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하는 법

로엔 남부의 농지는 물로 나뉘어 있었다.
담이나 울타리가 없었다. 대신 수로가 있었다. 밭과 밭 사이로 폭이 두 걸음쯤 되는 도랑이 나 있고 그 안으로 물이 흘렀으며, 어느 밭이 어디까지인지는 그 도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물을 나누는 것이 곧 땅을 나누는 것이었다. 로엔에서 밭을 놓고 벌어지는 다툼은 거의 전부 물을 놓고 벌어지는 다툼이었고, 그래서 이 나라의 재판 기록 절반이 물에 관한 것이었다.
일행이 그 수로를 따라 걷게 된 것은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이었다. 큰길에서 갈라져 나온 샛길을 탔는데 그 샛길이 밭 사이로 들어가더니 없어졌다. 없어진 자리에 물만 흐르고 있었다.
"물어봐야겠는데."
바르트가 말했다.
앞쪽에 사람이 모여 있었다. 열 명쯤이었고 전부 수로 한쪽 가에 서 있었다. 서 있는 모양이 일을 하다 만 모양이었다. 삽을 든 사람이 삽을 땅에 짚은 채로, 자루를 진 사람이 자루를 진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수로였다. 정확히는 수로 위에 걸쳐진 널 한 장이었다.
널은 길이가 어른 키만 했고 폭이 두 뼘이었다. 물 위에 가로로 놓여 있었으며 양 끝이 도랑 가장자리에 걸쳐져 있었다. 널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널 가운데에 작은 것들이 놓여 있기는 했다. 조가비 몇 개와 유리구슬 세 알과 마른 꽃 한 줌이었다. 그것들이 한 줄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널 앞에 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여자아이였다. 켈리와 또래로 보였고 켈리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밝은 밤색 머리를 여러 갈래로 땋아 갈래마다 구슬을 꿰었고, 팔목과 발목에 장신구가 다발로 감겨 있었다. 조가비와 유리와 나무를 깎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맨발이었다. 발등까지 진흙이 올라와 있었는데 씻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묻힌 것처럼 고르게 묻어 있었다.
그 아이가 널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소리가 아주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말하다가 멈추고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가 매번 같았다.
이런 일에도 직업이 있었다. 로엔의 큰 농지에서는 물이 갈라지는 자리마다 교섭인을 두었고, 교섭인은 대개 실베인에서 왔으며, 품삯은 밭 주인들이 나누어 냈다. 물이 제때 오면 아무도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고 물이 안 오면 그 사람이 책임을 졌다. 좋은 직업은 아니었다. 실베인 사람들이 이 일을 하러 로엔까지 오는 이유는 실베인에 밭이 적기 때문이었다.
켈리가 그것을 보았다. 켈리가 아는 자세 중에 저것과 비슷한 것이 하나 있었다. 마법청 검열관이 왔을 때 대원들이 취하는 자세였다. 다만 그 자세는 사람을 향해 서서 하는 것이었지 물을 향해 꿇어앉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뭐 하는 거야."
켈리가 물었다.
"교섭입니다."
니카가 대답했다.
"물길 정령이랑요."
"정령이 뭔데."
"물에 사는 겁니다. 정확히는 물을 맡고 있는 거고요."
니카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잘은 모릅니다. 실베인 사람들이 저런 걸 합니다. 우리 쪽에서는 잘 안 하고요."
"저기 아무것도 없는데."
"그렇죠. 그래서 못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오벨이 널 위의 물건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그 배열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려 하는 중이었는데 읽히지 않았다. 계약서라면 읽을 수 있었다. 조가비 세 개와 유리 세 알과 마른 꽃의 배열에는 조항이 없었다.
"저 물건들에 뜻이 있습니까."
"예물일 겁니다."
"무엇에 대한 대가입니까."
"물을 좀 돌려 달라는 거겠죠. 저 아래쪽 밭이 마른 모양입니다."
바르트는 이미 그쪽으로 걷고 있었다. 길을 물어야 했고 저기 사람이 있었다. 켈리가 따라갔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를 배운 적이 없었다. 벨류엔에서는 물을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분대에서는 분대장에게, 분대장이 없으면 그 위에게, 아무도 없으면 묻지 않고 기다린다. 물을 사람을 고르는 일 자체가 없었으므로 고르는 법도 없었다.
켈리는 사람들을 훑었다. 계급장을 찾았다. 없었다. 나이순으로 세워 보려고 했는데 나이가 제각각이었고 서 있는 자리에도 규칙이 없었다. 삽을 든 사람이 앞에 있고 손이 빈 사람이 뒤에 있었다. 켈리가 아는 어떤 배열도 아니었다. 그래서 켈리는 가장 앞에 있는 사람에게 갔다.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은 무릎을 꿇고 있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 아이와 켈리 사이에 수로가 있었다. 수로를 건너려면 건널 것이 필요했고 건널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켈리가 널을 밟았다.
정확히 말하면 밟으려고 발을 올렸다. 발바닥이 널에 닿았고 무게가 실렸다. 켈리는 마른 강바닥에서 오래 걸었던 사람이라 발을 디딜 때 앞쪽부터 놓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대로 놓았다. 널은 두꺼웠고 사람 하나쯤은 충분히 받쳤을 것이다. 그러나 널 가운데에 조가비와 유리구슬과 마른 꽃이 놓여 있었고, 켈리의 발이 그 위로 올라갔다.
유리구슬 하나가 깨졌다.
소리가 아주 작았다. 물소리에 묻힐 만한 소리였는데 아무도 그렇게 듣지 않았다. 열 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무릎 꿇고 있던 아이가 허리를 펴고 켈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아이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화가 아니었다. 화는 그다음에 왔다. 먼저 온 것은 무언가가 방금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물이 멎었다.
멎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수로의 물은 계속 흘렀다. 다만 아래쪽으로 갈라지는 작은 도랑 하나로 들어가던 물이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갈라지는 자리에서 물이 한 번 뭉쳤다가 전부 본줄기로 갔다. 손으로 막은 것처럼 갔다. 막은 것은 없었다.
아래쪽 밭에서 누가 소리를 질렀다.
"안 와!"
아이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켈리의 발을 보았고 깨진 유리를 보았고 남은 조가비를 보았다. 그러고는 켈리의 얼굴을 보았다.
"너 지금."
"길 좀 물으려고요."
"거길."
"예."
"거기를 밟고."
"예."
아이가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그리고 참았다. 참는 것이 보였다.
"내려와."
켈리가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두 번째 유리구슬을 밟았다.
그 아이의 이름이 린 소아레라는 것은 한참 뒤에 알게 된다. 그때 켈리가 알고 있던 것은 자기가 무언가를 깨뜨렸다는 사실 하나뿐이었고, 그것을 물어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았으나 무엇으로 물어내야 하는지는 몰랐다. 유리구슬의 값은 알 수 있었다. 그 유리구슬이 놓여 있던 자리의 값은 알 수 없었다.
린이 무릎을 다시 꿇었다.
"다시 합니다."
"뭘 다시."
농부 하나가 말했다.
"인사부터 다시 합니다. 처음부터요."
린이 널 앞에 이마가 닿을 만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이번에는 소리를 내서 말했다.
"윗물을 맡으신 분께. 아까 여쭌 사람입니다. 제 잘못으로 자리가 상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례를 더 올리겠습니다."
린이 손목에서 장신구 하나를 풀었다. 파란 유리를 깎은 것이었다. 그것을 널 위에 놓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먼저 여쭙고 놓았어야 하는데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제 잘못입니다."
린이 그 유리를 도로 집었다. 그리고 다시 절을 하고 나서 다시 놓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린이 일어나서 켈리에게 왔다. 아주 빠르게 왔다.
"네가 해."
"뭘요."
"사과."
"누구한테요."
"저기."
켈리가 널을 보았다. 널 위에 조가비와 깨진 유리가 있었다. 그 너머에 물이 있었고 물 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저기 아무도 없는데요."
"있어."
"안 보이는데요."
"안 보이는 게 없는 거야?"
켈리가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흘 전에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면 안 본 거지 없는 게 아니라고 어떤 사람이 말했다. 켈리는 그 말을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갖고 다니는 중이었다.
"뭐라고 해요."
"미안하다고 해."
"미안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말고."
"어떻게요."
"진심으로."
"진심이 뭔데요."
린이 켈리를 보았다.
그 순간 린의 얼굴에서 화가 조금 빠졌다. 빠진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왔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린 자신도 몰랐다. 열여덟 해를 살면서 진심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비꼬는 얼굴이 아니었고 따지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정말로 모르는 얼굴이었으며, 그런 얼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린은 그때 처음 알았다.
뒤에서 농부들이 움직였다.
"됐어. 나가."
"아직 됩니다."
린이 돌아섰다.
"한 번만 더."
"두 시간 했잖아."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물이 안 오잖아!"
그 말에는 대꾸할 것이 없었다. 물이 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고, 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든 밭은 마르고 있었으며, 마르는 밭 앞에서 예법을 설명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삽을 든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켈리가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고쳐 쥐었고 바르트가 그 팔을 눌렀다.
"갑시다."
바르트가 말했다.
"저 사람 삽 들었는데요."
"삽으로 땅 파던 사람이야. 우리가 여기 있으면 저 사람이 오늘 안에 삽으로 다른 걸 파게 돼."
일행이 물러났다.
린도 같이 나왔다. 아무도 린에게 나가라고 하지 않았는데 나왔다. 정확히는 한 사람이 말하기는 했다. 그 말은 나가라는 뜻이 아니라 다시는 오지 말라는 뜻이었고, 린은 그 둘을 구별할 줄 알았으므로 대꾸하지 않고 널 위의 조가비를 하나씩 주워 담았다.
줍는 데 시간이 걸렸다. 깨진 유리를 먼저 주웠고 조가비를 나중에 주웠다. 손끝이 베였는데 신경 쓰지 않았다. 마른 꽃은 물에 떨어져 이미 떠내려가고 없었으므로 린은 그 자리를 잠깐 보다가 그만두었다. 마지막으로 널을 들어 도랑 가에 세워 놓았다. 세워 놓는 방향이 있는 모양이었다. 두 번 고쳐 세웠다.
켈리가 그것을 보고 있었다. 물에 빠진 꽃을 찾는 시간과 널을 두 번 고쳐 세우는 시간은 켈리가 아는 어떤 셈에도 들어가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무언가가 생기지 않았고 무언가가 줄지도 않았다. 켈리는 그것이 낭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다가 판단할 기준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었다.
밭을 벗어나는 데 한참 걸렸다. 수로를 두 번 건너고 마른 도랑을 한 번 넘었다. 린이 앞장서서 걸었고 걸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맨발이 진흙을 밟는 소리만 났다.
큰길에 올라서고 나서 린이 멈췄다. 그리고 손목의 장신구를 세기 시작했다.
왼쪽 손목부터 세고 오른쪽 손목을 세고 발목 두 짝을 셌다. 세는 동안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다 세고 나서 한 번 더 셌다.
스물셋이었다.
"스물셋."
린이 말했다.
"아침에 스물넷이었는데."
"하나 놓고 왔잖아."
켈리가 말했다.
"그래. 놓고 왔지. 받지도 못했는데 놓고 왔지."
"그거 얼마예요."
린이 고개를 돌렸다.
"뭐?"
"그 유리요. 값이 얼마예요. 제가 깼으니까 물어야 되는데 지금은 돈이 없고, 그래서 얼마인지 알아야 갚을 때 갚아요."
린이 켈리를 한참 보았다. 화를 낼 참이었는데 그 말이 화를 낼 자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산하는 말이었고 계산하는 사람의 얼굴이었으며, 무엇보다 그 말을 하는 동안 켈리는 미안해하지 않고 있었다. 미안해하지 않는 것이 뻔뻔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린은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뻔뻔한 얼굴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보았다.
"…여섯 냥."
"여섯 냥."
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 둘게요."
그러고는 정말로 종이를 꺼내서 적었다. 린이 그것을 보고 있다가 물었다.
"너 뭐야."
"켈리요."
"그게 아니라."
"예?"
"됐어."
린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열 걸음쯤 가다가 멈췄다. 그리고 돌아섰다.
"아니 그게 왜 됐어. 하나만 물어볼게. 너 그게 뭔지 알고 밟았어?"
"널이요."
"널 아니야."
"널처럼 생겼는데요."
"널처럼 생긴 건 맞지. 근데 널이 아니야. 자리야."
"자리가 뭔데요."
"올라오는 자리."
"뭐가요."
"그분이."
켈리가 고개를 돌려 오벨을 보았다. 오벨이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그는 방금 들은 말을 자기 머릿속의 어떤 항목에도 넣지 못하고 있었다.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만."
"뭔데요."
"그 자리에 관한 권리는 누구에게 귀속됩니까. 밭 소유자입니까, 아니면 그 자리를 마련한 사람입니까."
"…예?"
"손괴가 발생했으니 청구권자가 특정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그 자리가 설치된 널이 밭 소유자의 재산이라면 재물 손괴와 예법 위반이 별개의 건으로 성립할 여지가—"
"아저씨."
"예."
"그런 거 없어요."
"없다는 것은 규정이 없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적용이 안 된다는 뜻입니까."
"둘 다요."
오벨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날 두 번째로 자기 직업이 닿지 않는 자리를 만났다.
니카가 뒤에서 끼어들었다.
"제가 여쭤도 됩니까. 그 정령이라는 게, 부탁을 들어주는 확률이 얼마쯤 됩니까."
"확률?"
"예. 열 번 하면 몇 번 됩니까."
"그런 식으로 안 세."
"안 세면 어떻게 압니까. 될지 안 될지를요."
"안 알아. 모르고 하는 거야."
"모르고 하시는데 이 일로 먹고사셨다고요."
"어."
니카가 정말로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것은 이 아이가 좀처럼 짓지 않는 얼굴이었다. 니카 셰르는 세상 모든 일에 승산이 붙어 있다고 믿으며 살아온 사람이었고, 승산이 붙지 않는 일에 밥벌이를 거는 사람을 그날 처음 보았다.
린이 두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아니 진짜. 너희 뭐야. 넷이 다 말이 안 통해."
그 말은 정확했다. 다만 정확하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날 큰길 위에서 네 사람은 각각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다. 하나는 조항으로 말했고 하나는 확률로 말했고 하나는 예법으로 말했으며 남은 하나는 무게와 값으로 말했다. 같은 말을 쓰는데 같은 뜻이 아니었다. 그 어긋남이 나중에 다섯 사람을 거의 갈라놓게 되는데, 그것은 아직 며칠 뒤의 일이었다.
날이 저물었다. 큰길 옆 잡목 아래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날은 내내 궂었고 저녁부터 비가 왔다. 오래 오지는 않았으나 나무를 적실 만큼은 왔다.
바르트가 불을 피우려고 했다. 반 시간 걸렸다. 안 됐다.
"젖었어."
그가 말했다.
"마른 게 없어."
"기름 부으면요."
켈리가 물었다.
"기름은 아침에 밥 하는 데 써야지."
린이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일행을 따라오고 있었는데 아무도 오라고 하지 않았고 아무도 가라고 하지 않았다. 오벨이 한 번 「동행 관계가 성립하였는지」를 확인하려 했다가 바르트가 눈짓으로 말렸다.
린이 일어섰다.
"제가 할게요."
"할 수 있어?"
"해 볼게요. 대신 조용히 해 주세요. 특히 저."
린이 켈리를 가리켰다.
"저 사람. 움직이지 마세요."
켈리가 그 자리에서 굳었다. 차렷 자세가 나왔다. 린이 그것을 보고 잠깐 말을 잃었다가 그냥 넘어갔다.
린이 젖은 나뭇가지를 모아 한군데 쌓았다. 쌓는 방법이 특별하지 않았다. 그다음이 특별했다.
린이 무릎을 꿇었다. 쌓아 놓은 나뭇가지 앞에서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등을 폈다. 그리고 말했다.
"이 근처에서 마른 자리를 맡고 계신 분께 여쭙습니다."
한 박자 쉬었다.
"이름을 모르고 부르는 무례를 먼저 사과드립니다. 실베인 소아레 마을에서 온 린입니다. 오늘 아랫녘 물자리에서 실례를 저질렀고 그 일은 그쪽에도 전해졌을 줄 압니다. 그러니 제 청을 들어주지 않으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또 한 박자.
"다만 여기 사람이 넷 있고 그중 하나가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밤이 길고 옷이 젖었습니다. 불을 조금만 빌리고 싶습니다. 오래 쓰지 않겠습니다. 이 나뭇가지가 다 탈 때까지만 쓰고 그 뒤로는 더 청하지 않겠습니다."
또 한 박자.
"사례는 먼저 보여 드리고 나중에 놓겠습니다."
린이 손목에서 장신구를 하나 풀었다. 조가비였다.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 불 자리 위로 한 번 들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손을 내렸다.
"빌려주시겠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켈리는 여기서 또 안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생각하면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 기분의 이름은 아마 실망이었을 것이고 켈리는 그 이름도 몰랐다.
그때 젖은 나뭇가지 가운데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연기가 먼저 올라오고 그다음에 아주 작은 불이 붙었다. 붙는 방식이 이상했다. 보통 불은 가장자리부터 붙어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은 한가운데부터 붙어서 밖으로 나왔다. 젖은 나무가 타면 나야 할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냥 마른 나무처럼 탔다.
불이 자리를 잡았다.
"고맙습니다."
린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약속대로 이 가지가 다 타면 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고는 조가비를 불 자리 옆 돌 위에 놓았다.
스물둘이 되었다.
켈리가 그 불을 보고 있었다. 보다가 린을 보았다. 린은 불 가까이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주 가까이였다. 손바닥이 불꽃에서 한 뼘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뜨거울 텐데요."
"안 뜨거워."
"그게 무슨."
"빌린 쪽 감각이 없어져. 불을 빌렸으니까 오늘 밤엔 뜨거운 걸 못 느껴."
린이 손을 그대로 두고 말했다.
"물 빌리면 목마른 걸 못 느끼고 바람 빌리면 숨 막히는 걸 못 느껴. 그런 거야."
"그럼 손 타는데요."
"어."
"타는지 모르고요."
"어."
켈리가 린의 손목을 잡아 뒤로 당겼다. 당기는 힘이 조금 셌다. 린이 끌려오면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가 켈리가 다시 잡아 세웠다.
"아 진짜, 그렇게 세게."
"손이 빨개요."
"…그러네."
린이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만져 보았는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고마워."
"뭐가요."
"봐 준 거."
켈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을 봐 줬다는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손이 빨개지고 있으면 치우는 것이 당연했다. 당연한 것에 고맙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켈리는 아직 몰랐다.
대신 켈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낮에 들은 말이었다. 진심으로 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켈리는 진심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물었을 때는 정말로 몰라서 물은 것이었고 지금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하나가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에 린이 불 앞에서 한 말들은 낮에 널 앞에서 한 말들과 문장이 거의 같았다. 같은 순서였고 같은 높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낮에는 안 됐고 지금은 됐다.
무엇이 달랐는지를 켈리는 알아내지 못했다.
켈리가 아는 세계에서 결과가 달라지는 이유는 언제나 양이었다. 힘을 더 쓰면 더 부서지고 덜 쓰면 덜 부서진다. 건량을 두 냥 받는 날과 여섯 냥 받는 날은 다르게 움직인다. 양이 같은데 결과가 다른 경우를 켈리는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을 설명하는 말이 세상에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이라거나 정성이라거나 진심이라고 불렀으며, 어린아이들도 대개 예닐곱 살에 그 말을 배웠다. 그 나이의 켈리가 배운 것은 폭발의 세 단계였다.
불이 자리를 잡고 나서 한참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바르트가 냄비를 올렸고 니카가 젖은 외투를 뒤집어 널었으며 오벨이 젖은 종이를 한 장씩 떼어 말렸다.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린이 켈리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까 그거."
"예."
"물어본 거. 진심이 뭐냐고."
켈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거 진짜 몰라서 물어본 거야?"
"예."
"아무도 안 가르쳐 줬어?"
"예."
린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이 한 번 튀었고 그쪽으로 재가 조금 날렸다.
"나 린이야. 린 소아레."
"…예."
"이름 말했으면 다음은 네 차례야. 그게 인사야."
켈리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이름을 대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글자였고 켈리는 그것을 쓸 줄도 알았다. 다만 켈리가 자기 이름을 남 앞에서 소리 내어 말해 본 것은 열여덟 해 동안 세 번이 되지 않았다. 벨류엔에서 켈리를 부르는 것은 번호였고, 대답할 때는 번호를 복창했으며, 이름이 필요한 자리가 없었다. 폐허에서는 어떤 사람이 먼저 물어서 대답했고 그 사람이 노트에 적어 주었다. 타르실에서는 종이 위에 남이 써 준 것을 보고 그 옆에 손가락을 눌렀다.
먼저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켈리."
"성은?"
"없어요."
"나도 없어. 소아레는 우리 마을 이름이야. 실베인은 다 그래. 땅 이름을 붙여."
"그럼 저는 뭘 붙여요."
"그건 네가 정하는 거지."
켈리가 그 말을 받아 놓았다. 받아 놓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할 수 있는 것을 정하지 않고 두는 법을 켈리는 그날 처음 써 보았는데, 쓰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린이 무릎을 안고 앉았다.
"내일부터 인사하는 법 가르쳐 줄게."
"왜요."
"네가 못 하니까."
"안 배우면요."
"안 배우면 또 밟겠지."
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맞는 말이었으므로 반박할 것이 없었다.
"근데 왜 가르쳐 줘요."
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린 자신도 그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동안 린은 두 달치 일을 잃었고 장신구를 둘 잃었으며 그 밭에 다시 못 들어가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원인에게 화를 내는 것이 순서인데 화가 나지 않았다. 화가 나지 않는 이유를 찾자면 하나 있기는 했다. 진심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의 그 얼굴이었다.
린은 그 얼굴을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실베인에서는 세 살짜리도 그건 안다.
"그냥."
린이 말했다.
"몰라서 그런 거면 가르쳐 주는 거야. 그게 예법이야."
켈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두었다. 요즘 그런 것이 자꾸 늘고 있었는데, 늘어도 무겁지 않다는 것을 알아 가는 중이었다.
불은 약속대로 그 가지가 다 탈 때까지만 탔다. 다 타고 나서 저절로 꺼졌다. 꺼진 자리에 조가비 하나가 놓여 있었고 아무도 그것을 집어 가지 않았다.
첫 수업은 이튿날 아침에 있었다.
"자. 마주 봐."
"예."
"허리 펴지 마."
"예?"
"허리를 펴지 말라고. 너 지금 사열받는 것 같아."
"이게 제일 바른 자센데요."
"바른 게 문제야. 인사는 바르게 하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하는 거야."
"부드럽게가 뭔데요."
"…턱 내려. 아니 그렇게 말고. 아니 너무 내렸어."
바르트가 냄비를 저으면서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니카는 아예 등을 돌리고 누웠는데 어깨가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오벨만이 진지하게 지켜보면서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나중에 확인된 바로 그가 적은 것은 「예법 교습, 대가 미정, 조항화 필요」였다.
"다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거 말고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그건 웃는 게 아니라 이 보이는 거야."
켈리가 입을 다물었다.
린이 한숨을 쉬었다. 쉬고 나서 자기가 한숨을 쉬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표정을 고쳤다. 고치는 데도 요령이 있는 모양이었다.
"됐어. 오늘은 여기까지."
"못 했는데요."
"이틀 만에 되는 게 아니야. 나도 여섯 살부터 배웠어."
"여섯 살이요."
"어. 실베인에선 다 그래."
켈리가 그 말을 받았다. 여섯 살에 켈리가 배운 것은 다른 것이었다. 무엇을 배웠는지 말하려다가 말았는데, 말하지 않기로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을 말하는 법도 아마 배우는 것일 터였다.
짐을 다시 나눈 것은 떠나기 직전이었다.
넷이 지던 것을 다섯으로 나누었으므로 각자 몫이 줄었다. 바르트가 자루를 내려 다시 묶는 동안 켈리는 자기 몫이 가벼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게가 줄어드는 것은 눈으로도 보였다. 자루의 허리가 헐거워졌고 끈을 한 뼘 당겨 묶어야 했다.
켈리가 그 자루를 등에 얹고 몇 걸음 걸었다.
"이게 다예요?"
"어."
"더 주셔도 되는데요."
"더 줄 게 없어."
"저 무거운 거 들 수 있어요."
"알아."
바르트가 그렇게 말하고 자기 배낭을 멨다. 그는 켈리가 왜 저러는지를 석 달 전에 이미 알아냈고, 알아낸 뒤로는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설명하면 고쳐야 할 것 같아지고, 고치려 들면 켈리가 그것을 또 하나의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냥 두었다.
켈리는 가벼운 자루를 메고 조금 뒤처져 걸었다. 걸으면서 등 쪽에 신경이 갔다. 덜 지면 덜 받는다. 그것은 켈리가 여섯 살에 배운 것 중 하나였고 열두 해 동안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여기서는 틀리는 모양인데, 틀리는 이유를 모르니 몸이 먼저 불안해졌다. 켈리는 그 불안을 없애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뭐라도 더 지면 된다. 다만 더 질 것이 없었으므로 그냥 걸었다.
한편 바르트는 전날 밤에 노트를 펴 놓고 한참 앉아 있었다.
그가 고친 것은 한 줄이었다. 하루 지출 항목이었는데 넷일 때 잡아 둔 숫자를 지우고 다섯 사람 치로 다시 적었다. 하루에 닷 돈이 늘었다. 그 아래 잔액 줄을 고쳤고 그 아래 상환 줄을 보았다. 상환 줄은 고칠 것이 없었다. 타르실 중재소에서 정한 날짜는 사람이 몇이 되든 바뀌지 않았다.
세 줄을 나란히 놓으면 답이 저절로 나왔다. 가진 것으로 그 날짜까지 가지 못한다. 넷일 때도 아슬아슬했고 다섯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아슬아슬하지도 않았다.
바르트는 그 아래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적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적어 봐야 그 줄이 답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트를 덮고 불을 껐다.
린은 그 노트를 보지 못했다. 다만 보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린이 자기 장신구를 한 번 더 셌는데, 세는 이유가 낮과 달랐다. 낮에는 잃은 것을 세었고 밤에는 낼 수 있는 것을 세었다. 스물둘이었다. 그중에 값이 붙을 만한 것은 넷쯤이었고 나머지는 조가비와 나무였다.
실베인에서는 남의 무리에 끼면 먼저 자기 몫을 말한다. 내가 낼 것이 이만큼이고 받을 것이 이만큼이라고 말하고 시작한다. 그것이 예법이었고 린은 그 예법을 여섯 살부터 배웠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이 관대해서인지 그런 절차를 아예 모르는 것인지 린은 구별하지 못했고, 두 번째 쪽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며칠 뒤에 알게 된다.
일행은 그날 아침 다섯이 되었다. 그렇게 정한 사람은 없었다. 짐을 나눌 때 린 몫이 하나 생겼고, 그것으로 정해졌다.
늘어난 것은 사람 하나와 하루 닷 돈이었다. 줄어든 것은 각자의 등에 실린 무게였다. 그 둘이 같은 저울에 올라가는 것인지 아닌지를 그때 계산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합이 안 맞는다

일이 처음 어긋난 것은 로엔 남부의 마른 둑길에서였다.
셋이 앞에서 길을 막고 서 있었다. 스무 살이 안 되어 보이는 것이 둘이고 하나는 더 어렸다. 무기라고 할 만한 것을 든 사람은 없었고 하나가 막대기를 쥐고 있었는데 그것은 길에서 주운 것이 분명했다. 옷이 얇았고 신이 해졌으며 셋 다 마른 편이었다. 로엔에서는 겨울을 넘기고 봄이 오는 사이에 이런 무리가 길에 나왔다. 작년 것이 떨어지고 올해 것이 아직 안 나는 두 달이 그들에게는 가장 길었다.
"짐 좀 봅시다."
앞에 선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 말투가 공손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 일을 해 본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니카가 한 걸음 옆으로 비껴서면서 낮게 말했다.
"앞에 있는 애가 넘어질 겁니다. 7할쯤이요."
"넘어지면 뭐가 달라지는데."
바르트가 물었다.
"뒤에 둘이 도망갑니다. 저런 무리는 한 명이 무너지면 끝입니다. 8할 넘게요."
니카가 그 말을 하는 동안 이미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엄지로 무언가를 문지르는 동작이었고 그 동작에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일에 시간을 아주 조금밖에 쓰지 않았다. 길게 걸면 되돌아올 몫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켈리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듣지 못한 이유는 켈리가 이미 앞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막대기를 든 아이가 그것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고, 들어 올리는 것이 보이면 먼저 치는 것이 켈리가 아는 유일한 순서였다. 켈리는 지팡이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붙였다. 막대기가 튀어 올라 둑 아래로 날아갔다. 그다음에 지팡이 끝을 돌려 그 아이의 정강이를 옆으로 쳤다.
그 아이가 주저앉았다.
뒤의 둘이 도망쳤다. 정확히 니카가 말한 대로였다. 주저앉은 아이가 정강이를 붙들고 한 번 신음했다가 곧 일어나서 절뚝거리며 따라갔다. 셋이 사라지는 데 열 숨이 걸리지 않았다.
길이 조용해졌다.
"…끝났어요."
켈리가 돌아서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니카를 보았다.
니카는 그 자리에 서서 자기 왼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목이 부어 있었다. 아까까지는 멀쩡했다. 부은 자리가 붉지 않고 희끄무레했고, 그런 종류의 부기는 밤에 더 아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손이."
"원래 이럽니다."
니카가 손을 소매 안으로 넣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켈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알아챌 재료가 없었다. 켈리가 본 것은 세 사람이 도망쳤다는 것과 자기가 두 번 쳤다는 것이었고, 그 둘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 있었다는 것은 화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니카가 건 것은 값을 치르고 걸렸으며, 걸린 뒤에 쓰이지 않았고, 쓰이지 않았다고 해서 값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자리에 여덟 시간짜리 손목 하나를 지불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다음부터 켈리가 먼저 묻게 될 텐데, 묻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켈리가 늦게 움직이게 되고, 늦게 움직이면 켈리가 맞는다. 니카 셰르는 그 계산을 걸으면서 했고 결론이 나쁘게 나왔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계산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말하지 않으면 같은 일이 매번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해가 기울어 갈 무렵에 둑길을 벗어났다. 그날 밤 야영지는 버려진 축사 옆 평지였다.
바르트가 짐을 풀고 자리를 골랐다. 그가 고른 자리는 축사 벽에 붙은 쪽이었는데 바닥이 고르고 바람이 막히는 데가 거기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에 기름먹인 천을 깔고 유리병 넷을 늘어놓았다. 오늘 안에 개어 두어야 할 것이 있었다.
린이 그 옆에서 불 자리를 만들다가 손을 멈췄다.
"여기서 안 돼."
"뭐가 안 돼요."
"거기서 그거 하면 불 못 빌려."
"이거 냄새 안 나는데."
"나."
바르트가 병뚜껑을 닫았다. 닫고 나서 린을 보았다. 그는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고, 잘 듣는다는 것은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할 때도 일단 해 보는 것을 뜻했다.
"이러면 되나."
린이 불 자리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한참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안 돼."
바르트가 유리병 넷을 전부 자루에 넣고 자루 입구를 두 번 감아 묶었다. 그리고 그 자루를 열 걸음 떨어진 데에 갖다 놓았다. 옮기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는 불쾌해서가 아니라 조건을 하나씩 지워 보는 중일 때가 많았다.
린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다시 일어섰다.
"안 돼."
바르트가 개울로 내려가 손을 씻었다. 오래 씻었다. 손톱 밑까지 문질렀고 소매를 걷어 팔뚝까지 씻었다. 물이 차서 손이 벌게졌다. 돌아와서 두 손을 펴 보였다.
"이제."
린이 그 손을 보지 않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곧 일어섰다.
"안 돼요."
"뭐가 문제야."
"손이 아니라 아저씨예요."
바르트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벌겋게 씻긴 손이었다. 그 손으로 30년 동안 무엇을 다뤄 왔는지가 그 손에 씻겨 나가지 않고 남아 있다는 말을 그는 그날 처음 들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매를 내렸다.
켈리가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켈리에게는 그것이 한 가지로 정리되었다. 아저씨가 여기 있으면 불이 안 붙는다.
"그럼 아저씨가 저쪽 가면 돼요?"
"안 돼."
"왜요. 아까 짐도 옮겼는데."
"짐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럼 뭐가 문제예요."
"…그건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것이 린의 대답이었고 그 대답은 사실이었다. 정령 쪽에서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싫어한다는 것만 알려지고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 실베인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자랐다. 이유를 모르는 채로 규칙을 지키는 일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켈리도 그런 일에는 익숙했다. 다만 켈리가 익숙한 쪽은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이었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벨류엔의 규정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알려 주지 않았을 뿐이지 어딘가에는 적혀 있었다. 적혀 있지 않은 규칙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났고, 만나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오벨이 가방을 열었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할 수 있어요?"
"부르면 손이 둘 나옵니다. 부싯돌은 칠 수 있을 겁니다."
가방에서 손이 둘 나왔다. 팔꿈치까지만 있고 색이 없었다. 잉크 냄새가 났다. 켈리는 그것을 볼 때마다 아직도 조금 물러섰는데, 그 자리의 다른 넷은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벨이 말했다.
"불을 피워라."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부싯돌을 쳐라."
손이 부싯돌을 쳤다. 한 번 쳤다. 그리고 멈췄다.
"스무 번 쳐라."
손이 스무 번 쳤다. 불꽃이 튀었고 열아홉 번째에 마른 이끼에 붙었다. 스무 번째를 치고 손이 멈췄다. 이끼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중이었고 바람을 조금만 보내 주면 붙을 상태였다. 손은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기가 사그라들었다.
"…불어라."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입이 없었다.
"…부쳐라."
손이 부쳤다. 세게 부쳤다. 어느 정도로 부치라는 말을 듣지 못했으므로 손은 낼 수 있는 만큼을 냈고, 꺼져 가던 이끼가 통째로 날아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스무 번 치고 붙으면 부쳐라."
손이 스무 번 쳤다. 이번에는 붙지 않았다. 붙지 않았으므로 부치지 않았다. 손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붙을 때까지 쳐라."
손이 쳤다. 계속 쳤다. 마흔 번쯤 치고 나서 부싯돌이 갈라졌다. 갈라진 부싯돌로 계속 쳤다. 불꽃이 나지 않는 돌을 계속 치는 동안 오벨이 이마를 짚었다.
"그만."
손이 멈췄다.
니카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불 자리에 던졌다. 기름 먹인 천 조각이었다. 그는 그것을 늘 갖고 다녔다. 불이 한 번에 붙었다.
아무도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니카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저녁에 그가 한 말은 그것 하나였다.
"저는 이거 셋 남았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일이 터졌다.
린이 밥을 지으려고 물을 빌렸다. 개울이 있었으나 물이 탁했고 린은 맑은 물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절차가 짧았다. 어제 인사를 해 두었으므로 오늘은 용건만 말하면 되었다. 그것이 정령 예법의 편한 점이었다.
물이 왔다. 야영지 둘레의 땅이 잠깐 젖었다가 말랐다.
니카가 그것을 보고 일어섰다.
"지금 뭐 하신 겁니까."
"물 빌렸는데."
"어디서요."
"여기서."
니카가 야영지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돌면서 땅을 보았다. 세 군데에서 멈췄고 세 번 다 같은 얼굴을 했다.
"여덟 시간짜리였습니다."
"뭐가."
"어젯밤에 걸어 둔 겁니다. 짐승이나 사람이 가까이 오면 발을 헛디디게요. 그게 땅에 묻혀 있었는데 방금 씻겨 나갔습니다."
"…몰랐어."
"모르셨겠죠."
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물어보셨으니까요."
"그걸 왜 내가 물어봐. 말을 안 해 줬잖아."
"말을 왜 합니까. 아무도 안 물어보는데."
린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닫고 나서 다시 열었다.
"실베인에서는 남의 자리에 뭘 걸면 먼저 말해. 그게 예법이야."
"여기는 실베인이 아닙니다."
"그럼 여기 예법은 뭔데."
"없습니다."
오벨이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날 아침은 그쯤에서 끝났을 것이다.
"정리하겠습니다. 이것은 고지 의무의 문제입니다. 공동으로 점유한 자리에 일방이 설비를 설치한 경우, 그 설비의 존재를 타방에게 알릴 의무가 누구에게 있는지가—"
"아저씨."
"예."
"지금 그게 중요해요?"
"중요합니다. 의무의 소재가 정해지지 않으면 손해를 누가 부담하는지가 정해지지 않습니다."
"손해가 뭔데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났는데."
"바로 그것이 손해입니다. 여덟 시간의 노무와 그에 수반된 신체적 대가가 결과 없이 소멸했으므로—"
"그러니까 내가 물어냐야 된다는 거야?"
"그렇게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방금 그랬잖아."
"저는 소재를 정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르트가 두 손을 들었다. 말리려는 동작이었는데 두 걸음 만에 그만두었다. 그는 30년 동안 사람을 상대로 한 계산은 해 본 적이 없었고, 이 자리에서 누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따지려면 그가 가진 저울로는 잴 수 없는 것을 재야 했다. 그래서 그는 물러나 냄비를 집어 들었다. 물러나는 것이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소리가 커졌다. 린이 손목의 장신구를 세기 시작했고 니카는 계산을 소리 내어 하기 시작했으며 오벨은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켈리가 일어섰다.
켈리는 지팡이를 들어 옆의 나무를 한 번 쳤다.
소리가 났다. 크고 짧고 마른 소리였다. 나무 몸통에서 껍질이 한 뼘쯤 떨어져 나갔고 그 조각이 땅에 떨어졌다. 새 몇 마리가 날았다.
그리고 다른 소리가 하나 더 났다. 아주 작았고 나무 소리에 섞여서 그 자리에서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조용해졌다. 넷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지팡이를 도로 세우고 제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켈리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물었다면 켈리는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벨류엔의 대기소에서 소리가 커지면 교관이 그렇게 했다. 벽을 한 번 치거나 문틀을 한 번 쳤고 그러면 조용해졌다. 조용해지면 다음 지시가 나왔다. 켈리는 그 순서를 열두 해 동안 보았고 그날 처음으로 자기가 그 자리에 섰다.
다만 켈리에게는 다음 지시가 없었다.
교관이 벽을 치고 나서 무슨 말을 했는지 켈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정렬. 소등. 취침. 그 셋 중 하나였다. 여기서 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정렬할 대형이 없었고 소등할 등이 없었으며 취침 시각을 정해 놓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를 멈추는 법은 배웠는데 멈춘 다음에 무엇을 하는지는 배우지 않았다. 배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는 언제나 다음 말을 할 사람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넷이 조용한 채로 켈리를 보고 있었고 켈리는 앉아서 땅을 보고 있었으며, 그 침묵이 싸움보다 길어질 무렵에 오벨이 헛기침을 했다.
"제안이 있습니다."
넷이 그쪽을 보았다.
"규칙을 문서로 만듭시다."
니카가 웃었다. 소리를 내서 웃은 것은 아니고 코로 한 번 숨을 내보낸 것이었는데 그것으로 충분했다. 린은 아예 고개를 돌렸다. 바르트는 냄비 안을 저었다.
오벨은 그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예상했으면서도 말한 이유는 그가 이런 종류의 반응을 직업으로 겪어 왔기 때문이다. 타르실 중재소에서 그가 상대한 사람들 열에 아홉은 문서를 우습게 여겼고, 그 아홉 중 여덟이 석 달 안에 같은 문서를 들고 다시 왔다.
"제1조. 자리에 무언가를 설치하는 자는 설치 전에 이를 알린다."
"그만하세요."
"제2조. 타인의 설치물을 제거해야 하는 경우 사전에 동의를 구한다."
"그만하시라니까요."
"제3조. 전투 개시 여부는—"
"아저씨."
니카가 일어섰다.
"우리 다섯입니다. 다섯이 종이 보고 움직이면 세 번째 조항 읽는 사이에 죽습니다."
"읽지 않고 외우면 됩니다."
"외울 시간에 도망가는 게 빠릅니다."
니카가 그렇게 말하고 자기 자리로 갔다. 린이 그 뒤를 따라갔고 바르트는 원래 자리에 있었으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벨이 종이를 무릎 위에 놓은 채 잠깐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으려고 했다.
"저는 그거 좋은데요."
오벨이 손을 멈췄다. 고개를 들었다. 켈리가 아직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거요. 적어 놓는 거."
"어째서입니까."
"적어 놓으면 안 틀리잖아요."
오벨이 그 대답을 받아 놓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는데 그중에 켈리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있었다. 적혀 있으면 틀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적힌 대로 살아 본 사람이다. 마법청의 모든 것은 적혀 있었다. 배식량이 적혀 있었고 출격 순서가 적혀 있었고 근신 일수가 적혀 있었으며, 적힌 것은 언제나 그대로 집행되었다. 켈리에게 문서란 지켜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축복인지 아닌지를 오벨은 판단하지 못했다. 다만 이 자리에서 그의 제안에 찬성한 사람이 하나 있었고, 그 하나가 문서 때문에 가장 많이 잃은 사람이라는 것이 그날 밤 그를 오래 붙들었다.
"적어 두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오늘 것은 두 조항뿐입니다만."
돈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 전에 니카가 앓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서 열이 올랐고 손목의 부기가 팔꿈치 쪽으로 번졌다. 그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루를 베고 누워 있었는데, 린이 지나가다 이마에 손을 대 보고 알았다.
"너 뜨거운데."
"압니다."
"왜 말 안 해."
"말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약을 사든가 하지."
"돈이 없습니다."
린이 그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대꾸하지 못함이 오늘 아침 일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니카가 앓는 것은 어젯밤에 건 것이 되돌아온 탓이었고, 어젯밤에 건 것은 아침에 씻겨 나갔으며, 씻겨 나간 것은 자기 손이었다.
"어제 그거."
"예."
"그거 때문이야?"
"둘 다입니다."
"둘?"
"어제 걸어 둔 것하고, 그저께 길에서 건 것하고요."
린이 니카 옆에 앉았다.
"둘 다 안 쓰인 거야?"
"예."
"그럼 그냥 버린 거네."
"버린 건 아닙니다. 값은 치러졌으니까요."
니카가 그렇게 말하고 돌아누웠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려면 누가 잘못했는지를 정해야 하는데, 정해 봤자 그 사람이 다음번에 다르게 행동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보장이 없는 데 걸지 않는 것이 도박판에서 그가 배운 유일한 규칙이었다.
바르트가 노트를 펴고 숫자 하나를 읽었다. 읽는 목소리가 평소와 같았으므로 처음에는 아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여섯 돈."
"…예?"
"남은 게 여섯 돈이야."
린이 손가락을 꼽았다. 니카는 꼽을 것도 없었다. 오벨은 이미 사흘 전에 같은 계산을 해 두었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섯이 하루 먹는 데 한 냥 아홉 돈이 들었다. 여섯 돈으로는 한 끼도 온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넉 달 분할로 정한 첫 상환일이 열이틀 뒤였다.
"내일 마을에서 일 없나 봅시다."
니카가 말했다.
"봄에는 일이 없습니다. 씨 뿌리는 철이라 사람은 다 나와 있고 품삯은 안 줍니다. 로엔은 여름에 일이 생깁니다."
"그럼 어쩌지."
"굶으면 됩니다. 사흘까지는 사람이 안 죽습니다."
"사흘 뒤에는."
"사흘 뒤에도 안 죽습니다. 그냥 못 걷습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불이 한 번 튀었다.
켈리가 일어섰다.
일어서서 아무 말 없이 어둠 쪽으로 걸어갔다. 지팡이를 들고 갔다. 넷이 그 뒷모습을 보았고 바르트가 뭐라고 부르려다가 말았다.
"어디 가는 겁니까."
"몰라."
"따라가 볼까요."
"두지."
켈리가 돌아온 것은 반 시간쯤 뒤였다.
품에 뭔가를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로브 앞자락을 걷어 올려 그 안에 담아 왔는데, 흙이 묻은 채였고 잎이 여기저기 찢겨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불 옆에 내려놓았다. 낮고 잎이 다섯 갈래로 갈라진 풀이었다. 줄기가 붉었다.
켈리가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잎이 다섯 갈래."
넷이 켈리를 보았다.
"줄기가 붉다. 그늘에서 자란다. 땅에 붙어서 자란다. 옆에 이끼가 있다. 짐승이 뜯어 먹은 자국이 있다."
켈리가 여섯 가지를 다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넷을 한 번씩 보았다. 그 얼굴은 자랑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보고하는 얼굴이었다. 켈리가 아는 것을 남 앞에서 내놓는 방식은 그것 하나뿐이었고, 그것도 열두 해 동안 받아 본 적 있는 형식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었다.
"먹어도 돼요."
켈리가 말했다.
"제가 먹어 봤어요. 여덟 번 먹었어요. 안 아팠어요."
린이 그 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잎을 뒤집어 보고 줄기를 꺾어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표정이 변했다.
"이거 쓴대야."
"예?"
"이름이 쓴대라고. 실베인에서는 이거 달여서 먹어. 배 아플 때."
"먹는 거 맞네요."
"그건 약으로 먹는 거지."
"…그럼 밥으로는 안 돼요?"
린이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안 되는 이유를 대려면 맛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맛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린은 판단하지 못했다.
바르트가 먼저 손을 뻗었다.
그가 잎 하나를 뜯어 입에 넣고 씹었다. 씹는 동안 얼굴이 한 번 굳었다. 굳은 것을 곧 풀었다. 다 씹고 삼켰다.
"먹을 만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바르트 뮐렌은 거짓말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가 그날 한 거짓말은 30년 치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한 것이었다.
니카가 하나를 집었다. 냄새를 맡고 나서 잠깐 계산하는 얼굴을 했다.
"이거 먹고 탈 날 확률이 얼마쯤 됩니까."
"여덟 번 먹고 안 아팠어요."
"표본 여덟이면 신뢰할 만합니다."
그러고는 입에 넣었다. 두 번 씹고 멈췄다. 삼켰다. 물을 마셨다. 물을 아주 많이 마셨다.
"…신뢰할 만합니다."
오벨은 먹기 전에 잎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먹었다. 먹으면서 이 풀이 왜 쓴지, 쓴 성분이 무엇에 작용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가 세 문장쯤 하고 그만두었다. 입안이 써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린이 마지막으로 먹었다. 먹으면서 눈을 감았다.
넷이 다 먹었다.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배가 부른 것과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는데, 입안에 무언가를 씹는 감각이 있고 그것이 목을 넘어가고 위에 도착해서 거기 머무른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조금 조용해졌다.
켈리는 그 넷을 보고 있었다.
넷 다 얼굴이 이상했다. 먹으면서 미간이 좁아졌고 삼킬 때 목이 한 번씩 걸렸으며 다 먹고 나서 아무도 두 개째를 집지 않았다. 켈리는 그 얼굴들을 차례로 보았다.
켈리에게 그 풀은 쓰지 않았다.
쓰다는 것은 다른 맛과 견주어야 알 수 있는 것이고, 켈리가 견줄 수 있는 것은 건량과 죽과 빵과 소금에 절인 고기 넷뿐이었다. 그중 셋은 아무 맛도 없었고 하나는 짰다. 그 네 가지를 열두 해 동안 먹은 입에 무엇이 쓰고 무엇이 안 쓴지를 가르는 눈금이 생길 리 없었다. 켈리가 아는 것은 이 풀이 먹으면 안 죽는다는 것 하나였고, 죽지 않는 것과 맛있는 것 사이에 다른 칸이 여럿 있다는 사실을 켈리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켈리가 생각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내가 잘못 가져왔나.
"…이거 아니에요?"
켈리가 물었다.
"맞아."
린이 대답했다.
"맞는데 왜 다들."
"맞아. 네가 맞게 가져왔어."
린이 그렇게 말하고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다. 집을 때 손이 조금 느렸는데 켈리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바르트도 하나를 더 집었다. 니카도 집었다. 오벨은 집으면서 헛기침을 했다.
넷이 한 번 더 먹었다. 그 두 번째를 먹을 이유는 아무 데도 없었다.
남은 것이 한 줌쯤 되었다.
린이 그것을 들고 일어섰다. 냄비에 물을 조금 붓고 그 풀을 넣고 불 위에 올렸다. 오래 끓이지 않고 색이 나올 때까지만 두었다가 내렸다. 그러고는 니카 쪽으로 가서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 봐."
"…예."
"이거 마셔."
"뭡니까."
"아까 그거."
"방금 먹었는데요."
"먹은 거랑 달인 거랑 달라."
니카가 그 그릇을 받아 들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린을 보았다.
"이게 왜 다릅니까."
"몰라. 그냥 달라. 실베인에서는 그렇게 해."
니카가 마셨다. 다 마시고 나서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릇을 내려놓았다.
"…이게 훨씬 낫습니다."
"그치."
"아까 그건 뭡니까 그럼."
"아까 건 그냥 풀이지."
한 시간쯤 뒤에 니카의 열이 조금 내렸다. 완전히 내린 것은 아니고 밤새 다시 오르내렸는데, 적어도 그날 밤 그는 자기 손목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 셀 수 있을 만큼은 깨어 있었다.
켈리는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다.
같은 풀이었다. 켈리가 가져온 것과 린이 달인 것이 같은 풀이었고 같은 줄기에서 뜯은 것이었으며 켈리가 여덟 번 먹어 본 그것이었다. 그냥 먹으면 배가 조금 덜 고파지는 것이 전부였는데, 물에 넣고 끓였더니 앓는 사람의 열이 내렸다.
켈리는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는 것은 보았다.
같은 것을 가지고 다르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켈리가 그날 처음 본 셈인데, 그것이 나중에 다섯 사람을 한 번에 살리게 되는 생각의 첫머리였다는 것은 그 자리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날 밤 그것은 그냥 한 그릇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보면서 조금 안심했다. 잘못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잘못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넷이 두 번째를 집은 이유는 그 풀이 먹을 만해서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고, 그 이유를 켈리가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날 밤 켈리가 종이를 꺼냈다.
오벨이 나눠 준 것 중에 마지막 장이었다. 숯을 쥐고 한참 앉아 있다가 적기 시작했다. 여섯 줄이었다. 획 순서가 틀렸고 글씨가 컸으며 줄이 아래로 처졌다. 세 번째 줄에서 한 글자를 통째로 빠뜨렸다가 옆에 작게 끼워 넣었다.
다 적고 나서 켈리는 그것을 한 번 읽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읽었다.
오벨이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었다. 그는 고쳐 주고 싶은 것이 세 군데 있었다. 획 순서와 자간과 빠진 글자였다. 세 군데 다 고치지 않았다.
그가 그날 밤 한 판단 중에 옳은 것은 그것 하나였다.
켈리가 열두 해 동안 그 여섯 가지를 입으로 외운 것은 종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글자를 몰라서였다. 잊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므로 걸으면서 외웠고 앉아서 외웠고 잠들기 전에 외웠다. 이제 적혀 있었다. 적혀 있으면 잊어버려도 된다.
켈리는 그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넣고 나서 손으로 한 번 눌러 보았다. 품에 뭔가가 있었다.
불이 사그라들 무렵에 린이 켈리 쪽을 보았다.
"그거."
"예?"
"그 옷. 왜 안 갈아입어?"
"…예?"
"다 해졌잖아. 자락도 뜯어졌고 소매도 닳았고. 그거 입고 다니면 안 추워?"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린은 그 말을 아무 뜻 없이 했다. 정말로 아무 뜻이 없었다. 린 소아레는 실베인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고 벨류엔에 가 본 적이 없으며 그 나라의 마법사 제도에 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남색에 흰 띠 두 줄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고 가슴의 은실 문장이 어떤 도안인지 본 적도 없었다. 린이 본 것은 해진 옷 한 벌이었다. 밤에 추울 것 같은 옷이었다.
이 대륙에서 그 옷이 무엇인지를 가장 늦게 알게 될 사람이 그날 밤 그 말을 했다.
바르트는 그 말을 듣고 냄비를 젓던 손을 멈췄다. 그는 그것을 두 달 동안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말하려고 한 적은 세 번 있었다. 세 번 다 입을 열기 전에 그만두었는데, 그 옷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은 그 말을 못 한다. 그 말에 다른 뜻이 붙을 것을 아니까 못 한다.
니카도 못 했다. 니카는 타르실에서 남색 로브를 두 번 본 적이 있었고 두 번 다 도망치는 쪽이었다.
오벨은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조항으로 말하는 사람이었고,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이 들어갈 조항은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켈리가 자기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끝이 닳아 실이 풀려 있었다. 흰 띠 두 줄이 아직 거기 있었는데 한 줄은 거의 지워져 있었다.
"…갈아입어도 돼요?"
"어?"
"이거 벗어도 되냐고요."
"네 옷인데 왜 나한테 물어."
린이 그렇게 말하고 자기 자리로 가서 누웠다.
켈리는 그 자리에 한참 앉아 있었다.
그날 밤 켈리가 로브를 벗었다. 불이 다 꺼지고 넷이 잠든 뒤였다. 벗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추가 셋이었고 셋 다 풀렸다.
벗어 놓고 보니 천 한 장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개켰다. 개키는 법은 배운 적이 있었다. 소매를 안으로 접고 자락을 둘로 접고 어깨선을 맞추어 다시 접는다. 점호 전에 침상에 올려 두는 방식이었고 그 방식대로 개키면 가슴의 은실 문장이 위로 오게 되어 있었다. 검열관이 그것을 보고 지나가기 쉬우라고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배운 대로 개켰다. 문양이 위로 왔다.
그러고는 그것을 자루 맨 아래에 넣었다. 버리지는 않았다.
벗고 나서 남은 것은 회색 무명 내의였다.
그것도 지급품이었다. 소매가 팔꿈치까지 오고 목깃이 둥글고 천이 얇았다. 켈리는 그것을 옷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옷은 로브였고 이것은 로브 밑에 딸려 오는 것이었다. 배급받은 물건 목록에 이것도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켈리는 알았는데, 알면서도 벗을 수 있는 물건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벗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씻을 때도 갈아입을 때도 새것을 받아서 바꿔 입었을 뿐이지 없이 지낸 시간이 없었다.
목깃 안쪽에 번호가 찍혀 있었다.
먹으로 찍은 것이라 열두 해를 빨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켈리의 번호였고 로브 안쪽 목깃에 찍힌 것과 같은 번호였다. 세탁장에서 주인을 가리려고 찍는 것이었으므로 명예와도 소속과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다만 켈리가 아는 세계에서 자기 것이라고 표시된 물건은 그 둘뿐이었다. 하나를 방금 자루 맨 아래에 넣었고 하나는 아직 몸에 붙어 있었다.
켈리는 그 목깃을 한 번 잡아당겨 보았다. 번호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안쪽에 찍힌 것이라 입고 있으면 남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 위에 갈색 외투를 걸쳤다.
외투는 벨류엔 것이 아니었다. 바르트가 어디서 얻어 온 것이었고 켈리 몸에 맞지 않았으며 기름 얼룩이 있었다. 켈리가 입고 있는 것 중에 번호가 찍히지 않은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날 밤 켈리는 그 외투를 여미고 누웠다. 로브가 빠진 자리만큼 안쪽이 헐거워서 바람이 옆구리로 들어왔다.
추운 것보다 이상한 것은 가벼운 것이었다.
로브는 무거운 옷이었다. 두꺼운 천에 안감을 대고 자락이 발목까지 왔으며 은실 문장이 앞뒤로 들어가 있어서 가슴과 등에 무게가 실렸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그 무게를 지고 잤다. 무게가 있으면 자기 몸이 어디까지인지가 분명해졌고, 분명하면 잠이 왔다.
지금은 분명하지 않았다.
켈리는 몸을 한 번 뒤척였다가 일어나 앉았다. 자루 쪽으로 손을 뻗다가 도로 거두었다. 대신 품에 손을 넣었다. 종이가 거기 있었다. 여섯 줄이 적힌 종이였고 접은 자리가 아직 빳빳했다.
켈리는 그것을 꺼내지 않고 손만 대고 있었다.
품에 무언가가 있으면 잤다. 그것이 열두 해 동안의 순서였다. 그 무언가가 예전에는 건량 조각이었고 얼마 전에는 돌멩이였으며 오늘은 종이였다. 종이는 먹을 수 없었고 무게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있었다.
켈리는 그 위에 손을 얹은 채로 잠들었다.
바르트는 그날 밤 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그가 보고 있던 것은 켈리의 지팡이였다. 켈리가 잠들면서 옆에 놓아둔 것을 가져와 불빛에 기울여 보는 중이었다. 낮에 소리가 둘 났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나무를 친 소리가 하나였고 그 아래에 다른 소리가 하나 더 있었다.
손잡이에서 한 뼘쯤 위였다. 결을 따라 금이 가 있었다. 길이가 손가락 두 마디였고 깊지 않았다. 손톱을 대 보니 걸렸다.
아이언우드는 잘 갈라지지 않는 나무였다. 갈라졌다는 것은 그동안 안쪽이 이미 상해 있었다는 뜻이고, 안쪽이 상한 이유는 이 막대기가 지난 석 달 동안 자기 용도가 아닌 일에 쓰였기 때문이다. 짚는 물건으로 만들어진 것을 치는 데 썼다. 얼어붙은 땅을 쳤고 사람을 쳤고 탁자를 쳤고 문을 쳤고 오늘 나무를 쳤다.
바르트는 그 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노트를 펴서 한 줄을 적었다.
「아이언우드. 손잡이 위 한 뼘. 결 방향. 두 마디.」
그 아래에 무게를 적을 자리를 비워 두었다. 쇠를 얼마나 녹여야 하는지는 재 봐야 알 수 있었고, 재려면 이 막대기의 무게를 먼저 알아야 했다. 지금 재면 켈리가 깬다.
그는 지팡이를 원래 자리에 도로 놓았다. 놓으면서 각도까지 맞췄다. 켈리는 물건이 제자리에 없으면 아침에 그것부터 찾는 사람이었다.
다음 장에 쓸 것을 그는 이미 정해 두었다. 다만 그 일에 값이 얼마나 붙을지는 아직 계산하지 않았다. 계산하면 하기 싫어질 수도 있었으므로 나중에 하기로 했다. 그런 순서로 일을 하는 것은 30년 만에 처음이었다.
필요 없는 땅

**자플랜 왕국 · 왕도 어전**
자플랜의 어전 회의는 긴 탁자 하나를 놓고 열렸다.
탁자는 떡갈나무였고 길이가 5미터였으며 200년 되었다. 이 탁자가 들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서서 회의를 했다. 왕 앞에서 앉는 것은 무례라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인데, 오스릭 2세 때 그 전통이 없어졌다. 없앤 이유는 왕이 다리가 아파서였다. 그 뒤로 자플랜의 중신들은 앉아서 회의를 하게 되었고, 앉게 되자 곧 어디에 앉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지금 그 탁자에는 규칙이 하나 있었다. 왕에게서 가까운 쪽부터 앉는다. 다만 그 가까움을 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적혀 있지 않은 것이 더 강하게 지켜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그런 경우였다.
란돌프 그라이엔은 왕의 오른쪽 셋째 자리에 앉았다. 그라이엔 가는 사백 년 동안 자플랜 왕가에 장군을 냈고 그중 열하나가 전사했다. 그 열하나의 이름이 왕궁 서쪽 회랑의 돌에 새겨져 있었다. 그가 그 자리에 앉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의견을 낸 적이 없었다.
유리크 판 카르소는 탁자 끝에서 넷째 자리에 앉았다. 기계화 선봉대장이었고 서른일곱이었으며 지난 두 해 동안 자플랜군이 회랑에서 얻은 땅의 절반 이상을 그가 얻었다. 그 자리가 그의 전공에 맞는 자리인가를 놓고 이 년 전에 한 번 말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 "판 카르소 경은 젊으시니 앞으로 오래 올라갈 시간이 있다"고 말했고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그는 그 뒤로 이 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았다.
성씨에 붙은 판이라는 말은 자플랜 것이 아니었다. 카르소의 말이었고 그 나라에서는 어느 땅에서 왔는지를 뜻했다. 자플랜이 카르소를 삼킨 뒤에 그 말을 그대로 쓰게 한 것은 관대함이 아니라 편의였다. 출신을 이름 안에 넣어 두면 따로 물어볼 필요가 없다.
비토르 케른은 왕의 왼쪽 둘째 자리에 앉았다. 대공학원장이었고 카르소계였으며, 카르소 사람이 그 자리에 앉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 사실은 자플랜의 관대함을 보여 주는 사례로 여러 번 인용되었다. 인용한 사람들 중에 그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서른한 해가 걸렸다는 것을 함께 말한 사람은 없었다.
오스릭 3세는 일흔넷이었다.
회의는 아홉 시에 시작했다. 첫 항목은 남부 세관이었고 둘째가 조선소였으며 셋째가 하렐 방면 전황이었다.
란돌프가 일어섰다.
"하렐 방면 제3 보루를 확보했습니다. 지난달 19일입니다."
그가 지도를 탁자 위에 폈다. 지도는 크지 않았다. 회랑 전체가 아니라 하렐 방면만 그린 것이었고, 그 안에서도 이번에 얻은 자리만 붉게 칠해져 있었다.
"벨류엔의 방어선이 이 지점에서 꺾여 있었습니다. 꺾인 자리를 밀어서 폈습니다."
"전과는."
"진지 하나와 그 앞의 고지를 얻었습니다. 전선이 팔백 미터 전진했습니다."
"손실은."
"400입니다."
방이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것은 그 숫자가 커서가 아니었다. 그 숫자는 이 방에서 여러 번 나왔고 더 큰 것도 나왔다. 조용해진 것은 다음 말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중 360이 보병이고 40이 공병입니다. 기계는 잃지 않았습니다."
기계를 잃지 않았다는 말이 보고의 마지막에 붙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기계는 값이 적혀 있었다. 한 대에 얼마이고 만드는 데 몇 달이 걸리는지가 조달청 장부에 있었으므로 잃으면 그 숫자만큼 손실로 잡혔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적히지 않았다. 사람에도 값이 있기는 했다. 유족 연금과 보충 징집 비용과 훈련 기간이 각각 다른 부서의 장부에 나뉘어 적혀 있었는데, 나뉘어 적혀 있었으므로 한 자리에서 합산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 방에서 400이라는 숫자는 값이 아니라 그냥 숫자였다.
"수고했소."
오스릭 3세가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조금 쉬어 있었다. 그는 열여섯 해 전부터 아침에 목이 쉬었고 오후가 되어야 풀렸다.
서기가 받아 적었다. 적힌 것은 이랬다. 하렐 방면 요지 확보. 전과 양호.
란돌프가 앉았다.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려는 참이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유리크 판 카르소가 일어섰다.
이 방에서 넷째 자리 아래에 앉은 사람이 셋째 자리 위에 앉은 사람의 보고에 질문하는 일은 자주 있지 않았다. 없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자주 있지 않았고, 자주 있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일단 그것이 무례인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한다. 판단은 내용을 듣기 전에 끝난다.
"말씀하시오."
"제3 보루의 남쪽이 습지입니다."
란돌프가 그를 보았다.
"그래서."
"습지는 중장비가 못 지나갑니다. 무한궤도 폭이 1.2미터인데 그 지반은 0.6미터짜리도 빠집니다. 제 부대가 작년 가을에 그 일대를 정찰했고 기록이 조달청에 있습니다."
"정찰 기록은 알고 있소."
"그러면 그 보루에서 남쪽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사람뿐입니다.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문제요?"
"그 자리를 얻는 데 사람 400을 썼습니다."
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 조용함은 종류가 달랐다.
유리크는 그 조용함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기다리는 것이 유리한 경우와 불리한 경우를 구분할 줄 알았고 지금은 불리한 쪽이라고 판단했다. 한 번 끊기면 다음을 말할 수 없게 된다.
"둘째로 보급입니다. 전선이 팔백 미터 전진했으므로 보급선이 팔백 미터 늘었습니다. 하렐 가도에서 그 보루까지 수레로 가면 왕복 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 반 늘어납니다. 한 시간 반이면 한 수레가 하루에 한 번 더 왕복할 수 있던 것을 못 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지금 그 방면에 수레가 62대 배치되어 있습니다."
"숫자는 됐소."
"숫자가 이 건의 전부입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62대가 하루에 한 번씩 덜 가면 그만큼이 모자랍니다. 모자라면 두 가지 중 하나를 합니다. 수레를 늘리거나 사람을 줄이거나. 수레를 늘리려면 말과 마부가 따라 늘어야 하고 그것도 먹습니다. 사람을 줄이면 그 보루를 지킬 수 없습니다. 지킬 수 없는 자리를 얻은 것은 얻은 것이 아닙니다."
"경은 그러면 물러나자는 거요?"
"물러나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얻을 자리를 고르자고 했습니다."
란돌프가 일어섰다. 일어선 것은 반박하기 위해서였는데, 일어서고 나서 그가 한 말은 반박이 아니었다.
"판 카르소 경."
"예."
"경은 전선을 밀어 본 적이 있소?"
"작년에 열한 번 밀었습니다."
"그것 말고. 사람으로."
유리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질문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경의 부대는 기계로 미시오. 기계가 들어가는 자리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소. 그런데 대륙에는 기계가 못 들어가는 자리가 훨씬 많고, 그런 자리는 사람이 밀어야 하오. 사람이 밀면 사람이 죽소. 그것을 손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한 걸음도 못 가오."
"저는 손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뭐요."
"쓸데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탁자 중간쯤에서 누가 숨을 들이켰다.
"그 보루는 방어에 쓸 수 없습니다. 남쪽이 습지라 적이 그쪽으로 오지 않으니 막을 것이 없습니다. 공격의 발판으로도 쓸 수 없습니다. 우리 중장비가 못 나가니까요. 쓸 데가 없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얻으려고 400을 썼고 이제 그 자리를 지키느라 매일 수레 62대가 한 시간 반씩 더 굴러야 합니다."
"전선은 밀어야 하오."
"어디로 밀지를 고르는 것이 제 일이고 각하의 일입니다. 아무 데나 미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란돌프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한 번 굳었다가 풀렸다. 굳은 것은 아주 짧았고 그것을 본 사람은 탁자 이쪽 절반뿐이었다.
그는 오래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 자리에서 그가 느낀 것은 화가 아니었고, 화라고 부르려면 조금 더 단순한 것이어야 했다. 그가 느낀 것은 방금 한 말이 맞는 말이라는 사실과 그 말을 한 사람이 하필 저 사람이라는 사실이 동시에 왔을 때의 어떤 것이었다. 둘 중 하나만 왔다면 그는 다르게 반응했을 것이다.
란돌프 그라이엔은 그날 그 자리에서 유리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알았다는 것이 그 뒤 여섯 해 동안 그를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만들게 되는데, 그 과정은 한 번의 결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매번 아주 작은 것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로 하지 않은 일이 그날 오후에 있었다.
"폐하."
란돌프가 왕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렐 방면의 지휘는 제게 위임되어 있습니다. 위임의 범위 안에서 판단한 일입니다."
그것은 옳은 말이었다. 반박이 아니라 절차였다. 절차를 꺼내는 것은 내용으로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는데, 이 방에서 그 차이를 짚는 사람은 없었다.
오스릭 3세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 지도를 보고 있었으나 읽고 있지는 않았다. 일흔넷이었고 이런 회의를 서른아홉 해 동안 주재했으며, 서른아홉 해 동안 이런 순간을 여러 번 만났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둘 다 맞는 말을 하고 왕이 하나를 고르는 순간이었다.
고르면 한쪽이 진다. 지는 쪽이 무가이면 무가 전체가 왕을 다르게 보기 시작하고, 지는 쪽이 기술관료이면 다음 예산 회기에 조선소와 공학원이 서로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는 그 둘을 저울질하는 데 통치의 후반 스무 해를 썼고, 스무 해를 쓰고 나서 남은 것은 저울질하는 기술이지 판단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양쪽 다 일리가 있소."
그가 그렇게 말했다.
"판 카르소 경의 지적은 기록해 두시오. 보급 문제는 따로 검토합시다. 총사령의 판단은 위임 범위 안의 일이니 그대로 두고."
서기가 받아 적었다.
그것으로 그 항목이 끝났다. 끝나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보루는 그대로 남았고 수레 62대는 계속 한 시간 반씩 더 굴렀으며 400은 그 전주에 이미 집계가 끝나 있었다.
결정하지 않는 것은 결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다른 것을 주장할 때 왕이 고르지 않으면 지금 하고 있는 쪽이 계속된다. 계속되는 쪽이 이긴다. 그날 오전 어전에서 승부가 났고 진 사람은 그것을 알았다.
비토르 케른은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왼쪽 둘째 자리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고 손에는 작은 수첩이 있었다. 논쟁이 오가는 동안 그가 적은 것은 세 줄이었다.
습지. 중장비 불가.
사람으로 팔백.
400.
세 줄을 적고 나서 그는 그 아래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적을 것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모으고 있는 것은 하나의 문장이었고 그 문장에 도달하려면 이런 줄이 훨씬 많이 필요했다. 그날 그가 그 세 줄에서 읽은 것은 이랬다. 사람으로 밀어서는 이 전쟁이 안 끝난다. 기계가 못 가는 자리가 너무 많다. 그러므로 더 나은 기계가 필요하다.
그가 그 결론에서 다른 결론으로 넘어가는 데는 여섯 해가 더 걸린다. 넘어가는 순간은 어전이 아니라 어느 겨울 새벽 공학원의 빈 실험실이 되고, 그때 그가 적는 문장은 짧다.
그는 유리크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성이 달랐으나 같은 곳에서 왔다. 케른의 고향은 카르소 북부의 탄광 마을이었고 유리크의 고향은 남쪽 강변이었으며, 거리가 200 킬로미터였으나 자플랜의 서류에서는 둘 다 같은 한 줄로 처리되었다. 카르소계. 그 세 글자가 붙으면 다른 것은 묻지 않는다.
케른은 서른한 해 동안 그 세 글자를 지우려고 했다. 지우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믿었다. 다른 사람이 못 하는 것을 해내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 그 세 글자보다 앞에 오는 것이 생긴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고 왼쪽 둘째 자리까지 왔다.
다만 그 자리에 앉고 나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이 방에서 그를 소개할 때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순서로 말했다. 카르소계 최초의 대공학원장. 최초라는 말이 앞에 붙지 않는 날은 오지 않았고, 최초가 있으려면 그 앞에 없었다는 사실이 늘 함께 불려 나와야 했다.
그는 그것을 유리크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말하면 저 사람이 그만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르소계가 이 자리에서 그만두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올라와 있어야 다음 사람이 덜 힘들다고 그는 믿었고, 그 믿음이 틀렸다는 증거가 지금 탁자 저쪽 끝에서 네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날 그는 수첩을 덮고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회의는 열두 시가 조금 지나 끝났다.
사람들이 나가는 데 시간이 걸렸다. 문이 하나였고 나가는 순서가 앉은 순서와 같았으므로 끝자리에 앉은 사람은 기다려야 했다. 유리크는 서류를 정리하면서 기다렸다. 정리할 것이 많지 않았는데 오래 정리했다.
복도에서 란돌프와 마주쳤다.
복도는 좁지 않았다. 둘이 나란히 걸어도 되는 폭이었고 실제로 두 사람이 지나가는 데 부딪칠 일은 없었다. 란돌프가 앞에서 걸어왔고 유리크가 벽 쪽으로 반걸음 비켰다. 그것이 예였다.
두 사람이 스쳤다.
란돌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반드시 말을 걸어야 하는 규정은 없었고, 방금 어전에서 부딪친 상대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점잖은 처사였다.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이기까지 했다. 예를 어긴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유리크는 그 스쳐 감을 나중에 여러 번 떠올리게 된다.
그가 떠올린 것은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없었는가였다. 그 방에서 그는 옳았다. 숫자가 맞았고 정찰 기록이 있었고 아무도 그 계산을 반박하지 못했다. 옳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열아홉 살에 자플랜군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한 가지를 믿었다. 쓸모를 증명하면 된다. 카르소계라는 것은 씻어 낼 수 없지만 전공은 쌓을 수 있고, 쌓인 것이 충분히 높아지면 그 위에서는 출신을 묻지 않게 된다. 그는 그 믿음으로 열여덟 해를 버텼고 실제로 전공을 쌓았다. 작년에 자플랜군이 회랑에서 얻은 땅의 절반 이상이 그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어전에서 옳은 말을 한 사람은 넷째 자리 아래에 앉은 사람이었고, 옳은 말은 기록만 되었다.
그가 그 자리에서 알게 된 것은 정확히 하나였다. 능력으로는 안 된다.
그 결론에 도달한 카르소 사람이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대공학원장은 같은 자리에서 반대 결론에 도달했고 그래서 서른한 해를 더 증명하는 쪽을 택했으며, 그 선택이 그를 왼쪽 둘째 자리까지 데려다 놓았다. 두 사람은 같은 나라에서 왔고 같은 말을 듣고 자랐고 같은 벽 앞에 섰다. 한 사람은 벽을 넘으려고 더 높이 쌓기로 했고 한 사람은 벽이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둘 다 틀리지 않았다. 그것이 이 나라가 사람을 다루는 방식의 가장 정교한 부분이었다.
그날 오후 유리크는 보급 증원 요청서를 썼다.
내용은 간단했다. 하렐 방면 수레 62대를 80대로 늘려 달라는 것이었고, 늘리지 못하면 제3 보루의 주둔 인원을 절반으로 줄여 달라는 것이었다.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고 적었다. 근거로 왕복 시간 계산과 소모 예상치를 붙였고 정찰 기록의 사본을 함께 넣었다. 종이가 넉 장이었다.
그것을 병참부에 냈다.
병참부의 서류함은 나무로 짠 것이었고 위쪽이 열려 있었다. 새 서류는 위에 놓았다. 처리는 위에서부터 했다. 그것이 규칙이었고 규칙이 그렇게 정해진 이유는 늦게 온 것보다 먼저 온 것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편이 손이 덜 가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에 그 함을 정리한 사람이 있었다. 누가 정리했는지는 기록에 남지 않았다. 함을 정리하는 일에는 서명이 붙지 않기 때문이다.
정리가 끝났을 때 유리크의 넉 장은 함의 아래쪽에 있었다.
반려된 것은 아니었다. 반려하려면 사유를 적어야 했고 사유를 적으면 그 종이가 다시 위로 올라온다. 반려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놓으면 아무것도 적을 필요가 없었다. 그 서류는 여전히 처리 대기 중이었고 앞으로도 오래 처리 대기 중일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1200 킬로미터 떨어진 벨류엔 마법청에서도 그 무렵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배치 연령을 올리자는 안이 부결이 아니라 보류로 적혔고, 그렇게 적은 사람은 그것이 다음에 다시 올릴 여지를 남기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두 나라는 63년 동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싸웠는데, 서류를 처리하지 않는 방식만은 거의 같았다.
그것이 두 나라가 63년을 버틴 이유이기도 했다. 무엇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데는 아무 비용도 들지 않는다. 비용은 그 결정이 미뤄진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치른다.
제3 보루의 주둔 인원은 줄지 않았다. 수레도 늘지 않았다.
**자플랜 왕국 · 하렐 방면 제3 보루**
그 보루는 어전에서 본 지도의 붉은 자리였다.
실제로 가 보면 자리가 좁았다. 흙을 파서 둑을 올리고 그 위에 통나무를 얹은 것이었고, 벨류엔이 쓰던 것을 그대로 쓰는 중이라 안쪽 구조가 자플랜 방식과 맞지 않았다. 총안의 높이가 달랐다. 벨류엔 병사의 평균 키에 맞춰 뚫어 놓은 것이라 자플랜 병사가 서면 눈높이가 안 맞았고, 맞추려면 발판을 대야 했으며, 발판을 댈 나무는 보급으로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흙을 쌓아 발판을 만들었다. 비가 오면 무너졌다. 무너지면 다시 쌓았다.
남쪽은 습지였다. 아침마다 안개가 그쪽에서 올라와 정오까지 걷히지 않았고, 걷히고 나면 보이는 것은 갈대와 물웅덩이와 그 너머의 아무것도 없는 평지였다. 적은 그쪽으로 오지 않았다. 올 수가 없었다. 이 보루가 지키는 방향에서는 여섯 주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보루에 그해 봄까지 배치되어 있던 병사 중에 요른이라는 이름의 열일곱 살짜리가 있었다.
목수 아들이었고 카르소계였다. 두 달 전 그 진지를 얻는 싸움에서 참호 안에 떨어졌다가 살아 나왔고, 그 뒤로 넓적한 목공 망치를 놓지 않고 다녔다. 밤에도 옆에 두고 잤다. 누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연장이니까 필요하다고 대답했고, 실제로 그는 그것으로 발판을 고치고 총안 틀을 손보고 무너진 흙을 눌러 다졌다. 대답에 틀린 데가 없었다.
그가 그 자리에서 여섯 주 동안 한 일은 대부분 목수 일이었다.
보루 안쪽 벽이 자꾸 흘러내려서 나무를 대고 박았고, 지붕 삼아 얹은 방수포가 찢어지면 꿰맸으며, 취사장 바닥에 물이 고여 판자를 깔았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시키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명령이 되고 명령이면 기록이 남았을 텐데, 스스로 한 일이었으므로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다.
밤에 보초를 서면 남쪽을 봐야 했다. 남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네 시간 동안 보는 일은 처음 해 보면 쉬워 보이고 여섯 주째가 되면 다른 것이 된다. 그는 그 시간에 계산을 했다. 집 지을 때 서까래를 몇 개 걸어야 하는지, 문틀 폭이 얼마여야 하는지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것이었고 두 해 동안 안 써서 잊어 가는 중이었으므로 잊지 않으려고 세었다.
한 번은 그 보루의 목재로 집을 지으면 몇 채가 나오는지를 세어 본 적이 있었다. 둑에 박힌 통나무와 발판과 지붕 틀을 전부 뜯어서 쓰면 두 채 반이 나왔다. 계산이 끝나고 나서 그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이유가 없었고 말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수레는 열흘에 한 번 왔다. 원래 이레에 한 번이었는데 늘어났다. 왜 늘어났는지를 그 보루의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 다만 가도에서 여기까지가 멀어서 그렇다는 말이 돌았다. 그 말은 맞았다. 팔백 미터가 멀다는 것을 그들은 몸으로 알았으나 그것이 어전의 탁자 위에서 논의된 적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그가 그 보루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 서류에도 적히지 않았다. 400 안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400 안에 들지 않은 사람에 관한 기록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은 집계의 대상이 아니고, 집계되지 않는 것은 검토되지 않으며, 검토되지 않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그해 봄에 하렐 방면 제3 보루에서 일어난 일 중에 어전에 보고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어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기록하는 양식은 두 나라 어디에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