 목수의 아들이었다. 연장 자루가 어떻게 닳는지 알았고, 그렇게 닳으려면 몇 해가 걸리는지도 알았다.
동쪽에서 무언가가 번쩍였다. 요른의 눈이 먼저 그쪽으로 갔다. 베르단의 그 밤 이후로 그는 남색을 보면 가슴께부터 보았다. 500미터 밖 일곱째 말뚝에 남색 둘이 작게 붙어 있었고, 가슴께의 은빛이 막 떠오르는 볕을 받아 한 번 더 번쩍였다. 외골격 몇이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자 그 둘이 말뚝에서 떨어졌다. 하나는 누군가의 등에 얹혀서였고 하나는 누군가에게 팔을 끌려서였다. 남색이 흙둑 뒤로 사라졌다.
요른은 판자를 교통호 위에 걸쳤다. 첫 외골격이 그 위에 발을 올렸고 판자가 활처럼 휘었다. 요른이 무릎으로 판자 끝을 눌렀다.
선이 움직였다. 63년 동안 움직이지 않은 선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문장이 떠올랐다. 세상이 하나가 되면 싸울 상대가 없어진다. 그 문장이 끝이 언제인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제3 보루 앞 참호 바닥에서 알았다. 그런데 오늘 선이 움직였다. 움직이는 선이라면 어딘가에 끝이 있을 것이었다. 요른은 그것이 기뻤다. 120킬로그램의 쇠가 판자 위를 지나가는 동안 그는 무릎으로 판자를 누르며 기뻐했고, 기뻐하는 것이 맞는지는 따지지 않았다. 따질 틈이 없었다. 판자가 서른 장은 더 필요했다.

**벨류엔 마법왕국 · 툰델 제2선**


구호는 그 밤을 흙둑 300미터 뒤의 참호에서 보냈다. 열여섯이거나 열일곱이었다. 본인도 정확히는 몰랐다. 제4마도대가 툰델 제2선으로 옮겨 온 것은 열흘 전이었다. 결계형이 모자라는 구간에 포격형을 붙인다는 명령이었고, 그 명령이 무엇을 메우려는 것인지는 명령서에 적혀 있지 않았다. 밤새 동쪽에서 둔한 소리가 났다. 구호는 그 소리를 세지 않았다. 세면 다음 것을 기다리게 되었다. 옆자리에서 칠호가 자고 있었다. 새 칠호는 열세 살이 되어 있었고 어디서든 잤다. 로브 소매를 두 번 접어 올린 채로 무릎을 안고 잤다.
동이 틀 무렵 소리가 바뀌었다. 둔한 소리가 멎고, 대신 북쪽 멀리서 낮게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평야를 건너왔다. 무거운 것 여럿이 한꺼번에 구르는 소리였다. 참호 안의 병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 굴러온다."
"굴러온다!"
그날 툰델의 벨류엔 병사들이 그것에 붙인 이름이 「굴러오는 것」이었다. 본 것이 아니라 들은 것에 붙인 이름이었다. 소리가 먼저 왔고 모양은 나중에 왔다. 그 이름이 쇠를 이끈 한 사람을 가리키게 된 뒤에도, 그 말을 처음 쓴 병사들은 그것이 사람을 부르는 말이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모양은 여섯째 말뚝 쪽에서 왔다. 잿빛 새벽 속에서 사람보다 한 뼘 크고 사람보다 넓은 것들이 흙둑을 넘어왔다. 걸을 때마다 쉭 하고 김 빠지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마흔 겹으로 겹쳤다. 흙둑 위에서 그것들이 잠깐 멈췄다가 아래로 내려섰다. 내려서는 무게가 참호 바닥까지 울렸다.
"포격."
구호의 집검관이 말했다.
"구호. 맨 앞."
"예. 알겠습니다."
구호가 참호 턱에 지팡이를 걸쳤다. 끝에 정밀 촉매를 박은 가는 지팡이였다. 맨 앞의 것을 그 끝에 올려놓고 숨을 멈췄다. 손끝에서 열이 빠져나갔다. 흰빛이 낮게 한 줄 지나가 맨 앞의 것 가슴판에 닿았다. 그것이 뒤로 한 번 휘청했다. 가슴판 한가운데가 붉게 달아올라 우묵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걸었다. 코밑이 따뜻해졌다.
두 번째는 무릎을 노렸다. 쇠 관절이 맞물린 자리였다. 흰빛이 지나갔고 관절이 터졌다. 그것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꾸라진 것을 뒤의 것들이 비켜 돌아서 계속 왔다. 구호가 소매로 코밑을 훔쳤다. 소매 끝에 묵은 자국이 몇 겹 있었고 그 위에 새것이 하나 더해졌다. 집검관이 수첩에 적었다. 사용 2회, 유효 1회. 첫 발은 맞았으나 세우지 못했으므로 유효에 들지 않았다.

그때 흙둑 쪽에서 병사 하나가 참호 사이 길로 뛰어 내려왔다. 등에 작은 남색을 업고 있었다. 업힌 아이의 다리가 병사의 걸음을 따라 흔들렸는데, 흔들리는 모양이 걷는 다리의 것이 아니었다. 무릎 아래가 제 무게대로만 흔들렸다. 그 뒤로 다른 병사가 또 하나를 부축해 왔다. 그 아이는 걸었고 걸으면서 기침을 했다. 맨 뒤에 칼을 찬 사내 둘이 따랐다. 둘 다 손을 칼자루에 얹고 있었다. 구호는 그 손을 보았다. 왜 거기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는 편이 견디기 쉬운 것이 이곳에는 많았다.
제2선은 정오까지 버텼다. 버틴 것은 흙둑에 남은 말뚝들이었다. 여섯째와 일곱째가 빈 자리로 쇠가 들어오는 동안 그 양옆의 아이들은 테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그래서 빈자리는 더 넓어지지 않았다. 오후 3시에 후퇴 명령이 내려왔다. 다섯째 말뚝과 여덟째 말뚝은 줄이 다 빠질 때까지 남았다. 남은 두 아이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구호는 듣지 못했다.
후퇴는 걸어서 했다. 툰델 남쪽으로 난 길은 하나였고 그 길에 수레와 들것과 사람이 한 줄로 늘어섰다. 하사관 하나가 줄을 따라 오르내리며 외쳤다.
"줄 맞춰! 도망치는 거 아니다! 후퇴다!"
구호의 귀가 도망이라는 말에서 멈췄다. 넉 달 전 겨울 막사에서 그 말을 들었다. 칠호 아직 안 왔대. 도망쳤대. 그때 그 말은 한 사람에게 붙은 말이었고, 붙은 사람은 그날로 이 줄에서 빠졌다. 지금은 천 명이 남쪽으로 걷고 있었고 그것은 후퇴라고 불렸다.

해가 졌다. 길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앞사람의 등만 보고 걸었다. 칠호가 옆에서 걸었다. 걸음이 자꾸 처졌다. 구호가 소매에서 빵을 꺼냈다. 그날 아침 배식에서 삼분의 일을 남겨 둔 것이었다. 칠호가 그것을 받아 한입 베어 물고 나머지를 소매에 넣었다. 구호는 그것을 곁눈으로 보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호."
"응."
"전에 칠호 말이야. 도망친 칠호."
"응."
"그 칠호는 이것보다 멀리 갔어?"
구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찾으려고 셈을 해 보았다. 새 자리까지 12킬로미터라고 했다. 오후에 떠나 밤이 깊어서야 끝나는 거리였다. 칠호는 하루를 걷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멈추는 자리가 곧 붙잡히는 자리였을 테니까. 그렇게 넉 달이었다. 넉 달을 걸으면 얼마인지 구호는 알지 못했다. 그만큼 걸어 본 사람이 이 줄에는 없었다.
"…몰라."

자정이 가까워서야 줄의 머리가 멈췄다. 새 자리에는 흙둑이 없었다. 공병들이 횃불 아래에서 땅을 파고 있었고 수레에서 말뚝을 내리고 있었다. 참나무에 잿빛 테를 두른 말뚝이 땅바닥에 나란히 눕혀졌다. 후방 창고에서 실어 온 것이라 하나같이 묵은 것이었다. 구간장이 횃불을 들고 그 앞을 지나며 결계형을 셌다. 남색 옷이 횃불 빛에 하나씩 드러났다.
"여덟."
누가 물었다.
"말뚝은."
"열둘."
아무도 그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횃불이 바람에 한 번 누웠다가 일어났다. 땅바닥에 눕혀진 말뚝 열둘의 테가 그 빛을 받았다. 테마다 손바닥 둘이 놓일 자리가 반들반들했다. 그 가운데 넷에 얹을 손이 이 줄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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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세요


켈리가 먼저 깼다.
5시 반이었다. 그 시각에 깨는 것은 열두 해 동안 몸에 든 것이라 고쳐지지 않았다. 바깥은 아직 어두웠고 비는 밤사이에 그쳐 있었다. 땅이 젖어 있었으나 공기가 달랐다. 사흘 만에 처음으로 숨을 쉴 때 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켈리가 일어나 앉았다. 앉는 데 시간이 걸렸다. 등을 쓰면 맞은 자리가 당겼고 옆구리를 쓰면 다른 자리가 당겼으므로 허벅지에 손을 짚고 일어나야 했는데 허벅지도 아팠다. 어디를 짚어도 아픈 몸으로 일어나는 방법은 그냥 참는 것이다. 켈리는 그것을 알았다.
어제저녁에 바르트가 등을 보았다. 외투를 벗기고 내의를 걷어 올렸고, 올린 다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쇠몽둥이 자리가 손바닥 두 개만 하게 검붉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괜찮거나, 말해 봐야 소용이 없거나.

"…뼈는 안 갔어."
"예."
"안 간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예."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 안 하지."
"…"
"그럴 줄 알았어."

그가 쑥 비슷한 풀을 짓이겨 천에 발라 등에 댔다. 바르트는 약사가 아니었고 그 풀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몰랐다. 다만 카르소의 대장간에서 열넷에 일할 때 화상을 입으면 늙은 대장장이가 그 풀을 썼고, 그때 덜 아팠던 기억이 있었다. 그것이 풀 때문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모른다.
아침에 그 천이 말라서 떨어져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주워 접어 두었다. 버리지 않았다.
해가 뜨고 나서 아래쪽 물가가 보였다. 줄은 아직 거기 있었다. 움직이는 기척이 없었다. 밤에 늦게 닿았으므로 늦게 떠나는 것이고, 늦게 떠나면 오늘은 다음 물까지 못 간다. 그런 식으로 하루가 밀리면 다음 날은 더 밀린다. 길 위의 셈은 틀리는 법이 없다.

"…올라오는데요."
니카가 말했다.

비탈 아래쪽에서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셋이었다. 앞의 하나가 다리를 절었고 왼쪽 어깨가 디딜 때마다 떨어졌다. 뒤의 둘 중 하나가 아이를 업고 있었다. 바르트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배낭 쪽으로 손이 갔는데 배낭 안에는 어제 깨진 유리와 젖은 화약밖에 없었다.
"…뭐야 또."
"오는 겁니다."
"그건 아는데."
"올라오는 데 반 시간 걸렸을 겁니다. 저 비탈을."
오벨이 그렇게 말했다. 그는 그 말을 어떤 뜻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다리를 저는 사람이 젖은 비탈을 올라오는 데 드는 시간을 셈했을 뿐이고, 셈하고 나서 그 셈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았으며, 알고 나서는 입을 다물었다.
셋이 평평한 자리까지 올라와 멈췄다. 숨을 고르는 데 잠깐 걸렸다. 다리를 저는 남자가 먼저 숨을 골랐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이 보따리였다. 거친 천으로 묶은 것이고 묶은 매듭이 둘이었으며 크기가 작지 않았다.

그가 그것을 땅에 내려놓았다.
"…이거요."
"…"
"받으시오."

다섯이 그 보따리를 보았다. 켈리가 한 걸음 물러섰다. 물러선 것은 의식한 동작이 아니었다. 모르는 것이 앞에 놓이면 몸이 먼저 간격을 잡는다. 그것도 열두 해 동안 든 것이었다.

"…저게 뭡니까."
니카가 물었다.
"옷이오."
"옷이요?"
"옷이오."

남자가 그 말을 두 번 했다. 두 번 한 이유는 상대가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그 자신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서였다. 오벨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이런 자리에서 앞으로 나오는 사람이었다. 스무 해 동안 주고받는 일에 끼어 서 있었으므로 주고받는 자리에서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몸이 알았다.
"…저희는 삯을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소."
"청구하지 않은 것은 청구할 상대가 없어서였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소."
"그럼 이건 무엇입니까."
"값이오."

오벨이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값이라는 말을 스무 해 동안 썼다. 법률로 먹고사는 사람이 하는 일의 절반이 값을 정하는 일이다. 깨진 것을 돈으로 바꾸고 못 지킨 약속을 숫자로 바꾼다. 값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정해진다. 한쪽이 정해서 통보하거나 양쪽이 만나서 깎는 것이다. 통보는 관청이 하고 깎는 것은 시장이 한다. 그 둘 말고 다른 방식이 있다는 말을 그는 들은 적이 없었다.

"…누가 정했습니까."
"우리가 정했소."
"우리라면."
"저 아래 있는 사람들이오."

남자가 비탈 아래를 가리켰다. 물가에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 몇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젯밤에 정했소. 오래 걸렸소."
"…"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주기로 했소. 줄 게 없으니까. 그러다가 하나가 신을 내놓겠다고 했고 그러니까 다른 하나가 그러면 나도 뭘 내놓겠다고 했소. 그렇게 돌았소."

그가 보따리를 한 번 보았다.
"열한 명이 냈소. 열한 명 중에 새것을 낸 사람은 없소."

그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조금 기다렸다. 기다린 것은 미안해서였고 미안한 이유는 새것이 없어서였다.
바르트가 보따리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매듭을 풀지 않고 손바닥으로 한 번 눌러 보았다.
"…무게가 좀 되는데."
"여덟 벌이오."
"여덟이요?"
"한 사람 앞에 하나씩은 안 되오. 겹쳐 입으라고 많이 넣었소."

매듭이 풀렸다. 안에 든 것은 짝이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겉옷이 셋이었다. 하나는 짙은 녹색이고 소매 끝이 닳아 올이 나왔다. 하나는 흙빛인데 등 쪽에 다른 천으로 덧댄 자리가 손바닥만 했다. 하나는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 없었고 지금은 모든 색이 한 번씩 섞인 것처럼 보였다.

바지가 둘이었다. 하나는 무릎에 천을 덧댔고 하나는 허리가 컸다. 조끼가 하나 있었다. 양모였고 앞에 나무 단추가 셋인데 그중 하나가 색이 달랐다. 잃어버린 자리에 다른 것을 단 것이다. 목에 두르는 천이 하나, 신이 한 켤레 있었다. 신은 작았다.

"…이건 애 신인데요."
린이 말했다.
"그렇소."
"누가 냈어요?"
"신은 낸 사람이 하나요. 그 사람 아이 것이오."
"아이는요."

남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린이 더 묻지 않았다. 린은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으나 더 묻지 않아야 하는 자리를 알았다. 실베인에서는 그것을 어릴 때 배운다. 늪에 사는 사람은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자리를 밟지 않는 법을 먼저 배우고, 말에도 그런 자리가 있다는 것을 같이 배운다.

"…골라요."
아이를 업은 여자가 말했다.
"뭐요?"
"고르시라고요. 맞는 걸로."

켈리가 그 말을 들었다.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비슷한 것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벨류엔 마법청의 피복 지급은 분기마다 한 번이었고 방식은 정해져 있었다. 줄을 서고, 번호를 대고, 담당자가 표에서 치수를 찾고, 그 치수에 해당하는 묶음을 내준다. 묶음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받기 전에 알 수 없고 받고 나서 바꿀 수 없다. 맞지 않으면 맞지 않는 채로 입는다.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칸이 양식에 없었다.
켈리는 그것이 옷을 받는 방식이라고 알았다. 다른 방식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므로 지금 앞에 놓인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뭘요."
"입을 거요."
"…"
"입어 보고 맞는 걸로 가져가요."

켈리가 보따리를 보았다. 보고 나서 넷을 보았다. 넷이 켈리를 보고 있었다. 켈리가 앞으로 가서 조끼를 집었다. 그것이 보따리 안에서 가장 작았다.

"…저 이거요."
"그거?"
"예."
"입어 봤소?"
"…안 입어 봐도 돼요."
"왜요."
"작아서요."

여자가 그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했고, 그 얼굴을 보고 켈리가 조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바르트가 켈리의 손에서 조끼를 가져갔다.
"야."
"…"
"작은 걸 왜 골라."
"…작은 게 나아서요."
"뭐가 나아."
"…많이 가져가면요."
"가져가면?"
"…나중에 받을 게 줄잖아요."

그 말에 그 자리가 조용해졌다. 다섯 중 셋이 그 말의 뜻을 알아듣는 데 잠깐 걸렸고, 하나는 바로 알아들었으며, 하나는 끝내 알아듣지 못했다. 바로 알아들은 사람은 오벨이었다. 끝내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린이었는데 린이 알아듣지 못한 이유는 린이 자란 곳에서는 그런 셈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벨류엔 마법청의 배급은 총량이 정해져 있었다. 한 부대에 할당된 양이 있고 그것을 인원으로 나눈다. 앞에서 많이 가져가면 뒤가 모자란다. 켈리는 언제나 뒤쪽이었고, 뒤쪽에서 열두 해를 보낸 사람은 앞쪽이 되었을 때도 뒤쪽의 셈을 한다. 많이 가져가는 것은 나중에 돌아온다. 돌아오는 방식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돌아온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여기는 총량이 없어."
바르트가 말했다.
"…예?"
"여기는 정해진 양이 없다고. 저 사람들이 자기들 걸 낸 거야. 네가 많이 가져간다고 다른 사람 몫이 줄지 않아."
"…"
"그리고 저게 여덟 벌이고 우리가 다섯이야. 다 가져가도 남아."

켈리가 그 말을 생각했다. 생각하는 동안 얼굴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켈리가 모르는 종류의 산수였다. 아는 산수는 하나였다. 나눌 것이 있고 사람이 있고 몫이 있다. 몫보다 많이 가져가면 누군가의 몫이 준다. 그 셈 말고 다른 셈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지금 처음 들었고, 들었다고 해서 몸이 바로 따라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하나만 할게요."
"왜."
"…그게 편해서요."

바르트가 더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오늘 안에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옷을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오래 걸린 이유의 절반은 바르트였다. 보따리 안에 그에게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겉옷 셋을 전부 대 보았는데 어깨에서 걸렸다. 가장 큰 흙빛 겉옷을 걸쳤을 때 소매가 팔꿈치 아래에서 끝났다.
"…"
"아저씨 그거 조끼 같은데요."
"닥쳐."
"진짜 조끼 같아요."
"조용히 해."
"팔이 다 나왔는데."

니카가 그 말을 하면서 웃다가 옆구리를 잡았다. 그도 어제 굴렀다.
바르트가 그 겉옷을 벗어 바닥에 놓았다. 놓으면서 손이 조금 늦었다.
"…난 됐어."
"입을 게 없으십니까."
"내 건 있어. 안 떨어졌어."
"떨어졌는데요."
"안 떨어졌다고."

오벨이 더 말하지 않았다. 바르트의 겉옷은 오른쪽 겨드랑이가 터져 있었고 그것이 두 달째였다.
니카는 목에 두르는 천을 가져갔다. 짙은 붉은색이었고 보따리 안에서 유일하게 색이 선명한 물건이었다.
"이거 저 주세요."
"그건 옷이 아닌데."
"압니다."
"목 시려요?"
"아니요."
"그럼 왜."
"이게 제일 멋있어서요."

그가 그것을 목에 둘렀다. 두르고 나서 한 바퀴 돌았다.
"어때요."
"…"
"아무도 말을 안 하네."
"…잘 어울립니다."
오벨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거짓말이었는데 니카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린은 신을 거절했다.
"저 안 신어요."
"발 시려울 텐데요."
"안 시려워요."
"겨울에는요?"
"겨울에도 안 신어요."
"왜요."
"땅을 못 들으니까요."

그 대답을 듣고 아이를 업은 여자가 린을 다시 보았다. 실베인 사람들이 맨발로 다니는 이유를 아는 로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것을 가난이나 미개함으로 본다. 정령술은 땅에 손을 대고 쓰는 것이고, 손이 모자랄 때는 발로 쓴다. 가죽을 사이에 두면 아무것도 빌릴 수 없다. 린은 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설명하면 길어지고, 길어지면 상대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린은 열 살에 이미 알았다.

오벨이 바지 하나를 가져갔다. 무릎에 천을 덧댄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맞소?"
"맞지 않습니다."
"그럼 다른 걸로."
"맞는 것을 찾으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 말을 하고 바지를 접었다. 접는 방식이 서류를 접는 방식이었다. 모서리를 맞추고 한 번에 눌렀다. 켈리가 마지막이었다. 켈리에게 남은 것은 짙은 녹색 겉옷과 색을 알 수 없는 겉옷과 허리가 큰 바지였다. 짙은 녹색 쪽을 집었다. 집어서 어깨에 대 보았다. 소매가 손끝을 넘어갔다. 그것을 한 번 접으면 될 일이었는데 켈리는 접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크네."
바르트가 말했다.
"예."
"접어."
"…"
"소매를 접으라고."

켈리가 소매를 접었다. 접는 손이 서툴렀다. 벨류엔에서는 옷을 접을 일이 없었다. 맞지 않는 옷은 맞지 않는 채로 입는 것이고, 소매가 길면 긴 채로 둔다. 접으면 규정 위반이다. 피복 규정에 복장을 임의로 변형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었고, 그 조항이 있는 이유는 검열할 때 눈으로 훑어 한 번에 다른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접어도 되는 옷이라는 것을 켈리는 아직 몸으로 알지 못했다.
갈아입으려면 벗어야 했다. 켈리가 갈색 외투를 벗었다. 그 아래에 회색 무명 내의가 있었다. 소매가 팔꿈치까지 오고 목깃이 둥글었다. 석 달 동안 그것만 입고 다녔으므로 겨드랑이 쪽이 삭아 있었고 물이 빠져서 원래의 회색보다 밝아져 있었다.
켈리가 그것의 아랫단을 잡았다. 잡고 나서 멈췄다.

"…뭐 해."
"…"
"안 벗어?"
"…"
"야."

켈리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벗을 수 있는 물건이라는 생각을 켈리는 해 본 적이 없었다. 로브는 옷이었다. 로브는 입는 것이고 벗는 것이고 개키는 것이고 검열받는 것이었다. 그 아래의 회색 내의는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몸에 딸린 것이었다. 여섯 살에 받았고 그 뒤로 치수가 바뀔 때마다 새것으로 바꿔 받았으며, 바꿔 받는 날에도 한 벌을 벗고 다른 한 벌을 입는 것이었으므로 그 사이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시간은 반 숨밖에 되지 않았다.
열두 해 동안 켈리의 몸과 회색 천 사이에는 한 번도 틈이 생긴 적이 없었다.

"…저쪽 가서 갈아입으시오."
다리를 저는 남자가 말했다.
"…"
"저기 바위 뒤에. 여기서 안 보이오."

켈리가 바위 뒤로 갔다. 바위 뒤는 좁았고 아래가 젖어 있었다. 켈리가 거기 서서 내의 아랫단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올렸다. 올리는 동안 등의 맞은 자리가 당겼다. 팔을 들어 올리는 동작이 그 자리를 쓰는 동작이었다. 켈리가 숨을 한 번 멈췄다가 마저 올렸다.

벗었다. 벗은 것을 손에 들고 있었다. 들고 있는 동안 바람이 왔다. 사흘 만에 그친 비 뒤의 바람이라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등과 배와 어깨에 한꺼번에 닿았다.
켈리가 그 감각에 잠깐 멈춰 섰다. 그다음에 켈리가 한 일은 그 내의를 뒤집어 목깃 안쪽을 본 것이었다. 
번호가 찍혀 있었다. 먹이었다. 지워지지 않는 먹이고 세탁장에서 쓰는 것이었다. 벨류엔 마법청의 세탁장은 한 번에 수백 벌을 삶았고 삶고 나면 전부 같은 색이 되었으므로 주인을 가릴 방법이 필요했다. 목깃 안쪽에 번호를 찍는 것은 그 방법이었다. 그 번호에는 명예가 없었다. 영광도 없었다. 세탁물을 돌려주기 위한 표시였고 그 용도로만 존재했다.
켈리의 번호가 거기 있었다. 협조문의 넷째 줄에 적혀 있던 것과 같은 숫자였다.
켈리가 그것을 한참 보았다. 보고 나서 손가락으로 그 위를 한 번 문질렀다.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켈리는 알았다. 알면서 문질렀다. 문지르는 동작은 규정에 없는 동작이고 교범에 없는 동작이며 누가 가르친 동작이 아니었다. 지워지지 않았다.

켈리가 짙은 녹색 겉옷을 입었다. 입고 나서 소매를 접었다. 아까보다 조금 나았다. 품이 컸다. 어깨선이 내려와 있었고 그 때문에 팔을 들면 천이 같이 올라왔다. 바지는 허리가 커서 끈으로 묶어야 했는데 끈이 없어서 그냥 접어 넣었다. 켈리가 바위 뒤에서 나왔다. 넷이 켈리를 보았다.

보는 눈이 넷 다 비슷했다. 웃음을 참는 눈이었다.
"…뭐요."
"…아니."
"왜 그렇게 봐요."
"…"
"왜요."

니카가 먼저 터졌다.
"…커요. 너무 커요."
"…"
"그거 누구 거예요? 아저씨 두 명 들어가겠는데요."
"…"
"어깨가 여기 있어야 되는데 여기 있잖아요."

켈리가 자기 어깨를 보았다. 어깨선이 팔뚝 중간쯤에 있었다. 바르트가 웃지 않았다. 웃지 않은 것은 참아서가 아니었다. 그가 보고 있던 것은 옷이 아니었다. 켈리가 손에 들고 있는 회색 뭉치였다.
"…그건 뭐 하려고."
"…"
"버려."
"…"
"야."
"…안 버릴래요."

켈리가 그것을 개기 시작했다. 개는 방식이 로브를 개는 방식이었다. 소매를 안으로 접고 아랫단을 둘로 접고 어깨선을 맞춘다. 그렇게 개면 목깃이 위로 온다. 목깃이 위로 오면 번호가 보인다. 그렇게 정해진 이유는 세탁장에서 번호를 보고 분류하기 편하라고였다. 켈리가 그것을 자루에 넣었다.
자루 안에 로브가 있었다. 그 옆에 넣었다. 둘이 나란히 놓였고 자루 입구를 묶었다.

다리를 저는 남자가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건 안 버리시오?"
"예."
"왜요."
"…"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버리지 않는 이유를 몰라서였다. 입을 것이 아니었다. 팔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벨류엔 지급품을 들고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고 그것을 켈리도 알았다. 알면서도 굳이 버리지 않고 넣었다.

셋이 비탈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데 올라온 것보다 더 걸렸다. 다리를 저는 사람이 젖은 비탈을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다 어렵다. 일행이 그날 늦게 출발했다.
길에 나선 지 한 시간쯤 되었을 때 니카가 뒤를 한 번 보았다. 보고 나서 앞을 보았고 다시 뒤를 보았다.
"…뭐 합니까."
"아니 그냥."
"그냥이라니요."
"…우리 이제 안 걸리겠죠?"

오벨이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협조문이요. 첫 줄이 남색 로브잖아요. 이제 로브 입은 사람도 없고 회색 내의도 없고 옷 다 바뀌었는데요."
"…"
"안 걸리겠죠?"
"아니요."
"예?"
"더 걸립니다."

니카가 걸음을 멈췄다. 멈춘 자리가 길 가운데여서 뒤에 오던 바르트가 부딪칠 뻔했다.
"…왜요?"
"지금 저 사람을 한번 보십시오."

넷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앞에서 걷고 있었다. 짙은 녹색 겉옷의 어깨선이 팔뚝에 있었고 소매는 두 번 접혀 있었으며 바지는 허리를 접어 넣어서 앞쪽이 불룩했다. 옷 색과 바지 색이 맞지 않았고 그 위에 걸친 갈색 외투는 또 다른 색이었다. 그리고 손에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이상한데요."
린이 말했다.
"이상합니다."
"엄청 이상해요."
"예."

오벨이 설명했다. 설명하는 목소리가 평평했다.
"사람은 보통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습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몹시 가난하거나, 그 옷이 자기 옷이 아니거나."
"…"
"길에서 사람을 찾는 자가 보는 것이 그 두 번째입니다."
"…"
"남색 로브를 입은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런 꼴을 한 사람도 흔하지 않습니다. 흔하지 않은 것이 흔하지 않은 것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니카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럼 어떡해요."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요?"
"예. 저는 서류를 읽는 사람이지 사람을 숨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르트가 뒤에서 말했다.
"애초에 저게 문제가 아니야."
"뭐가요."
"옷이 문제가 아니라고."

그가 앞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켈리의 오른손에 지팡이가 있었다. 어두운 회갈색이고 장식이 없고 끝이 뭉툭했으며 가운데에 쇠 테가 한 줄 감겨 있었다. 이음매가 비뚤고 표면이 우글거렸다.

"저걸 들고 다니는 한 옷은 아무 상관이 없어."
"…그럼 저걸 숨기면요?"
"숨겨 봐."
"…"
"숨겨 보라고. 저 길이를."

니카가 그 지팡이의 길이를 눈으로 쟀다. 켈리 키의 삼분의 이쯤 되었다. 자루에 들어가지 않는 길이였고 품에 넣을 수 있는 길이도 아니었으며 옷 안에 넣으면 걸을 때 무릎이 안 굽는 길이였다.

"…천으로 감으면 어때요."
"감아서?"
"지팡이처럼 안 보이게요."
"그럼 싸울 때 풀어야지."
"풀면 되잖아요."
"몇 숨 걸리는데."
"…"
"어제 저 비탈에서 몇 숨 있었냐고."

니카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 길에서 사람을 셋 만났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었고 수레를 끌고 있었다. 지나치면서 그중 하나가 켈리를 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보았고 다시 위로 보았다. 그 눈이 사람을 수상히 여기는 눈이었다. 보고 나서 그가 지나갔다. 지나가고 나서 일행 뒤에서 그 셋이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했다. 말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켈리가 그것을 알았다. 켈리는 뒤쪽의 기척을 아는 사람이었다.

"…저 쳐다봤죠."
"응."
"왜요."
"옷이 이상해서."
"…"
"어제는 로브 때문에 쳐다봤고 오늘은 옷 때문에 쳐다봐."

켈리가 걸으면서 자기 소매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짙은 녹색이었고 끝이 닳아 올이 나와 있었다. 누가 입던 것이었다. 몇 해를 입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켈리가 그 소매를 손가락으로 한 번 만져 보았다. 만져 본 것은 천이 거칠어서가 아니었다. 벨류엔의 지급품 중에 이것보다 거친 것이 많았다. 다른 점은 하나였다. 이 소매는 켈리의 치수에 맞춰 나온 것이 아니었다. 누구의 치수에도 맞춰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그냥 누가 오래 입다가 내놓은 것이고, 내놓을 때 그 사람은 받는 사람의 치수를 몰랐다.

그래서 크다. 켈리가 그것을 생각하는 데 한참 걸렸고, 생각하고 나서도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정하지 못했다. 저녁에 자리를 잡았을 때 켈리가 자루를 열었다.
안에 로브가 있었고 그 옆에 회색 내의가 있었다. 둘 다 개켜져 있었고 둘 다 목깃이 위로 와 있었다. 로브의 목깃에는 은실 문장이 있었고 내의의 목깃에는 먹으로 찍은 번호가 있었다.
같은 숫자였다. 켈리가 자루를 도로 묶었다. 묶고 나서 자기가 입은 겉옷의 목깃 안쪽을 한 번 뒤집어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흔한 막대기


니카가 널빤지 조각을 하나 주워 왔다.
손바닥 두 개만 한 것이었고 한쪽 끝이 썩어 있었다. 니카가 그것을 불 꺼진 자리 앞에 세워 놓고 오벨에게서 숯을 빌렸다. 오벨은 숯을 빌려줄 때 그것이 남은 넷 중 하나라고 말했고 니카는 듣지 않았다. 널빤지에 세 줄이 적혔다.

「감는다. 넣는다. 바꾼다.」

"뭐야 이게."
바르트가 말했다.
"지팡이 숨기는 법이요."
"어제 내가 숨겨 보라고 한 거?"
"예. 숨겨 보려고요."
"셋 중에 뭐가 되는데."
"하나는 됩니다. 셋 다 해 보면 9할이요."
바르트가 니카를 한참 보았다. 니카가 숫자를 금방 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고, 틀릴 때도 금방 낸다는 것도 알았다. 틀리면서 빠른 건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켈리는 널빤지를 보지 않았다. 등 뒤에서 바르트가 풀 바른 천을 갈아 대고 있었다. 쇠몽둥이 자리의 멍이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바래 가는 중이었고 가운데는 아직 검붉었다. 지팡이가 무릎 옆에 세워져 있었고 오른손이 그 위에 얹혀 있었다. 얹혀 있다는 것을 켈리는 의식하지 못했다. 밤에도 거기 있었다. 잠든 켈리의 손이 지팡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사람은 일행 중에 없었다.
"…이거요?"
"예."
"숨겨요?"
"어제 다 들었잖아요. 그거 들고 다니면 옷 바꾼 게 소용없다고."
"…"
"싫어요?"
"…싫은 건 아닌데요."
켈리가 손을 떼지 않았다.

첫 줄은 감는 것이었다. 감으려면 천이 필요했다. 니카가 자기 목의 붉은 천을 한 번 만졌다가 손을 내렸고 린이 그것을 보았다.
"그거 쓰면 되잖아."
"이건 안 됩니다."
"왜."
"이건 제 거니까요."
"어제 받은 거잖아."
"어제부터 제 겁니다."

결국 쓴 것은 흙빛 겉옷이었다. 어제 바르트가 걸쳤다가 조끼 같다는 말을 들은 그것이었다. 오벨이 챙겨 왔다. 받은 물건을 그 자리에 두고 오면 받은 값을 돌려주는 것이 된다고 그가 말했고, 그 말에 반대한 사람이 없었는데 반대할 말을 아무도 찾지 못해서였다.
니카가 손을 내밀었다. 켈리가 지팡이를 내밀었다. 니카가 쥐었다. 켈리가 놓지 않았다.
"…놔야 감죠."
"…"
"놔요."
켈리가 놓았다. 놓은 손이 그 자리에서 한 번 오므라들었다가 펴졌다.

니카가 감았다. 소매 둘로 양 끝을 묶고 몸판으로 가운데를 둘렀으며 남은 자락을 꼬아 매듭을 셋 지었다. 다 감고 나니 길쭉한 흙빛 뭉치가 되었다. 가운데 한 군데가 불룩했다. 쇠 테가 있는 자리였다.
"어때요."
넷이 그것을 보았다.
"…뭐 같아요?"
"창."
린이 먼저 말했다.
"창이요?"
"감춘 창. 창을 감추면 꼭 저렇게 돼. 로엔 경비들이 그런 걸 메고 다녀."
"…"
"아니면 다리."
"다리요?"
"사람 다리. 한 짝."
바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참는 것인지 다른 것을 참는 것인지는 등만 보여서 알 수 없었다.

"풀어 봐요."
니카가 뭉치를 켈리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지금요?"
"지금요. 누가 덮쳤다고 치고요."

켈리가 뭉치를 쥐고 매듭을 찾았다. 니카가 지은 매듭이었고 니카는 풀리지 않게 묶는 법밖에 몰랐다. 타르실 도박장에서 돈주머니를 묶을 때 쓰는 매듭이었다. 켈리가 첫 매듭을 손톱으로 긁었다. 안 풀렸다. 이로 물었다. 풀렸다. 둘째 매듭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켈리가 뭉치를 거꾸로 들고 흔들었다. 흙빛 소매 하나가 풀려 늘어졌고 그 소매가 켈리의 발목에 감겼다.
그사이에 린이 앉았다. 바르트가 배낭 끈을 한 번 고쳐 멨다. 오벨이 수첩을 꺼내 한 줄을 적고 도로 넣었다. 니카는 처음에는 서서 보다가 나중에는 쪼그려 앉아서 보았다.
지팡이 끝이 겉옷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켈리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고 발목에 소매가 감겨 있었으며 셋째 매듭을 아직 입에 물고 있었다.

"…지금 우리 다 죽었어요."
니카가 말했다.
"…"
"그동안 저는 두 번 죽었어요. 아저씨는 세 번 죽었고요."
"나는 왜 세 번이야."
"크니까요. 큰 건 맞히기 쉬워요."
"…"
"오벨 씨는 맨 먼저 죽었어요."
"예. 맞습니다."
오벨이 그 셈을 고치지 않았다.

켈리가 매듭을 뱉고 지팡이를 마저 뽑아 들었다. 쥐고 나서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그 숨이 무슨 숨인지는 넷이 다 보았다. 니카가 널빤지의 첫 줄에 선을 그었다.

둘째 줄은 넣는 것이었다. 켈리의 자루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자루 길이가 지팡이의 절반이었다. 바르트의 배낭에 세워 넣자 삼분의 일이 위로 솟았고, 솟은 끝에 흙빛 겉옷을 씌웠다.
"…아저씨, 등에 깃대 꽂은 것 같아요."
"깃발이 없잖아."
"그래서 더 이상해요. 깃발 없는 기수 같아요."
"…저울 빼면 들어가."
"그럼 저울 빼요."
"저울은 못 빼."

그 말에서 바르트가 물러서지 않았다. 니카가 다른 것을 빼자고 했고 바르트가 그것도 못 뺀다고 했으며, 그렇게 배낭 안의 물건이 하나씩 이름이 불렸다가 하나씩 못 빼는 것이 되었다. 깨진 유리병까지 못 빼는 것이 되었을 때 니카가 포기했다. 결국 지팡이는 겉옷에 감긴 채로 배낭 옆구리에 비스듬히 대고 끈으로 묶였다. 그 위에 켈리의 자루를 걸어 늘어뜨리자 멀리서는 짐 사이에 무엇이 끼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켈리의 손이 비었다. 빈손으로 걷는 것이 켈리에게 어떤 것인지는 그 손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오른손이 외투 자락을 쥐었다가 놓았고 허리께를 쥐었다가 놓았다. 바지 허리를 접어 넣은 자리를 쥐었을 때 그것이 풀릴 뻔해서 놓았다.

점심 무렵에 길이 농가 하나의 마당 귀퉁이를 지났다. 울타리가 없었다. 로엔 남부에서 울타리는 밭에 치는 것이지 마당에 치는 것이 아니었다. 길과 마당의 경계는 길 쪽 흙이 단단하고 마당 쪽 흙이 무르다는 것뿐이었다.
"저쪽으로 질러가요. 저쪽이 빨리 갈 확률이 8할이에요."
니카가 그렇게 말했다.
마당에 거위가 일곱 있었다.

거위는 사람을 셀 줄 안다. 셀 줄 안다는 것은 사람 쪽에서 붙인 말이고 실제로 거위가 아는 것은 자기 마당에 들어온 것이 몇인가 하는 것뿐이다. 하나면 지켜보고 둘이면 소리를 낸다. 다섯이면 온다.
일곱이 왔다. 목을 땅과 나란하게 뻗고 날개를 반쯤 편 채로 왔다. 그런 자세로 오는 거위는 실제보다 두 배쯤 커 보인다. 소리가 먼저 왔고 거위가 그 뒤에 왔다.

켈리의 오른손이 허리 옆으로 갔다. 쥐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손이 어깨 위로 갔다. 쥐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켈리가 바르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팡이는 바르트의 배낭 옆구리에 있었다. 켈리가 그쪽으로 손을 뻗자 바르트가 꺼내 주려고 몸을 돌렸다. 바르트가 돌자 배낭 옆구리가 반대쪽으로 갔다. 켈리가 그쪽으로 따라 돌았다. 바르트가 다시 돌았다.
둘이 그 자리에서 두 바퀴를 돌았다.
"가만히 좀 있어요!"
"너나 가만히 있어!"
"아저씨가 돌잖아요!"
"꺼내 주려고 돈 거야!"

그사이에 거위가 니카에게 닿았다. 일곱 중 넷이 니카에게 갔다. 왜 니카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린은 목에 두른 붉은 천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지는 거위만 알았다. 니카가 뒤로 물러나다 넘어졌고 넘어진 자리에서 거위 하나가 그의 엉덩이를 물었다.
"아악! 아니 왜 저예요!"
린이 웃었다. 웃다가 거위 하나가 자기 쪽으로 오자 맨발로 그 거위를 마주 보고 섰다. 거위가 멈췄다. 린도 멈췄다. 둘이 한참 서로를 보다가 거위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오벨은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거위가 그 옆을 지나갔는데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거위에게 마당의 일부였다.

빗자루를 든 아낙이 집에서 나왔다. 아낙이 빗자루를 한 번 쓸었다. 일곱이 흩어졌다.
아낙이 다섯을 보았다. 엉덩이를 쥐고 주저앉은 젊은이와, 큰 남자 옆에서 손을 뻗은 채 멈춘 처녀와, 거위와 눈싸움을 하고 선 맨발의 처녀와, 가방을 든 채 꼼짝하지 않는 남자를 차례로 보았다.
"…다 큰 사람 다섯이서 거위한테 뭐 하는 거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마당을 벗어나서 오벨이 켈리 옆으로 왔다.
"손이 먼저 갑니다."
"…예?"
"꺼내려고 생각하기 전에 손이 갔습니다. 세 번이요."
켈리가 자기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반쯤 오므라든 채였다. 무언가를 쥐려다 만 모양 그대로 굳어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폈다. 펴고 나서 조금 걷다 보니 또 반쯤 오므라들어 있었다.
니카가 널빤지의 둘째 줄에 선을 그었다.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를 받치고 있었다.

셋째 줄을 떠올리게 한 것은 그 아낙의 빗자루였다.
"저거예요."
"빗자루?"
"아니요. 흔한 거요. 저 아주머니가 빗자루 들고 다니는 걸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잖아요."
"…"
"진짜는 짐에 넣어 두고 손에는 흔한 걸 드는 거예요. 길에서 막대기 들고 다니는 사람 많아요. 개 쫓으려고 들고, 짚으려고 들고. 그런 거 하나 든다고 쳐다보는 사람 없어요."
니카가 그 말에 확률을 붙이지 않았다. 붙일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바르트가 길가의 개암나무에서 가지 하나를 쳤다. 칼로 세 번 쳐서 잘랐고 잔가지를 훑어 냈다. 길이가 켈리의 지팡이와 비슷했고 굵기는 조금 가늘었다. 껍질이 덜 말라 손에 쥐면 미끄러웠다.
켈리가 받았다. 받고 나서 그것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다시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무게가 틀렸다. 지팡이는 가운데보다 끝이 조금 무거웠는데 이것은 손잡이 쪽이 무거웠다. 쇠 테가 있던 자리쯤에 옹이가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한 번 휘둘렀다. 공중이었다.
"치지 마."
"안 쳤는데요."
"치려고 했잖아."
"…휘둘러 본 건데요."
"그게 치려고 한 거야."

켈리가 그것을 쥔 채 걸었다. 쥔 손이 계속 고쳐 쥐었다. 쥘 때마다 손가락 자리를 바꿨고 바꿀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을 했다. 켈리가 그런 얼굴을 짓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니카가 널빤지의 셋째 줄 옆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건 진짜 흔해요. 길에 굴러다니는 거예요. 이걸로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루터에 닿은 것은 오후였다. 실베인으로 가려면 강을 하나 건너야 했고 강폭이 80미터쯤 되었다. 배는 하루에 두 번 떴다. 오후 배가 4시였고 일행이 닿았을 때 반 시간쯤 남아 있었다.
나루터 마당에 사람이 스물쯤 있었다. 짐꾼과 장사꾼과 보따리를 든 사람들이었다. 마당 한쪽 말뚝 위에 젊은 남자 하나가 걸터앉아 있었고 그 둘레에 예닐곱이 모여 있었다.
켈리가 그 남자를 알아보았다.
"…저 사람."
"누구."
"그 줄에 있던 사람이에요. 앞에서 셋째쯤."
켈리는 그 줄을 셀 때 얼굴도 같이 보았다. 그 남자가 왜 줄에서 빠졌는지는 몰랐다. 다만 줄에서 빠지는 데에는 좋은 이유가 하나 있었고, 그 남자가 지금 말뚝 위에 멀쩡히 앉아 있다는 것이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남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에서 애가 하나 내려오는데."
"애?"
"애였어. 여자애. 근데 키가 이만해."
남자가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손이 머리보다 한 뼘 위에 있었다.
"막대기를 들었는데 막대기가 이만해."
두 손을 벌렸다. 벌린 폭이 문짝만 했다.
"그걸로 한 번 치니까 다섯이 날아갔어."
"다섯이?"
"다섯이. 한 번에."

켈리가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다 듣고 나서 바르트에게 아주 작게 물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바르트가 사레가 들렸다.
"너잖아."
린이 말했다.
"…저 저렇게 안 컸는데요."
"다섯도 아니었어요. 둘이었어요."
니카가 말했다.
"셋입니다. 셋째는 바르트 씨가 깔았습니다."
오벨이 고쳤다.
"그건 내가 한 거잖아."
"예. 그러니까 저 이야기 안에서는 저 사람이 한 겁니다."

켈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자기 손을 보았다. 오른손에 개암나무 가지가 쥐어져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천천히 등 뒤로 옮겼다.
바르트가 그것을 보았다. 보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그가 그날 참은 것 중에 가장 큰 것이었다.

배삯이 모자랐다. 니카가 잔액을 세어 보고 그렇게 말했다. 다섯 중 셋은 건널 수 있고 둘은 못 건넌다.
"…누가 남아요?"
"아무도 안 남아요."
니카가 마당 반대편을 턱으로 가리켰다. 짐꾼 셋이 짐짝 위에 판을 벌여 놓고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다. 판돈이 동전 한 닢씩이었다.
"안 돼."
"이길 가능성이 7할이에요."
"안 된다고."
"저 사람들 던지는 거 봤어요? 셋 다 던질 때 손목을 꺾어요. 꺾으면 여섯이 덜 나와요. 그걸 모르고 여섯에 걸어요."
"…"
"그리고 저기는 저 이야기하는 사람 반대쪽이에요. 저쪽만 안 보면 돼요."
바르트가 대답하기 전에 니카가 갔다.

니카가 이겼다. 한 판을 이기고 두 판을 지고 그다음 다섯 판을 이겼다. 지는 판은 일부러 진 것이었는데 그것을 아는 사람은 니카뿐이었다. 짐꾼들의 동전이 니카 앞으로 옮겨 오는 동안 니카의 얼굴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바뀌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너 뭐 했어."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뭐 걸었지."
짐꾼 하나가 니카의 손목을 보았다. 손목에 천이 감겨 있었다. 주술사가 감는 천이었고 로엔 남부에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
"안 걸었어요. 진짜로 셈만 했어요."
"셈?"
"예. 셈이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니카는 그날 아무것도 걸지 않았다. 걸었으면 무언가 돌아왔을 것이고 돌아온 것이 없었으니 걸지 않은 것이다. 다만 이 자리에서 사실은 쓸모가 없었다. 셈으로 이겼다는 말은 주술로 이겼다는 말보다 더 믿기 어려웠다.
짐꾼이 니카의 목에서 붉은 천을 낚아챘다.
"이거라도 내놔."
"그건 안 돼요!"
니카가 천 끝을 붙들었다. 붙든 채로 끌려가다가 무릎을 꿇었다.
"그건 제 거예요! 어제부터 제 거라고요!"

켈리가 갔다. 간 것을 처음 본 사람은 바르트였다. 그가 손을 뻗었는데 닿지 않았다. 켈리가 짐꾼 앞에 섰다. 천을 쥔 팔이 보였다. 켈리가 개암나무 가지를 들어 그 팔을 쳤다.
딱.
소리가 가벼웠다. 가지가 가운데에서 부러졌다. 옹이가 있던 자리였다. 부러진 반쪽이 빙글 돌며 날아가 강물에 떨어졌다.
짐꾼이 자기 팔을 보았다.
"…아."
그것뿐이었다.

켈리가 자기 손을 보았다. 손에 반 토막이 남아 있었다. 부러진 끝이 하얗게 갈라져 있었고 껍질 아래 덜 마른 속이 젖어 있었다.
짐꾼이 웃었다. 웃음이 번졌다. 짐꾼 셋이 웃고 판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웃었다. 켈리는 그 웃음 속에서 반 토막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등의 맞은 자리가 당겼다. 휘두를 때 쓴 자리였다.
그때 말뚝 위의 남자가 일어섰다. 남자가 켈리를 보았다. 얼굴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본 것은 손이었고 손에 든 나무 토막이었다.
"…막대기."
옆 사람이 남자를 돌아보았다.
"막대기 든 애다."

웃음이 끊겼다. 끊기는 데 순서가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먼저 멈췄고, 그들이 멈춘 것을 보고 나머지가 멈췄다. 짐꾼이 마지막이었다. 짐꾼이 켈리를 다시 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보았다. 키가 크고 말랐고 여자였다. 손에 막대기가 있었다. 반 토막이었으나 그 이야기에는 막대기가 무슨 나무인지 나오지 않았다. 몇 토막인지도 나오지 않았다. 한 번에 갔다는 것만 나왔다.
짐꾼이 붉은 천을 놓았다.
"…농담이었소."
켈리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 아직 안 쳤는데요."
짐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켈리는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 방금 그것은 치려고 친 것이 아니었다. 천을 쥔 팔을 떼어 놓으려고 댄 것이었다. 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켈리는 알았고 그것은 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만 그 말은 이 자리에서 다른 뜻으로 들렸고, 들린 뜻 그대로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니카가 붉은 천을 끌어안고 일어났다. 짐짝 위에 동전이 그대로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가져가지 않았다. 판돈 앞에서 니카 셰르의 손이 그렇게 오래 멈춰 있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저거 가져가도 돼요?"
니카가 오벨에게 작게 물었다.
"딴 겁니까, 빼앗은 겁니까."
"딴 거예요."
"그럼 가져가십시오."
"근데 지금 가져가면 빼앗은 걸로 보일 것 같아요."
"예. 그렇게 보일 겁니다."
니카가 동전을 집었다. 집는 손이 떨렸다.

배가 왔다. 사람들이 탔다. 배는 넓지 않아서 스무 명이 타면 어깨가 닿았는데, 켈리 둘레만 어깨 하나만큼 비어 있었다. 아무도 그렇게 하자고 하지 않았다.
켈리가 반 토막을 무릎에 놓고 앉았다. 오벨이 그 옆에 앉았다. 오벨 둘레는 비지 않았다.
"…첫 줄이 바뀌었습니다."
"…예?"
"협조문의 첫 줄은 남색 로브였습니다. 저 사람들의 첫 줄은 막대기입니다."
켈리가 무릎 위의 반 토막을 보았다.
"…이거 그냥 나무인데요."
"예."
"아까 꺾은 거예요."
"압니다. 그래서 곤란합니다. 그 첫 줄에는 아무 나무나 다 맞습니다."

니카가 배 가장자리에서 널빤지를 꺼냈다. 세 줄이 적혀 있었고 위의 둘에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셋째 줄 옆의 동그라미를 한참 보다가 그 위에 선을 그었다.
"…9할이었는데."
"셋 다 했잖아."
바르트가 말했다.
"셋 다 했죠."
"셋 다 안 됐잖아."
"…셋 다 안 됐죠."
니카가 널빤지를 강물에 놓았다. 널빤지가 뱃전을 따라 조금 흐르다가 뒤로 처졌다. 니카의 셈은 빠르지만 가끔 맞지 않을 때가 있었다.

배가 강 가운데쯤 왔을 때 켈리가 뒤를 보았다. 나루터 마당에서 그 젊은 남자가 다시 말뚝에 올라앉아 있었다. 새로 온 사람이 셋 있었고 남자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그려 보이고 있었다. 두 손을 벌렸다가 한 손을 툭 꺾었다. 부러졌다는 시늉이었다. 그 이야기는 아까보다 한 줄이 길어져 있었다.

켈리가 반 토막을 물에 놓았다. 먼저 떨어진 반쪽이 어디쯤 갔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바르트가 배낭 옆구리의 끈을 풀었다. 겉옷에 감긴 채로 지팡이를 꺼내 켈리 쪽으로 내밀었다. 켈리가 받아서 겉옷을 벗겨 냈다. 이번에는 매듭이 금방 풀렸다. 바르트가 나루터에서 기다리는 동안 다시 묶어 둔 매듭이었다.
켈리의 손이 지팡이를 쥐었다. 손이 닫혔다.
이번에는 끝까지 닫혔다.

 

몫


비앙카 세렌은 아침부터 나루터에 있었다.
남색 코트는 짐 안에 접혀 있었다. 로브 입은 자를 쫓는 사람이 남색을 입고 다니면 안 된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 회색 여행 외투를 입고 있으니 마당의 누구도 그를 두 번 보지 않았다.
나루터 마당 한쪽 판자에 그 종이가 걸려 있었다. 희고 얇은 종이였고 왼쪽 위에 아홉 가닥 문장이 찍혀 있었다. 며칠 내린 비에 글자가 번져 아래쪽은 읽기 어려웠는데, 처마에 가려 있던 맨 윗줄은 멀쩡했다.
남색 로브.
그 종이는 비앙카가 왕도를 나설 때 들고 나온 묶음 중 하나였다. 남서 방면 검문소와 자치대에 돌린 것이 서른 장이었다.

말뚝 위에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틀 사이에 나루터 짐꾼이 된 사람이었고 짐을 지지 않을 때는 이야기를 했다. 새로 온 사람 넷이 그 앞에 모여 있었다.
"…막대기가 부러졌어. 딱 하고. 그런데 짐꾼이 물러났다니까."
"왜."
"그 애가 그랬대. 아직 안 쳤다고."
듣던 사람들이 웃었다. 비앙카는 웃지 않았다.
막대기로 치면 막대기가 부러질 수 있다. 다만 마도대 돌파형이 강화를 걸고 치면 부러지는 것은 막대기가 아니다. 그 애는 강화를 걸지 않고 쳤다. 걸지 않은 것인지 걸 수 없었던 것인지는 이야기만으로 알 수 없었다.

넷이 왔다. 갈색 겉옷에 곡물 자루를 멨고 걸음 폭이 같았다. 넷이 비앙카 앞에 멈췄는데 멈추는 데 시차가 없었다. 남서 국경 초소에서 빌려 온 정찰조였다. 빌린 서류는 없었다. 초소장이 비앙카에게 갚을 것이 하나 있었고 그것으로 갈음했다.
"보고."
조장이 입을 열었다. 종이는 꺼내지 않았다. 적히지 않아야 하는 일이었으므로 보고도 적히지 않았다.
"남쪽 큰길을 나루터까지 훑었습니다. 대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리 위에서 다섯과 마주쳤습니다. 셋에게 말을 걸었고 대답이 막힌 자는 없었습니다. 큰 남자 하나, 대장간 연장을 진다고 했습니다. 맨발의 처녀 하나, 실베인 소아레 출신이라 했습니다. 서류를 다루는 중년 남자 하나. 먼저 인사한 젊은 남자 하나."
"다섯이라 했네."
조장이 멈췄다.
"넷만 말했네."
"…다섯째는 보지 않았습니다."
"왜."
"다리가 좁았습니다. 발밑을 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조장이 다음 말을 하는 데 잠깐 걸렸다.
"…남색이 없었습니다."

비앙카가 말뚝 위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손을 벌렸다가 한 손을 툭 꺾는 중이었다. 큰 남자와 맨발의 처녀와 가방 든 남자와 붉은 천을 두른 젊은 남자. 다리 위의 넷과 나루터 이야기의 넷이 같았다. 다섯째 자리만 둘이 달랐다. 조장의 보고에서 그 자리는 비어 있었고 이야기에서는 막대기가 서 있었다.
회수과의 검문소 기준에는 네 항목이 있다. 남색 로브, 소매 끝 흰 띠, 도보 또는 승마, 단독. 비앙카는 한 달 반 전에 왕도에서 첫째 항목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넷째 항목도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426건 가운데 무리를 지어 달아난 자산은 없었다. 무리를 지으려면 먹을 것을 나눠야 하고, 나눌 것이 있으려면 벌어야 하며, 벌려면 9일보다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9일을 넘긴 자산이 드물었으므로 무리를 지은 자산은 없었다. 기준에 단독이라고 적은 사람은 틀리지 않았다. 그 사람이 본 자산은 전부 혼자였다.

"다리 위에서 자네가 보지 않은 하나가 대상이었네."
조장의 얼굴이 굳었다.
"…첫 줄이."
"알고 있네."
비앙카가 판자 쪽으로 턱을 들었다.
"저 첫 줄을 들고 나온 것이 나네."
조장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랐다. 이 일을 맡을 때 문서에 남지 않는 일이라는 말은 들었다. 문서에 남지 않는 일에서 잘못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는 듣지 못했다.

첫 줄은 고칠 수 있었다. 고치려면 사유를 적어야 했고, 사유에는 대상이 로브를 벗은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가 들어가야 했다. 타르실 중재 기록을 조용히 청구한 일과 월경 허가 없이 정찰조를 로엔에 들인 일이 거기 같이 들어간다. 고친 협조문은 회수과의 정식 문서가 되고, 정식 문서는 읽힌다. 그래서 비앙카는 고치지 않았다. 서른 장에 적힌 첫 줄은 지금도 서른 군데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강은 언제 건넜다던가."
"이틀 전이라고 합니다."
나루터에서 실베인 접경까지는 이틀 길이었다. 비앙카가 강 건너를 보았다. 안개가 물 위에 낮게 깔려 있어서 건너편 둑이 반쯤만 보였다.
어디로 갔나. 두 달 넘게 붙들고 있던 질문에 처음으로 답이 나왔다. 실베인이었다. 벨류엔 군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가면 마을이 문을 닫는 땅이었다. 그 땅 사람들은 여덟 해 전에 늪을 돌아 들어온 벨류엔군을 아직 기억했다.
"돌아가게. 초소로."
"…예."
"자네들은 여기 온 적이 없네."
"확인했습니다."
넷이 돌아섰다. 돌아서는 데도 시차가 없었다.

혼자 남은 비앙카가 짐에서 협조문 사본을 한 장 꺼냈다. 맨 윗줄 옆 여백에 펜으로 한 단어를 적었다.
막대기.
그 단어는 사본 한 장에만 적혔다. 서른 장의 원본에는 지금도 남색 로브가 첫 줄이었다. 비앙카가 사본을 접어 넣었다. 넣으면서 손끝이 허리의 칼집을 지나갔다. 홈이 열아홉 개 파여 있었다.
스무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강 건너 이틀 길 끝에서, 그날 오후에 린이 먼저 알았다.
린이 알았다는 것을 넷이 안 것은 린의 걸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맨 뒤에서 발을 끌던 린이 어느새 맨 앞에 가 있었다. 맨발이 젖은 흙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짧아져 있었다.
"…왜 그래."
"냄새."
"무슨 냄새."
"물 냄새가 달라."
켈리가 숨을 들이켜 보았다. 물 냄새는 며칠째 났다. 달라진 것을 켈리는 맡지 못했다.

길이 낮아지면서 안개가 올라왔다. 위에서 내려오는 안개가 아니라 아래에서 차오르는 안개였다. 발목께부터 오더니 무릎까지 왔고 거기서 더 오르지 않았다. 무릎 아래가 하얗게 지워진 채로 다섯이 걸었다. 안개 위로 나무들이 솟아 있었는데 밑동이 전부 물에 잠겨 있었다. 잠긴 지 오래되어 줄기 아래쪽이 검었고 그 위를 이끼가 두껍게 덮었다. 이끼는 한 가지 색이 아니었다. 짙은 초록과 회색과 붉은 갈색이 섞여 있었고 가까이 가서 보면 하나하나가 다른 이끼였다.

길 한가운데에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길이 그 나무를 비켜 둘로 갈라졌다가 나무 너머에서 다시 만났다. 둥치는 어른 셋이 팔을 벌려야 둘러쌀 만했고 껍질에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여러 사람이 새긴 것이라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잎 모양이 있고 물결 모양이 있고 새 발자국 같은 것이 있었다. 오래된 문양은 껍질이 자라 올라와 반쯤 덮었고 새것은 아직 하얬다.
린이 나무 앞에 멈춰 손바닥을 둥치에 댔다. 대고 한참 있었다.
"…여기서부터예요."
"뭐가."
"실베인."

켈리가 둘레를 보았다. 문이 없었다. 초소도 깃대도 줄도 없었다. 켈리가 아는 국경은 초소와 깃대와 줄이었다. 줄을 서서 번호를 대면 통과시켰고 대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잡혔다.
여기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그 너머에 사람이 많았다. 나무 뒤 둔덕에 갈대로 엮은 거적이 수십 장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고 그 아래마다 사람이 앉아 있었다. 연기가 여러 줄 올랐다. 둔덕 한가운데에 큰 솥이 걸려 있었고 그 앞에 줄이 서 있었다. 켈리는 그 줄을 세지 않았다. 세지 않아도 길었다.
켈리가 따라 걸었던 줄은 아직 뒤에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보다 먼저, 다른 길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우기 내내 북쪽에서 사람이 내려왔고 내려온 사람들은 이 나무 앞에서 멈췄다.
나무 뿌리 사이에 노파가 하나 앉아 갈대를 엮고 있었다. 엮은 것이 옆에 쌓여 있었다. 거적이 되는 것이었다.

노파는 엮던 손을 멈추지 않고 고개만 들었다. 린이 그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 가까이 숙였다가 들었다. 로엔의 물길 앞에서 숙이던 각도와 같았다.
"소아레의 린이에요. 돌아왔어요."
"소아레 린. 로엔 물길 일 하러 간."
"예."
"이 년 만이오."
"예."
실베인에는 성이 없다. 사는 땅의 이름을 이름 앞에 붙인다. 소아레는 늪 동쪽의 마을 이름이었고, 린이 어디서 왔는지 묻는 사람에게는 그것으로 대답이 끝났다.
노파가 다시 갈대를 엮었다. 그것으로 인사가 끝났다.
켈리가 린 옆에 가서 똑같이 무릎을 꿇었다. 린에게 배운 인사였다. 숙이는 각도가 린보다 조금 깊었고 드는 것이 조금 늦었다. 노파의 손이 한 번 멈췄다.
"처음 하는 인사요."
"…예."
"누구한테 배웠소."
켈리가 린을 보았다. 노파가 린을 보았다. 린이 고개를 돌렸는데 귀가 붉었다.

"들어오려면 몫을 말하시오."
노파가 말했다. 넷이 린을 보았다.
"실베인은 통행세를 안 받아요. 들어오는 무리는 마을에 해 줄 일을 하나씩 말해요. 그게 몫이에요. 말한 일을 하면 들어와요."
"못 하면."
바르트가 물었다.
"못 들어와요."
"일 못 하는 사람은. 늙었거나 애거나."
"같이 온 사람이 대신 져요. 몫은 무리마다 지니까요."
바르트가 둔덕 쪽을 보았다. 거적 아래 앉은 사람들 가운데 노인과 아이가 많았다.

"저 사람들 다 받으면 먹을 게 모자라지 않아요?"
니카가 물었다.
"모자라오."
노파가 말했다. 엮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럼 왜 받아요."
"나도 여덟 해 전에 여기 몫을 말하고 들어왔소."
니카가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노파의 왼손 등에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다. 갈대를 당길 때마다 그 자리가 땅기는지 손가락이 한 박자씩 늦었다.
수풀회는 피난 온 사람들을 어떻게 할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정해진 것이 없으니 접경 마을들은 옛날부터 하던 대로 했다. 몫을 말하고 말한 것을 하면 누구든 들어온다. 그 예법은 수풀회보다 오래되었다.

노파가 바르트를 보았다. 눈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 목덜미의 혹을 보는 눈이었다.
"어디 땅이오."
"카르소요."
"없어진 땅이오."
"예."
"몫은."
"쇠 고치는 거요."
노파가 갈대 엮던 손으로 둔덕 아래를 가리켰다. 거적 하나 옆에 쇠붙이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날이 나간 낫과 자루가 빠진 괭이와 밑이 뚫린 솥이었다. 피난 온 사람들이 지고 온 것 가운데 못 쓰게 된 것들이었고, 못 쓰게 되었는데도 버리지 못해서 쌓아 둔 것들이었다.
바르트가 그 무더기를 한참 보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그쪽으로 걸어가 배낭을 내려놓았다.

다음이 오벨이었다.
"어디 땅이오."
"벨류엔입니다."
갈대를 엮던 손이 멈췄다.
"불 놓은 땅이오."
"예. 저는 불을 놓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땅입니다."
"몫은."
"적는 일입니다. 약속이든 셈이든요."
"실베인은 적지 않소. 기억하오."
"…그럼 무엇을 하면 됩니까."
노파가 둔덕 아래 물가를 턱으로 가리켰다. 물동이 둘과 멜대가 놓여 있었다.
"물 길으시오."
오벨이 그 멜대를 보았다. 서른여덟 해 동안 그가 어깨에 메어 본 것은 서류 가방뿐이었다.

니카 차례였다.
"어디 땅이오."
"…타르실이요."
손이 다시 멈췄다. 이번에는 오래 멈췄다.
"상인이오?"
"아니요."
"그럼 무엇이오."
니카가 대답하기 전에 잠깐 있었다. 거짓말을 고르는 시간은 아니었다. 니카는 거짓말을 할 때 빨랐다.
"…도박사요."
"그건 더 나쁘오."
"왜요?"
"상인은 지도를 팔았소. 도박사는 뭘 걸었는지도 모르겠소."
타르실 상인이 실베인 늪의 통행로를 그린 지도를 벨류엔에 판 일이 있었다. 그 지도를 따라 벨류엔군이 늪을 돌아 들어와 마을들을 태웠다. 노파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실베인 사람이면 누구나 알았고 타르실 사람이면 대개 알았다. 니카도 알았다. 니카의 눈이 노파의 왼손에 가서 멎었다.
"수풀회에서 이 일로 회의를 마흔 번 했소. 타르실 상인은 돌려보내기로 했소."
"전 상인이 아닌데요."
"그러니 문제요. 도박사는 회의에서 다룬 적이 없소."
"…그럼 어떻게 돼요."
"회의를 해 봐야 아오."
"회의는 언제 하는데요."
"다음 달."
니카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멜대를 메다 말고 오벨이 기침을 한 번 했다. 웃음을 덮는 기침이었다.

"얘 몫까지 제가 할게요."
린이 말했다. 노파가 린을 보았다.
"데려온 건 저예요."
"물길 일이 두 배가 되오."
"예."
노파가 갈대를 한 줄 더 엮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회의 안 해도 되오."
니카가 린을 보았다.
"…그럼 저는 뭐 해요."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요?"
"아무 짓도 하지 마. 네가 뭘 하면 그것도 내 몫이 돼."

나무 뒤에서 아이 둘이 고개를 내밀었다. 하나가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껍질도 벗기지 않은 가지였다. 아이가 켈리의 얼굴을 보고 켈리의 손을 보았다. 그러고는 자기 가지를 휘둘렀다.
"한 번에 다섯!"
다른 아이가 뒤로 넘어지는 시늉을 했다. 둘이 같이 웃으며 나무 뒤로 달아났다.
켈리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지팡이를 등 뒤로 옮겼다.
"숨기지 마. 이제 소용없어."
린이 말했다. 노파는 갈대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막대기 든 애가 남쪽으로 온다는 말이 어제 왔소. 강을 같이 건넌 사람이 먼저 왔소."
"…저 막대기 아닌데요."
"말이 그렇게 왔소."

노파가 켈리를 보았다.
"어디 땅이오."
켈리가 대답하지 못했다. 노파가 기다렸다. 갈대를 엮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켈리는 어디서 태어났는지 몰랐다. 여섯 살 전을 기억하지 못했고, 원적이 지워졌으므로 찾아볼 데도 없었다. 켈리가 아는 땅은 막사 바닥과 연병장과 참호였는데 그것은 땅이 아니라 자리였다.
"…모르겠는데요."
"모르오?"
"예."
노파가 그 대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둔덕 위에도 자기 땅을 잃은 사람이 많았다. 여덟 해 전에는 노파도 그랬다.
"땅이 없으면 몫으로 말하시오."

켈리가 생각했다. 생각하는 동안 노파가 기다렸다. 나무 뒤에서 아까 그 아이들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다들 같은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때리는 거요?"
노파가 갈대를 내려놓았다.
"그건 몫이 아니오. 그건 소문이오. 여기는 때릴 사람이 없소."
나무 뒤에서 아이 하나가 킥 하고 웃었다. 니카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떨렸다.

켈리가 다시 생각했다. 생각하는 동안 눈이 둔덕의 솥으로 갔다. 솥 앞의 줄이 조금씩 줄었다. 맨 앞의 여자가 그릇을 내밀었고 국자가 한 번 들어갔다 나왔다. 그릇에 담긴 것이 묽었다. 여자가 그릇을 기울이자 바닥이 보였다.
켈리는 그 그릇을 알았다. 골짜기에서 빵 한 덩이를 들고 서 있던 날 켈리는 그 빵을 예순으로 나누면 손톱만 해진다는 셈을 했다. 손톱만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날 켈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켈리가 품에 손을 넣었다. 종이가 두 장 있었다. 그중 한 장을 꺼냈다. 접힌 자리가 닳아 보풀이 일었고 숯 글씨가 조금 번져 있었다. 획 순서가 틀렸고 글씨가 컸으며 줄이 아래로 처졌다. 셋째 줄에는 빠뜨렸던 글자가 옆에 작게 끼워져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펴서 손가락으로 첫 줄을 짚었다.
"…잎이 다섯 갈래."
손가락이 내려갔다.
"줄기가 붉다. 그늘에서 자란다. 땅에 붙어서 자란다. 옆에 이끼가 있다."
마지막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짐승이 뜯어 먹은 자국이 있다."
켈리가 종이에서 눈을 들었다.
"…먹어도 되는 풀을 고를 줄 알아요. 여덟 번 먹어 봤어요. 안 아팠어요."
노파가 켈리를 한참 보다가 늪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가서 해 보시오."

늪가는 물과 땅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다. 디디면 땅이고 한 발 더 디디면 물이었다. 켈리가 거기 무릎을 꿇었다. 꿇은 자리로 물이 배어 올라와 무릎이 젖었다. 켈리가 풀 하나를 손으로 들추었다. 잎을 세었다. 넷이었다. 놓았다. 다음 것을 들추었다. 다섯이었다. 줄기를 보았다. 푸르렀다. 놓았다.
켈리는 그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여섯 줄을 차례로 대 보고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놓았다. 놓은 것이 뽑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아까 그 아이 둘이 따라와 있었다. 둘이 켈리 옆에 쪼그려 앉아 켈리가 하는 것을 보았다. 하나가 켈리가 놓은 풀을 집어 들었다.
"이건 왜 버려요?"
"이끼가 없어서요."
아이가 그 풀 둘레를 보았다. 이끼가 없었다. 아이가 그것을 놓고 다른 풀을 들추었다. 잎을 손가락으로 세었다.
"다섯이에요!"
"줄기요."
"…푸른데요."
"그럼 아니에요."
아이가 실망한 얼굴로 풀을 놓았다. 그러고는 또 다른 것을 들추었다. 해가 기울 무렵에는 셋이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셋 다 무릎이 젖었다.

켈리가 돌아왔을 때 짙은 녹색 겉옷의 앞자락이 불룩했다. 앞자락을 걷어 올려 그 안에 담아 온 것이었다. 어깨선이 팔뚝까지 내려오는 겉옷이라 앞자락이 넓었고 많이 들어갔다. 크다고 웃음거리가 됐던 옷이었다.
켈리가 노파 앞에 그것을 쏟았다. 노파가 갈대를 내려놓고 하나씩 집어 보았다. 잎을 뒤집었고 줄기를 꺾어 냄새를 맡았다. 다 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켈리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서 있는 자세가 보고하는 자세였다.
노파가 풀 하나를 따로 골라 옆에 놓았다.
"이건 쓴대라는 풀이오. 먹는 것이 아니라 달여서 배 아픈 사람한테 주는 것이오."
"…알아요."
"아시오?"
"린이 가르쳐 줬어요."
노파가 둔덕 아래 도랑 쪽을 보았다. 린이 무릎까지 물에 들어가 막힌 자리를 손으로 더듬고 있었다. 노파가 나머지를 한데 모았다.
"솥에 넣으시오."

그날 저녁 솥의 죽이 달랐다. 국자가 들어갔다 나오면 그릇에 초록이 섞였고, 그릇을 기울여도 바닥이 금방 보이지 않았다. 맛은 썼다. 쓴 것을 먹는 얼굴들이 있었는데 그릇을 내려놓는 사람은 없었다.
켈리는 줄 끝에 서서 그것을 보았다. 맛이 쓴지 어떤지는 켈리에게 상관이 없었다. 켈리가 본 것은 그릇 바닥이었다. 바닥이 보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해가 진 뒤에 일이 끝났다. 바르트 옆에 쌓인 쇠붙이가 줄었고 고친 낫이 다른 쪽에 따로 쌓였다. 도랑이 뚫려 마을 앞으로 차오르던 물이 빠졌다. 오벨이 멜대를 내려놓았는데 내려놓은 뒤에도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는 물동이를 몇 번 날랐는지 세어 두었고 아무도 묻지 않았으므로 말하지 않았다. 마흔한 번이었다.
니카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니카에게는 그날 가장 힘든 일이었다. 오후 내내 거적 아래 앉아 솥 앞의 줄을 셌고, 센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그것이 무슨 일이 될까 봐서였다.

노파가 갈대를 다 엮고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켈리를 보았다.
"기억했소."
"…예."
"내일도 하시오."
켈리가 그 말을 들었다. 내일도 하라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열두 해 동안 매일 들었다. 다만 그때 그 말 앞에는 언제나 번호가 있었다.

늪가에서 같이 무릎을 꿇었던 아이 하나가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막대기 든 애가 풀 고를 줄 안대!"

그날 밤 접경 마을에서 그 말이 여러 번 쓰였다. 첫 줄은 나루터에서 건너왔고 둘째 줄은 솥 앞에서 생겼다.
둘째 줄은 켈리가 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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