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너무 많다

타르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열하루째 오후였다. 먼저 보인 것은 도시가 아니라 길이었다. 그때까지 걸어온 길은 수레바퀴 자국이 난 흙길이었는데, 어느 지점부터 그 길에 돌이 깔려 있었다.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촘촘히 박아 놓은 것이었고 폭이 수레 세 대가 나란히 갈 만했다. 켈리가 발로 한 번 굴러 보았다. 소리가 났다. 흙에서는 나지 않던 소리였고, 발바닥으로 올라오는 느낌도 달랐다. 열하루 동안 켈리의 발은 무른 땅에 익숙해져 있었다. 무른 땅은 밟으면 조금 가라앉았다가 발을 놓아주는데, 이 돌은 가라앉지 않고 그대로 받아쳤다. 무릎이 먼저 그것을 알아차렸다.
"여기서부터 저쪽 거야."
바르트가 말했다. 켈리는 저쪽이 어디인지 물으려다 말았다. 요즘 켈리는 물어볼 것을 하나씩 뒤로 미루는 버릇이 생겼는데, 미루는 이유는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열하루 동안 켈리가 본 적 없는 것이 하루에 두세 개씩 나왔다. 물레방아를 봤고 우물에 달린 두레박을 봤고 소가 끄는 쟁기를 봤다. 그것을 전부 물으면 걷는 시간보다 묻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았고, 그래서 켈리는 나중에 물을 것을 머릿속에 쌓아 두기 시작했다. 쌓아 두는 것은 처음 해 보는 일이었다. 여태 켈리의 머릿속에는 쌓아 둘 자리가 없었다.
돌길을 따라 두 시간을 더 가자 성벽이 나왔다. 성벽은 높지 않았다. 켈리가 아는 성벽은 회랑의 방어 토루였고 그것은 사람 키의 세 배쯤 되었는데, 여기 것은 두 배가 될까 말까 했다. 대신 길었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성벽 위에 사람이 서 있지 않았다. 켈리가 그것을 한참 보았다. 벽이 있으면 위에 사람이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켈리가 아는 규칙이었다. 벽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고 지키려면 서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고, 대신 벽 아래 문 앞에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줄을 보자 켈리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발이 그쪽으로 갔다. 등이 펴졌고 두 손이 앞으로 모였고 시선이 정면보다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줄의 맨 뒤에 가서 섰다. 앞사람과의 간격은 한 걸음 반이었다. 그것이 정확한 간격이었다. 육성소에서는 한 걸음 반이었고 전선에서도 한 걸음 반이었으며 그보다 가까우면 지적을 받았다. 지적은 대개 이름을 부르는 대신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고, 두 번 치면 그날 저녁에 벌이 있었다.
"자네 뭐 해."
바르트가 뒤에서 물었다.
"줄 섰어."
"무슨 줄인지 알아?"
켈리가 앞을 보았다. 앞사람의 등이 있었고 그 앞에도 등이 있었고 그 끝에 문이 있었다. 문 앞에 탁자가 있고 탁자 뒤에 사람이 둘 앉아 있었다.
"…몰라."
"그럼 왜 섰어."
켈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줄이 있으면 선다. 그다음에 무엇을 주든 받는다. 그것은 이유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유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줄을 섰고 그중 어느 줄에서도 이게 무슨 줄이냐고 물은 적이 없었으며, 물은 아이를 본 적도 없었다.
바르트가 옆에 와서 같이 섰다.
"뭐, 이 줄은 맞긴 해."
"맞아?"
"성문 통과 줄이야. 어차피 서야 돼."
켈리가 조금 안심했다. 안심했다는 것을 본인은 몰랐고, 다만 어깨가 한 치쯤 내려갔다. 줄은 생각보다 길었고 천천히 줄었다. 앞에는 짐수레가 둘 있었고 그 사이에 걸어서 온 사람들이 끼어 있었다. 수레는 안을 들여다보는 데 시간이 걸렸고 사람은 금방 지나갔다. 켈리는 그 차이를 세어 보았다. 수레 하나에 여덟 숨, 사람 하나에 두 숨쯤이었다. 세는 동안 기다리는 것이 덜 길게 느껴졌다. 기다릴 때 뭔가를 세는 버릇은 저울 줄에서 생긴 것이었다. 앞에 몇이 남았는지를 세면 자기 차례까지 몇 숨인지가 나왔고, 그 숫자가 있으면 견딜 만했다.
탁자 앞에 왔을 때 앉아 있던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입시세 둘."
바르트가 동전 두 개를 놓았다. 남자가 그것을 쓸어 담고 옆으로 고갯짓을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름도 묻지 않았고 어디서 왔는지도 묻지 않았고 짐도 열어 보지 않았다. 켈리가 문을 지나면서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저 사람 아무것도 안 물어봤어."
"물어볼 이유가 없으니까."
"왜 없어."
"돈 냈잖아."
켈리는 그 논리를 따라가 보려고 했다. 돈을 내면 묻지 않는다. 그러면 돈을 안 낸 사람에게는 묻는 것인가. 아니면 돈이 곧 대답인가. 두 번째 쪽이 맞는 것 같았는데, 맞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했다. 대답은 말로 하는 것인데 동전은 말이 아니었다.
실은 두 번째가 맞았다. 타르실의 성문은 사람을 가려 들이는 곳이 아니라 수를 세어 값을 받는 곳이었고, 값을 낸 자에게 더 묻지 않는 것이 이 도시가 육십 년 동안 지켜 온 거의 유일한 원칙이었다. 상인의 도시에서 출신을 캐기 시작하면 배가 들어오지 않는다. 켈리가 그날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원칙 덕분이었으며, 사흘 뒤에 명부에 이름이 오르게 되는 것도 같은 원칙 때문이었다. 묻지 않는 도시는 그 대신 적는 도시였다. 켈리는 그 생각을 머릿속의 쌓아 두는 자리에 넣었다. 그 자리가 요즘 빠르게 차고 있었다.
문 안쪽 벽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여러 장이었다. 어떤 것은 새것이고 어떤 것은 비에 젖었다 말라 우글쭈글했다. 글자가 있는 것도 있고 그림이 있는 것도 있었다. 켈리가 지나가면서 그것을 읽었다. 읽을 수 있는 것만 읽었다. 배를 구한다는 것, 짐꾼을 구한다는 것, 소를 잃어버렸다는 것. 소를 잃어버렸다는 종이에는 소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다. 그리고 오른쪽 끝에 다른 종이보다 빳빳한 것이 하나 있었다.
켈리가 걸음을 늦췄다. 그 종이에는 그림이 없었고 글자만 있었다. 윗줄이 굵었고 아랫줄이 가늘었다. 굵은 쪽에 네 글자가 있었다. 분실 자산. 그 아래 줄에 회수 협조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로는 글씨가 작아져서 읽기 어려웠다. 맨 아래에 도장이 찍혀 있었다. 둥근 도장이었고 안쪽에 뭔가가 새겨져 있었는데 켈리는 그 문양을 알았다. 원 안에서 실이 뻗어 나오는 모양이었다. 켈리의 외투 안쪽 가슴에도 같은 것이 은실로 수놓여 있었고, 그것은 지난 이십일 일 동안 한 번도 바깥 공기에 닿지 않았다.
"가자."
바르트가 켈리의 팔꿈치를 잡았다. 그는 이미 그 종이를 봤고 봤다는 티를 내지 않았으며 켈리가 그 앞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도 세고 있었다. 셋을 세고 나서 팔꿈치를 잡았다. 그보다 오래 서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이쪽을 볼 것이었다. 남의 눈에 걸리는 것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오래 보느냐라는 것을 그는 북쪽에서 빠져나오던 해에 배웠다. 그 요령이 그를 두 번 살렸고, 두 번 다 그는 자기가 살아난 줄도 모르는 채로 지나갔다. 켈리가 따라 걸었다. 걸으면서 외투 앞섶을 한 번 만졌다. 단추가 목까지 채워져 있었다.
타르실 안쪽은 소리부터 달랐다. 켈리가 아는 소리는 종류가 많지 않았다. 망치 소리, 점호 소리, 발소리, 배식 줄이 움직이는 소리. 전부 한 번에 하나씩 나는 소리였다. 소리가 두 가지 이상 겹치는 일은 드물었고, 겹치면 대개 무슨 일이 난 것이었다. 여기서는 그 전부가 동시에 났다. 수레바퀴가 돌길을 지나가고 어딘가에서 쇠를 두드리고 누가 소리쳐 부르고 다른 누가 웃고 개가 짖고 문이 닫히고 그릇이 부딪혔다. 소리가 겹치면 하나하나를 골라낼 수 없다는 것을 켈리는 처음 알았다. 골라내려고 애쓰다가 머리가 아파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 많았다. 켈리는 그 표현을 정확히 쓸 수 있었다. 많다는 것은 셀 수 있는 것이 셀 수 없을 만큼 있다는 뜻인데, 켈리는 여태 사람을 세면서 살았다. 제4마도대에 마법사가 스물몇이었고 그 숫자가 계속 바뀌었으므로 매번 세었다. 막사 스무 채에 사람이 몇인지도 대략 알았다. 육성소에서는 한 방에 열둘이었고 그것은 삼 년 내내 열둘이었다. 그런데 이 길에는 그보다 많은 사람이 한 번에 있었고, 세려고 하면 센 사람이 움직여서 다시 세어야 했다. 켈리는 두 번 세다가 그만두었고, 그만두고 나서 속이 조금 불편해졌다. 셀 수 없는 것이 눈앞에 있는 상태를 켈리의 몸은 견디기 어려워했다.
문제는 세는 것이 아니라 걷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무 대형도 이루지 않고 걸었다. 이쪽으로 가는 사람과 저쪽으로 가는 사람이 섞여 있었고 누가 앞인지 뒤인지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간격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둘은 어깨가 닿을 만큼 붙어서 걸었고 어떤 사람은 혼자 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걸었다. 켈리는 그 사이에 들어가서 세 걸음을 걷고 멈췄다. 앞에서 사람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두 걸음을 걷고 또 멈췄다. 이번에는 옆에서 왔다. 켈리가 아는 규칙으로는 앞에서 오는 사람이 있으면 서서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행군 대열이 마주치면 계급이 낮은 쪽이 비켜선다. 켈리는 늘 낮은 쪽이었다.
뒤에서 누가 켈리의 등에 부딪혔다. 부딪힌 쪽이 뭐라고 하고 지나갔다. 켈리가 그쪽을 보았다. 잘못한 것이 자기인지 상대인지 알 수 없었다. 줄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줄에서는 앞사람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서면 섰다. 그게 전부였고 그래서 틀릴 일이 없었다. 틀릴 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 것이었는지를 켈리는 그 길 한가운데에서 처음 알았고, 알고 나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편했다고 생각한 것이 이상했다.
제도가 사람에게서 맨 먼저 가져가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판단이다. 판단을 오래 빼앗긴 자는 그것을 돌려받는 순간을 안도가 아니라 불편으로 느끼며, 불편하다는 이유로 스스로 돌려주려 든다. 켈리의 몸은 열두 해 동안 틀릴 일이 없는 세계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 세계는 켈리를 열일곱 번 내보냈고 매번 며칠씩을 가져갔으나, 적어도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를 두고 켈리를 곤란하게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 번째로 부딪혔을 때 바르트가 돌아와서 켈리의 손목을 잡았다.
"이러다 저녁까지 못 가겠네."
"사람이 계속 와."
"오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어."
바르트가 잠깐 켈리를 보았다.
"자네 지금 저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고 있었어?"
"어."
"전부?"
"어."
바르트가 손목을 잡은 채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보지 마. 앞만 봐. 부딪히면 부딪히는 거고."
"부딪히면 어떻게 돼."
"어떻게 되는 건 없어."
켈리는 그 대답이 제일 어려웠다. 아무것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말이었다. 켈리가 아는 세계에서 무언가가 어긋나면 반드시 뒤에 무엇이 왔다. 지적이 오거나 벌이 오거나 그날 배식이 줄었다. 아무것도 안 오는 어긋남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며칠 전 파인 땅에서 한 번 들었고 오늘 또 들었다. 두 번 들었으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바르트가 쇳조각을 판 곳은 항구 안쪽의 좁은 골목이었다. 문 위에 간판이 없고 대신 벽에 쇠붙이 몇 개가 못으로 박혀 있었다. 그것이 간판인 모양이었다. 안에 들어가자 사람이 하나 앉아 있었고 바르트가 자루를 내려놓았다. 그다음부터는 긴 이야기가 오갔다. 켈리는 절반쯤 알아들었다. 이건 어디서 난 것이냐, 폐허다, 어느 폐허냐, 말할 수 없다, 그러면 값을 깎겠다, 깎으면 다른 데로 가겠다, 다른 데 가면 이것도 못 받는다, 그럼 둘 다 손해다. 그런 식이었다. 중간에 주인이 자루에서 쇳조각 하나를 꺼내 손톱으로 긁고 혀로 대 보고 불빛에 비춰 보았다. 그 동작이 어딘가 바르트와 닮아 있었다.
켈리는 그 이야기가 싸움인 줄 알았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목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했는데 둘 다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상대를 깎는 일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날 배웠다. 값이라는 것이 물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는데, 그 생각을 붙잡아 두기에는 가게 안이 너무 답답했다.
밖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듣고 켈리가 골목으로 나왔다. 나와서 벽에 기대어 섰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고 땅을 보았다. 땅을 보고 있으면 사람이 몇 명 지나가는지 세지 않아도 되었다. 돌바닥 틈새에 뭔가가 자라 있었다. 풀이었다. 돌을 이렇게 촘촘히 박아 놓았는데도 틈이 있었고 그 틈으로 풀이 나왔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때 골목 끝에 줄이 있었다.
열 명쯤이 벽을 따라 서 있었다. 간격이 일정했다. 켈리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무엇을 주는 줄인지 보려고 앞쪽을 살폈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켈리는 맨 뒤에 가서 섰다. 등을 펴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시선을 정면보다 조금 아래에 두었다. 간격은 한 걸음 반이었다.
줄은 천천히 줄었다. 여덟 명이 남고 여섯이 남고 넷이 남았다. 켈리는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은 켈리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앞사람이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켈리를 보고 다시 앞을 봤다가 또 한 번 돌아보았다. 두 번째에는 조금 오래 보았다. 켈리는 그 시선이 무엇을 재는 것인지 몰랐고, 모르는 채로 자세를 유지했다.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시선에 대한 정답이라고 몸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켈리 뒤에 누가 와서 섰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왔다. 켈리가 서 있었으므로 거기가 줄의 끝인 줄 알았던 것이다. 켈리는 뒤에 사람이 붙은 것을 알았고 알고 나서 등을 조금 더 폈다. 줄이 길어지면 자기 차례가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가 든든해지는 것이었다. 앞에 넷이고 뒤에 둘이면 그 줄 안에서 켈리의 자리는 확실했다.
바르트가 찾으러 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골목을 두 번 오가고 나서야 그 줄에서 켈리를 발견했고, 발견하고 나서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본 것은 마른 여자애 하나가 자세를 완벽하게 잡고 서 있는 것과, 그 뒤로 두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서 있는 것이었다.
"켈리."
켈리가 돌아보았다.
"거기서 뭐 해."
"줄 있어서."
"무슨 줄인지 봤어?"
켈리가 앞을 보았다. 앞의 세 사람 너머로 이제는 보였다. 나무 문이 하나 있고 그 옆에 통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통에 동전을 넣고 문으로 들어갔다.
"…몰라."
"저건 뒷간이야."
"…"
"돈 내고 들어가는 뒷간."
켈리가 줄에서 나왔다. 나오면서 앞사람이 한 걸음 앞으로 갔고 간격이 메워졌다. 켈리는 그 메워지는 것을 보았다. 자기가 빠져도 줄은 그대로였다. 뒤에 섰던 둘 중 하나가 켈리를 따라 나왔고 하나는 그냥 남았다. 남은 쪽은 아마 원래 볼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바르트가 앞서 걷다가 한 번 돌아보았다.
"자네 줄 보면 다 서?"
"어."
"왜."
켈리가 그 질문에 대답하려고 했다. 대답이 없지는 않았다. 줄을 서면 그다음이 있다. 무언가를 받거나 어딘가로 가거나 무엇을 하라는 말을 듣는다. 줄을 서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열두 해 동안 켈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줄을 선 뒤에 일어났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전부 그랬다. 줄 밖에서 켈리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말로 만들려니 문장이 되지 않았다.
"…그냥."
바르트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그날 저녁 노트에 한 줄을 적었고 그 줄은 이랬다. 줄을 보면 선다. 무슨 줄인지 묻지 않는다.
항구는 골목을 빠져나오자 바로 나왔다. 나무로 짠 긴 부두가 있었고 배가 여섯 척 묶여 있었다. 배는 켈리가 생각한 것보다 컸다. 짐수레 스무 대를 실어도 남을 것 같았고 돛대가 성벽보다 높았다. 사람들이 널빤지를 오르내리며 자루를 옮기고 있었다. 자루 하나를 두 사람이 드는 것도 있고 혼자 지는 것도 있었는데, 혼자 지는 쪽은 허리를 굽히지 않고 무릎으로 들어 올렸다. 켈리가 그 동작을 알아보았다. 모래주머니를 들 때 그렇게 들었다. 잘 들면 허리가 안 나간다.
그 너머에 물이 있었다. 켈리가 걸음을 멈췄다. 이번에는 사람 때문이 아니었다.
물은 끝이 없었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끝이 있었는데 앞쪽으로는 없었다. 회색이었고 움직이고 있었으며 움직이는 방식이 개울과 달랐다. 개울은 한쪽으로 흘렀다. 이것은 한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동시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소리가 났다. 계속 났고 멈추지 않았다. 켈리가 아는 소리 중에 멈추지 않는 것은 없었다. 망치도 멈추고 점호도 끝나고 발소리도 그친다. 이 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그치지 않는 소리가 있다는 것이 켈리에게는 소리 자체보다 이상했다.
냄새도 났다. 켈리가 코로 두 번 들이마셨다. 소금이었다. 며칠 전에 3돈을 주고 산 것과 같은 냄새였다. 켈리는 그 자루를 등에 지고 열흘을 걸었고 그것이 한 줌씩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냄새가 공기에 그냥 퍼져 있었다. 값이 붙은 것이 공짜로 퍼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켈리는 잠깐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한 번 더 들이마셨다.
"저거 다 물이야?"
"다 물이야."
"어디까지."
바르트가 옆에 와서 섰다.
"저쪽 끝에 또 땅이 있어. 거기도 사람 살고."
"얼마나 가야 돼."
"배로 스무 날쯤."
켈리가 그 숫자를 들었다. 스무 날. 걸어서 열하루를 온 것이 이 도시까지였고, 배로 스무 날을 가면 또 땅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땅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켈리는 며칠 전에 흙바닥에서 동그라미 다섯 개를 보았고 그것이 세상 전부인 줄 알았다. 그 동그라미들은 이 물의 이쪽에 있었다. 이쪽이 있으면 저쪽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때 처음 계산해 보았고, 계산해 보니 세상이 흙바닥에 그려진 것보다 훨씬 컸다.
"저 배는 어디로 가."
"저건 곡물선이니까 로엔 쪽에서 왔을 거고. 나가는 건 남쪽으로 가."
"남쪽에 뭐 있어."
"나도 안 가 봤어."
켈리가 바르트를 보았다. 안 가 봤다는 말을 이 사람에게서 듣는 것이 처음이었다. 바르트는 여태 켈리가 묻는 것에 대개 답을 갖고 있었고, 답이 없을 때는 모른다고 했는데 그것도 아는 사람이 모른다고 하는 투였다. 안 가 봤다는 것은 달랐다. 그것은 이 사람에게도 바깥이 있다는 뜻이었다.
켈리가 한참 서 있었다. 바르트가 재촉하지 않았다. 해가 물 위로 낮게 떨어지고 있었고 물이 그 빛을 받아 군데군데 번졌다. 켈리는 번지는 자리를 보았다가 번지지 않는 자리를 보았다가 했다. 번지는 자리는 계속 옮겨 다녔다. 같은 자리에 두 번 오지 않았다. 켈리는 그것을 세어 보려고 하다가 세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었다. 오늘 세는 것을 그만둔 것이 세 번째였고, 그만두고 나서 속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날 밤은 항구 뒤편의 삯방에서 잤다. 하룻밤에 셋이었고 그 값에 짚 매트리스와 담요 한 장과 문 하나가 딸렸다. 문이 딸렸다는 것이 켈리에게는 새로웠다. 헛간에는 문이 있었지만 그 문은 안에서 잠기지 않았다. 여기 것은 안쪽에 나무 빗장이 있었다. 바르트가 그것을 걸었고 켈리가 그 동작을 보았다.
"왜 잠가."
"여긴 사람이 많으니까."
"사람 많으면 잠가?"
"많으면 그중에 나쁜 놈도 있지."
"몇이나."
바르트가 잠깐 웃었다.
"그건 나도 몰라. 그래서 잠그는 거야."
켈리가 그 말을 곱씹었다. 몇인지 모르기 때문에 잠근다는 것이었다. 켈리가 아는 대비는 전부 숫자에서 나왔다. 적이 몇이면 이쪽은 몇을 세우고, 며칠 치가 남았으면 하루에 얼마씩 먹는다. 숫자를 모르는 채로 대비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들었다.
바르트가 쇳조각을 판 값은 일곱 냥 너 돈이었다. 켈리가 그 숫자를 듣고 잠깐 셈을 했다. 하루에 예닐곱 돈을 쓰면 열흘이 넘었다. 처음으로 셈이 넉넉하게 나왔고, 넉넉하게 나왔는데도 켈리는 그 숫자를 두 번 더 확인했다.
"여기서 며칠 있을 거야."
"왜."
"살 게 있어. 그리고 읽을 것도 좀 있고."
바르트가 노트를 펴면서 말했다.
"여기 서고가 하나 있거든. 돈 내면 들어가서 볼 수 있어."
"책 보는 데 돈을 내?"
"내지."
"얼마."
"하루에 닷 돈."
켈리가 눈썹을 조금 움직였다. 닷 돈이면 빵 두 개 반이었다. 켈리는 책이라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마법청 서기가 들고 다니는 것이 있었고 그것은 얇았다. 그 얇은 것을 하루 보는 데 빵 두 개 반을 낸다는 계산이 잘 서지 않았다.
"뭐 읽는데."
"잉여 얘기."
켈리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바르트를 보았다.
"자네가 터뜨리면 나가는 게 있잖아. 그게 어디로 가는지."
"그거 아직도 봐?"
"보지."
바르트가 노트를 덮었다.
"자네는 그게 그냥 없어진다고 했고 나는 없어지는 건 없다고 했는데, 둘 중 하나는 틀렸을 거 아냐. 그럼 확인을 해야지."
등불이 꺼지고 나서 켈리는 오래 깨어 있었다. 삯방은 벽이 얇아서 옆방 소리가 들렸고 아래층에서는 아직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다. 그 소리가 켈리에게는 낯설었는데, 낯설다고 해서 싫은 것은 아니었다. 소등 뒤에 소리가 나는 것은 규칙 위반이었고 위반이면 누가 와야 하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 밤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스무 날째 겪는 중이었고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누워서 켈리는 성문 안쪽에 붙어 있던 종이를 다시 떠올렸다.
「회수」는 아는 말이었다. 열다섯 살에 처음 듣고 삼 년을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때 누가 설명해 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말이 나온 뒤에 어떤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고, 그다음에 또 그 말이 나왔고 또 누가 돌아오지 않았다. 세 번째쯤부터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켈리는 그 말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말 뒤에 오는 것을 아는 쪽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더 알려고 하면 물어야 하는데 그것은 물어도 되는 항목이 아니었다.
모르는 것은 앞에 붙은 네 글자였다. 분실 자산. 글자는 읽혔고 뜻도 짐작이 갔다. 잃어버린 재산이라는 말이었다. 창고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그렇게 적는다. 켈리는 보급 문서에서 그 표기를 본 적이 있었다. 담요 두 장이 없어졌을 때 그렇게 적혔고, 그 아래에 담당자가 변상한다는 줄이 붙었다.
그 네 글자가 왜 「회수」 앞에 붙어 있는지를 켈리는 몰랐다. 둘을 이어 붙이면 문장이 하나 나온다는 것도, 그 문장의 주어가 자기라는 것도 몰랐다. 벨류엔의 문서를 읽는 데에는 요령이 하나 있었다. 사람에게 쓰는 말과 물건에 쓰는 말이 같은 난에 들어앉아 있을 때, 그 난이 사람 쪽인지 물건 쪽인지는 맨 아래 처리란을 보아야 알 수 있다. 처리란은 언제나 글씨가 가장 작은 자리에 있었고, 켈리는 거기까지 읽지 않았다.
몰랐으므로 그날 밤 켈리는 잘 잤다.
확률이 낮았을 뿐

바르트가 서고에 간 것은 타르실 둘째 날 아침이었다. 그는 나가기 전에 켈리에게 세 가지를 말했다. 첫째, 점심때쯤 돌아온다. 둘째, 이 동전 다섯 개로 뭐든 사 먹어라. 셋째, 멀리 가지 마라. 켈리가 세 가지를 다 듣고 알겠다고 했다. 바르트가 문을 열다 말고 한 번 돌아보았는데, 돌아본 이유는 알겠다는 대답이 너무 정확하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깐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나갔다. 나가면서 그가 생각한 것은 자기가 방금 세 가지를 명령처럼 말했다는 것이었고, 그 생각은 서고에 도착할 때까지 그를 따라왔다.
켈리는 동전 다섯 개를 오른손에 쥐었다. 쥐고 나서 주머니에 넣을까 하다가 그대로 쥐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으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려고 계속 만져야 하는데, 손에 쥐고 있으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동전은 얇고 차가웠다가 곧 손바닥 온도가 되었다. 켈리는 짚 매트리스에 앉아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은 잘하는 일이었으므로 특별히 힘들지 않았다. 창밖으로 항구 쪽이 보였고 종탑이 하나 서 있었다. 종은 정시마다 울렸다. 여덟 시에 여덟 번 울렸고 아홉 시에 아홉 번 울렸다. 켈리는 그 규칙을 알아내고 나서 조금 편해졌다. 시각을 알려 주는 것이 있는 도시는 그렇지 않은 들판보다 나았다. 전선에도 시보가 있었다. 여기 종은 그것보다 소리가 길게 끌렸다.
열 번이 울리고 열한 번이 울렸다. 그 두 시간 동안 켈리가 한 일은 네 가지였다. 지팡이를 무릎에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살펴보았다. 흠은 없었다. 담요를 접었다가 폈다가 다시 접었다. 세 번 접으면 네모가 되고 네 번 접으면 더 작은 네모가 되는데 네 번 접은 쪽이 보기 좋았다. 손바닥을 펴서 동전이 다섯 개인지 확인했다. 다섯 개였다. 그리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세었다. 스물아홉까지 세다가 같은 사람이 두 번 지나가는 바람에 다시 세었고, 두 번째에는 마흔넷에서 놓쳤다.
열한 번이 울린 뒤에 배가 고파졌다. 고픈 것에는 익숙했으나 요즘은 하루에 세 번쯤 먹는 것이 보통이 되어 있었고, 몸이 그 보통에 벌써 적응한 모양이었다. 켈리는 그것이 조금 억울했다. 며칠 먹었다고 몸이 더 자주 보채는 것이 계산에 맞지 않았다. 열두 해 동안 두 번씩 먹었을 때는 두 번에 맞춰 고팠는데, 세 번으로 바뀌는 데는 스무 날도 걸리지 않았다. 몸이 그렇게 빨리 편한 쪽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켈리에게는 새로웠고, 새로우면서 조금 불안했다. 다시 두 번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오면 그때는 더 힘들 것 같았다.
켈리가 일어섰다. 밖에 나가는 것은 세 번째 항목에 어긋나지 않았다. 멀리 가지 말라고 했지 나가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켈리는 그 구별을 해 보고 나서 자기가 방금 구별이라는 것을 했다는 사실에 잠깐 멈췄다. 전에는 이런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말한 것만 했고 말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았으며 그 사이에 뭐가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말과 말 사이에 빈자리가 있고 그 빈자리는 자기가 채워도 된다는 것이, 켈리가 이 도시에서 배운 것 중 가장 위험한 것이 되었다.
골목으로 나가자 냄새가 났다. 빵집이었다. 켈리가 그 앞에 가서 섰다. 철판 위에 빵이 있었고 값이 적힌 나무판이 걸려 있었다. 한 개 두 돈. 켈리는 그것을 읽었고 손에 다섯 돈이 있었고 계산은 간단했다. 두 개를 사고 한 돈이 남는다. 그런데 켈리는 거기서 움직이지 못했다.
사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는지를 몰랐다. 저쪽이 먼저 뭘 물어야 하는 것인지, 이쪽이 먼저 동전을 내미는 것인지, 내밀면 어느 손으로 내미는 것인지, 빵을 가리키면서 내미는 것인지 그냥 내밀고 기다리는 것인지. 베렐에서는 바르트가 했고 성문에서도 바르트가 했고 삯방에서도 바르트가 했다. 켈리가 본 것은 그 사람이 동전을 놓는 장면뿐이었고, 그 앞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보지 않았다. 볼 이유가 없었다. 배급 줄에서는 손을 내밀면 얹어 주었다. 그게 전부였고 그 전부가 여기서는 통하지 않았다.
켈리가 손을 반쯤 내밀었다가 도로 내렸다. 내밀면 얹어 줄 것 같았는데 얹어 주지 않으면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사고파는 일에는 말이 필요했다. 무엇을 얼마나 달라고 말하고 값을 묻고 동전을 내미는 순서가 있는데, 그 순서는 어느 나라에서도 문서로 적히지 않는다. 적히지 않는 것은 곁에서 보고 익히는 수밖에 없고, 곁에서 보고 익히려면 어릴 적에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장에 따라가 본 일이 있어야 한다. 켈리에게 여섯 살 이전은 없었다.
빵집 주인이 켈리를 두 번 보았다. 세 번째에 뭐라고 물었는데 켈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항목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켈리가 뒷걸음으로 한 걸음 물러났고, 주인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것이 켈리를 쫓아낸 것인지 그냥 다른 일이 생긴 것인지 켈리는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었으므로 그 자리를 떴다.
골목을 나와 걷다가 켈리가 줄을 보았다. 열두어 명이 벽을 따라 서 있었다. 켈리가 걸음을 늦췄다. 어제 뒷간 일이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먼저 앞쪽을 살폈다. 살펴봤으나 사람 등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다만 줄 끝에서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어딘가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기대하는 얼굴로 줄을 서서 들어가는 곳이 켈리가 아는 것 중에는 하나뿐이었다. 켈리는 그 하나를 떠올렸고, 떠올리고 나니 배가 더 고파졌다.
켈리가 맨 뒤에 섰다. 간격은 한 걸음 반이었다.
줄은 빨리 줄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앞에 탁자가 있고 사람이 하나 앉아 있었는데, 앞사람이 그 앞에서 짧게 뭐라고 하고 들어갔다. 켈리 차례가 왔을 때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이름."
켈리가 대답했다.
"켈리."
"성은."
"없어."
남자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마른 여자애가 서 있었다. 남색인지 뭔지 모를 옷 위에 큰 갈색 외투를 걸쳤고 손에 긴 나무 막대기를 들었으며 표정이 없었다.
"성이 없어?"
"없어."
"…그럼 켈리라고만 적는다."
"어."
남자가 명부에 적었다. 적으면서 한 번 더 켈리를 보았다. 그러고는 턱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켈리가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자기 이름이 종이에 적히는 것을 보았다.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바르트의 노트였고 이번은 이 명부였다. 켈리는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적히는 것이 나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아직 켈리에게 없었다. 벨류엔에서 켈리에 관해 적힌 것은 전부 번호였고, 번호는 적혀도 켈리를 찾아오지 않았다. 찾아오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그래서 켈리는 적기와 찾기를 서로 다른 일로 알고 있었으며, 그 둘이 한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앞으로 사흘이 더 걸렸다.
안은 넓지 않았고 어두웠고 사람이 많았다. 가운데에 두꺼운 나무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양쪽에 의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 팔꿈치 자국이 깊게 패어 있었다. 오래 쓴 물건이었다. 사람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고 한쪽 벽에 나무판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 이름과 숫자가 분필로 적혀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보고 배식대를 떠올렸다. 사람이 둘러싸고 있고 이름이 적혀 있고 숫자가 붙어 있었다. 숫자가 붙은 이름은 켈리가 아는 것이었다. 무게를 재면 숫자가 나오고 그 숫자대로 받는다. 여기 숫자도 그런 것이라고 켈리는 짐작했고, 짐작이 절반은 맞았다. 숫자대로 받는 것은 맞았으나 그 숫자가 무게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음. 켈리."
켈리가 앞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갈라졌고 갈라지면서 웅성거렸다. 누가 웃었다. 하나가 웃자 둘이 웃었고 곧 여럿이 웃었다. 켈리가 그쪽을 보았다.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웃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보다가, 보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앞으로 갔다. 웃음은 켈리가 잘 모르는 것 중 하나였다. 육성소에서 아이들이 웃는 일은 있었으나 많지 않았고, 웃을 때는 대개 무엇이 웃긴지 서로 아는 상태였다. 여기서는 웃는 쪽만 알고 웃음을 받는 쪽은 몰랐다. 그것이 사람을 여럿 모아 놓고 웃는 일의 오래된 쓰임이었다. 웃음은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바깥에 있는지를 말 한마디 없이 정해 놓으며, 바깥으로 정해진 쪽은 자기가 언제 정해졌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켈리는 그날 그 방에서 바깥이었고, 바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의자에 앉았다.
배당을 매기는 남자가 켈리를 위아래로 훑고 나무판에 분필로 적었다. 켈리 열둘. 옆의 숫자는 하나였다.
"열두 배."
그 말에 또 웃음이 났다. 몇 사람이 동전을 내밀었다. 재미로 거는 것이었다. 한 돈짜리가 대부분이었고 아무도 진지하지 않았다. 열두 배를 건다는 것은 지지 않을 것 같은 쪽에 거는 사람들이 심심해서 반대쪽에 한 돈을 던지는 일이었고, 그것도 놀이의 일부였다.
탁자 반대편에 앉은 사람은 부두 짐꾼이었다. 목이 굵고 팔뚝이 켈리 허벅지만 했다. 그가 켈리를 보더니 뒤쪽을 향해 뭐라고 했고 또 웃음이 났다. 켈리가 의자에 앉았다. 앉아서 탁자를 보았다.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몰랐으므로 물었다.
"이거 뭐 해."
"팔씨름."
옆에 선 남자가 대답했다. 그는 심판인 모양이었다.
"팔 올려. 손 잡고. 상대 손등 탁자에 붙이면 이기는 거야."
"그게 다야?"
"그게 다야."
켈리가 오른팔을 탁자에 올렸다. 짐꾼이 손을 내밀었고 켈리가 그 손을 잡았다. 손이 컸다. 켈리의 손이 그 안에 반쯤 들어갔다. 잡고 나서 켈리가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이거 이기면 뭐 줘."
"뭐?"
"이기면 뭐 줘. 밥 줘?"
짐꾼이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웃는 웃음이었다. 앞니가 하나 없었다.
"애야. 여기 밥 안 줘."
켈리가 실망했다. 실망했다는 표시는 나지 않았고 다만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밥을 주는 줄인 줄 알았다. 기대하는 얼굴로 들어가는 곳이 밥 주는 데 말고 또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 순간에 배웠다. 그리고 배운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여기까지 온 이상 이걸 하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줄을 섰으면 차례를 마쳐야 한다. 차례를 안 마치고 나가는 법을 켈리는 배운 적이 없었다.
"시작."
켈리는 시작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은 켈리가 아는 말이었다. 열두 해 동안 그 말 뒤에 오는 것은 언제나 하나였다. 걸고 달리고 하라는 대로 한다. 무엇을 걸어야 하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랐으나 걸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걸지 않고 시작하는 훈련은 벨류엔에 없었다.
그래서 켈리는 걸었다.
오른팔 안쪽에서 무언가가 밀려 올라왔다. 어깨에서 팔꿈치로 내려가 손목에서 뭉쳤다. 교범은 그것을 강화의 예비 단계라 불렀고 마법청의 서기들은 단계마다 번호를 매겨 두었으나 켈리는 그 이름을 배운 적이 없었다. 켈리가 아는 것은 다 올라오고 나면 팔이 가벼워진다는 사실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을 쓰면 안 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그 방에서 아무도 켈리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말해 줄 이유가 없었다. 이 방의 누구도 그런 것을 걸 줄 아는 사람이 앉아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짐꾼은 처음에 힘을 주지 않았다. 봐주려고 한 것이었다. 어린 여자애를 상대로 단번에 눕히면 보기 좋지 않으므로 몇 숨쯤 버티다가 천천히 넘길 생각이었고, 그 생각을 할 시간은 있었다. 시작 소리가 나고 나서 한 숨 반 정도였다. 그 한 숨 반이 지나고 그의 손등이 탁자에 닿았다.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짐꾼이 자기 손을 보았다가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여전히 팔을 그 자세로 두고 앉아 있었고 표정이 그대로였다.
"…뭐야 지금."
"끝난 거야?"
켈리가 물었다. 심판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켈리의 팔을 한 번 보았다.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 팔뚝이 가늘었다. 가는데 선이 있었다. 살이 없어서 근육이 그대로 드러난 팔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다른 선이 하나 더 있었다.
피부 밑으로 붉은 실 같은 것이 손목에서 팔꿈치 쪽으로 옅게 번져 있었다. 방이 어두웠고 등불이 탁자 위쪽에만 달려 있었으므로 잘 보이지 않았다. 심판은 부두에서 10년을 일했고 팔뚝을 보는 눈이 있었는데, 그 눈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타르실에는 마법사가 없었다. 회랑에서 천 리 떨어진 항구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남의 팔에서 그 선을 알아볼 방법은 없었다.
그는 그것을 핏줄이라고 생각했다. 힘을 쓰면 핏줄이 선다. 그 설명으로 넘어갔고, 넘어간 뒤로는 다시 보지 않았다.
나무판 앞이 잠깐 소란해졌다. 한 돈을 던졌던 사람들이 열두 돈씩 받아 갔다. 받아 가면서 웃었고 이번 웃음은 아까 것과 종류가 달랐다. 배당을 매기던 남자가 분필로 적힌 것을 지우고 다시 적었다. 켈리 둘. 옆의 숫자는 하나였다.
두 번째 상대는 봐주지 않았다. 그쪽은 첫 판을 봤으므로 처음부터 힘을 썼고, 켈리의 손등이 탁자 쪽으로 반쯤 기울었다. 사람들이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웃음이 아니라 구경하는 소리였다. 켈리는 그 상태에서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이를 악물고 있었고 목에 핏줄이 섰고 어깨가 들려 있었다. 켈리는 그 자세를 보고 한 가지를 알았다. 저 사람은 지금 전부를 쓰고 있었다.
켈리는 절반쯤 걸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을 마저 걸었다.
팔이 한 번 더 뜨거워졌다. 상대의 손등이 탁자에 닿는 데는 두 숨이 걸렸다. 닿고 나서 그가 팔을 빼고 어깨를 주물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무판 앞에서 배당을 매기던 남자가 분필을 든 채로 서 있었다. 그가 한참 서 있다가 켈리의 숫자를 지웠다. 지우고 새로 적지 않았다. 켈리 쪽에 걸 사람이 이제 없을 것이고, 켈리 반대쪽에 걸 사람은 더 없을 것이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에는 값을 붙이지 않는 것이 이 판의 규칙이었다.
세 번째는 하우스가 직접 골랐다. 뒤쪽 방에서 불려 나온 사람이었고 여기서 일하는 자였다. 팔이 짐꾼보다 굵지는 않았는데 손목이 두꺼웠다. 그가 앉으면서 켈리를 한 번 보았고 그 눈에는 웃음이 없었다. 이 사람이 나온 것은 판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두 판이 나갔으면 세 판째는 되찾아야 했고, 되찾지 못하면 오늘 저녁 장부가 맞지 않았다.
켈리도 이번에는 처음부터 다 걸었다. 여태 절반씩 건 이유는 아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를 몰라서였는데, 이제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상대가 얼마나 쓰는지를 보고 그보다 조금 더 걸면 되는 것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그 자리에서 알아냈고, 알아낸 것을 바로 써 보았다.
문제는 그 조금 더가 켈리에게는 조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벨류엔의 교범에는 강화의 단계가 여섯으로 나뉘어 있었다. 아래 셋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 안에 있었고 위 셋은 그 바깥에 있었다. 돌파형에게 가르치는 것은 위 셋이었다. 터지는 자리까지 가는 데 필요한 것이 그것이었기 때문이고, 아래 셋을 쓸 일이 없었으므로 아래 셋은 가르치지 않았다. 켈리가 조절할 줄 아는 눈금은 넷째부터 시작했다.
탁자가 부서졌다.
정확히는 켈리 쪽 모서리가 먼저 갈라졌고 그다음에 상판 가운데가 쪼개졌다. 두꺼운 나무였는데도 그렇게 되었다. 상대의 손등은 탁자에 닿지 못했다. 닿을 탁자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팔이 부러진 상판 사이로 내려갔고 켈리가 손을 놓았다. 나무 부스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상대는 팔을 그대로 든 채 자기 손과 켈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이 일을 육 년 했고 탁자가 부서지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 방에서 소리를 낸 것은 마지막으로 떨어진 나무 조각 하나였다.
켈리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오른쪽 무릎이 한 번 꺾였다가 돌아왔다. 값이 왔다. 세 번을 연달아 걸었고 마지막 것이 컸으므로 그만큼이 어디선가 빠져나갔다. 켈리는 그것을 배고픔으로 셌다. 오늘 받은 것이 다섯 돈이었고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방금 쓴 것이 빵 몇 개어치인지가 저절로 계산되어 나왔다. 계산이 나쁘게 나왔다.
켈리가 부서진 탁자를 보았다. 그리고 심판을 보았다.
"이거 내가 물어야 돼?"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누군가 뒷문 쪽으로 뛰었다. 뒤이어 한 사람이 나무판 앞으로 가서 분필로 적힌 것을 손바닥으로 지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배당을 건 사람들이었다. 열두 배가 한 번 나왔고 두 배가 한 번 나왔으니 받을 것이 있었고, 받을 것이 있는 사람이 여럿이면 소리가 커진다. 나무판을 지우는 쪽과 지우지 말라는 쪽이 붙었고 그 사이에 의자 하나가 넘어졌다.
켈리는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다만 사람들이 자기를 밀치고 지나가고 있었고, 밀치는 것에 대해 이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냥 서 있었다. 서 있으면서 켈리가 생각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아직 밥을 못 먹었다. 둘째, 저 탁자를 물어야 하는지 아닌지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둘 중에 첫 번째가 더 급했다.
그러다 종소리를 들었다. 열두 번이었다. 정오였다. 점심때쯤 돌아온다고 했으니 돌아가야 할 시각이었다.
켈리가 문 쪽으로 갔다. 들어온 문은 사람들이 막고 있었고 반대편에 다른 문이 있었으므로 그쪽으로 갔다. 손잡이를 당겼다. 열리지 않았다. 바깥에서 뭔가로 막아 놓은 모양이었다. 켈리가 한 번 더 당겼고 역시 열리지 않았다.
"나 가야 돼."
아무도 듣지 않았다. 켈리가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과 지워진 나무판과 부서진 탁자가 있었다. 그중 누구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시간 됐어."
켈리가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는 대신 이번에는 앞으로 밀었다. 미는 동안 팔에 또 한 번 걸었다. 문을 부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켈리는 문이 열리기를 바랐고, 밀면 열린다고 생각했으며, 세게 밀면 더 잘 열린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는 틀린 데가 없었다. 다만 켈리가 걸 줄 아는 가장 약한 눈금이 문이 견딜 수 있는 것보다 위에 있었을 뿐이다.
문이 경첩째 뜯어져 나갔다.
문짝이 바깥 골목으로 넘어가 돌바닥에 떨어졌다. 먼지가 났다. 그리고 그 문 뒤쪽 벽에 붙어 있던 것이 같이 딸려 나왔다.
사람이었다. 작았다. 켈리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고 열대여섯으로 보였다. 사내아이였다. 문과 벽 사이 좁은 틈에 들어가 있다가 문이 통째로 없어지는 바람에 몸을 가릴 것이 사라진 참이었다. 주머니가 여럿 달린 옷을 입고 있었고 그중 하나에서 주사위가 두 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쪽이 켈리를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없었다. 켈리도 표정이 없었다. 둘이 잠깐 그러고 있었다. 그 잠깐 동안 주사위 하나가 계속 굴러가다가 돌틈에 걸려 멈췄다.
"저 3할로 잡힐 참이었는데요."
작은 쪽이 말했다. 목소리에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주사위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켈리 옆을 지나 골목 쪽으로 걸어갔다. 세 걸음쯤 가다가 멈추고 돌아보았다.
"같이 가시죠."
"왜."
"혼자 가면 저 7할로 잡혀요. 두 사람이면 4할이고요."
켈리가 그 숫자를 들었다. 7할과 4할. 어느 쪽이 작은지는 바로 알았다. 숫자는 켈리가 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쪽은 혼자 가면 9할입니다."
"왜 나는 9할이야."
"그렇게 생겼으니까요."
작은 쪽이 켈리의 외투와 지팡이와 키를 차례로 가리켰다.
"저 안에서 탁자 부순 사람이 어떻게 생겼냐고 물으면 다들 똑같이 대답할 겁니다. 마른 여자애가 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고요. 이 도시에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몇인데."
"하나요."
켈리가 골목 양쪽을 보았다. 뒤쪽 방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소리가 났다.
"가자."
켈리가 말했다.
작은 쪽이 따라오지 않았다. 골목 입구에 쭈그려 앉아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뭐 해."
"잠깐만요."
주사위 하나를 꺼냈다. 아까 주운 것 중 하나였다. 그것을 돌바닥에 세워 놓고 엄지로 한 번 눌렀다. 누르는 동안 입술이 움직였는데 소리는 나지 않았다. 숫자를 세는 입 모양이었다. 켈리는 그것을 보았고, 보면서 저 사람이 지금 뭔가를 세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았다. 무엇을 세는지는 몰랐다.
작은 쪽이 일어섰다.
"됐습니다."
뒷문에서 사람 셋이 뛰어나왔다. 앞선 자가 골목 입구를 돌았다.
넘어졌다.
뒤따르던 자가 그 위로 넘어졌고, 세 번째가 두 사람을 피하려다 벽에 어깨를 박았다. 셋이 한자리에 엉켰다. 하나가 일어서려다 다른 하나의 팔을 밟았고 그쪽이 소리를 질렀다.
켈리가 그 자리를 보았다. 평평한 돌바닥이었다.
"저거 왜 넘어져."
"돌이 있었겠죠."
"없는데."
"그럼 미끄러웠겠죠."
켈리가 바닥을 한 번 더 보았다. 마른 돌이었다. 사흘째 비가 안 왔다. 켈리는 그 두 가지를 알았고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까지 알았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나아가려면 사람이 이유 없이 넘어질 수도 있다는 것 말고 다른 가능성을 알아야 했고, 그런 것을 켈리는 배운 적이 없었다.
작은 쪽이 주사위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몸을 돌렸다. 두 걸음 만에 발을 헛디뎠다. 넘어지지는 않았는데 오른손을 벽에 짚었고, 짚고 나서 그 손목을 잠깐 쥐고 있었다. 숨을 한 번 짧게 들이마셨다.
"…3할로 돌아왔네요."
"뭐가."
"아무것도요."
소매를 내려 손목을 덮었다. 덮는 동안 소매 안쪽이 잠깐 보였다. 천이 감겨 있었다. 새것이 아니었고 여러 번 감았다 푼 것이었으며, 감은 자리가 손목 하나치고는 두꺼웠다.
둘이 골목을 나와 큰길로 접어들었다. 큰길에 들어서자 니카가 걸음을 조금 늦췄다. 뛰면 눈에 띈다고 했다. 켈리가 그 말을 듣고 속도를 맞췄다. 맞추는 것은 요즘 연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근데 왜 숨어 있었어."
"땄거든요."
"많이?"
"아니요. 조금씩 오래요."
니카가 걸으면서 대답했다.
"한 번에 많이 따면 걸립니다. 조금씩 오래 따면 안 걸리는데, 그것도 아주 오래 하면 걸려요. 저는 넉 달 했습니다."
"넉 달이면 오래야?"
"오래죠. 보통 두 달쯤에서 그만둡니다."
"근데 왜 넉 달 했어."
니카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계산이 맞았으니까요."
켈리는 그 대답을 이해했다. 계산이 맞으면 계속하는 것이었다. 계산이 맞는데도 그만두는 이유를 켈리도 잘 몰랐다. 그리고 걸으면서 니카가 한마디를 더 했는데, 묻지도 않은 것을 덧붙이는 투였다.
"저 판에서는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무슨 짓."
"…아니요. 그냥 안 했다고요."
니카가 말을 접었다. 접은 이유는 설명하려면 길어지기 때문이었고, 길어지면 이 사람이 자기를 두고 갈 확률이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니카가 넉 달 동안 지킨 규칙이었다. 판에서는 걸지 않는다. 도망칠 때만 건다. 그 구분을 지키지 않으면 오래 못 간다는 것을 그는 열세 살에 배웠고 그 뒤로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켈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들을 이유가 없었다. 켈리에게는 지켜야 할 그런 구분이 없었고, 없는 이유는 아무도 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벨류엔에서 시작이라는 말이 나오면 거는 것이 순서였고, 거는 자리와 걸지 않는 자리를 나누는 규정은 교범 어디에도 없었다. 나눌 필요가 없었다. 마법사가 마법을 쓰면 안 되는 자리에 가게 되는 경우를 마법청은 상정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한 사람은 판에서 걸지 않아 뒷문 뒤에 숨어 있었고, 한 사람은 판에서 걸어 탁자를 부수었다. 둘이 같은 골목에서 만난 것이 그래서 우연이었는데, 우연이라는 것을 둘 다 나중에야 알았다.
켈리가 물었다.
"아까 주사위는 왜 세웠어."
니카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버릇입니다."
"무슨 버릇."
"세워 놓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버릇이요."
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종류의 것은 켈리도 알았다. 담요는 세 번 접어도 되는데 네 번 접는 쪽이 나았고, 왜 나은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켈리는 더 묻지 않았다.
니카가 켈리를 한 번 보았다. 더 물을 줄 알고 대답을 두 개 더 준비해 두었는데 쓸 데가 없어졌다. 걸으면서 그 두 개를 도로 집어넣었다.
켈리가 물었다.
"이름 뭐야."
"니카 셰르입니다."
"켈리."
"성은요."
"없어."
"그거 좋네요."
니카가 말했다.
"찾기 어렵거든요."
켈리가 그 말을 생각해 보았다. 여태 켈리에게 성이 없다는 것은 없는 쪽이었다. 없는 것에 좋다는 말이 붙은 것은 처음이었다.
바르트는 삯방 앞에 서 있었다. 열두 시 반이었고 켈리는 없었고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가 골목 입구 쪽을 보다가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는 켈리였고 하나는 처음 보는 작은 사내아이였다. 두 사람 다 걸음이 빨랐고 뒤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어디 갔었어."
"줄 섰어."
바르트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또?"
"이번엔 앞에 봤어."
"봤는데?"
"밥 주는 덴 줄 알았어."
옆에서 니카가 말했다.
"밥은 안 주는 데였습니다."
바르트가 그쪽을 보았다.
"댁은 누구요."
"니카 셰르입니다. 이분이 문을 부수는 바람에 같이 나왔습니다."
"…문을."
"문하고 탁자요."
니카가 정정했다.
"탁자가 먼저였고 문이 나중이었습니다."
바르트가 켈리를 보았다. 켈리는 아직 오른손에 동전 다섯 개를 쥐고 있었다. 나가서 아무것도 사 먹지 않았으므로 하나도 줄지 않았다. 손바닥에 동전 모양 자국이 다섯 개 나 있었다. 바르트가 그 손을 한참 보았다. 그가 오늘 아침에 준 것은 다섯 돈이었고 그것으로 빵 두 개를 사고 한 돈이 남았어야 했다. 다섯 개가 그대로 있다는 것은 켈리가 네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그 네 시간 동안 대신 무엇을 했는지는 방금 들었다.
"자네 밥은."
"못 샀어."
"왜."
"사는 법 몰라서."
바르트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배낭을 열고 아침에 남긴 빵을 꺼내 켈리에게 주었다. 켈리가 받아서 먹었다.
받는 손을 그가 보고 있었다. 오른쪽 팔뚝에 아직 선이 남아 있었다. 아까보다 옅어졌고 곧 사라질 것이었는데, 사라지기 전까지는 보였다. 그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지난 석 달 동안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세 번인지 네 번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은 색의 짙기로 가늠해 보면 서너 번쯤이었다.
바르트는 그것을 묻지 않았다. 묻는 대신 켈리가 빵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중에 노트를 펴고 그날 자리에 한 줄을 적었다. 「셋, 혹은 넷. 아침부터 굶음.」 그 아래에 화살표를 그리고 「보충 없음」이라고 적었다.
쓴 만큼을 어디선가 가져와야 하는데 그날 켈리가 가져올 데는 자기 몸밖에 없었다. 그것을 계산으로 확인한 것이 그날이 처음이었고, 확인하고 나서 그는 저울 이야기를 며칠 더 하게 된다.
먹는 동안 니카가 그 옆에 서서 기다렸다가 다 먹은 것을 보고 말했다.
"오늘 안에 이 도시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요."
"저쪽이 받을 게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탁자값하고 문값하고, 아마 배당금까지 엮어서요."
"배당금은 우리가 받을 거 아니오."
"받으려면 남아 있어야 하고, 남아 있으면 물어줄 것도 같이 계산됩니다."
니카가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하나 꺼내 손안에서 굴렸다.
"제 계산으로는 남는 쪽이 6할 손해입니다. 저쪽은 장부를 쓰는 사람들이고 장부를 쓰는 쪽은 언제나 받을 것을 먼저 적습니다."
바르트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부를 쓰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오후 셋은 타르실 서쪽 문으로 나갔다. 나가는 데 입시세는 들지 않았다. 나가는 것은 공짜라고 켈리가 처음 알았다. 들어올 때는 돈을 받고 나갈 때는 안 받는 것이 이상해서 물었더니, 니카가 나가는 사람한테 받으면 아무도 안 나가고 그러면 더 곤란해진다고 대답했다. 켈리는 그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 앞뒤가 맞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흘 뒤에 그들은 다시 타르실로 불려 들어오게 되는데, 그때 셈을 해 준 사람은 니카가 아니었다.
대리인

찾아온 사람은 사흘째 저녁에 왔다. 일행은 타르실에서 서쪽으로 반나절쯤 떨어진 냇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르트가 여기서 며칠 더 묵자고 했기 때문이었는데, 이유는 사려던 물건을 아직 못 샀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려는 것은 저울이었다. 지금 쓰는 것은 한 푼 단위까지밖에 못 재는데, 그보다 잘게 재는 것이 타르실에 있다고 했다. 값은 스무 냥이었다. 바르트는 그 값을 듣고 사흘째 계산 중이었고, 계산하는 동안 그 저울 이야기를 세 번 했다.
찾아온 사람은 젊었고 가죽 통을 하나 들고 있었다. 그는 불가로 와서 이름 셋을 확인했다. 바르트 뮐렌, 니카 셰르, 그리고 켈리. 성이 없는 켈리. 확인하고 나서 통에서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받는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다고 했고, 다만 받았다는 표시를 해 달라고 했다. 바르트가 받고 이름을 적었다. 그 사람은 표시를 확인하고 통을 닫고 돌아갔다. 오는 데 반나절, 가는 데 반나절일 텐데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 일의 방식이었다. 통지를 나르는 자는 내용에 관여하지 않으며,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반나절을 걸어와 종이 한 장을 내밀고 다시 반나절을 걸어 돌아갈 수 있다. 관여하기 시작하면 그 일은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내가 그날 저녁 불가에서 본 것은 마른 여자애 하나와 작은 사내아이 하나와 덩치 큰 중년 남자 하나였고, 셋 중 누구도 그의 기억에 남지 않았다.
켈리가 그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위쪽에 굵은 글자가 있고 아래로 작은 글자가 빽빽했다. 굵은 쪽은 읽혔다. 중재 출석 통지. 그리고 그 아래 어딘가에 자기 이름이 있었다. 켈리 두 글자였다. 그것을 찾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는데, 글자가 작고 줄이 촘촘했기 때문이다. 찾고 나서 켈리가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짚었다.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는 것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바르트의 노트였다. 두 번째는 사흘 전 그 집의 명부였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 것은 켈리에게 좋았고 두 번째 것은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세 번째 것은 이 종이가 반나절을 걸어서 자기를 찾아왔다는 점이 달랐다. 적힌 것이 사람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때 알았다.
"내 이름이 왜 여기 있어."
"자네가 적어 줬으니까."
바르트가 종이를 받아서 작은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얼굴이 조금씩 굳었다.
"적으면 안 되는 거였어?"
"안 되는 건 아니고."
"근데."
"적으면 찾을 수 있게 되는 거지."
켈리가 그 말을 곱씹었다. 바르트의 노트에 적힌 이름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런데 그 노트는 켈리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같은 적기인데 하나는 찾아오고 하나는 안 찾아오는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켈리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 차이는 누가 적었느냐가 아니라 그 적힌 것을 누가 들고 있느냐에 있었다.
니카가 종이를 넘겨받아 아래쪽 글자를 읽었다.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 가면 궐석으로 처리된다고 합니다."
"궐석이 뭐요."
"안 온 사람 몫은 온 사람 말대로 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얼마가 되나."
"저쪽이 부르는 대로요."
바르트가 불을 한 번 쑤셨다. 불티가 올라갔다.
"사흘 전엔 도망가는 게 6할 이득이라고 했잖소."
"그때는 그랬습니다."
"지금은."
"지금은 반대입니다."
니카가 주사위를 손안에서 굴렸다. 굴리는 것은 계산을 하는 동작이 아니라 계산이 끝났을 때 하는 동작이었다. 켈리는 며칠 사이에 그 구별을 알게 되었다.
"사흘 전엔 저쪽이 우리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지금은 압니다. 이름 셋에 나이에 생김새까지요. 쇠 파는 데서 나갔겠죠. 그 집은 장부를 쓰니까요."
"그래서."
"그래서 지금 도망가면 이 도시에 다시는 못 들어옵니다. 저야 상관없는데요."
니카가 바르트 쪽을 보았다.
"그쪽은 여기서 계속 사야 하는 게 있으시잖습니까."
바르트가 불을 한 번 더 쑤셨다. 저울은 타르실에서만 팔았다. 정확히는 타르실에서 사는 것이 가장 쌌고, 다른 데서 사려면 두 배를 줘야 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십 년쯤 더 재면서 살 생각이었다.
"가야겠군."
중재소는 항구 안쪽 큰 건물의 이 층에 있었다. 아래층은 곡물 저울대였고 사람이 많았으며 냄새가 났다. 곡물 냄새와 사람 냄새와 젖은 마대 냄새가 섞인 것이었는데, 켈리는 그 냄새를 맡으면서 로엔에서 온 밀이 여기를 지나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밀이 어디서 오는지 아는 것이 두 달 전에는 못 하던 일이었다.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좁고 어두웠고 계단참마다 문이 있었고 문마다 번호가 붙어 있었다. 켈리가 그 번호를 하나씩 읽으면서 올라갔다. 번호를 읽는 것은 잘하는 일이었다.
배정된 방은 넷째 문이었다. 안은 좁았고 긴 탁자가 하나 있었으며 그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의자가 놓여 있었다. 상석에 앉은 사람은 중재인이었다. 쉰쯤 되어 보였고 앞에 종이와 모래시계를 놓아두었다. 모래시계는 켈리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유리 안에 모래가 들어 있고 가운데가 잘록했다. 켈리는 앉자마자 그것을 보기 시작했고 그 뒤로도 자주 보았다.
맞은편에는 둘이 앉아 있었다. 하나는 그날 그 집의 주인이었다. 켈리가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날은 뒤쪽 방에 있었는데 지금은 앞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하나가 더 앉아 있었는데, 그쪽은 그날 없던 사람이었다. 서른 후반쯤의 남자였다. 금속테 안경을 썼고 옅은 갈색 머리를 뒤로 넘겼는데 한 가닥이 삐져나와 있었다. 회색 장코트가 구겨져 있었고 원래는 좋은 옷이었을 것 같았다. 여행하는 차림이 아닌데 옷은 여행한 사람처럼 상해 있었다. 앞에 서류 뭉치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낡은 가죽 가방이 있었다. 그가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손가락으로 줄을 짚고 있었는데, 짚는 속도가 읽는 속도보다 빨랐다. 이미 아는 것을 확인하는 손이었다.
중재인이 시작을 알리고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그리고 양쪽을 한 번씩 보았다.
"청구 측부터."
안경 쓴 남자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코트 앞섶을 한 번 폈는데 그래 봐야 구김이 펴지지는 않았다.
"대리인 오벨 리스트입니다. 청구 항목은 셋입니다. 첫째, 탁자 한 대. 참나무 상판에 쇠 받침을 댄 것으로 여덟 해 전 제작. 감가를 적용해 열두 냥. 둘째, 문 한 짝과 경첩 두 벌. 문짝은 새것에 가깝고 경첩은 벽째 뜯겨 나갔으므로 벽 보수까지 포함해 여덟 냥. 셋째, 영업 중단 손실. 당일 오후와 다음 날 하루, 합 하루 반. 일 평균 수입의 절반을 잡아 다섯 냥. 합계 스물다섯 냥입니다."
"…스물다섯."
바르트가 그 숫자를 받아 적었다. 손에 있는 것이 여섯 냥 조금 넘었다. 스물다섯 냥이면 정밀 저울보다 다섯 냥이 더 비쌌고, 그는 그 계산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니카가 손을 들었다. 손을 들고 나서 중재인이 고갯짓을 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그런 절차를 아는 사람이었다. 타르실 빈민가에서 자란 아이가 중재소 절차를 아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동네에서는 돈 문제가 생기면 여기로 왔고, 니카는 열두 살부터 남의 일로 이 계단을 올라 다녔다.
"셋째 항목이요. 영업 중단이 하루 반이라는 건 누가 셌습니까."
"청구인이 신고했습니다."
"신고한 걸 그대로 적으면 그건 셈이 아니라 받아쓰기죠."
"신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허위로 밝혀지면 배액을 물립니다."
"밝혀지면요. 안 밝혀지면 그냥 다섯 냥이고요."
오벨이 가방 쪽으로 손을 뻗었다. 뻗으면서 낮게 뭐라고 말했는데 들리지 않았다. 숫자 같기도 했다.
가방이 저절로 열렸다.
그 안에서 손이 나왔다. 두 개였다. 팔꿈치까지 있었고 그 위로는 없었다. 잘린 자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거기까지만 있는 모양이었다. 색이 없었고 잉크 냄새가 났다. 두 손이 탁자 위로 올라와 서류 뭉치 옆에 자리를 잡더니 종이를 넘기기 시작했다. 넘기는 속도가 빨랐고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켈리가 지팡이를 잡았다. 바르트가 그 팔을 눌렀다.
나머지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중재인은 모래시계를 보고 있었고 그 집 주인은 하품을 했고 니카는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다. 이 방에서 그것을 처음 보는 사람은 켈리뿐이었다.
"앉으셔도 됩니다."
오벨이 말했다.
"물지 않습니다."
"…저거 뭐야."
"서기입니다."
"사람이야?"
"아니요."
"그럼 뭐야."
"계약입니다."
손이 한 장을 뽑아 오벨 앞으로 밀었다. 오벨이 그것을 받아 읽었는데, 받기 전에 이미 읽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타르실 상거래 중재 규정 제구조 제이항. 손실액 산정은 청구인의 장부에 근거하되, 장부가 없는 업종은 신고액에 상한을 둔다. 이 업종은 장부를 두지 않는 업종이며 상한은 일 평균 수입의 절반, 최대 사흘분입니다. 저희는 하루 반을 청구했습니다. 상한의 절반입니다."
"그걸 외우고 계십니까."
"제구조는 자주 씁니다."
니카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다른 쪽을 짚었다.
"둘째 항목. 벽 보수가 왜 문값에 들어갑니까."
"경첩이 벽째 뜯겼습니다."
"그건 문이 튼튼했으면 안 그랬겠죠. 문이 벽보다 강하면 벽이 나가는 겁니다. 그건 문을 그렇게 단 쪽 잘못 아닙니까."
"제십사조. 건축물의 시공 상태는 손괴 책임을 감면하지 않습니다."
"제십사조에 단서가 있을 텐데요."
손이 종이를 한 장 뽑아 올렸다. 제십사조였다. 단서는 붙어 있지 않았다.
"단서는 제십사조에 없습니다. 제십오조에 있고, 지진과 홍수입니다."
"그럼 제십오조도 가져오시죠."
"부르지 않았습니다."
"부르면 가져옵니까."
"예."
"그럼 부르시죠."
"제가 왜요."
손 두 개가 가만히 있었다. 부른 것만 가져오는 손이었다.
"사람도 지진처럼 밀면요."
"규정에 사람은 없습니다."
니카가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꺼내 탁자에 굴렸다. 굴리고 나서 눈을 보지도 않았다.
"그럼 제가 이길 확률이 2할쯤 되겠네요."
"제 계산으로는 일흔 번에 한 번입니다."
"일흔 번에 한 번이면 2할이 아니라 거의 없는 건데요."
"예."
"그럼 일흔 번 하면 한 번은 이기는군요."
"이 건은 한 번뿐입니다."
니카가 주사위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중재인이 그 오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종이에 뭔가를 적었는데, 적은 것은 진술이 아니라 시각이었다.
바르트가 그 사이에 손을 들었다. 중재인이 또 고갯짓을 했다. 바르트가 일어서지 않고 앉은 채로 허리춤을 더듬더니 손바닥만 한 놋쇠 물건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접시가 둘 달린 작은 저울이었다.
중재인이 그것을 보았다.
"…그건 뭡니까."
"저울이오."
"여기서 뭘 재시려고."
"이거요."
바르트가 주머니에서 나무 조각을 하나 꺼냈다. 손바닥 절반쯤 되는 것이었고 한쪽 면이 매끈하고 반대쪽이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부서진 탁자 상판의 조각이었다. 사흘 전에 그 방을 나오면서 주워 온 것이었다.
오벨이 그 조각을 보았다. 그는 십오 년 동안 이 계단을 오르내렸고 증거물이 들어오는 것은 여러 번 봤다. 부서진 물건의 파편이 들어오는 것도 봤다. 저울이 같이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탁자 말인데."
"예."
"참나무 상판이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두께가 얼마요."
오벨이 서류를 넘겼다. 넘기다가 멈췄다.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쟀소."
바르트가 조각을 저울 한쪽 접시에 올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추를 몇 개 꺼내 반대쪽에 얹기 시작했다. 얹는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추가 세 개째에서 접시가 수평이 되었다.
"11 그램하고 조금. 이만한 부피에 이 무게면 참나무가 맞소. 다만 상판 두께가 손가락 두 마디 반이오. 쪼개진 면을 보면 알 수 있소. 참나무 두 마디 반이면 여덟 해 쓴 걸 감안해도 새로 짜는 데 일곱 냥이면 되오. 쇠 받침은 안 부서졌으니 그대로 쓰면 되고. 열두 냥은 쇠 받침까지 새로 짜는 값이오."
방이 조용해졌다. 중재인이 처음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나무는 무게로 값을 치오. 나는 무게 재는 사람이고."
오벨이 안경을 한 번 올려 썼다. 그러고는 서류 맨 뒤에서 한 장을 뽑아 앞으로 옮겼다. 그가 처음으로 말을 조금 느리게 했다.
"…확인하겠습니다. 다만 쇠 받침이 재사용 가능한지는 목수가 봐야 합니다."
"봐야지."
"그럼 그 항목은 보류하고 나머지를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모래가 절반쯤 내려간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둘째 항목에 있었다. 중재인이 두 번 시간을 확인했고 한 번은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니카가 확률을 말하면 오벨이 조항 번호로 받았고, 오벨이 조항을 읽으면 바르트가 무게와 값으로 받았다. 세 사람이 서로 다른 말로 싸우고 있었으므로 이야기는 좀처럼 한자리에 모이지 않았다. 중재인은 처음 얼마간 받아 적다가 나중에는 적기를 그만두었고, 그만둔 뒤로는 턱을 괴었다. 그가 이 방에서 십일 년을 일했는데 오늘 같은 건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한쪽이 화를 내고 한쪽이 우는데, 오늘은 아무도 화를 내지 않고 세 사람이 각자 자기 학문을 하고 있었다.
켈리는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슨 이야기인지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아들은 것은 이랬다. 자기가 부순 것들에 값이 붙었고, 그 값이 스물다섯 냥이고, 스물다섯 냥은 가진 것보다 훨씬 많다. 나머지는 전부 아는 단어로 되어 있는데 붙여 놓으면 뜻이 흩어졌다. 켈리는 알아듣기를 포기하고 모래시계를 보았다. 모래는 일정하게 떨어졌다. 켈리가 그것을 세어 보았는데 알갱이 단위로는 셀 수 없었고, 대신 잘록한 부분을 지나가는 줄기가 한 번도 끊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방에서 켈리가 그날 알아낸 것은 그것 하나였다.
그러다 오벨이 한 장을 더 넘기면서 말했다.
"참고로 상금 청구 건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참가 등록 시 규정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되며, 해당 규정에 따라 기물 파손 시 상금은 소멸합니다."
니카가 고개를 들었다.
"그 규정 읽어 준 적 없는데요."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어디에요."
"입구 벽입니다. 명부 탁자 옆."
"글자가 얼마나 작던가요."
"규정에 크기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켈리가 그때 입을 열었다.
"나 그거 못 읽었어."
모두가 켈리 쪽을 보았다. 켈리는 탁자를 보고 있었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입구에 있었어?"
"예. 있었습니다."
"나 거기 섰었는데."
"그러면 읽을 수 있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글자는 읽어."
켈리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근데 뜻을 몰라."
오벨이 종이를 넘기려던 손을 멈췄다. 그는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읽었다거나 못 읽었다거나 안 읽었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다. 읽었는데 뜻을 모른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그가 십오 년간 남의 말을 들어서 얻은 감각으로 바로 알아졌다.
"…어느 부분이 말씀입니까."
"전부."
"전부요."
"글자는 다 알아. 붙여 놓으면 모르겠어."
오벨이 잠깐 오벨답지 않게 가만히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규정문이 적힌 쪽을 켈리 쪽으로 돌려놓고,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어 읽어 주었다.
"이 줄입니다. 참가자는 등록으로써 본 규정에 동의한 것으로 본다."
"동의가 뭐야."
"좋다고 했다는 뜻입니다."
"난 안 했는데."
"등록하셨으니까요."
"이름 물어봐서 대답한 건데."
"그것이 등록입니다."
켈리가 그 줄을 오래 보았다. 오벨이 짚어 준 자리에는 글자가 열몇 개 있었고 켈리는 그것을 전부 읽을 수 있었다. 읽을 수 있는데 그 열몇 개가 자기를 여기 앉혀 놓았다.
"그럼 저 문 값은."
"열두 냥입니다. 아니, 문은 여덟이고 탁자가 열둘입니다."
"그거 누가 정했어."
"탁자는 목재 시세와 감가로 산정했습니다. 문은 시공비 견적서가 있습니다."
"그거 말고."
켈리가 서류 쪽을 가리켰다.
"저기 적은 사람. 그 사람이 정한 거야?"
"산정 기준에 따라 계산한 것입니다."
"기준은 누가 정해."
"평의회가 정합니다."
"평의회는 누가 정해."
"…상인들이 뽑습니다."
"그럼 상인이 정하네."
오벨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멈췄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틀린 말인데 어디가 틀렸는지 설명하려면 세 단계가 더 필요했고, 세 단계를 거쳐도 결국 비슷한 데로 돌아왔다.
켈리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제 값은 누가 정해요?"
방이 조용해졌다.
켈리는 자기가 방금 무엇을 물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질문은 앞의 질문과 같은 줄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문에 값이 있고 그 값을 누가 정했으면, 자기에게도 값이 있고 그것도 누가 정했을 것이다. 켈리는 자기에게 값이 붙어 있다는 것을 사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루 5돈이라는 값이었고 그것은 바르트가 노트에 적어 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값은 먹는 것에 붙은 값이었고, 켈리가 지금 물은 것은 그것과 조금 다른 것이었다. 무엇이 다른지는 켈리도 몰랐다.
오벨이 대답하지 않았다. 조항을 찾은 것도 아니고 서류를 넘긴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앉아 있었다. 그가 아는 규정집에는 그 질문에 해당하는 조항이 없었다. 사람에게 값을 매기는 조항은 있었다. 노동 계약이 그랬고 보상 산정이 그랬고 상해 배상표가 그랬다. 그러나 그 조항들은 전부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값을 매겼지 사람 자체에 매기지 않았다. 매기지 않는 이유는 매길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매기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고, 그러면 누가 언제 그렇게 정했느냐는 질문이 바로 뒤에 붙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지금 자기 값을 물었다. 물어도 되는 것인 줄 알고 물은 얼굴이었다.
중재인이 헛기침을 했다.
"질문의 취지가 본건과 관련이 없습니다."
"예."
오벨이 대답했다. 대답하고 나서 종이를 정리했다. 정리하면서 옆자리를 보았다.
"청구인 되시는…"
거기서 멈췄다.
멈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반 숨쯤이었다. 오벨이 서류 맨 위를 내려다보았고 거기 적힌 것을 읽었다.
"…하우케 씨. 나머지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그 집 주인이 오벨을 한 번 보았다. 따지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오벨이 가방을 열었고 손 두 개가 마지막 종이를 묶어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이 닫혔다.
켈리가 그것을 보았다. 아까보다 덜 놀랐다. 놀라는 데도 순서가 있어서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덜 놀라게 되어 있었다.
그날의 결론은 이렇게 났다. 탁자는 목수 확인 뒤에 다시 정하기로 하고 일단 여덟 냥으로 잡았다. 문과 벽은 여섯 냥으로 깎였다. 영업 손실은 반나절분인 두 냥으로 줄었다. 합해서 열여섯 냥이었다. 바르트가 가진 것은 여섯 냥이 조금 넘었으므로 다섯 냥을 먼저 내고 남은 열한 냥을 넉 달에 나누어 갚기로 했다.
분할 상환 각서에 세 사람의 이름이 들어갔다. 바르트가 적고 니카가 적었다. 켈리 차례가 되자 중재인이 도장을 내라고 했다. 도장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손가락을 쓰라고 했다. 먹그릇이 켈리 앞으로 밀려왔다.
켈리가 오른손 엄지에 먹을 묻혔다. 그리고 자기 이름 옆을 눌렀다.
종이가 찢어졌다.
"…어."
먹이 밀려 나와 이름 쪽까지 번졌고, 눌린 자리에 구멍이 났으며, 그 아래 탁자 상판에 엄지만 한 자국이 팼다. 중재인이 그 자국을 보았다. 그리고 켈리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벨이 가방에서 새 종이를 꺼냈다.
"…여분이 있습니다."
"규정에 있는 거요?"
"아니요. 제가 들고 다닙니다."
두 번째 장을 다시 쓰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다 쓰고 나서 중재인이 이번에는 먹그릇을 직접 잡고 있었다. 켈리가 엄지를 대고, 아까보다 약하게 눌렀다. 종이는 무사했다. 대신 자국이 검은 동그라미 하나로 뭉개져 있었다.
중재인이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결이 보여야 합니다."
"결이 뭐야."
"손가락 무늬요. 이러면 누가 눌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거 내 손가락인데."
"압니다. 그런데 종이는 모릅니다."
세 번째 장이 나왔다. 오벨의 여분은 두 장까지였다.
바르트가 저울을 도로 꺼냈다. 아까 넣었던 것을 다시 꺼내 탁자 가운데에 놓고, 한쪽 접시에 추를 하나 얹었다. 제일 작은 것이었다.
"손가락 대 보시오."
켈리가 반대쪽 접시에 엄지를 얹었다. 접시가 쑥 내려갔다.
"세."
"이게 세?"
"이건 세다 못해 산을 미는 거요. 접시가 안 내려갈 만큼."
켈리가 힘을 뺐다. 접시가 올라왔다.
"이제 모자라오."
"그럼 어떡해."
"사이."
켈리가 사이를 찾기 시작했다. 접시는 내려가거나 올라갔고 그 사이에서 멈추는 법이 좀처럼 없었다. 켈리는 열두 해 동안 아무것도 조절해 본 적이 없었다. 조절이란 말 자체를 그날 처음 들었다. 배급은 정해진 만큼 나왔고 마법은 나가거나 안 나갔고 명령은 따르거나 안 따르는 것이었다. 중간이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켈리는 그 놋쇠 접시 위에서 처음 배우고 있었다.
일곱 번째에 접시가 멈췄다.
"됐소. 그만큼."
켈리가 그 힘을 손끝에 남겨 둔 채로 먹을 묻히고 종이에 댔다. 그리고 뗐다.
자국이 남았다.
중재인이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도장을 찍었다. 니카가 뒤에서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세 번째 장이 나올 확률이 어떻다는 얘기였고 아무도 듣지 않았다.
켈리가 자기 이름 옆을 보았다.
작은 검은 자국이었다. 가까이 보면 선이 여러 겹 돌아가고 있었다. 가운데가 소용돌이처럼 감겼고 바깥으로 갈수록 선이 벌어졌다. 켈리는 자기 손가락에 그런 것이 있는 줄 몰랐다. 엄지를 들어 불빛 쪽으로 기울여 보니 거기에도 같은 무늬가 있었다. 늘 있었을 텐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번호는 받은 것이었다. 이름도 받은 것이었다. 로브도 받았고 지팡이도 받았고 빵도 받은 것이었으며, 받은 것에는 전부 값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이 무늬는 아무도 준 적이 없었다. 육성소에서도 주지 않았고 제4마도대에서도 주지 않았다. 켈리가 여섯 살에 줄을 서기 전부터 그 손가락에 있었다.
값이 얼마인지 켈리는 몰랐다. 물어볼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도 그날은 몰랐다.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해가 기울어 있었다. 셋이 부두 쪽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얼마 못 가서 뒤에서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오벨이 가방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장코트 자락이 뛰는 바람에 더 구겨져 있었다.
"잠깐만."
바르트가 멈췄다. 니카도 멈췄다. 켈리는 조금 늦게 멈췄다.
"뭐 빠뜨린 거 있소?"
"아니요."
오벨이 숨을 고르고 안경을 올려 썼다.
"아까 그 질문 말입니다."
"어느 거요."
"그럼 제 값은 누가 정하느냐는 것이요."
그가 켈리 쪽을 보았다. 켈리는 그를 보고 있었고 특별한 표정이 없었다.
"제가 답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요."
"조항으로 답이 안 나와서요."
바르트가 그를 한참 보았다.
"그래서 어쩌시려고."
"동행하겠습니다."
"우리 돈 없소."
"압니다. 제가 방금 그 액수를 산정했습니다."
"그럼 왜."
"답이 안 나와서요."
"그건 댁 사정이고."
"예. 제 사정입니다."
바르트가 배낭끈을 고쳐 멨다. 거절할 참이었고 거절하는 말은 짧을수록 좋았다.
"그럼 여기서 푸시오. 우리는 줄 게 없소. 방금 열여섯 냥 물기로 한 사람들이오."
"드리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같이 갈 이유가 없다는 거요."
"같이 안 가셔도 됩니다."
오벨이 말했다.
"제가 같은 길로 가는 겁니다."
바르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왕령 통행 조례 제칠조. 공로의 통행은 제한하지 아니한다. 서쪽 문에서 로엔 가도까지는 공로입니다."
"그러니까 따라오겠다는 거 아니오."
"아닙니다. 저는 로엔 쪽에 볼일이 있고 그쪽도 로엔 쪽으로 가십니다. 방향이 같을 뿐입니다."
"볼일이 뭔데."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니카가 그때 주머니에서 주사위를 꺼냈다. 굴리지는 않았다.
"안 떨어집니다, 저 사람."
"계산했나."
"아니요. 이건 계산 안 해도 압니다."
바르트가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는 무엇을 하든 기한을 먼저 정하는 사람이었다.
"언제까지 같은 방향이오."
"답이 나올 때까지입니다."
"안 나오면."
"안 나올 리가 없습니다."
오벨이 가방 끈을 고쳐 쥐었다.
"십오 년 동안 남이 묻는 걸 조항으로 답해 왔습니다. 조항이 없으면 비슷한 것을 찾았고 그것도 없으면 해석을 붙였습니다. 그 일을 오래 하면 알게 되는 게 하나 있는데, 답이 없는 질문은 대개 질문이 틀린 겁니다. 오늘 건 안 틀렸습니다."
"그거 하나 때문에."
"하나면 충분합니다."
"찾으면 어쩔 거요."
"돌아갑니다."
그 말에 켈리가 고개를 들었다. 여태 듣기만 하고 있었다.
"돌아가면 나는."
오벨이 켈리 쪽을 보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답 만들면 돌아간다며.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데."
오벨이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두 번째였다.
그는 방금 자기가 한 말을 속으로 다시 들어 보았다. 들어 보니 그 안에 이 아이가 들어 있지 않았다. 질문만 들어 있었다. 질문은 그가 가져갈 것이고 답도 그가 만들 것이며 그러고 나면 그는 타르실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 순서 어디에도 그 질문을 한 사람의 자리는 없었다. 십오 년 동안 그는 일을 그렇게 다뤄 왔다. 사람으로 보지 않고 건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었다.
"…그건 그때 가서 정하겠습니다."
"그것도 조항으로 정해?"
"아마도요."
바르트가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말할 근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근거를 못 찾은 것은 그날 세 번째였다.
넷이 서쪽 문으로 나갈 때 켈리가 오벨에게 물었다.
"아저씨 글씨 잘 써?"
"…예. 그럭저럭."
"나 못 써."
"읽으신다면서요."
"읽어. 쓰는 건 안 배웠어."
오벨이 걸음을 한 박자 늦췄다. 그는 그 말의 뜻을 아까보다 빨리 알아들었다. 읽기만 가르치고 쓰기를 안 가르치는 데가 어디인지, 그리고 왜 그렇게 하는지를 그는 알고 있었다. 벨류엔에서 태어났으므로 알았다.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얼마 줘야 돼."
오벨이 대답하려다 멈췄다. 방금 자기가 한 말에 걸렸기 때문이다. 값을 받지 않고 무언가를 주면 그것은 선의가 되고, 선의로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좀 전에 세 번 말했다.
"…열람료를 받겠습니다."
"그게 뭐야."
"제가 묻는 것에 대답해 주시는 겁니다. 한 번 가르칠 때 한 번씩이요."
"뭘 물어보는데."
"아직 모릅니다. 정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켈리가 그 조건을 따져 보았다. 대답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았다. 켈리가 가진 것 중에 값이 붙은 것은 하루 5돈짜리 먹는 양뿐이었고 그것과는 상관없는 조건이었다.
"어."
"그럼 정해진 겁니다."
오벨이 잠깐 뒤에 한마디를 덧붙였는데, 방금 없던 값을 하나 만들어 붙여 놓고 하는 말이었으므로 켈리에게 한 말이라기보다 자기에게 한 말에 가까웠다.
"값이 안 붙는 것도 있어야죠. 그게 없으면 다들 미칩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수첩을 꺼냈다. 걸으면서 두 줄을 적었다. 켈리. 성 없음. 읽을 줄 알되 쓰지 못함. 그 아래에 한 줄이 더 붙었다. 열람료 — 문답 일 회 대 일 회.
십오 년 동안 그렇게 해 왔다. 오늘 만난 사람을 적어 두지 않으면 어느 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기 때문이었고, 그것이 그가 지불해 온 값이었다. 값을 치르는 데 불만은 없었다. 다만 그 줄을 적는 손이 평소보다 한 박자 느렸는데, 이유는 방금 자기가 답하지 못한 질문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