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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두리번거린다. 아주 낯선 곳에 떨어진 어린 아이처럼 빛의 조각이라도 잡으려는 듯 눈동자가 부드럽게 커진다. 빼곡한 자취 촌을 지나 캠퍼스가 다가오면 이제 조금씩 푸름에 지쳐가는 잔디며 나무들이 보인다. 먼지가 파삭거리며 일어나는 블록 길을 성큼성큼 걸으면서도 나에겐 방향이 없다. 풍경은 충분히 눈에 익은데 이곳은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그때 걸려온 전화는 확실히 혜원의 것이었다.

라고 믿는다. 일주일 전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었다. 새벽 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고 발신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은 숫자였다. 그럼에도 지극히 평범하고 무미건조한 동작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상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너무 익숙한 침묵이 흘렀다. 전화상의 침묵이, 만들어내는 사람마다 다를 리 없지만 그 때의 침묵은 너무도 익숙하게 받아들여졌다. 마치 오리가 오리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내 입에서 짧고 깊은 한숨소리가 새어나왔고 전화는 끊어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공간을 넘어(어쩌면 시간마저 넘어) 간신히 연결되어 있던 선은 예리한 가위에 잘려나간 듯 여운마저 없이 끊어졌다. 근거는 전혀 없었지만 혜원이란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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