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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우연하게도 연하디 연한 숨결
달근하면서 알싸한 감색이 입에 스미고
바짝 마른 공기가 혈관을 타고 흐른 뒤
혀끝에서부터 퍼지는 차가운 침묵의 확산

그녀도 나를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밤늦은 시간에 나를 불러낸 적이 있었다. 시원하고 건조한 밤이었다. 어두워지니 물소리며 풀벌레소리가 커졌다. 가로등이 빛 조각을 깨뜨리자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깊게 울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나의 조용한 당황이 한동안 침묵을 만들어냈다. 무슨 말을,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히 그녀와 나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는데, 아니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데 명랑하지 않은 표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토해낸 후엔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것일까. 순간, 그녀가 가볍게 키스를 했다. 다음순간, 내가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의 가벼운 입맞춤을 끝으로 서로 연락이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침착해졌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에든 진심으로 화를 내거나 웃는 일이 귀찮아졌다.
그때부터였다. 그때부터 또 하나의 강진우가 만들어져 모든 감각과 감정을 받아들이고 있다. 진짜는 허상이 받아들이는 것들을 공유하고 분석하여 적당한 반응을 만들어낸다. 처음엔 견디기 힘겨울 만큼 어색했지만 불과 일 년 만에 평생을 그랬던 것처럼 너무나 익숙한 습관으로 나의 모든 곳에 스며들었다. 이제는 나의 마음 전체로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는 것들이 귀찮아졌다. 어쩌면 무엇인가에 빠져드는 것이 두려워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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