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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하는 법


로엔 남부의 농지는 물로 나뉘어 있었다.

담이나 울타리가 없었다. 대신 수로가 있었다. 밭과 밭 사이로 폭이 두 걸음쯤 되는 도랑이 나 있고 그 안으로 물이 흘렀으며, 어느 밭이 어디까지인지는 그 도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물을 나누는 것이 곧 땅을 나누는 것이었다. 로엔에서 밭을 놓고 벌어지는 다툼은 거의 전부 물을 놓고 벌어지는 다툼이었고, 그래서 이 나라의 재판 기록 절반이 물에 관한 것이었다.

일행이 그 수로를 따라 걷게 된 것은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이었다. 큰길에서 갈라져 나온 샛길을 탔는데 그 샛길이 밭 사이로 들어가더니 없어졌다. 없어진 자리에 물만 흐르고 있었다.
"물어봐야겠는데."
바르트가 말했다.

앞쪽에 사람이 모여 있었다. 열 명쯤이었고 전부 수로 한쪽 가에 서 있었다. 서 있는 모양이 일을 하다 만 모양이었다. 삽을 든 사람이 삽을 땅에 짚은 채로, 자루를 진 사람이 자루를 진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수로였다. 정확히는 수로 위에 걸쳐진 널 한 장이었다.

널은 길이가 어른 키만 했고 폭이 두 뼘이었다. 물 위에 가로로 놓여 있었으며 양 끝이 도랑 가장자리에 걸쳐져 있었다. 널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널 가운데에 작은 것들이 놓여 있기는 했다. 조가비 몇 개와 유리구슬 세 알과 마른 꽃 한 줌이었다. 그것들이 한 줄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널 앞에 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여자아이였다. 켈리와 또래로 보였고 켈리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밝은 밤색 머리를 여러 갈래로 땋아 갈래마다 구슬을 꿰었고, 팔목과 발목에 장신구가 다발로 감겨 있었다. 조가비와 유리와 나무를 깎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맨발이었다. 발등까지 진흙이 올라와 있었는데 씻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묻힌 것처럼 고르게 묻어 있었다.

그 아이가 널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소리가 아주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말하다가 멈추고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가 매번 같았다.

이런 일에도 직업이 있었다. 로엔의 큰 농지에서는 물이 갈라지는 자리마다 교섭인을 두었고, 교섭인은 대개 실베인에서 왔으며, 품삯은 밭 주인들이 나누어 냈다. 물이 제때 오면 아무도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고 물이 안 오면 그 사람이 책임을 졌다. 좋은 직업은 아니었다. 실베인 사람들이 이 일을 하러 로엔까지 오는 이유는 실베인에 밭이 적기 때문이었다.

켈리가 그것을 보았다. 켈리가 아는 자세 중에 저것과 비슷한 것이 하나 있었다. 마법청 검열관이 왔을 때 대원들이 취하는 자세였다. 다만 그 자세는 사람을 향해 서서 하는 것이었지 물을 향해 꿇어앉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뭐 하는 거야."
켈리가 물었다.
"교섭입니다."
니카가 대답했다.
"물길 정령이랑요."
"정령이 뭔데."
"물에 사는 겁니다. 정확히는 물을 맡고 있는 거고요."
니카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잘은 모릅니다. 실베인 사람들이 저런 걸 합니다. 우리 쪽에서는 잘 안 하고요."
"저기 아무것도 없는데."
"그렇죠. 그래서 못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오벨이 널 위의 물건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그 배열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려 하는 중이었는데 읽히지 않았다. 계약서라면 읽을 수 있었다. 조가비 세 개와 유리 세 알과 마른 꽃의 배열에는 조항이 없었다.
"저 물건들에 뜻이 있습니까."
"예물일 겁니다."
"무엇에 대한 대가입니까."
"물을 좀 돌려 달라는 거겠죠. 저 아래쪽 밭이 마른 모양입니다."

바르트는 이미 그쪽으로 걷고 있었다. 길을 물어야 했고 저기 사람이 있었다. 켈리가 따라갔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를 배운 적이 없었다. 벨류엔에서는 물을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분대에서는 분대장에게, 분대장이 없으면 그 위에게, 아무도 없으면 묻지 않고 기다린다. 물을 사람을 고르는 일 자체가 없었으므로 고르는 법도 없었다.

켈리는 사람들을 훑었다. 계급장을 찾았다. 없었다. 나이순으로 세워 보려고 했는데 나이가 제각각이었고 서 있는 자리에도 규칙이 없었다. 삽을 든 사람이 앞에 있고 손이 빈 사람이 뒤에 있었다. 켈리가 아는 어떤 배열도 아니었다. 그래서 켈리는 가장 앞에 있는 사람에게 갔다.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은 무릎을 꿇고 있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 아이와 켈리 사이에 수로가 있었다. 수로를 건너려면 건널 것이 필요했고 건널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켈리가 널을 밟았다.

정확히 말하면 밟으려고 발을 올렸다. 발바닥이 널에 닿았고 무게가 실렸다. 켈리는 마른 강바닥에서 오래 걸었던 사람이라 발을 디딜 때 앞쪽부터 놓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대로 놓았다. 널은 두꺼웠고 사람 하나쯤은 충분히 받쳤을 것이다. 그러나 널 가운데에 조가비와 유리구슬과 마른 꽃이 놓여 있었고, 켈리의 발이 그 위로 올라갔다.

유리구슬 하나가 깨졌다.

소리가 아주 작았다. 물소리에 묻힐 만한 소리였는데 아무도 그렇게 듣지 않았다. 열 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무릎 꿇고 있던 아이가 허리를 펴고 켈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아이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화가 아니었다. 화는 그다음에 왔다. 먼저 온 것은 무언가가 방금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물이 멎었다.

멎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수로의 물은 계속 흘렀다. 다만 아래쪽으로 갈라지는 작은 도랑 하나로 들어가던 물이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갈라지는 자리에서 물이 한 번 뭉쳤다가 전부 본줄기로 갔다. 손으로 막은 것처럼 갔다. 막은 것은 없었다.

아래쪽 밭에서 누가 소리를 질렀다.
"안 와!"

아이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켈리의 발을 보았고 깨진 유리를 보았고 남은 조가비를 보았다. 그러고는 켈리의 얼굴을 보았다.
"너 지금."
"길 좀 물으려고요."
"거길."
"예."
"거기를 밟고."
"예."
아이가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그리고 참았다. 참는 것이 보였다.
"내려와."

켈리가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두 번째 유리구슬을 밟았다.

그 아이의 이름이 린 소아레라는 것은 한참 뒤에 알게 된다. 그때 켈리가 알고 있던 것은 자기가 무언가를 깨뜨렸다는 사실 하나뿐이었고, 그것을 물어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았으나 무엇으로 물어내야 하는지는 몰랐다. 유리구슬의 값은 알 수 있었다. 그 유리구슬이 놓여 있던 자리의 값은 알 수 없었다.

린이 무릎을 다시 꿇었다.
"다시 합니다."
"뭘 다시."
농부 하나가 말했다.
"인사부터 다시 합니다. 처음부터요."

린이 널 앞에 이마가 닿을 만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이번에는 소리를 내서 말했다.
"윗물을 맡으신 분께. 아까 여쭌 사람입니다. 제 잘못으로 자리가 상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례를 더 올리겠습니다."
린이 손목에서 장신구 하나를 풀었다. 파란 유리를 깎은 것이었다. 그것을 널 위에 놓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먼저 여쭙고 놓았어야 하는데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제 잘못입니다."
린이 그 유리를 도로 집었다. 그리고 다시 절을 하고 나서 다시 놓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린이 일어나서 켈리에게 왔다. 아주 빠르게 왔다.
"네가 해."
"뭘요."
"사과."
"누구한테요."
"저기."

켈리가 널을 보았다. 널 위에 조가비와 깨진 유리가 있었다. 그 너머에 물이 있었고 물 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저기 아무도 없는데요."
"있어."
"안 보이는데요."
"안 보이는 게 없는 거야?"

켈리가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흘 전에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면 안 본 거지 없는 게 아니라고 어떤 사람이 말했다. 켈리는 그 말을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갖고 다니는 중이었다.
"뭐라고 해요."
"미안하다고 해."
"미안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말고."
"어떻게요."
"진심으로."
"진심이 뭔데요."

린이 켈리를 보았다.

그 순간 린의 얼굴에서 화가 조금 빠졌다. 빠진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왔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린 자신도 몰랐다. 열여덟 해를 살면서 진심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비꼬는 얼굴이 아니었고 따지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정말로 모르는 얼굴이었으며, 그런 얼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린은 그때 처음 알았다.

뒤에서 농부들이 움직였다.
"됐어. 나가."
"아직 됩니다."
린이 돌아섰다.
"한 번만 더."
"두 시간 했잖아."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물이 안 오잖아!"

그 말에는 대꾸할 것이 없었다. 물이 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고, 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든 밭은 마르고 있었으며, 마르는 밭 앞에서 예법을 설명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삽을 든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켈리가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고쳐 쥐었고 바르트가 그 팔을 눌렀다.
"갑시다."
바르트가 말했다.
"저 사람 삽 들었는데요."
"삽으로 땅 파던 사람이야. 우리가 여기 있으면 저 사람이 오늘 안에 삽으로 다른 걸 파게 돼."

일행이 물러났다.

린도 같이 나왔다. 아무도 린에게 나가라고 하지 않았는데 나왔다. 정확히는 한 사람이 말하기는 했다. 그 말은 나가라는 뜻이 아니라 다시는 오지 말라는 뜻이었고, 린은 그 둘을 구별할 줄 알았으므로 대꾸하지 않고 널 위의 조가비를 하나씩 주워 담았다.

줍는 데 시간이 걸렸다. 깨진 유리를 먼저 주웠고 조가비를 나중에 주웠다. 손끝이 베였는데 신경 쓰지 않았다. 마른 꽃은 물에 떨어져 이미 떠내려가고 없었으므로 린은 그 자리를 잠깐 보다가 그만두었다. 마지막으로 널을 들어 도랑 가에 세워 놓았다. 세워 놓는 방향이 있는 모양이었다. 두 번 고쳐 세웠다.

켈리가 그것을 보고 있었다. 물에 빠진 꽃을 찾는 시간과 널을 두 번 고쳐 세우는 시간은 켈리가 아는 어떤 셈에도 들어가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무언가가 생기지 않았고 무언가가 줄지도 않았다. 켈리는 그것이 낭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다가 판단할 기준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었다.

밭을 벗어나는 데 한참 걸렸다. 수로를 두 번 건너고 마른 도랑을 한 번 넘었다. 린이 앞장서서 걸었고 걸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맨발이 진흙을 밟는 소리만 났다.

큰길에 올라서고 나서 린이 멈췄다. 그리고 손목의 장신구를 세기 시작했다.

왼쪽 손목부터 세고 오른쪽 손목을 세고 발목 두 짝을 셌다. 세는 동안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다 세고 나서 한 번 더 셌다.

스물셋이었다.

"스물셋."
린이 말했다.
"아침에 스물넷이었는데."
"하나 놓고 왔잖아."
켈리가 말했다.
"그래. 놓고 왔지. 받지도 못했는데 놓고 왔지."
"그거 얼마예요."
린이 고개를 돌렸다.
"뭐?"
"그 유리요. 값이 얼마예요. 제가 깼으니까 물어야 되는데 지금은 돈이 없고, 그래서 얼마인지 알아야 갚을 때 갚아요."

린이 켈리를 한참 보았다. 화를 낼 참이었는데 그 말이 화를 낼 자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산하는 말이었고 계산하는 사람의 얼굴이었으며, 무엇보다 그 말을 하는 동안 켈리는 미안해하지 않고 있었다. 미안해하지 않는 것이 뻔뻔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린은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뻔뻔한 얼굴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보았다.
"…여섯 냥."
"여섯 냥."
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 둘게요."

그러고는 정말로 종이를 꺼내서 적었다. 린이 그것을 보고 있다가 물었다.
"너 뭐야."
"켈리요."
"그게 아니라."
"예?"
"됐어."

린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열 걸음쯤 가다가 멈췄다. 그리고 돌아섰다.
"아니 그게 왜 됐어. 하나만 물어볼게. 너 그게 뭔지 알고 밟았어?"
"널이요."
"널 아니야."
"널처럼 생겼는데요."
"널처럼 생긴 건 맞지. 근데 널이 아니야. 자리야."
"자리가 뭔데요."
"올라오는 자리."
"뭐가요."
"그분이."

켈리가 고개를 돌려 오벨을 보았다. 오벨이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그는 방금 들은 말을 자기 머릿속의 어떤 항목에도 넣지 못하고 있었다.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만."
"뭔데요."
"그 자리에 관한 권리는 누구에게 귀속됩니까. 밭 소유자입니까, 아니면 그 자리를 마련한 사람입니까."
"…예?"
"손괴가 발생했으니 청구권자가 특정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그 자리가 설치된 널이 밭 소유자의 재산이라면 재물 손괴와 예법 위반이 별개의 건으로 성립할 여지가—"
"아저씨."
"예."
"그런 거 없어요."
"없다는 것은 규정이 없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적용이 안 된다는 뜻입니까."
"둘 다요."

오벨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날 두 번째로 자기 직업이 닿지 않는 자리를 만났다.

니카가 뒤에서 끼어들었다.
"제가 여쭤도 됩니까. 그 정령이라는 게, 부탁을 들어주는 확률이 얼마쯤 됩니까."
"확률?"
"예. 열 번 하면 몇 번 됩니까."
"그런 식으로 안 세."
"안 세면 어떻게 압니까. 될지 안 될지를요."
"안 알아. 모르고 하는 거야."
"모르고 하시는데 이 일로 먹고사셨다고요."
"어."

니카가 정말로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것은 이 아이가 좀처럼 짓지 않는 얼굴이었다. 니카 셰르는 세상 모든 일에 승산이 붙어 있다고 믿으며 살아온 사람이었고, 승산이 붙지 않는 일에 밥벌이를 거는 사람을 그날 처음 보았다.

린이 두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아니 진짜. 너희 뭐야. 넷이 다 말이 안 통해."

그 말은 정확했다. 다만 정확하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날 큰길 위에서 네 사람은 각각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다. 하나는 조항으로 말했고 하나는 확률로 말했고 하나는 예법으로 말했으며 남은 하나는 무게와 값으로 말했다. 같은 말을 쓰는데 같은 뜻이 아니었다. 그 어긋남이 나중에 다섯 사람을 거의 갈라놓게 되는데, 그것은 아직 며칠 뒤의 일이었다.

날이 저물었다. 큰길 옆 잡목 아래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날은 내내 궂었고 저녁부터 비가 왔다. 오래 오지는 않았으나 나무를 적실 만큼은 왔다.

바르트가 불을 피우려고 했다. 반 시간 걸렸다. 안 됐다.

"젖었어."
그가 말했다.
"마른 게 없어."
"기름 부으면요."
켈리가 물었다.
"기름은 아침에 밥 하는 데 써야지."

린이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일행을 따라오고 있었는데 아무도 오라고 하지 않았고 아무도 가라고 하지 않았다. 오벨이 한 번 「동행 관계가 성립하였는지」를 확인하려 했다가 바르트가 눈짓으로 말렸다.

린이 일어섰다.
"제가 할게요."
"할 수 있어?"
"해 볼게요. 대신 조용히 해 주세요. 특히 저."
린이 켈리를 가리켰다.
"저 사람. 움직이지 마세요."

켈리가 그 자리에서 굳었다. 차렷 자세가 나왔다. 린이 그것을 보고 잠깐 말을 잃었다가 그냥 넘어갔다.

린이 젖은 나뭇가지를 모아 한군데 쌓았다. 쌓는 방법이 특별하지 않았다. 그다음이 특별했다.

린이 무릎을 꿇었다. 쌓아 놓은 나뭇가지 앞에서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등을 폈다. 그리고 말했다.
"이 근처에서 마른 자리를 맡고 계신 분께 여쭙습니다."

한 박자 쉬었다.
"이름을 모르고 부르는 무례를 먼저 사과드립니다. 실베인 소아레 마을에서 온 린입니다. 오늘 아랫녘 물자리에서 실례를 저질렀고 그 일은 그쪽에도 전해졌을 줄 압니다. 그러니 제 청을 들어주지 않으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또 한 박자.
"다만 여기 사람이 넷 있고 그중 하나가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밤이 길고 옷이 젖었습니다. 불을 조금만 빌리고 싶습니다. 오래 쓰지 않겠습니다. 이 나뭇가지가 다 탈 때까지만 쓰고 그 뒤로는 더 청하지 않겠습니다."

또 한 박자.
"사례는 먼저 보여 드리고 나중에 놓겠습니다."

린이 손목에서 장신구를 하나 풀었다. 조가비였다.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 불 자리 위로 한 번 들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손을 내렸다.
"빌려주시겠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켈리는 여기서 또 안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생각하면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 기분의 이름은 아마 실망이었을 것이고 켈리는 그 이름도 몰랐다.

그때 젖은 나뭇가지 가운데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연기가 먼저 올라오고 그다음에 아주 작은 불이 붙었다. 붙는 방식이 이상했다. 보통 불은 가장자리부터 붙어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은 한가운데부터 붙어서 밖으로 나왔다. 젖은 나무가 타면 나야 할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냥 마른 나무처럼 탔다.

불이 자리를 잡았다.

"고맙습니다."
린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약속대로 이 가지가 다 타면 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고는 조가비를 불 자리 옆 돌 위에 놓았다.

스물둘이 되었다.

켈리가 그 불을 보고 있었다. 보다가 린을 보았다. 린은 불 가까이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주 가까이였다. 손바닥이 불꽃에서 한 뼘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뜨거울 텐데요."
"안 뜨거워."
"그게 무슨."
"빌린 쪽 감각이 없어져. 불을 빌렸으니까 오늘 밤엔 뜨거운 걸 못 느껴."
린이 손을 그대로 두고 말했다.
"물 빌리면 목마른 걸 못 느끼고 바람 빌리면 숨 막히는 걸 못 느껴. 그런 거야."
"그럼 손 타는데요."
"어."
"타는지 모르고요."
"어."

켈리가 린의 손목을 잡아 뒤로 당겼다. 당기는 힘이 조금 셌다. 린이 끌려오면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가 켈리가 다시 잡아 세웠다.
"아 진짜, 그렇게 세게."
"손이 빨개요."
"…그러네."

린이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만져 보았는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고마워."
"뭐가요."
"봐 준 거."

켈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을 봐 줬다는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손이 빨개지고 있으면 치우는 것이 당연했다. 당연한 것에 고맙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켈리는 아직 몰랐다.

대신 켈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낮에 들은 말이었다. 진심으로 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켈리는 진심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물었을 때는 정말로 몰라서 물은 것이었고 지금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하나가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에 린이 불 앞에서 한 말들은 낮에 널 앞에서 한 말들과 문장이 거의 같았다. 같은 순서였고 같은 높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낮에는 안 됐고 지금은 됐다.

무엇이 달랐는지를 켈리는 알아내지 못했다.

켈리가 아는 세계에서 결과가 달라지는 이유는 언제나 양이었다. 힘을 더 쓰면 더 부서지고 덜 쓰면 덜 부서진다. 건량을 두 냥 받는 날과 여섯 냥 받는 날은 다르게 움직인다. 양이 같은데 결과가 다른 경우를 켈리는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을 설명하는 말이 세상에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이라거나 정성이라거나 진심이라고 불렀으며, 어린아이들도 대개 예닐곱 살에 그 말을 배웠다. 그 나이의 켈리가 배운 것은 폭발의 세 단계였다.

불이 자리를 잡고 나서 한참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바르트가 냄비를 올렸고 니카가 젖은 외투를 뒤집어 널었으며 오벨이 젖은 종이를 한 장씩 떼어 말렸다.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린이 켈리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까 그거."
"예."
"물어본 거. 진심이 뭐냐고."
켈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거 진짜 몰라서 물어본 거야?"
"예."
"아무도 안 가르쳐 줬어?"
"예."

린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이 한 번 튀었고 그쪽으로 재가 조금 날렸다.
"나 린이야. 린 소아레."
"…예."
"이름 말했으면 다음은 네 차례야. 그게 인사야."

켈리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이름을 대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글자였고 켈리는 그것을 쓸 줄도 알았다. 다만 켈리가 자기 이름을 남 앞에서 소리 내어 말해 본 것은 열여덟 해 동안 세 번이 되지 않았다. 벨류엔에서 켈리를 부르는 것은 번호였고, 대답할 때는 번호를 복창했으며, 이름이 필요한 자리가 없었다. 폐허에서는 어떤 사람이 먼저 물어서 대답했고 그 사람이 노트에 적어 주었다. 타르실에서는 종이 위에 남이 써 준 것을 보고 그 옆에 손가락을 눌렀다.

먼저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켈리."
"성은?"
"없어요."
"나도 없어. 소아레는 우리 마을 이름이야. 실베인은 다 그래. 땅 이름을 붙여."
"그럼 저는 뭘 붙여요."
"그건 네가 정하는 거지."

켈리가 그 말을 받아 놓았다. 받아 놓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할 수 있는 것을 정하지 않고 두는 법을 켈리는 그날 처음 써 보았는데, 쓰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린이 무릎을 안고 앉았다.
"내일부터 인사하는 법 가르쳐 줄게."
"왜요."
"네가 못 하니까."
"안 배우면요."
"안 배우면 또 밟겠지."
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맞는 말이었으므로 반박할 것이 없었다.
"근데 왜 가르쳐 줘요."

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린 자신도 그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동안 린은 두 달치 일을 잃었고 장신구를 둘 잃었으며 그 밭에 다시 못 들어가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원인에게 화를 내는 것이 순서인데 화가 나지 않았다. 화가 나지 않는 이유를 찾자면 하나 있기는 했다. 진심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의 그 얼굴이었다.

린은 그 얼굴을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실베인에서는 세 살짜리도 그건 안다.

"그냥."
린이 말했다.
"몰라서 그런 거면 가르쳐 주는 거야. 그게 예법이야."

켈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두었다. 요즘 그런 것이 자꾸 늘고 있었는데, 늘어도 무겁지 않다는 것을 알아 가는 중이었다.

불은 약속대로 그 가지가 다 탈 때까지만 탔다. 다 타고 나서 저절로 꺼졌다. 꺼진 자리에 조가비 하나가 놓여 있었고 아무도 그것을 집어 가지 않았다.

첫 수업은 이튿날 아침에 있었다.
"자. 마주 봐."
"예."
"허리 펴지 마."
"예?"
"허리를 펴지 말라고. 너 지금 사열받는 것 같아."
"이게 제일 바른 자센데요."
"바른 게 문제야. 인사는 바르게 하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하는 거야."
"부드럽게가 뭔데요."
"…턱 내려. 아니 그렇게 말고. 아니 너무 내렸어."

바르트가 냄비를 저으면서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니카는 아예 등을 돌리고 누웠는데 어깨가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오벨만이 진지하게 지켜보면서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나중에 확인된 바로 그가 적은 것은 「예법 교습, 대가 미정, 조항화 필요」였다.

"다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거 말고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그건 웃는 게 아니라 이 보이는 거야."

켈리가 입을 다물었다.

린이 한숨을 쉬었다. 쉬고 나서 자기가 한숨을 쉬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표정을 고쳤다. 고치는 데도 요령이 있는 모양이었다.
"됐어. 오늘은 여기까지."
"못 했는데요."
"이틀 만에 되는 게 아니야. 나도 여섯 살부터 배웠어."
"여섯 살이요."
"어. 실베인에선 다 그래."

켈리가 그 말을 받았다. 여섯 살에 켈리가 배운 것은 다른 것이었다. 무엇을 배웠는지 말하려다가 말았는데, 말하지 않기로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을 말하는 법도 아마 배우는 것일 터였다.

짐을 다시 나눈 것은 떠나기 직전이었다.

넷이 지던 것을 다섯으로 나누었으므로 각자 몫이 줄었다. 바르트가 자루를 내려 다시 묶는 동안 켈리는 자기 몫이 가벼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게가 줄어드는 것은 눈으로도 보였다. 자루의 허리가 헐거워졌고 끈을 한 뼘 당겨 묶어야 했다.

켈리가 그 자루를 등에 얹고 몇 걸음 걸었다.
"이게 다예요?"
"어."
"더 주셔도 되는데요."
"더 줄 게 없어."
"저 무거운 거 들 수 있어요."
"알아."

바르트가 그렇게 말하고 자기 배낭을 멨다. 그는 켈리가 왜 저러는지를 석 달 전에 이미 알아냈고, 알아낸 뒤로는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설명하면 고쳐야 할 것 같아지고, 고치려 들면 켈리가 그것을 또 하나의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냥 두었다.

켈리는 가벼운 자루를 메고 조금 뒤처져 걸었다. 걸으면서 등 쪽에 신경이 갔다. 덜 지면 덜 받는다. 그것은 켈리가 여섯 살에 배운 것 중 하나였고 열두 해 동안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여기서는 틀리는 모양인데, 틀리는 이유를 모르니 몸이 먼저 불안해졌다. 켈리는 그 불안을 없애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뭐라도 더 지면 된다. 다만 더 질 것이 없었으므로 그냥 걸었다.

한편 바르트는 전날 밤에 노트를 펴 놓고 한참 앉아 있었다.

그가 고친 것은 한 줄이었다. 하루 지출 항목이었는데 넷일 때 잡아 둔 숫자를 지우고 다섯 사람 치로 다시 적었다. 하루에 닷 돈이 늘었다. 그 아래 잔액 줄을 고쳤고 그 아래 상환 줄을 보았다. 상환 줄은 고칠 것이 없었다. 타르실 중재소에서 정한 날짜는 사람이 몇이 되든 바뀌지 않았다.

세 줄을 나란히 놓으면 답이 저절로 나왔다. 가진 것으로 그 날짜까지 가지 못한다. 넷일 때도 아슬아슬했고 다섯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아슬아슬하지도 않았다.

바르트는 그 아래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적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적어 봐야 그 줄이 답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트를 덮고 불을 껐다.

린은 그 노트를 보지 못했다. 다만 보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린이 자기 장신구를 한 번 더 셌는데, 세는 이유가 낮과 달랐다. 낮에는 잃은 것을 세었고 밤에는 낼 수 있는 것을 세었다. 스물둘이었다. 그중에 값이 붙을 만한 것은 넷쯤이었고 나머지는 조가비와 나무였다.

실베인에서는 남의 무리에 끼면 먼저 자기 몫을 말한다. 내가 낼 것이 이만큼이고 받을 것이 이만큼이라고 말하고 시작한다. 그것이 예법이었고 린은 그 예법을 여섯 살부터 배웠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이 관대해서인지 그런 절차를 아예 모르는 것인지 린은 구별하지 못했고, 두 번째 쪽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며칠 뒤에 알게 된다.

일행은 그날 아침 다섯이 되었다. 그렇게 정한 사람은 없었다. 짐을 나눌 때 린 몫이 하나 생겼고, 그것으로 정해졌다.

늘어난 것은 사람 하나와 하루 닷 돈이었다. 줄어든 것은 각자의 등에 실린 무게였다. 그 둘이 같은 저울에 올라가는 것인지 아닌지를 그때 계산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합이 안 맞는다


일이 처음 어긋난 것은 로엔 남부의 마른 둑길에서였다.

셋이 앞에서 길을 막고 서 있었다. 스무 살이 안 되어 보이는 것이 둘이고 하나는 더 어렸다. 무기라고 할 만한 것을 든 사람은 없었고 하나가 막대기를 쥐고 있었는데 그것은 길에서 주운 것이 분명했다. 옷이 얇았고 신이 해졌으며 셋 다 마른 편이었다. 로엔에서는 겨울을 넘기고 봄이 오는 사이에 이런 무리가 길에 나왔다. 작년 것이 떨어지고 올해 것이 아직 안 나는 두 달이 그들에게는 가장 길었다.

"짐 좀 봅시다."

앞에 선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 말투가 공손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 일을 해 본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니카가 한 걸음 옆으로 비껴서면서 낮게 말했다.
"앞에 있는 애가 넘어질 겁니다. 7할쯤이요."
"넘어지면 뭐가 달라지는데."
바르트가 물었다.
"뒤에 둘이 도망갑니다. 저런 무리는 한 명이 무너지면 끝입니다. 8할 넘게요."

니카가 그 말을 하는 동안 이미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엄지로 무언가를 문지르는 동작이었고 그 동작에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일에 시간을 아주 조금밖에 쓰지 않았다. 길게 걸면 되돌아올 몫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켈리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듣지 못한 이유는 켈리가 이미 앞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막대기를 든 아이가 그것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고, 들어 올리는 것이 보이면 먼저 치는 것이 켈리가 아는 유일한 순서였다. 켈리는 지팡이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붙였다. 막대기가 튀어 올라 둑 아래로 날아갔다. 그다음에 지팡이 끝을 돌려 그 아이의 정강이를 옆으로 쳤다.

그 아이가 주저앉았다.

뒤의 둘이 도망쳤다. 정확히 니카가 말한 대로였다. 주저앉은 아이가 정강이를 붙들고 한 번 신음했다가 곧 일어나서 절뚝거리며 따라갔다. 셋이 사라지는 데 열 숨이 걸리지 않았다.

길이 조용해졌다.

"…끝났어요."
켈리가 돌아서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니카를 보았다.

니카는 그 자리에 서서 자기 왼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목이 부어 있었다. 아까까지는 멀쩡했다. 부은 자리가 붉지 않고 희끄무레했고, 그런 종류의 부기는 밤에 더 아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손이."
"원래 이럽니다."

니카가 손을 소매 안으로 넣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켈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알아챌 재료가 없었다. 켈리가 본 것은 세 사람이 도망쳤다는 것과 자기가 두 번 쳤다는 것이었고, 그 둘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 있었다는 것은 화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니카가 건 것은 값을 치르고 걸렸으며, 걸린 뒤에 쓰이지 않았고, 쓰이지 않았다고 해서 값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자리에 여덟 시간짜리 손목 하나를 지불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다음부터 켈리가 먼저 묻게 될 텐데, 묻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켈리가 늦게 움직이게 되고, 늦게 움직이면 켈리가 맞는다. 니카 셰르는 그 계산을 걸으면서 했고 결론이 나쁘게 나왔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계산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말하지 않으면 같은 일이 매번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해가 기울어 갈 무렵에 둑길을 벗어났다. 그날 밤 야영지는 버려진 축사 옆 평지였다.

바르트가 짐을 풀고 자리를 골랐다. 그가 고른 자리는 축사 벽에 붙은 쪽이었는데 바닥이 고르고 바람이 막히는 데가 거기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에 기름먹인 천을 깔고 유리병 넷을 늘어놓았다. 오늘 안에 개어 두어야 할 것이 있었다.

린이 그 옆에서 불 자리를 만들다가 손을 멈췄다.
"여기서 안 돼."
"뭐가 안 돼요."
"거기서 그거 하면 불 못 빌려."
"이거 냄새 안 나는데."
"나."

바르트가 병뚜껑을 닫았다. 닫고 나서 린을 보았다. 그는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고, 잘 듣는다는 것은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할 때도 일단 해 보는 것을 뜻했다.
"이러면 되나."
린이 불 자리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한참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안 돼."

바르트가 유리병 넷을 전부 자루에 넣고 자루 입구를 두 번 감아 묶었다. 그리고 그 자루를 열 걸음 떨어진 데에 갖다 놓았다. 옮기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는 불쾌해서가 아니라 조건을 하나씩 지워 보는 중일 때가 많았다.

린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다시 일어섰다.
"안 돼."

바르트가 개울로 내려가 손을 씻었다. 오래 씻었다. 손톱 밑까지 문질렀고 소매를 걷어 팔뚝까지 씻었다. 물이 차서 손이 벌게졌다. 돌아와서 두 손을 펴 보였다.
"이제."

린이 그 손을 보지 않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곧 일어섰다.
"안 돼요."
"뭐가 문제야."
"손이 아니라 아저씨예요."

바르트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벌겋게 씻긴 손이었다. 그 손으로 30년 동안 무엇을 다뤄 왔는지가 그 손에 씻겨 나가지 않고 남아 있다는 말을 그는 그날 처음 들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매를 내렸다.

켈리가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켈리에게는 그것이 한 가지로 정리되었다. 아저씨가 여기 있으면 불이 안 붙는다.
"그럼 아저씨가 저쪽 가면 돼요?"
"안 돼."
"왜요. 아까 짐도 옮겼는데."
"짐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럼 뭐가 문제예요."
"…그건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것이 린의 대답이었고 그 대답은 사실이었다. 정령 쪽에서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싫어한다는 것만 알려지고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 실베인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자랐다. 이유를 모르는 채로 규칙을 지키는 일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켈리도 그런 일에는 익숙했다. 다만 켈리가 익숙한 쪽은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이었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벨류엔의 규정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알려 주지 않았을 뿐이지 어딘가에는 적혀 있었다. 적혀 있지 않은 규칙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났고, 만나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오벨이 가방을 열었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할 수 있어요?"
"부르면 손이 둘 나옵니다. 부싯돌은 칠 수 있을 겁니다."

가방에서 손이 둘 나왔다. 팔꿈치까지만 있고 색이 없었다. 잉크 냄새가 났다. 켈리는 그것을 볼 때마다 아직도 조금 물러섰는데, 그 자리의 다른 넷은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벨이 말했다.
"불을 피워라."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부싯돌을 쳐라."

손이 부싯돌을 쳤다. 한 번 쳤다. 그리고 멈췄다.

"스무 번 쳐라."

손이 스무 번 쳤다. 불꽃이 튀었고 열아홉 번째에 마른 이끼에 붙었다. 스무 번째를 치고 손이 멈췄다. 이끼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중이었고 바람을 조금만 보내 주면 붙을 상태였다. 손은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기가 사그라들었다.
"…불어라."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입이 없었다.
"…부쳐라."

손이 부쳤다. 세게 부쳤다. 어느 정도로 부치라는 말을 듣지 못했으므로 손은 낼 수 있는 만큼을 냈고, 꺼져 가던 이끼가 통째로 날아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스무 번 치고 붙으면 부쳐라."
손이 스무 번 쳤다. 이번에는 붙지 않았다. 붙지 않았으므로 부치지 않았다. 손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붙을 때까지 쳐라."
손이 쳤다. 계속 쳤다. 마흔 번쯤 치고 나서 부싯돌이 갈라졌다. 갈라진 부싯돌로 계속 쳤다. 불꽃이 나지 않는 돌을 계속 치는 동안 오벨이 이마를 짚었다.
"그만."
손이 멈췄다.

니카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불 자리에 던졌다. 기름 먹인 천 조각이었다. 그는 그것을 늘 갖고 다녔다. 불이 한 번에 붙었다.
아무도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니카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저녁에 그가 한 말은 그것 하나였다.
"저는 이거 셋 남았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일이 터졌다.
린이 밥을 지으려고 물을 빌렸다. 개울이 있었으나 물이 탁했고 린은 맑은 물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절차가 짧았다. 어제 인사를 해 두었으므로 오늘은 용건만 말하면 되었다. 그것이 정령 예법의 편한 점이었다.
물이 왔다. 야영지 둘레의 땅이 잠깐 젖었다가 말랐다.

니카가 그것을 보고 일어섰다.
"지금 뭐 하신 겁니까."
"물 빌렸는데."
"어디서요."
"여기서."

니카가 야영지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돌면서 땅을 보았다. 세 군데에서 멈췄고 세 번 다 같은 얼굴을 했다.
"여덟 시간짜리였습니다."
"뭐가."
"어젯밤에 걸어 둔 겁니다. 짐승이나 사람이 가까이 오면 발을 헛디디게요. 그게 땅에 묻혀 있었는데 방금 씻겨 나갔습니다."
"…몰랐어."
"모르셨겠죠."
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물어보셨으니까요."
"그걸 왜 내가 물어봐. 말을 안 해 줬잖아."
"말을 왜 합니까. 아무도 안 물어보는데."

린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닫고 나서 다시 열었다.
"실베인에서는 남의 자리에 뭘 걸면 먼저 말해. 그게 예법이야."
"여기는 실베인이 아닙니다."
"그럼 여기 예법은 뭔데."
"없습니다."

오벨이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날 아침은 그쯤에서 끝났을 것이다.
"정리하겠습니다. 이것은 고지 의무의 문제입니다. 공동으로 점유한 자리에 일방이 설비를 설치한 경우, 그 설비의 존재를 타방에게 알릴 의무가 누구에게 있는지가—"
"아저씨."
"예."
"지금 그게 중요해요?"
"중요합니다. 의무의 소재가 정해지지 않으면 손해를 누가 부담하는지가 정해지지 않습니다."
"손해가 뭔데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났는데."
"바로 그것이 손해입니다. 여덟 시간의 노무와 그에 수반된 신체적 대가가 결과 없이 소멸했으므로—"
"그러니까 내가 물어냐야 된다는 거야?"
"그렇게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방금 그랬잖아."
"저는 소재를 정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르트가 두 손을 들었다. 말리려는 동작이었는데 두 걸음 만에 그만두었다. 그는 30년 동안 사람을 상대로 한 계산은 해 본 적이 없었고, 이 자리에서 누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따지려면 그가 가진 저울로는 잴 수 없는 것을 재야 했다. 그래서 그는 물러나 냄비를 집어 들었다. 물러나는 것이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소리가 커졌다. 린이 손목의 장신구를 세기 시작했고 니카는 계산을 소리 내어 하기 시작했으며 오벨은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켈리가 일어섰다.
켈리는 지팡이를 들어 옆의 나무를 한 번 쳤다.
소리가 났다. 크고 짧고 마른 소리였다. 나무 몸통에서 껍질이 한 뼘쯤 떨어져 나갔고 그 조각이 땅에 떨어졌다. 새 몇 마리가 날았다.

그리고 다른 소리가 하나 더 났다. 아주 작았고 나무 소리에 섞여서 그 자리에서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조용해졌다. 넷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지팡이를 도로 세우고 제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켈리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물었다면 켈리는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벨류엔의 대기소에서 소리가 커지면 교관이 그렇게 했다. 벽을 한 번 치거나 문틀을 한 번 쳤고 그러면 조용해졌다. 조용해지면 다음 지시가 나왔다. 켈리는 그 순서를 열두 해 동안 보았고 그날 처음으로 자기가 그 자리에 섰다.

다만 켈리에게는 다음 지시가 없었다.
교관이 벽을 치고 나서 무슨 말을 했는지 켈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정렬. 소등. 취침. 그 셋 중 하나였다. 여기서 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정렬할 대형이 없었고 소등할 등이 없었으며 취침 시각을 정해 놓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를 멈추는 법은 배웠는데 멈춘 다음에 무엇을 하는지는 배우지 않았다. 배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는 언제나 다음 말을 할 사람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넷이 조용한 채로 켈리를 보고 있었고 켈리는 앉아서 땅을 보고 있었으며, 그 침묵이 싸움보다 길어질 무렵에 오벨이 헛기침을 했다.

"제안이 있습니다."
넷이 그쪽을 보았다.
"규칙을 문서로 만듭시다."

니카가 웃었다. 소리를 내서 웃은 것은 아니고 코로 한 번 숨을 내보낸 것이었는데 그것으로 충분했다. 린은 아예 고개를 돌렸다. 바르트는 냄비 안을 저었다.

오벨은 그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예상했으면서도 말한 이유는 그가 이런 종류의 반응을 직업으로 겪어 왔기 때문이다. 타르실 중재소에서 그가 상대한 사람들 열에 아홉은 문서를 우습게 여겼고, 그 아홉 중 여덟이 석 달 안에 같은 문서를 들고 다시 왔다.

"제1조. 자리에 무언가를 설치하는 자는 설치 전에 이를 알린다."
"그만하세요."
"제2조. 타인의 설치물을 제거해야 하는 경우 사전에 동의를 구한다."
"그만하시라니까요."
"제3조. 전투 개시 여부는—"
"아저씨."

니카가 일어섰다.
"우리 다섯입니다. 다섯이 종이 보고 움직이면 세 번째 조항 읽는 사이에 죽습니다."
"읽지 않고 외우면 됩니다."
"외울 시간에 도망가는 게 빠릅니다."

니카가 그렇게 말하고 자기 자리로 갔다. 린이 그 뒤를 따라갔고 바르트는 원래 자리에 있었으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벨이 종이를 무릎 위에 놓은 채 잠깐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으려고 했다.
"저는 그거 좋은데요."

오벨이 손을 멈췄다. 고개를 들었다. 켈리가 아직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거요. 적어 놓는 거."
"어째서입니까."
"적어 놓으면 안 틀리잖아요."

오벨이 그 대답을 받아 놓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는데 그중에 켈리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있었다. 적혀 있으면 틀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적힌 대로 살아 본 사람이다. 마법청의 모든 것은 적혀 있었다. 배식량이 적혀 있었고 출격 순서가 적혀 있었고 근신 일수가 적혀 있었으며, 적힌 것은 언제나 그대로 집행되었다. 켈리에게 문서란 지켜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축복인지 아닌지를 오벨은 판단하지 못했다. 다만 이 자리에서 그의 제안에 찬성한 사람이 하나 있었고, 그 하나가 문서 때문에 가장 많이 잃은 사람이라는 것이 그날 밤 그를 오래 붙들었다.

"적어 두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오늘 것은 두 조항뿐입니다만."

돈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 전에 니카가 앓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서 열이 올랐고 손목의 부기가 팔꿈치 쪽으로 번졌다. 그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루를 베고 누워 있었는데, 린이 지나가다 이마에 손을 대 보고 알았다.
"너 뜨거운데."
"압니다."
"왜 말 안 해."
"말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약을 사든가 하지."
"돈이 없습니다."

린이 그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대꾸하지 못함이 오늘 아침 일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니카가 앓는 것은 어젯밤에 건 것이 되돌아온 탓이었고, 어젯밤에 건 것은 아침에 씻겨 나갔으며, 씻겨 나간 것은 자기 손이었다.
"어제 그거."
"예."
"그거 때문이야?"
"둘 다입니다."
"둘?"
"어제 걸어 둔 것하고, 그저께 길에서 건 것하고요."

린이 니카 옆에 앉았다.
"둘 다 안 쓰인 거야?"
"예."
"그럼 그냥 버린 거네."
"버린 건 아닙니다. 값은 치러졌으니까요."

니카가 그렇게 말하고 돌아누웠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려면 누가 잘못했는지를 정해야 하는데, 정해 봤자 그 사람이 다음번에 다르게 행동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보장이 없는 데 걸지 않는 것이 도박판에서 그가 배운 유일한 규칙이었다.

바르트가 노트를 펴고 숫자 하나를 읽었다. 읽는 목소리가 평소와 같았으므로 처음에는 아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여섯 돈."
"…예?"
"남은 게 여섯 돈이야."

린이 손가락을 꼽았다. 니카는 꼽을 것도 없었다. 오벨은 이미 사흘 전에 같은 계산을 해 두었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섯이 하루 먹는 데 한 냥 아홉 돈이 들었다. 여섯 돈으로는 한 끼도 온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넉 달 분할로 정한 첫 상환일이 열이틀 뒤였다.

"내일 마을에서 일 없나 봅시다."
니카가 말했다.
"봄에는 일이 없습니다. 씨 뿌리는 철이라 사람은 다 나와 있고 품삯은 안 줍니다. 로엔은 여름에 일이 생깁니다."
"그럼 어쩌지."
"굶으면 됩니다. 사흘까지는 사람이 안 죽습니다."
"사흘 뒤에는."
"사흘 뒤에도 안 죽습니다. 그냥 못 걷습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불이 한 번 튀었다.

켈리가 일어섰다.

일어서서 아무 말 없이 어둠 쪽으로 걸어갔다. 지팡이를 들고 갔다. 넷이 그 뒷모습을 보았고 바르트가 뭐라고 부르려다가 말았다.

"어디 가는 겁니까."
"몰라."
"따라가 볼까요."
"두지."

켈리가 돌아온 것은 반 시간쯤 뒤였다.

품에 뭔가를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로브 앞자락을 걷어 올려 그 안에 담아 왔는데, 흙이 묻은 채였고 잎이 여기저기 찢겨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불 옆에 내려놓았다. 낮고 잎이 다섯 갈래로 갈라진 풀이었다. 줄기가 붉었다.

켈리가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잎이 다섯 갈래."
넷이 켈리를 보았다.
"줄기가 붉다. 그늘에서 자란다. 땅에 붙어서 자란다. 옆에 이끼가 있다. 짐승이 뜯어 먹은 자국이 있다."

켈리가 여섯 가지를 다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넷을 한 번씩 보았다. 그 얼굴은 자랑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보고하는 얼굴이었다. 켈리가 아는 것을 남 앞에서 내놓는 방식은 그것 하나뿐이었고, 그것도 열두 해 동안 받아 본 적 있는 형식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었다.

"먹어도 돼요."
켈리가 말했다.
"제가 먹어 봤어요. 여덟 번 먹었어요. 안 아팠어요."

린이 그 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잎을 뒤집어 보고 줄기를 꺾어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표정이 변했다.
"이거 쓴대야."
"예?"
"이름이 쓴대라고. 실베인에서는 이거 달여서 먹어. 배 아플 때."
"먹는 거 맞네요."
"그건 약으로 먹는 거지."
"…그럼 밥으로는 안 돼요?"

린이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안 되는 이유를 대려면 맛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맛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린은 판단하지 못했다.
바르트가 먼저 손을 뻗었다.
그가 잎 하나를 뜯어 입에 넣고 씹었다. 씹는 동안 얼굴이 한 번 굳었다. 굳은 것을 곧 풀었다. 다 씹고 삼켰다.
"먹을 만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바르트 뮐렌은 거짓말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가 그날 한 거짓말은 30년 치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한 것이었다.

니카가 하나를 집었다. 냄새를 맡고 나서 잠깐 계산하는 얼굴을 했다.
"이거 먹고 탈 날 확률이 얼마쯤 됩니까."
"여덟 번 먹고 안 아팠어요."
"표본 여덟이면 신뢰할 만합니다."
그러고는 입에 넣었다. 두 번 씹고 멈췄다. 삼켰다. 물을 마셨다. 물을 아주 많이 마셨다.
"…신뢰할 만합니다."

오벨은 먹기 전에 잎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먹었다. 먹으면서 이 풀이 왜 쓴지, 쓴 성분이 무엇에 작용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가 세 문장쯤 하고 그만두었다. 입안이 써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린이 마지막으로 먹었다. 먹으면서 눈을 감았다.
넷이 다 먹었다.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배가 부른 것과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는데, 입안에 무언가를 씹는 감각이 있고 그것이 목을 넘어가고 위에 도착해서 거기 머무른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조금 조용해졌다.
켈리는 그 넷을 보고 있었다.
넷 다 얼굴이 이상했다. 먹으면서 미간이 좁아졌고 삼킬 때 목이 한 번씩 걸렸으며 다 먹고 나서 아무도 두 개째를 집지 않았다. 켈리는 그 얼굴들을 차례로 보았다.

켈리에게 그 풀은 쓰지 않았다.
쓰다는 것은 다른 맛과 견주어야 알 수 있는 것이고, 켈리가 견줄 수 있는 것은 건량과 죽과 빵과 소금에 절인 고기 넷뿐이었다. 그중 셋은 아무 맛도 없었고 하나는 짰다. 그 네 가지를 열두 해 동안 먹은 입에 무엇이 쓰고 무엇이 안 쓴지를 가르는 눈금이 생길 리 없었다. 켈리가 아는 것은 이 풀이 먹으면 안 죽는다는 것 하나였고, 죽지 않는 것과 맛있는 것 사이에 다른 칸이 여럿 있다는 사실을 켈리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켈리가 생각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내가 잘못 가져왔나.

"…이거 아니에요?"
켈리가 물었다.
"맞아."
린이 대답했다.
"맞는데 왜 다들."
"맞아. 네가 맞게 가져왔어."

린이 그렇게 말하고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다. 집을 때 손이 조금 느렸는데 켈리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바르트도 하나를 더 집었다. 니카도 집었다. 오벨은 집으면서 헛기침을 했다.
넷이 한 번 더 먹었다. 그 두 번째를 먹을 이유는 아무 데도 없었다.
남은 것이 한 줌쯤 되었다.

린이 그것을 들고 일어섰다. 냄비에 물을 조금 붓고 그 풀을 넣고 불 위에 올렸다. 오래 끓이지 않고 색이 나올 때까지만 두었다가 내렸다. 그러고는 니카 쪽으로 가서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 봐."
"…예."
"이거 마셔."
"뭡니까."
"아까 그거."
"방금 먹었는데요."
"먹은 거랑 달인 거랑 달라."

니카가 그 그릇을 받아 들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린을 보았다.
"이게 왜 다릅니까."
"몰라. 그냥 달라. 실베인에서는 그렇게 해."

니카가 마셨다. 다 마시고 나서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릇을 내려놓았다.
"…이게 훨씬 낫습니다."
"그치."
"아까 그건 뭡니까 그럼."
"아까 건 그냥 풀이지."

한 시간쯤 뒤에 니카의 열이 조금 내렸다. 완전히 내린 것은 아니고 밤새 다시 오르내렸는데, 적어도 그날 밤 그는 자기 손목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 셀 수 있을 만큼은 깨어 있었다.

켈리는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다.
같은 풀이었다. 켈리가 가져온 것과 린이 달인 것이 같은 풀이었고 같은 줄기에서 뜯은 것이었으며 켈리가 여덟 번 먹어 본 그것이었다. 그냥 먹으면 배가 조금 덜 고파지는 것이 전부였는데, 물에 넣고 끓였더니 앓는 사람의 열이 내렸다.
켈리는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는 것은 보았다.
같은 것을 가지고 다르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켈리가 그날 처음 본 셈인데, 그것이 나중에 다섯 사람을 한 번에 살리게 되는 생각의 첫머리였다는 것은 그 자리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날 밤 그것은 그냥 한 그릇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보면서 조금 안심했다. 잘못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잘못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넷이 두 번째를 집은 이유는 그 풀이 먹을 만해서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고, 그 이유를 켈리가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날 밤 켈리가 종이를 꺼냈다.
오벨이 나눠 준 것 중에 마지막 장이었다. 숯을 쥐고 한참 앉아 있다가 적기 시작했다. 여섯 줄이었다. 획 순서가 틀렸고 글씨가 컸으며 줄이 아래로 처졌다. 세 번째 줄에서 한 글자를 통째로 빠뜨렸다가 옆에 작게 끼워 넣었다.
다 적고 나서 켈리는 그것을 한 번 읽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읽었다.
오벨이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었다. 그는 고쳐 주고 싶은 것이 세 군데 있었다. 획 순서와 자간과 빠진 글자였다. 세 군데 다 고치지 않았다.

그가 그날 밤 한 판단 중에 옳은 것은 그것 하나였다.
켈리가 열두 해 동안 그 여섯 가지를 입으로 외운 것은 종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글자를 몰라서였다. 잊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므로 걸으면서 외웠고 앉아서 외웠고 잠들기 전에 외웠다. 이제 적혀 있었다. 적혀 있으면 잊어버려도 된다.
켈리는 그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넣고 나서 손으로 한 번 눌러 보았다. 품에 뭔가가 있었다.
불이 사그라들 무렵에 린이 켈리 쪽을 보았다.

"그거."
"예?"
"그 옷. 왜 안 갈아입어?"
"…예?"
"다 해졌잖아. 자락도 뜯어졌고 소매도 닳았고. 그거 입고 다니면 안 추워?"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린은 그 말을 아무 뜻 없이 했다. 정말로 아무 뜻이 없었다. 린 소아레는 실베인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고 벨류엔에 가 본 적이 없으며 그 나라의 마법사 제도에 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남색에 흰 띠 두 줄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고 가슴의 은실 문장이 어떤 도안인지 본 적도 없었다. 린이 본 것은 해진 옷 한 벌이었다. 밤에 추울 것 같은 옷이었다.

이 대륙에서 그 옷이 무엇인지를 가장 늦게 알게 될 사람이 그날 밤 그 말을 했다.

바르트는 그 말을 듣고 냄비를 젓던 손을 멈췄다. 그는 그것을 두 달 동안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말하려고 한 적은 세 번 있었다. 세 번 다 입을 열기 전에 그만두었는데, 그 옷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은 그 말을 못 한다. 그 말에 다른 뜻이 붙을 것을 아니까 못 한다.

니카도 못 했다. 니카는 타르실에서 남색 로브를 두 번 본 적이 있었고 두 번 다 도망치는 쪽이었다.
오벨은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조항으로 말하는 사람이었고,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이 들어갈 조항은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켈리가 자기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끝이 닳아 실이 풀려 있었다. 흰 띠 두 줄이 아직 거기 있었는데 한 줄은 거의 지워져 있었다.

"…갈아입어도 돼요?"
"어?"
"이거 벗어도 되냐고요."
"네 옷인데 왜 나한테 물어."

린이 그렇게 말하고 자기 자리로 가서 누웠다.
켈리는 그 자리에 한참 앉아 있었다.
그날 밤 켈리가 로브를 벗었다. 불이 다 꺼지고 넷이 잠든 뒤였다. 벗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추가 셋이었고 셋 다 풀렸다.

벗어 놓고 보니 천 한 장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개켰다. 개키는 법은 배운 적이 있었다. 소매를 안으로 접고 자락을 둘로 접고 어깨선을 맞추어 다시 접는다. 점호 전에 침상에 올려 두는 방식이었고 그 방식대로 개키면 가슴의 은실 문장이 위로 오게 되어 있었다. 검열관이 그것을 보고 지나가기 쉬우라고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배운 대로 개켰다. 문양이 위로 왔다.
그러고는 그것을 자루 맨 아래에 넣었다. 버리지는 않았다.

벗고 나서 남은 것은 회색 무명 내의였다.

그것도 지급품이었다. 소매가 팔꿈치까지 오고 목깃이 둥글고 천이 얇았다. 켈리는 그것을 옷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옷은 로브였고 이것은 로브 밑에 딸려 오는 것이었다. 배급받은 물건 목록에 이것도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켈리는 알았는데, 알면서도 벗을 수 있는 물건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벗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씻을 때도 갈아입을 때도 새것을 받아서 바꿔 입었을 뿐이지 없이 지낸 시간이 없었다.

목깃 안쪽에 번호가 찍혀 있었다.

먹으로 찍은 것이라 열두 해를 빨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켈리의 번호였고 로브 안쪽 목깃에 찍힌 것과 같은 번호였다. 세탁장에서 주인을 가리려고 찍는 것이었으므로 명예와도 소속과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다만 켈리가 아는 세계에서 자기 것이라고 표시된 물건은 그 둘뿐이었다. 하나를 방금 자루 맨 아래에 넣었고 하나는 아직 몸에 붙어 있었다.

켈리는 그 목깃을 한 번 잡아당겨 보았다. 번호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안쪽에 찍힌 것이라 입고 있으면 남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 위에 갈색 외투를 걸쳤다.

외투는 벨류엔 것이 아니었다. 바르트가 어디서 얻어 온 것이었고 켈리 몸에 맞지 않았으며 기름 얼룩이 있었다. 켈리가 입고 있는 것 중에 번호가 찍히지 않은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날 밤 켈리는 그 외투를 여미고 누웠다. 로브가 빠진 자리만큼 안쪽이 헐거워서 바람이 옆구리로 들어왔다.

추운 것보다 이상한 것은 가벼운 것이었다.
로브는 무거운 옷이었다. 두꺼운 천에 안감을 대고 자락이 발목까지 왔으며 은실 문장이 앞뒤로 들어가 있어서 가슴과 등에 무게가 실렸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그 무게를 지고 잤다. 무게가 있으면 자기 몸이 어디까지인지가 분명해졌고, 분명하면 잠이 왔다.

지금은 분명하지 않았다.
켈리는 몸을 한 번 뒤척였다가 일어나 앉았다. 자루 쪽으로 손을 뻗다가 도로 거두었다. 대신 품에 손을 넣었다. 종이가 거기 있었다. 여섯 줄이 적힌 종이였고 접은 자리가 아직 빳빳했다.

켈리는 그것을 꺼내지 않고 손만 대고 있었다.
품에 무언가가 있으면 잤다. 그것이 열두 해 동안의 순서였다. 그 무언가가 예전에는 건량 조각이었고 얼마 전에는 돌멩이였으며 오늘은 종이였다. 종이는 먹을 수 없었고 무게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있었다.

켈리는 그 위에 손을 얹은 채로 잠들었다.
바르트는 그날 밤 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그가 보고 있던 것은 켈리의 지팡이였다. 켈리가 잠들면서 옆에 놓아둔 것을 가져와 불빛에 기울여 보는 중이었다. 낮에 소리가 둘 났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나무를 친 소리가 하나였고 그 아래에 다른 소리가 하나 더 있었다.

손잡이에서 한 뼘쯤 위였다. 결을 따라 금이 가 있었다. 길이가 손가락 두 마디였고 깊지 않았다. 손톱을 대 보니 걸렸다.
아이언우드는 잘 갈라지지 않는 나무였다. 갈라졌다는 것은 그동안 안쪽이 이미 상해 있었다는 뜻이고, 안쪽이 상한 이유는 이 막대기가 지난 석 달 동안 자기 용도가 아닌 일에 쓰였기 때문이다. 짚는 물건으로 만들어진 것을 치는 데 썼다. 얼어붙은 땅을 쳤고 사람을 쳤고 탁자를 쳤고 문을 쳤고 오늘 나무를 쳤다.
바르트는 그 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노트를 펴서 한 줄을 적었다.

「아이언우드. 손잡이 위 한 뼘. 결 방향. 두 마디.」

그 아래에 무게를 적을 자리를 비워 두었다. 쇠를 얼마나 녹여야 하는지는 재 봐야 알 수 있었고, 재려면 이 막대기의 무게를 먼저 알아야 했다. 지금 재면 켈리가 깬다.
그는 지팡이를 원래 자리에 도로 놓았다. 놓으면서 각도까지 맞췄다. 켈리는 물건이 제자리에 없으면 아침에 그것부터 찾는 사람이었다.

다음 장에 쓸 것을 그는 이미 정해 두었다. 다만 그 일에 값이 얼마나 붙을지는 아직 계산하지 않았다. 계산하면 하기 싫어질 수도 있었으므로 나중에 하기로 했다. 그런 순서로 일을 하는 것은 30년 만에 처음이었다.

 

필요 없는 땅


**자플랜 왕국 · 왕도 어전**

자플랜의 어전 회의는 긴 탁자 하나를 놓고 열렸다.

탁자는 떡갈나무였고 길이가 5미터였으며 200년 되었다. 이 탁자가 들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서서 회의를 했다. 왕 앞에서 앉는 것은 무례라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인데, 오스릭 2세 때 그 전통이 없어졌다. 없앤 이유는 왕이 다리가 아파서였다. 그 뒤로 자플랜의 중신들은 앉아서 회의를 하게 되었고, 앉게 되자 곧 어디에 앉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지금 그 탁자에는 규칙이 하나 있었다. 왕에게서 가까운 쪽부터 앉는다. 다만 그 가까움을 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적혀 있지 않은 것이 더 강하게 지켜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그런 경우였다.

란돌프 그라이엔은 왕의 오른쪽 셋째 자리에 앉았다. 그라이엔 가는 사백 년 동안 자플랜 왕가에 장군을 냈고 그중 열하나가 전사했다. 그 열하나의 이름이 왕궁 서쪽 회랑의 돌에 새겨져 있었다. 그가 그 자리에 앉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의견을 낸 적이 없었다.

유리크 판 카르소는 탁자 끝에서 넷째 자리에 앉았다. 기계화 선봉대장이었고 서른일곱이었으며 지난 두 해 동안 자플랜군이 회랑에서 얻은 땅의 절반 이상을 그가 얻었다. 그 자리가 그의 전공에 맞는 자리인가를 놓고 이 년 전에 한 번 말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 "판 카르소 경은 젊으시니 앞으로 오래 올라갈 시간이 있다"고 말했고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그는 그 뒤로 이 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았다.

성씨에 붙은 판이라는 말은 자플랜 것이 아니었다. 카르소의 말이었고 그 나라에서는 어느 땅에서 왔는지를 뜻했다. 자플랜이 카르소를 삼킨 뒤에 그 말을 그대로 쓰게 한 것은 관대함이 아니라 편의였다. 출신을 이름 안에 넣어 두면 따로 물어볼 필요가 없다.

비토르 케른은 왕의 왼쪽 둘째 자리에 앉았다. 대공학원장이었고 카르소계였으며, 카르소 사람이 그 자리에 앉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 사실은 자플랜의 관대함을 보여 주는 사례로 여러 번 인용되었다. 인용한 사람들 중에 그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서른한 해가 걸렸다는 것을 함께 말한 사람은 없었다.

오스릭 3세는 일흔넷이었다.
회의는 아홉 시에 시작했다. 첫 항목은 남부 세관이었고 둘째가 조선소였으며 셋째가 하렐 방면 전황이었다.
란돌프가 일어섰다.

"하렐 방면 제3 보루를 확보했습니다. 지난달 19일입니다."

그가 지도를 탁자 위에 폈다. 지도는 크지 않았다. 회랑 전체가 아니라 하렐 방면만 그린 것이었고, 그 안에서도 이번에 얻은 자리만 붉게 칠해져 있었다.
"벨류엔의 방어선이 이 지점에서 꺾여 있었습니다. 꺾인 자리를 밀어서 폈습니다."
"전과는."
"진지 하나와 그 앞의 고지를 얻었습니다. 전선이 팔백 미터 전진했습니다."
"손실은."
"400입니다."

방이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것은 그 숫자가 커서가 아니었다. 그 숫자는 이 방에서 여러 번 나왔고 더 큰 것도 나왔다. 조용해진 것은 다음 말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중 360이 보병이고 40이 공병입니다. 기계는 잃지 않았습니다."

기계를 잃지 않았다는 말이 보고의 마지막에 붙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기계는 값이 적혀 있었다. 한 대에 얼마이고 만드는 데 몇 달이 걸리는지가 조달청 장부에 있었으므로 잃으면 그 숫자만큼 손실로 잡혔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적히지 않았다. 사람에도 값이 있기는 했다. 유족 연금과 보충 징집 비용과 훈련 기간이 각각 다른 부서의 장부에 나뉘어 적혀 있었는데, 나뉘어 적혀 있었으므로 한 자리에서 합산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 방에서 400이라는 숫자는 값이 아니라 그냥 숫자였다.
"수고했소."
오스릭 3세가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조금 쉬어 있었다. 그는 열여섯 해 전부터 아침에 목이 쉬었고 오후가 되어야 풀렸다.
서기가 받아 적었다. 적힌 것은 이랬다. 하렐 방면 요지 확보. 전과 양호.
란돌프가 앉았다.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려는 참이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유리크 판 카르소가 일어섰다.

이 방에서 넷째 자리 아래에 앉은 사람이 셋째 자리 위에 앉은 사람의 보고에 질문하는 일은 자주 있지 않았다. 없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자주 있지 않았고, 자주 있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일단 그것이 무례인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한다. 판단은 내용을 듣기 전에 끝난다.

"말씀하시오."
"제3 보루의 남쪽이 습지입니다."
란돌프가 그를 보았다.
"그래서."
"습지는 중장비가 못 지나갑니다. 무한궤도 폭이 1.2미터인데 그 지반은 0.6미터짜리도 빠집니다. 제 부대가 작년 가을에 그 일대를 정찰했고 기록이 조달청에 있습니다."
"정찰 기록은 알고 있소."
"그러면 그 보루에서 남쪽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사람뿐입니다.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문제요?"
"그 자리를 얻는 데 사람 400을 썼습니다."

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 조용함은 종류가 달랐다.
유리크는 그 조용함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기다리는 것이 유리한 경우와 불리한 경우를 구분할 줄 알았고 지금은 불리한 쪽이라고 판단했다. 한 번 끊기면 다음을 말할 수 없게 된다.

"둘째로 보급입니다. 전선이 팔백 미터 전진했으므로 보급선이 팔백 미터 늘었습니다. 하렐 가도에서 그 보루까지 수레로 가면 왕복 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 반 늘어납니다. 한 시간 반이면 한 수레가 하루에 한 번 더 왕복할 수 있던 것을 못 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지금 그 방면에 수레가 62대 배치되어 있습니다."

"숫자는 됐소."
"숫자가 이 건의 전부입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62대가 하루에 한 번씩 덜 가면 그만큼이 모자랍니다. 모자라면 두 가지 중 하나를 합니다. 수레를 늘리거나 사람을 줄이거나. 수레를 늘리려면 말과 마부가 따라 늘어야 하고 그것도 먹습니다. 사람을 줄이면 그 보루를 지킬 수 없습니다. 지킬 수 없는 자리를 얻은 것은 얻은 것이 아닙니다."
"경은 그러면 물러나자는 거요?"
"물러나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얻을 자리를 고르자고 했습니다."

란돌프가 일어섰다. 일어선 것은 반박하기 위해서였는데, 일어서고 나서 그가 한 말은 반박이 아니었다.
"판 카르소 경."
"예."
"경은 전선을 밀어 본 적이 있소?"
"작년에 열한 번 밀었습니다."
"그것 말고. 사람으로."

유리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질문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경의 부대는 기계로 미시오. 기계가 들어가는 자리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소. 그런데 대륙에는 기계가 못 들어가는 자리가 훨씬 많고, 그런 자리는 사람이 밀어야 하오. 사람이 밀면 사람이 죽소. 그것을 손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한 걸음도 못 가오."
"저는 손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뭐요."
"쓸데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탁자 중간쯤에서 누가 숨을 들이켰다.
"그 보루는 방어에 쓸 수 없습니다. 남쪽이 습지라 적이 그쪽으로 오지 않으니 막을 것이 없습니다. 공격의 발판으로도 쓸 수 없습니다. 우리 중장비가 못 나가니까요. 쓸 데가 없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얻으려고 400을 썼고 이제 그 자리를 지키느라 매일 수레 62대가 한 시간 반씩 더 굴러야 합니다."
"전선은 밀어야 하오."
"어디로 밀지를 고르는 것이 제 일이고 각하의 일입니다. 아무 데나 미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란돌프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한 번 굳었다가 풀렸다. 굳은 것은 아주 짧았고 그것을 본 사람은 탁자 이쪽 절반뿐이었다.
그는 오래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 자리에서 그가 느낀 것은 화가 아니었고, 화라고 부르려면 조금 더 단순한 것이어야 했다. 그가 느낀 것은 방금 한 말이 맞는 말이라는 사실과 그 말을 한 사람이 하필 저 사람이라는 사실이 동시에 왔을 때의 어떤 것이었다. 둘 중 하나만 왔다면 그는 다르게 반응했을 것이다.

란돌프 그라이엔은 그날 그 자리에서 유리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알았다는 것이 그 뒤 여섯 해 동안 그를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만들게 되는데, 그 과정은 한 번의 결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매번 아주 작은 것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로 하지 않은 일이 그날 오후에 있었다.

"폐하."
란돌프가 왕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렐 방면의 지휘는 제게 위임되어 있습니다. 위임의 범위 안에서 판단한 일입니다."

그것은 옳은 말이었다. 반박이 아니라 절차였다. 절차를 꺼내는 것은 내용으로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는데, 이 방에서 그 차이를 짚는 사람은 없었다.
오스릭 3세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 지도를 보고 있었으나 읽고 있지는 않았다. 일흔넷이었고 이런 회의를 서른아홉 해 동안 주재했으며, 서른아홉 해 동안 이런 순간을 여러 번 만났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둘 다 맞는 말을 하고 왕이 하나를 고르는 순간이었다.

고르면 한쪽이 진다. 지는 쪽이 무가이면 무가 전체가 왕을 다르게 보기 시작하고, 지는 쪽이 기술관료이면 다음 예산 회기에 조선소와 공학원이 서로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는 그 둘을 저울질하는 데 통치의 후반 스무 해를 썼고, 스무 해를 쓰고 나서 남은 것은 저울질하는 기술이지 판단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양쪽 다 일리가 있소."
그가 그렇게 말했다.
"판 카르소 경의 지적은 기록해 두시오. 보급 문제는 따로 검토합시다. 총사령의 판단은 위임 범위 안의 일이니 그대로 두고."

서기가 받아 적었다.
그것으로 그 항목이 끝났다. 끝나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보루는 그대로 남았고 수레 62대는 계속 한 시간 반씩 더 굴렀으며 400은 그 전주에 이미 집계가 끝나 있었다.
결정하지 않는 것은 결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다른 것을 주장할 때 왕이 고르지 않으면 지금 하고 있는 쪽이 계속된다. 계속되는 쪽이 이긴다. 그날 오전 어전에서 승부가 났고 진 사람은 그것을 알았다.

비토르 케른은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왼쪽 둘째 자리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고 손에는 작은 수첩이 있었다. 논쟁이 오가는 동안 그가 적은 것은 세 줄이었다.

습지. 중장비 불가.
사람으로 팔백.
400.

세 줄을 적고 나서 그는 그 아래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적을 것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모으고 있는 것은 하나의 문장이었고 그 문장에 도달하려면 이런 줄이 훨씬 많이 필요했다. 그날 그가 그 세 줄에서 읽은 것은 이랬다. 사람으로 밀어서는 이 전쟁이 안 끝난다. 기계가 못 가는 자리가 너무 많다. 그러므로 더 나은 기계가 필요하다.

그가 그 결론에서 다른 결론으로 넘어가는 데는 여섯 해가 더 걸린다. 넘어가는 순간은 어전이 아니라 어느 겨울 새벽 공학원의 빈 실험실이 되고, 그때 그가 적는 문장은 짧다.

그는 유리크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성이 달랐으나 같은 곳에서 왔다. 케른의 고향은 카르소 북부의 탄광 마을이었고 유리크의 고향은 남쪽 강변이었으며, 거리가 200 킬로미터였으나 자플랜의 서류에서는 둘 다 같은 한 줄로 처리되었다. 카르소계. 그 세 글자가 붙으면 다른 것은 묻지 않는다.

케른은 서른한 해 동안 그 세 글자를 지우려고 했다. 지우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믿었다. 다른 사람이 못 하는 것을 해내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 그 세 글자보다 앞에 오는 것이 생긴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고 왼쪽 둘째 자리까지 왔다.

다만 그 자리에 앉고 나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이 방에서 그를 소개할 때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순서로 말했다. 카르소계 최초의 대공학원장. 최초라는 말이 앞에 붙지 않는 날은 오지 않았고, 최초가 있으려면 그 앞에 없었다는 사실이 늘 함께 불려 나와야 했다.

그는 그것을 유리크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말하면 저 사람이 그만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르소계가 이 자리에서 그만두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올라와 있어야 다음 사람이 덜 힘들다고 그는 믿었고, 그 믿음이 틀렸다는 증거가 지금 탁자 저쪽 끝에서 네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날 그는 수첩을 덮고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회의는 열두 시가 조금 지나 끝났다.
사람들이 나가는 데 시간이 걸렸다. 문이 하나였고 나가는 순서가 앉은 순서와 같았으므로 끝자리에 앉은 사람은 기다려야 했다. 유리크는 서류를 정리하면서 기다렸다. 정리할 것이 많지 않았는데 오래 정리했다.

복도에서 란돌프와 마주쳤다.
복도는 좁지 않았다. 둘이 나란히 걸어도 되는 폭이었고 실제로 두 사람이 지나가는 데 부딪칠 일은 없었다. 란돌프가 앞에서 걸어왔고 유리크가 벽 쪽으로 반걸음 비켰다. 그것이 예였다.

두 사람이 스쳤다.
란돌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반드시 말을 걸어야 하는 규정은 없었고, 방금 어전에서 부딪친 상대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점잖은 처사였다.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이기까지 했다. 예를 어긴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유리크는 그 스쳐 감을 나중에 여러 번 떠올리게 된다.
그가 떠올린 것은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없었는가였다. 그 방에서 그는 옳았다. 숫자가 맞았고 정찰 기록이 있었고 아무도 그 계산을 반박하지 못했다. 옳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열아홉 살에 자플랜군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한 가지를 믿었다. 쓸모를 증명하면 된다. 카르소계라는 것은 씻어 낼 수 없지만 전공은 쌓을 수 있고, 쌓인 것이 충분히 높아지면 그 위에서는 출신을 묻지 않게 된다. 그는 그 믿음으로 열여덟 해를 버텼고 실제로 전공을 쌓았다. 작년에 자플랜군이 회랑에서 얻은 땅의 절반 이상이 그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어전에서 옳은 말을 한 사람은 넷째 자리 아래에 앉은 사람이었고, 옳은 말은 기록만 되었다.
그가 그 자리에서 알게 된 것은 정확히 하나였다. 능력으로는 안 된다.

그 결론에 도달한 카르소 사람이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대공학원장은 같은 자리에서 반대 결론에 도달했고 그래서 서른한 해를 더 증명하는 쪽을 택했으며, 그 선택이 그를 왼쪽 둘째 자리까지 데려다 놓았다. 두 사람은 같은 나라에서 왔고 같은 말을 듣고 자랐고 같은 벽 앞에 섰다. 한 사람은 벽을 넘으려고 더 높이 쌓기로 했고 한 사람은 벽이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둘 다 틀리지 않았다. 그것이 이 나라가 사람을 다루는 방식의 가장 정교한 부분이었다.
그날 오후 유리크는 보급 증원 요청서를 썼다.

내용은 간단했다. 하렐 방면 수레 62대를 80대로 늘려 달라는 것이었고, 늘리지 못하면 제3 보루의 주둔 인원을 절반으로 줄여 달라는 것이었다.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고 적었다. 근거로 왕복 시간 계산과 소모 예상치를 붙였고 정찰 기록의 사본을 함께 넣었다. 종이가 넉 장이었다.

그것을 병참부에 냈다.
병참부의 서류함은 나무로 짠 것이었고 위쪽이 열려 있었다. 새 서류는 위에 놓았다. 처리는 위에서부터 했다. 그것이 규칙이었고 규칙이 그렇게 정해진 이유는 늦게 온 것보다 먼저 온 것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편이 손이 덜 가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에 그 함을 정리한 사람이 있었다. 누가 정리했는지는 기록에 남지 않았다. 함을 정리하는 일에는 서명이 붙지 않기 때문이다.
정리가 끝났을 때 유리크의 넉 장은 함의 아래쪽에 있었다.

반려된 것은 아니었다. 반려하려면 사유를 적어야 했고 사유를 적으면 그 종이가 다시 위로 올라온다. 반려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놓으면 아무것도 적을 필요가 없었다. 그 서류는 여전히 처리 대기 중이었고 앞으로도 오래 처리 대기 중일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1200 킬로미터 떨어진 벨류엔 마법청에서도 그 무렵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배치 연령을 올리자는 안이 부결이 아니라 보류로 적혔고, 그렇게 적은 사람은 그것이 다음에 다시 올릴 여지를 남기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두 나라는 63년 동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싸웠는데, 서류를 처리하지 않는 방식만은 거의 같았다.

그것이 두 나라가 63년을 버틴 이유이기도 했다. 무엇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데는 아무 비용도 들지 않는다. 비용은 그 결정이 미뤄진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치른다.

제3 보루의 주둔 인원은 줄지 않았다. 수레도 늘지 않았다.

**자플랜 왕국 · 하렐 방면 제3 보루**

그 보루는 어전에서 본 지도의 붉은 자리였다.

실제로 가 보면 자리가 좁았다. 흙을 파서 둑을 올리고 그 위에 통나무를 얹은 것이었고, 벨류엔이 쓰던 것을 그대로 쓰는 중이라 안쪽 구조가 자플랜 방식과 맞지 않았다. 총안의 높이가 달랐다. 벨류엔 병사의 평균 키에 맞춰 뚫어 놓은 것이라 자플랜 병사가 서면 눈높이가 안 맞았고, 맞추려면 발판을 대야 했으며, 발판을 댈 나무는 보급으로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흙을 쌓아 발판을 만들었다. 비가 오면 무너졌다. 무너지면 다시 쌓았다.

남쪽은 습지였다. 아침마다 안개가 그쪽에서 올라와 정오까지 걷히지 않았고, 걷히고 나면 보이는 것은 갈대와 물웅덩이와 그 너머의 아무것도 없는 평지였다. 적은 그쪽으로 오지 않았다. 올 수가 없었다. 이 보루가 지키는 방향에서는 여섯 주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보루에 그해 봄까지 배치되어 있던 병사 중에 요른이라는 이름의 열일곱 살짜리가 있었다.

목수 아들이었고 카르소계였다. 두 달 전 그 진지를 얻는 싸움에서 참호 안에 떨어졌다가 살아 나왔고, 그 뒤로 넓적한 목공 망치를 놓지 않고 다녔다. 밤에도 옆에 두고 잤다. 누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연장이니까 필요하다고 대답했고, 실제로 그는 그것으로 발판을 고치고 총안 틀을 손보고 무너진 흙을 눌러 다졌다. 대답에 틀린 데가 없었다.

그가 그 자리에서 여섯 주 동안 한 일은 대부분 목수 일이었다.
보루 안쪽 벽이 자꾸 흘러내려서 나무를 대고 박았고, 지붕 삼아 얹은 방수포가 찢어지면 꿰맸으며, 취사장 바닥에 물이 고여 판자를 깔았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시키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명령이 되고 명령이면 기록이 남았을 텐데, 스스로 한 일이었으므로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다.

밤에 보초를 서면 남쪽을 봐야 했다. 남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네 시간 동안 보는 일은 처음 해 보면 쉬워 보이고 여섯 주째가 되면 다른 것이 된다. 그는 그 시간에 계산을 했다. 집 지을 때 서까래를 몇 개 걸어야 하는지, 문틀 폭이 얼마여야 하는지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것이었고 두 해 동안 안 써서 잊어 가는 중이었으므로 잊지 않으려고 세었다.

한 번은 그 보루의 목재로 집을 지으면 몇 채가 나오는지를 세어 본 적이 있었다. 둑에 박힌 통나무와 발판과 지붕 틀을 전부 뜯어서 쓰면 두 채 반이 나왔다. 계산이 끝나고 나서 그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이유가 없었고 말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수레는 열흘에 한 번 왔다. 원래 이레에 한 번이었는데 늘어났다. 왜 늘어났는지를 그 보루의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 다만 가도에서 여기까지가 멀어서 그렇다는 말이 돌았다. 그 말은 맞았다. 팔백 미터가 멀다는 것을 그들은 몸으로 알았으나 그것이 어전의 탁자 위에서 논의된 적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그가 그 보루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 서류에도 적히지 않았다. 400 안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400 안에 들지 않은 사람에 관한 기록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은 집계의 대상이 아니고, 집계되지 않는 것은 검토되지 않으며, 검토되지 않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그해 봄에 하렐 방면 제3 보루에서 일어난 일 중에 어전에 보고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어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기록하는 양식은 두 나라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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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습니다


타르실을 떠난 뒤로 사흘 동안 바르트는 자루를 하나 따로 메고 다녔다. 다른 짐과 섞지 않았고 밤에는 머리맡에 두었다. 누가 그 근처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자면서도 아는 눈치였다. 니카가 한 번 발끝으로 밀어 놓으려다 이름을 불렸는데, 크게 부른 것도 아니고 꾸짖는 투도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아무도 그 자루 쪽으로 손을 뻗지 않았다.

안에 든 것은 전부 타르실에서 산 물건이었다. 값은 하나도 빠짐없이 노트에 적혀 있었고 다 합하면 넉 냥이 조금 넘었다. 그 무렵 네 사람이 쥐고 있던 돈의 절반이 넘는 액수였는데도 그는 그것을 쓰면서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상의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만 그 넉 냥이 열여섯 냥의 빚 위에 얹혀 있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아서, 장부의 그 줄 옆에 가느다란 세로선을 하나 그어 두었다. 일행의 지출이 아니라 자기 지출이라는 표시였다. 훗날 갚을 때 누구 몫에서 빠지는가가 그 선 하나로 갈렸다. 돈이 나가기 전에 나갈 자리부터 그어 놓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가 마흔이 넘도록 돈 문제로 남과 얼굴을 붉힌 적이 없는 것은 그 버릇 덕분이었다.

나흘째 오후에 그가 걸음을 멈췄다. 길에서 왼쪽으로 비탈을 내려가면 마른 강바닥이 있었다. 로엔으로 가는 길이 강을 따라 나 있었는데, 물은 한참 위쪽에서 수로로 빠져나가 버려 아래쪽에는 흰 자갈만 강의 모양대로 깔려 있었다. 양옆으로는 사람 키의 두 배쯤 되는 둑이 서 있고 그 위로는 마른 덤불뿐이었다. 사람이 다닌 자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바르트가 그 아래로 내려가 한참을 서 있었다. 한 번은 쭈그려 앉아 자갈을 한 줌 쥐었다가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다. 그러고는 올라와서 오늘은 여기서 묵자고 했다.
"물이 없는데요."
니카가 말했다.
"위쪽에 있어. 삼백 보쯤."
"그럼 왜 여기서."
"쓸 데가 있어서."

그날 저녁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바르트가 한 일이라고는 재는 것뿐이었다. 강바닥으로 내려가 줄자를 펴고 걸음을 세더니 네 군데에 말뚝을 박았는데 그 간격이 자로 잰 듯 고르게 맞았다. 그다음에는 삽을 들고 흙을 퍼서 둑 쪽에 낮은 담을 쌓기 시작했다. 어른 무릎 높이에 길이는 두 걸음쯤 되는 것이었다. 켈리가 그것을 한참 보고 있다가 비탈을 내려가 도왔다. 시키지 않았는데 도왔고 도우면서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바르트가 말없이 삽을 하나 더 건넸다. 둘은 한 시간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흙을 퍼 올렸다.

흙은 위쪽이 마르고 아래쪽이 축축했다. 켈리는 마른 쪽이 가볍고 축축한 쪽이 무겁다는 것을 삽질 몇 번 만에 알아차렸다. 알아차린 뒤로는 무거운 쪽을 퍼서 아래에 깔고 가벼운 쪽을 위에 얹었는데, 아무도 그렇게 하라고 일러 준 적은 없었다. 바르트가 그 순서를 한 번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켈리에게 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것은 언제나 일과 일 사이에 남는 시간이었다. 삽이 흙에 박혀 있는 동안에는 할 일이 정해져 있었고 정해져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요즘 들어 생각할 것이 자꾸 늘어나던 참이라 켈리는 그런 시간이 좋았다.

둑 위에서는 오벨이 종이를 펴 놓고 있었다. 서류가 아니라 지적도였는데, 타르실을 나오던 날 어디선가 얻어 온 것이었다.
"이 구간은 등록된 소유자가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하천 부지는 왕령이고 마른 하상은 하천 부지에 포함됩니다. 다만 인접 농지 소유자가 관습상 사용권을 주장할 수 있는데, 가장 가까운 농지가 여기서 이천 보 밖입니다. 주장하려면 이천 보를 걸어와서 주장해야 합니다."
"그럼 안 온다는 거요?"
"올 수는 있습니다. 오지 않을 뿐입니다."
니카는 그 옆에 다리를 접고 앉아 길 쪽을 보고 있었다. 반나절 동안 지나간 것이라고는 수레 둘과 사람 셋이 전부였고, 그것도 모두 둑 위쪽 길로만 지나갔다. 아무도 강바닥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오늘 여기 사람 올 확률은 백에 하나도 안 됩니다."
"백에 하나면 거의 안 온다는 소리군."
"예."
"그 하나가 오면."
"그럼 그 하나가 온 겁니다."
니카가 주사위를 굴렸다. 굴리고 나서 눈을 보지 않았다.
"근데 뭘 하시려고 이렇게까지 재십니까."
바르트가 대답하지 않았다.

오벨이 그 사이에 켈리 쪽으로 왔다. 그가 수첩을 펴고 귀퉁이에 무언가를 그었다. 세로로 한 번, 가로로 한 번이었다.
"이게 열 십(十) 자입니다. 획이 둘이고 세로를 먼저 긋습니다."
켈리가 들여다보았다. 읽을 줄 아는 글자였고 보급 문서에 자주 나오던 것이었다.
"그거 알아."
"읽는 것은 아실 겁니다. 긋는 데는 순서가 있습니다."
"순서가 왜 있어."
"순서를 지켜야 남이 읽습니다."
켈리가 숯을 받아 땅에 그어 보았다. 가로를 먼저 그었다. 오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고, 켈리가 발로 지우고 다시 그었을 때에야 비로소 세로가 먼저 나왔다.
"됐습니다. 그럼 제 차례입니다."
"뭐가."
"문답입니다. 한 번 가르쳤으니 한 번 여쭙니다."
켈리가 그제야 어제 한 약속을 떠올렸다. 잊고 있었다.
"어."
"열두 해 동안 무언가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켈리가 그 질문을 두 번 들었다. 두 번 듣고 나서야 대답이 나왔다.
"없어."
"한 번도요."
"어."
오벨이 수첩에 적었다. 적는 데에는 시간이 들지 않았다. 켈리는 그가 무엇을 적는지 넘겨다보지 않았고 어째서 그런 것을 묻는지도 묻지 않았는데, 묻는 쪽이 값을 받는 쪽이니 자기는 묻지 않는 편이 셈에 맞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준비가 끝난 것은 그날 오후였다. 바르트가 자루를 풀어 안에 든 것을 말뚝 사이에 늘어놓았다. 유리병이 넷이었는데 그중 둘은 비어 있었고, 나머지 둘에는 회색 가루와 검은 액체가 절반쯤 담겨 있었다. 뚜껑에 바늘구멍 같은 것이 여럿 뚫린 놋쇠 통이 하나 있었다. 저울은 둘이었다. 하나는 늘 쓰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켈리가 처음 보는 것으로, 접시가 작고 바늘이 실처럼 가늘었다.

"저거 샀어?"
켈리가 물었다. 저울 이야기를 며칠 전에 들었기 때문이다. 스무 냥이라고 했었다.
"아니. 저건 여섯 돈짜리야. 스무 냥짜리는 안 샀어."
"왜."
"못 사니까."
바르트가 새 저울의 수평을 맞추면서 대답했다.
"스무 냥짜리는 한 푼의 십분지 일까지 재. 이건 십분지 오까지 재고. 지금은 이거면 돼."

그가 켈리를 자갈 위에 앉히고 설명을 시작했다. 한참이 걸렸고 중간에 세 번쯤 말을 바꾸었는데, 켈리가 알아들을 만한 말로 갈아 끼우느라 그랬다.

"자네가 터뜨리면 며칠이 나가지."
"어."
"그 며칠이 어디로 가는지 아나."
"몰라."
"나도 몰라. 근데 없어지는 건 아닐 거야."
바르트가 빈 유리병 하나를 들었다.
"뭐가 없어지려면 없어진 자리가 있어야 되거든. 태우면 재가 남고 녹이면 물이 되고 날아가면 어디 가서 내려앉아. 근데 자네가 쓰는 건 나간 자리가 안 보여. 나간 건 확실한데 어디로 갔는지가 없어. 나는 그게 이상해."
"이상하면 어떻게 되는데."
"이상하면 안 본 거야. 없는 게 아니고."

켈리가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앞뒤가 맞는 말이었다. 태우면 재가 남는다는 것쯤은 켈리도 알았다. 다만 자기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에도 재가 남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 애초에 그것이 생각할 항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가면 나가는 것이었고, 나가고 나면 며칠을 앓았고, 앓고 나면 또 나갔다. 그 사이에 무엇이 끼어 있는지를 여태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뭘 하는데."
"받아 보려고."
"뭘."
"나간 걸."
바르트가 놋쇠 통을 가리켰다.
"저 안에 받을 걸 넣어 놨어. 자네가 쓸 때 옆에 두면 뭐라도 붙을지 모르지. 안 붙으면 안 붙는 대로 하나 아는 거고."
"붙으면."
"붙으면."
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
"붙으면 다음부터 며칠이 줄어들 수도 있어."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 말만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며칠이 줄어든다는 것은 전선에서 아무도 해 주지 않던 말이었다. 며칠은 정해진 것이었지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줄여 보자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소모가 났으면 난 것이고 다음 배치까지 회복하면 그만이었으며, 회복이 늦으면 늦은 만큼 기록에 남았다. 켈리가 열두 해 동안 본 문서 가운데 더 나가게 하는 줄은 여럿이었어도 덜 나가게 하는 줄은 하나도 없었다.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벨류엔에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법청 연구부에 비슷한 제안이 세 번 올라갔고 세 번 다 반려되었다. 반려 사유는 매번 같았다. 소모를 줄이는 기술은 마법사 한 사람당 쓸 수 있는 횟수를 늘리는데, 쓸 수 있는 횟수가 늘면 그만큼 더 쓰게 되므로 총 소모량은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지지 않는 것에 예산을 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 계산 안에서 마법사 한 사람이 며칠을 앓느냐는 처음부터 항목이 아니었다.

"두 달 걸렸어. 이거 생각해 내는 데."
바르트가 덧붙였다.
"틀렸을 수도 있어. 틀리면 넉 냥 날리는 거고."

그가 조건을 하나씩 짚어 나갔다. 짚는 것은 오래된 버릇이어서 무엇을 약속하든 늘 그렇게 했다. 첫째, 다칠 사람이 없다. 백 보 안에 아무도 없을 것이며 니카와 오벨은 둑 위 저쪽 끝으로 보낼 텐데 거기까지가 이백 보다. 둘째, 물어낼 것이 없다. 주인 없는 땅이고 부서질 것이라고는 흙뿐이며 흙은 도로 덮어 놓으면 그만이다. 셋째, 값은 자기가 낸다. 재료값을 이미 치렀으니 결과가 나온다 해도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니라 알아낸 것이며, 알아낸 것은 나누어 갖는다.

"넷째."
그가 말했다.
"싫으면 안 해도 돼."

켈리가 그를 보았다. 그 말이 왜 거기에 붙는지 알 수 없었다. 앞의 셋은 조건이었는데 넷째는 조건이 아니었다. 조건이란 무엇을 하기 위해 미리 갖추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데, 안 해도 된다는 말은 갖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 줄은 어느 항목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열두 해 동안 켈리가 들은 말에는 언제나 들어갈 항목이 있었다. 항목에 없는 말을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건 왜 말해."
"말해야 되니까."
"왜."
바르트가 대답하려다 그만두었다. 대답하자면 자기가 몇 해 전에 어떤 사람들 옆에서 일했는지부터 말해야 했고, 그 사람들이 무엇을 물어도 어떻게 대답했는지를 말해야 했고, 그중 몇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는지까지 말해야 했다. 요즘 그 생각을 하루에 한 번씩 한다는 것을 덧붙이자면 밤이 다 갈 것이었다. 그는 그 전부를 말하지 않기로 하고 짧게 끊었다.
"그냥 말해야 돼."

그러고 나서 그가 물었다.
"할 텐가."

켈리가 입을 열었다.

"예. 알겠습—"

거기서 멈췄다.

멈춘 것은 켈리가 아니었다. 입이 먼저 가고 있었고 소리가 절반쯤 빠져나왔는데, 나머지 절반이 뒤따라 나오려던 참에 무언가가 걸렸다. 목 안쪽이었는지 그보다 아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배급 줄에서 앞사람이 까닭 없이 멈춰 설 때 뒷사람의 발이 어중간하게 들린 채 허공에 남는 일이 있다. 그 순간 켈리의 안에서 일어난 일이 꼭 그와 같았다. 말이 끊긴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도 없고 다음 말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없었다. 켈리가 아는 모든 자리에는 다음이 붙어 있었다. 줄에는 다음 사람이 있었고 대답에는 다음 동작이 있었으며 출격에는 다음 명령이 있었다. 다음이 없는 자리에 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고 나서 켈리가 깨달은 것은 자기가 방금 대답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대답이 저 혼자 나오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둘이 서로 다른 일이라는 것을 켈리는 열여덟 해 만에 처음으로 알았다. 생각해서 고른 말이 아니었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시작되어 무엇을 묻는지 듣지도 않고 흘러나오는 말이었다. 열두 해 동안 그 말은 언제나 정확한 자리에서 정확한 속도로 나왔고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틀릴 수가 없었다. 무엇을 묻든 답이 하나였기 때문이다.

켈리는 그 말이 나왔던 자리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배식대 앞에서 나왔고, 점호에서 나왔고, 조준에 실패한 뒤에 나왔고, 열일곱 번의 출격 앞에서 나왔다. 회랑 앞에서도 나왔다. 그때마다 켈리는 자기가 대답했다고 여겼는데, 지금 돌아보니 대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열두 해 동안 켈리가 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소리였다.

그동안 켈리의 몸에서는 따로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깨가 조금 올라가 있었고 오른발이 반 걸음 앞으로 나가 있었다. 대답을 마치고 곧바로 움직이려던 자세였다. 열두 해 동안 그 말 뒤에는 반드시 움직임이 뒤따랐으므로 몸이 미리 채비를 해 둔 것이었다. 켈리는 그 발을 도로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거두려면 이 일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걸음 나간 그대로 서 있었다. 어디로 가려는 자세도 아니고 가만히 서 있는 자세도 아닌, 세상 어느 규정에도 없는 자세였다.

바르트 쪽에서 그 침묵은 한참이나 길었다. 그는 자기가 방금 무엇을 물었는지 알고 있었다. 할 텐가는 예 아니면 아니오로 답하는 질문이었고, 어느 쪽이 나오든 그대로 받기로 하고 물은 것이었다. 그런데 답이 나오지 않자 그가 처음 떠올린 생각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 물었나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 떠올린 생각은 다시 묻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묻는 순간 그것은 재촉이 되는데, 재촉이란 명령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형태였다. 그는 북쪽 작업장에서 그 부드러운 형태를 여러 해에 걸쳐 보았고, 그때마다 아무도 그것을 명령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손에 들고 있던 놋쇠 통을 자갈 위에 내려놓았는데, 들고 있으면 그것이 어서 답하라는 뜻으로 보일까 싶어서였다. 거기까지 헤아리고 있는 자기가 우스웠다. 우스운 줄 알면서도 내려놓았다. 통이 자갈에 닿는 소리가 짧게 나고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강바닥으로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며 마른 덤불을 흔들었고, 둑 위 저쪽 끝에서 니카가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이백 보 밖이라 말은 실려 오지 않고 소리만 왔다.

켈리가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이번에는 절반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왔다.

"싫습니다."

말해 놓고 켈리 쪽이 더 놀랐다. 아는 말이었고 남이 쓰는 것을 들은 적도 있었지만 자기 입에서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말을 해도 된다는 것 자체가 켈리에게는 처음 받아 보는 물건 같았다. 게다가 존댓말이 붙어 있었다. 켈리는 바르트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고 여태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는데, 그 말만은 존댓말로 나왔다. 「예. 알겠습니다」가 들어앉아 있던 자리에서 나온 말이었으니 그 자리의 옷을 그대로 입고 나온 셈이었다. 훗날 켈리는 그 말을 여러 번 더 하게 되는데 매번 그러했다. 거절할 때만 존댓말을 썼고, 그것은 끝내 고쳐지지 않았다.

벨류엔의 어느 규정에도 마법사가 지시를 거절하는 경우를 다룬 조항은 없었다. 불복과 태만을 다루는 조항은 있었다. 그것은 명령을 받고도 수행하지 않은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할 것이냐고 묻는 절차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거절이라는 항목이 만들어질 자리도 없었다. 그러니까 켈리가 그날 한 것은 규정 위반이 아니었다. 규정 바깥의 일이었다. 열두 해 동안 켈리가 살아온 세계에는 바깥이라는 것이 없었으니, 켈리는 자기가 방금 무엇을 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말하고 나서 켈리는 기다렸다. 기다리는 일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축에 들었으므로 자세는 저절로 잡혔다. 두 발이 모이고 시선이 정면보다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알고 있었다. 거절한 자리에는 반드시 뒤따라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는데, 여태 거절해 본 적이 없으니 뒤따라오는 것을 구경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무언가 오기는 오리라는 것만은 알았다. 이 세상에 대가가 붙지 않는 일은 없었고, 그것은 요즘 켈리가 가장 확실하게 배운 것이었다.

바르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알았어."

그게 전부였다.

켈리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뒤따라오는 것이 오지 않았다. 오지 않는 편이 켈리에게는 오히려 어려웠다. 무엇이 오면 그것을 받으면 그만인데 아무것도 오지 않으면 받을 것이 없고, 받을 것이 없으면 그 일은 끝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켈리는 얹어 줄 사람이 사라진 배식 줄에 손을 내민 채로 남아 있는 사람처럼 한동안 그러고 서 있었다.

바르트는 도구를 치우지 않았다. 대신 놋쇠 통을 다시 집어 들고 흙 담 쪽으로 걸어갔다. 통을 담 앞에 내려놓고 뚜껑을 연 다음, 회색 가루를 부어 넣고 검은 액체를 조금 따라 넣고 뚜껑을 덮어 나사를 조였다. 조이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다 조이고 나서 그가 말뚝 쪽으로 물러났다.
"자네 저 뒤에 가 있어."
켈리가 말뚝 밖으로 물러났다. 바르트가 짧은 심지에 불을 붙이고 뛰었다. 뛰는 모양이 익숙하지 않았다. 마흔이 넘은 사람이 자갈밭을 달리는 모습이었고 한 번은 미끄러질 뻔했다.

터졌다.

소리가 났고 흙이 솟았고 먼지가 한참 떠 있다가 내려앉았다. 흙 담은 무너지지 않았다. 한쪽 끝이 기울었고 그 아래가 조금 파였을 뿐이었다. 놋쇠 통은 서른 보쯤 날아가 자갈밭에 떨어져 있었는데, 찌그러지기는 했으나 터지지는 않았다.

바르트가 일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담이 기운 각도를 재고, 파인 자리의 깊이를 재고, 통이 날아간 거리를 걸음으로 세었다. 주워 온 통의 안쪽을 손가락으로 훑어 보고 냄새를 맡아 보고서야 노트를 펴고 적기 시작했다. 담 기움 한쪽 끝 6센티. 파임 깊이 15센티에 너비 45센티. 통 이동 32보. 잉여 포집 없음. 적는 동안 얼굴에는 아무 표시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지막 줄 아래에 그가 숫자를 하나 더 적었는데 그것은 오늘 잰 것이 아니라 석 달 전 언덕의 구덩이를 걸음으로 어림해 두었던 것으로, 깊이 1.5미터에 너비 2.4미터였다. 두 줄을 나란히 놓으면 한쪽이 다른 쪽의 몇 배인지가 눈으로도 보였다. 열 배가 넘었다. 그는 거기서 숯을 멈췄다. 넉 냥으로 이만큼이 나오고 사람 하나로 저만큼이 나온다면 그 사람이 한 번에 얼마를 치르고 있는지가 곧 계산되어 나올 것이었고, 나온 숫자는 오늘 그가 본 것과 같은 자리에 적히게 될 것이었다.

켈리가 다가와 그 자리를 들여다보았다. 담 한쪽이 기울어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석 달 전에 언덕에서 켈리가 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때는 땅이 파였고 파인 자리가 켈리 키만 했으며 흙이 얼어 있었는데도 그렇게 되었다. 켈리는 그 둘을 머릿속에 나란히 놓아 보았다. 같은 종류의 일인데 크기가 달랐고, 크기가 그만큼 다르면 그것은 이미 다른 일이었다.

"이게 다야?"
"이게 다야."
"작네."
"작지."
바르트가 노트를 덮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쓰는 건 원래 이만해. 값을 치른 만큼 나오거든. 넉 냥어치 샀으니까 넉 냥어치 나온 거야."
"내 건."
"자네 건 값이 다른 데서 나가지."
그가 켈리를 보지 않고 말했다.
"자네 건 넉 냥이 아니야."

켈리가 그 말을 받았다. 받고 나서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켈리가 생각한 것은 넉 냥이 얼마나 되는지였다. 빵이 한 개에 두 돈이었고 열 돈이 한 냥이었으므로 넉 냥이면 빵 스무 개였다. 스무 개는 켈리가 열흘쯤 먹는 양이었다. 열흘치 빵으로 흙 담 한쪽을 기울일 수 있었다. 그럼 켈리 키만 한 구덩이는 얼마인가. 켈리는 그 계산을 시작했다가 도중에 멈췄다. 곱해야 할 숫자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곱하고 나면 나오는 답이 자기 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해가 넘어갈 때쯤 넷이 강바닥에서 올라왔다. 니카와 오벨이 이백 보 밖에서 올라와 합류했다. 오벨이 먼저 물었다.
"결과가 나왔습니까."
"나왔소."
"어느 쪽입니까."
"안 붙었소."
"…그럼 넉 냥은."
"날린 거지."
오벨이 뭐라고 더 물으려다가 바르트의 얼굴을 보고 그만두었다. 니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둘이 아까 강바닥에서 한참 서 있던 것을 이백 보 밖에서 보았고,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못 들었지만 서 있던 모양은 보았다. 그는 그런 것을 읽는 데 익숙했다. 판에서 진 사람과 이긴 사람은 앉은 자세부터 달랐는데, 아까 그 둘은 둘 다 진 사람의 자세도 이긴 사람의 자세도 아니었다. 니카는 그런 자세를 본 적이 없었고, 본 적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는 것을 빈민가에서 배우며 자랐다.

오벨은 수첩에 적어 둔 줄을 그날 고치지 않았다. 고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물었고 아침에 답을 받았고 그 답은 없다였다. 그 답이 그날 오후에 낡았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훨씬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줄을 지우지 않고 아래에 한 줄을 더 붙였다. 지우면 언제 바뀌었는지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네 사람은 둑 위에서 잤다. 불을 작게 피웠고 남은 빵을 나눠 먹었다. 오벨이 조항 이야기를 하려다 그만두었고 니카가 확률 이야기를 하려다 그만두었는데, 그만둔 이유는 둘 다 같았다. 바르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입을 다물면 다른 사람도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넷이 된 지 며칠밖에 안 되었는데 그런 규칙은 벌써 생겨 있었다. 바르트가 노트를 폈다. 낮에 적은 줄 아래에 여백이 있었다. 그가 거기에 한 줄을 적었다.

거절함. 최초.

그리고 그 아래를 한 줄 비웠다. 다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언제일지도 모르고 무엇을 거절할지도 몰랐으나, 한 번 생긴 것은 두 번째가 오게 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기로 하면서 그는 자기가 지금 기쁜지 아닌지를 알아보려고 했다. 알 수 없었다. 넉 냥을 날린 것은 아무렇지 않았고 두 달을 생각한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 둘은 원래 날릴 수 있는 것들이었고 날릴 각오로 산 것들이었다. 아무렇지 않지 않은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그 아이가 오늘 싫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여태 싫다고 말하지 못한 채로 한 것들이 전부 무엇이었는지가 오늘로 드러나는 셈이었다. 열일곱 번이 그렇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은 그 아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한 번씩 되돌아볼 때마다 다시 드러날 것이었다. 그는 그 생각까지 하고 나서 노트를 덮었다.

켈리는 반대쪽에 누워 있었다. 자지 않았다. 낮부터 한 가지가 계속 걸렸는데, 걸린 것은 「싫습니다」가 아니었다. 그건 이미 말해 버렸으므로 끝난 일이었다. 걸린 것은 그 앞이었다. 입이 먼저 가고 있었다는 것. 켈리가 아니라 말이 먼저 가고 있었다는 것. 그럼 그동안 대답한 것은 누구인가. 켈리는 그 질문을 여러 번 돌려 보았고 돌릴 때마다 같은 자리로 왔다. 대답한 사람이 자기가 아니었다면 열일곱 번을 나간 사람도 자기가 아니어야 했다. 그런데 나간 것은 자기 몸이었다. 몸은 갔고 대답은 남이 했다. 그 두 개가 어떻게 한 사람 안에 들어 있는지를 켈리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을 요즘 접어 두는 법을 배웠으므로 이것도 접어 두려고 했는데 접히지 않았다. 접으려면 모서리가 맞아야 하는데 이건 모서리가 없었다.

새벽에 켈리가 한 번 깨었다. 불이 거의 꺼져 있었고 바르트 쪽을 보니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자는 것 같지 않았다. 숨 쉬는 간격이 자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켈리는 전선에서 그 구별을 배웠다. 같은 막사에서 자는 사람들은 자는 척을 자주 했고, 자는 척하는 사람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도 거기서 배웠다. 켈리가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물을 것이 있었는데 어떻게 묻는지 몰랐다. 묻고 싶은 것은 화났느냐였고, 화났으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였고, 안 났으면 왜 아무 말도 안 하느냐였다. 그 셋을 한 번에 묻는 말을 켈리는 알지 못했다. 하나씩 물으려면 세 번을 물어야 했고 세 번 묻는 것은 켈리가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켈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시 누웠다. 누워서 천천히 한 가지를 정했는데, 정했다기보다 알게 된 쪽에 가까웠다. 그 말은 이제 안 나올 것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오늘 그 말이 절반에서 끊겼고 끊긴 자리는 다시 붙지 않을 터였다. 붙지 않는 까닭을 켈리는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한 번 끊어진 줄은 이어 놓아도 그 자리가 남는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런 줄을 여러 번 보았다. 보급대에서 나오는 밧줄은 대개 한 번씩 이어져 있었고 손이 매번 그 매듭에서 걸렸다.

해가 바뀌기 전 어느 밤, 켈리는 숲에서 혼자 자면서 명령하는 쪽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적이 있었다. 알아차리기만 하고 앉지는 않았다. 앉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날 강바닥에서 켈리가 한 일이 그 자리에 앉은 것이었는데, 앉고 나서도 앉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사람이 어느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은 대개 한참 지난 뒤에야 알게 된다.

켈리가 눈을 감았다. 바람이 둑 위로 지나가며 마른 덤불을 한 번 흔들었다. 아래쪽 강바닥에는 기울어진 흙 담이 있었고 그 옆에 아직 치우지 않은 말뚝 네 개가 서 있었다.

 

보충률


**벨류엔 마법왕국 · 왕도 마법청**

분기 보충률 보고회는 해마다 네 번 열렸고, 삼십일 년째 같은 방에서 열렸다.

방은 마법청 본관 삼 층 동쪽 끝에 있었다. 창이 북향이라 하루 종일 볕이 들지 않았는데 그것이 이 방을 회의실로 쓰게 된 이유였다. 북향 방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추우며, 서류를 오래 두어도 색이 바래지 않는다. 마법청이 이 건물을 지을 때 북향에 무엇을 둘지를 정한 사람은 문서를 생각했지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삼십일 년 동안 이 방에서 열린 회의의 참석자들은 외투를 벗지 않았다.

로르칸 베르트는 그날 아침에도 제일 먼저 들어와 있었다. 예순일곱이었고 마법청 운용국장이었으며 그 자리에 열아홉 해째였다. 그 전에는 병참과에 있었고 그 전에는 조달에 있었다. 마법청의 서류를 만드는 부서를 전부 거친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읽지 못하는 양식은 이 건물 안에 없었다.

그는 회의 시작 반 시간 전에 와서 자기 자리에 앉아 서류를 훑는 버릇이 있었다. 훑는다고 해도 이미 사흘 전에 다 읽어 둔 것들이었다. 다시 보는 이유는 숫자가 바뀌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숫자는 바뀌지 않는다. 다만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들어가는 것과 그러지 않고 들어가는 것은 회의 중에 차이가 났다.

아홉 시에 사람들이 들어왔다. 열한 명이었다. 운용국에서 넷, 병참에서 둘, 선발에서 둘, 기록에서 하나, 그리고 전선에서 올라온 마도원수 둘. 칼멘 드 바슈가 그중 하나였다. 예순둘이 되어 있었다. 지난해보다 흰머리가 늘었고 앉을 때 왼쪽 무릎을 한 번 짚었다. 왕도까지 나흘을 말을 타고 왔고 도착한 것이 어제저녁이었다. 분기마다 한 번씩 이 길을 온 지 십사 년째였다.

"시작하지."
로르칸이 그렇게 말하고 첫 장을 넘겼다. 회의는 언제나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선발 실적, 훈련 이수, 배치, 소모, 보충률. 다섯 항목이고 그중 앞의 넷은 보고만 하고 넘어갔다. 논의가 붙는 것은 언제나 마지막이었다.

선발부터 나왔다. 그해 봄 적성 검사 대상은 114,000명이었고 그중 통과가 412였다. 270명당 하나꼴이었다. 이 비율은 15년 전만 해도 300명당 하나였다. 기준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검사 대상이 넓어진 것이라고 선발 쪽은 설명했다. 예전에는 여섯 살에 한 번만 보았는데 지금은 다섯 살과 여섯 살과 일곱 살에 각각 한 번씩 본다. 세 번 보면 걸리는 것이 늘어난다.
"세 번 보는 것의 부작용은 검토했나."
로르칸이 물었다. 선발 쪽 인원이 서류를 넘겼다.
"다섯 살에 통과한 아이들의 초급 이수율이 낮습니다. 여섯 살 통과자에 비해 12 퍼센트가량."
"낮으면 어떻게 하나."
"중급으로 올리지 않고 초급에 한 해 더 둡니다."
"한 해 더 두면 그동안 먹는다."
"예."
"그 비용은 어느 항목에 들어가나."
"양성 예산입니다."
로르칸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그는 그 질문을 이미 답을 알고 물었다. 양성 예산은 운용 예산과 별도로 편성되며 편성 주체가 달랐다. 초급에 한 해 더 두는 비용은 운용국 장부에 나타나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 비용은 그의 결재를 거치지 않는다. 그가 물은 것은 그 사실을 이 방의 열한 명에게 한 번 더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다. 회의에서 오가는 말의 절반쯤은 그런 이유로 오갔다.

배치까지 별일 없이 넘어갔다. 소모 항목에서 서류가 두꺼워졌다.

그해 일분기의 소모는 141이었다. 분류별로 나뉘어 있었다. 포격형 63, 결계형 44, 돌파형 26, 기타 8. 각 분류 아래에 다시 세부 항목이 있었다. 전사, 회수, 소모, 분실. 분실 칸에 3이 적혀 있었다.

로르칸이 그 줄에서 잠깐 멈췄다. 세 건 중 둘은 이미 종결되어 있었다. 하나는 열흘 만에 발견되어 회수되었고 하나는 시신으로 확인되어 전사로 재분류되었다. 남은 하나에 미결 표시가 붙어 있었고, 표시 옆에 작은 글씨로 경과 일수가 적혀 있었다. 52일.

그것이 로르칸이 지난 늦겨울에 점을 찍은 건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의 자리에서는 미결 건을 기억하는 것이 업무였다. 다만 그가 그 건에 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체중 곡선과 훈련 기록과 남서쪽으로 난 발자국이었다. 그 자산의 번호는 기억났고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이름이 서류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보충률 표는 한 장이었다. 가로줄이 분기고 세로줄이 분류였다. 각 칸에 두 개의 숫자가 나란히 들어가 있었다. 왼쪽이 소모고 오른쪽이 보충이었다. 두 숫자가 같으면 유지고 오른쪽이 크면 증강이고 왼쪽이 크면 감소였다. 표 맨 아래에 합계 행이 있었고 그 오른쪽 끝에 비율이 적혀 있었다.

그해 일분기의 비율은 0.78이었다. 소모 141에 보충 110이었다. 31이 모자랐다. 모자라는 것은 새 일이 아니었다. 비율이 일을 넘은 것은 17년 전이 마지막이었고 그 뒤로는 계속 아래였다. 0.9를 넘은 해가 여섯 번, 0.8대가 여덟 번, 0.7대가 세 번이었다. 이번이 네 번째였다.

로르칸은 그 표를 31년 동안 보아 왔다.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서른여섯이었고 병참과 서기였으며 비율은 1.0이였다. 그때는 그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몰랐다. 지금은 알았다. 그것은 이 나라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를 한 자리 숫자로 줄여 놓은 것이었다.

표의 돌파형 칸에 26이 적혀 있었다. 그 26 안에 제4마도대 출신이 하나 들어 있었다. 분실 미결 건은 집계상 소모로 잡혔다. 분실로 따로 세면 소모 합계가 줄어들고, 소모 합계가 줄면 보충 요구량이 줄어들며, 보충 요구량이 줄면 다음 분기에 받아야 할 것을 못 받게 된다. 그래서 미결은 소모 쪽에 넣는 것이 관행이었다. 종결되면 그때 옮긴다. 옮기는 일은 기록과가 했다.

그러니까 그 줄에 켈리가 있었다. 번호로 있지도 않았고 이름으로 있지도 않았다. 26이라는 숫자 안에 하나로 있었다. 26에서 하나를 빼면 25가 되는데 그 25가 26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볼 방법은 표 위에 없었다. 표는 그런 것을 보여 주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표가 보여 주도록 만들어진 것은 비율이었고, 비율은 하나가 빠지든 들어오든 소수점 아래 둘째 자리에서나 움직였다.

통계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생겼다. 개별을 지워야 전체가 보인다. 141명이 각각 어디서 어떻게 없어졌는지를 다 적어 놓으면 그 종이로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으면 다음 분기에 몇을 뽑아야 하는지도 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이름을 떼고 번호를 떼고 얼굴을 떼어 숫자만 남긴다. 그것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가 굴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방에 앉은 열한 명 중 누구도 그 일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 이 일을 오래 하는 데 유리했다.

다만 지워진 것은 지워졌을 뿐이지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숫자 안의 하나는 그 시각에 로엔으로 가는 길 위에 있었고, 사흘 전에 처음으로 무언가를 거절했으며, 자기가 어느 표의 어느 칸에 들어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알았다 해도 그 칸에서 나오는 방법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칸에서 나오는 방법은 이 방에 앉은 사람들도 몰랐다.

그 소수점 아래 둘째 자리가 지금 이 방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벨류엔 마법왕국 · 왕도 마법청, 같은 회의**

"한 가지 올리겠습니다."
칼멘 드 바슈가 말한 것은 마지막 항목이 끝나 가던 무렵이었다. 로르칸이 고개를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들었다. 이 회의에서 전선 인원이 발언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들은 숫자를 가져오는 쪽이지 해석하는 쪽이 아니었다.
"말씀하시오."
"배치 연령을 조정하는 안입니다."
칼멘이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한 장이었고 손으로 쓴 것이었다. 서기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쓴 모양이었다.
"현행 표준은 12입니다. 이것을 14로 올리자는 제안입니다."

방이 잠깐 조용해졌다. 로르칸이 그 종이를 받아서 훑었다. 훑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장짜리였고 숫자가 세 줄뿐이었다.
"근거는."
"돌파형 평균 재적 기간이 14개월입니다. 그런데 14 이후에 배치된 자산은 평균이 22개월입니다. 표본이 적습니다. 37건뿐입니다. 그래도 차이가 여덟 달입니다."
"14 이후 배치가 왜 37건인가."
"유급입니다. 중급에서 분류가 안 나와서 한두 해 늦어진 경우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37은 원래 늦된 쪽이었군."
"예."
"늦된 쪽이 오래 버텼다."
"예."
로르칸이 종이를 책상에 놓았다.
"그러면 원인이 연령인지 개체차인지를 알 수 없네."
"알 수 없습니다. 알아보려면 일부러 늦춰서 표본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이 제안입니다."

그것은 정확한 대답이었다. 로르칸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이 방에서 14년을 앉아 있는 동안 칼멘 드 바슈는 한 번도 감정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숫자를 가져왔고 숫자로 말했고 숫자가 안 되면 안 된다고 했다. 그것이 그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한 것이었고, 동시에 그가 이 자리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로르칸이 다른 서류를 한 장 꺼내 책상 가운데로 밀었다.
"전선 유지 최소 배치 인원이오. 북부와 서부 합쳐서."
칼멘이 그것을 보았다.
"이번 분기 필요치가 490입니다. 현재 운용 중인 것이 461이고요."
"모자라지."
"예."
"12에서 14로 올리면 두 해 동안 신규 배치가 끊기네. 그 두 해에 소모는 계속 나고. 지금 비율이 0.78인데 신규가 끊기면 얼마가 되나."
칼멘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왕도로 오는 나흘 동안 그 계산을 세 번 했고 세 번 다 같은 숫자가 나왔다.
"0.3대입니다."
"0.3이면 전선이 어떻게 되나."
"…무너집니다."
"어디부터."
"북부 서쪽입니다. 그다음이 하렐 방면이고요."
"하렐이 뚫리면 그 뒤가 무엇인가."
칼멘이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이 방의 모두가 알기 때문이었다. 하렐 뒤에는 세 개의 곡창지대가 있고 그 뒤가 왕도였다.

로르칸이 종이를 칼멘 쪽으로 도로 밀어 놓았다.
"자네 제안이 틀렸다는 게 아니오."
그가 말했다.
"여덟 달은 큰 숫자요. 표본이 37이라 해도 그건 봐야 하는 숫자고, 나 같아도 그걸 보면 이 안을 올렸을 걸세. 다만 지금은 안 되네. 이 안이 되려면 두 해를 버틸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한테 그게 없어."
"그럼 언제 됩니까."
"비율이 1.0을 넘으면."
"1.0을 넘은 게 17년 전입니다."
"알고 있네."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로르칸이 그 말을 하면서 칼멘을 똑바로 보았다. 피하지 않았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방금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다른 답을 낼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이 자리에서 열아홉 해 동안 해 온 일이 그것이었다.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을 맞추는 일. 맞지 않으면 맞지 않는다고 적는 일. 맞추기 위해 무엇을 줄일지를 고르는 일.

고를 수 있는 것이 몇 개 없었다. 배치 연령을 올리면 전선이 무너진다. 훈련 기간을 늘리면 같은 일이 생긴다. 소모를 줄이는 기술에는 예산이 안 붙는다. 남은 것은 선발을 늘리는 것뿐이었고, 그래서 검사를 세 번 보게 되었으며, 세 번 보니 다섯 살짜리가 걸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다섯 살짜리들이 초급에서 한 해씩 더 머무는 비용은 양성 예산에서 나갔다. 운용국 장부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기록해 두게."
로르칸이 서기 쪽을 보고 말했다.
"배치 연령 조정 안건, 마도원수 드 바슈 제안. 전선 유지 필요치 미달로 보류."
"보류입니까."
"부결이라고 적으면 다음에 다시 올릴 수 없어."
서기가 받아 적었다. 칼멘은 자기 종이를 도로 접어 품에 넣었다. 접는 동작이 조심스러웠다. 그 종이는 그가 손으로 쓴 것이었고, 같은 것을 14년 동안 여섯 번 썼으며, 여섯 번 다 접어서 품에 넣고 돌아갔다.

회의는 11시에 끝났다.

**벨류엔 마법왕국 · 왕도 마법청 회수과**

회수과는 본관이 아니라 뒤채에 있었다. 방이 셋이고 인원이 아홉이었다. 넷은 특무 집검관이고 다섯은 그들을 지원하는 서기였다. 비앙카 세렌이 그 방에 들어간 것은 그날 오후였다.

그는 두 달 만에 왕도로 돌아온 참이었다. 남서 방면을 훑고 왔는데 성과가 없었다. 마을 열아홉 곳과 검문소 여섯 곳에서 물었고, 열흘 지난 발자국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었다.

회수과 서기가 그의 책상에 쌓인 것을 가리켰다.
"잡보입니다. 두 달 치요."
잡보는 각지에서 올라오는 짧은 보고를 모은 것이었다. 정보 가치가 낮아서 정식 보고로 만들지 않은 것들이 여기로 왔다. 국경 검문소의 통행 기록, 도시 자치대의 주간 사건 요약, 상인 조합이 제출한 분쟁 목록. 대부분은 마법사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상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회수과가 하는 일이었고, 그래서 이 방의 서기들은 하루에 수백 장을 읽었다.

비앙카가 의자에 앉아 그 더미를 당겼다. 읽는 속도가 빨랐다. 한 장에 열 숨을 쓰지 않았다. 열두 해 동안 읽는 훈련을 받은 사람의 속도였고, 그 훈련은 마법사였을 때 받은 것이 아니라 집검관이 되고 나서 받은 것이었다. 세 시간 만에 더미가 절반으로 줄었다.

그리고 그가 손을 멈췄다.

타르실 자치대의 주간 사건 요약이었다. 석 장짜리였고 17건이 적혀 있었다. 절도 넷, 폭행 셋, 채무 분쟁 다섯, 기물 파손 둘, 나머지 셋. 그중 열두 번째 건에 이런 줄이 있었다.

동편 골목 도박장. 기물 파손. 탁자 일, 문 일, 경첩 이. 파손자 성명 켈리, 성 없음. 중재 회부 완료.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비고. 목격자 진술에 따르면 파손자는 십 대 후반 여성으로 체격이 왜소함. 탁자는 참나무 상판.

비앙카는 그 두 줄을 네 번 읽었다. 네 번을 읽는 동안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일을 열두 해 하면서 그는 이런 줄을 여러 번 만났고, 그중 열에 아홉은 다른 사람이었다. 같은 이름은 흔하고 왜소한 십 대 후반 여성은 더 흔하다. 그래서 그는 기뻐하는 대신 세 가지를 순서대로 확인했다.

먼저 확인한 것은 날짜였다. 그 사건은 52일 중 41일째에 일어났다. 베르단에서 타르실까지의 거리는 600킬로미터가 조금 넘었다. 41일에 600킬로미터면 하루에 15킬로미터다. 다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속도였고, 굶으면서 걸었다면 조금 느렸다가 뭔가를 먹기 시작하고 빨라졌을 것이었다. 앞뒤가 맞았다.

두 번째로 확인한 것은 이름이었다. 성 없음. 벨류엔의 평민에게는 성이 없는 경우가 흔했으므로 그 자체로는 아무 뜻이 없었다. 다만 마법사에게는 예외 없이 없었다. 원적이 말소되면서 같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가 탁자였다. 비앙카는 참나무 상판을 알았다. 도박장에서 쓰는 것이면 두께가 손가락 두 마디 이상이고 아래에 쇠 받침을 댄다. 그런 것을 사람 팔로 부수려면 팔이 먼저 부러진다. 체격이 왜소한 십 대 후반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는 벽에 걸린 지도로 갔다. 남서 방면 지도였다. 이미 표시가 여럿 있었다. 그가 두 달 동안 훑은 자리들이었고 전부 헛것으로 판명된 자리들이었다. 그 표시들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어디를 봤는지를 알아야 어디를 안 봤는지가 나온다.

타르실은 지도의 왼쪽 아래 끝에 있었다.

비앙카가 거기에 표시를 했다. 그리고 표시를 하고 나서 한 걸음 물러나 지도 전체를 보았다. 베르단에서 타르실까지 자를 대고 선을 그으면 그 선이 지나가는 곳에 마을이 마흔 곳쯤 있었다. 그중 열아홉 곳을 그가 이미 훑었고, 훑은 곳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오지 않은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거기를 지나가지 않았거나, 지나갔는데 아무도 보지 못했거나.

두 번째라면 그 자산은 남색 로브를 입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사소한 결론이 아니었다. 회수라는 업무는 로브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었다. 검문소 기준에도 그렇게 적혀 있고 자치대에 돌리는 협조문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남색 로브, 소매 끝 흰 띠, 도보 또는 승마, 단독. 그 네 항목 중 첫 번째가 빠지면 나머지 셋만으로는 사람을 특정할 수 없다. 길 위에는 단독으로 걷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로브를 벗을 수 있다는 것을 회수과가 몰라서 그렇게 적은 것은 아니었다. 벗은 자를 잡아 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적은 것이었다. 426건의 대부분은 9일 안에 끝났고, 9일 안에 끝나는 도망자는 옷을 갈아입을 겨를이 없다. 겨를이 있으려면 밖에서 먹고 자는 법을 먼저 익혀야 하는데 그것을 익힐 시간이 9일보다 길다.

비앙카가 책상으로 돌아와 서랍에서 다른 서류철을 꺼냈다. 회수 기록이었다. 지난 육십삼 년 동안 분실로 분류되었다가 종결된 건들이 연도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426건이었다. 그는 그 서류철을 몇 해 전에 한 번 통독한 적이 있었다. 지금 다시 펼친 것은 확인할 것이 하나 있어서였다.

종결까지 걸린 일수를 보았다. 가장 짧은 것이 반나절이었고 가장 긴 것이 44일이었다. 426건의 중간값은 9일이었다. 9일 안에 대부분이 끝났다. 끝나는 방식은 세 가지였고 그중 둘은 시신이었다.

44일을 넘긴 건은 없었다.

오늘이 52일째였다.

비앙카는 그 서류철을 덮고 한참 앉아 있었다. 창밖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북향 방이 아니었으므로 이쪽은 해가 드는 자리였고, 드는 해가 지금 기울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이런 것이었다. 426건 중에 44일을 넘긴 것이 없다는 사실은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 44일을 넘기면 반드시 잡히거나 죽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44일을 넘긴 자를 잡아 본 적이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같은 숫자였다. 같은 종이에 같은 잉크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앞쪽으로 읽으면 이 일은 이미 끝나 가는 것이고 뒤쪽으로 읽으면 이 일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기록이라는 것이 가진 한계가 거기 있었다. 기록은 일어난 일만 적는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적히지 않고, 적히지 않은 것은 다음 사람이 읽을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44일이라는 상한은 도망친 자들의 한계를 잰 숫자가 아니라 쫓은 자들의 한계를 잰 숫자일 수도 있었다. 63년 동안 아무도 그 구분을 해 놓지 않았다. 해 놓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넘긴 건이 없으면 넘긴 건을 어떻게 다룰지를 적어 둘 이유도 없다.

그런 경우를 위한 항목이 서류철 어디에도 없었다. 목차를 앞에서 뒤로 두 번 훑었는데 없었다.

기록에 없는 것을 쫓는 방법은 기록에 적혀 있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서 벽의 코트를 내렸다. 그리고 검을 챙겼다. 칼집을 허리에 걸면서 손끝이 홈이 파인 자리를 지나갔다. 열아홉 개였고 스무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방을 나서기 전에 서기에게 한 가지를 청구했다.
"타르실 상인 평의회 중재 기록. 지난 석 달 치 전부."
"정식 청구로 올릴까요."
"아니. 조용히."
서기가 그것을 적었다. 적으면서 한 가지를 물었다.
"그 건, 확실합니까."
비앙카가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확실하지 않네."
그가 말했다.
"다만 44일이 넘었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서기는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들을 필요도 없었다. 회수과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특무 집검관들이 가끔 그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말은 대개 그들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비앙카 세렌이 왕도를 다시 떠난 것은 다음 날 새벽이었다. 이번에는 짐이 하나 늘어 있었다. 남서 방면 지도 말고 타르실 시가도가 한 장 더 들어갔다.

같은 날 아침, 로르칸 베르트는 어제 회의의 회의록에 서명했다. 마지막 장 아래쪽에 보류 항목이 한 줄 적혀 있었다. 배치 연령 조정 안건, 마도원수 드 바슈 제안, 전선 유지 필요치 미달로 보류. 그는 그 줄을 읽고 서명했다.

서명하면서 그가 떠올린 것은 37년 전이었다. 그때 비율이 1.01이었고 그 해에도 누군가 비슷한 안을 올렸다. 그때는 여유가 있었으므로 검토가 진행되었다. 검토는 두 해 걸렸고 결론이 나기 전에 비율이 0.9대로 떨어졌으며, 떨어지자 그 건은 자동으로 보류되었다. 보류된 것은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올리려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그 뒤로 한 번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 안을 올린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회의록에 남아 있었다. 로르칸 베르트, 당시 병참과장.

그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말할 자리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말하면 다음 질문이 나오고, 다음 질문의 답은 그 자신이 어제 칼멘에게 한 말과 똑같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여유가 생기면 하겠습니다. 여유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 회의록은 본관 지하 서고 서쪽 세 번째 칸에 있었다. 연도순으로 꽂혀 있었고 표지에 먼지가 앉아 있었다. 십칠 년 동안 그것을 꺼내 본 사람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기록과 서기였고 목록을 대조하러 왔다가 펼치지 않고 도로 꽂았다. 다른 한 명은 로르칸이었다.

그가 언제 그것을 꺼내 보았는지는 대출부에 적혀 있었다. 열한 해 전 겨울, 운용국장으로 부임하고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 그는 그 서류철을 한 시간 반 동안 읽고 제자리에 꽂았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 꺼내지 않았다. 꺼낼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한 번 읽고 나서 거기 적힌 젊은 사람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 젊은 사람은 여유가 언젠가 온다고 전제하고 안을 썼다. 여유는 오지 않았고, 오지 않는 것을 전제로 다시 쓰면 그 안은 성립하지 않았다.

문서고 관리인이 봄마다 서쪽 칸의 먼지를 털었다. 마른 천으로 표지 위를 한 번씩 훔치고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그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닦고 있는지 몰랐다. 알 필요도 없었다. 서고에 있는 모든 서류는 같은 방식으로 닦이고 같은 방식으로 제자리에 놓인다.

칼멘 드 바슈는 그날 정오에 왕도를 떠났다. 말에 오르기 전에 품속을 한 번 눌러 보았다. 종이가 거기 있었다. 그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가져가는 사람이었고, 가져가서 다음 분기까지 서랍에 두었다가 숫자만 고쳐서 다시 쓰는 사람이었다. 일곱 번째가 될 것이었다. 돌아가는 길은 나흘이었다.

 

밀밭


로엔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문이 없었다.

타르실과 로엔 사이에는 국경을 표시하는 돌이 하나 서 있었는데, 어른 허리 높이의 화강암이었고 양쪽 면에 각각 다른 나라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새긴 지 오래되어 양쪽 다 닳았다. 그 돌 옆에 초소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주춧돌만 있고 지붕은 없었다. 검문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로엔은 들어오는 사람을 막아서 지키는 나라가 아니었다.

켈리는 그 돌을 지나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벨류엔에서 배운 국경은 사람이 죽는 자리였고, 열두 해 동안 켈리가 넘어 본 경계는 전부 넘는 순간에 무언가가 날아오는 종류의 것이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았다. 돌이 하나 서 있고 길이 이어졌다. 켈리는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앞이 잘못되어 있었다.

길은 완만한 언덕을 넘어가는 중이었고, 언덕마루에 올라서자 그 너머가 한꺼번에 나타났다. 켈리가 멈춘 것은 그때였다. 멈추려고 멈춘 것이 아니라 발이 먼저 멎었다. 지팡이가 땅을 짚은 자리에서 반 뼘쯤 앞으로 나가다 말았다.

초록이었다. 눈이 닿는 데까지 전부 초록이었다.

그것은 숲의 초록이 아니었다. 숲은 위로 자라고 그늘을 만들고 안쪽이 어둡다. 이것은 땅에 깔려 있었다. 무릎 높이로 고르게, 마치 누가 한 번에 쓸어 놓은 것처럼 평평하게 깔려서 언덕을 넘고 개울을 건너고 그 너머 또 다른 언덕을 넘어 지평선까지 갔다. 바람이 지나가면 그 초록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밀렸다. 밀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멀리서 시작해서 가까이로 오는 데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이 보인다는 것이 켈리를 가장 이상하게 했다. 그렇게 넓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켈리가 본 것 중에 가장 큰 초록은 연병장이었다. 제4마도대의 연병장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이백 걸음이었고 봄이 되면 가장자리에 풀이 돋았는데 사흘 안에 깎였다. 풀을 기르는 곳이 아니었으므로 기르지 않았다. 켈리는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땅이란 무언가를 하는 자리이고, 하지 않는 땅은 비워 두는 것이 당연했다.

여기는 땅 전체가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밀입니다."
니카가 옆에 와서 섰다. 걸음이 가볍고 소리가 나지 않는 아이였다.
"겨울밀요. 가을에 심어서 초여름에 벱니다. 지금은 한창 크는 중입니다."
"이게 밀이야."
"예."
"이게 다."
"보이는 데까지는요."
니카가 손을 들어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천천히 그었다.
"저 언덕 너머도 밀입니다. 그 너머도요. 로엔 북부는 열흘을 걸어도 밀밭입니다. 저도 다 가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가 본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겠지요."

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눈앞의 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몰랐고, 그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재는 단위도 몰랐다. 벨류엔에서 가르친 단위는 전부 사람을 세거나 거리를 재거나 시간을 나누는 것이었다. 땅이 얼마나 넓은지를 재는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하지 않은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 넓이를 세는 단위는 이 대륙에 여럿 있었고 로엔에서만 쓰는 것도 셋이었다. 켈리는 그중 하나도 배운 적이 없었다.

대신 몸이 먼저 반응했다. 목 안쪽이 조였고 침이 고였다. 그것은 앞에 먹을 것이 있을 때 나오는 반응이었는데, 켈리가 보고 있는 것은 아직 밀조차 아니었고 여물지도 않은 어린 줄기였다.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그랬다. 열두 해 동안 켈리의 몸은 눈에 보이는 양과 들어오는 양이 다르다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배울 기회가 없었다. 보이는 것이 곧 나오는 것이었고 나오는 것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켈리는 침을 삼켰다. 삼키고 나서 그것이 부끄러운 일인지 아닌지를 잠깐 생각했는데, 판단이 서지 않았으므로 생각을 그만두었다.

바르트가 뒤에서 올라와 옆에 섰다. 그는 언덕 아래를 한 번 훑고 나서 켈리를 보았다. 켈리가 아직 그대로 서 있었다.

"처음 보지."
"예."
"나도 처음 봤을 때 한참 서 있었어."
바르트가 배낭 끈을 고쳐 멨다.
"그때 스물넷이었나. 카르소에서 여기 처음 왔을 때야. 그땐 지금보다 더 넓었어."
"땅이 줄었어요?"
"아니. 내가 늙었지."

켈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바르트도 설명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남겨 두는 말이 그 둘 사이에 점점 늘어 가고 있었는데, 그것이 나쁜 징조가 아니라는 것을 켈리는 아직 몰랐다. 사람과 오래 같이 있으면 설명되지 않은 말이 쌓이고, 쌓인 것이 어느 날 저절로 풀린다. 켈리는 그런 식으로 무언가가 풀려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것을 기다릴 줄도 몰랐다.

길은 밀밭 사이로 났다. 폭이 수레 두 대가 겨우 비껴갈 만했고 바퀴 자국이 깊게 패어 있었다. 그 자국을 보면 이 길로 얼마나 많은 것이 지나갔는지 알 수 있었는데, 켈리는 자국을 보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척후 훈련에서 사흘을 했다. 다만 그 훈련은 사람의 발자국을 보는 것이었지 수레의 것이 아니었다.

정오 무렵에 첫 마을이 나왔다. 마을이라기보다 창고가 먼저 나왔다. 길 왼쪽으로 길고 낮은 건물이 다섯 채 나란히 서 있었고 전부 같은 모양이었다. 벽이 돌이고 지붕이 높고 창이 아주 작았다. 문 앞에 수레가 여러 대 서 있었으며 사람들이 자루를 옮기고 있었다.

"저게 집이에요?"
"창고."
니카가 말했다.
"곡물 창고입니다. 다섯 채면 작은 편이에요."
"저기 사람이 안 살아?"
"밀이 삽니다."

켈리가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니카가 웃을 뻔했다가 참았다. 이 사람에게 농담을 하면 농담이 사실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을 니카는 며칠 만에 알아차렸고, 알아차린 뒤로는 조심하고 있었다. 조심하는 것이 그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오벨이 따라붙었다. 그는 걸으면서도 가방을 가슴 앞으로 돌려 안고 다니는 버릇이 있었다.
"저 창고들은 아마 개인 소유가 아닐 겁니다."
그가 말했다.
"지붕 모양이 같고 문 쇠붙이가 같습니다. 같은 도면으로 지은 것이지요. 로엔은 창고를 공공이 짓고 농가가 임차합니다. 임차료를 현물로 받습니다."
"현물이 뭐예요."
"돈 말고 물건으로요. 밀을 맡기면 백 섬에 몇 섬씩 떼는 식입니다."
"왜 떼요."
"지어 준 값이지요."

켈리가 그 말을 곱씹었다. 곱씹는 얼굴이 따로 있는 사람이었다. 눈이 조금 내려가고 입이 굳게 다물리고 걸음이 반 박자 느려진다.
"창고가 있으면 밀이 안 상해요?"
"예."
"그럼 창고가 없으면 상해요?"
"상합니다. 비를 맞거나 쥐가 들거나 습기가 차면요."
"그러면 백 섬 중에 몇 섬은 원래 없어질 거였네요."
오벨이 걸음을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멈춘 것은 멈춘 것이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 떼는 게 아니잖아요. 안 없어진 걸 나누는 거지."

이 문답에는 정확한 이름이 있었다. 보관 비용의 귀속을 다투는 논점이었고, 로엔 곡물청의 판례집 제삼권에 유사 사건이 열한 건 실려 있으며, 그중 일곱 건에서 켈리와 같은 논리가 채택되었다. 오벨 리스트는 그 판례집을 읽은 적이 있었다. 켈리는 판례라는 말을 몰랐고 곡물청이라는 관청이 있다는 것도 몰랐으며 자기가 방금 한 말이 누군가의 직업 전체와 관련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켈리가 아는 것은 밀이 상한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벨류엔에서 건량이 상하면 그것은 맡아 둔 사람의 책임이었다.

오벨이 가방 끈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걸음을 다시 옮겼다.
"열람료로 치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뭐가요."

"제가 하나 여쭈었으니 하나 알려 드려야지요. 다만 오늘은 제가 받은 쪽입니다. 그러니 두 개 알려 드리겠습니다."

니카가 알려 준 것은 값이었다.
"작년 가을 시세가 한 섬에 열두 냥이었습니다."
그가 길가 돌에 걸터앉아 말했다.
"올봄에 열여섯까지 올랐고요. 지금은 열다섯 대여섯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비싼 거야?"
"비쌉니다. 재작년에는 아홉이었으니까요."
"왜 올라."
"사는 쪽이 늘었으니까요."
니카가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여기 두 군데가 삽니다. 북쪽하고 동쪽이요. 둘 다 많이 삽니다. 둘 다 급하게 사고요. 급하게 사는 사람이 둘이면 값은 올라갑니다. 이건 확률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됩니다."
"북쪽하고 동쪽이 누군데."

니카가 켈리를 보았다. 보고 나서 대답을 조금 늦췄다. 그가 대답을 늦추는 것은 계산할 것이 있을 때인데, 이번에 계산한 것은 확률이 아니었다.
"자플랜하고 벨류엔입니다."

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벨이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끼어든 것이 배려였는지 그냥 순서가 되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파는 방식도 아셔야 합니다."
그가 말했다.
"저 밀은 이미 팔렸습니다."
"아직 안 자랐는데요."
"예. 안 자랐는데 팔렸습니다."

켈리가 밭을 보았다. 무릎 높이였다. 이삭은 아직 없었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고 초록이 한쪽으로 밀렸다.
"어떻게 팔아요. 없는 걸."
"없는 것을 파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줄 것을 지금 약속하는 것입니다. 사는 쪽은 지금 값을 치르고 파는 쪽은 여름에 물건을 냅니다. 사는 쪽은 값이 더 오를까 봐 미리 잡아 두는 것이고, 파는 쪽은 값이 떨어질까 봐 미리 팔아 두는 것이지요. 양쪽 다 무서워서 하는 거래입니다."
"안 자라면요."
"안 자라도 줘야 합니다."
"밀이 없는데 어떻게 줘요."
"사 와서 줍니다. 자기 밭에서 안 나면 남의 밭 것을 사서 채웁니다. 그 해에 그 사람은 망합니다."
"그럼 안 하면 되잖아요."
"안 하면 값이 떨어졌을 때 망합니다."

켈리가 멈춰 섰다. 이번에는 밭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쪽이든 망해요?"
"어느 쪽이든 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둘 중에 덜 망할 것 같은 쪽을 고릅니다. 고르는 것이 이 일의 전부입니다."
"고르는 게 왜 있어요."
"예?"
"안 고르면 안 돼요? 그냥 자라면 먹고 안 자라면 안 먹고."

오벨이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만들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 질문에 답하는 조항이 그의 머릿속에 여러 개 떠올랐으나 그중 어느 것도 「안 고르면 안 되느냐」에 답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항은 고른 다음부터 적용된다. 고르지 않는 경우를 위한 조항은 없었다. 오벨 리스트가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런 것을 묻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값을 배운다. 켈리는 값을 배운 적이 없어서 아직 그것을 물을 수 있었다.

로엔에는 군대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성벽을 쌓은 도시가 하나도 없고 상비군이 이천을 넘은 적이 없으며 그 이천도 대부분 창고를 지키는 인원이었다. 대륙의 어느 나라도 로엔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나라도 로엔을 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치면 그해 농사가 망하고 농사가 망하면 치러 간 쪽도 겨울에 굶는다. 자플랜의 대군이 남하할 때마다 로엔의 밀밭을 밟지 않고 우회한 것은 로엔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 밭이 자기들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창을 든 쪽과 빵을 쥔 쪽 가운데 먼저 굶는 것은 창 쪽이다. 이레네 로엔은 그 말을 공개 석상에서 세 번 했고 세 번 다 다른 나라 사신 앞에서 했다.

물론 밟힌 적이 있기는 했다. 협정력 191년 겨울에 드란의 용병대가 군량을 요구했고 로엔이 거절했으며 용병대는 창고를 열었다. 그해 로엔 남부에서 얼마나 죽었는지는 나라마다 다르게 적혀 있다. 드란의 기록에는 그 사건이 「징발」로, 로엔의 기록에는 「굶긴 겨울」로 남았다. 같은 사건에 두 개의 이름이 붙었고 두 이름 모두 아직 쓰이고 있었다. 켈리는 그 일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12년 전 일이었고 그때 켈리는 여섯 살이었으며, 여섯 살의 켈리가 있던 곳에서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날 저녁은 밀밭 가장자리에서 묵었다. 길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마른 도랑이 있었고 바람이 덜 들었다. 바르트가 불을 피우고 니카가 마을에서 산 것을 풀었다. 빵 네 덩이와 소금에 절인 콩과 기름 한 병이었다. 값이 도합 한 냥 두 돈이었는데 켈리는 그 숫자를 들었고 기억했다. 남은 것이 얼마인지도 들었다. 그것도 기억했다.

먹고 나서 켈리가 종이를 꺼냈다. 오벨이 나눠 준 것이었다. 한 장을 넷으로 접어 쓰고 다 쓰면 뒷면을 쓰라고 했다. 숯 조각은 바르트의 것을 빌렸다.

켈리가 쓴 것은 숫자였다.

먼저 하루치를 적었다. 벨류엔의 건량은 한 사람 하루에 넉 냥이었다. 냥은 무게 단위였고 돈 단위와 글자가 같았는데 그것이 왜 같은지 켈리는 몰랐다. 아무튼 넉 냥이었다. 출격이 있는 날은 여섯 냥이 나왔고 대기하는 날은 넉 냥이었으며 근신 중에는 두 냥이었다.

그다음에 날수를 적었다. 한 해가 약 360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열두 해를 곱해야 하는데 곱셈이 막혔다. 켈리는 곱셈을 배웠으나 자릿수가 커지면 손이 엉켰다. 그래서 더했다. 360을 열두 번 더하는 데 한참이 걸렸고 중간에 두 번 틀려서 처음부터 다시 했다.

4320 일이 나왔다.

거기에 넉 냥을 곱했다. 이번에는 4320을 네 번 더했다. 17,280냥이 나왔다. 켈리는 그 숫자를 종이에 적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만이라는 숫자를 자기 손으로 써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뭐 해."
바르트가 불 너머에서 물었다. 켈리가 종이를 돌려 보여 주었다.
"제가 먹은 거요."
"열두 해 치를 다 셌어?"
"예."
"왜."
"저기 얼마나 있나 보려고요."

바르트가 그 말의 뜻을 알아듣는 데 잠깐 걸렸다. 알아듣고 나서 그는 니카를 불렀다.
"밀 한 섬이 몇 냥이야. 무게로."
"섬은 무게가 아니라 부피인데요."
니카가 자루를 베고 누운 채 대답했다.
"그래도 대충 치면 한 섬이 140근쯤 됩니다. 근이 열여섯 냥이니까 2240냥이요."
"밭 한 뙈기에서 몇 섬 나와."
"뙈기가 얼마만 한 건지에 따라 다릅니다만."
니카가 몸을 일으켰다. 셈이 얽히기 시작하면 그는 눕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여기 밀밭은 보통 한 이랑이 백 걸음에 스무 걸음입니다. 그 정도면 한 해에 여덟 섬쯤 나옵니다. 좋은 해에는 열 섬이고요."

켈리가 숯을 다시 들었다.

여덟 섬이면 17,920냥이었다. 그 계산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켈리가 방금 쓴 숫자와 비슷했기 때문에 비슷하다는 것이 먼저 보였다.

켈리는 종이에서 눈을 들어 밭을 보았다.

날이 거의 저물어 밀이 검게 보였다. 그래도 어디까지 있는지는 보였다. 도랑 너머로 이랑이 이어졌고 그 이랑이 몇 개인지 셀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세다가 스물다섯에서 놓쳤다. 놓친 자리 너머로도 계속 있었다.

이랑 하나가 켈리의 열두 해였다.

그 밭에 이랑이 몇 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백 개는 넘어 보였고, 그 밭 너머에 또 밭이 있었으며, 니카는 열흘을 걸어도 밀밭이라고 했다.

켈리는 종이를 무릎에 놓고 가만히 있었다. 불이 타는 소리가 났고 어디선가 개구리가 울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켈리가 열두 해 동안 배운 것 중에 가장 확실했던 것은 세상에 먹을 것이 모자란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배운 것이 아니라 전제였다. 건량이 넉 냥인 이유는 넉 냥밖에 없기 때문이고, 출격 전날 더 주는 이유는 그날 더 써야 하기 때문이며, 남는 것이 없으므로 아끼고 남기지 않고 셈을 맞춰야 한다. 열두 해 동안 켈리는 그 전제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하려면 바깥을 봐야 하는데 바깥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 있었다.

먹을 것은 모자라지 않았다. 모자라기는커녕 한 사람의 열두 해가 이랑 하나였고 이랑은 지평선까지 있었다. 그러니까 켈리가 굶은 것은 세상에 밀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밀은 있었다. 밀은 여기 있었고 여기서 자라서 수레에 실려 어딘가로 갔다. 켈리에게 온 것이 넉 냥이었을 뿐이다.

넉 냥이 나온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 이유에는 이름이 있었다. 배분이라고 했다. 그것을 정하는 관청이 벨류엔에 있었고 이름은 운용국이었다. 운용국의 장에게는 그 숫자를 정할 권한이 있었으며 권한을 쓰기 위한 장부가 따로 있었다. 장부에는 전선 유지 필요치와 보충 요구량과 양성 예산이 항목별로 나뉘어 적혔다. 그 어느 항목에도 열두 살짜리가 하루에 몇 냥을 먹는지를 적는 칸은 없었다. 그런 칸은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합계였다.

켈리는 그 관청의 이름을 몰랐다. 국장이라는 직책이 있는 줄도 몰랐고 자기 몫을 누가 정하는지 열두 해 동안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묻지 않은 것은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물어도 되는 종류의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그날 밤 켈리가 알게 된 것은 정확히 하나였다. 모자란 것과 안 준 것은 다르다.

그 둘을 가르는 말을 켈리는 아직 몰랐다. 아는 데는 시간이 더 걸렸고, 그 말을 처음으로 소리 내어 쓰게 되는 것은 이 밤으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다.

이튿날 아침에 수레를 보았다.

길이 큰길과 만나는 자리에서였다. 일행이 그 어귀에 다다랐을 때 오른쪽에서 수레 행렬이 들어오고 있었으므로 길가로 비켜서서 기다렸다. 수레는 모두 같은 크기였고 소 두 마리씩이 끌었으며 위에 삼베를 덮고 밧줄로 눌러 두었다. 세어 보니 열네 대였다.

바퀴가 깊이 파였다. 무거운 것이었다.

"북쪽 것입니다."
니카가 말했다.
"어떻게 알아."
"저기 옆판에 표시 보이시죠. 네모 안에 빗금 두 개요. 저게 자플랜 조달청 겁니다. 저 표시가 있으면 국경까지 통행료가 면제됩니다."
"밀이야?"
"밀입니다. 작년 것이요. 창고에서 나온 겁니다."

행렬이 지나가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열네 대가 다 지나가고 먼지가 가라앉을 무렵에 왼쪽에서 다른 행렬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열아홉 대였다.

옆판의 표시가 달랐다. 네모가 아니라 둥근 테두리였고 안에 가로줄이 세 개 그어져 있었다. 켈리는 그 표시를 알고 있었다. 병참 수레에 그것이 찍혀 있었다. 열두 해 동안 아주 여러 번 보았고, 그 표시가 온 날은 건량이 나오는 날이었으며, 그것이 오지 않는 날은 나오지 않는 날이었다.

켈리가 그 자리에 서서 그 수레들을 보았다.

두 행렬이 같은 어귀에서 갈라졌다. 하나는 북쪽으로 가고 하나는 남동쪽으로 갔다. 같은 창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같은 흙에서 자란 것이었고 같은 사람들이 실었으며 삼베까지 같은 것이었다. 갈라지는 자리에서 두 행렬의 마부들이 서로 인사를 했다.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저거 둘 다 같은 데서 온 거야?"
"같은 창고입니다."
니카가 말했다.
"아침에 북쪽 것 싣고 낮에 동쪽 것 싣습니다. 바쁠 때는 번갈아 싣고요."
"싸우는 데 아니야? 저 둘."
"싸웁니다."
"근데 같은 데서 사?"
"여기 말고 살 데가 없으니까요."

길가에 곡물 중개인이 나와 서 있었다. 오십쯤 된 남자였고 장부를 옆구리에 끼고 수레를 세고 있었다. 그가 일행을 흘끗 보았다가 다시 세었다. 길에 낯선 사람이 서 있는 것에 익숙한 얼굴이었다.

켈리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바르트가 부르려다 말았다.
"아저씨."
중개인이 고개를 들었다.
"뭔가."
"저거 둘 다 아저씨가 파는 거예요?"
"그렇지."
"둘이 싸우는데요."
"싸우지."

켈리가 잠깐 말을 찾았다.
"누가 이기면 좋겠어요."

중개인이 켈리를 보았다. 그는 그 질문을 처음 받는 것이 아니었다. 길에는 사람이 지나가고 지나가는 사람 중에는 매년 몇 명씩 그것을 묻는 사람이 있다. 대개는 젊고 대개는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고 싶게 생겼으며 대개는 대답을 듣고 나서 얼굴이 굳는다. 그는 그 얼굴들을 여러 번 보았으므로 이제 대답을 줄여서 했다.
"안 이기면 좋겠네."
"예?"
"어느 쪽도 안 이기고 길게 하면 좋겠다고."
그가 장부를 고쳐 끼었다.
"이기면 끝나거든. 끝나면 이만큼 안 사."

그러고는 다시 수레를 세었다.

켈리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수레는 계속 지나갔다. 바퀴가 돌 때마다 자국이 조금씩 더 깊어졌고 소가 숨 쉬는 소리가 났으며 삼베 밑에서 마른 알갱이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켈리가 아는 소리였다. 건량 자루를 옮길 때 나는 소리와 같았다.

길게 하면 좋겠다는 말의 뜻은 어렵지 않았다. 켈리는 그것을 바로 알아들었다. 알아듣는 데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말을 한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중개인은 수레를 세고 있었고 세는 솜씨가 좋았으며 마부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켈리가 아는 나쁜 사람은 때리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아무도 때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켈리가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뒤에 아무도 묻지 않았고 켈리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이후로 켈리는 수레를 볼 때마다 옆판을 먼저 보게 되었다. 그것이 습관이 되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행렬이 다 지나가고 일행이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바르트가 노트를 펴서 한 줄을 적었다. 적고 나서 오래 들여다보았다.

적힌 것은 이랬다. 「로엔. 밀 한 이랑 = 사람 하나 열두 해. 이랑 수 미상.」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적을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떠오른 말이 숫자가 아니어서였다. 바르트 뮐렌은 숫자가 아닌 것은 노트에 적지 않는 사람이었다. 30년 동안 그랬고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것이었다.

한참 뒤에 켈리가 옆으로 왔다.
"아저씨."
"어."
"제가 먹은 거요."
"어."
"그거 없어서 못 먹은 거예요, 안 줘서 못 먹은 거예요?"

바르트가 걸음을 늦췄다. 늦춘 것은 대답을 고르기 위해서였는데, 고를 것이 두 개밖에 없었고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는 거짓말이었고 하나는 그가 증명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도 몰라."
"모르면요."
"모르면 물어봐야지."
"누구한테요."

바르트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에 이름을 대 줄 수 있으려면 벨류엔 마법청의 직제를 알아야 했고,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으며, 아는 사람은 이 대륙에 몇 되지 않았다. 아는 사람들은 전부 그 안에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밀밭이 양쪽으로 계속되었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초록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밀렸다. 켈리는 그 물결을 보지 않았다. 앞을 보고 걸었다. 한 걸음마다 마른 흙이 발밑에서 부서졌고 그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켈리가 그날 물어본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곡물 중개인에게 물었고 하나는 바르트에게 물었으며, 둘 다 대답을 얻지 못했다. 얻지 못한 채로 남았다는 것을 켈리는 그날 밤에도 잊지 않았다.

그것이 이 여정에서 바뀌기 시작한 것들 가운데 가장 작고 가장 오래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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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너무 많다


타르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열하루째 오후였다. 먼저 보인 것은 도시가 아니라 길이었다. 그때까지 걸어온 길은 수레바퀴 자국이 난 흙길이었는데, 어느 지점부터 그 길에 돌이 깔려 있었다.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촘촘히 박아 놓은 것이었고 폭이 수레 세 대가 나란히 갈 만했다. 켈리가 발로 한 번 굴러 보았다. 소리가 났다. 흙에서는 나지 않던 소리였고, 발바닥으로 올라오는 느낌도 달랐다. 열하루 동안 켈리의 발은 무른 땅에 익숙해져 있었다. 무른 땅은 밟으면 조금 가라앉았다가 발을 놓아주는데, 이 돌은 가라앉지 않고 그대로 받아쳤다. 무릎이 먼저 그것을 알아차렸다.

"여기서부터 저쪽 거야."
바르트가 말했다. 켈리는 저쪽이 어디인지 물으려다 말았다. 요즘 켈리는 물어볼 것을 하나씩 뒤로 미루는 버릇이 생겼는데, 미루는 이유는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열하루 동안 켈리가 본 적 없는 것이 하루에 두세 개씩 나왔다. 물레방아를 봤고 우물에 달린 두레박을 봤고 소가 끄는 쟁기를 봤다. 그것을 전부 물으면 걷는 시간보다 묻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았고, 그래서 켈리는 나중에 물을 것을 머릿속에 쌓아 두기 시작했다. 쌓아 두는 것은 처음 해 보는 일이었다. 여태 켈리의 머릿속에는 쌓아 둘 자리가 없었다.

돌길을 따라 두 시간을 더 가자 성벽이 나왔다. 성벽은 높지 않았다. 켈리가 아는 성벽은 회랑의 방어 토루였고 그것은 사람 키의 세 배쯤 되었는데, 여기 것은 두 배가 될까 말까 했다. 대신 길었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성벽 위에 사람이 서 있지 않았다. 켈리가 그것을 한참 보았다. 벽이 있으면 위에 사람이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켈리가 아는 규칙이었다. 벽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고 지키려면 서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고, 대신 벽 아래 문 앞에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줄을 보자 켈리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발이 그쪽으로 갔다. 등이 펴졌고 두 손이 앞으로 모였고 시선이 정면보다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줄의 맨 뒤에 가서 섰다. 앞사람과의 간격은 한 걸음 반이었다. 그것이 정확한 간격이었다. 육성소에서는 한 걸음 반이었고 전선에서도 한 걸음 반이었으며 그보다 가까우면 지적을 받았다. 지적은 대개 이름을 부르는 대신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고, 두 번 치면 그날 저녁에 벌이 있었다.

"자네 뭐 해."
바르트가 뒤에서 물었다.
"줄 섰어."
"무슨 줄인지 알아?"
켈리가 앞을 보았다. 앞사람의 등이 있었고 그 앞에도 등이 있었고 그 끝에 문이 있었다. 문 앞에 탁자가 있고 탁자 뒤에 사람이 둘 앉아 있었다.
"…몰라."
"그럼 왜 섰어."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줄이 있으면 선다. 그다음에 무엇을 주든 받는다. 그것은 이유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유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줄을 섰고 그중 어느 줄에서도 이게 무슨 줄이냐고 물은 적이 없었으며, 물은 아이를 본 적도 없었다.

바르트가 옆에 와서 같이 섰다.
"뭐, 이 줄은 맞긴 해."
"맞아?"
"성문 통과 줄이야. 어차피 서야 돼."
켈리가 조금 안심했다. 안심했다는 것을 본인은 몰랐고, 다만 어깨가 한 치쯤 내려갔다. 줄은 생각보다 길었고 천천히 줄었다. 앞에는 짐수레가 둘 있었고 그 사이에 걸어서 온 사람들이 끼어 있었다. 수레는 안을 들여다보는 데 시간이 걸렸고 사람은 금방 지나갔다. 켈리는 그 차이를 세어 보았다. 수레 하나에 여덟 숨, 사람 하나에 두 숨쯤이었다. 세는 동안 기다리는 것이 덜 길게 느껴졌다. 기다릴 때 뭔가를 세는 버릇은 저울 줄에서 생긴 것이었다. 앞에 몇이 남았는지를 세면 자기 차례까지 몇 숨인지가 나왔고, 그 숫자가 있으면 견딜 만했다.

탁자 앞에 왔을 때 앉아 있던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입시세 둘."
바르트가 동전 두 개를 놓았다. 남자가 그것을 쓸어 담고 옆으로 고갯짓을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름도 묻지 않았고 어디서 왔는지도 묻지 않았고 짐도 열어 보지 않았다. 켈리가 문을 지나면서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저 사람 아무것도 안 물어봤어."
"물어볼 이유가 없으니까."
"왜 없어."
"돈 냈잖아."
켈리는 그 논리를 따라가 보려고 했다. 돈을 내면 묻지 않는다. 그러면 돈을 안 낸 사람에게는 묻는 것인가. 아니면 돈이 곧 대답인가. 두 번째 쪽이 맞는 것 같았는데, 맞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했다. 대답은 말로 하는 것인데 동전은 말이 아니었다.

실은 두 번째가 맞았다. 타르실의 성문은 사람을 가려 들이는 곳이 아니라 수를 세어 값을 받는 곳이었고, 값을 낸 자에게 더 묻지 않는 것이 이 도시가 육십 년 동안 지켜 온 거의 유일한 원칙이었다. 상인의 도시에서 출신을 캐기 시작하면 배가 들어오지 않는다. 켈리가 그날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원칙 덕분이었으며, 사흘 뒤에 명부에 이름이 오르게 되는 것도 같은 원칙 때문이었다. 묻지 않는 도시는 그 대신 적는 도시였다. 켈리는 그 생각을 머릿속의 쌓아 두는 자리에 넣었다. 그 자리가 요즘 빠르게 차고 있었다.

문 안쪽 벽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여러 장이었다. 어떤 것은 새것이고 어떤 것은 비에 젖었다 말라 우글쭈글했다. 글자가 있는 것도 있고 그림이 있는 것도 있었다. 켈리가 지나가면서 그것을 읽었다. 읽을 수 있는 것만 읽었다. 배를 구한다는 것, 짐꾼을 구한다는 것, 소를 잃어버렸다는 것. 소를 잃어버렸다는 종이에는 소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다. 그리고 오른쪽 끝에 다른 종이보다 빳빳한 것이 하나 있었다.

켈리가 걸음을 늦췄다. 그 종이에는 그림이 없었고 글자만 있었다. 윗줄이 굵었고 아랫줄이 가늘었다. 굵은 쪽에 네 글자가 있었다. 분실 자산. 그 아래 줄에 회수 협조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로는 글씨가 작아져서 읽기 어려웠다. 맨 아래에 도장이 찍혀 있었다. 둥근 도장이었고 안쪽에 뭔가가 새겨져 있었는데 켈리는 그 문양을 알았다. 원 안에서 실이 뻗어 나오는 모양이었다. 켈리의 외투 안쪽 가슴에도 같은 것이 은실로 수놓여 있었고, 그것은 지난 이십일 일 동안 한 번도 바깥 공기에 닿지 않았다.

"가자."
바르트가 켈리의 팔꿈치를 잡았다. 그는 이미 그 종이를 봤고 봤다는 티를 내지 않았으며 켈리가 그 앞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도 세고 있었다. 셋을 세고 나서 팔꿈치를 잡았다. 그보다 오래 서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이쪽을 볼 것이었다. 남의 눈에 걸리는 것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오래 보느냐라는 것을 그는 북쪽에서 빠져나오던 해에 배웠다. 그 요령이 그를 두 번 살렸고, 두 번 다 그는 자기가 살아난 줄도 모르는 채로 지나갔다. 켈리가 따라 걸었다. 걸으면서 외투 앞섶을 한 번 만졌다. 단추가 목까지 채워져 있었다.

타르실 안쪽은 소리부터 달랐다. 켈리가 아는 소리는 종류가 많지 않았다. 망치 소리, 점호 소리, 발소리, 배식 줄이 움직이는 소리. 전부 한 번에 하나씩 나는 소리였다. 소리가 두 가지 이상 겹치는 일은 드물었고, 겹치면 대개 무슨 일이 난 것이었다. 여기서는 그 전부가 동시에 났다. 수레바퀴가 돌길을 지나가고 어딘가에서 쇠를 두드리고 누가 소리쳐 부르고 다른 누가 웃고 개가 짖고 문이 닫히고 그릇이 부딪혔다. 소리가 겹치면 하나하나를 골라낼 수 없다는 것을 켈리는 처음 알았다. 골라내려고 애쓰다가 머리가 아파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 많았다. 켈리는 그 표현을 정확히 쓸 수 있었다. 많다는 것은 셀 수 있는 것이 셀 수 없을 만큼 있다는 뜻인데, 켈리는 여태 사람을 세면서 살았다. 제4마도대에 마법사가 스물몇이었고 그 숫자가 계속 바뀌었으므로 매번 세었다. 막사 스무 채에 사람이 몇인지도 대략 알았다. 육성소에서는 한 방에 열둘이었고 그것은 삼 년 내내 열둘이었다. 그런데 이 길에는 그보다 많은 사람이 한 번에 있었고, 세려고 하면 센 사람이 움직여서 다시 세어야 했다. 켈리는 두 번 세다가 그만두었고, 그만두고 나서 속이 조금 불편해졌다. 셀 수 없는 것이 눈앞에 있는 상태를 켈리의 몸은 견디기 어려워했다.

문제는 세는 것이 아니라 걷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무 대형도 이루지 않고 걸었다. 이쪽으로 가는 사람과 저쪽으로 가는 사람이 섞여 있었고 누가 앞인지 뒤인지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간격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둘은 어깨가 닿을 만큼 붙어서 걸었고 어떤 사람은 혼자 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걸었다. 켈리는 그 사이에 들어가서 세 걸음을 걷고 멈췄다. 앞에서 사람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두 걸음을 걷고 또 멈췄다. 이번에는 옆에서 왔다. 켈리가 아는 규칙으로는 앞에서 오는 사람이 있으면 서서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행군 대열이 마주치면 계급이 낮은 쪽이 비켜선다. 켈리는 늘 낮은 쪽이었다.

뒤에서 누가 켈리의 등에 부딪혔다. 부딪힌 쪽이 뭐라고 하고 지나갔다. 켈리가 그쪽을 보았다. 잘못한 것이 자기인지 상대인지 알 수 없었다. 줄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줄에서는 앞사람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서면 섰다. 그게 전부였고 그래서 틀릴 일이 없었다. 틀릴 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 것이었는지를 켈리는 그 길 한가운데에서 처음 알았고, 알고 나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편했다고 생각한 것이 이상했다.

제도가 사람에게서 맨 먼저 가져가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판단이다. 판단을 오래 빼앗긴 자는 그것을 돌려받는 순간을 안도가 아니라 불편으로 느끼며, 불편하다는 이유로 스스로 돌려주려 든다. 켈리의 몸은 열두 해 동안 틀릴 일이 없는 세계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 세계는 켈리를 열일곱 번 내보냈고 매번 며칠씩을 가져갔으나, 적어도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를 두고 켈리를 곤란하게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 번째로 부딪혔을 때 바르트가 돌아와서 켈리의 손목을 잡았다.
"이러다 저녁까지 못 가겠네."
"사람이 계속 와."
"오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어."
바르트가 잠깐 켈리를 보았다.
"자네 지금 저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고 있었어?"
"어."
"전부?"
"어."
바르트가 손목을 잡은 채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보지 마. 앞만 봐. 부딪히면 부딪히는 거고."
"부딪히면 어떻게 돼."
"어떻게 되는 건 없어."
켈리는 그 대답이 제일 어려웠다. 아무것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말이었다. 켈리가 아는 세계에서 무언가가 어긋나면 반드시 뒤에 무엇이 왔다. 지적이 오거나 벌이 오거나 그날 배식이 줄었다. 아무것도 안 오는 어긋남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며칠 전 파인 땅에서 한 번 들었고 오늘 또 들었다. 두 번 들었으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바르트가 쇳조각을 판 곳은 항구 안쪽의 좁은 골목이었다. 문 위에 간판이 없고 대신 벽에 쇠붙이 몇 개가 못으로 박혀 있었다. 그것이 간판인 모양이었다. 안에 들어가자 사람이 하나 앉아 있었고 바르트가 자루를 내려놓았다. 그다음부터는 긴 이야기가 오갔다. 켈리는 절반쯤 알아들었다. 이건 어디서 난 것이냐, 폐허다, 어느 폐허냐, 말할 수 없다, 그러면 값을 깎겠다, 깎으면 다른 데로 가겠다, 다른 데 가면 이것도 못 받는다, 그럼 둘 다 손해다. 그런 식이었다. 중간에 주인이 자루에서 쇳조각 하나를 꺼내 손톱으로 긁고 혀로 대 보고 불빛에 비춰 보았다. 그 동작이 어딘가 바르트와 닮아 있었다.

켈리는 그 이야기가 싸움인 줄 알았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목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했는데 둘 다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상대를 깎는 일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날 배웠다. 값이라는 것이 물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는데, 그 생각을 붙잡아 두기에는 가게 안이 너무 답답했다.

밖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켈리가 골목으로 나왔다. 나와서 벽에 기대어 섰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고 땅을 보았다. 땅을 보고 있으면 사람이 몇 명 지나가는지 세지 않아도 되었다. 돌바닥 틈새에 뭔가가 자라 있었다. 풀이었다. 돌을 이렇게 촘촘히 박아 놓았는데도 틈이 있었고 그 틈으로 풀이 나왔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때 골목 끝에 줄이 있었다.

열 명쯤이 벽을 따라 서 있었다. 간격이 일정했다. 켈리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무엇을 주는 줄인지 보려고 앞쪽을 살폈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켈리는 맨 뒤에 가서 섰다. 등을 펴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시선을 정면보다 조금 아래에 두었다. 간격은 한 걸음 반이었다.

줄은 천천히 줄었다. 여덟 명이 남고 여섯이 남고 넷이 남았다. 켈리는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은 켈리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앞사람이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켈리를 보고 다시 앞을 봤다가 또 한 번 돌아보았다. 두 번째에는 조금 오래 보았다. 켈리는 그 시선이 무엇을 재는 것인지 몰랐고, 모르는 채로 자세를 유지했다.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시선에 대한 정답이라고 몸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켈리 뒤에 누가 와서 섰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왔다. 켈리가 서 있었으므로 거기가 줄의 끝인 줄 알았던 것이다. 켈리는 뒤에 사람이 붙은 것을 알았고 알고 나서 등을 조금 더 폈다. 줄이 길어지면 자기 차례가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가 든든해지는 것이었다. 앞에 넷이고 뒤에 둘이면 그 줄 안에서 켈리의 자리는 확실했다.

바르트가 찾으러 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골목을 두 번 오가고 나서야 그 줄에서 켈리를 발견했고, 발견하고 나서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본 것은 마른 여자애 하나가 자세를 완벽하게 잡고 서 있는 것과, 그 뒤로 두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서 있는 것이었다.
"켈리."
켈리가 돌아보았다.
"거기서 뭐 해."
"줄 있어서."
"무슨 줄인지 봤어?"
켈리가 앞을 보았다. 앞의 세 사람 너머로 이제는 보였다. 나무 문이 하나 있고 그 옆에 통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통에 동전을 넣고 문으로 들어갔다.
"…몰라."
"저건 뒷간이야."
"…"
"돈 내고 들어가는 뒷간."
켈리가 줄에서 나왔다. 나오면서 앞사람이 한 걸음 앞으로 갔고 간격이 메워졌다. 켈리는 그 메워지는 것을 보았다. 자기가 빠져도 줄은 그대로였다. 뒤에 섰던 둘 중 하나가 켈리를 따라 나왔고 하나는 그냥 남았다. 남은 쪽은 아마 원래 볼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르트가 앞서 걷다가 한 번 돌아보았다.
"자네 줄 보면 다 서?"
"어."
"왜."
켈리가 그 질문에 대답하려고 했다. 대답이 없지는 않았다. 줄을 서면 그다음이 있다. 무언가를 받거나 어딘가로 가거나 무엇을 하라는 말을 듣는다. 줄을 서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열두 해 동안 켈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줄을 선 뒤에 일어났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전부 그랬다. 줄 밖에서 켈리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말로 만들려니 문장이 되지 않았다.
"…그냥."
바르트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그날 저녁 노트에 한 줄을 적었고 그 줄은 이랬다. 줄을 보면 선다. 무슨 줄인지 묻지 않는다.

항구는 골목을 빠져나오자 바로 나왔다. 나무로 짠 긴 부두가 있었고 배가 여섯 척 묶여 있었다. 배는 켈리가 생각한 것보다 컸다. 짐수레 스무 대를 실어도 남을 것 같았고 돛대가 성벽보다 높았다. 사람들이 널빤지를 오르내리며 자루를 옮기고 있었다. 자루 하나를 두 사람이 드는 것도 있고 혼자 지는 것도 있었는데, 혼자 지는 쪽은 허리를 굽히지 않고 무릎으로 들어 올렸다. 켈리가 그 동작을 알아보았다. 모래주머니를 들 때 그렇게 들었다. 잘 들면 허리가 안 나간다.

그 너머에 물이 있었다. 켈리가 걸음을 멈췄다. 이번에는 사람 때문이 아니었다.

물은 끝이 없었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끝이 있었는데 앞쪽으로는 없었다. 회색이었고 움직이고 있었으며 움직이는 방식이 개울과 달랐다. 개울은 한쪽으로 흘렀다. 이것은 한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동시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소리가 났다. 계속 났고 멈추지 않았다. 켈리가 아는 소리 중에 멈추지 않는 것은 없었다. 망치도 멈추고 점호도 끝나고 발소리도 그친다. 이 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그치지 않는 소리가 있다는 것이 켈리에게는 소리 자체보다 이상했다.

냄새도 났다. 켈리가 코로 두 번 들이마셨다. 소금이었다. 며칠 전에 3돈을 주고 산 것과 같은 냄새였다. 켈리는 그 자루를 등에 지고 열흘을 걸었고 그것이 한 줌씩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냄새가 공기에 그냥 퍼져 있었다. 값이 붙은 것이 공짜로 퍼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켈리는 잠깐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한 번 더 들이마셨다.

"저거 다 물이야?"
"다 물이야."
"어디까지."
바르트가 옆에 와서 섰다.
"저쪽 끝에 또 땅이 있어. 거기도 사람 살고."
"얼마나 가야 돼."
"배로 스무 날쯤."
켈리가 그 숫자를 들었다. 스무 날. 걸어서 열하루를 온 것이 이 도시까지였고, 배로 스무 날을 가면 또 땅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땅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켈리는 며칠 전에 흙바닥에서 동그라미 다섯 개를 보았고 그것이 세상 전부인 줄 알았다. 그 동그라미들은 이 물의 이쪽에 있었다. 이쪽이 있으면 저쪽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때 처음 계산해 보았고, 계산해 보니 세상이 흙바닥에 그려진 것보다 훨씬 컸다.

"저 배는 어디로 가."
"저건 곡물선이니까 로엔 쪽에서 왔을 거고. 나가는 건 남쪽으로 가."
"남쪽에 뭐 있어."
"나도 안 가 봤어."
켈리가 바르트를 보았다. 안 가 봤다는 말을 이 사람에게서 듣는 것이 처음이었다. 바르트는 여태 켈리가 묻는 것에 대개 답을 갖고 있었고, 답이 없을 때는 모른다고 했는데 그것도 아는 사람이 모른다고 하는 투였다. 안 가 봤다는 것은 달랐다. 그것은 이 사람에게도 바깥이 있다는 뜻이었다.

켈리가 한참 서 있었다. 바르트가 재촉하지 않았다. 해가 물 위로 낮게 떨어지고 있었고 물이 그 빛을 받아 군데군데 번졌다. 켈리는 번지는 자리를 보았다가 번지지 않는 자리를 보았다가 했다. 번지는 자리는 계속 옮겨 다녔다. 같은 자리에 두 번 오지 않았다. 켈리는 그것을 세어 보려고 하다가 세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었다. 오늘 세는 것을 그만둔 것이 세 번째였고, 그만두고 나서 속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날 밤은 항구 뒤편의 삯방에서 잤다. 하룻밤에 셋이었고 그 값에 짚 매트리스와 담요 한 장과 문 하나가 딸렸다. 문이 딸렸다는 것이 켈리에게는 새로웠다. 헛간에는 문이 있었지만 그 문은 안에서 잠기지 않았다. 여기 것은 안쪽에 나무 빗장이 있었다. 바르트가 그것을 걸었고 켈리가 그 동작을 보았다.
"왜 잠가."
"여긴 사람이 많으니까."
"사람 많으면 잠가?"
"많으면 그중에 나쁜 놈도 있지."
"몇이나."
바르트가 잠깐 웃었다.
"그건 나도 몰라. 그래서 잠그는 거야."
켈리가 그 말을 곱씹었다. 몇인지 모르기 때문에 잠근다는 것이었다. 켈리가 아는 대비는 전부 숫자에서 나왔다. 적이 몇이면 이쪽은 몇을 세우고, 며칠 치가 남았으면 하루에 얼마씩 먹는다. 숫자를 모르는 채로 대비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들었다.

바르트가 쇳조각을 판 값은 일곱 냥 너 돈이었다. 켈리가 그 숫자를 듣고 잠깐 셈을 했다. 하루에 예닐곱 돈을 쓰면 열흘이 넘었다. 처음으로 셈이 넉넉하게 나왔고, 넉넉하게 나왔는데도 켈리는 그 숫자를 두 번 더 확인했다.
"여기서 며칠 있을 거야."
"왜."
"살 게 있어. 그리고 읽을 것도 좀 있고."
바르트가 노트를 펴면서 말했다.
"여기 서고가 하나 있거든. 돈 내면 들어가서 볼 수 있어."
"책 보는 데 돈을 내?"
"내지."
"얼마."
"하루에 닷 돈."
켈리가 눈썹을 조금 움직였다. 닷 돈이면 빵 두 개 반이었다. 켈리는 책이라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마법청 서기가 들고 다니는 것이 있었고 그것은 얇았다. 그 얇은 것을 하루 보는 데 빵 두 개 반을 낸다는 계산이 잘 서지 않았다.
"뭐 읽는데."
"잉여 얘기."
켈리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바르트를 보았다.
"자네가 터뜨리면 나가는 게 있잖아. 그게 어디로 가는지."
"그거 아직도 봐?"
"보지."
바르트가 노트를 덮었다.
"자네는 그게 그냥 없어진다고 했고 나는 없어지는 건 없다고 했는데, 둘 중 하나는 틀렸을 거 아냐. 그럼 확인을 해야지."

등불이 꺼지고 나서 켈리는 오래 깨어 있었다. 삯방은 벽이 얇아서 옆방 소리가 들렸고 아래층에서는 아직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다. 그 소리가 켈리에게는 낯설었는데, 낯설다고 해서 싫은 것은 아니었다. 소등 뒤에 소리가 나는 것은 규칙 위반이었고 위반이면 누가 와야 하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 밤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스무 날째 겪는 중이었고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누워서 켈리는 성문 안쪽에 붙어 있던 종이를 다시 떠올렸다.

「회수」는 아는 말이었다. 열다섯 살에 처음 듣고 삼 년을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때 누가 설명해 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말이 나온 뒤에 어떤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고, 그다음에 또 그 말이 나왔고 또 누가 돌아오지 않았다. 세 번째쯤부터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켈리는 그 말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말 뒤에 오는 것을 아는 쪽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더 알려고 하면 물어야 하는데 그것은 물어도 되는 항목이 아니었다.

모르는 것은 앞에 붙은 네 글자였다. 분실 자산. 글자는 읽혔고 뜻도 짐작이 갔다. 잃어버린 재산이라는 말이었다. 창고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그렇게 적는다. 켈리는 보급 문서에서 그 표기를 본 적이 있었다. 담요 두 장이 없어졌을 때 그렇게 적혔고, 그 아래에 담당자가 변상한다는 줄이 붙었다.

그 네 글자가 왜 「회수」 앞에 붙어 있는지를 켈리는 몰랐다. 둘을 이어 붙이면 문장이 하나 나온다는 것도, 그 문장의 주어가 자기라는 것도 몰랐다. 벨류엔의 문서를 읽는 데에는 요령이 하나 있었다. 사람에게 쓰는 말과 물건에 쓰는 말이 같은 난에 들어앉아 있을 때, 그 난이 사람 쪽인지 물건 쪽인지는 맨 아래 처리란을 보아야 알 수 있다. 처리란은 언제나 글씨가 가장 작은 자리에 있었고, 켈리는 거기까지 읽지 않았다.

몰랐으므로 그날 밤 켈리는 잘 잤다.

 

확률이 낮았을 뿐


바르트가 서고에 간 것은 타르실 둘째 날 아침이었다. 그는 나가기 전에 켈리에게 세 가지를 말했다. 첫째, 점심때쯤 돌아온다. 둘째, 이 동전 다섯 개로 뭐든 사 먹어라. 셋째, 멀리 가지 마라. 켈리가 세 가지를 다 듣고 알겠다고 했다. 바르트가 문을 열다 말고 한 번 돌아보았는데, 돌아본 이유는 알겠다는 대답이 너무 정확하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깐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나갔다. 나가면서 그가 생각한 것은 자기가 방금 세 가지를 명령처럼 말했다는 것이었고, 그 생각은 서고에 도착할 때까지 그를 따라왔다.

켈리는 동전 다섯 개를 오른손에 쥐었다. 쥐고 나서 주머니에 넣을까 하다가 그대로 쥐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으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려고 계속 만져야 하는데, 손에 쥐고 있으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동전은 얇고 차가웠다가 곧 손바닥 온도가 되었다. 켈리는 짚 매트리스에 앉아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은 잘하는 일이었으므로 특별히 힘들지 않았다. 창밖으로 항구 쪽이 보였고 종탑이 하나 서 있었다. 종은 정시마다 울렸다. 여덟 시에 여덟 번 울렸고 아홉 시에 아홉 번 울렸다. 켈리는 그 규칙을 알아내고 나서 조금 편해졌다. 시각을 알려 주는 것이 있는 도시는 그렇지 않은 들판보다 나았다. 전선에도 시보가 있었다. 여기 종은 그것보다 소리가 길게 끌렸다.

열 번이 울리고 열한 번이 울렸다. 그 두 시간 동안 켈리가 한 일은 네 가지였다. 지팡이를 무릎에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살펴보았다. 흠은 없었다. 담요를 접었다가 폈다가 다시 접었다. 세 번 접으면 네모가 되고 네 번 접으면 더 작은 네모가 되는데 네 번 접은 쪽이 보기 좋았다. 손바닥을 펴서 동전이 다섯 개인지 확인했다. 다섯 개였다. 그리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세었다. 스물아홉까지 세다가 같은 사람이 두 번 지나가는 바람에 다시 세었고, 두 번째에는 마흔넷에서 놓쳤다.

열한 번이 울린 뒤에 배가 고파졌다. 고픈 것에는 익숙했으나 요즘은 하루에 세 번쯤 먹는 것이 보통이 되어 있었고, 몸이 그 보통에 벌써 적응한 모양이었다. 켈리는 그것이 조금 억울했다. 며칠 먹었다고 몸이 더 자주 보채는 것이 계산에 맞지 않았다. 열두 해 동안 두 번씩 먹었을 때는 두 번에 맞춰 고팠는데, 세 번으로 바뀌는 데는 스무 날도 걸리지 않았다. 몸이 그렇게 빨리 편한 쪽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켈리에게는 새로웠고, 새로우면서 조금 불안했다. 다시 두 번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오면 그때는 더 힘들 것 같았다.

켈리가 일어섰다. 밖에 나가는 것은 세 번째 항목에 어긋나지 않았다. 멀리 가지 말라고 했지 나가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켈리는 그 구별을 해 보고 나서 자기가 방금 구별이라는 것을 했다는 사실에 잠깐 멈췄다. 전에는 이런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말한 것만 했고 말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았으며 그 사이에 뭐가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말과 말 사이에 빈자리가 있고 그 빈자리는 자기가 채워도 된다는 것이, 켈리가 이 도시에서 배운 것 중 가장 위험한 것이 되었다.

골목으로 나가자 냄새가 났다. 빵집이었다. 켈리가 그 앞에 가서 섰다. 철판 위에 빵이 있었고 값이 적힌 나무판이 걸려 있었다. 한 개 두 돈. 켈리는 그것을 읽었고 손에 다섯 돈이 있었고 계산은 간단했다. 두 개를 사고 한 돈이 남는다. 그런데 켈리는 거기서 움직이지 못했다.

사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는지를 몰랐다. 저쪽이 먼저 뭘 물어야 하는 것인지, 이쪽이 먼저 동전을 내미는 것인지, 내밀면 어느 손으로 내미는 것인지, 빵을 가리키면서 내미는 것인지 그냥 내밀고 기다리는 것인지. 베렐에서는 바르트가 했고 성문에서도 바르트가 했고 삯방에서도 바르트가 했다. 켈리가 본 것은 그 사람이 동전을 놓는 장면뿐이었고, 그 앞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보지 않았다. 볼 이유가 없었다. 배급 줄에서는 손을 내밀면 얹어 주었다. 그게 전부였고 그 전부가 여기서는 통하지 않았다.

켈리가 손을 반쯤 내밀었다가 도로 내렸다. 내밀면 얹어 줄 것 같았는데 얹어 주지 않으면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사고파는 일에는 말이 필요했다. 무엇을 얼마나 달라고 말하고 값을 묻고 동전을 내미는 순서가 있는데, 그 순서는 어느 나라에서도 문서로 적히지 않는다. 적히지 않는 것은 곁에서 보고 익히는 수밖에 없고, 곁에서 보고 익히려면 어릴 적에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장에 따라가 본 일이 있어야 한다. 켈리에게 여섯 살 이전은 없었다.

빵집 주인이 켈리를 두 번 보았다. 세 번째에 뭐라고 물었는데 켈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항목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켈리가 뒷걸음으로 한 걸음 물러났고, 주인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것이 켈리를 쫓아낸 것인지 그냥 다른 일이 생긴 것인지 켈리는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었으므로 그 자리를 떴다.

골목을 나와 걷다가 켈리가 줄을 보았다. 열두어 명이 벽을 따라 서 있었다. 켈리가 걸음을 늦췄다. 어제 뒷간 일이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먼저 앞쪽을 살폈다. 살펴봤으나 사람 등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다만 줄 끝에서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어딘가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기대하는 얼굴로 줄을 서서 들어가는 곳이 켈리가 아는 것 중에는 하나뿐이었다. 켈리는 그 하나를 떠올렸고, 떠올리고 나니 배가 더 고파졌다.

켈리가 맨 뒤에 섰다. 간격은 한 걸음 반이었다.

줄은 빨리 줄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앞에 탁자가 있고 사람이 하나 앉아 있었는데, 앞사람이 그 앞에서 짧게 뭐라고 하고 들어갔다. 켈리 차례가 왔을 때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이름."
켈리가 대답했다.
"켈리."
"성은."
"없어."
남자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마른 여자애가 서 있었다. 남색인지 뭔지 모를 옷 위에 큰 갈색 외투를 걸쳤고 손에 긴 나무 막대기를 들었으며 표정이 없었다.
"성이 없어?"
"없어."
"…그럼 켈리라고만 적는다."
"어."
남자가 명부에 적었다. 적으면서 한 번 더 켈리를 보았다. 그러고는 턱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켈리가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자기 이름이 종이에 적히는 것을 보았다.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바르트의 노트였고 이번은 이 명부였다. 켈리는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적히는 것이 나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직 켈리에게 없었다. 벨류엔에서 켈리에 관해 적힌 것은 전부 번호였고, 번호는 적혀도 켈리를 찾아오지 않았다. 찾아오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그래서 켈리는 적기와 찾기를 서로 다른 일로 알고 있었으며, 그 둘이 한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앞으로 사흘이 더 걸렸다.

안은 넓지 않았고 어두웠고 사람이 많았다. 가운데에 두꺼운 나무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양쪽에 의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 팔꿈치 자국이 깊게 패어 있었다. 오래 쓴 물건이었다. 사람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고 한쪽 벽에 나무판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 이름과 숫자가 분필로 적혀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보고 배식대를 떠올렸다. 사람이 둘러싸고 있고 이름이 적혀 있고 숫자가 붙어 있었다. 숫자가 붙은 이름은 켈리가 아는 것이었다. 무게를 재면 숫자가 나오고 그 숫자대로 받는다. 여기 숫자도 그런 것이라고 켈리는 짐작했고, 짐작이 절반은 맞았다. 숫자대로 받는 것은 맞았으나 그 숫자가 무게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음. 켈리."

켈리가 앞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갈라졌고 갈라지면서 웅성거렸다. 누가 웃었다. 하나가 웃자 둘이 웃었고 곧 여럿이 웃었다. 켈리가 그쪽을 보았다.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웃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보다가, 보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앞으로 갔다. 웃음은 켈리가 잘 모르는 것 중 하나였다. 육성소에서 아이들이 웃는 일은 있었으나 많지 않았고, 웃을 때는 대개 무엇이 웃긴지 서로 아는 상태였다. 여기서는 웃는 쪽만 알고 웃음을 받는 쪽은 몰랐다. 그것이 사람을 여럿 모아 놓고 웃는 일의 오래된 쓰임이었다. 웃음은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바깥에 있는지를 말 한마디 없이 정해 놓으며, 바깥으로 정해진 쪽은 자기가 언제 정해졌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켈리는 그날 그 방에서 바깥이었고, 바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의자에 앉았다.

배당을 매기는 남자가 켈리를 위아래로 훑고 나무판에 분필로 적었다. 켈리 열둘. 옆의 숫자는 하나였다.
"열두 배."
그 말에 또 웃음이 났다. 몇 사람이 동전을 내밀었다. 재미로 거는 것이었다. 한 돈짜리가 대부분이었고 아무도 진지하지 않았다. 열두 배를 건다는 것은 지지 않을 것 같은 쪽에 거는 사람들이 심심해서 반대쪽에 한 돈을 던지는 일이었고, 그것도 놀이의 일부였다.

탁자 반대편에 앉은 사람은 부두 짐꾼이었다. 목이 굵고 팔뚝이 켈리 허벅지만 했다. 그가 켈리를 보더니 뒤쪽을 향해 뭐라고 했고 또 웃음이 났다. 켈리가 의자에 앉았다. 앉아서 탁자를 보았다.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몰랐으므로 물었다.
"이거 뭐 해."
"팔씨름."
옆에 선 남자가 대답했다. 그는 심판인 모양이었다.
"팔 올려. 손 잡고. 상대 손등 탁자에 붙이면 이기는 거야."
"그게 다야?"
"그게 다야."
켈리가 오른팔을 탁자에 올렸다. 짐꾼이 손을 내밀었고 켈리가 그 손을 잡았다. 손이 컸다. 켈리의 손이 그 안에 반쯤 들어갔다. 잡고 나서 켈리가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이거 이기면 뭐 줘."
"뭐?"
"이기면 뭐 줘. 밥 줘?"
짐꾼이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웃는 웃음이었다. 앞니가 하나 없었다.
"애야. 여기 밥 안 줘."
켈리가 실망했다. 실망했다는 표시는 나지 않았고 다만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밥을 주는 줄인 줄 알았다. 기대하는 얼굴로 들어가는 곳이 밥 주는 데 말고 또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 순간에 배웠다. 그리고 배운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여기까지 온 이상 이걸 하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줄을 섰으면 차례를 마쳐야 한다. 차례를 안 마치고 나가는 법을 켈리는 배운 적이 없었다.

"시작."

켈리는 시작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은 켈리가 아는 말이었다. 열두 해 동안 그 말 뒤에 오는 것은 언제나 하나였다. 걸고 달리고 하라는 대로 한다. 무엇을 걸어야 하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랐으나 걸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걸지 않고 시작하는 훈련은 벨류엔에 없었다.

그래서 켈리는 걸었다.
오른팔 안쪽에서 무언가가 밀려 올라왔다. 어깨에서 팔꿈치로 내려가 손목에서 뭉쳤다. 교범은 그것을 강화의 예비 단계라 불렀고 마법청의 서기들은 단계마다 번호를 매겨 두었으나 켈리는 그 이름을 배운 적이 없었다. 켈리가 아는 것은 다 올라오고 나면 팔이 가벼워진다는 사실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을 쓰면 안 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그 방에서 아무도 켈리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말해 줄 이유가 없었다. 이 방의 누구도 그런 것을 걸 줄 아는 사람이 앉아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짐꾼은 처음에 힘을 주지 않았다. 봐주려고 한 것이었다. 어린 여자애를 상대로 단번에 눕히면 보기 좋지 않으므로 몇 숨쯤 버티다가 천천히 넘길 생각이었고, 그 생각을 할 시간은 있었다. 시작 소리가 나고 나서 한 숨 반 정도였다. 그 한 숨 반이 지나고 그의 손등이 탁자에 닿았다.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짐꾼이 자기 손을 보았다가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여전히 팔을 그 자세로 두고 앉아 있었고 표정이 그대로였다.
"…뭐야 지금."
"끝난 거야?"
켈리가 물었다. 심판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켈리의 팔을 한 번 보았다.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 팔뚝이 가늘었다. 가는데 선이 있었다. 살이 없어서 근육이 그대로 드러난 팔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다른 선이 하나 더 있었다.

피부 밑으로 붉은 실 같은 것이 손목에서 팔꿈치 쪽으로 옅게 번져 있었다. 방이 어두웠고 등불이 탁자 위쪽에만 달려 있었으므로 잘 보이지 않았다. 심판은 부두에서 10년을 일했고 팔뚝을 보는 눈이 있었는데, 그 눈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타르실에는 마법사가 없었다. 회랑에서 천 리 떨어진 항구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남의 팔에서 그 선을 알아볼 방법은 없었다.
그는 그것을 핏줄이라고 생각했다. 힘을 쓰면 핏줄이 선다. 그 설명으로 넘어갔고, 넘어간 뒤로는 다시 보지 않았다.

나무판 앞이 잠깐 소란해졌다. 한 돈을 던졌던 사람들이 열두 돈씩 받아 갔다. 받아 가면서 웃었고 이번 웃음은 아까 것과 종류가 달랐다. 배당을 매기던 남자가 분필로 적힌 것을 지우고 다시 적었다. 켈리 둘. 옆의 숫자는 하나였다.
두 번째 상대는 봐주지 않았다. 그쪽은 첫 판을 봤으므로 처음부터 힘을 썼고, 켈리의 손등이 탁자 쪽으로 반쯤 기울었다. 사람들이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웃음이 아니라 구경하는 소리였다. 켈리는 그 상태에서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이를 악물고 있었고 목에 핏줄이 섰고 어깨가 들려 있었다. 켈리는 그 자세를 보고 한 가지를 알았다. 저 사람은 지금 전부를 쓰고 있었다.

켈리는 절반쯤 걸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을 마저 걸었다.
팔이 한 번 더 뜨거워졌다. 상대의 손등이 탁자에 닿는 데는 두 숨이 걸렸다. 닿고 나서 그가 팔을 빼고 어깨를 주물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무판 앞에서 배당을 매기던 남자가 분필을 든 채로 서 있었다. 그가 한참 서 있다가 켈리의 숫자를 지웠다. 지우고 새로 적지 않았다. 켈리 쪽에 걸 사람이 이제 없을 것이고, 켈리 반대쪽에 걸 사람은 더 없을 것이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에는 값을 붙이지 않는 것이 이 판의 규칙이었다.

세 번째는 하우스가 직접 골랐다. 뒤쪽 방에서 불려 나온 사람이었고 여기서 일하는 자였다. 팔이 짐꾼보다 굵지는 않았는데 손목이 두꺼웠다. 그가 앉으면서 켈리를 한 번 보았고 그 눈에는 웃음이 없었다. 이 사람이 나온 것은 판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두 판이 나갔으면 세 판째는 되찾아야 했고, 되찾지 못하면 오늘 저녁 장부가 맞지 않았다.

켈리도 이번에는 처음부터 다 걸었다. 여태 절반씩 건 이유는 아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를 몰라서였는데, 이제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상대가 얼마나 쓰는지를 보고 그보다 조금 더 걸면 되는 것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그 자리에서 알아냈고, 알아낸 것을 바로 써 보았다.

문제는 그 조금 더가 켈리에게는 조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벨류엔의 교범에는 강화의 단계가 여섯으로 나뉘어 있었다. 아래 셋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 안에 있었고 위 셋은 그 바깥에 있었다. 돌파형에게 가르치는 것은 위 셋이었다. 터지는 자리까지 가는 데 필요한 것이 그것이었기 때문이고, 아래 셋을 쓸 일이 없었으므로 아래 셋은 가르치지 않았다. 켈리가 조절할 줄 아는 눈금은 넷째부터 시작했다.

탁자가 부서졌다.
정확히는 켈리 쪽 모서리가 먼저 갈라졌고 그다음에 상판 가운데가 쪼개졌다. 두꺼운 나무였는데도 그렇게 되었다. 상대의 손등은 탁자에 닿지 못했다. 닿을 탁자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팔이 부러진 상판 사이로 내려갔고 켈리가 손을 놓았다. 나무 부스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상대는 팔을 그대로 든 채 자기 손과 켈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이 일을 육 년 했고 탁자가 부서지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 방에서 소리를 낸 것은 마지막으로 떨어진 나무 조각 하나였다.
켈리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오른쪽 무릎이 한 번 꺾였다가 돌아왔다. 값이 왔다. 세 번을 연달아 걸었고 마지막 것이 컸으므로 그만큼이 어디선가 빠져나갔다. 켈리는 그것을 배고픔으로 셌다. 오늘 받은 것이 다섯 돈이었고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방금 쓴 것이 빵 몇 개어치인지가 저절로 계산되어 나왔다. 계산이 나쁘게 나왔다.

켈리가 부서진 탁자를 보았다. 그리고 심판을 보았다.
"이거 내가 물어야 돼?"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누군가 뒷문 쪽으로 뛰었다. 뒤이어 한 사람이 나무판 앞으로 가서 분필로 적힌 것을 손바닥으로 지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배당을 건 사람들이었다. 열두 배가 한 번 나왔고 두 배가 한 번 나왔으니 받을 것이 있었고, 받을 것이 있는 사람이 여럿이면 소리가 커진다. 나무판을 지우는 쪽과 지우지 말라는 쪽이 붙었고 그 사이에 의자 하나가 넘어졌다.

켈리는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다만 사람들이 자기를 밀치고 지나가고 있었고, 밀치는 것에 대해 이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냥 서 있었다. 서 있으면서 켈리가 생각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아직 밥을 못 먹었다. 둘째, 저 탁자를 물어야 하는지 아닌지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둘 중에 첫 번째가 더 급했다.

그러다 종소리를 들었다. 열두 번이었다. 정오였다. 점심때쯤 돌아온다고 했으니 돌아가야 할 시각이었다.

켈리가 문 쪽으로 갔다. 들어온 문은 사람들이 막고 있었고 반대편에 다른 문이 있었으므로 그쪽으로 갔다. 손잡이를 당겼다. 열리지 않았다. 바깥에서 뭔가로 막아 놓은 모양이었다. 켈리가 한 번 더 당겼고 역시 열리지 않았다.
"나 가야 돼."
아무도 듣지 않았다. 켈리가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과 지워진 나무판과 부서진 탁자가 있었다. 그중 누구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시간 됐어."
켈리가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는 대신 이번에는 앞으로 밀었다. 미는 동안 팔에 또 한 번 걸었다. 문을 부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켈리는 문이 열리기를 바랐고, 밀면 열린다고 생각했으며, 세게 밀면 더 잘 열린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는 틀린 데가 없었다. 다만 켈리가 걸 줄 아는 가장 약한 눈금이 문이 견딜 수 있는 것보다 위에 있었을 뿐이다.

문이 경첩째 뜯어져 나갔다.
문짝이 바깥 골목으로 넘어가 돌바닥에 떨어졌다. 먼지가 났다. 그리고 그 문 뒤쪽 벽에 붙어 있던 것이 같이 딸려 나왔다.

사람이었다. 작았다. 켈리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고 열대여섯으로 보였다. 사내아이였다. 문과 벽 사이 좁은 틈에 들어가 있다가 문이 통째로 없어지는 바람에 몸을 가릴 것이 사라진 참이었다. 주머니가 여럿 달린 옷을 입고 있었고 그중 하나에서 주사위가 두 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쪽이 켈리를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없었다. 켈리도 표정이 없었다. 둘이 잠깐 그러고 있었다. 그 잠깐 동안 주사위 하나가 계속 굴러가다가 돌틈에 걸려 멈췄다.
"저 3할로 잡힐 참이었는데요."
작은 쪽이 말했다. 목소리에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주사위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켈리 옆을 지나 골목 쪽으로 걸어갔다. 세 걸음쯤 가다가 멈추고 돌아보았다.
"같이 가시죠."
"왜."
"혼자 가면 저 7할로 잡혀요. 두 사람이면 4할이고요."
켈리가 그 숫자를 들었다. 7할과 4할. 어느 쪽이 작은지는 바로 알았다. 숫자는 켈리가 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쪽은 혼자 가면 9할입니다."
"왜 나는 9할이야."
"그렇게 생겼으니까요."
작은 쪽이 켈리의 외투와 지팡이와 키를 차례로 가리켰다.
"저 안에서 탁자 부순 사람이 어떻게 생겼냐고 물으면 다들 똑같이 대답할 겁니다. 마른 여자애가 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고요. 이 도시에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몇인데."
"하나요."

켈리가 골목 양쪽을 보았다. 뒤쪽 방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소리가 났다.
"가자."
켈리가 말했다.

작은 쪽이 따라오지 않았다. 골목 입구에 쭈그려 앉아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뭐 해."
"잠깐만요."

주사위 하나를 꺼냈다. 아까 주운 것 중 하나였다. 그것을 돌바닥에 세워 놓고 엄지로 한 번 눌렀다. 누르는 동안 입술이 움직였는데 소리는 나지 않았다. 숫자를 세는 입 모양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보았고, 보면서 저 사람이 지금 뭔가를 세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았다. 무엇을 세는지는 몰랐다.

작은 쪽이 일어섰다.
"됐습니다."

뒷문에서 사람 셋이 뛰어나왔다. 앞선 자가 골목 입구를 돌았다.

넘어졌다.

뒤따르던 자가 그 위로 넘어졌고, 세 번째가 두 사람을 피하려다 벽에 어깨를 박았다. 셋이 한자리에 엉켰다. 하나가 일어서려다 다른 하나의 팔을 밟았고 그쪽이 소리를 질렀다.

켈리가 그 자리를 보았다. 평평한 돌바닥이었다.
"저거 왜 넘어져."
"돌이 있었겠죠."
"없는데."
"그럼 미끄러웠겠죠."

켈리가 바닥을 한 번 더 보았다. 마른 돌이었다. 사흘째 비가 안 왔다. 켈리는 그 두 가지를 알았고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까지 알았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나아가려면 사람이 이유 없이 넘어질 수도 있다는 것 말고 다른 가능성을 알아야 했고, 그런 것을 켈리는 배운 적이 없었다.

작은 쪽이 주사위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몸을 돌렸다. 두 걸음 만에 발을 헛디뎠다. 넘어지지는 않았는데 오른손을 벽에 짚었고, 짚고 나서 그 손목을 잠깐 쥐고 있었다. 숨을 한 번 짧게 들이마셨다.
"…3할로 돌아왔네요."
"뭐가."
"아무것도요."

소매를 내려 손목을 덮었다. 덮는 동안 소매 안쪽이 잠깐 보였다. 천이 감겨 있었다. 새것이 아니었고 여러 번 감았다 푼 것이었으며, 감은 자리가 손목 하나치고는 두꺼웠다.

둘이 골목을 나와 큰길로 접어들었다. 큰길에 들어서자 니카가 걸음을 조금 늦췄다. 뛰면 눈에 띈다고 했다. 켈리가 그 말을 듣고 속도를 맞췄다. 맞추는 것은 요즘 연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근데 왜 숨어 있었어."
"땄거든요."
"많이?"
"아니요. 조금씩 오래요."
니카가 걸으면서 대답했다.
"한 번에 많이 따면 걸립니다. 조금씩 오래 따면 안 걸리는데, 그것도 아주 오래 하면 걸려요. 저는 넉 달 했습니다."
"넉 달이면 오래야?"
"오래죠. 보통 두 달쯤에서 그만둡니다."
"근데 왜 넉 달 했어."
니카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계산이 맞았으니까요."
켈리는 그 대답을 이해했다. 계산이 맞으면 계속하는 것이었다. 계산이 맞는데도 그만두는 이유를 켈리도 잘 몰랐다. 그리고 걸으면서 니카가 한마디를 더 했는데, 묻지도 않은 것을 덧붙이는 투였다.
"저 판에서는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무슨 짓."
"…아니요. 그냥 안 했다고요."
니카가 말을 접었다. 접은 이유는 설명하려면 길어지기 때문이었고, 길어지면 이 사람이 자기를 두고 갈 확률이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니카가 넉 달 동안 지킨 규칙이었다. 판에서는 걸지 않는다. 도망칠 때만 건다. 그 구분을 지키지 않으면 오래 못 간다는 것을 그는 열세 살에 배웠고 그 뒤로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켈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들을 이유가 없었다. 켈리에게는 지켜야 할 그런 구분이 없었고, 없는 이유는 아무도 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벨류엔에서 시작이라는 말이 나오면 거는 것이 순서였고, 거는 자리와 걸지 않는 자리를 나누는 규정은 교범 어디에도 없었다. 나눌 필요가 없었다. 마법사가 마법을 쓰면 안 되는 자리에 가게 되는 경우를 마법청은 상정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한 사람은 판에서 걸지 않아 뒷문 뒤에 숨어 있었고, 한 사람은 판에서 걸어 탁자를 부수었다. 둘이 같은 골목에서 만난 것이 그래서 우연이었는데, 우연이라는 것을 둘 다 나중에야 알았다.

켈리가 물었다.
"아까 주사위는 왜 세웠어."
니카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버릇입니다."
"무슨 버릇."
"세워 놓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버릇이요."
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종류의 것은 켈리도 알았다. 담요는 세 번 접어도 되는데 네 번 접는 쪽이 나았고, 왜 나은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켈리는 더 묻지 않았다.

니카가 켈리를 한 번 보았다. 더 물을 줄 알고 대답을 두 개 더 준비해 두었는데 쓸 데가 없어졌다. 걸으면서 그 두 개를 도로 집어넣었다.

켈리가 물었다.
"이름 뭐야."
"니카 셰르입니다."
"켈리."
"성은요."
"없어."
"그거 좋네요."
니카가 말했다.
"찾기 어렵거든요."
켈리가 그 말을 생각해 보았다. 여태 켈리에게 성이 없다는 것은 없는 쪽이었다. 없는 것에 좋다는 말이 붙은 것은 처음이었다.

바르트는 삯방 앞에 서 있었다. 열두 시 반이었고 켈리는 없었고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가 골목 입구 쪽을 보다가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는 켈리였고 하나는 처음 보는 작은 사내아이였다. 두 사람 다 걸음이 빨랐고 뒤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어디 갔었어."
"줄 섰어."
바르트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또?"
"이번엔 앞에 봤어."
"봤는데?"
"밥 주는 덴 줄 알았어."
옆에서 니카가 말했다.
"밥은 안 주는 데였습니다."
바르트가 그쪽을 보았다.
"댁은 누구요."
"니카 셰르입니다. 이분이 문을 부수는 바람에 같이 나왔습니다."
"…문을."
"문하고 탁자요."
니카가 정정했다.
"탁자가 먼저였고 문이 나중이었습니다."

바르트가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아직 오른손에 동전 다섯 개를 쥐고 있었다. 나가서 아무것도 사 먹지 않았으므로 하나도 줄지 않았다. 손바닥에 동전 모양 자국이 다섯 개 나 있었다. 바르트가 그 손을 한참 보았다. 그가 오늘 아침에 준 것은 다섯 돈이었고 그것으로 빵 두 개를 사고 한 돈이 남았어야 했다. 다섯 개가 그대로 있다는 것은 켈리가 네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그 네 시간 동안 대신 무엇을 했는지는 방금 들었다.

"자네 밥은."
"못 샀어."
"왜."
"사는 법 몰라서."

바르트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배낭을 열고 아침에 남긴 빵을 꺼내 켈리에게 주었다. 켈리가 받아서 먹었다.

받는 손을 그가 보고 있었다. 오른쪽 팔뚝에 아직 선이 남아 있었다. 아까보다 옅어졌고 곧 사라질 것이었는데, 사라지기 전까지는 보였다. 그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지난 석 달 동안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세 번인지 네 번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은 색의 짙기로 가늠해 보면 서너 번쯤이었다.

바르트는 그것을 묻지 않았다. 묻는 대신 켈리가 빵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중에 노트를 펴고 그날 자리에 한 줄을 적었다. 「셋, 혹은 넷. 아침부터 굶음.」 그 아래에 화살표를 그리고 「보충 없음」이라고 적었다.

쓴 만큼을 어디선가 가져와야 하는데 그날 켈리가 가져올 데는 자기 몸밖에 없었다. 그것을 계산으로 확인한 것이 그날이 처음이었고, 확인하고 나서 그는 저울 이야기를 며칠 더 하게 된다.

먹는 동안 니카가 그 옆에 서서 기다렸다가 다 먹은 것을 보고 말했다.
"오늘 안에 이 도시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요."
"저쪽이 받을 게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탁자값하고 문값하고, 아마 배당금까지 엮어서요."
"배당금은 우리가 받을 거 아니오."
"받으려면 남아 있어야 하고, 남아 있으면 물어줄 것도 같이 계산됩니다."
니카가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하나 꺼내 손안에서 굴렸다.
"제 계산으로는 남는 쪽이 6할 손해입니다. 저쪽은 장부를 쓰는 사람들이고 장부를 쓰는 쪽은 언제나 받을 것을 먼저 적습니다."
바르트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부를 쓰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오후 셋은 타르실 서쪽 문으로 나갔다. 나가는 데 입시세는 들지 않았다. 나가는 것은 공짜라고 켈리가 처음 알았다. 들어올 때는 돈을 받고 나갈 때는 안 받는 것이 이상해서 물었더니, 니카가 나가는 사람한테 받으면 아무도 안 나가고 그러면 더 곤란해진다고 대답했다. 켈리는 그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 앞뒤가 맞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흘 뒤에 그들은 다시 타르실로 불려 들어오게 되는데, 그때 셈을 해 준 사람은 니카가 아니었다.

 

대리인


찾아온 사람은 사흘째 저녁에 왔다. 일행은 타르실에서 서쪽으로 반나절쯤 떨어진 냇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르트가 여기서 며칠 더 묵자고 했기 때문이었는데, 이유는 사려던 물건을 아직 못 샀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려는 것은 저울이었다. 지금 쓰는 것은 한 푼 단위까지밖에 못 재는데, 그보다 잘게 재는 것이 타르실에 있다고 했다. 값은 스무 냥이었다. 바르트는 그 값을 듣고 사흘째 계산 중이었고, 계산하는 동안 그 저울 이야기를 세 번 했다.

찾아온 사람은 젊었고 가죽 통을 하나 들고 있었다. 그는 불가로 와서 이름 셋을 확인했다. 바르트 뮐렌, 니카 셰르, 그리고 켈리. 성이 없는 켈리. 확인하고 나서 통에서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받는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다고 했고, 다만 받았다는 표시를 해 달라고 했다. 바르트가 받고 이름을 적었다. 그 사람은 표시를 확인하고 통을 닫고 돌아갔다. 오는 데 반나절, 가는 데 반나절일 텐데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 일의 방식이었다. 통지를 나르는 자는 내용에 관여하지 않으며,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반나절을 걸어와 종이 한 장을 내밀고 다시 반나절을 걸어 돌아갈 수 있다. 관여하기 시작하면 그 일은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내가 그날 저녁 불가에서 본 것은 마른 여자애 하나와 작은 사내아이 하나와 덩치 큰 중년 남자 하나였고, 셋 중 누구도 그의 기억에 남지 않았다.

켈리가 그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위쪽에 굵은 글자가 있고 아래로 작은 글자가 빽빽했다. 굵은 쪽은 읽혔다. 중재 출석 통지. 그리고 그 아래 어딘가에 자기 이름이 있었다. 켈리 두 글자였다. 그것을 찾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는데, 글자가 작고 줄이 촘촘했기 때문이다. 찾고 나서 켈리가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짚었다.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는 것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바르트의 노트였다. 두 번째는 사흘 전 그 집의 명부였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 것은 켈리에게 좋았고 두 번째 것은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세 번째 것은 이 종이가 반나절을 걸어서 자기를 찾아왔다는 점이 달랐다. 적힌 것이 사람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때 알았다.

"내 이름이 왜 여기 있어."
"자네가 적어 줬으니까."
바르트가 종이를 받아서 작은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얼굴이 조금씩 굳었다.
"적으면 안 되는 거였어?"
"안 되는 건 아니고."
"근데."
"적으면 찾을 수 있게 되는 거지."
켈리가 그 말을 곱씹었다. 바르트의 노트에 적힌 이름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런데 그 노트는 켈리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같은 적기인데 하나는 찾아오고 하나는 안 찾아오는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켈리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 차이는 누가 적었느냐가 아니라 그 적힌 것을 누가 들고 있느냐에 있었다.

니카가 종이를 넘겨받아 아래쪽 글자를 읽었다.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 가면 궐석으로 처리된다고 합니다."
"궐석이 뭐요."
"안 온 사람 몫은 온 사람 말대로 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얼마가 되나."
"저쪽이 부르는 대로요."
바르트가 불을 한 번 쑤셨다. 불티가 올라갔다.
"사흘 전엔 도망가는 게 6할 이득이라고 했잖소."
"그때는 그랬습니다."
"지금은."
"지금은 반대입니다."
니카가 주사위를 손안에서 굴렸다. 굴리는 것은 계산을 하는 동작이 아니라 계산이 끝났을 때 하는 동작이었다. 켈리는 며칠 사이에 그 구별을 알게 되었다.
"사흘 전엔 저쪽이 우리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지금은 압니다. 이름 셋에 나이에 생김새까지요. 쇠 파는 데서 나갔겠죠. 그 집은 장부를 쓰니까요."
"그래서."
"그래서 지금 도망가면 이 도시에 다시는 못 들어옵니다. 저야 상관없는데요."
니카가 바르트 쪽을 보았다.
"그쪽은 여기서 계속 사야 하는 게 있으시잖습니까."

바르트가 불을 한 번 더 쑤셨다. 저울은 타르실에서만 팔았다. 정확히는 타르실에서 사는 것이 가장 쌌고, 다른 데서 사려면 두 배를 줘야 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십 년쯤 더 재면서 살 생각이었다.

"가야겠군."

중재소는 항구 안쪽 큰 건물의 이 층에 있었다. 아래층은 곡물 저울대였고 사람이 많았으며 냄새가 났다. 곡물 냄새와 사람 냄새와 젖은 마대 냄새가 섞인 것이었는데, 켈리는 그 냄새를 맡으면서 로엔에서 온 밀이 여기를 지나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밀이 어디서 오는지 아는 것이 두 달 전에는 못 하던 일이었다.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좁고 어두웠고 계단참마다 문이 있었고 문마다 번호가 붙어 있었다. 켈리가 그 번호를 하나씩 읽으면서 올라갔다. 번호를 읽는 것은 잘하는 일이었다.

배정된 방은 넷째 문이었다. 안은 좁았고 긴 탁자가 하나 있었으며 그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의자가 놓여 있었다. 상석에 앉은 사람은 중재인이었다. 쉰쯤 되어 보였고 앞에 종이와 모래시계를 놓아두었다. 모래시계는 켈리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유리 안에 모래가 들어 있고 가운데가 잘록했다. 켈리는 앉자마자 그것을 보기 시작했고 그 뒤로도 자주 보았다.

맞은편에는 둘이 앉아 있었다. 하나는 그날 그 집의 주인이었다. 켈리가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날은 뒤쪽 방에 있었는데 지금은 앞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하나가 더 앉아 있었는데, 그쪽은 그날 없던 사람이었다. 서른 후반쯤의 남자였다. 금속테 안경을 썼고 옅은 갈색 머리를 뒤로 넘겼는데 한 가닥이 삐져나와 있었다. 회색 장코트가 구겨져 있었고 원래는 좋은 옷이었을 것 같았다. 여행하는 차림이 아닌데 옷은 여행한 사람처럼 상해 있었다. 앞에 서류 뭉치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낡은 가죽 가방이 있었다. 그가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손가락으로 줄을 짚고 있었는데, 짚는 속도가 읽는 속도보다 빨랐다. 이미 아는 것을 확인하는 손이었다.

중재인이 시작을 알리고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그리고 양쪽을 한 번씩 보았다.
"청구 측부터."
안경 쓴 남자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코트 앞섶을 한 번 폈는데 그래 봐야 구김이 펴지지는 않았다.
"대리인 오벨 리스트입니다. 청구 항목은 셋입니다. 첫째, 탁자 한 대. 참나무 상판에 쇠 받침을 댄 것으로 여덟 해 전 제작. 감가를 적용해 열두 냥. 둘째, 문 한 짝과 경첩 두 벌. 문짝은 새것에 가깝고 경첩은 벽째 뜯겨 나갔으므로 벽 보수까지 포함해 여덟 냥. 셋째, 영업 중단 손실. 당일 오후와 다음 날 하루, 합 하루 반. 일 평균 수입의 절반을 잡아 다섯 냥. 합계 스물다섯 냥입니다."
"…스물다섯."
바르트가 그 숫자를 받아 적었다. 손에 있는 것이 여섯 냥 조금 넘었다. 스물다섯 냥이면 정밀 저울보다 다섯 냥이 더 비쌌고, 그는 그 계산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니카가 손을 들었다. 손을 들고 나서 중재인이 고갯짓을 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그런 절차를 아는 사람이었다. 타르실 빈민가에서 자란 아이가 중재소 절차를 아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동네에서는 돈 문제가 생기면 여기로 왔고, 니카는 열두 살부터 남의 일로 이 계단을 올라 다녔다.
"셋째 항목이요. 영업 중단이 하루 반이라는 건 누가 셌습니까."
"청구인이 신고했습니다."
"신고한 걸 그대로 적으면 그건 셈이 아니라 받아쓰기죠."
"신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허위로 밝혀지면 배액을 물립니다."
"밝혀지면요. 안 밝혀지면 그냥 다섯 냥이고요."
오벨이 가방 쪽으로 손을 뻗었다. 뻗으면서 낮게 뭐라고 말했는데 들리지 않았다. 숫자 같기도 했다.

가방이 저절로 열렸다.

그 안에서 손이 나왔다. 두 개였다. 팔꿈치까지 있었고 그 위로는 없었다. 잘린 자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거기까지만 있는 모양이었다. 색이 없었고 잉크 냄새가 났다. 두 손이 탁자 위로 올라와 서류 뭉치 옆에 자리를 잡더니 종이를 넘기기 시작했다. 넘기는 속도가 빨랐고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켈리가 지팡이를 잡았다. 바르트가 그 팔을 눌렀다.

나머지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중재인은 모래시계를 보고 있었고 그 집 주인은 하품을 했고 니카는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다. 이 방에서 그것을 처음 보는 사람은 켈리뿐이었다.

"앉으셔도 됩니다."
오벨이 말했다.
"물지 않습니다."
"…저거 뭐야."
"서기입니다."
"사람이야?"
"아니요."
"그럼 뭐야."
"계약입니다."

손이 한 장을 뽑아 오벨 앞으로 밀었다. 오벨이 그것을 받아 읽었는데, 받기 전에 이미 읽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타르실 상거래 중재 규정 제구조 제이항. 손실액 산정은 청구인의 장부에 근거하되, 장부가 없는 업종은 신고액에 상한을 둔다. 이 업종은 장부를 두지 않는 업종이며 상한은 일 평균 수입의 절반, 최대 사흘분입니다. 저희는 하루 반을 청구했습니다. 상한의 절반입니다."
"그걸 외우고 계십니까."
"제구조는 자주 씁니다."
니카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다른 쪽을 짚었다.
"둘째 항목. 벽 보수가 왜 문값에 들어갑니까."
"경첩이 벽째 뜯겼습니다."
"그건 문이 튼튼했으면 안 그랬겠죠. 문이 벽보다 강하면 벽이 나가는 겁니다. 그건 문을 그렇게 단 쪽 잘못 아닙니까."
"제십사조. 건축물의 시공 상태는 손괴 책임을 감면하지 않습니다."
"제십사조에 단서가 있을 텐데요."
손이 종이를 한 장 뽑아 올렸다. 제십사조였다. 단서는 붙어 있지 않았다.
"단서는 제십사조에 없습니다. 제십오조에 있고, 지진과 홍수입니다."
"그럼 제십오조도 가져오시죠."
"부르지 않았습니다."
"부르면 가져옵니까."
"예."
"그럼 부르시죠."
"제가 왜요."
손 두 개가 가만히 있었다. 부른 것만 가져오는 손이었다.
"사람도 지진처럼 밀면요."
"규정에 사람은 없습니다."
니카가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꺼내 탁자에 굴렸다. 굴리고 나서 눈을 보지도 않았다.
"그럼 제가 이길 확률이 2할쯤 되겠네요."
"제 계산으로는 일흔 번에 한 번입니다."
"일흔 번에 한 번이면 2할이 아니라 거의 없는 건데요."
"예."
"그럼 일흔 번 하면 한 번은 이기는군요."
"이 건은 한 번뿐입니다."
니카가 주사위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중재인이 그 오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종이에 뭔가를 적었는데, 적은 것은 진술이 아니라 시각이었다.

바르트가 그 사이에 손을 들었다. 중재인이 또 고갯짓을 했다. 바르트가 일어서지 않고 앉은 채로 허리춤을 더듬더니 손바닥만 한 놋쇠 물건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접시가 둘 달린 작은 저울이었다.

중재인이 그것을 보았다.
"…그건 뭡니까."
"저울이오."
"여기서 뭘 재시려고."
"이거요."
바르트가 주머니에서 나무 조각을 하나 꺼냈다. 손바닥 절반쯤 되는 것이었고 한쪽 면이 매끈하고 반대쪽이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부서진 탁자 상판의 조각이었다. 사흘 전에 그 방을 나오면서 주워 온 것이었다.

오벨이 그 조각을 보았다. 그는 십오 년 동안 이 계단을 오르내렸고 증거물이 들어오는 것은 여러 번 봤다. 부서진 물건의 파편이 들어오는 것도 봤다. 저울이 같이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탁자 말인데."
"예."
"참나무 상판이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두께가 얼마요."
오벨이 서류를 넘겼다. 넘기다가 멈췄다.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쟀소."
바르트가 조각을 저울 한쪽 접시에 올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추를 몇 개 꺼내 반대쪽에 얹기 시작했다. 얹는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추가 세 개째에서 접시가 수평이 되었다.
"11 그램하고 조금. 이만한 부피에 이 무게면 참나무가 맞소. 다만 상판 두께가 손가락 두 마디 반이오. 쪼개진 면을 보면 알 수 있소. 참나무 두 마디 반이면 여덟 해 쓴 걸 감안해도 새로 짜는 데 일곱 냥이면 되오. 쇠 받침은 안 부서졌으니 그대로 쓰면 되고. 열두 냥은 쇠 받침까지 새로 짜는 값이오."
방이 조용해졌다. 중재인이 처음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나무는 무게로 값을 치오. 나는 무게 재는 사람이고."
오벨이 안경을 한 번 올려 썼다. 그러고는 서류 맨 뒤에서 한 장을 뽑아 앞으로 옮겼다. 그가 처음으로 말을 조금 느리게 했다.
"…확인하겠습니다. 다만 쇠 받침이 재사용 가능한지는 목수가 봐야 합니다."
"봐야지."
"그럼 그 항목은 보류하고 나머지를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모래가 절반쯤 내려간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둘째 항목에 있었다. 중재인이 두 번 시간을 확인했고 한 번은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니카가 확률을 말하면 오벨이 조항 번호로 받았고, 오벨이 조항을 읽으면 바르트가 무게와 값으로 받았다. 세 사람이 서로 다른 말로 싸우고 있었으므로 이야기는 좀처럼 한자리에 모이지 않았다. 중재인은 처음 얼마간 받아 적다가 나중에는 적기를 그만두었고, 그만둔 뒤로는 턱을 괴었다. 그가 이 방에서 십일 년을 일했는데 오늘 같은 건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한쪽이 화를 내고 한쪽이 우는데, 오늘은 아무도 화를 내지 않고 세 사람이 각자 자기 학문을 하고 있었다.

켈리는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슨 이야기인지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아들은 것은 이랬다. 자기가 부순 것들에 값이 붙었고, 그 값이 스물다섯 냥이고, 스물다섯 냥은 가진 것보다 훨씬 많다. 나머지는 전부 아는 단어로 되어 있는데 붙여 놓으면 뜻이 흩어졌다. 켈리는 알아듣기를 포기하고 모래시계를 보았다. 모래는 일정하게 떨어졌다. 켈리가 그것을 세어 보았는데 알갱이 단위로는 셀 수 없었고, 대신 잘록한 부분을 지나가는 줄기가 한 번도 끊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방에서 켈리가 그날 알아낸 것은 그것 하나였다.

그러다 오벨이 한 장을 더 넘기면서 말했다.
"참고로 상금 청구 건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참가 등록 시 규정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되며, 해당 규정에 따라 기물 파손 시 상금은 소멸합니다."
니카가 고개를 들었다.
"그 규정 읽어 준 적 없는데요."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어디에요."
"입구 벽입니다. 명부 탁자 옆."
"글자가 얼마나 작던가요."
"규정에 크기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켈리가 그때 입을 열었다.
"나 그거 못 읽었어."
모두가 켈리 쪽을 보았다. 켈리는 탁자를 보고 있었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입구에 있었어?"
"예. 있었습니다."
"나 거기 섰었는데."
"그러면 읽을 수 있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글자는 읽어."
켈리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근데 뜻을 몰라."

오벨이 종이를 넘기려던 손을 멈췄다. 그는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읽었다거나 못 읽었다거나 안 읽었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다. 읽었는데 뜻을 모른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가 십오 년간 남의 말을 들어서 얻은 감각으로 바로 알아졌다.

"…어느 부분이 말씀입니까."
"전부."
"전부요."
"글자는 다 알아. 붙여 놓으면 모르겠어."
오벨이 잠깐 오벨답지 않게 가만히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규정문이 적힌 쪽을 켈리 쪽으로 돌려놓고,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어 읽어 주었다.
"이 줄입니다. 참가자는 등록으로써 본 규정에 동의한 것으로 본다."
"동의가 뭐야."
"좋다고 했다는 뜻입니다."
"난 안 했는데."
"등록하셨으니까요."
"이름 물어봐서 대답한 건데."
"그것이 등록입니다."

켈리가 그 줄을 오래 보았다. 오벨이 짚어 준 자리에는 글자가 열몇 개 있었고 켈리는 그것을 전부 읽을 수 있었다. 읽을 수 있는데 그 열몇 개가 자기를 여기 앉혀 놓았다.

"그럼 저 문 값은."
"열두 냥입니다. 아니, 문은 여덟이고 탁자가 열둘입니다."
"그거 누가 정했어."
"탁자는 목재 시세와 감가로 산정했습니다. 문은 시공비 견적서가 있습니다."
"그거 말고."
켈리가 서류 쪽을 가리켰다.
"저기 적은 사람. 그 사람이 정한 거야?"
"산정 기준에 따라 계산한 것입니다."
"기준은 누가 정해."
"평의회가 정합니다."
"평의회는 누가 정해."
"…상인들이 뽑습니다."
"그럼 상인이 정하네."
오벨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멈췄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틀린 말인데 어디가 틀렸는지 설명하려면 세 단계가 더 필요했고, 세 단계를 거쳐도 결국 비슷한 데로 돌아왔다.

켈리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제 값은 누가 정해요?"

방이 조용해졌다.

켈리는 자기가 방금 무엇을 물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질문은 앞의 질문과 같은 줄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문에 값이 있고 그 값을 누가 정했으면, 자기에게도 값이 있고 그것도 누가 정했을 것이다. 켈리는 자기에게 값이 붙어 있다는 것을 사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루 5돈이라는 값이었고 그것은 바르트가 노트에 적어 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값은 먹는 것에 붙은 값이었고, 켈리가 지금 물은 것은 그것과 조금 다른 것이었다. 무엇이 다른지는 켈리도 몰랐다.

오벨이 대답하지 않았다. 조항을 찾은 것도 아니고 서류를 넘긴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앉아 있었다. 그가 아는 규정집에는 그 질문에 해당하는 조항이 없었다. 사람에게 값을 매기는 조항은 있었다. 노동 계약이 그랬고 보상 산정이 그랬고 상해 배상표가 그랬다. 그러나 그 조항들은 전부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값을 매겼지 사람 자체에 매기지 않았다. 매기지 않는 이유는 매길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매기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고, 그러면 누가 언제 그렇게 정했느냐는 질문이 바로 뒤에 붙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지금 자기 값을 물었다. 물어도 되는 것인 줄 알고 물은 얼굴이었다.

중재인이 헛기침을 했다.
"질문의 취지가 본건과 관련이 없습니다."
"예."
오벨이 대답했다. 대답하고 나서 종이를 정리했다. 정리하면서 옆자리를 보았다.
"청구인 되시는…"

거기서 멈췄다.

멈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반 숨쯤이었다. 오벨이 서류 맨 위를 내려다보았고 거기 적힌 것을 읽었다.
"…하우케 씨. 나머지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그 집 주인이 오벨을 한 번 보았다. 따지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오벨이 가방을 열었고 손 두 개가 마지막 종이를 묶어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이 닫혔다.

켈리가 그것을 보았다. 아까보다 덜 놀랐다. 놀라는 데도 순서가 있어서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덜 놀라게 되어 있었다.

그날의 결론은 이렇게 났다. 탁자는 목수 확인 뒤에 다시 정하기로 하고 일단 여덟 냥으로 잡았다. 문과 벽은 여섯 냥으로 깎였다. 영업 손실은 반나절분인 두 냥으로 줄었다. 합해서 열여섯 냥이었다. 바르트가 가진 것은 여섯 냥이 조금 넘었으므로 다섯 냥을 먼저 내고 남은 열한 냥을 넉 달에 나누어 갚기로 했다.

분할 상환 각서에 세 사람의 이름이 들어갔다. 바르트가 적고 니카가 적었다. 켈리 차례가 되자 중재인이 도장을 내라고 했다. 도장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손가락을 쓰라고 했다. 먹그릇이 켈리 앞으로 밀려왔다.

켈리가 오른손 엄지에 먹을 묻혔다. 그리고 자기 이름 옆을 눌렀다.

종이가 찢어졌다.

"…어."

먹이 밀려 나와 이름 쪽까지 번졌고, 눌린 자리에 구멍이 났으며, 그 아래 탁자 상판에 엄지만 한 자국이 팼다. 중재인이 그 자국을 보았다. 그리고 켈리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벨이 가방에서 새 종이를 꺼냈다.
"…여분이 있습니다."
"규정에 있는 거요?"
"아니요. 제가 들고 다닙니다."

두 번째 장을 다시 쓰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다 쓰고 나서 중재인이 이번에는 먹그릇을 직접 잡고 있었다. 켈리가 엄지를 대고, 아까보다 약하게 눌렀다. 종이는 무사했다. 대신 자국이 검은 동그라미 하나로 뭉개져 있었다.

중재인이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결이 보여야 합니다."
"결이 뭐야."
"손가락 무늬요. 이러면 누가 눌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거 내 손가락인데."
"압니다. 그런데 종이는 모릅니다."

세 번째 장이 나왔다. 오벨의 여분은 두 장까지였다.

바르트가 저울을 도로 꺼냈다. 아까 넣었던 것을 다시 꺼내 탁자 가운데에 놓고, 한쪽 접시에 추를 하나 얹었다. 제일 작은 것이었다.
"손가락 대 보시오."
켈리가 반대쪽 접시에 엄지를 얹었다. 접시가 쑥 내려갔다.
"세."
"이게 세?"
"이건 세다 못해 산을 미는 거요. 접시가 안 내려갈 만큼."
켈리가 힘을 뺐다. 접시가 올라왔다.
"이제 모자라오."
"그럼 어떡해."
"사이."

켈리가 사이를 찾기 시작했다. 접시는 내려가거나 올라갔고 그 사이에서 멈추는 법이 좀처럼 없었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아무것도 조절해 본 적이 없었다. 조절이란 말 자체를 그날 처음 들었다. 배급은 정해진 만큼 나왔고 마법은 나가거나 안 나갔고 명령은 따르거나 안 따르는 것이었다. 중간이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 놋쇠 접시 위에서 처음 배우고 있었다.

일곱 번째에 접시가 멈췄다.

"됐소. 그만큼."

켈리가 그 힘을 손끝에 남겨 둔 채로 먹을 묻히고 종이에 댔다. 그리고 뗐다.

자국이 남았다.

중재인이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도장을 찍었다. 니카가 뒤에서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세 번째 장이 나올 확률이 어떻다는 얘기였고 아무도 듣지 않았다.

켈리가 자기 이름 옆을 보았다.

작은 검은 자국이었다. 가까이 보면 선이 여러 겹 돌아가고 있었다. 가운데가 소용돌이처럼 감겼고 바깥으로 갈수록 선이 벌어졌다. 켈리는 자기 손가락에 그런 것이 있는 줄 몰랐다. 엄지를 들어 불빛 쪽으로 기울여 보니 거기에도 같은 무늬가 있었다. 늘 있었을 텐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번호는 받은 것이었다. 이름도 받은 것이었다. 로브도 받았고 지팡이도 받았고 빵도 받은 것이었으며, 받은 것에는 전부 값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이 무늬는 아무도 준 적이 없었다. 육성소에서도 주지 않았고 제4마도대에서도 주지 않았다. 켈리가 여섯 살에 줄을 서기 전부터 그 손가락에 있었다.

값이 얼마인지 켈리는 몰랐다. 물어볼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도 그날은 몰랐다.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해가 기울어 있었다. 셋이 부두 쪽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얼마 못 가서 뒤에서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오벨이 가방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장코트 자락이 뛰는 바람에 더 구겨져 있었다.

"잠깐만."
바르트가 멈췄다. 니카도 멈췄다. 켈리는 조금 늦게 멈췄다.
"뭐 빠뜨린 거 있소?"
"아니요."
오벨이 숨을 고르고 안경을 올려 썼다.
"아까 그 질문 말입니다."
"어느 거요."
"그럼 제 값은 누가 정하느냐는 것이요."
그가 켈리 쪽을 보았다. 켈리는 그를 보고 있었고 특별한 표정이 없었다.
"제가 답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요."
"조항으로 답이 안 나와서요."

바르트가 그를 한참 보았다.
"그래서 어쩌시려고."
"동행하겠습니다."
"우리 돈 없소."
"압니다. 제가 방금 그 액수를 산정했습니다."
"그럼 왜."
"답이 안 나와서요."
"그건 댁 사정이고."
"예. 제 사정입니다."

바르트가 배낭끈을 고쳐 멨다. 거절할 참이었고 거절하는 말은 짧을수록 좋았다.
"그럼 여기서 푸시오. 우리는 줄 게 없소. 방금 열여섯 냥 물기로 한 사람들이오."
"드리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같이 갈 이유가 없다는 거요."
"같이 안 가셔도 됩니다."
오벨이 말했다.
"제가 같은 길로 가는 겁니다."

바르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왕령 통행 조례 제칠조. 공로의 통행은 제한하지 아니한다. 서쪽 문에서 로엔 가도까지는 공로입니다."
"그러니까 따라오겠다는 거 아니오."
"아닙니다. 저는 로엔 쪽에 볼일이 있고 그쪽도 로엔 쪽으로 가십니다. 방향이 같을 뿐입니다."
"볼일이 뭔데."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니카가 그때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꺼냈다. 굴리지는 않았다.
"안 떨어집니다, 저 사람."
"계산했나."
"아니요. 이건 계산 안 해도 압니다."

바르트가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는 무엇을 하든 기한을 먼저 정하는 사람이었다.
"언제까지 같은 방향이오."
"답이 나올 때까지입니다."
"안 나오면."
"안 나올 리가 없습니다."
오벨이 가방 끈을 고쳐 쥐었다.
"십오 년 동안 남이 묻는 걸 조항으로 답해 왔습니다. 조항이 없으면 비슷한 것을 찾았고 그것도 없으면 해석을 붙였습니다. 그 일을 오래 하면 알게 되는 게 하나 있는데, 답이 없는 질문은 대개 질문이 틀린 겁니다. 오늘 건 안 틀렸습니다."
"그거 하나 때문에."
"하나면 충분합니다."
"찾으면 어쩔 거요."
"돌아갑니다."

그 말에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여태 듣기만 하고 있었다.
"돌아가면 나는."
오벨이 켈리 쪽을 보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답 만들면 돌아간다며.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데."

오벨이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두 번째였다.

그는 방금 자기가 한 말을 속으로 다시 들어 보았다. 들어 보니 그 안에 이 아이가 들어 있지 않았다. 질문만 들어 있었다. 질문은 그가 가져갈 것이고 답도 그가 만들 것이며 그러고 나면 그는 타르실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 순서 어디에도 그 질문을 한 사람의 자리는 없었다. 십오 년 동안 그는 일을 그렇게 다뤄 왔다. 사람으로 보지 않고 건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었다.

"…그건 그때 가서 정하겠습니다."
"그것도 조항으로 정해?"
"아마도요."

바르트가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말할 근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근거를 못 찾은 것은 그날 세 번째였다.

넷이 서쪽 문으로 나갈 때 켈리가 오벨에게 물었다.
"아저씨 글씨 잘 써?"
"…예. 그럭저럭."
"나 못 써."
"읽으신다면서요."
"읽어. 쓰는 건 안 배웠어."
오벨이 걸음을 한 박자 늦췄다. 그는 그 말의 뜻을 아까보다 빨리 알아들었다. 읽기만 가르치고 쓰기를 안 가르치는 데가 어디인지, 그리고 왜 그렇게 하는지를 그는 알고 있었다. 벨류엔에서 태어났으므로 알았다.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얼마 줘야 돼."
오벨이 대답하려다 멈췄다. 방금 자기가 한 말에 걸렸기 때문이다. 값을 받지 않고 무언가를 주면 그것은 선의가 되고, 선의로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좀 전에 세 번 말했다.
"…열람료를 받겠습니다."
"그게 뭐야."
"제가 묻는 것에 대답해 주시는 겁니다. 한 번 가르칠 때 한 번씩이요."
"뭘 물어보는데."
"아직 모릅니다. 정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켈리가 그 조건을 따져 보았다. 대답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았다. 켈리가 가진 것 중에 값이 붙은 것은 하루 5돈짜리 먹는 양뿐이었고 그것과는 상관없는 조건이었다.
"어."
"그럼 정해진 겁니다."

오벨이 잠깐 뒤에 한마디를 덧붙였는데, 방금 없던 값을 하나 만들어 붙여 놓고 하는 말이었으므로 켈리에게 한 말이라기보다 자기에게 한 말에 가까웠다.
"값이 안 붙는 것도 있어야죠. 그게 없으면 다들 미칩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수첩을 꺼냈다. 걸으면서 두 줄을 적었다. 켈리. 성 없음. 읽을 줄 알되 쓰지 못함. 그 아래에 한 줄이 더 붙었다. 열람료 — 문답 일 회 대 일 회.

십오 년 동안 그렇게 해 왔다. 오늘 만난 사람을 적어 두지 않으면 어느 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기 때문이었고, 그것이 그가 지불해 온 값이었다. 값을 치르는 데 불만은 없었다. 다만 그 줄을 적는 손이 평소보다 한 박자 느렸는데, 이유는 방금 자기가 답하지 못한 질문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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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에 얼마


능선을 넘고 사흘이 지났다.

첫날은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폐허 분지에서 남서로 빠지는 비탈에는 짐승이 다닌 자국뿐이었고 그마저도 녹다 만 눈에 덮여 자주 끊겼다. 바르트는 자국이 끊긴 자리마다 잠깐 서서 땅을 들여다보고는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내렸다. 켈리가 보기에 그 결정에는 아무 근거가 없었다. 물어보지는 않았다. 앞선 사람이 가는 쪽으로 가는 일이라면 열두 해 동안 해 왔으므로 새로 배울 것이 없었다.

둘째 날 오후에야 수레바퀴 자국이 난 길이 나왔다. 바퀴 폭이 넓고 자국이 깊은 것을 보면 짐수레가 여러 번 지나간 길이었다. 바르트는 그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주저앉더니 한참 숨을 골랐다. 그는 켈리보다 훨씬 크고 훨씬 느렸다.

"여기서부터는 사람 다니는 데야."
"그래서."
"그래서 짐을 다시 싸야지."
바르트가 배낭을 풀어 안에 든 것을 길바닥에 늘어놓았다. 병이 여섯, 천으로 싸맨 주머니가 아홉, 집게와 작은 망치와 쇠붙이 몇, 담요 두 장, 부싯돌, 소금 자루, 마른 빵, 말린 고기 한 줌, 그리고 노트. 노트는 맨 위에 따로 놓았다. 비가 오면 그것부터 품에 넣는다는 것을 켈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바르트가 그중에서 담요 두 장과 빈 냄비와 주머니 세 개를 골라 켈리 쪽으로 밀었다.
"자네가 이거 들어."
켈리가 그것들을 한데 모아 들어 보았다. 한 손으로 들렸다. 들린다는 것을 넘어서 가볍다는 느낌까지 왔고, 가볍다는 느낌이 오는 순간 속이 불편해졌다. 켈리는 그것을 다시 내려놓고 바르트가 남겨 둔 쪽을 건너다보았다. 병 여섯 개와 연장 전부가 거기 있었다.
"적어."
"적지."
"더 줘."
"안 돼."
"왜."
바르트가 자기 몫을 배낭에 도로 넣기 시작했다. 병을 넣을 때는 사이사이에 천을 끼워 서로 부딪히지 않게 했다. 그 동작이 어찌나 느리고 정확한지, 켈리는 보고 있는 동안 두 번쯤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자네 지금 47이야."
"그게 뭐."
"자네 무게. 어제 쟀잖아."

쟀다. 어제 저녁에 바르트가 나뭇가지와 노끈으로 이상한 물건을 만들어 켈리를 거기 매달았다. 켈리는 그것이 저울인 줄 알았고 실제로 저울이었다. 벨류엔의 저울과 생김새는 전혀 달랐으나 하는 일은 같았다. 다른 점이 딱 하나 있었는데, 벨류엔에서는 숫자가 올라가면 안 되는 것이었고 어제는 바르트가 숫자를 보더니 만족한 얼굴을 했다는 것이었다. 켈리는 그 차이를 사흘이 지나도록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47이면 절반이 23이고, 오래 걸을 거면 그 절반쯤이 맞아. 그 이상 지면 무릎이 먼저 나가."
"나 30 지고 달렸어."
"얼마나."
"매일."
바르트가 병을 넣던 손을 멈추고 켈리를 보았다. 한참 보았다. 켈리는 그 시선이 무엇을 재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재고 있다는 것만 알았으므로 등을 조금 폈다. 무엇을 재는지 모를 때는 자세를 바로 하는 편이 낫다는 것도 열두 해가 가르쳐 준 것 중 하나였다.
"그래서 지금 47이지."
켈리는 그 말의 앞뒤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몰랐다. 다만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이 사람이 자주 한다는 데에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켈리가 다시 자기 몫을 내려다보았다. 담요 두 장과 냄비와 주머니 세 개. 아무리 봐도 적었다.
"덜 지면 덜 받잖아."
"뭘 덜 받아."
"밥."

바르트가 배낭 끈을 조이다 말고 켈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노트를 꺼내 숯 조각으로 한 줄을 적었다. 켈리는 그가 무엇을 적는지 보려고 목을 뺐으나 각도가 나오지 않았다. 한 줄을 적고 나서 바르트는 노트를 덮더니, 자기 짐에서 빈 자루 두 개를 꺼내 켈리 쪽 더미 위에 얹었다. 자루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부피만 컸다.
"이것도 자네가 들어."
켈리가 그것을 들어 보았다. 무게는 거의 그대로인데 덩치가 커졌다. 등에 묶고 일어서서 몇 걸음 걸어 보니 등판이 꽉 찬 느낌이 났다. 그제야 속이 편해졌다.
"됐어?"
"어."
바르트가 무릎을 짚고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켈리는 빈 자루 두 개를 등에 지고 그 옆을 따라 걸었다.

마을이 보인 것은 사흘째 한낮이었다. 먼저 보인 것은 표지판이었다. 길이 갈라지는 자리에 나무 기둥이 서 있고 가로판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기둥은 기울어지지 않았고 가로판도 떨어지지 않았다. 글자는 파낸 자리에 검은 칠을 덧입혀 놓아 멀리서도 읽혔다. 켈리가 걸음을 늦추고 그것을 읽었다. 베렐. 한 시간. 지나가면서 고개를 돌려 기둥 뒤쪽을 보았다. 기둥 뒤에는 완만한 내리막이 있었고 내리막 끝에 지붕들이 있었다. 회색 지붕과 짚 지붕이 섞여 있었으며 그중 몇 군데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중이었다. 담이 있고 담 안에 집이 있고 집에 지붕이 있었다.

표지판 아래에 마을이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처음 보았다. 회랑에서 삼 년을 보내는 동안 표지판은 수십 번 지나갔고 그 뒤에는 한 번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이 남고 마을이 없는 것, 그것이 켈리가 아는 표지판의 정의였다. 그래서 켈리는 그 앞에서 잠깐 멈춰 서 있었고, 열 걸음쯤 앞서 가던 바르트가 돌아보았다.
"왜."
"아니."
켈리가 따라붙었다. 내리막을 내려가는 동안 지붕이 점점 커졌고 어느 순간 소리가 났다. 사람 소리였다. 자기가 사람 소리를 오래 듣지 못했다는 것을 켈리는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알았다. 마을 어귀에서 바르트가 멈춰 서더니 켈리 쪽으로 손을 뻗어 외투 앞섶을 여며 주었다. 단추 세 개를 위에서부터 차례로 채우고, 한 발 물러나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다.
"됐다."
"뭐가."
"안 보여."
켈리가 자기 가슴 쪽을 내려다보았다. 기름 얼룩이 진 두꺼운 갈색 천뿐이었다.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는 켈리만 알았다.

마을에 들어서자 흙길이 넓어지고 양옆으로 좌판이 늘어섰다. 장이 서는 날인 모양이었다. 늦겨울의 장이라 물건이 많지는 않았다. 무와 마른 콩과 절인 것들, 겨울을 난 사과 몇 바구니, 나무 그릇, 가죽끈, 대장간에서 나온 낫과 쇠못. 사람들은 두껍게 입고 손을 비비면서 좌판 사이를 오갔고 값을 두고 서로 뭐라고 주고받았는데,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지는 품이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 사이를 걸으면서 켈리는 한 가지를 알아차렸다. 아무도 자기를 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이 켈리에게 닿았다가 그냥 지나갔다. 멈추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일도 없었고 아이를 안으로 들이는 사람도 없었다.

베렐은 벨류엔 국경에서 남서로 엿새 거리에 있었고, 그 엿새가 이 마을의 성격을 전부 결정했다. 회랑은 여기까지 닿지 않았다. 남색 로브가 마지막으로 지나간 것이 이십 년 전이라 젊은 사람들은 그 색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예 몰랐고, 나이 든 사람들은 알면서도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켈리가 지금 걸치고 있는 것은 기름 얼룩이 진 갈색 외투였다. 그러므로 켈리는 그날 마른 여자애 하나로 그 장을 지나갔고, 그것은 켈리가 열두 해 만에 처음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본 경험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그런 말로 정리하지 못했다. 다만 사람들이 자기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만 알아차렸고,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은 채로 걷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켈리가 아는 바깥은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사라지는 곳이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지 않았고 그래서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러다 냄새를 맡았다. 길 안쪽에 천막을 반쯤 친 좌판이 있었고 그 뒤에 화덕이 있었다. 화덕 위 철판에 둥근 빵이 줄줄이 얹혀 있었다. 갈색으로 구워진 것과 아직 흰 것이 섞여 있었으며 표면에 기름이 발려서 빛났다. 화덕에서 나온 김이 찬 공기에 닿아 흰 기둥을 만들었다가 흩어졌다. 켈리는 그 앞에서 멈췄다. 배가 고팠다. 고픈 것에는 익숙했으므로 그것 자체는 특별하지 않았다. 다만 눈앞에 빵이 있고 그것이 줄지어 있고 아무도 그 앞에 줄을 서 있지 않다는 것이 켈리를 붙잡아 세웠다. 배급 줄이 없는 배급은 켈리가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켈리가 손을 뻗어 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줄의 맨 앞에 서면 손을 내밀고, 얹어 주면 받고, 받으면 옆으로 비킨다. 열두 해 동안 하루에 세 번씩 한 동작이었다. 빵이 따뜻했다. 켈리가 그것을 손바닥에 올린 채 옆으로 한 걸음 비켰고, 좌판 주인이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리의 크기와 방향만 알 수 있었고, 그 방향이 자기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켈리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등이 펴지고 턱이 당겨지고 시선이 정면보다 약간 아래로 내려갔다. 두 발이 모였다. 열두 해 동안 혼나는 소리가 날 때마다 취하던 자세였다. 지금 그 소리를 낸 사람은 집검관이 아니라 앞치마를 두른 중년 남자였고 켈리도 그 차이를 알았는데, 알면서도 자세를 풀 수가 없었다. 켈리가 빵을 철판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그런데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몰랐다.

좌판 주인이 좌판을 돌아 나와 켈리의 팔을 잡았다. 외투 소매 위로 잡은 것이었고 세게 잡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잡혔다. 잡히는 순간 오른팔 안쪽에서 무언가가 밀려 올라왔다. 벨류엔의 교범은 그것을 강화의 예비 단계라 불렀고 마법청의 서기들은 단계마다 번호까지 매겨 두었으나, 켈리는 그 이름을 배운 적이 없었다. 켈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어깨까지 다 올라오고 나면 팔이 가벼워진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가벼워진 팔로 잡은 것을 떼어 내면 되는데, 떼어 낸 다음에 그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는 여태 확인해 본 적이 없었다. 확인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만 써 왔기 때문이다. 켈리가 숨을 멈췄다.

"놔 주쇼."
바르트의 목소리였다. 그가 좌판 옆에 와 서 있었다. 덩치가 커서 서 있는 것만으로 좌판 앞이 좁아졌다.
"이거 댁 일행이오?"
"그렇소."
"집어 갔소."
"봤소."
바르트가 켈리의 팔을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좌판 주인이 손을 놓았다. 켈리의 팔에서 감각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빠져나가면서 손끝이 저렸다.

그 저림이 가실 때까지 켈리는 아무 데도 보지 않았다. 팔 안쪽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가 쓰이지 못하고 도로 가라앉을 때 손끝이 저리다는 것을, 켈리는 열두 해 동안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올라온 것은 언제나 쓰였기 때문이다. 표적 앞에서 올라왔고 표적을 향해 나갔으며 나가고 나면 며칠이 사라졌다. 올라온 것을 도로 내려보내는 일에는 이름조차 없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켈리가 방금 한 번 했다.

바르트가 허리춤에서 천 주머니를 꺼내 끈을 풀었다. 주머니를 한쪽 손바닥 위에 기울이자 그 안에서 작고 납작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동전이었다. 구리색이었고 손톱만 했고 한쪽 면에 뭔가가 새겨져 있었다. 바르트가 그중 두 개를 골라 좌판 위에 놓았다. 소리가 났다. 딱, 딱. 좌판 주인이 그 두 개를 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아까 켈리가 내려놓은 빵을 집어서 종이에 싸더니 바르트에게 내밀었다. 얼굴이 조금 전과는 딴사람처럼 달라져 있었다.
"두 개 사면 하나 더 얹어 주오."
"그럼 두 개 주쇼."
바르트가 동전 네 개를 더 놓았다. 주인이 빵 세 개를 쌌다.

마을 끝 돌담에 걸터앉아 켈리가 빵을 먹었다. 겉이 단단하고 속이 부드러웠으며 안쪽에서 소금 맛이 났다. 켈리는 그것을 세 입에 먹었다. 먹고 나서 손바닥에 남은 부스러기를 혀로 핥았다. 바르트는 남은 빵 세 개를 무릎에 올려놓고 동전을 한 줄로 늘어놓았다가 쓸어 담았다가 다시 늘어놓으며 세고 있었다.
"아저씨."
"응."
"이게 빵이야?"
바르트가 세던 손을 멈췄다.
"뭐가."
켈리가 좌판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가 바르트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저거. 그거 주니까 빵 줬잖아. 그럼 그게 빵이야?"
바르트가 동전 하나를 집어서 켈리에게 내밀었다. 켈리가 받았다. 얇고 차가웠다. 뒤집어 보니 한쪽 면에 배 모양이 새겨져 있고 반대쪽에 숫자가 있었다. 가장자리가 닳아서 무늬가 뭉개져 있었다.

"이게 빵 값이야."

"값."
"빵 하나에 이게 둘. 그러니까 이건 빵 반쪽이지."
켈리가 그 동전을 손바닥 위에 놓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반쪽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냄새도 안 나고 따뜻하지도 않았다.
"먹을 수 있어?"
"없지."
"그럼 왜 줘."
"저 사람이 저걸로 밀을 사거든. 밀 사서 빵을 또 굽고, 구운 걸 또 팔고, 팔아서 또 밀을 사고. 그렇게 돌아가는 거야."
켈리가 동전을 바르트에게 돌려주고 두 손을 무릎에 놓았다. 돌려주면서 손바닥에 남은 자국을 한 번 들여다보았다. 오래 쥐고 있었던 탓에 동그란 자리가 눌려 있었다. 그 자국은 금방 사라졌는데, 저울에 오래 매달려 있다가 내려왔을 때 겨드랑이에 남던 자국도 그런 식으로 사라지곤 했다.
"누가 정해."
"뭘."
"둘. 빵 하나에 둘. 누가 정했어."
바르트가 빵 한 개를 반으로 갈라 한쪽을 켈리에게 건넸다. 켈리가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정하지. 밀값이 오르면 올리고, 옆 좌판이 싸게 팔면 내리고. 그러다 너무 올리면 아무도 안 사니까 다시 내려."
"안 내면?"
"뭘."
"값. 안 내면 어떻게 돼."
"뺏기지. 아니면 쫓겨나고. 아까 자네 팔 잡은 거, 그거야."

켈리가 씹던 것을 삼켰다. 그러고 나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바르트는 재촉하지 않고 남은 빵을 종이에 다시 쌌다.

그동안 켈리가 한 것은 셈이었다. 하루에 세 번, 한 해가 삼백예순 날 남짓, 그것이 열두 해. 숫자가 커지자 손가락이 모자랐고 켈리는 도중에 몇 번 자리를 놓쳤다가 처음부터 다시 셌다. 만이 넘어갔다. 만이라는 수를 켈리는 배급 문서에서 본 적이 없었다. 벨류엔의 문서에 나오는 숫자는 대개 수십이었고 많아야 수백이었으며 그보다 큰 수는 쓸 일이 없었으므로, 켈리에게 만이란 이름만 있고 크기가 없는 수였다. 그 수만큼 받아먹은 것에 값이 붙어 있다면 그 값은 켈리가 아는 어떤 물건보다도 컸다.

"나는 안 냈는데."
"안 냈지."
"근데 여섯 살 때부터 매일 받았어. 하루에 세 번."
바르트가 빵을 싸던 손을 멈췄다. 멈추고 나서도 켈리 쪽을 보지 않았다. 종이의 접힌 자리를 손가락으로 두 번 눌렀다.
"그랬겠지."
"그럼 그건 값이 없는 거야?"
"아니."
"그럼."
"값이 없는 게 아니고, 자네가 안 낸 거야."
켈리가 바르트를 보았다. 바르트는 여전히 종이만 보고 있었다.
"그럼 누가 냈는데."
바르트가 빵 꾸러미를 배낭에 넣고 끈을 묶었다. 묶고 나서 일어섰다. 무릎에서 소리가 났다.
"가자. 해 지겠다."

그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몰라서가 아니었다. 벨류엔이 마법사를 어떻게 길러 내는지 그는 대강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는데, 그가 아는 쪽은 쇠를 다루는 일이지 사람을 다루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십수 년을 여러 나라의 길 위에서 보내다 보면 어떤 종류의 값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으로 치러진다는 것쯤은 저절로 알게 된다. 그가 입을 다문 것은 자기가 아는 만큼만 말했다가 그 아이가 그것을 전부라고 믿어 버릴까 싶어서였다. 반쯤 아는 사람이 해 주는 설명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세계의 모양을 정해 버린다. 그는 북쪽 작업장에서 그런 일을 여러 번 저질렀고, 저지르고 나면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것도 거기서 배웠다.

그날 밤은 마을 바깥의 헛간에서 잤다. 여관이 하나 있었는데 바르트가 값을 묻더니 그냥 나왔다. 하룻밤에 5돈이라고 했다. 그 대신 마을 끝 농가에 가서 헛간 한쪽을 빌렸고 그 값은 1돈이었다. 짚이 두껍게 깔려 있었고 벽 한쪽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으나 바닥이 젖지 않았다. 켈리는 삼 년 동안 잔 곳 중에 그보다 나쁜 데가 여럿 있었다고 생각했다.

바르트가 초 한 자루를 켜고 노트를 폈다. 켈리는 담요를 무릎에 덮고 그 옆에 앉아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목을 빼지 않아도 보였다. 바르트가 옆자리를 비워 두었기 때문이다. 글자는 읽을 수 있었다. 어려운 글자가 아니었다. 마법청은 켈리에게 번호와 보급 수량과 소속 표기를 읽을 만큼은 가르쳤고, 바르트가 노트에 적는 것도 대개 그 정도 수준이었다.
빵 넷. 6돈.
소금 한 자루. 3돈.
헛간. 1돈.
합 10돈.
남음 36돈.

켈리가 그 숫자를 보고 나서 앞 장을 넘겼다. 바르트가 말리지 않았다. 앞 장에도 비슷한 줄들이 있었고 맨 아래에 남음이라는 글자와 숫자가 있었다. 46이었다. 그 앞 장도 46이었고 그 앞 장도 46이었다. 폐허에 있는 동안에는 쓸 일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켈리가 손가락으로 46에서 36으로 이어지는 자리를 짚었다.
"줄었어."
"줄었지."
"왜."
"썼으니까."
"이거 다 쓰면."
"더 못 사지."

켈리가 노트에서 손을 뗐다. 짚 위에 손바닥을 짚고 몸을 조금 뒤로 기울였다. 헛간 서까래에 거미줄이 있었고 초의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거미줄 그림자도 따라 흔들렸다.
"아저씨는 뭐 팔아."
"쇠붙이. 폐허에서 캔 거."
"저기서 팔면 되잖아."
"저기선 값이 안 나와. 그냥 쇠로밖에 안 쳐 주거든. 그걸 아는 사람한테 팔아야 값이 붙지."
"그게 어딘데."
"항구."
바르트가 초를 손으로 가려 심지를 조금 세웠다. 불이 밝아졌다.
"타르실이라고. 배 들어오는 데야. 거기까지 가야 돼."
"멀어?"
"걸어서 보름."
켈리가 셈을 했다. 숫자를 더하고 빼는 것은 배급 수량을 확인할 줄 알아야 했으므로 마법청이 가르친 것 중 하나였고, 켈리가 가장 잘하는 것이기도 했다.
"모자라."
"오늘은 소금 샀으니까 많이 쓴 거고. 앞으로는 하루 6돈에서 7돈쯤일 거야."
"그럼 닷새."
"그쯤."
바르트가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은 아니었지만 켈리는 그가 왜 웃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셈은 빠르네."

켈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하루에 6돈에서 7돈. 그건 둘이 쓰는 것이었다. 그러면 하나가 쓰는 것은 그 절반쯤일 텐데, 자기가 바르트보다 더 먹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바르트는 아침에 빵 반 개를 먹고 그만두었다.
"나 얼마야."
바르트가 초 심지에서 손을 뗐다.
"뭐가."
"하루에. 내가 먹는 거."
바르트가 노트를 앞으로 몇 장 넘겼다. 폐허에 있던 동안 적어 둔 쪽이었다. 거기에는 날짜마다 켈리가 먹은 것이 적혀 있었다. 무엇을 몇 번. 바르트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입속으로 뭔가를 세었다.
"자네 혼자 5돈쯤. 나보다 많이 먹어."

켈리가 그 숫자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것이 자기에게 붙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울의 47처럼 붙어 있었는데, 저울의 숫자와 달리 이쪽은 날마다 새로 생겨났다.
"내가 안 먹으면."
"그럼 돈은 남지."
"그럼 안 먹을게."
바르트가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켈리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짚이 눌리는 소리가 났다.
"안 먹으면 돈은 남고, 대신 자네가 줄어. 그것도 어디로든 가는 거야. 없어지는 게 아니고."
"어디로 가는데."
"그건 나도 몰라."
바르트가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손깍지를 꼈다.
"근데 하나는 알아. 이 세상에 공짜로 없어지는 건 없어. 자네가 안 내면 누가 내는 거고, 아무도 안 내는 것 같으면 그건 안 내는 게 아니라 내가 누가 내는지 모르는 거야."

켈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며칠 전 분지에서 들은 말과 같은 말이라는 것만은 알아들었다. 그때는 잉여가 어디로 가느냐는 이야기였고 지금은 빵값 이야기인데, 바르트는 그 둘을 같은 얼굴로 말했다. 바르트가 초를 껐다. 헛간이 어두워지고 벽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짚 끝을 흔들었다. 켈리는 담요를 턱까지 끌어 올리고 누워서 눈을 뜬 채로 서까래 쪽을 보았다. 거미줄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데도 거기 있다는 것은 알았다. 조금 전까지 불빛 아래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켈리는 그 생각을 하다가 낮에 들은 말 하나가 같은 모양이라는 데에 닿았다. 누가 내는지 모르면 아무도 안 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어두워지면 거미줄이 없어 보이는 것과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갔으나 그다음으로는 가지 못했다. 그다음으로 가려면 누가 내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했고, 그것은 오늘 물었다가 대답을 못 받은 것이었다. 켈리는 대답을 못 받은 질문을 두 번 묻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켈리가 그날 배운 말은 값 하나였다. 그 말이 빵에도 붙고 소금에도 붙고 헛간 바닥 짚 한 줌에도 붙는다는 것을 그날 알았고, 자기에게도 하루 5돈씩 붙어 있다는 것까지 알았다. 다만 그 값을 여태 누가 대신 내 왔으며 그 대가로 무엇을 가져가기로 되어 있었는지를 알게 되는 데는, 그로부터 한참이 더 걸렸다.

 

다섯 개의 이름


베렐을 떠난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농가 주인이 헛간 문을 열어 주면서 남서쪽 길 사정을 일러 주었다. 사흘쯤 내리막이 이어지고 그 끝에 갈림길이 있는데 가운데로 가면 여울을 두 번 건너야 하니 왼쪽으로 붙으라고 했다. 바르트가 고맙다고 하면서 어제 산 소금을 한 줌 덜어 주었다. 주인이 사양했고 바르트가 다시 밀었고 주인이 받았다. 그 주고받는 동작이 세 번쯤 오갔다. 사양하고 다시 밀고 마지못한 척 받는 그 절차에는 이름이 있었고, 대륙 어디를 가나 형태만 조금씩 다를 뿐 같은 것이 있었으며, 아이들은 대개 예닐곱 살 무렵에 어른들을 보고 그것을 익힌다. 켈리는 익힌 적이 없었다. 켈리가 본 것은 세 가지가 한자리에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소금에는 3돈이라는 값이 붙어 있었고, 값이 붙은 것을 아무 대가 없이 덜어 주는 일이 있었으며, 주는 쪽과 받는 쪽이 한 번씩 미루는 순서가 있었다. 그 셋이 어떻게 한자리에 같이 있을 수 있는지를 켈리는 알 수 없었다. 물어보려다가 바르트가 이미 걷기 시작했으므로 따라갔다.

길은 이틀 내내 완만한 내리막이었다. 겨울이 끝나 가는 중이라 눈은 그늘진 자리에만 남아 있었고, 녹은 물이 길 가장자리로 흘러 가느다란 도랑을 만들었다. 물소리가 계속 오른쪽에서 났다. 켈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걷는 것 자체는 힘들지 않았다. 힘든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켈리는 걸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이상한 말 같지만 사실이었다. 육성소에서는 대형을 맞춰 이동했고 전선에서는 행군하거나 달렸다. 대형은 앞사람의 뒤통수를 보고 보폭을 맞추는 일이었고, 행군은 정해진 시각까지 정해진 지점에 닿는 일이었으며, 달리기는 뒤를 보지 않는 일이었다. 셋 다 걷는 것과는 달랐다. 그냥 어딘가로 가면서 옆 사람과 속도를 맞추고 도중에 서고 싶으면 서는 것, 그런 식의 이동을 켈리는 열여덟 해 만에 처음 해 보는 중이었고,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바르트는 느렸다. 켈리가 평소 속도로 걸으면 백 보쯤 만에 뒤가 비었고, 그러면 켈리는 멈춰 서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서 있었다. 열두 해 동안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줄을 서서 하는 것이었고 줄에는 반드시 앞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앞사람이 뒤에 있었다. 켈리는 그 구조를 처음 겪어 보았고, 겪는 동안 자기 발끝을 자주 내려다보았다.

바르트가 느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무릎이었다. 왼쪽 무릎이 오르막에서는 그럭저럭인데 내리막에서 말을 듣지 않았고, 그래서 내리막일수록 더 느려졌다. 사흘째 저녁에 켈리가 그것을 물었다. 바르트가 바지를 걷어 무릎을 보여 주었는데 한쪽이 다른 쪽보다 눈에 띄게 굵었다. 만져 보라고 해서 만져 보니 안에 딱딱한 것이 들어 있었다. 뼈는 아니었다. 뼈는 그렇게 둥글지 않았다.
"이것도 대가야?"
"이건 계량 잘못한 거고."
"뭐가 달라."
"안 달라. 그냥 내가 못한 거지."
"못하면 더 와?"
"더 오지. 정확히 맞추면 안 오고."
켈리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잘못하지 않으면 대가가 안 온다는 뜻이었는데, 켈리가 아는 대가는 잘하고 못하고와 상관없이 왔다. 열일곱 번을 다 제대로 해냈어도 손은 매번 두 시간씩 굳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치르는 값과 자기가 치르는 값은 다른 종류인 모양이었다. 어떻게 다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둘의 차이는 실은 간단했다. 바르트가 치르는 것은 실수의 값이었고 켈리가 치르는 것은 존재의 값이었다. 실수는 줄일 수 있고 존재는 줄일 수 없다. 켈리가 그 구분에 이름을 붙이게 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며, 붙이고 나서도 그것을 남에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사흘째부터 켈리는 조금씩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다. 다만 멈춰 서서 기다리는 것보다 처음부터 천천히 걷는 편이 덜 이상했고, 그 편이 덜 이상하다는 것을 켈리가 스스로 알아냈다. 바르트는 그것을 알아차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노트에 한 줄이 늘었을 뿐이었다.

갈림길은 사흘째 오후에 나왔다. 길이 세 갈래로 갈렸고 어느 쪽에도 표지판이 없었다. 바르트가 잠깐 서서 해를 보더니 왼쪽 길로 들어섰다. 왼쪽은 남서쪽이었다. 처음부터 계속 그랬다.
"왜 맨날 저쪽이야."
"북쪽에는 내가 못 가."
"왜."
바르트가 대답하지 않고 걸었다. 켈리는 더 묻지 않았다. 묻지 말아야 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대답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시 묻는 방법을 몰라서였다. 열두 해 동안 대답하지 않는 쪽은 언제나 가르치는 쪽이었고, 가르치는 쪽에 두 번 묻는 일은 없었다.

그날 밤 켈리는 그 말을 한 번 더 생각했다. 못 간다는 것은 가는 방법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가면 안 된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켈리가 아는 못 간다는 것은 전부 두 번째였다. 가면 안 되는 데가 있었고 가면 안 되는 시각이 있었고 가면 안 되는 이유는 알려 주지 않았다. 바르트가 말한 못 간다가 어느 쪽인지 켈리는 알 수 없었다. 물어보면 알 수 있을 텐데 물어보는 방법을 몰랐고,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 요즘 들어 자꾸 걸렸다. 전에는 걸린 적이 없던 일이었다.

나흘째 낮에 둘은 볕이 드는 바위에 앉아 쉬었다. 남쪽으로 트인 비탈이라 바람이 없었고 흙이 마르기 시작한 오후였다. 바위가 미지근했다. 바르트가 마른 빵을 반으로 갈라 한쪽을 켈리에게 주었고 켈리는 그것을 받아 먹기 시작했다. 저쪽 비탈에서 새가 두 번 울었다. 같은 간격으로 두 번이었고, 조금 있다가 또 두 번이었다.

켈리가 빵을 다 먹고 손바닥을 털었다. 그러고 나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려다가 말았고 다시 열려다가 말았다. 물어보는 일에는 순서가 있었다. 육성소에서는 손을 들고 호명을 기다린 다음 물었고, 물을 수 있는 항목은 정해져 있었으며, 정해지지 않은 것을 물으면 대답 대신 다른 것이 돌아왔다. 전선에서는 아예 손을 들지 않았다. 지금 옆에 앉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한 적이 없었고 항목을 정해 준 적도 없었는데, 정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켈리에게는 오히려 어려웠다. 어디까지가 물어도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긴 어느 나라야."

바르트가 씹던 것을 멈췄다.

켈리가 무언가를 물은 적은 여러 번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물은 것은 전부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이게 빵이냐, 값이 뭐냐, 다 쓰면 어떻게 되느냐. 손으로 짚을 수 있는 것들이었고 대답도 손으로 짚어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눈앞에 없는 것을 물은 것은 처음이었다. 바르트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알아차렸다는 표시를 내지는 않았다. 표시를 내면 다음부터 묻지 않을 것 같아서였는데, 그런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로서는 낯선 일이었다. 그는 평생 사람보다 물건을 많이 다뤘고, 물건은 이쪽이 어떤 얼굴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바르트가 남은 빵을 종이에 싸서 품에 넣었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발치의 젖은 흙을 손바닥으로 몇 번 쓸어 고르고, 옆에 떨어진 마른 막대기를 하나 주웠다. 무릎이 좋지 않은 사람이 쪼그려 앉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앉고 나서 한 번 더 자세를 고쳤다.
"자네 지금 글자 읽지."
"읽어."
"어디까지."
"번호. 수량. 소속."
"그럼 됐네."
바르트가 막대기 끝으로 고른 흙 가운데에 긴 줄을 하나 그었다. 줄은 비뚤었고 길었다. 한 번 긋고 나서 끝을 조금 더 늘였다.
"여기가 회랑이야."

켈리가 그 줄을 보았다. 자기가 삼 년을 산 곳이 흙 위의 손가락 두 마디였다. 그 두 마디 안에 베르단이 있고 카인 북단이 있고 하렌 방면이 있었다. 이름만 남은 땅들이 전부 거기 들어 있었다. 켈리는 그 땅을 걸어서 가로지르는 데 이틀이 걸린다는 것을 알았고, 폭으로는 열다섯 킬로미터쯤 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손가락 두 마디가 열다섯 킬로미터라면 이 흙바닥은 어느 정도인지 계산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나눌 숫자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척도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실제 거리와 그려진 거리 사이에 정해진 비율이 있고 그 비율을 알면 종이 위의 한 뼘에서 걸어야 할 날수를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켈리는 몰랐다. 모르는 편이 마땅했다. 지도는 벨류엔에서 마법사에게 지급되는 물품이 아니었고, 지급되지 않는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자기가 선 자리를 전체 안에서 짚을 수 있게 되면 그다음에 하게 되는 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마법청은 알았고, 그래서 켈리의 손에는 열두 해 동안 어떤 지도도 쥐여지지 않았다.

바르트가 줄 위쪽에 넓은 모양을 그렸다. 크게 그렸다. 막대기가 두 번 왔다 갔다 하고서야 테두리가 닫혔다.
"여기가 자플랜."
그리고 줄 아래 오른쪽에 또 하나를 그렸다. 위쪽 것보다 뚜렷하게 작았다.
"여기가 벨류엔."
켈리가 두 개를 번갈아 보았다.
"자플랜이 더 크네."
"훨씬 크지."
"얼마나."
"땅으로는 네 배쯤. 사람으로는 그보다 더 되고."
"근데 왜 못 이겨."
바르트가 막대기로 아래쪽 모양을 두 번 두드렸다.
"저쪽은 사람이 많고, 이쪽은 사람 하나가 사람 백을 하니까."

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 하나가 사람 백을 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켈리는 알았다. 그것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았다. 백을 하려면 백만큼의 값을 내야 하고 값은 몸에서 나가고 몸은 한정되어 있었다. 열네 달이라는 숫자를 켈리가 들어 본 적은 없었지만, 들어 본 적이 없어도 막사에서 사람이 줄어드는 속도는 세어 볼 수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세어 본 적이 있었다. 세고 나서 다시는 세지 않았다. 켈리는 무릎 위에 놓은 손을 한 번 쥐었다가 폈다.

바르트가 막대기를 자플랜 안쪽으로 옮겼다. 오른쪽 위였다. 막대기 끝을 거기에 댔다. 대고만 있었다. 흙에 점이 하나 찍혔을 뿐 선은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가 막대기를 뗐고,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거긴 뭐야."
"없어."
"없어?"
"지금은 없어."
"전에는 있었어?"
바르트가 막대기로 다른 데를 가리켰다. 왼쪽 아래였다.
"이쪽 얘기부터 하자."
켈리가 그 점을 한 번 더 보았다. 점은 곧 마른 흙에 섞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바르트가 막대기를 왼쪽 아래로 가져갔다. 그리고 동그라미를 그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서로 붙지 않게 조금씩 떨어뜨려서 그렸다. 그리는 데 꽤 시간이 걸렸고 다 그리고 나서는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건 뭐야."
"나라."
"다섯 개?"
"다섯 개."

켈리가 아는 나라는 둘이었다. 하나는 자기가 속한 곳이고 하나는 쏘는 쪽이었다. 그 둘 말고 더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들어 본 적이 없으면 없는 것이라고 켈리는 여태 여겨 왔다. 세계의 크기를 자기가 들은 말의 크기로 재는 셈인데, 그 버릇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켈리 자신도 몰랐다. 마법청이 가르친 것은 번호와 수량과 소속과 명령이었다. 그 넷으로 열두 해가 돌아갔다. 나라의 수는 거기 없었다. 없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으니, 셋 이상을 알면 고를 수 있게 되고 고를 수 있게 되면 떠날 수도 있게 되기 때문이다. 둘만 아는 사람에게 세상은 여기 아니면 저기이고, 저기가 쏘는 쪽이라면 남는 것은 여기 하나뿐이었다.

바르트가 동그라미 안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흙에는 잘 써지지 않아서 획마다 두 번씩 덧그었다. 다 쓰고 나서 막대기로 하나씩 짚었다.
켈리가 그것을 읽었다. 소리를 내어 읽었다.
"아르베인. 로엔. 타르실. 드란. 실베인."
읽고 나서 한 번 더 읽었다. 입에 붙지 않았다. 처음 내 보는 소리들이었다. 회랑의 표지판에 적혀 있던 이름들은 전부 없어진 것의 이름이었는데, 흙바닥의 이 다섯은 아직 있는 것의 이름이었다. 있는 것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 보는 일이 그렇게까지 다르다는 것을 켈리는 그때 처음 알았다.

"어디로 가."
바르트가 세 번째 동그라미를 짚었다.
"여기. 타르실. 항구 있는 데."
"나머지는."
"로엔은 밀. 어제 먹은 거 그쪽에서 온 거야."
켈리가 로엔이라고 쓰인 동그라미를 보았다. 빵이 어디선가 오기는 했을 텐데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본 적이 없다기보다, 빵에 출처가 있다는 것 자체가 새로웠다. 육성소와 군대의 배식대에는 솥이 있었고 솥 안에 든 것이 어디서 실려 왔는지를 묻는 아이는 없었다. 묻는 항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 사람들은 뭐 해."
"밀 키우지. 그거 말고는 별로 안 해."
"그럼 그거 누가 다 먹어."
"여기저기 다 먹어. 위에도 가고 아래에도 가고."
바르트가 막대기 끝으로 로엔에서 자플랜 쪽으로 선을 하나 긋고, 다시 로엔에서 벨류엔 쪽으로 선을 하나 그었다. 두 선이 로엔에서 갈라져 나갔다.
"그러니까 저기를 굶기면 위아래가 같이 굶어. 그래서 아무도 저기는 안 건드려."
"안 건드리면 좋은 거 아니야?"
"좋지. 지금까지는."

바르트가 막대기를 옮겼다.
"드란은 산이고. 사람 파는 데야."
"사람을 팔아?"
"싸우는 사람. 돈 주면 가서 싸워 줘."
"누구 편으로."
"돈 준 쪽."
켈리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편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태어나면 정해지고 번호를 받으면 확정되며 그 뒤로는 바뀌지 않는다. 켈리는 자기 편을 고른 적이 없었고 고를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돈으로 정하는 사람들이 산속에 살고 있다고 했다. 편을 돈으로 정할 수 있다면 편이란 값이 붙는 물건이라는 뜻이고, 값이 붙는 물건이라면 켈리의 편에도 값이 붙어 있었을 것이었다. 그 값을 누가 치렀는지는 사흘 전 돌담에서 물었다가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 형제끼리 다른 편 될 수도 있어?"
바르트가 막대기를 들었다가 그대로 두었다. 대답이 조금 늦게 나왔다.
"되지."
"그럼 어떻게 해."
"모르겠어. 나는 산에 안 살아 봐서."

"실베인은 늪이야. 이상한 거 하는 사람 많고."
"이상한 거."
"자네 같은 거. 근데 방식이 달라."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마법사?"
"아니. 그건 아니야."
바르트가 뭐라고 더 설명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설명할 말을 고르는 얼굴이었는데 마땅한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막대기로 실베인 동그라미의 테두리를 한 번 덧그었다.
"자네 쪽은 힘을 밀어내는 거잖아. 저쪽은 뭐랄까, 빌리거나 걸거나 부르거나 그래. 규칙이 계통마다 다르고 하는 사람마다도 좀 달라. 나도 다 몰라."
"너도 그거야?"
"나는 또 다른 거고."
"그럼 몇 개야."
"여섯인가 일곱인가. 세는 사람마다 달라."
켈리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는 사람마다 다른 숫자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숫자는 하나였다. 스물셋은 어디서 세도 스물셋이었다.
"나중에 보면 알아."

켈리가 마지막 동그라미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는."
"아르베인. 기사 있는 데. 다섯 중에 제일 가난해."
"기사가 뭐야."
"칼 쓰는 사람. 말 타고. 규칙 많고."
"무슨 규칙."
"안 싸우기로 한 사람은 안 치고, 항복하면 안 죽이고, 뭐 그런 거. 지키는지는 모르겠다만."
켈리가 그 말을 들으면서 눈을 한 번 깜빡였다. 항복하면 안 죽인다는 규칙이 있다는 말이었다. 켈리가 아는 규칙 중에 누구를 안 죽이는 쪽으로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규칙은 전부 누가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하고 몇 시에 자는지를 정하는 것이었다.
"마법사는."
"없어."
켈리가 손을 뗐다.
"그럼 뭘로 싸워."

"안 싸워."

켈리가 바르트를 보았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바르트는 막대기 끝으로 흙을 긁고 있었고 딴 데를 보고 있지도 않았으므로,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다.
"안 싸워?"
"지금은 안 싸워."
"왜."
바르트가 막대기를 흙에 꽂았다.
"안 해도 되니까."

켈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싸우지 않아도 되는 상태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었는데, 켈리가 아는 세계에서 싸움은 날씨 같은 것이었다. 좋고 나쁨이 있을 뿐 있고 없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겨울에 눈이 안 올 수는 있어도 겨울이 안 올 수는 없었다. 켈리가 다섯 개의 동그라미를 다시 보았다. 다섯 군데 전부 눈이 안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건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태 그랬다는 뜻이기도 했다. 켈리가 저울에 올라가고 벌판을 돌고 열일곱 번 손을 드는 동안, 저 동그라미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밀을 키우고 배를 띄우고 말을 타고 다녔으며, 그중 누구도 켈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고 알아야 할 까닭도 없었다. 세상의 대부분은 켈리가 사는 방식으로 살지 않았다. 그것이 그날 오후 흙바닥 위에서 켈리에게 건네진 것이었고, 건넨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건네고 있는지 절반쯤만 알고 있었다.

"그럼 저기 애들은 뭐 해."
바르트가 막대기를 잡은 손을 멈췄다.
"뭐?"
"애들. 저기 애들은 뭐 해."
바르트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대답을 찾는 중이었는데, 켈리가 보기에는 둘이 같아 보였다.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새가 또 두 번 울었다. 바르트가 아는 대답은 여러 개 있었다. 밭에 나가고, 물을 긷고, 가축을 보고, 더러는 학교 비슷한 데에 가고, 대개는 그냥 놀았다. 그중 어느 것도 이 아이에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놀았다는 말을 하려면 논다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말해야 했다.

"그냥 살지."

"그냥?"
"응. 그냥."
켈리가 다섯 개의 동그라미를 보았다. 하나씩 보았다. 아르베인, 로엔, 타르실, 드란, 실베인. 그 안에 사람이 있고 그중에 켈리만 한 아이들이 있고 그 아이들은 아침에 저울에 올라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켈리는 저울에 올라가지 않는 아침이라는 것을 상상해 보려다가 실패했다. 재지 않으면 무엇으로 그날의 양을 정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지 않고 그냥 주는 것일까. 그럼 얼마나 주는 것일까. 얼마나 먹을지를 자기가 정하는 것일까. 마지막 생각까지 가고 나서 켈리는 그것을 그만두었다. 그 생각은 어제 바르트가 그릇을 밀어 주었을 때 켈리를 한참 앉아 있게 만든 것과 같은 종류였고, 같은 자리에서 또 막혔다.

바르트가 일어섰다. 무릎을 짚고 일어나면서 짧게 소리를 냈고, 짐을 메고, 막대기를 흙에 꽂아 둔 채 길 쪽으로 두어 걸음 옮겼다. 켈리는 아직 앉아 있었다.

켈리가 손을 뻗어 오른쪽 아래의 모양을 짚었다. 벨류엔이었다. 손가락 끝이 흙에 조금 묻었다.
"우리 어디 있어."
바르트가 돌아와서 막대기를 뽑아 들고, 회랑 아래쪽에서 왼쪽으로 조금 치우친 자리에 점을 하나 찍었다.
"여기."
켈리가 그 점을 보았다. 그리고 그 점과 벨류엔 사이를 보았다. 손가락 한 마디였다. 켈리는 열흘 가까이 걸었다. 하루에 몇 만 걸음씩 걸었고 발바닥이 두 번 까졌고 밤마다 다리가 아팠는데, 그게 손가락 한 마디였다.

가깝다고 켈리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다.

켈리가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는지 아닌지는 얼굴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같은 거리를 반대쪽에서 재는 사람들이 있었다. 벨류엔의 회수 담당자들은 지도를 펴 놓고 일한다. 사라진 자산이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를 지난 날수만큼 곱하고, 그 결과를 반지름 삼아 원을 그리고, 원 안에 든 마을들로 사람을 보낸다. 켈리가 열흘 동안 벌어 놓은 손가락 한 마디는 그 원 안에 넉넉히 들어가고도 남았다.

그러고 나서 켈리가 점과 타르실 사이를 보았다. 그쪽도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다섯 개의 동그라미는 전부 왼쪽 아래에 모여 있었고, 위쪽의 자플랜과는 회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며, 오른쪽 아래의 벨류엔과도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았다. 손을 펴면 셋이 다 덮였다.

켈리가 다섯 개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 세고 나서 한 번 더 세었다. 개수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달라진 것은 없었는데도 켈리는 그것을 세 번째로 세었고, 세면서 무엇을 확인하려는 것인지는 본인도 몰랐다.

"가자."
켈리가 일어섰다. 지도는 지우지 않았다. 지워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몰랐고, 바르트도 지우지 않았으므로 그냥 두었다. 걷다가 한 번 뒤를 돌아보았는데 비탈이 꺾여서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은 길에서 조금 벗어난 바위 밑에서 잤다. 바람을 막아 주는 자리를 바르트가 골랐고,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작게 피웠다. 크게 피우면 멀리서 보인다고 했다. 누가 보면 안 되느냐고 켈리가 물었더니, 안 되는 사람이 딱히 정해진 건 아니지만 보여서 좋을 일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켈리는 그 말이 맞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으나 불이 작은 것 자체는 좋았다. 작은 불은 오래 봐도 눈이 아프지 않았다. 바르트가 노트에 그날 몫을 적고 먼저 누웠다. 그는 눕자마자 잠들었다. 매번 그랬다. 켈리는 매번 그러지 못했다.

불이 잦아들 때까지 켈리는 앉아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얹고 불을 보았다. 그러다 오른손을 폈다. 그리고 엄지부터 하나씩 접었다. 엄지에서 아르베인, 검지에서 로엔, 중지에서 타르실, 약지에서 드란, 새끼손가락에서 실베인. 다섯이 되면 주먹이 되었다. 주먹을 폈다가 다시 처음부터 했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입술만 움직였다. 자는 사람 옆에서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육성소에서 배운 것 중 하나였고, 소등 뒤에 말을 하면 다음 날 배식이 줄었다. 줄어 봐야 얼마 안 줄었는데도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켈리는 그 규칙이 지금 이 자리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는 것과 몸이 하는 것은 별개였고, 그 둘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도 겨우 몇 주 전부터였다.

외우는 이유는 분명했다. 적어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켈리는 글자를 읽었지만 쓸 줄은 몰랐다. 읽는 것은 가르쳐 주었고 쓰는 것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번호를 읽어야 자기 자리를 찾고 수량을 읽어야 배급을 확인하는데, 마법사가 무언가를 써야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쓸 일이 없는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 기준은 그것 하나였고, 그 기준을 세운 사람은 아마 악의가 없었을 것이다. 읽기만 가르친 자는 지시를 받을 수 있고 쓰기까지 배운 자는 지시를 남길 수 있다. 남긴 것은 다른 사람이 읽게 되고 읽은 사람은 그것을 다시 남긴다. 그런 연쇄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마법청은 오래전에 계산해 두었으며, 계산의 결론이 켈리의 손에 숯 한 자루가 쥐여지지 않은 이유였다. 그 기준으로 자기에게서 빠진 것이 무엇무엇인지를 켈리 자신은 아직 몰랐다.

그래서 켈리가 뭔가를 남겨 두는 방법은 외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잊어버리면 다시 물어야 하는데, 다시 묻는 방법을 켈리는 몰랐다. 한 번 물어서 대답을 들은 것을 또 묻는 일이 육성소에는 없었다. 그러니 잊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켈리는 그날 밤 그 다섯을 몇 번이나 셌는지 세지 않았다. 세는 것까지 세지는 않았다. 다만 불이 완전히 꺼졌을 때도 순서가 헷갈리지 않았으므로 충분히 셌다고 판단하고 누웠다.

누워서도 한 번 더 했다. 아르베인, 로엔, 타르실, 드란, 실베인. 그리고 손가락이 모자라서 세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지도의 오른쪽 아래에 있던 작은 모양이었다. 그것에도 이름이 있었고 켈리는 그 이름을 외울 필요가 없었다. 열두 해 동안 매일 들었으므로.

그 지도는 그 자리에 한동안 남아 있었다. 사흘 뒤에 비가 왔고 비가 오자 지워졌다. 켈리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그보다 오래갔는데, 남은 것은 나라 다섯의 이름이 아니라 동그라미 다섯 개의 크기였다. 다섯을 전부 합쳐도 위쪽 것 하나보다 작았다. 켈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날은 몰랐고,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 다섯 개를 전부 걸어 본 뒤였다.

 

때리는 편이 싸다


베렐에서 남서로 이틀을 더 갔을 때 길이 좁아지는 자리가 나왔다. 양옆으로 낮은 언덕이 붙어 있고 그 사이로 수레 한 대가 겨우 지날 폭의 길이 이어졌다. 길 끝에 마을이 있었다. 집이 열 채쯤 되는 작은 마을이었고 입구에 방앗간이 하나 서 있었는데 물레가 얼어붙어 돌지 않았다. 바르트가 그것을 보더니 저기서 물을 얻어 가자고 했다. 물에도 값이 붙느냐고 켈리가 물었고, 물은 대개 공짜라는 대답을 들었다. 대개라는 말이 왜 붙는지는 묻지 않았다. 요 며칠 사이 켈리는 대개라든가 보통이라든가 아마도라든가 하는 말들이 바깥이라는 데에 유난히 많이 붙어 다닌다는 것을 알아 가는 중이었다. 벨류엔의 문서에는 그런 말이 없었다. 문서는 얼마를 언제까지라고만 적었고, 적힌 대로 되지 않는 날에도 적힌 것 쪽이 고쳐지는 법은 없었다. 바깥은 반대였다. 말이 먼저 헐겁고 그 헐거운 자리 안에서 일이 실제로 어떻게 될지가 정해졌다.

셋이 나온 것은 언덕 그늘에서였다. 앞에 선 남자가 낡은 칼을 차고 있었는데 칼집이 가죽이 아니라 천으로 감겨 있었고 감은 것이 풀려 늘어져 있었다. 그 뒤에 몽둥이를 든 키 큰 남자가 있었고, 맨 뒤에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쪽은 아직 아이였다. 열대여섯쯤으로 보였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고 다른 둘보다 두 걸음쯤 떨어져 서 있었다. 셋 다 말랐다. 바르트보다도 켈리보다도 말랐다. 켈리는 그것을 먼저 보았다. 마른 것은 알아보기 쉬웠고, 얼마나 말랐는지로 며칠쯤 굶었는지를 어림하는 일은 켈리가 아주 오래 해 온 것이었다.

켈리가 그다음으로 알아차린 것은 저들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열일곱 번의 출격에서 켈리가 본 사람들은 전부 등을 보이거나 땅에 엎드려 있었고, 그래서 켈리에게 사람의 정면이란 같은 편의 얼굴을 뜻하는 말이었다. 지금 언덕 그늘에서 나온 셋은 같은 편이 아닌데 정면으로 오고 있었다. 그런 종류의 사람은 켈리의 열여덟 해에 한 번도 없었다. 켈리는 그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고, 알고 나서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몰랐다.

"짐 내려놓으쇼."
바르트가 배낭을 벗어 발치에 내려놓았다. 순순히 내려놓는 것을 보고 켈리가 그를 보았는데 얼굴에 별다른 것이 없었다. 화가 난 것도 겁을 먹은 것도 아니고 그냥 배낭을 내려놓는 얼굴이었다. 그는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것이 아니었다. 북쪽에서 빠져나오던 해에 세 번 당했고, 그중 두 번은 그냥 내주었고 한 번은 안 내주려다 갈비뼈가 나갔다. 나간 갈비뼈는 넉 달이 지나서야 제대로 붙었고 그동안 일을 못 했다. 그래서 그는 그 뒤로 셈을 해 두고 다녔다. 쇳조각 서 돈어치와 갈비뼈 하나를 놓고 보면 어느 쪽이 싼지는 계산할 것도 없었다.
"안에 쇠붙이밖에 없소."
"열어 보쇼."
바르트가 끈을 풀었다. 병 여섯 개와 천에 싸맨 주머니들과 연장과 노트가 보였다. 칼을 찬 남자가 그중에서 쇳조각이 든 자루를 끌어냈다. 무게가 있어서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거 팔아 봐야 값 안 나오오."
"그걸 댁이 왜 정하쇼."
"정하는 게 아니라 아는 거요. 그 안에 든 게 죄 부러진 축이랑 녹슨 판때기라 그냥 쇠로 치면 서 돈어치야. 셋이 나누면 한 사람에 한 돈이고, 그걸 지고 마을까지 내려가는 값이 더 들 거요."
남자가 잠깐 멈췄다. 셈을 해 보는 얼굴이었고 셈이 오래 걸리는 얼굴이기도 했다. 그러다 옆에 선 키 큰 남자가 뭐라고 짧게 한마디 했고, 그러자 칼을 찬 남자가 자루를 어깨에 얹었다.
"그래도 한 돈이 어디요."

바르트가 자루 끈을 잡았다. 놓지 않으려고 잡은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말해 보려고 잡은 것 같았는데, 키 큰 남자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몽둥이가 아니라 손으로 밀었다. 세게 민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바르트는 무릎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고 짐을 벗어 균형이 어긋나 있었고 발밑이 얼어 있었다. 뒤로 두 걸음 밀리다가 발이 걸렸고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넘어지면서 팔꿈치가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품에서 노트가 빠져나와 젖은 흙 위로 떨어졌다.

켈리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손가락이 벌어지고 팔꿈치가 펴졌다. 마법청의 교범은 그 동작을 제3 기립이라 적어 두었고, 그 아래에 자세가 잡히기까지 허용되는 시간의 상한을 표로 붙여 두었다. 켈리의 몸은 그 표의 절반쯤 되는 시간에 자세를 잡았다. 열두 해가 그 시간을 줄여 놓았으며, 줄여 놓은 만큼이 켈리가 돌파형으로 분류된 이유였다. 팔 안쪽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깨에서 손목 쪽으로 무언가가 번져 내려왔고, 다 번지면 그다음은 정해져 있었다. 그 뒤의 일을 켈리는 매번 보지 못했다. 보고 있을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을 들면 무언가가 없어졌고 없어진 자리에서 켈리는 달렸다. 그것이 절차였다.

"안 돼."
바르트였다. 흙바닥에 옆으로 누운 채로 낸 소리였고 크지 않았다. 켈리가 멈췄다. 손이 올라간 채로 멈췄다. 팔 안쪽의 열은 멈추지 않고 계속 번졌으므로, 멈춘 것은 켈리의 팔이 아니라 켈리였다. 켈리는 그 목소리가 명령인지 아닌지 잠깐 헷갈렸다. 명령이면 따르면 되고 따르면 끝나는데, 바르트는 명령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방금 한 말은 명령처럼 들렸고, 켈리의 몸은 명령처럼 들리는 것에는 먼저 반응하게 되어 있었다.

"저기 집 있어."
바르트가 팔꿈치를 짚고 몸을 일으키면서 턱으로 마을 쪽을 가리켰다.
"자네가 여기서 터뜨리면 저 집들 값을 우리가 물어."
켈리가 그 말을 들었다. 단어는 전부 아는 것이었다. 집이 있고 값이 있고 문다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떻게 한 문장으로 붙는지가 잡히지 않았다. 켈리가 아는 세계에서 터뜨리는 것에는 값이 붙지 않았다. 그것은 명령이었고, 명령에 값을 물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값은 빵에 붙는 것이었다.
"…내가?"
"자네가. 나도."
"왜."
"부쉈으니까."

켈리는 며칠 전 돌담에 앉아서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그때도 값 이야기였고 그때도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럼 누가 냈는데. 바르트는 일어나서 가자고 했고 해가 진다고 했다. 켈리가 삼 년 동안 터뜨린 것들에도 값이 붙어 있었다면 그것 역시 누군가 냈을 것이었다. 부서진 집이 있었고 부서진 사람이 있었고 그 전부에 값이 붙었다면, 그 값은 열일곱 번어치였다. 누가 냈는지는 그때도 지금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방금 알았다. 지금 여기서 터뜨리면 그 값을 낼 사람이 이 자리에 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방금 넘어져서 아직 다 일어나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칼을 찬 남자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인지 켈리는 듣지 않았다. 켈리는 자기 오른손을 보고 있었다. 손끝이 조금 떨렸고 그것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올라온 것이 아직 안 내려가서였다. 그 상태로 두면 어디로든 나가게 되어 있었다. 여태 그것을 안 나가게 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켈리는 지금 자기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것을 안 나가게 하고 있었다. 올라온 것을 쓰지 않고 내려보내는 데에도 값이 붙는지는 아무도 말해 준 적이 없었는데, 팔이 어깨까지 무거워지는 것을 보면 아마 붙는 모양이었다.

켈리가 손을 내렸다. 내리고 나서 왼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오른손으로 옮겨 잡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잡았다. 아래쪽을 잡았다. 그렇게 잡는 법은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고 그날 켈리가 혼자 정한 것이었는데, 정했다기보다 두 손으로 잡으면 덜 흔들리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했다. 훗날 다섯 나라의 교본에 실리게 되는 자세가 그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정해졌다. 교본을 쓴 사람들은 그것이 오랜 연구의 산물이라고 적었으나 실제로는 열여덟 살짜리가 언덕 밑에서 반 호흡 만에 정한 것이었고, 정한 근거는 덜 흔들리겠다는 짐작 하나였다.

켈리는 사람을 때려 본 적이 없었다.

터뜨려 본 적은 열일곱 번 있었다. 그것은 스무 보쯤 떨어진 데서 손을 들면 되는 일이었고 그다음에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는 켈리가 보지 않았다. 보라고 한 적이 없었고 볼 여유도 없었다. 터뜨리고 나면 뛰어야 했으므로 뒤를 돌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리가 세 걸음이었고 상대의 얼굴이 보였고 그 얼굴이 자기 쪽을 보고 있었다. 보고 있는 얼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배운 것이 없었다.

켈리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위로 들었다. 장작을 패는 자세였다. 그런 자세를 배운 적은 없었는데 무거운 것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동작은 몸이 알고 있었다. 모래주머니를 들었다 내려놓는 일을 삼 년 동안 매일 했고, 그때는 아무도 그것을 무기 쓰는 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냥 다리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들어 올리면서 팔에 힘을 넣었다. 넣는다기보다 아까부터 열려 있던 것을 그쪽으로 흘려보냈다. 뜨거운 것이 어깨에서 손목까지 한 번에 내려갔고 손아귀가 저렸다. 저리고 나서 조여들었다. 아이언우드가 갑자기 가벼워졌다. 무게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켈리 쪽이 세진 것이었는데, 몸은 그 둘을 구별하지 못하고 똑같이 가볍다고 느꼈다.

내려쳤다. 빗나갔다.

키 큰 남자는 세 걸음 앞에 있었는데 지팡이는 그보다 한 걸음 오른쪽 땅에 떨어졌다. 켈리는 조준을 못 했다. 스무 보에서 못 하던 것을 세 걸음에서 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고 실제로 못 했다. 다만 스무 보에서 빗나가는 것과 세 걸음에서 빗나가는 것은 결과가 달랐다. 스무 보에서는 엉뚱한 데가 없어졌고, 세 걸음에서는 땅이 파였다. 얼어 있던 흙이 깨지면서 소리가 났다. 쿵이 아니라 쩍, 하는 소리였다. 파인 자리가 켈리의 발만 했고 깊이가 손 한 뼘이었다. 흙덩이가 튀어서 키 큰 남자의 무릎에 맞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키 큰 남자가 파인 자리를 보았다. 그리고 지팡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쥐고 있는 마른 여자애를 보았다. 세 가지를 차례로 보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고, 그 시간 동안 켈리는 박힌 지팡이를 뽑아내고 있었다. 잘 안 빠져서 두 번 흔들었다. 두 번째에 뽑혔고, 뽑히면서 흙이 한 줌 딸려 나왔다. 그리고 남자가 몽둥이를 들었다. 아마 들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켈리가 두 번째를 쳤다. 이번에는 옆으로 쳤다. 위에서 아래로 치면 빗나간다는 것을 방금 배웠으므로 옆으로 쓸었고, 옆으로 쓸면 빗나가더라도 어딘가에는 닿는다는 것까지는 계산이 아니라 우연이었다. 지팡이가 몽둥이에 먼저 닿았다. 몽둥이가 부러졌다. 부러진 것이 튀어 나가고 나서도 지팡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 가서 남자의 팔뚝에 닿았다. 닿는 소리가 났는데 나무에 닿을 때와 다른 소리였다. 켈리는 그 소리를 처음 들었고, 들으면서 손으로도 느꼈다. 들고 있는 나무를 통해 저쪽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손바닥으로 전해져 왔다. 무언가가 한 번 걸렸다가 미끄러졌다.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몽둥이 자루를 놓고 팔을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칼을 찬 남자가 자루를 떨어뜨렸다. 떨어뜨리고 나서 잠깐 서 있다가, 주저앉은 쪽의 옷깃을 잡아 끌어 일으켜 세우고 언덕 쪽으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면서 계속 켈리를 보았다. 켈리도 보았다. 칼은 끝까지 뽑지 않았고 아마 뽑을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터뜨릴 때에는 없던 일이었다. 멀리서 하는 일에는 손에 남는 것이 없고, 손에 남는 것이 없으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의 경계도 함께 흐려진다. 벨류엔이 마법사에게 거리를 주는 까닭이 사거리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무 보 밖에서 손을 드는 아이는 자기가 무엇을 부수었는지를 손바닥으로 알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도 자기 몫을 따져 물을 수가 없다. 그날 세 걸음 거리에서 켈리의 손바닥으로 올라온 감각은 열두 해 동안 벨류엔이 켈리에게 주지 않기로 되어 있던 것이었다.

맨 뒤에 있던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아이가 켈리를 보고 있었고 켈리도 그 아이를 보았다.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고 두 발이 모여 있었고 시선이 정면보다 약간 아래였다. 켈리가 지팡이를 든 채로 멈췄다. 왜 멈췄는지는 몰랐다. 다만 저 자세를 어디서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디서 봤는지가 떠오르려다 말았으며, 떠오르기 전에 칼을 찬 남자가 그 아이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셋이 언덕을 넘어갔다. 자루는 그 자리에 있었다. 켈리는 계속 서 있었다. 지팡이를 두 손으로 쥔 채였다. 끝났다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터뜨린 다음에는 뛰라는 지시가 있었고 돌아오면 보고하라는 절차가 있었는데, 때린 다음에 무엇을 하라는 항목은 어디에도 없었다. 켈리는 그 항목이 없는 자리에 서서 언덕 쪽을 계속 보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어깨가 조금씩 내려갔다.

"이제 놔도 돼."
바르트가 흙을 털면서 일어나 있었다. 팔꿈치 쪽이 찢어져 피가 비쳤고 바지에 진흙이 묻어 있었다. 그가 먼저 한 일은 노트를 주워 겉장의 흙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는 것이었다. 두 번 닦고 나서 품에 넣고, 그러고 나서야 자기 팔꿈치를 들여다보았다. 켈리가 손가락을 폈다. 펴지기는 하는데 도로 오므라지지 않았다. 지팡이가 손에서 떨어져 땅에 부딪혔다. 켈리가 그것을 다시 주우려고 몸을 굽혔는데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는 자리가 없었다. 손목부터 팔꿈치까지가 남의 것 같았고, 팔을 들어 올리는 것까지는 되는데 쥐는 것이 안 되었다. 켈리는 그 상태를 알고 있었다. 매번 이랬다. 벨류엔의 문서는 이것을 소모라고 적었다. 소모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는 것이었으므로 손실 항목에 들어가지 않았고, 손실 항목에 들어가지 않는 것에는 아무도 값을 붙이지 않았다. 켈리가 열일곱 번에 걸쳐 치른 두 시간들은 그런 식으로 어느 장부에도 오르지 않았다.

"왔나."
바르트가 옆에 와서 쪼그려 앉았다. 켈리의 손을 보고 있었다.
"뭐가."
"대가. 지금 온 거지?"
"어."
"어디로."
"손."
"얼마나 가나."
"두 시간쯤."
"매번 그만큼인가."
"세게 쓰면 더 가."
"더 가면 얼마나."
"하루."
"하루 동안 손을 못 쓰나."
"어."
바르트가 그 대답을 듣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노트를 폈다. 젖은 손으로 숯을 잡아서 글씨가 번졌다. 그래도 적었다. 적으면서 한 번 더 물었다.
"아까가 세게 쓴 건가."
켈리가 파인 구덩이 쪽을 보았다.
"아니."

둘은 길가 돌에 앉아서 기다렸다. 바르트가 물통을 꺼내 켈리 손에 물을 부었다. 씻으라고 부은 것이 아니라 감각이 돌아오는지 보려고 부은 것이었는데, 차갑다는 것은 느껴졌다. 느껴지는데 오므라지지 않았다. 켈리가 그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열여덟 해를 쓴 손이었고 굳은살이 세 군데 박혀 있었다. 지팡이가 닿는 자리와 밧줄이 닿는 자리와 모래주머니 끈이 닿는 자리였다. 세 군데 다 벨류엔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벨류엔이 만들지 않은 자리를 찾으려면 아무것도 닿지 않은 손바닥 한가운데를 보아야 했는데, 하필 그 자리에 오늘 처음으로 무언가가 생겼다. 나무를 통해 남의 뼈가 한 번 걸렸다 미끄러지던 감각이 거기 남아 있었다. 그것은 굳은살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바르트는 그동안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자기 팔꿈치에 뭔가를 발랐다. 바르는 동안 얼굴을 한 번 찡그렸다.

"그거 내가 물어야 돼?"
"뭘."
"팔. 피 나잖아."
바르트가 병뚜껑을 닫으면서 자기 팔꿈치를 들여다보았다.
"이건 저쪽이 물어야지. 민 사람이 있으니까."
"근데 갔잖아."
"갔지."
"그럼 어떻게 돼."
"그냥 내가 떠안는 거야."
바르트가 병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세상에 못 받는 값이 꽤 많아. 받을 데가 도망가기도 하고, 받을 데가 죽기도 하고, 받을 데가 어딘지 몰라서 못 받기도 하고. 그런 건 그냥 누가 떠안는 거지."
"누가."
"거기 있던 사람."
켈리가 그 말을 생각해 보았다. 값은 붙어 있고 누군가는 내야 하는데 낼 사람이 없으면 옆에 있던 사람이 낸다는 뜻이었다. 그건 켈리가 아는 어떤 것과 모양이 비슷했다. 무엇과 비슷한지까지는 그날 생각이 닿지 않았다.

"저거는 물어야 돼?"
"뭘."
"저거. 땅 파인 거."
바르트가 그쪽을 보더니 웃었다. 소리는 내지 않고 어깨만 한 번 움직였다.
"저건 안 물어도 돼. 땅은 주인이 없으면 안 물고, 주인이 있어도 저 정도는 안 따져."
"어떻게 알아."
"따지려면 재야 되거든. 재는 값이 더 비싸."
켈리가 구덩이를 다시 보았다. 재는 값이 더 비싸다는 말을 켈리는 처음 들었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다. 알아들었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했다. 요즘 이 사람이 하는 말 중에 알아듣는 것이 조금씩 늘고 있었고, 그게 어떻게 늘어나는지는 켈리도 몰랐다. 배우고 있다는 감각은 없었다. 배운다는 것은 벌판을 돌고 표적 앞에 서는 일이었지 돌에 앉아서 구덩이를 보는 일이 아니었다.

바르트가 다 적고 나서 노트를 돌려 켈리 쪽으로 보여 주었다. 켈리가 읽었다. 글씨가 번져 있었지만 읽을 수는 있었다.

강화 더하기 타격. 대가 적음. 배상 없음.

"뭔 뜻이야."
"자네가 아까 한 게 제일 싸다는 뜻이야."
"싸."
"터뜨리면 자네 몸에서 며칠이 나가고 저기 집들 값까지 물어야 돼. 아까처럼 하면 손 두 시간이면 끝나고 아무한테도 안 물어도 되고. 그럼 싼 거지."
켈리가 그 줄을 다시 보았다. 셈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며칠과 두 시간이었고 무는 것과 안 무는 것이었다. 켈리는 셈을 잘했으므로 어느 쪽이 싼지는 바로 알았다. 다만 그 셈을 자기가 해도 되는 것인지는 몰랐다. 여태 무엇을 쓸지 정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고, 그 사람은 값을 계산해서 정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계산한 것은 다른 것이었고 켈리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자네 아까 왜 손 내렸어."
"네가 안 된다고 했잖아."
"그래."
바르트가 숯을 내려놓았다.
"그럼 내가 하라면 해?"

"응."

켈리는 구덩이를 보고 있었고 방금 한 대답이 어떤 대답인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켈리에게 그 질문은 물을 필요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고, 물을 필요가 없는 것에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바르트는 그 대답을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북쪽의 어느 작업장에서 몇 해를 같이 일한 사람들이 꼭 그렇게 대답했다. 하라면 했고 물으면 응이라고 했고 며칠씩 앓다가 그중 몇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그가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하라면 한다고 대답하는 사람 옆에 오래 서 있으면 언젠가 하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쁜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니었다. 편한 쪽으로 한 번씩 기울어지는 과정이었고, 기울기가 워낙 완만해서 기울어지는 동안에는 아무도 자기가 기울고 있는 줄을 몰랐다. 그가 아는 한 그 경사를 되돌아 올라온 사람은 없었다. 되돌아오려면 자기가 어디까지 내려왔는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은 대개 사람이 하나 없어진 뒤에 남는 빈자리였다.

바르트가 오래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일어나 자루를 끌어와 배낭에 도로 넣고, 켈리의 지팡이를 주워 켈리 옆에 기대어 놓고, 두 시간쯤 여기서 쉬어 가자고 했다. 물은 내일 얻어도 된다고 했다. 켈리가 알겠다고 했고, 그 말을 하면서 자기가 또 대답만 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둘은 해가 기울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마을은 걸어서 스무 보쯤이었는데 들어가지 않았다. 바르트가 오늘은 안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했고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켈리는 그 이유를 나중에야 짐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언덕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소리가 난 쪽에서 낯선 둘이 걸어 내려오면 그 둘을 반기지 않을 것이었다. 부순 것에 값이 붙는다면 소리에도 무언가가 붙는 모양이었다.

앉아 있는 동안 켈리는 오른손보다 다른 것을 더 많이 생각했다. 두 번째로 쳤을 때 손바닥으로 올라온 감각이었다. 나무를 통해 사람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전해져 왔고, 무언가가 한 번 걸렸다가 미끄러졌다. 켈리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았다. 팔뼈였다. 걸렸다가 미끄러졌다는 것은 부러지지는 않았다는 뜻이었고, 부러졌다면 걸린 자리에서 그대로 갔을 것이었다. 켈리는 그 차이를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알았다. 알고 나서 손바닥을 바지에 두 번 문질렀다. 문질러도 그 감각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터뜨릴 때는 이런 것이 없었다. 손을 들면 멀리서 무언가가 사라졌고 켈리는 뛰었고 그게 전부였다. 무엇이 어떻게 부서지는지가 손으로 올라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켈리는 그날 처음으로 자기가 한 일이 손에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좋은지 나쁜지는 판단하지 못했다. 판단할 항목이 없었다.

그날 밤은 마을 바깥 헛간에서 잤다. 방앗간 옆에 있는 것이었고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문이 열려 있었다. 바르트가 그걸 확인하고 나서, 아침에 사람이 오면 값을 치르면 된다고 했다. 켈리가 그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먼저 들어가 놓고 나중에 무는 것도 되는 모양이었다.

손은 두 시간이 조금 넘어서 돌아왔다. 손가락이 오므라지기 시작할 때 저릿한 것이 손끝에서 손목 쪽으로 올라왔고, 그 뒤로는 쥘 수 있었다. 켈리는 몇 번 쥐었다 폈다 해 보고 나서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등불 가까이 가져가 살펴보았다. 얼어붙은 흙을 그만큼 쳤으면 어딘가 상했어야 했다. 아무 자국도 없었다. 흙만 조금 끼어 있었고 그것은 손톱으로 긁으니 떨어졌다. 나무 표면이 매끈했고 금 간 데도 없었고 끝이 뭉개지지도 않았다. 켈리는 그것을 두 번 돌려 가며 확인했다.

아이언우드였다. 보급대에서 지급할 때 뭐라고 설명해 주지도 않았고 켈리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삼 년을 쓰는 동안 이 물건에 흠이 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것도 좀 이상했다. 이 나라는 마법사에게 싸구려만 지급했다. 옷은 얇았고 신은 밑창이 금방 닳았고 담요는 한 장이었다. 그런데 이 지팡이만은 삼 년째 멀쩡했다. 켈리가 그것을 무릎에 놓고 손잡이 쪽을 만져 보았다. 거기만 닳아 있었다. 누군가 오래 쥐었던 자리였고 켈리가 받았을 때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 누군가가 몇 호였는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적을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손잡이 아래쪽에 평평한 면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새길 수 있었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바르트가 그때 노트를 폈다. 낮에 적은 줄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그 줄은 그날의 지출도 아니고 켈리가 먹은 양도 아니었으므로 이 노트의 어느 항목에도 속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적었다. 여섯 글자였다.

명령하지 말 것.

수신자가 없는 문장이었다. 그가 평생 적어 온 줄들은 전부 나중에 누군가 읽고 셈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한 줄만은 읽을 사람이 자기뿐이었고, 읽어도 셈이 맞춰지지 않았다. 금지 조항이란 대개 이미 저지른 자가 만든다. 그는 자기가 아직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었고, 믿으면서도 적었다. 적어 두지 않으면 잊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잊지 않으면서도 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켈리는 그 줄을 보지 못했다. 반대쪽을 보고 앉아 지팡이를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있다가 등불이 꺼졌고 둘 다 누웠다. 누워서 켈리는 낮에 본 것을 한 번 더 떠올렸다. 맨 뒤에 서 있던 아이였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고 두 발이 모여 있었고 시선이 정면보다 조금 아래였다. 그 자세를 어디서 봤는지가 그때 생각났다. 여러 군데서 봤다. 줄 서 있는 데서 봤고 점호할 때 봤고 저울 앞에서 봤다. 다들 그렇게 서 있었다. 켈리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지시를 기다리는 자세였고, 켈리가 아는 한 그 자세는 육성소와 전선에만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벨류엔 사람이 아니었고 마법사도 아니었고 남색 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번호도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서 있었다. 켈리는 한참 동안 그 앞뒤를 맞춰 보려고 했다. 맞춰지지 않았다. 저 자세가 육성소 바깥에도 있다면 그건 육성소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뜻인데, 그럼 누가 만든 것인지를 켈리는 알 수 없었고, 그 질문을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켈리는 결국 그것을 접어 두었다. 접어 둔 것들이 요즘 자꾸 늘어나고 있었다. 그 전에는 접어 둘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접어 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들기 전에 손가락이 오므라지는지 두 번 더 확인했고, 두 번 다 오므라졌으므로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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