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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h를 주로 사용하는데 sh로 초기 shell이 적용되어 color가 맞지 않는다거나 하는 경우


# echo $SHELL

output : 

/bin/sh


chsh -s {shell-name} {user-name}

#sudo chsh -s /bin/bash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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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

焚書坑儒 ,焚书坑儒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26XXXXX00599



서적을 불사르고 유생을 구덩이에 묻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발본색원을 하거나 폭정을 저지르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출전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천하를 통일한 뒤 자손만대에 물려줄 수 있는 강력한 대제국을 만들기 위하여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했다. 군현제란 전국을 군과 현으로 나누고 관리를 파견하여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중앙집권 방식이다. 그런데 군현제에 반대 의견을 표하고, 봉건제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박사 순우월(淳于越)이었다. 순우월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진시황이 문무백관을 한자리에 불러 함양궁(咸陽宮)에서 잔치를 베푸는데 순우월이 황제 앞에 나와 말했다. “은나라와 주나라가 과거 천 년이나 왕위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공신이나 친인척을 제후로 봉하여 이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왕실을 보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왕께서는 지역을 분할해서 군현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설혹 왕족이라고 해도 일개 백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만약 황실을 둘러엎으려는 불충한 자가 나올 경우 황실을 지켜 주는 세력이 없다면 어떻게 황실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지나간 역사를 거울삼지 않고 장구한 안전을 얻었던 예는 없었습니다.”」


시황 34년(BC213) 이사(李斯)가 상서를 올렸다.


「예전에는 제후가 다투어 유세하는 학자를 후하게 초대하였으나, 이제 천하가 이미 평정되어 법령이 한곳에서 나오니 백성은 집에서 농업과 공업에 힘쓰며, 선비는 법령을 배워 익혀야 하거늘, 지금 여러 유생들은 지금을 스승 삼지 아니하고 옛것을 배워 현재를 비방하여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서로 더불어 법이 아닌 것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법령을 들으면 각자 자기의 학문으로 그것을 따지며, 조정에 들어가서는 마음속으로 비난하고, 밖으로 나와서는 논쟁하며, 왕에게 자만한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고, 뜻을 달리하는 것을 높다고 여겨 아랫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비방하니, 이 같은 것을 금하지 아니하면 왕의 권세는 위에서 내려가고 당파는 아래에서 이루어지게 되므로 이를 금해야 합니다. 사관은 진나라의 기록이 아니면 모두 불사르고, 박사관의 직책이 아니면 천하에 시서(詩書)와 백가(百家)의 서적을 소장한 자는 관리에 넘겨 모두 태우게 하고, 짝을 지어 시서를 논하는 자가 있으면 기시(棄市)하고, 옛것을 가지고 지금을 비방하는 자는 멸족하십시오. 의약, 복서(卜筮), 종수(種樹)의 책은 남겨두되,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면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십시오.(臣請史官, 非秦記皆燒之. 非博士官所職, 天下有藏詩書百家語者, 皆詣守尉, 雜燒之. 有偶語詩書者棄市, 以古非今者族. 所不去者, 醫藥卜筮種樹之書. 若欲有學法令, 以吏爲師.)」


춘추전국시대에 전국이 전화에 휩싸인 근본적인 이유가 봉건제였으며, 전쟁을 부추긴 사람들이 바로 자신의 입신을 위해 각국의 왕들에게 유세를 하고 다녔던 학자였다고 분석했던 진시황은 군현제의 입안자이자 개혁론자인 재상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여 군현제 실시에 장애물이 되는 것을 제거하는 조치를 내린다. 바로 의약과 복술, 농경에 관한 책과 진나라의 기록을 제외한, 민간에 퍼져 있던 시서(《시경》과 《서경》)와 제자백가의 책을 수거하여 태우고, 이를 위반하는 사람들이나 시서를 논하는 사람들과, 옛날과 비교하면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진시황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모두 처형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분서 사건이다. 그러나 이때 모든 기록을 다 불태운 것은 아니고, 박사관이 소장하고 있던 것은 그대로 보존되었다. 박사관이 소장하고 있던 나머지 기록마저도 다 불에 타 없어지고 만 것은 후에 항우(項羽)가 함양에 입성하여 진나라의 궁실을 불지른 때였다.(당시의 책은 모두 대나무 조각을 엮어서 만든 죽간(竹簡)이거나 비단 두루마리인 백서(帛書)였으므로 대부분 한번 잃으면 복원하기가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분서갱유’라고 하며 분서와 갱유를 병칭하고 있지만, 사실은 갱유는 분서와는 별개의 사건으로, 도가의 방사들이 일으킨 화로 인해 그 불똥이 유생들에게 튄 사건이었다. 진시황은 말년에 미신에 빠져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해 주겠다는 도가의 방사들에게 사기를 많이 당했다. 한중(韓衆)이나 서복(徐福)과 같은 방사들은 진시황의 돈만 사취하고 도망을 했고, 노생(盧生)과 후생(侯生)과 같은 방사들은 돈을 사취한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진시황의 부덕함을 비난하고 도망해 버렸다. 이에 화가 난 진시황은 분서 다음 해인 BC212년, 자신의 실정을 비난하고 다니던 함양(咸陽)의 서생 460여 명을 체포하여 산 채로 구덩이에 매장해 버렸는데, 이것을 일러 갱유라고 한다.


「이에 어사를 시켜 서생들을 심문하게 하자 서생들이 서로 고발하였다. 진시황은 손수 금기를 범한 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지워 가며 460여 명을 모두 함양에서 산 채로 땅에 묻어 버려 천하가 알게 함으로써 후세에 경계를 삼도록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적발하여 유배 보내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자 큰아들 부소가 간했다. “천하가 막 평정되어 멀리 있는 백성들이 아직 돌아오지 못했고, 서생들은 시서를 외우며 공자를 배우고 있는데, 지금 폐하께서 무거운 법으로 다스리면 천하가 불안해할까 두렵습니다. 폐하께서 살피시기 바랍니다.” 진시황은 대로하여 부소를 북방의 상군으로 보내 몽염 장군을 감독하도록 했다.(於是使御史悉案問諸生, 諸生傳相告引, 乃自除犯禁者四百六十餘人, 皆阬之咸陽, 使天下知之, 以懲後. 益發謫徙邊. 始皇長子扶蘇諫曰, 天下初定, 遠方黔首未集, 諸生皆誦法孔子, 今上皆重法繩之, 臣恐天下不安. 唯上察之. 始皇怒, 使扶蘇北監蒙恬於上郡.)」


분서와 갱유에 관한 이야기들은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나오는데, 여기에는 진시황이 갱살한 것이 학자들인지, 아니면 방사들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사마천은 다음에서 당시 진시황이 갱살한 것이 술사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나라 말년에 시서를 불태우고 술사들을 산 채로 묻어 죽였다.(及至秦之季世, 焚詩書, 坑術士.)」(《사기(史記) 〈유림열전(儒林列傳)〉》)


그런데 후세의 사람들이 진시황이 시서를 불태우고 서생들을 갱살한 사건을 ‘분서갱유’라고 칭하며 당시에 진시황이 유학자들을 묻어 죽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분서갱유’란 말이 처음으로 쓰인 공안국(孔安國)의 《상서(尙書) 〈서(序)〉》에 기인한다.


「진시황이 선대의 전적을 없애고, 서적을 불사르고 유학자들을 산 채로 묻어 버리자 천하의 학사들이 모두 난을 피해 흩어져 버렸다.(及秦始皇滅先代典籍, 焚書坑儒, 天下學士逃難解散.)」



용례


과거 대부분의 독재 정권들은 언론을 장악하고 언론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보도 지침을 만들어 현대판 ‘분서갱유’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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