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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세요


켈리가 먼저 깼다.
5시 반이었다. 그 시각에 깨는 것은 열두 해 동안 몸에 든 것이라 고쳐지지 않았다. 바깥은 아직 어두웠고 비는 밤사이에 그쳐 있었다. 땅이 젖어 있었으나 공기가 달랐다. 사흘 만에 처음으로 숨을 쉴 때 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켈리가 일어나 앉았다. 앉는 데 시간이 걸렸다. 등을 쓰면 맞은 자리가 당겼고 옆구리를 쓰면 다른 자리가 당겼으므로 허벅지에 손을 짚고 일어나야 했는데 허벅지도 아팠다. 어디를 짚어도 아픈 몸으로 일어나는 방법은 그냥 참는 것이다. 켈리는 그것을 알았다.
어제저녁에 바르트가 등을 보았다. 외투를 벗기고 내의를 걷어 올렸고, 올린 다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쇠몽둥이 자리가 손바닥 두 개만 하게 검붉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괜찮거나, 말해 봐야 소용이 없거나.

"…뼈는 안 갔어."
"예."
"안 간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예."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 안 하지."
"…"
"그럴 줄 알았어."

그가 쑥 비슷한 풀을 짓이겨 천에 발라 등에 댔다. 바르트는 약사가 아니었고 그 풀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몰랐다. 다만 카르소의 대장간에서 열넷에 일할 때 화상을 입으면 늙은 대장장이가 그 풀을 썼고, 그때 덜 아팠던 기억이 있었다. 그것이 풀 때문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모른다.
아침에 그 천이 말라서 떨어져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주워 접어 두었다. 버리지 않았다.
해가 뜨고 나서 아래쪽 물가가 보였다. 줄은 아직 거기 있었다. 움직이는 기척이 없었다. 밤에 늦게 닿았으므로 늦게 떠나는 것이고, 늦게 떠나면 오늘은 다음 물까지 못 간다. 그런 식으로 하루가 밀리면 다음 날은 더 밀린다. 길 위의 셈은 틀리는 법이 없다.

"…올라오는데요."
니카가 말했다.

비탈 아래쪽에서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셋이었다. 앞의 하나가 다리를 절었고 왼쪽 어깨가 디딜 때마다 떨어졌다. 뒤의 둘 중 하나가 아이를 업고 있었다. 바르트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배낭 쪽으로 손이 갔는데 배낭 안에는 어제 깨진 유리와 젖은 화약밖에 없었다.
"…뭐야 또."
"오는 겁니다."
"그건 아는데."
"올라오는 데 반 시간 걸렸을 겁니다. 저 비탈을."
오벨이 그렇게 말했다. 그는 그 말을 어떤 뜻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다리를 저는 사람이 젖은 비탈을 올라오는 데 드는 시간을 셈했을 뿐이고, 셈하고 나서 그 셈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았으며, 알고 나서는 입을 다물었다.
셋이 평평한 자리까지 올라와 멈췄다. 숨을 고르는 데 잠깐 걸렸다. 다리를 저는 남자가 먼저 숨을 골랐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이 보따리였다. 거친 천으로 묶은 것이고 묶은 매듭이 둘이었으며 크기가 작지 않았다.

그가 그것을 땅에 내려놓았다.
"…이거요."
"…"
"받으시오."

다섯이 그 보따리를 보았다. 켈리가 한 걸음 물러섰다. 물러선 것은 의식한 동작이 아니었다. 모르는 것이 앞에 놓이면 몸이 먼저 간격을 잡는다. 그것도 열두 해 동안 든 것이었다.

"…저게 뭡니까."
니카가 물었다.
"옷이오."
"옷이요?"
"옷이오."

남자가 그 말을 두 번 했다. 두 번 한 이유는 상대가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그 자신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서였다. 오벨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이런 자리에서 앞으로 나오는 사람이었다. 스무 해 동안 주고받는 일에 끼어 서 있었으므로 주고받는 자리에서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몸이 알았다.
"…저희는 삯을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소."
"청구하지 않은 것은 청구할 상대가 없어서였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소."
"그럼 이건 무엇입니까."
"값이오."

오벨이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값이라는 말을 스무 해 동안 썼다. 법률로 먹고사는 사람이 하는 일의 절반이 값을 정하는 일이다. 깨진 것을 돈으로 바꾸고 못 지킨 약속을 숫자로 바꾼다. 값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정해진다. 한쪽이 정해서 통보하거나 양쪽이 만나서 깎는 것이다. 통보는 관청이 하고 깎는 것은 시장이 한다. 그 둘 말고 다른 방식이 있다는 말을 그는 들은 적이 없었다.

"…누가 정했습니까."
"우리가 정했소."
"우리라면."
"저 아래 있는 사람들이오."

남자가 비탈 아래를 가리켰다. 물가에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 몇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젯밤에 정했소. 오래 걸렸소."
"…"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주기로 했소. 줄 게 없으니까. 그러다가 하나가 신을 내놓겠다고 했고 그러니까 다른 하나가 그러면 나도 뭘 내놓겠다고 했소. 그렇게 돌았소."

그가 보따리를 한 번 보았다.
"열한 명이 냈소. 열한 명 중에 새것을 낸 사람은 없소."

그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조금 기다렸다. 기다린 것은 미안해서였고 미안한 이유는 새것이 없어서였다.
바르트가 보따리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매듭을 풀지 않고 손바닥으로 한 번 눌러 보았다.
"…무게가 좀 되는데."
"여덟 벌이오."
"여덟이요?"
"한 사람 앞에 하나씩은 안 되오. 겹쳐 입으라고 많이 넣었소."

매듭이 풀렸다. 안에 든 것은 짝이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겉옷이 셋이었다. 하나는 짙은 녹색이고 소매 끝이 닳아 올이 나왔다. 하나는 흙빛인데 등 쪽에 다른 천으로 덧댄 자리가 손바닥만 했다. 하나는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 없었고 지금은 모든 색이 한 번씩 섞인 것처럼 보였다.

바지가 둘이었다. 하나는 무릎에 천을 덧댔고 하나는 허리가 컸다. 조끼가 하나 있었다. 양모였고 앞에 나무 단추가 셋인데 그중 하나가 색이 달랐다. 잃어버린 자리에 다른 것을 단 것이다. 목에 두르는 천이 하나, 신이 한 켤레 있었다. 신은 작았다.

"…이건 애 신인데요."
린이 말했다.
"그렇소."
"누가 냈어요?"
"신은 낸 사람이 하나요. 그 사람 아이 것이오."
"아이는요."

남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린이 더 묻지 않았다. 린은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으나 더 묻지 않아야 하는 자리를 알았다. 실베인에서는 그것을 어릴 때 배운다. 늪에 사는 사람은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자리를 밟지 않는 법을 먼저 배우고, 말에도 그런 자리가 있다는 것을 같이 배운다.

"…골라요."
아이를 업은 여자가 말했다.
"뭐요?"
"고르시라고요. 맞는 걸로."

켈리가 그 말을 들었다.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비슷한 것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벨류엔 마법청의 피복 지급은 분기마다 한 번이었고 방식은 정해져 있었다. 줄을 서고, 번호를 대고, 담당자가 표에서 치수를 찾고, 그 치수에 해당하는 묶음을 내준다. 묶음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받기 전에 알 수 없고 받고 나서 바꿀 수 없다. 맞지 않으면 맞지 않는 채로 입는다.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칸이 양식에 없었다.
켈리는 그것이 옷을 받는 방식이라고 알았다. 다른 방식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므로 지금 앞에 놓인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뭘요."
"입을 거요."
"…"
"입어 보고 맞는 걸로 가져가요."

켈리가 보따리를 보았다. 보고 나서 넷을 보았다. 넷이 켈리를 보고 있었다. 켈리가 앞으로 가서 조끼를 집었다. 그것이 보따리 안에서 가장 작았다.

"…저 이거요."
"그거?"
"예."
"입어 봤소?"
"…안 입어 봐도 돼요."
"왜요."
"작아서요."

여자가 그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했고, 그 얼굴을 보고 켈리가 조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바르트가 켈리의 손에서 조끼를 가져갔다.
"야."
"…"
"작은 걸 왜 골라."
"…작은 게 나아서요."
"뭐가 나아."
"…많이 가져가면요."
"가져가면?"
"…나중에 받을 게 줄잖아요."

그 말에 그 자리가 조용해졌다. 다섯 중 셋이 그 말의 뜻을 알아듣는 데 잠깐 걸렸고, 하나는 바로 알아들었으며, 하나는 끝내 알아듣지 못했다. 바로 알아들은 사람은 오벨이었다. 끝내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린이었는데 린이 알아듣지 못한 이유는 린이 자란 곳에서는 그런 셈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벨류엔 마법청의 배급은 총량이 정해져 있었다. 한 부대에 할당된 양이 있고 그것을 인원으로 나눈다. 앞에서 많이 가져가면 뒤가 모자란다. 켈리는 언제나 뒤쪽이었고, 뒤쪽에서 열두 해를 보낸 사람은 앞쪽이 되었을 때도 뒤쪽의 셈을 한다. 많이 가져가는 것은 나중에 돌아온다. 돌아오는 방식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돌아온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여기는 총량이 없어."
바르트가 말했다.
"…예?"
"여기는 정해진 양이 없다고. 저 사람들이 자기들 걸 낸 거야. 네가 많이 가져간다고 다른 사람 몫이 줄지 않아."
"…"
"그리고 저게 여덟 벌이고 우리가 다섯이야. 다 가져가도 남아."

켈리가 그 말을 생각했다. 생각하는 동안 얼굴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켈리가 모르는 종류의 산수였다. 아는 산수는 하나였다. 나눌 것이 있고 사람이 있고 몫이 있다. 몫보다 많이 가져가면 누군가의 몫이 준다. 그 셈 말고 다른 셈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지금 처음 들었고, 들었다고 해서 몸이 바로 따라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하나만 할게요."
"왜."
"…그게 편해서요."

바르트가 더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오늘 안에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옷을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오래 걸린 이유의 절반은 바르트였다. 보따리 안에 그에게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겉옷 셋을 전부 대 보았는데 어깨에서 걸렸다. 가장 큰 흙빛 겉옷을 걸쳤을 때 소매가 팔꿈치 아래에서 끝났다.
"…"
"아저씨 그거 조끼 같은데요."
"닥쳐."
"진짜 조끼 같아요."
"조용히 해."
"팔이 다 나왔는데."

니카가 그 말을 하면서 웃다가 옆구리를 잡았다. 그도 어제 굴렀다.
바르트가 그 겉옷을 벗어 바닥에 놓았다. 놓으면서 손이 조금 늦었다.
"…난 됐어."
"입을 게 없으십니까."
"내 건 있어. 안 떨어졌어."
"떨어졌는데요."
"안 떨어졌다고."

오벨이 더 말하지 않았다. 바르트의 겉옷은 오른쪽 겨드랑이가 터져 있었고 그것이 두 달째였다.
니카는 목에 두르는 천을 가져갔다. 짙은 붉은색이었고 보따리 안에서 유일하게 색이 선명한 물건이었다.
"이거 저 주세요."
"그건 옷이 아닌데."
"압니다."
"목 시려요?"
"아니요."
"그럼 왜."
"이게 제일 멋있어서요."

그가 그것을 목에 둘렀다. 두르고 나서 한 바퀴 돌았다.
"어때요."
"…"
"아무도 말을 안 하네."
"…잘 어울립니다."
오벨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거짓말이었는데 니카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린은 신을 거절했다.
"저 안 신어요."
"발 시려울 텐데요."
"안 시려워요."
"겨울에는요?"
"겨울에도 안 신어요."
"왜요."
"땅을 못 들으니까요."

그 대답을 듣고 아이를 업은 여자가 린을 다시 보았다. 실베인 사람들이 맨발로 다니는 이유를 아는 로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것을 가난이나 미개함으로 본다. 정령술은 땅에 손을 대고 쓰는 것이고, 손이 모자랄 때는 발로 쓴다. 가죽을 사이에 두면 아무것도 빌릴 수 없다. 린은 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설명하면 길어지고, 길어지면 상대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린은 열 살에 이미 알았다.

오벨이 바지 하나를 가져갔다. 무릎에 천을 덧댄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맞소?"
"맞지 않습니다."
"그럼 다른 걸로."
"맞는 것을 찾으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 말을 하고 바지를 접었다. 접는 방식이 서류를 접는 방식이었다. 모서리를 맞추고 한 번에 눌렀다. 켈리가 마지막이었다. 켈리에게 남은 것은 짙은 녹색 겉옷과 색을 알 수 없는 겉옷과 허리가 큰 바지였다. 짙은 녹색 쪽을 집었다. 집어서 어깨에 대 보았다. 소매가 손끝을 넘어갔다. 그것을 한 번 접으면 될 일이었는데 켈리는 접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크네."
바르트가 말했다.
"예."
"접어."
"…"
"소매를 접으라고."

켈리가 소매를 접었다. 접는 손이 서툴렀다. 벨류엔에서는 옷을 접을 일이 없었다. 맞지 않는 옷은 맞지 않는 채로 입는 것이고, 소매가 길면 긴 채로 둔다. 접으면 규정 위반이다. 피복 규정에 복장을 임의로 변형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었고, 그 조항이 있는 이유는 검열할 때 눈으로 훑어 한 번에 다른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접어도 되는 옷이라는 것을 켈리는 아직 몸으로 알지 못했다.
갈아입으려면 벗어야 했다. 켈리가 갈색 외투를 벗었다. 그 아래에 회색 무명 내의가 있었다. 소매가 팔꿈치까지 오고 목깃이 둥글었다. 석 달 동안 그것만 입고 다녔으므로 겨드랑이 쪽이 삭아 있었고 물이 빠져서 원래의 회색보다 밝아져 있었다.
켈리가 그것의 아랫단을 잡았다. 잡고 나서 멈췄다.

"…뭐 해."
"…"
"안 벗어?"
"…"
"야."

켈리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벗을 수 있는 물건이라는 생각을 켈리는 해 본 적이 없었다. 로브는 옷이었다. 로브는 입는 것이고 벗는 것이고 개키는 것이고 검열받는 것이었다. 그 아래의 회색 내의는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몸에 딸린 것이었다. 여섯 살에 받았고 그 뒤로 치수가 바뀔 때마다 새것으로 바꿔 받았으며, 바꿔 받는 날에도 한 벌을 벗고 다른 한 벌을 입는 것이었으므로 그 사이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시간은 반 숨밖에 되지 않았다.
열두 해 동안 켈리의 몸과 회색 천 사이에는 한 번도 틈이 생긴 적이 없었다.

"…저쪽 가서 갈아입으시오."
다리를 저는 남자가 말했다.
"…"
"저기 바위 뒤에. 여기서 안 보이오."

켈리가 바위 뒤로 갔다. 바위 뒤는 좁았고 아래가 젖어 있었다. 켈리가 거기 서서 내의 아랫단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올렸다. 올리는 동안 등의 맞은 자리가 당겼다. 팔을 들어 올리는 동작이 그 자리를 쓰는 동작이었다. 켈리가 숨을 한 번 멈췄다가 마저 올렸다.

벗었다. 벗은 것을 손에 들고 있었다. 들고 있는 동안 바람이 왔다. 사흘 만에 그친 비 뒤의 바람이라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등과 배와 어깨에 한꺼번에 닿았다.
켈리가 그 감각에 잠깐 멈춰 섰다. 그다음에 켈리가 한 일은 그 내의를 뒤집어 목깃 안쪽을 본 것이었다. 
번호가 찍혀 있었다. 먹이었다. 지워지지 않는 먹이고 세탁장에서 쓰는 것이었다. 벨류엔 마법청의 세탁장은 한 번에 수백 벌을 삶았고 삶고 나면 전부 같은 색이 되었으므로 주인을 가릴 방법이 필요했다. 목깃 안쪽에 번호를 찍는 것은 그 방법이었다. 그 번호에는 명예가 없었다. 영광도 없었다. 세탁물을 돌려주기 위한 표시였고 그 용도로만 존재했다.
켈리의 번호가 거기 있었다. 협조문의 넷째 줄에 적혀 있던 것과 같은 숫자였다.
켈리가 그것을 한참 보았다. 보고 나서 손가락으로 그 위를 한 번 문질렀다.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켈리는 알았다. 알면서 문질렀다. 문지르는 동작은 규정에 없는 동작이고 교범에 없는 동작이며 누가 가르친 동작이 아니었다. 지워지지 않았다.

켈리가 짙은 녹색 겉옷을 입었다. 입고 나서 소매를 접었다. 아까보다 조금 나았다. 품이 컸다. 어깨선이 내려와 있었고 그 때문에 팔을 들면 천이 같이 올라왔다. 바지는 허리가 커서 끈으로 묶어야 했는데 끈이 없어서 그냥 접어 넣었다. 켈리가 바위 뒤에서 나왔다. 넷이 켈리를 보았다.

보는 눈이 넷 다 비슷했다. 웃음을 참는 눈이었다.
"…뭐요."
"…아니."
"왜 그렇게 봐요."
"…"
"왜요."

니카가 먼저 터졌다.
"…커요. 너무 커요."
"…"
"그거 누구 거예요? 아저씨 두 명 들어가겠는데요."
"…"
"어깨가 여기 있어야 되는데 여기 있잖아요."

켈리가 자기 어깨를 보았다. 어깨선이 팔뚝 중간쯤에 있었다. 바르트가 웃지 않았다. 웃지 않은 것은 참아서가 아니었다. 그가 보고 있던 것은 옷이 아니었다. 켈리가 손에 들고 있는 회색 뭉치였다.
"…그건 뭐 하려고."
"…"
"버려."
"…"
"야."
"…안 버릴래요."

켈리가 그것을 개기 시작했다. 개는 방식이 로브를 개는 방식이었다. 소매를 안으로 접고 아랫단을 둘로 접고 어깨선을 맞춘다. 그렇게 개면 목깃이 위로 온다. 목깃이 위로 오면 번호가 보인다. 그렇게 정해진 이유는 세탁장에서 번호를 보고 분류하기 편하라고였다. 켈리가 그것을 자루에 넣었다.
자루 안에 로브가 있었다. 그 옆에 넣었다. 둘이 나란히 놓였고 자루 입구를 묶었다.

다리를 저는 남자가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건 안 버리시오?"
"예."
"왜요."
"…"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버리지 않는 이유를 몰라서였다. 입을 것이 아니었다. 팔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벨류엔 지급품을 들고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고 그것을 켈리도 알았다. 알면서도 굳이 버리지 않고 넣었다.

셋이 비탈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데 올라온 것보다 더 걸렸다. 다리를 저는 사람이 젖은 비탈을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다 어렵다. 일행이 그날 늦게 출발했다.
길에 나선 지 한 시간쯤 되었을 때 니카가 뒤를 한 번 보았다. 보고 나서 앞을 보았고 다시 뒤를 보았다.
"…뭐 합니까."
"아니 그냥."
"그냥이라니요."
"…우리 이제 안 걸리겠죠?"

오벨이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협조문이요. 첫 줄이 남색 로브잖아요. 이제 로브 입은 사람도 없고 회색 내의도 없고 옷 다 바뀌었는데요."
"…"
"안 걸리겠죠?"
"아니요."
"예?"
"더 걸립니다."

니카가 걸음을 멈췄다. 멈춘 자리가 길 가운데여서 뒤에 오던 바르트가 부딪칠 뻔했다.
"…왜요?"
"지금 저 사람을 한번 보십시오."

넷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앞에서 걷고 있었다. 짙은 녹색 겉옷의 어깨선이 팔뚝에 있었고 소매는 두 번 접혀 있었으며 바지는 허리를 접어 넣어서 앞쪽이 불룩했다. 옷 색과 바지 색이 맞지 않았고 그 위에 걸친 갈색 외투는 또 다른 색이었다. 그리고 손에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이상한데요."
린이 말했다.
"이상합니다."
"엄청 이상해요."
"예."

오벨이 설명했다. 설명하는 목소리가 평평했다.
"사람은 보통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습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몹시 가난하거나, 그 옷이 자기 옷이 아니거나."
"…"
"길에서 사람을 찾는 자가 보는 것이 그 두 번째입니다."
"…"
"남색 로브를 입은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런 꼴을 한 사람도 흔하지 않습니다. 흔하지 않은 것이 흔하지 않은 것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니카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럼 어떡해요."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요?"
"예. 저는 서류를 읽는 사람이지 사람을 숨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르트가 뒤에서 말했다.
"애초에 저게 문제가 아니야."
"뭐가요."
"옷이 문제가 아니라고."

그가 앞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켈리의 오른손에 지팡이가 있었다. 어두운 회갈색이고 장식이 없고 끝이 뭉툭했으며 가운데에 쇠 테가 한 줄 감겨 있었다. 이음매가 비뚤고 표면이 우글거렸다.

"저걸 들고 다니는 한 옷은 아무 상관이 없어."
"…그럼 저걸 숨기면요?"
"숨겨 봐."
"…"
"숨겨 보라고. 저 길이를."

니카가 그 지팡이의 길이를 눈으로 쟀다. 켈리 키의 삼분의 이쯤 되었다. 자루에 들어가지 않는 길이였고 품에 넣을 수 있는 길이도 아니었으며 옷 안에 넣으면 걸을 때 무릎이 안 굽는 길이였다.

"…천으로 감으면 어때요."
"감아서?"
"지팡이처럼 안 보이게요."
"그럼 싸울 때 풀어야지."
"풀면 되잖아요."
"몇 숨 걸리는데."
"…"
"어제 저 비탈에서 몇 숨 있었냐고."

니카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 길에서 사람을 셋 만났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었고 수레를 끌고 있었다. 지나치면서 그중 하나가 켈리를 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보았고 다시 위로 보았다. 그 눈이 사람을 수상히 여기는 눈이었다. 보고 나서 그가 지나갔다. 지나가고 나서 일행 뒤에서 그 셋이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했다. 말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켈리가 그것을 알았다. 켈리는 뒤쪽의 기척을 아는 사람이었다.

"…저 쳐다봤죠."
"응."
"왜요."
"옷이 이상해서."
"…"
"어제는 로브 때문에 쳐다봤고 오늘은 옷 때문에 쳐다봐."

켈리가 걸으면서 자기 소매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짙은 녹색이었고 끝이 닳아 올이 나와 있었다. 누가 입던 것이었다. 몇 해를 입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켈리가 그 소매를 손가락으로 한 번 만져 보았다. 만져 본 것은 천이 거칠어서가 아니었다. 벨류엔의 지급품 중에 이것보다 거친 것이 많았다. 다른 점은 하나였다. 이 소매는 켈리의 치수에 맞춰 나온 것이 아니었다. 누구의 치수에도 맞춰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그냥 누가 오래 입다가 내놓은 것이고, 내놓을 때 그 사람은 받는 사람의 치수를 몰랐다.

그래서 크다. 켈리가 그것을 생각하는 데 한참 걸렸고, 생각하고 나서도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정하지 못했다. 저녁에 자리를 잡았을 때 켈리가 자루를 열었다.
안에 로브가 있었고 그 옆에 회색 내의가 있었다. 둘 다 개켜져 있었고 둘 다 목깃이 위로 와 있었다. 로브의 목깃에는 은실 문장이 있었고 내의의 목깃에는 먹으로 찍은 번호가 있었다.
같은 숫자였다. 켈리가 자루를 도로 묶었다. 묶고 나서 자기가 입은 겉옷의 목깃 안쪽을 한 번 뒤집어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흔한 막대기


니카가 널빤지 조각을 하나 주워 왔다.
손바닥 두 개만 한 것이었고 한쪽 끝이 썩어 있었다. 니카가 그것을 불 꺼진 자리 앞에 세워 놓고 오벨에게서 숯을 빌렸다. 오벨은 숯을 빌려줄 때 그것이 남은 넷 중 하나라고 말했고 니카는 듣지 않았다. 널빤지에 세 줄이 적혔다.

「감는다. 넣는다. 바꾼다.」

"뭐야 이게."
바르트가 말했다.
"지팡이 숨기는 법이요."
"어제 내가 숨겨 보라고 한 거?"
"예. 숨겨 보려고요."
"셋 중에 뭐가 되는데."
"하나는 됩니다. 셋 다 해 보면 9할이요."
바르트가 니카를 한참 보았다. 니카가 숫자를 금방 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고, 틀릴 때도 금방 낸다는 것도 알았다. 틀리면서 빠른 건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켈리는 널빤지를 보지 않았다. 등 뒤에서 바르트가 풀 바른 천을 갈아 대고 있었다. 쇠몽둥이 자리의 멍이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바래 가는 중이었고 가운데는 아직 검붉었다. 지팡이가 무릎 옆에 세워져 있었고 오른손이 그 위에 얹혀 있었다. 얹혀 있다는 것을 켈리는 의식하지 못했다. 밤에도 거기 있었다. 잠든 켈리의 손이 지팡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사람은 일행 중에 없었다.
"…이거요?"
"예."
"숨겨요?"
"어제 다 들었잖아요. 그거 들고 다니면 옷 바꾼 게 소용없다고."
"…"
"싫어요?"
"…싫은 건 아닌데요."
켈리가 손을 떼지 않았다.

첫 줄은 감는 것이었다. 감으려면 천이 필요했다. 니카가 자기 목의 붉은 천을 한 번 만졌다가 손을 내렸고 린이 그것을 보았다.
"그거 쓰면 되잖아."
"이건 안 됩니다."
"왜."
"이건 제 거니까요."
"어제 받은 거잖아."
"어제부터 제 겁니다."

결국 쓴 것은 흙빛 겉옷이었다. 어제 바르트가 걸쳤다가 조끼 같다는 말을 들은 그것이었다. 오벨이 챙겨 왔다. 받은 물건을 그 자리에 두고 오면 받은 값을 돌려주는 것이 된다고 그가 말했고, 그 말에 반대한 사람이 없었는데 반대할 말을 아무도 찾지 못해서였다.
니카가 손을 내밀었다. 켈리가 지팡이를 내밀었다. 니카가 쥐었다. 켈리가 놓지 않았다.
"…놔야 감죠."
"…"
"놔요."
켈리가 놓았다. 놓은 손이 그 자리에서 한 번 오므라들었다가 펴졌다.

니카가 감았다. 소매 둘로 양 끝을 묶고 몸판으로 가운데를 둘렀으며 남은 자락을 꼬아 매듭을 셋 지었다. 다 감고 나니 길쭉한 흙빛 뭉치가 되었다. 가운데 한 군데가 불룩했다. 쇠 테가 있는 자리였다.
"어때요."
넷이 그것을 보았다.
"…뭐 같아요?"
"창."
린이 먼저 말했다.
"창이요?"
"감춘 창. 창을 감추면 꼭 저렇게 돼. 로엔 경비들이 그런 걸 메고 다녀."
"…"
"아니면 다리."
"다리요?"
"사람 다리. 한 짝."
바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참는 것인지 다른 것을 참는 것인지는 등만 보여서 알 수 없었다.

"풀어 봐요."
니카가 뭉치를 켈리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지금요?"
"지금요. 누가 덮쳤다고 치고요."

켈리가 뭉치를 쥐고 매듭을 찾았다. 니카가 지은 매듭이었고 니카는 풀리지 않게 묶는 법밖에 몰랐다. 타르실 도박장에서 돈주머니를 묶을 때 쓰는 매듭이었다. 켈리가 첫 매듭을 손톱으로 긁었다. 안 풀렸다. 이로 물었다. 풀렸다. 둘째 매듭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켈리가 뭉치를 거꾸로 들고 흔들었다. 흙빛 소매 하나가 풀려 늘어졌고 그 소매가 켈리의 발목에 감겼다.
그사이에 린이 앉았다. 바르트가 배낭 끈을 한 번 고쳐 멨다. 오벨이 수첩을 꺼내 한 줄을 적고 도로 넣었다. 니카는 처음에는 서서 보다가 나중에는 쪼그려 앉아서 보았다.
지팡이 끝이 겉옷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켈리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고 발목에 소매가 감겨 있었으며 셋째 매듭을 아직 입에 물고 있었다.

"…지금 우리 다 죽었어요."
니카가 말했다.
"…"
"그동안 저는 두 번 죽었어요. 아저씨는 세 번 죽었고요."
"나는 왜 세 번이야."
"크니까요. 큰 건 맞히기 쉬워요."
"…"
"오벨 씨는 맨 먼저 죽었어요."
"예. 맞습니다."
오벨이 그 셈을 고치지 않았다.

켈리가 매듭을 뱉고 지팡이를 마저 뽑아 들었다. 쥐고 나서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그 숨이 무슨 숨인지는 넷이 다 보았다. 니카가 널빤지의 첫 줄에 선을 그었다.

둘째 줄은 넣는 것이었다. 켈리의 자루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자루 길이가 지팡이의 절반이었다. 바르트의 배낭에 세워 넣자 삼분의 일이 위로 솟았고, 솟은 끝에 흙빛 겉옷을 씌웠다.
"…아저씨, 등에 깃대 꽂은 것 같아요."
"깃발이 없잖아."
"그래서 더 이상해요. 깃발 없는 기수 같아요."
"…저울 빼면 들어가."
"그럼 저울 빼요."
"저울은 못 빼."

그 말에서 바르트가 물러서지 않았다. 니카가 다른 것을 빼자고 했고 바르트가 그것도 못 뺀다고 했으며, 그렇게 배낭 안의 물건이 하나씩 이름이 불렸다가 하나씩 못 빼는 것이 되었다. 깨진 유리병까지 못 빼는 것이 되었을 때 니카가 포기했다. 결국 지팡이는 겉옷에 감긴 채로 배낭 옆구리에 비스듬히 대고 끈으로 묶였다. 그 위에 켈리의 자루를 걸어 늘어뜨리자 멀리서는 짐 사이에 무엇이 끼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켈리의 손이 비었다. 빈손으로 걷는 것이 켈리에게 어떤 것인지는 그 손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오른손이 외투 자락을 쥐었다가 놓았고 허리께를 쥐었다가 놓았다. 바지 허리를 접어 넣은 자리를 쥐었을 때 그것이 풀릴 뻔해서 놓았다.

점심 무렵에 길이 농가 하나의 마당 귀퉁이를 지났다. 울타리가 없었다. 로엔 남부에서 울타리는 밭에 치는 것이지 마당에 치는 것이 아니었다. 길과 마당의 경계는 길 쪽 흙이 단단하고 마당 쪽 흙이 무르다는 것뿐이었다.
"저쪽으로 질러가요. 저쪽이 빨리 갈 확률이 8할이에요."
니카가 그렇게 말했다.
마당에 거위가 일곱 있었다.

거위는 사람을 셀 줄 안다. 셀 줄 안다는 것은 사람 쪽에서 붙인 말이고 실제로 거위가 아는 것은 자기 마당에 들어온 것이 몇인가 하는 것뿐이다. 하나면 지켜보고 둘이면 소리를 낸다. 다섯이면 온다.
일곱이 왔다. 목을 땅과 나란하게 뻗고 날개를 반쯤 편 채로 왔다. 그런 자세로 오는 거위는 실제보다 두 배쯤 커 보인다. 소리가 먼저 왔고 거위가 그 뒤에 왔다.

켈리의 오른손이 허리 옆으로 갔다. 쥐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손이 어깨 위로 갔다. 쥐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켈리가 바르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팡이는 바르트의 배낭 옆구리에 있었다. 켈리가 그쪽으로 손을 뻗자 바르트가 꺼내 주려고 몸을 돌렸다. 바르트가 돌자 배낭 옆구리가 반대쪽으로 갔다. 켈리가 그쪽으로 따라 돌았다. 바르트가 다시 돌았다.
둘이 그 자리에서 두 바퀴를 돌았다.
"가만히 좀 있어요!"
"너나 가만히 있어!"
"아저씨가 돌잖아요!"
"꺼내 주려고 돈 거야!"

그사이에 거위가 니카에게 닿았다. 일곱 중 넷이 니카에게 갔다. 왜 니카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린은 목에 두른 붉은 천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지는 거위만 알았다. 니카가 뒤로 물러나다 넘어졌고 넘어진 자리에서 거위 하나가 그의 엉덩이를 물었다.
"아악! 아니 왜 저예요!"
린이 웃었다. 웃다가 거위 하나가 자기 쪽으로 오자 맨발로 그 거위를 마주 보고 섰다. 거위가 멈췄다. 린도 멈췄다. 둘이 한참 서로를 보다가 거위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오벨은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거위가 그 옆을 지나갔는데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거위에게 마당의 일부였다.

빗자루를 든 아낙이 집에서 나왔다. 아낙이 빗자루를 한 번 쓸었다. 일곱이 흩어졌다.
아낙이 다섯을 보았다. 엉덩이를 쥐고 주저앉은 젊은이와, 큰 남자 옆에서 손을 뻗은 채 멈춘 처녀와, 거위와 눈싸움을 하고 선 맨발의 처녀와, 가방을 든 채 꼼짝하지 않는 남자를 차례로 보았다.
"…다 큰 사람 다섯이서 거위한테 뭐 하는 거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마당을 벗어나서 오벨이 켈리 옆으로 왔다.
"손이 먼저 갑니다."
"…예?"
"꺼내려고 생각하기 전에 손이 갔습니다. 세 번이요."
켈리가 자기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반쯤 오므라든 채였다. 무언가를 쥐려다 만 모양 그대로 굳어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폈다. 펴고 나서 조금 걷다 보니 또 반쯤 오므라들어 있었다.
니카가 널빤지의 둘째 줄에 선을 그었다.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를 받치고 있었다.

셋째 줄을 떠올리게 한 것은 그 아낙의 빗자루였다.
"저거예요."
"빗자루?"
"아니요. 흔한 거요. 저 아주머니가 빗자루 들고 다니는 걸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잖아요."
"…"
"진짜는 짐에 넣어 두고 손에는 흔한 걸 드는 거예요. 길에서 막대기 들고 다니는 사람 많아요. 개 쫓으려고 들고, 짚으려고 들고. 그런 거 하나 든다고 쳐다보는 사람 없어요."
니카가 그 말에 확률을 붙이지 않았다. 붙일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바르트가 길가의 개암나무에서 가지 하나를 쳤다. 칼로 세 번 쳐서 잘랐고 잔가지를 훑어 냈다. 길이가 켈리의 지팡이와 비슷했고 굵기는 조금 가늘었다. 껍질이 덜 말라 손에 쥐면 미끄러웠다.
켈리가 받았다. 받고 나서 그것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다시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무게가 틀렸다. 지팡이는 가운데보다 끝이 조금 무거웠는데 이것은 손잡이 쪽이 무거웠다. 쇠 테가 있던 자리쯤에 옹이가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한 번 휘둘렀다. 공중이었다.
"치지 마."
"안 쳤는데요."
"치려고 했잖아."
"…휘둘러 본 건데요."
"그게 치려고 한 거야."

켈리가 그것을 쥔 채 걸었다. 쥔 손이 계속 고쳐 쥐었다. 쥘 때마다 손가락 자리를 바꿨고 바꿀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을 했다. 켈리가 그런 얼굴을 짓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니카가 널빤지의 셋째 줄 옆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건 진짜 흔해요. 길에 굴러다니는 거예요. 이걸로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루터에 닿은 것은 오후였다. 실베인으로 가려면 강을 하나 건너야 했고 강폭이 80미터쯤 되었다. 배는 하루에 두 번 떴다. 오후 배가 4시였고 일행이 닿았을 때 반 시간쯤 남아 있었다.
나루터 마당에 사람이 스물쯤 있었다. 짐꾼과 장사꾼과 보따리를 든 사람들이었다. 마당 한쪽 말뚝 위에 젊은 남자 하나가 걸터앉아 있었고 그 둘레에 예닐곱이 모여 있었다.
켈리가 그 남자를 알아보았다.
"…저 사람."
"누구."
"그 줄에 있던 사람이에요. 앞에서 셋째쯤."
켈리는 그 줄을 셀 때 얼굴도 같이 보았다. 그 남자가 왜 줄에서 빠졌는지는 몰랐다. 다만 줄에서 빠지는 데에는 좋은 이유가 하나 있었고, 그 남자가 지금 말뚝 위에 멀쩡히 앉아 있다는 것이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남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에서 애가 하나 내려오는데."
"애?"
"애였어. 여자애. 근데 키가 이만해."
남자가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손이 머리보다 한 뼘 위에 있었다.
"막대기를 들었는데 막대기가 이만해."
두 손을 벌렸다. 벌린 폭이 문짝만 했다.
"그걸로 한 번 치니까 다섯이 날아갔어."
"다섯이?"
"다섯이. 한 번에."

켈리가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다 듣고 나서 바르트에게 아주 작게 물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바르트가 사레가 들렸다.
"너잖아."
린이 말했다.
"…저 저렇게 안 컸는데요."
"다섯도 아니었어요. 둘이었어요."
니카가 말했다.
"셋입니다. 셋째는 바르트 씨가 깔았습니다."
오벨이 고쳤다.
"그건 내가 한 거잖아."
"예. 그러니까 저 이야기 안에서는 저 사람이 한 겁니다."

켈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자기 손을 보았다. 오른손에 개암나무 가지가 쥐어져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천천히 등 뒤로 옮겼다.
바르트가 그것을 보았다. 보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그가 그날 참은 것 중에 가장 큰 것이었다.

배삯이 모자랐다. 니카가 잔액을 세어 보고 그렇게 말했다. 다섯 중 셋은 건널 수 있고 둘은 못 건넌다.
"…누가 남아요?"
"아무도 안 남아요."
니카가 마당 반대편을 턱으로 가리켰다. 짐꾼 셋이 짐짝 위에 판을 벌여 놓고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다. 판돈이 동전 한 닢씩이었다.
"안 돼."
"이길 가능성이 7할이에요."
"안 된다고."
"저 사람들 던지는 거 봤어요? 셋 다 던질 때 손목을 꺾어요. 꺾으면 여섯이 덜 나와요. 그걸 모르고 여섯에 걸어요."
"…"
"그리고 저기는 저 이야기하는 사람 반대쪽이에요. 저쪽만 안 보면 돼요."
바르트가 대답하기 전에 니카가 갔다.

니카가 이겼다. 한 판을 이기고 두 판을 지고 그다음 다섯 판을 이겼다. 지는 판은 일부러 진 것이었는데 그것을 아는 사람은 니카뿐이었다. 짐꾼들의 동전이 니카 앞으로 옮겨 오는 동안 니카의 얼굴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바뀌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너 뭐 했어."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뭐 걸었지."
짐꾼 하나가 니카의 손목을 보았다. 손목에 천이 감겨 있었다. 주술사가 감는 천이었고 로엔 남부에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
"안 걸었어요. 진짜로 셈만 했어요."
"셈?"
"예. 셈이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니카는 그날 아무것도 걸지 않았다. 걸었으면 무언가 돌아왔을 것이고 돌아온 것이 없었으니 걸지 않은 것이다. 다만 이 자리에서 사실은 쓸모가 없었다. 셈으로 이겼다는 말은 주술로 이겼다는 말보다 더 믿기 어려웠다.
짐꾼이 니카의 목에서 붉은 천을 낚아챘다.
"이거라도 내놔."
"그건 안 돼요!"
니카가 천 끝을 붙들었다. 붙든 채로 끌려가다가 무릎을 꿇었다.
"그건 제 거예요! 어제부터 제 거라고요!"

켈리가 갔다. 간 것을 처음 본 사람은 바르트였다. 그가 손을 뻗었는데 닿지 않았다. 켈리가 짐꾼 앞에 섰다. 천을 쥔 팔이 보였다. 켈리가 개암나무 가지를 들어 그 팔을 쳤다.
딱.
소리가 가벼웠다. 가지가 가운데에서 부러졌다. 옹이가 있던 자리였다. 부러진 반쪽이 빙글 돌며 날아가 강물에 떨어졌다.
짐꾼이 자기 팔을 보았다.
"…아."
그것뿐이었다.

켈리가 자기 손을 보았다. 손에 반 토막이 남아 있었다. 부러진 끝이 하얗게 갈라져 있었고 껍질 아래 덜 마른 속이 젖어 있었다.
짐꾼이 웃었다. 웃음이 번졌다. 짐꾼 셋이 웃고 판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웃었다. 켈리는 그 웃음 속에서 반 토막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등의 맞은 자리가 당겼다. 휘두를 때 쓴 자리였다.
그때 말뚝 위의 남자가 일어섰다. 남자가 켈리를 보았다. 얼굴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본 것은 손이었고 손에 든 나무 토막이었다.
"…막대기."
옆 사람이 남자를 돌아보았다.
"막대기 든 애다."

웃음이 끊겼다. 끊기는 데 순서가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먼저 멈췄고, 그들이 멈춘 것을 보고 나머지가 멈췄다. 짐꾼이 마지막이었다. 짐꾼이 켈리를 다시 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보았다. 키가 크고 말랐고 여자였다. 손에 막대기가 있었다. 반 토막이었으나 그 이야기에는 막대기가 무슨 나무인지 나오지 않았다. 몇 토막인지도 나오지 않았다. 한 번에 갔다는 것만 나왔다.
짐꾼이 붉은 천을 놓았다.
"…농담이었소."
켈리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 아직 안 쳤는데요."
짐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켈리는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 방금 그것은 치려고 친 것이 아니었다. 천을 쥔 팔을 떼어 놓으려고 댄 것이었다. 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켈리는 알았고 그것은 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만 그 말은 이 자리에서 다른 뜻으로 들렸고, 들린 뜻 그대로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니카가 붉은 천을 끌어안고 일어났다. 짐짝 위에 동전이 그대로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가져가지 않았다. 판돈 앞에서 니카 셰르의 손이 그렇게 오래 멈춰 있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저거 가져가도 돼요?"
니카가 오벨에게 작게 물었다.
"딴 겁니까, 빼앗은 겁니까."
"딴 거예요."
"그럼 가져가십시오."
"근데 지금 가져가면 빼앗은 걸로 보일 것 같아요."
"예. 그렇게 보일 겁니다."
니카가 동전을 집었다. 집는 손이 떨렸다.

배가 왔다. 사람들이 탔다. 배는 넓지 않아서 스무 명이 타면 어깨가 닿았는데, 켈리 둘레만 어깨 하나만큼 비어 있었다. 아무도 그렇게 하자고 하지 않았다.
켈리가 반 토막을 무릎에 놓고 앉았다. 오벨이 그 옆에 앉았다. 오벨 둘레는 비지 않았다.
"…첫 줄이 바뀌었습니다."
"…예?"
"협조문의 첫 줄은 남색 로브였습니다. 저 사람들의 첫 줄은 막대기입니다."
켈리가 무릎 위의 반 토막을 보았다.
"…이거 그냥 나무인데요."
"예."
"아까 꺾은 거예요."
"압니다. 그래서 곤란합니다. 그 첫 줄에는 아무 나무나 다 맞습니다."

니카가 배 가장자리에서 널빤지를 꺼냈다. 세 줄이 적혀 있었고 위의 둘에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셋째 줄 옆의 동그라미를 한참 보다가 그 위에 선을 그었다.
"…9할이었는데."
"셋 다 했잖아."
바르트가 말했다.
"셋 다 했죠."
"셋 다 안 됐잖아."
"…셋 다 안 됐죠."
니카가 널빤지를 강물에 놓았다. 널빤지가 뱃전을 따라 조금 흐르다가 뒤로 처졌다. 니카의 셈은 빠르지만 가끔 맞지 않을 때가 있었다.

배가 강 가운데쯤 왔을 때 켈리가 뒤를 보았다. 나루터 마당에서 그 젊은 남자가 다시 말뚝에 올라앉아 있었다. 새로 온 사람이 셋 있었고 남자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그려 보이고 있었다. 두 손을 벌렸다가 한 손을 툭 꺾었다. 부러졌다는 시늉이었다. 그 이야기는 아까보다 한 줄이 길어져 있었다.

켈리가 반 토막을 물에 놓았다. 먼저 떨어진 반쪽이 어디쯤 갔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바르트가 배낭 옆구리의 끈을 풀었다. 겉옷에 감긴 채로 지팡이를 꺼내 켈리 쪽으로 내밀었다. 켈리가 받아서 겉옷을 벗겨 냈다. 이번에는 매듭이 금방 풀렸다. 바르트가 나루터에서 기다리는 동안 다시 묶어 둔 매듭이었다.
켈리의 손이 지팡이를 쥐었다. 손이 닫혔다.
이번에는 끝까지 닫혔다.

 

몫


비앙카 세렌은 아침부터 나루터에 있었다.
남색 코트는 짐 안에 접혀 있었다. 로브 입은 자를 쫓는 사람이 남색을 입고 다니면 안 된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 회색 여행 외투를 입고 있으니 마당의 누구도 그를 두 번 보지 않았다.
나루터 마당 한쪽 판자에 그 종이가 걸려 있었다. 희고 얇은 종이였고 왼쪽 위에 아홉 가닥 문장이 찍혀 있었다. 며칠 내린 비에 글자가 번져 아래쪽은 읽기 어려웠는데, 처마에 가려 있던 맨 윗줄은 멀쩡했다.
남색 로브.
그 종이는 비앙카가 왕도를 나설 때 들고 나온 묶음 중 하나였다. 남서 방면 검문소와 자치대에 돌린 것이 서른 장이었다.

말뚝 위에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틀 사이에 나루터 짐꾼이 된 사람이었고 짐을 지지 않을 때는 이야기를 했다. 새로 온 사람 넷이 그 앞에 모여 있었다.
"…막대기가 부러졌어. 딱 하고. 그런데 짐꾼이 물러났다니까."
"왜."
"그 애가 그랬대. 아직 안 쳤다고."
듣던 사람들이 웃었다. 비앙카는 웃지 않았다.
막대기로 치면 막대기가 부러질 수 있다. 다만 마도대 돌파형이 강화를 걸고 치면 부러지는 것은 막대기가 아니다. 그 애는 강화를 걸지 않고 쳤다. 걸지 않은 것인지 걸 수 없었던 것인지는 이야기만으로 알 수 없었다.

넷이 왔다. 갈색 겉옷에 곡물 자루를 멨고 걸음 폭이 같았다. 넷이 비앙카 앞에 멈췄는데 멈추는 데 시차가 없었다. 남서 국경 초소에서 빌려 온 정찰조였다. 빌린 서류는 없었다. 초소장이 비앙카에게 갚을 것이 하나 있었고 그것으로 갈음했다.
"보고."
조장이 입을 열었다. 종이는 꺼내지 않았다. 적히지 않아야 하는 일이었으므로 보고도 적히지 않았다.
"남쪽 큰길을 나루터까지 훑었습니다. 대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리 위에서 다섯과 마주쳤습니다. 셋에게 말을 걸었고 대답이 막힌 자는 없었습니다. 큰 남자 하나, 대장간 연장을 진다고 했습니다. 맨발의 처녀 하나, 실베인 소아레 출신이라 했습니다. 서류를 다루는 중년 남자 하나. 먼저 인사한 젊은 남자 하나."
"다섯이라 했네."
조장이 멈췄다.
"넷만 말했네."
"…다섯째는 보지 않았습니다."
"왜."
"다리가 좁았습니다. 발밑을 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조장이 다음 말을 하는 데 잠깐 걸렸다.
"…남색이 없었습니다."

비앙카가 말뚝 위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손을 벌렸다가 한 손을 툭 꺾는 중이었다. 큰 남자와 맨발의 처녀와 가방 든 남자와 붉은 천을 두른 젊은 남자. 다리 위의 넷과 나루터 이야기의 넷이 같았다. 다섯째 자리만 둘이 달랐다. 조장의 보고에서 그 자리는 비어 있었고 이야기에서는 막대기가 서 있었다.
회수과의 검문소 기준에는 네 항목이 있다. 남색 로브, 소매 끝 흰 띠, 도보 또는 승마, 단독. 비앙카는 한 달 반 전에 왕도에서 첫째 항목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넷째 항목도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426건 가운데 무리를 지어 달아난 자산은 없었다. 무리를 지으려면 먹을 것을 나눠야 하고, 나눌 것이 있으려면 벌어야 하며, 벌려면 9일보다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9일을 넘긴 자산이 드물었으므로 무리를 지은 자산은 없었다. 기준에 단독이라고 적은 사람은 틀리지 않았다. 그 사람이 본 자산은 전부 혼자였다.

"다리 위에서 자네가 보지 않은 하나가 대상이었네."
조장의 얼굴이 굳었다.
"…첫 줄이."
"알고 있네."
비앙카가 판자 쪽으로 턱을 들었다.
"저 첫 줄을 들고 나온 것이 나네."
조장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랐다. 이 일을 맡을 때 문서에 남지 않는 일이라는 말은 들었다. 문서에 남지 않는 일에서 잘못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는 듣지 못했다.

첫 줄은 고칠 수 있었다. 고치려면 사유를 적어야 했고, 사유에는 대상이 로브를 벗은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가 들어가야 했다. 타르실 중재 기록을 조용히 청구한 일과 월경 허가 없이 정찰조를 로엔에 들인 일이 거기 같이 들어간다. 고친 협조문은 회수과의 정식 문서가 되고, 정식 문서는 읽힌다. 그래서 비앙카는 고치지 않았다. 서른 장에 적힌 첫 줄은 지금도 서른 군데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강은 언제 건넜다던가."
"이틀 전이라고 합니다."
나루터에서 실베인 접경까지는 이틀 길이었다. 비앙카가 강 건너를 보았다. 안개가 물 위에 낮게 깔려 있어서 건너편 둑이 반쯤만 보였다.
어디로 갔나. 두 달 넘게 붙들고 있던 질문에 처음으로 답이 나왔다. 실베인이었다. 벨류엔 군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가면 마을이 문을 닫는 땅이었다. 그 땅 사람들은 여덟 해 전에 늪을 돌아 들어온 벨류엔군을 아직 기억했다.
"돌아가게. 초소로."
"…예."
"자네들은 여기 온 적이 없네."
"확인했습니다."
넷이 돌아섰다. 돌아서는 데도 시차가 없었다.

혼자 남은 비앙카가 짐에서 협조문 사본을 한 장 꺼냈다. 맨 윗줄 옆 여백에 펜으로 한 단어를 적었다.
막대기.
그 단어는 사본 한 장에만 적혔다. 서른 장의 원본에는 지금도 남색 로브가 첫 줄이었다. 비앙카가 사본을 접어 넣었다. 넣으면서 손끝이 허리의 칼집을 지나갔다. 홈이 열아홉 개 파여 있었다.
스무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강 건너 이틀 길 끝에서, 그날 오후에 린이 먼저 알았다.
린이 알았다는 것을 넷이 안 것은 린의 걸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맨 뒤에서 발을 끌던 린이 어느새 맨 앞에 가 있었다. 맨발이 젖은 흙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짧아져 있었다.
"…왜 그래."
"냄새."
"무슨 냄새."
"물 냄새가 달라."
켈리가 숨을 들이켜 보았다. 물 냄새는 며칠째 났다. 달라진 것을 켈리는 맡지 못했다.

길이 낮아지면서 안개가 올라왔다. 위에서 내려오는 안개가 아니라 아래에서 차오르는 안개였다. 발목께부터 오더니 무릎까지 왔고 거기서 더 오르지 않았다. 무릎 아래가 하얗게 지워진 채로 다섯이 걸었다. 안개 위로 나무들이 솟아 있었는데 밑동이 전부 물에 잠겨 있었다. 잠긴 지 오래되어 줄기 아래쪽이 검었고 그 위를 이끼가 두껍게 덮었다. 이끼는 한 가지 색이 아니었다. 짙은 초록과 회색과 붉은 갈색이 섞여 있었고 가까이 가서 보면 하나하나가 다른 이끼였다.

길 한가운데에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길이 그 나무를 비켜 둘로 갈라졌다가 나무 너머에서 다시 만났다. 둥치는 어른 셋이 팔을 벌려야 둘러쌀 만했고 껍질에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여러 사람이 새긴 것이라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잎 모양이 있고 물결 모양이 있고 새 발자국 같은 것이 있었다. 오래된 문양은 껍질이 자라 올라와 반쯤 덮었고 새것은 아직 하얬다.
린이 나무 앞에 멈춰 손바닥을 둥치에 댔다. 대고 한참 있었다.
"…여기서부터예요."
"뭐가."
"실베인."

켈리가 둘레를 보았다. 문이 없었다. 초소도 깃대도 줄도 없었다. 켈리가 아는 국경은 초소와 깃대와 줄이었다. 줄을 서서 번호를 대면 통과시켰고 대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잡혔다.
여기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그 너머에 사람이 많았다. 나무 뒤 둔덕에 갈대로 엮은 거적이 수십 장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고 그 아래마다 사람이 앉아 있었다. 연기가 여러 줄 올랐다. 둔덕 한가운데에 큰 솥이 걸려 있었고 그 앞에 줄이 서 있었다. 켈리는 그 줄을 세지 않았다. 세지 않아도 길었다.
켈리가 따라 걸었던 줄은 아직 뒤에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보다 먼저, 다른 길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우기 내내 북쪽에서 사람이 내려왔고 내려온 사람들은 이 나무 앞에서 멈췄다.
나무 뿌리 사이에 노파가 하나 앉아 갈대를 엮고 있었다. 엮은 것이 옆에 쌓여 있었다. 거적이 되는 것이었다.

노파는 엮던 손을 멈추지 않고 고개만 들었다. 린이 그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 가까이 숙였다가 들었다. 로엔의 물길 앞에서 숙이던 각도와 같았다.
"소아레의 린이에요. 돌아왔어요."
"소아레 린. 로엔 물길 일 하러 간."
"예."
"이 년 만이오."
"예."
실베인에는 성이 없다. 사는 땅의 이름을 이름 앞에 붙인다. 소아레는 늪 동쪽의 마을 이름이었고, 린이 어디서 왔는지 묻는 사람에게는 그것으로 대답이 끝났다.
노파가 다시 갈대를 엮었다. 그것으로 인사가 끝났다.
켈리가 린 옆에 가서 똑같이 무릎을 꿇었다. 린에게 배운 인사였다. 숙이는 각도가 린보다 조금 깊었고 드는 것이 조금 늦었다. 노파의 손이 한 번 멈췄다.
"처음 하는 인사요."
"…예."
"누구한테 배웠소."
켈리가 린을 보았다. 노파가 린을 보았다. 린이 고개를 돌렸는데 귀가 붉었다.

"들어오려면 몫을 말하시오."
노파가 말했다. 넷이 린을 보았다.
"실베인은 통행세를 안 받아요. 들어오는 무리는 마을에 해 줄 일을 하나씩 말해요. 그게 몫이에요. 말한 일을 하면 들어와요."
"못 하면."
바르트가 물었다.
"못 들어와요."
"일 못 하는 사람은. 늙었거나 애거나."
"같이 온 사람이 대신 져요. 몫은 무리마다 지니까요."
바르트가 둔덕 쪽을 보았다. 거적 아래 앉은 사람들 가운데 노인과 아이가 많았다.

"저 사람들 다 받으면 먹을 게 모자라지 않아요?"
니카가 물었다.
"모자라오."
노파가 말했다. 엮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럼 왜 받아요."
"나도 여덟 해 전에 여기 몫을 말하고 들어왔소."
니카가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노파의 왼손 등에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다. 갈대를 당길 때마다 그 자리가 땅기는지 손가락이 한 박자씩 늦었다.
수풀회는 피난 온 사람들을 어떻게 할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정해진 것이 없으니 접경 마을들은 옛날부터 하던 대로 했다. 몫을 말하고 말한 것을 하면 누구든 들어온다. 그 예법은 수풀회보다 오래되었다.

노파가 바르트를 보았다. 눈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 목덜미의 혹을 보는 눈이었다.
"어디 땅이오."
"카르소요."
"없어진 땅이오."
"예."
"몫은."
"쇠 고치는 거요."
노파가 갈대 엮던 손으로 둔덕 아래를 가리켰다. 거적 하나 옆에 쇠붙이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날이 나간 낫과 자루가 빠진 괭이와 밑이 뚫린 솥이었다. 피난 온 사람들이 지고 온 것 가운데 못 쓰게 된 것들이었고, 못 쓰게 되었는데도 버리지 못해서 쌓아 둔 것들이었다.
바르트가 그 무더기를 한참 보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그쪽으로 걸어가 배낭을 내려놓았다.

다음이 오벨이었다.
"어디 땅이오."
"벨류엔입니다."
갈대를 엮던 손이 멈췄다.
"불 놓은 땅이오."
"예. 저는 불을 놓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땅입니다."
"몫은."
"적는 일입니다. 약속이든 셈이든요."
"실베인은 적지 않소. 기억하오."
"…그럼 무엇을 하면 됩니까."
노파가 둔덕 아래 물가를 턱으로 가리켰다. 물동이 둘과 멜대가 놓여 있었다.
"물 길으시오."
오벨이 그 멜대를 보았다. 서른여덟 해 동안 그가 어깨에 메어 본 것은 서류 가방뿐이었다.

니카 차례였다.
"어디 땅이오."
"…타르실이요."
손이 다시 멈췄다. 이번에는 오래 멈췄다.
"상인이오?"
"아니요."
"그럼 무엇이오."
니카가 대답하기 전에 잠깐 있었다. 거짓말을 고르는 시간은 아니었다. 니카는 거짓말을 할 때 빨랐다.
"…도박사요."
"그건 더 나쁘오."
"왜요?"
"상인은 지도를 팔았소. 도박사는 뭘 걸었는지도 모르겠소."
타르실 상인이 실베인 늪의 통행로를 그린 지도를 벨류엔에 판 일이 있었다. 그 지도를 따라 벨류엔군이 늪을 돌아 들어와 마을들을 태웠다. 노파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실베인 사람이면 누구나 알았고 타르실 사람이면 대개 알았다. 니카도 알았다. 니카의 눈이 노파의 왼손에 가서 멎었다.
"수풀회에서 이 일로 회의를 마흔 번 했소. 타르실 상인은 돌려보내기로 했소."
"전 상인이 아닌데요."
"그러니 문제요. 도박사는 회의에서 다룬 적이 없소."
"…그럼 어떻게 돼요."
"회의를 해 봐야 아오."
"회의는 언제 하는데요."
"다음 달."
니카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멜대를 메다 말고 오벨이 기침을 한 번 했다. 웃음을 덮는 기침이었다.

"얘 몫까지 제가 할게요."
린이 말했다. 노파가 린을 보았다.
"데려온 건 저예요."
"물길 일이 두 배가 되오."
"예."
노파가 갈대를 한 줄 더 엮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회의 안 해도 되오."
니카가 린을 보았다.
"…그럼 저는 뭐 해요."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요?"
"아무 짓도 하지 마. 네가 뭘 하면 그것도 내 몫이 돼."

나무 뒤에서 아이 둘이 고개를 내밀었다. 하나가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껍질도 벗기지 않은 가지였다. 아이가 켈리의 얼굴을 보고 켈리의 손을 보았다. 그러고는 자기 가지를 휘둘렀다.
"한 번에 다섯!"
다른 아이가 뒤로 넘어지는 시늉을 했다. 둘이 같이 웃으며 나무 뒤로 달아났다.
켈리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지팡이를 등 뒤로 옮겼다.
"숨기지 마. 이제 소용없어."
린이 말했다. 노파는 갈대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막대기 든 애가 남쪽으로 온다는 말이 어제 왔소. 강을 같이 건넌 사람이 먼저 왔소."
"…저 막대기 아닌데요."
"말이 그렇게 왔소."

노파가 켈리를 보았다.
"어디 땅이오."
켈리가 대답하지 못했다. 노파가 기다렸다. 갈대를 엮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켈리는 어디서 태어났는지 몰랐다. 여섯 살 전을 기억하지 못했고, 원적이 지워졌으므로 찾아볼 데도 없었다. 켈리가 아는 땅은 막사 바닥과 연병장과 참호였는데 그것은 땅이 아니라 자리였다.
"…모르겠는데요."
"모르오?"
"예."
노파가 그 대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둔덕 위에도 자기 땅을 잃은 사람이 많았다. 여덟 해 전에는 노파도 그랬다.
"땅이 없으면 몫으로 말하시오."

켈리가 생각했다. 생각하는 동안 노파가 기다렸다. 나무 뒤에서 아까 그 아이들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다들 같은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때리는 거요?"
노파가 갈대를 내려놓았다.
"그건 몫이 아니오. 그건 소문이오. 여기는 때릴 사람이 없소."
나무 뒤에서 아이 하나가 킥 하고 웃었다. 니카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떨렸다.

켈리가 다시 생각했다. 생각하는 동안 눈이 둔덕의 솥으로 갔다. 솥 앞의 줄이 조금씩 줄었다. 맨 앞의 여자가 그릇을 내밀었고 국자가 한 번 들어갔다 나왔다. 그릇에 담긴 것이 묽었다. 여자가 그릇을 기울이자 바닥이 보였다.
켈리는 그 그릇을 알았다. 골짜기에서 빵 한 덩이를 들고 서 있던 날 켈리는 그 빵을 예순으로 나누면 손톱만 해진다는 셈을 했다. 손톱만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날 켈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켈리가 품에 손을 넣었다. 종이가 두 장 있었다. 그중 한 장을 꺼냈다. 접힌 자리가 닳아 보풀이 일었고 숯 글씨가 조금 번져 있었다. 획 순서가 틀렸고 글씨가 컸으며 줄이 아래로 처졌다. 셋째 줄에는 빠뜨렸던 글자가 옆에 작게 끼워져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펴서 손가락으로 첫 줄을 짚었다.
"…잎이 다섯 갈래."
손가락이 내려갔다.
"줄기가 붉다. 그늘에서 자란다. 땅에 붙어서 자란다. 옆에 이끼가 있다."
마지막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짐승이 뜯어 먹은 자국이 있다."
켈리가 종이에서 눈을 들었다.
"…먹어도 되는 풀을 고를 줄 알아요. 여덟 번 먹어 봤어요. 안 아팠어요."
노파가 켈리를 한참 보다가 늪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가서 해 보시오."

늪가는 물과 땅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다. 디디면 땅이고 한 발 더 디디면 물이었다. 켈리가 거기 무릎을 꿇었다. 꿇은 자리로 물이 배어 올라와 무릎이 젖었다. 켈리가 풀 하나를 손으로 들추었다. 잎을 세었다. 넷이었다. 놓았다. 다음 것을 들추었다. 다섯이었다. 줄기를 보았다. 푸르렀다. 놓았다.
켈리는 그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여섯 줄을 차례로 대 보고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놓았다. 놓은 것이 뽑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아까 그 아이 둘이 따라와 있었다. 둘이 켈리 옆에 쪼그려 앉아 켈리가 하는 것을 보았다. 하나가 켈리가 놓은 풀을 집어 들었다.
"이건 왜 버려요?"
"이끼가 없어서요."
아이가 그 풀 둘레를 보았다. 이끼가 없었다. 아이가 그것을 놓고 다른 풀을 들추었다. 잎을 손가락으로 세었다.
"다섯이에요!"
"줄기요."
"…푸른데요."
"그럼 아니에요."
아이가 실망한 얼굴로 풀을 놓았다. 그러고는 또 다른 것을 들추었다. 해가 기울 무렵에는 셋이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셋 다 무릎이 젖었다.

켈리가 돌아왔을 때 짙은 녹색 겉옷의 앞자락이 불룩했다. 앞자락을 걷어 올려 그 안에 담아 온 것이었다. 어깨선이 팔뚝까지 내려오는 겉옷이라 앞자락이 넓었고 많이 들어갔다. 크다고 웃음거리가 됐던 옷이었다.
켈리가 노파 앞에 그것을 쏟았다. 노파가 갈대를 내려놓고 하나씩 집어 보았다. 잎을 뒤집었고 줄기를 꺾어 냄새를 맡았다. 다 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켈리가 그 앞에 서 있었다. 서 있는 자세가 보고하는 자세였다.
노파가 풀 하나를 따로 골라 옆에 놓았다.
"이건 쓴대라는 풀이오. 먹는 것이 아니라 달여서 배 아픈 사람한테 주는 것이오."
"…알아요."
"아시오?"
"린이 가르쳐 줬어요."
노파가 둔덕 아래 도랑 쪽을 보았다. 린이 무릎까지 물에 들어가 막힌 자리를 손으로 더듬고 있었다. 노파가 나머지를 한데 모았다.
"솥에 넣으시오."

그날 저녁 솥의 죽이 달랐다. 국자가 들어갔다 나오면 그릇에 초록이 섞였고, 그릇을 기울여도 바닥이 금방 보이지 않았다. 맛은 썼다. 쓴 것을 먹는 얼굴들이 있었는데 그릇을 내려놓는 사람은 없었다.
켈리는 줄 끝에 서서 그것을 보았다. 맛이 쓴지 어떤지는 켈리에게 상관이 없었다. 켈리가 본 것은 그릇 바닥이었다. 바닥이 보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해가 진 뒤에 일이 끝났다. 바르트 옆에 쌓인 쇠붙이가 줄었고 고친 낫이 다른 쪽에 따로 쌓였다. 도랑이 뚫려 마을 앞으로 차오르던 물이 빠졌다. 오벨이 멜대를 내려놓았는데 내려놓은 뒤에도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는 물동이를 몇 번 날랐는지 세어 두었고 아무도 묻지 않았으므로 말하지 않았다. 마흔한 번이었다.
니카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니카에게는 그날 가장 힘든 일이었다. 오후 내내 거적 아래 앉아 솥 앞의 줄을 셌고, 센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그것이 무슨 일이 될까 봐서였다.

노파가 갈대를 다 엮고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켈리를 보았다.
"기억했소."
"…예."
"내일도 하시오."
켈리가 그 말을 들었다. 내일도 하라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열두 해 동안 매일 들었다. 다만 그때 그 말 앞에는 언제나 번호가 있었다.

늪가에서 같이 무릎을 꿇었던 아이 하나가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막대기 든 애가 풀 고를 줄 안대!"

그날 밤 접경 마을에서 그 말이 여러 번 쓰였다. 첫 줄은 나루터에서 건너왔고 둘째 줄은 솥 앞에서 생겼다.
둘째 줄은 켈리가 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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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착의


길이 갈라지는 자리에 창고가 넷 서 있었다.

마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나온 것은 사흘 만이었다. 그 사이에 지나온 것은 집 두어 채짜리 자리들이었고 그런 데서는 아무것도 살 수 없었다. 파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팔 것이 없어서였다.

여기는 달랐다. 로엔의 창고는 전부 같은 도면으로 짓는다. 지붕 모양이 같고 문에 박힌 쇠붙이가 같고 문턱 높이가 같다. 넷이 나란히 서 있으니 하나를 네 번 본 것 같았다.

창고 앞에 사람이 모여 있었다. 장이 선 것은 아니고 그냥 모여 있는 것이었는데, 로엔에서는 창고 앞이 그런 자리였다. 물건이 오가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말이 오간다. 곡식 값과 물 차례와 누구네 둑이 터졌다는 이야기가 거기서 돌았다.

사람이 마흔쯤 되었다. 켈리가 그 수를 세고 나서 벽 쪽으로 붙었다.

붙어서 섰다. 등이 벽에 닿았고 왼쪽이 창고 모서리였으며 앞이 트였다. 그 자리에서는 들어오는 사람이 전부 보이고 뒤로는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켈리는 그 자리를 고른 것이 아니었다. 고를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고, 사람이 많은 데 서면 몸이 알아서 그쪽으로 갔다.
"뭐 해."
"…아무것도요."
"왜 거기 서 있어."
"여기가 편해서요."

린이 켈리 옆에 가서 똑같이 벽에 등을 붙여 보았다. 붙여 보고 나서 다시 떨어졌다.
"안 편한데."
"…"

"닷새 치 삽시다."
니카가 그렇게 말했다. 잔액을 아는 사람이 그였으므로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린이 먼저 들어갔다. 맨발이었다. 로엔 남부에서 맨발로 다니는 사람은 드물지 않았으나 이 계절에는 드물었고, 그래서 두어 사람이 린의 발을 보았다가 얼굴을 보았다가 다시 발을 보았다.
"…왜 봐요."
"안 봤습니다."
"봤잖아요."
"봤는데 안 봤다고 하는 게 예의입니다."
"그럼 아저씨는 왜 봤다고 해요."
"저는 예의가 없습니다."

린이 그 말을 한참 생각했다.

오벨은 창고 쪽으로 가지 않았다. 그는 창고 옆 벽으로 갔다. 벽에 판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어른 키만 했고 아래쪽에 못이 여러 개 박혀 있었으며 못마다 종이가 걸려 있었다. 로엔의 창고 앞에는 어디나 그런 판자가 있었다. 임차료 고지, 물 차례표, 곡물청 고시, 분쟁 조정 결과 같은 것이 붙었다. 판자가 벽에 걸린 것은 그것이 공공의 물건이기 때문이고, 공공의 물건이라 못을 뽑지 않는 한 아무거나 걸 수 있었다.

로엔은 붙이는 것을 막는 나라가 아니었다.

오벨이 종이를 하나씩 읽었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읽었고 읽는 속도가 느리지 않았다. 스무 해 동안 그가 한 일이 그것이었다. 읽을 것이 있으면 읽는다. 읽지 않으면 나중에 그 종이가 자기 앞으로 온다.

여섯 번째 종이에서 그가 멈췄다. 종이 질이 달랐다. 다른 것들은 로엔에서 흔한 누런 종이였는데 이것은 희고 얇았다. 결이 곱고 가장자리가 반듯했다. 손으로 찢은 것이 아니라 날로 자른 종이였고, 그렇게 자른 종이를 쓰는 관청이 이 대륙에 몇 되지 않았다.

왼쪽 위에 문장이 찍혀 있었다. 원 안에서 실이 뻗어 나오는 도안이었고 가닥이 아홉이었다.
"…바르트 씨."

오벨이 부른 소리가 크지 않았는데 바르트가 왔다. 오는 걸음이 빨랐다. 그다음에 니카가 왔고 린이 왔다. 켈리가 맨 나중에 왔다. 켈리는 벽에서 떨어지는 데 한 박자가 걸렸다.

「협조 요청. 벨류엔 마법왕국 마법청 회수과.」

그 아래로 글이 이어졌다. 오벨이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읽지 않은 이유는 주변에 사람이 있어서였다.
"…뭐라고 쓰여 있는데요."
"찾는다는 내용입니다."
"누구를요."
"…"

켈리가 판자 앞으로 갔다. 읽었다. 읽는 데 시간이 걸렸다. 켈리는 글자를 배운 지 석 달이 되지 않았고 배운 방식도 정규가 아니었다.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읽었고 한 줄을 다 읽고 나면 다음 줄로 눈을 옮기는 데 한 번 더 짚어야 했다.

그래서 켈리는 그 종이를 아주 천천히 읽었다. 그 자리의 다섯 중에 가장 오래 읽은 사람이 켈리였다.

「아래 인원의 소재에 관해 정보를 가진 자는 가까운 관청에 신고하기 바란다. 신고자에게는 벨류엔 마법청이 사례한다.」

「인상착의.
1. 남색 로브. 소매 끝과 자락 끝에 흰 띠 두 줄. 가슴과 등에 은실 문장.
2. 여성. 열여덟. 키가 크고 마름.
3. 짙은 갈색 머리. 짧음.
4. 벨류엔 마법청 제4마도대 소속. 등록번호 아래와 같음.」

번호가 적혀 있었다. 켈리가 그 번호를 보았다. 열두 해 동안 불린 것이었고 복창한 것이었으며 옷 목깃 안쪽에 먹으로 찍혀 있는 것이었다.

그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성명 미상.」

켈리가 그 네 글자를 두 번 읽었다.

성명 미상이라고 적은 사람이 누구인지 켈리는 몰랐다. 그 사람이 게을러서 그렇게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몰랐다. 벨류엔 마법청의 장부에 켈리의 이름이 적힌 칸이 없었고, 칸이 없는 것을 협조문에 옮길 수는 없으므로 담당자는 규정대로 적었다. 규정에는 알 수 없는 항목을 미상으로 적게 되어 있었다.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름을 적는 칸이 없었다.

"…이거요."
켈리가 말했다.
"왜."
"저 아니에요."

넷이 켈리를 보았다.
"뭐가 아닌데요."
"이거 다 틀렸어요."

켈리가 손가락으로 첫 줄을 짚었다.
"남색 로브. 저 그거 안 입었잖아요."
"자루에 있지 않습니까."
"입었냐고 썼잖아요. 입은 게 아니면 안 보이잖아요."

니카가 그 말에 대꾸를 못 했다.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인상착의라는 것은 보이는 것을 적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인상착의가 아니다.

켈리의 손가락이 둘째 줄로 내려갔다.

거기서 멈췄다.

여성. 열여덟. 키가 크고 마름. 켈리가 그 줄을 두 번 읽었다. 틀린 데를 찾으려고 읽은 것인데 찾지 못했다. 키는 크다. 마른 것도 맞다. 요즘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그 조금으로 저 줄을 틀리게 만들 수는 없었다.

손가락이 셋째 줄로 갔다. 짙은 갈색 머리. 짧음.

켈리가 자기 머리끝을 만져 보았다. 넉 달 동안 자르지 않아서 턱선보다 조금 내려와 있었다. 조금 길어진 것을 짧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다.

넷째 줄에는 숫자가 있었다. 그 줄에 관해서는 짚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숫자는 켈리의 것이 맞았고, 열두 해 동안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켈리가 손가락을 내렸다.
"…하나만 틀렸네요."
"그 하나가 제일 위에 있습니다."
오벨이 말했다.

사람을 찾을 때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을 첫 줄에 쓴다. 그것이 인상착의를 쓰는 방식이었고 틀린 방식이 아니었다. 길에서 사람을 찾는 자에게는 그 줄 하나면 되고, 나머지 셋은 붙잡은 다음에 맞춰 보는 항목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을 그 사람이 벗어 버린 경우는 그 방식이 다루지 못했다.

"…이거 베끼겠습니다."
오벨이 가방을 열었다.
"미쳤어요? 지금 여기서요?"
"예."
"누가 보면요."
"보면 베끼는 사람으로 봅니다. 저는 원래 베끼는 사람처럼 생겼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오벨 리스트는 어디에 서 있어도 서류를 다루는 사람처럼 보였다. 스무 해 동안 그렇게 살면 몸이 그렇게 된다.

그가 숯을 꺼내 베꼈다. 종이가 아깝지 않은 척했으나 실은 두 장 중 한 장을 썼다. 다 베끼고 나서 그는 원본을 그대로 두었다. 떼지 않았다.
"왜 안 떼요."
"떼면 뗀 사람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
"그리고 저건 여러 장 돌렸을 겁니다. 여기 것 하나 뗀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때 린이 켈리의 소매를 잡았다. 잡은 것은 말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린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고 창고와 창고 사이의 길을 보고 있었다.
"저기."

셋이 그쪽을 보았다. 켈리는 보지 않았다. 켈리는 이미 그쪽을 보고 있었다.

넷이었다. 길 건너편에서 창고 쪽으로 오는 중이었고 거리가 서른 걸음쯤이었다. 옷은 이 나라 것이었다. 로엔 남부에서 흔한 갈색 겉옷이었고 새것이 아니었으며 한 사람은 밀짚 모자를 썼다. 모자 챙이 한쪽으로 처져 있었다. 비를 여러 번 맞으면 그렇게 된다. 짐도 이 나라 것이었다. 어깨에 멘 자루가 곡물 자루였고 그것도 제대로 닳아 있었으며, 밑동 해진 자리에 다른 천을 덧댔는데 덧댄 실 색까지 맞춰 놓았다.

옷에는 틀린 데가 하나도 없었다.
틀린 데가 하나도 없는 것이 틀린 것이었다. 이 계절에 이 길을 가는 사람의 옷에는 대개 어딘가 틀린 자리가 있다. 급해서 못 고친 데가 있거나 고치다 만 데가 있다. 넷의 옷에는 그런 자리가 없었다. 넷 다 같은 정도로 낡아 있었고 같은 정도로 손질되어 있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린이 물었다.
"예."
켈리가 그렇게 대답했다.
"누군데."
"몰라요."
"아는 사람이라며."
"얼굴은 몰라요."

넷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가 보고 있던 것은 얼굴이 아니었다. 발이었다.
넷이 걷는 걸음 폭이 같았다. 같은 것이 우연일 수도 있었다. 다만 그 넷은 길이 고르지 않은 자리에서도 폭을 유지했다. 웅덩이가 나오면 넘지 않았다. 폭을 줄여 웅덩이 안으로 발을 넣었다가 지나서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렇게 걸으면 신이 젖고 느려진다. 느려지는데도 그렇게 걸었다.
넷 사이의 간격도 같았다. 앞사람이 멈추면 뒷사람이 같이 멈췄는데 멈추는 데 시차가 없었다. 보고 멈춘 것이 아니라 들으면서 걷고 있었다는 뜻이다.

벨류엔 마법청의 행군 교범에는 걸음 폭이 적혀 있다. 76센티미터다. 그 숫자가 정해진 이유는 그것이 사람이 가장 편하게 걷는 폭이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시간당 이동 거리를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계산할 수 있으면 예정표를 쓸 수 있고 예정표가 있으면 보급을 붙일 수 있다. 사람을 그 폭에 맞추는 편이 보급을 사람에 맞추는 것보다 싸다.

켈리는 그 76이라는 숫자를 배운 적이 없었다. 다만 열두 해 동안 그 폭으로 걸었다. 걷다가 틀리면 맞았다. 지금 그것을 몸에서 빼내지 못한 사람 넷이 길 건너에서 오고 있었다.

"…물건 사요."
켈리가 말했다.
"뭐요?"
"닷새 치 산다면서요. 사요."

켈리가 돌아서서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걷는 폭이 일정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본 사람이 구별하지 못했다.

넷이 지나갔다. 지나가면서 그중 하나가 판자 쪽을 보았다. 협조문이 붙은 그 판자였다. 보고 나서 눈을 떼지 않고 잠깐 더 보았는데, 보는 것이 종이가 아니라 판자 앞에 선 사람들이었다.
거기 선 사람은 셋이었다. 서류를 베끼는 중년 남자와 맨발의 아이와 아주 큰 남자.
남색은 없었다. 넷이 그대로 지나갔다.

창고 안은 어두웠고 먼지 냄새가 났다. 곡물 자루가 벽을 따라 두 층으로 쌓여 있었는데 아래층이 눌려 배가 나와 있었다. 바닥에 굵은 소금 같은 것이 흩어져 있었다. 밟으면 소리가 났다. 밀을 오래 쌓아 둔 창고 바닥에는 그런 것이 생긴다. 켈리가 자루 하나를 골랐다. 고르는 척했다. 실은 자루와 자루 사이의 틈으로 밖을 보고 있었다. 창고 문이 남쪽으로 나 있었고 그 틈으로 길이 손바닥만큼 보였다.

넷이 길 끝에서 멈췄다. 멈춰서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말했다. 말하는 동안 넷이 모여 서지 않았다. 둘이 서고 둘이 양쪽으로 조금 떨어져 바깥을 보았다. 그것도 배운 대로 하는 것이었다. 그중 하나가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가리킨 방향이 남쪽이었다. 남쪽은 일행이 가는 방향이었다.

켈리가 자루를 내려놓았다. 두 번째로 스친 것은 그날 오후였다.
일행이 마을을 나와 한 시간쯤 걸었을 때였다. 길이 좁아지는 자리에 다리가 하나 있었다. 나무다리였고 폭이 수레 한 대 지나갈 만했으며 난간이 한쪽에만 있었다. 로엔에서 다리는 공공이 놓고 공공이 고친다. 고치는 값은 그 다리를 쓰는 밭 주인들이 나누어 내고, 그래서 다리마다 누가 얼마를 냈는지 적힌 판자가 붙어 있었다. 이 다리 판자에는 이름이 아홉이었다. 그중 둘에 줄이 그어져 있었고 줄을 그은 이유는 적혀 있지 않았다.

아래로 물이 흘렀다. 비가 그친 지 이틀이라 물이 아직 흐렸고 소리가 컸다. 나뭇가지 하나가 떠내려오다 교각에 걸렸고 잠깐 그대로 있다가 돌아서 다시 떠내려갔다.

다리 건너편에서 넷이 오고 있었다. 같은 넷이었다. 아까보다 가까웠고 다리 폭이 좁아서 비켜설 자리가 없었다.

"…뒤로 가요."
니카가 낮게 말했다.
"뒤로 가면 뒤로 가는 걸 봅니다."
오벨이 말했다.
"그럼 어떡해요."
"건넙니다."

다섯이 다리에 올라섰다. 널이 젖어 있어서 밟을 때마다 발이 조금씩 밀렸다. 가운데쯤에 한 장이 들떠 있었고 밟으면 반대쪽 끝이 들렸다.
여덟 사람이 폭 두 걸음짜리 다리에서 비켜 가는 데는 요령이 있다. 한쪽이 난간 쪽으로 붙고 다른 쪽이 그 옆으로 지나간다. 그 사이에 어깨가 스친다. 바르트가 앞이었다. 그가 난간 쪽으로 붙었다. 덩치가 커서 그가 붙어도 자리가 넉넉하지 않았다.

넷 중 하나가 바르트를 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한 번 보고 다시 위로 보았다. 그 눈이 사람을 재는 눈이었다.
"…무겁겠소."
"예."
"뭘 지고 가시오."
"연장이오."
"무슨 연장이오."
"대장간 것이오."

그 사람이 바르트의 배낭을 한 번 더 보았다. 배낭 안에 든 것은 대장간 연장이 아니었다. 계량 저울과 유리병과 밀랍 먹인 봉지와 두 가지 가루였다. 봉지 중 하나는 화약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것보다 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만 바르트의 대답에 틀린 데가 없기도 했다. 그는 대장간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카르소에서였고 그때 그가 열넷이었으며, 그 대장간은 지금 없다.
"…고단하시겠소."
"예."

그 사람이 지나갔다. 그다음이 오벨이었다. 오벨은 아무도 그를 보지 않았다. 중년이고 마르고 서류 냄새가 나는 사람은 길에 흔하다. 그다음이 니카였다. 니카를 본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니카가 먼저 인사를 했으므로 그것으로 끝났다. 인사를 받으면 그 뒤를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다음이 린이었다. 린에게서 걸음이 멎었다.
"…발을 왜 그러고 다니시오."
"이게 편해서요."
"이 철에 맨발로 다니면 병 나오."
"실베인에선 다 그래요."
"실베인 사람이오?"
"예."
"어디."
"소아레요."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베인의 마을 이름을 다 아는 사람은 실베인에도 없다. 고개를 끄덕인 것은 알아서가 아니라 대답이 막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지명에서 막힌다. 막히는 자리가 정해져 있어서 그 자리만 보면 된다는 것을 그는 배웠다.

린은 막히지 않았다. 사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켈리였다. 켈리가 난간 쪽으로 붙었다. 붙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숙인 것은 감추려고가 아니라 발밑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들뜬 널이 하필 그 자리에 있었다. 넷 중 마지막 사람과 어깨가 스쳤다. 스치면서 그쪽 자루가 켈리의 팔에 닿았다. 자루 안에서 쇠붙이가 서로 부딪는 소리가 아주 짧게 났다. 곡물 자루에서 날 소리가 아니었다.

그 사람은 켈리를 보지 않았다. 보지 않은 이유는 다리 폭이 좁아 발밑을 봐야 했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이 남색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다리의 폭이 조금 더 넓어 켈리를 자세히 봤다면, 혹은 자신의 발 밑이 아니라 켈리가 신은 장화를 봤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사람이 무언가를 찾을 때는 그것을 찾는다. 찾는 것이 없으면 눈이 그냥 지나간다.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사람 눈이 원래 그렇게 생긴 것이다. 눈은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을 본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자기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다리 위에서 마주친 여덟 중 다섯을 살폈고 그중 셋에게 말을 걸었으며 대답이 막히는 사람이 있는지를 보았다. 배운 대로 했다. 찾는 것 중에 틀린 것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넷이 다리를 건너갔다.
켈리가 멈춰 서지 않았다. 계속 걸었다. 다리를 다 건너고 스무 걸음쯤 더 간 다음에야 뒤를 돌아보았다. 넷은 이미 굽이를 돌아 보이지 않았다.
"…간 거예요?"
린이 물었다.
"갔습니다."
"…저 못 알아본 거예요?"
켈리가 물었다.
"예."
"왜요? 넷 중에 셋 맞다면서요."

오벨이 가방에서 아까 베낀 종이를 꺼냈다.
"첫 줄이 로브입니다."
"그래서요."
"사람은 첫 줄부터 봅니다. 첫 줄이 안 맞으면 둘째 줄을 안 봅니다."
"그게 그렇게 돼요?"
"그렇게 됩니다. 저도 스무 해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니카가 그 말을 받았다.
"근데 그럼 저쪽도 곧 압니다."
"예."
"저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면 스무 날 안에 협조문을 고칩니다."
"고치려면 절차가 필요합니다."
"무슨 절차요."
"인상착의를 고치려면 왜 틀렸는지를 적어야 합니다. 왜 틀렸는지를 적으려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적어야 하고요."

니카가 그 말의 뜻을 알아듣는 데 잠깐 걸렸다.
"…그걸 적으면요."
"적으면 그 사람이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가 문서에 남습니다."

그 말에 아무도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벨류엔 마법청 회수과의 소조가 로엔 남부의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느 문서에도 적히지 않았다. 적으려면 월경 허가가 있어야 했고 월경 허가를 받으려면 대상의 소재를 특정해야 했으며, 소재를 특정할 수 있으면 애초에 소조를 보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허가 없이 건넜다. 허가 없이 건넌 것은 적히지 않는다. 적히지 않는 일은 고칠 수도 없다. 그들을 보낸 사람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 보냈다. 자기가 쓸 수 있는 종이가 한 장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종이 없이 하는 일뿐이었다.

그날 저녁에 일행이 불 앞에 앉았다. 자리를 잡은 데가 무너진 돌담 옆이었고 담이 바람을 반쯤 막아 주었다. 담에 덩굴이 올라와 있었는데 돌 틈으로 뿌리가 들어가 돌을 밀어내는 중이었다. 이 담은 앞으로도 무너질 것이었다.
아무도 오래 말하지 않았다. 니카가 잔액을 고쳤고 린이 발을 씻었으며 바르트가 배낭을 다시 쌌다. 오벨은 베낀 종이를 폈다가 접었다가 다시 폈다. 세 번째로 폈을 때 바르트가 그쪽을 보았고 오벨이 접었다.
켈리가 자기 자루를 열었다. 안에 로브가 있었다. 개켜진 채로 스무 날 넘게 그 자리에 있었다. 접은 자리가 눌려 굳었고 한 귀퉁이에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꺼내 무릎에 놓았다.
"…버리려고?"
바르트가 물었다.
"아니요."

켈리가 소매 끝을 보았다. 흰 띠 두 줄 중에 한 줄이 거의 지워져 있었다. 가슴의 은실 문장은 그대로였다. 은은 안 상한다.
"이게 첫 줄이래요."
"…뭐."
"저를 찾는 첫 줄이요. 이거래요."

켈리가 그 말을 하고 나서 한참 있었다.
열두 해 동안 켈리가 받은 것 중에 가장 좋은 물건이 그것이었다. 처음 받은 날 켈리는 그것을 밤에 한 번 더 만져 보았다. 천이 두꺼웠고 안감이 매끄러웠으며 앞에 붙은 은실이 등잔 밑에서 빛났다. 그날 잠들기 전에 켈리가 한 일은 소매 끝의 흰 띠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어 본 것이었다. 두 줄이 끝까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그것을 받았을 때 켈리는 자기가 무엇이 된 줄 알았다.
그것이 켈리를 찾는 첫 줄이었다.

켈리가 로브를 도로 개켰다. 배운 대로 개켰다. 소매를 안으로 접고 자락을 둘로 접고 어깨선을 맞추면 문장이 위로 온다. 그렇게 정해진 이유는 검열할 때 보기 편하라고였다. 켈리가 그것을 자루에 넣고 입구를 묶었다.
"…아저씨."
"어."
"이거 태우면요."
"태우면 없어지지."
"그럼 저 못 찾아요?"

바르트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답을 아는 사람은 그 자리에 하나 있었는데 오벨은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이 사람이 태울 것이기 때문이고, 태우고 나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는 태울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첫 줄은 고쳐진다. 고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불이 한 번 튀었다.
"…근데요."
린이 말했다.
"그 종이에 지팡이는 안 적혀 있던데요."

넷이 린을 보았다. 오벨이 베낀 종이를 다시 폈다. 네 항목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로브. 성별과 나이. 머리. 소속과 번호. 지팡이는 없었다.
"…왜 없지."
"지급품이라서요."
켈리가 말했다.
"뭐?"
"그거 다 똑같아요. 마도대는 다 같은 거 받아요. 그러니까 그걸로는 못 찾죠."

켈리가 그렇게 말하고 자기 지팡이를 보았다.
어두운 회갈색이고 장식이 없고 끝이 뭉툭했다. 벨류엔 마법청이 돌파형에게 지급하는 규격품이었고 같은 것을 받은 사람이 그해에만 백 명이 넘었다. 그중 지금까지 쓰고 있는 사람이 몇인지는 회수과의 다른 장부에 적혀 있었다.

몸통 가운데에 세로로 간 실금이 있었다. 그 위에 쇠 테가 한 줄 감겨 있었다. 이음매가 비뚤고 표면이 우글거렸다. 열이틀 전에 어느 마을 어귀에서 급히 녹여 먹인 것이었고 먹인 사람은 지금 그 옆에 앉아 있었다. 같은 것을 받은 백 명 중에 이렇게 생긴 것은 하나였다.
아무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켈리도 하지 않았다. 다섯 다 같은 것을 보고 있었는데 그것을 말로 만든 사람이 없었다.

린이 발을 불 쪽으로 내밀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뭐가."
"안 적혀 있으니까요."

켈리가 지팡이를 무릎 옆에 세웠다. 세우면서 쇠 테가 불빛을 받았다. 고르게 받지 않았다. 우글거리는 자리마다 빛이 끊겨서, 한 줄로 이어져야 할 것이 점점이 끊긴 채로 반짝였다.

켈리가 그것을 한 번 보고 눈을 돌렸다.

 

모르겠는데요



비가 다시 왔다. 굵은 비가 아니라 가는 비였고 그친 적이 없는 것처럼 왔다. 이런 비는 옷을 적시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한 시간쯤은 괜찮고 두 시간쯤 되면 어깨가 무거워지고 세 시간이 지나면 속옷까지 간다. 그때부터는 비가 그쳐도 마르지 않는다.

길이 비탈을 따라 돌아갔다. 왼쪽이 올라가는 쪽이고 오른쪽이 내려가는 쪽이었다. 내려가는 쪽으로 밭이 층층이 깎여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심겨 있지 않았다. 둑이 두 군데 무너져 흙이 아래 층으로 쏟아져 있었고 쏟아진 자리에 물이 고였다.

니카가 앞이었다. 니카가 먼저 멈췄다.
"…저기요."

아래쪽 길에 줄이 있었다. 사람이 늘어서서 가고 있었다. 길 한 줄을 따라 띄엄띄엄 이어져 있어서 끝이 어디까지인지 보이지 않았다. 수레가 둘이었고 하나는 바퀴가 하나뿐이라 두 사람이 멍에 자리를 들고 갔다. 짐은 많지 않았다. 지고 가는 짐이 적은 행렬은 멀리서 보면 가볍게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람들인가."
바르트가 말했다.
"그 사람들입니다."
오벨이 말했다.

같은 줄이었다. 나흘 전에 골짜기에서 나란히 걸었던 줄이다. 일행이 앞서 걸었고 줄이 뒤따라왔으므로 이쯤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일행은 하루에 12킬로미터를 걸었고 줄은 8킬로미터를 걸었다. 그 차이가 나흘 동안 쌓여야 했는데 쌓이지 않았다. 다리에서 회수조와 스친 다음 날부터 일행은 큰길을 버렸다. 그 넷이 큰길을 오르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길로 이틀을 돌았고 산길은 큰길의 절반도 나아가게 해 주지 않았다.

줄이 짧아져 있었다. 세어 보면 알 수 있었다. 나흘 전에 예순 남짓이었다. 켈리가 그때 세었다. 지금 세면 마흔 몇이었다. 켈리가 그것을 세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줄었네요."
린이 말했다.
"…"
"왜 줄었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둘 있었는데 둘 다 하지 않았다. 사람이 줄어드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고 그중에 좋은 이유는 하나뿐이다. 갈 데를 찾아서 빠지는 것이다. 나머지 이유는 길에 남는다. 일행이 비탈 위 길로 계속 갔다. 아래 줄과 나란히 가는 모양이 되었고 높이 차가 백 걸음쯤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켈리가 걸으면서 아래를 보았다. 줄의 앞쪽은 고르게 갔다. 걸음이 맞지는 않았으나 끊기지 않았다. 가운데쯤도 그랬다. 문제는 끝이었다. 끝이 늘어져 있었다. 맨 뒤 대여섯이 앞 무리에서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가 점점 벌어지는 중이었다. 벌어지는 것이 보일 정도면 많이 벌어진 것이다. 뒤쪽 여섯 중에 둘은 노인이었고 하나는 아이를 업었으며 하나는 다리를 절었다. 저는 쪽이 왼쪽이었고 디딜 때마다 어깨가 한쪽으로 떨어졌다.

앞 무리에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는 것이 모진 것은 아니었다. 돌아보면 멈춰야 하고 멈추면 다 같이 느려지고 느려지면 오늘 안에 다음 물까지 못 간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앞에 있었다. 길 위의 셈은 틀리는 법이 없었고, 틀리지 않기 때문에 끝이 떨어져 나갔다.
켈리가 그것을 한참 보았다.

"뭐 봐."
"…"
"야."
"…아무것도요."

비가 조금 굵어졌다. 그리고 비탈 아래쪽 덤불에서 사람이 나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처음에 둘이 나왔고 그다음에 넷이 나왔으며 조금 떨어진 바위 뒤에서 셋이 더 나왔다. 아홉이었다. 나오는 방식이 제각각이었다. 뛰어나온 자가 있고 걸어 나온 자가 있고 하나는 바지춤을 붙잡고 나왔다. 옷은 섞여 있었다. 둘은 자플랜 군복을 아직 입고 있었는데 윗옷만이었고 계급을 나타내는 끈은 뜯겨 있었다. 나머지는 민간 옷이었고 그중 하나는 여자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손에 든 것도 섞여 있었다. 군용 창이 둘, 단검이 셋, 나무 자르는 도끼가 하나, 쇠몽둥이가 둘. 마지막 하나가 활을 들고 있었다. 활은 제대로 된 물건이었고 그 자는 다른 여덟과 떨어져서 비탈 중턱에 자리를 잡았다.

"…아."
니카가 그 소리를 냈다.

아홉이 줄 쪽으로 가지 않았다. 줄의 앞 무리 쪽으로 가지 않고 끝 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돌아 들어가는 길이 익숙했다. 어디로 들어가면 앞에서 안 보이는지를 아는 자들의 걸음이었다. 이 비탈에서 이 짓을 처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앞 무리가 모르지는 않았다. 몇이 돌아보았다. 돌아보고 나서 걸음이 빨라졌다.

"…뛰네요."
린이 말했다.

"앉아."
바르트가 말했다.
"예?"
"앉으라고. 머리 내리고."

다섯이 둑 뒤로 몸을 낮췄다. 무너진 둑이라 높이가 허리쯤이었고 그 너머로 아래가 보였다. 비가 사이에 끼어서 소리가 잘 오지 않았다. 사람 소리는 났는데 말이 되어 오지는 않았다.

"…저거 도와요?"
린이 물었다.
"안 돼."
"왜요."
"이유가 없어."

바르트가 그렇게 말했다. 말하면서 그는 아래를 보고 있었고 보는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열다섯 해 동안 사람 많은 데서 일했고 그동안 이런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처음 본 날에는 뛰어 내려갔다. 그날 그가 얻은 것은 부러진 갈비뼈 둘과 아무것도 아닌 결과였다.

"니카."
"…셈이요?"
"어."
"안 좋습니다."
"얼마나."
"열에 둘이요."

니카가 그 숫자를 금방 냈다. 그는 숫자를 금방 내는 사람이었고 틀릴 때도 금방 냈다.
"저쪽이 아홉이고 이쪽이 다섯인데 붙을 수 있는 게 셋이에요. 하나는 맨손이고 하나는 아저씨고요."
"…저는 서른여덟입니다."
오벨이 말했다.
"그러니까요."
"…"
"그리고 활이 있어요. 활이 하나 있으면 셈이 반으로 꺾입니다. 저쪽은 높은 데 있고 우리는 내려가야 해요. 내려가는 동안 세 발 맞습니다."

오벨이 가방 끈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또 뭐요."
"청구할 상대가 없습니다."

셋이 오벨을 보았다.
"저 줄에는 대표가 없습니다. 삯을 받으려면 누구와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끝내고 나서 아무한테도 받지 못합니다."
"…그럼 공짜로 싸우는 거네요."
"예."
"그런 걸 뭐라고 합니까."
"저는 그런 걸 부르는 말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바르트가 짧게 웃었다. 웃은 것이 재미있어서가 아니었다. 아래에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말이 되어 왔다. 여자 목소리였고 길게 가지 않았다.

켈리가 일어섰다. 일어서는 데 아무 준비 동작이 없었다. 무릎을 짚지도 않았고 숨을 들이켜지도 않았다. 둑 뒤에 앉아 있던 몸이 그냥 펴졌다.
"야."
"…"
"야. 앉아."

켈리가 둑을 넘었다. 넘어서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걸음이 빠르지 않았다. 뛰지도 않았고 미끄러지지도 않았다. 젖은 비탈을 내려가는 데는 요령이 있는데 켈리는 그 요령을 쓰지 않았다. 그냥 발을 디디는 데로 디뎠다.

"…야!"

바르트가 둑 위로 몸을 올렸다. 올리면서 욕을 했다. 그 욕은 켈리에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니카가 바르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잠깐만."
"놔."
"저거 왜 저래요? 쟤 왜 저러냐고요."
"내가 어떻게 알아."

오벨이 그쪽을 보지 않고 가방을 열었다. 열어서 안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찾는 손이 빨랐다.
켈리가 비탈 중간쯤에서 멈췄다. 멈춘 것은 생각이 나서가 아니었다. 발밑이 미끄러져서였다. 한 걸음 밀렸고 지팡이를 짚어 멈췄다. 짚은 자리에 쇠 테가 흙에 박혔다.
그리고 다시 내려갔다. 활을 든 자가 켈리를 보았다. 보고 나서 활을 들었다. 들어 올리는 동작이 느렸다. 느린 이유는 그가 겨눌 것이 생길 줄 몰랐기 때문이다. 이 비탈에서 그는 여러 번 일을 했고 그동안 위에서 내려온 것이 한 번도 없었다.

첫 화살이 켈리의 왼쪽으로 세 걸음 떨어진 데 박혔다. 켈리가 걸음을 바꾸지 않았다.
두 번째 화살이 오른쪽으로 두 걸음 떨어진 데 지나갔다. 세 번째가 어깨 위를 지나갔는데 그것은 가까웠다. 바람 소리가 났다.

"…저게 미쳤나."
니카가 말했다.
"피할 줄을 모릅니다."
오벨이 말했다.
"뭐요?"
"저 사람은 열두 해 동안 줄을 섰고 그중 삼 년은 맨 앞이었습니다. 맨 앞에 선 자는 피하는 법을 안 배웁니다. 피하면 뒤가 맞으니까요."

니카가 그 말을 들었다. 듣고 나서 손목의 천을 풀었다.
"…아, 진짜."

켈리가 비탈을 다 내려갔다. 내려간 자리가 줄의 뒤쪽이었다. 거기 사람이 엉켜 있었다. 아홉 중 여섯이 그 자리에 있었고 셋은 조금 떨어져서 수레 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다리를 저는 남자가 바닥에 있었다. 업힌 아이가 울고 있었다.

군복 윗옷을 입은 자 하나가 켈리를 보았다. 그가 본 것은 열여덟 살짜리였다. 키가 크고 말랐고 큰 갈색 외투를 입었으며 손에 든 것이 나무 막대기였다. 막대기에 장식이 없었고 끝이 뭉툭했으며 가운데에 쇠 테가 감겨 있었다. 대장간에서 급히 만든 테였고 이음매가 비뚤었다.

그가 웃었다.
"…뭐야 너."
"…"
"뭐냐고."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대답할 말이 없어서였다. 켈리는 지금까지 자기가 누구인지 묻는 말에 숫자로 대답해 왔고, 그 숫자를 여기서 말하면 안 된다는 것만 알았다.
그가 창을 들었다. 들어서 겨눴다. 겨누는 자세가 제대로였다. 자플랜 보병 교범의 중단 자세였고 그는 그것을 배웠으며 배운 지 오래되지 않았다. 켈리가 한 걸음 들어갔다.
창이 뻗는 것보다 켈리가 들어가는 쪽이 빨랐다. 창은 겨눈 데서 뻗는다. 뻗기 전에 간격 안으로 들어가면 창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술이 아니라 길이의 문제였고, 켈리는 삼 년 동안 창 든 자를 상대로 그것을 했다.

지팡이가 옆에서 들어갔다. 관자놀이 아래였다. 한 번에 갔다. 소리가 둔탁했고 짧았으며 그 뒤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남자가 창을 놓고 무릎부터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몸이 접혔고 접힌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자리가 조용해졌다.
여섯 중 다섯이 켈리를 보았다. 보는 얼굴들이 비슷했다. 방금 본 것을 아직 처리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다섯이 한꺼번에 왔다. 여기서부터 어긋났다. 켈리는 한 사람을 상대하는 법을 배웠다. 벨류엔 마도대의 근접 교범은 돌파를 전제로 짜여 있고 돌파는 앞에서 오는 것을 뚫는 것이다. 옆과 뒤는 다른 사람이 맡는다. 삼 년 동안 켈리의 옆과 뒤에는 늘 다른 번호가 있었다. 지금은 없었다.
두 번째를 쳤다. 쳤는데 각이 모자랐다. 어깨를 치는 대신 팔을 쳤고 상대가 비틀거리기만 했다. 세 번째가 옆에서 들어왔다. 켈리가 지팡이를 돌렸는데 돌리는 사이에 네 번째가 등 쪽으로 돌아갔다.
쇠몽둥이가 등에 맞았다. 소리가 났다. 켈리가 앞으로 밀렸다. 밀리면서 무릎이 꺾였고 한 손으로 땅을 짚었다. 맞은 자리가 뜨거웠다.
이것이 처음이었다. 켈리는 맞아 본 적이 많았다. 기억나는 동안 내내 맞았다. 다만 열다섯 이후로 맞을 때는 몸에 강화가 걸려 있었다. 훈련장의 대련에서도 걸려 있었고 전선에서 맞을 자리에 들어갈 때는 늘 걸려 있었으며 걸린 몸은 맞아도 이렇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 전에 맞은 것은 손이나 회초리였다. 강화를 걸지 않은 몸으로 쇠붙이에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켈리는 오늘 처음 알았다.

걸 수가 없었다. 지팡이 가운데에 금이 가 있었다. 스무 날 남짓 전에 갔다. 나무는 마력을 통과시키는 재료고, 통과시키기 때문에 강화를 실어 나를 수 있고, 실어 나르기 때문에 상한다. 금이 간 나무에 그것을 다시 통과시키면 어떻게 되는지를 바르트가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가 그 말을 할 때 켈리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는데 그래도 들었다.

「한 번은 돼. 한 번 쓰면 끝이야.」

켈리가 땅을 짚은 손으로 몸을 밀어 올렸다.
올리는 동안 두 번 더 맞았다. 한 번은 옆구리고 한 번은 허벅지였다. 허벅지 쪽이 더 아팠다. 켈리가 일어서면서 지팡이를 아래에서 위로 올렸다.

턱이었다.
올려 친 것은 맞은 자리를 갚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일어서는 힘과 올리는 힘이 같은 방향이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켈리는 그 동작을 배운 적이 없었다. 배운 적 없는 동작이 가장 잘 들어갔다.

두 번째가 넘어갔다. 그때 위에서 소리가 났다.
바르트가 내려오고 있었다.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굴러오는 것에 가까웠다. 젖은 비탈에서 백 킬로그램 넘는 사람이 뛰면 그렇게 된다. 그는 중간쯤에서 발이 미끄러졌고 그대로 엉덩이로 미끄러져 내려왔으며 내려오는 동안 배낭이 등 위에서 두 번 튀었다.

"비켜어어어어."
"…"

아무도 안 비켰다. 비킬 시간이 없었다. 바르트가 셋째와 넷째 사이로 들어갔다. 들어간 것이 아니라 쏟아졌다. 넷째가 깔렸다. 깔린 자가 내는 소리가 사람 소리가 아니었다.

바르트가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배낭을 벗었다. 벗어서 손에 쥐었다.
"야."
"…예."
"화약 젖었어."
"…"
"사흘째 비 왔잖아. 젖었다고."
"그럼 어떡해요."
"이거 무거워."

그가 배낭을 휘둘렀다. 배낭 안에는 계량 저울과 유리병 여섯과 밀랍 먹인 봉지 넷과 두 가지 가루가 들어 있었다. 무게가 스물몇 킬로그램이었다. 그것이 반원을 그리며 지나갔고 지나간 자리에 있던 자가 날아갔다. 안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
바르트가 그 소리를 냈다.
"뭐 깨졌어요?"
"몰라."
"비싼 거예요?"
"나중에 울게."

위쪽에서 니카가 손목 천을 손가락에 감고 있었다. 감으면서 아래를 보고 있었고 보는 것이 활잡이였다. 주술은 거는 것이다. 니카는 그것을 빈민가에서 배웠고 가르친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으며 그 사람은 지금 없다. 거는 데 필요한 것은 상대를 보는 것과 손목의 천과 돌아올 자리를 정해 두는 것이었다. 돌아올 자리를 정하지 않으면 자기한테 온다.
니카는 정하지 않았다. 정할 시간이 없었다.
"…빗나가라."

활잡이가 네 번째 화살을 놓았다. 그 화살이 켈리의 어깨를 지나 땅에 박혔다. 빗나간 것이었다.
같은 순간에 니카의 발밑 흙이 꺼졌다. 무너진 둑 자리였고 밟으면 안 되는 자리였으며 니카는 그 자리를 밟고 있었다. 그가 비탈 아래로 굴렀다.
구르는 거리가 서른 걸음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저 사람 왜 저래요?"
린이 오벨에게 물었다.
"주술은 돌아옵니다."
"어디로요."
"건 사람한테요."
"그럼 왜 걸어요?"
"저도 묻고 싶습니다."

니카가 비탈 아래에 도착했다. 도착한 자리가 하필 다섯째 앞이었다. 다섯째가 단검을 들고 있다가 발밑으로 사람이 굴러오는 것을 보고 멈췄다. 멈춘 사이에 니카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잡은 것은 공격하려고가 아니라 멈추려고 잡은 것이었는데 결과는 같았다.
다섯째가 넘어졌다.

"…어어어."
"놔! 놓으라고!"
"못 놔요! 나 지금 안 멈췄어요!"

둘이 같이 굴렀다. 린이 둑 위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보다가 아래 길의 웅덩이를 보았다.
비가 사흘 왔으므로 길에 물이 고여 있었다. 고인 자리가 길 가운데였고 깊지 않았다. 발목까지였다.

정령술은 빌리는 것이다. 린이 무릎을 꿇고 손을 땅에 댔다. 대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베인의 정령술에는 주문이 없다. 주문은 벨류엔이 쓰는 것이고 실베인에서는 그것을 예의 없는 짓이라고 한다. 빌릴 때는 소리를 내지 않고 손만 댄다.
물이 올라왔다.
웅덩이가 넓어진 것이 아니었다. 길 아래의 물이 위로 배어 나왔다. 흙이 물을 머금었고 머금은 흙은 밟으면 꺼진다. 스무 걸음쯤 되는 길 한 토막이 그렇게 되었다.

그 위를 달리던 여섯째가 무릎까지 빠졌다.
린이 손을 뗐다. 떼고 나서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어."
"왜 그러십니까."
"…목이 안 말라요."
"…"
"아까부터 안 말라요. 하나도 안 말라요."

오벨이 그 말을 들었다. 들은 채로 아래를 보았다. 아래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켈리가 서 있었고 바르트가 서 있었고 니카는 땅에 있었다. 저쪽은 아홉 중 다섯이 움직이지 않았고 넷이 남았는데 그중 하나가 활이었다.
활잡이가 다섯 번째 화살을 재고 있었다. 겨누는 쪽이 바르트였다. 바르트는 크다. 큰 것은 맞히기 쉽다. 오벨이 둑 위로 올라섰다.
그는 서른여덟이었고 키가 보통이었으며 평생 무기를 쥐어 본 적이 없었다. 손에 든 것은 가방이었고 가방 안에는 종이와 숯과 밀랍과 도장 세 개가 들어 있었다. 그중에 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소리를 냈다.
"로엔 곡물청 남부 순찰대다!"

그 소리가 비탈을 타고 내려갔다. 목소리가 컸다. 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에는 스무 해가 들어 있었다. 스무 해 동안 그는 법정에서 조항을 읽었고 채무자의 문 앞에서 통고를 읽었으며 사람들이 싫어하는 문장을 사람들 앞에서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런 것을 읽는 목소리는 따로 있다. 높지 않고 평평하고 끝이 내려가지 않는다. 그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데 목소리만은 진짜였다.

"현장 인원 전원 정지! 무기 투하! 신원 확인한다!"
활잡이가 활을 내렸다. 내린 이유는 그 문장이 진짜였기 때문이 아니다. 저 문장을 들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플랜 사람이고 로엔 곡물청이 무엇인지 잘 몰랐으나, 저 말투로 외치는 자 뒤에는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런 목소리를 내는 자는 혼자 다니지 않는다.

그가 뒤를 보았다. 비탈 위에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비가 와서였다.

"…튀어!"

넷이 달아났다. 달아나면서 둘이 쓰러진 자를 끌고 갔고 셋은 두고 갔다. 젖은 덤불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가 멎었다. 그 자리가 조용해지고 빗소리가 다시 들렸다.
켈리가 서 있었다. 숨이 거칠었다. 거친 이유는 마력을 써서가 아니었다.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그냥 몸이 움직였고 몸이 힘들었다. 이렇게 숨이 차는 것은 켈리에게 낯선 종류였다. 마력을 쓰고 나면 속이 빈 것처럼 되는데 지금은 반대였다. 몸 안에 뜨거운 것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등이 아팠다. 옆구리도 아팠다. 허벅지는 디딜 때마다 아팠다. 켈리가 자기 손을 보았다. 지팡이를 쥔 손이었다. 손가락이 저절로 벌어지지 않았다.

바르트가 왔다. 와서 켈리의 등을 보았다. 외투 위로 비 맞은 자리와 다른 색이 번져 있었다.
"…벗어."
"…안 벗을래요."
"벗어."
"괜찮아요."
"야."
"…"
"너 지금 똑바로 서 있는 거 아니야."

켈리가 그제야 자기가 왼쪽으로 기울어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니카가 땅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데 두 번 걸렸다. 온몸에 진흙이 묻어 있었고 왼쪽 눈썹이 찢어져 피가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겼어요?"
"어."
"열에 둘이었는데요."
"그러게."
"셈이 틀렸네요."
"셈은 안 틀렸어. 쟤가 틀리게 만들었지."

바르트가 켈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줄이 멈춰 있었다.
앞 무리가 돌아와 있었다. 전부는 아니고 열몇 명이었다. 그들이 떨어진 자리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누구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가까이 오지 않는 이유는 방금 여기서 일어난 일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이다. 다리를 저는 남자가 땅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면서 한쪽 팔을 썼다. 다른 팔은 쓰지 못했다. 아이를 업은 여자가 켈리 쪽으로 왔다. 오다가 세 걸음 앞에서 멈췄다.
"…누구세요."

켈리가 그 말을 들었다. 들어 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다만 그때 묻는 자가 원한 것은 번호였다. 번호를 대면 명부를 찾아보고 명부에 있으면 통과시켰다. 번호를 대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잡혔다.
지금 묻는 사람은 명부를 들고 있지 않았다.

"…"
"이름이 뭐예요."
"…"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것은 숨기려고가 아니었다. 켈리는 자기 이름을 안다. 석 달 전에 어떤 사람이 그것을 수첩에 적어 주었고 켈리는 그 글자를 외웠다. 지금 그것을 말할 수 있었다.
말하지 않은 이유를 켈리는 설명하지 못했다. 말하면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것만 알았고,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몰랐다.
여자가 기다렸다. 기다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숙이고 나서 돌아갔다.
오벨이 비탈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다 내려와서 그는 가방을 열었다. 종이를 꺼냈다. 두 장 남은 것 중 하나였다. 숯을 쥐었다.

그리고 멈췄다. 그가 멈춘 것은 쓸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쓸 말은 많았다. 날짜가 있고 장소가 있고 제공한 역무가 있고 발생한 손해가 있었다. 유리병 여섯 중 몇 개가 깨졌는지는 세어 보면 나온다. 사람 하나가 등을 맞았고 하나가 눈썹이 찢어졌다. 삯을 매기려면 매길 수 있었다. 하지만 받을 사람이 없었다.
계약서에는 양쪽이 필요하다. 한쪽에 이름을 쓰고 다른 쪽에 이름을 쓴다. 저 줄에는 쓸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없어서가 아니라 줄을 대표하는 이름이 없어서였다. 저기 마흔몇 명이 있는데 그중 누구도 나머지를 대신해 서명할 수 없었다. 서명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려면 모여서 정해야 하고, 모여서 정하는 일을 저 사람들은 지금 할 수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다음 물까지 가야 했기 때문이다.

오벨이 숯을 내렸다. 그가 종이를 도로 넣었다. 넣고 나서 가방을 닫았고 닫는 손이 늦었다.
"…안 쓰십니까."
바르트가 물었다.
"못 씁니다."
"또요?"
"또입니다."

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것을 다섯이 보았다. 떨어졌던 뒤쪽 여섯이 앞 무리에 붙었다. 붙은 것은 누가 기다려 줘서가 아니라 앞이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멈춘 동안 따라붙었고 다시 가기 시작하자 또 떨어질 것이었다.

켈리가 품에 손을 넣었다. 안에 종이 두 장과 마른 꽃 하나와 빵 한 덩이가 있었다. 빵은 나흘 전 것이었고 품에서 눌려 납작해졌으며 딱딱해져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꺼냈다. 꺼내서 다리를 저는 남자에게 갔다. 남자가 켈리를 보았다. 보는 눈에 아직 아까 본 것이 남아 있었다.
켈리가 빵을 내밀었다. 내미는 동작이 서툴렀다. 켈리는 받는 동작을 열두 해 동안 했고 내미는 동작은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그 빵을 품에 넣던 날이었고 그때는 상대가 받지 않았다.
남자가 받았다. 받고 나서 손 안에서 한 번 눌러 보았다. 딱딱했다.
"…고맙소."
"…"
"이거 언제 거요."
"…나흘요."
"나흘 전 거요?"
"예."
"왜 안 먹었소."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품에 넣었고 돌아서서 갔다. 가면서 왼쪽 어깨가 디딜 때마다 떨어졌다. 줄이 멀어졌다. 다섯이 그 자리에 남았고 비는 계속 왔다. 쓰러져 있는 셋은 그대로 있었고 그중 둘이 숨을 쉬고 있었다.

바르트가 켈리 앞으로 왔다. 와서 한참 서 있었다.
"야."
"…예."
"왜 내려갔어."

켈리가 바르트를 보았다. 보고 나서 아래를 보았다. 아래에 자기 발이 있었고 발 옆에 지팡이 끝이 있었으며 쇠 테에 진흙이 묻어 있었다. 그 질문의 답을 켈리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것은 아까 둑 위에서 본 장면이었다. 줄의 끝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고 앞에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줄에 섰고 언제나 뒤쪽이었다. 뒤쪽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켈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지금 일어난 일과 이어 붙이는 방법을 몰랐다. 그런 것을 이어 붙이는 일을 켈리는 배운 적이 없었다.

"…모르겠는데요."
"몰라?"
"예."
"모르는데 내려갔어?"
"…예."

바르트가 뭐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말하려던 것은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이유 없이 움직이면 죽는다는 말이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그 말을 열다섯 해 동안 여러 사람에게 했다. 그 말을 한 뒤에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켈리의 어깨를 한 번 쳤다. 치고 나서 아프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
"미안."
"괜찮아요."
"안 괜찮잖아."
"…예."

니카가 둑 쪽으로 걸어가면서 혼잣말을 했다.
"이길 가능성이 열 번 중에 둘이었는데."
"…"
"이게 되네."

린이 그 옆에서 걸었다. 린은 아직 목이 마르지 않았고 그래서 물을 마시지 않았다. 마시지 않은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린은 알고 있었으나 몸이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정령술사는 자기 몸의 신호를 잃는 대가로 원소를 빌리고, 신호가 없는 동안은 자기가 어디까지 쓰였는지 모른다.

린이 걷다가 한 번 비틀거렸다.
"…어?"
"마시십시오."
오벨이 물통을 내밀었다.
"목 안 마른데요."
"그러니까 마시라는 겁니다."

일행이 비탈을 올라갔다. 그날 저녁 줄은 물가에 닿았다. 닿은 시각이 해가 진 다음이었고, 원래대로라면 해 지기 전에 닿았어야 했으나 낮에 반 시간쯤 멈춰 있었기 때문에 늦었다. 불을 피우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낮의 일을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달랐다. 어떤 사람은 다섯이 왔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셋이 왔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큰 남자가 사람을 날렸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위에서 관리가 외쳤다고 했다. 그 외침이 진짜 관리였는지 아닌지로 두 사람이 다투다가 그만두었다.

한 가지는 같았다.
"…먼저 내려온 애가 있었어."
"애?"
"애였어. 여자애."
"뭘 들고?"
"막대기."
"막대기?"
"응. 그냥 막대기. 여기쯤에 쇠 감긴 거."

말한 사람이 손으로 길이를 그렸다. 그린 길이가 실제보다 길었다.

"그걸로 뭘 했는데."
"쳤지."
"그래서?"
"한 번에 갔어."

듣던 사람이 믿지 않았다. 믿지 않는다고 말했고 말한 사람이 화를 냈다. 화를 내다가 둘 다 그만두었다. 그만둔 이유는 둘 다 피곤했기 때문이다.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물어본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 밤에 그 자리에서 쓰인 말은 이름이 아니었다.

막대기 든 애.
그 말이 그 자리에서 다섯 번쯤 쓰였고 다음 날 아침에도 쓰였다.

 

전령 도착 지연

**벨류엔 마법왕국 · 북부전선 작전과**

하렐 가도가 끊긴 날은 그해 다섯째 달 열이렛날이었고, 끊는 데 걸린 시간은 한나절이 되지 않았다.
끊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를 고르는 데 두 달이 걸렸다는 것이다. 자르는 일은 어디서 자를지를 정하고 나면 쉽다. 어려운 것은 자를 자리를 아는 일이고, 그것은 칼이 아니라 종이로 한다.

테린 보스는 서른넷이었고 벨류엔 북부전선 작전과의 참모였다. 그가 두 달 동안 한 일은 자플랜 보급 수레를 세는 것이었다.
세는 방법은 단순했다. 하렐 가도가 내려다보이는 능선에 관측 초소가 셋 있었고, 그 셋은 원래 적 병력의 이동을 보고하기 위해 있는 것이었다. 병력이 움직이지 않는 날에는 보고할 것이 없었으므로 초소의 일지에는 빈 줄이 많았다. 테린 보스는 그 빈 줄 대신 수레를 적게 했다. 지나간 수레의 수와 시각과 방향만 적으면 되는 일이었고, 초소병들은 그것이 무슨 쓸모가 있는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은 이유는 물어도 대답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고, 벨류엔에서 아래 사람이 위에 묻는 일은 드물었다.

두 달치 일지가 모였을 때 그는 그것을 한 장에 옮겼다. 옮기고 나서 보인 것이 하나 있었다. 셋째 달 중순까지 북쪽으로 가는 수레는 이레마다 한 번씩 몰려서 올라갔다. 셋째 달 하순부터 그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넷째 달에는 아흐레였고 다섯째 달에는 열흘이 되었다.
수레의 수는 줄지 않았다. 간격만 벌어졌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내는 데 그는 사흘을 썼다. 사흘째에 그는 자플랜 전선이 셋째 달에 어디를 밀었는지를 조회했고, 하렐 방면 제3 보루가 그때 넘어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보루가 넘어간 자리를 지도에 대고 자를 올려 보았다.

팔백 미터였다.
그는 그 숫자를 보고 한참 있었다. 자플랜이 팔백 미터를 얻었다는 것은 벨류엔에서는 손실로 기록된 사건이었다. 그 기록을 읽은 사람 중에 자를 올려 본 사람은 그때까지 없었다. 수레 한 대가 왕복하는 거리가 팔백 미터 늘어나면 한나절에 한 번 더 갈 수 있던 것을 못 가게 된다. 못 가는 만큼은 다른 수레가 메우거나 뒤로 밀린다. 뒤로 밀린 것이 두 달 동안 쌓이면 간격이 사흘 벌어진다.
간격이 사흘 벌어졌다는 것은 저쪽이 이미 한계에 닿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가 작성한 건의서는 넉 장이었다. 첫 장에 수레 집계표가 있고 둘째 장에 간격 변화 그래프가 있으며 셋째 장에 하렐 가도의 지형이 있었다. 넷째 장에는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이 길을 사흘만 막으면 북쪽 네 보루가 굶습니다.」

그 건의서는 올라간 지 엿새 만에 승인되었다. 승인한 사람은 그 넉 장을 다 읽지 않았다. 넷째 장만 읽었다. 넷째 장만 읽어도 되게 쓴 것이 테린 보스가 벨류엔에서 열두 해 동안 배운 기술이었다.

**자플랜 왕국 · 하렐 가도**

하렐 가도는 자플랜 북부군의 등뼈였다. 가도라고 부르지만 포장된 길은 아니었다. 자갈을 깔고 다진 길이고 비가 오면 질척거렸으며 수레 두 대가 겨우 비켜 갔다. 다만 그 길 말고는 길이 없었다. 북쪽 20 킬로미터 구간에서 동쪽은 바위 능선이고 서쪽은 습지였다. 능선은 수레가 못 넘고 습지는 수레가 빠진다. 사람은 둘 다 지나갈 수 있었으나 사람이 지고 갈 수 있는 양으로는 보루 넷을 먹일 수 없었다.

그 20 킬로미터가 허리였다. 허리를 지키는 병력은 많지 않았다. 많을 이유가 없었다. 길 양쪽이 못 지나가는 땅이면 그 길을 치려는 자도 그 땅을 건너야 하고, 건너지 못하므로 길만 보면 된다. 길의 남쪽 끝과 북쪽 끝에 초소가 있었고 가운데에 보급 중계소가 하나 있었다. 중계소에는 수레를 세워 두는 마당과 창고 둘과 병사 스물이 있었다. 병사 스물은 싸우라고 둔 것이 아니었다. 수레를 세고 장부를 쓰고 바퀴가 빠지면 고치라고 둔 것이었다.

다섯째 달 열이렛날 새벽에 수레 열네 대가 중계소를 떠나 북쪽으로 출발했다. 수레에 실린 것은 밀가루와 소금과 건초와 기름이었다. 기름 수레가 둘이었고 그것이 맨 뒤였다. 기름은 뒤에 두는 것이 규정이었다. 앞에 두면 사고가 났을 때 앞이 다 막힌다. 호송 병력은 열둘이었다. 보급대장은 드레이스 판 카르소였고 마흔한 살이었으며 왼팔에 회색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 띠는 카르소계 신민이 자플랜 군복을 입을 때 붙이는 것이었고 규정이었으며 떼면 처벌 대상이었다. 그는 그것을 열아홉 해 동안 둘렀다. 수레 호송에 공병 하나가 따라붙었다. 바퀴와 차축을 보는 사람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공병의 이름은 요른 하이덴이었다. 열일곱이었고 카르소계였으며 제3 보루에서 차출되어 내려와 있었다. 차출된 이유는 그가 손이 좋다는 말이 올라갔기 때문이고, 그 말을 올린 사람은 제3 보루의 중대장이었으며, 그는 그것을 칭찬으로 올렸다.

요른은 아버지가 목수였다. 카르소 남부에서 수레도 짰다. 수레를 짜는 목수는 바퀴를 알고 바퀴를 아는 자는 차축을 안다. 요른은 그것을 열 살 전에 배웠고 그 뒤로 잊을 기회가 없었다. 그가 그날 새벽에 한 일은 열네 대의 차축에 기름을 먹이는 것이었다. 기름은 보급품이 아니었다. 바퀴에 쓰는 기름은 따로 나오지 않았으므로 요른은 식용 기름 수레에서 조금씩 덜어 썼다. 그것이 규정 위반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고 드레이스도 알았으며 둘 다 말하지 않았다. 기름을 안 먹이면 차축이 탄다. 차축이 타면 수레가 선다. 수레가 서면 하루가 밀린다.
하루가 밀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요른은 제3 보루에서 보았다. 수레가 떠난 뒤 요른이 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셋째 수레의 짐을 다시 묶었다. 묶은 사람이 서툴러서 한쪽이 기울어 있었고 그대로 가면 10 킬로미터쯤에서 쏟아질 것이었다. 다시 묶는 데 걸린 시간 때문에 열네 대가 출발하는 것이 반 시간 늦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수레는 가도의 가운데쯤에 있었다. 가운데쯤은 동쪽 능선이 가장 가까워지는 자리였다. 능선 밑동이 길에서 100미터가 안 되었고 거기부터 길이 완만하게 휘었다. 휜 자리에서는 앞뒤가 서로 보이지 않는다. 벨류엔 기병 예순이 그 휜 자리의 양쪽에서 나왔다.
기병만 온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가 넷 따라왔다. 넷 중 하나가 열여섯이었고 둘이 열셋이었으며 하나가 열두 살이었다. 열두 살짜리는 결계형이었다. 벨류엔 마법청은 결계형을 분류한 그해에 내보낸다. 결계는 조준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조준이 필요 없는 기술은 가르치는 데 시간이 덜 들고, 시간이 덜 드는 쪽부터 내보내는 것이 보충률을 맞추는 방법이었다.

열두 살짜리가 길 북쪽에 벽을 세웠다. 벽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맨 앞 수레의 말이 거기서 멈췄고 멈춘 뒤에 앞으로 가지 않았다. 말은 사람보다 먼저 안다. 마부가 고삐를 당겼고 말이 뒷걸음질을 쳤으며 그 바람에 둘째 수레와 부딪쳤다. 열셋짜리 둘이 뒤쪽으로 갔다. 포격형이었다. 둘이 같은 자리를 겨눴다. 겨눈 자리가 맨 뒤의 기름 수레였다. 기름을 뒤에 두는 것은 사고가 났을 때 앞이 막히지 않게 하기 위한 규정이었다. 그 규정을 쓴 사람은 사고를 생각했지 사격을 생각하지 않았다. 뒤에 있는 것은 치기도 쉽다.

기름 수레 둘이 거의 동시에 탔다. 불이 붙은 기름은 흐른다. 가도가 가운데가 높고 가장자리가 낮게 다져져 있었으므로 흐른 기름은 양쪽 도랑으로 갔고 도랑을 따라 앞쪽으로 번졌다. 열넷 중 뒤의 다섯이 그 안에 들어갔다. 앞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혔고 뒤는 탔다.
드레이스 판 카르소가 그날 한 일 중에 가장 빠른 판단은 북쪽으로 뚫으라고 하지 않은 것이었다. 벽은 열두 살짜리가 세운 것이었고 그 아이가 버티는 동안은 뚫리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마법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어떤 종류인지는 몰랐고, 몰랐으므로 시험하지 않았다.

그가 명령한 것은 수레를 길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길 밖은 서쪽 습지였다. 수레가 빠지는 땅이다. 다만 빠지는 것과 타는 것 중에서는 빠지는 쪽이 낫다. 여덟 대가 습지 가장자리로 들어갔다. 바퀴가 발목까지 묻혔고 거기서 멈췄다. 멈춘 자리에서 불은 오지 않았다.

기병 예순이 길 위로 들어왔다. 호송 열둘과 마부 열넷이 그들을 맞았다. 맞았다고 쓰는 것은 양식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고,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와 달랐다. 마부는 싸우는 사람이 아니다. 호송 열둘 중에 전투 경력이 있는 자가 넷이었다.
그 싸움은 길지 않았다. 요른 하이덴은 그 시각에 셋째 수레 밑에 있었다. 셋째 수레는 습지로 들어가다 왼쪽 뒷바퀴가 돌에 걸렸고 축이 비틀렸다. 요른이 그것을 보고 수레 밑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이유는 축을 받쳐 올리면 바퀴가 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고, 들어가면서 그는 망치와 쐐기를 가지고 갔다.
수레 밑은 어두웠고 진흙이 차가웠다. 위에서 나는 소리가 멀게 들렸다. 그가 축을 받치고 쐐기를 세 번 쳤을 때 수레 위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떨어진 것은 그 수레의 마부였고 요른은 그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함께 온 지 나흘 되었고 이름이 마른이었으며 카르소계는 아니었다.
요른이 수레 밑에서 나왔다. 나왔을 때 기병 하나가 바로 앞에 있었다. 요른이 그 자리에서 한 일은 망치를 든 것이었다. 든 것이 공격하려고 든 것인지 막으려고 든 것인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손에 들고 있던 것이 그것뿐이었다. 말이 그를 치고 지나갔다. 치인 것은 어깨였다. 요른이 뒤로 날아가 수레바퀴에 등이 부딪쳤고 숨이 한 번 끊겼다가 돌아왔다. 돌아오고 나서 왼팔이 올라가지 않았다.

기병은 그를 다시 보지 않았다. 말을 탄 자가 땅에 넘어진 자를 일일이 확인하는 일은 없다. 확인하려면 내려야 하고 내리면 느려진다. 싸움은 그 뒤로 얼마 가지 않아 끝났다. 끝났을 때 길 위에 서 있는 자플랜 병사는 없었다. 벨류엔 기병은 수레를 태우는 데 시간을 더 쓰지 않았다. 여섯 대가 이미 탔고 여덟 대가 습지에 박혀 있었으며 박힌 수레는 꺼내는 데 하루가 걸린다. 꺼내는 데 하루가 걸리는 수레는 태운 수레와 같다.
그들이 길 북쪽으로 빠져나갔다. 빠져나가기 전에 결계를 거둔 열두 살짜리가 말에서 내려 앉았다. 앉은 것이 아니라 주저앉은 것이었고 일으켜 세우는 데 둘이 붙었다. 그날 그 벽에 부딪친 것은 놀라 날뛴 말 몇 마리와 북쪽으로 달아나려던 마부 몇이었다. 결계는 부딪친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받아서 세운 사람의 몸으로 옮긴다. 그 아이는 그날 저녁까지 숨을 깊게 쉬지 못했고 기침을 할 때마다 갈비뼈 안쪽을 손으로 눌렀다. 교범에는 그것이 정상 범위라고 적혀 있었다.

보고가 유리크 판 카르소에게 도착한 것은 그날 오후 2시였다. 유리크는 그 보고를 선 채로 읽었다. 읽는 데 걸린 시간이 길지 않았다. 종이에 적힌 것은 여섯 줄이었고 그중 쓸모 있는 줄은 둘이었다.
그가 지도 앞으로 갔다. 하렐 가도의 가운데에 손가락을 댔다. 거기서 북쪽으로 네 개의 점이 있었다. 제3 보루와 그 위의 셋이었다. 넷 중 둘은 자체 비축이 나흘 치였고 하나는 이틀 치였으며 제3 보루는 사흘 치였다. 숫자가 머릿속에서 저절로 나왔다. 그는 그런 숫자를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었고, 외우고 다니는 이유는 묻는 자리에서 종이를 뒤적이면 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틀 치인 보루가 하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가도가 막힌 구간을 다시 열려면 그 구간에 병력을 넣어 길을 확보하고 습지에 박힌 수레를 꺼내야 했다. 박힌 수레를 꺼내는 데 하루, 불탄 자리를 치우는 데 반나절. 그동안 북쪽으로는 아무것도 못 올라간다.

사람이 지고 올라가면 올라갈 수는 있었다. 한 사람이 지고 갈 수 있는 무게가 25킬로그램이고 20 킬로미터를 가는 데 하루가 걸린다. 보루 하나의 하루치가 400킬로그램이다. 넷이면 1,600이다. 하루에 64명이 왕복해야 한다는 뜻이고, 왕복이므로 실제로는 128명이 그 길에만 붙어 있어야 했다.
그 인원을 어디서 빼 올지가 그의 권한 밖이었다. 그가 구원 요청서를 쓴 것은 오후 2시 40분이었다.
요청서는 한 장이었다. 첫 줄에 상황, 둘째 줄에 필요 병력, 셋째 줄에 소요 기간, 넷째 줄에 이것이 늦었을 때 생기는 결과가 적혀 있었다. 넷째 줄에는 보루 이름 넷과 각각의 비축 일수가 숫자로 들어갔다. 그는 그 요청서를 정확하게 썼다. 정확하게 쓴다는 것은 읽는 사람이 판단에 필요한 것을 전부 담는다는 뜻이었고, 그 말은 읽는 사람이 읽을 것이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유리크는 그것을 알았다. 알면서 그렇게 썼다. 짧게 쓰면 나중에 「왜 그때 말하지 않았소」를 듣는다는 것을 그는 열아홉 살 이후로 여러 번 배웠다.

전령이 떠난 것은 오후 2시 50분이었다. 북부군 사령부까지는 말로 세 시간 거리였다.
전령은 세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시간 사십 분 만에 도착했다. 그는 도중에 말을 한 번 바꿨고 바꾸는 데 쓴 시간이 4분이었으며 그 4분은 중계소 일지에 적혀 있다. 사령부 접수 기록에 찍힌 시각은 5시 30분이었다. 란돌프 그라이엔은 그 시각에 집무실에 있었다.
그는 요청서를 받아 읽었다. 읽는 자세가 바르고 속도가 고르며 다 읽고 나서 한 번 더 처음으로 돌아가 넷째 줄을 보았다. 거기 보루 이름 넷과 숫자가 있었다.

"…알겠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다음에 그가 한 일은 규정에 적힌 것이었다.
북부군 작전 규정 제4편 제2장에는 긴급 지원 요청의 처리 절차가 적혀 있다. 접수 기록을 남기고, 요청한 지휘관의 위임 범위를 확인하고, 해당 방면의 지휘 계통을 조회하고, 가용 예비 병력을 조회하고, 출동 명령서를 작성하고, 부관의 부서를 받는다. 여섯 단계다.
그 여섯 단계를 전부 밟으면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이 걸린다. 북부군에서 그 여섯 단계를 전부 밟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급한 자리에서는 란돌프가 구두로 명령했고 서류는 나중에 맞췄다. 그가 지휘한 열한 해 동안 구두 명령으로 움직인 횟수가 몇 번인지는 아무도 세지 않았으나, 센다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그는 서류로 했다. 위임 범위 확인에 한 시간이 걸렸다. 하렐 방면의 지휘가 유리크 판 카르소에게 위임되어 있는지, 위임 문서의 유효 기간이 남아 있는지, 위임 범위에 사령부 예비 병력 요청이 포함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문서는 서류함에 있었고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지휘 계통 조회에 사십 분이 걸렸다. 해당 구간이 하렐 방면 지휘에 속하는지 아니면 중부 보급 관구에 속하는지가 문서마다 달랐다. 두 문서가 다를 때는 상위 문서를 따르는데, 상위 문서가 어느 것인지를 다시 확인해야 했다.
가용 병력 조회에 오십 분이 걸렸다. 출동 명령서 작성에 삼십 분이 걸렸다. 란돌프가 직접 구술했고 서기가 받아 적었으며 두 번 고쳤다. 부관의 부서를 받는 데 두 시간 삼십 분이 걸렸다. 부관이 그 시각에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자리에 없다는 것을 안 뒤에 란돌프가 한 일은 기다린 것이었다. 부관을 부르러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명령서가 나간 것은 밤 11시였다. 기병 두 중대가 출발한 것은 밤 11시 40분이었다. 사령부에서 하렐 가도 중간까지는 말을 몰아 4시간 거리였고, 부대로 밤길을 가면 그 갑절이 걸렸다.

그 사이에 란돌프가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는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늦추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멈추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규정에 적힌 것을 규정에 적힌 대로 한 것이었고, 그것을 두고 문제 삼으려면 규정을 문제 삼아야 했다. 집무실에 혼자 남았을 때 그가 창가로 갔다. 창밖은 어두웠다. 안뜰에 등이 둘 켜져 있었고 그 밑에 보초가 서 있었다. 그는 그 보초를 한참 보았는데 보초를 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던 것은 달포 전 어전이었다. 넷째 자리 아래에 앉은 사람이 일어나 숫자를 말했고 그 숫자가 맞았으며 자기는 그것을 위임 범위라는 말로 덮었다. 덮은 뒤에 왕이 양쪽 말에 일리가 있다고 했고 그것으로 끝났다. 그때 그 사람이 말한 것이 보급선이었다. 오늘 끊긴 것이 보급선이었다.

란돌프 그라이엔이 그날 저녁에 느낀 것은 기쁨이 아니었다. 그는 기뻐할 만큼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느낀 것은 그 사람이 옳았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과정을 자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 증명이 끝나고 나면 다음 어전에서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사람이 일어서는 것을 막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사람이 일어섰을 때 들고 있을 것이 성공한 구원의 기록인지 실패한 구원의 기록인지는 오늘 밤에 정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생각으로 떠올리지 않았다. 생각으로 떠올렸다면 그것은 결심이 되고, 결심이 되면 책임이 된다. 그는 다만 서류함 앞에서 평소보다 조금 오래 서 있었고, 부관이 없다는 말을 듣고 평소보다 조금 오래 기다렸을 뿐이다.

하렐 가도의 밤은 길었다. 요른 하이덴은 셋째 수레 옆에 있었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길 위에 남은 자플랜 병사 중에 숨이 붙은 자가 넷이었고 넷 다 서로를 몰랐다. 해가 지고 나서는 더 몰랐다. 요른의 왼팔은 올라가지 않았다. 쇄골이 부러졌는데 그는 그것이 부러졌다는 것을 몰랐다. 아는 것은 왼쪽이 안 움직인다는 것뿐이었다. 등도 아팠다. 바퀴에 부딪친 자리였다. 그가 밤에 한 일은 수레를 고치는 것이었다. 셋째 수레는 축이 비틀려 있었다. 낮에 그가 쐐기를 세 번 쳤고 세 번째에서 멈췄다. 한 번만 더 치면 바퀴가 돌아올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밤새 했다.
오른손만 썼다. 망치를 쥐고 쐐기를 대고 치는 일은 원래 두 손으로 한다. 한 손으로 하려면 쐐기를 무릎으로 눌러야 하고 무릎으로 누르면 각이 안 맞는다. 각이 안 맞으면 쐐기가 튄다. 그는 네 번 튀긴 뒤에 쐐기 밑에 천을 깔면 덜 튄다는 것을 알아냈다.
천은 마른의 겉옷에서 잘랐다. 마른은 셋째 수레 옆에 있었고 아침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밤이 깊었을 때 그는 한 번 쉬었다.
쉬면서 수레 바닥에 등을 대고 앉았다.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없었고 별이 많았다. 카르소 남부에서도 이맘때 별이 많았다. 아버지의 작업장은 지붕이 반만 있었고 여름에는 그 반쪽 아래에서 잤다. 톱밥 냄새가 났고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카락에 톱밥이 붙어 있었다. 그가 다시 일어나 쐐기를 쳤다. 치는 소리가 길 위로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둘 있었다. 둘 다 숨이 붙은 자들이었고 둘 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지 못했다. 다만 소리가 계속 나는 동안 그들은 자기 말고 누군가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새벽 3시쯤에 소리가 뜸해졌다.
4시쯤에 멎었다.

기병 두 중대가 하렐 가도 중간 지점에 도착한 것은 아침 7시 40분이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길 위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불은 꺼져 있었고 탄 수레 여섯이 뼈대만 남아 있었으며 여덟 대가 습지 가장자리에 박혀 있었다. 숨이 붙어 있던 자가 셋이었다. 둘은 밤에 소리를 들은 자들이었고 하나는 소리를 낸 자였다.
셋째 수레 옆에서 발견된 자는 깨우는 데 한참 걸렸다. 그를 발견한 기병이 보고한 것은 두 가지였다. 자세가 앉은 자세였다는 것과 손에 망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두 가지 다 보고서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올릴 양식이 없었다. 수레는 고쳐져 있었다.
셋째 수레의 왼쪽 뒷바퀴는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고 축이 펴져 있었다. 그 수레는 나중에 끌어내어 수리 없이 다시 썼다. 끌어낸 사람들은 그것이 밤새 고쳐진 것인지 원래 멀쩡했던 것인지 알지 못했고, 알 필요도 없었다.

란돌프 그라이엔의 보고서는 그날 오후에 작성되었다. 보고서는 두 장이었다. 첫 장에 사건 경위가 있고 둘째 장에 손실이 있었다.

손실: 수레 14대 중 6대 소실, 8대 손상. 인원 26명 전사, 7명 부상. 비축 물자 손실분은 별표.
경위 항목의 마지막 줄은 이렇게 되어 있었다.

「전령 도착 지연으로 구원 병력 투입 시기를 놓쳤음.」

그 보고서의 사본이 하렐 방면 지휘소에 전달된 것은 사흘 뒤였다. 유리크 판 카르소가 그것을 읽었다.
읽고 나서 그는 자기 책상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구원 요청서의 발송 기록이었다. 거기에 전령 출발 시각이 적혀 있었다. 오후 2시 50분.
그는 사령부 접수 기록을 조회할 권한이 있었다. 조회하면 5시 30분이 나온다. 2시간 40분이다. 말로 3시간 거리를 2시간 40분에 갔다.

전령은 늦지 않았다.
늦은 것은 접수한 다음이었고, 접수한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규정대로 했다는 말 한마디로 전부 설명된다. 규정대로 한 것을 문제 삼은 기록은 자플랜군 역사에 없었다. 유리크가 그 두 종이를 나란히 놓고 한참 보았다. 보고 나서 그는 조회 신청서를 쓰지 않았다. 쓰지 않은 이유는 달포 전 어전에서 배운 것 때문이었다. 그날 그는 옳았다. 숫자가 맞았고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옳은 것이 기록만 되는 곳에서 기록을 하나 더 만드는 일에 그는 흥미를 잃어 가는 중이었다. 그가 두 종이를 접어 서랍에 넣었다. 넣으면서 그는 왼팔의 회색 띠를 한 번 고쳐 맸다. 그 동작은 19년 동안 하루에 몇 번씩 해 온 것이라 생각 없이 나왔다.

7이라는 숫자 안에 요른 하이덴이 있었다. 그 숫자는 보고서 둘째 장에 적혔고 북부군 월간 손실 집계에 합산되었으며 분기 보고에서 다른 숫자들과 함께 어전에 올라갔다. 어전에서 그 줄을 읽은 사람이 있었다. 왕은 26에서 눈을 멈췄고 7은 지나갔다.
제3 보루의 인원표에서 그는 여전히 차출 중이었고 하렐 가도의 손실표에서는 부상자였다. 그를 차출한 서류와 그를 세어 올린 서류가 다른 부서에 있었다.

두 장부가 만나는 자리는 없었다. 두 달 전에 그 보루에서 그가 발판을 대고 지붕을 꿰매고 바닥에 판자를 깐 것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다. 그날 밤에 그가 한 손으로 쐐기를 쳐서 고친 셋째 수레는 「8대 손상」 안에 들어 있었다. 보고서가 쓰이던 그 오후에 그 수레는 이미 습지에서 끌려 나와 다음 짐을 싣고 있었다.
그날 하렐 가도에서 요른 하이덴이 한 일은 손상으로 세어졌고, 요른 하이덴은 부상으로 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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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은 남는다



바르트가 불을 피운 것은 해 뜨기 전이었다.
작은 불이었다. 돌 셋을 모아 그 안에 숯을 담고 위에 쇠 그릇을 올렸다. 그릇 안에 든 것은 쇠 테 조각이었다. 수레바퀴를 묶는 데 쓰는 것을 마을 대장간에서 얻어 온 것으로, 값은 치르지 않고 대신 그 집 풀무를 한나절 고쳐 주었다.

그 옆에 저울이 놓여 있었다. 접시가 작고 바늘이 실처럼 가는 것이었다. 여섯 돈짜리였다.
켈리는 아직 자고 있었다.
바르트는 지팡이를 무릎에 놓고 금이 간 자리를 다시 보았다. 손잡이 위 한 뼘. 결을 따라 손가락 두 마디. 사흘 전보다 길어져 있었다. 어제 켈리가 개울에서 나무를 짚고 건널 때 체중이 그쪽으로 실렸을 것이었다.

그는 지팡이를 저울에 올렸다. 눈금을 읽고 노트에 적었다. 그다음에 쇠 테 조각을 올렸다. 눈금을 읽고 적었다. 그리고 두 숫자 사이에 선을 하나 긋고 아래에 세 번째 숫자를 적었다.

필요한 양이 나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필요한 양과 손에 있는 양이 같지 않았다. 손에 있는 것이 조금 많았다. 남는 것을 덜어 내면 되는데, 덜어 낸 것을 어디에 쓸지가 정해져 있지 않으면 그 남은 양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어딘가로 간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알면서 손을 그릇 위에 올렸다.
쇠가 녹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이 그만큼 세지도 않았는데 그릇 안의 것이 색을 바꾸더니 가장자리부터 흘렀다. 흐르면서 냄새가 났다. 쇠 냄새가 아니라 뜨거운 돌 냄새에 가까운 것이었다.

바르트가 지팡이를 들어 갈라진 자리를 아래로 향하게 기울였다.
녹은 것이 그 틈으로 들어갔다. 결을 따라 스며들면서 나무가 한 번 소리를 냈다. 물에 마른 것을 담글 때 나는 소리였다. 그는 그 소리가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팡이를 바로 세웠다.

식는 데 한참 걸렸다.
다 식고 나서 보니 갈라진 자리에 가느다란 선이 하나 앉아 있었다. 표면이 고르지 않았고 한쪽 끝이 뭉쳐 있었으며 색이 어두운 회색이었다. 보기 좋지 않았다. 다만 손톱을 대 보니 걸리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를 원래 자리에 갖다 놓았다. 각도를 맞춰 놓았다.
그러고 나서 목덜미를 만졌다.

오른쪽 귀 아래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자리였다. 어제까지 없던 것이 만져졌다. 콩알보다 작았고 단단했고 눌러도 아프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두 번 만져 보고 손을 내렸다.
노트를 펴서 뒤쪽 장을 넘겼다. 그 장에는 날짜와 짧은 말만 적혀 있었다. 열여섯 줄이 적혀 있었고 열일곱 번째 줄이 비어 있었다.

거기에 한 줄을 적었다.
「다섯째 달 초사흘. 목 오른쪽. 쌀알. 한 푼 남음.」

적고 나서 노트를 덮었다. 계산은 맞았다. 다만 한 푼이 남았고 남은 한 푼은 어디로 가야 했으므로 목으로 갔다. 그는 20년 동안 그 계산을 해 왔고 20년 동안 정확히 맞춘 적이 열 번이 되지 않았다.

켈리가 깬 것은 그로부터 반 시간 뒤였다.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 것은 옆을 더듬는 일이었다. 지팡이가 있었다. 각도까지 어제 놓은 그대로였다. 켈리가 그것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세 걸음 걷다가 멈췄다.
들여다보았다. 손잡이 위쪽에 없던 것이 있었다. 켈리가 손가락으로 그것을 문질러 보았다.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했다.
"이거 뭐예요."
"금 갔길래."
"언제요."
"자네가 나무 쳤을 때."
"그때 소리 안 났는데요."
"났어."

켈리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 자리를 한 번 더 문질렀다. 그리고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고 가볍게 휘둘러 보았다. 무게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손잡이 쪽이 아주 미세하게 무거웠다.
"무거워졌어요."
"어. 두 푼쯤."
"그럼 조금 다르게 쳐야 되겠네요."
"그렇겠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켈리는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고맙다고 하는 자리인 줄 몰랐기 때문이고, 바르트는 그 사실을 알았으므로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목덜미를 한 번 더 만진 것을 켈리는 보지 못했다.

마을 이름은 베르셀이었다.
로엔 남쪽 변경에 있었고 집이 서른 채쯤이었다. 지붕이 전부 납작했다. 이 일대는 비가 적고 바람이 세서 지붕을 세우면 날아가기 때문에 낮게 얹고 돌로 눌렀다. 돌은 집집마다 열 개씩이었고 모양이 비슷했다. 한 군데서 캐 온 것이었다.

가운데에 우물이 있었다. 돌을 둥글게 쌓아 올린 것이었고 높이가 무릎께였으며 둘레에 이끼가 앉아 있었다. 두레박 줄이 닳아 가운데가 가늘었다. 우물 옆에 곡물 창고가 하나 서 있었고 창고 벽에 기대어 좌판이 셋 놓여 있었다. 좌판 위에는 마른 콩과 절인 것과 실타래가 있었다.
일행이 그 마을에 들어간 것은 품을 팔기 위해서였다. 봄에는 일이 없다고 니카가 말했으나 씨 뿌리는 철이 끝나면 물길 손보는 일이 나온다고 린이 말했고, 린의 말이 맞았다.

사흘동안 일을 했다.
도랑을 쳤다. 겨우내 쌓인 것을 걷어 내고 바닥을 고르고 둑을 다지는 일이었다. 삽이 둘뿐이라 둘이 파고 셋이 나르는 식으로 돌아갔다. 켈리가 나르는 쪽이었는데 한 번에 남들의 두 배를 들었고, 두 배를 들면 두 배로 먹어야 한다는 것을 바르트가 알고 있었으므로 그날 저녁에 빵을 나눌 때 켈리 몫을 반 덩이 늘렸다. 켈리는 그것을 세었다. 반 덩이가 한 돈이라는 것도 알았다.

아침마다 린이 우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흘 다 그랬다. 첫날은 길었고 둘째 날은 짧았고 셋째 날은 더 짧았다. 셋째 날에는 무릎을 꿇지 않고 서서 고개만 숙였는데, 그것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린이 말했다. 인사를 한 번 해 둔 사이에서는 절차를 줄여도 된다는 것이었다.
"뭐라고 해요."
"안녕하시냐고."
"그게 다예요?"
"어제 물 고맙다고도 하고."
"물은 우리가 두레박으로 떴는데요."
"그래도 해."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베인 사람이 물가에서 그러는 것을 로엔 남부에서는 여러 번 보았다.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다만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오면 물이 덜 마른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쫓아내지도 않았다.

밤마다 니카가 야영지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자기 전에 했다.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걸으면서 세 군데에서 멈췄고 멈출 때마다 몸을 조금 숙였다. 숙이는 동작이 신발 끈을 고쳐 매는 것처럼 보였는데 니카는 끈이 없는 신을 신고 있었다.

사흘째 밤에 켈리가 그것을 보고 물었다.
"뭐 해요."
"아무것도 안 합니다."
"세 번 멈췄는데요."
"…돌이 있었습니다."

바르트는 사흘 내내 저울을 폈다.
일이 끝난 저녁마다 자루를 열고 유리병을 꺼내 가루를 옮겨 담았다. 옮기면서 무게를 쟀다. 한 번 재고 적고 다시 재고 또 적었다. 같은 것을 두 번 재는 이유를 켈리가 물었더니 첫 번째는 저울을 믿는지 보려고 재는 것이고 두 번째가 진짜라고 했다.
"저울이 틀려요?"
"틀릴 수 있지."
"그럼 두 번째는 어떻게 믿어요."
"두 번 같으면 믿어."
"세 번째도 같으면요."
"그럼 더 믿고."

다섯이 사흘 일하고 받은 것이 두 냥 여섯 돈이었다.
빚이 아홉 냥 남아 있었다.

넷째 날 아침에 마을 어귀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말 두 필과 걷는 사람 여섯이었다. 말에 탄 쪽은 둘이었고 하나는 장부를 들었고 하나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걷는 여섯은 가죽 조끼를 입었고 몽둥이나 짧은 창을 들고 있었다. 창은 날이 좁고 길이가 짧았다. 사람을 죽이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겁주려고 만든 물건이었다.

우물가에 있던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췄다.
장부를 든 쪽이 말에서 내렸다. 사십쯤 된 남자였고 옷이 깨끗했다. 그가 장부를 펴고 우물가를 한 번 둘러보았다.
"타르실 상인 평의회 위임 추심입니다. 각서 건으로 왔습니다."

오벨이 가장 먼저 일어섰다. 그는 일어서면서 가방을 가슴 앞으로 돌려 안았다. 그것이 그가 일할 때 나오는 자세였다.
"기일이 아직 남았습니다."
"넉 달 분할이고 첫 기일이 그저께였습니다."
"그저께가 아니라 사흘 뒤입니다. 중재 기록에 기산일이 도장 찍은 날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쪽 기록에는 각서 작성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둘이 다르면 중재 기록이 우선합니다. 상인 평의회 규약 제11조입니다."
"그건 평의회 안에서 다툴 때 이야기고요."

장부를 든 남자가 장부를 덮었다.
"저는 다투러 온 게 아닙니다. 받으러 왔습니다."
그러고는 뒤쪽 여섯에게 손짓을 했다. 손짓이 아주 작았다. 오래 해 본 사람의 손짓이었다.
여섯이 흩어졌다. 흩어지는 방식에 모양이 있었다. 둘은 일행 뒤로 돌았고 둘은 창고 쪽으로 갔고 둘은 우물 옆에 그대로 섰다. 뒤로 돈 둘이 먼저 움직일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다섯 사람은 각자 다른 일을 하기 시작했다.
오벨은 계속 말했다. 제11조를 인용하고 기산일의 정의를 설명하고 중재인의 서명 위치를 짚었다. 그가 말하는 동안 상대는 이미 듣지 않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니카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셈을 했다. 여섯 중에 누가 먼저 오는지, 그 하나를 넘어뜨리면 나머지가 어떻게 되는지. 셈에 시간이 걸렸다. 어제 열이 있었으므로 평소보다 느렸다. 린은 무릎을 꿇었다. 우물 옆의 땅을 향해서였다. 바르트는 자루를 열어 유리병 넷 중에 둘을 꺼내고 저울을 꺼냈다. 저울을 꺼내는 데 시간이 걸렸고 수평을 맞추는 데 더 걸렸다.

켈리는 이미 앞으로 나가 있었다. 뒤로 돈 둘 중 하나가 몽둥이를 들어 올린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들어 올리는 것이 보이면 먼저 치는 것이 켈리가 아는 순서였다.

켈리가 쳤다. 몽둥이가 손에서 튀어 올랐다. 그 사람이 손목을 붙들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나머지 다섯이 동시에 움직였다. 다섯이 한꺼번에 오는 것은 켈리가 겪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하나가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왔다.
켈리가 지팡이를 내려 그것을 쳐 냈다. 쳐 내는 데 성공했는데 자세가 무너졌다. 그 무너진 틈으로 다른 하나가 들어왔다.

"움직이지 마세요!"

니카가 소리쳤다. 켈리 쪽을 향한 말이었다. 셋 번째 놈 발밑에 이미 걸어 둔 것이 있었고, 켈리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 주기만 하면 그놈이 혼자 넘어질 참이었다.

켈리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들을 여유가 없었다. 켈리가 앞으로 파고들어 그놈을 쳤다. 그놈이 뒤로 넘어졌다. 니카가 걸어 둔 자리 바깥으로 넘어졌다. 니카의 손목이 뜨거워졌다.

"…아."

그가 짧게 소리를 냈다. 값은 치러졌고 쓰이지 않았다. 어제와 같았다.
린이 일어섰다. 물을 빌리는 데 성공한 참이었다. 우물 아래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척이 났고 땅이 조금 젖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자리가 하필 바르트가 저울을 놓은 자리였다.
저울이 기울었다. 바늘이 흔들렸다. 바르트가 그것을 붙들었다.
"여기서 하지 마!"
"어디서 하라고요!"
"저쪽!"
"저쪽은 아까 아저씨가 짐 풀었잖아요!"

오벨이 그 사이에 가방을 열었다.
"도와라."

손 둘이 나왔다. 나와서 가만히 있었다.
무엇을 도우라는 것인지 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벨이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 두 숨이 걸렸고, 두 숨 사이에 창을 든 자가 그 손들을 지나 켈리 쪽으로 갔다.

이 시점에서 다섯 사람은 완전히 따로 있었다.
한 사람은 조항을 읽고 있었고 한 사람은 셈이 어긋나 손목을 붙들고 있었으며 한 사람은 물을 어디에 부어야 하는지를 놓고 싸우고 있었고 한 사람은 저울을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은 혼자 다섯을 상대하고 있었다.

켈리가 밀렸다. 밀린 것은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켈리가 아는 싸움은 한 번에 하나를 치는 것이었고, 벨류엔에서 배운 것도 그것이었다. 여럿이 한꺼번에 오는 경우는 교범에 없었다. 교범에 없는 이유는 그런 경우에 돌파형은 폭발을 쓰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켈리가 등을 창고 벽에 붙였다. 붙이고 나서 숨을 한 번 쉬었다. 그리고 왼팔에 걸었다.
거기서 판이 바뀌었다. 바뀐 이유는 누가 신호를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르트가 저울을 놓쳤기 때문이다.
린과 다투다가 손이 미끄러졌고 저울이 땅에 떨어졌으며 접시에 있던 것이 쏟아졌다. 회색 가루였다. 그것이 젖은 땅에 닿았다.
젖은 땅은 린이 방금 물을 부른 자리였다. 가루가 물에 닿자 하얀 김이 올라왔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만 김이 낮게 깔리면서 우물가 쪽으로 번졌고, 그쪽에 있던 둘이 눈을 감았다. 매운 것이었다.

"눈 감지 마세요!"

니카가 또 소리쳤다. 이번에는 상대 쪽을 향한 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가 눈을 감기를 바라고 한 말이었다. 도박판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사람은 하지 말라는 것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둘이 눈을 더 세게 감았다. 감은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발뒤꿈치가 먼저 나가고 몸이 따라가는 걸음이었다. 셋 걸음쯤 갔을 때 앞사람의 오른발이 땅에 닿자마자 미끄러졌다. 미끄러진 방향이 이상했다. 그 자리에 기울기가 없었는데도 발이 바깥으로 빠졌다.
그가 넘어지면서 뒷사람의 정강이를 쳤다. 둘이 겹쳐서 넘어졌다.
린이 그것을 보고 손을 들었다. 들면서 우물 쪽에 대고 뭐라고 짧게 말했다. 세 마디였고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물이 더 왔다. 우물 돌 틈으로 물이 밀려 나왔다. 솟은 것이 아니라 밀려 나왔다. 흙이 그것을 한 번에 받지 못하고 표면부터 풀렸다. 마른 흙이 검어지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검어진 자리가 우물가에서 바깥쪽으로 번졌고, 번지는 속도가 사람이 걷는 것보다 빨랐다.

창을 든 자가 켈리 쪽으로 두 걸음 갔다. 세 걸음째에 발이 들어갔다. 발목까지 들어갔고 빼려고 하자 반대쪽 발이 더 깊이 들어갔다. 그가 창을 지팡이처럼 짚었다. 창끝도 들어갔다.

"오벨 아저씨!"
켈리가 소리쳤다. 소리치면서 손가락으로 그 사람의 창을 가리켰다.
"저 창! 뺏어요!"
오벨이 반사적으로 말했다.
"저 사람 오른손에 든 창을 잡아당겨라."

손 둘이 갔다. 진창 위를 지나가는데 발자국이 나지 않았다. 창자루를 양쪽에서 잡고 당겼다. 당기는 힘이 세지 않았는데 상대의 발이 이미 박혀 있어서 버틸 수가 없었다. 창이 빠졌다.
손은 창을 든 채로 멈췄다. 그다음에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았으므로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켈리가 벽에서 떨어져 나왔다.
한 발을 진창 바깥의 마른 자리에 디뎠다. 디디면서 오른팔에도 걸었다. 팔 안쪽이 뜨거워지고 그 뜨거움이 손목에서 어깨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동안 켈리가 지팡이를 아래에서 위로 들어 올렸다.

장작을 패는 자세였다.
지팡이를 양손으로 높이 들어올린 자세에서 그대로 내려쳤다.

지팡이가 진창에 박힌 자의 어깨를 쳤다. 나무가 젖은 가죽을 치는 소리가 났다. 그 사람이 앞으로 꺾이면서 무릎이 진창에 박혔다. 켈리가 지팡이를 돌려 옆에 있던 자의 정강이를 쳤다. 그 사람이 소리를 내면서 주저앉았고 주저앉은 자리에서 물이 튀어 올랐다. 켈리가 한 발 나아가 세 번째를 쳤다.

세 번째를 칠 때 손잡이 위쪽에서 소리가 났다. 아주 짧은 소리였다. 나무가 한 번 삐걱하고 멈추는 소리였다. 멈춘 이유는 그 자리에 쇠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켈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세 번째를 치고 네 번째를 찾는 중이었다.
네 번째는 없었다.

여섯 중에 넷이 진창에 있었고 하나는 손목을 붙들고 물러나 있었으며 하나는 창을 빼앗긴 채 서 있었다. 창을 들고 있는 것은 팔꿈치까지만 있는 손 두 개였다.

우물가가 조용해졌다.
장부를 든 남자가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이 일을 여덟 해 했고 이런 것은 처음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무엇을 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물이 나왔고 김이 났고 사람들이 넘어졌고 창이 저절로 빠졌으며 마른 여자애 하나가 세 명을 눕혔다.

그가 장부를 다시 폈다.
"…기일 건은 사흘 뒤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오벨이 말했다.
"제11조에 따르면 그것이 맞습니다."

그들은 그날 오후에 마을을 떠났다. 떠난 이유는 이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물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물을 너무 많이 빌렸고 빌린 물이 우물 둘레의 흙을 쓸어 갔다. 돌을 쌓아 올린 벽은 흙이 받쳐 주어야 서 있는 것이라, 아래쪽 흙이 빠지자 북쪽 면이 안으로 주저앉았다. 돌 열두 개가 우물 안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소리가 한참 뒤에 올라왔다.
좌판 하나가 기울었다. 다리 두 개가 젖은 땅에 박히면서 상판이 쏠렸고 실타래가 굴러 진창에 들어갔다. 실타래는 젖으면 못 쓴다.
창고 벽 아래쪽이 검었다. 돌 벽이라 무너지지는 않았는데 아래에서 물이 배어 올라가고 있었다. 물이 배면 안쪽 흙벽이 눅고, 눅으면 그 안에 쌓아 둔 자루의 밑바닥부터 상한다. 얼마나 상하는지는 열어 봐야 알고 열어 보려면 자루를 전부 들어내야 하며 들어내는 데도 사람이 필요하다.

마을 사람들이 계산했다. 계산은 빨랐다. 로엔 사람들은 밭 때문에 셈이 빠르다.
우물 보수 여섯 냥. 좌판 한 냥. 창고 벽 넉 냥. 안의 밀은 열어 봐야 안다.

린이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는 사람에게였다.
"제 잘못입니다."
"누구 잘못인지는 안 따져요."
촌장이 말했다. 예순쯤 된 여자였고 손등에 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물어낼 사람만 있으면 돼요."

일행이 사흘 일해서 번 것은 두 냥 여섯 돈이었다.
그것을 전부 냈다. 그리고 더 내야 할 돈이 여덟 냥 넘게 남았다. 낼 것이 없었으므로 각서를 하나 더 썼다. 이번에는 오벨이 직접 썼고 기산일을 도장 찍는 날로 명시했으며 분할을 여섯 달로 늘렸다.
쓰는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켈리는 그 옆에 서서 종이를 보고 있었다. 글자가 빽빽했다. 읽을 수 있는 것이 몇 개 있었다. 우물. 창고. 냥. 그리고 아래쪽에 자기 이름이 있었다. 오벨이 적어 준 것이었다.
그 옆에 엄지를 눌렀다. 종이가 찢어지지 않았다. 먹이 손끝에서 종이로 옮겨 가면서 가운데가 소용돌이로 감긴 무늬가 남았다. 달포 전에 세 장을 버리고 나서 배운 힘이었다.

마을을 나서는 길에 촌장이 우물 쪽을 보고 있었다.
무너진 벽 위로 물이 조금 넘쳐 흐르고 있었다. 넘친 물이 낮은 쪽으로 흘러 아래 도랑으로 들어갔다. 사흘 동안 일행이 치워 놓은 도랑이었다. 바닥이 고르고 둑이 다져져 있어서 물이 새지 않고 그대로 밭 쪽으로 갔다.
촌장이 그것을 한참 보았다. 보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는데 열었을 때 나오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그 자신도 정하지 못한 참이었다.

각서에는 그 도랑에 관한 항목이 없었다. 도랑을 친 것은 품삯을 받고 한 일이었고 품삯은 이미 받아서 이미 도로 냈다.

남쪽으로 걸었다. 해가 기울 때까지 걸었고 그동안 다섯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니카가 왼손을 소매 안에 넣고 걸었다. 린이 손목의 장신구를 세었다. 열아홉이었다. 오벨이 가방 끈을 두 번 고쳐 쥐었다. 바르트는 목덜미를 만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켈리는 지팡이를 보면서 걸었다. 쇠가 들어간 자리가 낮 동안 조금 더 어두워져 있었다. 손톱을 대 보았다. 걸리지 않았다. 밤에 자리를 잡고 나서 바르트가 노트를 폈다.
한참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 적기 시작했는데, 적는 것이 지출도 아니고 켈리가 먹은 양도 아니었다. 순서였다.

「가루가 젖은 땅에 떨어짐.
김이 남. 둘이 눈을 감음.
감은 채로 물러남. 걸린 자리로.
물이 더 옴. 진창.
창을 빼앗음. 하나만.
그리고 침.」

여섯 줄이었다.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전부 우연.」

적고 나서 그는 그 줄을 오래 보았다. 보면서 한 가지를 생각했다. 우연이라고 적었는데 다섯 줄 중에 넷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미리 해 둔 것이었다. 니카는 어젯밤에 걸었고 린은 사흘 동안 인사했으며 그는 아침에 가루를 쟀다. 미리 해 둔 것들이 우연히 한자리에서 만났다.

그렇다면 우연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
그는 「전부 우연」에 줄을 긋지 않았다. 대신 그 아래에 여백을 두었다.

켈리가 옆에 와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거 뭐예요."
"낮에 있었던 거."
"왜 적어요."
"또 해야 될 것 같아서."
"똑같이 또 돼요?"
"안 되지."
"그럼 왜 적어요."
"안 되는 걸 알아야 되는 걸 찾지."

켈리가 그 말을 받아 놓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숯 주세요."
바르트가 숯을 건넸다. 켈리가 노트를 무릎에 놓고 여백 아래쪽에 무언가를 적었다. 한 글자였다. 획이 둘이었고 둘 다 삐뚤었으며 크기가 다른 글자들보다 두 배쯤 컸다.

5.

적고 나서 켈리가 숯을 돌려주었다. 바르트가 그것을 받아 들고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뭔가."
"다섯이요."
"그건 알아."
"…다섯이 했으니까요."

켈리가 그렇게 말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바르트는 그 숫자를 한참 보았다. 삐뚤었고 컸고 다른 어떤 줄과도 맞지 않았다. 그가 20년 동안 쓴 노트에서 이런 글씨가 들어간 것은 그 장이 처음이었다. 그는 그것을 지우지 않았다.

불이 사그라들었다. 니카가 자면서 왼손을 가슴에 얹었고 린은 잠들기 전에 장신구를 한 번 더 셌으며 오벨은 수첩에 그날 인용한 조항 번호를 적었다. 켈리는 지팡이를 옆에 놓고 품에 손을 넣었다. 종이가 있었다.
바르트는 노트를 덮기 전에 뒤쪽 장을 한 번 더 넘겼다. 열일곱 번째 줄이 채워져 있었다. 열여덟 번째 줄은 비어 있었다.
그는 노트를 덮고 불을 껐다.

 

제11조


비가 그치지 않았다.
길은 이미 길이 아니라 진흙의 강이었다. 발목까지 잠겼다가 빠져나오는 데 한 번에 두 숨이 걸렸고, 빠져나온 발이 다시 들어가는 데 반 숨이 걸렸다. 켈리가 지팡이를 짚어 균형을 잡으면서 걸었다. 지팡이 끝도 진흙에 박혔다. 박힌 것을 뽑을 때마다 진흙이 밑동을 놓지 않으려 들면서 소리를 냈다. 젖은 것이 젖은 것에서 떨어지는 소리였다.

로엔 남부에서 실베인 접경까지는 걸어서 보름이었다. 마른 길이면 그랬다. 로엔 남부를 떠난 지 엿새째였고 그중 사흘을 빗속에서 걸었으며 아직 절반을 못 왔다.
맨 앞이 바르트였다. 그가 앞선 이유는 덩치가 커서 진흙을 밟아 다져 놓으면 뒷사람이 덜 빠지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이 린이었고 그다음이 오벨이었으며 니카가 넷째였다. 켈리는 맨 뒤였다.

맨 뒤가 가장 나빴다. 앞의 넷이 밟고 지나간 자리는 다져지는 것이 아니라 풀어졌다.
"자리 바꿔요."
켈리가 말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빗소리가 커서 못 들었거나 들었는데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자리 바꾸자고요."
린이 돌아보았다.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있었고 땋은 갈래 사이로 물이 흘렀다. 맨발이었다. 발목까지 진흙이 올라와 있었는데 씻어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라고?"
"제가 앞에 갈게요."
"네가 앞에 가면 너무 빨라."
"천천히 갈게요."
"천천히 가도 빨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무거운 것을 지고 달리는 훈련을 받았고, 그 훈련을 시킨 자들이 원한 것은 터지는 자리까지 제 발로 도착하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켈리는 진창에서도 빨랐다. 빠른 것이 이 무리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쉬기위해 자리를 잡았다. 나무 아래였다. 잎이 두꺼워서 비가 덜 들이쳤는데 대신 잎에 고였던 물이 한꺼번에 떨어졌다. 어느 쪽이 나은지는 판단이 갈렸다.

여기서 첫 번째 다툼이 났다.

"이쪽이 마른데요."
"거기 뿌리 올라와 있어."
"뿌리 위가 물이 안 고여요."
"뿌리 위에서 자면 아침에 등이 안 펴집니다."
"그럼 어디서 자요."
"저쪽이요."
"저쪽은 아저씨가 짐 풀었잖아요."
"짐을 옮기면 되지."
"옮기면 화약 냄새가 이쪽으로 와요."

린이 그렇게 말하고 팔짱을 꼈다. 팔짱을 끼면 말이 길어진다는 것을 나머지 넷이 이제 알았다.

"그러니까 제가 계속 말씀드리는 건데요, 이게 매번 이러잖아요. 어제도 이랬고 그저께도 이랬고요. 어제는 아저씨가 저쪽에 풀었고 오늘은 이쪽에 풀었는데 그 기준이 뭐예요?"
"평평한 데."
"평평한 기준이 뭔데요."
"평평하면 평평한 거지."

니카가 그 사이에 앉았다. 앉은 자리가 하필 둘이 다투던 그 자리였다.
"저는 여기 자겠습니다."
"거기 뿌리 위인데요."
"압니다."
"등 안 펴진다면서요."
"어차피 안 펴집니다."

두 번째 다툼은 불이었다.
젖은 나무밖에 없었고 린이 불을 빌리려면 바르트가 자리를 옮겨야 했다. 옮기자 이번에는 그 자리가 니카가 자겠다고 한 자리였다. 니카가 일어나 옮겼지만 그 자리는 켈리가 짐을 놓은 자리였다.
셋이 한 바퀴를 돌고 제자리로 왔다.

"…다시 해 봅시다."
바르트가 말했다.
"아니 왜 매번 이래야 되는데요."

세 번째 다툼은 먹는 순서였다.
빵이 세 덩이였고 사람이 다섯이었다. 나누는 방식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바르트가 나눴는데 그가 나누면 켈리 몫이 많았고, 켈리 몫이 많은 이유는 켈리가 많이 먹기 때문인데 그 사실을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으므로 불만이 쌓이지 않고 그냥 있었다.

그날은 니카가 먼저 말했다.
"오늘은 제가 나누겠습니다."
"왜."
"제가 나누면 공평합니다. 저는 계산을 하니까요."
"계산을 하면 왜 공평한데."
"공평이 계산이니까요."

니카가 빵을 다섯으로 나눴다. 정확히 같은 크기였다. 재기까지 했다. 바르트의 저울로 쟀다.
켈리가 자기 몫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받아서 먹었다. 먹고 나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 뒤 두 시간 동안 세 번 일어나서 물을 마셨다.

그것을 본 사람은 오벨이었다.
오벨은 그날 밤 잠들기 전에 수첩을 폈다. 그리고 세 줄을 적었다.

「자는 자리. 기준 없음.
불. 순서 없음.
먹는 것. 기준이 두 개. 서로 다름.」

이튿날도 비가 왔다. 정오쯤에 네 번째 다툼이 났고 그것이 가장 컸다.
린이 물을 빌렸다. 마실 물을 얻으려던 것이었는데 그 자리가 니카가 아침에 걸어 둔 자리 옆이었다. 니카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 침묵이 말보다 무거웠다.

"…또요?"
"안 씻겼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예요."
"옆이었다는 말입니다."
"옆은 괜찮잖아요."
"오늘은 괜찮았습니다."

바르트가 두 사람 사이에 섰다.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았다. 물러나지 않은 이유는 물러날 자리가 진흙이었기 때문이다.
"그만들 하고."
"아저씨는 맨날 그만하라고만 하시잖아요."

린이 그렇게 말했고, 그 말에 바르트가 대답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른 해 동안 혼자 일했고 사람 사이의 셈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할 줄 아는 중재는 물러나는 것 하나였다.

켈리가 지팡이를 들었다. 그리고 내리지 않았다. 옆에 칠 나무가 없었다. 있는 것은 진흙뿐이었고 진흙은 쳐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켈리가 지팡이를 든 채로 한 박자 서 있다가 도로 내렸다.

"…조용히 해요."
작은 소리였다. 아무도 못 들었다. 오벨이 가방을 열었다.
"제안이 있습니다."
넷이 그쪽을 보았다.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규칙을 문서로 만듭시다."

니카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닫은 이유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흘 내리 젖은 채로 다퉜기 때문이었다. 린은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돌아보았다. 바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찬성이었다.

"…해 봅시다."

그날 저녁에 그들은 종이 넉 장을 놓고 앉았다. 종이는 오벨의 것이었다. 비에 젖지 않게 기름 먹인 천에 싸서 가방 안쪽에 넣어 두었던 것이라 마른 종이가 남은 사람은 그뿐이었다. 숯은 바르트가 냈다.

"제1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제1조가 뭔데요."
"무엇이든 됩니다. 가장 자주 다투는 것부터 넣습니다."
"자는 자리요."

린이 말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오벨이 적었다.

「제1조. 야영지에 도착하면 자는 자리를 먼저 정한다.」

"이걸로 되나요?"
"안 됩니다. 누가 정하는지가 없습니다."
"그럼 넣어요."
"순서를 정해야 합니다."

「제1조. 야영지에 도착하면 자는 자리를 먼저 정한다. 고르는 순서는 전날 가장 늦게 잔 사람부터 한다.」

"늦게 잔 게 뭔데요."
"마지막에 누운 사람이요."
"누가 마지막인지 누가 세요."
"…"

「제1조. 야영지에 도착하면 자는 자리를 먼저 정한다. 고르는 순서는 돌아가며 한다. 순서는 바르트 뮐렌, 니카 셰르, 린 소아레, 오벨 리스트, 켈리 순이다.」

"왜 아저씨가 처음이에요."
"제일 크니까요."
"큰 게 왜 먼저예요?"
"자리를 제일 많이 차지하니까 먼저 정하는 게 효율적입니다."
"그럼 저는 제일 작으니까 마지막이에요?"
"…순서를 바꾸겠습니다."

그 조항 하나에 반 시간이 걸렸다.
제2조는 불이었다. 린이 불을 빌리려면 화약이 몇 걸음 떨어져 있어야 하는지를 정해야 했고, 그 걸음 수를 놓고 바르트와 린이 다시 십오 분을 썼다. 린은 스무 걸음을 불렀고 바르트는 다섯 걸음을 불렀다.

「제2조. 열 걸음.」

"이게 다예요?"
"길게 쓰면 또 다툽니다."

제3조는 니카가 냈다.
"저주를 걸어 둔 자리는 제가 말하겠습니다. 다만 말할 때마다 어디에 걸었는지를 정확히 말하면 그게 노출입니다. 적이 들으면 안 되니까요."
"그럼 어떻게 하는데요."
"방향만 말하겠습니다. 동쪽 셋, 이런 식으로요."
"셋이 뭔데요."
"세 군데라는 뜻입니다."

「제3조. 니카 셰르가 무언가를 걸어 둔 경우 방향과 개수를 말한다. 자세한 위치는 말하지 않는다. 들은 사람은 그 방향에서 물을 쓰지 않는다.」

린이 그 조항을 두 번 읽었다.
"이거 나한테만 불리한데요."
"그럼 제4조를 내시면 됩니다."

「제4조. 린 소아레가 정령과 교섭 중일 때는 말을 걸지 않는다. 교섭 중인지 아닌지는 무릎을 꿇었는지로 판단한다.」

"서서 할 때도 있는데요."
"그럼 서서 할 때는 손을 드십시오."
"손을 왜 들어요."
"안 들면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린이 손을 들어 보았다. 들고 나서 내렸다.
"…이거 바보 같은데."
"바보 같아도 판단은 됩니다."

제5조는 바르트가 냈다. 계량에 관한 것이었고 「2그램 이상을 쓸 때는 미리 알린다」였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2그램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이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제6조는 오벨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제6조. 오벨 리스트가 소환체에게 지시할 때는 동작과 대상과 횟수를 함께 말한다.」

"…이건 제가 적기 민망합니다만."
"적으세요."
켈리가 말했다.
"지난번에 불 꺼졌잖아요."

제7조가 문제였다.
먹는 것이었다. 여기서 반 시간이 또 갔다. 니카는 똑같이 나누자고 했고 바르트는 몸집대로 나누자고 했으며 린은 일한 만큼 나누자고 했다. 셋 다 근거가 있었다.

"켈리 씨 의견은요."
오벨이 물었다.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넷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무릎에 손을 얹고 앉아 있었고 시선이 불 쪽에 있었다. 한참 그러고 있었다.

"…정해 주면 그대로 할게요."
그 대답에 아무도 다음 말을 하지 못했다.
린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고 니카가 손에 든 숯을 한 번 굴렸으며 바르트는 냄비 쪽을 보았다. 오벨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넷 다 같은 것을 생각했는데 넷 중 누구도 그것을 말로 만들지 못했다.

불이 한 번 튀었다.
"…똑같이 나누겠습니다."
니카가 말했다.
"그리고 남는 건 제일 많이 걸은 사람이 먹습니다."
"그거 매번 켈리인데요."
"예."
"그러면 결국 켈리가 많이 먹는 거잖아요."
"예."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쓰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쓰면 켈리 씨가 안 먹습니다."

린이 그 말을 받아 놓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7조. 음식은 똑같이 나눈다. 남은 것은 그날 가장 많이 걸은 사람이 먹는다. 누가 가장 많이 걸었는지는 니카 셰르가 정한다.」

켈리가 그 조항을 읽었다. 글자가 여럿이라 읽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다 읽고 나서 한 가지를 물었다.
"이거 제가 안 먹겠다고 하면요."
"조항 위반입니다."
"위반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

오벨이 종이를 한 장 더 꺼냈다.

「제8조. 조항을 어긴 자는 다음 날 짐을 한 몫 더 진다.」

켈리의 얼굴이 조금 움직였다. 아주 조금이었는데 그 자리의 넷 중 셋이 그것을 보았다.

"…그럼 저 많이 어길게요."
"안 됩니다."
"왜요."
"고의로 어기면 두 몫입니다."

「제8조의2. 고의로 어긴 경우 두 몫을 진다. 고의인지 아닌지는 어긴 사람 말고 나머지가 정한다.」

제9조와 제10조는 빨리 정해졌다. 아홉째는 걷는 순서였고 열째는 말을 끊지 않는 것이었다. 열째를 적는 동안 린이 두 번 말을 끊었다. 다 적고 나서 오벨이 종이를 들어 읽었다.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열 개 조항에 단서가 여섯 개 붙어 있었고 그중 둘은 다른 조항을 가리키고 있었다.

"…됐습니다."

넷이 그 종이를 보았다.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했다. 사흘 만에 조용했다.
이튿날 아침에 문제가 생겼다. 켈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이기는 하는데 매번 멈췄다. 일어나서 짐을 지려다 멈추고 물을 뜨려다 멈추고 불을 끄려다 멈췄다. 세 번째로 멈췄을 때 바르트가 물었다.
"뭐 하나."
"제9조요."
"제9조가 뭔데."
"걷는 순서요. 그거 짐 지는 순서도 정한 건가요?"
"…아니."
"그럼 누가 먼저 지는지 안 정해졌는데요."
"아무나 지면 돼."
"아무나가 조항에 없는데요."

바르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날 아침에 켈리가 한 일은 서 있는 것이었다. 조항에 적힌 일은 정확히 했고 적히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켈리가 열두 해 동안 배운 방식이었다. 적힌 것은 지키고 적히지 않은 것은 기다린다. 기다리면 누가 와서 말해 준다.

넷이 그것을 반 시간 동안 보았다.

"…이거 우리가 잘못한 겁니다."
니카가 말했다.
"뭘요."
"저 사람한테 규칙을 주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규칙이 없어서 싸웠잖아요."
"그건 우리가 싸운 거고요."

오벨이 종이를 다시 폈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 한참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열두 해 동안 문서로 먹고산 사람이었고, 문서가 사람을 묶는 것이라는 사실을 직업으로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아는 묶임은 언제나 지키지 않으려는 자를 묶는 것이었다. 너무 잘 지키는 자를 어떻게 풀어 주는지는 어느 규정집에도 없었다.

그가 숯을 들었다. 그리고 종이 맨 아래에 한 줄을 적었다. 앞의 열 개보다 짧았고 단서가 하나도 붙지 않았다.

「제11조. 급할 때는 이 문서를 보지 않는다.」

켈리가 그것을 읽었다. 읽고 나서 오벨을 보았다.
"급한 게 뭔데요."
"급하면 압니다."
"모르면요."
"모르면 급한 게 아닙니다."

켈리가 그 말을 받아 놓았다. 그리고 짐을 졌다. 지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날 일행은 평소보다 먼 거리를 걸었다. 비가 조금 잦아들었고 진흙이 덜 물렀으며 다툼이 한 번밖에 나지 않았다. 그 한 번도 오래가지 않았다. 린이 제4조를 들먹였고 니카가 제3조로 받았으며 둘 다 자기가 맞다고 생각한 채로 걸었는데, 걸으면서 따지는 것은 서서 따지는 것보다 빨리 끝났다.

저녁에 자리를 잡고 나서 오벨이 종이를 접었다. 넉 장 중에 두 장에 글자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기름 먹인 천에 싸서 가방 안쪽에 넣었다.
"한 부씩 베껴 드리는 게 맞습니다만."
"종이가 없잖아요."
"예. 그래서 못 합니다."

켈리가 손을 내밀었다.
"그거 볼게요."

오벨이 도로 꺼내 건넸다. 켈리가 그것을 펴서 불빛에 대고 읽었다. 읽는 데 오래 걸렸다. 다 읽고 나서 맨 아래 한 줄을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 접었다. 접어서 오벨에게 돌려주려다가 손을 멈췄다.
"…이거 제가 가지고 있어도 돼요?"
"조항에 없습니다."
"그럼요."
"그럼 가지셔도 됩니다."

켈리가 그것을 품에 넣었다. 품에 이미 종이가 하나 있었다. 여섯 줄이 적힌 것이었고 접은 자리가 닳아 있었다. 새 종이가 그 옆에 들어갔다. 
품이 조금 두꺼워졌다.

 

제12조



비가 밤사이 그쳤는데 아침이 되어도 길이 마르지 않았다.

켈리는 그것을 눈으로 알지 못했고 발로 알았다. 로엔의 길은 비가 그치면 반나절 만에 굳었다. 굳은 길은 밟으면 소리가 났고 소리가 난 다음에 발바닥이 아팠다. 여기서는 그 소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발이 조금씩 들어갔다가 나왔다.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이 길에 남아 있었고 그 안에 물이 고여 있었다.

켈리가 쭈그려 앉아 손으로 흙을 파 보았다. 검었다. 한 뼘을 파도 검었고 손에 묻었다.
"뭐 하십니까."
"…안 말라요."
"실베인 쪽은 원래 그렇습니다."
"원래요?"
"예. 물이 안 빠지는 땅입니다."

켈리가 손을 옷에 문질렀다. 잘 안 지워졌다. 벨류엔 왕도 북쪽의 흙은 마르면 털린다. 연병장 흙이 그렇고 참호 흙이 그렇고 공병대가 퍼 나르는 흙도 그렇다. 열두 해 동안 켈리가 판 구덩이는 전부 털리는 흙이었으므로 켈리에게 흙은 털어 내면 없어지는 물건이었다.

나무도 달라져 있었다. 로엔의 나무는 밭 가장자리에만 있었고 줄을 맞춰 서 있었다. 사람이 심었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나무가 줄을 잃었고 대신 많아졌으며 높아졌다. 물푸레나무가 길 양옆으로 이어졌는데 잎이 아직 어려서 연했다.

밑동마다 이끼가 한쪽으로만 붙어 있었다. 붙은 쪽이 전부 같은 쪽이었다.

남쪽으로 갈수록 길에 사람이 많아졌다. 빗속을 걸은 사흘 동안 마주친 사람이 열둘이었고 전부 같은 방향이었다.

행렬을 처음 본 것은 그날 아침이었다.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길이 완만하게 굽는 자리에서 앞쪽이 보이지 않았는데, 안개 너머에서 소리가 먼저 왔다. 바퀴 소리였다. 하나가 아니었고 박자가 맞지 않았다. 그다음에 냄새가 왔다. 젖은 천과 사람과 연기가 섞인 냄새였다. 오래 씻지 못한 사람이 여럿 모이면 나는 냄새인데, 켈리는 그 냄새를 알았다. 제4마도대의 막사에서 나던 냄새와 같았다.

굽이를 돌자 길이 막혀 있었다. 사람이었다.
켈리가 걸음을 멈췄다. 멈추고 나서 세기 시작했다. 스물을 세고 마흔을 세고 예순을 셌다. 예순에서 세는 것을 그만두었는데 셀 수 없어서가 아니라 줄이 안개 안쪽으로 계속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예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쪽으로 걷고 있었다. 일행과 같은 방향이었다. 수레가 열댓 대 있었는데 소가 끄는 것은 셋뿐이고 나머지는 사람이 끌었다. 수레에 실린 것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다. 이불과 솥과 자루와 나무통. 사람은 걸었다. 못 걷는 사람만 수레 위에 있었고 수레 위에 있는 사람은 대개 아주 늙었거나 아주 어렸다.
앞쪽에서 수레 한 대가 멈춰 있었다. 바퀴가 진흙에 빠진 것이었다. 남자 셋이 그것을 밀고 있었고 밀 때마다 바퀴가 반 뼘씩 올라왔다가 도로 내려갔다.

"난민입니다."
니카가 말했다.
"난민이 뭔데."
니카가 켈리를 보았다. 보고 나서 대답을 조금 늦췄다.
"…살던 데서 나온 사람들요."
"왜 나와."
"못 살게 되니까요."
"왜 못 살게 되는데."

니카가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몰라서가 아니라 그 대답이 길기 때문이었고, 길어지면 이 사람이 다음 질문을 하기 때문이었다.

켈리는 난민을 본 적이 없었다.
열두 해 동안 켈리가 본 전쟁은 한쪽 면뿐이었다. 벌판과 참호와 진지와 폭음과 회수 기록. 그 면에는 군복을 입은 사람만 있었다. 군복을 안 입은 사람이 전쟁 때문에 어디론가 가는 광경을 켈리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이유는 그런 것이 있다는 말을 아무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법청의 교범에는 민간인에 관한 항목이 있었다. 두 줄이었다. 「작전 구역 내 민간인은 관할이 아니다. 인솔자의 판단에 따른다.」
켈리가 배운 전쟁은 그 두 줄에서 끝났다.

일행이 행렬 옆으로 비켜 걸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많은 것이 보였다. 신을 신지 않은 사람이 여럿이었다. 신은 있는데 들고 가는 사람도 있었는데, 진흙길에서는 맨발이 낫고 마른 길이 나오면 신으려고 아껴 두는 것이었다. 어린아이 하나가 솥을 이고 걷고 있었다. 솥이 아이 머리보다 컸다.
수레를 끄는 여자의 손을 켈리가 보았다. 밧줄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있었다. 그 자리에 천을 감았는데 천이 이미 젖어서 소용이 없었다. 여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켈리는 그 손을 알았다. 모래주머니를 오래 들면 그렇게 된다.

행렬이 조용했다. 켈리가 그것을 걷다가 알아차렸다. 예순 명이 걷는데 말소리가 거의 없었다. 수레바퀴 소리와 발소리와 이따금 기침 소리뿐이었다. 사람이 여럿 모이면 소리가 나는 법인데 이 줄에서는 나지 않았다. 말을 하려면 숨이 남아 있어야 하고, 열흘을 걸은 사람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우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우는데 소리가 작았다. 업은 여자가 등을 두드리지 않고 그냥 걸었다.

"저 사람들 어디 가요."
"남쪽이요."
"남쪽 어디."
"모를 겁니다."
"모르는데 왜 가요."
"북쪽에서 왔으니까요."

정오 전에 안개가 걷혔다.

걷히는 순서가 위에서부터였다. 하늘이 먼저 열리고 그다음에 능선이 나왔고 맨 나중에 골짜기 바닥이 드러났다. 드러난 것을 켈리가 보았다.

왼쪽에 산이 있었다. 산이라기보다 크게 부푼 언덕이었는데 그 등을 풀이 덮고 있었고 풀 색이 두 가지였다. 해가 닿는 쪽은 노란빛이 도는 초록이고 그늘 쪽은 푸른빛이 도는 초록이었다. 그 경계가 구름이 지나갈 때마다 천천히 움직였다. 움직이는 속도가 사람이 걷는 속도와 비슷했다.

오른쪽 아래로는 물이 있었다. 폭이 스무 걸음쯤 되는 강이었다. 얕은 자리에서 흰 거품이 일었고 그 소리가 여기까지 올라왔다. 강가에 자갈이 넓게 깔려 있었는데 자갈이 전부 둥글었다. 오래 굴러야 그렇게 된다.

그 위로 새가 지나갔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스물쯤이 한 덩어리로 날았고 방향을 한꺼번에 바꿨다. 바꿀 때 몸의 옆면이 동시에 해를 받아서 덩어리가 잠깐 하얘졌다가 도로 검어졌다.

켈리가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저거 뭐예요."
"새요."
"아니 저거 하얘졌잖아요."
"도느라고 그런 겁니다. 배가 흰 새예요."
"…예."

켈리가 그것을 한참 보았다. 보고 나서 다시 걸었는데 열 걸음쯤 가서 한 번 더 보았다.

열두 해 동안 켈리가 지형을 읽은 방식은 하나였다. 능선은 시야가 열리는 자리고 골짜기는 갇히는 자리다. 강은 건널목이 몇 개인지가 전부고 숲은 매복이 되는 곳이다. 지금 눈앞의 것을 그 방식으로 읽으면 이렇게 된다. 왼쪽 언덕은 엄폐가 없고 오른쪽 강은 도하점이 하나이며 새가 한꺼번에 떴다는 것은 그 방향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켈리가 그렇게 읽었다. 읽고 나서, 읽은 것과 상관없이 한 번 더 보았다.

그 골짜기를 예순 명이 지나가고 있었다.

높은 데서 보니 줄이 한눈에 들어왔다. 길이 강을 따라 굽었고 줄도 그대로 굽어 있었다. 수레 열댓 대가 점처럼 박혀 있었고 점과 점 사이가 사람이었다. 줄의 앞머리는 이미 다음 굽이로 들어갔는데 꼬리는 아직 안개가 남은 자리에 있었다. 앞과 뒤가 서로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줄이 나아가는 방식이 이상했다. 멀리서 보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한참을 보고 있어야 조금 앞으로 가 있었다.

길이 다시 물푸레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해가 잎 사이로 들어와 길바닥에 얼룩이 생겼고 얼룩이 바람에 흔들렸다. 린이 맨발로 그 얼룩을 밟으며 걸었다. 밟을 때마다 자리를 골라 밟았다. 밝은 데만 딛는 것이었는데 묻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것이 놀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그날 정오에 일행이 행렬 옆에서 잠깐 쉬었다. 쉬는 자리가 겹쳤다. 길가에 마른 자리가 몇 군데 없었고 그중 하나에 일행이 앉았는데, 옆자리에 행렬 사람들이 앉았다. 앉은 거리가 열 걸음쯤이었다.

앉고 보니 좋은 자리였다. 등 뒤가 둔덕이어서 바람이 막혔고 앞이 트여서 해가 들었다. 둔덕에 제비꽃이 피어 있었다. 여럿이 아니라 띄엄띄엄 있었는데 그 자리만 보라색이었다. 아래쪽에서는 강물 소리가 계속 올라왔다. 나뭇가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어깨에 닿았고 닿은 자리가 금방 말랐다. 해가 그만큼 좋았다.

행렬 사람들도 같은 해를 쬐었다. 앉자마자 신을 벗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벗어서 발을 내놓고 해를 보게 돌려놓았다. 젖은 것을 말리는 데는 그게 제일 빠르다. 한 노인이 발바닥을 해 쪽으로 들고 한참 그러고 있었는데, 그 자세가 편해서가 아니라 그래야 마르기 때문이었다.

바르트가 빵을 꺼냈다. 세 덩이였다. 어제 마을에서 산 것이었고 값이 여섯 돈이었다. 그가 그것을 다섯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켈리가 옆을 보았다. 열 걸음 거리에 아이가 둘 앉아 있었다. 하나는 일고여덟쯤이고 하나는 더 어렸다. 둘 다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보는 방식이 달랐다. 큰 쪽은 빵을 보았고 작은 쪽은 켈리의 얼굴을 보았다.

큰 쪽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돌리는 속도가 빨랐다.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아이의 속도였다.
켈리가 자기 몫을 받았다. 받아서 손에 들고 있다가 일어섰다.
"어디 가나."
"저기요."
"거기 왜."
"줄 거예요."

바르트가 손을 뻗어 켈리의 팔을 잡았다. 잡는 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얹은 정도였는데 켈리가 멈췄다. 멈춘 이유는 힘 때문이 아니라 그 손이 폐허에서 그릇을 내밀던 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사흘 치밖에 없어."
"저 하나면 돼요."
"자네 하나면 오늘 자네가 굶어."
"굶어 본 적 있어요."
"알아."

바르트가 그렇게 말하고 손을 놓았다. 놓았는데 켈리가 가지 않았다. 가지 않은 이유는 그다음 말이 없어서였다. 바르트는 말리지도 않았고 가라고도 하지 않았다. 켈리가 아는 세계에서는 그런 경우가 없었다. 하라고 하거나 하지 말라고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켈리가 그 자리에 빵을 들고 서 있었다.

니카가 그것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몇 명입니까."
"…모르겠어요."
"세 보셨잖아요."
"예순에서 그만뒀어요."
"예순이 넘는다는 뜻이네요. 그럼 빵 하나를 예순으로 나누면 한 사람당 얼마가 갑니까."

켈리가 셈을 했다. 빵 한 덩이가 손바닥만 했다. 그것을 예순으로 나누면 손톱만 해진다.
"…조금이요."
"조금도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조금을 누가 받습니까. 앞에 있는 사람이 받습니다. 뒤에 있는 사람은 못 받고요. 그러면 뒤에 있는 사람이 앞에 있는 사람을 봅니다."
"보면요."
"보면 그때부터 저 줄이 줄이 아니게 됩니다."

켈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쪽에 가까웠는데, 그 둘을 구분하는 법을 켈리는 아직 배우지 않았다.

오벨이 가방을 열었다.
"조항이 없습니다."
"뭐가요."
"이 경우에 관한 조항이요. 어제 만든 문서에 열한 개 조항이 있는데 그중 어느 것도 이 상황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럼 만들어요."
"…만들겠습니다."

오벨이 종이를 꺼냈다. 어제 쓰고 남은 두 장 중 한 장이었다. 숯을 쥐고 제일 아래에 적기 시작했다.

「제12조.」

거기서 멈췄다. 멈춘 채로 한참 있었다. 손이 종이 위에 있었고 숯 끝이 종이에 닿아 있었는데 움직이지 않았다.
"뭐라고 쓰시는데요."
린이 물었다.
"…생각 중입니다."

「제12조. 모르는 사람이 배고파 보이면」

거기서 또 멈췄다. 그 뒤에 무엇이 와야 하는지를 그는 알 수 없었다. 준다고 쓰면 사흘 뒤에 다섯이 굶는다. 안 준다고 쓰면 그것을 문서로 남기는 것이 되고, 문서로 남긴 것은 지켜진다. 오벨 리스트는 열두 해 동안 문서로 먹고살았고 문서가 사람을 묶는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로 그 이유로 지금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제12조. 모르는 사람이 배고파 보이면 그중 하나에게만」

그는 그 줄에 선을 그었다.

「제12조. 모르는 사람이 배고파 보이면 가진 것의 십분지 일까지」

그 줄에도 선을 그었다.

「제12조. 모르는 사람이 배고파 보이면 그날 가장 여유 있는 사람이」

세 번째 줄에도 선을 그었다. 세 번째를 지울 때는 선을 두 번 그었다.

니카가 그것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못 쓰시는 겁니까."
"…쓸 수는 있습니다."
"근데요."
"쓰면 지켜야 합니다."
"지키면 되잖아요."
"어느 쪽으로 쓰든 지키게 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린이 그 말을 듣고 오벨을 보았다. 그리고 종이를 보았다. 지워진 줄이 셋이었고 그 위에 「제12조」만 남아 있었다.
"…이상하네요."
"뭐가 말입니까."
"어제는 열한 개를 한나절에 썼잖아요."
"어제 것들은 우리 사이의 일이었습니다."
"이건 뭔데요."
"이건 우리 사이의 일이 아닙니다."

바르트가 그때 일어섰다. 그가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소금 자루였다. 어제 마을에서 산 것이고 값이 세 돈이었다. 그는 그것을 반으로 나누지 않고 통째로 들었다. 그리고 열 걸음을 걸어가 수레를 끌던 여자 옆에 놓았다. 놓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왔다.

여자가 그것을 보았다. 보고 나서 바르트를 보았는데 바르트는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그건 뭡니까."
니카가 물었다.
"소금."
"왜 소금입니까."
"빵은 먹으면 없어져."
바르트가 자기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소금은 오래 가. 그리고 저 사람들 솥이 있어."

니카가 그 말을 받아 놓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산이 맞았기 때문이다. 빵 한 덩이는 예순으로 나뉘지 않지만 소금 한 자루는 솥 하나에 들어가고, 솥 하나는 예순을 먹인다. 한 끼는 아니고 한 끼의 맛이지만, 열흘을 멀건 것만 먹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한 끼보다 클 수도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20년 전에 나도 저 줄에 있었어."

그 말에 아무도 다음 말을 하지 못했다. 바르트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더 설명하지 않았다. 카르소가 삼켜진 것이 31년 전이었고 그때 그가 열셋이었다는 것을 그 자리의 누구도 계산해 보지 않았다.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은 지금 다른 것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켈리는 여전히 빵을 들고 서 있었다.
"…아저씨."
"어."
"저는 뭘 줘요."

바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켈리가 자기 짐을 보고 있었다. 자루 하나였다. 안에 든 것은 갈아입을 것도 아니고 팔 것도 아니었다. 남색 로브 한 벌과 회색 내의 한 벌과 종이 두 장이 전부였고, 그중 로브와 내의는 켈리 것이 아니었다. 벨류엔이 지급한 것이었다.

가진 것 중에 자기 것이 두 장짜리 종이뿐이라는 사실을 켈리가 그 자리에서 알았다.
"없으면 안 줘도 돼."
"주고 싶은데요."
"…그래."

바르트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숙인 이유는 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그날 오후에 일행은 행렬보다 빨리 걸었다. 빨리 걸은 것은 일부러가 아니었다. 다섯이 걷는 속도와 예순이 걷는 속도가 원래 다르다. 다섯은 각자 자기 발로 걷고 예순은 가장 느린 사람에게 맞춘다. 반 시간 만에 행렬이 뒤로 멀어졌고 한 시간 뒤에는 굽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켈리가 세 번 돌아보았다. 세 번째에 린이 물었다.
"뭐 봐."
"안 보여서요."
"안 보이면 없는 거야?"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켈리가 전에 들은 적이 있는 말이었다. 순서가 반대였다. 그때는 켈리가 저쪽이었고 물어본 사람이 이쪽이었다.

늦은 오후에 길이 강에서 멀어지면서 오르막이 시작됐다. 세 번 굽어 올라가는 길이었고 굽이마다 아래가 더 넓게 보였다. 두 번째 굽이에서 강이 실처럼 가늘어졌고 세 번째 굽이에서는 소리만 남았다. 마지막을 돌자 능선이었다.

능선 너머에 들판이 있었다.

밀이었다. 켈리가 그것을 알아보았다. 로엔 북부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고 그때 이름을 배웠다.

같은 밀인데 달랐다. 북부의 것은 빽빽해서 땅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 것은 사이가 떴다. 키가 작았고 색이 고르지 않아 누런 자리가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그런데도 넓이는 넓어서 남쪽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았다.
"이것도 밀이에요?"
"밀입니다."
"근데 왜 이래요."
"여기는 물이 적습니다. 로엔은 남쪽으로 갈수록 그렇습니다."

바람이 한쪽에서 밀려오면 그 성긴 것이 결을 이루며 쓸려 갔는데 결이 한 줄이 아니었다. 여러 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갔고 줄과 줄 사이의 속도가 달라서 들판 전체가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해가 기울고 있었으므로 결이 지나갈 때마다 색이 한 번씩 바뀌었다. 성긴 자리에서는 흙이 같이 드러났고 그 흙이 검어서 결이 지날 때마다 검은 줄이 함께 났다.

들판 가운데에 길이 한 줄 나 있었다. 그 길만 누렇고 나머지는 푸르렀다. 밭을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밀을 밟아서 난 길이었고 한 사람이 밟아서 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다섯이 능선에 서서 그것을 보았다.

오벨이 수첩을 폈다. 폈다가 다시 덮었다. 그 수첩 앞쪽에는 로엔 북부에서 적은 줄이 하나 있었다. 밀 한 이랑이 사람 하나를 몇 해 먹이는지를 적어 둔 줄이었고, 이랑이 몇인지는 적지 못해 비워 두었다. 그는 그 옆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이랑을 가로질러 간 것을 세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린이 먼저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뭘 꺾어서 올라왔다.
"이거."
"…뭔데요."
"꽃."

켈리가 그것을 받았다. 받아서 한참 들여다보았다. 노란 것이 다섯 갈래로 벌어져 있었고 줄기에 아직 물기가 있었다.
"먹는 거예요?"
"…아니."
"그럼 뭐 하는 건데요."
"그냥 예쁘잖아."
"…예."

켈리가 그것을 손에 들고 있었다. 들고 있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니카를 보았다. 니카가 못 본 척했다. 오벨을 보았다. 오벨이 방금 덮은 수첩을 다시 폈다. 바르트를 보았다.
"…품에 넣어."
"왜요."
"손에 들고 가면 짐이야."

켈리가 꽃을 품에 넣었다. 넣고 다시 걸었다. 반 시간 뒤에 꺼내 보니 눌려서 납작해져 있었다.
"…망가졌는데요."
"원래 그래."
"원래 망가져요?"
"응."
"그럼 왜 꺾어요."

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그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였다. 정령술사는 꽃을 꺾지 않는다. 꺾으면 빌릴 것이 하나 줄어든다. 린은 열 살 때부터 그것을 배웠고 그 뒤로 꽃을 꺾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꺾었다. 왜 꺾었는지는 린도 몰랐다.

켈리가 능선에서 한 번 뒤를 보았다. 골짜기가 아래에 있었고 강이 보였고 자갈밭이 보였다. 줄은 보이지 않았다. 굽이에 가려 있거나 아직 거기까지 못 왔거나 둘 중 하나였다.
같은 길이다. 저 사람들도 이 능선을 넘는다. 사흘 뒤일지 나흘 뒤일지는 몰라도 넘기는 넘고, 넘으면 이것을 본다.
그 생각을 하고 나서 켈리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나아진 이유를 켈리는 설명하지 못했다.

저녁에 자리를 잡았다. 오벨이 종이를 폈다. 지워진 줄 셋 위에 「제12조」만 남아 있는 종이였다. 그는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숯을 들었다.
그리고 「제12조」에도 선을 그었다.
"…안 쓰십니까."
"못 쓰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또 만나면요."
"…그때 정하겠습니다."
"그건 규칙이 아니잖아요."
"예. 규칙이 아닙니다."

오벨이 종이를 접었다. 접으면서 손이 조금 늦었다. 그는 그날 밤에 수첩을 따로 펴고 한 줄을 적었는데, 계약서가 아니라 자기 수첩이었으므로 아무도 보지 않았다.

「조항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 있다.」

적고 나서 그는 그 줄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으려다 그만두었다. 그 아래에 적힐 말이 무엇인지를 알았는데, 알면서도 적지 못한 이유는 그것을 적으면 자기가 열두 해 동안 해 온 일의 절반이 흔들리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에 별이 많았다.

구름이 없었고 달이 늦게 떴다. 밀밭 위로 하늘이 넓게 열렸는데 가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지평선까지 별이 내려와 있었다. 아래쪽 별은 흔들렸다. 공기가 땅에서 올라오기 때문이라고 오벨이 말했고,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켈리가 누워서 그것을 보았다. 왕도에서는 별을 볼 일이 없었다. 밤에는 막사 안에서 자고, 밖에서 자는 날은 비가 오는 날이거나 훈련하는 날인데 훈련하는 날은 위를 보면 안 된다.
"…많네요."
"뭐가."
"별이요."
"원래 많아."
"원래요?"
"응."

켈리가 그 말을 들었다. 원래 그렇다는 말을 켈리는 오늘 두 번 들었다. 땅은 원래 안 마르고 별은 원래 많다. 그러면 흙이 털려 없어지고 하늘이 비어 있던 쪽에서 열두 해를 산 것이 된다.

멀리서 강물 소리가 들렸다. 낮에 지나온 그 강이었고 밤에는 소리가 더 컸다. 물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바퀴 소리도 없었다.

켈리는 그날 밤 자기 몫의 빵을 먹지 않았다. 품에 넣었다. 넣고 나서 손으로 한 번 눌러 보았다. 종이 두 장과 납작해진 꽃과 빵 한 덩이가 거기 있었다. 열두 해 동안 켈리가 품에 넣어 온 것은 언제나 먹을 것이었고, 먹을 것을 품에 넣는 이유는 나중에 먹으려고였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켈리 자신도 정하지 못했다. 다만 먹어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만 알았고, 그래서 먹지 않았다.
빵은 이틀 뒤에 딱딱해졌다. 꽃은 그보다 먼저 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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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하는 법


로엔 남부의 농지는 물로 나뉘어 있었다.

담이나 울타리가 없었다. 대신 수로가 있었다. 밭과 밭 사이로 폭이 두 걸음쯤 되는 도랑이 나 있고 그 안으로 물이 흘렀으며, 어느 밭이 어디까지인지는 그 도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물을 나누는 것이 곧 땅을 나누는 것이었다. 로엔에서 밭을 놓고 벌어지는 다툼은 거의 전부 물을 놓고 벌어지는 다툼이었고, 그래서 이 나라의 재판 기록 절반이 물에 관한 것이었다.

일행이 그 수로를 따라 걷게 된 것은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이었다. 큰길에서 갈라져 나온 샛길을 탔는데 그 샛길이 밭 사이로 들어가더니 없어졌다. 없어진 자리에 물만 흐르고 있었다.
"물어봐야겠는데."
바르트가 말했다.

앞쪽에 사람이 모여 있었다. 열 명쯤이었고 전부 수로 한쪽 가에 서 있었다. 서 있는 모양이 일을 하다 만 모양이었다. 삽을 든 사람이 삽을 땅에 짚은 채로, 자루를 진 사람이 자루를 진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수로였다. 정확히는 수로 위에 걸쳐진 널 한 장이었다.

널은 길이가 어른 키만 했고 폭이 두 뼘이었다. 물 위에 가로로 놓여 있었으며 양 끝이 도랑 가장자리에 걸쳐져 있었다. 널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널 가운데에 작은 것들이 놓여 있기는 했다. 조가비 몇 개와 유리구슬 세 알과 마른 꽃 한 줌이었다. 그것들이 한 줄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널 앞에 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여자아이였다. 켈리와 또래로 보였고 켈리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밝은 밤색 머리를 여러 갈래로 땋아 갈래마다 구슬을 꿰었고, 팔목과 발목에 장신구가 다발로 감겨 있었다. 조가비와 유리와 나무를 깎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맨발이었다. 발등까지 진흙이 올라와 있었는데 씻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묻힌 것처럼 고르게 묻어 있었다.

그 아이가 널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소리가 아주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말하다가 멈추고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가 매번 같았다.

이런 일에도 직업이 있었다. 로엔의 큰 농지에서는 물이 갈라지는 자리마다 교섭인을 두었고, 교섭인은 대개 실베인에서 왔으며, 품삯은 밭 주인들이 나누어 냈다. 물이 제때 오면 아무도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고 물이 안 오면 그 사람이 책임을 졌다. 좋은 직업은 아니었다. 실베인 사람들이 이 일을 하러 로엔까지 오는 이유는 실베인에 밭이 적기 때문이었다.

켈리가 그것을 보았다. 켈리가 아는 자세 중에 저것과 비슷한 것이 하나 있었다. 마법청 검열관이 왔을 때 대원들이 취하는 자세였다. 다만 그 자세는 사람을 향해 서서 하는 것이었지 물을 향해 꿇어앉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뭐 하는 거야."
켈리가 물었다.
"교섭입니다."
니카가 대답했다.
"물길 정령이랑요."
"정령이 뭔데."
"물에 사는 겁니다. 정확히는 물을 맡고 있는 거고요."
니카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잘은 모릅니다. 실베인 사람들이 저런 걸 합니다. 우리 쪽에서는 잘 안 하고요."
"저기 아무것도 없는데."
"그렇죠. 그래서 못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오벨이 널 위의 물건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그 배열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려 하는 중이었는데 읽히지 않았다. 계약서라면 읽을 수 있었다. 조가비 세 개와 유리 세 알과 마른 꽃의 배열에는 조항이 없었다.
"저 물건들에 뜻이 있습니까."
"예물일 겁니다."
"무엇에 대한 대가입니까."
"물을 좀 돌려 달라는 거겠죠. 저 아래쪽 밭이 마른 모양입니다."

바르트는 이미 그쪽으로 걷고 있었다. 길을 물어야 했고 저기 사람이 있었다. 켈리가 따라갔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를 배운 적이 없었다. 벨류엔에서는 물을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분대에서는 분대장에게, 분대장이 없으면 그 위에게, 아무도 없으면 묻지 않고 기다린다. 물을 사람을 고르는 일 자체가 없었으므로 고르는 법도 없었다.

켈리는 사람들을 훑었다. 계급장을 찾았다. 없었다. 나이순으로 세워 보려고 했는데 나이가 제각각이었고 서 있는 자리에도 규칙이 없었다. 삽을 든 사람이 앞에 있고 손이 빈 사람이 뒤에 있었다. 켈리가 아는 어떤 배열도 아니었다. 그래서 켈리는 가장 앞에 있는 사람에게 갔다.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은 무릎을 꿇고 있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 아이와 켈리 사이에 수로가 있었다. 수로를 건너려면 건널 것이 필요했고 건널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켈리가 널을 밟았다.

정확히 말하면 밟으려고 발을 올렸다. 발바닥이 널에 닿았고 무게가 실렸다. 켈리는 마른 강바닥에서 오래 걸었던 사람이라 발을 디딜 때 앞쪽부터 놓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대로 놓았다. 널은 두꺼웠고 사람 하나쯤은 충분히 받쳤을 것이다. 그러나 널 가운데에 조가비와 유리구슬과 마른 꽃이 놓여 있었고, 켈리의 발이 그 위로 올라갔다.

유리구슬 하나가 깨졌다.

소리가 아주 작았다. 물소리에 묻힐 만한 소리였는데 아무도 그렇게 듣지 않았다. 열 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무릎 꿇고 있던 아이가 허리를 펴고 켈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아이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화가 아니었다. 화는 그다음에 왔다. 먼저 온 것은 무언가가 방금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물이 멎었다.

멎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수로의 물은 계속 흘렀다. 다만 아래쪽으로 갈라지는 작은 도랑 하나로 들어가던 물이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갈라지는 자리에서 물이 한 번 뭉쳤다가 전부 본줄기로 갔다. 손으로 막은 것처럼 갔다. 막은 것은 없었다.

아래쪽 밭에서 누가 소리를 질렀다.
"안 와!"

아이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켈리의 발을 보았고 깨진 유리를 보았고 남은 조가비를 보았다. 그러고는 켈리의 얼굴을 보았다.
"너 지금."
"길 좀 물으려고요."
"거길."
"예."
"거기를 밟고."
"예."
아이가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그리고 참았다. 참는 것이 보였다.
"내려와."

켈리가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두 번째 유리구슬을 밟았다.

그 아이의 이름이 린 소아레라는 것은 한참 뒤에 알게 된다. 그때 켈리가 알고 있던 것은 자기가 무언가를 깨뜨렸다는 사실 하나뿐이었고, 그것을 물어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았으나 무엇으로 물어내야 하는지는 몰랐다. 유리구슬의 값은 알 수 있었다. 그 유리구슬이 놓여 있던 자리의 값은 알 수 없었다.

린이 무릎을 다시 꿇었다.
"다시 합니다."
"뭘 다시."
농부 하나가 말했다.
"인사부터 다시 합니다. 처음부터요."

린이 널 앞에 이마가 닿을 만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이번에는 소리를 내서 말했다.
"윗물을 맡으신 분께. 아까 여쭌 사람입니다. 제 잘못으로 자리가 상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례를 더 올리겠습니다."
린이 손목에서 장신구 하나를 풀었다. 파란 유리를 깎은 것이었다. 그것을 널 위에 놓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먼저 여쭙고 놓았어야 하는데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제 잘못입니다."
린이 그 유리를 도로 집었다. 그리고 다시 절을 하고 나서 다시 놓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린이 일어나서 켈리에게 왔다. 아주 빠르게 왔다.
"네가 해."
"뭘요."
"사과."
"누구한테요."
"저기."

켈리가 널을 보았다. 널 위에 조가비와 깨진 유리가 있었다. 그 너머에 물이 있었고 물 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저기 아무도 없는데요."
"있어."
"안 보이는데요."
"안 보이는 게 없는 거야?"

켈리가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흘 전에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면 안 본 거지 없는 게 아니라고 어떤 사람이 말했다. 켈리는 그 말을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갖고 다니는 중이었다.
"뭐라고 해요."
"미안하다고 해."
"미안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말고."
"어떻게요."
"진심으로."
"진심이 뭔데요."

린이 켈리를 보았다.

그 순간 린의 얼굴에서 화가 조금 빠졌다. 빠진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왔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린 자신도 몰랐다. 열여덟 해를 살면서 진심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비꼬는 얼굴이 아니었고 따지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정말로 모르는 얼굴이었으며, 그런 얼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린은 그때 처음 알았다.

뒤에서 농부들이 움직였다.
"됐어. 나가."
"아직 됩니다."
린이 돌아섰다.
"한 번만 더."
"두 시간 했잖아."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물이 안 오잖아!"

그 말에는 대꾸할 것이 없었다. 물이 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고, 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든 밭은 마르고 있었으며, 마르는 밭 앞에서 예법을 설명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삽을 든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켈리가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고쳐 쥐었고 바르트가 그 팔을 눌렀다.
"갑시다."
바르트가 말했다.
"저 사람 삽 들었는데요."
"삽으로 땅 파던 사람이야. 우리가 여기 있으면 저 사람이 오늘 안에 삽으로 다른 걸 파게 돼."

일행이 물러났다.

린도 같이 나왔다. 아무도 린에게 나가라고 하지 않았는데 나왔다. 정확히는 한 사람이 말하기는 했다. 그 말은 나가라는 뜻이 아니라 다시는 오지 말라는 뜻이었고, 린은 그 둘을 구별할 줄 알았으므로 대꾸하지 않고 널 위의 조가비를 하나씩 주워 담았다.

줍는 데 시간이 걸렸다. 깨진 유리를 먼저 주웠고 조가비를 나중에 주웠다. 손끝이 베였는데 신경 쓰지 않았다. 마른 꽃은 물에 떨어져 이미 떠내려가고 없었으므로 린은 그 자리를 잠깐 보다가 그만두었다. 마지막으로 널을 들어 도랑 가에 세워 놓았다. 세워 놓는 방향이 있는 모양이었다. 두 번 고쳐 세웠다.

켈리가 그것을 보고 있었다. 물에 빠진 꽃을 찾는 시간과 널을 두 번 고쳐 세우는 시간은 켈리가 아는 어떤 셈에도 들어가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무언가가 생기지 않았고 무언가가 줄지도 않았다. 켈리는 그것이 낭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다가 판단할 기준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었다.

밭을 벗어나는 데 한참 걸렸다. 수로를 두 번 건너고 마른 도랑을 한 번 넘었다. 린이 앞장서서 걸었고 걸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맨발이 진흙을 밟는 소리만 났다.

큰길에 올라서고 나서 린이 멈췄다. 그리고 손목의 장신구를 세기 시작했다.

왼쪽 손목부터 세고 오른쪽 손목을 세고 발목 두 짝을 셌다. 세는 동안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다 세고 나서 한 번 더 셌다.

스물셋이었다.

"스물셋."
린이 말했다.
"아침에 스물넷이었는데."
"하나 놓고 왔잖아."
켈리가 말했다.
"그래. 놓고 왔지. 받지도 못했는데 놓고 왔지."
"그거 얼마예요."
린이 고개를 돌렸다.
"뭐?"
"그 유리요. 값이 얼마예요. 제가 깼으니까 물어야 되는데 지금은 돈이 없고, 그래서 얼마인지 알아야 갚을 때 갚아요."

린이 켈리를 한참 보았다. 화를 낼 참이었는데 그 말이 화를 낼 자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산하는 말이었고 계산하는 사람의 얼굴이었으며, 무엇보다 그 말을 하는 동안 켈리는 미안해하지 않고 있었다. 미안해하지 않는 것이 뻔뻔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린은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뻔뻔한 얼굴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보았다.
"…여섯 냥."
"여섯 냥."
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 둘게요."

그러고는 정말로 종이를 꺼내서 적었다. 린이 그것을 보고 있다가 물었다.
"너 뭐야."
"켈리요."
"그게 아니라."
"예?"
"됐어."

린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열 걸음쯤 가다가 멈췄다. 그리고 돌아섰다.
"아니 그게 왜 됐어. 하나만 물어볼게. 너 그게 뭔지 알고 밟았어?"
"널이요."
"널 아니야."
"널처럼 생겼는데요."
"널처럼 생긴 건 맞지. 근데 널이 아니야. 자리야."
"자리가 뭔데요."
"올라오는 자리."
"뭐가요."
"그분이."

켈리가 고개를 돌려 오벨을 보았다. 오벨이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그는 방금 들은 말을 자기 머릿속의 어떤 항목에도 넣지 못하고 있었다.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만."
"뭔데요."
"그 자리에 관한 권리는 누구에게 귀속됩니까. 밭 소유자입니까, 아니면 그 자리를 마련한 사람입니까."
"…예?"
"손괴가 발생했으니 청구권자가 특정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그 자리가 설치된 널이 밭 소유자의 재산이라면 재물 손괴와 예법 위반이 별개의 건으로 성립할 여지가—"
"아저씨."
"예."
"그런 거 없어요."
"없다는 것은 규정이 없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적용이 안 된다는 뜻입니까."
"둘 다요."

오벨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날 두 번째로 자기 직업이 닿지 않는 자리를 만났다.

니카가 뒤에서 끼어들었다.
"제가 여쭤도 됩니까. 그 정령이라는 게, 부탁을 들어주는 확률이 얼마쯤 됩니까."
"확률?"
"예. 열 번 하면 몇 번 됩니까."
"그런 식으로 안 세."
"안 세면 어떻게 압니까. 될지 안 될지를요."
"안 알아. 모르고 하는 거야."
"모르고 하시는데 이 일로 먹고사셨다고요."
"어."

니카가 정말로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것은 이 아이가 좀처럼 짓지 않는 얼굴이었다. 니카 셰르는 세상 모든 일에 승산이 붙어 있다고 믿으며 살아온 사람이었고, 승산이 붙지 않는 일에 밥벌이를 거는 사람을 그날 처음 보았다.

린이 두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아니 진짜. 너희 뭐야. 넷이 다 말이 안 통해."

그 말은 정확했다. 다만 정확하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날 큰길 위에서 네 사람은 각각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다. 하나는 조항으로 말했고 하나는 확률로 말했고 하나는 예법으로 말했으며 남은 하나는 무게와 값으로 말했다. 같은 말을 쓰는데 같은 뜻이 아니었다. 그 어긋남이 나중에 다섯 사람을 거의 갈라놓게 되는데, 그것은 아직 며칠 뒤의 일이었다.

날이 저물었다. 큰길 옆 잡목 아래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날은 내내 궂었고 저녁부터 비가 왔다. 오래 오지는 않았으나 나무를 적실 만큼은 왔다.

바르트가 불을 피우려고 했다. 반 시간 걸렸다. 안 됐다.

"젖었어."
그가 말했다.
"마른 게 없어."
"기름 부으면요."
켈리가 물었다.
"기름은 아침에 밥 하는 데 써야지."

린이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일행을 따라오고 있었는데 아무도 오라고 하지 않았고 아무도 가라고 하지 않았다. 오벨이 한 번 「동행 관계가 성립하였는지」를 확인하려 했다가 바르트가 눈짓으로 말렸다.

린이 일어섰다.
"제가 할게요."
"할 수 있어?"
"해 볼게요. 대신 조용히 해 주세요. 특히 저."
린이 켈리를 가리켰다.
"저 사람. 움직이지 마세요."

켈리가 그 자리에서 굳었다. 차렷 자세가 나왔다. 린이 그것을 보고 잠깐 말을 잃었다가 그냥 넘어갔다.

린이 젖은 나뭇가지를 모아 한군데 쌓았다. 쌓는 방법이 특별하지 않았다. 그다음이 특별했다.

린이 무릎을 꿇었다. 쌓아 놓은 나뭇가지 앞에서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등을 폈다. 그리고 말했다.
"이 근처에서 마른 자리를 맡고 계신 분께 여쭙습니다."

한 박자 쉬었다.
"이름을 모르고 부르는 무례를 먼저 사과드립니다. 실베인 소아레 마을에서 온 린입니다. 오늘 아랫녘 물자리에서 실례를 저질렀고 그 일은 그쪽에도 전해졌을 줄 압니다. 그러니 제 청을 들어주지 않으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또 한 박자.
"다만 여기 사람이 넷 있고 그중 하나가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밤이 길고 옷이 젖었습니다. 불을 조금만 빌리고 싶습니다. 오래 쓰지 않겠습니다. 이 나뭇가지가 다 탈 때까지만 쓰고 그 뒤로는 더 청하지 않겠습니다."

또 한 박자.
"사례는 먼저 보여 드리고 나중에 놓겠습니다."

린이 손목에서 장신구를 하나 풀었다. 조가비였다.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 불 자리 위로 한 번 들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손을 내렸다.
"빌려주시겠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켈리는 여기서 또 안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생각하면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 기분의 이름은 아마 실망이었을 것이고 켈리는 그 이름도 몰랐다.

그때 젖은 나뭇가지 가운데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연기가 먼저 올라오고 그다음에 아주 작은 불이 붙었다. 붙는 방식이 이상했다. 보통 불은 가장자리부터 붙어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은 한가운데부터 붙어서 밖으로 나왔다. 젖은 나무가 타면 나야 할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냥 마른 나무처럼 탔다.

불이 자리를 잡았다.

"고맙습니다."
린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약속대로 이 가지가 다 타면 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고는 조가비를 불 자리 옆 돌 위에 놓았다.

스물둘이 되었다.

켈리가 그 불을 보고 있었다. 보다가 린을 보았다. 린은 불 가까이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주 가까이였다. 손바닥이 불꽃에서 한 뼘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뜨거울 텐데요."
"안 뜨거워."
"그게 무슨."
"빌린 쪽 감각이 없어져. 불을 빌렸으니까 오늘 밤엔 뜨거운 걸 못 느껴."
린이 손을 그대로 두고 말했다.
"물 빌리면 목마른 걸 못 느끼고 바람 빌리면 숨 막히는 걸 못 느껴. 그런 거야."
"그럼 손 타는데요."
"어."
"타는지 모르고요."
"어."

켈리가 린의 손목을 잡아 뒤로 당겼다. 당기는 힘이 조금 셌다. 린이 끌려오면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가 켈리가 다시 잡아 세웠다.
"아 진짜, 그렇게 세게."
"손이 빨개요."
"…그러네."

린이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만져 보았는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고마워."
"뭐가요."
"봐 준 거."

켈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을 봐 줬다는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손이 빨개지고 있으면 치우는 것이 당연했다. 당연한 것에 고맙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켈리는 아직 몰랐다.

대신 켈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낮에 들은 말이었다. 진심으로 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켈리는 진심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물었을 때는 정말로 몰라서 물은 것이었고 지금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하나가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에 린이 불 앞에서 한 말들은 낮에 널 앞에서 한 말들과 문장이 거의 같았다. 같은 순서였고 같은 높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낮에는 안 됐고 지금은 됐다.

무엇이 달랐는지를 켈리는 알아내지 못했다.

켈리가 아는 세계에서 결과가 달라지는 이유는 언제나 양이었다. 힘을 더 쓰면 더 부서지고 덜 쓰면 덜 부서진다. 건량을 두 냥 받는 날과 여섯 냥 받는 날은 다르게 움직인다. 양이 같은데 결과가 다른 경우를 켈리는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을 설명하는 말이 세상에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이라거나 정성이라거나 진심이라고 불렀으며, 어린아이들도 대개 예닐곱 살에 그 말을 배웠다. 그 나이의 켈리가 배운 것은 폭발의 세 단계였다.

불이 자리를 잡고 나서 한참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바르트가 냄비를 올렸고 니카가 젖은 외투를 뒤집어 널었으며 오벨이 젖은 종이를 한 장씩 떼어 말렸다.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린이 켈리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까 그거."
"예."
"물어본 거. 진심이 뭐냐고."
켈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거 진짜 몰라서 물어본 거야?"
"예."
"아무도 안 가르쳐 줬어?"
"예."

린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이 한 번 튀었고 그쪽으로 재가 조금 날렸다.
"나 린이야. 린 소아레."
"…예."
"이름 말했으면 다음은 네 차례야. 그게 인사야."

켈리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이름을 대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글자였고 켈리는 그것을 쓸 줄도 알았다. 다만 켈리가 자기 이름을 남 앞에서 소리 내어 말해 본 것은 열여덟 해 동안 세 번이 되지 않았다. 벨류엔에서 켈리를 부르는 것은 번호였고, 대답할 때는 번호를 복창했으며, 이름이 필요한 자리가 없었다. 폐허에서는 어떤 사람이 먼저 물어서 대답했고 그 사람이 노트에 적어 주었다. 타르실에서는 종이 위에 남이 써 준 것을 보고 그 옆에 손가락을 눌렀다.

먼저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켈리."
"성은?"
"없어요."
"나도 없어. 소아레는 우리 마을 이름이야. 실베인은 다 그래. 땅 이름을 붙여."
"그럼 저는 뭘 붙여요."
"그건 네가 정하는 거지."

켈리가 그 말을 받아 놓았다. 받아 놓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할 수 있는 것을 정하지 않고 두는 법을 켈리는 그날 처음 써 보았는데, 쓰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린이 무릎을 안고 앉았다.
"내일부터 인사하는 법 가르쳐 줄게."
"왜요."
"네가 못 하니까."
"안 배우면요."
"안 배우면 또 밟겠지."
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맞는 말이었으므로 반박할 것이 없었다.
"근데 왜 가르쳐 줘요."

린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린 자신도 그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동안 린은 두 달치 일을 잃었고 장신구를 둘 잃었으며 그 밭에 다시 못 들어가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원인에게 화를 내는 것이 순서인데 화가 나지 않았다. 화가 나지 않는 이유를 찾자면 하나 있기는 했다. 진심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의 그 얼굴이었다.

린은 그 얼굴을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실베인에서는 세 살짜리도 그건 안다.

"그냥."
린이 말했다.
"몰라서 그런 거면 가르쳐 주는 거야. 그게 예법이야."

켈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두었다. 요즘 그런 것이 자꾸 늘고 있었는데, 늘어도 무겁지 않다는 것을 알아 가는 중이었다.

불은 약속대로 그 가지가 다 탈 때까지만 탔다. 다 타고 나서 저절로 꺼졌다. 꺼진 자리에 조가비 하나가 놓여 있었고 아무도 그것을 집어 가지 않았다.

첫 수업은 이튿날 아침에 있었다.
"자. 마주 봐."
"예."
"허리 펴지 마."
"예?"
"허리를 펴지 말라고. 너 지금 사열받는 것 같아."
"이게 제일 바른 자센데요."
"바른 게 문제야. 인사는 바르게 하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하는 거야."
"부드럽게가 뭔데요."
"…턱 내려. 아니 그렇게 말고. 아니 너무 내렸어."

바르트가 냄비를 저으면서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니카는 아예 등을 돌리고 누웠는데 어깨가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오벨만이 진지하게 지켜보면서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나중에 확인된 바로 그가 적은 것은 「예법 교습, 대가 미정, 조항화 필요」였다.

"다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거 말고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그건 웃는 게 아니라 이 보이는 거야."

켈리가 입을 다물었다.

린이 한숨을 쉬었다. 쉬고 나서 자기가 한숨을 쉬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표정을 고쳤다. 고치는 데도 요령이 있는 모양이었다.
"됐어. 오늘은 여기까지."
"못 했는데요."
"이틀 만에 되는 게 아니야. 나도 여섯 살부터 배웠어."
"여섯 살이요."
"어. 실베인에선 다 그래."

켈리가 그 말을 받았다. 여섯 살에 켈리가 배운 것은 다른 것이었다. 무엇을 배웠는지 말하려다가 말았는데, 말하지 않기로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을 말하는 법도 아마 배우는 것일 터였다.

짐을 다시 나눈 것은 떠나기 직전이었다.

넷이 지던 것을 다섯으로 나누었으므로 각자 몫이 줄었다. 바르트가 자루를 내려 다시 묶는 동안 켈리는 자기 몫이 가벼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게가 줄어드는 것은 눈으로도 보였다. 자루의 허리가 헐거워졌고 끈을 한 뼘 당겨 묶어야 했다.

켈리가 그 자루를 등에 얹고 몇 걸음 걸었다.
"이게 다예요?"
"어."
"더 주셔도 되는데요."
"더 줄 게 없어."
"저 무거운 거 들 수 있어요."
"알아."

바르트가 그렇게 말하고 자기 배낭을 멨다. 그는 켈리가 왜 저러는지를 두 달 전에 이미 알아냈고, 알아낸 뒤로는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설명하면 고쳐야 할 것 같아지고, 고치려 들면 켈리가 그것을 또 하나의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냥 두었다.

켈리는 가벼운 자루를 메고 조금 뒤처져 걸었다. 걸으면서 등 쪽에 신경이 갔다. 덜 지면 덜 받는다. 그것은 켈리가 여섯 살에 배운 것 중 하나였고 열두 해 동안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여기서는 틀리는 모양인데, 틀리는 이유를 모르니 몸이 먼저 불안해졌다. 켈리는 그 불안을 없애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뭐라도 더 지면 된다. 다만 더 질 것이 없었으므로 그냥 걸었다.

한편 바르트는 전날 밤에 노트를 펴 놓고 한참 앉아 있었다.

그가 고친 것은 한 줄이었다. 하루 지출 항목이었는데 넷일 때 잡아 둔 숫자를 지우고 다섯 사람 치로 다시 적었다. 하루에 닷 돈이 늘었다. 그 아래 잔액 줄을 고쳤고 그 아래 상환 줄을 보았다. 상환 줄은 고칠 것이 없었다. 타르실 중재소에서 정한 날짜는 사람이 몇이 되든 바뀌지 않았다.

세 줄을 나란히 놓으면 답이 저절로 나왔다. 가진 것으로 그 날짜까지 가지 못한다. 넷일 때도 아슬아슬했고 다섯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아슬아슬하지도 않았다.

바르트는 그 아래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적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적어 봐야 그 줄이 답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트를 덮고 불을 껐다.

린은 그 노트를 보지 못했다. 다만 보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린이 자기 장신구를 한 번 더 셌는데, 세는 이유가 낮과 달랐다. 낮에는 잃은 것을 세었고 밤에는 낼 수 있는 것을 세었다. 스물둘이었다. 그중에 값이 붙을 만한 것은 넷쯤이었고 나머지는 조가비와 나무였다.

실베인에서는 남의 무리에 끼면 먼저 자기 몫을 말한다. 내가 낼 것이 이만큼이고 받을 것이 이만큼이라고 말하고 시작한다. 그것이 예법이었고 린은 그 예법을 여섯 살부터 배웠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이 관대해서인지 그런 절차를 아예 모르는 것인지 린은 구별하지 못했고, 두 번째 쪽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며칠 뒤에 알게 된다.

일행은 그날 아침 다섯이 되었다. 그렇게 정한 사람은 없었다. 짐을 나눌 때 린 몫이 하나 생겼고, 그것으로 정해졌다.

늘어난 것은 사람 하나와 하루 닷 돈이었다. 줄어든 것은 각자의 등에 실린 무게였다. 그 둘이 같은 저울에 올라가는 것인지 아닌지를 그때 계산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합이 안 맞는다


일이 처음 어긋난 것은 로엔 남부의 마른 둑길에서였다.

셋이 앞에서 길을 막고 서 있었다. 스무 살이 안 되어 보이는 것이 둘이고 하나는 더 어렸다. 무기라고 할 만한 것을 든 사람은 없었고 하나가 막대기를 쥐고 있었는데 그것은 길에서 주운 것이 분명했다. 옷이 얇았고 신이 해졌으며 셋 다 마른 편이었다. 로엔에서는 겨울을 넘기고 봄이 오는 사이에 이런 무리가 길에 나왔다. 작년 것이 떨어지고 올해 것이 아직 안 나는 두 달이 그들에게는 가장 길었다.

"짐 좀 봅시다."

앞에 선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 말투가 공손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 일을 해 본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니카가 한 걸음 옆으로 비껴서면서 낮게 말했다.
"앞에 있는 애가 넘어질 겁니다. 7할쯤이요."
"넘어지면 뭐가 달라지는데."
바르트가 물었다.
"뒤에 둘이 도망갑니다. 저런 무리는 한 명이 무너지면 끝입니다. 8할 넘게요."

니카가 그 말을 하는 동안 이미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엄지로 무언가를 문지르는 동작이었고 그 동작에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일에 시간을 아주 조금밖에 쓰지 않았다. 길게 걸면 되돌아올 몫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켈리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듣지 못한 이유는 켈리가 이미 앞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막대기를 든 아이가 그것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고, 들어 올리는 것이 보이면 먼저 치는 것이 켈리가 아는 유일한 순서였다. 켈리는 지팡이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붙였다. 막대기가 튀어 올라 둑 아래로 날아갔다. 그다음에 지팡이 끝을 돌려 그 아이의 정강이를 옆으로 쳤다.

그 아이가 주저앉았다.

뒤의 둘이 도망쳤다. 정확히 니카가 말한 대로였다. 주저앉은 아이가 정강이를 붙들고 한 번 신음했다가 곧 일어나서 절뚝거리며 따라갔다. 셋이 사라지는 데 열 숨이 걸리지 않았다.

길이 조용해졌다.

"…끝났어요."
켈리가 돌아서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니카를 보았다.

니카는 그 자리에 서서 자기 왼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목이 부어 있었다. 아까까지는 멀쩡했다. 부은 자리가 붉지 않고 희끄무레했고, 그런 종류의 부기는 밤에 더 아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손이."
"원래 이럽니다."

니카가 손을 소매 안으로 넣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켈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알아챌 재료가 없었다. 켈리가 본 것은 세 사람이 도망쳤다는 것과 자기가 두 번 쳤다는 것이었고, 그 둘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 있었다는 것은 화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니카가 건 것은 값을 치르고 걸렸으며, 걸린 뒤에 쓰이지 않았고, 쓰이지 않았다고 해서 값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자리에 여덟 시간짜리 손목 하나를 지불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다음부터 켈리가 먼저 묻게 될 텐데, 묻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켈리가 늦게 움직이게 되고, 늦게 움직이면 켈리가 맞는다. 니카 셰르는 그 계산을 걸으면서 했고 결론이 나쁘게 나왔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계산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말하지 않으면 같은 일이 매번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해가 기울어 갈 무렵에 둑길을 벗어났다. 그날 밤 야영지는 버려진 축사 옆 평지였다.

바르트가 짐을 풀고 자리를 골랐다. 그가 고른 자리는 축사 벽에 붙은 쪽이었는데 바닥이 고르고 바람이 막히는 데가 거기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에 기름먹인 천을 깔고 유리병 넷을 늘어놓았다. 오늘 안에 개어 두어야 할 것이 있었다.

린이 그 옆에서 불 자리를 만들다가 손을 멈췄다.
"여기서 안 돼."
"뭐가 안 돼요."
"거기서 그거 하면 불 못 빌려."
"이거 냄새 안 나는데."
"나."

바르트가 병뚜껑을 닫았다. 닫고 나서 린을 보았다. 그는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고, 잘 듣는다는 것은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할 때도 일단 해 보는 것을 뜻했다.
"이러면 되나."
린이 불 자리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한참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안 돼."

바르트가 유리병 넷을 전부 자루에 넣고 자루 입구를 두 번 감아 묶었다. 그리고 그 자루를 열 걸음 떨어진 데에 갖다 놓았다. 옮기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는 불쾌해서가 아니라 조건을 하나씩 지워 보는 중일 때가 많았다.

린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다시 일어섰다.
"안 돼."

바르트가 개울로 내려가 손을 씻었다. 오래 씻었다. 손톱 밑까지 문질렀고 소매를 걷어 팔뚝까지 씻었다. 물이 차서 손이 벌게졌다. 돌아와서 두 손을 펴 보였다.
"이제."

린이 그 손을 보지 않고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곧 일어섰다.
"안 돼요."
"뭐가 문제야."
"손이 아니라 아저씨예요."

바르트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벌겋게 씻긴 손이었다. 그 손으로 20년 동안 무엇을 다뤄 왔는지가 그 손에 씻겨 나가지 않고 남아 있다는 말을 그는 그날 처음 들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매를 내렸다.

켈리가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켈리에게는 그것이 한 가지로 정리되었다. 아저씨가 여기 있으면 불이 안 붙는다.
"그럼 아저씨가 저쪽 가면 돼요?"
"안 돼."
"왜요. 아까 짐도 옮겼는데."
"짐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럼 뭐가 문제예요."
"…그건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것이 린의 대답이었고 그 대답은 사실이었다. 정령 쪽에서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싫어한다는 것만 알려지고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 실베인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자랐다. 이유를 모르는 채로 규칙을 지키는 일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켈리도 그런 일에는 익숙했다. 다만 켈리가 익숙한 쪽은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이었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벨류엔의 규정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알려 주지 않았을 뿐이지 어딘가에는 적혀 있었다. 적혀 있지 않은 규칙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났고, 만나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오벨이 가방을 열었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할 수 있어요?"
"부르면 손이 둘 나옵니다. 부싯돌은 칠 수 있을 겁니다."

가방에서 손이 둘 나왔다. 팔꿈치까지만 있고 색이 없었다. 잉크 냄새가 났다. 켈리는 그것을 볼 때마다 아직도 조금 물러섰는데, 그 자리의 다른 넷은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벨이 말했다.
"불을 피워라."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부싯돌을 쳐라."

손이 부싯돌을 쳤다. 한 번 쳤다. 그리고 멈췄다.

"스무 번 쳐라."

손이 스무 번 쳤다. 불꽃이 튀었고 열아홉 번째에 마른 이끼에 붙었다. 스무 번째를 치고 손이 멈췄다. 이끼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중이었고 바람을 조금만 보내 주면 붙을 상태였다. 손은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기가 사그라들었다.
"…불어라."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입이 없었다.
"…부쳐라."

손이 부쳤다. 세게 부쳤다. 어느 정도로 부치라는 말을 듣지 못했으므로 손은 낼 수 있는 만큼을 냈고, 꺼져 가던 이끼가 통째로 날아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스무 번 치고 붙으면 부쳐라."
손이 스무 번 쳤다. 이번에는 붙지 않았다. 붙지 않았으므로 부치지 않았다. 손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붙을 때까지 쳐라."
손이 쳤다. 계속 쳤다. 마흔 번쯤 치고 나서 부싯돌이 갈라졌다. 갈라진 부싯돌로 계속 쳤다. 불꽃이 나지 않는 돌을 계속 치는 동안 오벨이 이마를 짚었다.
"그만."
손이 멈췄다.

니카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불 자리에 던졌다. 기름 먹인 천 조각이었다. 그는 그것을 늘 갖고 다녔다. 불이 한 번에 붙었다.
아무도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니카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저녁에 그가 한 말은 그것 하나였다.
"저는 이거 셋 남았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일이 터졌다.
린이 밥을 지으려고 물을 빌렸다. 개울이 있었으나 물이 탁했고 린은 맑은 물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절차가 짧았다. 어제 인사를 해 두었으므로 오늘은 용건만 말하면 되었다. 그것이 정령 예법의 편한 점이었다.
물이 왔다. 야영지 둘레의 땅이 잠깐 젖었다가 말랐다.

니카가 그것을 보고 일어섰다.
"지금 뭐 하신 겁니까."
"물 빌렸는데."
"어디서요."
"여기서."

니카가 야영지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돌면서 땅을 보았다. 세 군데에서 멈췄고 세 번 다 같은 얼굴을 했다.
"여덟 시간짜리였습니다."
"뭐가."
"어젯밤에 걸어 둔 겁니다. 짐승이나 사람이 가까이 오면 발을 헛디디게요. 그게 땅에 묻혀 있었는데 방금 씻겨 나갔습니다."
"…몰랐어."
"모르셨겠죠."
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물어보셨으니까요."
"그걸 왜 내가 물어봐. 말을 안 해 줬잖아."
"말을 왜 합니까. 아무도 안 물어보는데."

린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닫고 나서 다시 열었다.
"실베인에서는 남의 자리에 뭘 걸면 먼저 말해. 그게 예법이야."
"여기는 실베인이 아닙니다."
"그럼 여기 예법은 뭔데."
"없습니다."

오벨이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날 아침은 그쯤에서 끝났을 것이다.
"정리하겠습니다. 이것은 고지 의무의 문제입니다. 공동으로 점유한 자리에 일방이 설비를 설치한 경우, 그 설비의 존재를 타방에게 알릴 의무가 누구에게 있는지가—"
"아저씨."
"예."
"지금 그게 중요해요?"
"중요합니다. 의무의 소재가 정해지지 않으면 손해를 누가 부담하는지가 정해지지 않습니다."
"손해가 뭔데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났는데."
"바로 그것이 손해입니다. 여덟 시간의 노무와 그에 수반된 신체적 대가가 결과 없이 소멸했으므로—"
"그러니까 내가 물어냐야 된다는 거야?"
"그렇게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방금 그랬잖아."
"저는 소재를 정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르트가 두 손을 들었다. 말리려는 동작이었는데 두 걸음 만에 그만두었다. 그는 20년 동안 사람을 상대로 한 계산은 해 본 적이 없었고, 이 자리에서 누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따지려면 그가 가진 저울로는 잴 수 없는 것을 재야 했다. 그래서 그는 물러나 냄비를 집어 들었다. 물러나는 것이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소리가 커졌다. 린이 손목의 장신구를 세기 시작했고 니카는 계산을 소리 내어 하기 시작했으며 오벨은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켈리가 일어섰다.
켈리는 지팡이를 들어 옆의 나무를 한 번 쳤다.
소리가 났다. 크고 짧고 마른 소리였다. 나무 몸통에서 껍질이 한 뼘쯤 떨어져 나갔고 그 조각이 땅에 떨어졌다. 새 몇 마리가 날았다.

그리고 다른 소리가 하나 더 났다. 아주 작았고 나무 소리에 섞여서 그 자리에서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조용해졌다. 넷이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지팡이를 도로 세우고 제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켈리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물었다면 켈리는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벨류엔의 대기소에서 소리가 커지면 교관이 그렇게 했다. 벽을 한 번 치거나 문틀을 한 번 쳤고 그러면 조용해졌다. 조용해지면 다음 지시가 나왔다. 켈리는 그 순서를 열두 해 동안 보았고 그날 처음으로 자기가 그 자리에 섰다.

다만 켈리에게는 다음 지시가 없었다.
교관이 벽을 치고 나서 무슨 말을 했는지 켈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정렬. 소등. 취침. 그 셋 중 하나였다. 여기서 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정렬할 대형이 없었고 소등할 등이 없었으며 취침 시각을 정해 놓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를 멈추는 법은 배웠는데 멈춘 다음에 무엇을 하는지는 배우지 않았다. 배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는 언제나 다음 말을 할 사람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넷이 조용한 채로 켈리를 보고 있었고 켈리는 앉아서 땅을 보고 있었으며, 그 침묵이 싸움보다 길어질 무렵에 오벨이 헛기침을 했다.

"제안이 있습니다."
넷이 그쪽을 보았다.
"규칙을 문서로 만듭시다."

니카가 웃었다. 소리를 내서 웃은 것은 아니고 코로 한 번 숨을 내보낸 것이었는데 그것으로 충분했다. 린은 아예 고개를 돌렸다. 바르트는 냄비 안을 저었다.

오벨은 그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예상했으면서도 말한 이유는 그가 이런 종류의 반응을 직업으로 겪어 왔기 때문이다. 타르실 중재소에서 그가 상대한 사람들 열에 아홉은 문서를 우습게 여겼고, 그 아홉 중 여덟이 석 달 안에 같은 문서를 들고 다시 왔다.

"제1조. 자리에 무언가를 설치하는 자는 설치 전에 이를 알린다."
"그만하세요."
"제2조. 타인의 설치물을 제거해야 하는 경우 사전에 동의를 구한다."
"그만하시라니까요."
"제3조. 전투 개시 여부는—"
"아저씨."

니카가 일어섰다.
"우리 다섯입니다. 다섯이 종이 보고 움직이면 세 번째 조항 읽는 사이에 죽습니다."
"읽지 않고 외우면 됩니다."
"외울 시간에 도망가는 게 빠릅니다."

니카가 그렇게 말하고 자기 자리로 갔다. 린이 그 뒤를 따라갔고 바르트는 원래 자리에 있었으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벨이 종이를 무릎 위에 놓은 채 잠깐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으려고 했다.
"저는 그거 좋은데요."

오벨이 손을 멈췄다. 고개를 들었다. 켈리가 아직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거요. 적어 놓는 거."
"어째서입니까."
"적어 놓으면 안 틀리잖아요."

오벨이 그 대답을 받아 놓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는데 그중에 켈리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있었다. 적혀 있으면 틀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적힌 대로 살아 본 사람이다. 마법청의 모든 것은 적혀 있었다. 배식량이 적혀 있었고 출격 순서가 적혀 있었고 근신 일수가 적혀 있었으며, 적힌 것은 언제나 그대로 집행되었다. 켈리에게 문서란 지켜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축복인지 아닌지를 오벨은 판단하지 못했다. 다만 이 자리에서 그의 제안에 찬성한 사람이 하나 있었고, 그 하나가 문서 때문에 가장 많이 잃은 사람이라는 것이 그날 밤 그를 오래 붙들었다.

"적어 두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오늘 것은 두 조항뿐입니다만."

돈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 전에 니카가 앓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서 열이 올랐고 손목의 부기가 팔꿈치 쪽으로 번졌다. 그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루를 베고 누워 있었는데, 린이 지나가다 이마에 손을 대 보고 알았다.
"너 뜨거운데."
"압니다."
"왜 말 안 해."
"말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약을 사든가 하지."
"돈이 없습니다."

린이 그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대꾸하지 못함이 오늘 아침 일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니카가 앓는 것은 어젯밤에 건 것이 되돌아온 탓이었고, 어젯밤에 건 것은 아침에 씻겨 나갔으며, 씻겨 나간 것은 자기 손이었다.
"어제 그거."
"예."
"그거 때문이야?"
"둘 다입니다."
"둘?"
"어제 걸어 둔 것하고, 그저께 길에서 건 것하고요."

린이 니카 옆에 앉았다.
"둘 다 안 쓰인 거야?"
"예."
"그럼 그냥 버린 거네."
"버린 건 아닙니다. 값은 치러졌으니까요."

니카가 그렇게 말하고 돌아누웠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려면 누가 잘못했는지를 정해야 하는데, 정해 봤자 그 사람이 다음번에 다르게 행동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보장이 없는 데 걸지 않는 것이 도박판에서 그가 배운 유일한 규칙이었다.

바르트가 노트를 펴고 숫자 하나를 읽었다. 읽는 목소리가 평소와 같았으므로 처음에는 아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여섯 돈."
"…예?"
"남은 게 여섯 돈이야."

린이 손가락을 꼽았다. 니카는 꼽을 것도 없었다. 오벨은 이미 사흘 전에 같은 계산을 해 두었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섯이 하루 먹는 데 한 냥 아홉 돈이 들었다. 여섯 돈으로는 한 끼도 온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넉 달 분할로 정한 첫 상환일이 열이틀 뒤였다.

"내일 마을에서 일 없나 봅시다."
니카가 말했다.
"봄에는 일이 없습니다. 씨 뿌리는 철이라 사람은 다 나와 있고 품삯은 안 줍니다. 로엔은 여름에 일이 생깁니다."
"그럼 어쩌지."
"굶으면 됩니다. 사흘까지는 사람이 안 죽습니다."
"사흘 뒤에는."
"사흘 뒤에도 안 죽습니다. 그냥 못 걷습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불이 한 번 튀었다.

켈리가 일어섰다.

일어서서 아무 말 없이 어둠 쪽으로 걸어갔다. 지팡이를 들고 갔다. 넷이 그 뒷모습을 보았고 바르트가 뭐라고 부르려다가 말았다.

"어디 가는 겁니까."
"몰라."
"따라가 볼까요."
"두지."

켈리가 돌아온 것은 반 시간쯤 뒤였다.

품에 뭔가를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로브 앞자락을 걷어 올려 그 안에 담아 왔는데, 흙이 묻은 채였고 잎이 여기저기 찢겨 있었다. 켈리가 그것을 불 옆에 내려놓았다. 낮고 잎이 다섯 갈래로 갈라진 풀이었다. 줄기가 붉었다.

켈리가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잎이 다섯 갈래."
넷이 켈리를 보았다.
"줄기가 붉다. 그늘에서 자란다. 땅에 붙어서 자란다. 옆에 이끼가 있다. 짐승이 뜯어 먹은 자국이 있다."

켈리가 여섯 가지를 다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넷을 한 번씩 보았다. 그 얼굴은 자랑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보고하는 얼굴이었다. 켈리가 아는 것을 남 앞에서 내놓는 방식은 그것 하나뿐이었고, 그것도 열두 해 동안 받아 본 적 있는 형식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었다.

"먹어도 돼요."
켈리가 말했다.
"제가 먹어 봤어요. 여덟 번 먹었어요. 안 아팠어요."

린이 그 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잎을 뒤집어 보고 줄기를 꺾어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표정이 변했다.
"이거 쓴대야."
"예?"
"이름이 쓴대라고. 실베인에서는 이거 달여서 먹어. 배 아플 때."
"먹는 거 맞네요."
"그건 약으로 먹는 거지."
"…그럼 밥으로는 안 돼요?"

린이 그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안 되는 이유를 대려면 맛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맛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린은 판단하지 못했다.
바르트가 먼저 손을 뻗었다.
그가 잎 하나를 뜯어 입에 넣고 씹었다. 씹는 동안 얼굴이 한 번 굳었다. 굳은 것을 곧 풀었다. 다 씹고 삼켰다.
"먹을 만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바르트 뮐렌은 거짓말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가 그날 한 거짓말은 20년 치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한 것이었다.

니카가 하나를 집었다. 냄새를 맡고 나서 잠깐 계산하는 얼굴을 했다.
"이거 먹고 탈 날 확률이 얼마쯤 됩니까."
"여덟 번 먹고 안 아팠어요."
"표본 여덟이면 신뢰할 만합니다."
그러고는 입에 넣었다. 두 번 씹고 멈췄다. 삼켰다. 물을 마셨다. 물을 아주 많이 마셨다.
"…신뢰할 만합니다."

오벨은 먹기 전에 잎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먹었다. 먹으면서 이 풀이 왜 쓴지, 쓴 성분이 무엇에 작용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가 세 문장쯤 하고 그만두었다. 입안이 써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린이 마지막으로 먹었다. 먹으면서 눈을 감았다.
넷이 다 먹었다.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배가 부른 것과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는데, 입안에 무언가를 씹는 감각이 있고 그것이 목을 넘어가고 위에 도착해서 거기 머무른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조금 조용해졌다.
켈리는 그 넷을 보고 있었다.
넷 다 얼굴이 이상했다. 먹으면서 미간이 좁아졌고 삼킬 때 목이 한 번씩 걸렸으며 다 먹고 나서 아무도 두 개째를 집지 않았다. 켈리는 그 얼굴들을 차례로 보았다.

켈리에게 그 풀은 쓰지 않았다.
쓰다는 것은 다른 맛과 견주어야 알 수 있는 것이고, 켈리가 견줄 수 있는 것은 건량과 죽과 빵과 소금에 절인 고기 넷뿐이었다. 그중 셋은 아무 맛도 없었고 하나는 짰다. 그 네 가지를 열두 해 동안 먹은 입에 무엇이 쓰고 무엇이 안 쓴지를 가르는 눈금이 생길 리 없었다. 켈리가 아는 것은 이 풀이 먹으면 안 죽는다는 것 하나였고, 죽지 않는 것과 맛있는 것 사이에 다른 칸이 여럿 있다는 사실을 켈리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켈리가 생각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내가 잘못 가져왔나.

"…이거 아니에요?"
켈리가 물었다.
"맞아."
린이 대답했다.
"맞는데 왜 다들."
"맞아. 네가 맞게 가져왔어."

린이 그렇게 말하고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다. 집을 때 손이 조금 느렸는데 켈리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바르트도 하나를 더 집었다. 니카도 집었다. 오벨은 집으면서 헛기침을 했다.
넷이 한 번 더 먹었다. 그 두 번째를 먹을 이유는 아무 데도 없었다.
남은 것이 한 줌쯤 되었다.

린이 그것을 들고 일어섰다. 냄비에 물을 조금 붓고 그 풀을 넣고 불 위에 올렸다. 오래 끓이지 않고 색이 나올 때까지만 두었다가 내렸다. 그러고는 니카 쪽으로 가서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 봐."
"…예."
"이거 마셔."
"뭡니까."
"아까 그거."
"방금 먹었는데요."
"먹은 거랑 달인 거랑 달라."

니카가 그 그릇을 받아 들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린을 보았다.
"이게 왜 다릅니까."
"몰라. 그냥 달라. 실베인에서는 그렇게 해."

니카가 마셨다. 다 마시고 나서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릇을 내려놓았다.
"…이게 훨씬 낫습니다."
"그치."
"아까 그건 뭡니까 그럼."
"아까 건 그냥 풀이지."

한 시간쯤 뒤에 니카의 열이 조금 내렸다. 완전히 내린 것은 아니고 밤새 다시 오르내렸는데, 적어도 그날 밤 그는 자기 손목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 셀 수 있을 만큼은 깨어 있었다.

켈리는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다.
같은 풀이었다. 켈리가 가져온 것과 린이 달인 것이 같은 풀이었고 같은 줄기에서 뜯은 것이었으며 켈리가 여덟 번 먹어 본 그것이었다. 그냥 먹으면 배가 조금 덜 고파지는 것이 전부였는데, 물에 넣고 끓였더니 앓는 사람의 열이 내렸다.
켈리는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는 것은 보았다.
같은 것을 가지고 다르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켈리가 그날 처음 본 셈인데, 그것이 나중에 다섯 사람을 한 번에 살리게 되는 생각의 첫머리였다는 것은 그 자리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날 밤 그것은 그냥 한 그릇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보면서 조금 안심했다. 잘못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잘못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넷이 두 번째를 집은 이유는 그 풀이 먹을 만해서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고, 그 이유를 켈리가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날 밤 켈리가 종이를 꺼냈다.
오벨이 나눠 준 것 중에 마지막 장이었다. 숯을 쥐고 한참 앉아 있다가 적기 시작했다. 여섯 줄이었다. 획 순서가 틀렸고 글씨가 컸으며 줄이 아래로 처졌다. 세 번째 줄에서 한 글자를 통째로 빠뜨렸다가 옆에 작게 끼워 넣었다.
다 적고 나서 켈리는 그것을 한 번 읽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읽었다.
오벨이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었다. 그는 고쳐 주고 싶은 것이 세 군데 있었다. 획 순서와 자간과 빠진 글자였다. 세 군데 다 고치지 않았다.

그가 그날 밤 한 판단 중에 옳은 것은 그것 하나였다.
켈리가 열두 해 동안 그 여섯 가지를 입으로 외운 것은 종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글자를 몰라서였다. 잊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므로 걸으면서 외웠고 앉아서 외웠고 잠들기 전에 외웠다. 이제 적혀 있었다. 적혀 있으면 잊어버려도 된다.
켈리는 그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넣고 나서 손으로 한 번 눌러 보았다. 품에 뭔가가 있었다.
불이 사그라들 무렵에 린이 켈리 쪽을 보았다.

"그거."
"예?"
"그 옷. 왜 안 갈아입어?"
"…예?"
"다 해졌잖아. 자락도 뜯어졌고 소매도 닳았고. 그거 입고 다니면 안 추워?"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린은 그 말을 아무 뜻 없이 했다. 정말로 아무 뜻이 없었다. 린 소아레는 실베인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고 벨류엔에 가 본 적이 없으며 그 나라의 마법사 제도에 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남색에 흰 띠 두 줄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고 가슴의 은실 문장이 어떤 도안인지 본 적도 없었다. 린이 본 것은 해진 옷 한 벌이었다. 밤에 추울 것 같은 옷이었다.

이 대륙에서 그 옷이 무엇인지를 가장 늦게 알게 될 사람이 그날 밤 그 말을 했다.

바르트는 그 말을 듣고 냄비를 젓던 손을 멈췄다. 그는 그것을 두 달 동안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말하려고 한 적은 세 번 있었다. 세 번 다 입을 열기 전에 그만두었는데, 그 옷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은 그 말을 못 한다. 그 말에 다른 뜻이 붙을 것을 아니까 못 한다.

니카도 못 했다. 니카는 타르실에서 남색 로브를 두 번 본 적이 있었고 두 번 다 도망치는 쪽이었다.
오벨은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조항으로 말하는 사람이었고, 옷을 갈아입으라는 말이 들어갈 조항은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켈리가 자기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끝이 닳아 실이 풀려 있었다. 흰 띠 두 줄이 아직 거기 있었는데 한 줄은 거의 지워져 있었다.

"…갈아입어도 돼요?"
"어?"
"이거 벗어도 되냐고요."
"네 옷인데 왜 나한테 물어."

린이 그렇게 말하고 자기 자리로 가서 누웠다.
켈리는 그 자리에 한참 앉아 있었다.
그날 밤 켈리가 로브를 벗었다. 불이 다 꺼지고 넷이 잠든 뒤였다. 벗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추가 셋이었고 셋 다 풀렸다.

벗어 놓고 보니 천 한 장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개켰다. 개키는 법은 배운 적이 있었다. 소매를 안으로 접고 자락을 둘로 접고 어깨선을 맞추어 다시 접는다. 점호 전에 침상에 올려 두는 방식이었고 그 방식대로 개키면 가슴의 은실 문장이 위로 오게 되어 있었다. 검열관이 그것을 보고 지나가기 쉬우라고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배운 대로 개켰다. 문양이 위로 왔다.
그러고는 그것을 자루 맨 아래에 넣었다. 버리지는 않았다.

벗고 나서 남은 것은 회색 무명 내의였다.

그것도 지급품이었다. 소매가 팔꿈치까지 오고 목깃이 둥글고 천이 얇았다. 켈리는 그것을 옷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옷은 로브였고 이것은 로브 밑에 딸려 오는 것이었다. 배급받은 물건 목록에 이것도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켈리는 알았는데, 알면서도 벗을 수 있는 물건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벗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씻을 때도 갈아입을 때도 새것을 받아서 바꿔 입었을 뿐이지 없이 지낸 시간이 없었다.

목깃 안쪽에 번호가 찍혀 있었다.

먹으로 찍은 것이라 열두 해를 빨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켈리의 번호였고 로브 안쪽 목깃에 찍힌 것과 같은 번호였다. 세탁장에서 주인을 가리려고 찍는 것이었으므로 명예와도 소속과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다만 켈리가 아는 세계에서 자기 것이라고 표시된 물건은 그 둘뿐이었다. 하나를 방금 자루 맨 아래에 넣었고 하나는 아직 몸에 붙어 있었다.

켈리는 그 목깃을 한 번 잡아당겨 보았다. 번호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안쪽에 찍힌 것이라 입고 있으면 남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 위에 갈색 외투를 걸쳤다.

외투는 벨류엔 것이 아니었다. 바르트가 어디서 얻어 온 것이었고 켈리 몸에 맞지 않았으며 기름 얼룩이 있었다. 켈리가 입고 있는 것 중에 번호가 찍히지 않은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날 밤 켈리는 그 외투를 여미고 누웠다. 로브가 빠진 자리만큼 안쪽이 헐거워서 바람이 옆구리로 들어왔다.

추운 것보다 이상한 것은 가벼운 것이었다.
로브는 무거운 옷이었다. 두꺼운 천에 안감을 대고 자락이 발목까지 왔으며 은실 문장이 앞뒤로 들어가 있어서 가슴과 등에 무게가 실렸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그 무게를 지고 잤다. 무게가 있으면 자기 몸이 어디까지인지가 분명해졌고, 분명하면 잠이 왔다.

지금은 분명하지 않았다.
켈리는 몸을 한 번 뒤척였다가 일어나 앉았다. 자루 쪽으로 손을 뻗다가 도로 거두었다. 대신 품에 손을 넣었다. 종이가 거기 있었다. 여섯 줄이 적힌 종이였고 접은 자리가 아직 빳빳했다.

켈리는 그것을 꺼내지 않고 손만 대고 있었다.
품에 무언가가 있으면 잤다. 그것이 열두 해 동안의 순서였다. 그 무언가가 예전에는 건량 조각이었고 얼마 전에는 돌멩이였으며 오늘은 종이였다. 종이는 먹을 수 없었고 무게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있었다.

켈리는 그 위에 손을 얹은 채로 잠들었다.
바르트는 그날 밤 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그가 보고 있던 것은 켈리의 지팡이였다. 켈리가 잠들면서 옆에 놓아둔 것을 가져와 불빛에 기울여 보는 중이었다. 낮에 소리가 둘 났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나무를 친 소리가 하나였고 그 아래에 다른 소리가 하나 더 있었다.

손잡이에서 한 뼘쯤 위였다. 결을 따라 금이 가 있었다. 길이가 손가락 두 마디였고 깊지 않았다. 손톱을 대 보니 걸렸다.
아이언우드는 잘 갈라지지 않는 나무였다. 갈라졌다는 것은 그동안 안쪽이 이미 상해 있었다는 뜻이고, 안쪽이 상한 이유는 이 막대기가 지난 두 달 남짓 동안 자기 용도가 아닌 일에 쓰였기 때문이다. 짚는 물건으로 만들어진 것을 치는 데 썼다. 얼어붙은 땅을 쳤고 사람을 쳤고 탁자를 쳤고 문을 쳤고 오늘 나무를 쳤다.
바르트는 그 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노트를 펴서 한 줄을 적었다.

「아이언우드. 손잡이 위 한 뼘. 결 방향. 두 마디.」

그 아래에 무게를 적을 자리를 비워 두었다. 쇠를 얼마나 녹여야 하는지는 재 봐야 알 수 있었고, 재려면 이 막대기의 무게를 먼저 알아야 했다. 지금 재면 켈리가 깬다.
그는 지팡이를 원래 자리에 도로 놓았다. 놓으면서 각도까지 맞췄다. 켈리는 물건이 제자리에 없으면 아침에 그것부터 찾는 사람이었다.

다음 장에 쓸 것을 그는 이미 정해 두었다. 다만 그 일에 값이 얼마나 붙을지는 아직 계산하지 않았다. 계산하면 하기 싫어질 수도 있었으므로 나중에 하기로 했다. 그런 순서로 일을 하는 것은 20년 만에 처음이었다.

필요 없는 땅

**자플랜 왕국 · 왕도 어전**

자플랜의 어전 회의는 긴 탁자 하나를 놓고 열렸다.

탁자는 떡갈나무였고 길이가 5미터였으며 200년 되었다. 이 탁자가 들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서서 회의를 했다. 왕 앞에서 앉는 것은 무례라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인데, 오스릭 2세 때 그 전통이 없어졌다. 없앤 이유는 왕이 다리가 아파서였다. 그 뒤로 자플랜의 중신들은 앉아서 회의를 하게 되었고, 앉게 되자 곧 어디에 앉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지금 그 탁자에는 규칙이 하나 있었다. 왕에게서 가까운 쪽부터 앉는다. 다만 그 가까움을 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적혀 있지 않은 것이 더 강하게 지켜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그런 경우였다.

란돌프 그라이엔은 왕의 오른쪽 셋째 자리에 앉았다. 그라이엔 가는 사백 년 동안 자플랜 왕가에 장군을 냈고 그중 열하나가 전사했다. 그 열하나의 이름이 왕궁 서쪽 회랑의 돌에 새겨져 있었다. 그가 그 자리에 앉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의견을 낸 적이 없었다.

유리크 판 카르소는 탁자 끝에서 넷째 자리에 앉았다. 기계화 선봉대장이었고 서른일곱이었으며 지난 두 해 동안 자플랜군이 회랑에서 얻은 땅의 절반 이상을 그가 얻었다. 그 자리가 그의 전공에 맞는 자리인가를 놓고 이 년 전에 한 번 말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 "판 카르소 경은 젊으시니 앞으로 오래 올라갈 시간이 있다"고 말했고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그는 그 뒤로 이 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았다.

성씨에 붙은 판이라는 말은 자플랜 것이 아니었다. 카르소의 말이었고 그 나라에서는 어느 땅에서 왔는지를 뜻했다. 자플랜이 카르소를 삼킨 뒤에 그 말을 그대로 쓰게 한 것은 관대함이 아니라 편의였다. 출신을 이름 안에 넣어 두면 따로 물어볼 필요가 없다.

비토르 케른은 왕의 왼쪽 둘째 자리에 앉았다. 대공학원장이었고 카르소계였으며, 카르소 사람이 그 자리에 앉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 사실은 자플랜의 관대함을 보여 주는 사례로 여러 번 인용되었다. 인용한 사람들 중에 그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서른한 해가 걸렸다는 것을 함께 말한 사람은 없었다.

오스릭 3세는 일흔넷이었다.
회의는 9시에 시작했다. 첫 항목은 남부 세관이었고 둘째가 조선소였으며 셋째가 하렐 방면 전황이었다.
란돌프가 일어섰다.

"하렐 방면 제3 보루를 확보했습니다. 지난달 19일입니다."

그가 지도를 탁자 위에 폈다. 지도는 크지 않았다. 회랑 전체가 아니라 하렐 방면만 그린 것이었고, 그 안에서도 이번에 얻은 자리만 붉게 칠해져 있었다.
"벨류엔의 방어선이 이 지점에서 꺾여 있었습니다. 꺾인 자리를 밀어서 폈습니다."
"전과는."
"진지 하나와 그 앞의 고지를 얻었습니다. 전선이 팔백 미터 전진했습니다."
"손실은."
"400입니다."

방이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것은 그 숫자가 커서가 아니었다. 그 숫자는 이 방에서 여러 번 나왔고 더 큰 것도 나왔다. 조용해진 것은 다음 말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중 360이 보병이고 40이 공병입니다. 기계는 잃지 않았습니다."

기계를 잃지 않았다는 말이 보고의 마지막에 붙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기계는 값이 적혀 있었다. 한 대에 얼마이고 만드는 데 몇 달이 걸리는지가 조달청 장부에 있었으므로 잃으면 그 숫자만큼 손실로 잡혔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적히지 않았다. 사람에도 값이 있기는 했다. 유족 연금과 보충 징집 비용과 훈련 기간이 각각 다른 부서의 장부에 나뉘어 적혀 있었는데, 나뉘어 적혀 있었으므로 한 자리에서 합산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 방에서 400이라는 숫자는 값이 아니라 그냥 숫자였다.
"수고했소."
오스릭 3세가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조금 쉬어 있었다. 그는 열여섯 해 전부터 아침에 목이 쉬었고 오후가 되어야 풀렸다.
서기가 받아 적었다. 적힌 것은 이랬다. 하렐 방면 요지 확보. 전과 양호.
란돌프가 앉았다.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려는 참이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유리크 판 카르소가 일어섰다.

이 방에서 넷째 자리 아래에 앉은 사람이 셋째 자리 위에 앉은 사람의 보고에 질문하는 일은 자주 있지 않았다. 없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자주 있지 않았고, 자주 있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일단 그것이 무례인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한다. 판단은 내용을 듣기 전에 끝난다.

"말씀하시오."
"제3 보루의 남쪽이 습지입니다."
란돌프가 그를 보았다.
"그래서."
"습지는 중장비가 못 지나갑니다. 무한궤도 폭이 1.2미터인데 그 지반은 0.6미터짜리도 빠집니다. 제 부대가 작년 가을에 그 일대를 정찰했고 기록이 조달청에 있습니다."
"정찰 기록은 알고 있소."
"그러면 그 보루에서 남쪽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사람뿐입니다.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문제요?"
"그 자리를 얻는 데 사람 400을 썼습니다."

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 조용함은 종류가 달랐다.
유리크는 그 조용함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기다리는 것이 유리한 경우와 불리한 경우를 구분할 줄 알았고 지금은 불리한 쪽이라고 판단했다. 한 번 끊기면 다음을 말할 수 없게 된다.

"둘째로 보급입니다. 전선이 팔백 미터 전진했으므로 보급선이 팔백 미터 늘었습니다. 하렐 가도에서 그 보루까지 수레로 가면 왕복 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 반 늘어납니다. 한 시간 반이면 한 수레가 하루에 한 번 더 왕복할 수 있던 것을 못 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지금 그 방면에 수레가 62대 배치되어 있습니다."

"숫자는 됐소."
"숫자가 이 건의 전부입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62대가 하루에 한 번씩 덜 가면 그만큼이 모자랍니다. 모자라면 두 가지 중 하나를 합니다. 수레를 늘리거나 사람을 줄이거나. 수레를 늘리려면 말과 마부가 따라 늘어야 하고 그것도 먹습니다. 사람을 줄이면 그 보루를 지킬 수 없습니다. 지킬 수 없는 자리를 얻은 것은 얻은 것이 아닙니다."
"경은 그러면 물러나자는 거요?"
"물러나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얻을 자리를 고르자고 했습니다."

란돌프가 일어섰다. 일어선 것은 반박하기 위해서였는데, 일어서고 나서 그가 한 말은 반박이 아니었다.
"판 카르소 경."
"예."
"경은 전선을 밀어 본 적이 있소?"
"작년에 열한 번 밀었습니다."
"그것 말고. 사람으로."

유리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질문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경의 부대는 기계로 미시오. 기계가 들어가는 자리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소. 그런데 대륙에는 기계가 못 들어가는 자리가 훨씬 많고, 그런 자리는 사람이 밀어야 하오. 사람이 밀면 사람이 죽소. 그것을 손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한 걸음도 못 가오."
"저는 손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뭐요."
"쓸데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탁자 중간쯤에서 누가 숨을 들이켰다.
"그 보루는 방어에 쓸 수 없습니다. 남쪽이 습지라 적이 그쪽으로 오지 않으니 막을 것이 없습니다. 공격의 발판으로도 쓸 수 없습니다. 우리 중장비가 못 나가니까요. 쓸 데가 없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얻으려고 400을 썼고 이제 그 자리를 지키느라 매일 수레 62대가 한 시간 반씩 더 굴러야 합니다."
"전선은 밀어야 하오."
"어디로 밀지를 고르는 것이 제 일이고 각하의 일입니다. 아무 데나 미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란돌프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한 번 굳었다가 풀렸다. 굳은 것은 아주 짧았고 그것을 본 사람은 탁자 이쪽 절반뿐이었다.
그는 오래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 자리에서 그가 느낀 것은 화가 아니었고, 화라고 부르려면 조금 더 단순한 것이어야 했다. 그가 느낀 것은 방금 한 말이 맞는 말이라는 사실과 그 말을 한 사람이 하필 저 사람이라는 사실이 동시에 왔을 때의 어떤 것이었다. 둘 중 하나만 왔다면 그는 다르게 반응했을 것이다.

란돌프 그라이엔은 그날 그 자리에서 유리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알았다는 것이 그 뒤 여섯 해 동안 그를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만들게 되는데, 그 과정은 한 번의 결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매번 아주 작은 것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로 하지 않은 일이 그날 오후에 있었다.

"폐하."
란돌프가 왕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렐 방면의 지휘는 제게 위임되어 있습니다. 위임의 범위 안에서 판단한 일입니다."

그것은 옳은 말이었다. 반박이 아니라 절차였다. 절차를 꺼내는 것은 내용으로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는데, 이 방에서 그 차이를 짚는 사람은 없었다.
오스릭 3세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 지도를 보고 있었으나 읽고 있지는 않았다. 일흔넷이었고 이런 회의를 서른아홉 해 동안 주재했으며, 서른아홉 해 동안 이런 순간을 여러 번 만났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둘 다 맞는 말을 하고 왕이 하나를 고르는 순간이었다.

고르면 한쪽이 진다. 지는 쪽이 무가이면 무가 전체가 왕을 다르게 보기 시작하고, 지는 쪽이 기술관료이면 다음 예산 회기에 조선소와 공학원이 서로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는 그 둘을 저울질하는 데 통치의 후반 스무 해를 썼고, 스무 해를 쓰고 나서 남은 것은 저울질하는 기술이지 판단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양쪽 다 일리가 있소."
그가 그렇게 말했다.
"판 카르소 경의 지적은 기록해 두시오. 보급 문제는 따로 검토합시다. 총사령의 판단은 위임 범위 안의 일이니 그대로 두고."

서기가 받아 적었다.
그것으로 그 항목이 끝났다. 끝나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보루는 그대로 남았고 수레 62대는 계속 한 시간 반씩 더 굴렀으며 400은 그 전주에 이미 집계가 끝나 있었다.
결정하지 않는 것은 결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다른 것을 주장할 때 왕이 고르지 않으면 지금 하고 있는 쪽이 계속된다. 계속되는 쪽이 이긴다. 그날 오전 어전에서 승부가 났고 진 사람은 그것을 알았다.

비토르 케른은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왼쪽 둘째 자리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고 손에는 작은 수첩이 있었다. 논쟁이 오가는 동안 그가 적은 것은 세 줄이었다.

습지. 중장비 불가.
사람으로 팔백.
400.

세 줄을 적고 나서 그는 그 아래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적을 것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모으고 있는 것은 하나의 문장이었고 그 문장에 도달하려면 이런 줄이 훨씬 많이 필요했다. 그날 그가 그 세 줄에서 읽은 것은 이랬다. 사람으로 밀어서는 이 전쟁이 안 끝난다. 기계가 못 가는 자리가 너무 많다. 그러므로 더 나은 기계가 필요하다.

그가 그 결론에서 다른 결론으로 넘어가는 데는 여섯 해가 더 걸린다. 넘어가는 순간은 어전이 아니라 어느 겨울 새벽 공학원의 빈 실험실이 되고, 그때 그가 적는 문장은 짧다.

그는 유리크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성이 달랐으나 같은 곳에서 왔다. 케른의 고향은 카르소 북부의 탄광 마을이었고 유리크의 고향은 남쪽 강변이었으며, 거리가 200 킬로미터였으나 자플랜의 서류에서는 둘 다 같은 한 줄로 처리되었다. 카르소계. 그 세 글자가 붙으면 다른 것은 묻지 않는다.

케른은 서른한 해 동안 그 세 글자를 지우려고 했다. 지우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믿었다. 다른 사람이 못 하는 것을 해내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 그 세 글자보다 앞에 오는 것이 생긴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고 왼쪽 둘째 자리까지 왔다.

다만 그 자리에 앉고 나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이 방에서 그를 소개할 때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순서로 말했다. 카르소계 최초의 대공학원장. 최초라는 말이 앞에 붙지 않는 날은 오지 않았고, 최초가 있으려면 그 앞에 없었다는 사실이 늘 함께 불려 나와야 했다.

그는 그것을 유리크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말하면 저 사람이 그만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르소계가 이 자리에서 그만두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올라와 있어야 다음 사람이 덜 힘들다고 그는 믿었고, 그 믿음이 틀렸다는 증거가 지금 탁자 저쪽 끝에서 네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날 그는 수첩을 덮고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회의는 12시가 조금 지나 끝났다.
사람들이 나가는 데 시간이 걸렸다. 문이 하나였고 나가는 순서가 앉은 순서와 같았으므로 끝자리에 앉은 사람은 기다려야 했다. 유리크는 서류를 정리하면서 기다렸다. 정리할 것이 많지 않았는데 오래 정리했다.

복도에서 란돌프와 마주쳤다.
복도는 좁지 않았다. 둘이 나란히 걸어도 되는 폭이었고 실제로 두 사람이 지나가는 데 부딪칠 일은 없었다. 란돌프가 앞에서 걸어왔고 유리크가 벽 쪽으로 반걸음 비켰다. 그것이 예였다.

두 사람이 스쳤다.
란돌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반드시 말을 걸어야 하는 규정은 없었고, 방금 어전에서 부딪친 상대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점잖은 처사였다.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이기까지 했다. 예를 어긴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유리크는 그 스쳐 감을 나중에 여러 번 떠올리게 된다.
그가 떠올린 것은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없었는가였다. 그 방에서 그는 옳았다. 숫자가 맞았고 정찰 기록이 있었고 아무도 그 계산을 반박하지 못했다. 옳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열아홉 살에 자플랜군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한 가지를 믿었다. 쓸모를 증명하면 된다. 카르소계라는 것은 씻어 낼 수 없지만 전공은 쌓을 수 있고, 쌓인 것이 충분히 높아지면 그 위에서는 출신을 묻지 않게 된다. 그는 그 믿음으로 열여덟 해를 버텼고 실제로 전공을 쌓았다. 작년에 자플랜군이 회랑에서 얻은 땅의 절반 이상이 그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어전에서 옳은 말을 한 사람은 넷째 자리 아래에 앉은 사람이었고, 옳은 말은 기록만 되었다.
그가 그 자리에서 알게 된 것은 정확히 하나였다. 능력으로는 안 된다.

그 결론에 도달한 카르소 사람이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대공학원장은 같은 자리에서 반대 결론에 도달했고 그래서 서른한 해를 더 증명하는 쪽을 택했으며, 그 선택이 그를 왼쪽 둘째 자리까지 데려다 놓았다. 두 사람은 같은 나라에서 왔고 같은 말을 듣고 자랐고 같은 벽 앞에 섰다. 한 사람은 벽을 넘으려고 더 높이 쌓기로 했고 한 사람은 벽이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둘 다 틀리지 않았다. 그것이 이 나라가 사람을 다루는 방식의 가장 정교한 부분이었다.
그날 오후 유리크는 보급 증원 요청서를 썼다.

내용은 간단했다. 하렐 방면 수레 62대를 80대로 늘려 달라는 것이었고, 늘리지 못하면 제3 보루의 주둔 인원을 절반으로 줄여 달라는 것이었다.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고 적었다. 근거로 왕복 시간 계산과 소모 예상치를 붙였고 정찰 기록의 사본을 함께 넣었다. 종이가 넉 장이었다.

그것을 병참부에 냈다.
병참부의 서류함은 나무로 짠 것이었고 위쪽이 열려 있었다. 새 서류는 위에 놓았다. 처리는 위에서부터 했다. 그것이 규칙이었고 규칙이 그렇게 정해진 이유는 늦게 온 것보다 먼저 온 것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편이 손이 덜 가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에 그 함을 정리한 사람이 있었다. 누가 정리했는지는 기록에 남지 않았다. 함을 정리하는 일에는 서명이 붙지 않기 때문이다.
정리가 끝났을 때 유리크의 넉 장은 함의 아래쪽에 있었다.

반려된 것은 아니었다. 반려하려면 사유를 적어야 했고 사유를 적으면 그 종이가 다시 위로 올라온다. 반려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놓으면 아무것도 적을 필요가 없었다. 그 서류는 여전히 처리 대기 중이었고 앞으로도 오래 처리 대기 중일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1200 킬로미터 떨어진 벨류엔 마법청에서도 그 무렵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배치 연령을 올리자는 안이 부결이 아니라 보류로 적혔고, 그렇게 적은 사람은 그것이 다음에 다시 올릴 여지를 남기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두 나라는 63년 동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싸웠는데, 서류를 처리하지 않는 방식만은 거의 같았다.

그것이 두 나라가 63년을 버틴 이유이기도 했다. 무엇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데는 아무 비용도 들지 않는다. 비용은 그 결정이 미뤄진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치른다.

제3 보루의 주둔 인원은 줄지 않았다. 수레도 늘지 않았다.

**자플랜 왕국 · 하렐 방면 제3 보루**


그 보루는 어전에서 본 지도의 붉은 자리였다.

실제로 가 보면 자리가 좁았다. 흙을 파서 둑을 올리고 그 위에 통나무를 얹은 것이었고, 벨류엔이 쓰던 것을 그대로 쓰는 중이라 안쪽 구조가 자플랜 방식과 맞지 않았다. 총안의 높이가 달랐다. 벨류엔 병사의 평균 키에 맞춰 뚫어 놓은 것이라 자플랜 병사가 서면 눈높이가 안 맞았고, 맞추려면 발판을 대야 했으며, 발판을 댈 나무는 보급으로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흙을 쌓아 발판을 만들었다. 비가 오면 무너졌다. 무너지면 다시 쌓았다.

남쪽은 습지였다. 아침마다 안개가 그쪽에서 올라와 정오까지 걷히지 않았고, 걷히고 나면 보이는 것은 갈대와 물웅덩이와 그 너머의 아무것도 없는 평지였다. 적은 그쪽으로 오지 않았다. 올 수가 없었다. 이 보루가 지키는 방향에서는 여섯 주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보루에 그해 봄까지 배치되어 있던 병사 중에 요른이라는 이름의 열일곱 살짜리가 있었다.

목수 아들이었고 카르소계였다. 두 달 전 그 진지를 얻는 싸움에서 참호 안에 떨어졌다가 살아 나왔고, 그 뒤로 넓적한 목공 망치를 놓지 않고 다녔다. 밤에도 옆에 두고 잤다. 누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연장이니까 필요하다고 대답했고, 실제로 그는 그것으로 발판을 고치고 총안 틀을 손보고 무너진 흙을 눌러 다졌다. 대답에 틀린 데가 없었다.

그가 그 자리에서 여섯 주 동안 한 일은 대부분 목수 일이었다.
보루 안쪽 벽이 자꾸 흘러내려서 나무를 대고 박았고, 지붕 삼아 얹은 방수포가 찢어지면 꿰맸으며, 취사장 바닥에 물이 고여 판자를 깔았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시키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명령이 되고 명령이면 기록이 남았을 텐데, 스스로 한 일이었으므로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다.

밤에 보초를 서면 남쪽을 봐야 했다. 남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네 시간 동안 보는 일은 처음 해 보면 쉬워 보이고 여섯 주째가 되면 다른 것이 된다. 그는 그 시간에 계산을 했다. 집 지을 때 서까래를 몇 개 걸어야 하는지, 문틀 폭이 얼마여야 하는지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것이었고 두 해 동안 안 써서 잊어 가는 중이었으므로 잊지 않으려고 세었다.

한 번은 그 보루의 목재로 집을 지으면 몇 채가 나오는지를 세어 본 적이 있었다. 둑에 박힌 통나무와 발판과 지붕 틀을 전부 뜯어서 쓰면 두 채 반이 나왔다. 계산이 끝나고 나서 그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이유가 없었고 말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수레는 열흘에 한 번 왔다. 원래 이레에 한 번이었는데 늘어났다. 왜 늘어났는지를 그 보루의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 다만 가도에서 여기까지가 멀어서 그렇다는 말이 돌았다. 그 말은 맞았다. 팔백 미터가 멀다는 것을 그들은 몸으로 알았으나 그것이 어전의 탁자 위에서 논의된 적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그가 그 보루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 서류에도 적히지 않았다. 400 안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400 안에 들지 않은 사람에 관한 기록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은 집계의 대상이 아니고, 집계되지 않는 것은 검토되지 않으며, 검토되지 않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그해 봄에 하렐 방면 제3 보루에서 일어난 일 중에 어전에 보고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어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기록하는 양식은 두 나라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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