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이빨목이 어디인지 일행 가운데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는 사람은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은 문간 안쪽 마당에서 도리깨를 들고 있었다. 탁, 그리고 쉼, 그리고 탁. 어제 우물가에서 등 뒤로 듣던 박자였다. 켈리는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도 셈은 할 수 있었다. 위로 간 사람의 종이에는 협로 수비라고 적혀 있었고 아래로 간 사람의 종이에는 길잡이라고 적혀 있었다. 길잡이는 길을 넘으려는 쪽에 붙었다. 켈리는 삼 년 동안 열일곱 번 넘는 쪽에 섰다. 앞에서 길을 아는 사람이 셋을 세면 뛰었고, 뛰어간 끝에는 늘 그 길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이름의 길이면 같은 끝이었다.
켈리의 발이 문간 쪽으로 한 걸음 나갔다. 두 번째 걸음은 나가지 않았다. 어젯밤 등잔 아래에서 처음 들은 말이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소리는 내지 마. 남의 셈이야. 오벨이 수첩을 덮어 가방 맨 안쪽에 넣고 끈을 한 번 더 조였다. 니카는 주머니 속에서 주사위를 쥐었다가 놓았다. 바르트는 처마 밑에 아직 가로로 걸린 장대를 올려다보다가 그것을 내리지 않았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는 것을 각자 따로 정했다는 것을 서로 알았다. 유안 혼자 이빨목이 무엇이냐고 물으려다가 다른 얼굴들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마당의 도리깨 소리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어제와 달랐다.
돌담 위의 회색은 그 자리에 있었다. 산마루를 넘어온 해가 등의 털끝을 하얗게 비췄다. 늑대는 두 길이 갈라지는 쪽을 보다가 이따금 마당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리깨가 떨어질 때마다 귀 하나가 그쪽으로 꺾였다. 린이 헛간 앞에서 털가죽 둘을 안고 왔다. 개울가 뿌리 밑에서 받아 든 뒤로 열여드레를 들고 다닌 것이었다. 접힌 자리마다 털이 눌려 하얗게 닳아 있었다. 린은 그것을 돌담 위, 늑대에게서 두 뼘쯤 떨어진 자리에 올려놓았다. 늑대가 털가죽을 내려다보았다. 코끝이 한 번 움직였다. 그뿐이었다.
"영감님."
린이 불렀다. 귀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리깨 소리에는 움직이던 귀였다.
"…사흘."
켈리가 말했다. 다들 켈리를 보았다.
"숲지기가 그랬어. 사흘 들고 있었더니 돌아왔다고."
"무슨 사흘입니까."
오벨이 물었다. 물어 놓고 오벨은 덮었던 수첩을 다시 꺼냈다. 어귀의 사흘은 오벨에게 없었다. 서기에게 담보로 내준 날들이었고, 그 자리에는 린이 외어 준 것을 받아 적은 몇 장이 대신 들어 있었다. 오벨의 손가락이 그 장을 짚어 내려가다 한 줄에서 멈췄다.
"떨어뜨리고 가길래요. 사흘 들고 있었더니 돌아오던데요."
오벨이 읽었다. 자기 글씨였다. 그 말을 한 목소리가 높았는지 낮았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적혀 있습니다. 제 글씨로."
켈리가 허리춤에서 뼈와 깃털 끈을 풀었다. 국자는 그대로 두었다. 끈을 왼 손목에 두 번 감고 끝을 이로 물어 당겨 묶었다. 숲 가장자리에서도 산마루에서도 그렇게 감고 팔을 들었다. 그때마다 늑대는 거기 있었고, 거기까지만 있었다. 켈리가 돌담 앞으로 갔다. 가까웠다. 수염 끝에 붙은 보리 까끄라기가 보였다. 켈리는 무엇이라고 부를지 정해야 했다. 일행은 그를 영감님이라고 불렀다. 린이 그렇게 불렀고 켈리도 따라 불렀다. 그런데 어귀에서 숲지기는 그를 영감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숲지기가 사흘 동안 들고 있었던 것은 다른 이름이었다.
"고슈."
켈리가 불렀다. 한 번이었다.
그러고는 기다렸다. 발뒤꿈치가 저절로 붙었다. 턱이 조금 들리고 두 팔이 몸 옆으로 내려가 손바닥이 허벅지에 붙었다. 켈리는 그대로 서 있었다. 도리깨 소리가 다섯 번 났다. 여섯 번 났다. 파리 한 마리가 켈리의 귀 옆을 맴돌다 갔다. 해가 목덜미에 내려앉았고, 마당에서 날아온 보리 먼지가 콧속을 간질였다. 켈리는 재채기를 참았다. 점호 중에는 재채기도 대답으로 들릴 수 있었다. 늑대가 하품을 했다. 켈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 번 더 안 불러요?"
니카가 물었다.
"불렀어."
도리깨 소리가 열 번을 넘었다. 켈리가 그제야 몸을 돌려 바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노트."
바르트가 묻지 않고 노트를 건넸다. 맨 뒷장이 펴졌다. 켈리가 「할름」 줄 아래에 새 줄을 긋고 여백에 「돌담」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고슈 칸에 연필을 댔다. 연필이 움직이기 전에 린이 그 끝을 잡았다.
"뭐 써."
"대답 없음."
"그건 적는 거 아니야."
"대답 없으면 적어."
"누가 그래?"
켈리는 잠깐 생각했다.
"…서기."
린은 연필을 놓지 않았다. 바르트가 노트 귀퉁이에서 눈을 돌렸고 오벨은 수첩을 덮었다. 니카의 손은 주머니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유안만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여러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켈리뿐이었는데, 켈리는 그것이 설명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몰랐다.
"여긴 서기 없어. 부르는 건 대답 올 때까지 하는 거야."
"몇 번."
"올 때까지."
켈리가 늑대를 올려다보았다. 늑대는 켈리를 보지 않았다. 켈리는 고슈 칸을 비운 채로 노트를 바르트에게 돌려주고 돌담 앞에 다시 섰다. 이번에는 발뒤꿈치가 붙지 않았다.
"고슈."
기다리지 않았다.
"고슈."
손목을 들 때마다 끈 끝에 매달린 뼈 두 개가 서로 부딪혀 딸깍 소리를 냈다. 늑대의 귀 하나가 그 소리 쪽으로 꺾였다가 돌아갔다.
"돌아올 확률, 6할이에요. 61.1 퍼센트"
니카가 말했다. 그날 니카가 내놓은 첫 숫자였다.
린은 점심을 먹고 나서 생각을 고쳤다. 이름만 던지는 것은 예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깊이 들어간 사람은 사람보다 정령 쪽에 가까이 가 있는 사람이었고, 정령에게는 부르는 것이 아니라 청하는 것이었다. 린이 돌담 앞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바닥을 땅에 댔다. 어귀에서 늙은 정령 앞에 앉던 자세였다. 마당 저편에서 잉가가 한 번 이쪽을 보고 다시 장대를 들었다.
"돌담 위에 앉으신 회색 털의 분께. 실베인 소아레에서 온 린이, 이름을 모르고 부르는 무례를 먼저—"
"이름 알잖아요."
니카가 말했다.
"지금은 모르는 거야. 영감님이 두고 왔으니까."
린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늑대가 하품을 했다.
린의 청은 첫 번째 사과를 지나 두 번째 사과로 넘어갔다. 늦게 청하는 무례에 대한 사과였다.
늑대가 앞발 위에 턱을 얹었다.
린의 청은 돌담으로 넘어갔다. 돌담 위의 분께 청하려면 돌담에게 먼저 인사해야 했고, 그 돌담을 쌓은 손들에게도 해야 했다.
늑대의 눈이 반쯤 감겼다.
도리깨 소리가 서른 번쯤 났다. 켈리가 짚단을 털다 말고 한 번 불렀다. 린이 눈을 흘겼다. 켈리는 다음 짚단에서는 부르지 않았다.
린이 마지막 대목에 들어섰다. 돌아와 주시기를 바라는 까닭을 셋 드는 대목이었다. 첫째 까닭을 다 말했을 때 늑대의 옆구리가 고르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잠들어 있었다.
린이 입을 다물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한참 늑대를 올려다보았다.
"…주무셔."
"4할이요."
니카가 고쳤다.
린이 땅에서 손바닥을 뗐다. 무릎을 펴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흙 묻은 손을 무릎에 문질렀다.
"아냐. 영감님한테는 이렇게 안 했어."
린이 늑대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청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소아레의 마루 끝에서, 늪가 둔덕에서, 해 질 녘 모닥불 앞에서 하던 얼굴이었다.
"영감님. 밥 먹어요."
늑대의 귀가 섰다. 눈이 떠졌고 고개가 들렸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린이 털가죽을 올려놓은 자리를 보고, 늑대를 보고, 제 손을 보았다. 열여드레 들고 다닌 것은 털가죽이었는데 귀를 세운 것은 밥이었다. 린은 그것이 억울한 일인지 다행한 일인지 얼굴로 정하지 못했다.
"…밥은 들리네."
그날 저녁 잉가의 탁자에는 그릇이 여섯 놓였다. 켈리가 셌다. 어제 저녁에는 여덟이었다. 잉가는 일행이 먹는 동안 화덕 옆에 서 있다가, 다들 숟가락을 내려놓기 전에 그릇 하나를 더 채워 들고 밖으로 나갔다. 문틈으로 보였다. 잉가는 돌담 앞까지 가서 그릇을 담 위에 올려놓았다. 털가죽 반대쪽, 늑대에게서 팔 하나만큼 떨어진 자리였다.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늑대도 잉가를 보기만 했다. 잉가는 돌아와 화덕 앞에 앉아 제 그릇을 들었다. 한낮에 린이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잉가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당 저편에서 장대를 들고 있었으니 들었을 것이었다. 켈리는 묻지 않았다. 계약서에는 세 끼가 적혀 있었고 그것은 여섯 사람 몫이었다. 일곱째 그릇이 누구의 셈인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담 위의 그릇은 비어 있었다. 바닥까지 핥은 자국이 햇빛에 번들거렸다. 늑대는 그대로 거기 있었다. 켈리가 「돌담」 줄 고슈 칸에 적었다. 죽 먹음. 안 내려옴. 바르트는 노트를 돌려받으며 그 줄을 오래 보았다. 그러다 노트를 든 채로 돌담 앞으로 갔다. 늑대가 내려다보았다. 바르트가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노트에 적힌 것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은 바르트가 서른 해 동안 해 온 일이었다. 남의 글씨를 읽어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개울. 물음표. 그 옆에, 멀리. 앉아 있음."
켈리의 글씨였다가 오벨의 글씨였다가 다시 켈리의 글씨였다. 바르트는 글씨가 바뀌는 자리에서 조금씩 쉬었다.
"계곡. 개 데려감. 쉰 날, 칸 밖에. 토끼 하나."
늑대의 귀가 섰다.
"산마루. 조금 가까이. 안개. 빵 먹음. 가까이."
귀가 또 섰다. 니카가 손가락을 꼽았다.
"이름보다 먹는 거에 귀가 설 확률, 9할이에요."
"할름. 망루 위 바위. 돌담. 죽 먹음. 안 내려옴."
바르트가 노트를 내렸다. 다 읽고 나서야 무엇을 읽었는지 안 얼굴이었다. 개울가 숲 가장자리, 계곡, 산마루 아래 바위, 안개 속 바위, 망루 위, 그리고 돌담. 칸 하나에 몇 글자씩 적힌 것이 열아흐레 동안 늑대가 걸어온 자리였다. 바르트의 손가락이 그 칸을 아래에서 위로 한 번 더 짚어 올라갔다.
"자네가 온 길이야. 개울에서부터."
늑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처음으로 담 위에서 몸을 돌려 바르트 쪽을 보고 앉았다.
오벨은 한낮의 쉬는 참에 수첩을 들고 돌담 앞에 섰다. 오벨이 아는 부르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고슈. 계약 제1조에 따라—"
거기서 멈췄다. 고슈와 맺은 계약은 없었다. 고슈는 적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벨은 기침을 한 번 하고 수첩을 넘겼다. 계약이 없으면 신원부터 확인하는 것이 순서였다.
"성명, 고슈. 출신, 실베인. 계통, 드루이드. 연령, 미상. 성—"
펜이 멈췄다. 실베인에서는 땅이 성을 대신했다. 린은 소아레 린이었다. 오벨이 린을 보았다.
"고슈 씨의 땅은 어디입니까."
"못 들었어요. 영감님은 늘 숲에 있었어요."
기재할 수 없는 칸을 비워 두는 것은 법률가가 할 일이 아니었고, 모르는 것을 지어 적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오벨의 펜이 칸 위에 뜬 채로 있었다.
"나도 아직이야."
켈리가 짚단을 털다 말고 말했다. 켈리의 땅 이름은 소아레에서 「아직」으로 외워져 있었다. 오벨이 켈리를 보았다. 한참 보았다.
"…기재 보류."
"아직."
"같은 말입니다."
오벨이 칸에 「보류」라고 적고 소리 내어 읽었다. 성, 보류. 늑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니카가 5할이라고 했다가 곧 4할로 고쳤다. 니카의 숫자는 이틀 동안 6할과 4할 사이를 오르내렸는데, 그가 하루에 숫자를 몇 번 고쳤는지는 그의 체면을 위해 적지 않기로 한다.
유안은 하루에 두 번 돌담 앞을 지나며 늑대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벨에게 숙이던 것과 같은 깊이였다. 늑대는 두 번 다 입술을 들었다. 유안은 두 번 다 같은 깊이로 고개를 들고 지나갔다. 켈리는 짚단 하나를 털 때마다 한 번씩 불렀다. 저녁에는 짚단이 없어도 불렀다. 부를 때마다 손목에서 딸깍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늑대의 귀 하나가 이쪽으로 꺾였다. 켈리는 그것이 이름 때문인지 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둘은 언제나 같이 갔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켈리에게 낯선 일이었다. 열두 해 동안 켈리는 불리는 쪽에 서 있었다. 불리면 나가서 저울에 올랐고, 불리면 대답했고, 불리면 뛰었다. 부르는 쪽은 장부를 든 사람이었고 그 사람은 한 번 부르면 다음 번호로 넘어갔다. 켈리는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같은 이름을 부르고 같은 이름을 다시 불렀다. 두 글자는 부를수록 입에 붙었고, 입에 붙을수록 이상하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숲지기가 말한 무게가 이런 것인지 켈리는 알 수 없었다. 해 질 무렵에는 목 안쪽이 따끔거렸다. 켈리는 그것도 값인지 생각해 보았고, 적을지 말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날 밤 헛간 앞 마당에서 유안이 종이를 폈다. 이틀 동안 유안은 한 번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부를 이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유안은 먹을 갈고 붓을 적셨다. 부르는 부적이 있다고 했다. 다들 유안의 손을 보았다. 붓 끝이 종이 위로 내려가다가 첫 획을 긋기 직전에 멈췄다. 등잔 불이 두 번 흔들리는 동안 멈춰 있다가 유안이 붓을 들어 올렸다.
"…얼굴을 모르면 획이 안 섭니다."
"얼굴이라 함은."
오벨이 물었다.
"부르는 글자는 부를 사람을 알고 씁니다. 저는 그분을 늑대로만 압니다. 늑대로 알고 쓰면 늑대가 옵니다."
"이미 와 있잖아요."
니카가 담 위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러니 이대로는 쓸 까닭이 없습니다. 어떤 분이었습니까."
다들 서로를 보았다. 처음 입을 연 것은 니카였다.
"늪에 빠진 우리를 꺼내 줬어요. 그러고 사십 분 동안 늪 얘기를 했어요. 우리가 젖은 채로요."
"사십 분입니까."
"제가 셌어요. 이제 끝날 확률을 오 분마다 셌는데 여덟 번 다 틀렸어요."
유안이 붓 끝으로 종이 귀퉁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획이 아니라 메모였다.
"평소에는 말이 없어요. 늪 얘기 할 때만 길어요."
린이 덧붙였다.
"변하고 돌아오면 반나절은 말이 끊기지. 소아레 갈 때 그랬어. 털가죽을 하나 뒤집어 입고 나와서 한 발로 서 있었지. 이렇게."
바르트가 앉은 채로 한 발을 들었다. 옆구리 때문에 몸이 기울었고 린이 그 어깨를 받쳤다.
"그리고 저를 안경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두 번."
린이 웃었다. 소리를 죽이려다 못 죽인 웃음이었다. 니카가 그 웃음에 힘을 얻었다.
"그 밤에도요."
마당이 잠깐 조용해졌다. 어느 밤인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열아흐레 동안 장부에는 그 밤을 적었으나 입으로 꺼낸 사람은 없었다.
"영감님 따라서 쇠뇌병 셋이 숲에 들어갔잖아요. 들어간 덤불로 도로 나왔잖아요. 셋이 서로 쳐다보고. 하나는 쇠뇌를 거꾸로 들고요."
바르트가 먼저 웃었다. 옆구리를 누르면서 웃었다.
"그 낮에는 내가 이 사람을 자루처럼 메고 뛰었지."
바르트가 오벨의 가방을 끌어다 어깨에 거꾸로 걸쳤다. 오벨이 손을 뻗었으나 늦었다.
"거꾸로 매달려서는—"
"「제 왼쪽이요!」"
니카가 가는 목소리로 외쳤다. 바르트가 왼쪽으로 돌았다.
"「아저씨 오른쪽, 백 보!」"
린이 외쳤다. 바르트가 오른쪽으로 돌았다. 어깨의 가방이 한 박자 늦게 따라 돌며 오벨의 머리를 쳤다. 안경이 날아갔다. 오벨이 무릎으로 땅을 더듬었다.
그때 소리가 났다.
짧은 소리였는데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숨이 한꺼번에 나가지 않고 여러 번으로 쪼개져 나갔고, 어깨가 그 박자로 흔들렸다. 켈리는 그 소리가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 다들 웃음을 멈추고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켈리의 입이 아직 벌어져 있었다.
"…왜."
"웃었어."
린이 말했다.
"누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오벨이 안경을 찾아 쓰고 켈리를 보았다. 쓰고 나서 본 것이 쓰기 전에 본 것과 같은지 확인하는 얼굴이었다. 바르트는 가방을 어깨에서 내리는 것을 잊었다. 켈리가 손끝으로 제 입가를 만졌다. 열두 해 동안 그 입에서 나간 것은 대답과 복창과 숫자였다. 그 밖의 것이 나간 자리를 처음 만져 보는 손이었다.
담 위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늑대가 일어서 있었다. 귀 둘이 다 이쪽을 향해 있었다.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데 일어서 있었다. 한참 그렇게 서 있다가 늑대는 다시 앉았다.
웃음이 그친 자리에 사람 수가 남았다. 이야기 속에는 여섯이 있었다. 불가에도 여섯이 앉아 있었다. 같은 여섯이 아니었다.
유안이 붓을 내려다보았다. 먹이 붓 끝에서 말라 가고 있었다.
"…획은 섰습니다."
"그럼 써."
켈리가 말했다. 목소리가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안이 붓을 물그릇에 헹궜다. 빈 종이를 접어 소매에 넣었다.
"제가 쓸 획이 아닙니다."
켈리가 일어나 돌담 쪽으로 갔다.
켈리는 그 밤 헛간 앞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돌담 밑에 마주 앉아 무릎을 세웠다. 담 위에는 잉가가 저녁에 다시 놓고 간 그릇이 있었고 그 옆에 털가죽 둘이 있었고 그 옆에 늑대가 있었다. 켈리는 불렀다. 부르고 나서 기다리지 않았고, 다시 불렀다. 손목을 들면 딸깍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손목을 어깨까지 들었는데 밤이 깊어지자 무릎 위에서 조금만 들었다. 그래도 소리는 났다. 켈리는 부른 횟수를 세지 않았다. 세기 시작하면 어디서 그칠지를 정해야 했다. 잉가네 창의 등잔이 꺼졌고 헛간 앞의 숨소리가 하나씩 고르게 되었다. 린의 숨소리가 가장 늦게 골라졌다. 늑대가 담 위에서 엎드렸다. 켈리는 늑대의 숨소리를 들으며 불렀다. 목이 거칠어졌다. 거칠어진 목으로도 이름은 나왔다. 두 글자였다.
산의 밤은 낮보다 소리가 많았다. 계단밭 돌담 틈에서 벌레가 울었고 처마의 이삭들이 바람에 서로 부딪쳤고, 망루 쪽에서 염소가 한 번 울고 그쳤다. 산마루 위로 별이 촘촘했다. 켈리의 어깨에 밤이슬이 내려앉았다. 담 위에서 늑대의 냄새가 내려왔다. 젖은 털과 마른 풀과 식은 죽이 섞인 냄새였다. 사흘 전보다 사람 냄새가 조금 더 섞였는지는 켈리의 코로는 가릴 수 없었다.
눈을 뜬 것은 물소리 때문이었다.
하늘이 회색이었다. 7월 15일의 새벽이었고, 켈리는 자기가 언제 눈을 감았는지 몰랐다. 손목은 무릎 위에 있었고 끈은 그대로 감겨 있었다.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담 위에 그릇이 있었다. 바닥까지 핥은 그릇이었다. 그 옆에 털가죽이 없었다. 그 옆에 늑대가 없었다. 켈리가 일어서려다 한 번 주저앉았다. 밤새 접고 있던 다리가 제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에 일어섰다. 물소리는 우물가에서 났다.
우물가 돌구유 앞에 사람 하나가 쭈그려 있었다. 얼굴을 물에 담그고 있었는데, 마시는 소리가 아니라 핥는 소리가 났다. 어깨에 털가죽 둘을 걸쳤고 하나는 뒤집혀 있었다. 털이 안으로 갔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볼까지 덮여 어디서 갈리는지 알 수 없었고, 구유 가장자리를 짚은 손의 손톱이 길었다. 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수염 끝에서 물이 떨어졌다. 그 사람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부르지 않았다. 사흘 동안 입에 달고 있던 이름이 입 안에 그대로 있었다. 부르면 대답이 올 것 같아서였는지 오지 않을 것 같아서였는지 켈리는 알지 못했다.
맨발이 흙을 차는 소리가 났다. 린이 헛간 앞에서 뛰어오다가 구유 다섯 걸음 앞에서 멈췄다. 그 사람이 린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린."
린의 입이 열렸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린은 고개만 끄덕였다. 여러 번 끄덕였다. 그 뒤로 바르트가 옆구리를 누르며 왔고 니카가 왔고 안경을 쓰면서 오벨이 왔고 맨 뒤에 유안이 왔다. 고슈가 하나씩 보았다.
"…바르트."
"응."
"…니카."
"…네."
고슈의 눈이 오벨에게서 오래 머물렀다. 오벨의 손이 안경다리에서 멈췄다.
"…오벨."
"…예."
오벨은 그 뒤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았다. 소아레로 가던 길에서는 「오벨입니다」를 붙였었다.
고슈의 코가 유안 쪽으로 한 번 움직였다. 윗입술이 아주 조금 들렸다가 내려왔다. 고슈는 아무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 유안이 고개를 숙였다. 늑대에게 숙이던 것과 같은 깊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므로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고슈가 켈리를 보았다. 얼굴을 보다가 눈이 내려갔다. 왼 손목이었다.
"…끈."
켈리가 입을 열었다. 목이 쉬어 있었다.
"…켈리야."
고슈가 켈리를 보았다. 손목을 보았다. 다시 켈리를 보았다.
"끈."
켈리는 더 고치지 않았다.
니카가 고개를 돌렸다. 어깨가 떨렸다. 린이 니카의 발을 밟았다.
고슈가 일어섰다. 무릎이 한 번 꺾였다가 펴졌다. 고슈가 마당을 둘러보다가 돌담 위의 빈 그릇에서 눈을 멈췄다.
"…죽."
문간에 잉가가 서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탁자에 있어. 들어와."
탁자에 그릇이 일곱 놓였다. 켈리가 셌다. 한 번 세고 한 번 더 셌다. 일곱이 한 탁자에 둘러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유안이 일행에 든 것은 고슈가 숲으로 들어간 뒤였다. 고슈는 그릇에 얼굴부터 가져갔다. 린이 그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고슈는 숟가락을 주먹으로 쥐었다. 다섯 손가락이 자루 끝까지 감겨서, 숟가락이 아니라 막대기를 쥔 손이었다. 켈리는 숟가락을 그렇게 쥐는 사람을 자기 말고는 처음 보았다. 고슈와 유안은 나란히 앉았는데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안이 고개를 숙이면 고슈의 코가 한 번 움직였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잉가는 화덕 옆에 서 있다가 다들 먹기 시작한 뒤에야 앉았다. 담 위의 그릇은 거두지 않았다. 방 안에 짐승 냄새가 났다. 잉가가 말없이 일어나 문을 끝까지 열어 두고 다시 앉았다. 고슈는 알아채지 못했다. 린은 알아챘고, 귀가 빨개졌다.
바르트가 노트를 켈리 앞에 밀어 놓았다. 켈리가 청하지 않았는데 맨 뒷장이 펴져 있었다. 고슈 칸에는 물음표에서 시작한 줄들이 차례로 내려와 있었다. 켈리가 「돌담」 줄 아래에 새 줄을 긋고 여백에 「사흘」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 맨 아래 고슈 칸에 적었다. 돌아옴. 연필이 켈리 칸으로 갔다. 사흘 동안 걸지 않았다. 그래도 낸 것이 있었다.
"…목."
켈리가 적으며 말했다. 쉰 소리였다.
"그게 값이야?"
"쉬었어."
바르트가 노트를 들여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린이 무릎을 내밀었다. 앞자락에 흙물이 배어 있었다.
"그럼 나도. 무릎."
켈리가 린 칸에 무릎이라고 적었다. 오벨이 수첩을 폈다.
"보고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스무 날 동안 보신 것을."
고슈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주먹을 펴는 데 한참 걸렸다. 그러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염소. 셋. 망루 밑. 하나 새끼 뱄어."
오벨이 적었다.
"까마귀. 아랫마을. 열하나. 전엔 넷. 개. 넷. 둘은 꼬리 말았어. 나 봐서. 쥐. 보리 끝나면 내려와. 담 틈으로. 이 집 담은 틈이 많아."
화덕 옆에서 잉가가 말했다.
"…그건 맞아."
고슈는 멈추지 않았다. 산의 물이 어느 바위 밑에서 나오는지, 한낮에 어느 그늘이 서늘한지, 산양이 어디서 소금기를 핥는지, 어느 비탈의 풀이 올해 먼저 말랐는지. 말과 말 사이를 잇는 것들이 빠져 있었는데도 말은 길었다. 니카가 열린 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바닥에서 얼마나 옮겨 갔는지를 보았다.
"…벌써 십오 분이에요."
린이 웃었다. 늪가에서 젖은 채로 사십 분을 듣던 얼굴이었다. 오벨은 받아 적는 손을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켈리는 고슈의 손을 보았다. 숟가락을 놓은 뒤에도 반쯤 쥐어져 있었다.
고슈가 말을 멈췄다. 손가락 하나가 들려 문밖을 가리켰다. 골짜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이틀 전 새벽 케이의 등이 안개 속으로 흐려져 간 쪽이었다.
"…골짜기."
다들 기다렸다.
"산 아래 골짜기에 사람이 모여 있어."
오벨의 펜이 멈췄다.
"깃발이 없어."
고슈가 코를 한 번 움직였다. 스무 날 동안 맡아 온 것을 다시 맡는 것 같았다.
"냄새가 두 가지야."
부엉이

냄새가 두 가지라는 말에 오벨의 펜은 잠깐만 멈췄다. 법률가의 펜은 놀라도 오래 멈추지 않는 법이었다. 오벨이 수첩 위로 몸을 기울였다.
"두 가지라 함은."
고슈가 코를 들었다. 문간으로 들어온 아침 바람을 한 번 맡고, 방 안을 한 번 맡더니 고개가 헛간 쪽 구석으로 돌아갔다. 거기 켈리의 자루가 세워져 있었다. 자루 맨 아래도 아니고 맨 위도 아닌 자리에 남색 로브가 개켜져 들어 있는 자루였다.
"…하나는 저거. 끈 자루."
다들 자루를 보았다. 자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색. 물감 냄새."
고슈가 다시 코를 들었다. 이번에는 오래 맡았다. 스무 날 동안 맡아 온 것을 하나씩 꺼내 보는 얼굴이었다.
"…하나는 쇠틀. 기름."
켈리는 셈을 했다. 남색은 벨류엔이었고 기름 먹은 쇠는 자플랜이었다. 거두러 오는 쪽과 데려가러 오는 쪽이었다. 둘이 같은 골짜기에 모여 있다면 셈은 한 줄로 끝났다. 그 한 줄 끝에 무엇이 적히는지 켈리는 타르실의 벽에서 읽었다. 분실 자산. 회수 협조. 켈리가 일어나 자루로 갔다. 끈을 쥐었다. 탁자 위의 그릇 일곱은 아직 다 비지 않았다.
"나가."
"어디로."
바르트가 물었다.
"마을 밖."
마을로 가면 마을이 값을 냈다. 산을 넘어올 때 켈리가 정한 길이었고, 그 길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켈리가 자루를 어깨에 걸치려는데 고슈가 고개를 저었다. 숟가락을 놓은 뒤에도 반쯤 쥐어진 손이 탁자 위에서 한 번 흔들렸다.
"…아니."
"뭐가."
"…쫓는 냄새 아니야."
켈리의 손이 멈췄다. 고슈는 말을 고르는 데 오래 걸렸다. 사람의 말 가운데 그 냄새에 맞는 것을 찾는 얼굴이었다.
"…배고픈 냄새."
아무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늑대로 스무 날을 산 사람이 배고픈 냄새를 모를 리 없었다. 바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탈영병이야. 양쪽에서 빠져나온."
오벨의 펜이 이번에는 오래 멈췄다.
"…어느 쪽 법에도 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켈리는 바르트가 쓴 낱말을 알았다. 마법청 문서에는 다른 말로 적혀 있었지만, 켈리가 한 일에 바깥 사람들이 붙이는 말은 그것이었다. 켈리의 눈이 처마로 갔다. 나무 갈고리마다 거꾸로 매달린 보리가 아침 바람에 이삭 끝을 부딪고 있었다. 배고픈 사람이 산을 올라오면 보는 것은 하나였다. 켈리는 그것을 알았다. 폐허에서 바르트가 그릇을 내밀던 날 켈리가 본 것도 그릇 하나였다.
화덕 옆에서 잉가가 말했다.
"…탈곡이 남았어."
잉가는 화덕의 불을 뒤적이던 부지깽이를 내려놓지 않았다. 말은 그것뿐이었다. 처마 밑 보리는 아직 이삭째였고, 이삭째인 보리는 들고 가기 쉬웠다. 털어서 자루에 담기 전의 보리에는 누구의 것인지 적혀 있지 않았다.
켈리가 자루를 내려놓았다. 오벨이 망루에 알려야 한다고 하자 잉가는 고개를 저었다. 망루는 계단밭 맨 위에서 산마루 길만 보았다.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길은 아래 밭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라 망루가 없었다. 왜 없느냐고 오벨이 묻자 잉가가 짧게 대답했다.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건 우리 사람뿐이었어."
잉가는 망루 아이를 산채로 올려 보냈다. 아이가 돌담을 뛰어넘어 사라진 뒤에 유안이 탁자 위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국물 자국이 동그랗게 남았다.
"범위를 정하면 빗나가도 됩니다."
유안이 켈리를 보았다. 안개 속에서 처음 만난 날과 같은 눈이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라 풀 것을 보는 눈이었다.
"제 글은 자주 빗나갑니다. 빗나가도 동그라미 안에서만 빗나가게 하면 됩니다. 켈리 씨의 것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고슈가 거들었다. 골짜기 길이 바위벽 밑으로 한 번 크게 굽는 자리가 있다고 했다. 유안이 그 말을 받았다.
"거기서 바위를 무너뜨리면 길이 막힙니다."
"…터뜨려?"
"바위 값은—"
오벨이 말을 꺼내자 잉가가 먼저 잘랐다.
"바위는 아무도 안 사."
터뜨리는 것은 켈리가 가장 오래 한 일이었고, 가장 오래 안 한 일이었다. 켈리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해 볼게."
"해 보는 겁니다."
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입니다."
할름 맨 아래 층에서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은 바위벽 밑을 따라가다가 한 번 크게 굽었다. 굽이는 마당만큼 넓었다. 한쪽은 사람 키 서넛을 쌓은 높이의 바위벽이었고 다른 쪽은 골짜기로 떨어지는 비탈이었다. 바위벽에는 풀 한 포기 붙어 있지 않았다. 터뜨려도 아무도 값을 묻지 않을 자리였다. 골짜기 아래에는 아침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아서, 길은 굽이 아래로 몇 걸음 내려가다가 흰 데로 사라졌다. 그 흰 데 어딘가에 고슈가 맡은 냄새가 있었다. 7월 16일 아침, 유안이 그 굽이 한가운데에 먹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사람 하나가 누울 만한 크기였다. 한 바퀴를 그리고 한 바퀴를 더 그렸는데 두 줄이 어긋나지 않았다. 맨 아래 층 돌담 위에는 아이들 머리가 일고여덟 개 나와 있었다. 오벨이 서른 걸음 밖으로 물러나 있으라고 했고 아이들은 서른 걸음을 정확히 지켰다. 그 가운데 레크도 있었다. 창 대신 보리 이삭을 하나 물고 있었다. 바르트는 노트 가운데 장을 펴고 맨 위에 「실험」이라고 적었다. 켈리는 동그라미 안에 섰다. 지팡이는 린이 들고 있었다.
첫째는 문이었다. 유안은 동그라미가 바위벽을 마주 보는 자리에 문을 하나 내겠다고 했다. 터진 것이 그 문으로만 나가 바위를 치게 하는 것이었다. 유안이 무릎을 꿇고 주홍 종이를 폈다. 획마다 숨을 멈추었고, 멈출 때마다 돌담 위 아이들도 따라 숨을 멈추었다. 다 쓴 종이를 동그라미의 바위 쪽 자리에 놓고 유안이 일어섰다. 가슴을 폈다. 이 대륙 말로 옮겨서 외쳤다.
"「문 속의 부—」"
마지막 글자에서 숨이 모자랐다. 획마다 숨을 멈추느라 숨을 다 쓴 뒤였다. 「불」의 끝소리가 혀끝에 걸리지 못하고 목으로 넘어가 둥글게 울렸다. 부웅.
종이가 재로 말려 올라갔다. 재는 흩어지지 않았다. 동그라미 위에서 한데 뭉치더니 깃을 펴듯 부풀었고, 펴진 자리에서 둥근 눈 두 개가 떠졌다. 노란 눈이었다. 한낮의 햇빛 속에서 그 눈이 천천히 한 번 감겼다 떠졌다.
부엉이였다.
부엉이는 먹줄 위에 앉아 고개를 반 바퀴 돌려 바위벽을 보고, 다시 반 바퀴 돌려 일행을 보았다. 그러고는 날아올랐다. 날갯짓 소리가 나지 않았다. 부엉이는 굽이를 한 바퀴 돌더니 가장 높은 자리를 골라 내려앉았다. 유안의 정수리였다. 높이 묶은 머리가 앉기에 꼭 알맞았다.
돌담 위에서 웃음이 터졌다. 레크가 이삭을 떨어뜨렸다. 유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수리에 부엉이를 얹은 채로 허리를 굽혀 타다 남은 종이 귀퉁이를 주웠고, 눈앞에 가져가 오래 들여다보았다. 획은 다 맞았다.
"…마지막 획이 빗나갔습니다."
"다 맞게 쓰셨잖아요."
니카가 말했다.
"소리로 긋는 획 말입니다."
유안이 정수리의 무게를 한 번 가늠했다.
"제가 「불」을 「부엉」이라고 했습니다."
부엉이가 대낮에 한 번 울었다. 부엉. 울 시각이 아니었다. 돌담 위에서 아이 하나가 따라 했다. 부엉. 고슈가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왔다. 부엉이를 오래 보고, 냄새를 맡았다.
"…이 산 부엉이 아니야. 먹 냄새 나."
부엉이가 유안의 머리에서 날아올라 할름 뒷산 쪽으로 갔다. 잉가네 지붕 위로 솟은 늙은 소나무에 내려앉아 깃을 고르기 시작했다. 고슈가 그쪽을 보며 말했다. 저기 살 거라고 했다. 바르트가 노트에 적었다. 「1. 문. 부엉이.」 그 옆 까닭 칸에 「소리(유안).」 켈리는 동그라미 안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손을 들기 전이었다. 들 데가 없었다. 그런데도 오른팔 안쪽이 조금 뜨거웠다. 둥글게 그어진 줄 안에 서서 앞을 보고 있으면 몸은 저 혼자 다음을 채비했다. 이 자리가 무엇을 하는 자리인지 몸은 아직 알고 있었다.
오후에는 벽이었다. 문이 안 되면 벽으로 세 면을 막고 남은 한 면을 문으로 쓰자는 것이었다. 먼저 아이들이 있는 마을 쪽에 벽을 세우기로 했다. 이번에는 바르트가 유안 옆에 쪼그려 앉아 획을 함께 셌고, 유안이 숨을 멈출 때마다 바르트도 멈추었다. 획은 맞았다. 유안이 종이 귀퉁이에 범위를 적는 작은 글자를 넣고 외쳤다.
"「쇠비늘의 벽」!"
땅이 한 번 울렸다. 흙 속에서 잿빛 비늘이 겹겹이 솟아올랐다. 큰 물고기의 옆구리를 세워 놓은 것 같았고, 가슴 높이에 열 걸음 길이였다. 벽은 섰다. 마을 쪽이 아니라 그 반대쪽, 골짜기로 내려가는 아랫길을 가로질러 섰다. 바위벽 밑동에서 비탈 쪽으로 뻗어 나가 아랫길을 막고, 마을 쪽은 돌담 위 아이들에게로 활짝 열어 둔 채였다. 아이들 머리가 일제히 더 높이 솟았고 레크가 두 손으로 둘을 눌러 앉혔다. 유안이 탄 귀퉁이를 주워 보았다.
"…범위 글자를 거꾸로 썼습니다."
린이 벽 앞으로 가서 한참 서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처음 보는 것에는 인사부터 하는 것이 린의 셈이었다. 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린은 대답이 없는 것에도 대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었는데, 이번에는 기다리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 벽에게는 해요체를 써야 할지 반말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방금 태어난 것이었다.
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바르트가 주먹으로 두드려 보니 솥뚜껑 소리가 났다. 밀어 보아도 꿈쩍하지 않았다. 언제 없어지느냐고 묻자 유안은 자기 운이 다할 때까지라고 했다. 니카가 듣고 그럼 금방이겠다고 했고, 유안은 그렇게 말하면 오래 서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은 벽 끝과 비탈 사이로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날 만큼만 남았다. 해 질 녘에 벽 뒤가 어떻게 생겼는지 재 보겠다고 그 틈으로 들어가던 바르트가 끼었다. 옆으로 섰는데도 배가 비늘에 걸렸다. 켈리가 틈 너머에서 밀고 린이 뒤에서 허리띠를 당겼다. 켈리는 걸지 않았다. 니카는 뒤에서 빠질 확률을 말하려다 바르트의 얼굴을 보고 숫자를 삼켰다. 바르트는 숨을 끝까지 내쉰 채로 빠져나와 옆구리를 붙잡았다. 벽 뒤는 끝내 재지 못했다. 그날 저녁 유안은 붓 한 자루와 왼쪽 신 한 짝을 잃었다. 유안은 대가라고 했고 니카는 확률이라고 했다. 그가 그날 몇 번 넘어졌는지는 그의 체면을 위해 적지 않기로 한다. 바르트의 노트에는 둘째 줄이 생겼다. 「2. 벽. 반대쪽.」 까닭 칸에 「범위 글자(유안).」
이튿날 유안은 신 한 짝을 끝내 찾지 못해 왼발에 짚을 감고 내려왔다. 그 발로 바르트와 머리를 맞대고 종이 한 장을 오래 썼다. 바르트가 획을 하나씩 세었다. 다 쓰고 나서 두 사람이 동시에 열하나라고 말했다. 숫자가 같았고 둘 다 당연한 얼굴이었다. 니카가 또 한 걸음 물러섰다. 이번 이름은 「외길의 문」이었다. 문을 따로 놓지 않고 동그라미 전체를 진법으로 세우되, 바위 쪽 한 자리만 열어 두는 것이었다. 유안이 외치자 먹줄이 일어섰다. 화덕 위에 아지랑이가 서듯 공기가 머리 높이까지 일렁이며 동그라미를 둘러쌌고, 바위벽을 마주 보는 한 자리만 비어 있었다. 이번에는 이름대로였다. 돌담 위에서 아이들이 길게 탄성을 냈다. 켈리는 아지랑이 안쪽에 서 있었다. 바깥의 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멀어졌고, 바위벽 쪽 빈자리 하나로만 바람이 드나들었다. 숨을 내쉬면 그 숨도 그 자리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다만 문은 열 숨 동안만 열려 있다고 유안이 말했다. 바르트가 노트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손을 들었다.
"그럼 셋에 하게. 내가 세지."
"하나."
유안이 외쳤다. 먹줄이 일어섰다.
"둘."
"셋."
켈리가 뛰었다.
문으로 빠져나가 바위벽까지 열댓 걸음을 단숨에 뛰었고, 바위 앞에서 오른손이 올라갔다.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손가락이 벌어졌다. 어깨에서 뜨거운 것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범위 밖입니다!"
"켈리!"
켈리는 바위에 이마가 닿을 듯한 자리에 섰다. 내려오던 열을 도로 올려보냈다. 아직 이름이 없는 동작이었다. 도로 올라간 열은 어깨 밑에 뭉쳐서 한동안 빠지지 않았다. 팔 안에 돌을 하나 넣어 둔 것 같았다. 팔이 어깨까지 무거워졌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셋 세면 뛰는 거였나."
"…응."
"넷에 하지."
켈리가 동그라미로 돌아왔다.
"하나."
"둘."
"셋."
켈리의 발뒤꿈치가 들렸다. 들린 채로 섰다.
"넷."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손은 위를 향해 있었는데 손바닥이 비어 있었다. 열은 뛰고 난 다음에 오는 것이었다.
문이 닫혔다.
"그럼 뛰고 나서 하면 되잖아요."
니카가 말했다. 켈리를 동그라미 바깥 스무 걸음 위에 세웠다.
"하나."
"둘."
"셋."
켈리가 뛰어 문으로 들어갔다. 동그라미 한가운데에서 손이 올라갔다. 이번에는 열이 왔다. 손바닥이 향한 쪽은 바위벽이 아니라 맨 아래 층 돌담이었다. 거기 아이들 머리가 일곱 개 있었다.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문을 등지게 되어 있었다.
"방향이—!"
켈리가 두 번째로 열을 도로 올려보냈다. 무릎이 접혔다. 켈리는 동그라미 한가운데 주저앉았다. 오른팔이 어깨에서부터 늘어져 무릎 위에 얹혔다. 손가락이 저절로 펴졌다 오므라들었다. 먹줄의 아지랑이가 꺼지고 굽이에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바르트가 다가와 노트를 폈다. 셋째 줄을 적었다. 「3. 셋. 뜀.」 그러고는 까닭 칸에 연필을 대고 망설이지 않고 적었다. 「내가 셌음.」 켈리가 그 글자를 보았다.
"내가 뛰었어."
"내가 셌어."
바르트는 그 줄을 지우지 않았다. 켈리는 무릎 위의 손을 보았다. 셋을 세는 사람은 늘 뒤에 있었다. 뒤에서 셋이 떨어지면 켈리는 앞으로 뛰었고, 다 터뜨리고 나오면 그 사람이 도랑가에 서서 갈 쪽을 가리켰다. 그 사람은 이제 없었다. 바르트는 칼을 차지 않았는데, 바르트가 세는 셋에도 켈리의 다리는 똑같이 뛰었다. 셋은 한 번도 켈리의 숫자였던 적이 없었다. 늘어진 팔을 왼손으로 받쳐 들면서 켈리가 말했다.
"…내가 셀게."
팔이 돌아오는 데 하루가 걸렸다. 7월 18일 낮, 바르트가 잉가네 헛간에서 금 간 물동이 하나를 안고 내려왔다. 잉가가 버리려고 내놓은 것이었다. 바르트는 그 안에 저울로 단 가루를 붓고, 동그라미의 문 자리에 물동이를 내려놓았다. 터진 것이 문으로 나가면 그 가운데 넘치는 몫을 물동이가 받는다고 했다. 가루는 잿빛이었고 손가락으로 비비면 쇠 냄새가 났다. 바르트는 저울 접시에 한 숟가락씩 덜어 올렸고, 접시가 기울 때마다 한 숟가락을 더 올렸다. 폐허에서 바르트가 켈리에게 물었던 것 가운데 아직 답이 없는 것이 그것이었다. 잉여 에너지는 어디로 가느냐는 것. 그때 켈리는 그 문장에서 두 낱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바르트는 물동이 앞에 쪼그려 앉은 채로 켈리를 올려다보았다.
"받아 봐도 되겠나."
켈리가 대답하기 전에 바르트가 한마디를 더 붙였다.
"싫으면 안 해도 돼."
강바닥에서도 바르트는 같은 말을 붙였었다. 그 말 끝에 켈리는 처음으로 다른 대답을 했었다.
"알아."
켈리는 잠깐 물동이를 보았다.
"…해."
바르트가 고개를 끄덕이고 가루를 한 번 더 달았다. 남는 쪽으로 달았다. 그는 늘 그렇게 달았다. 유안이 옆에서 같은 박자로 숨을 쉬었다. 켈리가 동그라미 안에 섰다. 돌담 위의 아이들은 오늘도 서른 걸음을 지켰다. 아무도 세 주지 않았다. 켈리는 숨을 한 번 골랐다. 숫자를 입에 올리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쇠뇌를 감는 스무 숨도 세었고 탁자의 그릇도 세었다. 다만 그 숫자 끝에서 자기가 움직이는 숫자는 센 적이 없었다.
"하나."
켈리가 셌다. 유안이 외쳤고 먹줄이 일어섰다.
"둘."
"셋."
다리는 뛰지 않았다. 뒤에서 세는 사람이 없었다. 셋은 켈리의 입에서 나왔고 켈리의 입은 켈리를 보내지 않았다. 오른손이 올라갔다.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손가락이 벌어지고 팔꿈치가 펴졌다. 어깨에서 손목으로 열이 내려왔다. 다 내려오면 그다음은 정해져 있었다.
켈리는 그 뒤의 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손을 들면 무언가가 없어졌고, 없어진 자리에서 켈리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달리지 않았으므로 보았다. 손바닥에서 흰 것이 떠났다. 빛이라고 하기에는 무겁고 불이라고 하기에는 조용한 것이었다. 그것이 아지랑이 벽에 닿지 않고 문으로 빨려 갔다. 굴뚝이 연기를 빨아들이듯이 갔다. 문 자리에 물동이가 있었다.
소리는 쾅이 아니었다. 먼 데서 큰 솥뚜껑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웅. 물동이가 안에서부터 검붉게 달아올랐다가, 그 빛을 그대로 머금은 채 오그라들었다. 바위벽의 돌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동그라미 둘레의 자갈 하나 구르지 않았다. 돌담 위에서 아이들이 일어섰다. 일어선 채로 기다렸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끝났어요?"
레크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먹줄의 아지랑이가 꺼졌다. 문 자리에는 물동이가 없었다. 빵 한 덩이만 한 돌이 하나 놓여 있었다. 겉이 그릇처럼 반들거렸고, 검붉던 빛이 가장자리부터 잿빛으로 식어 가는 중이었다.
그다음은 켈리의 차례였다. 손끝부터 추워졌다. 7월 한낮의 햇빛이 머리 위에 있는데 손가락 끝이 얼음물에 담근 것처럼 시렸다. 추위가 손목을 지나 팔꿈치로 올라오는 동안 입안이 말랐고, 마른 입안에 무언가를 넣고 싶어졌을 때는 이미 다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켈리가 동그라미 안에 앉았다. 린이 뛰어 내려와 제 겉옷을 벗어 켈리의 어깨에 둘렀다. 켈리는 떨면서도 문 자리의 돌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켈리가 터뜨린 것이 아무것도 없애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바르트가 돌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손바닥을 가까이 대 보고 오래 말이 없었다.
"…남는 쪽으로 달았어."
"얼마나요."
니카가 물었다.
"다 받을 만큼."
바르트가 목덜미를 만졌다. 새로 붙은 것은 없었다. 남게 달았는데 남은 것이 없었다. 바르트는 그 셈을 한참 붙들고 있다가 노트에 적었다. 「4. 물동이. 다 먹음.」 까닭 칸에 「계량(바르트). 남는 쪽.」 유안은 돌과 켈리를 번갈아 보더니 자기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변수가 너무 큽니다."
"…그럼 줄여?"
켈리의 입술이 떨렸다. 추워서였다.
"줄일 수 있습니까."
"…아니."
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첩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켈리 자리에서는 거꾸로 보였는데, 거꾸로 읽는 것은 켈리가 잘하는 일이었다. 「변수. 그대로.」 그 아래에 「문을 넓힐 것.」 켈리를 줄이겠다는 사람이 아니었다. 켈리는 그 두 줄을 오래 보았다. 열두 해 동안 켈리를 적은 종이는 많았지만 켈리를 그대로 두고 다른 것을 고치겠다고 적은 종이는 없었다.
바르트가 소매로 돌을 감싸 들어 켈리 앞으로 굴려 주었다. 켈리가 두 손으로 그것을 안았다. 돌은 따뜻했다. 켈리가 낸 열이었다. 시린 손가락 끝으로 그 열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고슈가 내려와 돌에 코를 대 보고 켈리를 보았다.
"…끈. 돌 안 뜨거워?"
"따뜻해."
고슈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 옆에 쪼그려 앉아 한참 일어나지 않았다.
해 질 녘에 고슈가 골짜기 쪽 산등성이를 한 바퀴 돌고 왔다. 사람의 다리로 돌았는데 돌아올 때는 코가 먼저 왔다. 아랫마을 까마귀가 열아홉으로 늘었다고 했다. 냄새가 가까워졌다고 했다. 내일이 아니면 모레라고 했다. 저녁 탁자에서 잉가가 켈리 무릎 위의 돌을 보았다. 무어냐고 묻기에 바르트가 물동이라고 했다. 잉가는 손바닥으로 돌을 한 번 덮어 보았다. 아직 따뜻했다.
"금 간 거였어."
그것으로 셈은 끝났다. 그 물동이에 무엇을 담아 왔었는지 잉가는 말하지 않았다. 오벨이 밤에 보초가 있어야 한다고 했고 고슈가 자기가 보겠다고 했다. 귀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 나서 문간에 기대앉은 고슈의 고개가 자꾸 무릎 쪽으로 떨어졌다. 돌아온 지 사흘이었다. 유안이 그것을 보고 소매에서 종이를 꺼냈다.
"깨어 계시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번 것은 중요하니 크게 쓰겠다고 했다. 붓을 누르는 손에 힘이 들어갔고 먹이 두 번 찍혔다. 귀퉁이 작은 글자 자리에 「고슈」를 적었다. 유안이 헛간 안에 서서 외쳤다.
"「잠들지 않는 눈」!"
종이가 재로 말렸다. 재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연기처럼 헛간 안에 퍼졌다. 퍼진 자리마다 누군가의 눈이 뜨였다. 누워서 눈을 반쯤 감고 있던 니카의 눈이 떠졌고, 안경을 벗어 두던 오벨의 눈이 떠졌다. 바르트도 린도 켈리도 떠졌다. 마지막으로 외친 유안 자신의 눈이 떠졌다.
일곱이 나란히 누워 서까래를 보았다. 등잔을 껐는데도 아무도 눈을 감지 못했다. 감으려고 하면 눈꺼풀이 도로 올라갔다. 헛간 지붕 틈으로 별빛이 몇 줄 새어 들었고, 그 아래에서 일곱 쌍의 눈이 빛을 받아 하나씩 번들거렸다. 바르트의 숨소리가 코골이로 넘어가려다 넘어가지 못하고 몇 번이고 도로 숨소리가 되었다. 한참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다들 깨어 있을 확률이요."
니카가 말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벨이 말했다.
"10할이에요."
유안이 서까래를 본 채로 말했다.
"…넘쳤습니다."
"넘치면 옆으로 가."
켈리가 말했다. 켈리는 그것을 알았다. 넘친 것은 쥔 것으로 갔고, 쥔 것이 없으면 가장 가까운 데로 갔다. 유안이 쥔 것은 붓이었고 가장 가까운 데는 헛간이었다. 문간에서 고슈가 눈을 끔벅이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원래 밤에 안 자."
그 말은 사실이었다. 스무 날 동안 그랬다. 부적이 깨우려던 사람은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은 길었다. 린이 먼저 일어났다. 잠이 안 오면 인사나 마저 해야겠다고 했다. 린은 맨발로 나가 우물가의 두 쪽 난 돌에 한 번 인사하고, 맨 아래 층 돌담 쪽으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오래 이어졌다. 말은 실려 오지 않고 높낮이만 실려 왔는데, 높낮이만으로도 린이 돌에게 해요체를 쓰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돌담은 린보다 나이가 많았다. 바르트는 켈리에게서 돌을 빌려 저울에 달았다. 등잔 없이 접시의 기울기를 손끝으로 읽었다. 물동이 무게 그대로라고 했다. 가루까지라고 했다. 그러고는 돌을 켈리 품에 돌려주었다. 돌은 아직 따뜻했다. 켈리는 돌을 배 위에 올려놓고 다시 누웠다. 돌은 더디게 식었다. 불은 꺼지면 금방 식는데 이 돌은 그러지 않았다. 켈리는 물동이 하나만 한 무게를 배 위에 얹은 채 서까래를 보았다.
켈리는 등잔을 다시 켜고 바르트의 노트를 빌려 맨 뒷장을 폈다. 「사흘」 아래에 새 줄을 긋고 여백에 「굽이」라고 적었다. 켈리 칸에 「팔 둘. 터뜨림 하나.」 터뜨린 자리에 무엇이 없어졌는지 적으려다 연필이 멈췄다. 없어진 것이 없었다. 켈리는 칸 바깥 여백으로 연필을 옮겨 작게 적었다. 「돌 1.」 받은 것을 적는 자리였다. 바르트 칸에 「혹 0.」 부적 칸에 「붓. 신 한 짝.」 그러고 나서 켈리는 사람 칸마다 같은 글자를 적었다. 켈리, 바르트, 니카, 린, 오벨, 고슈, 부적. 「잠.」 같은 글자가 일곱 칸에 나란히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고슈 칸에서는 잠깐 망설였다가 「잠」 앞에 두 글자를 보탰다. 「원래 안 잠.」
새벽이 오기 전, 뒷산 소나무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밤새 울던 소리와 달랐다. 짧고, 빨랐고, 끊이지 않았다. 문간의 고슈가 일어섰다. 귀가 소리 쪽으로 서 있었다.
"…저건 사람 보고 우는 거야."
그날 밤 할름에서 깨어 있던 것은 일곱과 부엉이뿐이었다. 여섯이 맨 아래 층 돌담으로 내려갔다. 아무도 등잔을 들지 않았다. 밤새 뜨고 있던 눈은 어둠에 익어 있었다. 린이 먼저 거기 있었다. 인사하던 자세 그대로 돌담에 손을 얹고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켈리는 품에 따뜻한 돌을 안은 채 린 옆에 섰다.
골짜기 바닥을 따라 불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횃불이 줄을 지어 굽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켈리가 세기 시작했다. 열을 넘어서도 줄은 끝나지 않았다.
쓸만하네

스물아홉에서 줄이 끝났다. 켈리는 한 번 더 셌다. 스물아홉이었다. 세는 동안 다른 여섯도 아래를 보고 있었다. 아무도 몇이냐고 묻지 않았다. 켈리가 세고 있다는 것을 다들 알았다. 횃불은 골짜기 바닥에서 굽이 쪽으로 올라오다가 비늘 벽 아래에서 멈췄다. 벽 끝과 비탈 사이에는 사람 하나가 지날 틈뿐이었고, 스물아홉은 한꺼번에 그 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불빛들이 벽 아래에서 엉겼다가 흩어졌다가 다시 엉겼다. 누군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올라왔다. 솥뚜껑 소리였다. 켈리는 따뜻한 돌을 품에 안은 채 돌담에 기대어 있었다. 돌은 밤새 조금 식어 이제 사람 살갗만 했다. 아래에서 말소리가 올라왔다. 회색 쪽 말과 남색 쪽 말이 섞여 있었다. 어느 쪽 말이든 배고픈 사람이 하는 말은 짧았다.
"…올라오지를 못하는군."
바르트가 말했다. 고슈가 돌담 위에서 코를 들었다. 밤새 뜨고 있던 눈이 새벽빛에 붉었다. 일곱 모두 그랬다.
"…배고픈 냄새. 많아. 남색도 하나."
고슈의 코가 한 번 더 움직였다.
"…쇠틀은 없어. 기름만 묻혀 왔어."
위쪽 계단밭 길에서 발소리가 내려왔다. 창을 든 사내들이었다. 열넷이었다. 맨 앞의 사내는 마흔 남짓이었고 코가 한 번 부러졌다가 비뚤게 붙어 있었다. 회갈색 모피 어깨걸이에 산양 뿔 단추가 둘 달려 있었다. 그 뒤에 레크가 있었다. 레크는 켈리를 보고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실험을 구경하던 아이들 사이에서 보리 이삭을 물고 있던 얼굴이 창을 들고 있으니 몇 살은 더 들어 보였다. 호른 가르는 돌담 끝에 서서 벽 아래의 불빛을 오래 내려다보았고, 그다음에 벽을 보았다.
"이건 누가 세웠나."
"…제 실수입니다."
유안이 말했다. 짚을 감은 왼발을 오른발 뒤로 감추었다. 호른이 벽과 유안의 발을 번갈아 보았다.
"잘 틀렸군."
호른은 산채에서 내려온 길이라고 했다. 산군이 보고 오라고 했다. 싸우라고는 하지 않았다. 계약 공백기의 드란 용병대에게 고용주는 없었고, 고용주가 없는 싸움은 드란에서 싸움이 아니었다. 호른의 사람들도 그렇게 서 있었다. 창을 세웠으나 겨누지 않았고, 벽 아래를 보았으나 내려가지 않았다. 열넷 가운데 넷은 팔이나 다리에 아직 천을 감고 있었다. 키엔에서 감은 천이었다.
"계약서 없이 창을 들면 그냥 죽는 거다. 키엔에서는 계약서가 있어도 죽었고."
"그럼 저희가 쓰겠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호른이 오벨을 보았다.
"값은."
일행이 가진 것은 하나였다. 켈리가 그것을 메고 있었다. 탈곡이 끝나던 날 품삯으로 받은 보리 한 자루였다. 받던 날 켈리는 자루 아가리를 묶은 새끼줄을 놓지 못했다. 품 말고는 숨길 데가 없었고 자루는 품에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도 줄은 켈리의 손에 감겨 있었다. 이레 동안 자루는 헛간 구석에서 켈리의 자루 옆에 서 있었고, 켈리는 밤마다 그 줄을 손목에 한 번 감고 잤다. 거친 새끼줄이 손목 안쪽에 남긴 자국이 아침마다 붉었다. 막사에서 켈리 몫으로 나오는 것은 한 끼씩이었고 한 끼는 그 자리에서 다 먹는 것이었다. 남겨 둘 수 있는 몫을 받아 본 것은 그 자루가 처음이었다. 켈리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이 줄을 한 번 더 감았다가 풀었다. 켈리가 일어나 호른 앞으로 가서 줄을 내밀었다. 줄이 손바닥을 빠져나갈 때 거친 올이 손금을 한 번 긁었다. 호른이 받았다. 자루를 한 손으로 들어 보고 내려놓았다.
"32킬로그램하고 조금. 남는 쪽으로 달면—"
바르트가 말하는데 호른이 잘랐다.
"산에서는 그냥 한 자루다."
오벨이 무릎 위에 종이를 펴고 썼다. 평생 쓴 것 가운데 가장 짧았다. 갑, 일행. 을, 호른 가르와 열셋. 제1조, 을은 굽이를 지킨다. 제2조, 을은 갑의 일행 계약서 제13조를 따른다. 값, 보리 한 자루. 더 쓸 것은 많았다. 기간이 있었고 해지가 있었고 다친 사람의 몫이 있었다. 오벨의 펜이 셋째 줄 끝에서 한 번 머뭇거렸다가 종이를 떠났다. 산채에서 들은 한마디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길다. 호른은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드란 용병대에서는 글을 읽는 사람이 읽고 나머지는 들었다. 호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는데 굽이 끝까지 갔다. 열셋이 그 목소리를 들으며 창 자루를 고쳐 쥐었다.
"…13조는 뭔가."
"지금 쓰겠습니다."
오벨이 가방에서 낡은 종이를 꺼냈다. 진창길에서 처음 쓴 일행의 계약서였다. 맨 아래 빈자리에 한 줄을 보탰다. 「제13조. 오벨 리스트가 '제1조'를 외치면 전원 열 걸음 물러나 엎드린다.」 호른이 그 종이를 받으려다 손을 거두었다.
"따르라는 계약서면 그것도 읽어야지. 끝까지."
벽 아래에서 불빛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벨은 제1조부터 읽었다. 자는 자리를 먼저 정한다. 고르는 순서는 돌아가며 한다. 열넷의 드란 사람들이 창을 세운 채 그것을 들었다. 제2조에서 호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 걸음」. 짧군."
제7조쯤에서 벽 아래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빨리 좀 읽으라는 소리였다. 회색 쪽 말이었다. 호른이 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드란 말로 짧게 대답했다. 레크가 켈리에게 옮겨 주었다. 계약서는 끝까지 읽는 거라고 했다. 아래가 조용해졌다. 수긍해서 조용한 것인지 기가 막혀서 조용한 것인지는 위에서 알 수 없었다. 오벨은 제8조를 읽었다. 조항을 어긴 자는 다음 날 짐을 한 몫 더 진다. 드란 사람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12조에서 오벨이 멈췄다. 제목 아래로 그어 지운 줄이 셋이었다.
"제12조는 비어 있습니다."
"빈 조항에 왜 번호가 있나."
"…쓰다가 못 쓴 것입니다."
"뭘."
오벨이 잠깐 있다가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배고파 보이면."
호른이 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불빛 스물아홉이 거기 엉겨 있었다. 호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벨이 제13조까지 다 읽는 데 걸린 시간은 그의 명예를 위해 적지 않기로 한다. 호른이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고, 레크가 보리 자루를 어깨에 메었다. 켈리는 빈손을 쥐었다 폈다. 줄이 감겨 있던 자리가 아직 따끔했다. 레크의 어깨에서 자루가 계단밭 길을 올라갔다. 켈리는 그것이 돌담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았다. 그러고 나서 품의 돌을 고쳐 안았다.
해가 산마루를 넘어오자 오벨이 제13조를 연습해야 한다고 했다. 부르는 것이 가까운 것부터 친다고 했다. 아군도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부른 것은 바위를 굴린다고 했다. 굴린 바위는 누가 서 있는지 묻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부르기 전에 모두가 물러나 있어야 했고, 물러나는 데에는 구령이 필요했다. 드란 사람들이 서로를 보았다. 오벨이 숨을 들이켰다.
"제1조!"
일행이 엎드렸다. 엎드리긴 했는데 자리가 제각각이었다. 바르트의 열 걸음은 길었고 린의 열 걸음은 짧았다. 바르트는 엎드린 채로 고개만 들어 제 걸음을 뒤돌아 셌다. 유안은 짚 감은 발로 아홉 걸음째에 미끄러졌다. 레크는 제일 먼저 엎드렸는데 앞으로 엎드렸다. 틈 쪽이었다. 호른이 뒷덜미를 잡아 끌어왔다. 레크의 코끝에 흙이 묻어 있었다. 구령이 떨어지면 몸부터 던지는 나이였다. 니카는 서 있었다.
"열 걸음이 누구 걸음 기준이에요?"
"…각자 걸음입니다. 다시."
"제1조!"
이번에는 다 엎드렸다. 드란 사람들까지 엎드렸다. 창 열넷이 한꺼번에 눕는 소리가 났다. 계약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고 계약서는 지키는 것이었다. 열넷과 일곱이 굽이 위 비탈에 나란히 배를 깔았다. 켈리의 뺨에 흙이 닿았다. 흙이 따뜻했다. 그 순간 켈리의 눈꺼풀이 내려왔다. 밤새 올라가 있던 것이 한꺼번에 내려왔다. 켈리는 옆에서 들리는 숨을 세려고 했다. 둘에서 셋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켈리 옆에서 린의 숨이 길어졌다. 니카의 숨이 길어졌다. 바르트의 숨은 길어지다가 코골이로 넘어갔고 이번에는 도로 숨소리가 되지 않았다. 부적이 다한 것이었다.
오벨이 다음 구령을 하지 않았다. 오벨도 자고 있었다.
드란 사람들이 엎드린 채로 기다렸다. 한참 기다렸다. 하나가 고개를 들어 옆을 보았다. 일곱이 흙에 얼굴을 묻고 자고 있었다. 고슈까지 자고 있었다. 고슈는 원래 밤에 자지 않았다. 낮에는 잤다. 호른이 일어나 무릎의 흙을 털고 일곱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한 놈들이군."
호른의 사람 하나가 웃음을 참다가 기침을 했다. 다른 하나는 아직 엎드린 채로 다음 구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란 사람들이 하나씩 일어났다. 레크는 일어나지 않았다. 엎드렸던 자리에서 무릎만 세우고 창을 틈 쪽으로 돌려 앉았다. 계약서에는 굽이를 지킨다고 적혀 있었다. 레크는 굽이에서 자는 일곱도 굽이에 든다고 셈했다. 레크는 자는 얼굴들을 하나씩 보았다. 아흐레 동안 메고 온 들것 위의 얼굴은 천에 덮여 있었다. 이 얼굴들은 덮여 있지 않았다. 해가 다 올라오도록 레크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드란 사람 몇이 돌아와 그 옆에 앉았다. 하나는 모피를 벗어 바르트의 등에 덮었다. 바르트가 코를 골다 말고 웃는 것 같은 소리를 한 번 냈다. 호른은 서서 그것을 보다가 아무 말 없이 틈 쪽으로 내려가 섰다. 켈리의 손은 자는 동안에도 반쯤 쥐어져 있었다. 쥘 줄이 없는 손이었다.
일곱은 해 질 녘에 깼다. 한낮에 아래쪽은 올라오지 않았다. 틈 앞에 서면 위에서 열넷이 내려다보는 자리였다. 켈리는 일어나 앉아 뺨의 흙을 털었다. 하루를 통째로 잤는데 목이 말랐다. 아래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무언가를 끓이는 냄새가 아니었다. 끓일 것이 없는 불이었다. 어두워지자 뒷산 소나무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짧고 빨랐다. 고슈가 귀를 세웠다.
"…온다."
유안이 「물러서는 안개」를 쓰겠다고 했다. 굽이를 안개로 덮어 위쪽을 가리겠다는 것이었다. 주홍 종이를 펴는데 린이 그 소매를 잡았다.
"산에 인사는 했어?"
"부적에는 인사가 필요 없습니다."
"여긴 남의 산이야."
유안은 대답하지 않고 이름을 외쳤다. 안개가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유안에게서 물러났다. 굽이에서 물러났고 벽에서 물러났고 틈으로 흘러내려 아래쪽에 하얗게 고였다. 굽이는 달빛에 환했다. 아래는 하얬다. 안개 속에서 기침 소리와 욕이 올라왔다. 회색 쪽 욕과 남색 쪽 욕이 같은 박자로 들렸다. 안개 속에서 누군가 횃불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났다. 유안이 재가 된 귀퉁이를 내려다보았다. 린이 팔짱을 꼈다.
"봐. 산이 삐졌잖아."
"…부적은 삐지지 않습니다."
"부적 말고 산."
그날 밤 유안은 오른쪽 신을 잃었다. 이제 양발이 짚이었다.
안개 속에서 첫 그림자가 틈으로 들어왔다. 옆으로 서서 비늘에 등을 붙이고 한 사람씩 빠져나왔다. 니카가 주사위를 꺼내 엄지로 눌렀다. 입술이 움직였다. 틈을 빠져나오던 둘이 연달아 발을 헛디뎠다. 셋째도 헛디뎠다. 니카는 엄지를 떼지 않았다. 틈만이 아니라 안개 속 전부에 걸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연달아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하나가 넘어지면 그 뒤의 사람이 걸려 넘어졌고, 걸린 것이 걸린 것을 낳았다. 니카의 셈은 거기서부터 니카의 것이 아니었다. 니카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손목에 감은 천 아래에서 무언가가 끓는 얼굴이었다.
켈리가 세기 시작했다.
"하나."
틈을 빠져나온 그림자가 굽이에 섰다.
"둘."
바르트가 켈리 뒤에 서 있었다. 노트를 들고 있었는데 펴지 않았다. 세지도 않았다.
"셋. 넷."
호른의 방패들이 굽이 위쪽 스무 걸음에 줄을 섰다. 아래에서 올라온 그림자들은 방패를 보고 멈췄고, 멈춘 자리 뒤로 틈에서 또 하나가 나왔다.
"다섯. 여섯."
켈리의 다리는 가만히 있었다. 세는 입이 켈리의 입이었다. 숫자가 하나 늘 때마다 그림자 하나가 굽이로 들어왔고, 켈리는 그 어깨들을 보았다. 다들 말랐다. 창 대신 낫을 든 사람도 있었다. 틈을 빠져나올 때 옆으로 선 몸이 바르트의 반도 되지 않았다.
"일곱."
틈과 방패 사이에 그림자 일곱이 들어차 있었다. 여덟째가 틈에 어깨를 들이밀고 있었다. 더 세면 방패에 닿았다. 켈리가 말했다.
"지금."
"굴림. 제1조!"
스물한 사람이 열 걸음 물러나 엎드렸다. 니카는 열에 떠서 여덟 걸음에서 엎드렸다. 굽이 한가운데의 땅이 한 번 부풀었다가 갈라졌다. 사람 키만 한 것이 일어났다. 등이 둥글었고 온몸이 잿빛 털로 덮였고 팔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눈은 작았다. 흙냄새와 젖은 털 냄새가 굽이에 퍼졌다. 그것이 발치의 바위 하나를 두 팔로 안아 들었다. 가장 가까운 것이 일곱이었다. 바위가 굴렀다. 일곱이 한꺼번에 쓰러졌고, 쓰러진 채로 틈을 향해 기었다. 굴림이 바위를 하나 더 안아 들었다. 일곱이 틈을 빠져나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굴림이 고개를 돌렸다. 다음으로 가까운 것을 찾는 고개였다. 여덟 걸음에 엎드린 니카의 뒤통수였다.
털 덮인 팔이 휘었다.
"이행을 확인한다. 돌아가라!"
굴림이 흙 속으로 내려앉았다. 니카가 고개를 들었다. 뒤통수 한가운데가 시원했다. 머리카락 한 줌이 없었다. 오벨은 엎드린 채로 일어나지 않았다. 손을 짚고 일어나려 했는데 팔이 몸을 들지 못했다. 숨만 크게 쉬었다. 바르트가 다가가 오벨을 뒤집어 눕혔다. 오벨의 손가락이 바르트의 소매를 쥐려다 미끄러졌다. 쥐는 힘부터 빠지는 값이었다. 린이 니카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덮어 보았다. 손바닥이 꼭 맞았다. 니카는 열에 들뜬 눈으로 무슨 확률을 말하려다가, 무슨 확률이었는지 잊었다. 켈리는 일곱에서 세기를 멈췄다. 더 셀 것이 없었다. 바르트가 그제야 노트를 폈다. 켈리가 센 숫자를 그대로 적었다. 일곱.
이튿날 아침, 틈 앞에 남색 코트가 섰다. 혼자였고 빈손이었다. 키가 컸는데 코트가 그보다 컸다. 단추는 목까지 채워져 있었다. 켈리는 그 옷을 알았다. 모라 늪가에서 인부를 앞세우던 소대장이 그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을에 와서 거두어 가는 것은 물자였고 인부였고 여섯 살 아이이기도 했다. 고슈가 코를 들었다.
"…저거. 남색 물감."
"보리 반."
남색 코트가 위를 보고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반만 주면 내려간다."
오벨이 바르트의 어깨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어제의 오벨보다 작아 보였다. 안경 너머의 눈이 남색 코트를 찾는 데 한참 걸렸다.
"계약서를 쓰시면—"
남색 코트가 웃었다. 웃음이 되다 만 소리였다.
"이름을 적으면 양쪽이 다 날 찾아."
켈리는 그 셈을 알았다. 타르실의 벽에 붙어 있던 종이가 그 셈이었다. 적힌 것은 찾아지는 것이었다. 남색 코트가 돌아서서 틈 너머로 내려갔다. 한낮이 되기 전에 아래가 한꺼번에 움직였다. 틈으로 하나씩, 그러나 쉬지 않고 들어왔다. 호른의 방패가 내려섰다. 창 자루가 부딪는 소리가 났다. 드란 사람들의 허리에서 투석끈이 풀렸다. 돌이 틈을 향해 날았고, 틈은 사람 하나 폭이라 돌도 하나씩만 들어갔다. 호른이 드란 말로 짧게 외칠 때마다 방패 줄이 반 걸음씩 내려섰다. 오벨은 부를 수 없었다. 린이 굽이 위 비탈로 뛰었다. 틈 바로 위에 맨 아래 층 돌담의 끝자락이 걸쳐 있었다. 밤새 인사한 돌담이었다. 린이 손목에서 뼈 구슬 하나를 풀어 돌 틈에 밀어 넣었다.
"밤새 인사드린 린이에요. 짧게 말해서 죄송해요. 틈 좀 닫아 주세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린이 돌담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산은 나중에 대답해."
그때 위쪽 길에서 아이 하나가 뛰어 내려왔다. 망루 노인의 손자였다. 닷새 전 산채로 올라간 아이가 산군의 말을 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이는 굽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뛰었고, 방패 줄 옆을 지나 굽이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틈에서 남색 코트가 막 빠져나오고 있었다.
켈리가 지팡이를 가로로 들었다.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손이 먼저 했다. 아이 앞에 무언가를 세우려는 손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배운 적이 제대로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것이 나온 것은 공사장의 빛 앞이었다. 무언가가 섰다. 아이 앞이 아니었다. 열 걸음 아래, 틈을 막 빠져나온 남색 코트의 앞과 뒤와 옆에 섰다. 유리를 붓고 굳힌 것처럼 공기가 그 사람의 모양대로 굳었다. 남색 코트는 한 발을 든 채로 멈췄다. 들린 발의 밑창이 반쯤 떨어져 덜렁거렸는데, 그것까지 굳어 있었다.
그가 움직이려 했다. 그 힘이 켈리의 갈비뼈 안쪽으로 왔다. 켈리가 기침을 했다. 그가 다시 밀었다. 다시 왔다. 결계는 막는 것이 아니라 받아서 옮기는 것이었다. 켈리가 지팡이를 짚고 무릎을 꿇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 안쪽에서 무언가가 걸렸다. 공사장의 빛 앞에서는 받은 것이 켈리를 날려 보냈다. 지금은 날아갈 데가 없었다. 받은 것이 그대로 켈리 안에 쌓였다.
"…움직이지 마."
남색 코트가 켈리를 보았다. 굳은 공기 너머로 켈리가 입가를 닦는 것을 보았다. 그가 밀기를 그쳤다. 굽이가 조용해졌다. 틈에서 나오던 사람들이 멈췄다. 앞선 사람이 한 발을 든 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에 잡혔는지 아무도 몰랐다. 망루 손자는 굽이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이의 손에는 산채에서 들고 온 나무 패가 쥐어져 있었다. 놓치지 않으려고 쥔 손이 하얬다.
그다음에 돌담이 대답했다. 우르르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오래 참았던 숨을 내쉬는 소리였다. 맨 아래 층 돌담의 끝자락이 앉았다. 돌들이 하나씩 비탈을 굴러 내려가 틈에 들어가 박혔다. 마지막 돌이 들어가자 틈이 없었다. 린이 돌담 끝에 선 채로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인사는 짧았다. 틈 이쪽에 아홉이 남았고 저쪽은 발소리와 함께 골짜기로 멀어졌다. 아홉이 하나씩 창을 내려놓고 앉았다. 린이 손목을 보았다. 켈리가 셌다. 열하나였다.
켈리가 세웠던 것을 내렸다. 내리는 데에도 갈비뼈가 울렸다. 남색 코트가 무릎을 꿇었다. 가까이서 보니 볼이 패어 있었다. 코트 안에 사람이 반만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소매 끝이 손등을 덮었고, 목까지 채운 단추 하나는 실이 풀려 매달려 있었다. 그래도 채워 두었다. 켈리는 그 단추를 오래 보았다. 켈리의 남색은 자루 안에 개켜져 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배고파."
켈리는 그 말을 알았다. 폐허에서 켈리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릇이 앞에 놓였는데도 먹으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손을 대지 않았다. 그 그릇을 놓은 사람이 지금 켈리 뒤에 서 있었다.
이튿날 아침 잉가가 굽이로 내려왔다. 솥을 이고 있었다. 밤새 굽이에 둘러앉은 아홉을 드란 사람들이 지켰는데, 아홉 가운데 일어서는 사람은 없었다. 일어설 힘이 남은 사람이 없었다. 잉가는 먼저 오벨 앞에 그릇을 놓았다. 오벨이 손을 저었다.
"세 끼라고 적었어."
오벨이 그릇을 받았다. 손이 떨려 숟가락이 그릇에 몇 번 부딪혔다. 한 숟가락을 넘기고 나서야 손끝에 숟가락의 무게가 돌아왔다. 두 숟가락째에 잉가의 얼굴이 조금 또렷해졌다. 탈곡을 다시 맡던 날 처음부터 「세」라고 적은 것은 오벨이었다. 그다음에 잉가는 비늘 벽 위에 그릇을 늘어놓았다. 아홉이었다. 켈리가 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늘어놓고 솥을 들고 돌아섰다. 오벨이 숟가락을 든 채로 말했다.
"…그건 계약에 없습니다."
"이건 계약이 아니야."
아홉이 벽 앞으로 와서 그릇을 들었다. 그릇을 들기 전에 몇은 잉가를 보았다. 잉가는 돌아보지 않았다. 솥을 이고 계단밭 길을 올라가는 등이 넓었다. 남색 코트가 맨 마지막이었다. 그는 숟가락을 바르게 쥐었고, 빨리 먹었다. 켈리는 그 숟가락을 보았다. 숟가락을 바르게 쥐는 법을 배운 손이었다. 그 손이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가 아홉 그릇 가운데 가장 컸다. 오벨이 가방에서 일행의 계약서를 꺼냈다. 제12조를 폈다. 그어 지운 줄 셋을 오래 보았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접었다.
해가 높아질 무렵 산군 그렌이 노새를 타고 내려왔다. 땋은 흰 수염이 가슴께에서 흔들렸고 산양 뿔 고리 둘이 노새 걸음마다 부딪혔다. 노새가 굽이에 들어서자 드란 사람들이 창을 세웠다. 망루 손자가 고삐를 잡고 있었다. 그렌은 이번에도 일행 쪽을 보지 않았다. 비늘 벽을 한 번 보고 돌로 메워진 틈을 한 번 보고, 그다음에 골짜기를 보고 말했다.
"산은 편을 들지 않는다. 너희는 어느 계약서에도 없다. 팔 데가 없으니 팔지 않는다. 먹었으면 내려가라."
남색 코트가 그릇을 벽 위에 내려놓았다. 바닥까지 비어 있었다. 잉가가 담 위에 놓았던 늑대의 그릇이 이튿날 아침 꼭 그랬다.
아홉이 돌을 넘어 내려갔다. 남색 코트가 마지막에 한 번 돌아보았다. 켈리는 그 눈이 자기를 보는지 지팡이를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렌이 골짜기를 본 채로 말했다.
"이름을 대라."
처음이었다. 산채에서는 묻지 않았다. 바르트가 대고 니카가 대고 린과 오벨과 유안이 댔다. 니카는 열에 들뜬 목소리로 성까지 댔다. 그렌은 성은 따라 하지 않았다. 고슈는 「고슈」라고만 했다. 켈리가 마지막이었다.
"켈리."
"켈리."
그렌이 따라 했다. 일곱 이름을 다 따라 했다. 외는 목소리였다. 켈리는 제 이름이 남의 입에서 한 번 더 나오는 것을 들었다. 저울 위에서 불리던 것은 번호였다. 번호는 서기의 입에서 나와 장부로 들어갔다. 이 이름은 그렌의 입에서 나와 어디로 들어가는지 보이지 않았다.
"산은 빚을 갚는다. 남쪽 길을 열어 주마."
노새가 돌아섰다. 호른 가르가 창을 어깨에 걸쳤다. 굽이를 내려다보고, 양발에 짚을 감은 유안과 뒤통수가 빈 니카와 옆구리를 짚은 바르트를 보고, 숨을 얕게 쉬는 켈리를 보았다.
"이상한 놈들인데."
레크가 그 말의 뒤를 기다렸다. 호른이 걸음을 떼며 말했다.
"…쓸만하네."
드란에서 그보다 높은 말은 없다고 레크가 일러 주었다. 호른의 등이 계단밭 길을 올라갔다. 이레 동안 켈리의 손목에 감겨 있던 줄은 지금 망루 어딘가에 있었다. 켈리는 손금에 남은 자국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자국은 벌써 흐려져 있었다. 그날 밤 니카는 열이 올라 일어나지 못했다. 바르트가 이마를 짚어 보고 며칠은 걷지 못하겠다고 했다. 켈리는 바르트의 노트 맨 뒷장을 펴고 「굽이」 아래에 새 줄을 그었다. 여백에 「틈」. 켈리 칸에 「갈비.」 오벨 칸에 「힘.」 니카 칸에 「머리카락 한 줌. 열.」 부적 칸에 「신 나머지 한 짝.」 바르트 칸에는 「0.」 바르트가 그 칸을 넘겨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린 칸에는 린이 세지 않은 숫자를 적었다. 「열하나.」 켈리는 숨을 얕게 쉬며 연필을 놓았다. 품에서 돌을 꺼내 무릎에 올렸다. 돌은 이제 거의 식어 있었다. 켈리가 손바닥을 얹자 손바닥 아래만 조금 따뜻해졌다.
마당 끝에 잉가가 서 있었다. 굽이 쪽이 아니라 남쪽 산마루를 보고 있었다. 그 너머가 이빨목이었다.
'bluelimn's > 물리법사 켈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물리법사 켈리 18 (0) | 2026.11.06 |
|---|---|
| 물리법사 켈리 17 (0) | 2026.10.30 |
| 물리법사 켈리 16 (0) | 2026.10.25 |
| 물리법사 켈리 15 (0) | 2026.10.17 |
| 물리법사 켈리 14 (0) | 2026.10.09 |
| 물리법사 켈리 13 (0) | 2026.10.08 |
| 물리법사 켈리 12 (0) | 2026.10.07 |
| 물리법사 켈리 11 (0) | 2026.10.06 |
| 물리법사 켈리 10 (0) | 2026.10.05 |
| 물리법사 켈리 9 (0) | 2026.10.0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