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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 테



린이 다 외었을 때는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간 뒤였다. 오벨은 마지막 줄 옆에 작게 출처를 적고 수첩을 덮었다. 덮고 나서 표지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 눌러 둔다고 안에 든 것이 달아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오벨은 그렇게 했다.
뿌리 밑에서 보이는 것은 두 가지였다. 앞에는 개울이 있었다. 열 걸음 너비의 물이 어둠 속에서도 희끄무레하게 흘렀고, 그 바닥의 돌들이 잿빛이라는 것을 일행은 알고 있었다. 낮에 쇠뇌병들이 그 앞에서 발을 멈췄다. 뒤에는 숲이 있었다. 들어가면 들어간 자리로 다시 나오는 숲이었다. 니카가 낮에 그것을 몸으로 확인했다. 그 둘 사이에 남은 것은 숲 가장자리를 따라 난 좁은 땅뿐이었다. 사람 둘이 나란히 서면 하나는 물가로 밀려나는 너비였다. 그 땅이 하류로 이어졌고 상류로도 이어졌다. 상류에는 천막이 있었다.
개울 건너 산기슭에서 천막의 불빛이 하나씩 늘어났다. 등불이 아니라 횃불이었다. 횃불 몇이 구덩이 둘레에 박혔고 그 사이로 사람 그림자들이 오갔다. 망치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버팀목을 박는 소리였다. 낮에 무너진 구덩이를 밤새 다시 세우려는 것이었다. 하루. 그 사람에게는 하루가 먼저였다.
개울가에서는 개구리가 울지 않았다. 윗늪에서 세던 소리가 여기서는 처음부터 없었다. 밤이 되면 들려야 할 것이 들리지 않는 자리에서는 들리는 것이 더 크게 들렸다. 물소리와 망치 소리와, 바르트의 숨소리였다. 바르트의 숨은 아직 고르지 않았다.
"…지금 가면요."
니카가 하류 쪽 어둠을 보며 말했다. 셈하는 입술이었는데 이번에는 숫자를 말했다.
"좁은 데서 따라잡혀요. 아저씨가 켈리 씨를 메고 뛰면 사람 걸음이에요. 외골격은 사람 걸음보다 빨라요. 8할."
"여기 있으면."
"…안 찾을 수도 있죠. 그건 셈이 안 나와요."
셈이 안 나온다는 말을 니카가 하는 것을 켈리는 처음 들었다. 바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릎 사이에 끼운 손을 아직 빼지 않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사람 하나를 메고 다시 뛸 다리가 바르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켈리는 셈을 했다. 구덩이 위에서 들보를 받친 것이 아침이었다. 다리에 한 번, 팔에 한 번 따로 걸었다. 후반동은 몇 시간에서 하루였다. 지금은 밤이었다. 켈리가 손가락을 오므려 보았다. 가운데 마디까지 접히다가 거기서 멈췄다. 낮보다는 나았다. 나은 만큼이 손톱 하나 길이였고, 그것으로는 지팡이를 쥘 수 없었다.
연필도 쥘 수 없었다. 켈리의 장부에는 오늘 줄이 아직 없었다. 적을 것은 있었다. 다리 남의 것. 팔. 손등. 아침에 구덩이 위에서 낸 값이었고 켈리 칸에 들어갈 값이었다. 바르트의 노트 맨 뒷장에 켈리가 직접 그어 놓은 칸이었다. 그런데 그 칸에 적으려면 손이 있어야 했다. 값을 낸 손으로는 값을 적을 수 없었다. 켈리는 그 셈을 오래 붙들고 있지 않았다. 지금 셀 것은 따로 있었다.
터뜨리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기 전에 셈이 먼저 끝났다. 뿌리 밑은 사람 여섯이 웅크리면 꽉 차는 구멍이었다. 켈리의 왼쪽 어깨에 바르트의 팔이 닿아 있었고 오른쪽 무릎에 린의 발이 닿아 있었다. 터뜨리는 자리에서는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먼저 없어졌다. 켈리는 그런 자리를 열일곱 번 지나왔다.
고슈는 구멍에 들어오지 않았다. 뿌리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 등이 둥글어졌다. 주먹은 여전히 쥔 채였다. 이따금 고개가 바람 쪽으로 돌았고, 돌아가는 빠르기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영감님."
린이 고슈의 등에 대고 불렀다.
"…응."
"아직이죠."
"…아직."
대답이 낮보다 늦게 왔다. 린은 그것을 듣고 더 묻지 않았다. 손목의 장신구를 한 손으로 감싸 소리가 나지 않게 했다.
바르트가 무릎 사이에서 손을 뺐다. 자루를 끌어당겨 안을 더듬었다. 유리병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가 났다. 저울이 든 쪽은 열지 않았다. 손이 병 하나를 찾아 꺼냈고, 엄지로 마개를 한 번 눌러 보고는 그 병을 품에 넣었다. 노트는 꺼내지 않았다. 켈리는 그것을 보았다. 바르트는 무엇을 넣든 먼저 달았다. 달지 않은 것을 품에 넣는 바르트를 켈리는 처음 보았다.
그때 소리가 왔다.
쉭.
개울 건너, 천막 쪽이었다. 낮에 두 번 들은 소리였다. 한참 뒤에 또 쉭. 그다음은 그보다 빨랐다. 쉭. 쉭. 소리와 소리 사이가 고르게 맞춰지고 있었다.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켈리는 숨을 세기 시작했다. 낮에 쇠뇌를 그렇게 셌다. 쏘고 나면 스무 숨이었고, 그 스무 숨 안에 뛰고 열여섯에서 엎드렸다. 세는 동안은 켈리의 입이 일행의 다리였다. 이번에도 셌다. 쉭과 쉭 사이에 숨이 둘이었다. 그다음 쉭과 쉭 사이에도 둘이었고 그다음도 둘이었다. 켈리는 그 사이에서 빈 데를 찾았다. 시위를 다시 거는 동안 고개가 아래로 가는 스무 숨 같은 것을. 사람이 쓰는 무기에는 그런 자리가 있었다. 사람이 다시 힘을 모아야 하는 자리였다.
쉭. 둘. 쉭. 둘. 쉭.
없었다. 그 쇠에는 다시 걸 시위가 없었다. 김은 걸음마다 빠졌고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켈리가 아는 셈 가운데 그것을 셀 수 있는 셈은 없었다. 켈리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일행이 켈리를 보고 있었다. 낮에 그랬듯이 켈리의 입에서 숫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숫자는 나오지 않았다.
상류 쪽에서 등불 셋이 이쪽 둑을 따라 내려왔다. 땅 가까이에서 흔들리는 불빛 아래로 쇠뇌병 넷의 다리가 보였고, 그 뒤에 하나가 더 걸어왔다. 그 하나는 등불 사이를 걸으면서도 얼굴만은 빛 바깥에 두고 있었다. 걸음걸이로 켈리는 그를 알았다. 무너진 구덩이를 사람보다 먼저 보던 사람이었다.
쉭 소리는 등불과 다른 데서 왔다. 맞은편 둑이었다. 거기 그것이 섰을 때 켈리는 처음으로 그것을 똑바로 보았다. 사람보다 한 뼘 큰 쇠틀이었다. 등에 진 둥근 통에서 김이 빠질 때마다 건너편 등불이 그 김에 번졌다. 무릎과 팔꿈치마다 쇠가 맞물려 있었고, 가슴은 판 하나로 막혀 있었다. 판 위쪽에 가로로 좁은 틈이 나 있었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건너편 등불이 그 틈을 한 번 비췄을 때 켈리는 안의 눈을 보았다. 젊은 눈이었다. 켈리는 그 눈이 자기를 셈하는지 보려 했다. 회색 외투가 켈리의 손등을 뒤집을 때의 눈이 그랬고 측정관의 눈이 그랬다. 그 눈은 셈하지 않았다. 틈 밖의 어둠을 이리저리 훑다가 개울의 물빛에서 한 번 멈췄다. 겁이 든 눈이었다. 쇠는 그 겁을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바깥에서 보이는 것은 김 빠지는 소리와 맞물린 쇠뿐이었다.
쇠틀이 개울로 들어왔다.
낮에 쇠뇌병이 발을 멈춘 누런 풀의 줄을 쇠틀은 그냥 밟았다. 잿빛 물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물살이 쇠에 부딪혀 갈라졌고 김 빠지는 소리가 바뀌었다. 쉭이 아니라 쉬익이었다. 물을 건너는 데는 걷는 것보다 많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안에 있는 사람은 물에 닿지 않았다. 학원 사람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한 물을 학원이 만든 쇠는 건넜다.
켈리는 그제야 알았다. 앞의 벽은 쇠뇌병에게만 벽이었다.
"…내가."
고슈가 말했다. 일어서지 않았다. 쪼그린 채로 어깨의 털가죽을 벗었고 둘째 것도 벗었다. 린이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았다. 받는 손이 떨렸다.
"영감님. 깊이 가지 마요."
고슈가 린을 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얼굴이었는데, 입이 열리기 전에 얼굴이 먼저 바뀌기 시작했다. 턱이 앞으로 나왔다. 회색 수염이 볼까지 번졌고, 쥐고 있던 주먹이 펴지면서 손톱이 흙을 긁었다. 등이 둥글어지다가 낮아졌다. 사람이 쪼그린 높이에서 짐승이 엎드린 높이로 내려갔다. 켈리는 그것을 소아레 늪에서 한 번 보았다. 그때는 오래 걸렸다. 이번에는 짧았다. 고슈가 서두르고 있었다.
늑대였다. 털빛이 수염과 같은 회색이었다. 늑대가 뿌리 밑을 한 번 돌아보았는데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아직은 그랬다.
그러고는 뛰었다. 숨은 쪽이 아니라 등불 쪽으로 뛰었다. 등불 아래를 스치듯 지나며 쇠뇌병 하나의 다리를 물었다가 놓았다. 등불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 비명이 났고 쇠뇌가 줄 소리를 냈다. 쇠살이 늑대 뒤의 흙에 꽂혔다. 늑대는 숲 가장자리를 따라 열 걸음쯤 달리다가 숲으로 들어갔다.
"쫓아!"
쇠뇌병 셋이 뒤따랐다. 지휘자가 무언가를 말했는데 그 말보다 셋의 발이 빨랐다. 셋이 덤불로 들어갔고 덤불이 흔들렸다. 그리고 세 숨 뒤에 셋이 같은 덤불에서 나왔다. 들어갈 때와 같은 쪽을 보고 있었다. 하나는 쇠뇌를 거꾸로 들고 있었다. 셋이 서로를 보았다. 낮에 니카가 그랬던 것처럼.
늑대는 나오지 않았다.
숲은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짐승은 들였다. 린이 털가죽 둘을 끌어안은 채 숲을 보았다. 덤불은 다시 흔들리지 않았다.
"영감님."
작게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린이 한 번 더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 부르면 등불이 이쪽을 볼 것이었다.
켈리가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뼈와 깃털 끈이 거기 매달려 있었다. 다음에도 맡으라고 했던 것이었다. 맡은 것은 여기 있었고 맡긴 사람은 숲에 있었다.

쇠틀이 개울을 다 건넜다. 이쪽 둑에 올라서자 물이 쇠를 타고 흘러내렸고, 물방울이 등불 빛을 받아 잿빛으로 반짝였다. 쇠틀은 숲으로 들어간 늑대에게 관심이 없었다. 뿌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낮에 쇠뇌병 하나가 덤불을 헤쳐 보았던 자리였다.
쉭.
니카가 뿌리 밑에서 기어 나갔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니카가 너무 빨랐다. 뿌리 하나를 등지고 무릎을 꿇었고,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꺼내 뿌리 위에 세웠다. 엄지로 눌렀다. 입술이 움직였다. 켈리는 그 입 모양을 알았다. 타르실 골목에서 처음 본 것이었다. 그날 마른 돌바닥에서 쫓아오던 셋이 차례로 넘어졌고, 니카는 걸어 놓고 걸어 나갔다.
쇠틀이 한 걸음을 더 디뎠다. 넘어지지 않았다.
니카의 엄지 밑에서 주사위가 튀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니카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무릎을 꿇은 채로, 디딘 데가 없는 사람처럼 넘어졌다. 등이 뿌리에 부딪혔고 뒤통수가 흙에 닿았다.
켈리는 니카에게 들은 것을 떠올렸다. 거는 데에는 걸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사람에게는 발목이 있고 무릎이 있고 겁이 있어서 넘어질 데가 많았다. 쇠틀에는 겁이 없었다. 쇠틀 안에는 있었겠으나 쇠가 그것을 감싸고 있었다. 걸 자리가 없으면 건 것은 갈 데가 없었고, 갈 데가 없는 것은 건 사람에게 돌아왔다.
니카가 일어나려 했다. 손목을 쥔 채였다. 손목에 감은 천 아래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일어나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튀었어요."
오벨의 손이 가방 걸쇠로 갔다. 켈리는 그 손을 보았다. 걸쇠를 반쯤 열었다가 멈춘 손이었다. 서기는 부른 일만 했다. 적으라고 부르면 적었고 가져오라고 부르면 가져왔다. 쇠틀을 멈추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부른다 해도 그 값으로 무엇을 내놓아야 할지 오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담보를 고르지 않으면 가장 최근 것부터 가져갔다. 가장 최근 것은 오늘이었고, 오늘은 린이 외어 준 어귀의 사흘이 들어 있는 날이었다. 가방에는 다른 계약서도 있었다. 그쪽은 부르면 가까운 것부터 쳤고, 쇠틀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니카였다. 오벨이 걸쇠를 도로 채웠다. 채우는 소리가 아주 작았다. 오벨은 가방을 가슴에 안고 니카 쪽으로 몸을 낮췄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인 사람의 자세였다.
쇠틀이 니카 쪽으로 돌았다.
린이 털가죽을 내려놓았다. 땅에 등불 하나가 굴러 있었다. 늑대가 떨어뜨리게 한 것이었다. 기름이 조금 새어 나와 마른 잎 위에서 불이 작게 번지고 있었다. 린이 그 앞으로 기어갔다. 무릎을 꿇었다. 오나 앞에서 차례를 청할 때 하던 자세였다. 손목에서 장신구 하나를 풀려는데 매듭이 손톱에 걸렸고, 린은 그것을 이로 끊었다.
"불 맡으신 분. 저는 소아레 린입니다. 인사가 짧아서 죄송합니다. 저 아이 앞에, 저 쇠 앞에 길게 서 주십시오. 오늘 밤만요."
린이 장신구를 불에 넣었다. 작은 뼈 구슬이었다.
불이 일어섰다. 마른 잎에서 마른 잎으로, 린의 손이 그어 보인 쪽으로 번져서 니카와 쇠틀 사이에 사람 무릎 높이의 띠를 만들었다. 쇠틀이 멈췄다. 김 빠지는 소리가 한 번 끊겼다가 다시 났다. 틈 너머에서 안의 사람이 고개를 숙여 불을 내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의 등에는 둥근 통이 있었다. 김을 내는 통이었다. 쇠틀이 한 걸음 물러났다.
쇠틀이 불을 따라 옆으로 걸었다. 불의 끝을 찾고 있었다. 띠는 길지 않아서 열 걸음쯤 가면 끝났다. 린이 그것을 보았다.
"한 번 더요."
린이 둘째 장신구를 풀었다. 이번에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할 틈이 없었다. 장신구를 쥔 손을 불 속에 그대로 넣었고, 넣은 채로 끝을 향해 그었다. 불이 손을 따라 달렸다. 띠가 늘어났다. 쇠틀이 다시 멈췄다.
켈리는 냄새를 맡았다. 마른 잎 타는 냄새 사이에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린의 손바닥이 아직 불 속에 있었다. 꺼낼 까닭을 모르는 손이었다. 린은 불을 빌렸고, 빌린 동안 불은 뜨겁지 않았다.
"린. 손."
"응?"
린이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불 속에서 꺼냈다. 손바닥이 등불 빛에 번들거렸다. 린은 그 손을 뒤집어 보고 다시 뒤집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 그 손에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었다.
손목에서 장신구 둘이 빠져 있었다. 남은 것들이 부딪는 소리가 아까보다 가벼웠다. 열둘이었다. 린은 세지 않았다. 켈리가 셌다.

불 띠의 끝은 개울가였다. 물 앞에서 불은 멈췄다. 쇠틀은 그 자리를 찾아냈다. 물에 한 발을 디뎠다. 쉬익. 잿빛 물을 밟고 불 끝을 돌아 나왔다. 돌아 나온 자리가 뿌리 밑이었다.
바르트가 거기 서 있었다.
언제 일어섰는지 켈리는 보지 못했다. 바르트는 뿌리 구멍과 쇠틀 사이에, 켈리의 앞에 서 있었다. 등불 빛이 바르트의 목덜미에 닿았다. 혹들이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스무 해 동안 하나씩 붙은 것들이었고 하나도 달지 않고 붙은 것은 없었다. 바르트의 얼굴은 켈리 쪽을 향하지 않았다. 쇠틀의 무릎을 보고 있었다. 품에 넣었던 병이 손에 들려 있었다. 손이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는 마개가 뽑히지 않아서 바르트는 마개를 이로 물어 뽑았다.
켈리는 바르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알았으므로 소리를 내려 했는데 소리보다 바르트가 빨랐다.
쇠틀의 팔이 바르트를 향해 뻗었다. 바르트는 피하지 않았다. 몸을 낮춰 그 팔 아래로 들어갔다. 쇠틀의 무릎이 바르트의 가슴 앞에 있었다. 쇠와 쇠가 맞물린 자리였다. 바르트가 병을 거꾸로 들어 그 자리에 쏟았다. 회색 가루였다. 얼마나 쏟는지 보지 않았다. 병이 빌 때까지 쏟았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그 무릎을 감쌌다.
바르트의 입술이 움직였다. 니카처럼 숫자를 세는 입술이 아니었다. 켈리가 아는 말 가운데 그 입 모양에 맞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바꾼다.
쇠가 소리를 냈다. 굽는 소리도 부러지는 소리도 아니었다. 젖은 모래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맞물린 쇠의 겉이 바르트의 손 아래에서 붉게 일어났다가 부슬부슬 떨어졌다. 녹이었다. 몇 해에 걸쳐 앉을 녹이 몇 숨 만에 앉았다. 쇠틀이 다음 걸음을 디디려 했는데 무릎이 그 무게를 받지 못했다. 쇠틀이 앞으로 꺾이며 무릎을 꿇었다. 김이 한꺼번에 빠졌다. 쉬이이. 그리고 멈췄다.
가슴판의 틈 너머에서 안의 사람이 무언가를 소리쳤다. 쇠틀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르트가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났다. 물러난 걸음이 휘청였다. 바르트의 윗옷 왼쪽 옆구리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등불 빛에 검게 보였다. 젖은 자리가 아래로 번졌다. 바르트가 그 자리에 손을 댔다가 떼었다. 손바닥이 검었다.
켈리는 바르트의 장부 맨 앞에 있던 두 줄을 떠올렸다. 모자람. 살 파임. 손톱. 붙는 것은 무게만 늘렸으나 빠지는 것은 어디서 빠질지 몰랐다. 그래서 바르트는 저울이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야 한다면 남는 쪽으로 기울게 달았다. 오늘 바르트는 달지 않았다. 빠진 것은 손톱만 하지 않았다.
"바르트!"
켈리가 소리쳤다.
소리친 것이 자기라는 것을 켈리는 조금 뒤에야 알았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소리를 질러 본 적이 없었다. 지르라고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그 이름으로 부른 것도 처음이었다. 폐허에서 그릇을 내밀던 날부터 그는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자리의 이름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서면 그 사람도 아저씨가 되었다. 지금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은 자리가 아니었다.
바르트가 돌아보았다. 웃으려고 했던 것 같았다. 웃음이 되기 전에 무릎이 꺾였다. 바르트가 쇠틀 옆에 주저앉았다.

등불이 다가왔다. 숲에서 나온 셋과 다리를 물린 하나가 쇠뇌를 들고 섰고, 그 가운데에 지휘자가 있었다. 가슴의 글씨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쇠뇌 끝이 바르트에게 갔다. 바르트는 쇠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옆구리를 누르고 있었다.
켈리가 일어섰다.
지금 켈리의 다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남의 다리도 세워 둘 수는 있었다. 무릎을 펴서 잠그면 되었다. 켈리는 뿌리를 등으로 밀며 몸을 올렸고, 린이 내려놓은 지팡이를 두 손바닥 사이에 끼워 땅에 짚었다. 쥐지는 못하고 기댔다. 짚는 물건으로 만든 것이었으니 짚는 데에는 쓸 수 있었다. 그렇게 세 걸음을 걸어 바르트 앞에 섰다. 쇠뇌와 바르트 사이였다.
쇠뇌 끝이 흔들렸다. 켈리는 그 까닭을 알고 있었다. 여자애는 살려서. 학원 사람들이 그 애 손을 보고 눈이 뒤집혔다고 했다. 상하지 않게 해 달라고 했다. 켈리를 물건으로 취급하는 눈들이었고, 그 셈에서 켈리는 값이 나갔다. 값이 나가는 것 앞에서는 쏘지 않는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그런 셈 안에서 살았다. 그 셈을 등 뒤의 사람 쪽으로 돌려세워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지휘자가 손을 들었다. 쇠뇌 끝이 내려갔다.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높지 않은 목소리였다. 높일 필요가 없는 목소리였다.
"예. 알겠습니다."
켈리의 입이 말했다. 지팡이가 손바닥 사이에서 빠져나가 땅에 떨어졌다.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켈리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알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먼저 입이 했고 손이 했다. 열두 해 동안 그 말 뒤에는 늘 손이 따라갔다. 무엇을 알겠다는 것인지 켈리는 몰랐다. 가브릴이 손을 뻗던 그 밤에도 몰랐다. 그 말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나오는 말이었고, 나오면 몸이 따랐다. 몸은 오늘 밤에도 배운 대로 했다.
지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됐소. 여자애만 데려가시오."
쇠뇌병 하나가 다가왔다. 지휘자의 눈이 켈리를 지나 바르트에게로, 니카에게로, 린에게로, 오벨에게로 갔다. 하나씩 세는 눈이었다.
"나머지는—"
낮에 들은 말이었다. 해 지면 묻으시오. 해는 진 지 오래였다.
켈리는 발 앞의 지팡이를 내려다보았다. 손은 쥐지 못했다. 쥐려면 걸어야 했다. 아침에 다리에 한 번, 팔에 한 번 걸었고 그 값이 아직 다 청구되지 않은 팔이었다. 그 위에 한 번 더 거는 것을 교범은 금하지 않았다. 돌파형에게는 마지막 자리라는 것이 늘 있었고, 마지막 자리에서는 다음 날을 셈하지 않았다.
켈리가 몸을 숙였다.
열이 올라왔다. 팔 안쪽에서 시작해 어깨로 올라가는, 아침과 같은 길이었다. 다만 길이 헐어 있었다. 열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무언가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넷째 눈금이었다. 켈리가 아는 가장 낮은 눈금이었고, 그것이 지금 켈리가 가진 전부였다. 손가락이 닫혔다. 지팡이를 쥐었다. 넘친 것이 지팡이로 갔다.
틱.
작은 소리였다. 아이언우드가 울기 전에 쇠가 먼저 울었다. 손바닥 바로 위, 바르트가 마을 어귀에서 급히 녹여 먹인 쇠 테가 갈라지는 소리였다. 우물가에서 마지막으로 쳤을 때도 그 테가 삐걱했다는 것을 켈리는 듣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들었다. 지팡이가 켈리 대신 값을 내는 소리였다.
쇠뇌가 다시 올라왔다. 지휘자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켈리는 사람을 보지 않았다. 사람을 치면 사람이 죽었다. 켈리가 아는 가장 낮은 눈금은 사람에게 쓰는 눈금이 아니었다. 켈리는 몸을 돌려 개울을 보았다. 쇠뇌병들이 선 자리 바로 옆이 둑이었다. 아까 쇠틀이 올라온 자리였고, 흙이 젖어 있었다.
켈리가 둑을 쳤다.
둑이 무너졌다. 쳐서 무너졌다기보다 쳐서 터진 것 같았다. 젖은 흙과 그 아래의 잿빛 물이 한꺼번에 들려 일어났다가 등불 쪽으로 쏟아졌다. 진흙이 쇠뇌병들의 다리와 소매와 얼굴에 튀었다. 등불 둘이 꺼졌다.
"물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학원 사람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한 물이었다. 쇠뇌병들이 쇠뇌를 내던지고 얼굴을 문질렀다. 하나는 개울에서 멀어지려고 숲 쪽으로 뛰었다가 덤불 앞에서 멈췄다. 지휘자만이 서 있었다. 그도 소매로 얼굴을 닦았는데, 닦는 동안 눈이 감겨 있었다.
낮에 일행을 막아 준 물이 밤에 길을 열었다. 저들이 만든 물이었다.
"가."
켈리가 말했다. 말하고 나서 무릎이 꺾였다.

오벨이 켈리를 업었다. 켈리는 오벨이 무언가를 업는 것을 처음 보았고, 오벨도 처음인 것 같았다.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메고 켈리를 등에 올리는 데 두 번 실패했고 세 번째에 올렸다. 린이 데지 않은 손으로 니카를 일으켰다. 니카는 열이 올라 걸음이 비뚤었다. 바르트는 혼자 일어났다. 옆구리를 누른 손가락 사이로 검은 것이 새어 나왔다. 린이 털가죽 둘과 지팡이를 한 팔에 끌어안았다.
하류로 뛰었다. 숲 가장자리의 좁은 땅을 따라, 들어가지 않고.
뒤에서 고함이 났다. 쫓아오는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켈리는 오벨의 등에서 뒤를 보았다. 뒤를 보는 것이 켈리의 일이었다. 무릎을 꿇은 쇠틀이 남은 등불 하나 아래에 그대로 있었다. 그 너머 개울 건너 산기슭의 천막에는 불이 다 켜져 있었다. 구덩이 쪽에서는 망치 소리가 아직 나고 있었다. 뿌리 밑에 웅크리고 있을 때부터 나던 소리였다. 쉭 소리처럼 고르게 났다. 쇠틀 하나를 멈추게 했는데 그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홈통은 거기 있었고 그 아래로 물은 흘렀다.
켈리는 셌다. 손가락을 접을 수 없었으므로 눈으로 셌다. 앞에서 비틀거리는 니카. 니카를 부축한 린. 혼자 걷는 바르트. 업은 오벨. 업힌 자신.
다섯이었다.
켈리는 한 번 더 셌다. 다섯이었다. 허리춤에서 뼈와 깃털 끈이 오벨의 등에 부딪혀 소리를 냈다. 켈리는 쥐지 못하는 손으로 그것을 잡으려 했다. 잡히지 않았다.
지팡이는 린의 팔에 안겨 있었다. 손잡이 위 한 뼘, 쇠 테가 갈라진 자리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켈리는 거기 갈라진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들었기 때문이다.

 

청구서


밤새 걸은 길이 몇 킬로미터였는지는 아무도 세지 않았다. 켈리도 세지 않았다. 오벨의 등에서 켈리가 센 것은 사람이었고, 사람은 밤새 다섯이었다.
동이 틀 무렵 숲 가장자리가 개울에서 멀어졌다. 개울은 오른쪽으로 휘어 갈대 속으로 들어갔고 숲은 왼쪽으로 물러났다. 그 사이에 바위가 하나 있었다. 사람 키의 두 배쯤 되는 바위였는데 아래쪽이 파여 있어 바람이 들지 않았다. 고슈가 있었다면 그 밑에 무엇이 사는지부터 말했을 것이었다. 고슈가 없었으므로 아무도 아무 말 없이 그 밑으로 들어갔다.
개울이 멀어지자 소리가 돌아왔다. 갈대 너머에서 새가 울었다. 처음에는 하나가 울었고 조금 뒤에는 여럿이 울었다. 며칠 동안 개울가에서 듣지 못한 소리였다. 개구리가 울지 않던 물가를 따라 밤새 걸어 내려온 끝에, 무언가가 우는 자리에 닿은 것이었다. 켈리는 오벨의 어깨 너머로 그 소리를 들었다. 셀 수 있는 소리였는데 세지 않았다. 셀 것이 따로 있었다.
오벨이 무릎을 꿇자 켈리가 등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오벨은 한참 그 자세로 있다가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앉았다. 서른여덟 해 동안 서류 가방보다 무거운 것을 져 본 적이 없는 허리였다. 가방은 아직 가슴 앞에 매달려 있었다. 밤새 켈리와 가방 사이에 끼어 있던 사람이 오벨이었다.
해가 떴다. 청구서도 같이 왔다.
켈리가 먼저 받았다. 일어나 앉으려고 바위를 짚었는데 팔이 어깨 높이에서 멈췄다. 그 위로는 올라가지 않았다. 막힌 것이 아니라 거기서 끝난 것 같았다. 손가락은 가운데 마디까지 접혔다가 거기서 멈췄다. 어제 아침에 한 번 낸 값 위에 밤에 한 번 더 얹은 값이었다. 두 번 낸 값이 두 번 청구되었는데 하나씩이 아니라 한꺼번에 왔다. 켈리는 팔을 내려놓고 어깨 아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셈해 보았다. 많지 않았다.
린이 바위 그늘 끝에 앉아 오른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침 빛이 손바닥에 닿아 있었다. 손바닥 가운데에 물집이 셋 솟아 있었고 하나는 밤새 터져 허옇게 늘어져 있었다. 린이 엄지로 그 자리를 꾹 눌렀다. 켈리는 린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에 아무것도 없었다.
"…괜찮은데?"
린이 말했다. 진짜로 궁금한 목소리였다. 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린의 손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린만 모르고 있었다. 모른다는 것이 그 손에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라는 데까지는 켈리도 알았다. 그다음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니카는 바위의 가장 깊은 데에 누워 있었다. 얼굴이 붉었다. 왼 손목의 천을 오른손으로 꽉 쥔 채였고 입술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따금 소리가 섞여 나왔는데 숫자였다. 니카가 눈을 떴다. 바위 아래로 들어오는 빛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지금 아침일 확률이요. 6할."
"해가 떠 있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니카가 빛을 다시 보았다.
"…그럼 7할로 올릴게요."
니카의 셈은 빨랐다. 늘 맞는 것은 아니었으나 빠르기만은 언제나 빨랐다. 그의 셈이 틀린 일은 꽤 많았는데, 그의 자존심을 위해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열 나는 확률은 10할이요. 이건 맞아요."
니카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 것은 맞았다.
오벨은 수첩을 펴 놓고 있었다. 어젯밤 뿌리 밑에서 받아 적은 장이었다. 줄마다 끝에 작게 「소아레 린이 외었음」이 붙어 있었다. 오벨은 그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로 다 읽고 나서 린을 보았다.
"숲지기는 지팡이를 짚었습니까."
"어제 외어 줬잖아요."
"적혀 있습니다."
오벨이 수첩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런데 제가 본 것이 아닙니다."
린이 오벨을 보았다. 오벨의 손가락은 그 줄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법정에서 기록과 증언은 같은 무게를 가졌다. 적힌 것은 본 것과 같았고, 그래서 오벨은 스무 해 동안 적힌 것을 읽는 일로 먹고살 수 있었다.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오벨은 자기 수첩에서 처음 배우고 있었다. 읽으면 알았다. 다만 떠오르지는 않았다.
린이 데지 않은 손으로 무릎을 짚고 오벨 앞에 고쳐 앉았다.
"짚었어요. 켈리 거랑 길이가 비슷했어요. 두 개가 나란히 놓였어요."
오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첩에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미 적혀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끄덕였다.
바르트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밤새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아침에도 하지 않았다. 윗옷 왼쪽 옆구리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어젯밤 등불 아래에서 검게 보이던 것이 아침 빛에서는 붉었다. 굳은 붉음 위에 새 붉음이 번들거렸다. 켈리는 그것을 보았고 오벨도 보았다. 오벨이 먼저 말했다.
"멎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말을 받지 않았다. 받을 말이 없었다. 여섯 가운데 상처를 닫는 술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빌리는 사람과 거는 사람과 부르는 사람과 바꾸는 사람과 되는 사람과 터뜨리는 사람이 있었다. 닫는 사람은 없었다.
"그쪽 술로는 막을 수 있습니까."
오벨이 바르트에게 물었다. 바르트가 눈을 떴다.
"…막을 수는 있어."
"그럼."
"달아야 해."
바르트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손이 떨렸다. 어제 아침부터 떨리던 손이었는데 오늘은 떨림이 더 컸다. 바르트는 그 손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는 눈금을 못 읽어. 못 읽고 바꾸면 또 모자라. 모자라면 또 빠져."
"어디서."
켈리가 물었다. 바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켈리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노트 앞쪽, 먹이 가장 바랜 자리의 두 줄이었다. 빠지는 것은 어디서 빠질지 몰랐다. 손목에서 빠지면 손목이 파였고 더 안쪽에서 빠지면 더 안쪽이 파였다. 어젯밤은 옆구리였다. 다음은 옆구리보다 안쪽일 수도 있었다.
니카가 누운 채로 말했다.
"…그러면 지지면 되잖아요."
모두가 니카를 보았다. 니카가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열 나서 하는 말 아니에요. 도박장 뒷마당에서 봤어요. 칼 맞은 사람을 달군 쇠로 지지는 거요. 9할은 살아요."
그 9할이 맞는지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다만 그것밖에 남은 방법이 없다는 것은 다들 알았다.
"불이 있어야 합니다."
오벨이 말했다.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연기."
켈리가 말했다. 오벨이 켈리를 보았다.
"연기는 멀리서 보여."
켈리는 그것을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었다. 연기가 오르는 데에는 사람이 있었고, 사람이 있는 데로 돌파형이 갔다. 켈리는 삼 년 동안 연기를 보고 걸었다. 걸어간 끝에 무엇을 했는지도 켈리는 알았다. 그러니 지금 이 바위에서 연기가 오르면 그것을 보고 걸어올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결국 불은 바위가 가장 깊이 파인 자리에 작게 피웠다. 마른 잔가지만 골라 손바닥 하나만 한 불을 만들었다. 연기는 바위 아랫면을 타고 퍼지다가 바위 끝에서 흩어졌다. 위로 곧게 오르지 않았다. 부싯돌은 오벨이 쳤다. 바르트의 자루에서 꺼낸 것이었는데 오벨은 다섯 번을 치고서야 불똥을 마른 이끼에 받았다. 앞의 네 번은 아무도 세지 않았다. 니카만 셌다.
바르트의 칼이 불 위에 놓였다. 손바닥 길이의 작은 칼이었고 자루까지 쇠 하나로 된 것이었다. 칼날이 먼저 붉어졌고 자루도 곧 뜨거워졌다. 그것을 쥐고 상처에 대고 있어야 했다. 떼지 않고 대고 있어야 했다.
켈리의 손은 쥐지 못했다. 바르트의 손은 떨렸다. 니카는 열에 떨었다. 오벨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다만 오벨이 그 자루를 쥐면 쥐는 순간 놓을 것이었다. 사람의 손은 뜨거운 것을 쥐면 놓게 되어 있었다. 놓지 않으려면 손이 뜨거운 것을 몰라야 했다.
"내가 할게."
린이 말했다. 모두가 린의 손을 보았다. 물집 셋이 아침 빛 아래에서 번들거렸다.
"린 씨 손은 이미—"
"그러니까요."
린이 오벨의 말을 잘랐다.
"지금은 안 뜨거워. 나중에 뜨거워도 그건 나중이야."
바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린을 오래 보았다.
"…그건 내가 하던 말이야."
"알아요."
린이 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목의 장신구는 풀지 않았다. 빌릴 것이 없었다. 어젯밤 빌린 것이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두 번 빌린 것은 두 번 돌려받아야 했고, 아직 하나도 돌려받지 않은 손이었다.
바르트가 자루에서 저울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묶은 가죽 끈을 풀어 입에 물었다. 오벨이 바르트의 뒤로 돌아가 두 어깨를 잡았다. 켈리는 잡을 손이 없었다. 켈리가 바르트의 다리 위에 엎드렸다. 두 다리를 가로질러 몸을 얹었다. 켈리가 낼 수 있는 것은 무게뿐이었다. 열두 해 동안 아침마다 저울 위에서 재던 그 무게였다. 그 무게를 남의 다리를 붙들어 두는 데 쓰는 것은 처음이었다.
린이 칼자루를 쥐었다. 쥐는 소리가 났다. 작게, 젖은 것이 뜨거운 데 닿는 소리였다. 린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벨이 바르트의 윗옷 자락을 걷었다. 굳은 피가 천과 같이 떨어지며 살이 드러났다. 파인 자리였다. 켈리는 그것을 바르트의 다리 너머로 보았다. 손톱만 하지 않았다.
"셋 세면 대요."
린이 말했다. 켈리가 숨을 셌다. 셀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하나. 둘.
린은 셋을 기다리지 않았다.
바르트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켈리의 몸이 다리째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오벨이 어깨를 누르며 무언가 말했는데 켈리는 듣지 못했다. 가죽 끈 너머에서 바르트의 소리가 났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바위 밑에서 짓눌리는 무언가의 소리였다. 냄새가 났다. 바르트의 살 냄새였고, 그 아래에 그보다 가는 냄새가 하나 더 섞여 있었다. 칼자루를 쥔 손에서 나는 냄새였다. 린의 손은 떼지 않았다. 켈리는 셌다. 넷. 다섯. 여섯.
린이 칼을 들었다.
파인 자리가 검게 오그라들어 있었다. 피가 나오지 않았다. 바르트가 가죽 끈을 뱉었다. 끈에 이가 깊이 박힌 자리가 남아 있었다. 바르트는 숨만 쉬었다. 오래 쉬었다.
린이 칼을 풀밭에 내려놓고 오른손을 펴 보았다. 칼자루 모양이 손바닥에 그대로 찍혀 있었다. 물집은 남아 있지 않았다. 물집이 있던 자리까지 다 그 모양 안에 들어갔다.
"…괜찮은데?"
아까와 같은 말이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까도 웃은 사람은 없었다.
"린."
켈리가 바르트의 다리 위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거 나중에 와."
켈리는 그것을 알았다. 후반동은 몇 시간에서 하루 뒤에 왔다. 걸 때는 아무렇지 않았고 다음 날 아침에 청구서가 왔다. 린의 손은 어제 걸었고 아직 아침이 오지 않은 손이었다.
"알아."
린이 대답했다. 다 안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게 대답했다.
바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린을 보았고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아직 바르트의 다리 위에 엎드려 있었다.
"…고맙네."
린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고는 켈리에게 말했다.
"무거웠어."
"45."
켈리가 말했다. 바르트가 웃으려고 했다. 웃으려다 옆구리를 붙잡았다. 붙잡고 나서 마저 웃었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정오가 지나자 켈리가 노트를 달라고 했다.
바르트의 자루에서 오벨이 노트를 꺼냈다. 맨 뒷장을 펴서 켈리 앞에 놓았다. 칸 다섯이 그어진 장이었다. 「켈리」「지팡이」「아저씨」「방망이」「외는 이」. 맨 아래 줄은 「소아레. 탁자」였다. 그 아래가 비어 있었다.
"적어야 해."
켈리가 말했다. 연필을 집으려 했다. 손가락이 가운데 마디에서 멈췄고 연필은 손바닥 위를 굴러 풀밭에 떨어졌다. 켈리가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바르트는 손이 떨렸다. 니카는 열에 떴고 린의 오른손은 칼자루 모양이었다. 바위 밑에서 연필을 쥘 수 있는 손은 하나였다.
"제가 적겠습니다."
오벨이 연필을 주웠다. 무릎 위에 노트를 고쳐 놓고 안경을 고쳐 썼다. 그 동작을 켈리는 중재소에서 보았다. 오벨이 남의 서류를 받아 적기 전에 하는 일이었다.
"자리는."
"구덩이."
오벨이 왼쪽 여백에 「구덩이」라고 적었다. 반듯한 글씨였다. 켈리의 글씨들 사이에서 그 두 글자만 인쇄한 것 같았다.
"켈리 칸. 다리 남의 것. 팔. 손등."
연필이 움직였다. 오벨이 다 적고 나서 소리 내어 읽었다.
"하지 기능 일시 상실. 상지 근력 저하. 수배부 모세혈관 파열."
켈리가 오벨을 보았다.
"…그게 뭐야."
"같은 말입니다."
"내 말로."
오벨이 자기가 적은 것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보다가 줄을 하나 긋고 그 아래에 다시 적었다. 「다리 남의 것. 팔. 손등.」 오벨의 반듯한 글씨로 적힌 「다리 남의 것」은 이상하게 법조문처럼 보였다. 켈리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지팡이 칸은 비워. 그날은 놓았어."
"예."
"칸 더 그어 줘. 다섯."
오벨의 연필이 멈췄다.
"다섯이나."
"니카, 린, 오벨, 고슈."
"넷입니다."
"하나 더."
오벨이 세로줄을 넷 그었다. 칸이 좁아졌다. 맨 뒷장 한 장에 칸 아홉이 들어가자 칸 하나의 너비가 손가락 하나만 해졌다. 오벨은 칸 머리에 이름을 하나씩 적었다. 「니카」「린」「오벨」「고슈」. 자기 이름을 적을 때 연필이 아주 조금 머뭇거렸다. 남의 장부에 자기 이름을 지불인으로 적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리고요."
"인부."
"인부는 저희 일행이 아닙니다."
"값을 냈어."
오벨이 켈리를 보았다.
"구덩이에서. 다리 부러진 사람. 매일 입에 천 감고 내려가는 사람들."
"지불인이 특정되지 않으면 장부에 칸을 줄 수가 없습니다. 이름이 없으면—"
"이름 몰라."
켈리가 말했다.
"그래도 냈어."
오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필이 오른쪽 끝으로 갔다. 종이 가장자리에 남은 자리는 손톱 두 개만 했다. 오벨이 거기에 세로줄을 하나 더 긋고 칸 머리에 작게 「인부」라고 적었다. 칸이 열이 되었다. 켈리가 열을 셌다. 어제는 다섯이었다.
"인부 칸에. 다리 하나."
「다리 하나.」
"오벨 칸에."
오벨의 연필이 자기 칸 위에서 멈췄다. 켈리가 말했다.
"어귀의 사흘."
오벨이 그것을 적었다. 자기가 낸 값을 자기 손으로 남의 장부에 적었다. 적고 나서 연필을 들지 않았다. 켈리가 하나를 더 말했다.
"옆에. 린이 외어 줬다고."
"옆은 여백입니다. 여백은 원래 비워 두는 자리입니다."
"내 장부는 여백에도 적어."
오벨이 여백을 보았다. 「소아레. 탁자」 줄 옆에 켈리의 삐뚤어진 글씨로 「자국 1」이 적혀 있었다. 오벨은 그 옆 줄의 여백에 작게 적었다. 「린이 외어 줌.」
다음 줄은 「개울」이었다. 켈리 칸에 「한 번 더. 팔 어깨까지.」 지팡이 칸에 「쇠 테 갈라짐.」 켈리는 그 다섯 글자를 오벨이 적는 동안 지팡이를 내려다보았다. 손잡이 위 한 뼘, 갈라진 자리는 낮에 보아도 가늘었다. 그래도 거기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들었으므로 알았다.
"니카 칸."
"튄 게 아니에요."
바위 안쪽에서 니카가 말했다. 눈은 감은 채였다.
"확률이 나쁜 쪽으로 나온 거예요. 쇠틀에는 걸 자리가 없었고 그래서 건 게 갈 데가 없어서—"
"칸이 좁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손가락 하나만 한 칸이었다. 니카가 잠깐 조용했다.
"…그럼 '나쁜 쪽'만요."
「나쁜 쪽. 열.」
"열은 빼 주시면 안 돼요?"
"사실입니다."
니카가 다시 조용해졌다. 셈하는 입술이 움직였는데 무엇을 세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린 칸에는 「둘. 손.」이 들어갔다. 장신구 둘과 손 하나였다. 린이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오늘 아침 거도 써."
"그건 오늘 줄이야."
켈리가 말했다. 오벨이 「개울」 아래에 새 줄을 그었다. 왼쪽 여백에 「바위 밑」. 린 칸에 「손. 또.」 그리고 바르트 칸에 무언가를 적으려다 켈리를 보았다. 켈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중이었다.
"고슈 칸은요."
오벨이 물었다. 켈리가 고슈 칸을 보았다. 「개울」 줄의 고슈 칸이 비어 있었다. 무엇을 냈는지는 알았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적어야 하는지는 몰랐다. 사람이 짐승이 되어 숲에 들어가 나오지 않은 것을 적는 말은 켈리에게 없었다.
"물음표."
"문서에 물음표는—"
"내 장부야."
오벨이 연필을 고슈 칸에 댔다. 한참 대고 있다가 물음표를 하나 그렸다. 스무 해 동안 오벨이 법정에 낸 서류 가운데 물음표가 들어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물음표를 쓰는 사람은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벨은 그것을 처음 그렸고, 다 그리고 나서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생각보다 모양이 반듯하게 나오지 않았다.
"하나 남았어."
켈리가 말했다. 셋째 칸 머리였다. 「아저씨.」
"그건 내가 쓸게."
켈리가 한 번 더 말했다.
오벨이 연필을 내밀었다. 켈리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받지 못하고 두 손바닥 사이에 끼웠다. 기도하는 사람의 손 모양이었다. 켈리는 그 손으로 「아저씨」 위에 줄을 하나 그었다. 줄은 곧게 그어지지 않았다. 세 글자를 다 지나가는 데 두 번 끊겼다. 그 위 빈자리에 켈리가 썼다.
바르트.
세 글자가 다른 글자의 세 배만 했다. 손바닥 사이에서 연필이 이리저리 기울었고, 기울 때마다 획이 넓어졌다. 마지막 글자의 받침이 옆 칸으로 넘어갔다. 「방망이」 칸이었다.
"방망이 칸을 침범했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방망이는 한 줄뿐이야."
켈리가 말했다. 바위 안쪽에서 니카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방망이가 이의 없대요. 10할이요."
린이 웃었다. 오늘 처음 웃은 사람이 린이었다. 바르트는 바위에 기댄 채 그 장을 건너다보았다. 자기 이름이 그 장에서 가장 컸다.
"…크게도 썼네."
"손이 이래서."
켈리가 말했다. 그러고는 바르트 칸의 「개울」 줄을 내려다보았다. 비어 있었다. 그 칸에 들어갈 것은 켈리가 정할 것이 아니었다. 바르트의 장부에서 옮겨 와야 했다. 그런데 바르트의 장부에는 아직 그 줄이 없었다.

해가 기울 무렵 일행은 바위를 떠나 산 쪽으로 반나절을 걸었다. 바르트는 걸었다. 지진 자리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 걸었고, 쉴 때마다 그 손을 떼어 보았다. 피는 묻어 나오지 않았다.
저녁 자리는 비탈의 마른 풀숲이었다. 불은 피우지 않았다. 바르트가 자루에서 노트를 꺼냈다. 이번에는 오벨이 꺼낸 것이 아니었다. 윗늪 저녁부터 바르트는 그 노트를 펴지 않았다. 켈리가 청할 때만 자루에서 나왔고, 나와서도 바르트의 손에서는 펴지지 않았다. 지금 바르트가 그것을 폈다. 맨 뒷장이 아니라 앞쪽이었다. 먹이 바랜 장을 지나 열일곱 줄이 있는 장에서 멈췄다.
맨 아래 줄은 「5월 3일. 목 오른쪽. 쌀알. 한 푼 남음.」이었다. 그 아래가 비어 있었다.
바르트가 연필을 쥐었다. 손이 떨렸다. 연필 끝이 종이에 닿자마자 미끄러져 엉뚱한 데로 줄을 그었다. 바르트는 그 줄을 내려다보았다. 스무 해 동안 그 장의 모든 글자가 그 손에서 나왔다. 저울을 달고, 눈금을 읽고, 적었다. 그 순서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켈리."
"네."
바르트가 노트를 내밀었다.
"적어 주게."
켈리는 노트를 받았다. 무릎 위에 놓고 연필을 두 손바닥 사이에 끼웠다. 바르트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부탁했다는 것을 켈리는 알았다. 무엇을 받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주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빵을 조금 크게 자르고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6월 25일."
켈리가 적었다. 숫자는 쉬웠다. 숫자는 육성소에서 배웠다.
"왼 옆구리."
적었다.
"살 파임."
적었다. 그다음에 바르트가 멈췄다. 크기를 말할 차례였다. 콩, 팥, 쌀알, 손톱. 바르트는 그것을 늘 제 눈으로 재서 적었다. 이번에는 보지 못했다. 파인 자리는 옆구리 뒤쪽에 있었고 바르트는 그 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그것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크기는."
"제 손바닥만 해요."
린이 말했다. 린은 그 자리를 칼로 덮은 사람이었다. 린이 오른손을 펴 보였다. 칼자루 모양이 찍힌 손바닥이었다. 아무도 그 손바닥을 오래 보지 않았다. 켈리가 적었다. 손바닥.
바르트가 다음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마지막은 늘 푼이었다. 한 푼 남음, 두 푼 모자람. 저울의 눈금이었다. 바르트의 입이 열린 채로 있었다. 거기 들어갈 숫자가 없었다.
"…달지 않음."
켈리가 적었다. 「달지 않음.」
그 줄은 그 장의 다른 줄들보다 두 배쯤 컸다. 한 줄이 두 줄의 자리를 먹었다. 열일곱 줄은 전부 같은 크기의 작은 글씨였는데 열여덟째 줄만 커다랗고 삐뚤었다. 그리고 그 줄만 푼으로 끝나지 않았다. 스무 해 동안 바르트의 몸은 저울 위에서 적혔다. 이 줄의 몸은 저울에 오른 적이 없었다.
바르트가 노트를 돌려받아 그 줄을 오래 보았다.
"…크네."
"손이 이래서."
"아니."
바르트가 노트를 덮지 않고 무릎에 얹었다.
"됐어."
켈리는 맨 뒷장으로 넘겨 바르트 칸의 「개울」 줄에 그것을 옮겨 적었다. 「옆구리. 손바닥. 달지 않음.」 역시 컸다. 「인부」 칸 바로 옆까지 넘어갔다. 이번에는 오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비탈 아래, 낮에 떠나온 숲 가장자리가 멀리 한 줄로 어둡게 누워 있었다. 그 끝에 무언가 앉아 있었다.
회색이었다. 바위인 줄 알았다. 바위였다면 귀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늑대였다. 앉아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숲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숲과 비탈의 경계, 아무도 서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린이 일어섰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부르면 올까. 부르면 갈까. 린은 그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될지 몰랐고, 모르는 채로 부를 수 없었다.
"…영감님 털 색이야."
린이 작게 말했다.
켈리가 허리춤의 끈을 풀었다. 손가락이 닫히지 않아 매듭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뼈 일곱 개와 깃털 다섯 개가 꿰인 끈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손목에 걸었다. 그러고는 팔을 들었다. 팔은 어깨 높이에서 멈췄다. 그 위로는 올라가지 않았다. 켈리는 거기까지만 들어 보였다.
맡은 것이 여기 있다는 뜻이었다. 그 뜻이 늑대에게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늑대는 일어서지 않았다. 귀만 한 번 이쪽으로 섰다.
켈리의 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깨 높이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하는 팔이었다. 린이 데지 않은 왼손으로 켈리의 팔꿈치를 받쳤다. 둘이 그렇게 서 있었다. 해가 넘어갔다. 늑대는 그 자리에 엎드렸다. 다가오지 않았다. 가지도 않았다.
그날 밤 켈리는 노트 맨 뒷장을 오래 보았다. 칸이 열이었다. 고슈 칸에 물음표가 하나 있었다. 켈리는 그 물음표를 지우지 않기로 했다. 내일 그 옆에 적을 것이 하나 생겼을 뿐이었다. 멀리. 앉아 있음.

 

치유사가 없다


린이 깬 것은 동이 트기 조금 전이었다. 깼다기보다 무언가에 끌려 올라온 것에 가까웠다. 마른 풀숲에 모로 누워 있던 몸이 한 번 크게 튀었고, 오른손이 가슴 앞으로 말려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소리가 났다.
켈리는 그 소리에 눈을 떴다. 막사에서 밤에 나는 소리는 대개 셋 가운데 하나였다. 기침과 잠꼬대와, 이를 악문 채 새어 나오는 숨. 이것은 그 셋 어디에도 들지 않았다. 이를 악물지 않은 소리였다. 막을 생각을 아직 하지 못한 사람의 소리였다.
린이 울고 있었다.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쥐고 무릎 사이에 끼운 채, 몸을 동그랗게 말고 울었다. 소리를 낮추려 하지 않았다. 소아레 마을 어귀에서 늪 바람이 눈에 들어갔다고 둘러대던 린이었다. 그때는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먼저 둘러댔다. 지금은 둘러댈 틈이 없었다.
어제 아침 칼자루를 쥐었던 손이었다. 그 손은 그때 아무것도 몰랐다. 불을 빌린 동안 불은 뜨겁지 않았고, 빌린 것을 돌려받기 전까지 그 손바닥은 린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돌려받고 있었다. 이틀 치 뜨거움이 이자를 붙여 한꺼번에 손바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바르트가 몸을 일으키려다 옆구리를 붙잡고 도로 누웠다. 오벨이 일어나 앉아 풀숲을 더듬어 안경을 찾았다. 니카는 열에 젖은 눈을 떴다가 린 쪽을 보고는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다. 셀 것이 아니었다.
켈리가 린 옆으로 기어갔다. 손가락은 아직 가운데 마디에서 멈췄다. 린의 손을 잡아 줄 수 없었다. 잡을 수 있었다 해도 지금 그 손은 아무도 잡으면 안 되는 손이었다. 켈리가 가진 것 가운데 지금 쓸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하나."
린의 어깨가 흔들렸다.
"둘."
켈리는 린의 숨에 맞춰 세지 않았다. 린의 숨이 따라올 만한 빠르기로 셌다. 행군할 때 교관이 세던 빠르기였다. 사람의 발이 생각보다 먼저 맞춰 들어가는 빠르기였다. 개울가에서는 켈리가 숫자를 말하면 다섯이 움직였다. 지금 켈리가 세는 것은 한 사람의 숨이었다.
"셋. 넷."
처음에 린의 숨은 숫자를 앞질렀다. 일곱쯤에서 숫자와 나란해졌고 열둘쯤에서는 숫자 뒤를 따라왔다. 켈리는 서른까지 세고 처음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 서른을 다 세기 전에 린이 다시 몸을 말았다. 아까와 같았고, 아까보다 조금 더했다. 켈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린은 불을 두 번 빌렸다. 두 번 빌린 것은 두 번 돌아왔다. 켈리는 셈을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셌다.
"하나."
오벨이 물통 뚜껑에 물을 따라 들고 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뚜껑을 든 채 서 있었다. 켈리가 턱으로 린의 손을 가리켰다. 오벨이 무릎을 꿇고 뚜껑을 기울였다. 물이 칼자루 모양으로 부어오른 자리 위로 흘러내렸다. 린이 숨을 크게 들이켰고, 켈리는 그 숨도 셌다. 오벨은 뚜껑이 빌 때마다 다시 따랐다. 물통이 가벼워지는 소리가 났다. 아무도 물을 아끼자고 하지 않았다.
해가 산등성이에 걸릴 무렵 린의 숨이 숫자 없이도 고르게 되었다. 켈리가 세기를 멈췄다. 린이 눈을 떴다. 눈가가 부어 있었다.
"…이게 원래 이런 거야?"
"응."
"너는 맨날 이랬어?"
"…다음 날 아침에."
"뭐가."
"걸고 나면. 다음 날 아침에 와."
린이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칼자루 모양이 아침 빛 아래에서 벌겋게 부어 있었다. 손바닥 가장자리의 물집 자리가 젖은 종이처럼 쭈글쭈글했다.
"그래서 나중에 온다고 한 거구나."
"응."
린이 한참 있다가 말했다.
"…이렇게 오는 줄 알았으면."
그 뒤를 린은 말하지 않았다. 켈리도 묻지 않았다. 그 뒤에 무엇이 붙을지 둘 다 알았고, 알았더라도 했을 것이라는 것도 둘 다 알았다. 바르트의 옆구리는 멎었다.
바르트가 누운 채로 린을 보았다.
"…미안하네."
"하지 마요."
린이 손을 무릎 위에 조심스럽게 펴 놓으며 말했다.
"그 말 들으면 더 아파요."
바르트는 그 뒤로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자루에서 마지막 남은 빵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나눴고, 가장 큰 조각을 린의 무릎 옆에 놓았다. 그것도 미안하다는 말이었지만 린은 그 말은 받았다.

빵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한 덩이를 다섯으로 나누자 손바닥보다 작은 조각들이 되었다. 켈리는 자기 몫을 품에 넣으려다 그만두고 그 자리에서 먹었다. 다음 끼니가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먹어 두어야 했다. 그것은 육성소가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탈영한 뒤의 숲이 가르친 것이었다.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숲 가장자리를 따라 실베인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이틀이면 모라였고 사흘이면 윗늪이었다. 비탈을 오르면 산이었다. 산등성이는 회색 돌을 군데군데 드러낸 채 서쪽으로 길게 이어졌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바르트만 알았다. 바르트는 드란이라고만 했다.
오벨이 수첩을 폈다.
"윗늪에서 청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오벨이 말을 이었다.
"청은 어디가 아픈지였습니다. 찾았습니다. 찾았으면 가서 말해야 합니다. 외는 이도 돌아오면 본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윗늪까지 가면요."
니카가 누운 채로 말했다. 이마에 얹은 젖은 천이 미끄러져 눈썹에 걸렸다.
"조사대 천막하고 반나절 거리예요. 걔들이 윗늪 쪽으로 올 확률이—"
니카가 입을 다물었다. 숫자를 말하지 않았다. 니카가 숫자를 말하지 않는 것은 숫자가 나쁠 때였다.
켈리는 비탈 아래를 보았다. 숲 가장자리가 한 줄로 누워 있었고 그 끝은 아침 안개에 묻혀 있었다. 그 너머 어딘가에 모라가 있었다. 둑 끝에서 징발대의 저울이 가라앉던 마을이었다. 그날 모라는 싸웠다. 마을 사람들이 앞장섰고 늪이 거들었다. 그날 온 것은 저울을 든 사람들이었다. 이번에 올 것은 누런 줄 앞에서 멈추지 않는 쇠틀이었다.
쫓는 쪽이 둘이었다. 거두러 오는 쪽과 데려가러 오는 쪽. 둘 다 켈리가 있는 데로 왔다. 켈리가 모라에 있으면 모라로 왔고 윗늪에 있으면 윗늪으로 왔다.
"마을로 가면 마을이 값을 내."
켈리가 말했다. 다들 켈리를 보았다.
"산으로 가."
말하고 나서야 켈리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알았다. 길을 정했다. 열두 해 동안 길은 정해져서 왔다. 지도 위에 그어진 선으로 왔고 교관의 손가락으로 왔고, 삼 년 동안은 가브릴의 등으로 왔다. 그 등을 따라가면 되었다. 탈영한 뒤에는 바르트가 정했고, 바르트가 정하지 않는 날에는 고슈가 앞에서 걸었다. 지금 고슈는 숲에 있었고 바르트는 옆구리를 누르고 앉아 있었다. 정할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켈리의 입이 먼저 정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바르트가 켈리를 오래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산."
"그럼 윗늪은."
린이 물었다. 켈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켈리의 셈에는 윗늪에 갈 자리가 없었다. 약속은 오벨의 셈이었고 켈리는 그런 셈을 할 줄 몰랐다.
린이 잠깐 있다가 말했다.
"그럼 내가 외어 둘게."
"…외어 둬?"
"나중에 말하려고. 윗늪은 적은 건 안 받잖아. 아저씨 수첩에 있어도 소용없어."
오벨이 수첩을 반쯤 덮었다.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린이 무릎을 꿇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서 무릎 위에 펴 둔 채였다. 외는 이들이 외기 전에 하던 자세였는데 그 손바닥만은 외는 이들과 달랐다. 린은 쉬는 자리에서 쉬며 외었다.
"윗늪 위. 옛 돌산 기슭. 천막 일곱. 깃발 없음. 구덩이 하나. 물 빼는 홈통 하나. 누런 줄은 홈통이 닿는 자리에서 시작함. 홈통 위쪽 풀은 양쪽 다 초록. 개구리는 위에서 욺."
린이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인부들은 입에 천을 감고 내려감. 한 사람은 띠를 오른팔에 맴."
그러고는 오벨을 보았다.
"…맞아?"
"맞습니다."
오벨이 수첩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볼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오벨이 잃지 않은 날에 오벨이 직접 본 것이었다.
켈리는 린을 보았다. 소아레에서 린은 「나는 외는 이 아니야」라고 했다. 할머니 앞에서, 차례를 받지 못한 자리에서. 외는 이는 차례가 아닌 말은 외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린에게 차례를 준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린이 지금 한 것은 외는 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린이 하는 일이었다.

산은 비탈보다 가팔랐다. 흙보다 돌이 많았고, 돌 틈마다 뿌리를 뼈처럼 드러낸 소나무가 바람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일행은 그날 해가 질 때까지 걸어 산의 어깨쯤에 닿았다. 바르트의 걸음에 맞추느라 빠르지 않았다. 켈리가 앞에서 걸었다. 앞에서 걷는 것도 처음이었다. 앞에서 걸어 보니 앞에는 길이 없었다.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뒤에 생겼다.
이튿날 아침 켈리는 지팡이를 쥐었다.
쥐어졌다. 손가락이 가운데 마디를 지나 끝까지 닫혔다. 켈리는 그것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사흘 만이었다. 손바닥 바로 위에서 쇠 테의 갈라진 자리가 만져졌다. 엄지로 쓸면 머리카락만 한 틈이 손끝에 걸렸다. 쥘 수 있게 된 손이 처음 만진 것이 그 틈이었다.
"돌아왔네."
린이 말했다. 오른손을 천으로 싼 채였다.
"이제 걸 수 있겠네."
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다음 날, 해가 한낮을 조금 넘었을 때였다.
멀었다. 산 아래, 며칠 전 떠나온 숲 가장자리 쪽이었다. 켈리가 바위 위로 올라가 엎드렸다. 숲 가장자리를 따라 작은 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셋은 낮았고 빨랐다. 개였다. 그 뒤로 넷이 따랐는데 등에 멘 것의 모양으로 쇠뇌인 줄 알았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었다. 회색 외투였다. 외투는 걸음이 느렸고, 걷다가 멈춰 개들이 코를 박은 자리를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았다.
켈리는 그 외투를 알았다. 구덩이 앞에서 켈리의 손등을 뒤집던 손이 그런 소매에서 나왔다. 상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 사람이 개를 따라오는 것은 켈리를 상하지 않게 데려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켈리가 바위에서 내려왔다.
"개 셋. 쇠뇌 넷. 회색 외투 하나. 숲 끝."
"냄새로 찾을 확률이요."
니카가 말했다. 열이 반쯤 내린 얼굴이었다.
"9할이요. 이건 맞아요."
바르트가 일어섰다. 일어서는 데 시간이 걸렸다. 옆구리를 누른 손이 떨렸다. 바르트는 뛸 수 없었다. 걸을 수는 있었지만 개보다 빨리 걸을 수는 없었다.
린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 걸면 업을 수 있잖아."
켈리는 셈했다. 업을 수 있었다. 다리에 속도를, 팔과 등에 힘을 따로 걸면 바르트를 업고 개보다 빨리 산을 오를 수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는. 그다음은 셈할 필요가 없었다. 켈리는 그다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구덩이 앞에서 들보를 받친 것이 아침이었고, 밤에 쇠틀이 왔을 때 켈리의 손은 지팡이를 쥐지 못했다. 개 뒤에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은 오늘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계급장 없는 그 사람에게는 하루가 먼저였고, 하루는 매일 왔다.
"지금은 안 써."
켈리가 말했다. 린이 켈리를 보았다. 그 눈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켈리는 몰랐다. 켈리는 말을 보탰다. 말을 보태는 것도 켈리에게는 처음 해 보는 일이었다.
"써 버리면 내일 없어. 저 사람들은 내일도 와."
바르트가 켈리를 보았다. 아까 길을 정할 때처럼 오래 보았다.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짧게 숨을 내쉬었는데, 켈리는 그것이 웃음의 앞부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 어쩔 건가."
켈리는 그것까지는 셈하지 못했다. 그때 린이 말했다.
"물."
린이 산 아래쪽 골짜기를 가리켰다. 물소리가 났다.
"늪에서 사냥할 때 짐승이 물로 들어가면 놓쳐. 냄새가 물에 안 남아."

계곡물은 차가웠다. 발목을 담그자 뼈까지 찬 기운이 올라왔고 무릎까지 들어서자 숨이 저절로 짧아졌다. 물살은 빨랐다. 바닥의 돌들은 이끼로 덮여 미끈거렸다. 일행은 물을 거슬러 올랐다.
문제는 바르트의 옆구리였다. 지진 자리는 젖으면 안 되었다. 물은 무릎까지였고 옆구리는 그보다 한참 위에 있었으니 넘어지지만 않으면 되었다. 바르트는 윗옷 자락을 걷어 올려 입에 물었다. 바위 밑에서 가죽 끈을 물던 입이었다. 그 꼴로 한 손은 옆구리를 누르고 한 손으로는 허공을 짚어 균형을 잡았다.
오벨은 가방을 머리 위로 들었다.
"계약서 젖으면 서기 안 나온다면서요."
니카가 말했다. 오벨이 머리 위의 가방을 올려다보았다.
"…그렇습니다."
니카는 찬물이 무릎에 닿자마자 눈을 감았다.
"아."
"왜."
"열 내려가는 확률이요. 9할."
린은 왼손 하나로 지팡이와 털가죽 둘을 머리 위로 받치고 걸었다. 천으로 싼 오른손은 가슴에 붙였다. 맨발이 이끼 낀 돌을 쥐듯 디뎠다. 이 물에서 넘어지지 않을 사람은 린 하나였다.
켈리는 바르트의 오른쪽에 섰다. 왼쪽은 지진 자리였다. 바르트의 오른팔을 자기 어깨에 걸쳤다. 무거웠다. 켈리는 걸지 않았다.
세 번째 굽이에서 바르트의 발이 미끄러졌다.
이끼 낀 돌이었다. 바르트의 몸이 왼쪽으로, 지진 자리 쪽으로 기울었다. 물이 옆구리를 향해 올라왔다. 켈리의 두 다리가 물 밑 돌 틈에 박혔다. 어깨에 걸친 팔을 끌어당겼다. 바르트의 무게가 켈리의 어깨와 허리와 무릎을 차례로 지나 물 밑의 돌까지 내려갔고, 거기서 멈췄다. 바르트가 기운 채로 섰다. 옆구리와 물 사이에 손바닥 하나만 한 틈이 남았다.
바르트가 옷자락을 문 채로 켈리를 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다 옷자락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 바르트가 옷자락을 손으로 옮겨 쥐었다.
"…자네 지금 걸었나."
"안 걸었어."
"그럼 이게 그냥 자네야?"
"모래주머니."
켈리가 말했다. 삼 년 동안 아침마다 모래주머니를 지고 벌판을 돌았다. 터지는 자리까지 제 발로 가라고 만든 다리였다. 그 다리가 지금 물 밑 돌 틈에 박혀 바르트를 받치고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걸지 않은 몸은 값을 청구하지 않았다.
바르트가 웃었다. 웃다가 손에 쥐었던 옷자락을 놓쳤다. 옷자락이 물에 떨어졌다.
"옷이 젖었습니다."
오벨이 머리 위로 가방을 든 채 말했다.
"옆구리는."
"안 젖었습니다."
"그럼 됐어."
켈리가 말했다. 바르트는 젖은 옷자락을 다시 걷어 물었다. 웃음이 아직 남아 있어서 옷자락이 자꾸 입에서 빠졌다.
한 시간 남짓 물을 거슬러 올랐을 때 개 짖는 소리가 계곡 입구에 닿았다. 소리가 물가에서 흩어졌다. 셋이 서로 다른 쪽에서 짖었다. 쫓던 것이 물가에서 끊긴 개들의 소리였다. 일행은 굽이 뒤 바위 그늘에 몸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물이 무릎을 스치며 지나갔다. 니카의 입술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무엇을 세는지 켈리도 알았다. 켈리도 세고 있었다.
그때 다른 소리가 났다.
짖는 소리가 아니었다. 길고 낮게 시작해서 끝이 높아지는 소리였다. 숲 쪽에서 왔다. 개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다음 순간 셋이 한꺼번에 짖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흩어진 소리가 아니었다. 한 방향이었다. 소리가 계곡 입구에서 멀어졌다. 숲 쪽으로, 산 아래로, 점점 작아졌다. 사람의 고함이 그 뒤를 따라갔다. 회색 외투의 목소리가 무언가 소리쳤지만 개들은 듣지 않았다.
린이 바위 그늘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붙어 있었다.
"…영감님이야."
아무도 그 말을 받지 않았다. 다들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날 밤 산의 어깨 너머에서 늑대가 울었다. 한 번이었고 멀었다. 린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그 소리가 끝날 때까지 들었다. 부르지 않았다. 켈리도 부르지 않았다. 켈리는 허리춤의 끈을 손으로 쥐었다. 이번에는 쥐어졌다.

이튿날은 쉬었다. 켈리가 정했다. 개들이 돌아오기 전에 하루쯤은 걷지 않아도 된다는 셈이었고, 그 셈이 맞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바르트의 걸음이 하루를 더 버티지 못한다는 것은 다들 알았다.
새벽에 린이 먼저 그것을 보았다. 바위 그늘에서 조금 떨어진 풀밭에 토끼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목덜미가 깨끗하게 물려 있었고 나머지는 상한 데가 없었다. 둘레의 이슬 맺힌 풀에 짐승의 발자국이 한 줄로 찍혀 왔다가 한 줄로 돌아갔다.
"…영감님이 잡는 방식이야."
린이 말했다. 토끼를 바로 들어 올리지 않았다. 한참 들여다보기만 했다.
"목만 물어. 다른 데는 안 상하게. 먹을 사람 생각해서."
토끼는 린이 왼손 하나로 손질했다. 늪 아이들은 한 손으로도 그 일을 할 줄 알았다. 칼은 바르트의 작은 칼이었다. 바위 밑에서 린이 쥐었던 그 칼이었다. 린은 칼자루를 쥐기 전에 잠깐 망설였고, 이번에는 왼손으로 쥐었다.
그날 아침의 다른 일은 대부분 오벨에게 갔다.
켈리가 바르트의 붕대를 갈려고 했다. 어제 계곡에서 옷자락이 젖었고 붕대 끝도 조금 젖었다. 켈리가 천을 감고 끝을 묶었다. 바르트의 숨이 멈췄다.
"…숨."
켈리가 매듭을 풀고 다시 묶었다. 이번에는 붕대가 바르트의 허리에서 스르르 흘러내렸다. 세 번째에는 바르트가 손을 들어 켈리를 말렸다. 손은 쥘 수 있게 돌아왔는데 그 손은 중간을 몰랐다. 모래주머니를 지고 삼 년을 돈 팔에는 꽉과 헐렁 사이의 눈금이 없었다. 바르트의 손은 떨렸고 니카의 손은 열에 들떠 있었으며 린의 오른손은 천에 싸여 있었다.
오벨이 붕대를 받아 들었다.
오벨은 붕대를 서류처럼 감았다. 천의 끝을 맞추고, 한 번 감을 때마다 접힌 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펴고, 마지막 끝을 세 겹으로 접어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매듭은 짓지 않았다. 접어 넣은 끝이 풀리지 않았다. 바르트가 자기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왜 안 풀려."
"서류 묶음은 끈 없이 접어서 보관합니다. 삼단 접기가 가장 덜 풀립니다."
린의 손도 오벨이 감았다. 찬물에 적신 천을 칼자루 모양 위에 얹고 같은 방식으로 접었다. 린이 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이거 편지 접은 거잖아요."
"편지도 삼단입니다."
니카의 이마에 얹을 천은 오벨이 반듯하게 네 번 접어 얹었다. 니카는 눈을 감은 채 그것을 받고는 서류함에 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오벨은 그 말을 칭찬으로 들었다.
불은 안개가 있을 때만 피웠다. 켈리가 그렇게 정했다. 새벽 안개가 골짜기를 채우고 있는 동안에는 연기가 안개에 섞여 어디가 연기인지 알 수 없었다. 오벨이 그 불에 죽을 끓였다. 바르트의 자루 맨 밑에서 나온 곡식 한 줌과 토끼 고기, 그리고 켈리가 바위 둘레에서 뜯어 온 풀이 들어갔다. 잎이 다섯 갈래였고 줄기가 붉었고 그늘에서 자란 것이었다. 실베인에서 몫으로 말했던 것을 켈리는 처음으로 일행의 솥에 넣었다.
오벨이 그날 아침 죽을 몇 번 태웠는지는 켈리의 장부에 두 번으로 적혀 있다. 실제로는 그보다 많았으나, 그의 명예를 위해 여기서는 장부를 따르기로 한다.
결국 켈리가 국자를 들었다. 모라의 젊은이가 준 늪오리나무 국자였다. 허리춤에 매달고 다닌 지 보름이 되었는데 국자로 쓰는 것은 처음이었다. 켈리는 저었다. 쉬지 않고 저었다. 같은 동작을 쉬지 않고 되풀이하는 것은 켈리가 열두 해 동안 가장 많이 해 온 일이었다. 죽은 더 타지 않았다.
"그 국자요."
니카가 이마의 천 아래에서 말했다.
"부러질 확률 68.7퍼센트는 아직 유효해요."
켈리는 국자를 조금 느슨하게 쥐었다.
오후에 오벨이 바르트의 붕대를 다시 풀었다. 지진 자리에 딱지가 앉아 있었다. 검붉고 단단했으며 가장자리가 조금 말려 올라가 있었다. 아무도 앉히지 않았는데 앉아 있었다.
"…앉았네."
바르트가 말했다. 놀란 목소리가 아니었다. 앉을 줄 알았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켈리는 그 딱지를 보다가 막사의 등잔을 떠올렸다.
출격한 다음 날 밤이면 치유사가 등잔을 들고 막사에 왔다. 흰 소매를 걷어 올린 사람들이었다. 치유사는 포격형의 침상부터 들렀고 결계형의 침상에서 오래 머물렀다. 돌파형의 침상은 지나갔다. 켈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돌파형은 다음 출격이 오기 전에 저 혼자 일어났다. 일어나지 못하면 다음 출격이 오지 않았다.
켈리의 멍은 아무도 손대지 않았으므로 저 혼자 검어졌다가 노래졌다가 사라졌다. 느렸다. 구호의 코피는 치유사가 손을 얹으면 그 자리에서 멎었다. 빨랐다. 그런데 켈리는 한 가지를 보았다. 구호의 코피는 갈수록 늦게 멎었다. 처음에는 손을 얹자마자 멎던 것이 나중에는 치유사가 한참을 앉아 있어야 멎었다. 손이 얹힐 때마다 다음 코피가 조금씩 더 오래 갔다.
켈리는 그때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지금도 정확히는 몰랐다. 다만 바르트의 딱지를 보며 셈은 할 수 있었다. 낫게 해 주는 것에도 값이 있었다. 그 값은 다음 상처에서 냈다. 켈리의 멍은 그 값을 내지 않았다. 아무도 켈리에게 그것을 빌려주지 않았으므로 켈리는 갚을 것도 없었다. 치유사가 없었다. 그 말이 그날 처음으로 나쁘게만 들리지 않았다. 느린 것은 제 것이었다.

밤에 켈리가 노트를 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켈리가 직접 적었다. 손이 돌아왔으므로. 글씨는 여전히 삐뚤었고 획마다 연필이 한 번씩 멈췄으나, 바위 밑에서 손바닥 사이에 끼우고 쓰던 것보다는 작았다.
「개울」 줄의 고슈 칸에는 물음표가 있었고 그 옆에 오벨이 받아 적어 준 「멀리. 앉아 있음.」이 붙어 있었다. 켈리가 그 아래에 새 줄을 그었다. 왼쪽 여백에 「계곡」.
켈리 칸에 「0. 안 씀.」이라고 적었다.
0은 세 번째였다. 모라와 소아레의 탁자에서 적은 것이 둘이었다. 그 둘은 걸 까닭이 없는 자리에서 걸지 않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까닭이 있었다. 개가 있었고 쇠뇌가 있었고 회색 외투가 있었다. 걸 까닭이 있는 자리에서 걸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켈리는 그 0을 앞의 둘보다 오래 보았다. 같은 모양인데 무게가 달랐다.
바르트 칸에 「옷 젖음. 옆구리 안 젖음.」 바르트가 그것을 보고 웃다가 옆구리를 눌렀다.
니카 칸에 「찬물.」 니카가 고개를 들었다.
"그건 값이 아니라 좋았던 건데요."
"찼잖아."
니카가 다시 누웠다. 반박하지 않았다. 찼다.
고슈 칸에 「개 데려감.」 켈리는 그 네 글자를 적는 동안 연필을 조금 천천히 움직였다.
그 아래에 줄을 하나 더 그었다. 「쉰 날.」
오벨 칸에 「죽 두 번 태움.」
"그건 대가가 아닙니다."
오벨이 말했다.
"곡식 냈잖아."
오벨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곡식은 바르트의 자루 맨 밑에 있던 마지막 한 줌이었다. 탄 것도 그 한 줌에서 나왔다. 오벨은 그 셈에 맞설 조항을 찾지 못했다.
고슈 칸에서 켈리의 연필이 멈췄다. 칸 안에 적을 것이 아니었다. 고슈가 낸 것이 아니라 고슈가 준 것이었다. 켈리는 연필을 칸 바깥 여백으로 옮겨 작게 적었다. 「토끼 1.」
"받은 것을 적는 칸은 없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여백에."
켈리가 말했다. 오벨이 「자국 1」과 「린이 외어 줌」이 적힌 여백을 보았다. 그 여백은 이제 비워 두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벨은 더 말하지 않았다.
켈리의 연필이 켈리 칸으로 돌아갔다. 「쉰 날」 줄의 켈리 칸이었다. 켈리는 거기에 무언가를 적으려 했다. 바르트의 옆구리였다. 바르트가 쇠틀 앞에 선 것은 켈리 앞이었고, 켈리가 쥐지 못하는 손으로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 값의 어느 만큼은 켈리 칸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연필 끝이 종이에 닿았다.
"그건 내 칸이야."
바르트가 말했다. 켈리의 어깨 너머였다. 소아레에서 들은 말이었다. 그때 켈리는 바르트의 장부에서 줄 하나를 옮겨 적고 있었다.
켈리가 연필을 떼었다.
바르트 칸에는 이미 그 값이 적혀 있었다. 「옆구리. 손바닥. 달지 않음.」 바르트의 말이었고 바르트가 고른 값이었다. 바르트는 그날 밤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그 병을 품에 넣었다. 그것을 켈리 칸에 다시 적으면 같은 값이 두 번 적혔다. 그리고 두 번째 줄이 첫 번째 줄을 지웠다. 바르트가 낸 것이 켈리가 낸 것이 되었다.
동료가 다친 것은 켈리가 낸 값이 아니었다. 켈리는 그 말을 소리 내어 하지 않았다. 다만 「쉰 날」 줄의 켈리 칸에 다른 것을 적었다. 「손 돌아옴.」
그것은 켈리의 것이었다.

7월 1일 아침 일행은 산마루에 올랐다.
마지막 오르막은 층이 진 바위였다. 바르트는 바위마다 쉬었고 쉴 때마다 옆구리에서 손을 떼어 보았다.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니카는 열이 다 내려 걸음이 곧았다. 곧은 걸음으로 니카가 일행 가운데 가장 먼저 마루에 닿았고, 닿자마자 그 자리에 섰다.
켈리가 그 옆에 섰다.
반대편 비탈이 보였다. 비탈 전체가 계단이었다. 사람의 무릎 높이로 쌓은 돌담이 비탈을 가로질러 층층이 내려갔고 층마다 좁은 밭이 있었다. 밭에는 키 작은 보리가 자라고 있었다. 담 하나를 쌓으려면 비탈에서 돌을 하나하나 골라내야 했을 것이었다. 비탈 어디에도 굴러다니는 돌이 보이지 않았다. 전부 담이 되어 있었다.
멀리 비탈이 꺾이는 자리에 돌탑 하나가 서 있었다. 망루였다. 꼭대기에서 연기 한 줄이 곧게 올라가고 있었다. 바람이 없는 아침이라 연기는 흩어지지 않았다.
"드란이야."
바르트가 말했다. 숨이 찼다.
"수출하는 게 사람뿐인 나라야. 돌은 많은데 먹을 건 저 층층이 밭에서 나는 것뿐이라서."
"받아 줄까요."
린이 물었다.
"드란은 사람을 받는 데에도 값을 받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얼마야."
켈리가 물었다.
"모릅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켈리는 연기를 보았다. 연기 아래에는 사람이 있었다.
린이 켈리의 소매를 당겼다. 린의 고개는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 지나온 쪽, 산마루 아래의 바위들이었다.
회색이 있었다.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숲 가장자리에서 처음 본 날보다 훨씬 가까웠다. 사람의 목소리가 겨우 닿지 않을 만한 거리였다. 늑대는 일행을 보고 있었다. 귀가 이쪽으로 서 있었다.
켈리가 허리춤에서 끈을 풀었다. 이번에는 매듭이 쉽게 풀렸다. 끈을 손목에 걸고 팔을 들었다.
팔이 어깨를 지나 올라갔다. 머리 위까지 올라갔다. 숲 가장자리에서는 어깨에서 멈추던 팔이었다. 켈리는 뼈 일곱 개와 깃털 다섯 개가 바람 한 점 없는 공중에서 흔들리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흔드는 것은 켈리의 팔이었다. 팔이 떨리고 있었다. 떨리면서도 내려오지 않았다.
늑대가 일어섰다. 일행 쪽으로 한 걸음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내려오지 않았다. 일어선 채로 이쪽을 보다가 도로 앉았다. 린의 숨이 한 번 걸렸다가 풀렸다.
켈리가 팔을 내렸다. 노트를 꺼내 맨 뒷장을 폈다. 「쉰 날」 줄 아래에 새 줄을 긋고 여백에 「산마루」라고 적었다. 그리고 고슈 칸에 적었다. 조금 가까이.
칸은 좁았다. 그래도 들어갔다.
일행이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망루 쪽이었다. 켈리가 앞에서 걸었다. 연기를 보고 걸었다.
연기를 보고 걷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삼 년 동안 열일곱 번 그렇게 걸었다. 걸어간 끝에서 터뜨리지 않으려고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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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목은 온전히 엔지니어를 위한 교육 시간이었는데 중국인 3에 한국인 1이 있으니 계속 자기네들끼리 중국어로만 대화했다. 나중에야 알게된 사실이지만 교육일정과 내용도 매니저만 받아서 잔기네들끼리는 공유하고 나에겐 알려주지 않은 것 같았다. 하도 중국어로만 하니 오스트리아 직원이 나보고 중국어 알아듣냐고 물어볼 지경이었다. 이번 출장에 충전기를 가져오지 않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는데 그래도 중국인 아저씨가 랩탑도 충전 가능한 보조배터리를 수,목 내내 빌려줘서 버틸 수 있었다. 대화는 어려웠지만 악의가 없다는 건 알겠다.

 

여기도 아이들 픽업은 상당히 중요한가보다. 우리를 교육시켜주는 직원이 유치원에 다니는 딸을 픽업해야해서 일찍 가야하니 점심은 회사 앞 케밥집에서 케밥을 사서 빠르게 먹고 바로 진행하자고 했다. 구글에서 찾았을 때 평점이 좋고 가까워 원래 월요일 점심으로 그곳에 가자고 말할 참이었는데 매니저가 다른 곳에서 먹자고 해서 못 갔던 곳이었다.

케밥도 비건용이 따로 있다. 케밥은 독일에서 먹었던 것보다 맛있었다.

 

돌아다닌 5개의 건물 중 하나는 중세시대 기숙사처럼 생겼는데 Castle이라고 불린다. 출입이 꽤 강하게 막혀 있는데 여기가 메인인가 보다ㅏ. 내가 승인받은 사원증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나갈 수는 있다.

물로 ㄴ특별히 심각하게 보안이 걸린 곳도 이번에 갔지만(나갈수도 없는) 연구실이 아닌 일반 사무실치고는 보안이 강했다.

단점은 조명이 어두웠다. 성이라는 별명답게 샹들리에 모양의 조명들이 있는데 켜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애초에 채광이 좋고 야근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저녁은 그라츠 중앙역 바로 앞에 있는 the Italian이라는 이탈리안 식당에서 먹었다. 파스타 중 가장 비싼 연어가 올라간 로제 파스타를 먹었다. 다른 사람이 피자를 시켜 한조각 공유해줘서 먹었는데 도우가 그냥 얇기만 해서 아쉬웠다. 이곳은 나쁘진 않지만 좋지도 않다. 만약 이곳에 간다면 클레식 파스타를 추천한다.

토마토 파스타, 봉골레, 까르보나라, 알리오올리오 같은 클레식이 가격도 싼데 실패 확률이 적을 듯 하다. 면의 익힘 정도는 한국인은 좋아하고 이탈리안은 조금 싫어할수도 있을정도의 부드럽게 익은 면이었다.(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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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오스트리아는 물이 깨끗한 편이라 수돗물을 마셔도 된다고 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수돗물을 컵에 따라 마시는 것도 보긴 했다.(회사에서 물과 음료가 항상 지급되는데도 말이다.)

오스트리아의 패트병은 뚜껑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혼쪽 끝이 매달려 있는 상태로 사용하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뚜껑이 따로 쓰레기로 버려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아닐까 생각했다. (찾아보니 2019년부터 EU에서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화를 높이기위해 의무화 했다고 한다.) 이곳은 물을 살 때 물에 공병반환금이 함께 계산된다고 한다. 공병을 회수하면 돈을 반환받는다. 마트 앞에 분리수거하는 곳과 함께 회수하는 기계도 있었다.

회사에서 음료를 무한 제공해줘서 계속 병에 든 탄산수를 마셨는데 공병회수는 한번도 안 했다. 어차피 환전해간 유로도 없었고 모든 계산은 카드로 했다.

점심은 회사에서 마련한 빵을 먹었다. 아주 다양한 빵을 작게 만들어 핑거푸드(라기에는 좀 큰) 형태로 다양한 맛을 보도록 해뒀다. 이곳은 어떤 식당을 가도 비건 메뉴가 있다. 회사에서도 점심을 준비할 때 비건 메뉴를 따로 만들어뒀다. 설명이 있는지 모르고 눈에 보이는 작은 버거를 하나 집었는데 비건 메뉴였다. 그대로 감자패티를 고기처럼 만들어놔서 먹을만 했다.

 

사무실이 여러개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날은 5개 건물을 오가며 데모도 보고 실습도 했다. 그라츠에만 5백명이 근무한다는데 다들 재택만 하는지 그리 많은 직원이 보이진 않았다. 

오후에 다른 사람들이 단체로 버스를 타고 독일로 가는 바람에 4시반에 일정이 끝났다.

 

USA에서 온 중국인 매니저가 일찍 끝났으니 걸어서 관광을 가자고 했다.

시계탐에 갔다.

이틀 연속으로 시계탑을 가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가는 길에 교회나 성당을 보이는 족족 다 들어가봐서 그건 좋았다. 유럽답게 오래된 교회건물이 많다.

강을 따라 레스토랑이 많이 자리잡고 있는데 맛난 것을 먹자고 갔는데 죄다 예약이 다 차서 입구컷을 당했다.

나중에는 현금만 받는다는 중국식 면 포장 도시작을 사려고 했는데, 중국인 중 한명이 반대해서 살 수 없었다. 독일로 가는 버스에서 먹으라고 빵과 과일을 도시락처럼 사줬는데 인원수대로 산다고 우리 것까지 샀었다. 그걸 호텔에 두고 왔는데 결국 그걸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웠는지 매니저가 회사 근처에 있는 로컬식당으로 끌고갔다. 거기가 회사 사무실 바로 옆이라는 것은 목요일이 되어서야 알았다.(사무실이 많아서...)

Reselstube라는 곳이었는데 주방장이 혼자서 모든 요리를 한다. 셰프가 메뉴판에 있는 메뉴 중 가장 위에 있는 것을 추천해줘서 그 걸로 먹었다. 대략 번역기로 돌려보니 삶은 소고기와 익힌감자, 사과와 와사비를 곁들였다고 했다.

나쁘진 않았는데 물기가 많은 수육을 먹는 느낌이라 내가 먹기엔 건강한 맛이었다. 사과소스를 곁들여 먹는데 그러면 먹을만 했다. 맛있긴 한데 가격만큼의 가치는 없어보였다.(자극이 필요해) 대신 굴라시가 대단히 맛있어 보였다. 먹은 사람(매니저)도 맛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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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은 힘들어

오스트리아로 오기전에 그라츠를 3번 갔다는 직장 동료에게 물어봤다.

독일에서는 호텔에서 물도 안 주던데 오스트리아는 어떤가요?

내가 지내기로 한 호텔에서 숙박한 적은 없으나 대부분 물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없었다. 이런...

내가 지낸 호텔은 Graz 중앙역 근처 Radisson hotel이었다.

 

역시나 첫날부터 시차에 적응할 리는 없으니 일찍 일어났다. 새벽 1시 30분 정동에 일어나 계속 누워 있었는데 중간중간에 10분, 20분씩 잠든 것 같다. 교육이 첫날은 오후에 시작하고, 유렵은 저녁에 관광하기 어려우니 월요일 아침에 시계탑이라도 보고 오자는 생각이 들어 6시쯤 나겄다.호텔이 그라츠 중앙역 근처에 있는데 걸어서 갈만한 거리에 있었다. 우르투름(Uhrturm)이라 불린다. 구글 맵으로 길을 찾았는데 역내에 이른 시간부터 늦은 시간까지하는 마트가 있어 물을 사고 가느라 추천 동산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을 컴컴한 새벽에 열심히 걸어갔다.

새벽에 비가 내려 안개도 심한 편이었다. 산에 올라도 경치를 감상할 수 있을까 잠시 망설였다. 산에는 계산이 아니라 등산로를 이용하여 올라갔다. 의도한 것은 아니고 지도가 이끄는대로 향했다. 올라가니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구름도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정상에 도착하니 마침 7시 정각이라 정상에 있는 탑에서 종을 치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그나마 구름이 걷혀 제대로 주변을 볼 수 있었다.

 

갈 때는 어두운 길로 갔는데 내려올 때는 계산을 잘 찾아서 내려왔다. 그곳에서 호텔까지 가는 길이 중앙광장도 있고 맛집도 많은 메인 거리였다. 올 때는 제대로 된 길로 왔다.

 

오후에 교육 일정이 시작되었는데 마케팅에 치우친 교육이었다. 알고보니 FAE, 마케팅 워크샵이었고 화요일 오후에 단체로 독일로 넘어가는 일정이었다. 중국이 3명과 한국인 1명만 그라츠에 남아 추가교육을 듣기로 했다.

 

오후에 시작해서 6시에 끝났는데 바로 회식을 했다. 회식이라기보다는 서로 인사하는 자리에 가까웠는데 엔지니어가 없으니 뭔가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인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았는데 다른 중국인들도 있었다. 28명중 6명이 중국인인듯 했다. 그 중 4명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고, 일본에서도 3명쯤 왔는데 그 중 한명이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 어떤 배려도 없이 늘 그러하듯 중국어로만 떠들고 간혹 말 붙일 때만 영어를 썼다. 물론 나와 일본인은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오스르리안이 두명 테이블에 더 왔는데 내가 한국인이라고 설명해도 중국은 요즘 어떠냐고 물어봤다. 일본어는 인사정도 할 줄 안다고 했다. 정작 술잔을 들고 일본인에게 '간빠이'라고 하지 않고 '건배'라고 했다. 일본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곳은 음식은 슈니첼이 유명하대서 맛난 슈니첼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맛있는 곳을 찾을 때까지 먹어볼 생각이었다. 점심에 호텔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나는 버거를 먹었지만 다른 사람이 슈니첼 한 조각을 공유해줬었다. 구글맵에서 평점 2.9인 곳이었고, 수긍이 가는 맛이었다.

회식은 Glöckl Bräu라는 맥주집에서 했다. 건장한 아저씨들이 완전 독일 풍으로 반바지에 멜빵을 하고 서빙하는 컨셉의 가게였다. 돼지 슈니첼을 시켰는데 치킨 슈니첼이 나왔다. 테이블의 다른 사람이 돼지 슈니첼을 받길래 혹시 치킨 시켰냐고 물으니 자기도 돼지 시켰다고 했다. 옆에서 새로 만들어달라고 하라는데 첫날부터 시끄럽게 하기 싫어서 그냥 먹었다. 두 조각이 나왔는데 하나는 거의 실수에 가깝게 바짝 구워져 있었고 하나는 적당히 튀겨져 있었다. 바짝 튀긴 것이 더 먹을만 했다. 적당힌 치킨 슈니첼에서 고기 비린내가 나서 급히 레몬즙을 가득 뿌렸다. 그런데 돼지 슈니첼을 보니 차라리 치킨이 나았구나 싶었다. 아마 그 가게도 서른명이 밀고 들어와서 한꺼번에 주문하니 제대로 된 음식을 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빋고싶다. 평점이나 후기는 굉장히 좋은 곳이었고 그날은 너무 피곤하고 예민해서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음식은 반 넘게 남겼다.

호텔로 돌아오면서 아침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중앙광장을 구경했는데 밤이라 별로 볼 건 없었다. 이곳에도 밤이되면 러닝크루가 무리지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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