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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빨목이 어디인지 일행 가운데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는 사람은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은 문간 안쪽 마당에서 도리깨를 들고 있었다. 탁, 그리고 쉼, 그리고 탁. 어제 우물가에서 등 뒤로 듣던 박자였다. 켈리는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도 셈은 할 수 있었다. 위로 간 사람의 종이에는 협로 수비라고 적혀 있었고 아래로 간 사람의 종이에는 길잡이라고 적혀 있었다. 길잡이는 길을 넘으려는 쪽에 붙었다. 켈리는 삼 년 동안 열일곱 번 넘는 쪽에 섰다. 앞에서 길을 아는 사람이 셋을 세면 뛰었고, 뛰어간 끝에는 늘 그 길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이름의 길이면 같은 끝이었다.
켈리의 발이 문간 쪽으로 한 걸음 나갔다. 두 번째 걸음은 나가지 않았다. 어젯밤 등잔 아래에서 처음 들은 말이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소리는 내지 마. 남의 셈이야. 오벨이 수첩을 덮어 가방 맨 안쪽에 넣고 끈을 한 번 더 조였다. 니카는 주머니 속에서 주사위를 쥐었다가 놓았다. 바르트는 처마 밑에 아직 가로로 걸린 장대를 올려다보다가 그것을 내리지 않았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는 것을 각자 따로 정했다는 것을 서로 알았다. 유안 혼자 이빨목이 무엇이냐고 물으려다가 다른 얼굴들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마당의 도리깨 소리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어제와 달랐다.
돌담 위의 회색은 그 자리에 있었다. 산마루를 넘어온 해가 등의 털끝을 하얗게 비췄다. 늑대는 두 길이 갈라지는 쪽을 보다가 이따금 마당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리깨가 떨어질 때마다 귀 하나가 그쪽으로 꺾였다. 린이 헛간 앞에서 털가죽 둘을 안고 왔다. 개울가 뿌리 밑에서 받아 든 뒤로 열여드레를 들고 다닌 것이었다. 접힌 자리마다 털이 눌려 하얗게 닳아 있었다. 린은 그것을 돌담 위, 늑대에게서 두 뼘쯤 떨어진 자리에 올려놓았다. 늑대가 털가죽을 내려다보았다. 코끝이 한 번 움직였다. 그뿐이었다.
"영감님."
린이 불렀다. 귀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리깨 소리에는 움직이던 귀였다.
"…사흘."
켈리가 말했다. 다들 켈리를 보았다.
"숲지기가 그랬어. 사흘 들고 있었더니 돌아왔다고."
"무슨 사흘입니까."
오벨이 물었다. 물어 놓고 오벨은 덮었던 수첩을 다시 꺼냈다. 어귀의 사흘은 오벨에게 없었다. 서기에게 담보로 내준 날들이었고, 그 자리에는 린이 외어 준 것을 받아 적은 몇 장이 대신 들어 있었다. 오벨의 손가락이 그 장을 짚어 내려가다 한 줄에서 멈췄다.
"떨어뜨리고 가길래요. 사흘 들고 있었더니 돌아오던데요."
오벨이 읽었다. 자기 글씨였다. 그 말을 한 목소리가 높았는지 낮았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적혀 있습니다. 제 글씨로."
켈리가 허리춤에서 뼈와 깃털 끈을 풀었다. 국자는 그대로 두었다. 끈을 왼 손목에 두 번 감고 끝을 이로 물어 당겨 묶었다. 숲 가장자리에서도 산마루에서도 그렇게 감고 팔을 들었다. 그때마다 늑대는 거기 있었고, 거기까지만 있었다. 켈리가 돌담 앞으로 갔다. 가까웠다. 수염 끝에 붙은 보리 까끄라기가 보였다. 켈리는 무엇이라고 부를지 정해야 했다. 일행은 그를 영감님이라고 불렀다. 린이 그렇게 불렀고 켈리도 따라 불렀다. 그런데 어귀에서 숲지기는 그를 영감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숲지기가 사흘 동안 들고 있었던 것은 다른 이름이었다.
"고슈."
켈리가 불렀다. 한 번이었다.
그러고는 기다렸다. 발뒤꿈치가 저절로 붙었다. 턱이 조금 들리고 두 팔이 몸 옆으로 내려가 손바닥이 허벅지에 붙었다. 켈리는 그대로 서 있었다. 도리깨 소리가 다섯 번 났다. 여섯 번 났다. 파리 한 마리가 켈리의 귀 옆을 맴돌다 갔다. 해가 목덜미에 내려앉았고, 마당에서 날아온 보리 먼지가 콧속을 간질였다. 켈리는 재채기를 참았다. 점호 중에는 재채기도 대답으로 들릴 수 있었다. 늑대가 하품을 했다. 켈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 번 더 안 불러요?"
니카가 물었다.
"불렀어."
도리깨 소리가 열 번을 넘었다. 켈리가 그제야 몸을 돌려 바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노트."
바르트가 묻지 않고 노트를 건넸다. 맨 뒷장이 펴졌다. 켈리가 「할름」 줄 아래에 새 줄을 긋고 여백에 「돌담」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고슈 칸에 연필을 댔다. 연필이 움직이기 전에 린이 그 끝을 잡았다.
"뭐 써."
"대답 없음."
"그건 적는 거 아니야."
"대답 없으면 적어."
"누가 그래?"
켈리는 잠깐 생각했다.
"…서기."
린은 연필을 놓지 않았다. 바르트가 노트 귀퉁이에서 눈을 돌렸고 오벨은 수첩을 덮었다. 니카의 손은 주머니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유안만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여러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켈리뿐이었는데, 켈리는 그것이 설명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몰랐다.
"여긴 서기 없어. 부르는 건 대답 올 때까지 하는 거야."
"몇 번."
"올 때까지."
켈리가 늑대를 올려다보았다. 늑대는 켈리를 보지 않았다. 켈리는 고슈 칸을 비운 채로 노트를 바르트에게 돌려주고 돌담 앞에 다시 섰다. 이번에는 발뒤꿈치가 붙지 않았다.
"고슈."
기다리지 않았다.
"고슈."
손목을 들 때마다 끈 끝에 매달린 뼈 두 개가 서로 부딪혀 딸깍 소리를 냈다. 늑대의 귀 하나가 그 소리 쪽으로 꺾였다가 돌아갔다.
"돌아올 확률, 6할이에요. 61.1 퍼센트"
니카가 말했다. 그날 니카가 내놓은 첫 숫자였다.

린은 점심을 먹고 나서 생각을 고쳤다. 이름만 던지는 것은 예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깊이 들어간 사람은 사람보다 정령 쪽에 가까이 가 있는 사람이었고, 정령에게는 부르는 것이 아니라 청하는 것이었다. 린이 돌담 앞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바닥을 땅에 댔다. 어귀에서 늙은 정령 앞에 앉던 자세였다. 마당 저편에서 잉가가 한 번 이쪽을 보고 다시 장대를 들었다.
"돌담 위에 앉으신 회색 털의 분께. 실베인 소아레에서 온 린이, 이름을 모르고 부르는 무례를 먼저—"
"이름 알잖아요."
니카가 말했다.
"지금은 모르는 거야. 영감님이 두고 왔으니까."
린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늑대가 하품을 했다.
린의 청은 첫 번째 사과를 지나 두 번째 사과로 넘어갔다. 늦게 청하는 무례에 대한 사과였다.
늑대가 앞발 위에 턱을 얹었다.
린의 청은 돌담으로 넘어갔다. 돌담 위의 분께 청하려면 돌담에게 먼저 인사해야 했고, 그 돌담을 쌓은 손들에게도 해야 했다.
늑대의 눈이 반쯤 감겼다.
도리깨 소리가 서른 번쯤 났다. 켈리가 짚단을 털다 말고 한 번 불렀다. 린이 눈을 흘겼다. 켈리는 다음 짚단에서는 부르지 않았다.
린이 마지막 대목에 들어섰다. 돌아와 주시기를 바라는 까닭을 셋 드는 대목이었다. 첫째 까닭을 다 말했을 때 늑대의 옆구리가 고르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잠들어 있었다.
린이 입을 다물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한참 늑대를 올려다보았다.
"…주무셔."
"4할이요."
니카가 고쳤다.
린이 땅에서 손바닥을 뗐다. 무릎을 펴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흙 묻은 손을 무릎에 문질렀다.
"아냐. 영감님한테는 이렇게 안 했어."
린이 늑대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청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소아레의 마루 끝에서, 늪가 둔덕에서, 해 질 녘 모닥불 앞에서 하던 얼굴이었다.
"영감님. 밥 먹어요."
늑대의 귀가 섰다. 눈이 떠졌고 고개가 들렸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린이 털가죽을 올려놓은 자리를 보고, 늑대를 보고, 제 손을 보았다. 열여드레 들고 다닌 것은 털가죽이었는데 귀를 세운 것은 밥이었다. 린은 그것이 억울한 일인지 다행한 일인지 얼굴로 정하지 못했다.
"…밥은 들리네."
그날 저녁 잉가의 탁자에는 그릇이 여섯 놓였다. 켈리가 셌다. 어제 저녁에는 여덟이었다. 잉가는 일행이 먹는 동안 화덕 옆에 서 있다가, 다들 숟가락을 내려놓기 전에 그릇 하나를 더 채워 들고 밖으로 나갔다. 문틈으로 보였다. 잉가는 돌담 앞까지 가서 그릇을 담 위에 올려놓았다. 털가죽 반대쪽, 늑대에게서 팔 하나만큼 떨어진 자리였다.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늑대도 잉가를 보기만 했다. 잉가는 돌아와 화덕 앞에 앉아 제 그릇을 들었다. 한낮에 린이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잉가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당 저편에서 장대를 들고 있었으니 들었을 것이었다. 켈리는 묻지 않았다. 계약서에는 세 끼가 적혀 있었고 그것은 여섯 사람 몫이었다. 일곱째 그릇이 누구의 셈인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담 위의 그릇은 비어 있었다. 바닥까지 핥은 자국이 햇빛에 번들거렸다. 늑대는 그대로 거기 있었다. 켈리가 「돌담」 줄 고슈 칸에 적었다. 죽 먹음. 안 내려옴. 바르트는 노트를 돌려받으며 그 줄을 오래 보았다. 그러다 노트를 든 채로 돌담 앞으로 갔다. 늑대가 내려다보았다. 바르트가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노트에 적힌 것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은 바르트가 서른 해 동안 해 온 일이었다. 남의 글씨를 읽어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개울. 물음표. 그 옆에, 멀리. 앉아 있음."
켈리의 글씨였다가 오벨의 글씨였다가 다시 켈리의 글씨였다. 바르트는 글씨가 바뀌는 자리에서 조금씩 쉬었다.
"계곡. 개 데려감. 쉰 날, 칸 밖에. 토끼 하나."
늑대의 귀가 섰다.
"산마루. 조금 가까이. 안개. 빵 먹음. 가까이."
귀가 또 섰다. 니카가 손가락을 꼽았다.
"이름보다 먹는 거에 귀가 설 확률, 9할이에요."
"할름. 망루 위 바위. 돌담. 죽 먹음. 안 내려옴."
바르트가 노트를 내렸다. 다 읽고 나서야 무엇을 읽었는지 안 얼굴이었다. 개울가 숲 가장자리, 계곡, 산마루 아래 바위, 안개 속 바위, 망루 위, 그리고 돌담. 칸 하나에 몇 글자씩 적힌 것이 열아흐레 동안 늑대가 걸어온 자리였다. 바르트의 손가락이 그 칸을 아래에서 위로 한 번 더 짚어 올라갔다.
"자네가 온 길이야. 개울에서부터."
늑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처음으로 담 위에서 몸을 돌려 바르트 쪽을 보고 앉았다.
오벨은 한낮의 쉬는 참에 수첩을 들고 돌담 앞에 섰다. 오벨이 아는 부르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고슈. 계약 제1조에 따라—"
거기서 멈췄다. 고슈와 맺은 계약은 없었다. 고슈는 적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벨은 기침을 한 번 하고 수첩을 넘겼다. 계약이 없으면 신원부터 확인하는 것이 순서였다.
"성명, 고슈. 출신, 실베인. 계통, 드루이드. 연령, 미상. 성—"
펜이 멈췄다. 실베인에서는 땅이 성을 대신했다. 린은 소아레 린이었다. 오벨이 린을 보았다.
"고슈 씨의 땅은 어디입니까."
"못 들었어요. 영감님은 늘 숲에 있었어요."
기재할 수 없는 칸을 비워 두는 것은 법률가가 할 일이 아니었고, 모르는 것을 지어 적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오벨의 펜이 칸 위에 뜬 채로 있었다.
"나도 아직이야."
켈리가 짚단을 털다 말고 말했다. 켈리의 땅 이름은 소아레에서 「아직」으로 외워져 있었다. 오벨이 켈리를 보았다. 한참 보았다.
"…기재 보류."
"아직."
"같은 말입니다."
오벨이 칸에 「보류」라고 적고 소리 내어 읽었다. 성, 보류. 늑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니카가 5할이라고 했다가 곧 4할로 고쳤다. 니카의 숫자는 이틀 동안 6할과 4할 사이를 오르내렸는데, 그가 하루에 숫자를 몇 번 고쳤는지는 그의 체면을 위해 적지 않기로 한다.
유안은 하루에 두 번 돌담 앞을 지나며 늑대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벨에게 숙이던 것과 같은 깊이였다. 늑대는 두 번 다 입술을 들었다. 유안은 두 번 다 같은 깊이로 고개를 들고 지나갔다. 켈리는 짚단 하나를 털 때마다 한 번씩 불렀다. 저녁에는 짚단이 없어도 불렀다. 부를 때마다 손목에서 딸깍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늑대의 귀 하나가 이쪽으로 꺾였다. 켈리는 그것이 이름 때문인지 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둘은 언제나 같이 갔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켈리에게 낯선 일이었다. 열두 해 동안 켈리는 불리는 쪽에 서 있었다. 불리면 나가서 저울에 올랐고, 불리면 대답했고, 불리면 뛰었다. 부르는 쪽은 장부를 든 사람이었고 그 사람은 한 번 부르면 다음 번호로 넘어갔다. 켈리는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같은 이름을 부르고 같은 이름을 다시 불렀다. 두 글자는 부를수록 입에 붙었고, 입에 붙을수록 이상하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숲지기가 말한 무게가 이런 것인지 켈리는 알 수 없었다. 해 질 무렵에는 목 안쪽이 따끔거렸다. 켈리는 그것도 값인지 생각해 보았고, 적을지 말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날 밤 헛간 앞 마당에서 유안이 종이를 폈다. 이틀 동안 유안은 한 번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부를 이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유안은 먹을 갈고 붓을 적셨다. 부르는 부적이 있다고 했다. 다들 유안의 손을 보았다. 붓 끝이 종이 위로 내려가다가 첫 획을 긋기 직전에 멈췄다. 등잔 불이 두 번 흔들리는 동안 멈춰 있다가 유안이 붓을 들어 올렸다.
"…얼굴을 모르면 획이 안 섭니다."
"얼굴이라 함은."
오벨이 물었다.
"부르는 글자는 부를 사람을 알고 씁니다. 저는 그분을 늑대로만 압니다. 늑대로 알고 쓰면 늑대가 옵니다."
"이미 와 있잖아요."
니카가 담 위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러니 이대로는 쓸 까닭이 없습니다. 어떤 분이었습니까."
다들 서로를 보았다. 처음 입을 연 것은 니카였다.
"늪에 빠진 우리를 꺼내 줬어요. 그러고 사십 분 동안 늪 얘기를 했어요. 우리가 젖은 채로요."
"사십 분입니까."
"제가 셌어요. 이제 끝날 확률을 오 분마다 셌는데 여덟 번 다 틀렸어요."
유안이 붓 끝으로 종이 귀퉁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획이 아니라 메모였다.
"평소에는 말이 없어요. 늪 얘기 할 때만 길어요."
린이 덧붙였다.
"변하고 돌아오면 반나절은 말이 끊기지. 소아레 갈 때 그랬어. 털가죽을 하나 뒤집어 입고 나와서 한 발로 서 있었지. 이렇게."
바르트가 앉은 채로 한 발을 들었다. 옆구리 때문에 몸이 기울었고 린이 그 어깨를 받쳤다.
"그리고 저를 안경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두 번."
린이 웃었다. 소리를 죽이려다 못 죽인 웃음이었다. 니카가 그 웃음에 힘을 얻었다.
"그 밤에도요."
마당이 잠깐 조용해졌다. 어느 밤인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열아흐레 동안 장부에는 그 밤을 적었으나 입으로 꺼낸 사람은 없었다.
"영감님 따라서 쇠뇌병 셋이 숲에 들어갔잖아요. 들어간 덤불로 도로 나왔잖아요. 셋이 서로 쳐다보고. 하나는 쇠뇌를 거꾸로 들고요."
바르트가 먼저 웃었다. 옆구리를 누르면서 웃었다.
"그 낮에는 내가 이 사람을 자루처럼 메고 뛰었지."
바르트가 오벨의 가방을 끌어다 어깨에 거꾸로 걸쳤다. 오벨이 손을 뻗었으나 늦었다.
"거꾸로 매달려서는—"
"「제 왼쪽이요!」"
니카가 가는 목소리로 외쳤다. 바르트가 왼쪽으로 돌았다.
"「아저씨 오른쪽, 백 보!」"
린이 외쳤다. 바르트가 오른쪽으로 돌았다. 어깨의 가방이 한 박자 늦게 따라 돌며 오벨의 머리를 쳤다. 안경이 날아갔다. 오벨이 무릎으로 땅을 더듬었다.
그때 소리가 났다.
짧은 소리였는데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숨이 한꺼번에 나가지 않고 여러 번으로 쪼개져 나갔고, 어깨가 그 박자로 흔들렸다. 켈리는 그 소리가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 다들 웃음을 멈추고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켈리의 입이 아직 벌어져 있었다.
"…왜."
"웃었어."
린이 말했다.
"누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오벨이 안경을 찾아 쓰고 켈리를 보았다. 쓰고 나서 본 것이 쓰기 전에 본 것과 같은지 확인하는 얼굴이었다. 바르트는 가방을 어깨에서 내리는 것을 잊었다. 켈리가 손끝으로 제 입가를 만졌다. 열두 해 동안 그 입에서 나간 것은 대답과 복창과 숫자였다. 그 밖의 것이 나간 자리를 처음 만져 보는 손이었다.
담 위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늑대가 일어서 있었다. 귀 둘이 다 이쪽을 향해 있었다.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데 일어서 있었다. 한참 그렇게 서 있다가 늑대는 다시 앉았다.
웃음이 그친 자리에 사람 수가 남았다. 이야기 속에는 여섯이 있었다. 불가에도 여섯이 앉아 있었다. 같은 여섯이 아니었다.
유안이 붓을 내려다보았다. 먹이 붓 끝에서 말라 가고 있었다.
"…획은 섰습니다."
"그럼 써."
켈리가 말했다. 목소리가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안이 붓을 물그릇에 헹궜다. 빈 종이를 접어 소매에 넣었다.
"제가 쓸 획이 아닙니다."
켈리가 일어나 돌담 쪽으로 갔다.

켈리는 그 밤 헛간 앞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돌담 밑에 마주 앉아 무릎을 세웠다. 담 위에는 잉가가 저녁에 다시 놓고 간 그릇이 있었고 그 옆에 털가죽 둘이 있었고 그 옆에 늑대가 있었다. 켈리는 불렀다. 부르고 나서 기다리지 않았고, 다시 불렀다. 손목을 들면 딸깍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손목을 어깨까지 들었는데 밤이 깊어지자 무릎 위에서 조금만 들었다. 그래도 소리는 났다. 켈리는 부른 횟수를 세지 않았다. 세기 시작하면 어디서 그칠지를 정해야 했다. 잉가네 창의 등잔이 꺼졌고 헛간 앞의 숨소리가 하나씩 고르게 되었다. 린의 숨소리가 가장 늦게 골라졌다. 늑대가 담 위에서 엎드렸다. 켈리는 늑대의 숨소리를 들으며 불렀다. 목이 거칠어졌다. 거칠어진 목으로도 이름은 나왔다. 두 글자였다.
산의 밤은 낮보다 소리가 많았다. 계단밭 돌담 틈에서 벌레가 울었고 처마의 이삭들이 바람에 서로 부딪쳤고, 망루 쪽에서 염소가 한 번 울고 그쳤다. 산마루 위로 별이 촘촘했다. 켈리의 어깨에 밤이슬이 내려앉았다. 담 위에서 늑대의 냄새가 내려왔다. 젖은 털과 마른 풀과 식은 죽이 섞인 냄새였다. 사흘 전보다 사람 냄새가 조금 더 섞였는지는 켈리의 코로는 가릴 수 없었다.
눈을 뜬 것은 물소리 때문이었다.
하늘이 회색이었다. 7월 15일의 새벽이었고, 켈리는 자기가 언제 눈을 감았는지 몰랐다. 손목은 무릎 위에 있었고 끈은 그대로 감겨 있었다.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담 위에 그릇이 있었다. 바닥까지 핥은 그릇이었다. 그 옆에 털가죽이 없었다. 그 옆에 늑대가 없었다. 켈리가 일어서려다 한 번 주저앉았다. 밤새 접고 있던 다리가 제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에 일어섰다. 물소리는 우물가에서 났다.
우물가 돌구유 앞에 사람 하나가 쭈그려 있었다. 얼굴을 물에 담그고 있었는데, 마시는 소리가 아니라 핥는 소리가 났다. 어깨에 털가죽 둘을 걸쳤고 하나는 뒤집혀 있었다. 털이 안으로 갔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볼까지 덮여 어디서 갈리는지 알 수 없었고, 구유 가장자리를 짚은 손의 손톱이 길었다. 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수염 끝에서 물이 떨어졌다. 그 사람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부르지 않았다. 사흘 동안 입에 달고 있던 이름이 입 안에 그대로 있었다. 부르면 대답이 올 것 같아서였는지 오지 않을 것 같아서였는지 켈리는 알지 못했다.
맨발이 흙을 차는 소리가 났다. 린이 헛간 앞에서 뛰어오다가 구유 다섯 걸음 앞에서 멈췄다. 그 사람이 린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린."
린의 입이 열렸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린은 고개만 끄덕였다. 여러 번 끄덕였다. 그 뒤로 바르트가 옆구리를 누르며 왔고 니카가 왔고 안경을 쓰면서 오벨이 왔고 맨 뒤에 유안이 왔다. 고슈가 하나씩 보았다.
"…바르트."
"응."
"…니카."
"…네."
고슈의 눈이 오벨에게서 오래 머물렀다. 오벨의 손이 안경다리에서 멈췄다.
"…오벨."
"…예."
오벨은 그 뒤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았다. 소아레로 가던 길에서는 「오벨입니다」를 붙였었다.
고슈의 코가 유안 쪽으로 한 번 움직였다. 윗입술이 아주 조금 들렸다가 내려왔다. 고슈는 아무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 유안이 고개를 숙였다. 늑대에게 숙이던 것과 같은 깊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므로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고슈가 켈리를 보았다. 얼굴을 보다가 눈이 내려갔다. 왼 손목이었다.
"…끈."
켈리가 입을 열었다. 목이 쉬어 있었다.
"…켈리야."
고슈가 켈리를 보았다. 손목을 보았다. 다시 켈리를 보았다.
"끈."
켈리는 더 고치지 않았다.
니카가 고개를 돌렸다. 어깨가 떨렸다. 린이 니카의 발을 밟았다.
고슈가 일어섰다. 무릎이 한 번 꺾였다가 펴졌다. 고슈가 마당을 둘러보다가 돌담 위의 빈 그릇에서 눈을 멈췄다.
"…죽."
문간에 잉가가 서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탁자에 있어. 들어와."

탁자에 그릇이 일곱 놓였다. 켈리가 셌다. 한 번 세고 한 번 더 셌다. 일곱이 한 탁자에 둘러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유안이 일행에 든 것은 고슈가 숲으로 들어간 뒤였다. 고슈는 그릇에 얼굴부터 가져갔다. 린이 그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고슈는 숟가락을 주먹으로 쥐었다. 다섯 손가락이 자루 끝까지 감겨서, 숟가락이 아니라 막대기를 쥔 손이었다. 켈리는 숟가락을 그렇게 쥐는 사람을 자기 말고는 처음 보았다. 고슈와 유안은 나란히 앉았는데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안이 고개를 숙이면 고슈의 코가 한 번 움직였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잉가는 화덕 옆에 서 있다가 다들 먹기 시작한 뒤에야 앉았다. 담 위의 그릇은 거두지 않았다. 방 안에 짐승 냄새가 났다. 잉가가 말없이 일어나 문을 끝까지 열어 두고 다시 앉았다. 고슈는 알아채지 못했다. 린은 알아챘고, 귀가 빨개졌다.
바르트가 노트를 켈리 앞에 밀어 놓았다. 켈리가 청하지 않았는데 맨 뒷장이 펴져 있었다. 고슈 칸에는 물음표에서 시작한 줄들이 차례로 내려와 있었다. 켈리가 「돌담」 줄 아래에 새 줄을 긋고 여백에 「사흘」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 맨 아래 고슈 칸에 적었다. 돌아옴. 연필이 켈리 칸으로 갔다. 사흘 동안 걸지 않았다. 그래도 낸 것이 있었다.
"…목."
켈리가 적으며 말했다. 쉰 소리였다.
"그게 값이야?"
"쉬었어."
바르트가 노트를 들여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린이 무릎을 내밀었다. 앞자락에 흙물이 배어 있었다.
"그럼 나도. 무릎."
켈리가 린 칸에 무릎이라고 적었다. 오벨이 수첩을 폈다.
"보고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스무 날 동안 보신 것을."
고슈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주먹을 펴는 데 한참 걸렸다. 그러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염소. 셋. 망루 밑. 하나 새끼 뱄어."
오벨이 적었다.
"까마귀. 아랫마을. 열하나. 전엔 넷. 개. 넷. 둘은 꼬리 말았어. 나 봐서. 쥐. 보리 끝나면 내려와. 담 틈으로. 이 집 담은 틈이 많아."
화덕 옆에서 잉가가 말했다.
"…그건 맞아."
고슈는 멈추지 않았다. 산의 물이 어느 바위 밑에서 나오는지, 한낮에 어느 그늘이 서늘한지, 산양이 어디서 소금기를 핥는지, 어느 비탈의 풀이 올해 먼저 말랐는지. 말과 말 사이를 잇는 것들이 빠져 있었는데도 말은 길었다. 니카가 열린 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바닥에서 얼마나 옮겨 갔는지를 보았다.
"…벌써 십오 분이에요."
린이 웃었다. 늪가에서 젖은 채로 사십 분을 듣던 얼굴이었다. 오벨은 받아 적는 손을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켈리는 고슈의 손을 보았다. 숟가락을 놓은 뒤에도 반쯤 쥐어져 있었다.
고슈가 말을 멈췄다. 손가락 하나가 들려 문밖을 가리켰다. 골짜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이틀 전 새벽 케이의 등이 안개 속으로 흐려져 간 쪽이었다.
"…골짜기."
다들 기다렸다.
"산 아래 골짜기에 사람이 모여 있어."
오벨의 펜이 멈췄다.
"깃발이 없어."
고슈가 코를 한 번 움직였다. 스무 날 동안 맡아 온 것을 다시 맡는 것 같았다.
"냄새가 두 가지야."

 

부엉이


냄새가 두 가지라는 말에 오벨의 펜은 잠깐만 멈췄다. 법률가의 펜은 놀라도 오래 멈추지 않는 법이었다. 오벨이 수첩 위로 몸을 기울였다.
"두 가지라 함은."
고슈가 코를 들었다. 문간으로 들어온 아침 바람을 한 번 맡고, 방 안을 한 번 맡더니 고개가 헛간 쪽 구석으로 돌아갔다. 거기 켈리의 자루가 세워져 있었다. 자루 맨 아래도 아니고 맨 위도 아닌 자리에 남색 로브가 개켜져 들어 있는 자루였다.
"…하나는 저거. 끈 자루."
다들 자루를 보았다. 자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색. 물감 냄새."
고슈가 다시 코를 들었다. 이번에는 오래 맡았다. 스무 날 동안 맡아 온 것을 하나씩 꺼내 보는 얼굴이었다.
"…하나는 쇠틀. 기름."
켈리는 셈을 했다. 남색은 벨류엔이었고 기름 먹은 쇠는 자플랜이었다. 거두러 오는 쪽과 데려가러 오는 쪽이었다. 둘이 같은 골짜기에 모여 있다면 셈은 한 줄로 끝났다. 그 한 줄 끝에 무엇이 적히는지 켈리는 타르실의 벽에서 읽었다. 분실 자산. 회수 협조. 켈리가 일어나 자루로 갔다. 끈을 쥐었다. 탁자 위의 그릇 일곱은 아직 다 비지 않았다.
"나가."
"어디로."
바르트가 물었다.
"마을 밖."
마을로 가면 마을이 값을 냈다. 산을 넘어올 때 켈리가 정한 길이었고, 그 길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켈리가 자루를 어깨에 걸치려는데 고슈가 고개를 저었다. 숟가락을 놓은 뒤에도 반쯤 쥐어진 손이 탁자 위에서 한 번 흔들렸다.
"…아니."
"뭐가."
"…쫓는 냄새 아니야."
켈리의 손이 멈췄다. 고슈는 말을 고르는 데 오래 걸렸다. 사람의 말 가운데 그 냄새에 맞는 것을 찾는 얼굴이었다.
"…배고픈 냄새."
아무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늑대로 스무 날을 산 사람이 배고픈 냄새를 모를 리 없었다. 바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탈영병이야. 양쪽에서 빠져나온."
오벨의 펜이 이번에는 오래 멈췄다.
"…어느 쪽 법에도 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켈리는 바르트가 쓴 낱말을 알았다. 마법청 문서에는 다른 말로 적혀 있었지만, 켈리가 한 일에 바깥 사람들이 붙이는 말은 그것이었다. 켈리의 눈이 처마로 갔다. 나무 갈고리마다 거꾸로 매달린 보리가 아침 바람에 이삭 끝을 부딪고 있었다. 배고픈 사람이 산을 올라오면 보는 것은 하나였다. 켈리는 그것을 알았다. 폐허에서 바르트가 그릇을 내밀던 날 켈리가 본 것도 그릇 하나였다.
화덕 옆에서 잉가가 말했다.
"…탈곡이 남았어."
잉가는 화덕의 불을 뒤적이던 부지깽이를 내려놓지 않았다. 말은 그것뿐이었다. 처마 밑 보리는 아직 이삭째였고, 이삭째인 보리는 들고 가기 쉬웠다. 털어서 자루에 담기 전의 보리에는 누구의 것인지 적혀 있지 않았다.
켈리가 자루를 내려놓았다. 오벨이 망루에 알려야 한다고 하자 잉가는 고개를 저었다. 망루는 계단밭 맨 위에서 산마루 길만 보았다.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길은 아래 밭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라 망루가 없었다. 왜 없느냐고 오벨이 묻자 잉가가 짧게 대답했다.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건 우리 사람뿐이었어."
잉가는 망루 아이를 산채로 올려 보냈다. 아이가 돌담을 뛰어넘어 사라진 뒤에 유안이 탁자 위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국물 자국이 동그랗게 남았다.
"범위를 정하면 빗나가도 됩니다."
유안이 켈리를 보았다. 안개 속에서 처음 만난 날과 같은 눈이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라 풀 것을 보는 눈이었다.
"제 글은 자주 빗나갑니다. 빗나가도 동그라미 안에서만 빗나가게 하면 됩니다. 켈리 씨의 것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고슈가 거들었다. 골짜기 길이 바위벽 밑으로 한 번 크게 굽는 자리가 있다고 했다. 유안이 그 말을 받았다.
"거기서 바위를 무너뜨리면 길이 막힙니다."
"…터뜨려?"
"바위 값은—"
오벨이 말을 꺼내자 잉가가 먼저 잘랐다.
"바위는 아무도 안 사."
터뜨리는 것은 켈리가 가장 오래 한 일이었고, 가장 오래 안 한 일이었다. 켈리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해 볼게."
"해 보는 겁니다."
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입니다."

할름 맨 아래 층에서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은 바위벽 밑을 따라가다가 한 번 크게 굽었다. 굽이는 마당만큼 넓었다. 한쪽은 사람 키 서넛을 쌓은 높이의 바위벽이었고 다른 쪽은 골짜기로 떨어지는 비탈이었다. 바위벽에는 풀 한 포기 붙어 있지 않았다. 터뜨려도 아무도 값을 묻지 않을 자리였다. 골짜기 아래에는 아침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아서, 길은 굽이 아래로 몇 걸음 내려가다가 흰 데로 사라졌다. 그 흰 데 어딘가에 고슈가 맡은 냄새가 있었다. 7월 16일 아침, 유안이 그 굽이 한가운데에 먹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사람 하나가 누울 만한 크기였다. 한 바퀴를 그리고 한 바퀴를 더 그렸는데 두 줄이 어긋나지 않았다. 맨 아래 층 돌담 위에는 아이들 머리가 일고여덟 개 나와 있었다. 오벨이 서른 걸음 밖으로 물러나 있으라고 했고 아이들은 서른 걸음을 정확히 지켰다. 그 가운데 레크도 있었다. 창 대신 보리 이삭을 하나 물고 있었다. 바르트는 노트 가운데 장을 펴고 맨 위에 「실험」이라고 적었다. 켈리는 동그라미 안에 섰다. 지팡이는 린이 들고 있었다.
첫째는 문이었다. 유안은 동그라미가 바위벽을 마주 보는 자리에 문을 하나 내겠다고 했다. 터진 것이 그 문으로만 나가 바위를 치게 하는 것이었다. 유안이 무릎을 꿇고 주홍 종이를 폈다. 획마다 숨을 멈추었고, 멈출 때마다 돌담 위 아이들도 따라 숨을 멈추었다. 다 쓴 종이를 동그라미의 바위 쪽 자리에 놓고 유안이 일어섰다. 가슴을 폈다. 이 대륙 말로 옮겨서 외쳤다.
"「문 속의 부—」"
마지막 글자에서 숨이 모자랐다. 획마다 숨을 멈추느라 숨을 다 쓴 뒤였다. 「불」의 끝소리가 혀끝에 걸리지 못하고 목으로 넘어가 둥글게 울렸다. 부웅.
종이가 재로 말려 올라갔다. 재는 흩어지지 않았다. 동그라미 위에서 한데 뭉치더니 깃을 펴듯 부풀었고, 펴진 자리에서 둥근 눈 두 개가 떠졌다. 노란 눈이었다. 한낮의 햇빛 속에서 그 눈이 천천히 한 번 감겼다 떠졌다.
부엉이였다.
부엉이는 먹줄 위에 앉아 고개를 반 바퀴 돌려 바위벽을 보고, 다시 반 바퀴 돌려 일행을 보았다. 그러고는 날아올랐다. 날갯짓 소리가 나지 않았다. 부엉이는 굽이를 한 바퀴 돌더니 가장 높은 자리를 골라 내려앉았다. 유안의 정수리였다. 높이 묶은 머리가 앉기에 꼭 알맞았다.
돌담 위에서 웃음이 터졌다. 레크가 이삭을 떨어뜨렸다. 유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수리에 부엉이를 얹은 채로 허리를 굽혀 타다 남은 종이 귀퉁이를 주웠고, 눈앞에 가져가 오래 들여다보았다. 획은 다 맞았다.
"…마지막 획이 빗나갔습니다."
"다 맞게 쓰셨잖아요."
니카가 말했다.
"소리로 긋는 획 말입니다."
유안이 정수리의 무게를 한 번 가늠했다.
"제가 「불」을 「부엉」이라고 했습니다."
부엉이가 대낮에 한 번 울었다. 부엉. 울 시각이 아니었다. 돌담 위에서 아이 하나가 따라 했다. 부엉. 고슈가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왔다. 부엉이를 오래 보고, 냄새를 맡았다.
"…이 산 부엉이 아니야. 먹 냄새 나."
부엉이가 유안의 머리에서 날아올라 할름 뒷산 쪽으로 갔다. 잉가네 지붕 위로 솟은 늙은 소나무에 내려앉아 깃을 고르기 시작했다. 고슈가 그쪽을 보며 말했다. 저기 살 거라고 했다. 바르트가 노트에 적었다. 「1. 문. 부엉이.」 그 옆 까닭 칸에 「소리(유안).」 켈리는 동그라미 안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손을 들기 전이었다. 들 데가 없었다. 그런데도 오른팔 안쪽이 조금 뜨거웠다. 둥글게 그어진 줄 안에 서서 앞을 보고 있으면 몸은 저 혼자 다음을 채비했다. 이 자리가 무엇을 하는 자리인지 몸은 아직 알고 있었다.
오후에는 벽이었다. 문이 안 되면 벽으로 세 면을 막고 남은 한 면을 문으로 쓰자는 것이었다. 먼저 아이들이 있는 마을 쪽에 벽을 세우기로 했다. 이번에는 바르트가 유안 옆에 쪼그려 앉아 획을 함께 셌고, 유안이 숨을 멈출 때마다 바르트도 멈추었다. 획은 맞았다. 유안이 종이 귀퉁이에 범위를 적는 작은 글자를 넣고 외쳤다.
"「쇠비늘의 벽」!"
땅이 한 번 울렸다. 흙 속에서 잿빛 비늘이 겹겹이 솟아올랐다. 큰 물고기의 옆구리를 세워 놓은 것 같았고, 가슴 높이에 열 걸음 길이였다. 벽은 섰다. 마을 쪽이 아니라 그 반대쪽, 골짜기로 내려가는 아랫길을 가로질러 섰다. 바위벽 밑동에서 비탈 쪽으로 뻗어 나가 아랫길을 막고, 마을 쪽은 돌담 위 아이들에게로 활짝 열어 둔 채였다. 아이들 머리가 일제히 더 높이 솟았고 레크가 두 손으로 둘을 눌러 앉혔다. 유안이 탄 귀퉁이를 주워 보았다.
"…범위 글자를 거꾸로 썼습니다."
린이 벽 앞으로 가서 한참 서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처음 보는 것에는 인사부터 하는 것이 린의 셈이었다. 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린은 대답이 없는 것에도 대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었는데, 이번에는 기다리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 벽에게는 해요체를 써야 할지 반말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방금 태어난 것이었다.
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바르트가 주먹으로 두드려 보니 솥뚜껑 소리가 났다. 밀어 보아도 꿈쩍하지 않았다. 언제 없어지느냐고 묻자 유안은 자기 운이 다할 때까지라고 했다. 니카가 듣고 그럼 금방이겠다고 했고, 유안은 그렇게 말하면 오래 서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골짜기로 내려가는 길은 벽 끝과 비탈 사이로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날 만큼만 남았다. 해 질 녘에 벽 뒤가 어떻게 생겼는지 재 보겠다고 그 틈으로 들어가던 바르트가 끼었다. 옆으로 섰는데도 배가 비늘에 걸렸다. 켈리가 틈 너머에서 밀고 린이 뒤에서 허리띠를 당겼다. 켈리는 걸지 않았다. 니카는 뒤에서 빠질 확률을 말하려다 바르트의 얼굴을 보고 숫자를 삼켰다. 바르트는 숨을 끝까지 내쉰 채로 빠져나와 옆구리를 붙잡았다. 벽 뒤는 끝내 재지 못했다. 그날 저녁 유안은 붓 한 자루와 왼쪽 신 한 짝을 잃었다. 유안은 대가라고 했고 니카는 확률이라고 했다. 그가 그날 몇 번 넘어졌는지는 그의 체면을 위해 적지 않기로 한다. 바르트의 노트에는 둘째 줄이 생겼다. 「2. 벽. 반대쪽.」 까닭 칸에 「범위 글자(유안).」

이튿날 유안은 신 한 짝을 끝내 찾지 못해 왼발에 짚을 감고 내려왔다. 그 발로 바르트와 머리를 맞대고 종이 한 장을 오래 썼다. 바르트가 획을 하나씩 세었다. 다 쓰고 나서 두 사람이 동시에 열하나라고 말했다. 숫자가 같았고 둘 다 당연한 얼굴이었다. 니카가 또 한 걸음 물러섰다. 이번 이름은 「외길의 문」이었다. 문을 따로 놓지 않고 동그라미 전체를 진법으로 세우되, 바위 쪽 한 자리만 열어 두는 것이었다. 유안이 외치자 먹줄이 일어섰다. 화덕 위에 아지랑이가 서듯 공기가 머리 높이까지 일렁이며 동그라미를 둘러쌌고, 바위벽을 마주 보는 한 자리만 비어 있었다. 이번에는 이름대로였다. 돌담 위에서 아이들이 길게 탄성을 냈다. 켈리는 아지랑이 안쪽에 서 있었다. 바깥의 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멀어졌고, 바위벽 쪽 빈자리 하나로만 바람이 드나들었다. 숨을 내쉬면 그 숨도 그 자리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다만 문은 열 숨 동안만 열려 있다고 유안이 말했다. 바르트가 노트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손을 들었다.
"그럼 셋에 하게. 내가 세지."
"하나."
유안이 외쳤다. 먹줄이 일어섰다.
"둘."
"셋."
켈리가 뛰었다.
문으로 빠져나가 바위벽까지 열댓 걸음을 단숨에 뛰었고, 바위 앞에서 오른손이 올라갔다.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손가락이 벌어졌다. 어깨에서 뜨거운 것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범위 밖입니다!"
"켈리!"
켈리는 바위에 이마가 닿을 듯한 자리에 섰다. 내려오던 열을 도로 올려보냈다. 아직 이름이 없는 동작이었다. 도로 올라간 열은 어깨 밑에 뭉쳐서 한동안 빠지지 않았다. 팔 안에 돌을 하나 넣어 둔 것 같았다. 팔이 어깨까지 무거워졌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셋 세면 뛰는 거였나."
"…응."
"넷에 하지."
켈리가 동그라미로 돌아왔다.
"하나."
"둘."
"셋."
켈리의 발뒤꿈치가 들렸다. 들린 채로 섰다.
"넷."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손은 위를 향해 있었는데 손바닥이 비어 있었다. 열은 뛰고 난 다음에 오는 것이었다.
문이 닫혔다.
"그럼 뛰고 나서 하면 되잖아요."
니카가 말했다. 켈리를 동그라미 바깥 스무 걸음 위에 세웠다.
"하나."
"둘."
"셋."
켈리가 뛰어 문으로 들어갔다. 동그라미 한가운데에서 손이 올라갔다. 이번에는 열이 왔다. 손바닥이 향한 쪽은 바위벽이 아니라 맨 아래 층 돌담이었다. 거기 아이들 머리가 일곱 개 있었다.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문을 등지게 되어 있었다.
"방향이—!"
켈리가 두 번째로 열을 도로 올려보냈다. 무릎이 접혔다. 켈리는 동그라미 한가운데 주저앉았다. 오른팔이 어깨에서부터 늘어져 무릎 위에 얹혔다. 손가락이 저절로 펴졌다 오므라들었다. 먹줄의 아지랑이가 꺼지고 굽이에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바르트가 다가와 노트를 폈다. 셋째 줄을 적었다. 「3. 셋. 뜀.」 그러고는 까닭 칸에 연필을 대고 망설이지 않고 적었다. 「내가 셌음.」 켈리가 그 글자를 보았다.
"내가 뛰었어."
"내가 셌어."
바르트는 그 줄을 지우지 않았다. 켈리는 무릎 위의 손을 보았다. 셋을 세는 사람은 늘 뒤에 있었다. 뒤에서 셋이 떨어지면 켈리는 앞으로 뛰었고, 다 터뜨리고 나오면 그 사람이 도랑가에 서서 갈 쪽을 가리켰다. 그 사람은 이제 없었다. 바르트는 칼을 차지 않았는데, 바르트가 세는 셋에도 켈리의 다리는 똑같이 뛰었다. 셋은 한 번도 켈리의 숫자였던 적이 없었다. 늘어진 팔을 왼손으로 받쳐 들면서 켈리가 말했다.
"…내가 셀게."

팔이 돌아오는 데 하루가 걸렸다. 7월 18일 낮, 바르트가 잉가네 헛간에서 금 간 물동이 하나를 안고 내려왔다. 잉가가 버리려고 내놓은 것이었다. 바르트는 그 안에 저울로 단 가루를 붓고, 동그라미의 문 자리에 물동이를 내려놓았다. 터진 것이 문으로 나가면 그 가운데 넘치는 몫을 물동이가 받는다고 했다. 가루는 잿빛이었고 손가락으로 비비면 쇠 냄새가 났다. 바르트는 저울 접시에 한 숟가락씩 덜어 올렸고, 접시가 기울 때마다 한 숟가락을 더 올렸다. 폐허에서 바르트가 켈리에게 물었던 것 가운데 아직 답이 없는 것이 그것이었다. 잉여 에너지는 어디로 가느냐는 것. 그때 켈리는 그 문장에서 두 낱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바르트는 물동이 앞에 쪼그려 앉은 채로 켈리를 올려다보았다.
"받아 봐도 되겠나."
켈리가 대답하기 전에 바르트가 한마디를 더 붙였다.
"싫으면 안 해도 돼."
강바닥에서도 바르트는 같은 말을 붙였었다. 그 말 끝에 켈리는 처음으로 다른 대답을 했었다.
"알아."
켈리는 잠깐 물동이를 보았다.
"…해."
바르트가 고개를 끄덕이고 가루를 한 번 더 달았다. 남는 쪽으로 달았다. 그는 늘 그렇게 달았다. 유안이 옆에서 같은 박자로 숨을 쉬었다. 켈리가 동그라미 안에 섰다. 돌담 위의 아이들은 오늘도 서른 걸음을 지켰다. 아무도 세 주지 않았다. 켈리는 숨을 한 번 골랐다. 숫자를 입에 올리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쇠뇌를 감는 스무 숨도 세었고 탁자의 그릇도 세었다. 다만 그 숫자 끝에서 자기가 움직이는 숫자는 센 적이 없었다.
"하나."
켈리가 셌다. 유안이 외쳤고 먹줄이 일어섰다.
"둘."
"셋."
다리는 뛰지 않았다. 뒤에서 세는 사람이 없었다. 셋은 켈리의 입에서 나왔고 켈리의 입은 켈리를 보내지 않았다. 오른손이 올라갔다.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손가락이 벌어지고 팔꿈치가 펴졌다. 어깨에서 손목으로 열이 내려왔다. 다 내려오면 그다음은 정해져 있었다.
켈리는 그 뒤의 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손을 들면 무언가가 없어졌고, 없어진 자리에서 켈리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달리지 않았으므로 보았다. 손바닥에서 흰 것이 떠났다. 빛이라고 하기에는 무겁고 불이라고 하기에는 조용한 것이었다. 그것이 아지랑이 벽에 닿지 않고 문으로 빨려 갔다. 굴뚝이 연기를 빨아들이듯이 갔다. 문 자리에 물동이가 있었다.
소리는 쾅이 아니었다. 먼 데서 큰 솥뚜껑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웅. 물동이가 안에서부터 검붉게 달아올랐다가, 그 빛을 그대로 머금은 채 오그라들었다. 바위벽의 돌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동그라미 둘레의 자갈 하나 구르지 않았다. 돌담 위에서 아이들이 일어섰다. 일어선 채로 기다렸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끝났어요?"
레크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먹줄의 아지랑이가 꺼졌다. 문 자리에는 물동이가 없었다. 빵 한 덩이만 한 돌이 하나 놓여 있었다. 겉이 그릇처럼 반들거렸고, 검붉던 빛이 가장자리부터 잿빛으로 식어 가는 중이었다.
그다음은 켈리의 차례였다. 손끝부터 추워졌다. 7월 한낮의 햇빛이 머리 위에 있는데 손가락 끝이 얼음물에 담근 것처럼 시렸다. 추위가 손목을 지나 팔꿈치로 올라오는 동안 입안이 말랐고, 마른 입안에 무언가를 넣고 싶어졌을 때는 이미 다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켈리가 동그라미 안에 앉았다. 린이 뛰어 내려와 제 겉옷을 벗어 켈리의 어깨에 둘렀다. 켈리는 떨면서도 문 자리의 돌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켈리가 터뜨린 것이 아무것도 없애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바르트가 돌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손바닥을 가까이 대 보고 오래 말이 없었다.
"…남는 쪽으로 달았어."
"얼마나요."
니카가 물었다.
"다 받을 만큼."
바르트가 목덜미를 만졌다. 새로 붙은 것은 없었다. 남게 달았는데 남은 것이 없었다. 바르트는 그 셈을 한참 붙들고 있다가 노트에 적었다. 「4. 물동이. 다 먹음.」 까닭 칸에 「계량(바르트). 남는 쪽.」 유안은 돌과 켈리를 번갈아 보더니 자기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변수가 너무 큽니다."
"…그럼 줄여?"
켈리의 입술이 떨렸다. 추워서였다.
"줄일 수 있습니까."
"…아니."
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첩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켈리 자리에서는 거꾸로 보였는데, 거꾸로 읽는 것은 켈리가 잘하는 일이었다. 「변수. 그대로.」 그 아래에 「문을 넓힐 것.」 켈리를 줄이겠다는 사람이 아니었다. 켈리는 그 두 줄을 오래 보았다. 열두 해 동안 켈리를 적은 종이는 많았지만 켈리를 그대로 두고 다른 것을 고치겠다고 적은 종이는 없었다.
바르트가 소매로 돌을 감싸 들어 켈리 앞으로 굴려 주었다. 켈리가 두 손으로 그것을 안았다. 돌은 따뜻했다. 켈리가 낸 열이었다. 시린 손가락 끝으로 그 열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고슈가 내려와 돌에 코를 대 보고 켈리를 보았다.
"…끈. 돌 안 뜨거워?"
"따뜻해."
고슈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 옆에 쪼그려 앉아 한참 일어나지 않았다.

해 질 녘에 고슈가 골짜기 쪽 산등성이를 한 바퀴 돌고 왔다. 사람의 다리로 돌았는데 돌아올 때는 코가 먼저 왔다. 아랫마을 까마귀가 열아홉으로 늘었다고 했다. 냄새가 가까워졌다고 했다. 내일이 아니면 모레라고 했다. 저녁 탁자에서 잉가가 켈리 무릎 위의 돌을 보았다. 무어냐고 묻기에 바르트가 물동이라고 했다. 잉가는 손바닥으로 돌을 한 번 덮어 보았다. 아직 따뜻했다.
"금 간 거였어."
그것으로 셈은 끝났다. 그 물동이에 무엇을 담아 왔었는지 잉가는 말하지 않았다. 오벨이 밤에 보초가 있어야 한다고 했고 고슈가 자기가 보겠다고 했다. 귀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 나서 문간에 기대앉은 고슈의 고개가 자꾸 무릎 쪽으로 떨어졌다. 돌아온 지 사흘이었다. 유안이 그것을 보고 소매에서 종이를 꺼냈다.
"깨어 계시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번 것은 중요하니 크게 쓰겠다고 했다. 붓을 누르는 손에 힘이 들어갔고 먹이 두 번 찍혔다. 귀퉁이 작은 글자 자리에 「고슈」를 적었다. 유안이 헛간 안에 서서 외쳤다.
"「잠들지 않는 눈」!"
종이가 재로 말렸다. 재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연기처럼 헛간 안에 퍼졌다. 퍼진 자리마다 누군가의 눈이 뜨였다. 누워서 눈을 반쯤 감고 있던 니카의 눈이 떠졌고, 안경을 벗어 두던 오벨의 눈이 떠졌다. 바르트도 린도 켈리도 떠졌다. 마지막으로 외친 유안 자신의 눈이 떠졌다.
일곱이 나란히 누워 서까래를 보았다. 등잔을 껐는데도 아무도 눈을 감지 못했다. 감으려고 하면 눈꺼풀이 도로 올라갔다. 헛간 지붕 틈으로 별빛이 몇 줄 새어 들었고, 그 아래에서 일곱 쌍의 눈이 빛을 받아 하나씩 번들거렸다. 바르트의 숨소리가 코골이로 넘어가려다 넘어가지 못하고 몇 번이고 도로 숨소리가 되었다. 한참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다들 깨어 있을 확률이요."
니카가 말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벨이 말했다.
"10할이에요."
유안이 서까래를 본 채로 말했다.
"…넘쳤습니다."
"넘치면 옆으로 가."
켈리가 말했다. 켈리는 그것을 알았다. 넘친 것은 쥔 것으로 갔고, 쥔 것이 없으면 가장 가까운 데로 갔다. 유안이 쥔 것은 붓이었고 가장 가까운 데는 헛간이었다. 문간에서 고슈가 눈을 끔벅이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원래 밤에 안 자."
그 말은 사실이었다. 스무 날 동안 그랬다. 부적이 깨우려던 사람은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은 길었다. 린이 먼저 일어났다. 잠이 안 오면 인사나 마저 해야겠다고 했다. 린은 맨발로 나가 우물가의 두 쪽 난 돌에 한 번 인사하고, 맨 아래 층 돌담 쪽으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오래 이어졌다. 말은 실려 오지 않고 높낮이만 실려 왔는데, 높낮이만으로도 린이 돌에게 해요체를 쓰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돌담은 린보다 나이가 많았다. 바르트는 켈리에게서 돌을 빌려 저울에 달았다. 등잔 없이 접시의 기울기를 손끝으로 읽었다. 물동이 무게 그대로라고 했다. 가루까지라고 했다. 그러고는 돌을 켈리 품에 돌려주었다. 돌은 아직 따뜻했다. 켈리는 돌을 배 위에 올려놓고 다시 누웠다. 돌은 더디게 식었다. 불은 꺼지면 금방 식는데 이 돌은 그러지 않았다. 켈리는 물동이 하나만 한 무게를 배 위에 얹은 채 서까래를 보았다.
켈리는 등잔을 다시 켜고 바르트의 노트를 빌려 맨 뒷장을 폈다. 「사흘」 아래에 새 줄을 긋고 여백에 「굽이」라고 적었다. 켈리 칸에 「팔 둘. 터뜨림 하나.」 터뜨린 자리에 무엇이 없어졌는지 적으려다 연필이 멈췄다. 없어진 것이 없었다. 켈리는 칸 바깥 여백으로 연필을 옮겨 작게 적었다. 「돌 1.」 받은 것을 적는 자리였다. 바르트 칸에 「혹 0.」 부적 칸에 「붓. 신 한 짝.」 그러고 나서 켈리는 사람 칸마다 같은 글자를 적었다. 켈리, 바르트, 니카, 린, 오벨, 고슈, 부적. 「잠.」 같은 글자가 일곱 칸에 나란히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고슈 칸에서는 잠깐 망설였다가 「잠」 앞에 두 글자를 보탰다. 「원래 안 잠.」
새벽이 오기 전, 뒷산 소나무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밤새 울던 소리와 달랐다. 짧고, 빨랐고, 끊이지 않았다. 문간의 고슈가 일어섰다. 귀가 소리 쪽으로 서 있었다.
"…저건 사람 보고 우는 거야."
그날 밤 할름에서 깨어 있던 것은 일곱과 부엉이뿐이었다. 여섯이 맨 아래 층 돌담으로 내려갔다. 아무도 등잔을 들지 않았다. 밤새 뜨고 있던 눈은 어둠에 익어 있었다. 린이 먼저 거기 있었다. 인사하던 자세 그대로 돌담에 손을 얹고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켈리는 품에 따뜻한 돌을 안은 채 린 옆에 섰다.
골짜기 바닥을 따라 불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횃불이 줄을 지어 굽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켈리가 세기 시작했다. 열을 넘어서도 줄은 끝나지 않았다.

 

쓸만하네


스물아홉에서 줄이 끝났다. 켈리는 한 번 더 셌다. 스물아홉이었다. 세는 동안 다른 여섯도 아래를 보고 있었다. 아무도 몇이냐고 묻지 않았다. 켈리가 세고 있다는 것을 다들 알았다. 횃불은 골짜기 바닥에서 굽이 쪽으로 올라오다가 비늘 벽 아래에서 멈췄다. 벽 끝과 비탈 사이에는 사람 하나가 지날 틈뿐이었고, 스물아홉은 한꺼번에 그 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불빛들이 벽 아래에서 엉겼다가 흩어졌다가 다시 엉겼다. 누군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올라왔다. 솥뚜껑 소리였다. 켈리는 따뜻한 돌을 품에 안은 채 돌담에 기대어 있었다. 돌은 밤새 조금 식어 이제 사람 살갗만 했다. 아래에서 말소리가 올라왔다. 회색 쪽 말과 남색 쪽 말이 섞여 있었다. 어느 쪽 말이든 배고픈 사람이 하는 말은 짧았다.
"…올라오지를 못하는군."
바르트가 말했다. 고슈가 돌담 위에서 코를 들었다. 밤새 뜨고 있던 눈이 새벽빛에 붉었다. 일곱 모두 그랬다.
"…배고픈 냄새. 많아. 남색도 하나."
고슈의 코가 한 번 더 움직였다.
"…쇠틀은 없어. 기름만 묻혀 왔어."
위쪽 계단밭 길에서 발소리가 내려왔다. 창을 든 사내들이었다. 열넷이었다. 맨 앞의 사내는 마흔 남짓이었고 코가 한 번 부러졌다가 비뚤게 붙어 있었다. 회갈색 모피 어깨걸이에 산양 뿔 단추가 둘 달려 있었다. 그 뒤에 레크가 있었다. 레크는 켈리를 보고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실험을 구경하던 아이들 사이에서 보리 이삭을 물고 있던 얼굴이 창을 들고 있으니 몇 살은 더 들어 보였다. 호른 가르는 돌담 끝에 서서 벽 아래의 불빛을 오래 내려다보았고, 그다음에 벽을 보았다.
"이건 누가 세웠나."
"…제 실수입니다."
유안이 말했다. 짚을 감은 왼발을 오른발 뒤로 감추었다. 호른이 벽과 유안의 발을 번갈아 보았다.
"잘 틀렸군."
호른은 산채에서 내려온 길이라고 했다. 산군이 보고 오라고 했다. 싸우라고는 하지 않았다. 계약 공백기의 드란 용병대에게 고용주는 없었고, 고용주가 없는 싸움은 드란에서 싸움이 아니었다. 호른의 사람들도 그렇게 서 있었다. 창을 세웠으나 겨누지 않았고, 벽 아래를 보았으나 내려가지 않았다. 열넷 가운데 넷은 팔이나 다리에 아직 천을 감고 있었다. 키엔에서 감은 천이었다.
"계약서 없이 창을 들면 그냥 죽는 거다. 키엔에서는 계약서가 있어도 죽었고."
"그럼 저희가 쓰겠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호른이 오벨을 보았다.
"값은."
일행이 가진 것은 하나였다. 켈리가 그것을 메고 있었다. 탈곡이 끝나던 날 품삯으로 받은 보리 한 자루였다. 받던 날 켈리는 자루 아가리를 묶은 새끼줄을 놓지 못했다. 품 말고는 숨길 데가 없었고 자루는 품에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도 줄은 켈리의 손에 감겨 있었다. 이레 동안 자루는 헛간 구석에서 켈리의 자루 옆에 서 있었고, 켈리는 밤마다 그 줄을 손목에 한 번 감고 잤다. 거친 새끼줄이 손목 안쪽에 남긴 자국이 아침마다 붉었다. 막사에서 켈리 몫으로 나오는 것은 한 끼씩이었고 한 끼는 그 자리에서 다 먹는 것이었다. 남겨 둘 수 있는 몫을 받아 본 것은 그 자루가 처음이었다. 켈리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이 줄을 한 번 더 감았다가 풀었다. 켈리가 일어나 호른 앞으로 가서 줄을 내밀었다. 줄이 손바닥을 빠져나갈 때 거친 올이 손금을 한 번 긁었다. 호른이 받았다. 자루를 한 손으로 들어 보고 내려놓았다.
"32킬로그램하고 조금. 남는 쪽으로 달면—"
바르트가 말하는데 호른이 잘랐다.
"산에서는 그냥 한 자루다."
오벨이 무릎 위에 종이를 펴고 썼다. 평생 쓴 것 가운데 가장 짧았다. 갑, 일행. 을, 호른 가르와 열셋. 제1조, 을은 굽이를 지킨다. 제2조, 을은 갑의 일행 계약서 제13조를 따른다. 값, 보리 한 자루. 더 쓸 것은 많았다. 기간이 있었고 해지가 있었고 다친 사람의 몫이 있었다. 오벨의 펜이 셋째 줄 끝에서 한 번 머뭇거렸다가 종이를 떠났다. 산채에서 들은 한마디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길다. 호른은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드란 용병대에서는 글을 읽는 사람이 읽고 나머지는 들었다. 호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는데 굽이 끝까지 갔다. 열셋이 그 목소리를 들으며 창 자루를 고쳐 쥐었다.
"…13조는 뭔가."
"지금 쓰겠습니다."
오벨이 가방에서 낡은 종이를 꺼냈다. 진창길에서 처음 쓴 일행의 계약서였다. 맨 아래 빈자리에 한 줄을 보탰다. 「제13조. 오벨 리스트가 '제1조'를 외치면 전원 열 걸음 물러나 엎드린다.」 호른이 그 종이를 받으려다 손을 거두었다.
"따르라는 계약서면 그것도 읽어야지. 끝까지."
벽 아래에서 불빛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벨은 제1조부터 읽었다. 자는 자리를 먼저 정한다. 고르는 순서는 돌아가며 한다. 열넷의 드란 사람들이 창을 세운 채 그것을 들었다. 제2조에서 호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 걸음」. 짧군."
제7조쯤에서 벽 아래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빨리 좀 읽으라는 소리였다. 회색 쪽 말이었다. 호른이 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드란 말로 짧게 대답했다. 레크가 켈리에게 옮겨 주었다. 계약서는 끝까지 읽는 거라고 했다. 아래가 조용해졌다. 수긍해서 조용한 것인지 기가 막혀서 조용한 것인지는 위에서 알 수 없었다. 오벨은 제8조를 읽었다. 조항을 어긴 자는 다음 날 짐을 한 몫 더 진다. 드란 사람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12조에서 오벨이 멈췄다. 제목 아래로 그어 지운 줄이 셋이었다.
"제12조는 비어 있습니다."
"빈 조항에 왜 번호가 있나."
"…쓰다가 못 쓴 것입니다."
"뭘."
오벨이 잠깐 있다가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배고파 보이면."
호른이 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불빛 스물아홉이 거기 엉겨 있었다. 호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벨이 제13조까지 다 읽는 데 걸린 시간은 그의 명예를 위해 적지 않기로 한다. 호른이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고, 레크가 보리 자루를 어깨에 메었다. 켈리는 빈손을 쥐었다 폈다. 줄이 감겨 있던 자리가 아직 따끔했다. 레크의 어깨에서 자루가 계단밭 길을 올라갔다. 켈리는 그것이 돌담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았다. 그러고 나서 품의 돌을 고쳐 안았다.

해가 산마루를 넘어오자 오벨이 제13조를 연습해야 한다고 했다. 부르는 것이 가까운 것부터 친다고 했다. 아군도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부른 것은 바위를 굴린다고 했다. 굴린 바위는 누가 서 있는지 묻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부르기 전에 모두가 물러나 있어야 했고, 물러나는 데에는 구령이 필요했다. 드란 사람들이 서로를 보았다. 오벨이 숨을 들이켰다.
"제1조!"
일행이 엎드렸다. 엎드리긴 했는데 자리가 제각각이었다. 바르트의 열 걸음은 길었고 린의 열 걸음은 짧았다. 바르트는 엎드린 채로 고개만 들어 제 걸음을 뒤돌아 셌다. 유안은 짚 감은 발로 아홉 걸음째에 미끄러졌다. 레크는 제일 먼저 엎드렸는데 앞으로 엎드렸다. 틈 쪽이었다. 호른이 뒷덜미를 잡아 끌어왔다. 레크의 코끝에 흙이 묻어 있었다. 구령이 떨어지면 몸부터 던지는 나이였다. 니카는 서 있었다.
"열 걸음이 누구 걸음 기준이에요?"
"…각자 걸음입니다. 다시."
"제1조!"
이번에는 다 엎드렸다. 드란 사람들까지 엎드렸다. 창 열넷이 한꺼번에 눕는 소리가 났다. 계약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고 계약서는 지키는 것이었다. 열넷과 일곱이 굽이 위 비탈에 나란히 배를 깔았다. 켈리의 뺨에 흙이 닿았다. 흙이 따뜻했다. 그 순간 켈리의 눈꺼풀이 내려왔다. 밤새 올라가 있던 것이 한꺼번에 내려왔다. 켈리는 옆에서 들리는 숨을 세려고 했다. 둘에서 셋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켈리 옆에서 린의 숨이 길어졌다. 니카의 숨이 길어졌다. 바르트의 숨은 길어지다가 코골이로 넘어갔고 이번에는 도로 숨소리가 되지 않았다. 부적이 다한 것이었다.
오벨이 다음 구령을 하지 않았다. 오벨도 자고 있었다.
드란 사람들이 엎드린 채로 기다렸다. 한참 기다렸다. 하나가 고개를 들어 옆을 보았다. 일곱이 흙에 얼굴을 묻고 자고 있었다. 고슈까지 자고 있었다. 고슈는 원래 밤에 자지 않았다. 낮에는 잤다. 호른이 일어나 무릎의 흙을 털고 일곱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한 놈들이군."
호른의 사람 하나가 웃음을 참다가 기침을 했다. 다른 하나는 아직 엎드린 채로 다음 구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란 사람들이 하나씩 일어났다. 레크는 일어나지 않았다. 엎드렸던 자리에서 무릎만 세우고 창을 틈 쪽으로 돌려 앉았다. 계약서에는 굽이를 지킨다고 적혀 있었다. 레크는 굽이에서 자는 일곱도 굽이에 든다고 셈했다. 레크는 자는 얼굴들을 하나씩 보았다. 아흐레 동안 메고 온 들것 위의 얼굴은 천에 덮여 있었다. 이 얼굴들은 덮여 있지 않았다. 해가 다 올라오도록 레크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드란 사람 몇이 돌아와 그 옆에 앉았다. 하나는 모피를 벗어 바르트의 등에 덮었다. 바르트가 코를 골다 말고 웃는 것 같은 소리를 한 번 냈다. 호른은 서서 그것을 보다가 아무 말 없이 틈 쪽으로 내려가 섰다. 켈리의 손은 자는 동안에도 반쯤 쥐어져 있었다. 쥘 줄이 없는 손이었다.

일곱은 해 질 녘에 깼다. 한낮에 아래쪽은 올라오지 않았다. 틈 앞에 서면 위에서 열넷이 내려다보는 자리였다. 켈리는 일어나 앉아 뺨의 흙을 털었다. 하루를 통째로 잤는데 목이 말랐다. 아래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무언가를 끓이는 냄새가 아니었다. 끓일 것이 없는 불이었다. 어두워지자 뒷산 소나무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짧고 빨랐다. 고슈가 귀를 세웠다.
"…온다."
유안이 「물러서는 안개」를 쓰겠다고 했다. 굽이를 안개로 덮어 위쪽을 가리겠다는 것이었다. 주홍 종이를 펴는데 린이 그 소매를 잡았다.
"산에 인사는 했어?"
"부적에는 인사가 필요 없습니다."
"여긴 남의 산이야."
유안은 대답하지 않고 이름을 외쳤다. 안개가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유안에게서 물러났다. 굽이에서 물러났고 벽에서 물러났고 틈으로 흘러내려 아래쪽에 하얗게 고였다. 굽이는 달빛에 환했다. 아래는 하얬다. 안개 속에서 기침 소리와 욕이 올라왔다. 회색 쪽 욕과 남색 쪽 욕이 같은 박자로 들렸다. 안개 속에서 누군가 횃불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났다. 유안이 재가 된 귀퉁이를 내려다보았다. 린이 팔짱을 꼈다.
"봐. 산이 삐졌잖아."
"…부적은 삐지지 않습니다."
"부적 말고 산."
그날 밤 유안은 오른쪽 신을 잃었다. 이제 양발이 짚이었다.
안개 속에서 첫 그림자가 틈으로 들어왔다. 옆으로 서서 비늘에 등을 붙이고 한 사람씩 빠져나왔다. 니카가 주사위를 꺼내 엄지로 눌렀다. 입술이 움직였다. 틈을 빠져나오던 둘이 연달아 발을 헛디뎠다. 셋째도 헛디뎠다. 니카는 엄지를 떼지 않았다. 틈만이 아니라 안개 속 전부에 걸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연달아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하나가 넘어지면 그 뒤의 사람이 걸려 넘어졌고, 걸린 것이 걸린 것을 낳았다. 니카의 셈은 거기서부터 니카의 것이 아니었다. 니카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손목에 감은 천 아래에서 무언가가 끓는 얼굴이었다.
켈리가 세기 시작했다.
"하나."
틈을 빠져나온 그림자가 굽이에 섰다.
"둘."
바르트가 켈리 뒤에 서 있었다. 노트를 들고 있었는데 펴지 않았다. 세지도 않았다.
"셋. 넷."
호른의 방패들이 굽이 위쪽 스무 걸음에 줄을 섰다. 아래에서 올라온 그림자들은 방패를 보고 멈췄고, 멈춘 자리 뒤로 틈에서 또 하나가 나왔다.
"다섯. 여섯."
켈리의 다리는 가만히 있었다. 세는 입이 켈리의 입이었다. 숫자가 하나 늘 때마다 그림자 하나가 굽이로 들어왔고, 켈리는 그 어깨들을 보았다. 다들 말랐다. 창 대신 낫을 든 사람도 있었다. 틈을 빠져나올 때 옆으로 선 몸이 바르트의 반도 되지 않았다.
"일곱."
틈과 방패 사이에 그림자 일곱이 들어차 있었다. 여덟째가 틈에 어깨를 들이밀고 있었다. 더 세면 방패에 닿았다. 켈리가 말했다.
"지금."
"굴림. 제1조!"
스물한 사람이 열 걸음 물러나 엎드렸다. 니카는 열에 떠서 여덟 걸음에서 엎드렸다. 굽이 한가운데의 땅이 한 번 부풀었다가 갈라졌다. 사람 키만 한 것이 일어났다. 등이 둥글었고 온몸이 잿빛 털로 덮였고 팔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눈은 작았다. 흙냄새와 젖은 털 냄새가 굽이에 퍼졌다. 그것이 발치의 바위 하나를 두 팔로 안아 들었다. 가장 가까운 것이 일곱이었다. 바위가 굴렀다. 일곱이 한꺼번에 쓰러졌고, 쓰러진 채로 틈을 향해 기었다. 굴림이 바위를 하나 더 안아 들었다. 일곱이 틈을 빠져나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굴림이 고개를 돌렸다. 다음으로 가까운 것을 찾는 고개였다. 여덟 걸음에 엎드린 니카의 뒤통수였다.
털 덮인 팔이 휘었다.
"이행을 확인한다. 돌아가라!"
굴림이 흙 속으로 내려앉았다. 니카가 고개를 들었다. 뒤통수 한가운데가 시원했다. 머리카락 한 줌이 없었다. 오벨은 엎드린 채로 일어나지 않았다. 손을 짚고 일어나려 했는데 팔이 몸을 들지 못했다. 숨만 크게 쉬었다. 바르트가 다가가 오벨을 뒤집어 눕혔다. 오벨의 손가락이 바르트의 소매를 쥐려다 미끄러졌다. 쥐는 힘부터 빠지는 값이었다. 린이 니카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덮어 보았다. 손바닥이 꼭 맞았다. 니카는 열에 들뜬 눈으로 무슨 확률을 말하려다가, 무슨 확률이었는지 잊었다. 켈리는 일곱에서 세기를 멈췄다. 더 셀 것이 없었다. 바르트가 그제야 노트를 폈다. 켈리가 센 숫자를 그대로 적었다. 일곱.

이튿날 아침, 틈 앞에 남색 코트가 섰다. 혼자였고 빈손이었다. 키가 컸는데 코트가 그보다 컸다. 단추는 목까지 채워져 있었다. 켈리는 그 옷을 알았다. 모라 늪가에서 인부를 앞세우던 소대장이 그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을에 와서 거두어 가는 것은 물자였고 인부였고 여섯 살 아이이기도 했다. 고슈가 코를 들었다.
"…저거. 남색 물감."
"보리 반."
남색 코트가 위를 보고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반만 주면 내려간다."
오벨이 바르트의 어깨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어제의 오벨보다 작아 보였다. 안경 너머의 눈이 남색 코트를 찾는 데 한참 걸렸다.
"계약서를 쓰시면—"
남색 코트가 웃었다. 웃음이 되다 만 소리였다.
"이름을 적으면 양쪽이 다 날 찾아."
켈리는 그 셈을 알았다. 타르실의 벽에 붙어 있던 종이가 그 셈이었다. 적힌 것은 찾아지는 것이었다. 남색 코트가 돌아서서 틈 너머로 내려갔다. 한낮이 되기 전에 아래가 한꺼번에 움직였다. 틈으로 하나씩, 그러나 쉬지 않고 들어왔다. 호른의 방패가 내려섰다. 창 자루가 부딪는 소리가 났다. 드란 사람들의 허리에서 투석끈이 풀렸다. 돌이 틈을 향해 날았고, 틈은 사람 하나 폭이라 돌도 하나씩만 들어갔다. 호른이 드란 말로 짧게 외칠 때마다 방패 줄이 반 걸음씩 내려섰다. 오벨은 부를 수 없었다. 린이 굽이 위 비탈로 뛰었다. 틈 바로 위에 맨 아래 층 돌담의 끝자락이 걸쳐 있었다. 밤새 인사한 돌담이었다. 린이 손목에서 뼈 구슬 하나를 풀어 돌 틈에 밀어 넣었다.
"밤새 인사드린 린이에요. 짧게 말해서 죄송해요. 틈 좀 닫아 주세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린이 돌담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산은 나중에 대답해."
그때 위쪽 길에서 아이 하나가 뛰어 내려왔다. 망루 노인의 손자였다. 닷새 전 산채로 올라간 아이가 산군의 말을 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이는 굽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뛰었고, 방패 줄 옆을 지나 굽이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틈에서 남색 코트가 막 빠져나오고 있었다.
켈리가 지팡이를 가로로 들었다.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손이 먼저 했다. 아이 앞에 무언가를 세우려는 손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배운 적이 제대로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것이 나온 것은 공사장의 빛 앞이었다. 무언가가 섰다. 아이 앞이 아니었다. 열 걸음 아래, 틈을 막 빠져나온 남색 코트의 앞과 뒤와 옆에 섰다. 유리를 붓고 굳힌 것처럼 공기가 그 사람의 모양대로 굳었다. 남색 코트는 한 발을 든 채로 멈췄다. 들린 발의 밑창이 반쯤 떨어져 덜렁거렸는데, 그것까지 굳어 있었다.
그가 움직이려 했다. 그 힘이 켈리의 갈비뼈 안쪽으로 왔다. 켈리가 기침을 했다. 그가 다시 밀었다. 다시 왔다. 결계는 막는 것이 아니라 받아서 옮기는 것이었다. 켈리가 지팡이를 짚고 무릎을 꿇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 안쪽에서 무언가가 걸렸다. 공사장의 빛 앞에서는 받은 것이 켈리를 날려 보냈다. 지금은 날아갈 데가 없었다. 받은 것이 그대로 켈리 안에 쌓였다.
"…움직이지 마."
남색 코트가 켈리를 보았다. 굳은 공기 너머로 켈리가 입가를 닦는 것을 보았다. 그가 밀기를 그쳤다. 굽이가 조용해졌다. 틈에서 나오던 사람들이 멈췄다. 앞선 사람이 한 발을 든 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에 잡혔는지 아무도 몰랐다. 망루 손자는 굽이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이의 손에는 산채에서 들고 온 나무 패가 쥐어져 있었다. 놓치지 않으려고 쥔 손이 하얬다.
그다음에 돌담이 대답했다. 우르르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오래 참았던 숨을 내쉬는 소리였다. 맨 아래 층 돌담의 끝자락이 앉았다. 돌들이 하나씩 비탈을 굴러 내려가 틈에 들어가 박혔다. 마지막 돌이 들어가자 틈이 없었다. 린이 돌담 끝에 선 채로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인사는 짧았다. 틈 이쪽에 아홉이 남았고 저쪽은 발소리와 함께 골짜기로 멀어졌다. 아홉이 하나씩 창을 내려놓고 앉았다. 린이 손목을 보았다. 켈리가 셌다. 열하나였다.
켈리가 세웠던 것을 내렸다. 내리는 데에도 갈비뼈가 울렸다. 남색 코트가 무릎을 꿇었다. 가까이서 보니 볼이 패어 있었다. 코트 안에 사람이 반만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소매 끝이 손등을 덮었고, 목까지 채운 단추 하나는 실이 풀려 매달려 있었다. 그래도 채워 두었다. 켈리는 그 단추를 오래 보았다. 켈리의 남색은 자루 안에 개켜져 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배고파."
켈리는 그 말을 알았다. 폐허에서 켈리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릇이 앞에 놓였는데도 먹으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손을 대지 않았다. 그 그릇을 놓은 사람이 지금 켈리 뒤에 서 있었다.

이튿날 아침 잉가가 굽이로 내려왔다. 솥을 이고 있었다. 밤새 굽이에 둘러앉은 아홉을 드란 사람들이 지켰는데, 아홉 가운데 일어서는 사람은 없었다. 일어설 힘이 남은 사람이 없었다. 잉가는 먼저 오벨 앞에 그릇을 놓았다. 오벨이 손을 저었다.
"세 끼라고 적었어."
오벨이 그릇을 받았다. 손이 떨려 숟가락이 그릇에 몇 번 부딪혔다. 한 숟가락을 넘기고 나서야 손끝에 숟가락의 무게가 돌아왔다. 두 숟가락째에 잉가의 얼굴이 조금 또렷해졌다. 탈곡을 다시 맡던 날 처음부터 「세」라고 적은 것은 오벨이었다. 그다음에 잉가는 비늘 벽 위에 그릇을 늘어놓았다. 아홉이었다. 켈리가 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늘어놓고 솥을 들고 돌아섰다. 오벨이 숟가락을 든 채로 말했다.
"…그건 계약에 없습니다."
"이건 계약이 아니야."
아홉이 벽 앞으로 와서 그릇을 들었다. 그릇을 들기 전에 몇은 잉가를 보았다. 잉가는 돌아보지 않았다. 솥을 이고 계단밭 길을 올라가는 등이 넓었다. 남색 코트가 맨 마지막이었다. 그는 숟가락을 바르게 쥐었고, 빨리 먹었다. 켈리는 그 숟가락을 보았다. 숟가락을 바르게 쥐는 법을 배운 손이었다. 그 손이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가 아홉 그릇 가운데 가장 컸다. 오벨이 가방에서 일행의 계약서를 꺼냈다. 제12조를 폈다. 그어 지운 줄 셋을 오래 보았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접었다.
해가 높아질 무렵 산군 그렌이 노새를 타고 내려왔다. 땋은 흰 수염이 가슴께에서 흔들렸고 산양 뿔 고리 둘이 노새 걸음마다 부딪혔다. 노새가 굽이에 들어서자 드란 사람들이 창을 세웠다. 망루 손자가 고삐를 잡고 있었다. 그렌은 이번에도 일행 쪽을 보지 않았다. 비늘 벽을 한 번 보고 돌로 메워진 틈을 한 번 보고, 그다음에 골짜기를 보고 말했다.
"산은 편을 들지 않는다. 너희는 어느 계약서에도 없다. 팔 데가 없으니 팔지 않는다. 먹었으면 내려가라."
남색 코트가 그릇을 벽 위에 내려놓았다. 바닥까지 비어 있었다. 잉가가 담 위에 놓았던 늑대의 그릇이 이튿날 아침 꼭 그랬다.
아홉이 돌을 넘어 내려갔다. 남색 코트가 마지막에 한 번 돌아보았다. 켈리는 그 눈이 자기를 보는지 지팡이를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렌이 골짜기를 본 채로 말했다.
"이름을 대라."
처음이었다. 산채에서는 묻지 않았다. 바르트가 대고 니카가 대고 린과 오벨과 유안이 댔다. 니카는 열에 들뜬 목소리로 성까지 댔다. 그렌은 성은 따라 하지 않았다. 고슈는 「고슈」라고만 했다. 켈리가 마지막이었다.
"켈리."
"켈리."
그렌이 따라 했다. 일곱 이름을 다 따라 했다. 외는 목소리였다. 켈리는 제 이름이 남의 입에서 한 번 더 나오는 것을 들었다. 저울 위에서 불리던 것은 번호였다. 번호는 서기의 입에서 나와 장부로 들어갔다. 이 이름은 그렌의 입에서 나와 어디로 들어가는지 보이지 않았다.
"산은 빚을 갚는다. 남쪽 길을 열어 주마."
노새가 돌아섰다. 호른 가르가 창을 어깨에 걸쳤다. 굽이를 내려다보고, 양발에 짚을 감은 유안과 뒤통수가 빈 니카와 옆구리를 짚은 바르트를 보고, 숨을 얕게 쉬는 켈리를 보았다.
"이상한 놈들인데."
레크가 그 말의 뒤를 기다렸다. 호른이 걸음을 떼며 말했다.
"…쓸만하네."
드란에서 그보다 높은 말은 없다고 레크가 일러 주었다. 호른의 등이 계단밭 길을 올라갔다. 이레 동안 켈리의 손목에 감겨 있던 줄은 지금 망루 어딘가에 있었다. 켈리는 손금에 남은 자국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자국은 벌써 흐려져 있었다. 그날 밤 니카는 열이 올라 일어나지 못했다. 바르트가 이마를 짚어 보고 며칠은 걷지 못하겠다고 했다. 켈리는 바르트의 노트 맨 뒷장을 펴고 「굽이」 아래에 새 줄을 그었다. 여백에 「틈」. 켈리 칸에 「갈비.」 오벨 칸에 「힘.」 니카 칸에 「머리카락 한 줌. 열.」 부적 칸에 「신 나머지 한 짝.」 바르트 칸에는 「0.」 바르트가 그 칸을 넘겨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린 칸에는 린이 세지 않은 숫자를 적었다. 「열하나.」 켈리는 숨을 얕게 쉬며 연필을 놓았다. 품에서 돌을 꺼내 무릎에 올렸다. 돌은 이제 거의 식어 있었다. 켈리가 손바닥을 얹자 손바닥 아래만 조금 따뜻해졌다.
마당 끝에 잉가가 서 있었다. 굽이 쪽이 아니라 남쪽 산마루를 보고 있었다. 그 너머가 이빨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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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받는 값


노인은 오래 보았다. 켈리도 보았다. 막사에서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을 마주 보지 않았다. 마주 보면 그것이 무엇이든 한 줄 더 적혔다. 켈리는 그 버릇을 안 지 오래되었고, 그래서 지금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벨류엔이오."
물음이 아니었다. 니카가 아주 작게 숨을 들이켰다. 셈을 시작하는 숨이었다. 오벨의 손이 가방 걸쇠 쪽으로 갔다가 멈췄다. 유안은 그 옷이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노인의 얼굴과 일행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눈이었다.
"…예."
켈리가 말했다.
노인이 펼친 로브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은실 문장이 횃불을 받아 한 번 더 번쩍였다. 노인은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이 옷은 전장에서 봤소. 다리가 이렇게 되기 전에."
노인이 앞으로 뻗은 다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쳤다. 무릎이 굽혀지지 않는 다리였다.
"이 옷 입은 것들은 여러 가지였소. 멀리서 쏘는 것도 있고 말뚝 붙잡고 버티는 것도 있고 가까이 와서 터지는 것도 있었소. 어느 것이든 혼자 다니는 건 못 봤소."
노인이 횃불 너머를 보았다. 일행이 내려온 산마루 쪽이었다. 어둠뿐이었는데 노인은 그 어둠을 오래 보았다.
"이 옷이 혼자 있으면, 이 옷을 찾는 것들이 뒤에 있소."
아이가 횃불을 쥔 채 노인 쪽으로 반 걸음 붙었다.
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남색 로브 곁에는 늘 집검관이 있었고, 집검관이 없는 남색 로브에게는 찾는 사람이 왔다. 로엔의 창고 벽에는 마법청 회수과의 협조문이 붙어 있었고 그 첫 줄이 남색 로브였다. 그리고 이제는 벨류엔만이 아니었다. 계급장 없는 그 사람은 하루라고 했다.
"…와."
켈리가 말했다.
"찾으러 와. 벨류엔도 오고 자플랜도 와."
니카가 눈을 감았다. 오벨의 손이 걸쇠에서 떨어졌다. 둘러댈 말을 고르던 자리에서 켈리가 먼저 참말을 해 버렸으므로 할 일이 없어진 손이었다.
켈리가 노인의 무릎에서 로브를 집어 들었다. 개기 시작했다. 소매를 안으로 접고 아랫단을 둘로 접었다. 마을로 가면 마을이 값을 냈다. 산마루에서 켈리는 연기 아래에 사람이 있다는 것만 셈했다. 연기 아래가 마을이라는 것은 셈하지 못했다.
"안 들어갈게."
노인의 손이 켈리의 손목을 잡았다. 손이 컸고 마디가 굵었다.
"찾으러 오는 것들이 계약서를 들고 오오?"
켈리는 계급장 없는 가슴을 떠올렸다. 서기의 손이 적은 글씨를 그 사람은 거꾸로 내려다보았다. 기록에 없는 조사였다. 회수과도 다르지 않았다. 협조문은 붙였으나 그 사람들이 다리를 건넜다는 것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다. 찾으러 오는 쪽은 적지 않고 왔다.
"…아니."
"그럼 됐소."
노인이 턱으로 머리 위를 가리켰다. 돌탑이었다.
"계약서 없이 오는 것은 이 망루를 못 지나오. 군대든 사람이든. 이 탑이 하는 일이 그거요."
"들고 오면요."
오벨이 물었다. 법률가는 단서를 묻는 사람이었다.
노인이 대답하기 전에 잠깐 있었다.
"그건 산군이 정하오. 나는 망루지기요."
노인이 켈리의 손에서 로브를 받아 도로 개었다. 개는 솜씨가 서툴렀다. 소매를 안으로 접는 것은 켈리와 같았는데 그다음부터 달랐다. 노인은 가슴께를 안쪽으로 오게 접었다. 은실 문장이 천 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개킨 것을 켈리의 자루에 넣고 매듭을 지었다. 매듭은 켈리의 것보다 단단했다.
"산은 옷을 사지 않소."
"…넘기지 않으십니까."
오벨이 물었다. 법률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확인하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누구한테 넘기오. 넘기라는 계약서가 없소."
노인이 그렇게만 말했다. 그러고는 일행을 하나씩 세었다. 손가락으로 세지 않고 턱으로 세었다. 여섯에서 멈췄다.
"여섯이오?"
"여섯입니다."
"0을 여섯으로 나눠도—"
니카가 말하다가 오벨에게 소매를 잡혔다.
"손이 여섯이면 됐소."
노인이 말했다.
"보리가 누웠는데 벨 손이 없소. 이 길로 내려가서 셋째 층 끝 집이오. 잉가네. 계약서는 그 집에서 쓰시오."
"할아버지, 잉가 아줌마네 형들 아직 안 왔잖아."
아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노인이 짧게 말했다. 아이는 그 뒤를 묻지 않았다. 횃불을 고쳐 쥐고 앞장섰다. 노인이 그 등에 대고 한마디를 더 했다.
"날 밝으면 산채에 다녀와라. 벨류엔 옷이 들어왔다고."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이 계단밭 길로 내려서는 동안 노인은 돌 위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산마루 쪽 어둠을 보고 있었다.
계단밭 사이로 내려가는 길에서 바르트가 린 옆으로 갔다. 숨이 찼지만 할 말이 있는 걸음이었다.
"값만 내면 된다고 했지."
"손으로 내는 줄은 몰랐죠."
린이 말했다. 바르트가 웃다가 옆구리를 눌렀다.
그 뒤에서 유안이 니카 옆으로 갔다. 망루에서부터 묻고 싶은 것을 참고 있던 걸음이었다.
"찾으러 온다는 것이 누구입니까."
"벨류엔이요. 그리고 자플랜."
"둘 다 큰 나라 아닙니까."
"제일 큰 나라 둘이요."
유안이 앞서 걷는 켈리의 등을 보았다. 아침에 땅에 그린 동그라미를 다시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그 동그라미는 사람 하나가 누울 만한 크기였다. 그 안에 넣어야 할 것이 사람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을 유안은 그제야 셈하기 시작했다. 셈을 끝까지 하지는 않았다.
"…동행 합의는 없었다고 하셨지요."
"반대도 없었다고 하셨잖아요."
유안이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한 말이었다. 횃불이 앞에서 흔들렸고 계단밭 길은 어두웠다.

잉가의 집은 돌로 쌓은 낮은 집이었다. 지붕 처마 밑에 나무 갈고리가 줄지어 박혀 있었고 갈고리마다 빈 새끼줄이 걸려 있었다. 다 벤 보리를 말려 거는 자리였다. 지금은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았다.
문을 연 사람은 어깨가 넓은 여자였다. 마흔은 넘어 보였다. 회색이 섞인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등 뒤로 넘겼고, 소매를 걷은 팔뚝이 햇볕에 그을려 손등과 같은 색이었다. 손가락 마디가 굵었다. 아이가 노인의 말을 전하자 여자가 일행을 문간에서부터 세었다. 노인과 같은 방식이었다. 턱으로 셌다.
"여섯."
"여섯입니다."
"들어와. 계약서부터."
등잔 하나가 탁자 위에 놓였다. 오벨이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펜을 꺼냈다.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러고는 쓰기 시작했는데, 쓰는 동안 오벨의 등이 조금씩 펴졌다. 켈리는 오벨이 무언가를 쓸 때 그렇게 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등이 펴지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다 쓴 종이를 오벨이 잉가 쪽으로 돌려놓았다. 잉가가 종이를 등잔 가까이 당겼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소리 내어 읽었다. 손가락 하나를 글자 밑에 대고 한 줄씩 짚어 가며 읽었다. 빠르지 않았다.
"제1조. 을은 갑의 보리 수확 작업에 성실히 종사한다."
손가락이 멈췄다.
"성실히가 뭐야."
"…열심히 한다는 뜻입니다."
"열심히 해서 이삭을 다 떨구면."
오벨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잉가가 손가락으로 그 낱말을 짚었다.
"빼. 이삭을 떨구지 않게 벤다, 로."
오벨이 고쳐 적었다. 잉가가 다음 줄로 갔다. 기간은 수확이 끝날 때까지였다. 잉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의 조항에서 손가락이 다시 멈췄다.
"갑은 을에게 하루 두 끼를 제공한다."
"세 끼."
"…그것은 갑에게 불리한 수정입니다."
"두 끼 먹은 손은 오후에 낫을 놔. 그게 나한테 불리해."
오벨이 「두」에 줄을 긋고 「세」라고 적었다. 적고 나서 펜을 든 채로 잉가를 보았다. 무언가를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잉가는 이미 다음 줄을 읽고 있었다.
"제4조. 을의 일원 가운데 벨류엔 출신이 있음을 갑은 고지받았다."
잉가의 손가락이 거기서 멈췄다. 이번에는 오래 멈췄다. 다들 그 손가락을 보았다. 켈리도 보았다.
"이건 왜 적었어."
"알고 서명하셔야 합니다."
오벨이 말했다. 거기에는 설명이 붙지 않았다. 잉가가 고개를 들어 켈리를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종이를 보았다.
"…알았어."
손가락이 다음 줄로 넘어갔다.
켈리는 그 한 줄을 보았다. 마법청의 종이에서 벨류엔은 켈리의 전부였다. 번호가 벨류엔의 것이었고 무게가 벨류엔의 것이었고 출격 날짜가 벨류엔의 것이었다. 이 종이에서 벨류엔은 제4조였다. 한 줄이었다. 그 아래에 제5조가 있었다. 제5조는 낫을 부러뜨리면 어떻게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잉가는 마지막 줄까지 읽었다. 서명란까지 읽었다. 서명란에 적힌 「갑」과 「을」까지 소리 내어 읽고 나서야 손가락을 뗐다.
"…끝까지 읽으셨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끝까지 안 읽고 서명하는 사람도 있어?"
"대부분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산에서 못 살아."
잉가가 펜을 받아 맨 아래에 이름을 적었다. 글씨가 크고 느렸다.
"우리 애들도 계약서를 먼저 읽고 갔어. 계약서가 먼저야. 고용주 얼굴보다."
"애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키엔이라는 데 갔어."
잉가가 펜을 오벨에게 돌려주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났다는 말이 먼저 올라왔어. 사람은 아직이고."
그 말 뒤에는 아무것도 붙지 않았다. 잉가는 일어나 화덕 쪽으로 갔다.
을의 서명은 여섯이었다. 오벨이 먼저 적었고 바르트와 니카와 린이 적었다. 유안은 자기 글자로 한 번 적고 그 옆에 이 대륙 글자로 한 번 더 적었다. 켈리는 맨 마지막이었다. 펜을 쥐고 종이 위에 한참 있다가 적었다. 「켈리」. 다른 이름들보다 컸다. 받침이 아래 칸까지 내려갔다. 오벨이 그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켈리가 남의 종이에 자기 손으로 이름을 적은 것은 처음이었다. 마법청의 종이에는 번호가 적혔고, 번호는 서기가 적었다.
화덕에서 보리죽이 왔다. 그릇이 여섯이었다. 켈리는 받자마자 먹었다. 뜨거웠는데 그대로 먹었다. 바닥이 보일 무렵 켈리의 왼손이 그릇을 놓고 품 쪽으로 갔다. 그릇 안에는 아직 한 숟가락이 남아 있었다.
잉가가 그 손을 보았다.
"내일도 있어."
켈리의 손이 멈췄다.
"세 끼라고 적었어."
켈리가 손을 내렸다. 남은 한 숟가락을 먹었다. 그릇을 내려놓고 나서 탁자 위의 계약서를 한 번 보았다. 「세」 자가 거기 있었다. 오벨이 줄을 긋고 고쳐 쓴 자리였다.

7월 3일 아침부터 보리를 벴다.
잉가는 낫을 여섯 자루 내놓고 한 번씩 시범을 보였다. 왼손으로 한 줌을 모아 쥐고 오른손의 낫을 밑동에 대고 당긴다. 그게 전부였다. 그게 전부인 일을 여섯이 저마다 다르게 했다.
켈리가 당겼다. 살살 당겼다. 보리가 밑동째 뽑혀 나왔다. 뿌리에 흙이 한 덩이 매달려 있었다.
"뿌리는 내년 거야."
잉가가 말했다. 켈리는 더 살살 당겼다. 이번에는 흙이 두 덩이였다.
유안은 밭머리의 허수아비에 주홍 종이를 붙이고 이름을 외쳤다. 「들판을 지키는 장수」였다. 비장했다. 한나절 뒤 허수아비의 두 팔에는 참새가 열네 마리 앉아 있었다. 줄지어 앉아 있었다. 유안이 종이를 떼어 보았다.
"…획이 하나 빗나갔습니다."
니카는 밭 가장자리 바위 그늘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날씨를 보는 것이 자기 일이라고 했다. 오늘 비 올 확률은 2할이었다.
"날씨도 계약서에 있어?"
잉가가 물었다.
"없습니다."
오벨이 대답했다. 잉가가 니카의 손에 낫을 쥐여 주었다.
바르트는 허리를 굽힐 수 없었다. 옆구리가 당겼다. 잉가가 그것을 보더니 한마디로 일을 정했다.
"허리 못 굽히는 사람은 세어."
바르트는 단을 셌다. 셀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세는 사람이었으므로 그것은 벌이 아니었다.
린은 말없이 벴다. 맨발이 이랑 사이의 흙을 읽었고 낫은 한 번도 헛돌지 않았다. 로엔의 밭에서 물길 일을 할 때 익힌 손이었다. 잉가가 린의 이랑을 한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잉가가 끄덕인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해가 졌을 때 벤 것은 한 층의 절반이었다. 잉가의 밭은 일곱 층이었다. 오벨이 그 셈을 수첩에 적었다. 적고 나서 오래 보았다.
그날 저녁 보리죽을 먹고 나서 오벨이 잉가에게 청했다. 할름에서 사람도 짐승도 아닌 작은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잉가는 왜 묻느냐고 묻지 않았다. 산사람은 남의 셈을 묻지 않았다. 오벨은 대답을 기다리며 수첩을 뒤쪽부터 폈다. 켈리는 그 장들을 처음 보았다. 동료들의 이름이 적힌 앞장과 달리 뒤쪽은 글씨가 잘았고, 줄마다 앞머리에 지명과 날짜가 붙어 있었다. 줄은 많았다. 줄 끝에 붙은 낱말은 거의 같았다. 놓침. 잉가가 화덕 앞에 앉아 이야기를 했다.
옛날 할름에 일손이 없던 해가 있었다. 사내들이 다 산 아래로 내려가고 보리는 누웠는데 벨 사람이 없었다. 그해 달밤에 이삭 할미가 내려왔다. 하룻밤에 한 층을 베어 단으로 묶어 놓고 갔다. 할미는 키가 문설주만 했고 낫은 초승달처럼 굽었다. 아침에 첫 단 하나를 밭머리에 두면 그것을 가져갔다.
오벨이 받아 적었다. 받아 적는 방식이 이야기를 듣는 방식이 아니었다.
"키가 문설주만 했다는 것은 정확한 치수입니까."
"그렇다고들 해."
"누가 그렇다고 했습니까."
"우리 할머니가."
"할머니께서는 직접 보셨습니까."
"…못 봤어. 할머니의 할머니가 봤다고 했어."
"전문의 전문이군요."
"이야기가 다 그렇지."
오벨이 그 이야기를 받아 적는 동안 잉가에게 되물은 것이 몇 번이었는지는, 그의 체면을 위해 적지 않기로 한다. 잉가는 세었다.
이야기 끝에 잉가가 한마디를 붙였다. 사내들이 다 산 아래로 내려갔다는 대목에서 잠깐 쉬었다가 한 말이었다.
"올해가 그 해야."
오벨의 펜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수첩을 덮고 가방에서 새 종이를 꺼냈다. 어제 노동 계약서를 쓴 것과 같은 종이였고 같은 펜이었다. 맨 위에 적는 것도 같았다. 갑은 이삭 할미, 을은 오벨 리스트. 제1조, 갑은 을이 부르면 온다. 제2조, 갑은 을이 시킨 일을 한다. 제3조, 보리를 벨 때는 이삭을 떨구지 않게 벤다. 마지막 줄은 어제 잉가에게 배운 것이었다. 대가의 칸에서 오벨의 펜이 멈췄다. 이야기에서 할미가 받는 것은 첫 단이었다. 첫 단은 잉가의 것이었다. 오벨의 것이 아니었다. 오벨이 가진 것은 가방과 종이와 수첩이었다. 오벨은 그 칸을 비워 둔 채 서명란으로 내려가 을의 자리에 이름을 적었다. 갑의 자리는 비었다.
잉가가 그 종이를 등잔 쪽으로 당겼다. 노동 계약서를 읽을 때처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읽었다. 비어 있는 갑의 자리까지 읽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할미가 글을 알아?"
"모를 겁니다."
"그럼 이건 누가 읽어."
"제가 읽어 드립니다. 끝까지."
"글 모르는 것한테 조항은 왜 적어."
"알고 서명하셔야 합니다."
어젯밤 제4조에 붙었던 말과 같았다. 잉가가 오벨을 보았다. 이번에는 종이가 아니라 오벨을 오래 보았다.
"…그렇게 읽어 줘서 서명한 게 몇이야."
오벨이 수첩 뒤쪽을 한 번 보았다. 볼 필요가 없는 것을 보는 눈이었다.
"제 손으로 붙잡은 것은 아직 없습니다."
잉가는 더 묻지 않았다. 종이를 오벨 쪽으로 돌려놓고 화덕의 불을 묻으러 갔다.
유안이 오벨의 어깨 너머로 그 계약서를 읽었다. 읽다가 한 글자에서 손가락이 움직였다. 허공에 무언가를 긋는 손가락이었다. 오벨이 돌아보았다.
"고칠 데가 있습니까."
유안이 손가락을 소매 안으로 거두었다.
"…없습니다."
있었다. 글자는 맞았다. 획순이 달랐다. 유안에게는 그것이 오자만큼 거슬렸다. 다만 남의 계약서를 고치는 것은 도술의 일이 아니었고, 유안은 그 획이 오벨의 글씨라고 여기기로 했다. 그렇게 여기는 데 저녁 내내 걸렸다.

7월 4일 밤 켈리는 잠이 오지 않아 마당 돌담에 앉아 있었다. 오벨이 등잔을 들고 맨 아래 층 밭머리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오벨은 밭머리 돌 위에 종이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하나는 어제 쓴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가방 맨 아래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종이가 누렇게 바랬고 접힌 자리가 닳아 보풀이 일어 있었다. 오벨이 누런 쪽을 집어 소리 내어 읽었다. 조항을 읽고 대가의 칸을 읽고 서명란까지 읽었다. 다 읽고 종이를 접은 뒤 오벨이 한 줄을 더 말했다.
"눈. 계약 제1조에 따라 모습을 드러내라."
중재소에서 오벨이 가방에 대고 낮게 말하던 것이 이것이었다. 그때 켈리가 알아들은 것은 숫자 하나뿐이었다. 맨 아래 층 보리 위, 이삭 끝에서 한 뼘쯤 떨어진 허공에 무언가가 떴다.
눈이었다. 사람 머리만 했다. 눈꺼풀이 있었고 그 둘레에 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조금 붙어 있었는데, 눈을 감싸는 데 다 쓰이고 남는 것이 없었다. 서기의 손처럼 색이 없었다. 눈동자만 색이 있어서 등잔 빛을 받아 젖은 돌처럼 빛났다. 그것이 한 번 깜빡이고 밭을 보았다.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까지 천천히 보았다. 무엇을 보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는 눈을 켈리는 처음 보았다.
"밭을 봐라. 올 것이 오면 알려라."
오벨이 말했다. 서기에게 하는 말보다 짧았다. 무엇이 올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눈이 정할 일이었다. 켈리가 돌담에서 내려와 밭머리로 갔다. 오벨은 돌아보지 않았다.
"손 말고 또 있어?"
"몇 있습니다. 물려받은 것입니다."
"누구한테."
"그 책을 판 사람한테서요."
오벨이 그렇게만 말했다. 켈리는 그 책을 알았다. 앞장이 서른 장쯤 떨어져 나간 책이었다. 산 것과 물려받은 것이 어떻게 한 사람한테서 같이 나오는지 켈리는 셈하지 못했다. 오벨이 돌 옆에 앉아 무릎에 빈 계약서를 얹고 펜을 쥐었다. 눈은 밭을 보았고 오벨은 눈을 보았다.
켈리는 돌담으로 돌아가 앉았다. 밤이 깊어지는 동안 오벨이 안경을 벗어 닦는 것을 두 번 보았다. 등잔은 그대로였는데 닦았다. 그 무렵 맨 아래 층의 보리 사이에서 무언가가 바스락거리기 시작했다. 눈은 깜빡이지 않았다. 오벨도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다만 눈이 깜빡이지 않았으므로 일어나지 않았다. 일을 맡겼으면 맡긴 쪽을 믿는 사람이었다. 소리는 밤새 그치지 않았고, 켈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깼다가 잤다가 다시 깼다.
켈리를 마지막으로 깨운 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밭 위의 빛이 한 번 꺼졌다 켜졌다. 눈이 감았던 눈꺼풀을 막 들어 올리고 있었다. 한 번이었다. 하늘이 회색으로 밝아 오고 있었고 맨 아래 층이 다 누워 있었다. 베어져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끝, 아직 서 있는 마지막 몇 줄기 사이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엄지손가락만 했다. 등이 굽었고 머리에 무언가를 썼는데 보리 껍질 같았다. 그것이 보리 한 줄기를 끌어안고 끝이 굽은 무언가로 밑동을 당겼다. 줄기가 넘어갔다. 그것이 넘어간 줄기를 끌어다 옆에 눕히고 풀잎 하나로 허리를 묶었다. 꼼꼼하게 묶었다. 그러고는 다음 줄기로 갔다.
밭머리에서 오벨이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빈 계약서를 들고 있었다. 오벨이 안경을 벗어 닦고 다시 썼다. 그러고는 밭을 보았는데 보는 자리가 조금 틀렸다. 그것은 오른쪽 끝에 있었고 오벨은 가운데를 보고 있었다.
"오른쪽 끝. 세 줄기 남았어."
켈리가 돌담에서 말했다. 오벨이 그쪽으로 걸었다. 걸음이 조심스러웠고 이랑 하나를 헛디뎠다. 끝에 이르러 오벨이 무릎을 꿇었다. 엄지만 한 것은 오벨의 무릎에서 두 뼘 떨어져 있었는데 오벨의 눈은 그보다 한 뼘 왼쪽에 가 있었다. 오벨이 계약서를 펴고 읽기 시작했다.
"갑은 이삭 할미. 을은 오벨 리스트. 제1조, 갑은 을이 부르면 온다."
그것이 줄기 하나를 묶었다.
"제2조, 갑은 을이 시킨 일을 한다."
그것이 다음 줄기로 갔다.
"제3조, 보리를 벨 때는 이삭을 떨구지 않게 벤다."
그것이 마지막 줄기를 당겼다. 오벨은 대가의 칸으로 넘어갔다. 비어 있다고 읽었다. 갑과 의논하여 정한다고 읽었다. 그런 줄이 거기 적혀 있었는지 켈리는 몰랐다. 오벨이 그 자리에서 지어 붙인 것인지도 몰랐다. 오벨이 서명란을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 줄기를 묶고 나서 그것이 고개를 들었다. 오벨 쪽이 아니었다. 켈리 쪽이었다. 켈리가 고개를 숙였다. 린에게 배운 인사였다. 숙이는 각도가 아직 서툴렀다. 그것도 숙였다. 그리고 보리 그루터기 사이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지 않았다.
"…갑, 을. 이상입니다."
오벨이 마지막 줄을 읽고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그루터기만 있었다. 오벨은 그 그루터기를 한참 보았다. 흐린 눈으로 보아도 거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오벨이 계약서를 접지 않고 밭머리로 돌아가 누런 종이 옆에 펴 놓았다. 그러고는 밭 위의 눈에게 말했다.
"이행을 확인한다. 돌아가라."
눈이 감겼고, 감긴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침에 일행이 맨 아래 층에 섰다. 층 하나가 다 베어져 있었다. 이삭은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보리는 단으로 묶여 있었다. 한 줄기씩. 줄기 하나하나가 풀잎 하나씩으로 허리를 묶인 채, 층 전체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단이긴 합니다."
오벨이 말했다.
바르트가 세기 시작했다. 유안이 반대쪽 끝에서 세기 시작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둘은 해가 산마루를 넘어올 무렵 가운데에서 만났다.
"3,412단."
"3,412단입니다."
둘의 숫자가 같았다. 둘 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얼굴이었다. 니카가 그 두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한 걸음 물러섰다.
"다시 묶을 확률은 10할이에요."
켈리가 줄기 다섯을 모아 새끼줄로 묶었다. 세게 묶었다. 줄기가 허리에서 끊어졌다. 켈리가 끊어진 단을 내려다보았다. 잉가도 내려다보았다.
"벤 건 벤 거야. 묶는 건 다시 묶으면 돼."
잉가가 말했다. 그러고는 쭈그려 앉아 그 작은 단 하나를 집었다. 손바닥 위에 놓고 오래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밭머리 돌 위에, 계약서가 펴 놓인 자리 옆에 놓았다.
"그건 계약에 없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이건 계약이 아니야. 인사야."
린이 잉가를 보았다. 린의 얼굴이 조금 붉었다.
오벨이 돌 위의 계약서를 집었다. 종이를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이 가져갔다.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갑의 자리는 새벽에 펴 놓은 그대로였다. 대신 위쪽, 오벨이 비워 둔 대가의 칸에 낫 모양의 자국이 하나 찍혀 있었다. 손톱보다 작았다.
"…서명란 밖의 자국은 효력이 없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바르트가 오벨의 어깨 너머로 종이를 넘겨다보았다. 비워 둔 칸에 자국이 있었고, 이야기에서 할미가 받는 것은 첫 단이었고, 그 첫 단을 방금 잉가가 돌 위에 놓았다. 바르트는 그 셈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오벨이 수첩 뒤쪽을 펴고 적었다. 글씨가 여느 때보다 컸다. 할름. 이삭 할미. 이야기와 다름. 키, 문설주(전문의 전문). 실측, 엄지(켈리). 그리고 줄 끝에 늘 적던 낱말을 적었다. 놓침.
수첩을 덮고 오벨이 고개를 들었다. 일행이 선 쪽이었다. 오벨의 눈이 얼굴들 위를 한 번 지나가다가 맨 끝에서 멈췄다. 보는 시간이 조금 길었다.
"…실례지만, 거기 계신 분이."
"잉가야."
"압니다. 목소리로 압니다."
오벨이 안경을 벗어 닦았다. 다시 썼다. 다시 보았다. 니카가 그 얼굴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안경이 문제일 확률은 0할이에요."
"압니다."
"얼마나 가요?"
켈리가 물었다. 오벨이 밭 위의 허공을 보았다. 간밤에 눈이 떠 있던 자리였다.
"본 만큼입니다. 밤새 봤으니 해 질 녘까지입니다."
잉가가 오벨의 손에 새끼줄을 쥐여 주었다.
"그럼 묶어. 묶는 건 손이 해."

그날은 작은 단들을 큰 단으로 다시 묶었다. 켈리는 묶는 일에서 빠졌다. 대신 둘째 층을 벴다. 뿌리째 뽑히는 것이 하나 걸러 하나로 줄었다.
한낮에 켈리는 린이 묶어 놓은 단에서 붉은 것을 보았다. 짚에 묻어 있었다. 이삭 색이 아니었다. 켈리가 낫을 내려놓고 린에게 갔다.
"손 줘 봐."
"왜."
켈리가 린의 오른손을 잡아 뒤집었다. 손바닥 가운데에 칼자루 모양이 남아 있었다. 개울가 바위 밑에서 달군 칼을 쥐었던 자리였다. 새살이 올라와 분홍색이었고, 그 가장자리가 짚에 베여 피가 배어 있었다. 깊지는 않았다. 켈리는 손등을 보았다. 손가락 사이를 보았다. 하나씩 벌려 보았다.
"뭐 해?"
"봐."
"안 아파."
"그러니까 봐."
린이 입을 다물었다. 새살은 아직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살이었다. 린도 그것을 알았다. 다만 알고 있는 것과 손을 뒤집어 보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켈리는 그 손을 놓지 않고 끝까지 보았다. 구덩이 턱에서 바르트가 켈리의 손을 그렇게 보았다. 손바닥을 보고 손등을 보고 손가락 사이를 보았다. 그때 켈리는 바르트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지금은 알았다. 손이 말해 주지 않는 것은 눈이 보아야 했다.
"…할머니는 이건 안 가르쳐 줬는데."
린이 말했다.
"나도 안 배웠어. 봤어."
오벨이 다가와 천을 꺼냈다. 삼단으로 접었다. 접는 손가락이 천 끝을 두 번 더듬었다.
해 질 녘에 오벨의 눈이 걷혔다. 오벨이 맨 먼저 본 것은 밭머리 돌이었다. 돌 위의 작은 단이 없었다.

밤에 켈리가 노트를 달라고 했다.
맨 뒷장에 줄이 두 개 늘었다. 하나는 「안개」였고 하나는 「할름」이었다. 「안개」 줄의 고슈 칸에 켈리가 적었다. 빵 먹음. 가까이.
그러고는 칸을 하나 더 그었다. 열째 칸 「인부」 오른쪽이었다. 칸 머리에 연필 끝이 갔다. 켈리가 적었다. 「부적」.
"…유안입니다."
유안이 켈리 어깨 너머에서 말했다.
"부적."
유안이 그 칸을 보았다. 칸 머리의 두 글자를 보고, 다른 열 개의 칸 머리를 보았다. 바르트와 니카와 린과 오벨과 고슈의 이름이 있었고, 지팡이와 방망이와 외는 이와 인부가 있었다. 유안의 얼굴이 펴졌다. 무언가에 이름이 오른 사람의 얼굴이었다.
"제 칸입니까."
"응."
켈리가 「안개」 줄의 그 칸에 적었다. 붓. 끈. 여섯 돈.
유안이 그것을 읽었다. 한 번 읽고 다른 칸들을 읽었다. 니카 칸에는 열과 찬물이 있었고, 린 칸에는 손이 있었고, 바르트 칸에는 옆구리가 있었다.
"…이 칸은 무엇을 적는 칸입니까."
"낸 거요."
니카가 말했다.
"잃은 거. 제 칸이랑 같은 걸 적는 칸이에요."
유안이 한참 그 칸을 보았다.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다 돌아왔을 때 유안이 말했다.
"…그래도 칸입니다."
「할름」 줄에는 몇 개만 적혔다. 린 칸에 「손 베임. 모름.」 오벨 칸에 「눈. 해 질 녘까지.」
"해 질 녘에 돌아왔으니 잃은 것이 아닙니다."
오벨이 말했다.
"그럼 빼?"
오벨이 그 칸을 오래 보았다. 이제는 잘 보이는 칸이었다.
"…두십시오."
고슈 칸에는 「망루 위 바위」라고 적었다. 해 질 녘에 거기 앉아 있는 회색을 켈리가 보았다. 망루보다 높은 자리였고 밭에서는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다만 하루 종일 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7월 7일 해 질 녘, 잉가가 일곱째 층에서 허리를 폈다.
펴고 나서 다시 굽히지 않았다. 낫을 쥔 채 아래를 보고 있었다. 켈리가 그 눈을 따라갔다. 계단밭 아래로 골짜기가 있었고 골짜기 바닥을 따라 길이 하나 났다. 그 길로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느렸다. 넷씩 짝을 지어 무언가를 메고 있었다.
들것이었다.
켈리가 셌다. 셀 수 있는 것은 세었다. 하나, 둘. 버드나무 가지를 엮은 것이었다. 멘 사람들의 어깨가 하나같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열, 열하나. 앞사람의 걸음과 뒷사람의 걸음이 맞지 않으면 들것이 흔들렸고,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넷이 같은 걸음으로 걸어야 했다. 열여덟, 열아홉.
열아홉이었다.
들것들은 골짜기 길을 따라 산 안쪽으로 지나갔다. 갈림길에서 하나가 줄을 빠져나왔다. 할름 쪽 계단밭 길로 꺾어 올라왔다. 네 사람이 메고 있었다. 둘은 얼굴이 닮았다. 하나는 열일곱쯤 된 소년이었다.
잉가는 뛰지 않았다. 낫을 쥔 채 돌담에 서 있었다. 들것이 셋째 층을 지나 잉가의 밭 옆까지 올라왔을 때에야 잉가가 입을 열었다.
"보른. 케이."
닮은 둘이 고개를 들었다. 둘 다 살아 있었다. 잉가는 두 아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들것을 보았다. 들것 위의 사람은 천에 덮여 있었고 천 밖으로 나온 손이 아랫집의 큰아들 손이었다. 잉가는 그 손을 알았다.
아랫집 문이 열렸다. 마을 사람들이 돌담 사이로 나왔다. 들것이 아랫집 문 앞에 내려졌다. 아무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들것 다리에는 흙이 두껍게 묻어 있었다. 키엔에서 여기까지 아흐레를 메고 온 흙이었다.
열일곱쯤 된 소년이 우물로 갔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손을 씻었다. 오래 씻었다. 아랫집 노인이 그 등에 대고 물었다.
"누가 쳤냐."
소년이 손을 씻다가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고용주가."
켈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고용주가 누구인지, 누구를 쳤는지 몰랐다. 다만 들것을 알았다. 막사에서 돌파형이 돌아오지 않으면 장부에 한 줄이 적혔다. 소모 1. 메고 오는 사람은 없었다. 메고 올 것이 남지 않는 일이었다. 여기서는 아흐레를 메고 왔다. 켈리는 그 열아홉을 오래 보았다. 다 지나가서 골짜기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까지 보았다.
그날 저녁 잉가의 탁자에 그릇이 여덟 놓였다. 켈리가 셌다.
보른이 문간에서 낯선 여섯을 보았다. 맨발의 여자애와 흰 옷의 사내와 안경 쓴 사내와 옆구리를 짚은 덩치와 주사위를 쥔 사내와, 막대기를 벽에 기대 놓은 마른 여자애였다.
"누구야."
"계약서 있어."
잉가가 말했다. 보른이 고개를 끄덕이고 앉았다. 케이도 앉았다. 소개는 그것으로 끝났다. 오벨은 그 소개가 자기가 아는 어떤 소개보다 짧고 정확하다는 것을 알았다.
보른과 케이는 말없이 먹었다. 잉가도 말없이 먹었다. 오벨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았다. 계약서에 그 자리에 맞는 조항이 없었다.

이틀 뒤 밤, 켈리는 잠이 오지 않아 마당 돌담에 앉아 있었다.
망루 위 바위에 회색이 있었다. 낮에는 밭을 내려다보던 늑대였다. 그것이 일어서 있었다. 밭 쪽이 아니었다. 귀가 산마루 쪽을 향해 서 있었다.
할름의 개는 밤에 짖지 않았다. 켈리는 할름에서 이레 밤을 자며 그것을 알았다.
개 짖는 소리가 산마루를 넘어왔다. 그 너머는 켈리가 지나온 길이었다.

 

돌아앉은 산


개 짖는 소리는 밤새 산마루 너머에 있었다. 넘어오지는 않았다. 새벽녘에 한 번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고, 해가 산마루에 걸릴 무렵에 그쳤다. 그친 것이 짖던 것보다 나빴다. 켈리는 그것을 알았다. 짖는 개는 냄새를 잃은 개였다. 조용한 개는 냄새를 따라 걷는 개였다.
7월 10일 아침, 잉가가 낫을 나눠 주며 말했다.
"오늘은 위쪽 밭에 가지 마."
켈리가 낫을 받지 않았다.
"보고 올게."
잉가가 켈리를 보았다. 무엇을 보러 가는지 묻지 않았다.
"보기만 해."
켈리가 지팡이를 들고 나섰다. 나서니 뒤에서 발소리가 다섯 따라왔다. 켈리가 돌아보았다.
"쇠틀이 오면 내가 봐야 해."
바르트가 말했다.
"켈리 씨 혼자 갈 확률은 0이에요. 셈할 것도 없어요."
니카가 말했다.
"증인이 필요합니다."
오벨이 말했다. 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따라왔다. 맨 뒤에서 유안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동행 합의는—"
"없었어요."
니카가 말했다. 유안이 입을 다물고 따라왔다.
망루는 계단밭 맨 위, 산마루에서 내려오는 길이 비탈에 닿는 자리에 서 있었다. 일행은 망루 옆 비탈의 위층 밭으로 올라가 돌담 뒤에 엎드렸다. 돌담은 무릎 높이였다. 무릎 높이의 담 뒤에 숨으려면 엎드려야 했다. 켈리는 지팡이를 몸 옆에 붙이고 납작하게 엎드렸다. 린도 엎드렸다. 니카와 오벨도 엎드렸다. 오벨은 가방을 배 밑에 깔았다.
바르트는 엎드리지 못했다. 엎드리려면 옆구리가 땅에 닿아야 했다. 왼쪽으로 누우면 파인 자리가 눌렸고 오른쪽으로 누우면 덩치가 담 위로 솟았다. 바르트는 결국 등을 대고 누웠다. 하늘을 보고 누운 사람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지나가면 말해 주게."
유안은 엎드렸다. 엎드렸는데 정수리 위로 높이 묶은 머리가 담 위로 한 뼘 솟아 있었다. 니카가 손을 뻗어 그 머리를 눌렀다. 유안이 눌린 채로 말했다.
"이 머리는 풀 수 없습니다. 도술사의 예법입니다."
"그럼 그 예법을 낮추세요."
유안이 턱을 흙에 댔다. 머리가 반 뼘으로 줄었다.
망루 앞에는 사람이 둘이었다. 다리를 뻗은 노인이 문 옆 돌 위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 창을 든 소년이 서 있었다. 켈리는 그 소년을 알았다. 사흘 전 들것 앞쪽을 메고 올라와 우물가에서 손을 오래 씻던 소년이었다. 이름은 레크라고 잉가가 일러 주었다. 지난밤 개가 짖자 망루 노인이 손자를 보내 레크를 깨웠다. 레크는 열일곱이었고 첫 계약에서 돌아온 지 사흘째였다.
해가 산마루를 다 넘었을 때 길 위쪽에서 개가 먼저 보였다.
넷이었다. 앞의 둘은 코를 땅에 박고 걸었고 뒤의 둘은 꼬리를 말고 그 뒤를 따랐다. 그 뒤로 쇠뇌를 멘 사람 넷, 회색 긴 외투 하나. 그리고 쇠틀이 왔다. 쉭. 쉭. 산길에서도 쉭과 쉭 사이는 숨 둘이었다. 맨 뒤에 짐말 한 필이 따라왔는데 등에 둥근 통이 넷 매달려 있었다. 쇠틀이 등에 진 통과 같은 모양이었다. 걷는 것이 먹는 것이었다. 산을 넘으려면 먹을 것을 따로 지고 와야 했다.
"…무릎만 새것이야."
바르트가 등을 대고 누운 채로 말했다. 보이지 않을 텐데 말했다. 쉭 소리만 듣고 하는 말이었다. 켈리는 담 너머로 그 무릎을 보았다. 쇠틀 전체가 거무스름한데 무릎의 반원 쇠판 하나만 하얗게 번쩍였다.
"어떻게 알아."
"소리가 달라. 새 쇠는 아직 덜 맞물려서 끼익거려."
쇠틀이 망루 앞에서 멈췄다. 개들도 멈췄다. 레크가 창을 세웠다. 창끝이 회색 외투의 가슴께에 있었다. 들어 올린 것도 아니고 겨눈 것도 아니었다. 거기 세워져 있었다.
"계약서."
레크가 말했다.
회색 외투가 레크를 내려다보았다. 키 차이가 한 뼘쯤 났다. 그는 레크를 보고, 레크 뒤의 노인을 보고, 노인 뒤의 돌탑을 보았다. 돌탑에는 깃발이 없었다. 자기들의 천막처럼.
"우리는 짐승을 쫓고 있습니다."
"짐승은 계약서 없이 지나가도 돼요."
레크가 말했다.
"사람은 안 돼요."
회색 외투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때 개 두 마리가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꼬리를 말고 있던 둘이었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망루 위를 보았다. 망루 위쪽, 비탈이 바위로 바뀌는 자리에 회색이 앉아 있었다. 늑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개들을 보고 있었다. 꼬리를 만 두 마리가 뒷걸음질을 쳤다. 쇠뇌병 하나가 끈을 당겼는데 개들이 끈을 끌고 쇠틀 뒤로 숨었다.
"그 늑대다."
쇠뇌병이 말했다.
"계곡에서 개를 데려간 그놈입니다."
회색 외투가 바위 위를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레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짐승은 지나가도 된다고 했습니까?"
"그래요."
"저 짐승도."
"산의 짐승이에요. 우리 계약서에 없어요."
켈리 옆에서 린이 입을 손으로 막았다. 웃음을 막는 손이었다. 담 너머의 누구도 그것을 듣지 못했다.
회색 외투가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동전이 부딪는 소리가 났다. 유안이 그 소리에 고개를 들려다 니카에게 다시 눌렸다.
"통행료로 치겠습니다."
"적지 않은 돈은 받지 않아요."
"그럼 적으십시오."
"계약서는 산채에서 써요. 산군 앞에서."
레크가 말했다. 외워 둔 말을 하는 목소리였다. 아마 그 어머니가 세 번 말해 준 것일 터였다.
"고용주 이름을 적고, 어느 나라 누구인지 적고, 무엇을 데려가는지 적어요. 그럼 산군이 정해요."
회색 외투의 손이 외투 앞섶으로 갔다. 가슴께였다. 거기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손이 그 위에 잠깐 얹혔다가 내려왔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용주 이름을 말하지 않았고 나라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
켈리는 바르트의 말을 떠올렸다. 기록에 없는 사람들은 계약서를 못 써. 담 너머에서 지금 그 말이 그대로 일어나고 있었다. 저 사람은 이름을 적을 수 없었다. 적으면 기록이 되었다.
쇠틀에서 쉭 소리가 크게 났다.
쇠틀이 한 걸음 나섰다. 회색 외투가 시킨 것이 아니었다. 회색 외투도 놀라 돌아보았다. 레크의 창끝이 쇠틀 쪽으로 돌았다. 이번에는 겨누었다. 열일곱 살의 팔이 창을 받치고 있었고 그 팔이 떨렸다. 쇠틀은 창을 보았다. 그러고는 쇠손을 뻗어 망루 옆 돌담에서 돌 하나를 뽑았다. 사람 머리만 한 돌이었다. 쇠손가락 다섯이 돌을 감싸 쥐었다. 손가락이 마디마다 따로 굽었다. 사람 손이 돌을 쥐는 모양 그대로였다.
노인이 일어섰다.
다리 하나가 굽혀지지 않았으므로 노인은 일어서는 데 오래 걸렸다. 지팡이를 짚고, 굽혀지지 않는 다리를 끌어당기고, 몸을 세웠다. 그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쇠틀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돌은 우리 할아버지가 놓은 거요."
노인이 말했다. 화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알려 주는 목소리였다.
회색 외투가 쇠틀을 보았다.
"놓아라."
쇠틀이 돌을 내렸다.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로 넣었다. 돌담의 빈자리로 돌을 가져가 대 보았다. 맞지 않았다. 쇠손이 돌을 조금 돌렸다. 손가락 다섯이 돌의 모서리를 하나씩 더듬었다. 엄지가 한 모서리를 밀고 검지가 다른 모서리를 당겼다. 돌이 빈자리에 들어갔다. 쇠손가락 끝이 그 돌을 한 번 눌러 자리를 잡았다. 처음 놓인 그대로였다.
노인이 그 돌을 내려다보았다.
"…잘 놓는군."
담 뒤에서 바르트가 하늘을 보고 누운 채로 낮게 말했다.
"저건 원래 돌 나르는 거야."
켈리가 돌아보았다. 바르트는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 보지 않고도 아는 얼굴이었다.
"카르소 공방에서 그렇게 만들었어. 사람이 입고 돌을 들라고. 입으면 사람 넷이 들 걸 혼자 들어. 내가 정제장에 있을 때는 그걸로 통을 날랐어."
"입어?"
"입어. 저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어. 사람이 팔을 들면 쇠팔이 따라 들고."
켈리가 담 너머를 보았다. 그때 쇠틀의 가슴에서 철컥 소리가 났다. 빗장이 벗겨지는 소리였다. 가슴판이 문처럼 옆으로 열렸다.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젊은 남자였다. 땀에 젖어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 그가 쇠팔에서 제 팔을 뽑았다. 장갑에서 손을 빼는 것 같았다. 쇠다리에서 제 다리를 하나씩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쇠틀 앞에 내려섰다. 쇠틀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릎은 펴진 채 잠겨 있었고 두 팔은 늘어져 있었다. 가슴이 열린 채로, 안이 빈 채로, 사람 모양으로 서 있었다.
젊은 남자가 짐말의 물통을 받아 마셨다. 오래 마셨다. 7월의 산길을 쇠 안에 들어앉아 넘어온 사람이었다. 다 마시고 나서 그는 망루 옆 돌담을 보았다. 방금 쇠손으로 돌을 넣은 자리였다. 그 얼굴이 무엇인지 켈리는 알 수 없었다. 젊었다. 그 눈이 개울 건너편 등불 아래 좁은 틈으로 보이던 눈인지도 알 수 없었다.
"가슴판은 왜 있어."
켈리가 물었다. 목소리가 작았다.
"위에서 떨어지는 거 막으라고. 돌이나 흙. 칼 막으라고 단 게 아니야. 겉에 긁힌 자리가 있을 거야. 칼자국이 아니라 돌에 쓸린 자국."
켈리가 보았다. 바르트는 보지 않고 말했는데, 열린 가슴판 겉에 자국이 여럿 있었다. 길고 얕았고 방향이 제각각이었다. 칼이 낸 자국은 짧고 깊었다. 켈리는 그것을 알았다.
"손은."
"연장 쥐라고 만든 손이야. 손가락이 따로 놀아야 망치를 쥐었다가 끌을 쥐었다가 하지. 창은 손가락이 한데 쥐어야 하는데 저 손은 그게 안 돼. 세게 치면 마디가 벌어져."
"그럼 왜 전쟁에 써."
바르트가 대답하지 않았다.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한참 있다가 말했다.
"있으니까."
젊은 남자가 쇠틀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다리를 넣고 팔을 넣었다. 가슴판이 닫혔다. 빗장이 걸렸다. 안에서 거는 소리였다. 쉭. 쇠틀의 오른팔이 한 번 들렸다가 내려갔다. 안의 사람이 팔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보는 것이었다.
회색 외투가 레크를 다시 보았다. 그러고는 망루 옆 비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위층 밭과 돌담들이었다. 그의 눈이 켈리가 엎드린 담을 지나갔다. 지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은 것이 켈리를 더 납작하게 만들었다.
"산에서 평생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레크에게였다. 레크에게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켈리는 알았다.
"그건 계약서에 없어요."
레크가 말했다.
회색 외투가 돌아섰다. 쇠뇌병들이 개를 끌었다. 꼬리를 만 두 마리는 끌려가면서도 바위 쪽을 돌아보았다. 쇠틀이 돌아섰고 짐말이 돌아섰다. 쉭. 쉭. 숨 둘. 소리가 산마루로 올라가 그 너머로 넘어갔다.
레크가 창을 내렸다. 내리고 나서 망루 문 옆 돌에 주저앉았다. 노인 옆이었다. 레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노인이 그 손을 보았다.
"계약서가 먼저지."
노인이 말했다. 칭찬이었다. 산에서는 그렇게 칭찬했다.
담 뒤에서 니카가 유안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유안이 고개를 들고 머리를 매만졌다. 바르트는 하늘을 보고 누운 채로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지나갔어."
켈리가 말했다.
"알아. 소리로 알았어."
바르트가 일어나려다 옆구리를 붙잡았다. 린과 켈리가 양쪽에서 그 팔을 잡아당겼다.

그날 저녁 망루 노인의 손자가 잉가의 집에 왔다. 문간에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산군이 내일 보재요. 여섯 다요."
잉가가 보리죽을 젓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망루가 할 일은 했어. 다음은 산군이 할 일이야."
"자플랜이 계약서를 들고 오면."
켈리가 물었다. 잉가가 국자를 솥에 걸쳤다.
"그러니까 산군이 보자는 거야."

7월 11일, 산채는 할름보다 한참 위에 있었다. 계단밭이 끝나고 바위가 시작되는 어깨에 돌로 쌓은 집이 하나 앉아 있었다. 할름의 어느 집보다 컸으나 높지는 않았다. 바람이 세서 높이 쌓지 못한 집이었다. 바르트는 올라오는 동안 다섯 번 쉬었다.
문 위에 나무 현판이 걸려 있었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오래되어 획 사이에 이끼가 끼어 있었다. 유안이 그 앞에서 멈췄다. 고개를 들고 현판을 보았다. 오른손 검지가 허공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니카가 그 손목을 잡아 내렸다.
"…셋째 글자의 둘째 획입니다."
"새긴 지 몇 해예요."
"…백 년은 넘었습니다."
"그럼 그 획이 맞는 거예요. 백 년 동안 아무도 안 고쳤으니까."
유안이 그 셈에 대꾸하지 못했다. 손목을 잡힌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여름인데도 서늘했다. 넓은 방 한가운데에 불이 피워져 있었고 벽을 따라 나무 걸상이 놓였다. 맞은편 벽에 작은 창이 하나 있었다. 창밖으로 산들이 겹겹이 보였다. 그 창 앞에 사람이 하나 앉아 있었다. 등이 이쪽이었다.
등이 컸다. 걸상보다 넓었다. 회갈색 모피를 두른 어깨가 바위 같았고 모피를 여민 자리에 산양 뿔로 깎은 고리가 둘 달려 있었다. 머리는 하얬다. 옆얼굴로 흰 수염이 보였는데 땋아서 가슴께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 사람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일행이 들어왔는데도 돌아보지 않았다.
방 한쪽 작은 탁자에 젊은 서기가 앉아 있었다. 그가 일어나 말했다.
"산군이십니다."
린이 서기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등에는 인사를 어떻게 해요?"
"등에 하십시오."
린이 그 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나에게 배운 각도였다. 다들 따라 숙였다. 켈리도 숙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등에 대고 여섯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는데,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용건."
서기가 말했다. 오벨이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어젯밤 잉가의 등잔 아래에서 쓴 것이었다. 오벨이 읽기 시작했다.
"청원인 일동은 할름 잉가와 체결한 노동 계약 제1조 내지 제7조에 의거하여 현재 할름에 체류 중이며, 이에 체류의 계속 및 그 요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길다."
등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방이 그 목소리만큼 울렸다.
"요약하겠습니다."
오벨이 종이를 넘겼다. 요약본이 따로 있었다. 오벨이 그것을 읽었다. 그 요약본이 원문보다 몇 줄 짧았는지는 그의 명예를 위해 적지 않기로 한다.
"길다."
오벨이 종이를 내렸다. 한참 있다가 말했다.
"…머물게 해 주십시오."
"그건 짧군."
등이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의 산도 움직이지 않았다. 불이 한 번 튀었다.
"어제 자플랜이 망루까지 왔다 갔다지. 계약서 없이."
"예."
오벨이 대답했다. 등은 대답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열사흘 전에 산은 고용주한테 맞았다. 키엔이라는 데서. 계약서대로 하다가 맞았다. 열아홉이 들것에 실려 왔다."
켈리는 그 열아홉을 알았다. 셌다.
"그래도 산은 계약서를 지킨다. 계약서를 안 지키는 산은 아무도 안 산다. 아무도 안 사면 산은 겨울에 굶는다."
그렌 보르크였다. 산 아래 사람들은 그를 돌아앉은 산이라고 불렀다. 누가 찾아와도 등을 보이고 앉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일행은 그 이름을 몰랐다. 다만 켈리는 그 등을 보며 셈 하나를 했다. 얼굴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얼굴로 무엇을 보여 줄 수도 없었다. 켈리가 아는 것 가운데 얼굴로 내는 값이 많았다. 고개를 숙이는 것, 눈을 내리까는 것, 「예. 알겠습니다」를 말하기 전의 얼굴. 그 등 앞에서는 그 값이 아무 데도 닿지 않았다.
"자플랜이 계약서를 들고 오면 산은 너희를 판다."
등이 말했다.
"벨류엔이 들고 와도 판다."
"누가 먼저 들고 올 확률은—"
니카가 말하다가 멈췄다. 자기가 말을 꺼냈다는 것을 말을 꺼낸 다음에 안 얼굴이었다.
"확률은 계약서에 안 적는다."
등이 말했다. 니카가 입을 다물었다. 오벨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니카가 오벨을 노려보았다.
"산은 누구 편도 아니다."
방이 조용했다. 불이 다시 튀었다. 서기의 펜이 멈춰 있었다.
"벨류엔 옷을 자루 맨 아래 넣고 다니는 아이야."
등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도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방 안의 모두가 알았다. 망루 노인의 손자가 이 방에 와서 무엇을 말했는지도 모두가 알았다.
"너는 누구 편이냐."
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다섯 달 전이었으면 있었다. 번호가 벨류엔의 것이었고 무게가 벨류엔의 것이었다. 편이라는 말을 몰라도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지금은 번호가 회색 내의 목깃 안쪽에 개켜져 자루 맨 아래에 있었다. 벨류엔은 켈리를 찾으러 왔다. 자플랜도 왔다. 둘 다 켈리를 데려가려 했고 둘 다 켈리의 편은 아니었다. 그럼 켈리는 누구 편인가. 켈리는 옆을 보지 않았다. 옆에 다섯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 다섯이 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편이 무엇인지 켈리는 몰랐다. 서는 자리인지, 지켜 주는 쪽인지, 이름을 적는 칸인지.
오벨이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대신 말하려는 입이었다. 바르트가 오벨의 소매를 잡았다. 오벨이 입을 닫았다.
등이 오래 기다렸다. 산사람의 기다림이었다.
"답이 없으면 그것도 답이다."
그렌이 말했다.
"그전까지는 값을 내고 머물러라. 남들처럼."
서기가 펜을 움직였다. 무엇을 적는지 켈리는 볼 수 없었다. 그렌은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일행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 등이 창밖의 산을 보는 동안 서기가 문 쪽을 가리켰다. 일행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등에 대고.
문을 나서며 유안이 현판을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백 년 동안 아무도 안 고쳤으면 맞는 겁니까."
유안이 니카에게 물었다. 니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니카도 방금 그 비슷한 셈을 들었다.

그날 밤 켈리는 자루를 열었다.
잉가와 두 아들은 안채에서 잠들었고 일행은 헛간 앞 마당에 자리를 폈다. 켈리가 자루 바닥에서 개켜진 천을 꺼냈다. 망루 노인이 갠 그대로였다. 가슴께가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무릎 위에서 펼쳤다. 등잔 빛 아래 은실 문장이 드러났다. 원 하나에서 실 아홉 가닥이 뻗어 나간 모양이었다. 멀리서도 보이라고 크게 수놓은 것이었다. 집검관이 전장 저편에서도 제 마법사를 찾으라고.
켈리는 그것을 한참 보았다. 그러고는 지팡이를 끌어다 무릎 옆에 눕혔다. 손잡이 위 한 뼘 자리에 쇠 테가 감겨 있었다. 갈라진 테였다. 갈라진 틈으로 나뭇결의 금이 들여다보였다.
켈리가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고, 그 손가락을 갈라진 테로 옮겼다. 바르트를 보았다.
"이거 쓸 수 있어요?"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바르트가 문장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은이야. 쓸 수는 있어."
바르트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왜 지금이냐고도, 그래도 되겠냐고도 묻지 않았다.
켈리가 첫째 가닥의 끝을 손톱으로 들추었다. 수놓은 실은 천에 바늘땀으로 박혀 있었다. 한 땀씩 뽑아야 했다. 세게 당기면 천이 찢어지고 실이 끊어졌다. 켈리는 세게 당기는 것밖에 몰랐다. 살살은 켈리가 가장 못 하는 것이었다. 빨래터에서도, 보리밭에서도 그랬다.
켈리는 걸지 않았다. 손톱 끝으로 한 땀을 들추고, 실을 반 뼘쯤 끌어내고, 다음 땀을 들추었다. 실이 한 번 끊어졌다. 켈리는 끊어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린이 등잔을 켈리 쪽으로 옮겨 주고 그 옆에 앉았다. 니카는 주사위를 꺼냈다가 굴리지 않고 도로 넣었다. 오벨은 수첩을 펴지 않았다. 유안은 바르트 옆에 앉아 있었다. 늑대는 보이지 않았다. 마당에는 바늘땀이 하나씩 풀리는 아주 작은 소리만 있었다.
첫째 가닥이 다 나오는 데 등잔 기름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줄었다. 둘째 가닥은 조금 빨랐다. 켈리의 손톱이 땀의 방향을 익히고 있었다. 다섯째 가닥에서 다시 한 번 끊어졌다. 켈리는 손을 멈추고 숨을 한 번 쉬었다. 그러고는 끊어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했다. 아홉째 가닥의 마지막 땀이 빠졌을 때 달이 헛간 지붕을 넘어가 있었다.
켈리의 손바닥 위에 은실이 한 줌 놓였다. 엉켜 있었다. 등잔 빛을 받아 아직 번쩍였다.
무릎 위의 로브에는 원 하나가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뻗어 나가지 않는 원이었다. 그 둘레에 바늘구멍이 줄지어 있었다. 실이 있던 자리였다. 구멍만으로도 아홉 가닥이 어디로 뻗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켈리가 손바닥을 바르트에게 내밀었다.
바르트가 자루에서 천으로 싼 것을 꺼냈다. 매듭은 윗늪에서 묶은 그대로였다. 바르트가 그 매듭을 풀었다. 풀리는 데 조금 걸렸다. 손이 떨리지는 않았다. 천 안에서 저울이 나왔다. 놋쇠 접시 둘과 가는 막대, 막대 가운데의 바늘. 윗늪 이후로 저울이 천 밖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바르트가 저울을 평평한 돌 위에 세우고 수평을 맞췄다. 오래 걸렸다. 유안이 그것을 보았다. 바르트가 숨을 멈추면 유안도 숨을 멈췄다.
은실을 한쪽 접시에 올렸다. 바늘이 기울었다. 바르트가 반대쪽 접시에 작은 추를 하나씩 올렸다. 바늘이 가운데로 돌아왔다. 바르트가 눈금을 읽었다. 그러고는 켈리에게 지팡이를 달라고 했다.
갈라진 쇠 테를 벗기는 것은 쉬웠다. 이미 갈라져 있었으므로 손가락으로 벌리자 빠졌다. 바르트가 그것도 접시에 올렸다. 은만으로는 물렀다. 쇠를 섞어야 버텼다. 버티되 은이 많아야 했다. 바르트가 셈을 했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유안의 입술도 같이 움직였다. 다른 셈이었으나 같은 박자였다.
바르트가 접시에서 은실을 들어 조금씩 덜어 냈다. 덜어 낸 것을 옆에 놓고 다시 달았다. 바늘이 가운데에 섰다. 바르트가 오래 보았다. 바늘이 가운데에 서 있지 않았다. 가운데에서 아주 조금 비켜 떨고 있었다. 눈금 하나에도 못 미치는 떨림이었다.
"남아."
바르트가 말했다.
"얼마나."
"푼 아래. 저울이 못 재는 만큼."
켈리가 은실 한 가닥을 집었다.
"잘라?"
"어디를 자를지 저울이 못 알려 줘. 못 재는 데서 자르면 모자랄 수도 있어."
"모자라면."
바르트가 왼쪽 옆구리에 손을 얹었다. 대답이 그것이었다.
"남으면 붙고."
켈리가 은실을 내려놓았다.
"붙는 게 나아. 파이는 건 해 봤어."
바르트가 소매를 걷었다. 가루를 한 꼬집 집어 접시 위에 뿌렸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접시를 덮었다. 손 아래에서 무언가가 바뀌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바르트의 손등에 핏줄이 섰다가 가라앉았다. 바르트가 손을 뗐을 때 접시 위에는 은실도 쇠 테도 없었다. 흐린 회색의 덩이가 하나 있었다. 아직 말랑했다.
바르트가 그것을 지팡이의 갈라진 자리에 감았다. 금은 손가락 한 마디보다 길었다. 바르트는 금의 위와 아래를 하나씩 감았다. 감고 나서 손바닥으로 굴렸다. 굴릴수록 덩이가 가늘어져 나무를 꼭 물었다.
테가 두 줄이 되었다.
흐린 회백색이었다. 등잔을 가까이 대도 빛을 되비추지 않았다. 문장이었을 때는 멀리서도 보이라고 번쩍이던 은이었다. 이제는 가까이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바르트가 그 두 줄을 보았다. 그러고는 켈리의 무릎 위 로브로 눈을 옮겼다. 소매 끝에 흰 띠가 있었다. 두 줄이었다. 자락 끝에도 두 줄이었다. 바르트는 테를 다시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켈리는 그 눈이 어디로 갔다 왔는지 보지 못했다. 테만 보고 있었다.
바르트가 목덜미에 손을 댔다. 손이 거기서 오래 있었다.
켈리가 보았다. 바르트의 손가락 사이, 목덜미 왼쪽에 작은 것이 하나 솟아 있었다. 좁쌀만 했다. 켈리가 셌다. 목덜미와 등과 어깨와 옆구리에 있는 것들을, 폐허에서 처음 셌던 일곱에 하나씩 더해서. 아홉이었다.
바르트가 노트를 폈다. 앞쪽이었다. 열여덟째 줄은 개울가 바위 밑에서 켈리가 대신 적은 줄이었다. 다른 줄보다 두 배 크고 삐뚤었다. 바르트가 그 아래에 열아홉째 줄을 적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글씨가 작았다. 앞의 열일곱 줄과 같은 크기였다.
「7월 11일. 목덜미 왼쪽. 좁쌀. 푼 아래 남음.」
줄이 다시 푼으로 끝났다.
켈리가 노트를 받아 맨 뒷장을 폈다. 「할름」 아래에 새 줄을 긋고 왼쪽에 「산채」라고 적었다. 켈리 칸에 「실 아홉.」 지팡이 칸에 「테 둘.」 그러고는 연필을 바르트 칸으로 옮겼다. 연필이 멈추지 않았다. 「혹 1.」
바르트가 켈리의 어깨 너머로 그 칸을 보았다.
"…그래."
바르트가 말했다.
"거기가 내 칸이야."
켈리가 로브를 다시 갰다. 소매를 안으로 접고 아랫단을 둘로 접었다. 그다음은 아무렇게나 접었다. 가슴께가 안으로 가든 밖으로 가든 이제는 상관이 없었다. 자루에 넣었다. 맨 아래에 넣으려다 그만두었다. 손에 잡힌 자리에 넣었다.
등잔 빛이 닿는 가장자리에 회색이 앉아 있었다.
언제 왔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켈리가 끈을 들지 않았는데도 거기 있었다. 늑대는 지팡이를 보고 있었다. 지팡이의 두 줄은 빛을 되비추지 않았으므로, 늑대가 무엇을 보는지 켈리는 알 수 없었다.

 

두 장의 계약서


할름의 마지막 보리는 잉가가 벴다. 일곱째 층 맨 끝 이랑, 돌담 그늘에 끝까지 서 있던 한 줌이었다. 잉가는 그것을 단으로 묶지 않았다. 낫을 허리춤에 꽂고 한 줌을 쥔 채 한참 서 있다가 밭머리 돌 위에 내려놓았다. 이레 전 엄지만 한 단이 놓였던 자리였다. 아무도 까닭을 묻지 않았고 잉가도 말하지 않았다. 해가 막 산마루에 걸린 7월 12일 아침이었다. 처마 밑 나무 갈고리마다 거꾸로 매달린 보리가 바람이 지날 때마다 마른 이삭 끝을 서로 부딪쳤는데, 그 소리가 계단밭을 따라 한 층씩 번져 내려가서 마을 전체가 차례로 한 번씩 바스락거렸다. 열흘 전 일행이 처음 내려왔을 때 빈 새끼줄만 걸려 있던 갈고리들이었다.
잉가가 집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가져와 마당 돌 위에 폈다. 「두」 위에 줄이 그어지고 그 옆에 「세」가 얹힌 계약서였다. 굵은 손가락이 아래쪽으로 내려가 한 줄을 짚었다.
"제6조. 수확이 끝나면 갑은 을에게 품삯으로 보리 한 자루를 준다."
잉가가 고개를 들었다.
"끝났어."
헛간에서 무릎 높이의 자루가 나왔다. 켈리가 아가리를 묶은 새끼줄을 쥐고 들어 보았다. 모래주머니보다는 가볍고 그 밖의 무엇보다도 무거웠다. 모래주머니는 지고 달리라고 준 무게였고 이것은 먹으라고 준 무게였다. 내려놓고 나서도 켈리는 줄을 놓지 않았다.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켈리가 아는 숨길 자리는 전부 품이었는데, 이것은 품에 들어가는 크기가 아니었다.
"…이제 여섯으로 나눌 게 있네요."
니카가 말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으나 자루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하나씩 늘었다.
오벨이 계약서를 받아 접으며 이것으로 제1조부터 제7조까지 모두 이행되었다고 말했다. 법률가다운 정확한 말이었고, 말을 마친 뒤에야 오벨은 자기가 무엇을 정확히 말했는지 들었다. 계약이 끝났다. 산군은 값을 내고 머물라고 했다. 낼 값이 끝난 사람에게 남는 것은 떠날 까닭뿐이었다. 켈리가 먼저 물었다.
"그럼 나가?"
"탈곡이 남았어. 새로 써."
오벨은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무릎을 책상 삼아 새 계약서를 썼다. 처음부터 「이삭을 떨구지 않게」라고 적었고 끼니 칸에도 처음부터 「세」를 적었다. 잉가가 손가락으로 서명란의 갑과 을까지 짚어 내려가고 나서 말했다.
"…고칠 데가 없어."
오벨은 펜을 돌려받고도 한동안 일어서지 않았다. 등이 펴져 있었다. 무언가를 쓰고 있지 않은 오벨의 등이 펴진 것을 켈리는 그때 처음 보았다.
도리깨는 긴 장대 끝에 짧은 막대 하나를 가죽끈으로 매단 연장이었다. 잉가가 마당에 보리 단을 풀어 깔고 한 번 보여 주었다. 장대를 어깨 위로 들면 끝의 막대가 뒤로 한 바퀴 돌았다가 앞으로 넘어와 이삭 위에 납작하게 떨어졌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낟알이 짚에서 튀어 흩어졌다. 내리치는 것이 아니라 막대가 제 무게로 떨어지게 두는 것이라고 잉가는 말했다. 켈리는 그 말을 들었다. 들은 대로 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였다.
켈리가 장대를 들었다. 살살 들었다. 켈리가 아는 살살 가운데 가장 살살이었다. 막대가 뒤로 돌았다. 앞으로 넘어오지 않고 한 바퀴를 더 돌았다. 그리고 또 돌았다. 가죽끈이 짧게 울더니 끊어졌고, 막대는 켈리의 머리 위로 솟아 마당 돌담을 넘어 아래층 계단밭 쪽으로 사라졌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이따 주워 와."
잉가가 말했다.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르트가 옆구리를 붙잡고 돌아앉았다. 린은 웃음을 막으려고 손목의 장신구를 입에 물었다. 유안 혼자 막대가 사라진 하늘을 오래 올려다보았는데, 막대가 그리고 간 곡선이 꽤 반듯했던 모양이었다.
잉가가 헛간에서 다른 막대를 꺼내 새 끈으로 매어 주었다. 켈리는 두 번째로 장대를 들었다. 이번에는 막대가 제대로 넘어와 이삭 위에 떨어졌다. 낟알은 튀지 않았다. 짚과 낟알이 한꺼번에 주저앉았고, 막대를 들어 보니 떨어진 자리만 하얗게 부서져 있었다. 보리가 아니라 보릿가루였다.
"그건 탈곡이 아니라 방아야."
잉가가 켈리의 손에서 도리깨를 거두고 짚단 하나를 쥐여 주었다. 돌에 대고 손으로 털라는 뜻이었다. 켈리는 짚단을 쥐고 돌 앞에 섰다. 손으로 터는 것은 할 수 있었다. 쥐는 것과 치는 것뿐이었고, 켈리의 손이 열두 해 동안 해 온 것도 그 둘뿐이었다.
그때 아래층 계단밭에서 노새 우는 소리가 올라왔다. 막대가 떨어진 쪽이었다. 조금 뒤 돌담 너머로 사내 하나가 얼굴을 내밀었다. 한 손에 노새 고삐를, 다른 손에 도리깨 막대를 들고 있었다. 막대는 그의 노새 발굽 바로 앞에 떨어졌다고 했다. 사내는 화를 내지 않았다. 막대를 돌담 위에 올려놓으면서 마당 안의 사람 수를 세었다. 손가락으로도 턱으로도 세지 않았다. 눈으로만 세었고, 다 세었다는 것은 그 눈이 멈추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노새 등에는 납작한 나무 상자가 묶여 있었고 그 뒤로 귀에 펜을 꽂은 젊은 서기가 숨을 몰아쉬며 따라 올라왔다.
"타르실에서 왔습니다. 계약서를 들고."
망루 노인이 그를 막지 않은 까닭이 그 한마디에 다 들어 있었다.

중개인은 우물가 넓적한 돌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가장자리에 푸른 테를 두른 종이가 묶음으로 들어 있었다. 종이마다 귀퉁이에 인장이 먼저 와 있었다. 저울이었다. 접시 둘에 막대 하나. 켈리는 그 모양을 눈보다 발바닥으로 먼저 알아보았다. 열두 해 동안 아침마다 그 위에 올라섰던 발바닥이었다. 다만 이 저울은 종이 위에 납작하게 눌려 있었고, 아무것도 얹지 않은 채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우물가에 모인 것은 열 남짓이었다. 노인과 여자와 아이가 대부분이었고 사내는 다섯이었다. 그 다섯 가운데 셋은 닷새 전 버드나무 들것을 메고 계단밭 길을 올라온 얼굴이었다. 보른과 케이, 그리고 망루에서 내려온 레크였다. 중개인은 마흔쯤 되어 보였다. 소매에 바다 쪽 줄무늬가 있었고 그 밖에는 눈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눈에 걸리지 않는 것이 그 일에는 맞았다. 그가 조건을 읽었다. 장터에서 값을 외치는 목소리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것을 알려 주는 목소리였다. 무엇이든 팔되 흥정하지 않는 도시에서 배운 목소리였다.
"올여름은 사람이 귀합니다. 자플랜이 삽니다. 남쪽 협로 수비, 하루 한 냥 두 돈, 선금 석 냥. 벨류엔도 삽니다. 산길 아는 자, 길잡이, 하루 한 냥, 선금 두 냥."
"근무지는 어딘가."
노인 하나가 물었다.
"계약서에 적혀 있습니다. 타르실은 말로 팔지 않습니다. 종이로 팝니다."
"키엔 전보다 많네요."
케이가 말했다.
"키엔 뒤로 드란 값이 올랐습니다."
"그게 맞은 값이에요?"
중개인이 케이를 보았다. 그 물음에 매길 값은 상자 안의 어느 종이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타르실은 값이 왜 오르는지는 적지 않습니다. 오른 것만 적습니다."
마당 쪽에서 도리깨 소리가 들려왔다. 잉가는 우물가로 내려오지 않았다. 혼자 마당에 남아 장대를 들고 있었다. 탁, 그리고 쉼, 그리고 탁. 장대가 오르고 막대가 돌아 떨어지기까지의 사이가 매번 같았다. 켈리는 그 박자를 등 뒤로 들으며 보른이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보았다.
"자플랜."
탁.
서기가 상자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펜을 적셨다. 종이는 거의 다 차 있었다. 고용주와 값과 기간과 근무지는 바다가 보이는 어느 방에서 이미 적혀 왔고 인장도 거기서 찍혀 왔다. 비어 있는 칸은 이름 하나였다. 이 산까지 노새 등에 실려 올라온 것은 결국 사람 하나가 들어갈 빈칸이었다.
"선금은 아랫집으로 주세요."
"수령인은 본인이어야 합니다."
"그럼 제가 받을게요."
탁.
보른은 석 냥을 쥐고 아래쪽 길로 내려갔다. 아랫집 문은 닫혀 있었다. 보른은 두드리지 않았다. 문지방에 동전을 나란히 놓고, 바람에 구르지 않게 손바닥으로 한 번 눌러 두고, 올라왔다. 문은 그가 우물가로 돌아온 뒤에야 손바닥 하나만큼 열렸다. 손 하나가 나와 문지방을 쓸었고 문이 다시 닫혔다.
"벨류엔."
케이가 말했다.
도리깨 소리가 한 번 오지 않았다.
장대가 올라간 채 내려오지 않은 동안이었다. 숨 하나쯤의 길이였다. 그다음 탁, 하고 소리가 이어졌고 박자는 처음처럼 고르게 돌아갔다. 우물가에서 그 빈자리를 들은 사람은 켈리 말고는 없는 것 같았다. 보른은 듣지 못했거나, 들은 얼굴을 하지 않았다.
"자플랜이 두 돈 더 쳐 줍니다."
중개인이 말했다. 타르실 사람이 베풀 수 있는 친절은 대개 그런 모양이었다.
"자플랜은 싫어요. 키엔에서 맞았어요."
닷새 전 우물가에서 레크가 돌아보지 않고 한 말이 그제야 켈리에게 와서 제자리를 찾았다. 고용주가. 서기가 다른 묶음에서 종이를 꺼냈다. 같은 테였고 귀퉁이의 저울도 같았다. 형제는 한 걸음 떨어져 서서 서로의 종이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산사람은 남의 셈을 묻지 않았고, 형제도 산사람이었다.
서기가 케이의 이름을 적는 동안 켈리는 우물가 돌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가 종이를 거꾸로 내려다보았다. 거꾸로 읽는 것은 익숙했다. 저울 위에서 서기의 장부를 늘 그렇게 읽었다. 고용주 칸에 벨류엔이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칸에 하루 한 냥이 적혀 있었다. 켈리의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그 칸 위로 갔다가 종이에 닿기 전에 멈췄다. 마법청의 장부에는 그런 칸이 없었다. 켈리는 그 칸이 없는 장부를 열두 해 동안 거꾸로 읽었다.
유안의 검지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서기의 펜이 케이의 이름 마지막 획을 긋는 순간, 유안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같은 획을 다른 순서로 그었다. 니카가 그 손목을 잡으려 했으나 유안이 손을 등 뒤로 감추는 쪽이 빨랐다. 감춘 손가락은 등 뒤에서도 쉬지 않았다. 오벨이 그것을 보았다.
"그 글자는 맞습니다."
"글자는 맞습니다. 획순이 다릅니다."
"획순은 효력과 무관합니다."
유안이 턱으로 종이의 셋째 줄을 가리켰다.
"그럼 저 쉼표는 효력과 무관합니까."
오벨이 쉼표를 보았다. 기간을 정한 줄이었다. 쉼표가 한 낱말 뒤로 밀려 있었고, 그 한 낱말 차이로 계약이 끝나는 날을 정하는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오벨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유관합니다."
그 순간부터 둘은 동맹이었다. 오벨이 왼쪽에서, 유안이 오른쪽에서 서기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동맹은 숨 한 번을 넘기지 못했다.
"셋째 줄 쉼표 말입니다만."
"그리고 넷째 글자의 둘째 획."
"획은 무관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쉼표는 글자도 아닙니다."
"글자보다 무겁습니다."
서기의 펜이 두 얼굴 사이를 오가며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는 사이, 펜촉 끝에 맺혀 있던 먹 한 방울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방울은 셋째 줄로 떨어졌다. 정확히 쉼표 자리였다. 쉼표가 있던 곳에 쉼표보다 큰 검은 점 하나가 천천히 번졌고, 서기와 중개인과 오벨과 유안이 머리를 맞대고 그 점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쉼표입니까."
오벨이 물었다.
"이것은 획이 아닙니다."
유안이 대답했다. 대답이 아니었다.
"고쳐 쓰면 종이값은 따로 받습니다."
중개인이 상자 뚜껑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물러났다. 점은 그대로 남았다. 그것이 쉼표인지 얼룩인지는 그날 저녁까지 두 사람 사이의 미결 안건이었는데, 그 심리가 얼마나 길었는지는 두 사람의 명예를 위해 여기 적지 않기로 한다.
중개인이 상자 밑바닥에서 천 두 장을 꺼냈다. 강철빛 회색 천에 진홍 실로 수놓은 왕관이 보른에게 갔다. 남색 천에 흰 실로 수놓은 원 하나가 케이에게 갔다. 원에서 실 아홉 가닥이 뻗어 나가 있었다. 켈리는 그 가닥을 세지 않았다. 손톱 밑이 아직 얼얼했다. 케이는 천을 아무렇게나 개어 품에 넣었다. 흰 원이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상자를 닫으려던 중개인이 우물가 맞은편 돌담을 보았다. 여섯이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여섯을 한 번에 훑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라 짐을 보는 눈이었다. 무게가 얼마이고 얼마나 오래 지고 걸을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눈이었다.
"그쪽은 용병으로 팔리겠습니까?"
대답을 듣기 전에 중개인이 턱으로 우물가의 돌 하나를 가리켰다. 우물 둘레를 쌓고 남은 돌이었는데 사람 머리 둘을 붙여 놓은 만했다.
"산에서는 저걸로 봅니다. 들어서 무릎까지 올리면 한 사람 값입니다."
바르트가 먼저 일어났다. 돌 앞에 쪼그려 앉아 손바닥으로 모서리를 두드려 보고, 한쪽 끝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38킬로그램."
"그건 들라는 겁니다."
"알아. 남는 쪽으로 달면 39고."
바르트가 두 팔로 돌을 안았다. 돌이 땅에서 떨어지기 전에 바르트의 얼굴이 먼저 하얘졌다. 바르트는 돌을 안은 채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옆구리였다.
"무게는 맞혔어요."
니카가 말했다. 중개인은 장부를 펴지 않았다.
유안이 일어났다. 소매에서 주홍 종이를 꺼내 무릎 위에 펴고 붓을 놀렸는데, 획마다 숨을 멈추는 바람에 그 짧은 글자 넷을 쓰는 동안 우물가 사람들도 따라서 숨을 멈추었다. 유안이 종이를 돌에 붙이고, 이 대륙 말로 옮겨 외쳤다.
"「장사의 팔」!"
비장했다. 종이가 재로 말려 올라갔다. 돌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우물가 저쪽에서 서기의 오른팔이 번쩍 들렸다. 펜을 쥔 채였다. 서기가 놀라서 팔을 내리려 했으나 팔은 장사의 팔답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기는 무언가를 꼭 묻고 싶은 사람처럼 손을 든 채 서 있게 되었다. 유안이 재가 된 종이 귀퉁이를 주워 들여다보았다. 범위를 적어 두는 작은 글자가 있던 자리였다.
"…범위가 빗나갔습니다."
"그건 값이 안 붙어요."
니카가 말했다.
린은 일어서는 대신 무릎걸음으로 돌 앞에 가 앉았다.
"저는 사람 치는 데는 안 빌려요. 그리고 돌은 빌려도 한참 뒤에야 움직여요."
"그럼 안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근데 이미 돌 앞에 앉았잖아요."
린이 이마를 땅에 댔다. 돌 앞에 앉은 이상 인사를 하지 않고 일어서는 것은 예법에 없었고, 흙과 돌에 하는 인사는 모든 인사 가운데 가장 길었다. 린의 입에서 낮은 소리로 이름 아닌 이름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반나절이에요."
니카가 중개인에게 일러 주었다. 중개인은 이마를 땅에 댄 린을 한 번 보고, 손을 든 채 서 있는 서기를 한 번 보고 나서 오벨에게 눈을 옮겼다. 오벨이 일어서며 안경을 고쳐 썼다.
"시험 조건을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무릎까지」라 함은 드는 사람의 무릎입니까, 아니면 보는 사람의—"
"됐습니다."
오벨이 도로 앉았다. 니카는 차례가 오기도 전에 손을 들었다.
"들 확률 2할, 떨어뜨려서 발등 찧을 확률 6할이에요. 빼 주세요."
중개인의 눈이 마지막 하나에서 멈췄다. 마른 여자애가 돌담에 막대기를 기대 놓고 짚단을 쥔 채 앉아 있었다. 손에서 아직 보릿가루 냄새가 났다. 중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켈리가 짚단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켈리는 걸지 않았다. 돌 앞에 서서 무릎을 굽히고 두 손을 돌 밑에 밀어 넣었다. 열두 해 동안 아침마다 무게를 달렸고 마지막 삼 년은 무거운 것을 지고 달렸다. 무거운 것을 드는 데에는 마법이 필요하지 않았다. 몸이 그것을 알았다. 돌이 땅에서 떨어져 무릎까지 올라왔다. 우물가 어딘가에서 누가 숨을 들이켰다. 중개인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켈리는 돌을 내려놓으려 했다. 살살 내려놓으려 했다. 켈리는 무거운 것을 드는 법과 지고 달리는 법을 배웠으나 내려놓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모래주머니는 사람이 쓰러지면 저절로 내려졌다. 돌이 켈리의 손을 떠나 우물가 바닥돌 위에 떨어졌고,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쪽이 났다. 거의 같은 크기의 두 쪽이었다.
린의 인사가 잠깐 멎었다. 린이 고개를 들어 두 쪽을 보았다. 그러고는 이마를 도로 땅에 대고, 조금 더 낮은 소리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돌이 둘이 되었으므로 인사도 둘이어야 했다.
니카가 켈리를 보았다. 셈을 시작하는 숨을 들이켰다가 그 숨을 그대로 내쉬었다.
"…켈리 씨는 셈 안 할게요."
"왜."
"높게 나와서요."
중개인은 두 쪽 난 돌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돌담에 기대 놓은 막대기로 눈을 옮겼다. 손잡이 위에 흐린 회백색 테가 두 줄 감겨 있었다. 그는 상자 옆에 세워 둔 장부를 펴서 무언가를 한 줄 적었다. 무엇을 적었는지 켈리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타르실은 묻지 않는 도시였고, 묻지 않는 대신 적었다.
니카가 무엇을 셈하다 그만두었는지 켈리는 알았다. 켈리를 찾는 쪽은 둘이었다. 하나는 거두어 가려 했고 하나는 학원에 데려가려 했다. 찾는 쪽이 둘이면 그 사이에 값이 붙었다. 무게는 열두 해 동안 매일 달렸고 번호는 처음부터 있었으나, 값이 붙은 것은 처음이었다. 켈리는 그 값을 몰랐다. 니카는 알았고, 말하지 않았다.
중개인과 서기는 들어올 때처럼 골짜기 길로 내려갔다. 서기의 오른팔은 길모퉁이를 돌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무언가를 끝까지 묻고 싶은 사람 같았다. 그날 해 질 녘 유안의 머리끈이 까닭 없이 끊어졌다. 유안은 풀어진 머리를 두 손으로 붙들고 대가입니다, 하고 말했고 니카는 확률이에요, 하고 말했다. 린의 인사는 그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들것이 올라온 날부터 잉가의 탁자에는 그릇이 여덟 놓였다. 그날 저녁도 여덟이었고, 보른과 케이는 그날 저녁에도 말없이 먹었다. 원래 그런 것인지 오늘 그런 것인지 켈리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릇이 비자 잉가가 탁자 위로 손바닥을 펴 내밀었다. 보른이 품에서 푸른 테 종이를 꺼내 그 손에 얹었고 케이도 얹었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는 일이었는데, 오가지 않는 것까지 오래된 순서처럼 보였다. 켈리는 종이를 얹고 거두는 두 손을 보았다. 손등의 그을린 빛이 같았고, 엄지 아래 굳은살이 앉은 자리가 같았다. 아흐레 동안 버드나무 들것 손잡이가 박아 넣은 자리였다.
잉가가 두 장을 등잔 가까이 당겨 손가락을 첫 줄 밑에 댔다. 손가락은 한 줄을 다 가기 전에 멈췄다. 타르실 서기의 글씨는 작고 촘촘했고, 한 문장이 산사람의 문장 셋을 이어 붙인 만큼 길었다. 잉가가 두 장을 오벨 쪽으로 밀었다.
"읽어 줘. 타르실 말은 길어서 손가락이 모자라."
오벨이 종이를 받아 숨을 들이켰다. 소리 내어 읽으려는 숨이었다. 잉가가 먼저 말했다.
"소리는 내지 마. 남의 셈이야."
켈리에게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막사에는 남의 셈이라는 것이 없었다. 모든 아이의 무게가 한 장부에 적혔고 서기는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남의 무게를 듣지 않는 법도, 제 무게를 남에게 들리지 않게 하는 법도 거기에는 없었다.
"무엇을 찾으면 됩니까."
"형제끼리 칼을 들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오벨은 보른의 것부터 읽었다. 고용주의 칸과 값의 칸과 기간의 칸을 지나며 수첩에 한 줄씩 옮겨 적었다. 적어 두지 않으면 잊는 사람이었고, 그 버릇은 남의 계약서 앞에서도 쉬지 않았다. 서명란까지 간 다음 그 장을 접어 보른 앞에 놓고 케이의 것을 폈다. 같은 테와 같은 인장과 같은 서기의 글씨 사이로 셋째 줄의 검은 점이 지나갔고, 오벨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잉가는 그동안 한 번도 종이를 보지 않았다. 오벨의 손가락만 보았다. 손가락이 한 줄에서 멈추면 잉가의 숨도 멈췄고, 다음 줄로 내려가면 숨도 따라 내려갔다. 그렇게 두 장이 끝까지 내려갔다.
오벨이 두 번째 장을 접어 케이 앞에 놓았다.
"없습니다."
잉가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보른이 접힌 종이를 품에 넣었고 케이도 넣었다. 일은 그것으로 끝났으나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모두 끝나지 않은 일 앞에 앉은 사람처럼 그대로 앉아 있었다. 등잔 불이 낮게 기울었다. 처마에서 이삭들이 바람에 서로 부딪는 소리가 문틈으로 들어왔다. 니카는 주머니 속에서 주사위를 쥐고 있었으나 굴리지 않았다. 굴리면 숫자가 나올 것이었고, 니카는 오늘 이미 숫자 하나를 말하지 않았다.
"…형제끼리면."
켈리가 말했다. 셈보다 입이 먼저 나간 말이었다. 다들 켈리를 보았다.
"계약서에 없어도, 안 들지 않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보른도 케이도, 잉가도 오벨도 대답하지 않았다. 켈리는 대답을 기다렸다. 막사에서 무언가를 물으면 대답 대신 장부에 한 줄이 더 적혔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다. 오벨의 펜도 수첩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대신 잉가가 일어나 헛간으로 갔다.
돌아왔을 때 잉가는 빈 주머니 둘과 보리 자루, 그리고 낮에 쓰던 도리깨 장대를 들고 있었다. 주머니는 크기가 같았다. 잉가가 그것들을 바르트 앞에 내려놓았다.
"똑같이 담아 줘."
바르트가 주머니 둘과 장대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일어났다. 장대 끝의 막대를 풀어 내고, 장대 한가운데를 손바닥에 올려 이리저리 옮기며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자리를 찾았다. 찾은 자리에 새끼줄을 감아 처마 밑 나무 갈고리에 걸었다. 낮에 보리를 내린 갈고리였다. 장대가 처마 밑에 가로로 떠서 천천히 흔들리다 멎었다. 바르트는 장대 양 끝에 주머니를 하나씩 매달았다. 사람 키만 한 저울이 처마 밑에 생겨났다.
바르트가 보리를 한 줌씩 담았다. 한쪽에 한 줌, 다른 쪽에 한 줌이었다. 장대가 이쪽으로 기울면 저쪽에 몇 알을 더 넣었고 저쪽으로 기울면 이쪽에 넣었다. 등잔을 든 린이 그 아래 섰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장대 양 끝의 주머니가 배를 불리며 내려가는 동안 장대는 몇 번이고 기울었다가 바로 섰다. 한쪽이 내려가면 다른 쪽이 올라갔다. 둘이 같이 내려가야만 장대가 반듯했다.
마지막에 바르트가 자루에서 천에 싼 작은 저울을 꺼냈다. 놋쇠 접시 두 개짜리였다. 보리 몇 알을 그 위에 달아 한쪽 주머니에 넣자 장대가 반듯해졌다. 바르트는 한참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똑같아. 푼까지."
"…똑같아야 해."
잉가가 장대에서 주머니를 내려 아가리를 묶었다. 두 주머니를 같은 매듭으로 묶었고, 묶은 것을 탁자 위에 나란히 세웠다가 하나는 보른 쪽으로, 하나는 케이 쪽으로 밀었다. 미는 거리도 같았다.
케이가 주머니를 받아 끈을 고쳐 매는데 품에서 무언가가 미끄러져 나왔다. 낮에 아무렇게나 개어 넣은 남색 천이 바닥에 떨어지며 반쯤 풀렸다. 흰 원이 등잔 빛 속에 드러났다. 켈리가 그것을 주웠다. 펼쳤다가 다시 갰다. 양 끝을 안으로 접고, 원이 있는 가운데를 안쪽으로 오게 한 번 더 접었다. 흰 원이 천 속으로 들어갔다. 켈리가 그것을 케이에게 내밀었다.
"멀리서도 보여."
케이가 천을 받았다. 켈리를 보았다. 무언가를 물으려는 얼굴이었는데 묻지 않았다. 케이는 개켜진 그대로 천을 품에 넣었다.

7월 13일의 새벽은 차가웠다. 산의 새벽은 달력을 따르지 않았다. 골짜기에는 안개가 고여 있었고 산마루만 회색으로 밝아 오고 있었다. 잉가는 문간에 섰다. 그 너머로는 나가지 않았다. 보른이 먼저 나오고 케이가 뒤따랐다. 같은 높이로 얹힌 주머니 둘 위에 키엔에서 메고 돌아온 창이 하나씩 걸쳐 있었다. 헛간 앞 마당의 일행은 누가 깨우지 않았는데도 모두 일어나 앉아 있었다. 처마 밑 갈고리에는 장대가 아직 가로로 걸려 있었다. 양 끝이 비어 있었다.
"계약서가 먼저야."
잉가가 말했다. 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가 먼저야."
케이가 끄덕였다.
"계약서가 먼저야."
세 번째 말은 두 아들 사이의 빈자리에 떨어졌다. 거기서 끄덕일 사람은 없었다.
돌담 끝에서 길이 둘로 갈렸다. 하나는 산마루를 타고 위로 넘어가는 길이었고 하나는 골짜기 바닥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보른이 위로 갔다. 케이가 아래로 갔다. 갈림목에서 둘은 돌아보지 않았다. 보른의 등은 산마루의 회색 속으로 올라가며 작아졌고 케이의 등은 골짜기의 안개 속으로 내려가며 흐려졌다. 작아지는 것과 흐려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었다. 켈리는 어느 쪽을 더 오래 보아야 할지 몰라 번갈아 보았다. 셀 것이 많지 않았다.
둘이었다.
잉가는 두 등이 다 사라진 뒤에도 한참 문간에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는 헛간 구석에 세워 두었던 다른 도리깨를 들고 있었다. 탈곡이 남아 있었다.
마당 돌담 위에 회색이 있었다. 잉가네 돌담이었다. 늑대가 지금까지 와 앉은 자리 가운데 가장 가까웠다. 늑대는 내려오지 않았다. 위쪽 길을 한 번 보고 아래쪽 길을 한 번 보았다.
"둘이 어디 가?"
켈리가 물었다. 누구에게 물은 것도 아니었다. 오벨이 수첩을 꺼냈다. 어젯밤 옮겨 적은 장이 두 장 있었다. 한 사람에 한 장이었다. 오벨은 그 두 장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처음으로 나란히 폈다. 계약서는 한 장마다 갑과 을뿐이었고, 잉가가 물은 것은 두 장 사이의 일이었다. 두 장 사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으므로 어젯밤 오벨은 두 장을 한 번도 나란히 놓지 않았다.
손가락이 근무지 칸에서 멈췄다. 위로 간 사람의 장에도 아래로 간 사람의 장에도 같은 지명이 적혀 있었다.
이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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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출국하는 날이 되었다.

공항으로 가는건 S1을 타면되고 지정된 좌석이 없다고 한다. S1을 타는 티켓은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하는 가장 저렴한 것이 한시간짜리가 있어 그것을 예매하려고 했다. 회사카드로 하려니 앱으로 승인이 필요했는데 데이터만 가능한 도시락 심으로는 결제가 불가능했다. 여기서 1차로 헤매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결국 심 교체로 해결했다. 도시락은 데이터만 가능해서 해외로 나왔을 때 받는 안전 안내문자들이 하나도 오지 않았는데 원래 사용하던 유심을 끼우니 안내 문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그런데 헤매는 도중에 낭비된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서비스의 시작 시간을 그대로 둔 채 결재 해버렸다. 어차피 가는데 10여분밖에 걸리지않아 시간을 좀 허비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원래 역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입구 앞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그러고는 시간에 맞춰 지나가는 지상철을 탔다. 타고나서 내 앞에 있는 아가씨에게 공항가는거 맞냐고 물어봤다.
아니라고 했다.
한 정거장만에 내려 다시 걸어서 역으로 갔다. 플랫폼을 찾다가 또 하나를 놓쳤다. 이제 다 확인하고 제대로 기다렸고 S1이 들어왔다. 기차에 타서 멋져보이는 아저씨에게 공항가는 것이 맞냐고 물어보니 또 아니란다.
기차에서 급히 내렸는데 아저씨가 앱으로 막 찾아보면서 따라나와서 S1도 공항 가는게 있고 지나치는게 있단다. 그러면서 여기서 다음차를 타면 된단다. 기다렸다. 그 기차가 떠나자마자 공항가는 S1표시가 사라졌다. 그 기차를 탔어야 했다. 도대체 그 친절한 빌런은 무슨짓을 한거지?
어쩔수없이 다음기차를 기다리다 문득 다른 플랫폼일수도 있겠다싶어 다시 나갔다. 역시나 다른 곳에서 기다려야 했다. 이번에 놓치면 표를 새로 예매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료인터넷이 되는곳을 찾아 유심을 바꿔야 할 위기였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유심은 로밍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이번에는 제대로 탔고 도착시간은 티켓의 종료시간과 일치했다. 기차를 타고가는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인데 티켓시간을 지나칠뻔 했다. 그 짧은 시간에도 티켓 검표원이 왔다. 이건 독일과 확일히 달랐다.
 
그라츠 공항은 상당히 작았다. 외진 시골길 같은 좁은 길을 지나면 덩그러니 혼자 있는 건물이 공항인데 카페하나 면세점 하나 있는 공항이다. 그래도 인터넷으로 여기 면세점에 어떤 물건들을 살 수 있는지 미리 검색해볼 수 있는 서비스가 있다.

 

독일로 가는 비행편은 30분 지연되었다. 제대로 안내도 해주지 않았다. 그냥 고속버스나 기차가 조금 지연되는 것처럼 생각하나보다. 다른 사람들은 다 태연하게 있길래 나만 환승을 하는 줄 알았는데 막상 비행기를 타고나서 몇몇 승객이 환승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봤다.(물론 한국으로 가능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프랑스의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긴급하게 탑승했다. 정작 다른 연결편도 지연도착 했는지 출발까지 지연시키면서 탑승하러 오는 마지막 버스를 기다려줬다.

 

출발시간까지 옆자리가 비어있어 짐을 다 놔뒀더니 마지막 버스를 타고 온 사람이 옆자리의 주인이었다.
루프트한자는 한국행이어서 그런지 한국어 버전의 메뉴 안내도 제공해줬다. 좌석에 디스플레이도 한국어를 지원해준다.
그리고 기내에서 내자리만 USC 충전기가 고장나 있었다. 승무원을 호출했는데 본척도 하지않고 한시간 후에 음료 서비스 하러와서는 끈다. 상황을 말하고 다른 충전할 방법이 없냐고 하니까 없단다. 유럽에서 제일큰 에어라인에 돈 다내고 탔는데 왜 고장난거 써야 하냐고 따졌는데 그냥 방법이 없단다.
보통 비행기에서 노트북도 쓰는데 전원포트도 없고 USB도 안되냐고 짜증이 엄청 났는데 옆자리 사람이 화장실 간 동안 확인해보니 좌석사이 뒤쪽에 충전기를 연결할 콘센트가 있었다.
승무원이 그것만 알려줬어도 좋았을텐데 유렵직원에 대해 다시 편견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사장이라면 유럽인 직원은 뽑기 전에 고민을 많이 해볼 것 같다.

 

한국에 도착은 예정대로 잘 도착했다. 에어프랑스에 너무 호되게 당했는지 갈 때와 올 때 제시간에 도착한 것이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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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엔 여울


**타르실 · 상인 평의회 회계실**


회계실은 평의회 건물 3층에 있었고 창이 바다 쪽으로 났다. 아침이면 돛대들의 그림자가 창살 사이로 들어와 마룻바닥에 가로줄을 긋다가, 해가 오를수록 짧아지며 벽 쪽으로 물러났다. 방은 길었다. 동쪽 끝에 책상이 하나 있었고 서쪽 끝에 책상이 하나 있었다. 두 책상은 서로 등을 지게 놓여 있어서 거기 앉은 서기 둘은 하루 종일 상대의 등만 보았다.
동쪽 책상의 장부는 「사람」이라고 불렸다. 용병을 사고파는 일이 거기 적혔다. 서쪽 책상의 장부는 「말」이라고 불렸다. 소문과 동향과 지도와 숫자가 거기서 팔렸다. 두 서기는 서로의 장부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책상을 등지게 놓은 것은 서른 해 전 어느 의장이었는데, 그가 남긴 말은 한 줄이었다. 타르실은 무엇이든 판다. 다만 누가 샀는지는 팔지 않는다. 바다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그 한 줄을 믿고 이 항구에 짐을 부렸다. 묻지 않는 도시였고, 그래서 적는 도시였다. 적은 것은 산 사람과 판 사람 말고는 아무도 보지 않았다.
두 장부가 같은 자리에 펼쳐지는 것은 하루에 몇 번뿐이었다. 창가 가운데에 의장의 탁자가 있었다. 동쪽 서기도 서쪽 서기도 서명을 받을 때는 장부를 그 탁자로 가져왔다. 의장은 읽고, 웃고, 왼손 가운뎃손가락의 반지를 돌려 인장 면을 아래로 향하게 한 다음 푸른 테를 두른 종이 위에 눌렀다. 저울이 찍혔다. 서기가 장부를 들고 제 책상으로 돌아가면 두 장부는 다시 방의 양 끝으로 갈라졌다.
6월 20일 아침에 동쪽 책상으로 온 손님은 상인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은 맞았는데 서는 자세가 맞지 않았다. 등이 너무 곧았고 두 발이 너무 가지런했다. 동쪽 서기가 그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고, 다 적은 것을 의장의 탁자로 가져왔다.
자하르 무넨은 쉰을 몇 해 넘긴 사내였다. 살집이 있었고 옷은 세 나라의 것을 한 벌에 섞어 입었다. 소매는 남쪽 바다의 줄무늬였고 깃은 로엔의 밀빛이었으며 단추는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손가락마다 반지가 있었다. 웃는 얼굴이었다. 그것이 그의 기본값이었다. 화가 나도 웃었고 손해를 보아도 웃었으며, 타르실 상인들은 그 웃음의 깊이를 읽어 그날 시세를 가늠했다.
그가 종이를 읽었다.
「드란 용병 200. 키엔 여울 남안. 6월 27일 밤 진입. 28일 정오까지 확보. 정오에 고용주의 주력이 깃발을 올리고 북안에서 건넌다. 그 전에 깃발 없이 북에서 오는 것은 적으로 본다. 고용주 표식은 정오에 올린다.」
"정오 전에 북에서 누가 옵니까."
자하르가 물었다. 손님이 대답했다.
"벨류엔 척후가 여울 북쪽 숲을 돈다는 말이 있소."
"그 말은 서쪽 책상에서 사셨습니까."
"아니오."
자하르가 웃었다. 사지 않은 말을 믿고 계약서를 쓰는 사람은 흔했다. 그는 반지를 돌렸고 저울이 푸른 테 안쪽에 찍혔다.
닷새 뒤 저녁에는 서쪽 책상에 손님이 왔다. 아침의 손님과는 다른 사내였다. 손가락 끝이 잉크로 검었고, 서는 자세는 아침의 손님과 같았다. 그는 키엔 여울 일대의 동향을 샀다. 서쪽 서기가 남쪽 가도 세관에서 올라온 통행 기록 사본을 펼쳐 놓고 거기서 한 줄을 옮겨 적었다. 24일. 드란 무리 약 200. 북쪽으로. 키엔 방향. 세관은 행선지를 묻지 않았고 고용주도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은 것은 적히지 않았다.
「드란 용병 약 200, 키엔 남안으로 이동 중. 27일 밤 도착 예상. 고용주 불명.」
"고용주가 누구요."
손님이 물었다.
"타르실은 고객의 이름을 팔지 않습니다."
서쪽 서기가 대답했다. 손님은 더 묻지 않았다. 종이를 받아 들고 서서, 서기의 펜을 빌려 「불명」 옆에 작게 몇 자를 덧붙였다. 서기는 그것을 보았으나 말리지 않았다. 산 종이에 산 사람이 무엇을 적든 그것은 산 사람의 일이었다.
「벨류엔 추정.」
의장의 탁자에서 자하르는 서명하기 전에 그 종이를 한 번 더 읽었다. 드란. 200. 키엔. 닷새 전 아침이 떠올랐다. 그는 손님의 외투 소매를 보았다. 상인 옷이었는데 안감이 강철 회색이었다. 자하르가 웃었다. 아침의 웃음보다 조금 깊었다.
자플랜이 산 드란을 자플랜이 또 사는 것이었다. 제 물건의 행방을 제 돈으로 사는 셈이었다. 타르실 상인들은 그를 「두 번 파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욕이 아니었다. 감탄이었다. 그는 웃으며 생각했다. 큰 나라는 제 안에서는 말이 통한다. 같은 왕관 아래의 방 두 개가 서로에게 말하지 않을 리 없었다.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나라의 일이었다.
반지가 돌았고 저울이 찍혔다. 서쪽 서기가 장부를 들고 제 책상으로 돌아갔다. 두 장부는 다시 방의 양 끝으로 갈라졌다. 두 장부가 만나는 자리는 그 방에 하나뿐이었다. 의장의 왼손 가운뎃손가락이었다.

**자플랜 왕국 · 서부 진격 대대**


6월 27일 밤, 키엔 여울 북안의 풀밭에는 불이 없었다. 유리크 판 카르소는 운반차 짐판에 등불 하나를 엎어 두고 그 아래에 종이 두 장을 나란히 폈다. 빛이 짐판 바닥으로만 새어 나왔다. 기름때 밴 장갑 손가락이 첫 장을 눌렀다. 왼팔의 회색 띠가 등불 가장자리에 걸렸다. 카르소 출신은 자플랜 군복을 입을 때 왼팔에 회색 띠를 둘러야 했다. 규정이었다.
첫 장은 북부군 본영의 명령서였다. 「정오까지 키엔을 건너 남안에 교두보를 세운다. 남안은 확보된다.」 아래에 란돌프 그라이엔의 서명이 있었다. 남안을 누가 확보하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확보된다. 주어가 없는 문장이었다. 본영의 문서에는 그런 문장이 흔했고, 주어가 빠진 자리에는 대개 보급이나 계약이 들어 있었다. 보급과 계약은 카르소계가 결재하지 않는 문서였다. 결재하지 않는 문서는 배포 명단에도 오르지 않았다. 유리크는 그것을 19년 동안 알았고 19년 동안 주어 없는 문장을 읽어 왔다.
둘째 장은 같은 본영 정보과에서 저녁에 내려온 것이었다. 푸른 테를 두른 타르실 종이의 사본이었다. 「드란 용병 약 200, 키엔 남안으로 이동 중. 27일 밤 도착 예상. 고용주 불명.」 그 옆에 다른 손으로 덧붙인 「벨류엔 추정.」
유리크는 두 장을 겹쳐 보았다. 남안은 확보된다. 남안에 오늘 밤 적의 용병이 든다. 두 문장이 같은 땅을 두고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확보하기로 한 무언가가 늦었거나 틀어졌고, 적이 그보다 먼저 들어오는 것이었다. 정오를 기다리면 드란은 밤새 남안의 버드나무 사이에 자리를 팔 것이고, 드란이 판 자리는 하루 만에 요새가 되었다. 드란이 어떤 병사인지는 자플랜 장교라면 다 알았다. 자플랜 군대 안에도 그들이 있었다.
그는 셈했다. 보병 300. 외골격 20. 드란 200. 강폭 120미터. 여울 길은 말뚝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했다. 새벽 4시 반이면 강에서 안개가 오를 것이었다. 이맘때 이 강은 해 뜨기 전에 늘 안개를 냈다.
"4시 반에 건넌다."
부관이 그를 보았다.
"명령서는 정오입니다."
"정오까지다."
유리크가 첫 장의 그 낱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부관은 더 말하지 않았다.
"깃발은 접는다. 안개 속에서 깃발은 표적이다. 소리 내지 않는다. 측심 줄을 맨 앞에. 외골격은 불을 넣지 않고 북안에 둔다."
"기계 없이 드란을 칩니까."
"깊이를 모르는 물에 기계를 넣지 않는다."
연료 한 통으로 물을 건너는 시간은 1시간 20분이었다. 외골격 한 벌은 120킬로그램이었고 가슴판은 안에서 빗장을 걸었다. 말뚝 사이가 생각보다 깊으면 그 120킬로그램은 그대로 가라앉을 것이었다. 유리크는 그 셈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부관을 언덕 위 세관으로 보냈다. 타르실 땅에서 무장한 채 여울을 건너려면 허가가 있어야 했고, 허가에는 값이 있었다. 정오의 허가를 새벽으로 당기는 값은 따로 붙었다. 유리크는 그 웃돈의 액수를 장부에 적게 했다.

**드란 · 키엔 여울 남안**


같은 밤 남안의 물은 검었다. 별빛이 물살에 부서져 군데군데 희끗거렸을 뿐 강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들리는 것은 자갈 위를 넘는 물소리였다. 레크는 허리까지 물에 들어가 말뚝 하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참나무 말뚝이었다. 머리에 타르실 세관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저울 모양이었다.
"뽑아."
호른 가르가 말했다. 호른은 물가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마흔 남짓이었고 코가 한 번 부러졌다가 비뚤게 붙어 있었다. 회갈색 모피 어깨걸이에 산양 뿔 단추가 둘 달려 있었다.
레크가 말뚝을 흔들었다. 바닥의 자갈이 말뚝을 놓지 않으려 했다. 세 번을 흔들고서야 뽑혔다. 물이 소용돌이치며 뽑힌 자리로 몰려들었다.
"그거 세관 거잖아요."
"세관 건 정오에 도로 꽂아 주면 돼."
"왜 옮겨요."
호른이 손가락으로 물을 가리켰다. 레크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호른에게는 보이는 모양이었다.
"얕은 길은 저 자갈톱을 따라 비스듬히 건너가. 말뚝이 그 길을 따라 열 걸음마다 하나씩 서 있지. 넷째부터 동쪽으로 반 걸음씩 옮겨. 일곱째쯤 가면 표시는 소 위에 서 있게 돼."
"소요?"
"깊은 데. 사람 키 둘."
레크는 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레크가 태어난 마을에도 강이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늘 차고 빨랐고, 마을 아이들은 걷기 전에 여울을 읽는 법을 먼저 배웠다. 물빛이 바뀌는 자리, 물살이 주름지는 자리, 돌이 둥글어지는 자리. 산사람은 여울을 안다. 그래서 산 아래 사람들은 드란을 샀다.
"정오에 우리 편이 오면요."
"깃발을 들고 오지. 그럼 소리쳐서 알려 주면 돼. 말뚝 옮겼다고."
"깃발 없이 오면요."
"계약서에 적혀 있잖아."
호른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개켜진 천이었다. 등불이 없어서 색은 보이지 않았다. 레크는 저녁에 그것을 한 번 보았다. 강철 회색 바탕에 진홍색으로 무언가가 수놓여 있었다. 정오가 되면 그것을 창끝에 매달아 올리기로 되어 있었다. 고용주의 주력이 그것을 보고 건너올 것이었다.
"정오 전에 깃발 없이 북에서 오는 것은 적이다."
호른이 천을 도로 품에 넣으며 외었다. 드란 용병대는 싸우기 전날 밤 계약서를 소리 내어 한 번 읽었다. 글을 읽는 사람이 읽고 나머지는 들었다. 들은 것은 잊지 않았다. 드란에서는 계약서가 먼저였다. 고용주의 얼굴보다, 고용주의 나라보다, 고용주가 내일 무슨 말을 하든 그보다 먼저였다. 그래야 다음 고용주가 드란을 샀다.
레크가 다섯째 말뚝을 뽑아 반 걸음 동쪽으로 옮겨 꽂았다. 물살이 발목을 감았다가 풀었다. 레크는 열일곱이었고 이번이 첫 계약이었다. 마을을 떠날 때 어머니는 계약서가 먼저라는 말을 세 번 했고, 레크는 세 번 다 들었다.
새벽 3시가 지나자 물에서 김이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 위에 얇게 깔렸다가 금세 무릎 높이가 되었고, 다시 허리 높이가 되었다. 버드나무 줄기가 아래에서부터 지워졌다. 호른이 일어서서 모두를 버드나무 사이로 물렸다. 방패들이 줄을 맞췄고 투석끈이 허리에서 풀렸다. 레크는 짧은 창을 쥐고 방패 뒤에 무릎을 꿇었다. 손이 차가웠다. 물에 오래 있었기 때문이라고 레크는 생각했다.

**타르실 · 키엔 세관**


세관은 북안 언덕 위에 있었다. 돌로 쌓은 이층집이었고 지붕에 저울을 새긴 풍향판이 달려 있었다. 자하르는 전날 저녁에 도착했다. 정오에 자플랜 대대가 여울을 건넌다고 했다. 보병 300에 외골격 20이었다. 통행료는 머릿수와 기계 수로 받았다. 그해 키엔에서 받을 가장 큰 값이었고, 타르실 의장은 큰 값이 들어오는 날에는 직접 입회했다. 게다가 그는 그 기계라는 것을 아직 한 번도 제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새벽 3시쯤 세관장이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키가 작은 노파였고 손에 등잔과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대대가 도하를 새벽으로 당겼습니다. 4시 반입니다. 웃돈을 냈습니다."
"왜."
"부관 말로는 정찰 정보에 남안에 적의 용병이 든다고."
자하르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멈췄다. 웃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웃음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 세관장은 그 얼굴을 서른 해 동안 보아 왔지만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남안의 드란은 자플랜 작전과가 산 것이었다. 그 계약서에 그는 6월 20일 아침에 서명했다. 남안에 적의 용병이 든다는 말은 자플랜 정보과가 산 것이었다. 그 종이에 그는 6월 25일 저녁에 서명했다. 두 장을 다 본 사람은 이 땅에 그 하나였다. 큰 나라의 방 두 개는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나라의 일이라고, 닷새 전 저녁에 그는 생각했다. 그 나라의 일이 지금 언덕 아래 물가에 있었다.
그가 탁자에 앉아 종이를 당겼다. 펜에 먹을 묻혔다. 「남안의 드란은 귀측 작전과가 고용한 것임.」 한 줄이었다. 그 한 줄을 언덕 아래 대대에 내려보내면 되었다. 세관장이 등잔을 든 채 그것을 기다렸다.
자하르는 그 종이를 보았다.
그 한 줄은 한 고객의 계약을 다른 고객에게 파는 것이었다. 작전과와 정보과는 같은 왕관 아래 있었으나 타르실 장부에는 다른 고객으로 적혀 있었다. 동쪽 책상과 서쪽 책상은 서른 해 동안 등을 지고 앉았다. 그 등과 등 사이에 이 도시가 있었다. 오늘 이 한 줄이 언덕을 내려가면, 내일부터 바다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타르실에 무엇을 사러 오든 그 값에 한 가지를 더 셈해야 했다. 내 이름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팔릴 수 있다는 것. 그 셈이 한 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았다. 신용은 그런 물건이었다.
"의장님."
"기다리게."
그는 종이를 접었다. 접은 것을 펴서 다시 읽었다. 한 줄은 그대로였다. 창밖은 검었다. 4시에 강에서 안개가 오르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안개는 물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차오르는 것 같았다. 여울이 지워졌고 버드나무가 지워졌고 북안의 풀밭이 지워졌다. 운반차의 검은 윤곽들이 흰 것 속에 마지막까지 떠 있다가 가라앉았다.
4시 반에 아래에서 소리가 올라왔다. 물을 헤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었는데 곧 다른 소리가 섞였다. 사람이 소리를 지르는 소리였다. 자하르는 종이를 쥔 채 창가에 섰다. 지금 이 종이를 들고 누군가 언덕을 뛰어 내려간다 해도 저 흰 것 속에서 누구에게 건넬 수 있을지 그는 알지 못했다.

**타르실 · 키엔 여울**


물은 허리까지 올라왔고 생각보다 찼다. 슈텐 판 카르소는 맨 앞에 있었다. 열아홉이었다. 왼팔에 회색 띠를 맸고 오른손에 3미터짜리 장대를 쥐었다. 허리에는 밧줄이 감겨 있었고 그 밧줄은 뒤의 열 명을 거쳐 북안의 말뚝에 매여 있었다. 슈텐은 수심을 측정하는 측심병이었다. 앞에 아무도 없는 자리가 측심병의 자리였다. 카르소 관구에서 징집된 아이들은 대개 그런 자리에 섰다.
안개 속에서는 세 걸음 앞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말뚝이 보였다. 말뚝 하나를 지나면 안개 속에서 다음 말뚝의 머리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저울 낙인이 찍힌 참나무 머리였다. 슈텐은 그 머리를 보고 걸었고, 장대로 앞의 바닥을 짚으며 걸었다. 장대 끝에 자갈이 닿았다. 닿으면 한 걸음 나갔다. 닿으면 또 한 걸음. 뒤의 사람들은 슈텐의 등을 보고 걸었다. 소리를 내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물소리만 났다. 삼백 명이 물을 헤치는 소리는 물소리에 묻혔다.
셋째 말뚝을 지났다. 넷째를 지났다. 다섯째 말뚝 앞에서 장대가 조금 깊이 들어갔다. 슈텐은 멈추지 않았다. 다섯째를 지나자 물이 가슴께로 올라왔다. 여섯째 말뚝 머리가 안개 속에 떴다. 슈텐이 장대를 앞으로 내밀었다.
장대가 바닥에 닿지 않았다.
3미터짜리 장대가 손잡이까지 물에 잠겼는데 아무것도 짚이지 않았다. 슈텐이 멈췄다. 뒤에서 누가 슈텐의 등을 밀었다. 슈텐의 발이 앞으로 미끄러졌다. 발밑의 자갈이 끝나 있었다. 끝난 자리에서 바닥이 비스듬히 아래로 꺼졌고 물살이 그쪽으로 빨려 들었다. 슈텐의 몸이 기울었다. 허리의 밧줄이 팽팽해졌다. 뒤의 사람이 밧줄을 붙잡았고, 그 뒤의 사람이 그 사람을 붙잡았다. 줄이 슈텐을 붙들었다.
슈텐의 옆으로 두 사람이 지나갔다. 줄에 매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말뚝을 보고 걷던 사람들이었다. 둘은 슈텐처럼 기울었다가 슈텐처럼 붙잡히지 못했다. 흰 안개 속에서 물이 두 번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갑옷을 입은 사람은 물에 뜨지 않았다.
"말뚝이 옮겨졌다!"
슈텐이 소리쳤다. 소리 내지 말라는 명령을 그가 처음으로 어겼다. 소리가 안개 속으로 번졌다. 뒤에서 누군가 그 말을 되받았다. 그 뒤에서도 받았다. 말이 줄을 타고 북안으로 넘어갔다.
"여울을 아는 놈들이다."
누군가 말했다. 그 말도 줄을 타고 넘어갔다.
그때 남안 쪽 안개 속에서 소리가 왔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굵고 짧았고 낯선 억양이었다. 슈텐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그 억양은 알았다. 관구의 공방에도 그런 억양으로 말하는 노인이 하나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었다.
"드란이다."
슈텐이 중얼거렸다. 정보대로였다. 남안에 드란이 있다고 했고, 드란은 여울을 알았고, 여울을 아는 놈들이 말뚝을 옮겼다. 하나도 틀린 데가 없었다. 맞는 것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그 소리는 더 적의 소리가 되었다.
남안에서 레크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호른 가르의 목소리였다. 호른은 안개를 향해 드란 말로 물었다. 어느 쪽이냐. 대답이 없었다. 물 헤치는 소리만 났다. 깃발도 없었다. 안개 속에서 깃발이 보일 리 없었으나 계약서에는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가 적혀 있지 않았다. 깃발 없이 북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오 전이었다.
"던져."
투석끈이 돌기 시작했다. 바람을 찢는 소리가 버드나무 사이에서 났다. 돌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어딘가에서 쇠에 맞는 소리가 났고 어딘가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레크는 방패 뒤에서 창을 쥐었다. 손이 떨렸다. 떨리는 것이 차가워서가 아니라는 것을 레크는 그제야 알았다.
자플랜 보병이 말뚝 길을 버리고 장대를 쥔 아이의 줄을 따라 자갈톱을 더듬어 올라왔다. 줄이 옳은 길을 찾았다. 그러나 옳은 길은 폭이 좁아서 셋이 나란히 서지 못했고, 그 좁은 끝에 드란의 방패가 기다리고 있었다. 물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한 번에 하나씩이었다. 허리까지 젖은 다리는 무거웠다. 방패 사이로 짧은 창이 나갔다가 들어왔다.
레크 앞으로 한 사람이 올라왔다. 밧줄을 매지 않은 사람이었다. 안개 속에서 먼저 보인 것은 강철 회색이었다. 젖어서 거의 검었다. 그다음에 얼굴이 보였다. 레크와 나이가 비슷했다. 그 사람이 칼을 들었다. 레크가 창을 내밀었다. 배운 대로였다. 창끝이 무언가에 걸렸다가 들어갔다. 그 사람이 물가에 무릎을 꿇었다. 왼팔에 회색 천이 감겨 있었다. 레크는 그 천이 무엇인지 몰랐다. 벨류엔 놈들도 팔에 띠를 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 사람에 관해 레크가 한 생각의 전부였다. 그 사람이 앞으로 쓰러졌고 물이 그 사람을 끌어갔다.
강은 서쪽으로 흘렀다. 서쪽 끝에 바다가 있었고 바다 어귀에 타르실의 항구가 있었다. 여울에서 번진 붉은 것이 물살을 타고 그쪽으로 길게 풀려 갔다. 안개 아래로 흘러서 아무도 보지 못했다.
북안 풀밭에서 유리크 판 카르소는 숫자를 받았다. 전령이 물에 젖은 채로 와서 불렀다. 측심 줄은 길을 찾았다. 말뚝 길은 소로 이어졌다. 소에서 꺼내지 못한 사람이 몇. 자갈톱 끝에 방패가 있다. 방패 너머에서 돌이 온다. 드란이다. 유리크가 그 숫자들을 받아 머릿속 셈에 더했다. 셈은 어떻게 해도 같은 자리로 갔다. 좁은 길 끝에 선 드란을 보병으로 밀어내려면 보병이 남지 않았다.
운반차 위에서 외골격들이 불을 넣지 않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부관이 그쪽을 보았다. 유리크는 보지 않았다. 말뚝이 소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그는 방금 들었다. 120킬로그램은 가라앉았고 가슴판의 빗장은 안에서 걸렸다. 그는 기계를 넣지 않았다. 기계는 남았다. 사람이 줄었다.
7시 반에 그가 물러나라고 명했다. 그리고 다시 모이라고 명했다. 안개 속에서 흩어진 보병을 모으려면 그들이 보고 찾아올 것이 있어야 했다.
"깃발을 편다. 외골격 불 넣어라. 물가에 벽을 세운다."

안개는 8시가 지나서 걷혔다. 아래에서 위로 걷혔다. 물이 먼저 드러났고 그다음에 말뚝들이 드러났다. 넷째부터 일곱째까지 말뚝이 동쪽으로 휘어 있었고, 그 휜 줄 아래의 물빛만 유난히 짙었다. 버드나무가 드러났고 북안의 풀밭이 드러났다. 그 풀밭 물가에 쇠틀들이 한 줄로 서서 김을 뿜고 있었다. 쉭. 쉭. 그 뒤로 깃발들이 펴져 있었다. 강철 회색 바탕에 진홍색 왕관이었다.
호른 가르가 그것을 보았다.
그의 손이 품으로 갔다. 개켜진 천을 꺼냈다. 펴지 않아도 알았다. 강철 회색이었고, 접힌 자리 사이로 진홍색 실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그는 강 건너의 깃발을 보았고 손에 든 천을 보았다. 두 번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레크의 창을 빼앗아 그 끝에 천을 매었다. 매는 손이 매듭을 두 번 놓쳤다. 품에서 계약서도 꺼냈다. 푸른 테를 두른 종이였다. 그것도 창끝에 꿰었다. 창이 올라갔다.
북안에서 유리크가 망원경을 들었다. 놋쇠 통 안에서 남안의 창끝이 둥글게 떠올랐다. 강철 회색 천에 진홍 왕관. 그 아래 푸른 테를 두른 종이 한 장. 유리크는 그 종이의 테를 알았다. 지금 그의 부관 품에도 같은 테를 두른 종이가 있었다.
"멈춰."
유리크가 말했다. 처음에는 낮게 말했고 두 번째는 크게 말했다. 물가의 보병들이 멈췄다. 부관이 품에서 정찰 정보 사본을 꺼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그것을 들고 서 있었다. 유리크가 그 손목을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강 양쪽에서 푸른 테를 두른 종이가 한 장씩 올라가 있었다.
언덕 위 세관의 창가에서 자하르 무넨은 그것을 보았다. 세관에는 여울을 건너는 수레를 세는 데 쓰는 망원경이 있었다. 그 망원경으로 그는 남안의 종이를 보았고 북안의 종이를 보았다. 글씨는 보이지 않았다. 테는 보였다. 테 안쪽 아래 귀퉁이에 무엇이 찍혀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저울이었다. 같은 반지가 찍은 저울이었다. 그 반지가 지금 그의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있었다. 그는 망원경을 내려놓고 그 손을 오므렸다. 반지의 인장 면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손을 펴지 않았다.
벨류엔은 그날 키엔에 한 사람도 보내지 않았다.
여울 가운데 자갈톱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 둘 다 허리까지 물에 잠겨 있었다. 호른 가르가 계약서를 내밀었고 유리크 판 카르소가 정보 사본을 내밀었다. 둘은 서로의 종이를 읽었다. 글씨는 달랐다. 한 장은 동쪽 책상의 서기가 썼고 한 장은 서쪽 책상의 서기가 썼다. 인장은 같았다.
"우리 계약에는 너희를 치는 조항이 없었다."
호른이 말했다.
"내 명령서에는 너희가 없었다."
유리크가 말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 명령서에 왜 드란이 없었는지 그는 알았다. 주어가 없는 문장이었다. 그 주어를 지운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왼팔에 감긴 것이 물에 젖어 무거웠다. 그것을 이 산사람에게 설명할 말은 없었다.
그날 키엔에서 자플랜 정규 대대는 38명을 잃었고 61명이 다쳤다. 드란 용병대는 19명을 잃었고 34명이 다쳤다. 동쪽으로 휜 말뚝 넷 아래의 소에서 건져 낸 사람이 가장 많았다. 유리크는 그 숫자를 외웠다. 외운 숫자를 종이로 옮길 때 하나도 흘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외골격 20벌 가운데 잃은 것은 없었다.
드란은 정오가 되기 전에 남안을 떠났다. 계약은 정오까지였고 정오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들은 죽은 이들을 버드나무 가지로 엮은 들것에 실었다. 산까지는 아흐레 길이었다. 레크는 들것 하나의 앞쪽 손잡이를 잡았다. 잡기 전에 물가에서 손을 오래 씻었다.
"누가 우리를 쳤어요?"
레크가 물었다. 호른 가르는 대답하기 전에 오래 걸었다.
"고용주가."
사실이었다. 그 짧은 말은 드란 사람들보다 먼저 산을 올랐다.
언덕 위 세관에서 서기가 장부를 펴 놓고 자하르를 기다렸다. 펜 끝이 오늘 날짜 줄 위에 멈춰 있었다.
"통행료는 어떻게 적습니까."
"건넌 수만 적게."
서기가 적었다. 「6월 28일. 키엔 여울. 통행 0.」
"수입은요."
자하르가 잠깐 있다가 말했다.
"둘."
서기가 적었다. 용병 중개료 하나, 정보 매매료 하나. 새벽 도하 웃돈은 허가에 붙은 값이라 따로 적었다. 타르실은 건넜는지를 묻지 않았다.
자하르가 서기의 손에서 펜을 받았다. 그 줄을 오래 보다가 줄 바깥 여백에 무언가를 적었다. 타르실 장부에는 사람의 수를 적는 칸이 없었다. 적을 칸이 없어서 그는 여백에 적었다.
「건너지 못한 사람 57.」
그는 펜을 돌려주었다. 왼손은 그때까지도 오므린 채였다. 서기가 장부를 덮으며 의장의 얼굴을 보았다. 웃는 얼굴이 기본값인 사람이었다. 그날 아침 그 기본값은 돌아오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접힌 쪽지 한 장이 보내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다.

 

묻힌 종이

 

**자플랜 왕국 · 카르소 공업 관구 오르트 정제장**


6월 12일 아침, 오르트 정제장의 정문 앞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관은 없었다.
정제장은 죽은 사람을 돌려주지 않았다. 정문 안쪽 어딘가에 묻는다고 했고, 어디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기록에는 열병이라고 적혔다. 오르트에서는 해마다 열병이 돌았다. 열병으로 죽은 사람은 몸을 오래 두면 안 된다는 것이 정제장의 설명이었고, 그 설명은 20년 째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들은 몸 대신 다른 것을 들고 왔다. 그날 앞장선 여자는 널빤지 하나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널빤지 위에 작업 장갑 한 켤레가 얹혀 있었다. 가죽이 닳아 손가락 끝이 반들거렸고 엄지 자리에 기운 자국이 있었다. 그 장갑의 주인은 마흔셋이었고 정제장에서 14년을 일했다.
행렬은 마을에서 정문까지 이어졌다. 길었다. 아무도 노래하지 않았고 아무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걸음만 있었다. 정문 앞에 이르자 맨 앞의 여자가 멈췄고 그 뒤로 사람들이 차례로 멈췄다. 그러고는 섰다. 정문 위 망루에서 감독관 하나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플랜 사람이었다. 강철 회색 제복에 진홍 줄이 하나 있었다. 그는 행렬을 해산시킬 수 없었다. 관구에서는 집회가 금지되어 있었으나 장례는 집회가 아니었다. 장례를 금하는 조항은 없었다. 금하려면 장례가 무엇인지를 문서에 적어야 했는데 그것을 적어 본 사람은 없었다.
하임은 행렬의 중간쯤에 있었다. 서른여덟이었다. 오르트에 온 지 열한 해가 되었고 그사이 손끝이 먼저 늙었다. 처음에는 손가락 끝이 조금 둔했고 그다음 해에는 손톱 밑이 둔했다. 지금은 첫째 마디까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뜨거운 것을 쥐어도 몰랐고 차가운 것을 쥐어도 몰랐다. 손이 무엇을 쥐었는지 알려면 눈으로 보아야 했다. 정제장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되었다. 손끝부터였다. 그다음이 기침이었고, 그다음은 장갑이 널빤지에 얹혔다.
하임의 앞에 마테스가 있었다. 스물둘이었고 정제장에 온 지 세 해째였다. 행렬이 정문 앞에서 멈추자 마테스가 왼팔에 손을 댔다. 회색 띠가 거기 감겨 있었다. 카르소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왼팔에 감았다. 정제장 작업복에도, 징집되어 입는 군복에도, 왕도에 가는 이동 허가증의 사진 자리에도 그 띠가 있었다. 마테스가 매듭을 풀었다. 천천히 풀었다. 띠가 팔에서 떨어져 손에 들렸다.
행렬의 몇이 그것을 보았다. 망루의 감독관도 보았다. 띠를 떼면 처벌이었다. 감독관이 망루의 난간을 짚고 몸을 내밀었다.
마테스는 띠를 떼지 않았다. 오른팔로 옮겼다. 오른팔 위쪽에 띠를 감고 매듭을 지었다. 왼팔에 감던 것과 같은 높이였고 같은 매듭이었다. 그러고는 손을 내리고 다시 정문을 보았다.
감독관이 망루에서 내려왔다. 하임은 그가 초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초소 창으로 그가 책장을 넘기는 것이 보였다. 두꺼운 책이었다. 관구 규정집이었다. 그는 한참 넘겼다. 회색 띠에 관한 조항은 하나였다. 카르소계 신민은 공적 장소에서 회색 띠를 착용한다. 왼팔에. 떼는 자는 처벌한다. 오른팔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규정에는 왼팔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왼팔에 착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뗀 것도 아니라 규정만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려워 감독관이 책을 덮었다.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적을 것이 없었다. 오른팔에 띠를 감은 사람을 무엇이라고 적어야 하는지 그 책은 알려 주지 않았다.
행렬은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정문 앞에 서 있다가 흩어졌다. 흩어지기 전에 널빤지를 든 여자가 정문 철책 아래에 장갑을 내려놓았다. 장갑은 저녁까지 거기 있었다.
그날 오후 감독관이 인부 막사 앞에 명부를 붙였다. 조사대 보충 인부였다. 어디로 가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오르트에서 둘. 하임의 이름이 있었고 그 아래에 마테스의 이름이 있었다. 마테스는 명부를 읽고 나서 오른팔의 띠를 한 번 만졌다. 하임은 자기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짚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옛 돌산 기슭의 구덩이는 깊었다. 바구니로 흙을 날라 올리는 데에도 요령이 있었다. 하임은 그 요령을 이틀 만에 익혔다. 정제장에서 열한 해 동안 무거운 것을 날랐으므로 몸이 먼저 알았다. 다만 손은 매번 눈으로 보아야 했다. 바구니 끈을 쥐었는지, 쥔 끈이 미끄러지지 않는지.
6월 25일 아침 구덩이 벽이 무너졌을 때 하임은 흙더미 위에 있었다. 바구니를 메고 막 올라선 참이었다. 흙먼지가 오르고 고함이 났다. 구덩이 아래에 사람이 둘 깔렸다. 벤노와 아르민이었다. 벤노는 하임과 같은 막사에서 잤고 아르민은 밤마다 피리를 불다가 감독에게 혼났다.
그때 덤불에서 누가 뛰어내렸다. 여자애였다. 마른 아이였고 갈색 외투 자락이 펄럭였다. 막대기를 하나 들고 있었는데 뛰어내리기 전에 그것을 덤불 위에 놓았다. 놓는 것을 하임은 보았다. 그다음은 잘 보이지 않았다. 너무 빨랐다. 여자애가 구덩이 안에 있었고 들보를 들고 있었다. 흙이 얹힌 들보였다. 사람 셋이 들어야 하는 것을 혼자 들고 있었다. 손등에 붉은 줄이 섰다.
마테스가 뛰어내렸다. 쇠뇌병 하나가 그의 팔을 잡았는데 마테스가 뿌리쳤다. 오른팔이었다. 마테스는 들보 밑으로 기어 들어가 손으로 흙을 팠다. 손톱이 들렸다.
하임은 흙더미 위에 서 있었다. 바구니를 멘 채였다. 내려가지 않았다. 내려가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바구니를 내려놓아야 내려갈 수 있었는데 바구니 끈을 쥐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손끝이 말해 주지 않았다. 손은 끈을 쥐고 있었고 하임은 그 손을 보지 않고 구덩이만 보고 있었다. 그러니 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임이 그것을 안 것은 모든 일이 끝나고 벤노가 들것에 실려 올라왔을 때였다. 그때 고개를 숙였고, 자기 손이 아직 끈을 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사이에 본 것은 있었다. 들보 아래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끌려 나오는 동안 여자애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엇을 세는 것 같았다. 그러다 들보 속에서 낮게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여자애가 한 걸음 물러나며 들보를 놓았다. 들보가 둘로 꺾였다. 흙이 마저 내려와 아무도 없는 자리를 덮었다. 덩치 큰 사람 하나가 구덩이 턱에 무릎을 꿇고 팔을 뻗어 여자애를 끌어올렸다. 끌어올리고 나서 그 사람은 여자애의 두 손을 뒤집어 보았다. 손바닥을 보고 손등을 보고 손가락 사이를 보았다. 그러고는 허리춤의 물통을 열어 그 손에 부었다. 다 부었다. 하임은 그것을 알았다. 정제장에서 교대가 끝나면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손끝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눈으로 손을 보고, 무엇이 묻었을지 모르니 물로 씻었다. 그때 물을 아끼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밤 막사는 조용했다. 낮에 벌어진 일을 두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록에 없는 사람들이 기록에 없는 일을 하다가 기록에 없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 날에는 입을 다무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하임은 등을 대고 누워 천막 천장을 보았다. 옆자리에서 마테스가 몸을 뒤척였다. 손톱이 들린 손가락에 천을 감고 있었다.
"그 큰 사람 봤어?"
마테스가 낮게 말했다.
"어느."
"여자애 끌어 올린 사람. 덩치 큰."
"봤어."
"목에 혹 봤어?"
하임은 기억을 더듬었다. 큰 사람이 여자애를 끌어 올리고 물을 붓던 것은 보았다. 목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임이 본 것은 그 사람의 손이었다. 남의 손을 뒤집어 보던 손이었다.
"정제장에 오래 있던 사람 혹이야."
마테스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 목에도 있었어. 오르트에 스무 해 있던 사람들은 다 그렇게 나. 목 옆에. 콩알만 한 게 하나 나고, 또 하나 나고."
하임이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자기 목에 댔다. 목 옆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손끝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매끈한지 울퉁불퉁한지, 따뜻한지 차가운지도 몰랐다. 손가락이 목에 닿아 있다는 것은 목이 알았다. 목이 아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하임은 손을 내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자리였다.
"그 사람이 거기서 나왔으면."
마테스가 말을 하다 말았다. 하임은 그 뒤를 묻지 않았다. 정제장에서 나온 사람은 없었다. 나왔다는 사람의 이야기는 가끔 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대개 끝이 좋지 않았다.
나흘 뒤 밤에 추적대가 돌아왔다. 낮에 개 셋을 앞세우고 나갔던 쇠뇌병 넷과 회색 외투 하나였다. 돌아온 개는 둘이었다. 둘 다 꼬리를 말고 있었다. 쇠뇌병 하나가 모닥불 앞에 주저앉아 침을 뱉었다.
"계곡에서 냄새가 끊겼어. 거기까진 좋았어."
"그다음은."
"늑대야. 회색 늑대. 숲에서 울더니 개들이 미쳐서 그쪽으로 달려갔어. 셋이 다. 둘은 해 지고 나서 저 혼자 돌아왔고."
"하나는."
"숲으로 들어갔어. 안 나와. 들어간 데로 나오는 숲이라더니 개는 안 나와."
다른 쇠뇌병이 웃었다. 웃음이 짧았다. 하임은 모닥불 너머에서 그 말을 들었다. 늑대가 개를 데려갔다. 그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것이 그냥 늑대라고 믿었다.
이튿날 아침 하임은 물을 길러 개울 위쪽으로 갔다. 홈통 위쪽, 아직 맑은 물이 흐르는 데였다. 물통 둘을 지고 돌아오는 길에 지휘자의 천막 앞을 지났다. 천막 앞에 접이 탁자가 하나 나와 있었고 계급장 없는 사람이 거기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의 짧은 상의 왼쪽 가슴에 글씨가 남아 있었다. 그 아침 구덩이 앞에서 손 둘이 나타나 적고 간 글씨였다. 그는 그것을 모래로 여러 번 문질렀다. 하임은 그가 개울가에서 문지르는 것을 두 번 보았다. 글씨는 흐려졌으나 지워지지 않았다. 잉크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 것 같았다.
하임은 글자를 몰랐다. 숫자는 알았다. 정제장의 할당량은 숫자로 왔다. 하루에 바구니 몇, 한 달에 통 몇. 그래서 하임은 그 가슴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몰라도 그 끝에 무슨 숫자가 있는지는 알았다. 6이었다.
계급장 없는 사람이 펜을 멈췄다. 고개를 숙였다.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거꾸로 읽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하임의 자리에서도 보였다. 6.
그가 옆에 선 쇠뇌병에게 물었다.
"개는."
"셋 중 둘입니다."
"까닭은."
"…늑대가."
계급장 없는 사람이 펜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길게 적었다. 하임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다만 그가 적는 동안 쇠뇌병의 얼굴이 조금 어색해지는 것을 보았다. 자기가 한 말이 그 종이에서는 다른 말이 되어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조금 위쪽에 숫자가 하나 더 있었다. 2. 하임은 그 숫자가 무엇인지 알았다. 벤노와 아르민이었다. 벤노는 다리가 꺾였고 아르민은 갈비뼈에 금이 갔다. 아르민은 그 뒤로 피리를 불지 않았다. 숨을 깊이 쉬면 아프다고 했다. 종이에는 2라고 적혀 있었다. 하임은 물통을 고쳐 지고 지나갔다. 물통 끈을 쥔 손은 이번에도 보아야 알았다.

닷새 뒤 왕도의 대공학원에 짐말 한 필이 들어왔다. 말 등에 봉투 하나와 나무 상자 하나가 실려 있었다. 봉투에는 봉랍이 없었다. 상자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비토르 케른은 동관 맨 끝 방에서 봉투를 먼저 열었다. 칼을 찾지 않고 손톱으로 열었다. 보고서는 한 장이었다. 글씨가 작고 곧았다. 쓴 사람은 그런 글씨를 쓰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6월 25일. 구덩이 일부 붕괴. 인부 2 부상(1 다리 골절). 미확인 인원 6 목격. 그중 1, 벨류엔 강화형 추정. 집검관 없음. 같은 날 밤 외골격 1, 무릎 관절 부식으로 정지. 6월 29일 추적. 계곡에서 냄새 끊김. 야생 동물에 의한 추적 중단. 사냥개 1 미귀환.」
케른의 눈은 「인부 2」를 지나갔다. 머물지 않았다. 인부는 조사대에 늘 딸려 있는 것이었고 둘이 다쳤다는 것은 둘을 다시 보내면 된다는 뜻이었다. 그의 눈은 셋째 줄에서 멈췄다. 벨류엔 강화형 추정. 집검관 없음. 그는 그 두 마디를 두 번 읽었다. 그다음 넷째 줄에서 다시 멈췄다. 무릎 관절 부식.
그가 상자를 열었다. 짚 사이에 쇠붙이 하나가 누워 있었다. 외골격의 무릎 외판이었다. 반원으로 휜 쇠판이었고 안쪽에 맞물림 톱니가 나 있었다. 그가 아홉 해 동안 각도를 맞춘 바로 그 관절이었다. 그 외판이 붉었다. 녹이었다. 녹이 겉에만 앉은 것이 아니었다. 톱니 사이사이에 피어 있었고 맞물리는 면이 부슬부슬 일어나 있었다. 케른이 엄지손톱으로 그 면을 긁었다. 녹이 비늘처럼 떨어져 짚 위에 쌓였다. 그 아래도 녹이었다.
그는 아래층 공방으로 내려갔다. 화로 셋이 달아 있었다. 공방장을 불러 외판을 작업대 위에 놓았다. 공방장은 앞치마에 손을 닦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손가락으로 톱니를 하나씩 짚었다. 한참이었다.
"…쇠가 하루 만에 늙었소."
공방장이 말했다. 남쪽 억양이었다.
"하루가 아니오."
케른이 말했다.
"보고서엔 몇 숨이라고 했소. 사람 하나가 손을 댄 뒤에 섰다고."
공방장이 외판에서 눈을 들었다. 케른을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입이 조금 열렸다가 닫혔다. 그는 외판을 작업대에 내려놓고 다시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이미 닦은 손이었다. 그러고는 화로 쪽으로 돌아갔다. 케른은 그의 등을 잠깐 보았다. 묻지 않았다. 공방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은 대개 말이 적었고, 말이 적은 사람에게 캐묻는 것은 케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외판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 작업대 위에 그가 아홉 해 동안 맞춘 관절이 해체된 채 놓여 있었다. 그 옆에 녹슨 외판을 나란히 놓았다. 같은 모양이었다. 하나는 아홉 해가 걸렸고 하나는 몇 숨이 걸렸다. 걸린 방향이 반대였다.
봉투에 종이가 한 장 더 있었다. 북부군 사령부에서 돌아온 사본이었다. 키엔 여울. 손실 칸에 숫자가 둘 있었다. 「외골격 손실 없음. 사망 57.」 케른은 그 두 줄을 오래 보았다. 기계는 하나도 잃지 않았고 사람은 쉰일곱을 잃었다. 그가 아는 셈으로는 답이 하나였다. 기계를 물에 넣지 않았다. 넣었으면 기계가 막았을 것이다. 그는 수첩을 꺼냈다. 넷째 줄 아래가 비어 있었다.
그가 다섯째 줄을 적었다.
키엔. 기계를 넣지 않았다. 57.
다섯 줄을 위에서 아래로 읽었다. 하나의 생각이 되었다. 그 생각에 그 줄이 꼭 맞았다. 깊이를 모르는 물에 120킬로그램을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그 사본에 적혀 있지 않았다. 적혀 있지 않은 것은 그의 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새 종이를 당겼다. 조사대로 보낼 쪽지였다. 대공학원장에게는 병력을 움직일 권한이 없었다. 예산을 결재할 권한도 없었다. 그래서 그 조사대는 기록에 없었다. 기록에 없는 조사대에 보내는 종이도 기록에 남지 않아야 했다. 그가 짧게 적었다.
「표본. 산 채로. 기록하지 말 것.」
접어서 봉했다. 이번에는 봉랍을 쓰지 않았다. 급사를 불렀다. 급사가 나간 뒤 그는 창가에 섰다. 북쪽 하늘이 맑았다. 작업대 위에서 녹슨 외판이 창빛을 받고 있었다. 녹은 빛을 되비추지 않았다. 그 옆의 관절만 번쩍였다.

7월 7일 오후, 북부군 사령부 란돌프 그라이엔의 집무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전령이 아니었다.
란돌프는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펜을 내려놓았다. 유리크 판 카르소였다. 군복이 먼지로 허옇게 덮여 있었고 장화 뒤축에 마른 진흙이 붙어 있었다. 키엔에서 여기까지는 말로 나흘이었다. 그는 나흘을 달려왔다. 반박문은 대개 전령이 들고 왔다. 하렐 때도, 툰델 때도 유리크는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리크가 종이 한 장을 책상에 놓았다. 경례는 규정대로 했다. 란돌프는 종이를 집지 않고 먼저 그를 보았다. 그가 이 방에 혼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앉으시오."
"서 있겠습니다."
란돌프가 종이를 집었다.
그는 이레 전에 키엔 보고서를 쓸 때를 떠올렸다. 「명령된 정오를 기다리지 않고 미확인 정보에 의거 새벽 독단 도하. 남안의 아군 고용 용병과 교전. 정찰 실패.」 거짓은 한 글자도 없었다. 다 쓰고 나서 그는 한 줄을 덧붙일까 생각했다. 「계약 문서는 배포 규정에 따라 선봉대에 통보되지 않음.」 그것도 사실이었다. 그 한 줄을 적으면 배포 규정이 보고서에 오른다. 보고서에 오른 규정은 어전에서 문제가 된다. 규정을 문제 삼은 기록은 자플랜군 역사에 없었다. 그는 그 줄을 쓰지 않았다. 하렐에서도 그랬다. 쓰지 않은 줄은 늘 그렇게 빠졌다.
반박문은 짧았다. 글씨가 작고 곧았으며 숫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아라비아 숫자로 적혀 있었다. 란돌프는 그 글씨를 알았다. 툰델의 상보도 같은 손이 썼다. 반박문은 그가 보고서에 쓰지 않은 그 한 줄로 끝나 있었다.
「본 대대는 드란 용병 고용 계약을 통보받지 못했다. 계약 문서는 카르소계 지휘관 배포 명단에서 제외된다.」
란돌프의 눈이 마지막 구절에서 멈췄다. 카르소계. 그 세 글자를 그는 수백 번 문서에서 보았다. 인사 서류에서, 배치표에서, 배포 명단의 각주에서. 언제나 다른 사람의 손으로 적힌 것이었다. 그 세 글자를 판 카르소가 제 손으로 쓴 것을 그는 처음 보았다. 획이 다른 글자보다 조금 깊었다. 펜을 세게 눌렀거나 오래 댔거나.
"틀린 데가 없소."
란돌프가 말했다.
"그럼."
"그럼."
란돌프가 펜을 들었다. 반박문 아래 여백에 처리 의견을 적었다. 적으면서 소리 내어 읽었다. 숨길 까닭이 없었다. 숨길 것이 하나도 없는 문장이었다.
"결재 권한 밖 문서 인용. 서고 보관."
유리크는 움직이지 않았다.
"제가 인용한 계약서는 장군께서 서명하신 명령서와 같은 날 나간 것입니다."
"그렇소."
"저는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소. 그리고 귀관은 그 문서를 볼 권한이 없소. 볼 권한이 없는 문서를 근거로 쓴 반박은 받을 수 없소. 규정이오."
"보지 못해서 57이 죽었습니다."
"그 숫자는 내 보고서에 있소."
란돌프가 말했다.
"내가 올렸소. 하나도 줄이지 않았소."
그것도 사실이었다. 유리크가 그를 보았다. 툰델의 상보를 쓴 사람의 눈이었다. 묻는 자리에서 종이를 뒤적이지 않으려고 숫자를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 눈이 지금 무엇을 외우고 있는지 란돌프는 알 수 없었다.
"규정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란돌프가 펜을 내려놓았다.
"규정을 문제 삼으시오. 규정을 문제 삼는 문서를 따로 올리면 되오."
유리크가 입을 열었다. 란돌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문서도 권한 밖이오만."
방 안이 조용했다. 창밖 안뜰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가 멀어졌다. 의자 등에는 강철 흉갑이 걸려 있었고 그 위에 진홍 망토가 개켜져 있었다. 유리크의 눈이 그 흉갑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그 종이를 제가 다시 가져갈 수는 없습니까."
"접수된 문서는 돌려주지 않소."
란돌프가 말했다.
"규정이오."
유리크가 경례했다. 규정대로였다. 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었다. 문고리를 잡기 전에 그가 왼팔에 손을 댔다. 회색 띠를 한 번 고쳐 맸다. 생각 없이 나온 동작이었다. 란돌프는 그 동작을 보았다. 어전에서도, 사령부 복도에서도 그는 그것을 여러 번 보았을 것이었다.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처음 본 것 같았다.
문이 닫혔다.
란돌프는 한동안 반박문을 들고 있었다. 처리 의견은 이미 적혀 있었다. 서기를 불러 넘기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는 서기를 부르지 않았다. 대신 반박문의 마지막 구절을 한 번 더 읽었다. 카르소계. 깊게 눌린 세 글자였다.
그는 그날 저녁에 만족하지 않았다.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먼저 알아차렸다. 팔백 미터를 얻은 날에도 그랬다. 그때 그는 그것을 피로라고 정리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정리했다. 그 정리가 편했다. 편한 정리는 오래갔다. 그는 서기를 불러 반박문을 넘기고, 의자 등의 흉갑을 무릎에 올려 마른 천으로 닦았다. 아침에 이미 닦은 것이었다.
그 종이는 엿새 뒤 왕실 서고에 꽂혔다. 서고지기는 처리 의견을 보고 선반을 골랐다. 「권한 밖」이라고 적힌 선반이었다. 그는 종이를 읽지 않았다. 처리 의견이 적힌 종이는 읽지 않는 것이 서고의 일이었다. 그 선반에는 먼저 꽂힌 종이들이 있었다. 서명이 「판 카르소」로 끝나는 종이가 여럿이었다.

**벨류엔 마법왕국 · 왕도 마법청 회수과**


회수과 뒤채의 책상 넷 가운데 셋이 비어 있었다. 툰델에서 결계선이 무너진 뒤로 전선을 벗어난 자산이 한꺼번에 쏟아졌고, 특무 집검관 셋은 한 달째 그 건들을 따라 북부를 돌고 있었다. 닷새 전 2분기 보충률 회의에서 분실 칸에 처음으로 두 자리 숫자가 적혔다. 남서 방면의 미결 한 건은 그 숫자 아래로 밀려 「장기 건」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비앙카 세렌은 그 꼬리표를 떼지 않았다. 떼지 않고 그 아래에 편성안을 붙여 올렸다. 특무 집검관 하나에 인원 셋, 말 다섯, 경비 석 달. 회수과가 생긴 뒤로 특무 집검관이 조를 꾸린 일은 없었다. 사람이 많으면 눈에 띄고 눈에 띄면 상대가 먼저 안다. 그 규칙은 상대가 혼자일 때 맞는 규칙이었다. 나루터에서 비앙카는 상대가 다섯이라는 것을 알았다.
편성안은 7월 7일 오후에 돌아왔다. 마지막 장에 로르칸 베르트의 서명이 있었다. 인원과 말과 경비가 적힌 장이었다. 그 뒤에 넉 장이 실로 묶여 붙어 있었다. 협조문 첫 줄을 고치는 사유서였다. 타르실 중재 기록을 조용히 청구한 일, 서류 없이 빌린 정찰조를 로엔에 들인 일, 첫 줄이 틀린 것을 알고도 서른 장을 그대로 둔 일이 날짜순으로 적혀 있었다. 비앙카가 직접 쓰고 직접 묶은 것이었다. 실을 세 번 감아 한쪽으로 맺었다. 돌아온 매듭이 그 모양 그대로였다.
정식 문서는 읽힌다. 비앙카는 그렇게 알고 넉 장을 썼다. 다만 읽힌다는 것이 끝까지 읽힌다는 뜻은 아니었다. 운용국장의 눈은 숫자가 있는 장에서 멈추었고, 숫자가 없는 넉 장은 숫자가 있는 장 뒤에 묶여 있었을 뿐이었다. 비앙카는 매듭을 풀지 않고 사유서를 서랍에 넣었다. 새 협조문 마흔 장은 이미 찍혀 있었다. 첫 줄이 「막대기」였다.

방에는 셋이 더 있었다.
위그는 문 옆에 앉아 있었다. 누가 들어올 때마다 입술이 움직였다. 나루터에서 다섯째를 보지 않았다고 보고한 뒤로 생긴 버릇이었다. 그는 이제 발밑보다 사람을 먼저 셌다. 그 보고로 초소장의 빚은 갚아졌고, 이번에는 비앙카가 그를 정식으로 데려왔다.
파스칼은 나무 상자를 무릎에 얹고 있었다. 회수과 서기 가운데 가장 젊었고 잡보를 가장 느리게 읽었다. 느리게 읽는 대신 한 줄도 버리지 않았다. 상자 안에는 손바닥만 한 카드가 마흔 장 남짓 서 있었다. 한 장에 소문 하나였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파스칼이 한 장을 들었다. 실베인 접경 장터에서 온 것이었다. 막대기 든 애. 키가 3미터.
"적게."
"틀린 줄 압니다."
"틀린 것도 적게. 어디서 틀렸는지가 나와."
파스칼이 카드를 도로 꽂았다. 지도의 헛것 표시를 지우지 않는 사람 밑에서 일하는 서기였다.
노엘은 창가에 서 있었다. 비앙카와 같은 해에 검사를 받았고 같은 해에 결계형으로 배치되었다. 번호는 11호였다. 열일곱에 갈비뼈 안쪽이 무너져 출력이 절반으로 떨어졌고, 그에게는 집검관 전환이 제안되지 않았다. 후방 잡역으로 가서 열한 해 동안 결계 말뚝을 깎았다. 숨을 깊이 쉬지 않는 사람이었다. 결계형은 대개 그랬다.
"3호."
노엘이 창밖을 본 채 불렀다. 회수과에서 비앙카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노엘 하나였다.
"강화가 넘치면 쥔 데로 가. 쥔 게 나무면 결 따라 터지고, 쥔 게 없으면 자기 손등으로 와. 그 애가 아직 막대기를 쥐고 다니면, 지나간 자리에 부러진 게 남아."
"부러진 걸 보면."
"몇째 눈금이었는지는 알아."
"11호."
비앙카가 말했다. 노엘이 돌아보았다. 둘이 서로를 부르는 데 쓰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다른 호칭은 둘 다 배운 적이 없었다.

비앙카가 상자에서 카드 한 장을 뽑았다. 파스칼이 오늘 아침에 꽂은 것이었다. 옛 돌산 아래에 자플랜 조사대. 칼 없는 벨류엔 마법사를 봤다고 함. 타르실 마부에게서.
비앙카는 그 카드를 지도 옆에 세웠다. 회수 규정 제25조가 왜 있는지 그는 알았다. 잡히면 운용 방식이 알려진다. 자산이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자산을 잃는 것보다 나빴다. 그는 옛 돌산 자리에 표시를 하고, 거기서 손가락을 남쪽으로 내렸다. 실베인의 테두리를 바깥으로 돌아 산맥 쪽이었다. 벨류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땅이라면 나오는 길목에 서 있으면 되었다.
카드를 도로 꽂으려는데 옆의 한 장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로엔 나루터. 짐꾼 앞에서 막대기가 부러짐. 그 애가 아직 안 쳤다고 함. 나루터에서 비앙카가 직접 들은 말이었다. 그는 그 카드를 다른 카드보다 조금 오래 보았다. 왜 오래 보았는지는 카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제자리에 꽂았다.
"새벽에 나가네."
위그가 일어섰다. 입술이 한 번 움직였다.
넷이었다.

**자플랜 왕국 · 옛 돌산 기슭 조사대 야영지**


7월 8일, 옛 돌산 기슭의 야영지에 급사가 들어왔다. 말이 거품을 물고 있었다.
하임은 흙더미에서 바구니를 비우고 내려오던 참이었다. 급사가 회색 외투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는 것을 보았다. 봉랍이 없는 종이였다. 회색 외투가 그것을 읽었다. 읽고 나서 계급장 없는 사람에게 건넸다. 계급장 없는 사람도 읽었다. 가슴의 흐린 글씨 위로 그의 턱이 잠깐 내려갔다.
그는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탁자 위에 일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일지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펜을 들지도 않았다. 하임은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무엇이든 적는 사람이었다. 바구니 수를 적었고 물통 수를 적었고 6을 적었다. 이번에는 적지 않았다.
"개를 데려와."
그가 말했다.
쇠뇌병들이 개를 끌고 나왔다. 늑대를 따라갔다가 꼬리를 말고 돌아온 둘이었고, 그 뒤로 사흘 전 아랫마을에서 사 온 개 둘이 더 있었다. 회색 외투가 천막에서 나무토막 하나를 들고 나왔다. 구덩이에서 둘로 꺾인 들보의 한쪽이었다. 회색 외투들은 구덩이에서 나온 것을 무엇이든 버리지 않았다. 흙은 유리병에 담았고 들보는 천막 안에 세워 두었다. 여자애가 쥐고 있던 자리에 손바닥 모양으로 나무껍질이 벗겨져 있었다. 개들이 그 자리에 코를 박았다.
"산마루 쪽으로."
쇠뇌병 넷이 쇠뇌를 멨다. 회색 외투가 따라나섰다. 이번에는 외골격 하나가 운반차에서 내려 그 뒤에 섰다. 무릎에 새 외판을 단 것이었다. 쉭. 김이 빠졌다.
마테스가 하임 옆에 와 섰다. 오른팔의 띠가 땀에 젖어 짙었다.
"산 채로래."
마테스가 말했다. 급사가 회색 외투에게 종이를 건네며 한 말을 그가 들었다.
하임은 대답하지 않았다. 막대기를 놓고 뛰어내린 여자애를 생각했다. 들보를 들고 있던 손등의 붉은 줄을 생각했다. 그 애가 들보를 내려놓았을 때 벤노가 살았다. 하임은 그때 흙더미 위에서 바구니를 메고 서 있었다.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냄새를 잡은 것이었다. 개울을 거슬러 산 쪽으로 끌려갔다. 쇠뇌병들이 뒤따랐고 외골격이 쉭쉭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하임은 흙더미 아래에 서서 그것을 보았다. 바구니 끈을 쥐고 있었다. 쥐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이번에도 몰랐다.
개 짖는 소리가 산마루를 넘어갔다. 그 너머가 드란이었다.

 

먹을 것이 없다


7월 2일 아침, 일행은 비탈 중간의 바위 그늘에서 깼다. 어제 산마루에서 볼 때 망루는 반나절 거리였다. 산에서 가까워 보이는 것은 대개 가깝지 않았다. 해가 질 때까지 내려왔는데도 망루는 여전히 비탈이 꺾이는 자리에 서 있었고, 꺾이는 자리는 내려갈수록 하나씩 더 생겼다. 그래서 바위 그늘에서 잤다. 저녁은 먹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었다.
아침에도 없었다. 없다는 것은 모두 알았다. 다만 오벨은 아는 것과 적힌 것이 다르다고 했다. 그래서 각자 가진 것을 바위 위에 꺼내 놓기로 했다. 오벨이 수첩을 펴고 맨 위에 적었다. 「일행 보유 물품 목록. 7월 2일 아침.」 그 아래에 줄을 긋고 첫 항목을 적었다. 「식량」. 그러고는 펜을 든 채 기다렸다.
바르트가 자루를 거꾸로 들고 털었다. 빈 병 다섯이 굴러 나왔다. 마개는 다 닫혀 있었고 속은 다 비어 있었다. 그다음에 천으로 싼 것이 하나 나왔는데, 바르트는 그것을 바위에 놓지 않고 도로 자루에 넣었다. 저울이었다. 윗늪 이후로 바르트는 그것을 풀지 않았다. 켈리는 천의 매듭이 지난번에 보았을 때와 같은 모양인 것을 보았다. 바르트가 대신 빈 손바닥을 펴서 위아래로 한 번 흔들었다. 어림하는 손이었다.
"0이야."
"아직 아무것도 안 올렸잖아요."
니카가 말했다.
"0은 달 필요가 없어."
니카가 자기 것을 꺼냈다. 주사위 둘, 목에 두르던 짙은 붉은 천, 손목에 감는 천의 여분이었다. 니카가 주사위를 바위 위에 굴렸다. 다섯과 둘이 나왔다. 니카가 그것을 오래 보았다.
"오늘 안에 먹을 것을 찾을 확률이요."
"얼마야?"
켈리가 물었다.
"주사위로는 안 나와요. 그냥 굴려 본 거예요."
린이 자루를 열었다. 손목에 장신구 열둘, 자루 안에 털가죽 둘이었다. 털가죽은 회색이었다. 린은 그것을 꺼내지 않고 자루 입구로 손만 넣어 한 번 쓸었다가 뺐다. 그러고는 일어나 비탈 위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소아레에서 물에게 하던 인사였다. 숙인 채로 한참 있었다. 대답이 없었다.
"여긴 남의 산이야."
린이 다시 앉으며 말했다.
"인사를 어떻게 받는지 몰라. 물어볼 데도 없고."
오벨 자신의 것은 수첩과 펜과 안경과 가방이었다. 가방 안은 종이였다. 종이는 먹을 수 없었으므로 오벨은 그것을 목록에 올리지 않았다. 이 목록의 주제는 식량이었다.
켈리가 자루를 열었다. 개켜진 천이 두 겹 들어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손을 넣어 바닥까지 짚어 보고 뺐다. 옷이었다. 옷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켈리가 자루를 도로 묶었다. 그리고 허리춤에 매단 것을 풀어 바위 위에 놓았다. 국자였다. 모라의 젊은이가 준 늪오리나무 국자였고, 그저께 처음으로 죽을 저었다. 다들 국자를 보았다.
"그건 식량이 아닙니다."
"국자."
"압니다."
오벨이 그래도 적었다. 목록에 올라간 첫 물건이었다. 「국자 1.」
"부러질 확률은 지금 0이에요."
니카가 말했다.
"저을 게 없으니까요."
오벨이 「식량」 옆에 적었다. 「없음.」 그 아래 줄에 적었다. 「돈 — 없음.」 그러고는 두 줄 밑에 밑줄을 두 번 그었다. 밑줄을 두 번 긋는 것은 오벨이 문서에서 가장 중요한 줄에만 하는 일이었다.
켈리가 품에 손을 넣었다.
꺼낸 것을 바위 위에 놓았다. 빵 끝이었다. 엄지손가락 두 마디만 했고 겉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6월 27일에 일행이 마지막 빵을 나누었을 때 켈리 몫의 한쪽 끝이었다. 켈리는 빵을 끝까지 먹은 적이 없었다. 끝을 하나 남겨 품에 넣었다. 막사에서 누가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막사에서 혼자 익힌 것이었다. 배급은 정해진 날에 왔고, 정해진 날이 와도 배급이 오지 않는 날이 있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바르트가 빵 끝을 집어 손바닥에 올렸다. 저울은 꺼내지 않았다. 손이 한 번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30그램쯤."
바르트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오벨이 「없음」에 줄을 하나 긋고 그 옆에 적었다. 「빵 조각 1.」
켈리가 국자를 들었다. 빵 끝을 바위에 놓고 국자 자루로 한 번 내리쳤다. 걸지 않았다. 빵이 갈라졌다. 반듯하게 갈라지지는 않았다. 큰 조각 둘과 작은 조각 넷이 바위 위로 튀었고, 부스러기가 그 사이에 흩어졌다.
"국자 부러질 확률이 다시 생겼어요."
니카가 말했다. 켈리는 국자를 조금 느슨하게 쥐었다.
조각은 여섯이었다. 켈리가 하나씩 나누었다. 바르트, 니카, 오벨, 린, 자기. 큰 조각 둘은 바르트와 린에게 갔다. 마지막 하나를 들고 켈리가 일어섰다. 바위 그늘을 나와 어제 내려온 쪽으로 몇 걸음 올라가서 평평한 돌 위에 놓았다. 거기서는 위쪽 비탈이 잘 보였다. 어제 늑대가 앉아 있던 바위가 그 위 어딘가에 있었다.
"영감님 거야."
켈리가 돌아와 앉았다. 다섯이 각자의 조각을 입에 넣었다. 굳어서 씹히지 않았다. 다들 입 안에서 오래 녹였다. 녹이는 동안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해가 오르자 골짜기에서 안개가 올라왔다.
처음에는 아래쪽 계단밭 몇 층이 하얘졌고, 바르트가 자루를 다 묶었을 때에는 바위 그늘 바로 앞의 돌담이 반쯤 지워져 있었다. 망루는 보이지 않았다. 연기도 보이지 않았다. 켈리는 어제 저녁까지 그 연기를 보고 걸었다. 연기가 없으니 볼 것이 없었다.
"기다리죠."
니카가 말했다.
"안개는 한낮이면 걷혀요. 대개는요."
"대개면 몇 할이요."
"7할. 72.5퍼센트 정도에요"
켈리가 제 배를 보았다. 빵 끝 하나가 들어간 배였다. 켈리가 일어섰다.
"걸어. 아래로만 가면 돼."
고슈가 있을 때 길을 정하는 사람은 고슈였다. 고슈는 맨 앞에서 땅을 보았고, 땅을 보다가 이쪽이 낫겠다고 말하면 그쪽이 나았다. 지금은 켈리가 맨 앞이었다. 땅을 볼 줄 몰랐으므로 켈리는 기울기를 보았다. 발이 아래로 기우는 쪽으로 걸으면 되었다. 그런데 계단밭에서는 발이 기울지 않았다. 층마다 평평했다. 평평하게 만들려고 쌓은 담이었다. 한 층을 끝까지 걸어야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틈이 나왔고, 그 틈은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벽을 따라가십시오."
오벨이 말했다.
"길을 잃었을 때는 벽을 따라가면 출구가 나옵니다. 로엔 곡물청 창고 안전 수칙 제4조입니다."
켈리가 돌담에 왼손을 대고 걸었다. 다들 그 뒤를 따랐다. 돌담은 무릎 높이였고 끊이지 않았다. 아주 오래 끊이지 않았다. 니카가 걸으면서 무언가를 셈했는데, 셈이 끝날 때마다 고개를 갸웃했다. 린은 한 번 더 위를 보고 인사했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바르트는 맨 뒤에서 옆구리에 손을 대고 걸었다.
돌담이 끝났다. 끝난 자리에 바위가 있었고, 바위 아래 그늘에 빵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다.
일행이 그 그늘을 내려다보았다. 아침에 깬 자리였다.
"…창고에는 문이 있었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돌담은 비탈을 가로질러 쌓은 것이었다. 비탈을 가로지르는 것을 끝까지 따라가면 산을 한 바퀴 돌았다.
"같은 자리로 돌아올 확률은요."
니카가 말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원래 1할도 안 돼요. 대단한 거예요."
켈리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몇 걸음 위의 평평한 돌로 갔다. 돌 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빵 조각이 있던 자리에 축축한 자국이 하나 남아 있었다. 혀로 핥은 자리처럼 둥글었다.
린이 켈리 옆에 와서 그 자국을 보았다. 린의 얼굴이 풀렸다.
"영감님이 먹었어."
켈리는 안개 속 위쪽을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데에 있었다.

그때 안개 속에서 고함이 났다.
"사기꾼아!"
"거기 서!"
발소리가 비탈 위에서 내려왔다. 하나는 가볍고 빨랐고, 그 뒤로 여럿이 무겁게 따라왔다. 개 짖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켈리가 지팡이를 가로로 들었다. 드는 순간 안개가 갈라지며 흰 것이 튀어나왔다. 흰 것은 켈리의 지팡이에 정확히 걸렸다.
사람이었다. 흰 옷을 입은 사내가 지팡이에 가슴을 받고 뒤로 넘어갔다. 등에 지고 있던 종이 두루마리 다발이 터져 사방으로 굴렀고, 소매에서 주홍색 종이가 한 움큼 쏟아져 안개 속으로 팔랑거렸다. 사내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잠깐 하늘을 보다가, 일어나지 않고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종이부터 주웠다. 주우면서 한 장 한 장 앞뒤를 확인했다. 확인한 것만 품에 넣었다.
"괜찮아?"
켈리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종이가 젖지 않았습니다."
사내가 주홍 종이 마지막 한 장을 품에 넣고 그제야 일행을 보았다. 스물 중반쯤 되어 보였다. 검은 머리를 정수리 위로 높이 묶었고, 발목까지 오는 흰 웃옷에 먹빛 띠를 둘렀다. 소매 끝과 손가락마다 먹이 묻어 있었다. 이 대륙의 얼굴이 아니었다. 사내가 일행을 하나씩 보고 나서 정중하게 물었다.
"실례지만, 길을 아십니까."
"몰라."
"저도 모릅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무언가가 정리된 얼굴이었다. 그때 안개 속에서 셋이 나타났다. 양치기들이었다. 거친 털옷을 입고 끝이 굽은 막대기를 들었으며, 발치에 털이 긴 개 한 마리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앞장선 사람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왔다. 수염 난 양치기가 흰 옷의 사내를 보고, 그 둘레에 선 다섯을 보았다.
"한패구나."
"아닙니다."
오벨이 앞으로 나섰다.
"저희는 이분과 어떠한 계약 관계에도 있지 않으며, 방금 이분이 저희 일행의 지팡이에—"
양치기가 막대기를 들었다. 오벨은 말을 멈추지 않고 돌아서서 뛰었다. 뛰면서 말을 마저 했다.
"—부딪혔을 뿐입니다!"
다들 뛰었다. 다들 뛰니까 켈리도 뛰었다. 흰 옷의 사내가 맨 앞이었다. 그는 뛰면서도 한 손으로 품의 종이를 누르고 있었다. 바르트가 옆구리를 붙잡고 뛰었고, 린이 바르트의 팔을 끼고 뛰었다. 니카는 뛰면서 무언가를 셈했다. 잡힐 확률 같았는데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안개 속에서는 어디로 뛰는지 아무도 몰랐다. 쫓는 쪽도 몰랐다. 얼마 뒤 앞도 하얗고 뒤도 하얘지자, 모두가 거의 같은 때에 멈췄다.
숨소리만 났다. 가까운 데서도 나고 조금 먼 데서도 났다.
"…거기 누구야."
안개 저쪽에서 수염 난 양치기의 목소리가 났다.
"저희요."
린이 대답했다.
"저희가 누구야."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 물음에 대답하려면 길었다.
"그놈도 거기 있어?"
"있습니다."
흰 옷의 사내가 대답했다. 스스로 한 대답이었다. 양치기가 안개 저쪽에서 한숨을 쉬었다. 쫓기를 그만둔 사람의 한숨이었다. 그도 길을 잃은 것이었다.
"그놈이 판 부적이 안개 속에서 길을 찾아 준다고 했어."
양치기가 안개에 대고 말했다.
"염소 우리에 붙여 놨는데, 안개 낀 아침에 염소가 셋이나 없어졌다고."
"붙여 두시면 안 됩니다."
사내가 말했다.
"읽으셔야 합니다."
"읽었어. 매일 봤어."
"소리 내서 읽으셔야 합니다."
안개 저쪽이 조용해졌다.
"…그런 말은 안 했잖아."
"했습니다. 파는 자리에서 세 번 말씀드렸습니다."
"했어."
다른 양치기의 목소리였다.
"나도 들었어. 세 번."
"넌 누구 편이야."
켈리는 그사이에 흰 옷의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젖지 않은 바위 위에 마른 종이를 한 장 펴고, 허리춤의 통에서 붓을 꺼내고, 다른 통의 뚜껑을 열었다. 먹이었다. 사내가 붓 끝을 먹에 담갔다가 통 가장자리에 두 번 훑었다. 두 번이었다. 세 번도 한 번도 아니었다. 바르트의 눈이 그 붓 끝을 따라갔다.
"어디로 가십니까."
사내가 붓을 종이 위에 든 채 물었다. 켈리에게였다. 일행 맨 앞에 선 사람이 켈리였다.
"연기."
켈리가 말했다.
"어제 망루에서 연기가 올라왔어. 그 밑으로 가."
사내가 종이 귀퉁이에 작은 글자 하나를 먼저 적었다. 그다음에 가운데에 큰 글자들을 쓰기 시작했다. 느렸다. 안개 저쪽에서 양치기들이 다시 웅성거렸고, 니카가 발끝으로 바위를 두드렸다. 사내는 서두르지 않았다. 획 하나를 긋고 붓을 들어 다음 획이 시작될 자리를 본 뒤에야 붓을 댔다. 획이 꺾이는 자리에서는 숨을 멈췄다. 바르트도 같은 자리에서 숨을 멈췄다. 켈리는 그것을 보았다. 바르트가 저울 앞에서 숨을 멈추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마지막 획은 긋지 않았다. 사내가 붓을 통에 넣고 종이를 두 손으로 들고 일어섰다. 종이를 가슴 높이로 들고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외쳤다.
"「바람의 길잡이」!"
산이 울릴 만큼 큰 소리였다. 비장했다. 안개 저쪽에서 양치기들이 움찔하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 가장자리부터 오그라들었다. 불꽃은 없었다. 주홍 종이가 가장자리에서부터 검게 말리며 재가 되었고, 재가 사내의 손끝을 떠나 공중에 떴다. 그 재가 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바람이 일었다. 사내의 발치에서 시작된 바람이 비탈 아래로 곧게 내달렸다. 넓지 않았다. 사람 둘이 나란히 걸을 만한 폭이었다. 그 폭만큼 안개가 갈라졌다. 갈라진 자리가 아래로 아래로 뻗어 나갔다. 돌담이 보였고 그 아래 돌담이 보였고 그 아래 틈이 보였다. 층과 층 사이로 내려가는 좁은 틈이었다. 바람은 그 틈만 골라 지나갔다. 맨 끝, 비탈이 꺾이는 자리에 돌탑이 서 있었다. 꼭대기에서 연기 한 줄이 곧게 오르고 있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갈라진 안개 가장자리에 양치기 셋이 서 있었다. 생각보다 가까웠다. 열 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개가 바람에 털을 날리며 낑낑거렸다. 수염 난 양치기가 천천히 품에 손을 넣었다. 꺼낸 것은 구겨진 주홍 종이였다. 같은 글자들이 쓰여 있었고, 귀퉁이에 다른 작은 글자가 하나 있었다.
"…소리 내서 읽어야 하는 거였어?"
"예."
수염 난 양치기가 종이를 보았다. 한참 보았다.
"그럼 내가 이걸 염소 우리에 붙여 놓은 건."
"그것도 괜찮습니다."
사내가 말했다.
"염소가 읽지 않을 뿐입니다."
그 산에서 흰 옷을 입을 사내는 많은 부적을 팔았는데 사내가 판 부적이 몇 장이었고 그중 몇 장이 지금 염소 우리에 붙어 있는지는, 그의 생계를 위해 여기서는 밝히지 않기로 한다.
수염 난 양치기가 종이를 품에 도로 넣었다. 넣는 손이 아까보다 조심스러웠다. 그가 허리춤의 주머니를 풀어 무언가를 세었다. 동전이 여섯 개였다.
"반만 냈었지. 나머지야."
사내가 두 손으로 받았다. 받고 나서 고개를 숙였다. 양치기도 따라 숙였다. 그때 아래쪽에서 염소 울음이 났다. 갈라진 안개 끝, 망루 아래 돌담 밑에 하얀 것 셋이 나란히 붙어 서 있었다. 수염 난 양치기가 그것을 보았다.
"…저기 있었네."
양치기 셋과 개가 바람이 낸 길을 따라 먼저 뛰어 내려갔다.

바람이 낸 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행이 그 길로 내려서자 뒤에서 안개가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닫히는 것이 걷는 것보다 조금 느렸으므로, 일행은 쫓기지 않을 만큼만 서둘렀다.
흰 옷의 사내도 같이 내려왔다. 아무도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는데 같이 내려왔다.
"유안입니다."
사내가 걸으면서 말했다.
"산맥 너머에서 왔습니다. 도술을 씁니다. 방금 것이 도술입니다."
오벨이 그 말을 받아 일행을 소개했다. 걸으면서 하는 소개였는데도 격식이 갖춰져 있었다. 바르트 뮐렌, 연금술. 니카 셰르, 주술. 소아레 린, 정령술. 오벨 리스트, 소환술. 유안은 이름을 하나 들을 때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끄덕이는 깊이가 매번 같았다.
"그리고 고슈. 드루이드입니다. 현재 부재중입니다."
길 옆 바위 위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회색이 앉아 있었다. 바람이 낸 길의 가장자리, 안개가 막 닫히려는 자리의 바위였다. 어제보다 가까웠다. 늑대는 일행을 보지 않았다. 유안을 보고 있었다. 입술이 들려 있었다.
유안이 걸음을 멈췄다.
"…저 늑대도 일행입니까."
"응. 영감님이야."
린이 말했다.
"…일행이 저를 싫어하는군요."
"처음 보는 사람은 다 싫어해. 사람일 때도 그랬어."
유안이 늑대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벨에게 끄덕이던 것과 같은 깊이였다. 늑대가 한 번 더 으르렁거리고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켈리는 오늘 밤 장부의 고슈 칸에 적을 것을 생각했다. 빵 먹음. 그리고 그 옆에, 가까이.
오벨이 마지막으로 켈리를 가리켰다.
"켈리입니다. 지팡이를 씁니다."
유안이 켈리 쪽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켈리가 먼저 말했다.
"부적."
"…유안입니다."
"부적."
유안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놀리는 얼굴이 아니었다. 켈리는 처음 보는 사람을 그 사람에게서 가장 먼저 보인 것으로 불렀다. 바르트는 오랫동안 아저씨였고 고슈는 아직 영감님이었다. 유안에게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안개 속에 팔랑거리던 주홍 종이였다.
"…예. 부적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유안이 말했다. 오자 하나를 그냥 넘기기로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얼마 뒤 니카가 유안 옆으로 갔다. 니카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운을 다루는 사람에게는 걸었다.
"방금 거, 값이 뭐예요."
"운입니다. 크게 쓰면 그만큼 사소한 것들이 어긋납니다."
"사소한 게 어긋나는 건 제 일인데요."
"…그렇습니까."
두 사람이 서로를 보았다. 같은 물건을 파는 가게 둘이 한 골목에 있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얼굴들이었다. 유안이 먼저 눈을 돌려 켈리의 지팡이를 보았다. 갈라진 쇠 테가 감긴 자리를 오래 보았다.
"켈리 씨는 무슨 술을 씁니까. 지팡이는 술이 아닙니다."
"마법이요."
니카가 대신 말했다.
"터뜨리는 거요. 그런데 어디로 갈지 몰라요. 그래서 지팡이로 때려요."
유안이 걸음을 멈췄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겁니까, 어디로 갈지 정하지 못하는 겁니까."
켈리가 유안을 보았다.
"…그거 다른 거야?"
"다릅니다. 모르는 것은 고칠 수 없습니다. 정하지 못하는 것은 대신 정해 줄 수 있습니다."
유안이 쭈그려 앉아 붓통 끝으로 땅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사람 하나가 누울 만한 크기였다. 다 그리고 나서 그 둘레를 한 번 더 그었다. 선이 처음 것과 어긋나지 않았다.
"범위를 정하면 빗나가도 됩니다. 이 안에서만 빗나가면 됩니다."
켈리가 동그라미를 내려다보았다. 삼 년 동안 교관은 켈리에게 어디를 맞히라고만 했다. 어디를 맞히지 않아도 되는지를 말한 사람은 없었다.
"그거, 부적으로 돼?"
"아직 해 본 적은 없습니다."
켈리는 유안을 보았다. 쓸 수 있는 것을 보는 눈이었다. 유안도 켈리를 보았다. 풀 수 있는 것을 보는 눈이었다. 둘 다 상대의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바르트는 알아챘다. 바르트는 아무 말 없이 동그라미를 밟지 않게 돌아서 걸었다.
"한 가지 확인하겠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유안 씨가 저희와 동행한다는 합의는 없었습니다."
"반대도 없었습니다."
오벨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조항을 찾는 얼굴이었다. 찾지 못했다.
대신 수첩을 폈다. 아침에 쓴 목록이었다. 오벨이 「식량」 줄 위에 한 줄을 끼워 넣었다. 「인원 — 6.」
"0을 여섯으로 나눠도 0이에요."
니카가 말했다. 셈이라고 할 것도 없는 셈이었는데 니카는 그것을 굳이 소리 내어 했다.
"저는 삯이 있습니다."
유안이 허리춤을 두드렸다. 동전끼리 부딪는 소리가 났다. 다들 그 소리 쪽을 보았다. 아침부터 일행이 들은 소리 가운데 가장 좋은 소리였다.
"여섯 돈이면 빵 세 덩이야."
바르트가 말했다. 오벨이 「돈 — 없음」에 줄을 긋고 옆에 적었다. 「여섯 돈(유안).」
켈리는 그 허리춤을 보았다. 빵 세 덩이를 여섯이 나누면 반이었다. 반이면 괜찮았다. 막사에서는 반도 없는 날이 있었다.

길 끝이 보인다고 길이 짧은 것은 아니었다. 바르트는 층마다 쉬었고 쉴 때마다 옆구리를 눌렀다. 안개는 뒤에서 닫히고 앞에서는 저절로 걷혔다. 니카의 7할이 맞았다. 다만 한낮이 아니라 해가 기운 뒤였다. 그사이에 유안은 두 가지를 잃었다.
첫째는 붓이었다. 좁은 틈을 내려가다 붓통 뚜껑이 저절로 열렸고, 붓 하나가 굴러 나와 돌담 틈으로 들어갔다. 유안이 무릎을 꿇고 틈을 들여다보았다. 팔을 넣어 보았다. 팔꿈치까지 들어갔다. 붓은 나오지 않았다. 돌담은 비탈 하나를 통째로 쌓은 것이었고 틈은 그 안 어디로든 이어졌다.
둘째는 신발 끈이었다. 붓을 찾느라 쭈그렸다가 일어서는데 끊어졌다.
유안이 품에서 빈 종이 한 장을 꺼내 길게 찢었다. 그것을 꼬아 끈 대신 묶었다. 매듭이 반듯했다.
"크게 쓴 날은 이렇습니다."
유안이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였다. 니카가 그 종이 끈을 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았다.
마지막 층에서 바르트가 담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망루가 이제는 돌 하나하나가 보일 만큼 가까웠다.
"드란은 값을 받아."
바르트가 말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사람을 받는 데에도 받고 군대를 받는 데에도 받아. 값을 치르려면 계약서가 있어야 하고. 계약서 없이 오는 군대는 저 망루에서 돌려보내. 자플랜이든 벨류엔이든."
"…그래서 산이었어요?"
켈리가 물었다. 산으로 가자고 한 것은 켈리였다. 그때 켈리가 셈한 것은 마을이 낼 값 하나뿐이었다.
"자네가 산이라고 했을 때 나도 셈을 하나 더 했지."
바르트가 옆구리를 누르며 일어섰다.
"기록에 없는 사람들은 계약서를 못 써."
켈리는 계급장 없는 가슴을 떠올렸다. 오벨의 서기가 적은 글씨를 거꾸로 내려다보던 얼굴이었다. 그 사람은 하루라고 했다. 하루는 매일 왔다. 다만 계약서는 들고 오지 못했다.
"우리도 없잖아요."
린이 말했다.
"우리는 사람이야. 사람은 값만 내면 돼."
"값도 없잖아요."
바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망루에 닿을 때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망루 아래에 닿았을 때 해는 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돌탑은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낮았다. 문은 아래쪽에 하나뿐이었고, 문 옆 돌 위에 둘이 앉아 있었다. 한쪽 다리를 앞으로 뻗은 노인과 열둘쯤 된 사내아이였다. 아이가 횃불을 들고 있었다. 그 둘 사이의 나이는 거기 없었다. 산 아래 어딘가의 계약서 안에 있었다.
노인이 일어나지 않고 말했다.
"여긴 할름이오. 들어오려면 값을 내시오."
"사람을 받는 값 말씀이십니까."
오벨이 물었다.
"사람을 받는 값이오."
"얼마입니까."
"사람마다 다르오. 가진 걸 보고 정하오."
유안이 앞으로 나섰다. 처음으로 그가 일행 앞에 섰다.
"제가 내겠습니다. 오늘 받은 삯이 있습니다."
그가 허리춤에 손을 댔다. 손이 멈췄다. 허리춤을 한 바퀴 더듬었다. 품을 더듬었다. 소매를 털었다. 주홍 종이가 한 장 떨어졌을 뿐이었다. 동전 여섯을 넣은 주머니는 거기 없었다. 언제 없어졌는지 아무도 몰랐다. 유안 자신도 몰랐다.
"…대가입니다."
유안이 말했다.
"확률이에요."
니카가 말했다.
유안이 니카를 보았다.
"크게 쓴 날은 반드시 무엇을 잃습니다. 오늘은 셋입니다. 붓, 끈, 삯."
"크게 안 쓴 날에도 사람은 물건을 잃어요. 주머니 끈은 원래 그쯤 되면 풀려요. 그건 그냥 확률이에요."
"제 불운은 제 것입니다."
"불운은 원래 제 쪽이에요."
두 사람 다 진지했다. 켈리는 불운이 누구 것인지를 두고 다투는 사람들을 처음 보았다. 막사에서는 그런 것을 다툴 일이 없었다. 다 마법청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오벨이 말했다.
"여섯 돈은 없습니다."
오벨이 수첩을 펴서 「여섯 돈(유안)」에 줄을 그었다. 그날 그 목록에서 지운 것이 그것으로 셋이었다.
노인은 그 다툼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럼 짐이오."
아이가 횃불을 들고 다가왔다. 노인이 앉은 채 손을 뻗어 자루를 하나씩 받았다. 오벨의 가방에서 종이가 나오자 노인이 한 장을 불빛에 비춰 보았다. 무언가 적혀 있었다.
"계약서요?"
"목록입니다."
노인이 그것을 도로 넣었다. 계약서가 아닌 종이에는 관심이 없는 손이었다. 니카의 주사위를 보고는 니카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바르트의 자루에서 천으로 싼 것을 만지려다, 바르트의 눈을 보고 손을 거두었다. 유안의 두루마리를 풀자 아이가 소리를 냈다.
"할아버지, 이거 염소 부적이다."
"알아."
노인이 두루마리를 도로 말았다. 유안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 산에서는 소문이 사람보다 먼저 내려왔다.
노인의 손이 켈리의 자루에 닿았다. 켈리는 그 손을 보았다. 매듭이 풀렸다. 아침에 켈리가 짚어 보기만 하고 꺼내지 않은 바닥까지 노인의 손이 내려갔다. 손이 개켜진 천을 쥐었다. 두 겹 가운데 두툼하고 무거운 쪽이었다. 노인이 그것을 꺼냈다.
아이가 횃불을 가까이 댔다. 노인이 천을 펼쳤다. 개킨 자리가 풀리면서 자락이 땅까지 늘어졌다. 짙은 남색이었다. 소매 끝과 자락 끝에 흰 띠가 두 줄씩 둘려 있었다. 그리고 가슴께에서, 은실로 크게 수놓은 문양이 횃불을 받아 번쩍였다.
노인의 눈이 그 문양에서 일행 쪽으로 올라왔다. 하나씩 지나갔다. 켈리에게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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